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하고 현관문의 벨이 울리는 소리에 방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토마스가 냉큼 일어났다. 인터폰에 보이는 익숙한 택배 아저씨의 모습에 토마스는 바로 현관을 향했다. 어제 시킨 신발이 온 걸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노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갈색 골판지 상자를 건넸다. 신발이라기엔 부피가 작아 토마스가 어리둥절한 사이 아저씨가 PDF를 꺼내 펜을 내밀었다.
"루이스 홀든씨 본인이신가요?"
"아, 아뇨."
"그럼 동료에 체크하고 서명해주세요."
토마스는 이름을 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루이스 홀든이라니. 루이스 홀든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홀든'이라니!!! 토마스는 황망히 닫히는 철문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박스에 붙은 택배 용지를 살폈으나 프린트 된 글자는 누가 봐도 Louis Holden님 이었다. 애써 부정을 해보려던 토마스의 여린 마음은 그렇게 알파벳 여섯 글자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토마스는 테이블 앞에 앉아 두 손깍지를 끼고 아치를 만들어 얼굴 앞에 두고 외출한 형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껏 진지한 얼굴에 평소엔 웃느라 눈에 띠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가 더해진 것도 모자라 뒤에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모 만화의 사령관 같았다. 그 모습에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두 홀든과 루이스는 현관에서 멈칫 발을 멈췄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심각한 걸까. 순간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지나갔다. 은퇴하나? 다른 팀으로 이적? 그것도 아니면 캐나다의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대체 뭐지? 그 정도로 토마스의 얼굴이 심각했기에 좀처럼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벨져마저 슬쩍 눈치를 보고 루이스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나마 우리 중 제일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건 너니까 빨리 가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 라는 눈빛에 루이스는 난처해하면서도 토마스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저어, 토마스. 무슨 일 있어?"
"선배."
"으, 응."
"말해봐요. 언제부터예요?"
"뭐가?"
루이스는 제게 따지듯 묻는 토마스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부터냐니. 루이스는 토마스가 흥분한 나머지 말을 다 생략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바람에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이글과 벨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토마스가 루이스의 어깨를 턱 잡았다.
"선배!"
"아,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형은 닥치고 있어요!"
늘 웃고 네네 응석을 받아주던 애가 화를 내니 무섭다. 이글은 저를 쏘아보며 소리치는 토마스를 향해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란 말인가. 이글은 흘긋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 골판지 상자를 보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 성인용품이라도 샀나? 그러지 않고서야 토마스가 아무리 루이스 일에 민감하다지만 이럴 리가 없었다. 아니지, 그랬다면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거나 부끄러워하고 있을테니 그것도 아니다. 이글은 토마스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가만히 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 문제의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선배! 설명해주세요!"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루이스는 잠시 상자를 보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토마스를 보곤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걸로 이런 헤프닝이 일어나다니. 하여간 어린 후배가 귀여워 살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웃으며 토마스가 한껏 멋내 세운 머리카락을 흐트리며 쓰다 듬었다. 토마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루이스의 손을 피하지 않아 금방 머리가 엉망이 됐다. 하지만 지금 토마스에겐 머리보다 루이스의 이 여유로운 태도가 더 신경쓰였다.
"악, 선배! 왜 그러는데요!"
"우리 토미가 귀여 워서 그러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야?"
"겨, 겨우라뇨!"
벨져는 영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사이좋은 토마스와 루이스를 지켜봤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언뜻 보니 이 상황을 이해한 건 루이스뿐이라 벨져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박스를 들었다. 내내 궁금해하던 이글도 벨져의 옆으로 와 상자에 붙어있는 배송 정보를 읽었다.
"루이스 홀든 님."
"흐응."
"푸하하하하하핫!"
이글은 소리내어 읽고는 바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콧소리를 길게 내며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 게 꽤 흡족해보였다. 벨져의 그 반응이 토마스가 내내 하던 고민에 설득력을 더했다. 셋 중에 누구인가 했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단 말인가. 토마스는 벨져의 그 여유작작한 태도에 발끈해 루이스를 향해 물었다.
"선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설마 진짜로...!"
"아니. 토마스, 그거 아냐."
루이스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순간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루이스는 신경도 안 쓰고 토마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마우스 새로 사는데 배송 정보에 성은 필수입력이더라고. 그래서 생각나는 거 중에 제일 짧은 걸로."
