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고 할 거 없이 벚꽃이 만개한 봄, 잠깐 나갔다 오자는 벨져의 막무가내에 끌려 점심을 먹고 호숫가까지 드라이브를 하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에 커피 한 잔 하고 나니 오후가 훌쩍 지나고 말았다. 가끔은 느긋하게 늦잠도 자고 숙소에서 좀 뒹굴어도 좋을 텐데. 루이스는 익숙하게 액셀을 밟으며 흘긋 조수석에 팔짱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벨져를 바라봤다.
기껏 비싼 차를 사놓고 자기가 모는 건 취한 자신을 데리러 올 때 뿐이다. 덕분에 루이스는 남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고급세단을 자기 차처럼 몰았다. 처음 벨져가 차 키를 던져줬을 땐 혹시라도 기스라도 날까 조심조심했지만 어차피 벨져는 홀든이었다.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의 가격은 0이 두 개는 더 붙고, 굳이 게이머 생활을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데다 은퇴하더라도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말 그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홀든.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나 데리고 살라고 하는 것도 벨져에겐 쉬운 일이었다.
자신이 '프로즌'이 아니었을 때도 벨져는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알바하는 식당, 서점, 술집 그것도 모자라 반지하 자취방까지 찾아와 귀찮게 굴던 게 벌써 몇 년 전인지. 루이스는 신호등이 초록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는 걸 보고 천천히 액셀에서 발을 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매끄럽게 멈춰선 차 안에서 루이스는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 고개를 돌렸다. 밖을 보고 있던 벨져가 그 시선에 루이스를 마주봤지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벨져가 대번에 눈썹에 힘을 줬지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루이스는 그래도 벨져가 다시 채널을 돌리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벨져는 칫, 하고 작게 혀를 차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때마침 봄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파란불이 켜졌다. 루이스는 액셀을 밟으며 경쾌한 하모니카의 멜로디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렸다. 벚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도로의 풍경이 예뻐서 절로 노래가 나왔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차를 몰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루이스는 창문을 조금 열고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나쁘지 않은 선곡이라 그런지 별 말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빠는 벨져를 옆에 두고 루이스는 정면을 보며 물었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벨져의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벨져.”
“왜.”
“오늘 며칠이지?”
“4월 4일 토요일. 그건 왜, 아.... 오늘이었나.”
벨져가 컵을 내려놓고 입가를 매만졌다. 별로 큰일은 아니지만 워낙 까탈스러운 성미라 루이스는 걱정이 됐다. 안 그래도 자기 공간을 침해받는 걸 질색하는데 과연 괜찮을런지. 루이스는 이제 겨우 열일곱인 그랑플람의 원딜러를 떠올렸다.
피지컬도 좋고 센스도 있고 대담하기도 한 원딜러 하랑은 그의 닉네임보다 미친 고딩이라는 수식어를 더 자주 달고 다니는 선수였다. 나이차가 꽤 나긴 하지만 하랑은 이글과 죽이 잘 맞는 아이였다. 쾌활하고 명랑한 딱 그 나이 남자애. 벨져의 말을 빌리자면 ‘시끄럽고 산만하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물론 같은 팀의 티엔이 잘 잡아주긴 하지만 그래도 넘치는 혈기는 주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루이스는 오늘 홀든A 숙소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 티엔이 브루스 감독과 함께 중국에 출장간 사이 일박이일로 묵어가는 것 뿐이지만 하랑이 오는 시점에서 평화로운 휴식은 물 건너가는 셈이었다.
루이스는 고가도로에서 커브를 돌며 오늘 일찍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아예 자고 들어가는 게 아니면 전쟁통처럼 시끄러운 숙소에서 자야하는데 문 하나로 그 목소리를 다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보나마나 이글이 술도 먹일 텐데, 고등학생인 하랑이 술을 마시는 건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숙면과 숙소의 평화, 아이작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브루스나 티엔에게 연락을 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가 하루 놀겠다는 걸 훼방 놓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벨져.”
“왜, 또.”
“우리 외박할까?”
그 말에 벨져가 눈을 크게 떴다.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에도 루이스는 능숙하게 운전을 계속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네 수행비서나 할까봐 하고 농담하긴 했지만 이정도면 정말 벨져 홀든의 비서나 운전수로 취직해도 좋을 갓 같았다. 아무렴 벨져가 대리를 부를 리 없으니 꽤 괜찮은 것 같은데. 딱히 미래에 뭘 해야겠다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루이스였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추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싫음 말고.”
“아, 아니. 싫다고 한 적 없다!”
“됐어, 끝났어. 잠이나 자두던가.”
“차 돌려.”
루이스는 들은 체도 않고 액셀을 밟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제가 못 잔 것도 벨져 때문이니 그라고 잠 좀 못 자면 어떻단 말인가. 루이스는 시내로 들어서며 창문을 올렸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벨져가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고 운전에 집중했다.
“…칠성급 호텔.”
“됐어. 하랑이 볼래. 아무리 그래도 집이 최고지.”
“그럼 내 집으로 가던가.”
“내가 너네 집을 왜 가.”
“외박하자며!”
벨져는 자꾸 말을 돌리고 간만 보다 빠지길 반복하니 짜증을 냈다. 이렇게 좀 삐지게 뒀다가 손을 내밀었을 때 만족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짓궂게 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스는 벨져가 퍽 귀엽다 생각하며 숙소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이 가까워질수록 벨져의 표정은 뚱하게 굳어졌지만 루이스는 벨져 홀든을 엿 먹이는 게 아주 즐거웠으므로 계속 이어지는 무언의 시위에도 차를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