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릭루이] 햇살과 나그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지요 암, 그렇고 말고.
한산한 금요일 저녁, 루이스는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책을 덮었다. 이 시간쯤 되면 모두들 집에 돌아가거나 펍으로 향하기 마련이라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하긴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누가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겠냐마는. 최근 연합의 일로 바빠서 서점에 신경을 못 썼던 터라 자청한 일이었지만 인적이 드문 거리에 이따금 지나가는 커플을 보자니 속이 쓰렸다.
공성이 아니면 만날 기회도 적은 연상의 연인이 떠오르자 한숨이 먼저 새어나왔다. 딱히 연상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귀기로 한 지 한 달, 일분일초도 떨어져있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에겐같이 있을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매번 먼저 찾아와주는 게 미안한데, 거기에 이번 주말엔 보기 힘들겠다고 말할 때의 그 기분이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루이스에겐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처럼 그 역시 질려버리는 건 아닐까.
루이스는 제게 뻗은 손의 온기와 그의 미소를 기억했다. 그녀 역시 그랬지만, 그 역시 제게는 너무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루이스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신난 강아지처럼 다가온 그의 얼굴에 실망이 번지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감추던 모습에 루이스도 마음이 아팠다.
사람에게 할 비유는 아니지만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키우는 애완견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덩치는 크지만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개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다며 빈 손을 보였을 때 풀이 죽어 귀와 꼬리를 늘어뜨리는 모습이 자꾸만 그와 겹쳐졌다. 차라리 짜증을 내거나 같이 있자며 투정을 부렸으면 이렇게까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따스하고 햇살같은 사람. 루이스는 토니의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와는 어울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햇살이 가득한 풍요의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그, 릭 톰슨은 밝고 친절했다. 유복하진 않을지언정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 그의 능력조차 하나의 선물로 여기고 그의 삶을 즐긴 사람. 전쟁과는 동떨어진 그 분위기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릭은 루이스가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가진 사람이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시기하거나, 동경하거나. 루이스는 그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경에 가깝겠지만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산더미라 그에 대한 감상은 차차 잊혀졌다.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릭이 귀를 붉히고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왔을 때도 그랬다. 그 때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트리비아의 일로 지쳐있어서 미안하다는 답밖에 돌려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릭은 기다려주었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에 전장에 끌여들여서도, 마음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뀐 건 그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엔가 밤의 여제가 손을 잡아 하늘 위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처럼 나타나 모든 걸 체념한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그는, 릭은 그런 사람이었다. 두렵지 않았냐고, 죽을 수도 있었다고 소리 치자 릭은 웃으며 답했다.
“두려웠소.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그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더 무서웠소. 오늘 이 시간에 그대를 구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후회했겠지. 루이스. 나는 후회하지 않소. 내 무모함이 그대를 살렸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오.”
맞잡은 손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이 어릴 적 런던의 뒷골목에서 상상한 맑은 햇살같았다. 일 년에 몇 번, 빛이 들까말까한 그늘진 빈민가와 추운 거리에서 어렴풋이 꿈꿔온 구원이 여기 있었다. 릭이 울지 말라며 손을 뻗기까지 루이스는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그 손길마저 따스해서, 루이스는 제 뺨을 덮은 그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 날 이후로 릭은 매일같이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왔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귄다고 특별히 하는 건 별로 없지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릭은 별다른 재주 없이 루이스를 웃게 했고, 한결같이 자상했다. 침대 위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자상한 면을 이용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쁘기라도 했으면 일에 치여 잠시나마 잊었을 텐데 텅 빈 거리와 서점은 루이스의 마음을 죄책감으로 무겁게 짓눌렀다. 책임을 다하려 한 것 뿐인데, 오히려 죄를 짓는 기분이다.
정리할 것도 없는 책장을 괜히 눈으로 훑는데 서점 위층에서 갑자기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훔쳐갈 거라곤 먼지 쌓인 책들밖에 없으니 도둑은 아니고, 그렇다면 자신을 노린 기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대체 어느 암살자가 이렇게 대놓고 침입을 알린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에 얼음 결정을 만들었다 털어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창고로 쓰는 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조심히 문을 열자 어둠 속에 익숙한 뒤통수가 들어왔다.
“릭?”
“아, 그, 루이스. 그, 이건.... 그러니까.... 으악!”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 묻자 릭이 말끝을 흐리며 돌아봤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불을 밝히려는데 릭의 비명에 양철통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이어졌다. 등을 밝히자 청소 도구들 사이에 널브러진 릭이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광경에 헛웃음을 흘린 루이스는 등불을 올려놓고 문을 가로막은 빗자루와 대걸레를 한 데 모아 치우고 릭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머리에 붙은 먼지를 털고 있으니 릭이 꼭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멋쩍게 웃었다.
“집에 먼저 들렀는데 없길래 놀래켜주려 했소만....”
“그러다 엇갈리면 어쩌려고요.”
“아, 그 생각은 못 했소. 이제 슬슬 퇴근할 시간이지 않소?”
“그렇긴 한데 누구씨가 일을 벌려주셔서요.”
