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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다음주에 온다던 사람입니다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
불꽃이 일고 금속음이 터지며 곳곳에서 공격이 날아드는 교전 상태, 가장 앞에 선 벨져는 박쥐로 변해 후방으로 달아나는 여제를 쫓았다. 그녀를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를 악문 순간, 벨져의 옆으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얼음 레일이 벨져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제길…!”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급하게 몸을 돌려 검을 던져다. 섬광보다 빠르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이라면 막을 수 있다…!
“전부, 얼어버려!”
한 끝, 한 끝 차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녀를 막지 못한 대가는 차가운 얼음 감옥이었다. 후드 안으로 휘날리는 청회색 머리카락. 얼음 속에 갇힌 채 후방에서 교전중이던 이들이 얼음 산탄총에 쓰러졌다. 벨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짐이라고는 하나 회사의 능력자라는 사람 넷이 단번에 리스폰 기어로 올라가버리는 기분이란. 꼼짝할 수 없게 가뒀던 얼음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벨져는 모든 기술을 써버린 루이스에게 달려들어 올려 베었다. 네 번, 베고 잡아 착지하며 안개지역의 상자 안으로 밀어넣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크흣…!”
“그 잘난 영웅의 이름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군.”
“네가 상관할 바가…, 큭!”
“아직 내 질문에 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하, 먼저 내빼놓고 이제 와서?”
벨져는 유치한 도발로 기회를 엿보는 루이스를 잡아 빠르게 발도해 베었다. 그녀만큼 단번에 큰 피해는 입힐 수 없지만 일대일인 이상 이런 식으로 갉아먹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우위를 점하고 이어가는 건 제 쪽이다.
아무리 환영의 도시라한들 고통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물들었다. 그 와중에도 눈을 감지 않는 건 칭찬할만 하지만 그녀는 과거 첫 대결에서도 그랬다. 그러니 딱히 칭찬해줄 필요도, 전처럼 한 수 물러줄 것도 없다.
“흥, 아직 남은 질문이 있지 않나?”
“후우. 하,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거야? 의외로 쪼잔하네! 홀든!”
깔끔하게 베어넘기며 잠시 손을 놓은 틈으로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날카로운 얼음의 위력은 몸소 체험해 본 자만이 안다.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걸, 벨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검의 괘적을 바꾸는 것보다 루이스의 검이 더 빠르다. 벨져는 검으로 쳐내는 대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이 거리면 언제든 검을 던져 공격할 수 있다. 루이스의 사정거리를 가늠한 벨져는 다시 그녀에게 검을 던져 돌아가려 했다.
“나가라!”
여제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뒤에서 날아든 박쥐 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앞은 루이스, 뒤는 여제. 벨져는 작게 혀를 찼다. 어느 쪽이든 피할 수 없다. 루이스가 미소짓는 게, 옅은 안개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작게 움직이는 입술.
“제길…!”
박쥐 떼가 등을 덮치고, 몸이 떠오른 순간 루이스가 벨져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른팔을 왼팔로 받치고, 귓가에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속삭이더니 곧장 쨍한 냉기와 함께 얼음이 폭발했다. 쟁쟁한 소리와 투박한 통증이 이어지고, 곧이어 벨져는 리스폰 기어 위로 올라갔다.
자아도 없이 끌려가는 기분이란 언제 당해도 기분 나쁘다. 먼저 올라와있던 넷이 제 눈치를 살피는 게 더 짜증나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십 분 내내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방금 그 한 방으로 열세를 극복하고 승기를 가져간 주역이 본진까지 들어와 무자비하게 수호자를 쓰러트리는 걸 손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영 심기가 불편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녀의 능력만큼이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이야말로 벨져가 방금 전까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전날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여느 아가씨마냥 머리를 틀어올린 게 이레귤러일 뿐이었다. 제 눈 앞에서 까딱이던 희고 가는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향락의 기억.
당황한 나머지 먼저 살롱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할 거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루이스가 너무 태연한 탓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쪽은 말을 꺼낸 벨져였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저들끼리만 화기애애하느라 공성을 망친 팀원들이 먼저 리스폰 기어를 나간 탓에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의 그 술집에서 봐.”
