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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9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1
- 2016.03.01 [벨져루이]
- 2016.03.01 [벨져루이토마] 한 걸음 더 가까이
- 2016.02.27 [벨져루이] 눈 쌓인 교정, 분수대 앞.
- 2016.02.26 [벨져루이] 그 해, 가을.
- 2016.02.25 냉장고는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가기도 한다
- 2016.02.23 [벨져루이] 더없이, 덧없이.
- 2016.02.22 소금사막 *
글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3 / L1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B3
그걸 보게 된 건 정말이지 질 나쁜 우연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벨져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열린 문에서 불어오던 바람에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는데,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고 말았다. 루이스가, 다이무스와 입을 맞추는 그 장면.
때는 겨울이었고, 바람이 차가웠으며 그 날은 며칠 내내 나리던 눈이 멎은 날이었다. 눈이 멈춰서였을까, 문 너머의 목소리가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루이스. 함께 가자. 나와 같이 해다오.”
“도련님, 저는…….”
앞으로도, 쭉 자신의 것이리라 생각했던 그였다. 그 때의 충격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졌다. 져버리고 말았다. 쓰디 쓴, 인생의 첫 패배였다. 벨져는 그 길로 무작정 예정에 없던 유학을 떠났다.
차라리 펑펑 내리던 눈과 함께 영원히 따스한 벽난로 앞과 같은 기억에 머무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벨져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머릿속에 박제된 것처럼 선명한 기억을 제 머릿속에서 지워내고 싶었다. 그 부분만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벨져를 마주했다. 서류를 하고 나갔을 땐 바지와 베스트가 바뀐 그가 문 앞에 서있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루이스는 방 안에서 오간 거래에 언급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눈빛이라도 한 번쯤 바뀔 만한데, 그는 차디찬 얼음조각같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다가갈 수가 없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벨져는 루이스를 외면하고 그를 지나쳤다.
루이스가 벨져를 잡을 때라곤 서류가 밀리거나, 중요한 고객을 상대해야 할 때뿐이었다. 그것도 그가 알아서 하는 선을 넘을 경우뿐이라 많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 업소를 관리하느라 바빴고, 벨져는 더러운 뒷거래와 돈세탁 같은 업무를 거부했다. 다이무스가 해온 일은 결국 루이스의 손으로 넘어가 벨져가 찾지 않는 이상 루이스가 따로 벨져를 찾는 일은 사실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먼저 찾기는 기분이 상한다. 매달리고 애원하는 쪽은 언제나 타인이었지, 벨져 홀든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벨져는 책상에 앉아 하릴없이 클래식이나 오페라를 듣거나, 읽히지도 않는 책을 읽는데 질려버렸다. 차라리 일이 바쁜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이따금 올라오는 서류나 만지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루이스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서지 않는 건, 글쎄. 벨져조차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성가실 뿐이다. 루이스는 벨져 홀든에게 언제나 예외가 되는 이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이렇게 그를 몰아붙이다보면 자연스레 형이나 아버지에게도 제 태만이 전해질 테고, 그럼 제게 걸맞는 자리를 찾아 이 더럽고 추악한 성을 떠나면 그 뿐이었다.
벨져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박자에 맞춰 책상을 두드리다가 일어났다. 지금 필요한 건 인내와 시간뿐이지만, 가만히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최소한 이 찝찝한 기분만이라도 해결해야 한다. 벨져는 무슨 일이냐 묻는 비서를 뒤로 하고 루이스를 찾아 홀로 내려갔다. 이미 해가 진데다 저녁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이 바로 접대의 시간이었고, 그 때문에 루이스가 한창 바쁠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홀에 있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기가 더 어려웠고, 벨져는 홀 이층 난간에서 아래를 살피는 것으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루이스는 일전에 제 앞에서 벗었던 감색 베스트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보란 듯이, 그때와 같은 차림으로 다른 남자에게 미소 짓는 그.
루이스의 그 미소에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벨져의 발이 멈췄다.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남자가 노골적으로 루이스에게 추근거리며 더러운 손을 그의 허리에 얹었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기 무섭게, 루이스가 웃으며 그의 손을 떼어내고 눈꼬리를 휘었다. 사르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그 눈웃음.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비록 벨져를 등지고 있지만 벨져의 눈에는 남자가 루이스에게 완전히 빠져버리는 게 훤히 보였다.
못 볼 걸 봤다. 벨져는 이를 악물고 가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다시 제 성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저는 주인이 있는 몸이라.”
넓고 웅장한, 층을 하나 터놓은 홀이라 여러 사람의 소리와 음악, 그 외의 잡음이 마구 섞여들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벨져의 귀에 꽂혔다. 귓가에 대고 속삭여서도 그보다 더 선명할 수는 없다. 벨져는 난간을 잡은 채 멈춰서, 쓰인 자재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려 했다.
훌륭한 솜씨로 마감된 대리석은 분명 최고급이고, 제가 보기에도 이 홀의 인테리어는 흠잡을 데가 없다. 고풍스러운 양식도, 허투루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화분과 도자기, 그림도 결국은 벨져의 신경을 돌리지 못했다. 벨져는 눈을 감은 채 빈 손으로 이마를 짚고 저 깊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숨과 함께 삼켰다.
주인이 있는 몸이라던 그 목소리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눈웃음이 고막과 망막에서 떠나질 않았다. 감각은 다른 걸 차단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고 했던가. 벨져는 감은 눈 아래 떠오르는 장면과 반복해 재생되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그가 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루이스와 남자는 떠나고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을 것도 없다.
루이스는 그의 주인을 위해 다른 이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 테고, 그건 제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결코, 루이스가 먼저 제게 안겨올 일은 없다. 벨져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그러쥐고 왔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명치, 혹은 그 아래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은 분노였고, 억울함에 터져 나오는 울분이기도 했다.
L1
종종, 숨을 쉬기 힘들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찌뿌드한 몸을 일으켰다. 벨져가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는 바람에 미처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지도 못한 채로 한 달. 그동안 언제 어디에 있을지 모를 그를 피하느라 짐을 가지러 가지도 못하고, 루이스는 한 달째 사무실에서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쪽잠을 자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웨이터며 직원들이 여기 침대가 몇 개인데 그런 고생을 사서 하냐며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어디에 누우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뒤로 들어오는 검은 돈들을 세탁하는 거며,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거래의 장소 제공, 기밀 엄수와 함께 그들의 검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준비와 관리 역시 지금은 루이스의 몫이었다.
쏟아지는 업무도 업무지만, 루이스가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보 같고 한심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느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벨져를 맞이하는 걸 빼먹어서는 안 된다. 온갖 부정하고 부패한 일들이 다 벌어지는 곳에서 홀든의 개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루이스는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더러는 이런 루이스의 행동에 다이무스가 간 지 얼마인데 벌써 줄타기를 하냐는 말이 돌았지만 루이스는 그 말에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 않았다. 멋대로 떠들어대는 말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숨어있었고, 루이스는 그걸 부정할 수 없었다.
제가 그에게 품고 있는 마음. 그 마음만큼은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비척거리며 일어나다. 핸드폰의 알림등이 빛나고 있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다른 쪽이었다면 또 모를까, 업무용은 오늘도 변함없이 말만 다른 청탁과 온갖 요구들로 가득할 게 뻔했다. 그걸 준비하는 건 급하지 않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루이스는 애초에 시궁창 속에서 숨을 쉬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 시절의 기억이 없다지만 이 화려한 어둠의 순리만큼은 확실히 안다. 이 가혹한 세계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빛나고 있는 건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 오탁에 물들게 둘 수는 없다. 루이스가 저와 함께 가자는 다이무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은 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 한 사람 때문이었다.
