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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6 [벨져루이] 밑도 끝도 없이 양궁au
- 2015.04.13 [벨져루이] 어쩌다 마주친 그대.
글
Prequel. 08.
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추후에 책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8.
마침내 대학생활이 끝났다. 루이스는 후련한 마음 반, 어딘가 섭섭한 마음 반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숨을 푹 내쉬었다. 졸업식만 가면 이제 정말 끝이다. 루이스는 노트북을 덮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붙어 지내다시피 하다가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니 부쩍 그 생각이 났다. 루이스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을 듣는 동안, 묘하게 두근거리고 설레기도 해 루이스는 노트북을 톡톡 건드렸다.
“여보세요.”
“응, 벨져.”
“잘 끝났나?”
“응. 덕분에.”
공사장에 있기라도 한 건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아니, 그냥.”
그냥. 보고싶어서. 보고싶다는 말은 목에 걸린 것 처럼 간질거리며 나오질 않았다. 루이스는 목에 걸린 것을 털어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벨져의 목소리에 짙게 배인 피곤이 신경쓰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지내는지도 한 번 묻지 않은 게 떠올랐다. 시험기간이라 바쁘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무심했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바빠?”
“아니, 안 바쁘다.”
“그럼 만날래?”
“그래. 그 카페에서 보도록 하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알았어.”
벨져는 걱정과 달리 별로 기분이 상하거나 서운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어질러진 방을 슥 둘러봤다. 오랜만에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냉장고도 좀 채워놔야지. 전같았으면 바로 시작했을 수순의 앞에 자연스럽게 벨져가 떠올랐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벨져가 말한 세 달도 끝난다. 루이스는 할 일을 적어놓은 캘린더를 펼쳤다. 알바며 과제, 팀플이며 시험으로 빼곡한 봄학기와 달리 가을학기 이후에는 과제 기한이 적혀있는 게 전부였다.
루이스는 캘린더를 덮고 일어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샤워도 하고, 오랜만에 사람 꼴로 나가기 위해 아껴둔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딱 분침이 절반 지나 있었다. 루이스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고 잠바를 걸쳤다. 벨져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집에서 가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키홀더와 지갑, 핸드폰을 챙긴 루이스는 집을 나섰다. 가지만 남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바람이 매서웠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티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어차피 요 앞이니까 이 정도야 어떠랴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험기간이라 꽉 찼던 카페들도 방학을 맞아 한산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들어선 루이스는 매장을 슥 둘러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은 루이스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 여기서 만날 때만 해도 해가 쨍하니 내리쬐던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바뀌고, 아메리카노 한 잔도 얼음이 담긴 유리잔 대신 따뜻하게 데운 하얀 머그로 바뀌었다. 루이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따뜻한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세 달. 벨져가 얘기한 세 달은 루이스의 학기와 함께 시작해 끝나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지난 시간을 천천히 되돌아봤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감상 속에 어느 순간 제가 섞여있었다. 그 해의 겨울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이었다. 결코 닿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고, 다른 세계를 동경할 새도 없이 주어진 것에 아등바등하느라 꿈을 꿔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욕심이 났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손을 내미는 그가 너무 눈부셔서, 닿고 싶었다.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시지프스가 되는 건 아닐까 했다. 신들의 아량으로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뻐기다가, 결국은 끊임없이 무거운 돌을 산 꼭대기까지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인간.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되도 않는 헛된 꿈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한 것도 벌써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은, 벨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사람은, 버려지는 것에 대해 어떠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는 저를 꾀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첫만남이 너무 극적이어서, 그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를 감싸쥐었다.
까만 수면에 자신이 비쳤다. 하고 싶은 것은 확실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계절의 끝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루이스.”
“왔어?”
“기다렸나?”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부쩍 수척해진 얼굴의 벨져가 장갑을 벗으며 다가와 앞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었다. 눈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이 안쓰러웠다. 벨져는 손을 뻗어 머그를 잡고 있던 루이스의 손등을 감쌌다. 따스한 온기에 루이스는 그를 향해 슬쩍 웃어보였다. 벨져는 대번에 혀를 찼다.
“손이 이게 뭐냐.”
“요 앞인데 뭘.”
“미련하긴.”
“너는. 잘 지냈어? 피곤해 보이는데.”
“못 지낼 것도 없지.”
못 지낼 것도 없다면서, 그 또렷한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제 손등을 감싸고 온기를 나눠주는 게 간질간질해 루이스는 숨을 죽였다. 이 모든 것이 깨면 사라질 꿈이 아니기를 바라. 잠시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 손의 온기와 감촉에 낮게 일던 파도가 가라앉았다.
“벨져.”
벨져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그 시선에 잠시 생각을 골랐다.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에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그 날 공성이나, 무슨 일이 있었다, 내일은 뭘 하고 밥은 뭘 먹을까. 정말 일상적인 얘기밖에 안 했구나. 그런 생각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등을 감쌌다.
“너는, 잘 지냈나?”
“응. 이제 다 마쳤지.”
“학사모 쓸 일만 남았군.”
“너는?”
“나?”
이런 질문이 의외라는 듯 벨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피식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기졸업했다. 별로 흥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하겠더군.”
“너 답네.”
“당연하지.”
수긍하자 벨져는 더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받아 차를 주문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에 루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벨져는 테이블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벌써 겨울이네.”
“오늘은 눈이 온다더군.”
“그래? 벌써 첫눈이 내릴 때가 됐구나.”
루이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했더니, 벌써 비 대신 눈이 올 날씨가 되었나보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금방 벨져의 차가 나왔다. 벨져가 시킨 진한 홍차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건 뭐야? 냄새 좋네.”
“얼그레이.”
벨져는 마셔보라는 듯 찻잔의 손잡이를 루이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금테가 둘러진 잔을 조심스레 잡고 입술을 댄 루이스는 가까이서 올라오는 향기에 차를 마시는 건지 향기를 마시는 건지 모를 기분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벨져 쪽으로 손잡이를 돌려놓은 루이스는 다시 머그를 잡았다.
“그냥 그렇네.”
“다음에 제대로 우려주지. 홍차는 전문점이 아닌 이상 제대로 맛을 못 내더군. 그래도 이 정도면 쓰레기는 아니지만.”
루이스는 바로 홍차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예 양팔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벨져가 한참 베르가못이니, 찻잎의 원산지니 하는 얘기를 하다가 말을 멈췄다. 너무 가까이 갔나 싶어 벨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당겨 의자 쿠션에 몸을 기댔다.
“밥은?”
“어…, 먹었을 걸?”
일어나서 메일 확인하고, 하던 일을 마치기까지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노트북의 글씨만 보고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라고 하는 게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벨져를 만나러 나오며 쐰 햇빛이 사나흘 만이었다. 비타민D를 위해 광합성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는데 벨져가 혀를 차더니 반도 마시지 않은 차를 두고 일어섰다.
“가자. 밥부터 먹고 차를 마셔야지. 빈 속에 그 쓴 걸 집어넣어?”
“어어, 너는? 점심 먹고 온 거 아니야?”
“이 멍청아,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나와.”
“넌 몇시에 먹었는데.”
“하아, 나도 안 먹었으니까 밥부터 먹자고.”
신경질이 섞인 벨져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벨져는 제 손목을 덥석 잡아 끌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에 끌려 가면서도, 피식 웃음이 샜다. 이 짜증과 신경질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반가웠다. 고작 몇 주 못 본 것 뿐인데 한 일 년은 못 본 것처럼 그리웠고, 또 반가웠다. 그간의 공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끌어당겨주는 게 고마웠다.
“뭐, 먹고 싶은 건?”
“별로 없는데.”
“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쯧, 그새 잘 먹여놨더니 이 꼴이 뭐냐.”
“너도 그새 말랐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계산대 앞에서 장지갑을 꺼내들었다. 루이스도 지갑을 꺼냈으나 벨져는 이미 카드를 내민 후였다. 뭐 그런 걸 꺼내냐는 듯 벨져는 그 잘생긴 얼굴의 미간을 찌푸렸다.
“넣어둬.”
“어떻게 커피 한 번을 못 사게 하냐?”
“그 돈을 누가 주는데. 밥이나 제대로 사 먹어. 굶고 다니지 말고.”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말이건만 벨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그런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제 지갑에 들어있는 건 벨져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기도 하고, 벨져에게 이 정도 커피값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은 그냥 기분이라도 내게 해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한 잔 할래?”
“…나쁘지 않지.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고. 그 다음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계산을 하는 사이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벨져의 시선에 루이스는 그를 마주봤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싶어 제 옷차림을 슥 보는데 벨져가 들고 내려온 목도리를 두르고 매듭을 지어주었다.
“나 추위 별로 안 타는데.”
“흥, 그래놓고 감기나 걸리지 마라.”
벨져는 영수증 대신 카드만 받아 지갑에 넣고는 돌아섰다. 루이스는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 훈기가 내려오는 카페의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목을 감싸면 체온 유지가 잘 된다던데, 벨져가 하고 다니는 거라 그런지 맨살에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벨져는 차를 빼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버렸다. 같이 가재도 그는 듣는 법이 없었다. 따라나가려 하면 또 짜증을 낼 게 분명했고,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해진 채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루이스는 한 발 양보했다. 사실 늘 양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 홀든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지금도 흔들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감상에 젖어 카페 문 앞에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코 끝에 차가운 게 닿아 녹아내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치고 있으니 아직 덜 얼은 진눈깨비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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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7.
07.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순위를 메긴다면 단연 상위권에 오를 사람이 제 집 소파에 앉아 저를 부르고 있었다. 당장 돌아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전화로 하면 될 걸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꽤 일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번 시즌도 넘길 테냐? 너라면 충분히 헬리오스에도 들어올 수 있을 거다. 내가 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형아.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가면 되겠네.”
벨져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이글 놈이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도 알려주지 않으리라. 문을 열기 전까지 기분좋게 돌아온 벨져였다. 오늘은 드디어 루이스가 조커1을 찍은 날이었고, 벨져는 그와 함께 5연승 기록을 세우고 피씨방을 나섰다. 곧 기말고사다 졸업 논문 심사다 뭐다 하는 일로 한동안은 얼굴을 보기 힘들 터였다. 그 전에 조커1을 찍은 게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 혼자 차를 세워두고 근처 바에서 한 잔 하고 오는 길이었다. 애당초 세웠던 계획도 차근차근 잘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최근 벨져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아니 '프로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맵을 읽는 센스, 냉철한 판단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 무엇보다 위기 상황에서 더 그를 빛나게 만드는 침착한 태도. 벨져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자신의 감과 판단을 믿었다. '쉬레'의 플레이도 그랬다. 지금까지 있었던 팀에서 벨져는 종종 오더를 무시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는 곧 자신이 맞다는 증명이었고, 팀원과 오더는 아연실색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벨져는 혼자서 게임을 이끌어나가는데 능숙했다. 최종 목표가 승리라면 탱커나 서포터 한 둘 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서포터와 탱커가 잘 해도, 딜러가 없으면 말짱 헛고생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프로즌'은 저와 정반대라 해도 좋을만한 플레이를 했다. 결과적으로 하는 행동은 똑같지만, 그는 팀을 이끌줄 알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다독이고 끌어들여 유대를 형성하는 면에서. 본인은 아니라고 하고 자각도 없는 것 같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 지켜보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아마 처음 그 날 졌던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할 정도로, 루이스는 팀원을 믿었다.