난리를 친 게 부끄러워질 정도의 사소한 이유에 토마스는 뭐라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이글은 아직도 숨이 넘어가라 웃다 못해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며 흐느끼는 중이었다.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흑역사 적립이다. 이글은 분명 앞으로 쿨타임이 될 때마다 이걸로 놀릴 것 이고, 인터뷰에서 말해버리거나 방송 중에 말할 지도 몰랐다. 그걸 깨닫자 마자 뺨에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토마스는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아났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달아나는 걸 지켜보다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웃느라 정신 없는 사람 대신 택배를 뜯었다. 에어캡에 싸인 제품이 제가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인 걸 보고 루이스에게 제품 상자를 건네자 루이스가 받아들고는 실실 웃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흥, 아직 넌 그거 쓸 급이 아닌데."
"어. 너 주려고 샀어."
"뭐?"
태연하게 대답한 루이스는 다시 뜯지도 않은 상자를 벨져에게 건넸다. 벨져가 쓰는 마우스는 게이밍 마우스 중에서도 비싼 순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웬만한 전자기기 하나 값 정도 되는 지라 다이무스가 경비로 처리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왜, 전에 스튜디오에서 인식 잘 안 먹는다며. 그래서 내 거 사는 김에 하나 샀지. 내 건 그 아래 있을 걸? 없어?"
벨져는 상자에서 신문지뭉치를 빼고 다른 마우스 하나를 더 꺼냈다. 제가 쓰는 것보다 더 가볍고 클릭 소리가 적은 루이스가 애용하는 모델. 그 마우스는 벨져가 루이스에게 프로즌 전용이라며 사준 것이었다.
"쯧, 이게 벌써 몇 년전건데 아직도 쓰냐."
"왜, 그거 프로즌 마우스잖아. 진짜 프로즌이 산 거 알면 회사에서 좋아라 하겠다. 프로즌 팬들이라면 다 하나씩 갖고 있는 거 아냐? 근데 내건 없어?"
이글이 눈물을 닦으며 박스 안을 기웃거렸다. 벨져는 이글을 쳐내며 문제의 골판지 상자 안에 마우스를 넣었다. 이글이 인증샷 하나만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들었지만 벨져는 개소리 하지 말라며 달려드는 이글을 발로 밀고는 방으로 향했다. 벨져가 이글의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린 바람에 그마저도 무산됐지만, 이글은 아쉬움에 머리를 긁적이다 루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저었다. 한참 웃다가 이글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신문지뭉치를 던졌다. 잽싸게 받아챈 이글이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쓰레기통으로 던져넣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팔을 얹었다.
"하여간, 노답새끼들이라니깐."
"너도 만만치 않아."
"하하. 그건 그래."
"오랜만에 치킨이나 시켜먹을까?"
"오, 좋지. 야! 토마스! 니네 형수가 치킨 쏜댄다!"
루이스는 이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과장스레 몸을 수그린 이글이 엄살을 부리며 그대로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고, 결국 한바탕 소동은 장을 보고 돌아온 아이작에게 혼나며 치킨을 뜯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아침부터 홀든A의 숙소는 분주했다. 부엌에선 아이작이 계란과 베이컨을 굽느라 바쁘고, 씻고 나온 토마스는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않고 늘어져있는 이글을 깨우느라, 벨져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며 아침부터 옷장을 뒤엎고 있었다.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안 돼?”
“미쳤어?”
벨져는 스키니진에 흰 셔츠, 그 위에 남색 스웨터를 입은 루이스가 침대에 앉아 이번 봄에 나온 불독인형을 끌어안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넌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그만 심통내. 모처럼 꽃놀이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더 아무거나 입을 수 없는 거다.”
루이스는 인형에 턱을 올리고 뚱한 얼굴의 벨져를 빤히 쳐다봤다. 이거야 원, 여자친구랑 쇼핑간 것도 아니고 벌써 삼십분 넘게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걸 보고 있으니 점점 기다리는 게 지루해졌다.
“베엘져어.”
“보채지 마라.”
벨져는 벌써 상의만 다섯 벌째 집어던지다 겨우 마음에 드는 게 나왔는지 얇게 스프라이트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걸쳤다. 봄이라곤 해도 저러면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꺼냈다간 벨져의 준비시간이 더 늘 것 같아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안에 가디건 입고, 위에 잠바를 입은 다음 벨져가 나중에 춥다고 짜증을 내면 가디건이나 잠바를 벗어주면 그만이니까. 루이스는 손등을 살짝 덮는 스웨터의 소매를 당겼다.
“선배!”
