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본편의 3년 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0.
날은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었고, 종강을 만끽하며 늘어지게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졸업까지 앞으로 반 년. 취직 걱정이 앞섰지만 당장 사는 게 바빠 남들 다 따는 자격증이나 뭐니 하는 것들은 거들떠볼 수도 없었다. 그런 걱정을 하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가끔 동기나 후배들이랑 한 판씩 하던 게임에서 어떻게 연이 닿아 소위 꿀알바라고 하는 자리를 얻고, 창고로 쓰던 쪽방이라도 괜찮으면 옮겨와 살라는 사장님의 배려에 지갑에 여유가 생긴 덕이었다. 방 하나짜리 고시원보다 넓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편했다.
루이스는 터덜터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설핏 깬 잠을 다시 자기 위해 차가운 장판 쪽으로 돌아누웠다.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잠들어 휴일을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화는 한 번 끊겼다가 다시 걸려왔다. 스팸 전화는 아니라는 소리다. 두 번이나 걸 정도면 학교의 급한 일, 아니면 알바 대타일 가능성이 컸다. 루이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으려 장판을 더듬거렸다. 손끝에 닿은 핸드폰을 끌어당겨 전화를 연결해 귀에 갖다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나! 뭐해?”
“……. 이글…. 나 오늘 이 주 만에 쉬는 날이거든…?”
“하하! 그거 잘 됐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물이라도 한 잔 해야 할까. 루이스는 핸드폰 액정에 뜨는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받아버린 것을 후회하며 빈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단잠을 자던 차에 하필이면 이글 홀든의 전화라니. 지금이라도 그냥 끊어버릴까. 그럼 당장은 편하겠지만, 그랬다간 또 한동안 이글이 이걸 가지고 야박하네 어쩌네 하며 징징댈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 조금 시달리고 마는 게 낫지. 루이스는 애써 긍정했다. 자다 일어난 참이라 그걸 확인할 정신이 없기도 했다.
“어어, 끊지 마! 놀자는 거 아냐!”
경쾌한 이글의 목소리에 짜증이 앞섰다. 습하고 더운 여름의 날씨는 사람의 짜증 지수를 쉽게 올린다. 휴일에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있다면 나오라는 이글 홀든의 전화가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비단 쉬는 날이 아니라도 시도 때도 없이 놀자는 녀석이지만, 사람에겐 모름지기 쉴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었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럼 뭔데. 거짓말할 생각, 큼. 흠. 하지 말고.”
아무래도 물을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목을 가다듬자 이글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글의 주변이 꽤 소란스러웠다.
“어, 오늘 지스타 있는데 백 명 한정으로 쿠폰 뿌린대. 근데 1인 1매로 준다는 거야. 아 존나 빡빡하지 않냐? 사람도 존나 많.”
“용건만.”
“야박하긴, 와서 나 대신 좀 받아줘. 갑자기 아부지 호출이 와서 가야될 것 같은데 나 지금 서른 번째로 서있단 말이야. 기다린 거 아깝다구. 대신 수고비는 제대로 줄 테니까! 응? 다 전화 안 받는다구~.”
안 받을 만도 하다. 누가 이런 날 뙤약볕에서 몇 시간씩 대신 기다려주겠는가. 루이스는 고민했다. 수고비가 얼마인가에 따라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데.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루이스는 이글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갑자기 생겨버린 일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글 대신 쿠폰을 받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루이스는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콜라 한 캔을 까 들이켰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청량감에 숨통이 좀 트였다. 부스에서 쿠폰을 챙기고 추첨권을 넣었는데, 그것도 챙겨가야 할까. 루이스는 고민하며 한 모금 콜라를 마시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콜록였다. 따끔따끔 거리는 게 거식해 목을 만지고 있으니 위에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다.
사이퍼즈 부스는 여전히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반 관람객에게도 쿠폰을 준다는 것 같은데 고작 그것 때문에 저 안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캐릭터 체험도 어차피 기다리면 풀릴 터였다.
루이스는 카탈로그를 펼쳐보다 함성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프로게이머를 이겨라! 라는 프로그램에 상품은 50만 테라. 토너먼트식도 아니고 단판으로 신행되는 소위 퍼주기 행사였다. 오늘의 초청 선수는 ‘쉬레’. 최근 가장 핫한 선수였다. 팬도 많은 만큼 안티도 많은 모양이지만, 그의 플레이를 동경하며 따라하는 사람들 때문에 프로게이머니 대회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도 알고 있는 선수였다.