AOS에서, 그것도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게임에서 믿음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이던가. 벨져는 그런 신뢰와 믿음은 5인 공성을 돌릴 때나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신뢰와 유대는 강력한 무기지만, 때로는 그 마음이 발목을 잡기도 하는 법이었다. 지지난 시즌의 32강, 힐러가 잡혔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는 불나방 플레이를 선보인 멍청이 덕에 신인 Darkness는 결국 본선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일반전에서나 볼 법한 플레이였고, 벨져로선 드물게 그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팀의 빈자리에 영입하려거든 반대할 생각으로 기억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벨져. 그 때 일이 걸려서 이러는 거라면 이번 시즌은 쉬어도 좋다.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해.”
“말을 끊지 마라.”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큰형과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저를 아래에 두고 어르고 훈수하려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릴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성인이 된 지도 꽤 됐다. 벨져는 거리를 가득 메운 불빛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듣기 싫으니 어서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제레온 감독이 승부조작 혐의를 받고 있다. 아직 기사는 안 났다만.”
“뭐?”
“후임 로리아노가 애쓰고 있지만, 가망이 없어 보이더군. 검제로 돌아가긴 힘들 거다. 다음 시즌에 데뷔하는 것도 힘들 테고.”
“…그걸 나한테 굳이 얘기해주는 의도는 뭐야?”
“……공백기가 너무 늘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새로 생겼다 사라지는 팀도 무수히 많지.”
벨져는 무뚝뚝하게 말하는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레온에 대한 진위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오랜 연을 맺어온 프리츠를 버린다는 소리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벨져는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벨져는 검의 형제를 위해 몸 바치다시피 한 제레온을 떠올렸다. 잘 부탁한다며 사무실을 나가던 날까지도 그는 제게 맞는 팀원을 구해주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사람이었다. 입 안이 써 담배가 고팠다.
루이스랑 있는 동안 담배 한 대를 못 태웠던 게 떠올라 벨져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확 추워진 날씨에 여전히 가을이라도 되는 양 옷이 얇았다. 그렇게 다니니 감기를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게 보일러도 좀 틀고 옷도 좀 사고 하라니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 자연스럽게 루이스 생각을 하던 벨져는 불을 붙이고, 니코틴을 들이마셨다. 다이무스는 실내에서 무슨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긴 자신의 집이고, 그는 무단 침입한 불청객이니까. 벨져는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뱉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형아.”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다.”
“하! 그 걱정은 이글 녀석에게나 해주지 그래? 좋아라 할 텐데. 그 자식 이번에 중간고사도 자느라 안 본 거 알아?”
“…하아. 이만 가보겠다.”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
벨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다이무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대로 돌아서 나가던 다이무스가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돌더군.”
“무슨 소문.”
“네가 듀오를 돈다는 것 말이다.”
“…….”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잘 하리라 믿겠다. 그럼 잘 자거라.”
젠장. 벨져는 둔탁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도어락의 잠금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미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어 양손을 허리에 놓고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자나. 벨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응? 벨져? 왜?”
“…….”
“왜, 무슨 일 있어?”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벨져는 헝클었던 머리를 다시 쓸어올렸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소파에 풀썩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데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은 먹었냐.”
“응? 아, 먹었어.”
“거짓말 말고 먹어. 먹고 자.”
“그거 얘기하려고 전화 한 거야?”
“…아니.”
“취했어? 술 마셨어?”
벨져는 피식 웃었다.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슬쩍 눈을 감았다. 그래, 이렇게 착잡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운 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빠르게 마셔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안 취했다.”
“얼른 자.”
“그래. 너도 자라.”
“알았어. 끊는다.”
“…그래.”
벨져는 잠시 잡을까 하다가 대답했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있는 건 아마 졸업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울까 하다가 루이스가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지나가듯 걱정하던 게 떠올라 담배 각을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곧 연락이 올 것이다. 벨져는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제가 구상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상을 현실에 옮기려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나 다른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신경 쓸 일 투성이였지만 루이스가 시험공부를 하고 졸업논문을 쓰는 사이 마냥 그만 기다리기도 뭐했다. 벨져는 잠시 소파에 앉아있다 일어났다. 서재 겸 작업실로 쓰는 방 안 책상 위엔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아무도 알아줄 리 없는 고충에 벨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슬슬 신생팀과 기존 팀은 윈터를 준비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쉬레는 이번 시즌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헬리오스를 비롯한 다른 팀에서도 쉬레를 부르고 있었지만 벨져는 이제 다시 다른 팀에 속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시작. 벨져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새우고 찾아올 계절이야말로 벨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빨리 보여주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했다. 벨져는 나가기 전까지 쓰던 기획서를 펼쳤다. 새 팀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루이스였다. 지금 한창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그. 프로즌은 스스로 자신이 쉬레에게 합당한 상대였음을 증명해야 했다. 커뮤니티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과 손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벨져는 프로즌의 전적을 검색했다. 승률은 63%. 아이스의 랭킹에도 진입한 게 뿌듯해 미소가 지어졌다. 루이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차분한 목소리와 제게 향하는 그 눈빛이 그리워졌다. 벨져는 지난 시간을 더듬어 처음 그를 만난 행사장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창. 해가 쨍쨍하니 내리쬐던 더위도 이제는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의류매장에는 코트와 니트가 걸리고, 거리를 물들인 낙엽도 한 차례 내린 비에 쓸려나갔다.
겨울이 오는 동안 준비할 게 산더미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못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새 사무실과 대신 일을 해줄 사람들, 리그 진출과 영업. 벨져는 키보드를 다그락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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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6.
06.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수차례 거절해도 강의가 끝날 쯤이면 백금색 벤츠가 학교 후문에 서있었다. 제가 사는 동네엔 벤츠가 들어오면 이상하게 볼 거라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걸어다니는 삼십분이 아깝다고 했다. 일단은 고용된 입장이라 군말없이 따르긴 했으나 이글이 놀려대며 은근슬쩍 괜찮냐 물을 때면 루이스는 말없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글은 그럴 줄 알았다며 킬킬거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흥이 나면 벨져 홀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늘어놓곤 했다. 주로 불평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전해듣는 건 확실히 즐거웠다. 연예인들 사생활에 대한 가십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여어, 작은 형~.”
“네가 왜 같이 오냐.”
“나? 쨌지~.”
벨져는 이글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벨져의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넣으며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신발 털고 타!”
루이스는 이글에게 짜증을 내는 벨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벨져는 루이스를 돌아보며 턱을 까딱였다. 조수석에 타 안전벨트를 메고 있으니 벨져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턱 닫으며 운전석에 앉았다. 백미러로 다리를 꼰 채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는 이글을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바로 시동을 걸었다. 매끄럽게 시동이 걸리고, 벨져의 벤츠는 복잡한 학교 앞 도로를 빠져나갔다. 조용하고 편안한 승차감에 감탄하는 것도 고작 사흘, 이제는 벨져도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한 계약관계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루이스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됐고, 벨져와 상의 끝에 강의 시간과 아르바이트 시간을 피해 시간을 조정했다. 벨져는 아예 휴학을 하는 건 어떠냐고 권했지만 어차피 마지막 학기라는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번호나 하나 찍으라더니, 루이스는 어제 통장잔고를 보고 기겁했다. 벨져 홀든의 이름으로 들어온 돈은 루이스의 한 달 생활비가 넘는 금액이었다. 물론 그 홀든이고, 씀씀이가 남다른 건 이글만 봐도 알지만 피씨방비에, 종종 하는 식사나 커피 값까지 포함하면 그것보다 받는 게 더 많은 셈이었다. 연습생들은 숙소비다 뭐다 하는 걸 내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건 명백히 벨져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달간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알바를 줄이고, 제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때 맞춰 잔 결과였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루이스는 벨져가 지켜보는 앞에서 첫 배치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골드3이었지만, 거기에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앞으로 한 달 안에 조커를 찍으라는 말로 짤막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거기에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이글이나 다른 클랜원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벨져가 말한 조커를 찍었다. 줄 땐 야박하게, 뺏어갈 땐 가차 없이 오르고 내리는 RP가 허망하고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수없이 많았다. 학기가 시작하고는 집중을 못 할 것 같다는 것도 한 몫 했다. 막학기고, 들을 강의도 세 개 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기를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라 루이스는 강의를 화수목 삼 일 안에 몰아넣었다. 벨져는 가장 사람이 많이 접속하는 금토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고, 자동적으로 루이스의 근무 시간은 금요일 낮부터 일요일 밤까지가 되었다.
조커를 찍고 나서야 벨져는 루이스에게 파티를 걸어왔다. 그게 지난 주 금요일의 일이었다. 타고난 근딜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빠른 속도에 루이스는 첫 판부터 진땀을 뺐다. 벨져는 루이스에게 아이스를 셀렉하라고 했고, 루이스는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서도 그의 닦달에 못 이겨 아이스를 셀렉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져의 시니컬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동기나 이동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쉴 틈이 없었다. 벨져는 착실하게 우위를 점령했고, 루이스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게임을 이어가는 벨져가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그의 서포트를 하느라 바빴다.
루이스의 아이스는 처음부터 극공을 타는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이스의 궁극기는 분명 '영웅플레이'의 정석을 낳는 스킬이지만, 그만큼 성공시키기 힘들기도 했다. Y축을 잘못 잡으면 꼼짝없이 지붕에 얼음성을 짓는 꼴이라 결정 슬라이드를 타고 휠업을 돌리며 내려가면서도 불안한 궁극기였다. 낙궁의 캔슬도를 따지자면 시니컬도 만만치 않지만, 벨져는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굴었다. 천상계는 천상계라 쉽지는 않았지만, 루이스는 섬광과 같이 움직이는 벨져의 뒤, 혹은 옆에서 그를 위해 콤보를 잇고 다가오는 적을 견제했다.
그럼 그 사이 상황이 정리되기 마련이었다. 안 되면 지는 거고. 다만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쉬레는 확실히 뛰어난 선수지만 그것과 같이 게임을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왜 그의 팀메이트들과 사이가 안 좋은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의 성향이었다. 협력과 공생. 글쎄, 벨져는 이기기 위해서 동맹을 맺는 것은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이루기 어려운 사람같았다.
루이스는 차 안에서 길게 하품을 했다. 첫 주부터 발표 과제가 나오는 바람에 미리 해두느라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졸렸다. 신호등 앞에 멈춘 벨져는 루이스를 흘긋 곁눈질했다. 루이스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했다. 같이 어울려주는 거라 생각하면 피곤하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쁜 게 아니었다. 이만한 꿀알바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마침 초록불이 켜졌고, 벨져는 액셀을 밟으며 쳐다보지 않은 척 정면을 봤다.
“아, 근데 형 그럼 이번 시즌은 쉬는 거야? 요새 갤에 형 얘기 존나 시끄러운데.”
“당분간은 생각 없다.”
“흐응. 그래? 하긴 뭐, 쉬레님은 지금 프로즌을 꼬시느라 바쁘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이글을 바라봤다. 이글은 자기가 뭐 틀린 말을 하기라도 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입가에 지우지 못한 미소와 장난기 가득한 눈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로선 이글이 뭘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게 쉬레와 프로즌에 대한 것임은 확실했다.
“이글.”
“왜. 나 바빠.”
“…됐다.”
“포기해. 저 녀석은 물에 던져놔도 입이랑 손은 둥둥 뜰 거다.”
“손은 왜?”
“그야 트윗을 해야 하니까지.”
