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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벨져] 젊은 왕과 집사, 그리고 연적
※ 겨울왕국 패러디 티엔루이벨져
생각하신 거랑 많이 다를 것 같아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ㅠㅠㅠㅠㅠ
흐으윽 부디 어여삐 봐주세요 ;ㅁ;)S2
올해로 젊은 왕을 모신지 이십년이 되는 티엔은 왕의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선 문지기들과 짧게 눈인사를 하고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할 땐 계란을 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고, 정중하게 세 번.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매일 그러하듯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티엔은 문을 열어 옆에서 세숫물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함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하얀 도자기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붓고, 티엔은 창문을 가린 두꺼운 암막 커튼을 젖혔다. 강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며 방 안을 밝히고, 상쾌한 아침 바람이 세 사람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침대의 얇은 천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라의 백성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젊은 왕은 꿈틀거리며 창문의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시녀가 갈아입을 옷을 내오는 사이 티엔은 침대로 다가갔다. 늘 보는 풍경이긴 하지만 왜 이 넓은 침대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는지. 티엔은 베개를 끌어안고 이불에 파묻혀있는 왕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전하. 일어나셔야 합니다. 홀든 경이 조회 전에 뵙자더군요."
"우으응…, 5분만……."
"그렇게 말씀하신지 5분 됐습니다. 일어나시죠."
티엔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는 왕의 어깨를 잡아 흔들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 역시 매일 아침 겪는 것이지만 빨리, 제대로 깨우려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일어나라."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않던 왕이 눈을 떴다. 채 눈을 다 뜨지 못할 정도로 잠에 취해서 저를 찾는 붉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워 티엔은 그의 눈꺼풀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작은 애정 표현에 루이스는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눈꽃이 피어나는 듯한 미소에 티엔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왕위에 오른 지가 벌써 육년인데, 아직도 어릴 때 버릇을 버리질 못한다. 티엔은 루이스의 잠버릇을 걱정하면서도 제게만 아침을 허락하는 그가 사랑스러워 이 짓을 그만두질 못하고 있었다. 왕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사람이 나쁜 버릇을 들이다니, 이래서야 집사 실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십여 년 넘게 그를 돌본 티엔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루이스의 미소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매번 다짐하지만 또 매번 그 미소에 지고 만다. 티엔 정은 대개 거의 대부분의 면에선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남자지만 이십여 년을 돌본 왕 앞에서 만큼은 저도 모르게 약해지곤 했다.
"티엔……."
제게 뻗는 손을 맞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재우고 면회 요청을 거절하고 싶지만 상대는 홀든이었다. 그것도 둘째. 티엔은 이불 째로 루이스의 몸을 끌어당겨 등을 토닥였다. 루이스는 티엔의 품에 얼굴을 묻고 부비며 어리광을 부렸지만 티엔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벨져 홀든이 신경질을 낼 거다. 일어나서 잠깐 얼굴이라도 비춰."
"벨져?"
루이스는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싫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홀든이 틀어쥐고 있는 막대한 부와 그를 기반으로 설립된 은행은 아무리 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푸대접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루이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시무룩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빠른 행동에 티엔은 루이스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루이스는 바로 슬리퍼를 신고 세수를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하루의 시작이라 티엔은 수건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서 수건을 받아들고 나가라 눈짓했다.
"오늘은 또 뭣 때문에 왔대?"
"아침에 긴히 할 말이 있다더군."
"군사 동맹 얘기는 안 꺼내면 좋으련만……."
티엔은 세수를 마친 루이스에게 수건을 건네고 옷을 가지러 돌아섰다. 얼음을 다루는 힘을 타고난 루이스는 그 능력 때문에 채 다섯 살도 되지 않아 외딴 탑에 유폐됐다. 말이 보호지, 감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루이스를 돌본 게 티엔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시중을 든 건 티엔이 아니라 티엔의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를 돕다 보니 어느 순간 루이스를 돌보고 있었다. 처음 루이스를 봤을 때 티엔은 제 눈을 의심했다. 말로 듣던 왕자님은 이야기에 나오는 야수처럼 흉악하게 생긴 괴물도 아니고, 괴팍하거나 까탈스럽지도 않았다. 떼를 쓰는 법도 거의 없는 착하고 순한 아이일 뿐이었다. 얼음을 다루는 능력만 아니면 그냥 동네에서 볼 법한 착하고 순한 아이에 불과했다. 탑에 사는 왕자님을 두고 무성한 소문 중에 맞는 거라곤 손에서 얼음을 만들어내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루이스."
