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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8.
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추후에 책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8.
마침내 대학생활이 끝났다. 루이스는 후련한 마음 반, 어딘가 섭섭한 마음 반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숨을 푹 내쉬었다. 졸업식만 가면 이제 정말 끝이다. 루이스는 노트북을 덮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붙어 지내다시피 하다가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니 부쩍 그 생각이 났다. 루이스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을 듣는 동안, 묘하게 두근거리고 설레기도 해 루이스는 노트북을 톡톡 건드렸다.
“여보세요.”
“응, 벨져.”
“잘 끝났나?”
“응. 덕분에.”
공사장에 있기라도 한 건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아니, 그냥.”
그냥. 보고싶어서. 보고싶다는 말은 목에 걸린 것 처럼 간질거리며 나오질 않았다. 루이스는 목에 걸린 것을 털어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벨져의 목소리에 짙게 배인 피곤이 신경쓰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지내는지도 한 번 묻지 않은 게 떠올랐다. 시험기간이라 바쁘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무심했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바빠?”
“아니, 안 바쁘다.”
“그럼 만날래?”
“그래. 그 카페에서 보도록 하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알았어.”
벨져는 걱정과 달리 별로 기분이 상하거나 서운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어질러진 방을 슥 둘러봤다. 오랜만에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냉장고도 좀 채워놔야지. 전같았으면 바로 시작했을 수순의 앞에 자연스럽게 벨져가 떠올랐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벨져가 말한 세 달도 끝난다. 루이스는 할 일을 적어놓은 캘린더를 펼쳤다. 알바며 과제, 팀플이며 시험으로 빼곡한 봄학기와 달리 가을학기 이후에는 과제 기한이 적혀있는 게 전부였다.
루이스는 캘린더를 덮고 일어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샤워도 하고, 오랜만에 사람 꼴로 나가기 위해 아껴둔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딱 분침이 절반 지나 있었다. 루이스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고 잠바를 걸쳤다. 벨져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집에서 가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키홀더와 지갑, 핸드폰을 챙긴 루이스는 집을 나섰다. 가지만 남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바람이 매서웠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티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어차피 요 앞이니까 이 정도야 어떠랴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험기간이라 꽉 찼던 카페들도 방학을 맞아 한산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들어선 루이스는 매장을 슥 둘러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은 루이스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 여기서 만날 때만 해도 해가 쨍하니 내리쬐던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바뀌고, 아메리카노 한 잔도 얼음이 담긴 유리잔 대신 따뜻하게 데운 하얀 머그로 바뀌었다. 루이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따뜻한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세 달. 벨져가 얘기한 세 달은 루이스의 학기와 함께 시작해 끝나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지난 시간을 천천히 되돌아봤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감상 속에 어느 순간 제가 섞여있었다. 그 해의 겨울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이었다. 결코 닿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고, 다른 세계를 동경할 새도 없이 주어진 것에 아등바등하느라 꿈을 꿔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욕심이 났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손을 내미는 그가 너무 눈부셔서, 닿고 싶었다.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시지프스가 되는 건 아닐까 했다. 신들의 아량으로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뻐기다가, 결국은 끊임없이 무거운 돌을 산 꼭대기까지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인간.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되도 않는 헛된 꿈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한 것도 벌써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은, 벨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사람은, 버려지는 것에 대해 어떠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는 저를 꾀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첫만남이 너무 극적이어서, 그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를 감싸쥐었다.
까만 수면에 자신이 비쳤다. 하고 싶은 것은 확실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계절의 끝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루이스.”
“왔어?”
“기다렸나?”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부쩍 수척해진 얼굴의 벨져가 장갑을 벗으며 다가와 앞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었다. 눈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이 안쓰러웠다. 벨져는 손을 뻗어 머그를 잡고 있던 루이스의 손등을 감쌌다. 따스한 온기에 루이스는 그를 향해 슬쩍 웃어보였다. 벨져는 대번에 혀를 찼다.
“손이 이게 뭐냐.”
“요 앞인데 뭘.”
“미련하긴.”
“너는. 잘 지냈어? 피곤해 보이는데.”
“못 지낼 것도 없지.”
못 지낼 것도 없다면서, 그 또렷한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제 손등을 감싸고 온기를 나눠주는 게 간질간질해 루이스는 숨을 죽였다. 이 모든 것이 깨면 사라질 꿈이 아니기를 바라. 잠시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 손의 온기와 감촉에 낮게 일던 파도가 가라앉았다.
“벨져.”
벨져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그 시선에 잠시 생각을 골랐다.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에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그 날 공성이나, 무슨 일이 있었다, 내일은 뭘 하고 밥은 뭘 먹을까. 정말 일상적인 얘기밖에 안 했구나. 그런 생각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등을 감쌌다.