짓궂게 말하자 당황한 릭이 그가 어지른 창고를 둘러봤다. 양동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걸 보고 울상을 짓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데 그 변화무쌍한 반응이 꽤 귀여웠다.
“하아. 미안하오. 그러려던 건 아닌데.... 끄응. 내가 어질렀으니 여긴 내게 맡기시오.”
“하하, 농담이에요. 어차피 내일 또 쓸텐데. 당신이야말로 일은 어쩌고.”
“루이스.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소.”
“...릭”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왠지 모르게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이 입 안이 간질거린다. 잠시 토라진 척 입을 비죽이던 릭이 해맑게 웃었다. 서른이 넘어서 저렇게 소년같이 웃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루이스는 릭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성큼 다가오던 릭의 발에 양동이가 채였다. 그 사소한 해프닝마저 웃음이 나, 루이스는 오늘 여러 번 그를 괴롭히는 양동이를 한 쪽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머리를 긁으며 창고를 나온 릭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맞췄다.
실로 그답게 상냥하고 간지러운 키스는 곧 어른의 키스로 바뀌어 눈을 감은 채 키스에 집중하던 루이스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 역시 피곤할 텐데 이렇게 달려와 준 게 고마워, 루이스는 릭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뗐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까....”
“같이...!”
“얼마 안 걸려요.”
가볍게 뽀뽀하고 내려온 루이스는 밖에 내놓은 가판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갔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내려온 릭이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기다리는 바람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서점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빼먹은 게 없나 둘러본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전등을 껐다. 등 뒤에서 껴안고 얼굴을 부비는 그가 사랑스러워 몸을 돌리자 릭이 입술을 내밀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릭.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소.”
“공간을 열어줄래요?”
“물론이지.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집으로 가요.”
발밑에 게이트가 열리고, 루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릭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나 그렇지만 참 유용한 능력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루이스는 릭과 함께 그의 집에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 안에는 저녁 노을이 넘실거리고, 루이스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제게는 잘 시간이지만 릭에겐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릭. 저녁은요?”
“그대는 먹었소?”
“...아니요.”
“루이스.”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답하자 릭이 짐짓 엄하게 타이르듯 얼굴을 찡그렸다. 불규칙한 식습관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럴 때면 꼭 꾸지람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일단 빵이나 시리얼이라도....”
“릭. 그것보단 그냥 같이 눕지 않을래요?”
부엌을 향하던 릭이 걸음을 멈추고 루이스를 돌아봤다. 침대에 앉아 나름 잘 먹히는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릭의 갈등이 한층 깊어지는 게 보였다.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릭의 다리 옆으로 큼지막한 리트리버가 꼬리를 흔들며 루이스를 덮쳤다.
“으왓. 안녕 새라. 읏, 간지러워. 핥지마.”
“새라!”
“하하, 이러다 릭씨가 누울 침대가 없겠는데요. 아 따뜻하다.”
격하게 반기는 리트리버를 쓰다듬으며 드러눕자 릭이 억울해 죽겠단 얼굴로 다가왔다. 그를 놀려먹는 게 재미있다고 하면 화를 낼까. 루이스는 웃음을 꾹 참고 개를 끌어안았다. 꼭 그 주인처럼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는 유독 루이스를 좋아했다.
“루이스으. 정말 이럴 거요?”
“뭘요?”
“.....”
말문이 막힌 릭의 얼굴이 붉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 루이스는 장난을 그만 두고 상체를 일으켜 낙담한 채 울상을 짓고 있는 연인에게 키스했다.
“섹스할래요?”
“.......”
대답 대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귀여웠다. 루이스는 웃으며 일어나 릭의 손을 잡아 끌었다. 놀아달라고 조르는 개를 떼어놓고 욕실에 들어가자 밖에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람이 고프긴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를 벗고, 화장실 문에 릭을 밀치며 입술을 맞추자 그의 손이 루이스의 허리를 짚고 티셔츠를 말아올렸다.
“루이스. 사랑하오.”
“윽......”
키스 뒤에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하는 고백에 루이스의 얼굴에 열기가 번졌다. 쑥쓰러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릭이 목에 입을 맞추며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그대도 그렇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소.”
얼굴을 가리고 숨고 싶을 정도로, 릭은 애정 표현에 솔직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자 고개를 숙여 아래서 올려다보며 눈을 빛내는데, 그의 그 애처로운 얼굴에 루이스는 오늘도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사랑해요.”
“응. 고맙소. 덕분에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오.”
“릭....”
루이스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연인과 눈을 맞췄다. 넘치는 사랑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당신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또 사랑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걸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릭이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몇 번을 되새겨 생각해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축복인지. 루이스는 입 안에서 얽히는 진한 키스에 그를 마주안았다. 이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에 숨이 차올랐다. 이 사람의 온기가, 맞닿은 피부의 감촉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좋았다.
사랑스러운, 따스한 햇살에 꽁꽁 싸맨 외투를 벗는 나그네가 된 것 같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0) | 2016.08.01 |
---|---|
[티엔루이] 위험한 사람 (0) | 2016.07.10 |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5 (0) | 2016.06.19 |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4 (0) | 2016.06.17 |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L3 (0) | 2016.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