이글이 벨져 대신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벨져는 주차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뒤롤 보며 조수석의 의자를 잡았다. 덕분에 드러난 조각같은 턱선과 목선에 루이스는 그에게서 살짝 멀어져 창 쪽으로 몸을 붙였다. 핸들을 돌리는 폼이, 같은 남자가 봐도 정말 멋있었다. 괜히 주차하는 남자한테 여자들이 설렌다는 게 아니라는 걸 루이스는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저도 모르게 두근거릴 정도니 여자들은 어떨까. 루이스는 조심스레 침을 삼켰다. 별 뜻은 없었다. 그저 가을볕이 따가울 정도로 강할 뿐이었다.
“날씨 진짜 좋네. 이런 날 피씨방이 뭐냐, 피씨방이.”
“토를 달 거면 집에 가라, 이글.”
“누가 간대? 그냥 이렇게 날도 좋은데 칙칙한 사내새끼들끼리 피씨방에 쳐박히니까 형들의 청춘이 안타까워서 그렇지~.”
루이스는 이글의 능청에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부터 같이 가자고 조를 땐 언제고 따라나오니 벨져의 신경을 살살 긁으며 장난을 치는 게 역시 형제는 좋구나 싶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벨져와 이글이 투닥거렸다. 벨져는 이글에게 신경질을 내고, 이글은 너스레를 떨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따라 올라오려던 벨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는 게 퍽 귀여웠다. 루이스는 벨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함께 계단을 올랐다.
“넌 왜 저 새끼를 데리고 와서….”
“내가 오라고 한 거 아냐. 자기가 따라왔지.”
“…하아.”
벨져는 진심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지쳐 보여 어깨를 두드려줄까 하다가 손을 내려 문을 열었다. 워낙 까칠한 사람이라 이런 사소한 스킨십에도 기분 나빠할까 조심스러웠다.
“오늘도 아이스 해?”
“네 마음대로 해라.”
“음…. 글쎄, 네 페이스에 맞춰가기 힘들어.”
“흥, 우는 소리 하기는.”
그러면서도 벨져는 루이스의 랜덤에 맞추어 랜덤을 꾸렸다. 빠르게 파고드는 쉬레를 위해 루이스는 기동력이 좋은 서브탱커를 넣었다. 이글이 음료수를 사러 간 사이 아이스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에게 귓말이 왔다. 대뜸 1과 2가 섞인 욕설로 시작하더니, 쉬레를 들먹이며 날선 비난이 채팅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게임을 하다가 욕을 듣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게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욕이라니. 루이스는 가만히 그가 하는 소리를 훑었다. 그딴 식으로 은퇴하게 만들고, 같이 다니는건 뒤라도 대줘서 그런 거냐는 둥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게 아무래도 쉬레의 팬 같았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뭔데.”
벨져는 자기 랜덤을 다 채우고 유리 칸막이 너머 루이스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제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이며 화면을 보던 벨져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차단해. 어차피 만날 일도 없겠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벨져가 욕을 들은 당사자보다 더 기분 나빠해서 오히려 머쓱해진 건 루이스 쪽이었다.
“뭐야, 뭔데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흐응.”
음료수를 건넨 이글이 루이스의 의자를 잡고 화면을 보다 길게 콧소리를 냈다. 콜라 캔을 깐 루이스는 캔을 기울이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쿨럭였다. 이글이 더럽다면서도 휴지를 가져다주고, 벨져가 등을 두드렸다. 사레 들린 거라 등은 두드릴 필요가 없는데, 천천히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잔뜩 인상을 쓴 얼굴과 달리 상냥했다.
“큽, 크흠. 켈록, 됐어.”
“너 진짜 탄산에 사레 잘 들리더라. 그냥 포카리 같은 거 마셔~.”
“아니, 그래도 콜라가 낫지. 근데 벨져, 너….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는 뭐지? 잠깐 있어봐.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벨져는 첫 게임을 하기도 전에 일어났다. 루이스는 별말은 않았지만 핸드폰까지 들고가는 걸 보고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도움을 구하고자 이글을 바라봤으나 이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모른다는 말을 대신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해~. 자기 최애 선수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반인한테 져서 그 충격으로 팀까지 나가면 팬 입장에선 네가 원수지, 원수.”
“…그렇구나.”
“그런 거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마. 너한테 지기 전부터 나오려고 벼르고 있었어. 기레기들이 자꾸 있지도 않은 소릴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해도, 안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벨져는 제게 시작을 말하면서 끝을 냈다. 프로 선수, 그것도 게이머가 다시 복귀를 하는 건 데뷔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아닌가? 그쪽 사정은 잘 모르지만 계약기간도 남았는데 그걸 파기하고 나온 거면 다른 팀에서도 받아주기 힘들 터였다. 아무리 벨져가 '쉬레'라 해도 괜찮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흡연실에서 잔뜩 인상을 쓴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인상을 쓰고 화를 내도 예쁜 얼굴이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걱정도 잠시 잊어버렸던 루이스는 민망해진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루이스는 옆에서 창을 내리고 커뮤니티를 돌고 있는 이글의 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글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요새 분위기는 어떤데?”
“당연히 졸라 나쁘지. 쉬레 없는 검제는 8강도 못 올라갈 거니 뭐니 하고, 쉬레 팬은 어디고 할 거 없이 너 엄청 싫어하고.”
“그 외에는?”
“글쎄, 직접 보는 게 빠를 걸? 링크 줄까?”
“응. 부탁해.”
이글이 핸드폰을 들었다. 루이스는 입술을 매만지며 초조하게 이글을 기다렸다. 그 사이 흡연실 문이 열리고,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 벨져가 돌아와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홀든 사이에 낀 루이스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벨져의 큐를 기다렸다. 벨져가 피우는 담배 냄새도 거슬리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불편했다.
“야.”
“응?”
“아이스 해.”
그 말을 마치자마자 매칭이 됐고, 루이스는 벨져의 말대로 순순히 아이스를 셀렉했다.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이 관계를 제안한 건 벨져지만, 팀을 나와 이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곧 저 하나를 위해 그가 가진 것들을 버렸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먹고 살 길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루이스는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손을 얹었다. 벨져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힘내서 이겨야 했다.
벨져는 제게 건 게 많았다. 그의 기대와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뿐이었다. 프로즌은 쉬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쉬레는 프로즌에게 새 삶의 시작이었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단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루이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가 피운 담배냄새가 공기와 함께 깊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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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5.
원고를 업로드 하다보니 편집점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슴니다만 이렇게 연재를 하다 보니 다음엔 언제 올라올까 하는 기다림과 기대도 받고 있는 것 같네요
읽는 시간은 짧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05.
벨져는 팀을 나왔다. 제레온이 딸 크리스티네 때문에 감독을 그만두고, 반년을 더 있으며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으니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대표는 붙잡으려 했지만 애초에 벨져는 이 팀이 아니라도 오라 하는 곳은 많았다. 아쉬울 건 없었다. 멤버간의 유대라는 것도 없다.
벨져가 팀에 있었던 건 단 하나, 제레온에 대한 의무와 책임 때문이었다. 제레온 프리츠가 없어도 검의 형제 기사단은 건재하다. 라는 걸 보여줬으니 충분했다. 지난 스프링의 우승, 섬머의 준결승 진출. 세간에서는 쉬레가 자꾸 이상한 데로 나돌아서 그렇다는 소리가 무성했지만 벨져는 여느 때처럼 개의치 않았다. 유명인에겐 언제나 구설수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대표는 계약금을 올려주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았네 어쩌네 하며 붙잡았지만 벨져 홀든은 다른 선수들처럼 돈에 매여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깟 위자료, 내고 말지. 관련 서류는 홀든의 변호사 쪽으로 보내라고 하니 허옇게 질리는 대표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그러게 제레온을 잡으라고 할 때 잡을 것이지. 제레온을 퇴출시킨 그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벨져는 벙찐 그를 매몰차게 뒤로 하고 연습실에 뒀던 짐만 챙겨 나왔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비롯해, 상자 하나짜리 짐을 싸서 뒷자석에 대충 던져놓은 벨져는 핸들을 피아노 치듯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루이스 녀석한테나 갈까. 오늘은 수요일이니 일찍 끝날 텐데. 대표가 끈질기게 붙잡는 바람에 공연히 시간을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퇴근 시간에 맞출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벨져가 루이스에게 간다고 전화를 하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데 전화가 왔다. 루이스였다.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없는 녀석이. 벨져는 드물게 놀라 잠시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의 액정을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묘하게 떨렸다.
“여보세요.”
'어, 난데. 지금 통화 괜찮아?'
“괜찮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좀 보자.'
“뭐?”
'안 되면 말고.'
먼저 전화를 하더니, 만나자는 말까지. 벨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상황이 반갑고 기쁜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루이스가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닌데,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벨져는 전화를 끊을 것 같은 눈치에 냉큼 대답했다.
“아니, 된다.”
'그럼 서점 앞 카페에서 보자.어딘지 알지?'
“곧 가지.”
전화는 그걸로 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일까. 벨져는 초조해진 나머지 입술을 매만지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꿨다. 그의 서점까지 가는 길은 이제 네비게이션 없이도 갈 수 있었다. 다만 전에 없는 상황에 왠지 모를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제발 그만 좀 오라며 짜증을 내고 화를 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벨져는 신호등 앞에 멈춰서 있을만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당장 데뷔라도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벨져는 제가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별 볼일 없는 팀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 제가 없는 리그에서 그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스러져간다면. 그대로 밑바닥에 다시 처박힌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애매하게 퇴근 시간대에 걸린 나머지 다 와서 길이 막혔다. 혹시 벌써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건 아니겠지. 이글 녀석에게 뭐 들은 얘기가 없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이글은 아직도 자고 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져는 차를 세워두고 빠른 걸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자리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2층으로 올라가니 창문을 열어놓은 창가 자리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창밖을 보고 있는 루이스. 그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른 벨져는 머리와 옷을 정리하며 다가가 그의 앞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메리카노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였으나 유리컵에는 물방울이 잔뜩 맺혀있었다.
“뭐냐, 할 얘기라는 거.”
“……. 이제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
묘한 침묵.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는데 루이스가 선수를 쳤다.
“플레인 요거트에 얼음 반만 넣어서 갈아주세요.”
“…….”
그건 또 언제 알았는지, 대신 주문을 하는 루이스를 보며 벨져는 팔짱을 꼈다. 물론 여기서 먹을 만한 건 그것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걸 알고 있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라 벨져는 몸을 카우치의 등받이에 기대고 양손 깎지를 껴 배 위에 놓았다.
“뭘, 정리하자는 거지.”
“한 달. 그쯤 했으면 됐잖아? 진짜 원하는 걸 말해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주문까지 가로채 사람을 물리나 했더니, 꽉 찬 돌직구가 날아와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오는 동안 가정한 최악의 수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걸 물어본다는 건 정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벨져는 잠시 루이스와 눈을 맞추다 눈을 감았다 뜨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나는 네가 프로로 데뷔를 해서, 네 가치를 입증하길 바란다. 이 쉬레를 꺾은 게 그냥 찌끄레기 듣보가 아니라, 아이스를 영웅으로 만드는 선수라는 걸 보여줬으면 해. 됐나?”
이건 그 때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한 달 동안 그를 지켜보며, 가끔 짬을 내 접속한 그와 함께 게임을 하며 느낀 것이었다. 그냥 이대로 썩히기엔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신에게 도움을 바래본 적은 없지만 루이스와 만난 것은 신이 정해준 운명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함께 게임을 하는 게 즐거웠다.
장마도 불볕더위도 사그라든 계절, 긴 여름해의 끝 무렵에 불어오는 바람이 벨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들어오는 햇빛에 루이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물방울이 잔뜩 맺힌 아메리카노 잔을 가볍게 쥐고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널 위해서?”
