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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2014/12/09
*마지막이 될 뻔 했던 미발 원고.
벨져는 걸음을 서둘렀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벨져는 정보를 부정했다. 제 앞을 가로막던 작은 몸과 시야를 붉게 물들이던 선혈과 그 뜨끈하고 비릿한 감각이 되살아나 입술을 깨물었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지던 다리와 힘없이 가늘게 흩어지던 머리카락이 지금도 느릿하게 흘렀다.
그 전부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몸을 던져 지킨 사람이 벨져 홀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원이 도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급로를 지키던 건 벨져와 연합의 다른 결정사 마에스트로였다.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토마스 스티븐슨은 실전이 처음인지 연신 불안해하더니 결국 뒤를 노리던 강화인간의 등장에 당황해 도움이 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라고 해도 이미 공포에 하얗게 질린 얼굴에 벨져는 검을 빼들었다. 사실 벨져에겐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네 명 째를 처리 했을 때였다. 급습을 각오한 것 치고 너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께름칙했다. 본디 기습은 두 번 통하지 않는 법. 벨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마에스트로에게 다가가려 발을 뗀 순간 쓰러진 강화인간들이 폭발하며 검붉은 안개가 퍼졌다.
재빨리 스카프를 풀어 코와 입을 막았지만 이미 몸의 반응이 둔해진 후였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서는 강화인간들은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뜯어고친 건지, 몸에서 태엽과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게 노인의 나무인형을 떠오르게 했다.
트루퍼가 해체되며 내뿜는 안개가 능력자를 강화시켜준다면, 이것들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한 번 더 복구되는 게 영 성가셨다. 핵을 완전히 부수지 않으면 동력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회복을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라 검 두 자루를 바투 쥐었다. 토마스가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에 제 가정이 맞음을 확신한 벨져는 확연히 둔해진 몸을 움직였다. 신체강화능력을 잃어도 홀든은 홀든. 겨우 기계 따위에 질 리가 없었다.
문제는 소형화된 기계들이 다 제각기 다른 패턴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감각에 입술을 악물며 두 번째 기계의 팔다리를 베어냈을 때, 멀리서 절그럭거리던 기계가 포탄을 쐈다. 원상태였다면 장치를 베어내고 그것마저 피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포탄에 맞은 벨져는 그대로 주르륵 쓰러졌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나머지 내상에 울컥 피를 토했다.
루사나 수도원에서 봤던 강화인간마냥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장착한 채 다가오는 기계가 하나, 또 다시 포탄을 쏠 준비를 하는 기계가 또 하나. 벨져가 이를 악물며 검을 쥐었으나 팔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벨져의 움직임을 더뎌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은 동시에 전에도 겪었던 참혹한 패배가 떠올랐다. 빠른 도약과 함께 흩날리던 머리카락, 결연한 빛을 띤 붉은 눈동자.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기억이 하필이면 뼈저린 오점이라니. 허무하고 어이없어 코웃음쳤을 때였다.
‘샤드!’
순간, 그 때가 떠오른 건 비단 벨져의 회상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쨍그랑,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포를 쏘려던 기계가 와르르 부서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은 여전히 벨져에게 향해있었기에 무릎을 세우고 검을 들었으나 순간 어찔하게 찾아온 현기증에 눈을 찡그렸을 때,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벨져의 얼굴에 튀었다.
비틀거리던 루이스가 피를 토하고, 다시 한 번 쨍한 파열음이 귀를 두드렸다. 그녀의 몸을 관통한 칼날이 기계팔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수상쩍은 안개를 내뿜기 시작했다. 부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가고, 루이스의 등에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다리가 무릎부터 털썩 무너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찰나의 시간이, 벨져에겐 늘어진 필름마냥 느릿하게 흘렀다. 단 일 초도 놓치지 않고 새겨진 기억은 벨져 홀든의 오만의 대가였다. 이미 한 번 그녀를 통해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이면.
급한 대로 재킷을 벗어 상처부위를 눌러 지혈을 해보았지만 이미 전방에서 구르다 온 루이스는 정신을 잃은 후였다. 지원부대가 도착해 그녀를 데려가기 전까지 벨져는 저를 감싼 멍청함을 책망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감정은 벨져 홀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빚을 졌다. 이번엔 그냥 오만함의 대가를 치렀다는 말로 넘어갈 수 없었다. 벨져가 그녀에게 치러야 할 것은 제 목숨값이었다. 그걸 알기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큰형을 만났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소식을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온 동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벨져는 말을 꺼내길 주저하는 동생을 채근했다. 참담한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글의 멱살을 잡았다. 죽었다는 말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 그리 여겼건만, 벨져는 마침내 입은 연 동생의 말에 순간 아득해졌다.
숨을 밭으며 실소를 흘리자 대번에 인상을 쓰며 저를 노려보는 이글의 표정에 손을 놓았다. 그럴 순 없었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라는 말에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무시하면 그뿐이었다.
도착한 병실 앞. 문 옆에 쓰인 그녀의 이름에 벨져는 숨을 골랐다. 문고리를 돌려 열면 그만인데도 쉬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려오긴 했지만 마주하는 데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벨져는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창에서 빛이 쏟아져 눈을 찡그렸다 뜨자 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흔드는 머릿결이, 그녀의 뒤에 퍼지는 빛이 눈이 부셨다. 바람에 실려 온 약냄새에 벨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오만했음을 시인했다.
