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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2 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2016.02.15 St. Valentine's Day
- 2016.02.05 [벨져루이]
- 2016.01.27 [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
- 2016.01.16 [벨져루이] 어떤 동행 07.
- 2016.01.12 Happy Birthday to you, Belzer. 2
- 2016.01.10 [벨져루이] 어떤 동행 06.
- 2016.01.03 [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 2016.01.03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 2015.12.30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글
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생각할 땐 재밌었는데....ㅠㅠ 쓰다보니 재미가 없어서 쓴 곳까지만 올림
** 게이머 은퇴 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셰프들이 유명인의 냉장고로 하는 시간제 요리쇼에 오늘 게스트로 초대받은 벨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루이스에게 카톡을 보냈다. 촬영을 시작했냐는 질문 옆에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 걸 봐선 핸드폰을 볼 여유가 없거나, 아니면 정신 자체가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벨져는 잠시 응원차 방송에 들어가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괜히 봤다가 또 망해가는 거 보고 심란해지면 이번 방송을 망칠 가능성이 컸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자리에 앉아 셰프들이며 패널들과 인사를 나눈 벨져는 제작진이 미리 옮겨놓은 냉장고를 보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닥달을 하긴 했지만 집을 비운 이틀 사이에 루이스가 또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아, 오늘의 특급 게스트를 모십니다!”
벨져는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 그래도 몇 번, 루이스가 집에서 셀프카메라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잡히면서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벨져였다. 셰프들의 요리 대결에 앞서 냉장고를 공개하는 시간이 이렇게 긴장될 줄이야. 적당히 오프닝 멘트를 주고받던 벨져는 냉장고 앞에 선 진행자들이 손잡이를 잡는 걸 보고 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어, 왜요. 왜 긴장을 하시죠? 여태 여유만만이시더니.”
“벨져씨 이런 모습 처음 봅니다. 경기할 때도 긴장을 안 하는 선수였거든요.”
두 엠씨가 긴장을 풀라는 듯 사람 좋게 웃었지만 벨져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정리도 안 된 집을 보여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인가. 벨져는 영혼 없이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제 동거인이 워낙....”
“아....”
“아, 루이스씨와 동거중이시죠?”
“그렇습니다. 지금 촬영중일텐데.... 제가 집을 이틀동안 비웠는데 그동안 얼마나 엉망으로 해놨을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셰프들이며 같이 나온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벨져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또 오늘 특집이 숙소요리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클레어씨?”
“어머, 그럼요! 사실 아이돌 숙소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또 선수들은 아니잖아요.”
“사실 프로게이머 숙소 냉장고는 이런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이돌 대표로 나온 클레어 스미스가 해맑게 웃었다. 전에도 한 번 집에 방문해 벨져가 만든 요리를 맛봤던 그녀는 두 사람의 집이 얼마나 깔끔하며 벨져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늘어놓으며 벨져의 냉장고 오픈을 잠시나마 늦춰주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루이스씨가 집에서 뭔가 요리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뇨. 주방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 아니 루이스씨는 절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야, 그렇게까지 가나요.”
“그렇습니다. 완제품을 먹는 건 괜찮은데, 자기가 직접 하는 건.... 라면 정도일까요.”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말에 애써 웃음을 눌러 참은 진행자가 냉장고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루이스씨는 그럼 전혀 냉장고에 손을 안 대는 겁니까?”
“못 대게 하죠. 보통.”
“이야.... 이거 왠지 불쌍한데요. 그 친구가 참 괜찮은 친구거든요.”
“사람이야 뭐....”
갑자기 루이스에게 기우는 동정론에 말끝을 흐렸다. 물론 사람이야 괜찮지만, 동거하는 애인이 아니라 같이 사는 입장에서 보면 루이스는 꽤나 번거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청소하기 귀찮다고 안 움직이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안 먹고 사람 속을 썩이는 데다 또 냉장고는 왜 그렇게 헤집어놓는지. 벨져는 지금 열심히 방송을 하고 있을 애인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럼 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죠! 전화 연결 한 번 해볼까요!?”
“아마 지금 촬영중이라 힘들 겁니다.”
“아, 어떤...?”
“타방송국의 조그만 텔레비전인데 실시간으로 하니까 아무래도....”
“그렇군요! 하긴 또 요즘 섭외순위 1순위가 아닙니까. 제가 듣기론 벨져씨보다 더 버신다고....”
짓궂은 질문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수입으로 치자면 그렇지만 워낙 보유 자산이 다르니까요.”
턱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자 셰프들이 박수를 치고 말을 꺼낸 진행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종종 가는 레스토랑의 메인 셰프가 계산은 루이스가 하지만 실제 카드는 벨져의 카드라는 증언을 보탰고, 벨져는 이틀동안 첫 출연이라고 저를 보는둥 마는둥 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그까짓 BJ 짝퉁 방송, 그냥 자기 채널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방송국까지 가서 해야 하나 싶었지만 루이스는 첫 공중파라며 같이 이 프로에 나오자는 벨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가버렸다.
그래. 그까짓 출연료 안 벌어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 수 있다. 벨져 홀든은 애인 한 사람쯤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못해 그를 위해 구단까지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어올라 벨져는 아까 접어든 카드를 꺼냈다.
“그래도 뭐, 시험 삼아 한 번 전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방송중이라고 전화를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벨져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 시작 전에 꺼둔 전원을 넣고 잠깐 흘러가는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는데 손에 든 핸드폰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벨져는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피식 웃었다.
“또, 우리 루이스씨가 양반은 못 되네요.”
“아! 루이스씨한테 전화가 온 겁니까!”
“받겠습니다.”
벨져는 셔츠에 찬 마이크를 약간 당기고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자마자 여태 속을 썩인 못난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아직 안 들어갔어? 다행이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클레어가 눈을 반짝였다. 평소 프로즌의 팬이라던 그녀니 당연하지만,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긴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어. 너는.”
“나? 이제 생방 끝났는데 완전 정신 없었어.... 너는 언제 끝나? 데리러 갈까?”
“지금 촬영중이다.”
벨져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침묵 속에 감도는 당황과 혼란이 여기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약간의 투정과, 늘어지는 말끝에서 풍기는 그 나름의 애교에 결국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루이스?”
“야, 이...!”
“루이스씨! 안녕하세요!”
“아, 어.... 안녕하세요! 아 근데 이거 방송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루이스의 맹한 대답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루이스의 황망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고, 진행자가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앞서 벨져씨가 두분의 동거생활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셨는데요, 평소에 벨져씨가 요리를 자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 그게 좀 허세가 든 방송용....”
“뭐?”
“네, 자주 해주죠. 오늘 셰프님들이 벨져씨의 입맛에 맞춰주시느라 힘드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짓말 아니구 벨져 요리 되게 잘해요.”
“그렇군요! 허세가 좀 들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다?”
짓궂은 질문에 루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 벨져씨도 그렇고, 서로를 감싸주는 두 분의 우정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언제 한 번 나오셔야죠!”
“하하, 같이 사는데 같은 냉장고로 두 번 나갈 수는 없죠. 아니면 지금 갈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오긴 어딜 와. 집에 가!”
참다가 짧게 윽박지르자 루이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며 능청스레 넘어가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그럼 저희 벨져씨한테 맛있는 거 많이 먹여주시구, 저는 집에서 본방 시청하기로 하고 여기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전화를 끊고 집에서 보자며 (웃음) 이모티콘을 보냈다. 아직 냉장고를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메시지에 답장도 않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벨져가 핸드폰을 끄고 집어넣는 사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냉장고로 돌아갔다. 저들끼리 얘기를 진행하다 마침내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은 그들이 냉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스튜디오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이야.... 이거 여느 살림꾼 냉장고 못지 않은데요?”
“일단 굉장히 깔끔합니다. 이건 와인인가요?”
벨져는 진행자들이 꺼내든 와인 병을 보고 기억을 더듬었다. 제 술은 전부 와인 셀러에 있으니 직접 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루이스가 넣어둔 것일 텐데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보다는 제가 집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가 배는 신경 쓰였다.
내내 방송 준비한다고 전화도 안 받더니, 냉장고 정리용기에 정리해놓은 거며 유리병, 플라스틱 통, 냉장고 주인인 벨져조차 꺼내 봐야 알아볼 비닐팩에 유통기한과 내용물이 라벨지에 곱게 적혀있었다. 멀리서 흘긋 봐도 선명한 루이스의 글씨에 잠시 품고 있던 감정이 녹아내렸다.
“글쎄요. 제 건 아닙니다.”
“이렇게 두 분의 사생활이 탄로나나요! 이게 동거인한테 주긴 아까운.... 그.... 벨져씨가 집을 비울 때 마시려고 넣어둔 게 아닐까요. 혹시 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노골적인 떠보기에 벨져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 숨겨둔 연인이 있느냐, 묻는 것이지만 그 연인이 다름 아닌 벨져 홀든 그 자신이라는 건 아무리 당당한 벨져라도 대답하기 곤란했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후환은 두렵다. 벨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중에 루이스씨가 나오면 물어보시죠.”
“아, 이렇게 피하시는군요! 이 아름다운 우정!”
“아무래도 오래 됐으니까요.”
“또 이렇게 마음이 맞는 친구끼리 사는 것도 로망이 있죠.”
“아무렴 이렇게 같이 살면 집에 여자는 안 데리고 오게 되는 게 또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주거니 받거니 저들끼리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늘어놓던 두 사람이 허허 웃고, 아까 벨져의 편을 들었던 셰프가 벨져의 눈치를 봤다. 데이트할 때 자주 가고, 그 역시도 스트레이트가 아니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저 와인 되게 구하기 힘든 거예요.”
“아, 그런가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브랜드의 샴페인인데, 저게 지금 딱 27년된 거거든요. 진짜 구하기 힘든 거예요.”
27년. 벨져는 들어있던 와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연말도 연초도 아니니 루이스가 선물받은 와인인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이건.... 같이 먹는 건가요?”
“그것도 선물 받은 겁니다. 루이스씨가 여기저기서 받아오는 게 많죠.”
“인기인이군요?”
“뭐, 그래도 나쁜 친구는 아니니까요. 밤마다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야, 밤마다.... 외박을 자주 하는 편인가요?”
“아뇨. 잠은 꼭 집에 와서 잡니다.”
루이스의 신상 캐묻기가 되어가는 흐름에 벨져는 한 팔로 턱을 괬다. 루이스가 보고 싶다. 냉장고 따위 평소대로 해놔도 괜찮으니 어제 영상통화나 조금 더 길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산 지 반십년이 다 되어가도 루이스의 세심함은 어딘가 모르게 벨져의 핀트를 어긋나곤 했다. 자상하고 세심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다른 것보다 제게 신경을 써주었음 하는 마음을 토로해도 그때 뿐.
벨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리는 동시에 냉장고 탐색이 끝나고, 진행자들이 오늘의 요리 주제를 발표했다.
“이야, 범상치 않습니다! 밤에 먹어도 부담 없는 한 끼 식사는 그렇다 치고, 건강한 정크푸드는 대체 뭐죠?!”
“저는 제 입에 들어가는 이상 좋은 재료에 건강과 맛을 둘 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야 그렇죠. 그런데 이건....”
“전 제 취향에 맞게 해먹을 수 있으니까요. 맛있는 걸 해줘도 안 먹고 햄버거같은 걸 찾는 누구씨를 위한 절충안입니다.”
셰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벨져는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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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St. Valentine's Day
* 둘 다 은퇴하고 사귀기 시작한 후입니다
** 발렌타인은 지나지 않았습니다 벤쿠버시간으로 아직 2월 14일 오후 9시입니다 저는 늦지 않습니다 저는 날짜를 넘기지 않앗습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연인들의 날. 루이스는 웬일로 운전대를 잡은 벨져를 잠이 덜 깨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벨져.”
“깼군.”
흘긋 적선하듯 시선을 준 벨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꿈이 아닌지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않았다. 루이스는 잠시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벨져의 옆얼굴을 쳐다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우리 어디 가?”
“더 자라.”
“납치야?”
분명 눈 뜨기 전까지만 해도 푹신한 침대 위였는데 무릎을 덮은 담요며 한껏 뒤로 젖혀놓은 조수석 의자가 웬말인가.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무거운 눈을 깜박였다.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머리를 쓸었다. 텅 빈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포르쉐의 조수석 승차감은 끝내주게 좋았고, 벨져의 손은 딱 좋은 정도로 따뜻했다.