세탁이 끝나 문고리에 거려있는 옷을 집어든 루이스는 바로 샤워를 하기 위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여벌로 미리 가져다둔 셔츠 두 벌과 정장 한 벌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돌려막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홀든가에는 비밀이 없다. 아무리 입이 철벽같은 집사님에게 부탁했어도 누군가의 입을 타고 소식이 전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루이스는 급하게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을 샀다. 본가로 돌아가 짐을 가져오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을 다이무스에게 더 걱정을 끼칠 순 없다.
게다가 돌아갔다가 그 안에서 벨져와 마주치느니 이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백 번 나았다. 물론 이글이라면야 쥐도 새도 모르게 해내겠지만, 그 녀석에게 제 공간을 허락하기도 내키지 않거니와 이글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아무리 밖에서 만난다손 쳐도 이글은 끝끝내 이리로 올 테고, 그럼 또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이글은 항상 제게만 취급이 요 모양이라며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더 끼어들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도와줄 걸 알지만 그래서 더 말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고, 이건 어디까지나 벨져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애초에 해결할 가능성이 있긴 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깊고 깜깜한 구덩이 안에 갇힌 기분. 루이스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 도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그는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외치고 아니라고 부인해도 벨져는 저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 잠겨있던 제게 한 줄기 빛이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그 날의 소년이 아니었다.
차라리 영원히 입을 다물었으면 조금 달랐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위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기억이란 거대한 저택에 들어오던 그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었고, 그 중심엔 언제나 벨져가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차마 다가갈 수도 함부로 바라볼 수도 없었던 작은 도련님.
그 때와 변하지 않은 거라곤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홀로 빛나고, 자신은 더 더럽혀질 곳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라는 것뿐이었다. 감히 그에게 닿고자 한 마음이 죄가 되어 그 벌을 받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더는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이 벼랑 끝에 선 건 온전히 자신의 의지였지만 벨져의 외면은 기다림보다 더 가혹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입을 열지 않아도 신기하게 제가 바라는 것을 알아내던 그 작은 도련님이 너무나 그리웠다.
루이스에게 기억이란 바닷물과도 같았다. 너무 목이 말라 타오르는 사막에서 겨우 도망쳐 순간의 갈증을 채우면, 그 다음은 폭풍이 치는 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다시 파도에 밀려 뭍이 올라와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했다.
그 누구도 채울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다. 내 주인은 영원히 넌데. 이럴 거면 시작을 말지.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끝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싫었다.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을 처음 가르친 사람은 너무나 변해버렸고 과거에 머물러있는 자신은 하루가 갈수록 그 하루를 버티는 게 점점 더 힘이 들었다. 기다림을 견디게 해준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바지와 팬티를 벗고 셔츠를 벗었다. 하루 동안 입었던 옷가지를 다시 세탁실로 보내기 위해 한 데 던져두고 샤워기 앞에 섰다.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달군 열이 씻겨 내리며 몸에 오한이 들어 몸이 떨렸다. 이 추위야말로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제가 머무를 계절은 영원히 그 겨울이라고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삶은, 시간은 전부 벨져가 떠나던 그 날에 멈춰있다. 제 삶에 좋은 부분, 따스한 기억이라곤 전부 오 년 전에 머물러있었다.
차디찬 타일을 짚고 깊은 한숨을 토한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찬 물을 맞고 있음에도 눈가와 머리가 뜨거웠다. 여전히, 숨을 쉬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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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BGM은 신화의 열병
결국 벨져는 그동안 계속되던 일탈을 그만 뒀다. 땡땡이를 치고 겁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기어들어온 막내의 성화와 협박에 못이긴 결과였다. 사실 이기려면 못 이길 것도 없었으나 생전 그렇게 성을 내는 적이 없던 막내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심지어는 출근하는 걸 봐야 자기도 학교에 가겠다며 버티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글이 등교거부를 하고 틀어박히면 당연히 어머니의 걱정과 큰형의 추궁이 있을 테고, 그런 식으로 그리고 제 얘기가 그런 식으로 다이무스의 귀에 들어가는 건 영 탐탁지 않았다. 분명 한숨을 내쉬며 저를 가르치려 들겠지만, 이제는 벨져 역시 성인이었다. 모든 일을 간섭받을 이유가 없다.
그걸 무엇보다 알려주는 게 이 부당한 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제 동생이자 홀든의 삼형제 중 막내인 이글 홀든은 뱀처럼 교활하고 영악한 놈이라 언제 어떻게 엿을 먹이려들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말썽에 휩쓸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그 공간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그는 한결같은 태도로 벨져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화려한 로비 앞에 차가 멈췄다. 저를 재촉하는 기사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떠 쓰디 쓴 현실을 마주했다. 아무리 옷을 차려입고 향수를 뿌린들 공간이 가진 음습함 자체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조차 고역인데, 그 안에는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게 항상 제 뒤를 맴돌았다.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서있던 루이스가 오늘도 변함없이 정갈한 차림으로 벨져를 맞았다. 허리를 깊게 숙인 루이스의 동그란 머리에 시선을 준 벨져는 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고급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 뒤로 따라붙는, 서늘하고 고요한 발소리. 그 발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처럼 작아 주의 깊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소리에 벨져는 일부러 발을 더 굴러 구두소리를 냈다.
“여전히 좋은 하인이군.”
벨져는 빈정거리며 넓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지독히도 풍류가 없는 방이다. 삭막하고 텅 빈, 그래 마치 눈앞에 선 도자기 인형 같은 남자처럼. 속은 다 비어있는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어차피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거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다이무스가 앉았을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등을 기대고 의자를 뱅그르 돌리며 빈정거리자 한 박자 늦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이라는 게 몹시도 짜증나는 긍정이었기에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곧은 자세로 서있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그래도 눈 하나 깜빡 않고 저를 마주하는 게 더 짜증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편한 심기를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연했다. 한참 입을 열지 않던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벌어진 틈으로 작은 한숨이 새고, 그와 함께 눈을 감는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렸다. 눈이 감기는 그 짧은 순간 왠지 모르게, 그의 눈이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벨져는 묻어놓았던 기억과 한동안 제 무의식이 투영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의 단편과, 한 순간이나마 푸르른 하늘 아래 맑은 호수와 같다고 여겼던 미소.
어쩌면, 상처를 줬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것도 잠시, 그 작은 숨 뒤에 이어진 목소리가 차갑게 벨져의 날선 눈빛을 막아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적이죠. 주인이 없는 조직은 없습니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도련님. 이건 제 일입니다.”
“네가, 고작 이딴 일이나 하고 있다고? 아버님께 밉보이기라도 했나? 아니면 정말로 형의 개라도 된 건가?”
벨져는 제 오해를 조소로 바꿨다. 농락당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아무리 다이무스의 사람이라 한들 그래봤자 여기선 제 말을 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날카롭게 후벼 파는 말에 루이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무표정으로 돌아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이런 모욕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듣고 있는 모습이 꼭 저만 속 좁은 남자가 된 것 같아 짜증이 솟구쳤다.