홀로 남은 벨져는 마지막으로 루이스가 속삭인 말을 곱씹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겨우 그 말만 가지고 어떻게 찾아가겠냐고 하겠지만 벨져에겐 짚이는 곳이 있었다.
아니, 거기밖에 없다. 루이스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디시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제 망나니 동생이 그가 가진 가장 귀한 재산에 흉터를 내고 가문의 위상을 더럽힌 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능력자에게 당한 제가 낫다. 비록 3급 능력자라 하지만 적어도 루이스는 그녀가 가진 다른 이름 앞에 한 치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분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상대였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벨져라 한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벨져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 루이스를 옹호해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겨우 그렇고 그런 능력자따위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만큼 굴욕적인 건 없을 테니까.
그 때의 일은 제 오만과 방심이 빚어낸 실수에 불과했지만 '루이스'는 달랐다. 그녀는 벨져 홀든을 꺾은 능력자답게 성장해나갔고, 이제는 더 나아가 연합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이 쯤 되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어차피 일생에 한 번쯤 겪을 일이라면, 오히려 그녀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벨져는 화를 내며 올라온 르블랑의 꼬마 숙녀와 명왕의 양녀를 내버려두고 부서져가는 HQ를 바라봤다. 니케가 루이스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누구에도 지는 법이 없는 자신이건만 루이스 앞에만 서면 흐름이 이상하게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어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내려가지 않았다. 여제가 비행을 시작한 이상 끝난 게임이었고, 내려가봤자 기세등등한 적을 마주해 분풀이를 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 당초 얼굴을 비추는 것에 의의가 있었던 만큼, 벨져는 이번 공성을 진들 이긴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예정에도 없던 루이스가 나오는 바람에 아주 약간 진심이 되었던 것뿐이다. 오히려 소득이라면 소득이 있었지.
여느 때처럼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 받는 회사 사람들을 두고 벨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잔소리꾼이라도 만나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
* * *
포트레너드의 쪽, 디시카는 워낙에도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회사와 연합의 갈등이 깊어지고 안타리우스가 성횡하는 근래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술냄생와 퀴퀴한 악취가 진동하는 술집으로 발을 들인 벨져는 손을 들어 코를 손등으로 가렸다. 그런다고 악취가 가시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손등에 남아있는 향수 냄새가 이 냄새에 적응하기까진 도움이 될 터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술집에는 불량배며 정신이 빠진 녀석들이 즐비했고, 벨져는 저를 이런 곳으로 불러낸 사람을 찾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능력자라 한들 여자 혼자서 들어올 곳이 못 된다. 척 봐도 질이 나쁜 녀석들이 여자를 끼고 수작을 부리거나, 공기가 탁해질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며 싸구려 술을 퍼마시는 지저분한 술집은 고귀함과 품위를 호흡하며 자란 벨져에겐 아무리 좋게 봐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잘도 이런 싸구려 술집에 발을 들일 생각을 했구나, 이글. 막내를 떠올리며 혀를 차던 벨져는 안쪽 구석에 후드를 쓰고 앉아있는 루이스를 발견했다. 눈여겨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엔 싸구려 위스키 한 병과 유리잔 두 개, 맥주병이 늘어서있었다. 혼자 마실 양은 절대 아니다. 벨져는 갈색 맥주병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훑던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눌러쓰고 고개를 수그린 그녀를 내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꼭 이런 곳이어야 했나?”
“보다시피 제정신 안 박힌 놈들 뿐이거든. 이 시간엔 더더욱. 걱정마, 여기 주인이랑 아는 사이니까.”
“흥. 말은 잘하는군.”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평소에 입는 후드재킷보다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여성 특유의 골격까지 감출 순 없다. 조악한 불빛 아래 잘 보이지 않는 얼굴과, 곳곳에 생채기가 난 가는다란 손가락. 벨져는 잔을 들어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마시지도 않을 맥주병만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이런 술이야 그냥 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얼음이 나올 리도 없고.”
“그냥 달라고 해.”
루이스는 손을 쥐었다 펴며 빈 잔에 얼음을 채웠다. 기묘한 장면이지만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이 정도는 놀라운 축에 끼지도 못했다. 라벨도 상표도 없는 위스키를 따 잔에 따른 벨져는 얼음과 술이 섞이도록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대로 내려놓으려 했는데, 무언가의 기대를 담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단숨에 들이켰다.