그 손이 머리를 쓰다듬다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며 내려와 루이스의 눈 위를 덮었다. 따스한 손바닥이 이끄는대로 눈꺼풀을 내린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연인의 날 한 번 거하게 치를 모양이었다. 그래도 루이스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루이스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마침내 벨져 홀든이 기나긴 무자각의 터널을 빠져나와 현재에 이른 지금 이번 발렌타인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맞는 연인의 날이었다. 그러니까 챙기고 싶었겠지. 로맨틱과 분위기를 목숨처럼 여기는 벨져니 당연했다.
“나 잔다....”
벨져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지고, 루이스는 포개놓은 손의 반지를 만지며 도로 눈을 감았다.
* * *
이마를 쓰다듬는 간지러운 손길에 눈을 뜨자 벨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보는 얼굴이지만,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라 루이스는 나른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고, 당기는대로 끌려오는 벨져에게 입술을 내밀자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다가온 벨져가 입술을 포갰다. 입술이 벌어지며 새는 나른한 숨. 몇 번만에 젖은 입술로 벨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떨어진 루이스는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끝까지 밀어놓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래서, 어디야?”
“네 눈으로 봐라. 내려.”
루이스는 먼저 내리는 벨져를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차 문을 열었다. 밀려들어오는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며 양팔로 몸을 감싸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펼쳐졌다. 잘 꾸며놓은 나무 펜스에 기대어 바다를 보다가 어깨를 덮는 코트에 웃음이 샜다.
“뭐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거냐.”
“글쎄.”
벨져가 뾰루퉁하니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게 또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루이스는 벨져의 입술에 쪽 가볍게 뽀뽀했다. 빙그레 웃자 벨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쁘다.”
“올라가서 보면 더 예쁠 거다.”
“아니, 바다 말고.”
루이스는 벨져의 손끝을 가볍게 잡고 눈꼬리를 휘었다. 전부 말하지 않아도 말뜻을 알아들은 벨져의 표정이 풀어졌다. 좋으면서 아닌 척, 독기도 뭐도 하나 없는 눈으로 흘겨봐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벨져가 기겁하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게 어딜 만져!”
“닳지도 않는 거 좀 만지면 어때서.”
벨져가 입을 벙긋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게 꼭 영상화보같아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렸다. 이마를 짚은 벨져의 왼손 약지에 빛나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방송인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왜, 아무도 없잖아.”
“네 눈은 무슨 옹이구멍이냐.”
벨져가 고개를 돌려 턱끝으로 뒤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둔 예쁜 카페. 루이스는 창가를 올려다보고 벨져에게 시선을 돌렸다. 벨져는 코트깃을 매만지며 손을 잡아이끌었다.
“방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난 괜찮다.”
“뭐야, 그게.”
이상한 논리에 웃음을 터트리자 카페 계단을 오르던 벨져가 고개를 돌려 쪽, 입술을 훔쳤다. 그리곤 주변을 돌아보고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러게 왜 방송을 하겠다고 해서.”
“미안.”
루이스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며 발뒤꿈치를 들었다. 한 계단 위의 벨져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귀기 전에도 수없이 했던 뽀뽀지만 지금은 의미가 달랐다. 전에는 카메라 앞에서 뽀뽀를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고작 입술을 포갰다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벨져의 뺨을 가볍게 잡아 가볍게 뽀뽀하는 걸 끝으로 떨어진 루이스는 이제야 천천히 눈을 뜨는 연인에게 미소지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 깊게 그림자가 지는 속눈썹이 아찔했다.
“미련하긴.”
한 번 더, 기어이 자기 좋을대로 입을 맞춘 벨져가 오만한 미소와 함께 계단을 마저 올랐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벨져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오는 내내 잤다고 하지만 차 안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드했다. 목을 돌리자 나는 뿌드득 소리에 어깨를 돌리며 올라가자 창틀 안에 방금 본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겼다.
“예쁘다.”
“안다.”
“너 말고.”
벨져가 대번에 눈을 흘겼다. 루이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메뉴는 아메리카노로 정해져있지만 벨져가 사납게 눈꼬리를 올리는 게 참 예쁘고 귀여워서 매번 제 무덤 파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물론 너도 예쁘지.”
“됐다.”
“삐졌어?”
“삐지긴.”
루이스는 메뉴판을 벨져에게 돌려주며 테이블에 턱을 괬다. 벨져가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마치고 단 둘이 된 루이스는 벨져의 손 위에 손을 얹어 약지에 낀 벨져의 반지를 매만졌다.
“왜.”
“아니, 그냥. 새삼스러워서.”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손을 덮었다. 꼼짝없이 잡힌 루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보석보다 예쁜 벨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손등을 덮은 벨져의 손이 손가락끝을 잡더니 벨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당기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사르르 눈을 감는데 확 열이 번졌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작게 웃으며 새어나온 숨이 손등을 간질였다. 손을 빼려 해도 벨져는 놔주질 않았고, 루이스는 항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훗. 귀엽긴.”
“하여간 다 네멋대로지.”
“왜, 좋아하지 않나?”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벨져를 가만히 쳐다봤다. 다 이겼다는 듯 웃고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홱 고개를 돌리니 잡은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깍지를 끼는데, 또 거기에 홀랑 넘어가버리는 자신이 미웠다.
“싫어?”
“그건 반칙이야.”
“사랑에 반칙이 어디 있나.”
“지금 네가 하고 있어.”
벨져는 그마저도 가소롭다는 듯 웃어넘기며 다시 한 번 루이스의 손등에 입맞췄다. 사랑은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거라는데 왜 항상 지는 기분일까. 루이스는 안 잡힌 손으로 턱을 괘고 벨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자상한 벨져의 눈빛에 루이스는 다리를 꼬았다. 타는 목마름에 힘겨워하던 게 얼마나 됐다고, 넘칠 정도의 애정에 이젠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누가 알았으랴, 짝사랑보다 더한 게 연애일줄.
“됐어.”
“삐졌나?”
“그래, 삐졌다.”
때마침 종업원이 다가오면서 루이스는 냉큼 벨져의 손에 잡혀있던 손을 뺐다. 조금 전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게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벨져는 손을 빼도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루이스의 아메리카노와 벨져의 차를 내려놓은 종업원이 벨져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루이스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의 바다로 눈을 돌렸다.
차가운 잔을 만졌던 손이 차갑고, 살짝 열이 오른 뺨이 뜨거웠다. 아직 2월이라 그런지 바다의 파도가 거셌다. 파도를 보며 열기를 가라앉히는데 벨져가 톡톡, 다리를 건드렸다. 말로 부를 것이지, 하여간 이 도련님은 다른 사람이라면 기분 나빠할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고 다.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 조금 전보다 더 기분이 좋아보이는 벨져가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루이스쪽으로 돌려 밀었다. 벨져의 차를 받은 루이스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이건 뭐야? 향 좋다.”
한참을 뜸들이던 벨져가 피식 웃고는 같이 시킨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내밀었다. 아무리 밖에서 보이지 않는 자리라지만 남자 둘이 카페에서 디저트를 시켜놓고 떠먹여준다니. 남이 볼까 민망해 고개를 도리저으며 몸을 뒤로 뺐지만 벨져는 단호했다.
“어서.”
“...해달라고 하지 마.”
언제나 결국 뜻한 바를 이루는 벨져 홀든이었다. 루이스는 얌전히 입을 벌려 벨져가 내민 케이크 조각을 받아먹었다.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이 입 안에서 녹았다.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녀석이 웬일로 초콜릿 케이크를 다 시켰는지 잠시 생각하던 루이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새삼 깨닫고 아메리카노와 함께 케이크를 넘겼다.
“이게 다야?”
“그러는 넌?”
“글쎄. 넌 뭐 하고 싶은데?”
“공개 연애.”
“그거 말고.”
루이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벨져는 여태껏 잘만 뽀뽀하고 끌어안고 다했으면서 왜 그거 하나 못해주냐고 불만이 많았지만 이것만큼은 루이스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기는 괜찮다고 해도,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 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둘 다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안 그래도 스캔들나는데 둘 다 게이라고 하면 기자들이 사냥개처럼 달려들걸.”
“지금도 그 스캔들 막느라 힘들다만.”
힘들다고 하는 것치고 벨져의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쁘지 않다기 보다, 뭔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이다. 루이스는 이 남자가 이번엔 또 무슨 이벤트를 준비해놓고 저를 기다리는지 예상답안을 추리다가,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여기 케이크 맛있다.”
“많이 먹어라.”
“자, 아.”
루이스는 벨져의 입을 막기 위해 케이크 조각을 잘라 내밀었다. 초콜릿을 좋아도 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입을 벌리는 게 얄미워 벨져의 입으로 향하던 포크를 돌려 제 입에 넣었다. 벨져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유치하긴.”
“몰랐어?”
“알고는 있었다만.”
“그럼 예상을 했어야지.”
“앞으로는 감안하겠다.”
벨져는 코트를 정리하곤 차를 홀짝였다. 정말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행동 하나하나가 화보인데, 왜 입만 열면 이 모양이 될까.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포크로 케이크를 잘랐다.
“자.”
“안 속아.”
“진짜야. 싫으면 말고.”
관심 없는 척 하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얌전히 입을 벌리는 게 예뻐서, 루이스는 포크 대신 입술을 내밀었다. 쪽,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자 놀란 벨져가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미안. 이제 진짜.”
웃으며 케이크를 내밀자 벨져가 포크를 쥔 손을 쥐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 와중에도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매서웠다.
“진짜라니까.”
“첫 발렌타인데이다. 망치고 싶지 않아.”
벨져답지 않게 진지한 투정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벨져와 그런 무드는 약에 쓸래도 찾기 힘든 루이스. 둘이 기념일이면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래도 전여친이랑 사귈 땐 이렇진 않았는데, 친구로 지낸 날이 많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벨져 앞에선 로맨틱한 말도 분위기도 다 낯설었다.
“그거 알아?”
“뭐.”
“오늘 마틴 생일인거.”
“루이스.”
“그런 얘기 아니야. 그냥, 기념일이 생일인 사람들은 어떨까 싶어서.”
마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벨져가 표정을 굳히며 팔짱을 꼈다. 황색 경보 발령. 기분이 언짢으시니 바로 풀어드릴 것. 루이스는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에 냉큼 말을 돌렸다.
“우리 다음엔 어디가?”
“몰라.”
삐졌다.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도 퉁명스럽게 나오는 걸 봐선 뽀뽀 몇 번으로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루이스는 카페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는 벨져를 보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나 잠깐 화장실.”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벨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서 하루동안 전세를 낸 것까진 좋았는데,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녀석을 납치하듯 조수석에 태우고 달릴 때만 해도 두근거렸는데 왜 또 이 모양 이 꼴인지. 머리를 헤집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며 벨져는 창 밖의 바다를 바라봤다.
발렌타인 데이란 모름지기 연인들의 날이고, 그러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귄다고 얘기도 하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내 사람이라고 말도 하고 싶은 건데 하나같이 안 된다고만 하는 루이스가 야속했다. 아까 반응을 봐선 오늘이 발렌타인인 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러니 당연히 선물이나 이벤트를 준비했을 리 없었다.
늘 그렇듯이, 애태우는 건 저 혼자라는 생각에 속이 탔다. 다정하고 자상하기로 치면 숙소생활을 하던 그 때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벨져는 루이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탄 속에 냉수가 들어가니 좀 살 것도 같았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에 벨져는 밖을 기웃거렸지만 벨져가 앉은 자리에선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음. 이거 되게 오랜만인데. 그래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부족해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언제 또 기타를 들었는지, 맑은 기타 소리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댔다. 잔잔한 기타 반주에 사랑을 속삭이는 가사. 노래가사처럼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벨져는 루이스를 보러 나가는 대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카페 안엔 직원들과 자신뿐이었고, 즐길 땐 확실하게 즐기는 게 좋았다.
프로즌이 은퇴하기 전, 그러니까 숙소 생활을 하던 시절엔 그렇게 조르고 협박을 해도 안 하던 노래를 뜸 한 번 안 들이고 하는 건 그 나름의 연인 한정 애정표현이었다. 돌아가면 괜찮은 기타를 한 대 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제게 바치는 세레나데는 마리아쥬의 웨딩임페리얼보다 더 향기롭고 감미로웠다.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내려놓는 소리에 이어 루이스가 돌아와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좀 봐주지.”
“잘 들었다.”