“응, 오오. 토마스, 신경 좀 썼는데?”
왁스로 머리도 만지고 몸에 딱 맞는 새 옷을 차려입은 토마스는 센스가 좋아서인지 새내기 대학생 같았다. 그 뒤로 따라온 이글은 스냅백에 껄렁하다 해야할지 화려하다 해야할지 애매한 차림이었지만 저게 다 명품이란 걸 안 후로 루이스는 이글의 옷차림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누가 맨날 입어서 때가 타고 목이 늘어진 런닝이 브랜드 제품이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냐만은, 또 티비나 보면서 비스듬히 누워 감자칩이나 먹고 있는 걸 보면 진하게 풍기는 백수의 향기에 옷이 묻힐 수밖에 없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표범무늬 모피코트를 두르고도 모델 포스가 나는 거라던가, 가끔 광고 찍으러 갈 때 핏이 사는 걸 보면 옷걸이는 참 좋은데. 사진 찍는 걸 보면 진짜 모델을 해도 될 것 같은 애가 이러고 있으니 가끔은 그쪽으로 안나간 게 안타깝기도 했다.
“뭐야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작은 형!”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나가!”
이글의 껄렁한 말투에 벨져가 문가에 서있는 토마스와 이글에게 짜증을 냈다. 흔히 있는 일이라 이글은 귀를 파며 들어오고, 토마스는 벨져와 이글의 눈치를 살피다 루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보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고,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씨는 뭐해?”
“도시락 싸고 계세요. 아까 슬쩍 보니까 샌드위치랑 과일 싸고 계시던데.”
“오오오.”
“오늘도 안 간대?”
“가겠어? 우리 없다고 대청소한대.”
루이스는 팬이 선물해준 쉬레와 프로즌의 스노우볼을 높이 띄웠다 잡아채는 이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옆에서 루이스의 오늘 옷차림이 교회 오빠 스타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차분하고 평범한 게 좋을 뿐이지만,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귀여운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기껏 공들인 머리를 망치면 안 된다 생각에 손을 멈췄다.
“너, 너, 저리로.”
이번에야말로 끝났나 싶었더니 벨져는 토마스와 이글이 들어온 뒤로 옷을 또 갈아입었다. 루이스는 허허 헛웃음을 흘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벨져가 이글이 가지고 노는 스노우볼을 뺏고 방에서 쫓아내는 걸 지켜봤다. 이래서야 나갈 수는 있을까. 사람들 붐비기 전에 가서 자리 잡고 싶은데. 루이스는 벨져와 눈이 마주치자 인형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꽃놀이 가자~. 옷 그만 갈아입고~.”
“그게 뭐냐, 어린애도 아니고.”
“네가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렇지. 씻기도 제일 먼저 씻어놓고.”
“너희가 너무 무신경한 거다. 선크림은 발랐냐?”
루이스가 대답이 없자 벨져는 한숨을 쉬고 화장대에서 선크림을 집어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옆에 토마스가 있는 걸 깨닫고 손에 크림을 죽 짰다.
“눈 감아.”
“그거 네 대사 아니잖아.”
“입도 닫아.”
루이스는 벨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남자치고 매끄러운 손이 뺨과 이마, 코와 턱을 지나 목을 매만지다 떨어졌다. 토마스는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저를 향한 싸늘한 벨져의 눈빛에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쭈뼛거렸다.
“어, 음. 전 아이작씨 도시락싸는 것 좀 도와드리러 갈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심술 부리지 마.”
“흥, 심술은 무슨.”
벨져는 선크림 뚜껑을 닫고 루이스의 손등에 남은 크림을 문질러 닦았다. 루이스는 그냥 손등을 문지르며 벨져가 대충 늘어놓은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꽃보러 가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혼잣말같은 그 말에 벨져는 선크림을 내려놓고 거울 너머로 루이스를 흘긋 쳐다봤다. 청승맞기는. 벨져는 옷장에서 인디언핑크색 브이넥을 꺼내 입고 위에 감이 톡톡한 감색 재킷을 걸쳤다. 이 정도면 옆에 섰을 때 흉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오늘의 루이스의 패션에 맞춘 벨져는 향수를 꺼내 루이스 옆에 다가가며 뿌렸다.
“아, 좀 밖에서 뿌리라니까.
“내가 내 방에서 외출준비를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그게 내 방이기도 하니까 문제라는 거지.”
“흐응, 싫어?”
“나한텐 너무 화려해서 안 어울려.”