“…그래. 날 위해서.”
벨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를 거짓 유혹으로 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거에 휘둘릴 위인도 아니거니와, 그렇게까지 제 자존심을 팔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나 말고도 잘 하는 선수는 많아.”
“하지만 그들은 '프로즌'이 아니지.”
“…그래, 그렇다 치자. 네 자존심을 채우고 나에게 남는 건 뭐야?”
“돈? 명예? 인기? 부족한 게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줄 수 있어.”
루이스는 그 오만하고 자신이 넘치는 말에 피식 웃었다. 눈을 내리깔고,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다 축축해진 손을 뗐다.
“미안하지만 홀든.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
“…왜지?”
벨져는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존심? 한 달 동안 지켜본 그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눈앞의 기회를 걷어차버리는 멍청한 사람이었던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벨져는 루이스라는 사람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지? 평생 이렇게 궁핍하게 사는 거?”
“…….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한 번도?”
“한 번도.”
벨져는 덤덤한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꿈도, 희망도 가져본 적 없다니. 그는 고작 저보다 한 살이 많을 뿐이었다. 다른 환경에서였다면 어땠을까. 벨져는 주먹을 쥐고 침묵했다. 이해할 수도, 쉽게 지레짐작할 수도 없다. 한 달은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한 사람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가 벨져를 향했다. 벨져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 바로 앉았다. 프로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를 향해 승부수를 던졌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도, 완벽한 계획도 아니었지만 벨져는 예전부터 하던 생각이 있었다. 안 되면 되게 하는 것 역시 능력이었다.
“앞으로 세 달.너는 네가 바라는 걸 생각해보고, 나는 네가 내게 걸맞는 상대인지 확인해보겠다. 시간과 형편이 여유롭지 않다면 내가 널 고용하지. 시간도, 봉급도 네가 정해라. 대신 진지하게 해.”
“연습 상대가 되라고?”
“아니.”
“그럼.”
“…그걸 알아보려는 거다.”
벨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 감각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루이스를 놓고 싶지 않았다. 지금 놓아버리면 다신 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약이라고 하는 걸 써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다. 어떠한 '관계'. 벨져는 루이스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싶었다. 함께 승리의 기쁨을 공유하고,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캐릭터를 분석하며 메타를 짜올리는. 팀메이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너무 복잡하고, 왠지 자존심이 상해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말로 내뱉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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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조금씩 더워지면서 학교 앞 호프집에 손님이 늘었다. 기숙사 살 때가 좋았는데. 혼자 사는 게 좋기도 하지만 집세에 다음 학기 생활비며 면접비, 졸업용 자격증 비용을 생각하면 알바를 늘려도 힘이 들었다. 4년 장학금을 받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중간에 학업을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잠시 심부름을 하러 마트에 다녀온 루이스는 기름 앞에 선 사장님에게 파와 양파가 든 비닐봉지를 건넸다. 사장님은 말도 거칠고, 사람대하는 것도 서툴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었다. 새로 사는 바람에 필요 없어졌다고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노트북을 거저로 주기도 하고, 시험기간이며 과제철이면 손님도 없는데 일찍 접자며 삼사십 분씩 일찍 들여보내주기도 했다.
그와 눈인사를 하고 주방을 나온 루이스는 허리에 두르는 검은색 앞치마를 다시 입었다. 끈을 앞으로 돌려 매려는데 드르륵,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울리는 부저 소리에 루이스는 매장 안으로 가볍게 뛰어가 주문을 받았다.
“사장님! 간장이랑 양념 반반이요!”
루이스는 주문서를 뽑아 렌지후드에 붙여놓고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잔 두 개를 가져다 생맥주를 따랐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품과 맥주의 비율에 속으로 한 번 뿌듯해하고, 뻥튀기를 접시에 담아 한 번에 들었다. 균형을 잡아 빠른 걸음으로 손님 테이블에 배달한 후에야 루이스는 핸드폰을 꺼냈다.
[야, 우리 형이 너 존나 찾어.]
[한번만 도와줘라 진짜 끈질기다니깐?]
너도 끈질기다 이 자식아. 루이스는 이글의 카톡을 읽고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안 왔네. 루이스는 뻥튀기를 퍼 담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한 얼굴을 떠올렸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쉬레는 다시 한 번 붙어보자며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알아내 찾아왔더랬다. 그날은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하기야 누가 쉬레를 일하다 볼 줄 알았겠냐마는. 덕분에 루이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귀찮은 짐이 하나 늘고 말았다.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오후 알바 장소인 서점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그냥 한 번 져주고 끝내려고도 해봤고, 방해가 되니 찾아오지 말라고 화도 내봤다. 하지만 그는 제 사정 따위 알 게 뭐냐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애초에 게임은 가끔 기분 전환 겸 애들이랑 놀 때나 하는 게 전부라 이기고 지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쉬레는 일부러 지려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대번에 무효라며 봐줄 생각 말고 제대로 하라고 눈을 번뜩였다. 그때처럼 멱살을 잡거나 길길이 날뛰진 않았지만, 무섭기로 치면 멱살을 잡히는 쪽이 차라리 나았다. 옆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이 말려주지 않았더라면 사단이 났을 지도 몰랐다. 덕분에 루이스는 일주일을 더 시달려야 했다.
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 예쁘장한 얼굴 뒤에 그에 못지않게 더럽고 사나운 성질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아니 아예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었고, 덕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쪽은 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이글의 형 아니랄까봐 끈질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쯤 했으면 충분하련만 벨져는 끈질기게 함께 공성할 것을 권했다. 말이 권하는 거지 눈빛으로는 안하면 어떻게 할 기세였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피곤하고 귀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그런 말은 제게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한테 하는 편이 백배는 더 건설적일 텐데. 문제는 그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자꾸만 넘어가는 자신이었다.
게임을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더, 루이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제게 큰 의미를 두는 건지도 모르겠고, 잘한다는 얘기는 적잖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게임만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에겐 그런 것보다 당장 모레 내야할 전기세와, 다음달에 내야 할 수도세 같은 게 더 중요했다.
당장 다음 달이면 개강인데 쉴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둬야 했다. 졸업 요건을 채워뒀다곤 해도 자격증이네 면접이네 하면 돈 나갈 일이 잔뜩이었다. 당장 제대로 된 정장 한 벌도 없는데. 영라인 정장도 위아래로 한 벌 맞추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글이 한 시즌 우승이면 두 학기 등록금이야 껌값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도, 다 철이 없어 하는 소리로 들렸다. 공연히 헛된 꿈과 희망을 좇기에 루이스에겐 당장의 현실이 더 급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한 달 용돈으로 백화점 명품매장 쇼핑을 다니는 그와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이제는 짜증이 난다거나 화가 나기보다는 비참했다. 학습된 경험은 쉬이 떨쳐버릴 수 없다.
센치해지려는 찰나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루이스는 냉큼 홀로 나가 주문을 받았다. 여름이라 사람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이 일을 한 지도 꽤 되다 보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금토일 주말만 아니면 그럭저럭 할 만 했다. 감당이 안 되는 진상은 사장님이 알아서 처리해주시기도 하고. 루이스는 주문을 받아 포스기에 입력하고 풀린 앞치마 끈을 앞쪽으로 꽉 동여맸다.
그래도 월요일이라 그런가 벌써 아홉시가 되어가는 데도 테이블이 반쯤 비어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주방을 흘긋 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어젯밤 퇴근하고 나서 새벽에 게임을 했더니 잠이 부족했다. 최근엔 확실히 잠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하루가 고단한 일정에, 쉬레의 장단에 맞춰주느라 잠을 줄이다보니 더 피곤했다.
하루 중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점에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학기 초였으면 바빠서 몇 번이나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 실수를 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없는 게 방학 중의 대학 서점이지만, 그렇다고 서점에 들여오는 책을 정리하고 검수하는 일은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주문을 마친 손님에게 뻥튀기 서빙을 마치고 멍을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있던 커플이 소란해지더니 여자가 물을 남자한테 뿌리고 나가버렸다. 가게 안 손님들과 루이스의 시선 역시 물벼락을 맞은 남자에게 쏠렸다. 그는 잠시 앉아있다가, 이내 여자를 따라 나가버렸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루이스는 냉큼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들어간 마지막 주문은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 보였지만 그래도 양념을 입히기 전에 이 상황을 알렸다. 마침 앉아있던 두 테이블이 계산을 하면서 홀이 비었다.
루이스는 영수증을 전출함에 넣어놓고 핸드폰의 홀드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마감시간이라 바닥에 떨어진 물을 닦고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누가 턱 등을 세게 두드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튀어나갈 뻔 했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험악한 인상의 사장님은 기름 앞에서 열기를 쐬느라 벌게진 얼굴로 루이스의 등을 두드렸다.
“그거 해놓고 문 닫아라. 닭도 남았는데 오랜만에 술 한 잔 하자. 거, 얼굴도 좀 피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가끔 있는 일이었다. 레이튼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루이스는 아픈 등을 쓰다듬으며 허리를 폈다. 한산한 거리를 한 번 슥 내다보고, 앞에 백금색 벤츠가 있는지 확인한 루이스는 매장 문을 닫고 바깥 조명을 껐다. 아무리 그라도 이 시간에 나타나진 않으리라. 보고 싶은 것도 아닌데 자꾸 앞에 나타나니 이젠 없으면 조금 서운했다. 사람 마음만큼 이기적인 게 없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가져다 매장을 닦고, 다시 빨아서 걸고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오니 레이튼이 치킨 한 소쿠리와 2000짜리 용기에 맥주를 가득 담아놓고 루이스를 맞았다. 하루 일과의 끝 치고는 후한 대접이라, 루이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 앉았다.
“참, 그놈은 안 왔나? 그 허여멀겋게 생겨서 예쁘장하니 고상한 척 하는 놈.”
“푸하하. 네, 오늘은 없네요.”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쉬레, 아니 벨져가 희고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레이튼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이글 홀든의 형이라니.”
“그 형제들이 닮은 거라곤 머리카락뿐일 걸요.”
“그런 것도 같다만.”
전에 이글이 스타이거 교수와 한바탕 소란을 피운 곳도 바로 여기였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잠시 전화번호를 가르쳐줄 때까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 출석 도장을 찍던 벨져를 떠올렸다. 알려주면 안 올 줄 알았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서점으로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와 하는 공성이 싫은 건 아니었다. 프로답게 벨져는 게임을 잘 했고, 의견 충돌도 잦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 거냐.”
“아무 일도 없는데요.”
“흥, 거짓말은. 어디 그런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치킨이나 뜯고 있을 놈이냐? 척 봐도 너 때문에 오는 건데.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조심스러워지는 말투에 루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벨져가 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벨져가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고 섬세한 데다 까탈스럽긴 하지만 결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지. 사실 그와 제 관계는 딱히 이렇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했다. 스카우터라기에 벨져는 안정적인 수입이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았고, 친구라기엔 소원했으며, 그냥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 하기에도 뭔가 모자랐다.
“그냥 같이 게임하자고 하는 것 뿐이에요.”
“그것뿐이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겠지.”
“...대회를 나가자는데, 아시잖아요.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는 거.”
루이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입안이 씁쓸한 이유였지만 레이튼은 턱을 만지며 그 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다 되물었다.
“잘하냐?”
“글쎄요.”
“그 녀석은.”
“걘 프로구요. 꽤 유명해요. 우승도 몇 번 하고, MVP도 몇 번 받고.”
