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하고 현관문의 벨이 울리는 소리에 방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토마스가 냉큼 일어났다. 인터폰에 보이는 익숙한 택배 아저씨의 모습에 토마스는 바로 현관을 향했다. 어제 시킨 신발이 온 걸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노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갈색 골판지 상자를 건넸다. 신발이라기엔 부피가 작아 토마스가 어리둥절한 사이 아저씨가 PDF를 꺼내 펜을 내밀었다.
"루이스 홀든씨 본인이신가요?"
"아, 아뇨."
"그럼 동료에 체크하고 서명해주세요."
토마스는 이름을 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루이스 홀든이라니. 루이스 홀든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홀든'이라니!!! 토마스는 황망히 닫히는 철문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박스에 붙은 택배 용지를 살폈으나 프린트 된 글자는 누가 봐도 Louis Holden님 이었다. 애써 부정을 해보려던 토마스의 여린 마음은 그렇게 알파벳 여섯 글자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토마스는 테이블 앞에 앉아 두 손깍지를 끼고 아치를 만들어 얼굴 앞에 두고 외출한 형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껏 진지한 얼굴에 평소엔 웃느라 눈에 띠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가 더해진 것도 모자라 뒤에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모 만화의 사령관 같았다. 그 모습에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두 홀든과 루이스는 현관에서 멈칫 발을 멈췄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심각한 걸까. 순간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지나갔다. 은퇴하나? 다른 팀으로 이적? 그것도 아니면 캐나다의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대체 뭐지? 그 정도로 토마스의 얼굴이 심각했기에 좀처럼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벨져마저 슬쩍 눈치를 보고 루이스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나마 우리 중 제일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건 너니까 빨리 가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 라는 눈빛에 루이스는 난처해하면서도 토마스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저어, 토마스. 무슨 일 있어?"
"선배."
"으, 응."
"말해봐요. 언제부터예요?"
"뭐가?"
루이스는 제게 따지듯 묻는 토마스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부터냐니. 루이스는 토마스가 흥분한 나머지 말을 다 생략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바람에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이글과 벨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토마스가 루이스의 어깨를 턱 잡았다.
"선배!"
"아,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형은 닥치고 있어요!"
늘 웃고 네네 응석을 받아주던 애가 화를 내니 무섭다. 이글은 저를 쏘아보며 소리치는 토마스를 향해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란 말인가. 이글은 흘긋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 골판지 상자를 보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 성인용품이라도 샀나? 그러지 않고서야 토마스가 아무리 루이스 일에 민감하다지만 이럴 리가 없었다. 아니지, 그랬다면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거나 부끄러워하고 있을테니 그것도 아니다. 이글은 토마스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가만히 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 문제의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선배! 설명해주세요!"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루이스는 잠시 상자를 보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토마스를 보곤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걸로 이런 헤프닝이 일어나다니. 하여간 어린 후배가 귀여워 살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웃으며 토마스가 한껏 멋내 세운 머리카락을 흐트리며 쓰다 듬었다. 토마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루이스의 손을 피하지 않아 금방 머리가 엉망이 됐다. 하지만 지금 토마스에겐 머리보다 루이스의 이 여유로운 태도가 더 신경쓰였다.
"악, 선배! 왜 그러는데요!"
"우리 토미가 귀여 워서 그러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야?"
"겨, 겨우라뇨!"
벨져는 영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사이좋은 토마스와 루이스를 지켜봤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언뜻 보니 이 상황을 이해한 건 루이스뿐이라 벨져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박스를 들었다. 내내 궁금해하던 이글도 벨져의 옆으로 와 상자에 붙어있는 배송 정보를 읽었다.
"루이스 홀든 님."
"흐응."
"푸하하하하하핫!"
이글은 소리내어 읽고는 바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콧소리를 길게 내며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 게 꽤 흡족해보였다. 벨져의 그 반응이 토마스가 내내 하던 고민에 설득력을 더했다. 셋 중에 누구인가 했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단 말인가. 토마스는 벨져의 그 여유작작한 태도에 발끈해 루이스를 향해 물었다.
"선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설마 진짜로...!"
"아니. 토마스, 그거 아냐."
루이스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순간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루이스는 신경도 안 쓰고 토마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마우스 새로 사는데 배송 정보에 성은 필수입력이더라고. 그래서 생각나는 거 중에 제일 짧은 걸로."
난리를 친 게 부끄러워질 정도의 사소한 이유에 토마스는 뭐라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이글은 아직도 숨이 넘어가라 웃다 못해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며 흐느끼는 중이었다.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흑역사 적립이다. 이글은 분명 앞으로 쿨타임이 될 때마다 이걸로 놀릴 것 이고, 인터뷰에서 말해버리거나 방송 중에 말할 지도 몰랐다. 그걸 깨닫자 마자 뺨에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토마스는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아났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달아나는 걸 지켜보다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웃느라 정신 없는 사람 대신 택배를 뜯었다. 에어캡에 싸인 제품이 제가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인 걸 보고 루이스에게 제품 상자를 건네자 루이스가 받아들고는 실실 웃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흥, 아직 넌 그거 쓸 급이 아닌데."
"어. 너 주려고 샀어."
"뭐?"
태연하게 대답한 루이스는 다시 뜯지도 않은 상자를 벨져에게 건넸다. 벨져가 쓰는 마우스는 게이밍 마우스 중에서도 비싼 순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웬만한 전자기기 하나 값 정도 되는 지라 다이무스가 경비로 처리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왜, 전에 스튜디오에서 인식 잘 안 먹는다며. 그래서 내 거 사는 김에 하나 샀지. 내 건 그 아래 있을 걸? 없어?"
벨져는 상자에서 신문지뭉치를 빼고 다른 마우스 하나를 더 꺼냈다. 제가 쓰는 것보다 더 가볍고 클릭 소리가 적은 루이스가 애용하는 모델. 그 마우스는 벨져가 루이스에게 프로즌 전용이라며 사준 것이었다.
"쯧, 이게 벌써 몇 년전건데 아직도 쓰냐."
"왜, 그거 프로즌 마우스잖아. 진짜 프로즌이 산 거 알면 회사에서 좋아라 하겠다. 프로즌 팬들이라면 다 하나씩 갖고 있는 거 아냐? 근데 내건 없어?"
이글이 눈물을 닦으며 박스 안을 기웃거렸다. 벨져는 이글을 쳐내며 문제의 골판지 상자 안에 마우스를 넣었다. 이글이 인증샷 하나만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들었지만 벨져는 개소리 하지 말라며 달려드는 이글을 발로 밀고는 방으로 향했다. 벨져가 이글의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린 바람에 그마저도 무산됐지만, 이글은 아쉬움에 머리를 긁적이다 루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저었다. 한참 웃다가 이글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신문지뭉치를 던졌다. 잽싸게 받아챈 이글이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쓰레기통으로 던져넣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팔을 얹었다.
"하여간, 노답새끼들이라니깐."
"너도 만만치 않아."
"하하. 그건 그래."
"오랜만에 치킨이나 시켜먹을까?"
"오, 좋지. 야! 토마스! 니네 형수가 치킨 쏜댄다!"
루이스는 이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과장스레 몸을 수그린 이글이 엄살을 부리며 그대로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고, 결국 한바탕 소동은 장을 보고 돌아온 아이작에게 혼나며 치킨을 뜯는 것으로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