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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齒亡脣亦支.
리퀘로 쓴 다이루이 동양물
"큰일이로군."
"큰일이네요."
다이무스 홀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골치가 아파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다이무스의 참모이자 가신인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조용히, 찻잎이 풀어지며 물에 우러나자 뜨거운 물을 한 번 더 부어 잔을 데우고 차를 따라 골머리를 앓고 있는 다이무스에게 권했다.
"드세요."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내온 찻잔을 감싸쥐고 들어올려 향을 맡았다. 완벽하게 제 취향에 맞춘 온도와 향이었다. 슬쩍 미간의 주름을 편 다이무스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음미하는 동안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문제가 된 서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탁상을 두드렸다.
서국의 제후가 방문하니 화려한 연회로 맞이하라는데, 문제는 그가 엄청난 난봉꾼이고 이 쪽엔 시중을 들 하녀들은 있어도 연회에 참석할 기녀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기방 세 곳이 단체로 뇌물 수수에 연루돼서 전 수령과 함께 압송되어 옥살이를 살게 된 게 바로 한 달 전 일이었다. 서국의 제후는 전에 맛본 그 화려한 연회를 기대하고 오는 게 분명한데, 지금 군영엔 잘 훈련된 군사들은 있을 지언정 연회를 위한 기녀는 없었다.
급하게 다른 지방에서 구하려 해도 파발이 가는 데만 사나흘이다. 서국의 제후는 당장 모레 도착할 텐데 어디서 기녀를 구한단 말인가. 서국으로 가는 무역상이 오가는 길목의 땅을 수백리나 가지고 있는 제후다. 그의 기분이 틀어져 갑자기 세를 과하게 물리기라도 하면 무역상들은 물론 나라의 재정에도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어떻게 해서든 맞춰줘야한다. 하지만 어떻게?
다이무스는 비리를 뿌리뽑겠다며 그들을 전부 처벌한 것을 후회했다. 그래도 기방을 완전히 없애선 안 된다고 루이스와 지방 토호들이 말릴 때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필요가 있으면 다시 생기기 마련이라고 다이무스는 기방의 주인을 법에 따라 처벌했다. 비리는 사라졌지만, 일자리를 잃은 기녀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게 이렇게 아쉬워질 줄이야.
다이무스는 차를 마시다 말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는 전에 있었던 화중왕 트리비아 카리나를 보러 오는 것이리라. 이 삭막한 곳에 볼 것이라곤 없으니 어두운 밤의 여제라도 없으면 뭇 사내들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주제에 그녀의 목소리는 그림자가 스며드는 것처럼 고혹적이었다. 다이무스는 잠시 그녀의 풍성한 치맛자락과 고양이가 걷는 것처럼 간드러지는 걸음걸이를 떠올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등을 덮는 차가운 손에 고개를 들자 루이스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바라봤다. 이럴 때도 제 편이 되주는 건 오로지 이 사람 뿐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골치 아픈 일일랑 다 던져버리고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유랑이라도 떠나면 좋으련만, 주어진 형편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치망순역지라는 말도 있고, 어떻게든 해볼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다이무스는 저를 어르듯 말하는 루이스를 향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말만이라도 고맙지만, 그라면 왠지 없는 사람도 솟아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어루만지다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다가온 그에게 입을 맞추고,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손에 쥐었다.
"윽..., 집무실에선 안 돼요."
"...안 한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고, 이따 방에서 봐요."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고선 귓가에 속삭였다. 귀를 스치는 숨결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으나 루이스는 미소를 끝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하아...."