루이스가 싱긋 웃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칭찬해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같은 모습에 벨져는 손목에 찬 시계부터 확인했다. 조금 이르지만 체크인부터 해놓고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어나.”
“아직 다 안 먹었는데.”
루이스는 말만 그렇게 하고 벗어놓은 코트를 집어들었다. 평소에도 이정도만 고분고분하게 따라주면 좋을 텐데.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포석을 깐 보람이 있었다. 카페를 나온 벨져는 세워둔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았다. 루이스를 전용 기사로 부린 지도 어언 반십년이지만 오늘은 데이트 코스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벨져가 시동을 걸도록 밖에서 미적거리던 루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웬일이래. 운전을 다 하고.”
벨져는 구태여 이유를 말하는 대신 조수석에 앉은 루이스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달칵, 고정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자 입술을 맞춘 루이스가 씩 웃었다. 그리곤 뺨을 잡아 고개를 살짝 기울여 눈을 감으며 다가오는데,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입을 열자 혀가 닿고, 달근하고 물컹한 무언가가 넘어왔다. 밀어내려 해도 혀를 감으며 뺨을 꽉 잡는 바람에 도망갈 곳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루이스의 허리를 잡았던 벨져는 혀와 혀가 얽히고 감기며 녹는 게 달고 쌉쌀한 초콜릿이란 걸 깨닫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해피 발렌타인. 놀랐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루이스의 입가에 초콜릿이 묻어있었다. 답지 않게 귀여운 짓을 한다 싶어 옆구리를 쿡 찌르자 루이스가 몸을 웅크렸다.
“뭘 그렇게 부스럭거리나 했더니.”
“별로였어?”
“뭐, 나쁘진 않았다.”
“다행이네. 주머니 가득 초콜릿이거든.”
불룩한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한 줌 꺼내더니 그대로 쥐고 흔들며 웃는 루이스가 귀여웠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에서 초콜릿 하나를 뺏어 입에 쏙 넣었다.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얼릉.”
어떻게 이걸 입에 넣고 어떻게 말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발음이 뭉개졌다. 소년처럼 맑게 웃으며 다가온 루이스가 목에 팔을 감으며 눈을 감았다. 입 안에서 녹는 초콜릿이 끈적하고, 달았다. 미각이 마비되는 것 같은 단 맛은 취향이 아니지만 달디 단 키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떠넘기려 해도 초콜릿을 혀 위에 두고 꾹 누르는 루이스의 장난에 마른 허리와 옆구리를 문지르는 것으로 응수하자 루이스가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키스하는 중에 그러는 게 어디있어.”
“네가 먼저 시작했다.”
“야, 난 입 안에서 놀았지.”
루이스가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투덜거렸다. 그 사이에 초콜릿이 다 녹아 입안이 텁텁해진 벨져는 루이스의 목에 팔을 감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사랑한다.”
“.......”
장난기가 가득했던 눈동자가 움찔하더니 그대로 눈을 깜빡이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려 도망갔다.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 슬며시 웃으며 흰 목에 입맞추자 루이스가 다급하게 팔을 잡았다. 벨져는 루이스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따뜻한 허리를 어루만지자 루이스의 몸이 굳었다.
“잠깐. 아니, 그러니까....”
“사랑해.”
“윽, 그래도 차 안에선 안 돼!”
“왜지?”
“왜냐니!”
노을이 번진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루이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바라보자 입만 벙긋거리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는데, 좀처럼 보이지 않는 반응이 신선했다.
“썬팅 다 해서 밖에서 안 보인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럼?”
다시 한 번, 루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벨져는 루이스가 좋아하는 얼굴을 십분 활용하기로 마음 먹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나?”
“...그야....”
꼴에 한 살 연상에, 연애 경험도 사회 경험도 많다고 여유를 부리던 루이스가 부끄러워하는 게 꽤 흡족했다. 벨져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라니, 이 이상 즐거울 수가 없었다.
“차에서 하면! 환기도 안 되고! 시트 청소하기도 힘들고! 계속 생각날 텐데!”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안 귀여운 소리에 벨져는 조수석 의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정색했다. 그야 물론 환기도 어렵고 청소도 힘들겠지만, 그걸 이유로 드는 건 말이 안 됐다. 잠시 루이스의 말을 곱씹던 벨져는 반 박자 늦게 루이스가 극구 반대하는 의미와 붉어진 얼굴의 의미를 깨닫고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아. 그러니까, 그게....”
“그래. 차에 탈 때마다 섹스하고 싶어질 것 같다는거군.”
“미친...!”
“그래. 잘 알겠다. 감안하지.”
벨져는 자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갔다. 한껏 몸을 문쪽으로 붙이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눈을 질끈 감은 게 꼭 순결을 뺏기지 않으려 필사적인 모양새였다. 벨져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고 쪽,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대로 굳어있는 루이스를 내버려두고 조수석 의자를 잡고 뒤를 보며 주차해둔 차를 뺐다. 무언가 더 이어질 거라 예상하고 있던 루이스는 차가 움직이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왜 그만뒀는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벨져는 루이스의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는 뽀뽀에도 눈을 꼭 감고 있는 게 귀엽기도 했고, 괜히 제 욕심을 앞세워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한적한 도로 위를 달렸다. 루이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어쩌다 너랑 이렇게 됐을까 싶어서.”
“흐응.”
루이스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지쳤음을 토로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루이스가 카섹스를 거부하는 이유를 안 것만으로 오늘의 수확은 충분했다.
“그래서, 진짜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나.”
“지금 하고 있다.”
“데이트는 맨날 하는 거잖아. 그거 말고.”
“또 까먹고 미안하다고 할 거면 하지 마라.”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쏘아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루이스가 미안해하는 걸 알고 있는데 괜히 아픈 구석을 건드린 것 같아 슬쩍 눈치를 살피니 예상대로 상처받은 얼굴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아냐.”
“루이스.”
“내가 죄인이지 뭐.”
또, 같은 패턴이다. 벨져는 차를 세우려다 액셀을 밟았다. 이렇게 된 이상 중간에 레스토랑도 바다도 다 패스하고 호텔로 직진이다. 이럴 때 어떻게 수습해본답시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할수록 어그러지고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는 건 이미 수 차례 반복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적막이 깊어지는 차는 텅 빈 도로를 달려 예약해둔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오는 내내 마음을 좀 가라앉혔는지, 루이스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직 다섯시밖에 안 됐지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 아슬아슬한 침묵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 벨져는 차에서 내려 문을 잠그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차라리 싸우면 섹스하면서 풀기라도 하지, 이렇게 토라진 루이스를 달래고 제 잘못을 사과하는 건 아직도 힘들었다. 그깟 말 한 마디가 뭐 그렇게 힘드냐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때 뿐이었다. 벨져는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멀찍이 떨어져있는 루이스를 흘긋거렸다. 제가 보지 않는 데서 축 쳐진 얼굴을 하고 있는 루이스때문에 양심이 따끔거렸다.
루이스는 제 눈치를 살피기 바쁜 벨져에게 등을 돌렸다. 기분이 안 상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못 넘길 것도 아니었다. 제멋대로에, 오만하고 저만 아는 도련님이긴 하지만 벨져는 기본적으로 제 사람에겐 무른 사람이었다. 그게 루이스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천하의 벨져 홀든을 전전긍긍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게 뿌듯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미안하기도 해서, 루이스는 청승은 이쯤하기로 하고 초콜릿을 하나 까 입 안에 넣었다.
어쩌랴, 미우나 고우나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루이스는 연인의 날을 고대하고 있던 벨져에게 맞춰주기로 결심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벨져에게 다가가자 눈치를 보던 벨져가 슬그머니 손끝을 잡았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루이스는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하고 싶은 거 있었는데.”
“뭐?”
루이스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그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치며 입술을 겹쳤다. 입술로 입술을 물었다 놓고 떨어지길 세 번. 촉촉촉 물기 어린 사랑스러운 소리에 루이스는 감았던 눈을 떠 벨져를 바라봤다.
“호텔방에서.”
쪽. 입술을 포개며 눈웃음 한 번.
“맨몸으로 부비적거리면서,”
어깨를 잡았던 손을 뻗어 목을 감싸안으며 다시 한 번 입을 맞춘 루이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오전 내내 늑장부리는거야.”
“...나쁘지 않군.”
푸흐흐, 웃음이 샜다. 덩달아 풀어진 벨져가 웃으며 이마를 맞댔다.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내내 마음을 졸인 게 보여 미안했다.
“왜 우리는 매번 후회할 짓을 해놓고 미안해할까.”
“우리라니. 너겠지.”
“하하, 그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루이스는 벨져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맞는 첫 발렌타인은, 아무래도 침대 위에서 보내게 될 것 같았다. 루이스는 카드키에 문이 열리자마자 키스하며 허리를 감싸안는 벨져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싸우고 서운하게 만들어도 좋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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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호그와트au
* 다이무스 5학년 / 루이스 3학년 / 벨져 2학년 / 이글은 아직 입학을 못해써요….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도 얼굴을 붉히며 한껏 수치스러워하는 벨져의 얼굴은 그대로였고, 루이스는 이게 드문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루이스는 검지로 뺨을 긁적이다 옆 의자를 뺐다. 벨져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이글의 못된 장난은 아닐까 싶어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이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지금 강의실 비었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
루이스는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려는 벨져의 입을 막고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로놓았다. 쉿. 눈을 깜빡이며 손을 내리자 벨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몇 시간째 움직이지도 않고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다이무스를 가리켰다. O.W.L이 코앞이라 도서관은 시험을 앞둔 5학년들로 살벌했고, 아무리 홀든이라 해도 고작 2학년이니 선배들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었다. 루이스는 산술점 책을 한 팔에 안고 벨져의 손을 잡아끌었다.
“휴, 너야 어떨지 몰라도 난 선배들 무섭단 말이야.”
“흥. 그까짓 상급생들, 몇 년 후면 내가 더 뛰어날 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련하시겠어.”
턱을 치켜든 벨져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듯 당당했다. 루이스는 책을 고쳐 안으며 어깨를 으쓱여 흘러내리는 망토를 올렸다. 멋대로 움직이는 계단을 타고 마법의 약 강의실인 지하감옥에 내려간 루이스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문 앞에 잠시 서있던 루이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담당 교수인 웨슬리 슬로언은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라 학생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도 후플푸프 학생들과 어디서 도시락을 풀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빈 강의실에 들어와서 뭘 뒤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까 뭐 어떠랴 싶었다. 혹시 들켜서 점수가 깎이더라도 이건 벨져의 탓이었다.
“그래서, 뭐가 어려운 건데? 2학년 과정이면….”
“전갈 독 해독제다.”
“아, 그랬지.”
루이스는 찬찬히 재료를 떠올렸다. 다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홀든이 못 만들 것도 없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루이스는 답을 얻기 위해 벨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벨져가 잠시 눈을 맞추고 있다가 시선을 피했다.
“뭐가 문젠데?”
“…실패한다.”
“그러니까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니야. 솔잎을 잘못 으깼다던가.”
“그걸 모르겠으니까, 도와달라는 거 아니냐!”
벨져의 외침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잘 해야하는 입장이니 한 번 실수한 것 정도야 괜찮지만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실수가 아니다. 다이무스한테 부탁하기엔 쪽이 팔렸을 테고, 벨져를 따라다니는 애들은 있어도 같이 다니는 애들도 없으니 만만한 제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좋아. 재료랑 방법은 다 알지?”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일단 뭐가 문제인지 한 번 만들어볼 것을 주문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말에 따라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 역시도 어쩔 수 없었다. 못내 탐탁지않아하면서도 재료를 준비하고 소매를 겉어붙인 벨져가 작은 칼을 쥐었다.
“잠깐잠깐 잠깐!”
“뭐냐?”
“그렇게 하면 썰리는게 아니라 토막나.”
“그거랑 그게 뭐가 다르지?”
하여간 도련님이란. 루이스는 양파썰기를 예로 들려다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벨져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념도 없는데 말로 백 번 해봐야 소용이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등 뒤에 서서 벨져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너, 이게 무슨…!”
“자, 봐봐. 손에 힘 빼고.”
루이스는 힘을 주어 한 토막을 잘랐다.
“이게 네가 하려던 거고.”
토막난 조각 위에 날을 세워 얇게 저며낸 루이스는 부드러운 벨져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손에 들어간 힘을 뺐다. 요령이 생겼는지 혼자 잘 써는 게 역시 빨랐다.
