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마음같이 나오지 않는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물을 수 없는 질문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토마스는 제 어깨를 잡는 루이스의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졌어.”
“네?”
“발을 딛고 있던 땅도 사라지고 어둠 속에 갇혀. 살아도 고통뿐이고,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지. 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아침 해가 뜨지 않기를 바랐어.”
“선배….”
담담하게 이어가는 것은 그의 절망이었다. 토마스가 본 선배는, 루이스는, 영웅이란 남자는 강한 사람이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는 영웅. 비록 그 방향이 제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를지라도 존경받아 마땅한 사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결코 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털어놓는 절망의 무게란 과연 어떤 것인지. 토마스는 루이스의 절망을, 그 어둠의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나는…. 더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포기해버렸지.”
“…….”
“그런데도 죽을 수가 없었어. 책임과 의무와 날 믿고 기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선배의 탓이 아니에요…!”
어쭙잖은 위로라는 걸 알지만,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그것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제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더 나은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걸론, 이 사람을 붙잡을 수 없다. 토마스는 문득 트리비아를 떠올렸다. 그 둘은, 그 연인은 트리비아가 떠나려 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루이스가 슬퍼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게 아닐까. 처음부터 그 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도 허공을 딛고 있던 게 루이스이며 그를 기다려주던 게 트리비아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텅 빈 허공에 사는 그를 받아줄 수 있을까. 루이스의 사랑이 트리비아의 사랑보다 깊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애정을 쏟아도 상대가 그걸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눈앞의 남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토마스 안에 켜켜이 쌓아올린 루이스라는 사람의 근간이 흔들리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알아.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지.”
“선배…!”
“그런데, 그 녀석이 날 잡아줬어.”
아득해진 머릿속에 루이스의 미소가 들어와 박혔다. 부서질 것 같은 미소가 아니라 홀가분하고 따스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상하지. 그런데 말이야,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떨어지는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데…. 걔가 그러더라고.”
루이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목을 가다듬고, 입꼬리를 올리는 그에게 전에 없던 여유가 보였다.
“그러면 왜 안 되느냐고.”
숫제 꿈을 꾸는 것처럼 읊조리는 루이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날이 서 다가오는 이들을 상처 입히는 고드름이 아닌, 끝없이 펼쳐진 얼음평원과도 같은 고요. 고향의 얼음호수가 그러했듯, 그 고요 앞에 인간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이 사람과 마주하려면,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루이스는 눈을 휘며 빙그레 웃었다.
“벨져는…. 알아줬어. 그리곤 그래도 된다고 하더라고. 가치 없는 삶이 뭐가 소중하냐면서 화를 내는 거 있지?”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마침내 루이스는 발을 디딜 땅을 찾았다. 그를 잡는데 필요했던 게 고작 말 몇 마디밖에 안 됐다는 허무보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재빨리 고개를 숙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자 루이스가 어깨 위에 올린 손으로 토마스를 토닥였다.
“살아도 된다고 해줬어. 자기가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저희가 못 미더운 건가요?”
“응?”
“왜, 왜 그게 벨젼데요? 우리는, 우리도, 당신을 걱정하고, 당신을…!”
“달라.”
내내 담담하게 남 얘기 하듯 말하던 루이스가 토마스의 격정을 딱 잘라 끊었다. 침착한 연합의 영웅의 얼굴을 한 루이스가 낯설다. 아니, 방금 전까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고요를 머금었던 남자가 동경해온 선배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야. 나는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했어. 너희들을 앞세워 살아남는 걸,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토마스. 그건 날 더 괴롭게 하는 거야.”
“선배!”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그 녀석은 달라.”
루이스의 입을 막고 싶었다.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녕, 나는 당신의 첫 번째가 될 수 없나.
“벨져는…. 글쎄, 나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렇게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르지. 영웅 전기의 시작은 언제나 벨져 홀든이잖아?”
더 말하지 말아요. 제발. 더 들었다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런 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입술 한 번 달싹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끔찍이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니까, 다시 돌려놓는 것도 그 녀석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배라고 불러선 안 되는 거였다. 그를 계승하고 싶었다. 그의 절망이 아닌, 찬란히도 빛나는 명예를 이어받고 싶었다. 이런 걸 잇게 되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손이, 아련히도 빛나는 미소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을 리 없다. 이어받는 것조차 자신이 없다. 영웅이 전설이 된다는 말을 그리 쉽게 담아선 안 됐다. 차고 두꺼운 얼음벽으로 나약한 자신을 감추던 인간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버렸다. 영웅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이길 수 있을까.
그 두 사람 앞에서 자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저, 보호받아야 하는 조연.
“미안.”
“…제가 강해져도, 소용없겠죠.”
“넌 잘 해낼 거야. 내가 없으면, 그 다음은 네 시대니까.”
아니오. 저는 당신의 시대에 당신과 함께이고 싶어요.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말을 가슴에 묻고, 토마스는 애써 웃었다.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팔을 벌려 토마스의 등을 감싸 안고 토닥였다. 몸이 닿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망 없는 첫사랑이 시리도록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