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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4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 벨져루이<-다무 요소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찐득한 젤리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엿 같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만. 꼭 어릴 때 호기심에 집어먹은 터키쉬 딜라이트에 크게 체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싸구려에, 찐득거리고, 혀가 마비될 것처럼 달고 목구멍에 달라붙어 뜨거운 물을 아무리 마셔도 그 거식한 느낌이 남아있는 느낌.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까지 어쩌면 그리 닮았는지.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곤 티푸드랍시고 접시 위에 다소곳하게 올라온 마카롱과 터키쉬 딜라이트, 한 조각의 쇼콜라에서 눈을 거뒀다. 굳이 차를 마셔보지 않아도 오늘의 다과가 루이스의 손을 타지 않은 게 분명히 보였다. 혹시나 해서 한 모금 마셔본 차는 온도가 낮고, 제대로 우리지 않아 떫은맛까지 났다. 이런 걸 다과랍시고 올린 인간의 면상에 네가 한 번 먹어보라고 한 바탕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겨우 이런 걸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아깝다.
벨져는 제 기분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래.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이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오늘은 늦은 시간에 왔음에도 나와 맞지를 않았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그렇지 다과가 이따위로 나오도록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게 괘씸했다.
그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득 될 게 하나도 없다. 벨져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위를 매운 서류철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없어도 돌아간다는 걸 입증하듯이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에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뒤로 받은 돈이며 정보, 사람이 전부 종이 위에 있었다. 참으로 작은 세상이다.
늘상 하던 것처럼 사인을 하기 위해 펜을 들던 벨져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종이 속에 담긴 세상을 찬찬히 훑었다. 그냥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시간을 때우려던 것뿐이었는데. 벨져는 본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다른 서류철을 열어 종이를 넘겼다.
이 작은 세상 위에는, 루이스의 이름이 없다.
벨져가 느낀 위화감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언제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리 서류에 사인하는 게 일의 전부라지만, 정말 그것뿐일 리 없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 두 달간 벨져의 책상 위로 올라온 서류는 이 거대한 성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담고 있다기엔 너무 적고 깨끗했다.
누군가 일부러 더러운 일을 전부 치워버리지 않고서야 이렇게 깔끔할 리가 없다. 이 자리에 앉기를 거부한 것도 다 추악하고 썩은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대로라면 아직 미성년자인 이글을 앉혀놔도 될 정도였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읽고 있던 서류철을 전부 펼쳐봤다.
가장 먼저 집어 들었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시간이 이렇게 가도록 눈치를 못 챈 자신이 한심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제게 이런 얕은 수를 썼다는 데서 더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벨져는 사무실 전화기로 비서를 호출했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벨져는 들어오라고 답했다.
“찾으셨습니까.”
“루이스는?”
“아……. 그게 지금, 아래 룸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지 않는 루이스와 대답을 피하는 비서. 그것만으로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눈으로 그를 추궁하자 비서는 시선을 피하며 답하지 않았다. 그래, 다 한통속이라 이거지.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당황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지만 아무리 그런들 벨져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을 닫고 그 앞에 버티고 선 비서를 노려보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비켜.”
“저, 그게, 금방 오실 겁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것도 자네에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하, 하나같이 자기들이 뭘 위해 일하는지 모르는 자들뿐인 건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 비켜.”
비서는 곤란해 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 그가 열어준 문 밖으로 나간 벨져는 고위층을 접대하는 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더니 층버튼을 누르고 비껴섰다.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이 비서조차 다이무스가 남겨둔 사람이니 그와 함께 뒤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제 행적을 죄다 고해바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좀처럼 저를 그의 눈 밖에 내놓지 않는 형을 떠올리자 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제 혈육이라지만 그와는 좀처럼 잘 지내기가 힘들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어쨌거나 벨져에게 형제란, 특히 형의 존재란 귀찮고 성가신 것에 불과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가르치고 돌보려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리고는 결국 제 것이어야 할 것을 모조리 가져가고는, 남은 걸 선심 쓰듯 내주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혈육이라 한들 그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벨져는 패배의 기억을 떠올리곤 손등이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어디에 있나.”
“그게…….”
“자네가 누굴 위해 일하는지도 알려줘야 하는 건가?”
“…이쪽입니다.”
