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려던 벨져는 문득 아침에 루이스가 식탁 위에 써놓은 메모를 떠올리곤 식료품점에 들러 우유를 샀다. 처음엔 엿을 먹여줄 생각으로 가사 전반을 맡기긴 했지만 식사까지 맡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말 영문을 모를 일이지만, 영국인들의 손을 거치면 멀쩡한 식재료도 쓰레기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런 얘기는 영국 태생들을 놀릴 때나 쓰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정말 입에 댈만한 음식이 없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영국인이었으므로 벨져는 루이스가 한 음식엔 절대 손을 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차피 혼자 살면서 뭘 해먹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적당히 먹을 만한 걸 사먹고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차려놓은 아침을 같이 먹었는데 의외로 먹어줄 만 했다.
씻고 나왔더니 까치집을 하고선 불 앞에 서있길래 그 노력이 가상해서 한 입 정돈 먹어주려 했다. 물론 당연히 맛이 없을 테니 아침부터 욕해주고 상큼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던 심산이었는데, 벨져는 멀쩡한 아침식사에 감사해야할지 아니면 기껏 준비한 욕이 무용지물이 된 걸 탓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아침식사에 뒤이어 그래도 먹어줄 만한 음식을 내놓을 때면 벨져는 그동안 제가 알던 상식이 잘못된 건가 싶어 곤혹스러워졌다. 샌드위치나 간단한 수프, 샐러드같이 패턴은 단조롭지만 그래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기껏 그 점을 높이 사 식재료비를 부담하겠다고 마음먹은 다음날, 루이스는 늦잠을 자서 벨져를 엿 먹였다. 아침을 먹고 나갈 생각으로 일어났더니 식탁은 비었고, 버터 냄새가 돌아야할 부엌엔 싸한 냉기만 감돌았다.
같이 살다보니 자연스레 생활 패턴 정도는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루이스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이른 아침을 맞는 편인 벨져에게 내내 맞춰주다가 아차 방심한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정도 되는 맨션에 얹혀살면서 그것도 못하랴싶지만 피차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아침 한 끼 얻어먹겠다고 자는 사람을 깨우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나가서 사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쉽고 섭섭한 감정이 쌓이다보니 한 마디 했던 게 소소한 다툼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같이 살면서 지킬 규칙을 쓰고 있었다.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타협점을 찾아서 대화를 해보려는 노력이 가상했기에 벨져는 한 번 져주기로 했다. 집세며 금전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기에 얼마든지 우위에 설 수 있지만, 고작 그런 걸로 쪼잔해지고 싶진 않았다. 절대 휘말린 게 아니다.
벨져는 묘하게 저를 애 다루듯 하는 게 찝찝했지만 펜과 종이를 내밀며 잠시 시간을 갖자는 루이스는 반쯤 체념한 표정과 말투를 떠올리곤 얼굴을 찌푸리는 것밖에 못했다.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맞춰주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얼음쟁이 놈은 자기가 한 발 물러선 주제에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이래서야 꼭 애새끼처럼 투정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벨져는 총 스물 세 개의 요구조건을 적었고, 루이스는 딱 다섯 개를 적었다. 그것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들이라 벨져는 혼자 열심히 고민한 것 같아 머쓱해졌더랬다.
벨져는 벌써 한 달도 더 된 기억을 떠올리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어째 계속 저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상이 싫은 건 아니지만 자꾸만 루이스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기분이라 찝찝했다.
계단을 올라 열쇠도 꺼내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루이스가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이자 같이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벨져는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 시간이면 부엌에 있어야 할 루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 식료품점의 봉투를 내려놓은 벨져는 집안을 한 번 슥 둘러보곤 바로 루이스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않고 문을 열어젖히자 이불 위로 빼꼼 나온 머리카락이 보여 미간을 찌푸렸다.
“야, 어이!”
“으우움….”
루이스는 잠투정을 부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저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이 짜증난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자 그제서야 게슴츠레 눈을 떴는데 눈빛이 몽롱한 게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리곤 배시시 웃는데, 그바람에 손목이 잡히는 것도 뒤늦게 깨닫고, 뿌리치려 했을 땐 이미 저를 끌어당기는 힘에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그대로 침대로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벨져를 끌어당긴 루이스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끌어안고는 씩 웃었다 그리곤 다시 고른 숨을 내쉬는데 영락없는 잠꼬대라 애꿎은 벨져만 휘말린 셈이었다.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사람을 안고 난리인지. 루이스는 말 그대로 벨져를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상체만 애매하게 끌리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발을 딛고 있던 벨져는 따끈따끈한 체온과 폭신한 이불에 고민하다 신발을 벗었다. 아예 발까지 올리고 누우니 그나마 편하긴 했지만 저를 곰인형처럼 끌어안은 루이스가 새근새근 잘도 자는 건 아니꼬웠다. 저를 끌어안고 빙긋 웃던 얼굴에 떠오른 만족감에 자기만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밥하라고 깨우려던 거지만.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냐.”
“…….”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얌전히 기어들어온 자신인 것 같지만, 벨져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루이스는 대답도 않고 눈을 깜박이다 다시 눈을 감아버리는 게 퍽 피곤한 모양이었다. 벨져는 지난 삼 일간 집안일을 팽개친 동거인을 노려봤다. 묘하게 뜨끈뜨끈한 게 또 아프기라도 하나 싶어 손을 이마에 댔다. 멀쩡한 체온에 안심하고 손을 떼려는데 루이스가 고개를 돌리며 벨져의 손바닥에 이마를 부비더니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야.”
“일곱 시 이십분.”
“…미안.”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져가 대번에 인상을 쓰자 루이스가 피식 웃더니 이불을 당기며 바로 누웠다.
“난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챙겨 먹어.”
“흥,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명백한 축객령에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자기가 끌어당겨놓고는 이제 와서 쫓아내는 것까지 하여간 예쁜 구석이 없다. 김이 빠져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라도 갈까 생각하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삐졌어?”
“헛소리 마라.”
“흐아암, 그래도 오자마자 청소하고 스튜 해놨는데.”
벨져가 돌아서서 팔짱을 끼자 루이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도 졸린 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입술만 움직여 씩 웃었다.
“삐졌네.”
“졸려서 정신이 나갔군.”
“안 먹을 거야?”
“먹을 만 하면.”
루이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벨져가 시선을 피하는 걸 놓치지 않고 슬쩍 웃었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본심을 말하기 쑥스럽거나 부끄러울 때 이런 식으로 눈을 피했다. 하여간 누가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자존심은 세가지고.
몸은 무겁고, 자꾸만 눈이 감기지만 벨져를 이대로 혼자 뒀다간 나중에 더 귀찮아질 게 뻔하단 생각에 루이스는 따끈한 이불의 유혹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시큰둥한 무표정을 짓고 있던 벨져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말은 사납게 해도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마저 완벽히 감출 순 없는 법. 더구나 같이 살다보면 이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도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말은 안 해도 기뻐하는 걸 보니 역시 일어나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독야청청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외로움을 타는 건가 싶기도 했다. 개는 싫어할 것 같고, 조만간 어디서 혈통 좋은 고양이라도 구해다 안겨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 뒤치다꺼리도 다 제 몫이 될 것 같아 생각을 그만뒀다.
그래, 사실 지금도 사람 하나 뒤치다꺼리하기 바쁘다. 루이스는 제 옆을 떠나지 않고 툴툴거리는 벨져를 보며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지. 루이스는 벨져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국자를 들었다. 속 편히 한 대만 칠 수 있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