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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눈 쌓인 교정, 분수대 앞.
* 호그와트au
호그와트의 학생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근 십년간 인구가 늘고 있다곤 하지만 마법사나 마녀의 수는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었고, '그' 사건 이후로 마법사의 인구가 줄다 보니 한 기숙사의 학생이라고 해봐야 백 명이 될까 말까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났다 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오, 작은형!”
“저리 가라. 이글.”
“캬, 난 형을 다시 봤지 뭐야. 노땅한테 개겼다가 된통 깨졌담서?”
“그게 무슨 천박한 말투냐! 네 녀석은 조금 더 홀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왜애. 난 작은형이 인간적이어서 좋은걸.”
이글은 혼자 분수대에 앉아있던 벨져에게 다가가 킬킬거렸다.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년은 그 나이 소년답게 장난기가 많았고, 홀든의 수치이자 걱정이라는 말답게 호그와트 안에서도 항상 말썽의 중심에 있었다. 홀든 최초로 슬리데린에 들어가지 않은 걸 첫째로, 모범적이다 못해 너무 완벽해 다가가기 힘든 그의 형들과 달리 그리핀도르의 기숙사 점수를 깎아먹는 주범이자 골칫덩이였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천진한 천연덕꾸러기라는 게 이글의 장점이지만 그와 십여 년을 같이 보낸 벨져에게 동생이란 홀든의 어디에서 이런 게 나왔는지 모를 미스터리이자 귀찮은 대상에 불과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렴, 이글.”
“우와앗. 엄청 상냥한 얼굴로 꺼지라고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아아, 영웅님한테 알려주러 가야…. 으엑!”
“당장 멈춰.”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도망가려는 이글의 머리 꼬랑지를 잡아 세운 벨져는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막냇동생의 어깨를 잡아 분수대에 앉히고 눈을 맞췄다.
“약속해라. 절대, 절대 그 자식한테 말하지 마.”
“헤헤, 그럼 뭘 해줄 건데?”
“……. 제길.”
“하하하! 이번 호그스미드 외출 때 데리고 나가준다고 약속하면 생각해볼게!”
“이글! 안 된다는 거 알면서 억지 부리지 마라!”
“흐으응. 그럼 버터 맥주?”
열두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당당하게 음주를 입에 담는 걸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 뱀같은 녀석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만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야 한다. 세심한가 싶으면서도 답답할 정도로 둔한 녀석이니 아직 희망은 있다. 벨져는 오늘 있었던 해프닝이 이틀도 안 가 잊히길 바랐다. 교수에게 대든 것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내막이 알려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간사한 뱀처럼 웃는 이글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이글이 배를 잡고 웃었다.
“즐거워 보이네, 이글.”
“큽, 푸흡. 그게, 하하! 루이스, 그거 알고 있어?”
“글쎄,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네게 호그스미드 외출은 일러. 반장 회의 때 조용히 말씀드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지금 벌점을 주는 게 나을까?”
“칫, 재미없긴.”
언제 왔는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쌀쌀해진 날씨에도 목을 훤히 내놓은 루이스가 허리를 짚으며 퍽이나 다정한 말투로 이글을 타일렀다. 타이른 다기 보단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어쨌거나 천방지축인 이글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글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릴지언정 순순히 물러났다.
그 잠깐 사이에 사람을 흔든 녀석이 회랑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벨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벨져와 같이 이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루이스가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내린 눈이 뽀드득 뭉쳐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후드 안쪽으로 보이는 흰 목이, 그 잠깐 사이 벨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도 모르게 꿀꺽 목울대를 울린 벨져는 루이스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네.”
“가던 길 가라.”
그 사이 차가워진 분수대에 앉자 루이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옆에 앉으려나 싶어 한 쪽 다리를 당겨 눈을 치워도 루이스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스타이거 교수님과 한 판 했다며?”
“그게 뭐.”
“…그거, 혹시 나 때문이야?”
움찔, 정곡을 찔린 벨져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의 얼굴엔 표정이라 할 게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에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누가 너 따윌 신경 쓴대?”
“아니면 말고.”
“하!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 따위가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란 거냐?”
“그만.”
서늘한 눈매와 살벌한 눈빛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그 따위에 화를 내는 루이스라니, 상상도 못했던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벨져 쪽이었다. 자신이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벨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다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가 널 책임져주기라도 할 것 같아? 사정 안 좋은 게 어디 너 하나야? 그런데 왜 너만 받아줬겠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슬 퍼런 눈빛으로 조용히 타오르던 루이스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크게 놀란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눈만 깜빡거리던 루이스가 손을 들기에 지팡이를 꺼내는 줄 알았는데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소리 내서 웃는 루이스를 본 적이 있던가.