비서는 벨져를 더 깊고 후미진 복도로 이끌었다. 어두워진 조명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은 분위기에 화려한 오탁의 향이 더 짙어졌다. 벌써부터 그 지독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지만 벨져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보이는 공간보다 보이지 않는 밀실이 훨씬 화려하고 넓다. 홀에는 거의 헐벗다시피 한 여자들이 돌아다니고, 좋은 옷을 갖춰 입은 사내들이 짐승의 냄새를 풍기며 게걸스럽게 탐욕을 채우는 공간. 더러는 비굴해지고, 더러는 추악해지는 이 공간이 역겨웠다.
향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스무 살의 벨져에겐 낯설다 못해 더럽게 느껴졌다. 벨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려했지만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둡고,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속에 비서가 걸음을 멈췄다.
룸의 앞에 선 벨져는 문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렇게 하면 안이 투시되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애꿎은 문을 노려봤지만 방음처리가 워낙 잘 된 터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안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얼마든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지만 벨져는 움직이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이는 것밖에,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또, 같은 장면을 보고 싶지 않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뭐 하러 되풀이한단 말인가. 벨져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제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천박하게 그지없는 행위에 흥분에 젖은 숨을 눌러 삼키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벨져는 이 비이성적인 행위를 없던 것으로 하기로 하고 돌아섰다. 비서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이르고 싶으면 이르라지. 다이무스가 뭐라 하던 알 바인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상관하지 않으면 그 뿐이었다.
올 때만큼이나 단호하고 빠른 걸음으로, 벨져는 아편굴 같은 내실을 빠져나왔다. 확 밝아진 조명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벽과 바닥이 전부 끔찍했다. 이 안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어 벨져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숨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넥타이를 푸르고 싶었지만 여즉 붙어있는 비서 때문에 꾹 눌러 참았다. 다이무스에게 말이 흘러가는 건 상관없지만 루이스에게 전해지는 건 그렇지 않았다.
뭐가 그렇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벨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거세게 닫고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 당겼다. 겨우 이딴 거나 보자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눈빛을 외면하고, 여길 떠나야 했다. 벨져는 재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서류가 쌓여있는,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책상 따위 꼴도 보기 싫었다. 마음 같아선 다 뒤엎고 싶지만, 그랬다가 손해를 보는 건 자신뿐이라 그렇게 홀로 분을 삭이고 있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하게 두 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소리. 벨져는 이를 악물며 문을 노려봤다. 저를 이렇게 뒤흔든 그가 문 앞에 서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고저 없이 평소와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져는 팔걸이를 꽉 잡았다.
“……아까 저를 찾으셨다고.”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일어난 벨져는 문을 뒤로 하고 섰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벨져의 사무실 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한 침묵이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루이스였다. 몇 시간이고 불러놓고 세워둬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저를 밀어내고 거절하고 있었다. 벨져는 홱 몸을 돌렸다. 한 마디 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희게 질린 얼굴과 핏기가 가신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며, 애써 참고 있는 그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하려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잠깐.”
벨져는 끝을 고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자 루이스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피했지만 벨져의 손보다, 루이스의 목보다 벨져의 눈이 더 빨랐다. 마침 흘러내린 진득한 붉은 방울에 벨져의 손이 멈췄다.
베스트를 적신 짙은 자국과, 평소와 다른 앞머리의 방향.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흰 피부에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지독히도 붉은 선혈에 벨져는 방금 전 그랬던 것보다 더 세게 이를 물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흰 셔츠에 떨어졌다.
“...누구지?”
“도련님, 이건....”
“누구냐고 물었다.”
이를 악 문 채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벨져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벨져는 거절당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선 이 사내에게 이 분노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걸 너무나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그동안 외면해온 탓에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끝내는 이런 식으로 제 앞에서 망가지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벨져는 주먹을 쥔 손을 내렸다. 너는 내 건데. 왜 함부로 너를 망치지?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묻지 못하는 건, 그의 입으로 부정하는 걸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며 루이스에게 돌아섰다. 너무 세게 힘을 준 주먹이 부들거렸다.
이 감정은 갈 곳이 없다.
“...나가봐.”
간신히 내뱉은 한 마디에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옮겼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그 발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이다, 문이 닫히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벨져는 참아온 분노를 표출했다. 컵이 깨지고, 서류철에 곱게 끼워져있던 종이들이 공중을 날았다. 벨져는 엉망이 된 사무실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제 것에 손을 댄 무뢰한에게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벨져는 풀었던 넥타이를 고쳐 매고 벗어둔 재킷을 걸쳤다.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잔뜩 움츠러든 채 서있던 비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새끼, 아직 거기 있나?”
“예? 아, 잠, 대표님!! 대표님!!!”
벨져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버렸다. 남은 건 켜켜이 쌓인 분노를 받아 온당한 곳에 쏟아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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