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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아무리 졸리고 피곤해도 출근은 해야 한다. 오늘도 착실하게 소시민의 삶을 시작한 루이스는 별 다를 거 없는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서점으로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을 빵을 한 덩이 사고 출근.
루이스는 서점의 문을 열고 일할 때 입는 셔츠와 가디건으로 갈아입은 뒤 서점 뒤 테이블을 정리하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서점은 한가롭다. 아는 사람, 혹은 꾸준히 찾는 사람만 오는 서점에서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소소하게 자리한 서점은 사실 트와일라잇 광장에서 가장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가끔 책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읽긴 하지만 추천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기야 이 시국에 트와일라잇까지 온 사이퍼가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바로 옆에 있는 홀든 은행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이퍼들이 들락거리지만 서점은 한가롭기 그지 없었다. 루이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하루가 갈수록 몸이 예전같지 않다. 여기저기가 삐걱거리고, 만성 수면 부족으로 카페인 없이는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모처럼 볕이 잘 드는 날씨에 몸이 더 나른했다. 인간의 삼대 욕구는 수면욕과 식욕, 성욕이라고 했던가. 안 그래도 요즘은 지치는 일 뿐인데 한밤중에 잠도 안 자고 돌아다녔더니 잘 시간을 뺏기는 건 물론이요, 거기에 머리까지 쓰느라 배로 힘들었다. 하긴, 벨져 홀든을 상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어제는 정말 생각나는 게 거기밖에 없어서 그랬지만 벨져의 말대로 장소를 옮길 필요는 있었다. 뒤에 보이는 트리비아, 방금 막 리스폰 기어에서 내려와 무전으로 들리는 이글의 목소리에 떠오른 게 거기였을 뿐이다.
딱히 거기라야 할 이유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거기까지 오가는 시간과 체력이 아깝다. 게다가 제 아무리 잘난 벨져 홀든이라도 일단은 연합의 세력권인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 중 누군 뭐 안전하겠냐마는,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이미 한 차례 아무것도 아닌 조무래기를 깔봤다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벨져를, 그 아름답고 고고한 남자를 떠올리다가 눈을 비볐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걸 봐선 아무래도 여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얼어죽을 걱정이나 난방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좋지만, 더위와 쨍한 햇살은 견디기 힘들다. 여름은 루이스에게 가장 가혹한 계절이었다. 올해는 더 더울 거라는데 또 어떻게 여름을 나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나고 자란 런던의 뒷골목에 해가 잘 들지 않아서였을까. 추위를 견디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한여름 뙤약볕에는 몸이 맥을 못 추고 늘어졋다. 거기다 햇빛에 노출된 피부는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울긋불긋하게 물들어서 여름에도 몸을 가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편해서 입고다니던 후드는 이제 떼어놓을 수가 없는 필수품이 됐다.
다들 해수욕이다 뭐다 하며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놀러갈 때도 루이스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벨져는 더 피부가 희고 창백한데 여름엔 어떨까. 그 성격과 외모에 양산이라도 쓰고 다닐지 모른다. 분명 화려한 레이스 양산을 쓰겠지. 워낙 하얗고 예뻐서 흰 색이나 아이보리 색이 어울릴 텐데.
지루하기 짝이 없는 뻔하디 뻔한 로맨스 소설을 읽던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았다. 모든 걸 가진 귀족 남자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활발하고 선한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차고 넘쳤다. 흔히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는데, 신데렐라는 원래 귀족 가문의 여성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왠지 그가 이 거리를 지나갈 것만 같다. 그렇게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데 꽃 파는 아이 하나가 서점 문을 열었다.
“저, 저기….”
“응? 무슨 일이니.”
“이거…! 엄청 예쁜 분이 언니 갖다드리라구…!”
뺨이 발갛게 물든 데다 눈이 반짝이는 여자아이가 루이스에게 수선화 한 다발을 내밀었다. 엄청 예쁜 분. 머릿속을 스쳐가는 인물에 루이스는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그리구 이것두요!”
“응, 고맙구나. 다른 말은 안 하셨니?”
루이스는 꽃을 내려놓고 앞치마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열한두살쯤 됐을까, 자매가 아니냐고 더러 묻는 세탁소의 아이 또래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작은 쪽지를 건넸다. 두 번,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접힌 쪽지에선 희미하게 꽃향기가 났다. 이쯤 되면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보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것도 없었다.
“어, 음…. 그지만 이건 비밀인데….”
“나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던?”
“아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그게….”
시선을 피하는 아이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 루이스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아이를 다그칠 생각은 없다. 대신 아이의 모자 위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 먹었니?”
“아뇨, 아침 일찍 꽃을 따느라….”
“그럼 같이 먹을래? 혼자서 먹긴 심심했거든. 그래봤자 빵이랑 차뿐이지만.”
“네!”
능력자도 아닌 아이가 여기까지 꽃을 팔러 왔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정말 형편이 어렵거나, 아니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스파이거나. 벨져가 뭘 보고 고른 건지 몰라도, 어쨌거나 아이는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낡은 원피스와 앞치마. 그것마저 꽃을 꺾느라 흙으로 더럽히고, 제 때 먹지도 씻지도 못한 데다 음식을 보자마자 기대감에 눈을 빛내는 것까지. 어쨌거나 루이스는 거리의 고아 출신이었고, 그런 것들을 구분하는 눈만큼은 확실했다.
차를 우리고 컵에 담아 내가는 동안 아이는 신기한 듯 서점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루이스는 작은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고 말을 붙였다.
“읽어보고 싶니?”
“아, 아뇨! 읽을 줄도 모르는 걸요. 그 예쁜 분도 제일 먼저 글을 읽을 줄 아냐고 물어보셨고…. 앗!”
