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피부를 긋는 것만이 자해는 아니다. 루이스는 언제나 괜찮은 척 했다. 그 '척'에 넘어가지 않는 건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 둘은 차라리 제가 손목이라도 그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루이스는 안 그래도 흉한 몸에 더 흉터를 늘릴 생각이 없었다. 모진 학대에 시달린 등은 홀든 가에서 지내는 동안 점차 나아갔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보기 흉했다. 그나마 반반하게 생겨 팔이며 다리, 얼굴같이 보이는 곳은 피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등을 내보일 일은 흔치 않으니까.
루이스는 셔츠를 입으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며 기뻐하는 것도, 그를 마주하는 것도,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전부. 결코 돌아올 리 없는 희망에 매달려 애걸복걸하고, 자신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모는 이 관계를 그만 끝내고 싶었다.
변함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벨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하루 아침에 저를 모질게 버려두고 떠났던 것처럼 제 얼굴따위 보기도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다. 차라리 그 태도가 계속 이어졌으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무관심과 외면 속에 덧난 상처가 아팠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저를 보는 그의 그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머금을 때면 독인 줄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혀끝에 담기는 지독히도 달콤한 독. 넘기자마자 몸 속을 태우고, 끝내는 파멸에 이르게 할 걸 알면서도 그 실낱같은 연민에 기대하게 된다. 다시 한 번, 헌신짝처럼 버려질 희망을 꿈꾸고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이 지독한 굴레.
그래서 루이스는 절대 벨져 앞에서 셔츠를 벗지 않았다. 끔찍한 학대의 흔적을 보면, 그리하여 그가 어린 시절의 그 소년을 떠올리고 값싼 동정을 베풀기라도 할까봐. 그 자그마한 연민에 매달려 놓을 수 없게 될까봐.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루이스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잡았다. 아직까지도 '루이스'를 존재하게 하는 건 그 시절의 벨져였다. 너는 아직도 나를 죽이고 살리는구나.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무릎을 당겨 모았다. 무릎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이 감은 눈 아래 펼쳐졌다.
그 날 벨져는 주름이 들어간 흰 셔츠에, 진한 녹색 비로드 리본을 맸다. 리본과 같은 색 반바지를 입고, 풀밭에 앉아 손바닥에 새로 생긴 상처에 눈살을 찌푸리곤 손수건을 감아주던 소년의 목소리, 표정 하나까지 또렷했다.
[약점을 보여선 안 돼.]
[도련님에게도 그런 게 있나요?]
[글쎄. 뭐일 것 같아?]
당당하게, 턱을 살짝 든 채 말하는 당신은 나보다 어린 소년임에도 너무나 빛나서, 참으로 빛나는 사람이구나. 결코, 때묻지 않은 빛이라 함께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건 소년의 동경이자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감정이었다. 따스한 기억 속 벨져는 어리고, 당당했으며, 햇빛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 기억때문에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그 숨이 이윽고 정반대의 감정을 수반할지라도 작은 위로가 되어 기뻤다.
봐, 벨져. 난 아직도 이렇게 널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어. 루이스는 입만 벙긋거리며 꽁꽁 숨겨온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소리 없이 말하고는 양손을 입술 위에 포갰다. 너무 소중해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뭘까. 이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루이스가 아는 사랑이라곤 그가 가르친 게 전부였다. 그러니 그로부터 부정당하는 순간 숨기며 지켜온 감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터였다. 인어공주의 사랑은 그녀를 죽인다.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한 번 말해보지 못하고 지고 만.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든 꽃에 꽃잎이 한 장이라도 떨어질까 조심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 누구도 이 기억에, 제 애틋하고 괴로운 사랑에 손을 델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