“그렇지. 그게 써는 거야. 얇게 썰수록 금방 우러나니까 좋고. 아, 근데 잘 건져야해.”
“그리고?”
“계속해. 보고 있으니까.”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벨져의 옆에 앉았다. 지하감옥은 추운데도 벨져의 목이며 귀가 빨갰다. 화로를 옆에 놔서 그렇겠지만, 옷도 따뜻하게 입은 주제에 혼자 화롯불을 쬐다니 치사했다. 루이스는 양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 주먹을 쥐어 턱을 받쳤다. 볼살이 주먹 위로 밀렸지만 차가운 손을 덥히기엔 딱이었다.
“윽….”
“지금! 빨리!”
집중해서 솔잎을 으깨던 벨져가 루이스를 보고 움찔했다. 때마침 솥에서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거품에 루이스는 솥을 가리켰다. 벨져가 도마를 들고 으깬 솔잎을 쏟아부었다. 잠잠해진 솥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된 것 같은데.”
루이스는 발을 까딱이며 마지막 재료인 상아 조각을 건넸다. 벨져는 여전히 이상한 표정이었지만 시간을 세느라 말할 여유가 없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삼십오초. 상아 조각을 솥에 넣고 휘휘 젓자 연기가 사라졌다. 성공이었다.
“잘 됐네.”
우유와 같은 흰색을 띠는 약을 확인한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벨져는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너.”
“응?”
솥을 들여다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져가 국자를 놓고 다가와 루이스의 볼을 꽉 잡았다.
“턱받침같은 거 하지 마. 사내자식이 귀여운 척은.”
“…뭐?”
“흥!”
벨져가 볼을 꽉 꼬집더니 솥에서 적당히 끓은 해독제를 유리병에 담았다. 볼은 얼얼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도와줘도 고맙단 말 한 마디를 못하지? 루이스는 내려놓은 책을 다시 품에 안았다.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어디가!”
“귀여운 척 하러 간다!”
“너, 이리, 야!”
루이스는 벨져가 정리를 하는 사이 문을 닫고 계단을 올랐다. 애초에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와 책을 고쳐안는데 계단을 오르다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으왓!”
꼴사납게 넘어진 루이스는 얼얼한 이마를 손등으로 비볐다. 신발끈이 풀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다른 발로 신발끈을 밟아버렸다. 무릎이 화끈거리며 따끔거리는 게 아무래도 피가 나고 멍이 들 것 같지만 벨져가 못 봐서 다행이었다. 루이스는 계단에 앉아 신발끈을 고쳐맸다. 다치고 넘어지는 것쯤이야 익숙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야! 루이…. 너, 익….”
신발끈의 매듭을 한 번 더 묶는데 잔뜩 성이 난 벨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망칠수도 없게 좁혀진 거리,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지팡이를 꺼내 복수를 하거나, 한 대 치거나 소리를 지를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풀석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슬며시 눈을 뜨자 벨져가 등을 보이고 쭈그려 앉아있었다.
“뭐해.”
“으응?”
“빨리 업혀.”
“아니, 나 걸을 수 있는….”
뜬금없는 호의에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얼버무리자 벨져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다리를 잡았다.
“아야야야.”
“이러고 잘도 걷겠다.”
“그냥 까진 거니까 바지 잘 잡고 걸으면, 아아. 알았어!”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해보려 했지만 벨져가 아픈 무릎에 손을 얹자마자 아파오는 무릎에 루이스는 양 손을 들어 항복했다.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등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 어린 애한테 업히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대론 계단에 앉아서 실랑이를 계속하게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기댔다. 벨져의 팔이 다리를 감싸고 천천히 일어났다. 떨어진 책을 주워야했지만 안 그래도 무거울텐데 책까지 부탁하기엔 염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따가 가지러오거나, 누군가 친절한 사람이 주워주길 바라는 수밖에.
일어날 때 힘들어했던 것과 달리 벨져는 루이스를 업고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아무래도 그 벨져다보니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따갑게 꽂혀서, 루이스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벨져의 등에 매달렸다. 벨져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왠지 쑥스러웠다.
“저기…. 벨져….”
“말, 시키지…마….”
“힘들면 그냥 내려줘도 되는데….”
래번클로 기숙사는 가장 큰 탑에 있고, 거기까지 가는 길은 높고 구불구불한 계단 뿐이다. 아무리 벨져가 슬리데린의 수색꾼이고, 체력이 좋다 해도 숨이 거칠어지는 건 당연했다. 중간에 누구라도 있으면 그냥 같이 갈테니까 괜찮다는 말이라도 해볼텐데, 오늘따라 래번클로 기숙사로 가는 길에 학생들이 보이질 않았다. 루이스는 점점 더해지는 미안함에 벨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진짜 괜찮아. 여기서 넘어지면 그게 더 큰일인 것 같은데.”
“넌…. 후. 항상 그 입이 문제야. 하, 빌어먹을 래번클로.”
루이스는 기어이 래번클로의 청동독수리상이 보일 때까지 자길 업고 계단을 올라온 벨져의 목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땐 벨져도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쉬느라 바빴다.
“잠깐만. 물이라도 좀 가져다줄게.”
대답이 없는 벨져 대신 루이스는 독수리상 앞에 섰다.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어김 없이 낸 문제에 벨져가 헛웃음을 흘렸다. 래번클로의 황동독수리상 얘기는 들어보긴 했지만 이정도로 어이가 없을 줄이야. 루이스는 독수리상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더없이 진지한 그 옆얼굴이, 투명한 붉은 눈동자가 벨져의 시선과 숨을 앗았다. 작고 붉은 루이스의 입술이 열렸다.
“사랑으로.”
“뭐?”
“일리가 있군. 들어가도 좋다.”
벨져는 엉뚱한 대답을 듣고도 문을 열어주는 황동독수리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문제고 답인가. 벨져는 루이스가 아직 한 번도 독수리상의 문제를 못 맞춘 적이 없다는 게 의아해졌다. 이거 얼굴로 현혹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잠깐 기다려. 물이랑 먹을 것 좀 가져올게. 나이오비! 도와줘요!”
문틈으로 사라져버린 루이스의 망토를 바라보던 벨져는 고개를 들어 독수리상을 올려다봤다.
“사아랑?”
황동독수리상은 벨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벨져는 여전히 질문도 답의 상관관계를 유추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루이스 녀석한테 물어보긴 쪽팔리고, 다이무스에겐 물어보기조차 싫었다. 혹시나 설명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독수리상을 쏘아보고 있는데 바지를 걷고 붕대를 감은 루이스가 나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나이오비가 그냥 안 보내줘서.”
루이스가 물병을 건넸다. 시원한 물을 쭉 들이켠 벨져는 포장지까지 까서 기다리고 있던 루이스의 손에서 초콜릿 바를 빼앗아들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래.”
“오늘 일은 비밀로 할 테니까 걱정 마.”
벨져는 달달한 초콜릿을 입 안에서 녹이며 생긋 웃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겨우 한 살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키는 벨져와 같은 선에 있어서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하기 편했다. 루이스의 얼굴에서 살짝 눈을 내린 벨져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는 붕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다리를 끌고 혼자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적잖이 아팠을 게 분명했다.
“멍청이.”
“뭐?”
“간다.”
“야! 벨져!”
초콜릿을 마저 입에 넣은 벨져는 루이스의 외침을 무시하고 다시 돌아온 계단을 빠르게 뛰어내려갔다. 사랑이라니,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잘도 하는 녀석의 얼굴과 등에 업혀 어쩔 줄 모르던 녀석의 온기와 무게가 떠올라서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빗자루를 타고 비행을 하던 때처럼 심장이 쿵쿵 울렸다. 장난감 가게의 초콜릿을 먹이기라도 한 건지, 뺨이며 손끝이 화끈거렸다.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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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
조금 특별한 생일에서 이어집니다.
루이스 어려짐 주의, 벨져 캐붕 주의
* * *
“루이스!”
다급한 목소리와 흔들리는 몸. 루이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데 소매가 끌리고, 벨져가 너무 높이 있었다. 벨져의 당황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벨져가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당연히 어깨에 닿아야 할 머리가, 가슴에 묻혔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몸과, 멍한 머리. 루이스는 상황파악을 위해 벨져를 밀어내려했으나 손에 들어가는 힘이 이상했다. 손의 크기도, 팔의 길이도 전부.
“이게, 무슨…….”
“괜찮나? 루이스. 정신이 드나?”
“잠깐, 나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네 짓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눈 떴더니 네가…!”
벨져의 반응으로 보아 벨져의 짓도 아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손과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벨져의 손에 손을 대어보니 확연히 보이는 차이에 덜컥 겁부터 났다.
“거울! 으우.”
“잠깐, 움직이지 마라.”
일단 제 모습부터 확인해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익숙하지 않은 몸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행히 벨져가 받아내 침대에서 구르는 일은 막았지만, 속옷도 바지도 흘러내려 티셔츠 한 장 차림으로 벨져의 팔에 안겨 욕실로 가는 건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내가 몇 살로 보여?”
“여섯…, 일곱?”
“……어쩌지.”
벨져의 팔에 안겨 거울 앞에 선 루이스는 낙담했다. 늘 입고 다니던 티셔츠가 허벅지까지 내려오고, 몸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짐작 가는 건.”
“어제는 내내 연합에서 일만……. 아.”
루이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벨져를 올려다봤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초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벨져가 낯설 정도로 커 보였다.
“어제, 어릴 때도 생일 파티 같은 거 해본 적 없다고 했더니 엘리가…….”
“그럼 돌아갈 방법은….”
“능력 제어하는 법도 모르는 애야.”
“큰일이군.”
벨져가 이마를 짚었다. 그 바람에 벨져의 한 팔에 안긴 루이스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벨져의 셔츠를 꼭 잡고 매달렸다.
“잠깐, 놓지 마. 읏.”
“아, 미안하다.”
엉덩이를 받쳐 안아든 벨져가 자세를 고쳤다. 눈을 맞춘 벨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루이스의 머리를 매만졌다.
“일단 뭐라도 걸쳐야겠군.”
“입을 게 없을 텐, 엣취!”
벨져는 추운 욕실에서 나와 루이스를 이불로 감쌌다. 그것도 모자라 여우털 목도리를 가져와 둘러주고, 손발을 주무르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유리조각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루이스는 작은 발을 주무르는 벨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고개를 든 벨져와 눈이 마주쳤다. 자꾸만 흠칫거리는 벨져가 낯설었다.
“저기…….”
“루이스. 머, 먼저 말해라.”
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까지. 루이스는 손을 내밀어 벨져의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풍경 속에 믿을 건 이 사람 하나뿐이었다. 루이스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그래도 정신은 아직 스물일곱, 아니 스물여덟이거든?”
“이, 미…….”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벨져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벨져 홀든은 꽤 보기 좋은 구경거리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마음껏 즐길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발을 까딱였다. 꼬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식사부터 하지. 가져다주겠다. 잠깐 기다리도록.”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벨져가 도망치듯 가버렸다. 어색하다. 갑자기 어려진 몸도, 갑자기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도 전부 낯설고 어려웠다. 높아진 천장과 발이 닿지 않는 침대의 높이. 감정을 통제하는 기관이 어려진 몸에 반응하는 건지, 참아보려 해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울긴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수그린 채 참고 있는데 한 손에 접시를 든 벨져가 다가왔다.
“루이스. 일단 이것 좀.... 루이스?”
상냥한 목소리에 울컥, 설움이 차올라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툭 떨어진 눈물이 이불을 적셨다.
“루이스, 잠깐.”
바닥에 무릎을 꿇은 벨져가 넓고 따스한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고 엄지로 눈가를 문질렀다.
“고개 들어봐라. 루이스. 울지 말고.”
당황한 목소리가,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손이 더 미웠다. 못 돌아가나 하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어려졌다고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에 대한 서러움이 복잡하게 섞여 흘러 넘쳤다. 루이스는 제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토닥이는 벨져의 품에 안겨 울었다. 소리 내 꺼이꺼이 우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지만,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약해진 모양이었다.
“쉬이. 루이스. 괜찮을 거다. 괜찮아. 울지 마라.”
벨져는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치고 훌쩍거리는 루이스의 등을 토닥이며 뺨을 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작고 귀여운 얼굴이 눈물범벅이 돼선, 눈가며 코가 발갰다. 눈을 부비는 손도 작고, 발도 한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벨져는 꿀꺽 침을 삼켰다.
