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무스는 내려온 지령서를 읽고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그 지령서를 가져온 타라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다이무스는 보고 있던 서류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어, 홀든. 그렇다고 내가 갈 순 없잖아?"
"지금 하고 있는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고 생각한다만."
"그거라면 걱정마. 어제 용기사 둘이 복귀했으니까."
타라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싱긋 웃었고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명왕조차 이기지 못하는 그녀를 다이무스가 이길 수 있을 리 없거니와,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다이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라는 만족한 듯 다이무스가 책상 위에 쌓아뒀던 서류철들을 들었다.
"이건 정의로운 쪽에 가져다줄테니까, 나머지는 되는 대로 괴짜한테 가져다줘."
"알겠다."
짧게 대답한 다이무스는 타라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울컥 치미는 욕지기에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런다고 막아질 리가 없었다. 책상을 짚고 등을 수그리자 바로 입에서 쏟아지는 얼음꽃이 사무실 바닥에 부딪혀 깨졌지만 다이무스는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날카로운 꽃잎들이 입 안의 살을 찢고 베어도 당장 숨을 쉬는 게 먼저였다. 다이무스는 가슴을 치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코로 마시는 걸론 부족해 입을 벌려 공기를 마시고 뱉기를 반복하며 눈을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구토때문에 따라붙는 생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다이무스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눈을 떴다.
입에 느껴지는 피맛에 물로 입을 헹구려 일어나려다 휘청이는 바람에 급히 책상을 짚었다.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이런데, 한동안 같이 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늘어난 인구때문에 전부터 코어레너드 관리 부서에서 인원 보충을 요구하긴 했지만 하필 그게 자신과 그가 될 줄이야.
코어레너드는 연합과 회사의 공동 관리 구역이기 때문에 아무리 적대세력이라 해도 일단은 협렵을 해야 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경쟁과 분란이 없겠냐만,은 같이 부대끼며 일하는 사람들인지라 지내다보면 정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코어레너드로 보냈던 이들 중 몇몇은 소속을 바꾸기도 하고, 종종 커플이 생기기도 했다. 위에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저를 고르고, 연합에선 그를 내보낸 것이겠지만 문제는 다이무스 홀든이 엽합의 영웅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애절하고 애틋하게.
다이무스는 이마를 짚고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들고 화장실로 향한 다이무스는 물로 입을 헹궜다. 물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렸지만 그보단 가슴이 더 따금거렸다. 세면대에 뱉어낸 물이 붉게 물들어 수채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전에 생긴 상처가 아물어도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입가를 매만지다 약통을 열었다. 상처를 낫게 하는 연고가 쌉쌀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아홉시 정각에 딱 맞춰 출근한 다이무스는 잔뜩 어질러진 책상들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야 필요한 서류를 제때 찾기도 힘들 게 뻔했다. 그와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라 다이무스는 혀를 내둘렀다.
"홀든?"
"아이스."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저도 그게 더 익숙하니까요."
루이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 한 반자 늦게 손을 맞잡았다. 불쾌할 법도 한데 루이스는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손을 놓았다. 차가울 거란 인상이 있던 손은 보통 사람들처럼 따스했다. 걱정과 달리 얼굴을 마주하고 손까지 잡았음에도 아직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전 손을 잡았을 때, 조금 더 붙잡고 있을 걸 하고 후회했지마 이미 늦은 후였다.
"잘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제 미리 들러서 만나봤는데 다들 일만 하면 그만이라더군요."
"코어레너드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 세력의 지역이라면 모를까, 공동 관리 구역에선 연합이고 회사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자칫 잘못했다간 잘못과 책임을 뒤집어쓰는 데다 적에게 자치권을 뺏길 수도 있는데 그 위험을 무릎쓸 필요가 없었다. 마침 들어오는 직원과 눈인사를 나눈 루이스가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은 저걸 쓰시면 됩니다. 바쁘다면서 저한테 안내를 해달라고 하던데 그래도 회사쪽 사람이 편하면 조금 더 기다리시죠."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귀찮게 할 거 없지."
서면상으로라곤 해도 이미 할 일도 숙지하고 있고, 코어레너드의 행정관 구조도 알고 있지만 다이무스는 순순히 루이스의 뒤를 따랐다. 루이스는 넓은 건물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문마다 걸린 팻말을 살피며 가끔 발을 멈추고 눈을 맞추며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다이무스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귀에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제게 향하는 붉은 눈동자에 심장의 박동이 거세졌다.
기분 좋은 설렘에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걷던 다이무스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표정을 굳혔다. 잠잠한가 싶더니 순간 격통과 함께 찾아온 역한 구토감에 다이무스는 입을 틀어 막았다. 다른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당사자 앞에서 누군를 향한 마음인지 빤히 보이는 꽃을 토할 순 없었다.
"홀든?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여기까지 하지."
다이무스는 올라오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참아내며 뒤돌아섰다. 입을 막고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다이무스는 변기를 잡고 참았던 얼음꽃을 토해냈다. 얇은 칸막이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려 고개를 쳐들자 피식 웃음이 샜다. 그의 친절은 제게 독이었다. 타는 목마름에 너무 달아서 마실 수밖에 없는 바닷물. 마셔봤자 달고 시원한 것도 잠시일 뿐,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걸 알지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는 제 어리석은 마음에 실소했다.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표정을 굳힌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입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