벨져는 루이스의 대답에 흡족해져 길게 콧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당겼다. 단둘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래도 봄나들이로 꽃구경이라니, 이번 기획이 누구 머리속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제법 칭찬해줄만했다.
“와, 진짜 얼마만이지. 도시락 들고 피크닉 가는 거.”
“전엔 누구랑 갔었는데?”
“고아원에서 다같이.”
루이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퉁명스레 묻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오는 바람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아픈 구석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눈치를 살피자 루이스가 씩 웃으며 일어났다.
“됐어, 나가자.”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지만, 말을 잘못했단 자각은 있기에 벨져는 토씨 하나 못 달고 루이스를 따라 나섰다.
차를 타고 삼십분, 꽃이 만개한 공원에 도착한 토마스와 이글은 루이스와 이글이 주차하는 사이 알아서 찍으라고 쥐어준 카메라를 들고 신나서 붕붕 뛰다니다 갑자기 인터뷰를 시작했다.
“홀든A의 막강한 서포터, 마에스트로! 오늘의 의상 컨셉은 뭡니까?”
“어, 오늘은 글쎄요? 봄이니까 상큼한 새내기?”
“이야아, 죽인다~. 모델 뺨치네 우리 토마스!”
이글은 카메라로 토마스의 발끝부터 머리까지를 훑으며 토마스 주변을 뱅뱅 돌았다.
“아, 형. 그만해요. 쪽팔려.”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상큼한 우리 토마슈~. 우쮸쮸쮸.”
“형 자꾸 이러면 방에 뭐가 널려있는지 앨리셔씨 트위터에다 제보할 거예요!”
“그건 안 되지.”
얼굴이 붉어진 토마스가 빽 소리를 지르자 이글은 바로 표정을 굳히며 카메라를 노란 개나리가 잔뜩 핀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형들을 향해 돌리고 혀를 찼다. 하여간 벨져 홀든 저거저거 아주 이게 데이트인 줄 아나. 척 봐도 루이스와 맞춰입은 티가 나는 옷차림에 이글은 제 작은형이 정말 어찌 할 수 없는 노답이라 생각했다. 아이돌 좋아한다고 뭐라 할 게 아니다. 저게 사생팬이지. 그것도 순 악질.
이글은 얼마 전 벨져가 루이스의 팬사이트에서 조공이랍시고 선물로 보낸 스니커의 가격을 떠올리고 고개를 도리저었다. 그걸 알면서도 봐주는 저 새끼도 정상은 아니지만.
“뭐 하냐?”
“쉬레와 프로즌의 팬들을 위한 서비스 타임.”
“뭔 소리야.”
“아냐, 우리 방송의 18퍼센트는 형들의 그 끈적한 사이가 책임지고 있다고.”
사뭇 진지한 이글의 목소리에 벨져는 또 헛소리겠거니 하고 무시하려했지만 둔하기 짝이 없는 루이스가 말을 거는 바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에 미묘한 수치에 억양이 거세진 건 분명 착각이 아니겠지만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그야 물론 귀엽고 멋진 이글이 비중이지~. 이글이글이 몰라? 하, 역시 유행에 뒤쳐지시네~, 안 되겠어~.”
“그게 유행이 된다면 난 그냥 죽겠다.”
“하, 하하. 벨져 형이 그런 말 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요....”
“당연하지. 농담이 아니니까.”
벨져가 정색하고 말하자 옆에서 걷던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철썩 치고는 슬쩍 토마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루이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좋지만, 뒤통수가 따끔하다 못해 뒤에서 검은 오오라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게 아무래도 위험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루이스에게 오늘 도시락 메뉴를 화제로 말을 걸었고, 루이스는 기대된다면서 토마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평일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공원은 그닥 붐비지 않았다.
“선배 너무 인기 많은 것 같아요.”
“응?”
“우리 팀은 다들 인기가 많잖아요. 이글형도 그렇고, 벨져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게 무슨 소리야.”
뒤에선 벨져와 이글이 또 버럭버럭 하며 투닥거리고 있지만 그러느라 계속 걷는 두 사람과 거리가 제법 거리가 벌어졌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에 토마스는 속에 품고 있던 얘기를 터놓았고, 루이스는 가볍게 받았다.
“서포터는 눈에 띠는 포지션도 아니니까요.”
“우리 전적 살펴보면 네가 제일 승률 좋을걸?”
“하지만 그거랑 그건 다르잖아요.”