갑자기 연인이 어린애가 된 건 벨져에게도 충격이 상당했다. 그러니까, 루이스가 느끼는 당황과 별개로. 이 통통하고 보들보들한 뺨에 입 맞추고, 희고 부드러운 다리며 팔을 만지고 싶다. 변태도 아니고, 어린애를 보고 그런 쪽으로 상상을 하고 마는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그만 울고, 일단 먹어라.”
머리론 눈앞의 아이가 오늘로 딱 스물여덟이 된 남자라는 걸 알아도 막상 보이는 게 어린아이니 더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지고 다칠 것 같다. 거기에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벨져는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루이스의 작은 손에 포크를 들려주었다.
챙그랑, 쥐어주기 무섭게 포크가 바닥을 굴렀다. 코를 훌쩍이는 루이스에게 티슈를 뽑아 건네고, 벨져는 저도 모르게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새 포크를 가져왔다.
“쇼핑부터 해야겠군.”
“이대로 나가자고?”
“일단 이것부터 먹고.”
벨져는 루이스에게 다시 포크를 쥐어주는 대신 어제 먹고 남은 케이크를 잘라 내밀었다. 애인이 아니라 애 취급을 하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 이 몸으론 포크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매트리스를 발로 두드리며 입을 벌렸다. 입 안에 들어온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워서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너는?”
“그렇게 배고프지 않다.”
꼬박꼬박 아침점심저녁 세 끼를 챙기는 사람이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게 웃겨 눈을 흘겨도 벨져는 끄떡없었다. 하긴, 벨져 홀든은 원래도 식사에 대해 은근히 집착이 심했다. 그래도 성인일 때는 먹었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배가 고프지 않다고 뻗댈 수라도 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몸을 따라서 정신과 마음도 어려지는 건지, 자꾸만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벨져는 기어이 접시에 담아온 음식을 다 먹이고 나서야 굽혔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기 위해 손을 내밀자 인형처럼 작은 루이스가 눈을 감고 턱을 올리는데, 순간 확 열이 돌았다. 너무 귀여워서 위험할 정도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고 루이스의 시야에서 도망쳐 벽을 짚었다.
작은 입술이 키스를 부르는 것 같다니, 미친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어린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다. 결코, 절대로, 단연코 소아성애적인 성향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루이스기 때문에, 원래의 그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다.
벨져는 낮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루이스는 고아였다. 그것도 거리를 떠도는 고아. 그러니 지금처럼 어린 시절을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생일, 마땅히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시기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보내버린 그다. 그러니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랐다.
돌아갈 수 없다면 그건 곤란하겠지만, 연합의 상상구현 능력자 꼬맹이의 능력 지속 시간은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스물 네 시간 정도일까.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가라앉은 심박수에 벨져는 루이스에게 입힐 옷부터 생각했다. 피부가 하얗고 예쁘니 무슨 색이든 잘 받을 테고, 이 기회를 틈타 자신만 아는 그의 모습을 더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기, 벨져.....”
“헉, 무, 무슨 일이냐.”
“아니,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이불을 꼭 쥐고 바지를 잡아당긴 루이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당장 부둥켜안고 침대 위를 구르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벨져는 이글이 꼬맹이들이 노는 걸 보면 그냥 대뜸 뽀뽀해주고 싶어진다고 하던 말을 십분 이해했다. 그야,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가만 둘 수 있을 리가. 벨져는 잠시 멈췄던 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혔다. 벨져 홀든이 오늘만 벌써 몇 번을 무릎을 굽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깟 무릎 따위 작은 루이스 앞에서야 어찌 되어도 좋았다.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나.”
“아니, 그냥....”
“루이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단호한 목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앙 문 루이스의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언제 잠잠했냐는 듯 심장이 널을 뛰었다.
“이런 나는.... 싫어?”
“싫을 리가!”
“...정말?”
“하, 정말이지. 지금 네 모습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뒹굴고 싶은...!”
루이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흥분한 나머지 오해할 법한 말을 했다는 걸 두 박자 늦게 깨달은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변태....”
“아니다! 루이스! 오해다!”
루이스가 진저리치며 벨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그 짧은 다리로 종종종 뛰어가는 게 너무 귀여워 잡을 수가 없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동물이 심장에 해롭다는 걸 되새기며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루이스……. 들어봐라. 오해다. 오해가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문을 다시 두드리고, 벨져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을 때도 매번 루이스가 먼저 사과를 했기에 해본 적 없는 사과였다.
“미안하다. 나는.... 후.... 그래. 네게 그런 걸 느낀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가 너라서 그런 거지, 절대 내가....”
달칵, 문이 열리고 허리 아래에서 루이스가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벨져를 올려다봤다. 벨져는 더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를 안아올렸다. 순순히 제 품에 안겨 셔츠를 꼭 잡는 루이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루이스.......”
“연합으로 갈래.”
“지금 그 꼴로 어디를 나간다는 거냐.”
“왜, 너도 쇼핑부터 하자며.”
“그러니까, 일단은 옷부터 제대로 입고 나서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거였다.”
“연합엔 피터도 있으니까 괜찮아.”
루이스가 부루퉁하니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루이스의 완강한 고집 앞에 최단시간으로 무릎 꿇은 벨져는 급한 대로 외출 준비를 하고 루이스를 한 팔에 안아들었다.
“이러니까 꼭 납치당하는 것 같아.”
“꼭 범죄자가 된 기분이군.”
“이미 전과가....”
“먼저 입 맞춘 건 어디까지나 너다!”
“넌 어디까지 상상했는데?”
벨져는 불리한 싸움 앞에 입을 다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아동복 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벨져와 루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들이야 아름다운 미남자와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아이의 사랑스러운 외모에 넋을 놓고 바라본 것뿐이지만, 어디까지나 연인인 그들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매우 곤란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재단사를 불러 몇 벌이라도 옷을 해주고 싶지만 당장 입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옷을 몇 벌 산 벨져는 루이스에게 르블랑의 아동용 남색 세일러 수트와 두꺼운 케이프 코트를 입혔다. 하얀 털에 감싸인 루이스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직접 코트의 리본을 매준 벨져는 내친 김에 후드까지 덮어씌웠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데, 정작 본인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루이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거, 여아용 아니야?”
“상관없다.”
“있지!”
“괜찮다. 잘 어울린다.”
벨져는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눈을 깜빡이다 확 얼굴을 붉힌 녀석이 귀여워 후드 째로 머리를 쓰다듬자 루이스가 작은 손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도리 저었다.
“하지 말라니깐!”
“안 되겠군.”
“뭐?”
“역시, 연합으로 가는 건 보류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루이스는 기가 차 물었다. 안 그래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해 죽겠는데 벨져는 아침의 상냥함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혼자 턱을 짚고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오늘 하루는 원래 내게 주기로 했었으니까.”
“그건....”
“게다가 어제는 네가 그대로 자버렸지.”
“설마 이 몸으로 하자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벨져가 정색하며 부정했다. 얼굴을 찡그린 벨져는 혀를 차고는 루이스를 다시 안아들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무심코 두근거릴 정도로 근사한 미소가 번졌다.
“그냥,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연합에 가면 여러모로 난리겠지. 설마하니 그런 생일을 보내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다시없을 기회다. 어린애 돌보기는 영 껄끄럽지만, 뭐. 생일이니 참아주도록 하지.”
“......벨져.”
“왜, 감동했나?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좋다.”
루이스는 싱긋 웃으며 벨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벨져의 뺨을 꽉 잡아 양쪽으로 당기자 바로 아픈 신음이 샜다.
“무슨 짓이냐!”
“미운 소리를 하길래. 어린애 방식으로 응징.”
“너...!”
“어리광 받아준다며. 뭐해. 얼른 안 가고.”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쁜 짓을 할 때나 저를 엿 먹일 때 짓는 미소를 띠운 루이스가 옷깃을 잡고 채근했다. 이거, 완전히 잘못 걸렸는지도. 하지만 그래도 행복했기에 벨져는 기꺼이 루이스의 집사 역할을 자처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루이스를 보여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벨져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루이스가 가리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비록 주려고 했던 선물은 이게 아니지만, 어린 루이스의 투정과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그의 어린 시절을 보상해주는 역할을 떠안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작은 발을 까딱이던 루이스는 곧 내려달라더니 혼자 걷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녀석이 귀여워 벨져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루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자 심통이 난 얼굴로 다가와 새끼손가락을 꼭 잡고 걷는데, 얼음에 상처가 나지 않은 작은 손이 따뜻했다.
다소 파렴치한 내용의 성인용 뒷이야기는 31일 디.페스타에 돌발본으로 나옵니다.... 28페이지....
하얗게 불태웠으니 이만 안녕히 안녕히...
+) 벨져의 껴안고 싶다 = 인형 끌어안고 굴러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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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7.
여관을 나와 꼬박 한 시간을 추위 속에 헤매던 두 사람은 마침내 외진 골목에서 연구원의 집을 발견하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벨져가 발을 들었다. 루이스가 손을 뻗어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문짝을 날려버렸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속삭였다.
“미쳤어? 침입자가 있다고 광고해?”
“어차피 상대는 사이퍼도 아닌 일반 연구원이다. 안 될 건 또 뭐지? 강도라도 들었다고 생각할 거다. 비켜.”
“하아, 됐다.”
루이스는 벨져를 제치고 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위장인지, 대문에는 정말로 장치가 없는지 문을 두드려봐도 뒤가 텅 빈 나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잠금장치는 하나. 루이스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얇은 핀을 꺼냈다. 벨져가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열쇠구멍에 핀을 꽂았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조용히 해. 이것도 오랜만이라.... 열렸다.”
묵직한 잠금쇠가 핀에 닿는 감각에 힘주어 돌리자 찰칵, 잠금쇠가 풀렸다. 핀을 쥔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느라 손이 얼얼했다. 손목을 털며 일어나 문을 연 루이스는 문을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도련님 먼저. 도어맨처럼 안을 향해 손짓하자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벨져가 한심하단 눈으로 혀를 차고는 들어갔다.
그래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슬슬 이 까다롭고 예민한 남자가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평범하군.”
“그러게. 딱히 더 뒤질 것도 없어 보이고.”
벨져를 따라 들어간 집은 황량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으레 그러하듯 퀴퀴한 냄새가 나고, 정리정돈이 안 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욕실, 침실, 부엌과 거실까지 어디 하나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전투 인원도 아니고 연구원이니 당연하겠지만, 심지어 책상이며 서랍, 책장에도 별 수확이 없었다.
벨져가 책상 위의 서류를 뒤지는 사이 루이스는 침대를 뒤집어보고 거실로 나왔다. 아무리 이런 후미진 곳이라 해도 기밀을 보란듯이 책상 위에 흘릴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보관장소가 있다는 건데, 밖에서 본 집의 형태와 안을 볼 때 따로 비밀공간이 있을 수가 없었다. 벨져라고 그 간단한 걸 모를리 없으니 집을 보는 대신 서류를 붙잡은 것일 테고.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지며 거실을 서성였다.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벨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삐걱거리지 않는 마루. 햇빛이 한창인 시간에도 볕이 들지 않는 구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끝으로 나무 판자를 톡톡 두드리자 안이 꽉 찬 둔탁한 소리가 감돌았다.
여기다. 루이스는 테이블 위의 버터나이프를 집어 지렛대 삼아 판자를 들어올렸다. 기름이라도 칠한듯 가볍게 들리는 마루 바닥 아래,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루이스를 반겼다.
“벨져. 이리와봐.”
“누구 마음대로 오라가라냐.”
실컷 헛물만 켜다 나온 벨져의 표정이 굳었다. 진지한 얼굴로 옆에 다가온 벨져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손때묻은 노트며 오래된 연구파일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꺼내놓고 빠르게 훑어보니 대충 감이 왔다.
“거부당한 연구 뿐이군.”
“아예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인 건 아니니까. 성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기현상과 새로운 공간을 연결짓기엔 천 구백년이라는 시간이 문제였겠지. 일식도 안 일어난 때니까.”
“흥. 그 중 몇이나 진짜 있었겠나.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지금은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
“그 얼토당토 않은 기현상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들고?”
