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그다운 죽음이었다. 고결한 희생을 바쳐 모두를 구하고 참사와 전쟁을 막았다. 극히 이례적으로 영국 왕실에서도 조의를 표했으며 영웅 루이스의 죽음은 세계 곳곳에 퍼져 추모가 이어졌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안타리우스 공습전과 회사와 연합의 갈등. 그 모두를 잠식시키고 일궈낸 평화 앞에 인간된 자들은 경의와 애도를 보냈다.
루이스의 장례식엔 조문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이어졌고, 장례가 끝나도 그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이들은 줄지 않았다. 매일같이 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그의 죽음이 얼마나 고결하고 희생적인 것이었는지, 그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떠들기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영웅을 잃은 연합이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메우고 신문의 헤드라인에서 루이스의 이름이 내려갔다. 전쟁 끝에 사람들이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즈음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벨져 홀든이 나타났다.
잔뜩 굳은 얼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그의 손엔 하얀 장미 꽃다발이 들려있었고, 여전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발은 루이스의 무덤 앞에 멈췄다.
가져온 꽃다발을 시들어가는 다른 꽃 위에 올린 벨져는, 루이스의 이름과 생몰연도, 여왕이 친히 내린 조의 문구를 새긴 비석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끝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 전설이 되어 잠들다.
* * *
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벨져는 제 셔츠를 주워 입은 루이스가 찻잔을 들고 걸어오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깨어있는데도 어딘가 꿈을 꾸는 기분이다. 늘 그렇지만, 아무리 벨져라도 깨어난 직후는 힘들었다.
벨져는 아침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리로 생각을 하는 대신 팔을 벌렸다. 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막상 일어나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린 잔상에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루이스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침대를 벗어난 그 잠깐동안 몸이 식어서 끌어안기엔 별로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를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자 루이스가 벨져의 등을 안아 두드렸다. 아이를 달래듯 자상한 손길은 일어나란 재촉이라기 보단 더 자라는 것 같았다.
“벌써 두시야, 벨져. 휴일 아침에 늑장 부리는 건 기혼 여성의 특권이라고.”
“서두르지 마라…….”
루이스가 작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맨다리에 다리가 얽히고, 루이스의 몸에선 싸구려 비누 냄새와 함께 제 향수 냄새가 났다. 비록 첫만남은 최악이지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잖아. 침대에만 있으려고?”
“시간은 많다. 서두를 필요 없어. 조급하게 굴지 마라.”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에 감은 팔을 당겨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 여자들처럼 부드럽진 않지만, 품안의 온기와 그의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돌아누웠다. 셔츠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에 가늘게 눈을 흘겼으나 루이스는 제 생각에 빠져 처연하게 웃고 있었다.
“글쎄, 왤까. 난 내 미래를 상상해본 적이 없어. 당장 오늘을 사는 것도 벅차서, 내일도 내다볼 수가 없나봐.”
안타까운 말이었다. 한 치의 꾸밈도 거짓도 없는 진솔한 진심 앞에 벨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내내 굳건한 얼음성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그의 본심은 너무나 나약해서, 더 소중히 지켜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파스스 웃고는 굳은 얼굴로 말을 아끼는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려 짓는 미소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얼음꽃과도 같았다.
한 겨울 숲에 소복이 내린 눈꽃. 잔잔하게 가라앉은 얼음 호수. 그 평온한 얼굴에 위로 대신 입을 맞추려던 벨져는 부르튼 입술을 보고 허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감쌌다. 엄지로 도톰한 입술을 문질러도 루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리며 손끝엔 그의 숨이 닿는다.
그 따스하고 간지러운, 평온한 감각. 이렇게 가만히 웃고 있으면 한 송이 물망초가 떠오를 정도로 청초한 얼굴인데, 왜 입만 열면 사사건건 부딪히는 건지. 괜히 부아가 치밀어 루이스의 입술을 매만지던 엄지를 뺨으로 옮겨 그대로 볼을 꼬집었다.
“아야야. 아파!”
저보다 한 살이나 많은 주제에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얼굴이라니. 평소의 그 침착하고 냉정한 분위기와 서늘한 눈빛만 아니면 원래 나이에서 예닐곱쯤은 깎아 불러도 충분히 믿을 법한 얼굴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처럼만 입고 다니면 좀 봐줄만 할 텐데.
가끔 보여주는 순박한 얼굴이 빼도 박도 못하게 취향이라 더 짜증이 났다. 왜 하필이면 루이스 따위에게. 벨져는 루이스의 뺨을 놓았다. 손을 놓자마자 뺨을 문지르는 그에게 작게 핀잔을 주었다.
“엄살은.”
“진짜 아프거든. 하여간 예쁜 게 힘은 세가지고.”
“말이 좀 이상하군. 아름답고 강한 게 뭐가 나쁘단 거지?”
“...말을 말자. 응. 그래.”
루이스가 벙찐 얼굴을 하더니 달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벨져의 마음에 들 리 만무했고, 다시 루이스의 얼굴을 잡자 움찔 몸을 떤 그의 동공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제 손아귀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자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루이스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시선을 피하는 그의 뺨을 단단히 잡고, 벨져는 눈을 질끈 감은 루이스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그저 닿은 것뿐이지만, 닿았다 떨어질 때 나는 소리만큼은 여느 키스 못지않았다.
눈을 뜨자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루이스가 보여, 벨져는 혀를 찼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도 모르나?”
정말 놀랐는지 루이스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가늘고 긴 속눈썹이 떨리는 게 예뻐 가만히 바라보자 루이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를 놀리는 대신 덩달아 부끄러워진 벨져는 도리어 성을 냈다.
“왜 이런 걸 부끄러워하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응,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루이스가 벌떡 일어나 벨져를 마주봤다. 뭔가 굳게 다짐한 듯 결연한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루이스의 손이 벨져의 얼굴을 잡았다. 당황할 새도 없이, 루이스의 입술이 닿았다. 벨져가 방금 한 것과 달리 조심스럽고 간지러운, 부드러운 키스에 벨져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고, 말캉한 입술 사이로 들숨인지 날숨인지 모를 축축한 숨이 오간다. 누군가 혈관 속에 가득 날개를 넣고 부채질 하는 것 같다. 그의 손이 닿은 피부가 덴 것 마냥 화끈거리고, 가슴이 뛴다. 속눈썹이 떨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 * *
눈을 뜸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난 벨져는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선명한 기억은 때로 잔인하게 그 주인을 괴롭힌다.
당장이라도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왜 직접 오질 않냐며 투덜거릴 것 같은데,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 전부 알고 있는데 어째서 가장 행복했던 날의 기억을 되풀이하는 걸까. 벨져는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밝히고, 미풍이 넘실거리는 화창한 날이다.
맑은 날씨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 마지막을 직감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서두를 리 없었다. 손을 잡는 것부터 키스, 몸을 섞는 것까지 남들은 몇 달, 몇 년을 들여 돌아가는 길을 왜 그리 서둘렀으며 왜 그다지도 1분 1초를 소중히 여겼는지. 벨져는 그 모두를 루이스의 무덤 앞에 서서야 깨달았다.
몇 번을 돌이켜봐도 봄날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솜사탕처럼 달콤한 나날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더없이, 덧없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