“다르지. 그지만 네 덕에 우리는 착실히 이기고 있어. 나도 벨져도 널 믿으니까 앞으로 가는 거야. 공방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토마스는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루이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서포터란 포지션이 눈에 띠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몫은 진입을 하는 이니시에이터나 딜러가 가져가지 마련이라 5인궁이라도 넣지 않는 이상 토마스는 카메라나 해설진의 주목을 받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걸 인정해줄 사람은 결국 팀원들밖에 없는데, 점점 모두가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의 톱니바퀴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서운했던 차였다.
“토마스. 우리가 말은 안 해도, 언제나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벨져도요?”
“하하, 당연하지. 뭐, 그건 저 녀석 마음이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널 빼겠다고 하면 당장 미쳤냐고 할 걸?”
토마스는 결국 한 대 맞은 이글과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도 토마스를 보며 마주 웃고, 그 사이를 벨져가 치고 들어왔다.
“아, 형!”
“형 소린 꺼내지도 마.”
“꽃 보러 온 거야, 싸우러 온 거야?”
“아, 같이 가! 쫌! 어휴, 드러워서 정말.”
이글이 잔뜩 투덜거리며 다가와 카메라를 루이스에게 넘겼다. 카메라를 받아든 루이스는 토마스와 벨져, 이글을 차례로 비추다 꽃이 만발한 공원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조그만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뒤돌아서 세 사람을 담기도 하고, 양 손이 자유로워지자 목 뒤에 깎지를 끼고 걷는 이글에게 농담같은 인터뷰 질문도 던졌다.
“요새 BJ로 버는 수입이 엄청나다면서요?”
“제가 워낙 멋져야 말이죠, 방송 치면 바로 나옴.”
“그게 그랑플람의 미친 고딩때문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글은 대번에 입술을 내밀었다. 그게 퍽 귀여워 루이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물었다. 이글은 주로 토마스와 듀오를 돌거나, 하랑이와 듀오를 돌거나, 아니면 그 둘과 삼인을 뛰곤 했다. 하랑은 피지컬이 뛰어난 원딜러인데다 센스도 있는 편이라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딜러인 이글과 함께 있으면 시너지가 엄청났다. 엊그제도 벨져와 듀오를 돌리다 세사람을 만나 진 루이스는 일부러 예민한 구석을 찔렀다. 진 다음에 벨져가 이게 다 뽀뽀를 안 해서 그렇다며 멱살을 잡고 달려든 복수였다.
“그건 걔가 바른 생활 어린이라 그런거지! 그랑플람에선 열두시 되면 걔 컴 전원을 빼버린다드라.”
“네가 하다가 술자리 데리고 오니까 그렇지.”
“쉿!”
이글은 큰일난다며 손사레를 쳤다. 어차피 다 편집해서 나갈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적당히 정도를 지키긴 해야 했다. 루이스와 이글이 노는 사이 벨져와 토마스가 음료수를 사서 돌아왔다. 이글의 첼시 콜라, 토마스의 민트초코 프라푸치노, 벨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루이스의 체리코크가 담긴 사각 트레이에 삼단 찬합이 두 개. 이글과 토마스, 벨져는 각각 트위터, 카스,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루이스는 세 사람의 촬영을 위해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오오오.”
“역시 아이작씨, 굉장하네요!”
“대단한데?”
“흐응. 나쁘지 않군.”
각각 다른 감상과 함께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다들 작성을 마친 후에야 각자 손을 뻗어 샌드위치와 유부초밥을 입에 가져갔다. 카메라는 잘 내려두고 먹는 동안 바람이 홱 불며 벚꽃잎이 흩날렸다.
“좋다. 날씨도 좋고, 꽃도 예쁘고 밥도 맛있고.”
“아이작씨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토끼랑 같이 보라고 갈 때 꽃가지 하나 꺾어가자.”
벨져는 이글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 동생을 쳐다봤지만 이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글의 말마따나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꺾어다주고 싶을 정도로 진풍경이라 혹했다.
“품위 없는 것들. 꽃가지 하나 보느니 차라리 휴일을 줘라. 쯧.”
토마스와 루이스는 관심도 없는 척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 벨져를 보고 둘이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뭐.”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치고 손에 묻지 않게 잘 싼 샌드위치를 집어든 벨져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루이스는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이글과 프라푸치노를 마시는 토마스를 차례로 훑어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파랗고 분홍색 꽃잎이 살랑인다.
“꽃놀이, 나오길 잘했네.”
루이스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하여간 가끔 늙은이같은 소리를 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긴장과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즐기는 루이스의 모습이 오랜만이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있는데 당연하지.”