벨져는 부인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검 대신 총포가 등장하고, 종교와 미신 대신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 세상이지만 그도 자신도 사이퍼였다. 개기월식의 그날부터, 최근의 슈퍼문까지. 사이퍼들의 이능력과 신비로운 자연현상은 뗄래야 뗄 수 없는데다가 그 이유와 연관성 역시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공간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사막 위에 어느날 갑자기 들어선 메트로시티, 세계수가 자라나 형성된 포트레너드. 그 모두가 얘기로만 전해들으면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현상을 직접 마주한 이들이 그것을 신의 계시나 기적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충분히 성인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이 사실은 능력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그 발상에서 시작한 보고서와 연구논문은 결국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마루바닥에 잠들어있지만 가능성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새로운 공간과 사이퍼,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란 명확히 밝혀낼 수 없는 고양이 상자 안의 고양이에 불과했다.
“진행되고 있는 연구가 뭔지 모르겠군. 안타리우스가 이런 자료를 계속 끌어안고 있다면 가능성이 없을 거다.”
“그건 아닐걸. 이것도 지금 진행되는 무언가도 결국은 가능성일 뿐이야. 인식의 문이나 액자처럼 확실한 통로나 공간이 있는 게 아니면 더 특정하기 힘들고.”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새 공간을 찾는 내내 한 고생을 떠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알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막연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도 의문이 걷히질 않는지 무섭게 서류를 읽는 벨져에게 루이스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아까웠겠지. 안 된다는 걸 알아도, 놓아야한다는 걸 알아도 막상 그러는 게 쉽지 않거든.”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루이스는 파일과 자료를 한 데 모아 도로 비밀 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이렇다 할 수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곳에 기밀문서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연락책도 아닌 일개 연구원이니 당연했다. 연구소에 가기 전에 먼저 들른 건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래도 클론이나 강화인간을 연구하는 건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경비는 적을 거야.”
“위치는?”
“서쪽 외곽. 지갑에 정기권있더라.”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또 탐탁지 않은지 제 얼굴에 꽂힌 그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이스는 판자를 도로 덮고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는데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쥐가 나면서 순간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며 풀썩 발목이 꺾였다. 넘어지기 전에 벽이라도 짚으려한 손은 의미없이 허공을 휘젓고, 거기에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돌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넘어져야 하는데, 충격 대신 단단한 팔이 허리를 잡았다. 루이스는 머리를 기대고, 당장 손에 잡히는 걸 쥔 채 숨을 골랐다. 추위와 함께 쨍하니 덮친 어지럼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데 다리까지 저리니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감각을 마비시킨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야, 루이스는 얼떨결에 붙잡고 기댄 사람이 벨져라는 걸 떠올렸다.
“후, 하아.... 미안.”
“도무지 못 봐주겠군. 대체 얼마나 미련하면...!”
생명줄이라도 되듯 잡았던 벨져의 옷을 놓고 떨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앞에서 이런 꼴이라니. 차라리 그냥 넘어지고 말지,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어지는 질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이야 하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마음에 안 드는 제게 꼬투리를 잡아 분풀이를 하는 게 목적이니 괜히 책 잡힐 빌미를 주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야 하는데, 당연히 그게 맞는 건데 손목을 잡아 루이스를 돌려세운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상한 일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벨져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루이스의 목에 감았다. 화가 난 얼굴로 그의 온기가 가득한 머플러를 꼼꼼히 감아 목 뒤로 매듭을 짓고는 다시 한 소리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냥 하면 될 걸 말도 못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벨져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홱 돌아섰다. 목을 감싼 온기와, 머플러에서 느껴지는 벨져의 향수냄새. 등을 보이고 돌아선 벨져는 주먹을 꽉 쥔 채 잠시 서있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루이스는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아니라고, 그저 지친 제 착각일 뿐이라고 되뇌어도 머릿속에선 빨간 경고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뭔가 잘못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다. 제게 패해 세상으로부터 온갖 괄시와 악의 섞인 편견을 받아야했던 벨져 홀든. 로라스 옆에서 길길이 날뛰며 노려보던 그 날의 벨져가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만약 이번에도 제 감이 맞다면, 이번에 무너지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벨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루이스는 이 불안이 기우로 끝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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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6.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그 햇살에 프라이팬의 달걀처럼 익어가던 루이스는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입안은 모래알을 한 움큼 넣은 것처럼 깔깔하고, 갈증과 함께 쨍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점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몹쓸 숙취는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게 며칠, 그마저도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뜨다 눈앞에 보이는 쇄골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대로 고개를 올리자 잠든 벨져의 얼굴이 보였다.
길고 풍부한 속눈썹 아래 우아하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워낙에도 미인이긴 하지만 이렇게 그림자까지 질 줄이야. 순수하게 감탄하며 벨져의 얼굴을 감사하던 루이스는 창밖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길래 벨져와 한 침대에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방이 없어서, 사정사정해 별채까지 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완전히 공백이었다. 아무래도 머리를 기대자마자 곯아떨어진 모양이라고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려 했다는 데 그친 건 제 허리와 다리에 감긴 벨져의 팔다리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오랫동안 안 쓴 별채니 난방이 제대로 될 리 없고, 유일한 난방수단인 벽난로는 불이 꺼진지 오래인 듯 했다. 추운 지방에, 밤이 되면 기온이 더 떨어지니 이불 한 겹으론 추위를 다 막지 못했을 테고 그러다보면 옆에 있는 체온에 달라붙을 수밖에.
설마하니 벨져가 먼저 제정신으로 끌어안았을 리는 없다. 그게 루이스가 내린 결론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벨져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잠결에 자기도 자연스레 온기를 찾았을 터였다. 내외하는 남녀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빠져나가려 하면 할수록 벨져는 더 꽉 끌어안고 좀처럼 놓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끌어안고 자는 베개쯤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현저하게 느껴지는 체력과 완력 차이에 더 오기가 생겼다. 가까스로 벗어나 숨을 돌린 루이스는 언제 벗었는지 모를 신발을 주워 신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왈칵 녹이 섞인 물이 흘러나와 손을 적셨다. 이럴 땐 그냥 흐르게 둬야 하는데, 벨져가 그런 서민의 생활상식을 알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일단 급한 대로 물을 틀어두었다. 여기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화장실을 나오는데 벨져가 창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루이스를 깨운 아침햇살이 이번엔 벨져를 괴롭히고 있었다.
루이스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커튼을 쳐 햇빛을 가리고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저기선 씻을 수도 없고, 있어봐야 예민한 도련님의 귀한 수면을 방해할 뿐이다. 하얗게 입김이 서리는 추위에 팔을 쓸며 사람의 발길이 닿은 길을 따라 걸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흐릿해 대충 감으로 걸어가니 마당에서 세탁물을 걷던 여자와 마주쳤다. 어젯밤 방을 내준 종업원을 기억해낸 루이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좋은, 큼. 아침입니다.”
“어머나, 벌써 일어나셨어요? 밤새 춥지는 않으셨구요?”
“덕분에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드릴까요?”
루이스는 그녀가 걷던 시트며 수건, 베개 커버같은 것들을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스위스인데 아무렇지 않게 말이 통한다. 위화감에 슬쩍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힘드시겠어요. 영어도 잘 하시는데.”
“에휴. 그러게나 말이에요. 겨우 탈출했다 싶었더니 잠깐만 와서 봐달라고 사정사정을 해서 왔더니 글쎄, 자기는 귀족 나부랭이랑 눈이 맞았다지 뭐예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놓고 여태껏 편지 한 번 없어요.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거 공부시켜놨더니, 이런데 틀어박히질 않나. 결국은 눈 맞아 도방가질 않나. 아, 같이 온 그 귀족나리는요? 그쪽도 만만치 않게 재수 없던데.”
과연. 루이스는 유독 벨져에게 야박했던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모양이나 말투로 보아하니 가정교사였던 것 같고, 사정 설명은 본인이 늘어놓은 신세한탄으로 다 들었다. 귀족에게 치를 떠는 이유도 알만 했다. 교사로 있을 때 까이고,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못하고 공부시킨 동생은 하필이면 또 귀족과 눈이 맞아 도망. 벨져야 누가 보더라도 귀족 도련님이니 어찌 보면 질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잡니다. 동생분 일은 정말 안타깝네요.”
“에휴. 기사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소설 속에나 있는 얘기예요. 그것 때문에 신세 망친 애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모름지기 남자는 성실하고 지고지순한 게 최고라니까요!”
여자는 시트를 팡팡 털며 말했다. 모름지기 신세한탄 인생역경 스토리란 아무리 말해도 말해도 질리지 않는 법이고, 거기에 왠지 친숙한 옆집 청년같이 생긴 남자가 있으면 말이 더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부터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여성들이 꽤 있었기에 익숙했다.
어떤 매커니즘인지는 모르지만 뛰어나게 잘 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호감이 가게 생긴 청년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루이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자의 푸념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받았다. 어젯밤에는 그런 얼굴로 불쌍한 척을 한 게 먹혀들어간 거고. 루이스는 그녀와 함께 다 걷은 세탁물을 옮겼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손님한테 일을 시켜버렸네요.”
“괜찮습니다. 크흠. 혹시 씻을 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혹시 편지도 좀…….”
“그럼요, 물론이죠! 저쪽이 욕실이니까 편하게 쓰세요. 아, 전화 쓰셔도 돼요. 아침은 서비스로 갖다 드릴게요!”
우다다 할 말을 쏟아내고 사라진 그녀의 등 뒤로 감사하다 소리친 루이스는 꽤 괜찮은 설비의 욕실에서 따뜻한 샤워로 언 몸을 녹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가방을 들고 나올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루이스는 전화기를 들었다. 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어디야? 트리비아는?’
“그녀는 떠났어.”
‘……그래. 그렇구나. 그럼 너는. 그리스에서 연락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앤지. 천천히.”
루이스는 흥분한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그야 물론 이글과 나이오비가 소식을 전했다면 걱정할 만 했다. 어쨌거나 안타리우스가 강화인간들을 처리한다는 건 성공작을 거의 완성했다는 뜻이고, 제키엘 헌팅턴까지 등장했으니 거기에 휘말렸으면 솔직히 뼈도 못 추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불안과 가정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루이스는 구태여 설명을 더하는 것보다 빠르게 앤지의 불안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랑 있는지 알아?”
‘뭐? 설마 작업 들어온 건 아니지?’
근래는 좀처럼 듣기 힘들어진 스노우퀸의 격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작게 웃었다.
“벨져.”
아무리 그녀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글이 벨져와 있었다는 걸 알렸다면 더더욱.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 뻔한 반응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루이스는 말을 잇지 못하는 친구에게 안심하라는 말을 보탰다. 얼마나 믿을진 모르겠지만 말 한 마디 한다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괜찮아?’
“자세한 건 편지로 보낼게. 아무래도 돌아가는 건 더 늦어질 것 같아. 미안. 부탁해.”
‘……알겠어. 루이스, 제발 몸조심해. 응?’
“알았어. 또 연락할게.”
루이스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앤지가 걱정을 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이면 보일수록 그녀를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녀마저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또다시 괴로워질 뿐이었다. 나는 네 기대에 못 미칠 지도 몰라. 기대를 저버리면 제게서 등을 돌릴 사람들이 무서웠다.
루이스는 양동이 하나를 빌려 뜨거운 물을 받아 왔던 길을 돌아갔다. 방문을 열자 나가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이 루이스를 맞았다. 자고 있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짜증을 내며 손을 내치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리는데, 그 모습이 꼭 마나님들의 성질 더럽고 예쁜 고양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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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없다. 어쩜 관광지에 방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지만, 그나마 묵을만한 호텔은 이미 방이 다 나가고, 작은 여인숙이나 모텔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섯번째, 벨져는 돈을 주겠다는데도 예약을 받은 거라 안 된다며 거절하는 숙박업소를 나왔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사이 술이 좀 깼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루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결혼이 이렇게까지 외부인을 모을 일인가. 어쩐지 아까 펍에서도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더라니. 방금 전 유명한 배우가 이곳의 지역 유지와 도피해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기자와 팬들이 몰려 어쩔 수 없었따. 밖으로 내몰린 벨져는 혀를 차고 성큼 앞서 걸었다.
“저, 벨져.”
“뭐지.”
“저쪽에, 불이 켜져 있소만.”
루이스를 부축하며 따라오던 릭이 모퉁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모텔을 가리켰다. 외관도 별로고, 자리도 별로라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 어쩐지 방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휘청거리며 걷던 루이스가 릭이 앓는 소리를 내자 자기는 괜찮다며 떨어졌다. 벨져는 병실로 돌아가야 하면서도 도움을 자청하는 환자와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주제에 남 걱정이나 하는 천치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냥 해도 될 걸 저 지경이 되도록 무식하게 퍼마신 건 어디까지나 저 머저리다. 얼마나 한심하고 미련한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벨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딸랑. 벨이 울리며 젊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방 없어요.”