“너는, 잘 지냈나?”
“응. 이제 다 마쳤지.”
“학사모 쓸 일만 남았군.”
“너는?”
“나?”
이런 질문이 의외라는 듯 벨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피식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기졸업했다. 별로 흥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하겠더군.”
“너 답네.”
“당연하지.”
수긍하자 벨져는 더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받아 차를 주문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에 루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벨져는 테이블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벌써 겨울이네.”
“오늘은 눈이 온다더군.”
“그래? 벌써 첫눈이 내릴 때가 됐구나.”
루이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했더니, 벌써 비 대신 눈이 올 날씨가 되었나보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금방 벨져의 차가 나왔다. 벨져가 시킨 진한 홍차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건 뭐야? 냄새 좋네.”
“얼그레이.”
벨져는 마셔보라는 듯 찻잔의 손잡이를 루이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금테가 둘러진 잔을 조심스레 잡고 입술을 댄 루이스는 가까이서 올라오는 향기에 차를 마시는 건지 향기를 마시는 건지 모를 기분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벨져 쪽으로 손잡이를 돌려놓은 루이스는 다시 머그를 잡았다.
“그냥 그렇네.”
“다음에 제대로 우려주지. 홍차는 전문점이 아닌 이상 제대로 맛을 못 내더군. 그래도 이 정도면 쓰레기는 아니지만.”
루이스는 바로 홍차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예 양팔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벨져가 한참 베르가못이니, 찻잎의 원산지니 하는 얘기를 하다가 말을 멈췄다. 너무 가까이 갔나 싶어 벨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당겨 의자 쿠션에 몸을 기댔다.
“밥은?”
“어…, 먹었을 걸?”
일어나서 메일 확인하고, 하던 일을 마치기까지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노트북의 글씨만 보고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라고 하는 게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벨져를 만나러 나오며 쐰 햇빛이 사나흘 만이었다. 비타민D를 위해 광합성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는데 벨져가 혀를 차더니 반도 마시지 않은 차를 두고 일어섰다.
“가자. 밥부터 먹고 차를 마셔야지. 빈 속에 그 쓴 걸 집어넣어?”
“어어, 너는? 점심 먹고 온 거 아니야?”
“이 멍청아,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나와.”
“넌 몇시에 먹었는데.”
“하아, 나도 안 먹었으니까 밥부터 먹자고.”
신경질이 섞인 벨져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벨져는 제 손목을 덥석 잡아 끌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에 끌려 가면서도, 피식 웃음이 샜다. 이 짜증과 신경질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반가웠다. 고작 몇 주 못 본 것 뿐인데 한 일 년은 못 본 것처럼 그리웠고, 또 반가웠다. 그간의 공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끌어당겨주는 게 고마웠다.
“뭐, 먹고 싶은 건?”
“별로 없는데.”
“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쯧, 그새 잘 먹여놨더니 이 꼴이 뭐냐.”
“너도 그새 말랐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계산대 앞에서 장지갑을 꺼내들었다. 루이스도 지갑을 꺼냈으나 벨져는 이미 카드를 내민 후였다. 뭐 그런 걸 꺼내냐는 듯 벨져는 그 잘생긴 얼굴의 미간을 찌푸렸다.
“넣어둬.”
“어떻게 커피 한 번을 못 사게 하냐?”
“그 돈을 누가 주는데. 밥이나 제대로 사 먹어. 굶고 다니지 말고.”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말이건만 벨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그런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제 지갑에 들어있는 건 벨져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기도 하고, 벨져에게 이 정도 커피값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은 그냥 기분이라도 내게 해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한 잔 할래?”
“…나쁘지 않지.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고. 그 다음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계산을 하는 사이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벨져의 시선에 루이스는 그를 마주봤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싶어 제 옷차림을 슥 보는데 벨져가 들고 내려온 목도리를 두르고 매듭을 지어주었다.
“나 추위 별로 안 타는데.”
“흥, 그래놓고 감기나 걸리지 마라.”
벨져는 영수증 대신 카드만 받아 지갑에 넣고는 돌아섰다. 루이스는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 훈기가 내려오는 카페의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목을 감싸면 체온 유지가 잘 된다던데, 벨져가 하고 다니는 거라 그런지 맨살에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벨져는 차를 빼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버렸다. 같이 가재도 그는 듣는 법이 없었다. 따라나가려 하면 또 짜증을 낼 게 분명했고,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해진 채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루이스는 한 발 양보했다. 사실 늘 양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 홀든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지금도 흔들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감상에 젖어 카페 문 앞에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코 끝에 차가운 게 닿아 녹아내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치고 있으니 아직 덜 얼은 진눈깨비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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