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3년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1.
그 일로부터 열흘. 딱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어처구니 없는 기사도 돌았고, 커뮤니티엔 쉬레에 대한 옹호와 비판과 욕설이 마구 뒤섞인 채 그들끼리 치고 받기를 반복했다. 그동안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런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봤자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들이 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벨져 홀든의 관심은 프로즌이라는 세글자와 그 멀끔한 얼굴의 남자에게 쏠려있었다. 찾아서, 이 수모를 갚아야 한다.
검색을 해본 결과 프로즌은 실제하는 유저였다. 어느 게임, 서버에나 하나 쯤은 있을 법한 고루한 닉네임이지만 프로즌이라는 이름은 그의 그 서늘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꽤 닮아있었다. 프로즌이 그에게 어울리는건지 그가 프로즌에 어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계정이 그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프로즌. 공식전을 돌지 않는지 랭킹조차 뜨지 않는 언랭의 유저.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커뮤니티 창을 켰다. 여전히 회색으로 뜨는 그 세글자에 괜히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일방적으로 친구 추가를 하고, 언제 접속할까 어플까지 깔았건만 프로즌은 열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급수를 보면 그래도 꽤 오래한 것 같은데. 벨져는 회색 글씨를 보며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팀으로는 진 적이 있어도, '쉬레'에게는 이게 첫 패배였다. 벨져는 누가 뭐래도 1:1의 강자였다. 누구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근접전에서 만큼은 뛰어나다 자부했다. 그런 그에게 언랭의 일반인, 그것도 시니컬을 들고 아이스에게 졌다는 게 벨져에겐 충격이었다. 첫 패배와, 전국적 망신과 프로즌. 벨져는 제가 진 이유를 복기하기 위해 끊임 없이 연구했다. 그렇게 지고 한 사나흘은 보이는 족족 아이스만 잡아댔다.
하지만 수차례 1:1을 해도, 상위권의 아이스 유저들과 붙어도 아이스는 그때처럼 벨져를 위협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명백하게 쉬레가 프로즌에게 졌다는 뜻이었다. 시니컬로 아이스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프로즌의 아이스는 겨우 30대 레벨에, 앞선 한타로 체력이 반토막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1셔라곤 해도 풀피였던 제 시니컬을 이겼다. 벨져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명백한 실책이었고,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벨져는 그로부터 삼일은 잔소리꾼을 피해 핸드폰도 꺼놓았다. 이글 녀석은 그러게 한 번 큰 코 다칠 줄 알았다며 귓이며 우편으로 놀려대고 끝이었지만. 짜증은 나도 차라리 그 쪽이 나았다.
벨져는 애꿎은 세팅창의 아이템을 정리하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서늘한 눈빛과, 멀건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여름인데도 겨울을 떠오르게 하는 녀석이었다. 벨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양껏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가도 가슴에 맺힌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삐릭, 접속 알림 사운드에 벨져는 반사적으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벨져는 이글의 클랜 이동 알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 귓속말이 왔다. 녀석의 파티 초대 테러에 초대 거부 설정을 해놓은 이후로 늘상 있는 일이었다. 오라는 프로즌은 안 오고. 벨져는 이글을 만나기 전에 빠르게 큐를 눌렀다. 방학 중이고, 경기도 끝난 지라 사람이 꽤 있으니 이글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글 녀석은 클랜원들과 인사니 뭐니 하느라 못해도 오분은 늦게 들어올 것이다. 벨져는 빠르게 시니컬을 가져갔다. 그래봤자 상위 랭크의 매칭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그게 지루하다고 쓰레기같은 일반전에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문득문득 손이 F7로 가는 것은 거기서 프로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알바하느라 자주 못 들어온다곤 했지만 다른 아이디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마주치는 랭커들 사이에 숨어있는 건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 막연히 기다리는 것 뿐인데, 그것도 열흘이 넘어가니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이게 전부, 프로즌 때문이다. 벨져는 창밖의 야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 화면이 전환되며 흐르는 배경음악에 적팀 조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익숙한 닉네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메이헨(아이스) : 오! 뭐야, 평타에 발린 쉬레자나?]
일반 채팅으로 도발하는 동생 녀석에 벨져는 왼쪽 중앙 3립으로 향했다. 도발에도 수준이 있지, 저따위 싸구려에 넘어갈 리 없었다. 아직 한참 멀은 동생을 친히 가르쳐주기 위해 벨져는 골목 안개지역에 숨어 애용하는 디티 인사이드를 깔았다. 아니나 다를까, 쭐레쭐레 슬라이드를 깔고 3립을 먹기 위해 이글의 아이스가 나타났다. 아이스 하나 잡는데는 궁극기도 필요 없다. 벨져는 가볍게 원콤보로 이글을 전광판으로 보내버렸다.