“방 둘. 다섯 배를 주지.”
“방 없는데요.”
“돈이라면.”
“아, 없다니까요.”
여급이 신경질을 내며 정리하던 수건을 턱하니 내려놓았다. 그녀의 기세에 잠시 움찔했던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돌아서서 세탁물을 개키기 시작했다. 딸그랑. 기어이 릭을 보냈는지 루이스가 혼자 들어왔다. 저걸 끌고 다른 곳을 찾을 순 없다. 벨져는 꾹 누르고 한 수를 물렀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나으리. 없다니까요?”
탁. 그녀는 아예 벽에 걸린 열쇠함을 치며 짜증을 내고 돌아섰다. 벨져 홀든에게 이런 푸대접이라니. 울컥 치솟는 짜증에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코웃음 친 벨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루이스가 휘청이며 팔을 잡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돌아봤다. 아직도 술기운이 여전한지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었다. 나른한 눈웃음에 벨져의 눈도 그만 루이스에게 쏠려버리고, 짜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약한 홍조가 돌았다.
“혹시 남는 방.... 그냥 잠만 잘 수 있으면 되는데.... 벌써 다섯번이나 허탕쳤어요.”
“아, 저.... 그게... 지금은 방이 다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던 벨져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는 여자와 나긋하게 말을 거는 루이스를 보고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참 잘 하는 짓이다. 벨져는 혀끝에 멤도는 말을 꾹 참아 눌렀다. 오늘 아주 작정하고 그 반반한 얼굴을 팔아먹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 지켜보고 있으니 데스크에 엎드리다 시피 기댄 루이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아래서 올려다보며 묻더니,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눈을 깜박였다. 여자에게 애원하는 법에 도가 튼 모습은 어이가 없다 못해 사실 펍에서 취한 사람은 루이스가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게, 수리중인 별채가 있긴 한데....”
“주세요.”
얼굴을 붉히며 내숭을 떠는 여자에게 웃으며 대답한 루이스가 몸을 일으켜 벨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손을 놓은 건 좋지만,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도무지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는 그였다. 루이스는 어젯밤 제 손을 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음에 드는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벨져는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 보란듯이 내려놓았다.
종업원이 발그레한 볼로 개켜놓은 시트와 수건같은 걸 분주히 준비하는 사이 툭, 루이스의 머리가 벨져의 어깨에 닿았다. 슬슬 한계인지 눈을 꿈벅이며 안간힘을 쓰는데, 그 꼴이 한심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따라오라는 말에 루이스가 멍한 눈으로 수건과 시트를 끌어당겼다. 벨져는 루이스가 든 짐을 빼앗아 들었다. 그냥 뒀다간 기껏 깨끗하게 세탁해 접어놓은 것들이 엉망이 될 터였다. 종업원은 수리중이라 보일러 대신 난로를 때야 한다며 빠른 속도로 이불과 시트를 갈았다. 별채까지 얼마나 된다고, 벨져를 따라 걷는 게 고작이었던 루이스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종업원은 루이스가 잠든 걸 보고 그쪽 도련님은 절대 못할거라며 난로에 불을 피우고 말 한 마디 붙이기 싫다는 듯 나가버렸다. 워낙 쌀쌀맞게 휙 나가버리는 바람에 벨져는 더 따져 묻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못 잘 건 아니다. 왜 멀쩡히 본채를 두고 떨어진 곳에 별채를 짓는지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취해서 잠든 루이스와 여행 온 커플이 쓸 법한 더블 베드를 함께 쓰는 건 머리론 알아도 마음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이를 어찌한다. 벨져는 머리를 누이지도 못하고 잠든 루이스의 팔을 잡아 이불 위에 눕혔다. 씻지도 않은 채 사내자식과 한 침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고 바닥에 내던질 수도 없고, 소복이 쌓인 먼지는 둘째치고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소파에 재울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내일 아침엔 송장을 치우게 될 테니까.
벨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곱게 잠든 얼굴을 보니 두통이 밀려왔다. 산을 오르고, 펍을 구르고, 제게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면서 엉망이 된 루이스였다.
루이스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욕실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따뜻한 물은 고사하고 누런 녹이 섞여 나오는 걸 확인한 벨져는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씻지 못할 거라면 더럽긴 오십보백보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같은 침대에서 잠들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벨져는 그치질 않는 한숨을 내쉬고 취침등 하나만 켜둔 채 불을 껐다.
그냥 누우면 되는데, 앉자마자 뻗어버리는 바람에 벗지도 못한 신발이 눈에 밟혔다. 잠시 고민하가, 결국 신발을 벗겨주고 나서야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누웠다. 루이스가 이불을 깔고 누운 바람에 벨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이불을 빼앗았다. 혼자 꽁꽁 두르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녀석의 숨소리가 벨져를 괴롭혔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왜 별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을 주워버린 걸까. 탁한 주황색 불빛이 비추는 루이스의 얼굴은 어젯밤을 연상시켰다. 여전히 슬프고, 아프고,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루이스의 손이 얼굴 바로 앞에 모여있었다.
쥐면 한 손에 다 들어올 것 같이 마른 손목.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손을 거두기엔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술기운이 들어가있었다. 과연. 예상대로 뼈밖에 없는 듯 마른 루이스의 손목은 벨져의 한 손에 잡히고도 남았다. 벨져는 짧게 혀를 찼다. 봐줄 거라곤 그나마 멀쑥한 얼굴 뿐인데 그마저도 말이 아니었다. 제게 맞아 찢어지며 부르튼 입술도, 막상 이렇게 보고 있으니 영 거슬렸다.
벨져는 손에 쥔 루이스의 손목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벨져는 도로 누워 몸을 돌렸다. 그와 제 얼굴 사이에 놓인 손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술냄새와, 방안에서 나는 먼지냄새, 시트에서 나는 청결한 비누와 햇살 냄새가 제 향수 냄새와 어지럽게 섞여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손 안의 온기와 눈앞에 잠든 남자의 얼굴에 감각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보통은 불쾌하다고 여겼을 것들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끝에 닿은 온기는 놓으면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아 놓치기 싫었다.
* 언제나 그렇듯이 연재분량은 원고 분량의 크롭이며 쌩원고입니다.
* 어떤 동행은 가제로 1월 중 완결,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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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이지만 진행 순서상 제목 표기와 게시 순서를 바꿨습니다
어쩌자고 이런 녀석을 받아준 걸까. 벨져는 한순간의 변덕을 후회했다. 덕분에 수월하게 갈 길을 돌아 돌아가고 있다. 얼음심장은 무슨. 세월에 날카롭게 벼려졌나 했더니 여전히 온건하다 못해 물러 터졌다. 연합의 동료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벨져의 곁에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안타리우스와 인식의 문, 그리고 연인을 잃은 남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안타리우스를 쫓던 벨져는 연합으로 돌아가려던 루이스를 낚아챘다. 물론 잡는다고 잡힐 녀석이 아니기에 남아있는 건 그의 의지기도 하다. 벨져는 그 날 펍에서 루이스를 주운 제 변덕과 그의 협조가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헤아리지 않았다. 녀석은 여전히 속을 모를 놈이고, 서로 깊이 얽히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마주한 과거의 실수는 예상 외로 덤덤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걸 알았으면 손을 뻗지 않았을 텐데. 넓은 아량으로 따뜻한 침대를 제공한 벨져는 아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제 심중이나 캐는 루이스를 마주했고, 그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루이스가 순순히 내놓은 정보는 꽤나 유용했다.
여제가 떠난 새로운 공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 곳을 찾는 과정엔 어김없이 안타리우스가 등장했다며 자신이 본 것과 그림자로만 알 수 있는 것들, 유럽을 헤집고 다니면서 알아낸 정보는 벨져가 혼자 수소문하며 모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벨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꽤 쓸 만한 길잡이였다. 능력도 확실하고, 시간이 흐르며 다져진 경험에 나름 쓸만한 머리까지 갖췄으니 껄끄러운 과거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만 아니라면 먼저 나서서 친분을 쌓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 사사건건 부딪히는 게 문제였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과 태생, 경험이 충돌했다. 양보? 녀석과는 원래부터 상성이 안 좋다. 벨져는 혀를 찼다.
알프스 산맥에 연구소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 까지는 좋다. 그 공은 인정한다. 그래서 릭과 함께 알프스까지 왔고, 대낮에 돌아다니는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도 발견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내놓은 수단과 방법은 벨져의 성에 차질 않았다. 고작 열쇠와 신분증을 훔쳐 연구소 안을 둘러보는 거라니.
물론 힘으로 뺏는 것 보다 잠시 잃어버린 걸로 하는 게 위험부담이 적겠지만, 벨져는 열이면 아홉 그의 편을 드는 릭도, 거 보라며 으스대는 녀석도 탐탁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벨져는 해가 지자마자 사람 많은 펍의 구석탱이에 처박혀 영국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수다나 떨고 있는 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화기애애한 꼴이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목적이 뭔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펍의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소문에는 취향이 그쪽이라던데. 과연 농부들과 다른 말끔한 차림새에 여자가 추근덕거려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게 소문이 확실한 것 같았다. 남자의 눈이 닿기 전, 벨져는 머리까지 뒤집어쓴 후드를 더 당겨썼다.
한가롭게 디저트에 대해 얘기하던 루이스를 쏘아보자 슬며시 눈을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눈짓을 주고받은 루이스가 남자가 볼 수 없게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바뀐 분위기에 릭도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살폈다. 뭔가 계획이라도 있는 게 아니었나? 루이스는 흘긋 남자를 보고는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앉아서 서너 잔은 마셨던 것 같은데 얼굴 색 하나 안 변하는 녀석이 릭의 잔까지 잡아 쭉 들이켰다. 열쇠를 훔치든 남자를 납치하든 뭘 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벨져는 눈을 찡그렸다. 그 사이 남자가 두 명째 여자를 거절했다. 낭패라는 듯 펍 안을 기웃거리던 남자가 바에 앉았다. 바텐더에게 무언갈 은밀히 속삭였지만 바텐더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다간 남자가 가버릴 판이다. 벨져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루이스를 채근했다.
“저 쪽?”
“아니. 너 말고. 넌 너무 눈에 띄어.”
벨져는 불만의 표시로 살짝 눈을 찡그렸으나 애석하게도 루이스의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래서 너무 아름다워도 탈이라니까. 루이스는 곤란해 하는 릭을 한 번 올려다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를 향해 걸어가는데,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루이스는 그의 옆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처연한 얼굴하며, 살짝 내리깐 눈, 거기에 얼음도 없이 마시는 독한 술. 누가 봐도 실연을 당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태연해서 잊고 말았던 이유를 다시 깨달을 정도였다. 연거푸 잔을 비운 루이스 옆, 남자가 루이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무어라 말을 걸었다. 작은 목소리라 뭐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순간 팽팽 돌아가던 생각이 멈췄다. 그를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 팔에 턱을 기대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술을 마시던 녀석이 말을 거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사르르 웃는데,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마치 몇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는 남자의 팔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에 이를 악물었다. 헛웃음이 샜다. 사내새끼가 눈웃음을 치는 꼴 하고는.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저런 싸구려 수작질이라니, 같잖기 그지없다. 실망하기도 아까울 정도로 기가 차는 수준이었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펍의 벽에 등을 기댔다. 루이스는 아예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살거리고 있었다. 펍은 시끄러웠고,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남자는 기분이 좋았고, 루이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입을 여는 건 추임새를 넣는 것 뿐이다.
남자가 들뜨면 들뜰수록 벨져의 기분은 수직 하강했다. 저 녀석이 뭘 하던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저렇게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갑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루이스 앞에 놓인 잔에 술이 다시 채워지고 남자 앞에도 잔이 늘어섰다. 가끔 속삭이는 말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 아주 침대까지 갈 모양이다. 남자의 손이 루이스의 어깨에서 등까지 내려갔음에도 루이스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마실 뿐이었다. 저게 진짜 취했나. 남자는 거부하지 않는 게 동의의 표시라 생각했는지 등줄기를 따라 훑으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벨져의 인내심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이, 그 손 놓지.”
“뭐야, 그쪽 애인?”
“애인...?”