"응?"
티엔은 저를 향하는 시선에 루이스에게 다가가 입술을 맞췄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옷의 단추를 푸르던 루이스는 갑작스런 키스에 놀랐지만 혀를 얽으며 입안을 희롱하는 연인을 따라 눈을 감았다. 허리를 당겨 배를 맞대고 점점 더 농염해지는 키스에 아침부터 머릿속이 비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으려는 입술이 떨어지고, 키스 대신 살짝 입술을 맞대고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끝을 맺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의 어깨를 잡고 다시 입을 맞추자 티엔은 루이스의 뺨을 양 손으로 감싸더니 이마와 코, 입술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니다."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놓았다. 그제야 루이스는 티엔이 왜 이러는지 눈치 채고 그의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였다.
"티엔.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 그래."
루이스는 슬며시 웃고는 돌아서서 잠옷을 벗었다. 아침햇살 아래 드러난 매끈하고 흰 살결. 그 피부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알기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다시 침대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탑에서 십여 년을 보낸 루이스지만 왕의 재목으론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왕자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떨어지는 면도 없었다. 물론 어릴 땐 더러 가끔씩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방을 꽁꽁 얼려버리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결국 능력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육년 전 전쟁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탑을 나오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 적은 강력했고, 채 세 달도 되지 않아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왕궁 앞까지 도달했을 때, 왕자들과 귀족들은 제일 먼저 달아났다. 수성전이 진행되는 도중 티엔은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루이스를 데리고 달아나려 했다. 일방적인 침략 전쟁은 얼굴도 모르는 형들과, 자식을 버린 왕이 받는 벌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방을 서성이던 루이스의 손을 잡고 티엔은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단 둘이 의지하며 몸까지 섞은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왕의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연인을 해치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놓았다. 놓고,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을 기회라며 전란의 중심으로 가버렸다. 티엔은 그제야 제가 모시던 사람이 진짜 왕이라는 걸 깨달았다.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자. 그 등을 보며 티엔은 가슴 속에 울컥 북받치는 감정을 삼키며 맹세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끝까지 따르며 보필하겠노라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버릇처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그의 편이 되어야 했다. 지금 그를 잡는 건 제 욕심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홀로 나아가 손을 푸른 결정으로 물들이고 얼음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기이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에 침입자들은 혼비백산해 물러났고, 루이스는 끝까지 맞서 싸우던 병사들과 국민들을 모아 그들을 몰아냈다. 상황을 역전시키고 바다마저 얼려 그들을 포로로 잡은 루이스는 배상금 문제는 물론 전후사고 처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심은 나라를 버린 왕자며 귀족이 아닌 '영웅'에게 쏠렸다.
얼음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더 이상 배척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뭄이 심한 지역의 우물에 저수지를 만들고, 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피서지를 만드는 고마운 능력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나 연합국의 수장으로부터 친필 편지와 선물이 도착했다. 더 늦기 전에 변경에서 적을 막은 덕에 피해를 줄였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받은 황금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피해보상금으로 분배했다. 물론 피해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도 루이스의 뜻이었다. 이쯤 되니 성도 받지 못한 왕자가 왕이 되는 것에 반기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탑을 나와 왕위에 올라서도 티엔은 변함없이 그 곁을 지켰다. 다만 루이스의 능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다 보니 시시때때로 동맹을 맺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보려는 나라들이 손을 뻗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제 힘이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거절하고 있지만, 그게 계속되니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루이스가 괴로워할 때마다 그 옆을 지키고 위로하는 것 역시 티엔의 몫이었다.
"그나저나 벨져라…, 다른 형제들은?"
"다이무스 홀든은 헬리오스에 있고 이글 홀든은 아직 뻗어있다."
티엔은 루이스의 옷을 입혀주며 대답했다. 단 둘이 있을 때도 보좌관 티엔 정과 연인이자 오랜 친우 티엔 정을 구분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태반이라 말을 조심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말을 낮췄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진 루이스는 티엔을 돌아봤다. 같이 지낸 세월만 이십년이 넘다 보니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속내가 읽히곤 했다.
"괜찮다니까."
"……. 하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럼?"
"…그 남자가 널 나와 같은 눈으로 보고 있어서."