“후후. 만만히 볼 게 아니지?”
“…너….”
“그게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야. 싫으면 다시 문 열고 나가.”
색을 보고 당연히 위스키겠거니 생각한 술은 식도와 위를 태우는 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셌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썼던 벨져는 여유롭게 웃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루이스는 만지작거리던 병을 따 손에 들고는 의장에 등을 기댔다. 가시지 않은 쓴 맛과 타오는 속 때문에 입가가 씰룩거렸으나 루이스는 제가 먹인 골탕이 만족스러웠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래.”
“잘도 나를 기만하는군.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고.”
“기대할게.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게 인지상정. 말문이 막혔는지 루이스가 테이블에 팔을 올리며 벨져 쪽으로 몸을 숙였다. 후드 안에 감춰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피처럼 붉은 눈이 벨져를 향했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혼자 남겨지는 거, 기분 정말 별로였거든.”
“윽……. 그때는….”
“알아. 경황이 없었겠지. 바쁘셨거나. 그런 걸로 연연하고 매달리는 레이디가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렇지 않게 아픈 구석을 찌르고 빠지는 바람에 기세등등하게 루이스를 몰아붙이던 벨져의 기세가 꺾였다. 아침에 일어나 목도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벨져가 입을 다문 사이 루이스가 도로 몸을 뒤로 빼고 팔짱을 꼈다.
“그땐 나도 완전히 취했었고…. 그냥 서로 실수한 걸로 치고 넘어가자고. 참고로 전에는 술로 때우려다가 그 방에 있는 술을 동내고 밑천이 없어서 옷 벗기로 했던 거야.”
“누가 먼저….”
“알고 싶어?”
“아니, 됐다!”
누가 침착한 결정사 아니랄까봐, 잘도 부끄러운 얘기를 술술 늘어놓는 루이스때문에 벨져만 뺨이 달아올랐다. 어느 쪽이든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전말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고, 없던 일로 하는 건 이쪽도 원하는 바였다.
벨져가 죽고 싶을 정도로 쪽팔려하는 게 재미있어,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발로 벨져의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그가 루이스를 볼 때 고운 얼굴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고, 확률로 치면 다시 한 번 거대 일식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희박했다.
“뭐, 지난 질문에 다시 답하는 건 포함시키지 말자구.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냐고 물어본 거야. 이걸로 세 번째네.”
“으윽….”
분명 엇비슷하게 마셨던 것 같은데 먼저 정신을 놓고 기억을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벨져는 도로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분명해서, 루이스는 조금이나마 다이무스의 고충을 이해했다. 이글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픈데 벨져까지 돌보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루이스가 그런 생각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사이 벨져는 이미 몇 번이고 되짚었던 기억을 돌이켰다. 영화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유독 생각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레코드가 긁힌 것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는 기억 속에는 지금의 이 무감각한 얼굴이 아닌, 잔뜩 흐트러져 할딱이는 여자가 있었다. 충동에 휩싸여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타들어가는 속만큼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쓰린 속에 또다시 누가 불을 지른 것만 같다.
눈을 감았다 뜬 벨져는 자신을 다잡았다. 취한 것도 아닌데 멀쩡한 제정신으로 루이스에게 말려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서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만 해댔지. 네가 여제의 행방에 마지막 남은 와인을 들이키던 것까진 기억난다.”
“설마하니 그렇게 다 피해가고픈 질문만 할 줄은 몰랐거든.”
“동감이다.”
“규칙을 수정해야겠어. 물론 계속한다는 가정 하에.”
“무슨 생각이지?”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돼. 어쨌거나 조건은 전과 같아. 소속의 대표가 아닌 개인으로서 하는 거래고, 제공자의 신원 보호는 철저하게 지켜야 해.”
“차라리 종이와 펜이라도 가져오지 그러나.”
“이런 건 확실히 하는 편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서로 안전한 편이 좋잖아?”
“그래서 새 규칙은.”
“간단해. 답은 예, 아니오. 대신 대답하기 곤란하면…. 술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요구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지.”
“그렇게 하면 네가 내놓을 게 있나? 공평한 거래라고 들리지 않는데.”