루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짜 취한 건지 표정이 나른했다. 무슨 짓을 하는 짓이냐며 눈으로 묻자 루이스가 씩 웃었다. 저 새끼가...!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남자는 루이스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글쎄, 저런 타입 별론데.”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으며 순순히 끌려가자 남자가 비웃음이 분명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참아줘야 하는가. 명백히 저를 놀려먹고 있는 그의 그 잘난 얼굴에 당장이라도 한 대 휘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예 머리가 없는 놈도 아니고, 완전히 술에 취한 것도 아니니 뭔가 하려는 게 있을 것이다. 벨져는 꾹 눌러 참았다.
“집착이 심한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
“뭐 이 새끼야?”
벨져는 기어코 제 속을 뒤짚어 엎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루이스는 슬쩍 웃더니 남자 뒤편으로 던지라고 눈짓했다.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일어났다. 제정신이 분명한 차가운 눈빛에 벨져는 자신이 그의 계획대로 놀아났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너 뭐야?”
남자가 쓰러진 루이스를 넘어 벨져에게 성큼 다가왔다. 취한 척,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그를 붙잡은 루이스가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미안해요. 잠깐, 윽....”
그의 가슴에 기댄 루이스가 숨을 고르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눈을 찡그리며 낮은 한숨을 내쉰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렸다.
“저쪽 것까지.”
바텐더가 빠르게 지폐를 셌다. 루이스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고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지 루이스를 바라봤다. 벨져에게 걸어온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가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벨져는 남자를 응시하며 루이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서, 뿌리칠 수 있음에도 같잖은 연인놀이를 계속했다.
“미안.”
펍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바로 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벽에 기대서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벨져는 안에서 꾹 참았던 일을 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윽...!”
각오할 새도 없이 얻어맞은 루이스는 그대로 엎어졌다. 비릿하게 퍼지는 피맛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다.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화를 참고 있는 벨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하하, 그러게.”
더 맞을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전보다는 철이 든 모양이다. 루이스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진심으로 때려서인가,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급하게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킨 것과 맞물려 속까지 울렁거렸다. 루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덕분에 챙겼어.”
벨져는 루이스가 꺼낸 지갑과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핥는 루이스를 번갈아보고 그가 내민 지갑을 받아들었다.
“배운 거 없는 거리의 고아라서.”
묻지도 않고, 보기만 했을 뿐인데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코웃음을 흘리고 지갑에 들어있는 명함과 고리에 매달린 열쇠를 떼어냈다.
“좋은 지갑이네.”
“좋기는.”
볼 일을 마친 벨져가 다시 지갑을 루이스에게 던졌다. 루이스는 지갑을 살피다 펍의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나온 릭이 서글서글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잘 됐소? 아니, 루이스 그대 입술이.”
“성질이 좀 더러워서 말이죠.”
“아직 덜 맞았나보군.”
“이것 좀 펍 안에 버려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소.”
루이스는 릭에게 지갑을 건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닌 척 사람을 다루는 게 능숙하다. 벨져는 혀를 찼다. 하여간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다. 주먹을 털며 검자루를 쥐었다 놓자 루이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물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슬퍼보여서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거니와, 그와 정다운 대화를 할 사이도 아닌데 왜 자꾸만 시선이 가는지 모를 일이다.
슬쩍 눈을 뜬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졌음에도 반쯤 뜬 눈만은 붉게 빛나고, 그 나른하고 퇴폐적인 눈빛에 순간 벨져는 침을 삼켰다.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는 녀석의 얼굴에 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까 펍에서 남자에게 짓던 눈이 아니다. 도발도, 유혹도 아닌 그저 흡연에 불과한데 야릇한 분위기가 벨져의 입과 발을 얼려 꼼짝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릭이 나오자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끈 루이스가 방금 그 얼굴과 분위기는 전부 허상이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드디어 숨통이 트여 벨져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내가 이 벨져 홀든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고작 저거 따위에? 언짢아진 이유를 찾아낸 벨져는 후드를 뒤집어쓴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여간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따지고 보면 이 일도 다 제 멋대로 자기 잘난 맛에 한 거 아닌가. 사람을 들러리로 쓰기나 하고.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한 대 더 패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다.
멀쩡히 걷던 녀석이 비틀거리지만 않았어도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 그 면상에 한 대 갈겨주었을 텐데. 릭과 걷던 녀석이 그의 팔을 잡으며 낮게 신음했다. 멀쩡해 보인다 했더니, 급하게 마신 술이 이제야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멍청하긴. 한 손으로 입을 틑어막은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루이스에게 괜찮으냐 묻는 릭의 손에 쥐어주었다.
“먼저 가겠다. 버리고 오던지, 사람 꼴로 만들어오던지.”
황망하게 저를 바라보는 릭의 눈빛에도 벨져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녀석의 추한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고, 그 뒤치다꺼리를 해줄 생각도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으니 그걸로 끝,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면 그만인데도 자꾸만 눈에 밟혀 기어이 멈춰 섰다.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린 벨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루이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를 다시 만난 날도 저렇게 취해있었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오려는지, 바람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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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벨져는 루이스의 방을 나서 바로 옆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 왔는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릭이 벨져를 맞았다.
“오, 왔소?”
“일행이 늘었다.”
“응? 동생도 떨어뜨리고 온 거 아니었소?”
“그녀석 말고, 좀 더 궁상맞은 결정사.”
“결정사? 잠깐, 그대 혹시…!”
릭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벨져는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일일이 답해줄 필요는 없다는 게 벨져의 지론이었다. 릭 앞이라고 바뀔 것도 없었다. 걱정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준 성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는 아량을 보이기로 했다.
“괜찮…소…?”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오.”
되려 묻자 릭은 머쓱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신문과 커피를 드는 대신 불안하게 손을 매만지며 눈치를 보는 게 거슬렸다. 그래도 벨져는 참았다. 건방지고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따박따박 하는 말마다 어깃장을 놓는 녀석보다야.
“그런데…. 정말 그… 그 사람이오?”
“연합의 3급 능력자 나부랭이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색한 기류 속에 눈치를 보기 바쁜 그를 향해 눈을 흘기던 벨져는 먼저 시선을 거뒀다. 릭 역시 흔히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를 책망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지겹도록 들은 소리고, 지겹다 못해 무뎌진 눈빛과 표정이다. 벨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를 신경 쓰고,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이 제게 씌운 편견의 굴레 속 벨져 홀든이었다.
“그…. 벨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그렇다면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소?”
벨져는 창문 앞에 섰다. 안타리우스의 의식은 성공해 인식의 문은 열렸고,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다. 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액자를 찾아 시바 포를 쫓는 것이고 아직 시바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한 벨져는 릭의 눈을 마주했다.
“그 녀석 하나 낀다고 달라질 건 없어. 난 내 일을 할 뿐이다.”
“…그대는 정말 대단하구려.”
“흥.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그러니 앞으로 며칠만 더 신세를 지도록 하지.”
릭이 난처한 듯 시선을 피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 좋다. 그보다는 루사노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의식이 성공해버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거리를 내려다봤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둠이 내렸던 거리엔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 속에 섞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인식의 문에 다가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문의 형태가 아니기에 더더욱 접근하기 어렵고, 그나마 아는 통로는 안타리우스에 점거됐다. 릭의 공간 이동 능력이 알려졌으니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긴 무리다. 벨져는 그림자와 액자를 넘나드는 그녀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하나는 행방을 모르고,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돌아올 가능성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멍청한 남자가 적들이 포진해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할 리가 없으니. 벨져는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자꾸만 어젯밤 어둑한 조명 아래 슬픔을 술로 삼키던 그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겠지.”
“으응?”
“어쨌거나 그림자를 열고 다녔으니 아무것도 모르진 않겠지. 액자에 대한 행방도 어쩌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지만. 릭이 눈을 깜박였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뚱하게 있느니 실제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벨져는 릭에게 옆방에 가보란 뜻으로 턱을 까딱였다.
“바로 옆이다.”
“그럼…. 다녀오겠소.”
벨져는 릭을 보내고 발신인도 수취인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런 게 없어도 누가 보낸 건지 뻔하다. 벨져는 시킨 일을 마무리했다는 짧은 메모를 보고 동봉된 정보를 외운 뒤 봉투째 태워버렸다.
릭이 마시던 커피에선 김이 올라오지 않고, 탄내 대신 벨져가 뿌린 향수 냄새가 방 안에 퍼지도록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질 않았다. 뭔가 일이 있으면 소리라도 들릴 텐데. 벨져는 루이스가 릭과 함께 연합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렸다가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이 있는데 그대로 꽁지를 내뺐으리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얕은 수를 썼던 녀석이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벨져는 다리를 꼰 채 문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온 신경을 문 너머에 집중하고 있기를 얼마, 릭의 웃음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와 냉큼 릭이 보던 신문을 집어들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신문에는 헌터에 대한 속보가 실려 있었고, 바로 얼마 전 마주쳤던 소리 능력자 자매에 대한 칼럼도 실려있었다.
“벨져, 우리 왔소.”
우리. 라는 말에 벨져는 눈썹을 꿈틀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 봤다고 벌써 우리라니. 벨져가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상기된 얼굴의 릭이 루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젖은 루이스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방울지고, 맺힌 물방울은 흰 목을 타고 흘러 티셔츠를 적셨다.
“칠칠치 못하긴.”
작게 중얼거리자 벨져를 향해 슬쩍 눈을 치뜨다가, 릭이 커피를 권하자 바로 고개를 들어 언제 눈을 흘겼냐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벨져는 다시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더 볼 일이 남아있는 겁니까?”
“아, 나는 벨져와 동행한 것 뿐이라.”
“그렇군요.”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자신을 빼고 돌아가는 대화에 벨져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둘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니 그 정도 주도권은 가져도 무방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안타리우스와 그 세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럼…. 인식의 문은?”
“내가 아는 루트는 막혔다.”
당당한 벨져의 말에 루이스가 기가 찬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를 매만지다가 벨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흰 손이 테이블 위에 있던 지도를 잡아 펼친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이었다.
벨져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마른 손목과 손등에 난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그 자신조차 갉아먹는 결정검 때문인지, 루이스의 손은 몇 년 사이에 성한 곳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온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도를 톡톡 두드리던 손끝이 한 점을 짚었다.
“스위스…?”
“일단 제일 가까운 곳은 인터라켄인데….”
“하늘이랑 눈밖에 볼 게 없는 곳이군.”
“여기서 소득이 없으면 거기로 가려했습니다.”
루이스는 지도를 짚으며 안타리우스의 연구소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고 릭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얘기의 주인공이고 연합의 영웅인데다 방금 처음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건의 주요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저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유명인을 직접 보면 신기할 테지. 릭에겐 얼마든지 이해하고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쪽. 또, 엄연히 같은 자리에 있는 자신을 빼놓고 릭에게 말을 건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루이스에게 불쾌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그를 노려보자 애먼 릭이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아, 그……. 그렇지. 커피. 커피 가져오겠소. 얘기들 나누시오.”
황급히 일어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숨을 내쉰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조하겠다더니, 저와는 말도 섞으려 들지 않는다. 벌써부터 어긋나는 말과 행동에 벨져는 젖은 머리를 터는 루이스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흰 목덜미에 물방울이 떨어져 흘렀다.
“협조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협조하겠다고 했지, 네 비위 맞춰주며 수행원 노릇 한다고 하지 않았어.”
릭에겐 그렇게 친절했으면서, 오늘 처음 본 사람보다 못한 냉랭한 취급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 여전하군.”
“지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홀든.”
“어떻게 믿지?”
“난 내가 들어가게 될 구덩이에 함정을 설치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거든.”
한 없이 0도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 타오르는 황혼의 색으로 정반대의 기운을 품은 눈을 마주하며 벨져는 수를 셌다. 말 한 마디 없지만 그 역시 자신의 수를 읽고, 읽고, 또 읽어 그 다음을 노리고 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기싸움. 먼저 백기를 든 건 루이스였다.
“그만. 이런 거 그만 하기로 했잖아.”
“먼저 시작한 건 너다.”
“…그래.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진짜야. 못 믿겠으면 말고.”
“믿는다.”
루이스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피곤하다는 듯 무심한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벨져를 바라봤다. 조금 즐거워진 벨져는 손을 모아 배 위에 얹고 노래하듯 말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의뭉스러운 모양이었으나 벨져 자신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안다 해도 말해주고 싶지 않다. 유치한 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벨져는 우위를 점한 이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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