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위험할 줄이야.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 갔다가 서점 알바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 둘이 나타나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연히 겁을 먹고 피하려 했지만 남자들이 내뿜는 위압감에 어쩔 수 없이 검은 대형 세단에 올랐다.
어렵게 살긴 하지만 목돈을 빚진 데도 없고, 기껏해야 친구들에게 가끔 얼마씩 꾼 게 전부였다. 그러니 남자들은 사채업자도, 인신매매단도 아니다.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같이 가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게 부탁일리는 없지만, 폭력이나 협박같은 과격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사실 이렇게 실려가는 이유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며칠 전까지 루이스의 원룸에서 한 침대를 쓰다가 말도 없이 사라진 그. 잘 잡힌 근육과 손에서 팔을 휘감은 문신, 그리고 그 눈빛만으로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비 오는 날 야밤에 거리에서 배에 칼을 맞고 쓰러져있다면 더더욱. 루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그의 이름도 하는 일도 말하지 않았지만 같이 살기엔 나쁘지 않았다. 사람의 온기가 반겨주는 집, 김이 오르는 음식은 루이스가 일평생 막연히 그랬으면 좋겠다고 꿈꿔온 것들이었다. 늠름하고,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는 남자. 그는 단단한 바위같았다. 비바람에도 꿈쩍 않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바윗돌. 샤워를 마치고 나와 낮게 숨을 내쉬던 그의 벗은 몸과 눈빛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유도 목적지도 모르고 모르는 사람들의 차에 실려가면서 너무 태평하지 않은가. 루이스는 다시 제 상황을 상기하며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사람들을 상대로 육탄전을 해서 이길 자신도, 달아날 자신도 없다. 침착하자.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루이스.
창밖을 흘긋거렸지만 어둠이 내린 거리엔 적막만이 가득했고, 점점 더 모르는 풍경만 들어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바다에 루이스의 머릿속에 진부한 드라마의 전개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어둠의 조직원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런 그를 노리는 세력이 인질로 쓰기 위해 잡아들이는 그런 흔하고 뻔한 클리셰.
주인공도 그렇지만, 인질들의 끝도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인질은 죽거나, 온갖 험한 꼴을 당하고 결국은 목숨만 부지하거나 평생 트라우마가 될 기억만 안고 살아간다. 그래도 사랑한다며 나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건 소설이나 영화, 만화 속에나 있는 얘기일 뿐이다. 루이스가 탈출 계획을 세우는 사이 해안도로를 달리던 차가 휘황찬란한 건물에 멈췄다.
듣도 보도 못한 건물 앞, 먼저 내린 남자가 뒤로 와 차의 문을 열었다. 건물 앞에는 저를 데려온 남자들과 비슷한 남자들이 서있었고, 루이스는 깔금하게 도주할 계획을 포기했다. 남자들은 루이스가 내리자마자 양 옆에 서서 연행하듯 걸었다. 팔을 잡지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결국 루이스는 반항 다운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발을 옮겼다. 곳곳에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가득한데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힘을 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들도 위에서 시킨 일을 하는 것 뿐이니 제 처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얘기를 해야 했다.
건물은 휘황찬란할 정도로 고급스러웠지만 위험하고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야 이 공간을 채운 사람들이 이 모양이니 당연하지만,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힌다. 마침내 저를 찾은 사람을 만나는 건지, 남자가 양쪽으로 여는 커다란 문을 두드렸다. 긴장으로 마른 침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렸다.
루이스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부디, 이 문 너머에 부디 제가 아는 얼굴이 있기 만을 바랄 뿐이었다.
“...계속 거기 그렇게 서있을 건가?”
“당신....”
“앉지.”
양복 대신 중국의 전통 복식을 갖춰입은 그가 기다렸다는 듯 루이스를 맞았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그가 한 번 눈짓하자 루이스를 데려온 사람들이 문을 닫고 나가고, 딱딱한 막대기마냥 그 자리에 서있던 루이스는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신세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괜 채 저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과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루이스의 걸음을 이끌었다.
“저녁은 먹었나?”
“아, 아뇨....”
“그럼 밥부터 먹지. 편하게 있어도 좋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요. 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루이스는 말을 꾹 눌러 참았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호화로운 방 안의 카페트로 시선을 내리고 있으니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한, 즐거움을 참아내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들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말 하지 않았나. 빚은 갚겠다고.”
“안 주셔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대가 호의를 베푼 게 그대의 마음이듯, 나 역시 내 마음대로 할 뿐이다.”
“...덕분에 오늘 삶의 위협을 느꼈는데.”
“그들이 무례하게 굴던가?”
잘생긴 얼굴에 미간이 좁혀지며 확 번지는 짜증에 루이스는 고개를 도리저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손 하나 까딱 않고 사람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이다. 제 말 한 마디에 사람 하나의 목이 날아가는 건 루이스로서도 썩 달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양해주었으면 했다.
루이스는 평화와 안온한 일상을 사랑하는 소시민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을 잃고 싶지 않다. 무겁게 짓눌린 공기 속에서, 후드를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은데요.”
“시간이 늦었다만.”
“늦은 시간인 걸 알면서 이렇게 데려와요? 말 한 마디 없이?”
“....... 루이스.”
“기왕 물어본 김에 하나만 더 물을게요. 난 당신 이름도 몰라요. 그건 압니까?”
이 지경이 되어서도 루이스는 남자의 이름조차 몰랐다. 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왜 바라지도 않은 보상을 주려는지는 몰라도 이런 식은 아니다. 말을 하다보니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라 그를 노려봤다. 남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루이스와 눈을 맞추다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에 무게가 느껴져 짓눌릴 것만 같았다. 괜히 혀를 놀렸나. 그냥 가만히 있을 걸.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 이를 악물고 눈을 감은 순간 뺨과 귀에 그의 손이 스쳤다. 후드가 벗겨져 목 뒤로 떨어지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티엔. 티엔 정이다.”
말문이 막혀 고개를 들자 그가 루이스의 귀 언저리에서 맴돌던 손을 거두고 뒷짐을 지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저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잘 지내는지 궁금했고..., 그리고....”
남자, 티엔은 말끝을 흐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을 고르는 그의 그 얼굴에 루이스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불안과 공포로 세차게 뛰던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저 당연한 신체 반응일 뿐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루이스는 꾹 눌러온 숨을 천천히 토했다.
“보고 싶었다구요?”
“....”
예상치 못한 답이라는 듯, 혹은 그 의표를 정확히 찔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새나왔다. 무서운 사람이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다. 가령 생각지도 못한 식사를 차려놓는다던가, 빨래를 예쁘게 접고 바느질을 한다던가 하는 것들. 이제야 겨우 제가 아는 사람이 돌아온 것 같아 손을 뻗었다.
그는 루이스가 조심스레 뻗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고 뺨을 감싼 손바닥에 그의 얼굴을 부볐다.
“보고 싶었다.”
“네.”
“넌 아니었나?”
“...별로요?”
바로 눈꼬리가 올라가며 입이 일자로 굳어지는 게 퍽 귀여워, 루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삐지면 달래기가 여간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냉큼 웃으며 말을 고쳤다.
“농담이에요.”
“썩 유쾌한 농담은 아니군.”
“아무렴 여기까지 끌려온 저만 할까요.”
“...식사 하겠나?”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인지, 여긴 어디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