레이튼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크게 숨을 뱉었다.
“그런 녀석이 같이 하자는 건 너한테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팡, 아플 정도로 센 손바닥이 등짝을 두드렸다.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아픈 등에 손을 얹었다. 순간의 고통이 가신 후에도 얼얼한 게 아무래도 티셔츠를 까보면 레이튼의 그 거북이 등딱지 같은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실수할 수도 있지! 해보지도 않고 벌써 겁부터 먹는 거냐? 사내자식이. 잘 하는 게 있는 지도 모르고 사는 녀석들이 태반인 세상이다. 루이스. 기회가 앞에 왔는데 겁부터 먹고 뒷걸음질 칠 테냐?”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쉬레도 그렇게 말했다. 도망치지 말라고. 왜 기회를 앞에 두고 안전한 길만 가려 하느냐고. 그 말에 루이스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기회에 걸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 위험을 생각하면, 그 다음을 생각하면 지금 있는 자리라도 놓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섭다고들 하지만, 백을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과 하나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은 다르다. 그 무게가 너무나 달라서 어떻게 이해를 시킬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시선을 피하며 숨을 집어삼켰다.
“루이스. 나는 말이다, 네가 더 크게 될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손님들이 놀라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던 레이튼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워낙이 괴팍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굉장히 상냥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틀렸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루이스는 대학이 매 년 쏟아내는 엘리트들과는 다를 거란 말이지. 알겠냐?”
서툰 위로와 격려에 담긴 건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루이스는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역시,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루이스는 레이튼이 포스기 정산을 확인하는 사이 마저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했다. 괴팍한 사장님의 변덕 덕에 호프집 일렉버스트의 영업시간은 들쭉날쭉했다. 루이스는 대걸레까지 빨아 걸어놓고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홀로 나왔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또 비가 쏟아졌다. 매장 안에는 에어컨이 추울 정도로 돌아가고 있지만 루이스의 마음 에는 창밖에 내리는 것 같은 장대비가 내리며 지독한 습기를 채웠다. 루이스는 금세 지치고 우울해지는 이 계절이 싫었다. 앞으로 이주면 창밖의 비가 그치겠지만 제 마음 속의 비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다들 제가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라는데, 그게 저한테만 안 보이나 봐요. 루이스는 문 앞까지 나와 우산을 챙겨주는 레이튼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담은 한숨은 우산을 두드리는 거센 빗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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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어이.”
“네, 고객님. 치한 및 스토커 신고는 국번 없이 112입니다.”
루이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산대 안쪽의 종이봉투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방학의 대학 서점은 한가하기 그지없었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저를 찾아올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정말 이럴 거냐?”
“그 말 그대로 돌려주면 되겠어?”
“프로즌.”
“시간 없다니까.”
질리지도 않는지 벌써 일주일째 출석 도장을 찍고 있는 쉬레에게 루이스는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명백한 거절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게임할 시간이 없는 것 뿐이다. 어김없이 당장 화보를 찍으러 가도 될 것 같은 차림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선글라스는 대체 몇 개나 있는지, 오늘은 짙은 갈색의 선글라스였다.
“고작 30분 내주는 게 그렇게 힘든가?”
“하아. 힘드니까 이러고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먼저 반말을 찍찍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말을 낮춘 게 엊그제였다. 쉬레는 호칭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저만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거기다 자꾸 보다보면 정이라도 들 거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미운 정을 붙이려는 건지 어느 쪽인지 몰라도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밥이라도 사겠다고,”
“체할 거 뻔한 상대랑 밥 먹는 취미는 없어서.”
“너,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쯤 했으면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일주일째 반복된 논리에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바 아니고, 그쪽이 굽히고 들어오는 거에 황송해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루이스는 그의 팬이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애초에 와서 꼬셔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저 쉬레의 일방적인 요구일 뿐이었다.
“어제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왜 그쪽 사정에 맞춰줘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돈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주지.”
“부탁하는 태도도 글러먹었고.”
쉬레는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있었다. 너무 뻔뻔하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굴어서 넘어갈 뻔도 했지만, 어쨌거나 루이스는 그의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만 생각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쉬레가 괘씸해하거나 말거나 제가 알 바 아니었다.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데.”
“적어도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진 않았으면 좋겠어.”
“흐응. 난 어디까지나 책을 사러 온 거니 그건 됐고.”
루이스는 영혼 없이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대충 아무거나 추천해보래서 법학과 전공 서적을 넘겨주면 거들떠도 안 보고 카드부터 내미는 놈이 책을 사러 오긴 무슨.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루이스는 이글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쉬레가 혼자서 찾아왔을 리도 없으니 백퍼센트 그녀석 짓이었다. 생각해보면 거기 간 것도 이글 때문인데, 거기에 신상까지 털어줬으니 만악의 근원인 셈이었다.
“그래도 쉬는 날은 있을 거 아니야. 그때도 그렇고.”
“아쉽게도, 내 쉬는 날은 어제였는데. 앞으로 이주간 없을 예정이고.”
“뭐?”
능글맞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쉬레가 짜증을 내다 혀를 차며 돌아섰다. 이 정도면 적당히 엿을 먹여준 기분이라 좀 후련하긴 했지만, 쉬레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루이스를 마주했다.
“…낮이 안 되면 밤도 괜찮다.”
“난 잠도 자지 말라고?”
“네 녀석 때문에 나는…!”
쉬레는 뭔가를 말하려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랫입술을 물며 입가를 엄지로 매만지는 게 꽤 선정적이었지만 그도 자신로 남자였다. 차라리 작업을 걸었으면 걸었지, 이건 뭐 어린애가 놀아달라 떼 쓰는 것도 아니고.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쪽이 내 사정 생각을 안 해주는데 내가 그쪽 사정 생각해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
“난 그쪽 팬도 아니고 아쉬울 것도 없어. 지금 자기가 일주일째 억지만 쓰고 있다는 걸 좀 알 때도 되지 않아?”
쉬레가 무섭도록 시린 눈으로 루이스를 응시했다. 그렇게 본다고 겁을 먹는 것도 아니건만. 루이스는 계산대를 톡톡 두드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이글보다 더 다루기 힘든 것 같았다.
“저기, 쉬레.”
쉬레는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도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깔보이는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루이스는 잠시 그를 마주보다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시간 나면 연락할 테니까 그만 와.”
이게 루이스가 할 수 있는 타협의 끝이었다. 사실 이글이 알려준 거면 이미 다 털렸겠지만, 그래도 그와 제가 직접 번호를 주고받는 건 의미가 달랐다. 어쨌거나 쉬레는 지금까지 제게 연락을 한 적이 없었고, 루이스가 아는 거라곤 쉬레가 이글의 형이라는 것 뿐이었다. 쉬레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찍었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루이스가 연락처를 저장하려는데 쉬레가 이름 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벨져. 벨져 홀든이다.”
“…루이스.”
그가 불쑥 나타난지 일주일만에 하는 통성명이었다. 루이스는 번호를 저장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쉬레가 핸드폰을 꺼내는 걸 보고 끊자 쉬레는 화면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화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저장을 안 하는 걸 봐선 이미 알고 저장해둔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글 홀든. 루이스는 그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고는 눈앞의 상대를 마주했다.
“이제 됐지?”
“일주일, 딱 일주일 기다려주도록 하지.”
“그거 참 무서운걸.”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이러다 집까지 찾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어째 좀 불안했지만 쉬레는 오늘의 수확에 만족했는지 쿨하게 등을 돌려 나갔다. 루이스는 계산대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괘고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쉬레는 루이스를 한 번 돌아보고, 녹음이 우거진 교정을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등이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했다.
벌써 미운정이라도 들었나. 루이스는 벨져가 올 때 켰던 에어컨을 끄고 가디건을 집어들었다. 밖에 있다 온 사람에겐 시원할지 몰라도, 하루 종일 있는 사람한테는 제법 쌀쌀한 온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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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1.
[ Prequel ]
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3년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1.
그 일로부터 열흘. 딱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어처구니 없는 기사도 돌았고, 커뮤니티엔 쉬레에 대한 옹호와 비판과 욕설이 마구 뒤섞인 채 그들끼리 치고 받기를 반복했다. 그동안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런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봤자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들이 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벨져 홀든의 관심은 프로즌이라는 세글자와 그 멀끔한 얼굴의 남자에게 쏠려있었다. 찾아서, 이 수모를 갚아야 한다.
검색을 해본 결과 프로즌은 실제하는 유저였다. 어느 게임, 서버에나 하나 쯤은 있을 법한 고루한 닉네임이지만 프로즌이라는 이름은 그의 그 서늘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꽤 닮아있었다. 프로즌이 그에게 어울리는건지 그가 프로즌에 어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계정이 그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프로즌. 공식전을 돌지 않는지 랭킹조차 뜨지 않는 언랭의 유저.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커뮤니티 창을 켰다. 여전히 회색으로 뜨는 그 세글자에 괜히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일방적으로 친구 추가를 하고, 언제 접속할까 어플까지 깔았건만 프로즌은 열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급수를 보면 그래도 꽤 오래한 것 같은데. 벨져는 회색 글씨를 보며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팀으로는 진 적이 있어도, '쉬레'에게는 이게 첫 패배였다. 벨져는 누가 뭐래도 1:1의 강자였다. 누구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근접전에서 만큼은 뛰어나다 자부했다. 그런 그에게 언랭의 일반인, 그것도 시니컬을 들고 아이스에게 졌다는 게 벨져에겐 충격이었다. 첫 패배와, 전국적 망신과 프로즌. 벨져는 제가 진 이유를 복기하기 위해 끊임 없이 연구했다. 그렇게 지고 한 사나흘은 보이는 족족 아이스만 잡아댔다.
하지만 수차례 1:1을 해도, 상위권의 아이스 유저들과 붙어도 아이스는 그때처럼 벨져를 위협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명백하게 쉬레가 프로즌에게 졌다는 뜻이었다. 시니컬로 아이스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프로즌의 아이스는 겨우 30대 레벨에, 앞선 한타로 체력이 반토막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1셔라곤 해도 풀피였던 제 시니컬을 이겼다. 벨져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명백한 실책이었고,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벨져는 그로부터 삼일은 잔소리꾼을 피해 핸드폰도 꺼놓았다. 이글 녀석은 그러게 한 번 큰 코 다칠 줄 알았다며 귓이며 우편으로 놀려대고 끝이었지만. 짜증은 나도 차라리 그 쪽이 나았다.
벨져는 애꿎은 세팅창의 아이템을 정리하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서늘한 눈빛과, 멀건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여름인데도 겨울을 떠오르게 하는 녀석이었다. 벨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양껏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가도 가슴에 맺힌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삐릭, 접속 알림 사운드에 벨져는 반사적으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벨져는 이글의 클랜 이동 알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 귓속말이 왔다. 녀석의 파티 초대 테러에 초대 거부 설정을 해놓은 이후로 늘상 있는 일이었다. 오라는 프로즌은 안 오고. 벨져는 이글을 만나기 전에 빠르게 큐를 눌렀다. 방학 중이고, 경기도 끝난 지라 사람이 꽤 있으니 이글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글 녀석은 클랜원들과 인사니 뭐니 하느라 못해도 오분은 늦게 들어올 것이다. 벨져는 빠르게 시니컬을 가져갔다. 그래봤자 상위 랭크의 매칭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그게 지루하다고 쓰레기같은 일반전에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문득문득 손이 F7로 가는 것은 거기서 프로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알바하느라 자주 못 들어온다곤 했지만 다른 아이디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마주치는 랭커들 사이에 숨어있는 건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 막연히 기다리는 것 뿐인데, 그것도 열흘이 넘어가니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이게 전부, 프로즌 때문이다. 벨져는 창밖의 야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 화면이 전환되며 흐르는 배경음악에 적팀 조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익숙한 닉네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메이헨(아이스) : 오! 뭐야, 평타에 발린 쉬레자나?]