[메이헨(아이스) : 아 형! 귀여운 동생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쉬레(시니컬) :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메이헨(아이스) : 내가 없는 소리한 것도 아닌데 왜그랰ㅋㅋㅋㅋ]
벨져는 이글을 차단하고 타워를 치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한타가 벌어졌으나 벨져는 초반에 이글 녀석을 처리했으므로 노마크 상태에서 레벨링을 하기 위해 합류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앙 타워를 끼고 4:4를 하면 그게 그거였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 이상 비등비등하게 타워를 긁다 서로 레벨링을 하기 위해 옆 타워로 이동할 터였다. 벨져는 이글의 리스폰이 끝나는 걸 보고 혼자서 반피를 만든 타워를 두고 뒤로 빠졌다. 아이스의 빠른 기동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쯤이 딱 시니컬의 궁극기로 한타를 걸어보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적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알고 있는 것과 그걸 막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중앙타워와 사이드 타워 옆 통로의 안개지역. 벨져는 거기에 숨어 디티를 꽂았다. 닌자 페어 중 하나인 시니컬은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데미지, 그리고 화려한 스킬만큼이나 방어력과 체력이 약했다. 제 팀의 디티가 아닌 디티 꽂히는 소리에 벨져는 바로 우클릭으로 디티를 꽂던 적팀 근딜을 잘라냈다. 그 뒤에 있던 원딜까지 전광판으로 보내고, 뒤늦게 달려오는 탱커와 아이스의 슬라이드에 바로 스페이스로 구멍을 타고 낙하한 벨져는 팀원들의 굿 소리를 들으며 중앙 타워에 핑을 찍었다.
근딜과 근딜의 싸움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벨져는 중앙타워의 팀원들과 합류에 중앙타워를 긁는 대신 아까 남겨둔 타워를 독차지했다. 최근 상향을 받은 스트리머 덕에 남은 타워 하나마저 금세 파괴하고 나니 딱 3분이었다. 벨져는 안쪽의 립까지 먹고 나서야 라인을 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스노우볼링 전개였지만 적팀엔 언제라도 역전을 노릴 수 있는 스타라이트와 미스틱이 있었다. 거기에 검증이 된 건 아니지만 영웅 플레이의 대표캐인 아이스까지. 그 셋의 궁극기를 한번에 맞으면 아무리 레벨차가 나도 위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트루퍼가 뜨기 전까지 통로 립을 먹는데 스트리머가 아이스에게 잘렸다. 순식간이었다. 아마 물방울쿠션이 꺼지자마자 샤드에 당한 것이리라. 얕은 잔재주에 벨져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봤자 이글의 아이스는 영웅병 걸린 아이스일 뿐이었다. 공방의 다른 아이스 랭커와 붙어도 프로즌 정도의 아이스는 없었다. 그러니 이글 녀석의 아이스가 위협이 될 리가. 마침 트루퍼가 딱 좋은 위치에 떴다. 벨져는 바로 트루퍼를 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1단계지만 그래도 코인 벌이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이미 3장2모를 찍은 후라 트루퍼는 팀원들이 오기도 전에 벨져의 손에 끝이 났다. 탱커나 서포터가 잡고 있던 거라면 또 모를까, 딜러가 막타를 먹는 게 당연했다. 거기에 스트리머는 이제야 겨우 전광판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공방이 버프에 벨져는 옆에서 터지듯 밀리는 아군 철거반을 보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철거반이 날아가는 정도를 봐선 아이스다. 벨져는 이동속도 킷을 사용하고 4번타워 앞 통로에 디티를 꽂았다. 바로 가까이서 들리는 휠업소리에 E키를 누르자 이글 대신 아이스와 함께 옆에 있던 히포크라시와 어트랙티브가 같이 갈렸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극공 힐러는 바로 궁극기에 죽고, 방서폿이었던 어트랙티브는 쐐기와 패닝으로 처리하고 나니 스타라이트가 다가왔다. 벨져는 아껴둔 왈츠로 통로를 타고 빠져나왔다. 둘을 끊은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통로 나오자마자 옆에서 미스틱과 아이스의 궁극기 소리와 함께 아군 상태창에 셋이 전광판 신세가 됐다. 암살을 하는 사이 옆으로 이동해 라인을 밀던 팀원들을 노린 거였다. 이글 녀석은 아마 저를 노린 거였겠지만.
벨져는 이글을 추격하는 대신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스타라이트의 기어3가 남아있고, 중앙타워가 살아있는 이상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글 녀석의 귓속말만 아니었다면, 벨져는 그대로 타워를 포기했을 터였다.
[메이헨: 형, 프로즌 보고싶지 않아? 가르쳐줄수 있는데ㅋㅋ]
[메이헨: 내기할래? 이기면 알려주지~]
이글의 귓속말은 벨져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글이 하는 말이니 그냥 하는 도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위여부를 살피고 재기에 벨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몸이 달아있는 상태였다. 벨져는 잠시 한숨을 깊게 내쉬고, 234번 소모킷을 전부 사용했다. 지루하게 벽돌을 쌓을 뿐인 게임은 순식간에 결승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벨져를 흥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