소복이 눈이 쌓인 분수대 앞, 눈이 녹아 얼음으로 굳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같이 고요한 풍경 속에서 루이스가 웃었다. 그 자신도 주체하기 힘든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다가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눈을 휘는데, 햇살이 물에 닿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멎고, 햇살이 멈춘다. 멈춘 시간 속에 그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뺨에 열이 몰려, 벨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치고 너무 격렬하게 웃느라 벗겨진 후드 안으로 보이는 흰 목과 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겨우 진정하고 숨을 고른 루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벨져의 앞에 섰다.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루이스는 O.W.L.이다 뭐다 해서 바빴던 내내 우중충하게 다니던 사람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래.”
“뭐가.”
“스타이거 교수님은 좋은 분이야.”
뜻 모를 말에 미간을 좁히자 루이스가 다시 웃다가 주먹을 입에 대며 헛기침했다.
“내 평생 가장 편한 여름방학이었어. 늘어져라 낮잠도 자고, 밤낚시도 가고. 네가 오해할만한 건 전혀 없었어. 그냥, 뭐랄까…….”
“지금 내 앞에서 그를 두둔하는 건가?”
“두둔한다기 보단….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지?”
“스타이거 교수님이 나한테 불건전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한 거 아니야?”
“걱정이라니, 내가? 너를? 하! 착각도 유분수지!”
“그럼 다행이고.”
루이스가 뒷짐을 지더니 슬며시 웃었다. 혼자만 열을 내는 게 분해서, 이를 악문 벨져는 손을 뻗엇다. 뒤늦게 피하려고 해봤자 거리를 좁힌 건 그였고, 벨져의 손은 그대로 루이스의 목을 감쌌다. 몸을 뒤로 빼며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스는 차가운 손이 목에 닿자 몸을 떨며 뒷걸음질치고, 발이 미끄러지며 허우적거리다 뒤로 넘어져버렸다.
“으으.”
“흥. 꼴좋군.”
벨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올리자 성대하게 넘어진 루이스가 엉덩이를 만지다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멍청하게 혼자 자빠진 거지만 크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대뜸 내밀어진 하얀 손. 벨져는 루이스의 손에서 웃음기가 걷힌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풀이 인 헐렁한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손목은 같은 남자의 것치고 가늘고 희다. 왠지, 봐선 안 되는 걸 봐버린 기분이었다.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루이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 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암시도, 해석해야 할 필요도 없다.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다 손을 맞잡자 루이스가 빙긋 웃었다. 눈꽃 결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미소가, 흰 눈밭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얍.”
“으왓!”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루이스가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맞잡은 손을 확 잡아 당겼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 벨져는 그대로 루이스의 위에 엎어졌고, 루이스의 웃음소리와 함께 솜털 같은 냄새가 확 풍겼다.
“하하하. 아아. 정말이지, 구경꾼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 자식…….”
“벨져 홀든이 놀라는 얼굴이라니. 카메라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루이스는 짐짓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어버렸다. 평소의 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순박하고 소년 같은 웃음에 벨져는 루이스의 가슴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입가를 씰룩였다.
“감히 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미안, 그지만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너만 만나면 되는 일이 없어! 지팡이 들어!!”
“잠깐 벨져, 진정하고…….”
양 손을 들고 순진한 척 눈을 깜빡여 봤자, 입꼬리가 부들거리며 올라갔다. 애써 웃음을 참는 꼴이 더 보기 싫어, 벨져는 옆에 있는 눈을 한 움큼 집어다 루이스의 얼굴에 문질렀다.
“차거! 야!”
“죽어!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네가 먼저, 흐앗.”
셔츠 안으로 눈이 들어가자 루이스가 움찔 몸을 떨며 가는 비음을 흘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떼자 루이스가 가쁜 숨을 내쉬며 벨져를 올려다봤다. 얇게 뜬 눈에, 잔뜩 붉어진 얼굴, 하얗게 서리는 입김. 야릇한 표정에 벨져의 얼굴에 다시 열이 번졌다.
“읏.”
“……벨져?”
“말 하지 마. 그랬다간 죽여 버릴 거다.”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쥐었다가 놓으며 일어났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에게, 제 심장 소리가 전부 들릴 것만 같았다.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글 녀석이 수상한 저주를 건 게 틀림없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혼쭐을 내주리라. 그렇게 다짐한 벨져는 아직도 눈밭에 어정쩡하게 앉은 채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를 무시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망토가 휘날리는 걸 정리하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텅 빈 회랑을 걸었다.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고, 루이스로부터 멀어진 다음에서야 벨져는 벽을 짚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자꾸만 그 야릇한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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