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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밑도 끝도 없이 양궁au
그냥 갑자기 뜬금없이 떠오른 양궁au
양궁은 다른 스포츠와 달리 오로지 홀로 고고한 스포츠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이고, 아무리 단체전이라 해도 활을 들고 선 순간만큼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도, 그렇다고 너무 빨리 쏘아서도 안 된다. 철저하게 계산된 조준, 망설임을 남겨선 안 되는 슈팅. 그렇기에 벨져에게 양궁은 최적의 스포츠였다.
날씨 좋다. 벨져는 잘 정리된 화살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사격장에 들어섰다. 방금 전까지 바람 한 점 없더니, 파이널이 시작되자 갑자기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건 좋은 징조다. 벨져는 승리의 여신이 오늘도 제 손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규모도 상금도 작은 대회지만 어쨌거나 이번 대회는 벨져의 고교 데뷔전이었다. 초등학생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벨져는 그동안 꾸준히 ‘홀든’의 명예에 걸맞게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컵과 금메달을 거머쥐며 유망주로 입지를 굳힌 선수였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바뀌는 건 없다. 이제 겨우 격에 맞는 상대들을 만나게 된 것 뿐이었다. 승리는 언제나 제 것으로 정해져있었고, 오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타고난 신체조건과 탁월한 집중력, 그리고 무엇보다 망설이지 않는 빠른 슈팅. 벨져는 화살이 제 손끝을 떠나 과녁에 꽂히는 그 사이의 공백을 즐겼다. 원하는 대로 꽂히는 화살과 정상에 선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벨져는 빨리 쏘는 만큼 힘도 좋았기에 바람이나 날씨의 영향에도 강한 편이었다. 날씨가 궂을 때면 벨져와 다른 선수 사이의 점수 격차가 더 벌어지곤 했고, 그런 점에서 이번 경기도 니케가 제게 날개를 펴주는 셈이었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수가 사석에 들어오는 것을 흘끗 바라봤다. 특이한 색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끈 탓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쳐다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여간 영국 놈 아니랄까봐 칙칙하긴. 벨져는 짧은 감상을 끝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곧 마이크로 제 이름이 호명됐고, 벨져는 일어나 활을 들었다. 성인급도 잘 안 쓰는 무거운 활. 그 무게를 한 팔로 들고 벨져는 사석에 섰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벨져는 자기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말하는 문구를 떠올렸다. 그 말 그대로 벨져는 화살을 오래 들고 있는 법이 없었다. 숨을 고르고, 시위를 당겨 스트링이 입술과 턱에 닿도록 당기고 잠시 숨을 멈춘다. 하나, 둘, 셋. 조준을 마친 벨져는 팔꿈치를 올리고 화살을 쐈다. 화살은 바람을 찢고 날아가 노란 원 안에 꽂혔다. 9. 시작으로 나쁘지 않다. 가볍게 활을 돌리며 벨져는 다음을 준비했다. 살짝 돌아간 암가드를 절히나느데 옆 사석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순간 불어오는 강한 돌풍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하다하다 바람까지 제 손을 들어준다. 쏘고 울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자 정확히 노란 원 안에 꽂힌 화살이 보였다. 10. 오조준을 한 게 바람을 탔나. 자기 차례를 알리는 신호음에 벨져는 활을 들었다. 경기라고 해봤자 매일 하는 연습이나 다를 게 없다. 발사 신호음이 울리고, 벨져는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화살을 떠나보냈다. 9. 이번에도 화살은 9에 꽂혔다. 10에 가깝긴 했지만 그래도 9는 9였다. 강한 바람에 경로가 살짝 휜 탓이었다. 어긋난 계산에 벨져는 혀를 찼다.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지만 제 계산이 틀렸다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조금 더 힘을 들였어야 했나. 벨져는 과녁을 보며 팔짱을 꼈다. 옆에선 다시 신호음이 울렸다. 그냥 빨리 끝내지. 벨져는 바람을 맞으며 조금 시간을 들이라는 제레온의 충고를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정도의 판단은 모두 제 몫이다. 섬광같은 화살은 벨져 홀든의 특기이자 자랑이었다. 활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9. 이번에 잡지 못하면 꼴이 우스워질 판이었다.
