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복도엔 약냄새와 소독용 알콜의 싸한 냄새가 났다. 그리 길지도 않은 복도를 걸을 때면 언제나 숨을 집어삼키게 된다.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어 익숙한 나무문 앞에 서면 언제나 망설이게 된다. 그래도 벨져 홀든은 매일같이 깨어나지 않는 한 남자를 찾아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병실엔 누가 가져다 놓은 꽃향기가 약냄새와 섞여 벨져를 맞았다. 삑, 삑 일정한 간격으로 상태를 알리는 전자음도 베이지 색의 싸구려 벽지도 어제와 같다. 병실 안엔 그 흔한 시계 하나가 없어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안에서 시간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건 야속한 남자의 몸에 양분을 공급하는 수액과 링거액, 그리고 화병의 꽃이 전부였다.
철제 파이프 의자를 대충 발로 끌어다 앉은 벨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의 눈은 애틋한 감정을 담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았다면 연인이라고 생각할 법한 장면이었으나 그를 이렇게 만든 건 벨져 홀든 본인이었다.
살짝 떨리는 속눈썹에 벨져는 손을 거뒀다. 혹시나, 깨어날까 하는 기대에 그를 지켜보았으나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벨져를 괴롭혔다.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본 지 얼마나 지났는지. 벨져는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몸을 관통하던 감각이 선명했다. 피를 토하고, 자신의 품으로 쓰러지며 아스라이 지은 그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여느 때와 같이 차가웠고,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가리고 있던 환각이 겨우 걷혔다.
‘벨져. 벨져 홀든.’
그가 여기 있을 리 없다. 분명 그는 제 뒤에 있었을 터, 지금 제가 꿰뚫은 건 성가신 빛능력자 클론의 심장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지하연합의 영웅쯤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력하게. 정신을 차렸음에도 벨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방심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결정의 루이스는 6년 전 결정검 하나로 저를 꺾었던 능력자였다.
주르륵 쓰러지며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이 제 손을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제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힘없이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벨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충격이 심했다. 쓰러진 루이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티셔츠를 적시는 걸 보고서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그의 몸을 안아들자 루이스가 힘겹게 눈을 뜨고는 피식 웃었다. 벨져는 죽지 말라고 했고, 루이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론 선명한 기억이 없다. 루이스를 데려간 의료진들, 이글이 넘겨주던 검에 말라붙은 핏자국같은 것이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흐릿했다.
안개에 섞여있던 환각물질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벨져는 환각물질 따위에 당했다는 분노보다, 제 검이 향한 게 치명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를 찔렀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벨져는 진심으로 죽이려했고, 환각이 덧씌워진 상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몸이 루이스보다 작았기 때문에 심장을 빗겨나갔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멍청한 새끼.”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으면 한 대 후려갈기기라도 하지, 왜 그걸 고스란히 쳐맞고 심지어는 저 혼자 후련하다는 듯 구는지. 루이스는 단 한 번도 제 뜻대로 움직여준 적이 없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빚을 지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벨져는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에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용서를 빌진 않을 것이다. 따지자면 이건 쌍방과실이고, 그가 제게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사랑한다는 낯 간지러운 말은 꺼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를 연인이라 칭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제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제게 죄책감과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감정만을 남겨놓은 채 왜 그랬는지 답도 주지 않고 가버릴 순 없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조차 없었고, 기다림의 시간은 길기만 했다. 어서 깨어나서 그 붉은 눈동자에 투명한 빛을 담아 자신을 바라봐주었음 했다. 이대로 떠날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잘난 동료들을 두고 훌쩍 가버릴 인물도 아니거나와 그리 약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제 곁으로 돌아와 주었음 했다.
벨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는 건, 이렇게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혹시라도 제가 없는 사이 영영 떠나버릴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잠든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되고, 애틋하고 무거운 감정은 조금씩 그 부피를 늘렸다. 하루에 하나씩 더해, 매일 커져만 가는 감정은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다.
누가 열어놓았는지 창문을 타고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약한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뻗어 넘겨주다 문득 든 생각에 몸을 일으켜 다가갔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루이스의 뺨을 스치고, 벨져는 고개를 숙였다.
맞닿은 입술은 거칠었고 피부에 닿는 숨은 안타까우리만치 미약하게 느껴져 가슴께가 시큰했다. 이 감정에 확신을 주지 않는 남자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