“뭐, 그렇게라도 있을 자리를 찾았다니 축하해줘야겠지.”
“……. 결재 서류가 밀렸습니다.”
계속해서 화를 내봤자 저만 바보가 될 뿐이란 생각에 벨져는 의자를 돌리며 다리를 꼬고 빈정거렸다. 이어지는 담담한 목소리는 결국 그 자신이 아쉽단 소리다. 벨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글쎄, 굳이 내가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
벨져는 바로 돌아오지 않는 답에 코웃음 치며 턱을 들었다. 이정도면 아무리 그라도 눈살을 찌푸릴 터, 그걸 빌미로 총괄 매니저란 사람의 태도가 이래도 되는 것이냐며 기를 꺾으려 의자를 돌리자 변함없는 얼굴의 루이스가 벨져를 마주했다. 그 때와 닮은, 그 때와 다른 얼굴과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군.”
“무엇을 바라십니까.”
차분한, 고저가 없는 목소리에 벨져는 눈을 흘겼다. 그는 하인의 복장을 한 채 제게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듯 굴었다. 분명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자신일 텐데, 그는 높다란 벽 위에 올라가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빨아. 그럼 그깟 서류쯤 해줄 지도 모르잖아?”
충동. 지극히 저열하고, 위아래를 가르치기 위한 행위를 주문하자 루이스가 눈을 깜박였다.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벨져를 향해 걸어왔다. 정말로 할 생각인 걸까. 벨져는 꼰 다리를 풀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느려 목이 탔다.
목끝까지 채운 단추와 단정하게 맨 넥타이, 거기에 몸에 딱 붙는 베스트와 같은 옷감으로 만든 바지까지 그는 당장 홀든 가의 집사로 들어와도 손색이 없는 옷차림으로 벨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목울대가 울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자극적이라, 벨져는 제가 아는 그 사람을 돌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그 시절 그 소년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었는데, 5년이라고 하는 공백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어쩌면 그와의 관계에서 변했는지도 모르지. 벨져는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떠올리고 초조해졌다. 잊힐래야 잊힐 리 없는 기억 속 루이스는 지금보다도 더 낯설었다.
자신의 것이라고, 제 손에 쥐고 있다고 의심치 않았는데. 그렇게 벨져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루이스의 흰 손이 벨져의 허리띠를 푸르고 지퍼를 내렸다. 지지직. 천천히 내려가는 그 소리가 어쩌면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소리와 닮았을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브리프 안으로 손을 넣었다. 맨 살갗에 닿은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그 역시도 조금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벨져는 그만두지 않았다. 노라고 말하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그런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차가운 손이 벨져의 성기를 쥐고 가볍게 흔들다, 루이스가 무릎을 꿇은 채로 벨져의 다리 사이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차가운 손과, 약한 떨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거부감은 결코 아니었다. 다이무스라는 연인을 두고 저와 오랄 섹스를 한다는 죄책감? 혹은 그저 긴장했을 뿐? 저도 모르게 초조해진 벨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슬쩍 눈을 올려 뜬 루이스가 불을 붙여주려는 듯 제 베스트로 손을 가져갔지만 벨져는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해. 그 눈빛에 루이스는 그의 손을 다시 벨져의 바지춤에 올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에 제 흔적을 마구 흩뿌려서 그를 정복하고 싶다. 비록 그러고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길지라도 이 무채색의 차가운 남자를 제 색으로 물들이고, 그를 가지고 싶었다.
분명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침내 루이스가 벨져의 성기를 입에 담았을 때, 벨져는 습하고 따뜻한 점막과 뜨거운 숨결에 얼굴을 찌푸렸다. 서툴다. 이건 결코 펠라치오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깨 너머로 익힌 지식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 같은 혀놀림에 벨져는 불을 붙여놓고 한참을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빨았다. 니코틴이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그 감각과 함께 머리가 맑아지니, 아래서 느껴지는 어설픈 자극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눈까지 감고 집중하며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설픈 건 여전했다. 벨져는 아직 점령할 고지가 남아있다는 걸 깨달은 모험가처럼 신이 났다. 루이스의 혀가 기둥을 핥고, 그의 입 안에서 크기를 불려가는 성기를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아들였다. 벨져는 더 열심히 해보라는 뜻으로 손을 뻗어 그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여유롭게 만끽했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 벨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희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머리를 잡은 채 살살 달래듯 어루만지다, 그의 목구멍까지 닿도록 허리를 쳐올리자 루이스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고환을 세게 쥐지 않으려는 노력이 갸륵해 두어 번 허리를 움직이다 놓아주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콜록거리며 바닥을 짚는 그 옆얼굴이 어찌나 가련한지. 벨져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튕겨 담뱃재를 털었다.
“입을 쓰는 건 처음인가보지?”
“흐, 하아……. 하…….”
루이스는 손등으로 입을 막고 콜록거리다 눈을 떠 벨져를 바라봤다. 노려보는 것도 아닌, 무감각한 그 시선이 사내의 정복욕을 부추겨 벨져는 담배를 발아래 던져 구둣발로 짓이겼다.
“도련님…….”
“이리와.”
굳은 얼굴로 하는 말에 루이스는 무릎으로 기어 벨져의 다리 사이로 다가왔지만 벨져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시 제 것을 잡고 입 안에 넣으려는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제 다리 위에 앉히자 루이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이 다른 남자를 떠오르게 해, 벨져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한 손에 쥐었다.
“도련님, 이건…….”
“벗어. 왜, 못 하겠나?”
시선을 피하던 루이스가 입술을 다문 채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이렇게 내비칠 사람인가. 벨져는 루이스를 올려다보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못하겠다고, 당신은 아니라고 말하리라 생각했던 루이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춤에 손을 가져갔다. 버클을 푸르고, 바지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내리며 복종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이 행위를 거부하며 떨고 있었다.
대체 너는, 어디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지?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으나 목에 꽉 막힌 말이 그 위로 올라오질 않았다. 그 사이 루이스는 색색 숨을 몰아쉬며 베스트의 단추를 푸르고, 단정하게 묶여있던 검고 얇은 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매듭을 잡아당기고, 그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가 검은 넥타이가 그의 흰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 뱀처럼 감겨들었다. 손에 감겨들었던 넥타이는 매듭을 풀자 힘없이 스르르 루이스의 손을 한 번 휘감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끝까지 채운 단추의 첫 단추를 하나 푸르고, 루이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도 꽤나 용기가 필요한지, 여기서 그만둘 거냐 도발하려는 찰나 루이스가 다시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툭, 툭,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잘 다려진 셔츠 안쪽으로 보이는 살결이 왠지 모르게 보면 안 되는 걸 훔쳐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의 흰 가슴팍과 배가 숨과 함께 떨리며 오르내리는 그 애처롭고도 가련한 모습에, 벨져는 제 안의 가학심이 타오르는 걸 느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이 슬며시 일어나, 벨져는 짐짓 여유로운 척 한 팔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어설픈 스트리퍼를 바라봤다.
