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어나자마자 꼭 붙어앉아 아이패드를 보고 있던 덩어리 중 하나가 대답했다. 하여간 자리도 넓은데 왜 저러고 있담. 이글은 입을 비죽 내밀며 벨져에게 안기다시피 기대있는 루이스의 옆에 앉았다. 루이스를 끌어안고 패드를 만지던 벨져가 화면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네 생일에 결승을 하겠군.”
“그 전에 네 생일에 4강을 하겠지.”
“그거야 당연히 이길 테니까.”
루이스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옆에서 이글이 질색을 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루이스는 이글의 다리를 두드리며 이해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 잠깐도 뺏기기 싫은지 바로 벨져가 목에 감고 있던 팔을 당겼다. 목이 졸리는 대신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올려다보자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대진표를 확인한다. 루이스는 벨져의 아이패드를 꺼버렸다.
“뭐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거 없어?”
“그냥 늬들은 서로를 줘라. 줘. 노예권.”
“니들이라니. 이글.”
“에휴, 난 줄 거 없다! 형들 알아서 해!”
선물 얘기가 나오자마자 냉큼 달아나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이글을 보다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루이스와 벨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 기대도 안 했지만....”
“저 새끼는 평생 저럴 거다.”
“그래서, 너는 뭐 생각해놓은 거 있어?”
“딱히 없다만.”
루이스는 벨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벨져의 눈길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노예권 줄까?”
“미쳤냐.”
“아니면 뽀뽀쿠폰같은 거?”
“......이글이 옮았군.”
“걔가 무슨 병균이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벨져가 혀를 차며 목에 둘렀던 팔을 내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준다고 해도 과연 벨져 홀든의 눈에 찰까 싶지만 그래도 생일이니만큼 뭔가 해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떠올렸다. 같이 산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벨져는 어려웠다. 비싼 고급 크리스탈 잔 같은 녀석이라 무디기 짝이 없는 센스의 루이스에게 벨져 홀든의 생일선물은 난제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축에 속했다.
“글쎄, 물질적인 건 별로.”
“그래.”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는 세상이 비슷할 때나 통하는 얘기다. 벨져가 수실로 옷장에 채워넣는 옷만 해도 그렇다. 루이스가 생각하는 옷값에 0을 몇 개를 더 붙여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돈으로 구할 수도 없는 한정판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방 안에 즐비했다.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숙소 생활을 시작한 몇 주동안은 벨져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을 구분하다 못해 가격부터 생각하던 루이스였다.
“경기 끝나고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회식 하고 바로 연습하겠지.”
“그러게....”
벨져가 시선을 내렸다. 영 좋지 않은 표정에 뭐 문제라도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푹 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글 녀석의 멍청함이 옮았나.”
“.......”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예뻐서, 흰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런 척 해도 엄청 좋아한다니깐. 피식 웃으며 아예 벨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아이패드를 내려놓은 벨져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넌. 뭐 갖고 싶은 거.”
“없는데.”
쯧. 또 혀를 찬다. 루이스는 예상한 반응에 가늘게 웃으며 벨져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사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다이무스의 자리를 대신해 새로 영입한 탱커와 조합을 맞추고 본선 경기를 연습해야 하는데 꼼짝도 하기 싫었다. 벨져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넣자 벨져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지 말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눈을 감아버렸다.
“방금 일어나놓고 또 자냐.”
“안 자.”
“결승 끝나면 휴가니까 어디라도 가던지.”
“둘이?”
“주렁주렁 다 달고 가면 제대로 쉬겠냐.”
난 좋은데. 네가 둘이 가고 싶은 거겠지.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여행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휴가라고 하면 그냥 집에서 늘어지게 쉬는 게 훨씬 좋지만 벨져는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드라이브를 하면서 바람을 쐬야하고, 밥도 그냥 한 끼 때우는 게 아니라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우선은 결승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벨져와 제 생일 사이엔 딱 15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결승은 일요일, 본선은 토요일에 하는 경기 일정 상 8강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벨져의 생일에 4강전을 하는 거야 정해진 수순이었다. 더구나 이번 상대는 유독 홀든A에게 약한 서포터 위주의 신생팀이었고, 사실상 홀든 A는 결승까지 수월하게 가지 않겠는냐는 게 대세적인 여론이었다.
“이대로 올라가면 또 그랑플람이랑 만나겠네.”
“콩라인으로 굳혀줘야지.”
“너만 잘 하면 돼....”
“내가 못한다는 소린가?”
“아.”
루이스는 잘못 속내를 말해버린 것처럼 입을 가렸다. 가슴을 아프지 않게 치는 벨져가 입술을 비죽인다. 삐진 게 귀여워서 이렇게 장난을 치고 마는 걸 알까. 알면 이럴 리가 없지. 키득거리며 미안하다고 말하자 깍지 낀 손을 놓고 내려놓았던 아이패드를 든다. 너 그거 떨어뜨리면 나 오늘 연습 못해. 벨져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 때 다른 약속 잡지 마. 이번에도 파토내면 앞으로 네 얼굴 안본다.”
“그럼 그랑플람으로 옮겨야겠네.”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다. 이러다 진짜 토라질 기세라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목을 뒤로 빼며 한 번 튕기다가 결국은 뺨을 내준다. 늘 관리를 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질였다.
“농담이야.”
루이스는 벨져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엄지로 뺨을 찬찬히 매만졌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벨져의 눈에 힘이 풀린다. 그 모습이 좋아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벨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당연히 입술을 맞추겠거니 싶어 눈을 감았는데도 반응이 없다. 슬며시 눈을 떠볼까 하는데 코를 잡혔다.
“아아아, 미안!”
루이스는 코를 비트는 고통에 벌떡 일어났다. 코를 잡고 눈을 흘기니 벨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흥. 덤빌 구석을 보고 덤벼야지.”
“...너 내가 너보다 형이란 건 아예 안중에도 없지?”
“고작 한 살 가지고.”
“아, 몰라몰라. 넌 생일 선물 취소야.”
벨져를 내버려두고 소파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뭐 그런 게 있냐는 둥 어이 없어하는 벨져를 두고 식탁 의자에 대충 걸어놨던 잠바를 집어들었다. 족히 두 사이즈는 큰 잠바는 원래 다이무스의 것이지만 다이무스가 은퇴하면서 자연스레 루이스의 소유가 됐다. 딱히 탐이 났던 게 아니라, 자기 옷과 헷갈려서 자주 입고 다닌 것 뿐이지만 어쨌거나 다른 건 다 사무실에 돌려놓은 다이무스가 오더의 역할과 함께 루이스에게 준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야!”
“나 먼저 간다!”
물론 벨져는 그런 거에 의미를 붙이는 게 오글거리지도 않냐며 질색을 했지만. 루이스는 벨져의 외침을 무시하고 이글과 토마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충 슬리퍼를 신고 문을 열면 결국 벨져가 몸을 일으킨다. 비척비척 토마스의 손에 이끌려 나온 이글도 춥다면서도 슬리퍼를 꿰찼다.
“아이작씨는?”
“아까 먼저 나가셨어요.”
“으아, 춥다. 으으으.”
“아, 형!”
“오늘은~ 우리 토마스가~ 몇 쓰레기나 당할까요~?”
“이글 형! 형이나 잘, 으악!”
이글은 능글맞게 웃으며 토마스의 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 토마스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고, 애를 놀리던 이글이 결국 벨져에게 등짝을 맞았다. 한 걸을 떨어져 걷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글의 호들갑에 웃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벨져의 생일까지 앞으로 한 달 남짓, 고민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