일반 채팅으로 도발하는 동생 녀석에 벨져는 왼쪽 중앙 3립으로 향했다. 도발에도 수준이 있지, 저따위 싸구려에 넘어갈 리 없었다. 아직 한참 멀은 동생을 친히 가르쳐주기 위해 벨져는 골목 안개지역에 숨어 애용하는 디티 인사이드를 깔았다. 아니나 다를까, 쭐레쭐레 슬라이드를 깔고 3립을 먹기 위해 이글의 아이스가 나타났다. 아이스 하나 잡는데는 궁극기도 필요 없다. 벨져는 가볍게 원콤보로 이글을 전광판으로 보내버렸다.
[메이헨(아이스) : 아 형! 귀여운 동생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쉬레(시니컬) :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메이헨(아이스) : 내가 없는 소리한 것도 아닌데 왜그랰ㅋㅋㅋㅋ]
벨져는 이글을 차단하고 타워를 치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한타가 벌어졌으나 벨져는 초반에 이글 녀석을 처리했으므로 노마크 상태에서 레벨링을 하기 위해 합류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앙 타워를 끼고 4:4를 하면 그게 그거였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 이상 비등비등하게 타워를 긁다 서로 레벨링을 하기 위해 옆 타워로 이동할 터였다. 벨져는 이글의 리스폰이 끝나는 걸 보고 혼자서 반피를 만든 타워를 두고 뒤로 빠졌다. 아이스의 빠른 기동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쯤이 딱 시니컬의 궁극기로 한타를 걸어보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적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알고 있는 것과 그걸 막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중앙타워와 사이드 타워 옆 통로의 안개지역. 벨져는 거기에 숨어 디티를 꽂았다. 닌자 페어 중 하나인 시니컬은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데미지, 그리고 화려한 스킬만큼이나 방어력과 체력이 약했다. 제 팀의 디티가 아닌 디티 꽂히는 소리에 벨져는 바로 우클릭으로 디티를 꽂던 적팀 근딜을 잘라냈다. 그 뒤에 있던 원딜까지 전광판으로 보내고, 뒤늦게 달려오는 탱커와 아이스의 슬라이드에 바로 스페이스로 구멍을 타고 낙하한 벨져는 팀원들의 굿 소리를 들으며 중앙 타워에 핑을 찍었다.
근딜과 근딜의 싸움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벨져는 중앙타워의 팀원들과 합류에 중앙타워를 긁는 대신 아까 남겨둔 타워를 독차지했다. 최근 상향을 받은 스트리머 덕에 남은 타워 하나마저 금세 파괴하고 나니 딱 3분이었다. 벨져는 안쪽의 립까지 먹고 나서야 라인을 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스노우볼링 전개였지만 적팀엔 언제라도 역전을 노릴 수 있는 스타라이트와 미스틱이 있었다. 거기에 검증이 된 건 아니지만 영웅 플레이의 대표캐인 아이스까지. 그 셋의 궁극기를 한번에 맞으면 아무리 레벨차가 나도 위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트루퍼가 뜨기 전까지 통로 립을 먹는데 스트리머가 아이스에게 잘렸다. 순식간이었다. 아마 물방울쿠션이 꺼지자마자 샤드에 당한 것이리라. 얕은 잔재주에 벨져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봤자 이글의 아이스는 영웅병 걸린 아이스일 뿐이었다. 공방의 다른 아이스 랭커와 붙어도 프로즌 정도의 아이스는 없었다. 그러니 이글 녀석의 아이스가 위협이 될 리가. 마침 트루퍼가 딱 좋은 위치에 떴다. 벨져는 바로 트루퍼를 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1단계지만 그래도 코인 벌이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이미 3장2모를 찍은 후라 트루퍼는 팀원들이 오기도 전에 벨져의 손에 끝이 났다. 탱커나 서포터가 잡고 있던 거라면 또 모를까, 딜러가 막타를 먹는 게 당연했다. 거기에 스트리머는 이제야 겨우 전광판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공방이 버프에 벨져는 옆에서 터지듯 밀리는 아군 철거반을 보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철거반이 날아가는 정도를 봐선 아이스다. 벨져는 이동속도 킷을 사용하고 4번타워 앞 통로에 디티를 꽂았다. 바로 가까이서 들리는 휠업소리에 E키를 누르자 이글 대신 아이스와 함께 옆에 있던 히포크라시와 어트랙티브가 같이 갈렸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극공 힐러는 바로 궁극기에 죽고, 방서폿이었던 어트랙티브는 쐐기와 패닝으로 처리하고 나니 스타라이트가 다가왔다. 벨져는 아껴둔 왈츠로 통로를 타고 빠져나왔다. 둘을 끊은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통로 나오자마자 옆에서 미스틱과 아이스의 궁극기 소리와 함께 아군 상태창에 셋이 전광판 신세가 됐다. 암살을 하는 사이 옆으로 이동해 라인을 밀던 팀원들을 노린 거였다. 이글 녀석은 아마 저를 노린 거였겠지만.
벨져는 이글을 추격하는 대신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스타라이트의 기어3가 남아있고, 중앙타워가 살아있는 이상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글 녀석의 귓속말만 아니었다면, 벨져는 그대로 타워를 포기했을 터였다.
[메이헨: 형, 프로즌 보고싶지 않아? 가르쳐줄수 있는데ㅋㅋ]
[메이헨: 내기할래? 이기면 알려주지~]
이글의 귓속말은 벨져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글이 하는 말이니 그냥 하는 도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위여부를 살피고 재기에 벨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몸이 달아있는 상태였다. 벨져는 잠시 한숨을 깊게 내쉬고, 234번 소모킷을 전부 사용했다. 지루하게 벽돌을 쌓을 뿐인 게임은 순식간에 결승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벨져를 흥분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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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0.
[ Prequel ]
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본편의 3년 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0.
날은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었고, 종강을 만끽하며 늘어지게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졸업까지 앞으로 반 년. 취직 걱정이 앞섰지만 당장 사는 게 바빠 남들 다 따는 자격증이나 뭐니 하는 것들은 거들떠볼 수도 없었다. 그런 걱정을 하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가끔 동기나 후배들이랑 한 판씩 하던 게임에서 어떻게 연이 닿아 소위 꿀알바라고 하는 자리를 얻고, 창고로 쓰던 쪽방이라도 괜찮으면 옮겨와 살라는 사장님의 배려에 지갑에 여유가 생긴 덕이었다. 방 하나짜리 고시원보다 넓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편했다.
루이스는 터덜터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설핏 깬 잠을 다시 자기 위해 차가운 장판 쪽으로 돌아누웠다.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잠들어 휴일을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화는 한 번 끊겼다가 다시 걸려왔다. 스팸 전화는 아니라는 소리다. 두 번이나 걸 정도면 학교의 급한 일, 아니면 알바 대타일 가능성이 컸다. 루이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으려 장판을 더듬거렸다. 손끝에 닿은 핸드폰을 끌어당겨 전화를 연결해 귀에 갖다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나! 뭐해?”
“……. 이글…. 나 오늘 이 주 만에 쉬는 날이거든…?”
“하하! 그거 잘 됐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물이라도 한 잔 해야 할까. 루이스는 핸드폰 액정에 뜨는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받아버린 것을 후회하며 빈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단잠을 자던 차에 하필이면 이글 홀든의 전화라니. 지금이라도 그냥 끊어버릴까. 그럼 당장은 편하겠지만, 그랬다간 또 한동안 이글이 이걸 가지고 야박하네 어쩌네 하며 징징댈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 조금 시달리고 마는 게 낫지. 루이스는 애써 긍정했다. 자다 일어난 참이라 그걸 확인할 정신이 없기도 했다.
“어어, 끊지 마! 놀자는 거 아냐!”
경쾌한 이글의 목소리에 짜증이 앞섰다. 습하고 더운 여름의 날씨는 사람의 짜증 지수를 쉽게 올린다. 휴일에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있다면 나오라는 이글 홀든의 전화가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비단 쉬는 날이 아니라도 시도 때도 없이 놀자는 녀석이지만, 사람에겐 모름지기 쉴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었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럼 뭔데. 거짓말할 생각, 큼. 흠. 하지 말고.”
아무래도 물을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목을 가다듬자 이글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글의 주변이 꽤 소란스러웠다.
“어, 오늘 지스타 있는데 백 명 한정으로 쿠폰 뿌린대. 근데 1인 1매로 준다는 거야. 아 존나 빡빡하지 않냐? 사람도 존나 많.”
“용건만.”
“야박하긴, 와서 나 대신 좀 받아줘. 갑자기 아부지 호출이 와서 가야될 것 같은데 나 지금 서른 번째로 서있단 말이야. 기다린 거 아깝다구. 대신 수고비는 제대로 줄 테니까! 응? 다 전화 안 받는다구~.”
안 받을 만도 하다. 누가 이런 날 뙤약볕에서 몇 시간씩 대신 기다려주겠는가. 루이스는 고민했다. 수고비가 얼마인가에 따라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데.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어디로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
“어, 그건 톡으로 보내놨어. 네가 안 보니까 전화한 거라구~. 알았지? 부탁할게! 아, 추가상품은 알아서 해~.”
루이스는 이글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갑자기 생겨버린 일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글 대신 쿠폰을 받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루이스는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콜라 한 캔을 까 들이켰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청량감에 숨통이 좀 트였다. 부스에서 쿠폰을 챙기고 추첨권을 넣었는데, 그것도 챙겨가야 할까. 루이스는 고민하며 한 모금 콜라를 마시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콜록였다. 따끔따끔 거리는 게 거식해 목을 만지고 있으니 위에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다.
사이퍼즈 부스는 여전히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반 관람객에게도 쿠폰을 준다는 것 같은데 고작 그것 때문에 저 안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캐릭터 체험도 어차피 기다리면 풀릴 터였다.
루이스는 카탈로그를 펼쳐보다 함성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프로게이머를 이겨라! 라는 프로그램에 상품은 50만 테라. 토너먼트식도 아니고 단판으로 신행되는 소위 퍼주기 행사였다. 오늘의 초청 선수는 ‘쉬레’. 최근 가장 핫한 선수였다. 팬도 많은 만큼 안티도 많은 모양이지만, 그의 플레이를 동경하며 따라하는 사람들 때문에 프로게이머니 대회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도 알고 있는 선수였다.
그러고 보면 한 번도 그의 플레이를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추첨발표까진 시간이 남아있었고, 근처 카페엔 이미 사람들이 즐비했다. 루이스는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는 걸 보며 잠시 망설이다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캐스터 대신 BJ를 하는 유저가 옵저버를 하며 중계를 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스크린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쉬레의 기습에 셋이 ‘블레이드’의 궁극기에 끊기고, 바로 추격을 이어 쿼드라가 터졌다. 쿼드라가 제노사이드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루이스는 제가 방금 무엇을 본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관중은 같이 흥분해 쉬레를 연호했고, BJ도 그의 플레이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작한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전방 타워가 모조리 털렸다.
“나라면 쉬레한테 안 덤빌 것 같애…….”