루이스의 행위에서는 그들이 이따금 던지는 추파나 유혹, 혹은 성적 어필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트립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따지자면 그저 옷을 벗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벨져는 루이스가 옷을 벗는다는 그 사실과 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에 흥분했다. 그저 흥분했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몰입해있었고, 그래서 더 선명하고 또렷했다. 지금이라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내면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바지 안에 잘 갈무리해뒀던 셔츠 밑단의 마지막 단추가 풀리고, 루이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매일 수도 없이 봤을 거면서, 어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그에게 벨져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전혀 섹시하지 않게 제 다리에 체중이 실리지 않도록 힘겹게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루이스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루이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신선한 반응에 이건 이거 나름대로 재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벨져는 그 다음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본디 인내 끝에 맛보는 과실이 가장 단 법. 벨져는 최대한 무던한 척하며 루이스에게 위로 올라가라 손짓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루이스는 양팔로 뒤에 있는 책상을 짚고 일어나 엉덩이를 그 위에 올렸다. 허리띠며 바지 지퍼까지 풀어헤친 채 책상 위로 올라가는 루이스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뒤에 펼쳐놓은 서류를 밀어내는 사이 다리를 꼬았다. 남자에게 욕정하는 성향은 없지만, 그래도 아직 사정 후에 흥분이 가시지 않은데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얼마든지 다시 발기할 수 있었다. 아무렴, 스무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 고작 한 번 뺀 걸로 만족할리가 없다. 벨져는 묵직해져오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루이스는 서류를 밀어놓고 잠시 머뭇거리다 걸치고 있던 감색 베스트를 벗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카펫 위로 떨어진 베스트 다음은 당연히 셔츠일 거라 예상했건만 루이스의 손은 셔츠대신 허리춤으로 향했고, 루이스의 다리를 감싸던 바지가 베스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유혹에는 영 소질이 없었지만, 애를 태우는 데는 소질이 다분했다. 애를 태우는 것만으로 스트리퍼가 될 수 있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밖에 있는 소문난 이들을 전부 제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벨져는 입술을 매만지며 다음을 기다렸다. 굳이 셔츠를 벗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딱히 벗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희고 다림질한 냄새가 나는 셔츠가 그에겐 더 잘 어울렸다. 어울린다고 할까, 다 벗는 것보다 훨씬 더 색정적이라 한 편의 포르노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버클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벨져는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훤히 드러난 그의 다리를 지그시 훑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오래된 흉터에 잠시 눈이 멈췄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게 발목까지 훑고 나서 고개를 들자 아직 벗지 못한 검은 브리프와 그의 중심이 눈에 들어왔다.
“흥분했나? 그렇게 좋으면 직접 해보지 그래.”
“…….도련님, 이건…….”
“왜, 아니면 내가 만져줬으면 좋겠다 뭐 이런 건가?”
벨져는 상기된 루이스의 얼굴에 즐거워졌다. 한없이 차가워 동요라곤 보이지 않던 그가 난처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 반응이 자신의 우위를 확인해주고 있었다.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울지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그와 그런 그를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 기형적이고 비이상적인 이 상황이, 그럼에도 즐거웠다.
생략은 미덕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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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1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 벨져루이<-다무 주의
오년에 걸친 유학 생활은 벨져에게 있어 사춘기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사이 자신의 입지는 꽤나 좁아졌을 테고, 그 많은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한 때의 혈기이기도 했다. 세 형제 중 유독 저를 아끼던 교사이자 숙부는 벨져의 유학을 극구 만류했지만, 벨져라고 오스트리아의 본가에 있는 게 더 이득임을 모를 리 없었다.
반항, 혹은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오 년을 보낸 벨져는 홀든 가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가문의 엄격한 훈련과 그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 마침내 진정한 '홀든'으로 거듭났다. 그간의 공백과 자신을 향한 걱정, 혹은 기대를 완전히 종식시킨 건 따로 말할 것도 없었다. 벨져 홀든은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남자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영리했고, 빼어난 외모를 타고난 데다 다른 형제들보다도 우수했다. 그렇기에 오만했고, 그 오만은 곧 벨져의 자부심이자 그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수식이기도 했다.
타고난 것을 갈고 닦은 끝에, 좋은 쇠를 수천수만 번 담금질해 벼려낸 검이 바로 벨져 홀든이다. 그런 벨져에게, 세상의 일이란 온통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한때나마 흥미를 붙여보았던 음악도, 그림도 결국은 질려버렸다. 집을 떠난 오년간 벨져는 자유를 누렸다. 비록 집안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 걸로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는 충분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홀든가의 당주인 아버지조차 벨져를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타고나기를 완벽하게 태어나 자신이 가진 것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벽이 범인과 벨져 사이에 존재했다. 넘볼 수도 없고, 허물 수도 없는 벽. 벨져는 그 차이를 '격'이라 표현했다.
그런 벨져가 다이무스가 나온 영국의 대학을 보란 듯이 조기 졸업하고 돌아온 것이다. 누구보다 뛰어난 아들이니, 바로 홀든 은행의 경영진에 이름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돌아온 벨져에게 홀든가의 당주가 내민 것은 홀든 가 소유의 호화 클럽이었다. 거물급 인사들의 은밀한 회담이 오가고, 웬만한 인사가 아니고서야 출입도 할 수 없는 휘황찬란한 클럽은 말이 좋아 클럽이지 더럽고 추악한 욕망의 온상이자 윤락업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 클럽을 통해 뒷돈이 오가고, 돈세탁이 이루어진다는 건 숨길 것도 없다. 벨져는 경악했다.
제가 누린 시간에 대한 값이라기엔 치러야 할 것이 너무 컸다. 그 공간엔 발조차 들이고 싶지 않다. 벨져는 완강히 거부의사를 피력했지만 홀든가의 당주는 단호했다. 벨져의 오만은 언젠가 독이 될 것이며, 그 때를 위해 적당한 처세술과 함께 복잡하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게 그가 내세운 이유의 전부였다. 협상의 여지라곤 없다는 걸 깨달은 벨져는 제 성질에 못 이겨 입술을 깨물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다이무스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라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온 벨져는 마침 계단을 오르던 제 형과 마주하고는 그를 무시해버렸다.
다음날, 다이무스는 친절하게도 큰형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벨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런 자질구레하고 더러운 일일랑 저와 단 1나노그람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가시 돋힌 말을 내뱉어도 다이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린 동생의 성질을 받아준다는, 혹은 이미 전부 예상했다는 그 태연한 반응에 더 짜증이 난 건 당연했다. 벨져는 어릴 적부터 저를 자신보다 모자라고 돌봐줘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까다로운 동생으로 대하는 다이무스를 못 견뎌했고, 그가 먼저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나이를 먹고 해가 지난다고 그를 향한 벨져의 반발심이 변할 리도 없었다.
벨져는 갈 테니 먼저 가라는 말과 함께 방문을 세게 닫고 어쩔 수 없이 넥타이를 매고 코트를 입었다. 애초에 격을 따질 것도 없다. 그 일은 여태껏 다이무스의 소관이었고, 그것이야말로 그와 자신의 격을 나누는 분명한 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제 것이어야 할 자리에 앉고, 제게는 시궁창이나 진배없는 자리를 물려주다니! 벨져는 다이무스의 것을 물려받는 게 싫었다. 그를 비롯한 모두가 그게 꼭 물려받는 것은 아니라고 위로했지만 그런다고 진실이 거짓이 될 리 없었다.
그의 형은 가문을 위해서란 명분으로 그 더러운 일을 해왔다. 원래부터 그랬다. 다이무스가 관심도 없는 경영을 공부하고, 홀든의 훈련을 받은 것은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다. 벨져는 그런 그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벨져는 그 모든 시련을 자신을 위해 이겨냈다. 그렇다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그 일을 맡아 하는 게 맞지 않은가.
