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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3 / L1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B3
그걸 보게 된 건 정말이지 질 나쁜 우연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벨져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열린 문에서 불어오던 바람에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는데,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고 말았다. 루이스가, 다이무스와 입을 맞추는 그 장면.
때는 겨울이었고, 바람이 차가웠으며 그 날은 며칠 내내 나리던 눈이 멎은 날이었다. 눈이 멈춰서였을까, 문 너머의 목소리가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루이스. 함께 가자. 나와 같이 해다오.”
“도련님, 저는…….”
앞으로도, 쭉 자신의 것이리라 생각했던 그였다. 그 때의 충격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졌다. 져버리고 말았다. 쓰디 쓴, 인생의 첫 패배였다. 벨져는 그 길로 무작정 예정에 없던 유학을 떠났다.
차라리 펑펑 내리던 눈과 함께 영원히 따스한 벽난로 앞과 같은 기억에 머무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벨져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머릿속에 박제된 것처럼 선명한 기억을 제 머릿속에서 지워내고 싶었다. 그 부분만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벨져를 마주했다. 서류를 하고 나갔을 땐 바지와 베스트가 바뀐 그가 문 앞에 서있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루이스는 방 안에서 오간 거래에 언급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눈빛이라도 한 번쯤 바뀔 만한데, 그는 차디찬 얼음조각같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다가갈 수가 없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벨져는 루이스를 외면하고 그를 지나쳤다.
루이스가 벨져를 잡을 때라곤 서류가 밀리거나, 중요한 고객을 상대해야 할 때뿐이었다. 그것도 그가 알아서 하는 선을 넘을 경우뿐이라 많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 업소를 관리하느라 바빴고, 벨져는 더러운 뒷거래와 돈세탁 같은 업무를 거부했다. 다이무스가 해온 일은 결국 루이스의 손으로 넘어가 벨져가 찾지 않는 이상 루이스가 따로 벨져를 찾는 일은 사실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먼저 찾기는 기분이 상한다. 매달리고 애원하는 쪽은 언제나 타인이었지, 벨져 홀든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벨져는 책상에 앉아 하릴없이 클래식이나 오페라를 듣거나, 읽히지도 않는 책을 읽는데 질려버렸다. 차라리 일이 바쁜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이따금 올라오는 서류나 만지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루이스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서지 않는 건, 글쎄. 벨져조차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성가실 뿐이다. 루이스는 벨져 홀든에게 언제나 예외가 되는 이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이렇게 그를 몰아붙이다보면 자연스레 형이나 아버지에게도 제 태만이 전해질 테고, 그럼 제게 걸맞는 자리를 찾아 이 더럽고 추악한 성을 떠나면 그 뿐이었다.
벨져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박자에 맞춰 책상을 두드리다가 일어났다. 지금 필요한 건 인내와 시간뿐이지만, 가만히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최소한 이 찝찝한 기분만이라도 해결해야 한다. 벨져는 무슨 일이냐 묻는 비서를 뒤로 하고 루이스를 찾아 홀로 내려갔다. 이미 해가 진데다 저녁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이 바로 접대의 시간이었고, 그 때문에 루이스가 한창 바쁠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홀에 있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기가 더 어려웠고, 벨져는 홀 이층 난간에서 아래를 살피는 것으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루이스는 일전에 제 앞에서 벗었던 감색 베스트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보란 듯이, 그때와 같은 차림으로 다른 남자에게 미소 짓는 그.
루이스의 그 미소에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벨져의 발이 멈췄다.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남자가 노골적으로 루이스에게 추근거리며 더러운 손을 그의 허리에 얹었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기 무섭게, 루이스가 웃으며 그의 손을 떼어내고 눈꼬리를 휘었다. 사르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그 눈웃음.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비록 벨져를 등지고 있지만 벨져의 눈에는 남자가 루이스에게 완전히 빠져버리는 게 훤히 보였다.
못 볼 걸 봤다. 벨져는 이를 악물고 가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다시 제 성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저는 주인이 있는 몸이라.”
넓고 웅장한, 층을 하나 터놓은 홀이라 여러 사람의 소리와 음악, 그 외의 잡음이 마구 섞여들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벨져의 귀에 꽂혔다. 귓가에 대고 속삭여서도 그보다 더 선명할 수는 없다. 벨져는 난간을 잡은 채 멈춰서, 쓰인 자재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려 했다.
훌륭한 솜씨로 마감된 대리석은 분명 최고급이고, 제가 보기에도 이 홀의 인테리어는 흠잡을 데가 없다. 고풍스러운 양식도, 허투루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화분과 도자기, 그림도 결국은 벨져의 신경을 돌리지 못했다. 벨져는 눈을 감은 채 빈 손으로 이마를 짚고 저 깊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숨과 함께 삼켰다.
주인이 있는 몸이라던 그 목소리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눈웃음이 고막과 망막에서 떠나질 않았다. 감각은 다른 걸 차단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고 했던가. 벨져는 감은 눈 아래 떠오르는 장면과 반복해 재생되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그가 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루이스와 남자는 떠나고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을 것도 없다.
루이스는 그의 주인을 위해 다른 이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 테고, 그건 제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결코, 루이스가 먼저 제게 안겨올 일은 없다. 벨져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그러쥐고 왔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명치, 혹은 그 아래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은 분노였고, 억울함에 터져 나오는 울분이기도 했다.