능력을 잃었음에도, 루이스는 그 삭막한 병실 안에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너…!”
그림같은 풍경에 잠시 멈춰 섰던 벨져는 태연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그게 무슨 태도냐고 따지려다 다시 입을 다문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루이스의 태도 때문이었다. 제가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벨져는 순간 제 막내동생이 또 질 나쁜 농담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벨져가 진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벨져는 말을 골랐다. 도대체 이 사람을 어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죄책감을 닮은 온갖 착잡하고 꿉꿉한 감정들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이 이어졌다.
단조롭고 삭막한 병실 안, 루이스만 홀로 색을 띠었다. 푸른빛이 도는 잿빛 머리카락도, 흰 피부도, 그리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 루이스의 그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에 벨져는 마른침을 삼켰다. 침묵 속에 감정을 내보인 게 저뿐이란 생각에 분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이제 루이스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이냐.”
“알고 온 거 아니야? 부인하고 싶은 거라면 대답해줄게. 사실이야.”
딱 잘라 선을 긋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루이스를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그 벨져 홀든의 얼굴은 잔뜩 경직되고, 오만하게 타인을 내려보던 눈동자 역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결정사 루이스는 이제 없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 씁슬하고 아픈 미소에 벨져는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돌아가.”
단호한 축객령에도 벨져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루이스가 언뜻 내비친 그 뼈저린 상실감은 저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벨져는 그녀가 잃은 것을 되찾아줄 수도 없다.
“왜 그랬지.”
그래서 벨져는 물었다. 이대로 고분고분 루이스가 하는 말에 따라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하는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벨져에게서 고개를 돌렸던 루이스는 크게 숨을 내뱉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그녀를 마주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가까이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벨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이스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가 저를 구한 이유를 구했으나 끝끝내 답을 얻지 못한 벨져였다.
“글쎄.”
“얼버무리지 마라.”
“…너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누군가를 지키는 건, 습관같은 거야. 그 날부터 쭉.”
그 날. 벨져는 루이스가 말하는 그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말도, 지킨다는 것도 다 연합의 동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벨져는 루이스가 지키는 울타리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벨져에게 루이스는 유일무이한 패배를 안긴 사람이었고 벨져는 한 때 그녀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이었다.
서로의 목을 노리는 사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스와 벨져 사이엔 유대감이라 부를 것도 무엇도 없었다. 덕분에 벨져는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지는 동시에 설욕의 기회를 잃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증오와 분노가 섞인 말을 내뱉으며 원망하는 편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루이스를 대하는 건 그녀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우리가 그런 사이였나?”
“네게 받은 이름, 돌려줬다고 생각해.”
그래서 벨져는 일부러 날을 세웠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이번에도 자신이 될 것 같아 비아냥거렸지만 루이스는 전보다 더 두터운 얼음벽을 두른 채 벨져를 밀어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무엇도 바라지 않을 뿐더러 되려 오래전 진 빚을 청산한 거라 말하는 루이스 앞에 벨져는 무력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 한단 말인가.
“하, 건방떨지 마라. 이렇게 내숭떤다고 네게 남는 게 뭐가 있지? 내가 괴로워하길 바라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홀든? 원하는 게 있어서 꾸민 일인 거 아닌가? 얼마든지 주지. 그러니까 말 해!”
“윽…!”
성큼 다가간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올리고 소리쳤다. 환자고, 여성이란 것도 잊고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벨져에겐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차가운 눈동자에 잔뜩 일그러진 벨져의 얼굴이 비쳤다.
“없어.”
벨져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환자복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우악스런 멱살잡이에 끌려왔던 루이스는 목 언저리를 만지며 콜록거렸고, 벨져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움찔 입가를 씰룩였다. 흐트러진 환자복 안으로 흘긋 보이는 붕대와 손목에 꽂힌 바늘, 피가 역류하는 튜브. 워낙에도 희긴 했지만 백지장처럼 핏기가 가신 얼굴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벨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콜록, 흐…….”
제가 한 짓이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선 벨져는 제 분에 못이겨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한 상대를 앞에 두고 길길이 날뛰었던 건 그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그 때는 상황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왜, 잘 된 거 아냐?”
침착함을 유지하던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 벨져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젠 ice도, 영웅도 죽었으니까!”
악을 쓰듯 내뱉는 말은 그녀의 결정검만큼이나 날카롭고 시렸다. 벨져를 구한 대가로 루이스가 치른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신경을 다친 채로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다시는 뛸 수 없다고도 했다. 사이퍼에게 능력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아주 잘 알았다.
힘을 바라며 모여드는 비능력자들, 그 욕망을 이용한 조직. 전쟁 이후로 꾸준히 그들을 쫓았던 벨져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전쟁 이후로 책임과 기대를 떠맡으며 영웅이 된 사람이었다. 영웅 루이스가 벨져 홀든을 구하고 능력을 잃었다. 사실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신문 1면에 실릴 헤드라인으로 이것보다 더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벨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이게 질 나쁜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깨고 말 하룻밤의 꿈이라면 그걸로 끝일 텐데. 하지만 입을 앙 다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은 이게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일깨웠다.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친 그녀 앞에서 벨져는 입이 두 개 라도 할 말이 없었다.
“비웃으려면 지금 해. 어차피 앞으로 계속 들을 테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뒤돌아섰다. 도망치듯 병실을 나와 어떻게 쉬었는지 모를 숨을 토해냈다. 최악.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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