루이스는 대답 대신 말도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 사람들 일엔 한없이 예민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선 눈치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그런 면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이럴 때 만큼은 자기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지 모르는 무방비한 연인이 원망스러워지곤 했다. 루이스는 피식 웃고는 티엔을 끌어안았다. 기껏 차려입은 옷이 구겨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이자 티엔이 루이스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티엔은 빙그레 웃는 루이스와 눈을 마주하고, 피식 웃으며 입을 맞췄다. 이젠 정말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 남자가 제 연인을 집어삼키려 들더라도 가야 했다. 오늘따라 접견실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늦는군. 차를 마시는 손동작만으로도 우아함과 기품이 절로 묻어나는 은발의 사내, 벨져 홀든은 오지 않는 젊은 왕을 기다리며 붉게 우러난 차의 향을 음미했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산에서만 나는 찻잎은 이 나라의 특산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벨져가 지금 마시는 것은 특상품이라 더욱 그 향이 은은하고 짙었다. 처음 마실 땐 그냥 물이나 다름없지만 입 안에서 머금고 넘길 때야 비로소 그 향이 은은하게 퍼지다 눈이 녹듯 사라지는 게 특색이었다. 꼭 누구처럼 말이지. 벨져는 쿠션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꼬았다.
'영웅' 루이스라길래,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이미지의 마법사를 떠올렸는데 막상 나온 게 거리를 지나다보면 흔히 있을 것 같은 수수한 청년이라 꽤 의외였더랬다. 왕이 되기보다는 어디 도서관의 사서나 하면 딱 어울릴 법한 얼굴이라 벨져는 그를 얕보고 말았다. 그 수수하고 곱상한 얼굴 뒤에 싸늘한 얼음 칼날을 숨기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리 쉽게 체관을 내주지 않았을 텐데. 제 오만이 불러온 실수 때문에 홀든 은행은 루이스에게 없다시피 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딱 원금 상환 그게 전부다. 그 없느니만 못한 이자 덕에 이렇게 가끔 찾아와 닦달하러 올 수 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저를 두고 시작된 뒷말과 막내동생의 놀림을 피할 수 없었다.
언젠가 벨져 홀든이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는 날이 오리라. 세간에서 그렇게 떠드는 바와 달리 벨져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끈질기게 찾아오는 건 사소한 복수나 앙갚음 때문이 아니라, 조금 더 심오한 흥미 때문이었다. 이주 만인가. 벨져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곧 내륙엔 쨍한 여름이 다가오는 지라 얼음 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고, 내륙의 화폐를 이쪽의 화폐로 바꿀 정도의 현금을 보유한 건 홀든 은행밖에 없었다. 벨져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는 루이스를 비롯한 대신들과 치열하게 환전 비율을 가지고 얘기를 하다 루이스가 쐐기를 박기 전에 회의를 끝내고 나왔다. 이번에도 져준다면 다이무스는 물론 아버지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한 걸 내준다면 또 모를까, 아무리 루이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번 만큼은 쉽게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했군요."
"그러게. 많이 늦었군. 내 시간은 일 분 일초가 돈인데 말이야."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뭐, 이런 작은 나라에선 아무래도 최상품을 구하긴 힘들겠지."
"이해해주셔서 고맙군요."
명백한 도발에도 루이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며 벨져의 앞자리에 앉았다. 늘 데리고 다니는 검은 머리의 집사가 차를 내오자 고개를 돌려 눈웃음을 치는 게 영 신경에 거슬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벨져는 턱을 살짝 올리고 팔짱을 꼈다.
"너, 이리로. 기다리느라 차가 식었다."
차를 마시던 루이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제게 향했다. 당장이라도 그 능력을 사용해 저를 꽁꽁 얼려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눈이었다. 역시, 얼빠지게 순한 얼굴보단 이쪽이 낫다. 벨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집사는 흠 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동작으로 벨져의 잔에 차를 따르고 허리를 숙인 후 물러났다. 루이스의 최측근이라고 해도 제가 우위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벨져는 잠시 싸늘한 눈빛으로 저를 경계하고 있는 그와 눈을 맞춘 후 다시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 적개심을 감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얼음 호수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이른 아침부터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그냥, 보고 싶어서."
"…전 농담은 재미있는 게 좋습니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벨져는 확 일그러지는 루이스의 얼굴에 흥이 났다. 질색하는 루이스의 뒤에 선 집사의 얼굴이 같이 굳는 게 영 마뜩찮았지만 그보단 눈앞의 남자가 더 중요했다. 벨져는 쿠션에 등을 기대며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벨져는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눈을 감고 피식 웃었다.
역시, 가지고 싶다. 이글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질색했지만 벨져는 이글의 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벨져는 이 굳건한 얼음벽 같은 사내의 목에 목줄을 채워 제 발 아래 두고 싶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강하고 아름다운 짐승이다.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열에 달뜬 숨 사이에 제 이름을 부르는 달콤하고도 짜릿한 상상에 벨져는 눈을 떴다.