“다음엔 아이작씨랑 다이무스씨도 같이 와요!”
벨져는 애먼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의 체리코크를 뺏어마셨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벨져는 체리코크를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다음주 수요일, 시간이 비니 다음 시즌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기분 전환삼아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아랑 아이작까지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지만. 벨져는 미리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날씨가 좋았다.
승리의 여운이 강하게 휩쓸고 지나간 홀든A의 대기실엔 평화로운 침묵이 감돌았다. 경기 후 이어진 아이돌 공연을 보겠다며 나갔던 루이스와 토마스, 이글은 무대 앞에서 적팀이었던 하랑과 제삼과 함께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야광봉까지 들고 놀다 카메라에 잡히기까지 했으니 그정도면 말을 다 한 셈이었다. 평소같았으면 다이무스가 바로 잡아왔겠지만 결승 경기도 끝났겠다, 그 뒤론 다른 게임의 결승이 이어지기에 사이퍼즈 결승에 참여했던 팀은 그대로 비는 시간이라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제레온과 함께 인터뷰를 하러 갔고, 제일 먼저 개인 인터뷰를 한 벨져 홀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루이스를 맞았다. 루이스는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경기 직전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동안의 긴장이 풀릴 대로 풀린 나머지 대기실에 오자마자 문자 그대로 뻗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벨져.”
“왜.”
“시상식까지 얼마나 남았지?”
루이스는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를 하며 물었고, 잡지를 뒤적이던 벨져는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쳐다봤다.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 눈 밑이 거뭇했다. 벨져는 혀를 차고는 옆에 앉은 루이스에게 한 마디했다.
“못 해도 한 시간. 잠깐 눈이라도 붙이던가.”
“카메라라도 들어오면 어떡해.”
“언제는 네가 카메라 신경 쓰기는 했냐?”
루이스는 시니컬한 벨져의 대답에 피식 웃곤 그대로 옆으로 몸을 누였다. 벨져의 허벅지를 베자 벨져가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기실 안의 텔레비전을 끈 뒤 루이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천천히 쓰다듬었다. 대기실 안은 온풍기를 틀어놓은 탓에 겉옷을 벗고 있어도 될 정도로 따뜻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은 시니컬한 말투와 달리 상냥해 절로 눈이 감겼다. 벨져는 자라는 듯 말도 걸지 않았고, 긴장의 끈을 놓은 루이스의 의식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빨려들었다.
벨져가 대충 훑고 있던 잡지를 전부 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질려갈 무렵,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벨져가 고개를 돌린 순간 피할 새도 없이 카메라와 마주했다. 익숙한 카메라는 대기실 상황을 찍는 회사 카메라라 벨져는 긴장을 놓았다. 분위기를 띄우거나 실없는 소리로 팬들을 관리하는 건 이글과 토마스의 역할이었고, 자신과 루이스, 다이무스는 대개 그들과 어울리는 정도였다. 다이무스는 워낙에 과묵한 편이라 따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루이스는 게임할 때와 생활하는 모습이 전혀 다른 점이 팬들에게 호평을 받는 편이었다. 벨져 홀든, 쉬레는 게임 스타일과 행동이 판박이라는 말을 들었고 벨져는 그것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게임 스타일은 그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이무스는 견고하고 탄탄한 플레이를 좋아했고 그만큼 냉철하고 신중한 사람인 동시에 보수적이었다. 역전의 한방의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아낼 배짱은 있으나 그만큼 유연한 사고를 기대하긴 어렵다. 벨져는 그 부분을 루이스가 보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이스는 근거리 캐릭터의 정석을 밟아가는 다이무스와 달리 유동적인 플레이를 했다. 프로즌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위기에 몰린 순간에 발휘하는 침착함을 무기로 빈틈을 파고드는 플레이에 강한 선수였다.
대중은 이글이 그저 제멋대로 날뛰길 좋아하는 딜러라 평했지만 이글이 무모해보일 정도의 진입을 하는 건 두 사람이 그만큼 앞을 보고, 마에스트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서포터가 커버를 해준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근거리 딜러의 역할을 맡고 있는 벨져는 제 팀이 시즌을 지배하는 것이 그 견고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프로즌'과 '쉬레'의 연계지만.