“벌써부터 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왕이면 안전한 편이 좋지.”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사항을 늘어놓는 건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의 성격탓일 수도 있지만, 벨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영웅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 한들 변함없이 겁쟁이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모두를 쥔 건 벨져지 루이스가 아니다. 벨져의 말은 다소 가혹할지 몰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루이스가 가진 거라곤 그녀의 몸과 명석한 두뇌, 능력과 정보 정도가 전부다. 자랑하는 능력도,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영리함도, 그리고 그녀가 아껴 마지않는 동료들도 전부 하나같이 내놓을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나를 줄게.”
“하! 전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군. 이만 일어나도 되겠나?”
“그래? 전에는 꽤 좋아했던 것 같아서. 아쉽게 됐네.”
이 인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 하룻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러는 게 불쾌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이래서 엮이고 싶지 않았건만. 벨져는 입가를 씰룩이며 루이스를 노려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덤덤한 무표정으로 맥주병을 기울이며 벨져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금 그 말, 상당히 불쾌하게 들리는군.”
“그러게 누가 기억하지 말래? 잊은 건 너야. 홀든. 정 궁금하면 질문이라도 해보던가.”
“흥. 차라리 술을 마셔라.”
“그게 별로라는 걸 경험해서. 아까도 말했지만, 혼자 남겨진 기분 진짜 별로거든.”
“윽…,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내 마음이다. 그리고!”
주먹을 부들거리던 벨져는 홧김에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건 전혀 벨져 홀든스럽지 않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도발하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 번쯤 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결코, 음란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소녀같이 순수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바람에 더 오기가 생겼다.
“장소는 내가 정해.”
“아무렴.”
생긋. 루이스는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막 봉우리를 틔운 하얀 꽃처럼 웃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얄미워 벨져는 대충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술값을 던졌다.
“이런 악취나는 곳에 한 시도 더 있고 싶지 않군. 일어나.”
“응? 잠깐. 아깝잖, 으왓…!”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술이 아까운 것 뿐이었는지 루이스는 저항 한 번 없이 끌려왔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벨져는 술집을 나오자마자 루이스의 손목을 놓았다.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가늘다. 장갑을 끼고 만졌음에도 손에 남은 촉감이 왠지 간질거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찼다. 말 한 마디 없이 가스등이 드문드문 서있는 거리를 걷는데 루이스가 추운지 팔을 감싸고 목을 움츠렸다. 손으로 팔을 쓰는 궁상맞은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샜다.
“저기, 난 이쪽인데….”
“그래서?”
“응?”
“앞장서라.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로의 갈림길에서 멈춰선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말하는 의도야 뻔하지만 그렇다고 새벽에 혼자 돌려보내기엔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루이스가 얼음보다 더 차갑고, 능력자 다섯쯤은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라 한들 이런 시기에 혼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할 리 없었다.
“지금 레이디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고개를 기울여 올려다보는 루이스에게 정색하고 말하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바로 섰다.
“다행이네. 보다시피 사람이 전혀 없거든.”
루이스는 싱긋 웃더니 거리에 얼음길을 깔고는 미끄러졌다. 자랑하는 기동력이 이럴 때도 쓰이는 모양이다. 벨져는 한달음에 멀어진 루이스의 뒷모습과 바스라진 얼음이 순식간에 기화되는 걸 보고 돌아섰다.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따라갈 의무까진 없다. 어차피 쉽게 당할 리가 없기도 하고,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건 그녀에게 추근덕거릴 멍청이들의 안위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인다. 벨져는 이미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꾸 루이스가 마음에 걸리는 건 몸에 익힌 매너와 습관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손에 쥐었던 가느다란 손목이 생각나서, 벨져는 샤워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루이스를 생각했다.
하루를 늦게 마치는 것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하루에 두 번 씩이나 루이스를 마주하기란 여간 피곤한 게 아니어서, 금세 잠이 몰려왔다. 눈을 감기 전, 연락할 수단과 만날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이것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깨달은 벨져는 베개를 잡아 당겨 편한 자세를 잡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나머지는 일어나서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는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그녀가 나왔다. 귀에 끈적하게 감겨드는 목소리가 달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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