"사실,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서밖에 안 나는 거라……. 그걸 주면 그깟 돈 몇 푼은 문제도 아니지."
"…말씀하시죠."
벨져는 선심 쓰듯 먼저 속내를 털어놨다. 그래, 그걸 가질 수 있다면 그깟 돈 몇 푼쯤 대수롭지 않지. 루이스의 얼굴은 여전히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들어올 때 잠시 띠웠던 가식적인 미소 대신, 잔뜩 날을 세워 저를 위협하고 경계하는 이 붉은 눈과 차가운 표정이 벨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너."
"농담이 과하십니다, 홀든 경."
"하, 개는 개답게 주인 아래 엎드려 있어야지. 식탁에 올라오려 하면 쓰나."
놀란 나머지 말도 못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루이스 대신 그의 집사가 끼어들었다. 그 포커페이스가 깨지고 동요하는 걸 더 감상하려던 벨져는 흥을 깬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가차 없이 깎아내리는 말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도 없는 사이라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주고받는 눈짓도, 자잘한 습관 하나까지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보살피는 것도, 이따금 애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속닥이는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이 남자는, 루이스를 돌봐야할 어린 동생이자 왕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연인으로 보고 있다. 과거가 어찌 됐든 벨져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먹어치우고 나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벨져는 짐승의 눈을 한 티엔 정을 피하지 않았다. 치열한 눈싸움은 한 사람을 둔 사내들의 갈등 그 자체였다.
"그쯤 하시죠, 홀든 경."
"예의를 가르친 거다, 왕."
"그게 조건이라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벨져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티엔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루이스는 벨져만을 응시했다. 잠시, 그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쉽게 내주겠다고 하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홀든 경이 남색인 것도 모자라 한 나라의 왕을 상대로 몸을 요구했다는 게 알려지면, 그것도 꽤 볼만 하겠군요."
"……."
이 새끼가. 벨져는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밖으로 알리겠다고 협박하다니. 남색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게 알려지면 이미 자신과 루이스에 관해 떠도는 소문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라 추문이 된다. 루이스야 백성을 위해 몸을 바친 왕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를 따르는 동맹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이들이 단체도 돈을 빼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벨져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이를 악물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이스는 평온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벨져의 싸늘하게 식은 눈이 따라붙었지만 루이스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세 걸음도 채 못 가서 벨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더 하실 말씀이라도?"
"흥, 영악하긴. 언젠가 네가 스스로 내 발치에 무릎 꿇게 될 거다."
벨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단단히 봉한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루이스는 티엔에게 눈짓하고는 고개를 돌려 벨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기대하죠. 그럼 이만."
루이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웠다.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찬 접견실을 나오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듯 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걸음 뒤에 따라오는 티엔에게 손을 내밀자 바로 벨져가 내놓은 두루마리가 손에 올라왔다. 홀든의 인장이 납인된 것으로 보아 홀든의 당주가 보낸 게 분명했다.
이미 다 정해져있는 걸 가지고 어제부터 그 짓거리를 하다니. 루이스는 놀아났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불안해하는 티엔도 덩달아 루이스의 무거운 마음에 무게 추를 더했다.
"티엔."
"예, 전하."
"돌아가는 배에 선물로 애완동물 좀 보내. 기왕이면 작고 털 많고 애교 많은 애들로."
"알겠습니다."
루이스는 이글이 고급정보라며 말한 벨져의 약점을 떠올렸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거나 애완동물은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다는 점에서 받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난감한 선물이었다. 어디, 돌아가는 삼일 내내 실컷 즐겨보시지. 루이스는 뜯지 않은 두루마리를 다시 티엔에게 넘겼다. 이른 아침부터 헛소리를 듣느라 기분도 더럽고 배도 고팠다.
"오늘 아침은 뭐야?"
"연어 샐러드를 넣은 샌드위치를 준비했습니다."
"하아, 오늘 들은 얘기 중에 제일 반가운 소리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티엔을 돌아봤다.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불안과 심란해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다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그를 이십년 동안 본 루이스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티엔."
"……."
연인의 이름을 읊조린 루이스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손을 마주 잡아오는 그가 안쓰럽고 또 미안해 루이스는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사랑해.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눈으로 말하자 티엔이 애틋한 눈을 하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두어 번 더 손등을 토닥인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놓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연인을 위로하느라 쉬이 잠들기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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