L1
종종, 숨을 쉬기 힘들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찌뿌드한 몸을 일으켰다. 벨져가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는 바람에 미처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지도 못한 채로 한 달. 그동안 언제 어디에 있을지 모를 그를 피하느라 짐을 가지러 가지도 못하고, 루이스는 한 달째 사무실에서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쪽잠을 자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웨이터며 직원들이 여기 침대가 몇 개인데 그런 고생을 사서 하냐며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어디에 누우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뒤로 들어오는 검은 돈들을 세탁하는 거며,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거래의 장소 제공, 기밀 엄수와 함께 그들의 검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준비와 관리 역시 지금은 루이스의 몫이었다.
쏟아지는 업무도 업무지만, 루이스가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보 같고 한심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느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벨져를 맞이하는 걸 빼먹어서는 안 된다. 온갖 부정하고 부패한 일들이 다 벌어지는 곳에서 홀든의 개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루이스는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더러는 이런 루이스의 행동에 다이무스가 간 지 얼마인데 벌써 줄타기를 하냐는 말이 돌았지만 루이스는 그 말에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 않았다. 멋대로 떠들어대는 말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숨어있었고, 루이스는 그걸 부정할 수 없었다.
제가 그에게 품고 있는 마음. 그 마음만큼은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비척거리며 일어나다. 핸드폰의 알림등이 빛나고 있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다른 쪽이었다면 또 모를까, 업무용은 오늘도 변함없이 말만 다른 청탁과 온갖 요구들로 가득할 게 뻔했다. 그걸 준비하는 건 급하지 않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루이스는 애초에 시궁창 속에서 숨을 쉬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 시절의 기억이 없다지만 이 화려한 어둠의 순리만큼은 확실히 안다. 이 가혹한 세계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빛나고 있는 건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 오탁에 물들게 둘 수는 없다. 루이스가 저와 함께 가자는 다이무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은 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 한 사람 때문이었다.
세탁이 끝나 문고리에 거려있는 옷을 집어든 루이스는 바로 샤워를 하기 위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여벌로 미리 가져다둔 셔츠 두 벌과 정장 한 벌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돌려막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홀든가에는 비밀이 없다. 아무리 입이 철벽같은 집사님에게 부탁했어도 누군가의 입을 타고 소식이 전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루이스는 급하게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을 샀다. 본가로 돌아가 짐을 가져오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을 다이무스에게 더 걱정을 끼칠 순 없다.
게다가 돌아갔다가 그 안에서 벨져와 마주치느니 이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백 번 나았다. 물론 이글이라면야 쥐도 새도 모르게 해내겠지만, 그 녀석에게 제 공간을 허락하기도 내키지 않거니와 이글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아무리 밖에서 만난다손 쳐도 이글은 끝끝내 이리로 올 테고, 그럼 또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이글은 항상 제게만 취급이 요 모양이라며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더 끼어들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도와줄 걸 알지만 그래서 더 말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고, 이건 어디까지나 벨져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애초에 해결할 가능성이 있긴 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깊고 깜깜한 구덩이 안에 갇힌 기분. 루이스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 도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그는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외치고 아니라고 부인해도 벨져는 저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 잠겨있던 제게 한 줄기 빛이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그 날의 소년이 아니었다.
차라리 영원히 입을 다물었으면 조금 달랐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위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기억이란 거대한 저택에 들어오던 그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었고, 그 중심엔 언제나 벨져가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차마 다가갈 수도 함부로 바라볼 수도 없었던 작은 도련님.
그 때와 변하지 않은 거라곤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홀로 빛나고, 자신은 더 더럽혀질 곳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라는 것뿐이었다. 감히 그에게 닿고자 한 마음이 죄가 되어 그 벌을 받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더는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이 벼랑 끝에 선 건 온전히 자신의 의지였지만 벨져의 외면은 기다림보다 더 가혹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입을 열지 않아도 신기하게 제가 바라는 것을 알아내던 그 작은 도련님이 너무나 그리웠다.
루이스에게 기억이란 바닷물과도 같았다. 너무 목이 말라 타오르는 사막에서 겨우 도망쳐 순간의 갈증을 채우면, 그 다음은 폭풍이 치는 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다시 파도에 밀려 뭍이 올라와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했다.
그 누구도 채울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다. 내 주인은 영원히 넌데. 이럴 거면 시작을 말지.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끝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싫었다.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을 처음 가르친 사람은 너무나 변해버렸고 과거에 머물러있는 자신은 하루가 갈수록 그 하루를 버티는 게 점점 더 힘이 들었다. 기다림을 견디게 해준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바지와 팬티를 벗고 셔츠를 벗었다. 하루 동안 입었던 옷가지를 다시 세탁실로 보내기 위해 한 데 던져두고 샤워기 앞에 섰다.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달군 열이 씻겨 내리며 몸에 오한이 들어 몸이 떨렸다. 이 추위야말로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제가 머무를 계절은 영원히 그 겨울이라고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삶은, 시간은 전부 벨져가 떠나던 그 날에 멈춰있다. 제 삶에 좋은 부분, 따스한 기억이라곤 전부 오 년 전에 머물러있었다.
차디찬 타일을 짚고 깊은 한숨을 토한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찬 물을 맞고 있음에도 눈가와 머리가 뜨거웠다. 여전히, 숨을 쉬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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