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흉한 기운이 감도는 육중한 회색 건물 앞, 건물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은색의 고급 세단이 멈췄다.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반짝이는 차체, 그리고 거기서 내린 남자의 머리칼 역시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벨져 홀든. 명문 귀족 출신에 금융업과 경검을 아우르는 엘리트 가문인 홀든. 그리고 그 홀든의 차남.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어가며 자라 명문 사립학교 진학에, 일류대를 조기졸업하고 검사 뱃지를 단 그는 무엇 하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특유의 오만한 태도와 남을 깔보는 성격을 기분 나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능력, 그리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배경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능력이 확실하고 철두철미한 일처리는 그가 낙하산같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충분했다. 벨져 홀근은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따를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사내였고, 실패란 것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 사건까진.
제게 굽신거리느라 바쁜 교도소장을 떼어놓은 벨져는 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서 넥타이의 매듭을 만지며 숨을 들이마셨다. 과거의 실수를 마주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면회라는 방법 대신 직접 찾아온 것은 하루, 혹은 몇시간이라도 제 형제들 귀에 자신의 행적이 들어가는 걸 늦추기 위해서였다. 벨져는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넣어온 정보를 되새기고 한숨을 쉬었다.
따라온 교도관이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벨져는 좁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물빠진 잿빛 머리카락과 곱상한 얼굴. 창문 하나 없는 교도소의 독방에서도 그는 얼음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날 이후로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새파란 죄수복에 그 날의 그를 겹쳐본 벨져는 표정을 굳혔다가 빈정거렸다.
"체스라, 한가하군. 누군 네 데스크만 털면 해결일 문제들을 가지고 아주 사방팔방 뛰어다니느라 바쁜데 말이야."
"…덕분에 아주 편안합니다."
여전히 재수 없는 자식. 벨져는 혀를 찼다. 이렇게 면대면으로 대하는 것도 껄끄럽지만 이미 위에서 다 결정이 된 사항이라 어깃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빠르고 간단하게. 벨져는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웠다.
"뭐, 네 놈의 목에 목줄을 채울 생각을 하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군."
"그러다 물리면 이번엔 쪽팔린 걸로는 안 끝날 텐데."
"뭐 이 새끼야?"
"검사님이 입에 걸레를 물어서 쓰나.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께서."
제 기분을 슬슬 긁는 소리에 벨져는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올렸다. 상성이 맞지 않는다기 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바람에 잠시 말린 것 뿐이다. 완벽에 가까운 미소를 머금고, 벨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웃었다. 고작 한 번. 제 실책이 크긴 했지만 고작 한 번 이긴 걸 가지고 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더 무서울 게 없나보군."
"나 무서운 거 많은데. 지금 내 앞에서 날 잡아먹으려는 검사님이라던가."
"흥, 말은 잘 하는군. 쓸모없어지면 바로 스위트룸으로 돌아오게 될 거다. 알아서 아늑하게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문제 없겠군."
"글쎄. 그 전에 내가 달아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어디 한 번 해보시던지. 다시 잡아 쳐넣어줄 테니까."
벨져의 푸른 눈과 루이스의 붉은 눈이 마주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서로를 탐색하는 맹수들처럼, 폭풍 전이 지극히 고요한 것처럼 둘은 말이 없었다. 그 신경전을 먼저 깬 건 루이스였다. 순하게 생긴 눈을 슬쩍 내리깔며 작게 숨을 내쉰 그는 무릎 위에 모아뒀던 손을 들어 체스판의 검은 폰을 움직이며 여전히 거만하게 서있는 벨져를 바로 보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벨져는 그를 내려다 보다 체스판 앞으로 다가가 흰 나이트를 움직였다. 처음 폰이 두 칸 앞서더라도, 끝내는 잡히게 되어 있었다.
"얼마든지."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고, 벨져 역시 미소로 답했다. 게임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