루이스가 돌아 나가면서 연한 쪽빛의 겉옷 자락이 펄럭였다. 단정하고 차분한, 검소한 차림은 그에게 퍽 잘 어울릴 뿐더러 한 떨기 난꽃 같은 청아한 매력을 풍기곤 했다. 그가 나가고 다시 찾아온 두통에 다이무스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럴 때 만큼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구는 막내가 부러워질 따름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파발이 인근 기방에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땐 이미 서북의 제후가 도착한 후였다. 다이무스는 쓸모 없어진 서찰을 찢어서 버렸다. 제후는 도착한지 얼마나 됐다고 노골적으로 연회를 언급하며 기대가 크다며 다이무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다이무스는 급히 모은 군영의 무희들을 떠올렸다. 말만 무희지, 평범한 여인들이다. 그녀들이 아무리 능하다 한들 밭일을 하며 부른 노래요, 동네 잔치 때나 되는 대로 춤을 춘 게 고작이었다. 온갖 화려한 연회에 익숙해진 제후의 눈에 그게 얼마나 하찮게 비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히려 기만하려 든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연회는 시작도 안 했건만,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아 다이무스는 제후의 옆에서 차를 따르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제후는 혼자 신이 나서 떠들고,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하게 차를 따르던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루이스는 걱정말라는 듯 살짝 눈꼬리를 휘며 웃엇지만 오늘은 그 미소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연회에 여인들을 빼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하하. 참, 그녀는 잘 있소? 화중왕말이오. 지난 번에 왔을 땐...."
"......"
올 게 왔다. 다이무스는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기생따윈 없으니 기대를 접으라 하고픈 마음을 누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이를 어찌한다. 생각하는 와중에 침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시는 길에 기방이 텅 빈 것을 보셨을 겁니다. 근처의 기방들이 문을 닫으면서 그녀도 떠났지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하지만 어디 꽃이 그녀 하나 뿐이겠습니까. 봄 꽃이 지면 여름 꽃이 피기 마련이지요.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루이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차분히 말을 잇자 제후는 자기가 성을 낸 게 머쓱해졌는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찻잔을 들고 있던 다이무스는 한 고비 넘긴 것에 안도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데다, 묘하게 루이스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향기로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제후는 형식적으로나마 근황을 묻고 다이무스 역시 형식적으로 답하면서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급히 들어온 토마스가 루이스에게 은밀히 말을 전하자 루이스마저 자리를 뜨고, 루이스를 보며 버티던 다이무스는 지루해하는 제후에게 방을 안내하기 위해 일어났다.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여독을 풀라는 말에 제후의 얼굴이 확 폈다. 제후는 사양하는 법도 없이 가버리고, 다이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점점 날이 갈 수록 근심만 느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유례없이 지친 몸을 일으켜 연회장으로 향했다. 지시한 대로 완벽하게 준비가 됐는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잠시나마 위안을 얻어보고자 루이스를 찾아보았으나 언제나 제 시야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던 사람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다들 연회 준비로 바쁘다보니 루이스를 봤다는 사람도 없고, 그 역시 일을 서두르느라 경황이 없을 거란 생각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찾기를 포기했다. 대신 단상 위에 마련된, 가시방석이나 다름없는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회가 시작해도 제후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 역시 모두 예상했지만, 다이무스에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자 제후는 연회가 너무 지루하다며 아무리 그래도 무희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냐는 둥 불만을 터놓기 시작했고, 다이무스는 조잡하게 구성된 무희라도 불러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안 좋은 기분을 더 그르칠 가능성이 더 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이무스가 하늘에서 선녀라도 내려오길 간절히 바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짙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넘실 흘러들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고, 얼굴을 얇은 너울로 가린 무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선녀와 같이 하늘하늘한 옷으로 몸을 겹겹이 감싼 무희가, 왠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슴 앞에 팔을 모은 채 들어온 무희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자 스르륵 흰 연기가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피리 소리와 함께 위로 팔을 올리자 손을 감싼 긴 천이 천천히 너울지며 흘러내렸다.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무희의 자태는 오월 버드나무의 가지같이 낭창하고, 한 마리 학처럼 우아했다. 다이무스는 넋을 놓고 그 손짓과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다른 말이 무에 필요한가. 제비가 하늘을 노닐 듯 아름다운 춤사위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바닥을 채운 흰 연기가 마치 구름같아 정말 선녀의 춤을 보는 것도 같았다. 한 바퀴 빙그르 돌며 얼굴을 가린 너울이 펄럭이고, 그 안에 가려잇던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절대, 잘못 보지 않았다. 잘못 볼리 없었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제게 보낸 그 눈웃음. 다이무스는 제가 앉아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습게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지도 몰랐다. 손에 힘이 들어가 술잔이 떨렸다. 다이무스는 작은 잔 안에 이는 파문을 단숨에 삼켰다. 시원한 술은 목을 타고 넘어가며 가슴속에 붙은 불을 키웠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음악이 끝나고, 연회장 안을 잠시 신선의 술자리로 만든 무희도 춤을 멈췄다. 무희가 들어올 때와 같이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인사를 올리고 나서야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곧 안에 있던 이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어안이 벙벙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제후는 무희를 아래위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이무스는 혼자 술잔을 채웠다.