벨져는 카메라를 보며 검지로 루이스를 가리켰다. 아마 이걸 쓴다면 화면 아래엔 우승 후에 맛보는 꿀잠 같은 자막이 실릴 것이다. 벨져는 더 말하는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미리 공지된 밸런스 패치는 선수들은 물론 유저들 전체가 술렁일 정도로 과격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근거리 딜러로 쓸만한 캐릭터들이 하향당했는데 해금 레벨이 낮은 원거리 딜러 캐릭터들이 상향을 받으니 근딜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벨져는 상향을 받은 원거리 캐릭터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솔로로 공방을 도는 것과 5명이 하는 게임은 다르다. 그것이 정설이었지만 홀든A의 딜링은 이글보다 벨져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정확한 건 또 부딪혀봐야 알겠지만 이래서야 근딜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건 명확했다. 더구나 다이무스의 은퇴 얘기가 슬슬 나오고 있으니 다음 시즌의 홀든A는 지금과 다른 모습일 것이다. 벨져는 이렇게 되면 오늘 경기가 홀든A의 마지막 우승이 될지도 모른다는 글을 읽고 페이지를 종료했다. 홀든A는 쉬레가 캐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뭣도 모르는 소리.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그 글을 쓴 사람이 경기는 물론 사람도 볼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벨져는 자신이 우위를 점하는 싸움을 좋아했다. 언제나 승리는 제 것이었으며 근접에서 붙었을 때 나올 수밖에 없는 실력의 차이를 즐겼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다.'라고 하는 치어풀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캐릭터가 하향을 당하네, 상향을 받았네 하는 것은 공고한 쉬레의 실력을 깎아내릴 수 없다. 그저 앞으로 공방에서 근접전을 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벨져의 생각과 달리 카메라는 벨져가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물러가지 않았다. 어차피 몇시간씩 찍어도 나가는 건 고작 몇 분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에 벨져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오면 방송분량은 나오겠지만 벨져는 루이스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 분 후, 이글이 앨리셔랑 악수하고 사진도 찍었다고 소란을 떨며 대기실에 들어왔다. 그 소리에 루이스가 눈을 뜨자 이글이 날아든 잡지를 맞으며 괴상한 소리를 내고, 벨져가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짜증을 냈다.
“아, 작은형! 쫌!!”
“닥치랬지.”
“됐어, 나 깼어. 몇 시야?”
루이스가 일어나자 벨져가 이글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글은 샐쭉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고, 루이스는 벨져 다리가 저릴까 그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아니나 다를까 벨져는 루이스의 손이 닿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깨우지.”
“흥, 네 머리 하나가 얼마나 무겁다고. 놔, 그냥 둬.”
루이스는 아직 잠에 취해 고개를 끄덕이며 벨져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얹고 있을 땐 몰라도 막상 떼면 그동안 눌렸던 다리에서 전기가 찌르르 오르기 마련이라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고 몸을 비틀었다.
“너, 익...!”
“우리 벨져 빨리 나아라~.”
태연하게 다리를 주무르며 배싯 눈웃음을 치는 루이스를 보며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고, 앞에선 이글이 루이스를 응원하며 되도 않는 노래를 불렀다. 벨져는 팔을 뻗어 루이스의 목을 걸었다. 다소 과격한 헤드락에 루이스는 벨져의 허벅지를 때리며 항복을 외쳤지만 심통이 난 벨져는 루이스를 놓아주지 않았고, 루이스는 벨져의 허리에 팔을 둘러 메달려 벨져의 배에 얼굴을 부볐다.
“또 그럴 거야?”
“당연하지.”
루이스를 제압한 채 벨져가 잠시 시간을 주고 묻자 장난을 치다 미끄러져 거의 소파에서 내려간 루이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가 그대로 손을 놓자 루이스는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글은 이제 루이스에게 붙어 자기 핸드폰을 들이밀며 자랑을 해댔고, 벨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스는 이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시 소파에 앉았고, 벨져는 냉장고에서 음료수 두 캔을 꺼냈다. 꺼내자마자 이온음료 캔을 따 마시며 소파에 다가가자 루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마시던 걸 준 벨져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탄산음료의 캔을 땄다. 반쯤 마시고 루이스에게 주자 루이스가 캔을 휘휘 흔들다 들이켰다. 벨져는 쉬지도 않고 쭉쭉 들이키는 루이스를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자 한숨을 쉬곤 등을 두드려주었다. 탄산음료를 마실 때면 늘 사레가 걸리면서 왜 꼭 탄산을 고집하는지.
벨져는 루이스의 등을 쓸어주다 시상식하러 가자는 소리에 일어났다. 루이스는 눈가가 빨개져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벨져는 늦게 일어난 루이스를 기다려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맞잡는 루이스의 손은 서늘해 온기에 흐물흐물해진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다음에도 이기자.”
