루이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산대 안쪽의 종이봉투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방학의 대학 서점은 한가하기 그지없었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저를 찾아올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정말 이럴 거냐?”
“그 말 그대로 돌려주면 되겠어?”
“프로즌.”
“시간 없다니까.”
질리지도 않는지 벌써 일주일째 출석 도장을 찍고 있는 쉬레에게 루이스는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명백한 거절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게임할 시간이 없는 것 뿐이다. 어김없이 당장 화보를 찍으러 가도 될 것 같은 차림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선글라스는 대체 몇 개나 있는지, 오늘은 짙은 갈색의 선글라스였다.
“고작 30분 내주는 게 그렇게 힘든가?”
“하아. 힘드니까 이러고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먼저 반말을 찍찍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말을 낮춘 게 엊그제였다. 쉬레는 호칭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저만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거기다 자꾸 보다보면 정이라도 들 거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미운 정을 붙이려는 건지 어느 쪽인지 몰라도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밥이라도 사겠다고,”
“체할 거 뻔한 상대랑 밥 먹는 취미는 없어서.”
“너,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쯤 했으면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일주일째 반복된 논리에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바 아니고, 그쪽이 굽히고 들어오는 거에 황송해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루이스는 그의 팬이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애초에 와서 꼬셔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저 쉬레의 일방적인 요구일 뿐이었다.
“어제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왜 그쪽 사정에 맞춰줘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돈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주지.”
“부탁하는 태도도 글러먹었고.”
쉬레는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있었다. 너무 뻔뻔하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굴어서 넘어갈 뻔도 했지만, 어쨌거나 루이스는 그의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만 생각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쉬레가 괘씸해하거나 말거나 제가 알 바 아니었다.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데.”
“적어도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진 않았으면 좋겠어.”
“흐응. 난 어디까지나 책을 사러 온 거니 그건 됐고.”
루이스는 영혼 없이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대충 아무거나 추천해보래서 법학과 전공 서적을 넘겨주면 거들떠도 안 보고 카드부터 내미는 놈이 책을 사러 오긴 무슨.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루이스는 이글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쉬레가 혼자서 찾아왔을 리도 없으니 백퍼센트 그녀석 짓이었다. 생각해보면 거기 간 것도 이글 때문인데, 거기에 신상까지 털어줬으니 만악의 근원인 셈이었다.
“그래도 쉬는 날은 있을 거 아니야. 그때도 그렇고.”
“아쉽게도, 내 쉬는 날은 어제였는데. 앞으로 이주간 없을 예정이고.”
“뭐?”
능글맞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쉬레가 짜증을 내다 혀를 차며 돌아섰다. 이 정도면 적당히 엿을 먹여준 기분이라 좀 후련하긴 했지만, 쉬레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루이스를 마주했다.
“…낮이 안 되면 밤도 괜찮다.”
“난 잠도 자지 말라고?”
“네 녀석 때문에 나는…!”
쉬레는 뭔가를 말하려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랫입술을 물며 입가를 엄지로 매만지는 게 꽤 선정적이었지만 그도 자신로 남자였다. 차라리 작업을 걸었으면 걸었지, 이건 뭐 어린애가 놀아달라 떼 쓰는 것도 아니고.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쪽이 내 사정 생각을 안 해주는데 내가 그쪽 사정 생각해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
“난 그쪽 팬도 아니고 아쉬울 것도 없어. 지금 자기가 일주일째 억지만 쓰고 있다는 걸 좀 알 때도 되지 않아?”
쉬레가 무섭도록 시린 눈으로 루이스를 응시했다. 그렇게 본다고 겁을 먹는 것도 아니건만. 루이스는 계산대를 톡톡 두드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이글보다 더 다루기 힘든 것 같았다.
“저기, 쉬레.”
쉬레는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도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깔보이는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루이스는 잠시 그를 마주보다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시간 나면 연락할 테니까 그만 와.”
이게 루이스가 할 수 있는 타협의 끝이었다. 사실 이글이 알려준 거면 이미 다 털렸겠지만, 그래도 그와 제가 직접 번호를 주고받는 건 의미가 달랐다. 어쨌거나 쉬레는 지금까지 제게 연락을 한 적이 없었고, 루이스가 아는 거라곤 쉬레가 이글의 형이라는 것 뿐이었다. 쉬레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찍었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루이스가 연락처를 저장하려는데 쉬레가 이름 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벨져. 벨져 홀든이다.”
“…루이스.”
그가 불쑥 나타난지 일주일만에 하는 통성명이었다. 루이스는 번호를 저장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쉬레가 핸드폰을 꺼내는 걸 보고 끊자 쉬레는 화면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화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저장을 안 하는 걸 봐선 이미 알고 저장해둔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글 홀든. 루이스는 그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고는 눈앞의 상대를 마주했다.
“이제 됐지?”
“일주일, 딱 일주일 기다려주도록 하지.”
“그거 참 무서운걸.”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이러다 집까지 찾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어째 좀 불안했지만 쉬레는 오늘의 수확에 만족했는지 쿨하게 등을 돌려 나갔다. 루이스는 계산대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괘고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쉬레는 루이스를 한 번 돌아보고, 녹음이 우거진 교정을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등이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했다.
벌써 미운정이라도 들었나. 루이스는 벨져가 올 때 켰던 에어컨을 끄고 가디건을 집어들었다. 밖에 있다 온 사람에겐 시원할지 몰라도, 하루 종일 있는 사람한테는 제법 쌀쌀한 온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