누군가 저를 음해하지 않은 한 일이 이렇게 꼬일 순 없다. 벨져는 새 주인을 기다리는 직원들과 다이무스를 그대로 두 시간 대기시켰다. 마침 비가 왔고, 제 기분을 맞추기 위해 틀어놓은 카오디오에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좋은 곡은 모름지기 시작부터 끝까지 경청해야 하는 법. 벨져는 카시트에 몸을 기대고 피아노 소리가 끊길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내 눈을 뜬 벨져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빠른 기사는 바로 운전석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고 벨져가 앉은 뒷자석의 문을 열었다. 로비 밖에서부터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지나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고급 자재에 샹들리에며 귀한 도자기같은 것들이 즐비했지만 그런다고 공간이 품은 추악한 욕망과 더러운 거짓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바로 벨져의 옆에 다가온 남자가 건물의 구조를 소개시켜드리겠다고 했지만 벨져는 손을 드는 걸로 그의 입을 막았다. 벨져는 얼어붙은 남자의 얼굴에 코웃음치며 사무실로 안내하라고 짤막하게 제 기분이 그리 좋지 않으며, 그가 제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딱딱한 목소리로 내비쳤다. 과연 온갖 거물이 드나드는 업소에 일하는 사람답게 눈치가 빨랐고, 두 사람의 구두가 대리석을 두드리는 소리만 넓은 공간을 채웠다.
“이쪽이 앞으로 쓰실 사무실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문을 두드렸다. 그말인즉슨 안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곧 제게 이 자리를 주고 떠날 사람이었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린 사이 문이 열렸다. 다이무스는 제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책상이 아닌 소파에 앉아있었다.
“앉아라.”
다이무스 앞에 놓인 커피는 이미 식은지 오래인지 김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벨져는 일부러 다이무스의 말을 못 들은 척 시큰둥하게 넓디 넓은 사무실을 느긋하게 걸었다. 앞으로 제 공간이 될 사무실은 모던하고 클래식했다. 큰 형의 성격을 반영하듯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허투루 존재하지 않는 공간. 벨져는 벽면이 유리일 뿐 창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뿐이다.
“이 일을 맡는 게 내키지 않는 건 안다만,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내키지 않는 걸 알면 그냥 그대로 거기 있지 그래.”
“벨져. 내게는 다른 일이 있다. 물론 네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와주겠지만,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제 형은 동생을 위하는 척 속을 긁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빨리 그가 꺼져주길 바랐다. 벨져에게 형이란 있어봤자 제 신경만 긁을 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 다이무스라고 제가 그를 껄끄러워하는 걸 모를 리 없다. 벨져는 다이무스가 침묵에 못 견뎌 떠나길 바랐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침묵에 익숙한 남자였다.
벨져의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을 깬 소리에 다이무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런 태도가 형제 사이에 골을 더 깊게 만든 것임에도 다이무스는 여전히 성인이 된 벨져를 돌봐야 하는 동생으로 대하고 있었다.
“긴 말 않겠다.”
다이무스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도 벨져는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의 뜻대로 놀아나는 장기말이 되는 건 질색이다. 그게 사사건건 신경을 거스르는 제 형이라면 더더욱. 다이무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벨져는 책상에 놓인 오브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이 흉물은 다이무스가 여길 나가는 순간 쓰레기통 행이다.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벨져는 슬쩍 곁눈질했다. 다이무스가 방금 들어온 듯한 남자가 내민 코트를 입고, 그는 벨져에게 등을 돌린 채 다이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뒷모습 뿐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 모습에 벨져는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잘 다린 흰 셔츠에 검은 베스트, 거기에 일자로 떨어지는 검은 정장 바지와 구두. 그 단정한 차림에 푸른 빛이 섞인 잿빛 머리카락. 누군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집을 떠나기 전 집에 있던 고용인 중 한명인지 아니면 제 착각일 뿐인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쪽은 총괄 매니저다. 원래는 내 비서로 데려가려 했다만, 그랬다간 곤란할 것 같더구나. 사무실은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럼 이만 가보지.”
끝까지 형이랍시고 훈계하는 게 꼴보기 싫다. 이미 벨져의 신경은 온통 뒤에 서있는 남자에게 쏠려 어서 방해꾼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다이무스는 벨져를 한 번 돌아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퍽 자상한 눈빛으로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걸로 끝인데도, 남자는 끝까지 문을 열어 다이무스를 배웅했다.
빨리, 어서, 얼굴을 보여. 남자의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문을 닫고,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분명, 벨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의 것이었다. 없애고 싶은, 감춰놓고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울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에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은 표정이 낯설지만, 그 때보다 키가 자랐을 뿐 그는 여전히 제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자신의 새 주인을 바라보는 그에게, 벨져는 다이무스가 썼을 마호가니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장갑을 벗으며 최대한 덤덤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내 형이 너를 꽤 아끼나 보더군. 뒤라도 대줬나?”
“우아하고 고상하기로 소문난 벨져 홀든 경이 이런 저열한 말을 하실 거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눈 하나 까딱 않고 대답하는 남자. 그 목소리가 낯설었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는 것도 사무적으로 답하는 것도 거슬린다. 벨져는 제 기억 속의 그와 눈앞의 남자를 겹쳐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그렇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단하고 높다란 얼음벽을 마주한 것 같아, 벨져는 팔짱을 꼈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쌓인 해묵은 감정들이 한 데 섞여 벨져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나는 널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런데, 왜 너는 아무렇지 않은 거지?
벨져는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으나 그는 제게 내려올 임무를 기다리는 기계처럼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시키실 일이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이어진 침묵 끝에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벨져는 그를 노려보다가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전부 쓸어 버렸다. 버리려고 했던 오브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잉크 병이 깨지고 벨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짜증이 치밀어올라 씩씩거리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더러운 시궁창에 버려진 것도 모자라 비참한 패배자가 되어 남이 쓰던 거나 물려받는 꼴이라니, 제 꼴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웃던 벨져는 책상을 짚고 허탈한 실소를 흘리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본디 그는 제 것이었다. 그 미소도, 그 목소리도, 그 눈빛, 숨결 하나조차도 제 소유였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다이무스와 키스하는 걸 봤을 때의 기분이란. 그 날로 벨져는 추궁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유학길에 올랐다. 집을 떠나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여자를 사귀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얼굴을 보자마자 이 꼴이라니. 벨져는 무거운 숨을 토하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추적하게 내리는 비때문에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이무스는 이걸로 제게 차남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영역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제 치부와 같은 그를 동원해가면서. 정말이지, 명색이 홀든의 장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저열한 수를 쓰다니. 이런 시궁창을 구르다 보니 가문의 일원으로 가져야 할 긍지마저 버린 모양이었다.
그의 뜻대로 놀아날 수는 없다. 벨져는 입술을 짓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공간에서 더는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조롱하는 다이무스도, 저를 생판 모르는 사람인 듯 대하는 그도 못 견디게 싫었다. 벨져는 그 다이무스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막내를 잠시 따라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제가 구태어 돌보지 않은들 업무가 갑자기 마비되어 난처해질 일도 없거니와, 설령 그러한들 아버지의 호통과 꾸지람 뒤에 제가 응당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면 그 뿐이었다.