옆에 서있던 여고생이 중얼거렸다. 그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팀이 불쌍하다고 소곤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쉬레는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수준에 맞춰주겠다는 듯이, 코인을 잔뜩 들고도 레벨도 올리지 않고 있었다. 블레이드의 필수품이라 여겨지는 하드스킨도 없거니와, 아이템 역시 온통 흰색 일색이었다. 명백하게, 가지고 놀고 있다. 개중에 용기를 낸 탱커 하나가 쉬레를 물었다. 하지만 쉬레는 팀원들의 백업이 오기도 전에 탱커를 녹이고, 그를 따라온 서포터까지 끊어냈다. 2장 1모 1신에 스킬링. 쉬레는 노셔츠로 상대팀을 농락하고 있었다. 역량 차이가 확연했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본 루이스는, ‘쉬레’가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상했다.
게임은 그대로 터져서 십 분을 조금 넘겨 끝나고 말았다. 쉬레와 함께한 유저 넷도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쉬레는 무표정으로 그들이 건네는 인사에 눈길만 잠시 주었을 뿐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최강의 근딜이라는 수식에 보탬이라곤 없었다.
BJ가 쉬레와 함께한 네 명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진 팀에겐 위로의 말과 함께 부스를 나온 그들을 도닥이고 쿠폰을 건넸다. 다음 경기의 참가 희망자를 묻는데, 쉬레 팀은 지원자가 넘치는 반면 도전자 팀은 지원하겠다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황한 BJ가 손에 든 쿠폰을 흔들어보였으나 관중은 웅성웅성할 뿐이었다. 이미 패배가 예정된 데다, 그 꼴을 보고도 무력한 패배라는 굴욕을 당하고 싶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여성 유저가 손을 들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가는 사이 루이스도 손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온 거지, 그런 압살을 당하고 목격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다.
그래, 루이스는 흔히들 말하는 ‘쉬레 플레이’가 싫었다. 루이스가 나오자 시간이라도 끌려는 건지 BJ가 처음 손을 든 여성유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여차저차 도전자 팀에도 다섯 명이 모이고, 루이스는 생전 처음 본 사람들과 방음 부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어색하고 경직된 공기 속,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클라이언트를 켜니 클랜 알림 창에 절친한 원딜러의 접속 알림이 떴다.
헤드폰을 끼기 전, 처음으로 나섰던 여성 유저가 말을 걸었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친숙했다.
“저기,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아, 프로즌입니다. 초대해주세요.”
“어? 정말요?”
“네. 다 대문자로.”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빙그레 웃으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날 아나? 공성에서 마주친 사람인지도 몰랐다. 타앙, 파티 초대의 둔중한 UI사운드에 화면을 보니 방금 접속한 원딜에게 초대가 와있어 루이스는 거절을 눌렀다.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팅창을 열려 엔터를 치는데 다시 한 번 초대가 왔다. 키보드에 양손을 올리고 있던 루이스가 다시 거절을 누르기 위해 마우스를 잡으려는데, 옆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받아요. 다 기다리고 있는데?”
“네?”
루이스가 말뜻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자 루이스 대신 마우스를 움직여 파티 초대 수락을 눌렀다. 다섯 명. 방금 그녀에게 초대를 위해 닉네임을 말했던 사람들로 채워진 파티에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설마.
“퀸?”
“안녕, 프로즌. 이런 우연이라니, 예감이 좋지 않아?”
루이스는 그제야 그녀가 제가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슬쩍 웃었다. 그녀의 말 그대로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저와 상성도 호흡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루이스는 다른 세 사람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스노우퀸, 앤지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그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앤지는 루이스에게 찡긋 윙크했다.
안내에 따라 친선전에 입장한 루이스는 조합을 맞출 것이냐 물었다. 앤지의 옆에 앉은 남자가 어차피 쉬레한테는 소용없을 거라며 잘하는 거 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으로는 이길 수 없다. 맞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고민하다 ‘아이스'를 골랐다. 팀원 하나가 벌써부터 게임을 놓는 거냐며 허탈하게 웃었지만 루이스는 게임을 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셀렉과 대기가 끝나고, 배경음악이 깔리며 화면이 전환됐다. 쉬레는 그의 주캐인 ‘시니컬’이었다. 부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스님 힘드시겠네요. 아이스로는 시니컬을 못 이기잖아요. 삑도 자주 나고.”
“……. 해봐야죠.”
루이스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마우스를 잡았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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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밑도 끝도 없이 양궁au
그냥 갑자기 뜬금없이 떠오른 양궁au
양궁은 다른 스포츠와 달리 오로지 홀로 고고한 스포츠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이고, 아무리 단체전이라 해도 활을 들고 선 순간만큼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도, 그렇다고 너무 빨리 쏘아서도 안 된다. 철저하게 계산된 조준, 망설임을 남겨선 안 되는 슈팅. 그렇기에 벨져에게 양궁은 최적의 스포츠였다.
날씨 좋다. 벨져는 잘 정리된 화살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사격장에 들어섰다. 방금 전까지 바람 한 점 없더니, 파이널이 시작되자 갑자기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건 좋은 징조다. 벨져는 승리의 여신이 오늘도 제 손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규모도 상금도 작은 대회지만 어쨌거나 이번 대회는 벨져의 고교 데뷔전이었다. 초등학생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벨져는 그동안 꾸준히 ‘홀든’의 명예에 걸맞게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컵과 금메달을 거머쥐며 유망주로 입지를 굳힌 선수였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바뀌는 건 없다. 이제 겨우 격에 맞는 상대들을 만나게 된 것 뿐이었다. 승리는 언제나 제 것으로 정해져있었고, 오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타고난 신체조건과 탁월한 집중력, 그리고 무엇보다 망설이지 않는 빠른 슈팅. 벨져는 화살이 제 손끝을 떠나 과녁에 꽂히는 그 사이의 공백을 즐겼다. 원하는 대로 꽂히는 화살과 정상에 선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벨져는 빨리 쏘는 만큼 힘도 좋았기에 바람이나 날씨의 영향에도 강한 편이었다. 날씨가 궂을 때면 벨져와 다른 선수 사이의 점수 격차가 더 벌어지곤 했고, 그런 점에서 이번 경기도 니케가 제게 날개를 펴주는 셈이었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수가 사석에 들어오는 것을 흘끗 바라봤다. 특이한 색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끈 탓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쳐다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여간 영국 놈 아니랄까봐 칙칙하긴. 벨져는 짧은 감상을 끝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곧 마이크로 제 이름이 호명됐고, 벨져는 일어나 활을 들었다. 성인급도 잘 안 쓰는 무거운 활. 그 무게를 한 팔로 들고 벨져는 사석에 섰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벨져는 자기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말하는 문구를 떠올렸다. 그 말 그대로 벨져는 화살을 오래 들고 있는 법이 없었다. 숨을 고르고, 시위를 당겨 스트링이 입술과 턱에 닿도록 당기고 잠시 숨을 멈춘다. 하나, 둘, 셋. 조준을 마친 벨져는 팔꿈치를 올리고 화살을 쐈다. 화살은 바람을 찢고 날아가 노란 원 안에 꽂혔다. 9. 시작으로 나쁘지 않다. 가볍게 활을 돌리며 벨져는 다음을 준비했다. 살짝 돌아간 암가드를 절히나느데 옆 사석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순간 불어오는 강한 돌풍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하다하다 바람까지 제 손을 들어준다. 쏘고 울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자 정확히 노란 원 안에 꽂힌 화살이 보였다. 10. 오조준을 한 게 바람을 탔나. 자기 차례를 알리는 신호음에 벨져는 활을 들었다. 경기라고 해봤자 매일 하는 연습이나 다를 게 없다. 발사 신호음이 울리고, 벨져는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화살을 떠나보냈다. 9. 이번에도 화살은 9에 꽂혔다. 10에 가깝긴 했지만 그래도 9는 9였다. 강한 바람에 경로가 살짝 휜 탓이었다. 어긋난 계산에 벨져는 혀를 찼다.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지만 제 계산이 틀렸다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조금 더 힘을 들였어야 했나. 벨져는 과녁을 보며 팔짱을 꼈다. 옆에선 다시 신호음이 울렸다. 그냥 빨리 끝내지. 벨져는 바람을 맞으며 조금 시간을 들이라는 제레온의 충고를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정도의 판단은 모두 제 몫이다. 섬광같은 화살은 벨져 홀든의 특기이자 자랑이었다. 활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9. 이번에 잡지 못하면 꼴이 우스워질 판이었다.
벨져는 화살을 끼웠다. 평소 하는 것처럼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고, 가늠자를 통해 과녁의 정중앙을 응시했다. 숨을 고르고, 때를 기다려 쏜다. 화살을 정중앙을 비껴나 두 번째 원의 끄트머리에 꽂혔다. 화살이 꽂힌 걸 본 벨져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총합은 27, 재수가 없으면 26. 이렇게 되면 이번 세트를 내줘야 할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내가, 왜? 왜 초조해하는 거지? 나는 벨져 홀든이다. 한 세트쯤 내주더라도 결국 이기는 건 나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제 상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들었는데, 대충 흘려듣다보니 영국인이라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벨져는 사석에 서서 화살 두 개가 중앙에 가깝게 꽂힌 과녁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영국놈을 바라봤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옆선이 곱상하니 가늘다. 잠시 그 옆얼굴을 보는 동안, 화살이 활을 떠나며 그의 손 안에서 활이 미끄러지듯 돌았다. 얄궂게도 그의 화살은 벨져의 화살이 그랬던 것처럼 8과 9 사이의 선에 꽂혔다. 남은 건 심판의 몫이지만, 그래봤자 운이 좋아야 비기는 거였다. 기록지를 든 심판들이 과녁 앞을 오가더니 스코어가 스크린에 떴다. 제 3라인, 벨져 홀든, 9, 9, 8. 졌다. 벨져는 제게서 2점을 따간 영국놈의 이름을 확인했다. 제 4라인, 루이스, 10, 9, 9. 망할.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구겨졌다.
“하...! 제길....”
욕보다는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정색한 벨져는 다시 활을 들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딴 새끼한테 지다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벨져는 다시 사석에 섰다. 성도 없는 고아같은 게 발을 디딜 판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줘야 했다. 괜히 덤볐다 허송세월 하느니 뭣 모르는 녀석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납작 엎드리게 해주지. 벨져는 활을 들었다. 화살촉엔 오만이 서렸다. 결과는 6:0. 참패였다.
***
벨져는 대기실을 뒤엎었다. 진 건 진 거다. 명백하게 졌다. 그 사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코어가, 과녁에 정확히 꽂힌 화살이 입증했다. 우승을 확신한 경기에서, 겨우 16강에 떨어졌다. 토너먼트식 경기에선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 벨져는 분을 삭이며 제게 쓰디 쓴 패배를 맛보게 한 빌어먹을 개새끼의 이름을 목 안쪽으로 곱씹었다. 제게 집중됐어야 할 언론의 플래시는 제레온이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모두 그에게 쏠렸다. 결과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준결승에서 스트링이 끊어지며 손을 다친 바람에 일종의 패널티가 있었음에도 결승을 속행해 퍼펙트 골드로 한 세트를 따낸 무명의 신인 선수. 심지어 이미 승패가 결정된 마지막 세트에서 루이스는 마지막 화살로 과녁의 정중앙에 설치된 카메라를 깨버렸다.
