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사노에서 포트레너드로 온 후 은신처를 만드는 대신 함께 살았던 루이스의 플랫에 이글이 토마스 스티븐슨을 달고 찾아왔다.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는데,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다. 순순히 맞아줄 리 없는 녀석이 일부러 맞고는 꺼낸 말이 더 가관이었다.
“형이 루이스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형의 착각일 뿐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만 좀 해! 형만 슬픈 줄 알아? 연합은 아직도 초상집 분위기라고! 그런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두지 말았어야지!”
“이글씨!”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공허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공허. 이글의 말이 맞았다.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미소로 제 뺨을 쓸던 그를 그냥 보내선 안 되는 거였다. 그게 기억 속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연합이 소중하다 한들 자신을 두고 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모두가 제 오만이었다.
“그럼.”
“뭐?”
토마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이글이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박스에 넣다 말고 반문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데?”
“작은형….”
“그 빌어먹을 자식은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 그런데 뭐? 내가 그녀석을 가장 잘 안다고? 웃기지 마라, 이글. 그 녀석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 사랑했다면 이렇게 모질게 굴 리 없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잊을 수도 없는 최악의 기억을 남기고 떠났을리 없다. 그의 부고를 신문을 통해 듣고, 장례도 끝나 무덤 앞의 꽃마저 시들어갈 때에서야 찾아가도록 두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형은 아무것도 몰라.”
“그러는 넌 얼마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벨져는 이글의 멱살을 잡아챘다. 자기도 분해 죽겠다는 듯한 이글이, 입을 열려다 말고 시선을 피했다.
“이글 홀든!!!”
“그만해요!”
가만히 지켜보던 제 3자의 개입에 벨져는 시선을 돌렸다. 눈물 범벅의 애송이가 주먹을 꽉 쥔 채 벨져를 보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선배는, 루이스 선배는….”
“닥쳐라.”
“형!”
“네가 그 자식이 지키려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라.”
“애먼 애한테 화풀이 하지 마!”
잠자코 잡혀있던 이글이 벨져의 분노가 토마스에게 향하자마자 팔을 잡았다. 애초에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게 누구인가. 그토록 아끼던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리 연합의 영웅이라 한들, 한 사람이 그 모두를 감당할 수있을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루이스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웠다. 영웅의 그늘에 숨어, 그를 앞세워 살아남은 이들을 벨져가 용서할 수 있을리 없었다. 생전에 지키려하지 않았다면 살인귀가 되어서라도 복수했을 것이다.
벨져는 묻고 싶었다. 왜 자신만의 루이스가 될 수 없었는지.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제 옆에 있는 걸로 충분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럼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토록 지키려했던 이들은 제게서 추억 한 조각마저 앗아가려 하는가.
“선배를 아낀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지, 넌 모를 거다.”
“루이스 선배는…!”
“그러니 네 영웅에게 감사해. 지금 여기서 널 베지 않는 건,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이니까.”
서슬퍼런 눈빛에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진심이다. 모두가 슬퍼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벨져같진 않았다. 갈 곳 잃은 분노와 상실감에 허덕이는 남자는, 고고한 벨져 홀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제 기억 속 마지막 루이스를 떠올렸다. 머리를 쓰다듬고, 슬며시 웃던 루이스는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같았다. 평소의 듬직한 선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후련해보였다.
그래서 잡지 못했다. 잡는다고 잡힐 것 같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쓰게 웃으며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역시, 걱정이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선배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걱정했어요. 하지만 이 남자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동경하던 사람이다. 그와 같은 선에 서고 싶었다. 그의 등을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자리를 너무나 쉽게 꿰찬 남자에게 마지막까지 지고 싶지 않았다.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해. 둘 다.”
“나가.”
“…하아. 플랫은 형이 알아서 해.”
이글은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쓸어담고는 박스를 토마스에게 넘긴 뒤 돌아섰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엔 그의 물건이라고 할 것도 얼마 없었다. 벨져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작은형.”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나가.”
“…너무 얽매여있지는 마.”
얽매여있지 말라는 말에 벨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벨져 홀든에게 루이스를 떼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과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