"허, 허허허. 하하하하! 아니, 이런 보물을 두고 이렇게 이 사람의 애를 태우신 겁니까. 하하하하,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소.내 잘나간다는 무희를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이오. 그래, 네 이름이 무어냐. 어서 그 너울을 벗어보거라!"
목소리는 속일 수가 없다. 다이무스는 가만 서있는 무희를 바라봤다. 가라. 흥을 돋우는 거라면 이미 충분히 성공했으니 돌아가도 될 터, 저 호색한이 어찌 한 번 품어보려 해도 없는 사람이라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잠시, 불쾌한 생각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리자 무희가 고개를 들었다.
"으응?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야?"
그리고 팔을 내려 손가락 끝으로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고 가까이 다가왔다. 웬일로 상석을 양옆의 자리와 떨어뜨리다 못해 몇 단이나 올렸나 싶었더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계획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더니, 이런 것이었나. 다이무스는 계단을 오르는 무희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제후의 눈은 이미 그 옷을 벗기고 있었다.
제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짓을 계획한 루이스도, 그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도, 호색한에 무능한 제후의 억지를 들어줘야 하는 것도 전부 다 못마땅했다.
어느덧 단상에 올라온 무희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천천히 너울을 걷었다. 화장까지 했는지, 고운 얼굴엔 연분홍빛이 어린 데다 작고 얇은 입술은 탐스럽게 붉었다. 거기에 살짝 내리깐 눈이, 더없이 매혹적이라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냥 순진한 처녀같은 얼굴로 요부같은 눈을 하다니. 싱긋, 입술과 눈을 예쁘게 휘며 웃는 바람에 무희가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가슴이 떨렸다. 누군지 알기에 더 떨리는 건지도 몰랐다. 다이무스의 요동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웃음을 친 무희는 다시 너울을 내리곤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잡았다.
제후의 존재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깨끗히 잊어버리고, 눈을 떼지 못하는 중에 무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이무스의 옆에 다가와 풀썩, 그 무릎에 앉았다. 팔을 목에 감으며 안겨와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 허리를 감싸안았다. 코를 마비시키기라도 할 것 처럼 짙은 꽃 향기에 꽃을 안은 것인지, 사람을 안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루이스."
"쉿. 적당히 알아서 둘러대주세요.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사람 앞엔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꽤나 귀여운 짓을 하는 구나."
"어서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는 물론 뺨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별 수도 없기에 다이무스는 다시 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제후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저와 품 안에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쇼. 이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그렇습니다."
"아, 아니. 아닐세. 헌데, 그....혹시...."
"제 정인입니다."
여전히 그 눈에 더러운 탐욕이 떨어지지 않아 불쾌해지려는 찰나, 루이스가 길게 콧소리를 내며 응석을 부리듯 품에 뺨을 부비며 안겨들었다. 제후와 이야기하고 있던 다이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할 거라면 제대로 하는 게 나았다.
"...자꾸 보채서 안 되겠군요. 먼저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이무스는 그대로 무릎에 앉아있는 루이스를 안아들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 내일이나 모레면 기생들도 도착할 테니 그 때 잘 구슬리고 달래주면 그만이었다. 문을 나서자 루이스가 너울을 걷어 넘기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도 한 고비 넘겼네요."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급하게 배웠죠. 이제 내려주세요."
"네가 보채지 않았더냐. 기왕 한 거 제대로 해야지. 이대로 침실까지 갈 거다. 침상 위에 내려주지."
루이스의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다이무스는 이제야 제 연인의 얼굴이 돌아온 것 같아 흡족하게 씩 웃었다.
"곱군."
"그야 화장에만 반 시진을 들였으니까요."
"기왕이면 가끔 해다오."
"...저도 사내놈입니다."
"정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게 이상한 일이더냐?"
루이스는 질색하다가 다이무스의 그 의기양양한 미소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번쩍 들어 다시 고쳐 안으며 곱게 연지를 바른 입술에 입맞췄다. 적어도 오늘 밤은 쉬이 재울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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