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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생각할 땐 재밌었는데....ㅠㅠ 쓰다보니 재미가 없어서 쓴 곳까지만 올림
** 게이머 은퇴 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셰프들이 유명인의 냉장고로 하는 시간제 요리쇼에 오늘 게스트로 초대받은 벨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루이스에게 카톡을 보냈다. 촬영을 시작했냐는 질문 옆에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 걸 봐선 핸드폰을 볼 여유가 없거나, 아니면 정신 자체가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벨져는 잠시 응원차 방송에 들어가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괜히 봤다가 또 망해가는 거 보고 심란해지면 이번 방송을 망칠 가능성이 컸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자리에 앉아 셰프들이며 패널들과 인사를 나눈 벨져는 제작진이 미리 옮겨놓은 냉장고를 보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닥달을 하긴 했지만 집을 비운 이틀 사이에 루이스가 또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아, 오늘의 특급 게스트를 모십니다!”
벨져는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 그래도 몇 번, 루이스가 집에서 셀프카메라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잡히면서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벨져였다. 셰프들의 요리 대결에 앞서 냉장고를 공개하는 시간이 이렇게 긴장될 줄이야. 적당히 오프닝 멘트를 주고받던 벨져는 냉장고 앞에 선 진행자들이 손잡이를 잡는 걸 보고 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어, 왜요. 왜 긴장을 하시죠? 여태 여유만만이시더니.”
“벨져씨 이런 모습 처음 봅니다. 경기할 때도 긴장을 안 하는 선수였거든요.”
두 엠씨가 긴장을 풀라는 듯 사람 좋게 웃었지만 벨져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정리도 안 된 집을 보여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인가. 벨져는 영혼 없이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제 동거인이 워낙....”
“아....”
“아, 루이스씨와 동거중이시죠?”
“그렇습니다. 지금 촬영중일텐데.... 제가 집을 이틀동안 비웠는데 그동안 얼마나 엉망으로 해놨을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셰프들이며 같이 나온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벨져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또 오늘 특집이 숙소요리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클레어씨?”
“어머, 그럼요! 사실 아이돌 숙소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또 선수들은 아니잖아요.”
“사실 프로게이머 숙소 냉장고는 이런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이돌 대표로 나온 클레어 스미스가 해맑게 웃었다. 전에도 한 번 집에 방문해 벨져가 만든 요리를 맛봤던 그녀는 두 사람의 집이 얼마나 깔끔하며 벨져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늘어놓으며 벨져의 냉장고 오픈을 잠시나마 늦춰주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루이스씨가 집에서 뭔가 요리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뇨. 주방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 아니 루이스씨는 절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야, 그렇게까지 가나요.”
“그렇습니다. 완제품을 먹는 건 괜찮은데, 자기가 직접 하는 건.... 라면 정도일까요.”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말에 애써 웃음을 눌러 참은 진행자가 냉장고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루이스씨는 그럼 전혀 냉장고에 손을 안 대는 겁니까?”
“못 대게 하죠. 보통.”
“이야.... 이거 왠지 불쌍한데요. 그 친구가 참 괜찮은 친구거든요.”
“사람이야 뭐....”
갑자기 루이스에게 기우는 동정론에 말끝을 흐렸다. 물론 사람이야 괜찮지만, 동거하는 애인이 아니라 같이 사는 입장에서 보면 루이스는 꽤나 번거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청소하기 귀찮다고 안 움직이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안 먹고 사람 속을 썩이는 데다 또 냉장고는 왜 그렇게 헤집어놓는지. 벨져는 지금 열심히 방송을 하고 있을 애인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럼 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죠! 전화 연결 한 번 해볼까요!?”
“아마 지금 촬영중이라 힘들 겁니다.”
“아, 어떤...?”
“타방송국의 조그만 텔레비전인데 실시간으로 하니까 아무래도....”
“그렇군요! 하긴 또 요즘 섭외순위 1순위가 아닙니까. 제가 듣기론 벨져씨보다 더 버신다고....”
짓궂은 질문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수입으로 치자면 그렇지만 워낙 보유 자산이 다르니까요.”
턱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자 셰프들이 박수를 치고 말을 꺼낸 진행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종종 가는 레스토랑의 메인 셰프가 계산은 루이스가 하지만 실제 카드는 벨져의 카드라는 증언을 보탰고, 벨져는 이틀동안 첫 출연이라고 저를 보는둥 마는둥 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그까짓 BJ 짝퉁 방송, 그냥 자기 채널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방송국까지 가서 해야 하나 싶었지만 루이스는 첫 공중파라며 같이 이 프로에 나오자는 벨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가버렸다.
그래. 그까짓 출연료 안 벌어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 수 있다. 벨져 홀든은 애인 한 사람쯤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못해 그를 위해 구단까지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어올라 벨져는 아까 접어든 카드를 꺼냈다.
“그래도 뭐, 시험 삼아 한 번 전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방송중이라고 전화를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벨져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 시작 전에 꺼둔 전원을 넣고 잠깐 흘러가는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는데 손에 든 핸드폰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벨져는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피식 웃었다.
“또, 우리 루이스씨가 양반은 못 되네요.”
“아! 루이스씨한테 전화가 온 겁니까!”
“받겠습니다.”
벨져는 셔츠에 찬 마이크를 약간 당기고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자마자 여태 속을 썩인 못난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아직 안 들어갔어? 다행이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클레어가 눈을 반짝였다. 평소 프로즌의 팬이라던 그녀니 당연하지만,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긴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어. 너는.”
“나? 이제 생방 끝났는데 완전 정신 없었어.... 너는 언제 끝나? 데리러 갈까?”