제게 주어진 임무를 내팽게치고, 골프 클럽이며 승마를 하러 다니며 벨져는 그가 자신의 태만을 고해바쳐 그 늪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계속되는 태업과 파행에도 그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비오는 날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난 그 모습 그대로 벨져를 맞았다.
벨져의 인내심이 동난 건, 마지못해 이 주 만에 네 번째 방문을 했을 때였다.
“왜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뭘 말하는지 알 텐데.”
담담하게 커피를 내리던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벨져와 눈을 마주했다. 오 년만에 처음으로, 벨져는 그의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를 제대로 보았다. 그 색이 본래 상징하는 것과 전혀 다른 온도의 빛을 머금었다. 저를 떠나보내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묻지.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도련님.”
“대답해. 다이무스가 그러라고 시켰나?”
“.......”
“루이스.”
채 정리하지 못한 과거의 악연은, 때로 예상치 못한 순간 부매랑처럼 돌아온다. 벨져는 그 붉은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을 떠올렸다. 꺼내고 싶지 않은, 묻어놓은 나쁜 기억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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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 루이스 사망 소재 주의
루사노에서 포트레너드로 온 후 은신처를 만드는 대신 함께 살았던 루이스의 플랫에 이글이 토마스 스티븐슨을 달고 찾아왔다.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는데,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다. 순순히 맞아줄 리 없는 녀석이 일부러 맞고는 꺼낸 말이 더 가관이었다.
“형이 루이스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형의 착각일 뿐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만 좀 해! 형만 슬픈 줄 알아? 연합은 아직도 초상집 분위기라고! 그런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두지 말았어야지!”
“이글씨!”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공허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공허. 이글의 말이 맞았다.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미소로 제 뺨을 쓸던 그를 그냥 보내선 안 되는 거였다. 그게 기억 속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연합이 소중하다 한들 자신을 두고 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모두가 제 오만이었다.
“그럼.”
“뭐?”
토마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이글이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박스에 넣다 말고 반문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데?”
“작은형….”
“그 빌어먹을 자식은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 그런데 뭐? 내가 그녀석을 가장 잘 안다고? 웃기지 마라, 이글. 그 녀석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 사랑했다면 이렇게 모질게 굴 리 없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잊을 수도 없는 최악의 기억을 남기고 떠났을리 없다. 그의 부고를 신문을 통해 듣고, 장례도 끝나 무덤 앞의 꽃마저 시들어갈 때에서야 찾아가도록 두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형은 아무것도 몰라.”
“그러는 넌 얼마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벨져는 이글의 멱살을 잡아챘다. 자기도 분해 죽겠다는 듯한 이글이, 입을 열려다 말고 시선을 피했다.
“이글 홀든!!!”
“그만해요!”
가만히 지켜보던 제 3자의 개입에 벨져는 시선을 돌렸다. 눈물 범벅의 애송이가 주먹을 꽉 쥔 채 벨져를 보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선배는, 루이스 선배는….”
“닥쳐라.”
“형!”
“네가 그 자식이 지키려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라.”
“애먼 애한테 화풀이 하지 마!”
잠자코 잡혀있던 이글이 벨져의 분노가 토마스에게 향하자마자 팔을 잡았다. 애초에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게 누구인가. 그토록 아끼던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리 연합의 영웅이라 한들, 한 사람이 그 모두를 감당할 수있을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루이스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웠다. 영웅의 그늘에 숨어, 그를 앞세워 살아남은 이들을 벨져가 용서할 수 있을리 없었다. 생전에 지키려하지 않았다면 살인귀가 되어서라도 복수했을 것이다.
벨져는 묻고 싶었다. 왜 자신만의 루이스가 될 수 없었는지.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제 옆에 있는 걸로 충분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럼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토록 지키려했던 이들은 제게서 추억 한 조각마저 앗아가려 하는가.
“선배를 아낀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지, 넌 모를 거다.”
“루이스 선배는…!”
“그러니 네 영웅에게 감사해. 지금 여기서 널 베지 않는 건,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이니까.”
서슬퍼런 눈빛에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진심이다. 모두가 슬퍼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벨져같진 않았다. 갈 곳 잃은 분노와 상실감에 허덕이는 남자는, 고고한 벨져 홀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제 기억 속 마지막 루이스를 떠올렸다. 머리를 쓰다듬고, 슬며시 웃던 루이스는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같았다. 평소의 듬직한 선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후련해보였다.
그래서 잡지 못했다. 잡는다고 잡힐 것 같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쓰게 웃으며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역시, 걱정이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선배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걱정했어요. 하지만 이 남자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동경하던 사람이다. 그와 같은 선에 서고 싶었다. 그의 등을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자리를 너무나 쉽게 꿰찬 남자에게 마지막까지 지고 싶지 않았다.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해. 둘 다.”
“나가.”
“…하아. 플랫은 형이 알아서 해.”
이글은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쓸어담고는 박스를 토마스에게 넘긴 뒤 돌아섰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엔 그의 물건이라고 할 것도 얼마 없었다. 벨져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작은형.”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나가.”
“…너무 얽매여있지는 마.”
얽매여있지 말라는 말에 벨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벨져 홀든에게 루이스를 떼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과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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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토마] 한 걸음 더 가까이
* 벨져루이<토마
** 토마스 짝사랑/토마스에게 상냥하지 않은 세계 주의
“왜 벨져에요?”
“응?”
“왜…. 휴톤씨나, 앤지씨도 아니고. 왜, 그러니까…!”
말이 마음같이 나오지 않는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물을 수 없는 질문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토마스는 제 어깨를 잡는 루이스의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졌어.”
“네?”
“발을 딛고 있던 땅도 사라지고 어둠 속에 갇혀. 살아도 고통뿐이고,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지. 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아침 해가 뜨지 않기를 바랐어.”
“선배….”
담담하게 이어가는 것은 그의 절망이었다. 토마스가 본 선배는, 루이스는, 영웅이란 남자는 강한 사람이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는 영웅. 비록 그 방향이 제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를지라도 존경받아 마땅한 사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결코 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털어놓는 절망의 무게란 과연 어떤 것인지. 토마스는 루이스의 절망을, 그 어둠의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나는…. 더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포기해버렸지.”
“…….”
“그런데도 죽을 수가 없었어. 책임과 의무와 날 믿고 기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선배의 탓이 아니에요…!”
어쭙잖은 위로라는 걸 알지만,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그것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제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더 나은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걸론, 이 사람을 붙잡을 수 없다. 토마스는 문득 트리비아를 떠올렸다. 그 둘은, 그 연인은 트리비아가 떠나려 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루이스가 슬퍼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게 아닐까. 처음부터 그 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도 허공을 딛고 있던 게 루이스이며 그를 기다려주던 게 트리비아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텅 빈 허공에 사는 그를 받아줄 수 있을까. 루이스의 사랑이 트리비아의 사랑보다 깊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애정을 쏟아도 상대가 그걸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눈앞의 남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토마스 안에 켜켜이 쌓아올린 루이스라는 사람의 근간이 흔들리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알아.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지.”
“선배…!”
“그런데, 그 녀석이 날 잡아줬어.”
아득해진 머릿속에 루이스의 미소가 들어와 박혔다. 부서질 것 같은 미소가 아니라 홀가분하고 따스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상하지. 그런데 말이야,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떨어지는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데…. 걔가 그러더라고.”
루이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목을 가다듬고, 입꼬리를 올리는 그에게 전에 없던 여유가 보였다.
