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레너드에 위치한 홀든 은행, 오후 두 시 반. 다이무스 홀든은 서류에 사인하고 안경을 벗었다. 흰 종이에 빽빽하게 쓰인 검은 글씨를 오래 보고 있자니 눈이 피곤했다. 남은 서류와 시계를 번갈아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짬을 내도 기껏해야 삼십분 정도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면 좀 살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코트를 집어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서두르면 오며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오며가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 생각이 향하는 곳에 발이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다이무스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출근할 때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따스한 게 딱 밖에서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라 그와 함께 공원이라도 거닐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놀랍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헛기침을 하며 클랜사무소의 기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드렉슬러를 지나 서점의 문을 열었다. 난로에 주전자를 올리던 루이스는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잠시, 피식 웃으며 다이무스를 맞았다.
“나도 한 잔 주겠나.”
“어쩐지 오늘은 물을 많이 넣고 싶더라니.”
루이스는 물을 더 붓는 대신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권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미소에 잔뜩 굳었던 얼굴의 근육을 슬쩍 풀며 소파에 앉았고, 루이스는 책장에 기대어 서선 물끄러미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점심은 먹었나?”
“네. 요 앞 카페에서 샌드위치 사다 먹었죠. 당신은요, 일 하다 거르진 않았나요?”
“바쁘긴 하지만 그정도는 아니다. 요전에 애인한테 한소리 듣기도 했고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뜨며 애인이라고 돌려 말하는 다이무스의 말에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숨을 집어삼키듯 웃고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한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마주한 시선에 눈이 감기고, 입술이 닿는다. 다가왔던 것처럼 천천히 입술을 떼고. 눈을 뜬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짙은 회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냥 그것만으로 좋아서 미소를 머금자 다이무스가 한 번 더 입술을 마주쳤다. 짧게 여러번, 새가 모이를 쪼듯 입술을 맞추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물이 끓으며 내는 소리에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잠시만요, 단 둘 뿐임에도 작게 속삭이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다이무스는 멈칫했다. 그 목소리는 잠자리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것과 매우 닮아있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묵묵히 차를 타는 루이스의 등을 보며 다이무스는 제 애인의 몸을 훑었다. 머리부터 흰 목덜미, 곧게 뻗은 등줄기를 따라 매끈한 허리와 탄탄한 엉덩이, 그리고 자신밖에 모르는 은밀한 곳과 바지 안에 감춰진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다이무스는 그의 피부를 만지며 단정한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겨내는 상상을 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왔던 길을 되짚어가자 때마침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마른 것 같군.”
“그런가요.”
루이스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일에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했다. 다이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은 루이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그쪽이 아니다.”
다이무스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봤다. 다이무스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고, 루이스는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귀가 붉어지는 걸 본 다이무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제 손을 움직였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루이스가 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보여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보탰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할 정도로 급하진 않다.”
“윽….”
정곡을 찔렸는지, 루이스가 움찔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하니 안 놀릴래야 안 놀릴 수가 없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 루이스는 얼굴을 붉힌 채 쭈뼛거리며 다가와 다이무스의 무릎에 앉았고, 다이무스는 만족스럽게 애인의 몸을 끌어안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점 특유의 종이와 잉크냄새와 섞여 나는 비누냄새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가 그렇게 루이스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자 꼬물거리다 포기하곤 몸에 힘을 뺐다. 애초에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건만, 루이스는 늘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했다. 루이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을 쓰다듬으며 도드라진 견갑골을 매만지던 다이무스는 제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쯧, 역시 말랐군. 잘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냥 바빴을 뿐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꼭 제 때 챙겨먹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지?”
“다이무스.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군. 데리러 오겠다.”
다이무스의 막무가내에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무릎에 앉힌 덕에 본래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가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턱을 치켜들어 그에게 키스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루이스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면 나오는 버릇에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들어줄 시간은 앞으로 오 분 정도지만.”
“그…. 어차피 안을 거라면, 음…. 보통 그렇잖아요.”
아무리 머리가 좋은 다이무스라도 루이스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정말이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다 하는 말이 겨우 이런 거라니.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그 마음이 귀여워 낮게 웃었다. 루이스는 제가 한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깨닫고는 당장 달아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다이무스에게 허리를 잡힌 채론 어딜 갈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진정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는 루이스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우니 견딜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지. 그리고 나는….”
다이무스는 천천히 허리를 쓰다듬다 대화를 거부하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움찔, 몸을 떨며 무슨 짓이냐는 듯 저를 쏘아보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을 때 살이 만져지는 쪽이 좋다.”
루이스의 얼어붙은 얼굴에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은 다이무스는 그의 이마에 입 맞추고, 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차는 이렇게 마시는 게 아니지만, 차를 마시러온 게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이무스는 포켓에 넣어둔 금장 회중시계를 꺼냈다. 두시 오십분. 떠나야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하아. 결국 당신도 홀든이네요.”
“무슨 뜻이지.”
루이스가 말하는 홀든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기에 다이무스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비교를 당해서가 아니라, 루이스가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는 데서 나오는 유치한 질투였다. 계속 다이무스에게 휘둘리던 루이스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빼곤 빙그레 웃었다.
“여기 서있으면 당신 목소리 들리는 거 알아요?”
“루이스.”
“전 오늘 일곱 시에 퇴근할 겁니다. 앞으로 네 시간 조금 남았네요.”
명백한 말 돌리기와 축객령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엷은 미소에 조금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일곱시까지 퇴근해 루이스를 데리러 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자세한 건 이따 듣도록 하지.”
“조심히 가세요.”
문까지 마중을 나온 루이스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쉬이 알려줄 것 같지 않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도발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묻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이무스는 코웃음 치며 은행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서 같은 베개를 베면 못 할 말이 없다고, 오랜만에 같이 해가 뜨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그 한탄과 닮은 말이 무슨 뜻인지 자연스레 듣게 되리라. 오후 세 시. 초침이 막 5를 지나가는 걸 확인한 다이무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