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무스 홀든은 서류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넥타이를 끌렀다. 그 일이 있었던 후로 집에 돌아와 잔업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의식을 잃은 동안 쌓인 서류와 일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그였다. 강화된 신체 덕에 회복 속도가 빠르다곤 해도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그에겐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영웅, 루이스의 죽음. 의식을 되찾았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후였기에 어찌 손 써볼 수도 없었고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에 몰랐고 그와 자신은 적대 세력의 능력자였기 때문에 문병을 오는 것도 힘들 거라 생각했다. 연합에 처리할 일이 많은 모양이라고, 아무 소식이 들리지 않는 건 멀쩡히 살아서 뒷수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섭섭한 마음을 달랬더랬다.
병실에 있는 동안 다이무스는 한 번 찾아오지도 않는 연인을 떠올렸다.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를 둘러싼 여러 제약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할뿐더러 만난다 해도 오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누구의 탓을 하지도 못해 다음을 기약하고 아쉬움을 달래는 게 고작인 연인. 그러나 같은 감정을 느끼고 서로를 생각하며 행복을 느낀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는 제 사람이었고, 자신을 완성하는 반쪽 조각이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반쪽을 잃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그의 장례식 이주 후, 그것도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는 기사의 사진을 통해서였다. 무심코 지나칠 법한 지면의 한 귀퉁이, 조그만 사진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면 언제 알게 되었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이무스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보여주겠다는 듯 굴 수도 없었다.
떳떳하지 않은 관계,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그리고 무력한 자신. 모든 것이 그로 끝나고, 지우려 할수록 깊이 남아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그 모든 감정이 거센 파도가 되어 쉴 새 없이 다이무스를 괴롭혔다. 모든 순간이 고통으로 얼룩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보다 더 절절하게 다가올 순 없었다.
퇴원한 다이무스는 생각과 감정을 비워내기 위해 일에 매달렸다. 그러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끝 깊이 배인 그의 감촉과 향기를 지워내기 위해 손을 씻고 향수를 뿌렸고 그와 함께 걸었던 거리를 피해 먼 길을 돌았다. 연합에 관한 일은 모조리 거절했다. 그를 떠오르게 하는 모든 것을 지우고, 잊고, 치우려 했지만 눈을 감으면 그 바스라질 듯한 미소가 아스라이 떠오르고, 다신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한순간이 후회와 그리움이 되어 빗방울처럼 떨어지면 다이무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슬픔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것뿐이었다.
다이무스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책상에 올려두곤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었다. 아직 해야 할 업무가 남아있었지만 타라와 드렉슬러가 더는 못 봐주겠다며 쫓아낸 탓에 집까지 일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바로 앉아 서류를 펼쳐놓았으나 책상 위엔 그 흔한 펜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드렉슬러가 대충 책상 위의 물건을 쓸어 담은 서류가방엔 평소에 쓰는 만년필이 들어 있지 않았기에 다이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없어져도 아쉬운 물건도 아니고, 당장 아쉬울 뿐이라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을 본 순간 턱하고 내려앉는 무게에 숨을 집어삼켰다. 한 켠에 들어있는 펜 대신 가죽으로 표지를 덧씌운 두꺼운 일기장을 꺼내든 다이무스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귓가에 들리는 심장 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으나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표지를 넘기자 익숙한 필체가 다이무스를 반겼다. 뿌옇게 차오르는 시큰한 감각에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지의 중앙에 자리한 문구 한 줄.
-당신의 모든 순간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단정한 필체로 쓰인 한 마디에 울컥 뜨거운 감정 덩어리가 치솟았다. 제 연인은 선물을 주면서 이름 하나를 남기지 못했다.
그렇게 가버릴 거라면 이름 정도는 남기지 그랬냐고, 이렇게 후회와 절망 속에 저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날 거라면 이 백지를 채울 기억이라도 남겨주지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를 대신할 생각으로 펜을 들었으나 시야가 흐려지는 바람에 손으로 눈을 덮었다. 고작 다섯 글자를 쓰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하얀 백지가 제 심장이라도 되는 양 천천히 그의 이름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