벨져는 화살을 끼웠다. 평소 하는 것처럼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고, 가늠자를 통해 과녁의 정중앙을 응시했다. 숨을 고르고, 때를 기다려 쏜다. 화살을 정중앙을 비껴나 두 번째 원의 끄트머리에 꽂혔다. 화살이 꽂힌 걸 본 벨져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총합은 27, 재수가 없으면 26. 이렇게 되면 이번 세트를 내줘야 할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내가, 왜? 왜 초조해하는 거지? 나는 벨져 홀든이다. 한 세트쯤 내주더라도 결국 이기는 건 나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제 상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들었는데, 대충 흘려듣다보니 영국인이라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벨져는 사석에 서서 화살 두 개가 중앙에 가깝게 꽂힌 과녁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영국놈을 바라봤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옆선이 곱상하니 가늘다. 잠시 그 옆얼굴을 보는 동안, 화살이 활을 떠나며 그의 손 안에서 활이 미끄러지듯 돌았다. 얄궂게도 그의 화살은 벨져의 화살이 그랬던 것처럼 8과 9 사이의 선에 꽂혔다. 남은 건 심판의 몫이지만, 그래봤자 운이 좋아야 비기는 거였다. 기록지를 든 심판들이 과녁 앞을 오가더니 스코어가 스크린에 떴다. 제 3라인, 벨져 홀든, 9, 9, 8. 졌다. 벨져는 제게서 2점을 따간 영국놈의 이름을 확인했다. 제 4라인, 루이스, 10, 9, 9. 망할.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구겨졌다.
“하...! 제길....”
욕보다는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정색한 벨져는 다시 활을 들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딴 새끼한테 지다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벨져는 다시 사석에 섰다. 성도 없는 고아같은 게 발을 디딜 판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줘야 했다. 괜히 덤볐다 허송세월 하느니 뭣 모르는 녀석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납작 엎드리게 해주지. 벨져는 활을 들었다. 화살촉엔 오만이 서렸다. 결과는 6:0. 참패였다.
***
벨져는 대기실을 뒤엎었다. 진 건 진 거다. 명백하게 졌다. 그 사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코어가, 과녁에 정확히 꽂힌 화살이 입증했다. 우승을 확신한 경기에서, 겨우 16강에 떨어졌다. 토너먼트식 경기에선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 벨져는 분을 삭이며 제게 쓰디 쓴 패배를 맛보게 한 빌어먹을 개새끼의 이름을 목 안쪽으로 곱씹었다. 제게 집중됐어야 할 언론의 플래시는 제레온이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모두 그에게 쏠렸다. 결과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준결승에서 스트링이 끊어지며 손을 다친 바람에 일종의 패널티가 있었음에도 결승을 속행해 퍼펙트 골드로 한 세트를 따낸 무명의 신인 선수. 심지어 이미 승패가 결정된 마지막 세트에서 루이스는 마지막 화살로 과녁의 정중앙에 설치된 카메라를 깨버렸다.
무명의 신인이 영웅처럼 나타나 벨져 홀든을 꺾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올라온 기사의 타이틀이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벨져 역시 그에 대한 정보를 기사로 볼 수밖에 없었다. 벨져는 차 안에서 태블릿을 켰다. 온통 벨져를 꺾고, 라는 말로 도배되다시피 한 기사들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던 벨져는 마침내 쓸만한 인터뷰 기사를 찾아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시작했다는 인터뷰를 시작으로 벨져는 루이스에 대한 정보란 정보는 다 끌어 모았다. 그는 예상대로 고아였고, 저를 누른 그 경기 전에는 대회에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양궁을 시작한지 채 일 년도 안 되어 준우승을 한 ‘영웅 루이스’.
이글이 집착도 그 정도면 병이라고 질색하며 놀려도 개의치 않았다. 벨져는 필사적으로 제가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부모가 천재라던가, 아니면 수없이 연습을 했다던가. 하지만 루이스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아마 그 본인조차 모를 만한 자료들 안에선 루이스가 양궁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전부였다.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코치도 없이 고작 친구랑 일 년 한 걸로 필드에서 그렇게 계산을 해서 쏜다고? 벨져는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내팽개치길 반복했다. 그리고 언론이 루이스 영웅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선수단을 나왔다.
선수단을 나온 벨져는 홀로 연습에 매진했다. 때마침 제레온이 도핑사건에 연루됐고, 사람들은 벨져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고 수근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머릿속에 벨져 홀든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새겨주지 않으면, 편히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떠드는 것과 달리 벨져는 진 것 자체는 금방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이긴 횟수가 더 많고, 앞으로도 이길 날이 많다. 제가 너무 여유롭게 생각해서, 기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오만하기 그지없어서 방심한 대가를 치른 것 뿐이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해도 가시지 않는 게 있었다.
벨져는 이걸로 딱 오백발 째의 화살을 떠나보내며 다시 그 말간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들이 묻기 전까지 벨져 홀든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 게 제일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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