“그러면 왜 안 되느냐고.”
숫제 꿈을 꾸는 것처럼 읊조리는 루이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날이 서 다가오는 이들을 상처 입히는 고드름이 아닌, 끝없이 펼쳐진 얼음평원과도 같은 고요. 고향의 얼음호수가 그러했듯, 그 고요 앞에 인간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이 사람과 마주하려면,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루이스는 눈을 휘며 빙그레 웃었다.
“벨져는…. 알아줬어. 그리곤 그래도 된다고 하더라고. 가치 없는 삶이 뭐가 소중하냐면서 화를 내는 거 있지?”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마침내 루이스는 발을 디딜 땅을 찾았다. 그를 잡는데 필요했던 게 고작 말 몇 마디밖에 안 됐다는 허무보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재빨리 고개를 숙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자 루이스가 어깨 위에 올린 손으로 토마스를 토닥였다.
“살아도 된다고 해줬어. 자기가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저희가 못 미더운 건가요?”
“응?”
“왜, 왜 그게 벨젼데요? 우리는, 우리도, 당신을 걱정하고, 당신을…!”
“달라.”
내내 담담하게 남 얘기 하듯 말하던 루이스가 토마스의 격정을 딱 잘라 끊었다. 침착한 연합의 영웅의 얼굴을 한 루이스가 낯설다. 아니, 방금 전까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고요를 머금었던 남자가 동경해온 선배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야. 나는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했어. 너희들을 앞세워 살아남는 걸,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토마스. 그건 날 더 괴롭게 하는 거야.”
“선배!”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그 녀석은 달라.”
루이스의 입을 막고 싶었다.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녕, 나는 당신의 첫 번째가 될 수 없나.
“벨져는…. 글쎄, 나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렇게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르지. 영웅 전기의 시작은 언제나 벨져 홀든이잖아?”
더 말하지 말아요. 제발. 더 들었다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런 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입술 한 번 달싹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끔찍이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니까, 다시 돌려놓는 것도 그 녀석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배라고 불러선 안 되는 거였다. 그를 계승하고 싶었다. 그의 절망이 아닌, 찬란히도 빛나는 명예를 이어받고 싶었다. 이런 걸 잇게 되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손이, 아련히도 빛나는 미소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을 리 없다. 이어받는 것조차 자신이 없다. 영웅이 전설이 된다는 말을 그리 쉽게 담아선 안 됐다. 차고 두꺼운 얼음벽으로 나약한 자신을 감추던 인간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버렸다. 영웅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이길 수 있을까.
그 두 사람 앞에서 자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저, 보호받아야 하는 조연.
“미안.”
“…제가 강해져도, 소용없겠죠.”
“넌 잘 해낼 거야. 내가 없으면, 그 다음은 네 시대니까.”
아니오. 저는 당신의 시대에 당신과 함께이고 싶어요.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말을 가슴에 묻고, 토마스는 애써 웃었다.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팔을 벌려 토마스의 등을 감싸 안고 토닥였다. 몸이 닿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망 없는 첫사랑이 시리도록 아팠다.
걸음을 맞추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등이, 너무나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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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눈 쌓인 교정, 분수대 앞.
* 호그와트au
호그와트의 학생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근 십년간 인구가 늘고 있다곤 하지만 마법사나 마녀의 수는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었고, '그' 사건 이후로 마법사의 인구가 줄다 보니 한 기숙사의 학생이라고 해봐야 백 명이 될까 말까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났다 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오, 작은형!”
“저리 가라. 이글.”
“캬, 난 형을 다시 봤지 뭐야. 노땅한테 개겼다가 된통 깨졌담서?”
“그게 무슨 천박한 말투냐! 네 녀석은 조금 더 홀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왜애. 난 작은형이 인간적이어서 좋은걸.”
이글은 혼자 분수대에 앉아있던 벨져에게 다가가 킬킬거렸다.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년은 그 나이 소년답게 장난기가 많았고, 홀든의 수치이자 걱정이라는 말답게 호그와트 안에서도 항상 말썽의 중심에 있었다. 홀든 최초로 슬리데린에 들어가지 않은 걸 첫째로, 모범적이다 못해 너무 완벽해 다가가기 힘든 그의 형들과 달리 그리핀도르의 기숙사 점수를 깎아먹는 주범이자 골칫덩이였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천진한 천연덕꾸러기라는 게 이글의 장점이지만 그와 십여 년을 같이 보낸 벨져에게 동생이란 홀든의 어디에서 이런 게 나왔는지 모를 미스터리이자 귀찮은 대상에 불과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렴, 이글.”
“우와앗. 엄청 상냥한 얼굴로 꺼지라고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아아, 영웅님한테 알려주러 가야…. 으엑!”
“당장 멈춰.”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도망가려는 이글의 머리 꼬랑지를 잡아 세운 벨져는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막냇동생의 어깨를 잡아 분수대에 앉히고 눈을 맞췄다.
“약속해라. 절대, 절대 그 자식한테 말하지 마.”
“헤헤, 그럼 뭘 해줄 건데?”
“……. 제길.”
“하하하! 이번 호그스미드 외출 때 데리고 나가준다고 약속하면 생각해볼게!”
“이글! 안 된다는 거 알면서 억지 부리지 마라!”
“흐으응. 그럼 버터 맥주?”
열두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당당하게 음주를 입에 담는 걸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 뱀같은 녀석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만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야 한다. 세심한가 싶으면서도 답답할 정도로 둔한 녀석이니 아직 희망은 있다. 벨져는 오늘 있었던 해프닝이 이틀도 안 가 잊히길 바랐다. 교수에게 대든 것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내막이 알려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간사한 뱀처럼 웃는 이글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이글이 배를 잡고 웃었다.
“즐거워 보이네, 이글.”
“큽, 푸흡. 그게, 하하! 루이스, 그거 알고 있어?”
“글쎄,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네게 호그스미드 외출은 일러. 반장 회의 때 조용히 말씀드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지금 벌점을 주는 게 나을까?”
“칫, 재미없긴.”
언제 왔는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쌀쌀해진 날씨에도 목을 훤히 내놓은 루이스가 허리를 짚으며 퍽이나 다정한 말투로 이글을 타일렀다. 타이른 다기 보단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어쨌거나 천방지축인 이글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글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릴지언정 순순히 물러났다.
그 잠깐 사이에 사람을 흔든 녀석이 회랑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벨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벨져와 같이 이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루이스가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내린 눈이 뽀드득 뭉쳐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후드 안쪽으로 보이는 흰 목이, 그 잠깐 사이 벨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도 모르게 꿀꺽 목울대를 울린 벨져는 루이스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네.”
“가던 길 가라.”
그 사이 차가워진 분수대에 앉자 루이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옆에 앉으려나 싶어 한 쪽 다리를 당겨 눈을 치워도 루이스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스타이거 교수님과 한 판 했다며?”
“그게 뭐.”
“…그거, 혹시 나 때문이야?”
움찔, 정곡을 찔린 벨져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의 얼굴엔 표정이라 할 게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에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누가 너 따윌 신경 쓴대?”
“아니면 말고.”
“하!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 따위가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란 거냐?”
“그만.”
