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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7.
07.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순위를 메긴다면 단연 상위권에 오를 사람이 제 집 소파에 앉아 저를 부르고 있었다. 당장 돌아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전화로 하면 될 걸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꽤 일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번 시즌도 넘길 테냐? 너라면 충분히 헬리오스에도 들어올 수 있을 거다. 내가 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형아.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가면 되겠네.”
벨져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이글 놈이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도 알려주지 않으리라. 문을 열기 전까지 기분좋게 돌아온 벨져였다. 오늘은 드디어 루이스가 조커1을 찍은 날이었고, 벨져는 그와 함께 5연승 기록을 세우고 피씨방을 나섰다. 곧 기말고사다 졸업 논문 심사다 뭐다 하는 일로 한동안은 얼굴을 보기 힘들 터였다. 그 전에 조커1을 찍은 게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 혼자 차를 세워두고 근처 바에서 한 잔 하고 오는 길이었다. 애당초 세웠던 계획도 차근차근 잘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최근 벨져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아니 '프로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맵을 읽는 센스, 냉철한 판단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 무엇보다 위기 상황에서 더 그를 빛나게 만드는 침착한 태도. 벨져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자신의 감과 판단을 믿었다. '쉬레'의 플레이도 그랬다. 지금까지 있었던 팀에서 벨져는 종종 오더를 무시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는 곧 자신이 맞다는 증명이었고, 팀원과 오더는 아연실색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벨져는 혼자서 게임을 이끌어나가는데 능숙했다. 최종 목표가 승리라면 탱커나 서포터 한 둘 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서포터와 탱커가 잘 해도, 딜러가 없으면 말짱 헛고생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프로즌'은 저와 정반대라 해도 좋을만한 플레이를 했다. 결과적으로 하는 행동은 똑같지만, 그는 팀을 이끌줄 알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다독이고 끌어들여 유대를 형성하는 면에서. 본인은 아니라고 하고 자각도 없는 것 같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 지켜보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아마 처음 그 날 졌던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할 정도로, 루이스는 팀원을 믿었다.
AOS에서, 그것도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게임에서 믿음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이던가. 벨져는 그런 신뢰와 믿음은 5인 공성을 돌릴 때나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신뢰와 유대는 강력한 무기지만, 때로는 그 마음이 발목을 잡기도 하는 법이었다. 지지난 시즌의 32강, 힐러가 잡혔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는 불나방 플레이를 선보인 멍청이 덕에 신인 Darkness는 결국 본선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일반전에서나 볼 법한 플레이였고, 벨져로선 드물게 그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팀의 빈자리에 영입하려거든 반대할 생각으로 기억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벨져. 그 때 일이 걸려서 이러는 거라면 이번 시즌은 쉬어도 좋다.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해.”
“말을 끊지 마라.”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큰형과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저를 아래에 두고 어르고 훈수하려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릴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성인이 된 지도 꽤 됐다. 벨져는 거리를 가득 메운 불빛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듣기 싫으니 어서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제레온 감독이 승부조작 혐의를 받고 있다. 아직 기사는 안 났다만.”
“뭐?”
“후임 로리아노가 애쓰고 있지만, 가망이 없어 보이더군. 검제로 돌아가긴 힘들 거다. 다음 시즌에 데뷔하는 것도 힘들 테고.”
“…그걸 나한테 굳이 얘기해주는 의도는 뭐야?”
“……공백기가 너무 늘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새로 생겼다 사라지는 팀도 무수히 많지.”
벨져는 무뚝뚝하게 말하는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레온에 대한 진위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오랜 연을 맺어온 프리츠를 버린다는 소리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벨져는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벨져는 검의 형제를 위해 몸 바치다시피 한 제레온을 떠올렸다. 잘 부탁한다며 사무실을 나가던 날까지도 그는 제게 맞는 팀원을 구해주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사람이었다. 입 안이 써 담배가 고팠다.
루이스랑 있는 동안 담배 한 대를 못 태웠던 게 떠올라 벨져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확 추워진 날씨에 여전히 가을이라도 되는 양 옷이 얇았다. 그렇게 다니니 감기를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게 보일러도 좀 틀고 옷도 좀 사고 하라니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 자연스럽게 루이스 생각을 하던 벨져는 불을 붙이고, 니코틴을 들이마셨다. 다이무스는 실내에서 무슨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긴 자신의 집이고, 그는 무단 침입한 불청객이니까. 벨져는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뱉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형아.”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다.”
“하! 그 걱정은 이글 녀석에게나 해주지 그래? 좋아라 할 텐데. 그 자식 이번에 중간고사도 자느라 안 본 거 알아?”
“…하아. 이만 가보겠다.”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
벨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다이무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대로 돌아서 나가던 다이무스가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돌더군.”
“무슨 소문.”
“네가 듀오를 돈다는 것 말이다.”
“…….”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잘 하리라 믿겠다. 그럼 잘 자거라.”
젠장. 벨져는 둔탁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도어락의 잠금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미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어 양손을 허리에 놓고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자나. 벨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응? 벨져? 왜?”
“…….”
“왜, 무슨 일 있어?”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벨져는 헝클었던 머리를 다시 쓸어올렸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소파에 풀썩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데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은 먹었냐.”
“응? 아, 먹었어.”
“거짓말 말고 먹어. 먹고 자.”
“그거 얘기하려고 전화 한 거야?”
“…아니.”
“취했어? 술 마셨어?”
벨져는 피식 웃었다.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슬쩍 눈을 감았다. 그래, 이렇게 착잡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운 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빠르게 마셔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안 취했다.”
“얼른 자.”
“그래. 너도 자라.”
“알았어. 끊는다.”
“…그래.”
벨져는 잠시 잡을까 하다가 대답했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있는 건 아마 졸업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울까 하다가 루이스가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지나가듯 걱정하던 게 떠올라 담배 각을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곧 연락이 올 것이다. 벨져는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제가 구상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상을 현실에 옮기려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나 다른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신경 쓸 일 투성이였지만 루이스가 시험공부를 하고 졸업논문을 쓰는 사이 마냥 그만 기다리기도 뭐했다. 벨져는 잠시 소파에 앉아있다 일어났다. 서재 겸 작업실로 쓰는 방 안 책상 위엔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아무도 알아줄 리 없는 고충에 벨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슬슬 신생팀과 기존 팀은 윈터를 준비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쉬레는 이번 시즌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헬리오스를 비롯한 다른 팀에서도 쉬레를 부르고 있었지만 벨져는 이제 다시 다른 팀에 속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시작. 벨져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새우고 찾아올 계절이야말로 벨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빨리 보여주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했다. 벨져는 나가기 전까지 쓰던 기획서를 펼쳤다. 새 팀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루이스였다. 지금 한창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그. 프로즌은 스스로 자신이 쉬레에게 합당한 상대였음을 증명해야 했다. 커뮤니티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과 손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벨져는 프로즌의 전적을 검색했다. 승률은 63%. 아이스의 랭킹에도 진입한 게 뿌듯해 미소가 지어졌다. 루이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차분한 목소리와 제게 향하는 그 눈빛이 그리워졌다. 벨져는 지난 시간을 더듬어 처음 그를 만난 행사장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창. 해가 쨍쨍하니 내리쬐던 더위도 이제는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의류매장에는 코트와 니트가 걸리고, 거리를 물들인 낙엽도 한 차례 내린 비에 쓸려나갔다.
겨울이 오는 동안 준비할 게 산더미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못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새 사무실과 대신 일을 해줄 사람들, 리그 진출과 영업. 벨져는 키보드를 다그락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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