손사래를 치던 아이는 해맑게 웃다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밀을 말해버리고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는 빵을 잘라 큰 쪽을 아이에게 건네며 웃었다.
“괜찮아. 비밀로 할게. 약속.”
“정말이죠…?”
“그럼. 별 것도 아닌걸.”
“휴, 감사합니다. 아, 언니도 예쁘세요! 정말로요! 아까 그 분은 장미같구, 언니는 물망초 같아요! 더 잘 팔리는 건 장미지만요!”
“그래. 고마워.”
들어올 때만 해도 간신히 말을 꺼내던 아이는 말이 많고 활달했다. 천성이 밝고,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고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가 빵을 손에 쥐자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천천히 먹으렴. 차도 좀 마시고. 너무 뜨겁니?”
“아뇨! 괜찮아요! 뜨거운 물이 얼마나 귀한데요!”
“그러다 체할라.”
루이스는 아직 김이 오르는 아이의 컵을 들고 후후 불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에게 컵을 건넸다.
그야 물론 보낸 애가 안 돌아오니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도 벨져가 지켜보고 있다. 직접 행차하지 않는 이유는 단연 옆 건물의 그 때문이었다. 이글이 아무리 바닥에 드러눕고 떼를 써도 절대 빌려주지 않는 홀든 가의 장남.
다이무스는 꽤 젠틀한 신사였고, 서점에도 자주 들르는 단골 고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벨져보다야 다이무스의 호의를 사는 게 낫고,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다이무스에게 빚을 지우는 게 이득이지만 어쨌거나 한 번 거래를 시작한 이상 그를 팔아넘길 순 없었다. 못 할 건 또 뭐 있겠냐마는, 그랬다간 정말 그와는 끝장이었다.
답을 아이 편에 돌려보내야 할까. 루이스는 창밖을 흘긋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부러 글을 못 읽는 아이를 보낸 건 단 한 줌의 정보도 흘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마 제대로 전해주는지도 지켜봤겠지. 아무렴 벨져 홀든이 일을 그렇게 허술하게 할 리가 없다.
루이스는 아이가 빵을 먹는 사이 창을 등지고 서서 쪽지를 폈다. 코어레너드의 럭셔리 호텔 이름과 네자리 숫자. 루이스는 객실 번호만 외우고 일어나 물을 끓이느라 썼던 화로에 쪽지를 던져넣었다.
“언니는 안 먹어요?”
“응? 아, 괜찮아. 더 먹을래?”
“정말요?”
“가져갈래?”
조심스럽게 묻는 아이의 앞치마가 불룩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먹을 걸 숨기는 건 나중에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배가 주린 와중에 생각나는 가족 때문이다. 활짝 피는 아이의 얼굴에 루이스는 빵을 잘 싸서 봉투 안에 넣고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심부름 값 대신이라고 생각해.”
“그, 그지만…. 꽃 값도 후하게 쳐주셨는 걸요.”
“괜찮아.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루이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냥 쪽지를 배달시키고 말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아이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나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벨져는 너무 예뻤고, 흔치 않은 일을 접한 아이는 순전히 뿌듯한 마음에 자랑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었다. 꽃 파는 아이, 신문 파는 아이, 구두 닦는 아이. 거리에 넘쳐나는 아이들 틈새로 번지는 소문은 또다시 그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었다.
“비밀로 해줄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 가족한테도,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꽃들한테도요?”
“응. 사실, 언니랑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거든. 언제 어디서나 감시하고 있어서, 잘못하면 너도 네 가족들도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알겠니?”
짐짓 심각한 척 아이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속삭이자 겁을 먹은 듯한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걸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괜히 겁을 준 것 같아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눈을 돌리려는 순간 꼼질락거리는 아이의 손과 작은 잇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 한 거짓말, 조금 더 보탠들 어떠랴 싶어,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동생이 있니?”
“네, 이제 다섯살이구…. 몸이 아파요….”
“네가 동생을 사랑하는 것처럼, 언니도 그 분을 사랑한단다.”
“…정말요?”
아이들은 감정에 예민하다. 아이의 질문에 뜨끔한 루이스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직접 만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그 분의 말을 전해주겠니?”
루이스는 최대한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말하려 애썼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읽었던 소설의 정신 나간 여주인공이 새를 붙들고 하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하는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이 나이 소녀들은 으레 동화속에 나올 법한 로맨스를 동경하는 법이니까. 슬픈 척 눈을 깜빡이자 아이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예요!”
“고마워.”
루이스는 아이를 한 번 안아주고 일어났다. 오래 쪼그려 앉은 탓에 다리가 저렸다. 어떻게 이게 통했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금단의 사랑을 하는 가련한 여주인공 보듯 힘내라며 서점을 나섰다.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뒤에서 손을 흔들던 루이스는 의자에 털석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의욕이 넘치는 것도 문제다. 아이가 벨져에게 힘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벨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조금 궁금했지만 당장은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택도 없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걸 가지고 또 한 소리 할 지언정 그도 이해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가벼운 아이들의 입을 믿을 순 없을 테니까.
한 차례 폭풍이 몰아친 것 같다.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빵부스러기와 컵 두 개, 그리고 서점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와 눈이 쨍할 정도로 노란 수선화가 남았다. 오늘 아침에 꺾어왔다는 말을 증명하듯 물기가 어린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가장 예쁜 유리병을 찾아 반쯤 물을 채우고 꽃을 꽂아 햇볕이 가장 잘드는 창가에 병을 놓았다. 싱그러운 여름의 향기가 오래된 종이로 가득한 서점을 채웠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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