“지금 촬영중이다.”
벨져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침묵 속에 감도는 당황과 혼란이 여기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약간의 투정과, 늘어지는 말끝에서 풍기는 그 나름의 애교에 결국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루이스?”
“야, 이...!”
“루이스씨! 안녕하세요!”
“아, 어.... 안녕하세요! 아 근데 이거 방송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루이스의 맹한 대답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루이스의 황망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고, 진행자가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앞서 벨져씨가 두분의 동거생활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셨는데요, 평소에 벨져씨가 요리를 자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 그게 좀 허세가 든 방송용....”
“뭐?”
“네, 자주 해주죠. 오늘 셰프님들이 벨져씨의 입맛에 맞춰주시느라 힘드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짓말 아니구 벨져 요리 되게 잘해요.”
“그렇군요! 허세가 좀 들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다?”
짓궂은 질문에 루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 벨져씨도 그렇고, 서로를 감싸주는 두 분의 우정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언제 한 번 나오셔야죠!”
“하하, 같이 사는데 같은 냉장고로 두 번 나갈 수는 없죠. 아니면 지금 갈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오긴 어딜 와. 집에 가!”
참다가 짧게 윽박지르자 루이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며 능청스레 넘어가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그럼 저희 벨져씨한테 맛있는 거 많이 먹여주시구, 저는 집에서 본방 시청하기로 하고 여기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전화를 끊고 집에서 보자며 (웃음) 이모티콘을 보냈다. 아직 냉장고를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메시지에 답장도 않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벨져가 핸드폰을 끄고 집어넣는 사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냉장고로 돌아갔다. 저들끼리 얘기를 진행하다 마침내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은 그들이 냉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스튜디오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이야.... 이거 여느 살림꾼 냉장고 못지 않은데요?”
“일단 굉장히 깔끔합니다. 이건 와인인가요?”
벨져는 진행자들이 꺼내든 와인 병을 보고 기억을 더듬었다. 제 술은 전부 와인 셀러에 있으니 직접 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루이스가 넣어둔 것일 텐데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보다는 제가 집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가 배는 신경 쓰였다.
내내 방송 준비한다고 전화도 안 받더니, 냉장고 정리용기에 정리해놓은 거며 유리병, 플라스틱 통, 냉장고 주인인 벨져조차 꺼내 봐야 알아볼 비닐팩에 유통기한과 내용물이 라벨지에 곱게 적혀있었다. 멀리서 흘긋 봐도 선명한 루이스의 글씨에 잠시 품고 있던 감정이 녹아내렸다.
“글쎄요. 제 건 아닙니다.”
“이렇게 두 분의 사생활이 탄로나나요! 이게 동거인한테 주긴 아까운.... 그.... 벨져씨가 집을 비울 때 마시려고 넣어둔 게 아닐까요. 혹시 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노골적인 떠보기에 벨져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 숨겨둔 연인이 있느냐, 묻는 것이지만 그 연인이 다름 아닌 벨져 홀든 그 자신이라는 건 아무리 당당한 벨져라도 대답하기 곤란했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후환은 두렵다. 벨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중에 루이스씨가 나오면 물어보시죠.”
“아, 이렇게 피하시는군요! 이 아름다운 우정!”
“아무래도 오래 됐으니까요.”
“또 이렇게 마음이 맞는 친구끼리 사는 것도 로망이 있죠.”
“아무렴 이렇게 같이 살면 집에 여자는 안 데리고 오게 되는 게 또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주거니 받거니 저들끼리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늘어놓던 두 사람이 허허 웃고, 아까 벨져의 편을 들었던 셰프가 벨져의 눈치를 봤다. 데이트할 때 자주 가고, 그 역시도 스트레이트가 아니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저 와인 되게 구하기 힘든 거예요.”
“아, 그런가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브랜드의 샴페인인데, 저게 지금 딱 27년된 거거든요. 진짜 구하기 힘든 거예요.”
27년. 벨져는 들어있던 와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연말도 연초도 아니니 루이스가 선물받은 와인인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이건.... 같이 먹는 건가요?”
“그것도 선물 받은 겁니다. 루이스씨가 여기저기서 받아오는 게 많죠.”
“인기인이군요?”
“뭐, 그래도 나쁜 친구는 아니니까요. 밤마다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야, 밤마다.... 외박을 자주 하는 편인가요?”
“아뇨. 잠은 꼭 집에 와서 잡니다.”
루이스의 신상 캐묻기가 되어가는 흐름에 벨져는 한 팔로 턱을 괬다. 루이스가 보고 싶다. 냉장고 따위 평소대로 해놔도 괜찮으니 어제 영상통화나 조금 더 길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산 지 반십년이 다 되어가도 루이스의 세심함은 어딘가 모르게 벨져의 핀트를 어긋나곤 했다. 자상하고 세심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다른 것보다 제게 신경을 써주었음 하는 마음을 토로해도 그때 뿐.
벨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리는 동시에 냉장고 탐색이 끝나고, 진행자들이 오늘의 요리 주제를 발표했다.
“이야, 범상치 않습니다! 밤에 먹어도 부담 없는 한 끼 식사는 그렇다 치고, 건강한 정크푸드는 대체 뭐죠?!”
“저는 제 입에 들어가는 이상 좋은 재료에 건강과 맛을 둘 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야 그렇죠. 그런데 이건....”
“전 제 취향에 맞게 해먹을 수 있으니까요. 맛있는 걸 해줘도 안 먹고 햄버거같은 걸 찾는 누구씨를 위한 절충안입니다.”
셰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벨져는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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