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의 영웅과 그의 연인 트리비아 카리나가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닌다는 건 이미 널리 퍼진 얘기다. 그림자와 액자, 환영의 도시 트와일라잇. 상처를 입어도 회복되고, 죽음조차 거스르는 이공간의 존재는 일종의 신비인 동시에 모두가 탐내는 기적이었다. 처음 트와일라잇을 발견하고 그 공간을 독점한 채 황혼의 도시에 군림한 여제는 본디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 이였고, 그녀의 연인은 자신만의 공간을 바라는 그녀를 사랑했다.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다.
몇 주에 걸친 집요한 추격 끝에 회사와 연합이 발견한 건 추레한 망토를 뒤집어쓴 한 남자와 찬란하고 처연하게 바스라지는 빛무리였다. 만월의 밤이었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남자가 쓴 망토의 후드를 벗겨냈다. 힘없이 부서져 먼지와 같이 흩날리는 빛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놓아주듯 한 손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던 남자. 빛무리에 감싸인 그의 손 안에서 어둠이 날갯짓하며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그 범접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광경에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행색은 추레했으나 남루한 옷가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옆얼굴에 드리운 깊은 수심과 애틋한 눈빛만이 사라지는 빛무리에 반짝일 뿐. 추격자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그는 한 때 영웅이라 불린 자이자 여제의 신하였고,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였다.
고통을 애써 참아내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는 시리도록 아픈 미소와 함께 돌아서 저를 찾아온 이들을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달을 등진 루이스는 절벽 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맞았다. 몇 차례에 걸친 추격과 정예요원들을 상대해온 그였지만 이젠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보냈어야 할 사람을 제 욕심으로 잡고 있던 그였다. 돌아보지 마, 카리나. 루이스는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켰다. 돌아올 문은 부쉈다. 물론 그 책임은 전부 제게 향하겠지만 감히 꿈꿔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대가를 치루는 것 뿐이었다.
“문을 부쉈나.”
“보는 대로.”
“엠프레스는.”
“달빛을 따라.”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은 건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루이스는 이 이후 벌어질 일을 가볍게 그렸다. 회사가 독자적으로 보낸 이들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이스…….”
루이스는 제 이름을 부르는 동료를 향해 웃었다. 걱정과 불안, 긴장이 섞여 미간을 찡그린 레베카 옆엔 휴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다. 둘이나 보내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앤지의 걱정이 과했던 모양이었다.
달리는 열차 안, 각각 연합과 회사의 능력자가 지키는 1등칸 안에는 단 둘 뿐이었다. 삼엄한 경비 속에 열차를 탄지 십분여 만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이무스는 가방에서 서류 파일을 꺼내 보고, 루이스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빠르게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아슬아슬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안 그래도 오랜 여정으로 지쳐있던 루이스가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이 침묵은 결국 탐색전의 일부일 뿐. 그렇다면 더 지치기 전에 만족할 만한 정보를 주고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나았다. 어차피 포트레너드로 돌아가면 회사와 연합의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게 뻔했다. 루이스는 타라나 브뤼노를 앞에 두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를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오랜만이로군요. 그것도 이렇게 거창하게.”
“네 신변은 안타리우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현 상황에서 연합의 영웅이 죽기라도 하면 연합과 회사의 균형이 깨지겠지.”
“안타리우스가 활동을 개시했다는 건 압니다. 최근 루사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서류를 검토하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창틀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고 바깥을 보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파일을 덮었다. 직접적으로 적대하거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두 사람은 각 진영의 사람이었기에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속내라던가 행동 패턴, 사소한 습관이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 알고 있다면 더 망설일 것도 없다. 다이무스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문을 열었나.”
“그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전 그녀를 배웅했을 뿐이라서요.”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루한 풍경에서 고개를 돌리니 매사 진지하기 그지없는 다이무스 홀든의 얼굴에 초조가 비쳤다. 회사 쪽에서도 어지간히 급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를 보냈다는 것부터가 이 사안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오가는 시선 속에 서로 뭐 하나라도 잡아내려는 그 긴장 속에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아무리 안타리우스가 점거했다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은 연합의 세력권 안에 있습니다. 회사보다는 정보가 빠르죠.”
저를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매서운 눈빛에 루이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눈을 감았다. 그도 아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건 지금 제가 상대하는 다이무스 홀든이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인지 아니면 홀든의 장남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시나, 잔뜩 굳은 그의 얼굴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루이스는 창틀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 눈을 뜨고 순순히 그가 원하는 정보를 내놓았다.
“동생분은 무사합니다. 둘 다.”
“보증할 수 있나?”
“그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군요.”
루이스는 제 패를 슬며시 보여주곤 덮어버렸다. 벨져 홀든이 이글 홀든을 불렀고, 이글은 나이오비와 다른 능력자를 대동하고 벨져를 찾았다. 비록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루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릭 톰슨의 공간이동과 그림자를 열고 이동하는 것, 어느 게 더 빠른가에 대한 실랑이도 이젠 의미가 없었다.
“루이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시다시피 막 실연을 당한 참이라서요. 더 말할 기분이 아니군요.”
“왜 그랬지?”
“…….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어디까지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꽤 감상적인 말이군.”
루이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어설프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곧 세계는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 것이고, 그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될 바에야 그녀만이라도 행복해지는 게 나았다. 트리비아를 보내기 싫어 미적거렸던 루이스가 그녀를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아주 사소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안타리우스가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니는 지금, 루이스는 제 선택이 늦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문을 열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알겠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쉬도록.”
다이무스는 다시 파일을 펴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루이스는 그걸 보곤 일등칸의 푹신한 쿠션에 지친 몸을 기댔다. 로라스만큼은 아니지만 다이무스 홀든 역시 자는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은 못 된다. 거기다 두 홀든의 정보를 쥐고 있는 이상 다이무스는 회사의 명령이 있다 해도 함부로 나설 수 없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루이스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곧 의식이 무거운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