그러고 보면 한 번도 그의 플레이를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추첨발표까진 시간이 남아있었고, 근처 카페엔 이미 사람들이 즐비했다. 루이스는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는 걸 보며 잠시 망설이다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캐스터 대신 BJ를 하는 유저가 옵저버를 하며 중계를 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스크린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쉬레의 기습에 셋이 ‘블레이드’의 궁극기에 끊기고, 바로 추격을 이어 쿼드라가 터졌다. 쿼드라가 제노사이드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루이스는 제가 방금 무엇을 본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관중은 같이 흥분해 쉬레를 연호했고, BJ도 그의 플레이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작한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전방 타워가 모조리 털렸다.
“나라면 쉬레한테 안 덤빌 것 같애…….”
옆에 서있던 여고생이 중얼거렸다. 그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팀이 불쌍하다고 소곤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쉬레는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수준에 맞춰주겠다는 듯이, 코인을 잔뜩 들고도 레벨도 올리지 않고 있었다. 블레이드의 필수품이라 여겨지는 하드스킨도 없거니와, 아이템 역시 온통 흰색 일색이었다. 명백하게, 가지고 놀고 있다. 개중에 용기를 낸 탱커 하나가 쉬레를 물었다. 하지만 쉬레는 팀원들의 백업이 오기도 전에 탱커를 녹이고, 그를 따라온 서포터까지 끊어냈다. 2장 1모 1신에 스킬링. 쉬레는 노셔츠로 상대팀을 농락하고 있었다. 역량 차이가 확연했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본 루이스는, ‘쉬레’가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상했다.
게임은 그대로 터져서 십 분을 조금 넘겨 끝나고 말았다. 쉬레와 함께한 유저 넷도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쉬레는 무표정으로 그들이 건네는 인사에 눈길만 잠시 주었을 뿐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최강의 근딜이라는 수식에 보탬이라곤 없었다.
BJ가 쉬레와 함께한 네 명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진 팀에겐 위로의 말과 함께 부스를 나온 그들을 도닥이고 쿠폰을 건넸다. 다음 경기의 참가 희망자를 묻는데, 쉬레 팀은 지원자가 넘치는 반면 도전자 팀은 지원하겠다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황한 BJ가 손에 든 쿠폰을 흔들어보였으나 관중은 웅성웅성할 뿐이었다. 이미 패배가 예정된 데다, 그 꼴을 보고도 무력한 패배라는 굴욕을 당하고 싶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여성 유저가 손을 들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가는 사이 루이스도 손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온 거지, 그런 압살을 당하고 목격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다.
그래, 루이스는 흔히들 말하는 ‘쉬레 플레이’가 싫었다. 루이스가 나오자 시간이라도 끌려는 건지 BJ가 처음 손을 든 여성유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여차저차 도전자 팀에도 다섯 명이 모이고, 루이스는 생전 처음 본 사람들과 방음 부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어색하고 경직된 공기 속,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클라이언트를 켜니 클랜 알림 창에 절친한 원딜러의 접속 알림이 떴다.
헤드폰을 끼기 전, 처음으로 나섰던 여성 유저가 말을 걸었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친숙했다.
“저기,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아, 프로즌입니다. 초대해주세요.”
“어? 정말요?”
“네. 다 대문자로.”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빙그레 웃으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날 아나? 공성에서 마주친 사람인지도 몰랐다. 타앙, 파티 초대의 둔중한 UI사운드에 화면을 보니 방금 접속한 원딜에게 초대가 와있어 루이스는 거절을 눌렀다.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팅창을 열려 엔터를 치는데 다시 한 번 초대가 왔다. 키보드에 양손을 올리고 있던 루이스가 다시 거절을 누르기 위해 마우스를 잡으려는데, 옆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받아요. 다 기다리고 있는데?”
“네?”
루이스가 말뜻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자 루이스 대신 마우스를 움직여 파티 초대 수락을 눌렀다. 다섯 명. 방금 그녀에게 초대를 위해 닉네임을 말했던 사람들로 채워진 파티에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설마.
“퀸?”
“안녕, 프로즌. 이런 우연이라니, 예감이 좋지 않아?”
루이스는 그제야 그녀가 제가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슬쩍 웃었다. 그녀의 말 그대로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저와 상성도 호흡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루이스는 다른 세 사람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스노우퀸, 앤지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그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앤지는 루이스에게 찡긋 윙크했다.
안내에 따라 친선전에 입장한 루이스는 조합을 맞출 것이냐 물었다. 앤지의 옆에 앉은 남자가 어차피 쉬레한테는 소용없을 거라며 잘하는 거 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으로는 이길 수 없다. 맞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고민하다 ‘아이스'를 골랐다. 팀원 하나가 벌써부터 게임을 놓는 거냐며 허탈하게 웃었지만 루이스는 게임을 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셀렉과 대기가 끝나고, 배경음악이 깔리며 화면이 전환됐다. 쉬레는 그의 주캐인 ‘시니컬’이었다. 부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