“그래.”
루이스는 언제나 경기를 이기고 나면 다음을 기약했다. 벨져는 다음이란 막역한 기약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루이스의 말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다음 제 손을 꼭 잡아오는 그 뿌듯함이 좋아 벨져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모두 가질 것이니, 선택은 없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승자로서 단상에 서야 할 시간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실책. ‘쉬레’ 벨져 홀든은 무력하게 아군의 HQ타워가 부서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고작 8강에서, 그것도 클린스코어로 패배란 홀든 attackers는 물론 벨져 홀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아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제 옆에 앉아있어야 할 그가 선수 부스 밖 관객석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팀원들의 얼굴과 함께 끝자리에 본 적도 없는 놈이 하나 앉아있는 게 보였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며 뒤돌아서는 게 보였다. 벨져는 해설들이 뭐라 떠들건 상관하지 않고 일어섰다. 뭔가 잘못됐다. 이겨야 하는 게임이었고, 그는 게임을 끝내고 무심한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함께 승리를 기뻐해야 했다. 루이스. 프로게이머 ‘프로즌’의 자리는 ‘쉬레’의 옆이었다. 벨져는 삼년이 넘는 시간동안 루이스와 호흡을 맞췄다. 그만큼 자신의 플레이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벨져는 다급하게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관객석과 선수를 가로막은 방음 부스의 벽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는 계속해서 멀어졌고 벨져가 루이스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는 찰나 아직 끼고 있던 헤드셋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벨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프로즌의 주캐, ‘Ice’의 패배 보이스였다.
‘Ice’가 두 사람에게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벨져에겐 첫 패배였고, 루이스에겐 프로게이머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Ice를 들고 져버렸다. 벨져는 이게 루이스 은퇴 후 첫 경기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있을 수 없다. 이젠 내가 뒤를 봐줄 수 없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며 쓰게 웃는 그에게, 너에게 기적을 선물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벨져였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루이스가 없는 첫 경기에서 ‘Ice’로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너무나 잘 알았다. 루이스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Ice’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루이스와 ‘Ice’를 연관 지어 전장의 영웅, 역전의 희망이라고 부르곤 했다. 루이스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쑥스러워했지만 벨져는 그 별명이 루이스와 ‘Ice’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Ice’를 들고 루이스가 보는 앞에서 져버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있을 수 없는 스코어에 헛웃음을 흘렸다. 견딜 수 없는 굴욕감과 분노에 방음부스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루이스를 잡으러 나가려했지만 부스엔 문이 없었다. 사방이 막힌 투명한 상자 안에 갇힌 벨져는 결국 루이스가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조금 전까지 있었던 팀원들과 스태프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루이스가 은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벨져는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한낱 꿈.
그걸 깨닫자 번쩍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천장,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 벨져는 바로 핸드폰을 찾아 홀드 버튼을 눌렀다. 오전 5시 15분. 마지막 게임을 하고 잠들기 전이 3시였으니 두 시간쯤 잔 셈이다. 답답하게 막혀있던 숨을 내뱉은 벨져는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로 훌쩍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곤히 잠든 룸메이트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루이스.”
잠기운에 잠긴 목은 깔끔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끝이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벨져는 상관하지 않고 루이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성인 남자 둘이 함께 눕기엔 좁은 침대였지만 루이스는 잠결에도 몸을 모로 뉘어 벨져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벨져는 냉큼 자리를 차지하곤 루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느껴지는 바디샴푸의 청결한 냄새와 따끈한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간절했던 그의 체취에 불안으로 날뛰던 가슴 속의 폭풍이 가라앉았다.
“루이스.”
한 번 더,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자 루이스가 잠투정을 부리듯 무어라 웅얼거렸다. 벨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콧잔등과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 맞추곤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지 않으면 쉬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취해서 고백하고 사귀게 된 지 고작 세달 밖에 안 된 연인이자 누구보다 믿음직한 파트너.
벨져는 루이스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건 전부 루이스가 은퇴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한계가 오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 말이 은퇴의 밑밥이란 걸 모를 정도로 벨져는 멍청하지 않았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은 필요 없다. 벨져는 자신의 팬들이 저를 위해 드는 치어풀을 떠올렸다. 사석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 꼭 맞는 말이었다. 벨져는 제게 팔을 둘러오는 루이스의 잠든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직 그를 그리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