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도 박도 못하는 실책. ‘쉬레’ 벨져 홀든은 무력하게 아군의 HQ타워가 부서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고작 8강에서, 그것도 클린스코어로 패배란 홀든 attackers는 물론 벨져 홀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아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제 옆에 앉아있어야 할 그가 선수 부스 밖 관객석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팀원들의 얼굴과 함께 끝자리에 본 적도 없는 놈이 하나 앉아있는 게 보였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며 뒤돌아서는 게 보였다. 벨져는 해설들이 뭐라 떠들건 상관하지 않고 일어섰다. 뭔가 잘못됐다. 이겨야 하는 게임이었고, 그는 게임을 끝내고 무심한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함께 승리를 기뻐해야 했다. 루이스. 프로게이머 ‘프로즌’의 자리는 ‘쉬레’의 옆이었다. 벨져는 삼년이 넘는 시간동안 루이스와 호흡을 맞췄다. 그만큼 자신의 플레이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벨져는 다급하게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관객석과 선수를 가로막은 방음 부스의 벽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는 계속해서 멀어졌고 벨져가 루이스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는 찰나 아직 끼고 있던 헤드셋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벨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프로즌의 주캐, ‘Ice’의 패배 보이스였다.
‘Ice’가 두 사람에게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벨져에겐 첫 패배였고, 루이스에겐 프로게이머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Ice를 들고 져버렸다. 벨져는 이게 루이스 은퇴 후 첫 경기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있을 수 없다. 이젠 내가 뒤를 봐줄 수 없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며 쓰게 웃는 그에게, 너에게 기적을 선물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벨져였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루이스가 없는 첫 경기에서 ‘Ice’로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너무나 잘 알았다. 루이스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Ice’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루이스와 ‘Ice’를 연관 지어 전장의 영웅, 역전의 희망이라고 부르곤 했다. 루이스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쑥스러워했지만 벨져는 그 별명이 루이스와 ‘Ice’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Ice’를 들고 루이스가 보는 앞에서 져버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있을 수 없는 스코어에 헛웃음을 흘렸다. 견딜 수 없는 굴욕감과 분노에 방음부스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루이스를 잡으러 나가려했지만 부스엔 문이 없었다. 사방이 막힌 투명한 상자 안에 갇힌 벨져는 결국 루이스가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조금 전까지 있었던 팀원들과 스태프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루이스가 은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벨져는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한낱 꿈.
그걸 깨닫자 번쩍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천장,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 벨져는 바로 핸드폰을 찾아 홀드 버튼을 눌렀다. 오전 5시 15분. 마지막 게임을 하고 잠들기 전이 3시였으니 두 시간쯤 잔 셈이다. 답답하게 막혀있던 숨을 내뱉은 벨져는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로 훌쩍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곤히 잠든 룸메이트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루이스.”
잠기운에 잠긴 목은 깔끔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끝이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벨져는 상관하지 않고 루이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성인 남자 둘이 함께 눕기엔 좁은 침대였지만 루이스는 잠결에도 몸을 모로 뉘어 벨져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벨져는 냉큼 자리를 차지하곤 루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느껴지는 바디샴푸의 청결한 냄새와 따끈한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간절했던 그의 체취에 불안으로 날뛰던 가슴 속의 폭풍이 가라앉았다.
“루이스.”
한 번 더,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자 루이스가 잠투정을 부리듯 무어라 웅얼거렸다. 벨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콧잔등과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 맞추곤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지 않으면 쉬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취해서 고백하고 사귀게 된 지 고작 세달 밖에 안 된 연인이자 누구보다 믿음직한 파트너.
벨져는 루이스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건 전부 루이스가 은퇴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한계가 오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 말이 은퇴의 밑밥이란 걸 모를 정도로 벨져는 멍청하지 않았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은 필요 없다. 벨져는 자신의 팬들이 저를 위해 드는 치어풀을 떠올렸다. 사석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 꼭 맞는 말이었다. 벨져는 제게 팔을 둘러오는 루이스의 잠든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직 그를 그리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