무명의 신인이 영웅처럼 나타나 벨져 홀든을 꺾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올라온 기사의 타이틀이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벨져 역시 그에 대한 정보를 기사로 볼 수밖에 없었다. 벨져는 차 안에서 태블릿을 켰다. 온통 벨져를 꺾고, 라는 말로 도배되다시피 한 기사들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던 벨져는 마침내 쓸만한 인터뷰 기사를 찾아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시작했다는 인터뷰를 시작으로 벨져는 루이스에 대한 정보란 정보는 다 끌어 모았다. 그는 예상대로 고아였고, 저를 누른 그 경기 전에는 대회에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양궁을 시작한지 채 일 년도 안 되어 준우승을 한 ‘영웅 루이스’.
이글이 집착도 그 정도면 병이라고 질색하며 놀려도 개의치 않았다. 벨져는 필사적으로 제가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부모가 천재라던가, 아니면 수없이 연습을 했다던가. 하지만 루이스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아마 그 본인조차 모를 만한 자료들 안에선 루이스가 양궁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전부였다.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코치도 없이 고작 친구랑 일 년 한 걸로 필드에서 그렇게 계산을 해서 쏜다고? 벨져는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내팽개치길 반복했다. 그리고 언론이 루이스 영웅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선수단을 나왔다.
선수단을 나온 벨져는 홀로 연습에 매진했다. 때마침 제레온이 도핑사건에 연루됐고, 사람들은 벨져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고 수근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머릿속에 벨져 홀든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새겨주지 않으면, 편히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떠드는 것과 달리 벨져는 진 것 자체는 금방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이긴 횟수가 더 많고, 앞으로도 이길 날이 많다. 제가 너무 여유롭게 생각해서, 기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오만하기 그지없어서 방심한 대가를 치른 것 뿐이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해도 가시지 않는 게 있었다.
벨져는 이걸로 딱 오백발 째의 화살을 떠나보내며 다시 그 말간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들이 묻기 전까지 벨져 홀든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 게 제일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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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쩌다 마주친 그대.
2014/10/13
옛날 연성 안 올린 거 발굴해서 올림
거슬리고 방해된다는 이유로 동행을 만들지 않던 벨져로선 제법 후한 제안이었음에도 루이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축 쳐진 채 이끄는 대로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맑아져있었지만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발밑이 훅 꺼져버리는 감각에 놀라 퍼득거린 것도 잠시, 벨져 홀든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악몽을 꾼 것처럼 개운하지가 않았다.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며칠째 벨져 홀든을 괴롭히는 꿈은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아보아도 이미 깬 꿈은 검게 물든 장면에 멈춘 채 흐르지 않고,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안타리우스를 추적하고 인식의 문을 찾아내 파괴하는 데 위험이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멍청이랑 자꾸 마주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기사단에서 보낸 정보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보다 신경을 거스르는 건 그들의 존재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그들은 좋은 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고 남자는 그걸 알면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로 바라보면 한 번쯤 돌아봐줄 법도 하건만 그녀는 매정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쪽에선 제법 유명인이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문이 제법 됐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났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안타리우스의 포인트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작 그들은 저를 못 알아본 데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연인이 뭔가를 발견한다 해도 이미 벨져가 다녀간 후라 상관없지만 그래도 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좋을 리 없었다.
벨져는 마른세수를 하며 어제 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벤치에 앉아 궁상을 떠는 남자의 얼굴은 전보다 더 수척해보였고, 한심하고 바보같았다. 멀쩡한 얼굴을 들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적의 요새 근처에서 빈틈을 보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쓰러뜨린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진 주제에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나부랭이에게 당하는 것 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기에 벨져는 어젯밤도 그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게 벌써 몇 주 째인지. 이렇게 꿈자리가 사나워진 것도 분명 그게 거슬려서인 게 분명했다. 차라리 빨리 이공간을 찾아서 사라져줬으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쉬울 리 없었다. 벨져는 거기까지 흘러간 생각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기사단과 정보통에게 도착한 편지들을 대충 읽고 정보들을 정리한 벨져는 편지들을 갈무리해 객실 금고에 던져놓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곧 하우스키핑 시간이니 나가줘야 청결이 유지되는 데다 호텔 방 안에만 있기엔 갑갑했다. 거울에 비친 벨져 홀든은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제 모습에 만족한 벨져는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바람도 선선히 부는 게 딱 좋은 날씨라 잠시 들른 카페의 이층 야외 테라스에 앉아 본 노을은 아름다웠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차와 샌드위치는 제법 먹어줄만 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고 한 잔 할 기분이었기에 적당히 펍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왁자지껄하게 노는 무리에 낄 생각도 없고, 벨져가 즐겨 마시는 좋은 술이 있을 리도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잠시 한 잔 하고 사라지면 그뿐. 벨져는 오늘 한 기사가 편지의 끄트머리에 오만한 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한 걸 떠올렸다. 마티니 한 잔을 주문하고 낡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벨져는 실소를 흘렸다. 오만하기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격에 맞는 이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 역시 격이 떨어지는 쪽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원형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기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착취당하며 속고 있는지도 모르고 술에 취하는 이들이었다. 더러는 그런 생각을 하는 벨져를 일컬어 사정도 모르는 귀한 귀족집 도련님이라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다르다.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특권을 누리는 게 바로 귀족이고, 술에 취해 시시덕거리는 일개 필부와 자신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검의 형제 기사단에 들어올 정도의 기사라는 자가 하는 간언의 수준이 그 꼴이라니,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텐더가 마티니를 내려놓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리던 벨져는 얼핏 스친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손등으로 이마를 지탱한 채 맥주를 들이키는 옆모습이 낯이 익었다. 바의 끝과 끝이라지만 그리 큰 펍도 아니었기에 그와 벨져 사이의 거리는 채 5미터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 입고 다니는 후드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올리는 바람에 주홍빛 조명 아래서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술을 넘기면서 목울대가 움직이고, 맥주병을 문 입술에서 흐른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둑한 펍 안에서도 얼굴이 제법 붉은 걸로 보아 꽤 마신 것 같았다. 더운지 후드를 넘기고 티셔츠를 펄럭이는데 게슴츠레 뜬 눈가가 빛에 반짝였다. 슬쩍 벌어진 입술 새로 새는 더운 숨결이 여기까지 닿는 것 같아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시켜놓은 마티니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칵테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겨우 루이스 따위를 넋을 잃고 바라본 게 자존심이 상했다. 한 모금 넘기자 싸하게 넘어가는 알콜에 정신이 들었다. 분명 제가 시킨 건 온더락이 아니었는데, 얼음이 녹아 진에 섞이는 게 영 껄끄러워 짜증이 났다. 바로 미간을 찌푸리자 바텐더가 다가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이봐, 혹시 그쪽?”
“치워라.”
대답할 가치도 없었지만 바텐더가 음흉한 눈으로 가리킨 건 분명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어느 멍청이였기에 벨져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바텐더는 움찔하더니 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 한 걸음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진엔 성긴 얼음이 조각나 물이 섞이고 있었고, 벨져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웨이터에게 손짓했다.
“너, 너. 이리로.”
“예, 말씀하시죠….”
빳빳한 지폐를 마티니 옆에 올리자마자 방금 전의 능글거림은 어디로 갔는지, 바로 굽신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벨져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펍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은 이미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 녀석, 얼마나 마신 거지.”
“여섯시였나, 일곱시였나 그쯤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마셨죠. 아무리 포터라지만 앉아서 마신 것만 해도 혼자서 열댓 병은 마셨을 겁니다.”
벨져는 바텐더의 대답에 인상을 썼다. 아무리 낮은 도수의 맥주라 해도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셨으면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시간상으론 저녁도 안 먹고 마셨을 게 뻔했다. 보기보다 술일 센 건지 아니면 홧김에 마시고 있는 건진 몰라도 지금의 루이스는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더 물이 섞이기 전에 마티니를 한 모금 넘긴 벨져는 흘긋 그를 살폈다. 턱을 괴고 상념에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것도, 뺨이 붉게 물든 것도 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시며 궁상을 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벨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저 자식 것까지. 이거면 충분하겠지.”
“헛, 물론입죠!”
“흥.”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 순간의 흥 때문에 싸구려 술로 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잡친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도 대신 내줬겠다, 그냥 그대로 나가서 가버리면 그만인데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해서 어쭙잖은 놈팽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든, 찬바람을 맞고 거리에서 얼어 죽든 객사하든 알 바 아니다.
바를 뒤로하고 나가려던 벨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신경이 쓰여서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뒤돌아선 벨져는 나올 때와 달리 척척 걸어가 축 쳐진 어깨를 잡아챘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미련하긴.”
“……벨져?”
“다 마셨으면 그만 하고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되묻는 루이스의 표정이 어딘차 서글퍼 벨져는 더 짜증이 났다.
“네 그 잘난 애인한테 가야할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벨져는 바로 애수에 차 깊어지는 루이스의 눈을 보고 아차 싶었다. 루이스란 사람이 애인을 몇 시간 동안이나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실 사람인가 답은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여긴 안타리우스의 요새 근처. 아무리 싸웠다 해도 두세 시간을 여자 혼자 보내게 둘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벨져가 표정을 굳히자 루이스는 미소인지 울상인지 모르게 입가를 씰룩였다. 아픔을 견디려 술을 마시는 그의 옆얼굴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손깍지를 긴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옆을 떠날 수 없는 건 이대로 두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루이스는 위험하다. 그동안 그를 지탱하던 한 기둥이 빠져나간 상실감이 냉정과 침착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적진에서 이렇게 취하게 만들었다. 멍청한 자식. 차였으면 얌전히 그 잘난 연합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단 말인가. 벨져는 아직 반절이 남은 병에 손을 뻗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만.”
“신경 꺼. 벨져 홀든. 어차피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멍청한 자식.”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고, 루이스는 실소를 흘렸다. 멍청하다는 말에 웃는 걸 보면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목이 한 손에 잡힐 정도로 마른데다 눈 밑이 검은 게 그동안 어지간히도 무리를 한 게 뻔했다.
“놔.”
“흥,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 주제에.”
루이스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먼 곳을 그리며 청승을 떠느니 적의를 품고 저를 향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벨져는 그를 도발하기 위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코웃음쳤다. 취한 루이스는 평소의 냉철함을 잃은 후였고, 내지른 주먹은 맨정신의 벨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윽…!”
“하, 미련하다!”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주먹을 한 손으로 잡고 뒤로 꺾자 루이스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펍 안은 시끄러웠고 바텐더는 벨져의 눈짓에 끼어들려하지 않았다. 루이스의 등 뒤에서 손목과 팔을 잡아 제압한 벨져는 루이스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눈앞에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잠시 머뭇거렸다. 저항할 생각도 않고 저를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는 다시 깊은 슬픔에 흐려져 벨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벨져는 루이스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취했다.”
“알아….”
“하, 정말이지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군.”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벨져는 미련한 남자를 놓아주었다. 가볍게 내치듯 놓았을 뿐인데 이미 술에 절어있던 루이스는 휘청이다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아 의자를 잡고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낮게 신음했다. 그 모습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쯧, 한 번 차인 것 가지고 찔찔 대기는. 따라와라. 발목을 잡으면 바로 버릴거다.”
벨져의 퉁명스러운 말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슬리고 방해된다는 이유로 동행을 만들지 않던 벨져로선 제법 후한 제안이었음에도 루이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축 쳐진 채 이끄는 대로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맑아져있었지만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벨져의 푸른 눈과 루이스의 붉은 눈이 마주했다.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던 벨져는 한숨을 내쉬곤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말없이 벨져를 올려다보다 눈을 깜박였다. 펍 안은 어두웠으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건 선명했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벨져를 올려다보며 손을 맞잡았다. 벨져는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당기고, 그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오늘밤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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