서늘한 눈매와 살벌한 눈빛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그 따위에 화를 내는 루이스라니, 상상도 못했던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벨져 쪽이었다. 자신이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벨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다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가 널 책임져주기라도 할 것 같아? 사정 안 좋은 게 어디 너 하나야? 그런데 왜 너만 받아줬겠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슬 퍼런 눈빛으로 조용히 타오르던 루이스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크게 놀란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눈만 깜빡거리던 루이스가 손을 들기에 지팡이를 꺼내는 줄 알았는데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소리 내서 웃는 루이스를 본 적이 있던가.
소복이 눈이 쌓인 분수대 앞, 눈이 녹아 얼음으로 굳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같이 고요한 풍경 속에서 루이스가 웃었다. 그 자신도 주체하기 힘든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다가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눈을 휘는데, 햇살이 물에 닿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멎고, 햇살이 멈춘다. 멈춘 시간 속에 그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뺨에 열이 몰려, 벨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치고 너무 격렬하게 웃느라 벗겨진 후드 안으로 보이는 흰 목과 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겨우 진정하고 숨을 고른 루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벨져의 앞에 섰다.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루이스는 O.W.L.이다 뭐다 해서 바빴던 내내 우중충하게 다니던 사람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래.”
“뭐가.”
“스타이거 교수님은 좋은 분이야.”
뜻 모를 말에 미간을 좁히자 루이스가 다시 웃다가 주먹을 입에 대며 헛기침했다.
“내 평생 가장 편한 여름방학이었어. 늘어져라 낮잠도 자고, 밤낚시도 가고. 네가 오해할만한 건 전혀 없었어. 그냥, 뭐랄까…….”
“지금 내 앞에서 그를 두둔하는 건가?”
“두둔한다기 보단….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지?”
“스타이거 교수님이 나한테 불건전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한 거 아니야?”
“걱정이라니, 내가? 너를? 하! 착각도 유분수지!”
“그럼 다행이고.”
루이스가 뒷짐을 지더니 슬며시 웃었다. 혼자만 열을 내는 게 분해서, 이를 악문 벨져는 손을 뻗엇다. 뒤늦게 피하려고 해봤자 거리를 좁힌 건 그였고, 벨져의 손은 그대로 루이스의 목을 감쌌다. 몸을 뒤로 빼며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스는 차가운 손이 목에 닿자 몸을 떨며 뒷걸음질치고, 발이 미끄러지며 허우적거리다 뒤로 넘어져버렸다.
“으으.”
“흥. 꼴좋군.”
벨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올리자 성대하게 넘어진 루이스가 엉덩이를 만지다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멍청하게 혼자 자빠진 거지만 크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대뜸 내밀어진 하얀 손. 벨져는 루이스의 손에서 웃음기가 걷힌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풀이 인 헐렁한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손목은 같은 남자의 것치고 가늘고 희다. 왠지, 봐선 안 되는 걸 봐버린 기분이었다.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루이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 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암시도, 해석해야 할 필요도 없다.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다 손을 맞잡자 루이스가 빙긋 웃었다. 눈꽃 결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미소가, 흰 눈밭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얍.”
“으왓!”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루이스가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맞잡은 손을 확 잡아 당겼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 벨져는 그대로 루이스의 위에 엎어졌고, 루이스의 웃음소리와 함께 솜털 같은 냄새가 확 풍겼다.
“하하하. 아아. 정말이지, 구경꾼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 자식…….”
“벨져 홀든이 놀라는 얼굴이라니. 카메라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루이스는 짐짓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어버렸다. 평소의 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순박하고 소년 같은 웃음에 벨져는 루이스의 가슴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입가를 씰룩였다.
“감히 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미안, 그지만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너만 만나면 되는 일이 없어! 지팡이 들어!!”
“잠깐 벨져, 진정하고…….”
양 손을 들고 순진한 척 눈을 깜빡여 봤자, 입꼬리가 부들거리며 올라갔다. 애써 웃음을 참는 꼴이 더 보기 싫어, 벨져는 옆에 있는 눈을 한 움큼 집어다 루이스의 얼굴에 문질렀다.
“차거! 야!”
“죽어!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네가 먼저, 흐앗.”
셔츠 안으로 눈이 들어가자 루이스가 움찔 몸을 떨며 가는 비음을 흘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떼자 루이스가 가쁜 숨을 내쉬며 벨져를 올려다봤다. 얇게 뜬 눈에, 잔뜩 붉어진 얼굴, 하얗게 서리는 입김. 야릇한 표정에 벨져의 얼굴에 다시 열이 번졌다.
“읏.”
“……벨져?”
“말 하지 마. 그랬다간 죽여 버릴 거다.”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쥐었다가 놓으며 일어났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에게, 제 심장 소리가 전부 들릴 것만 같았다.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글 녀석이 수상한 저주를 건 게 틀림없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혼쭐을 내주리라. 그렇게 다짐한 벨져는 아직도 눈밭에 어정쩡하게 앉은 채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를 무시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망토가 휘날리는 걸 정리하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텅 빈 회랑을 걸었다.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고, 루이스로부터 멀어진 다음에서야 벨져는 벽을 짚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자꾸만 그 야릇한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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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그 해, 가을.
*호그와트 au
9월 1일. 런던, 킹스 크로스 역. 긴 여름방학을 보낸 호그와트의 학생들이 새 학기를 맞이해 머글들 사이를 오갔다. 머글 태생이나 혼혈 학생들이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지만 머글들과는 거리가 먼 순수 혈통의 학생들은 종종 그들의 시선을 받곤 했다. 그리고 여기, 다른 의미로 머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소년이 하나.
“제길.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불어오는 바람에 눈부신 은발을 날리며 승강장을 돌아다니던 벨져는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들이마셨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성인이 되기 전까진 마법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는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홀든.”
“윽.”
“설마 길 잃어버린 거야?”
최악. 벨져는 두꺼비를 잃어버렸다며 난리를 피우던 막냇동생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기 싫은 녀석과 마주쳐버렸다 아직 학교도 아닌데 이 면상을 보다니 이번 학기는 벌써부터 재수가 옴 붙었는지도. 벨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남이사.”
“이글이라면 두꺼비보단 부엉이라 생각했는데.”
루이스의 후드 안에서 여름 내내 벨져를 괴롭힌 이글의 두꺼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고양이나 개, 토끼처럼 작고 털 달린 작은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양서류 역시 달갑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벨져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찼다.
애초에 왜 그런 동물을 귀여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거 없이도 잘 살 수 있는데. 약한 것들은 싫다. 벨져는 남루한 사복 차림의 루이스를 아래위로 훑었다. 원래 지내던 고아원이 파산해서 스타이거 교수네서 지낸다더니 어째 추레한 행색은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리 내.”
“내가 이글한테 갖다 줄게. 악몽이라도 꾸면 큰일이잖아.”
“윽, 너…!”
“누구나 무서운 거 한둘쯤은 있는 거 아니겠어. 이쪽이야.”
아니, 달라졌다. 분위기가 다르다. 조금 더 차분하고 침착해진데다, 전에 없던 여유가 생겼다. 벨져는 트렁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짐가방 하나를 손에 달랑 든 루이스를 따라 걷다가 그를 제치고 앞서 걸었다. 다이무스도 그렇고, 고작 몇 살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 어른인 척 앞서나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호해야 할 어린애도 아니고, 벨져 홀든에게 미아 취급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벨져, 어딜 갔던…. 루이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나. 좋아 보이는군.”
짜증이 가득했던 다이무스의 얼굴이 루이스 앞에 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다이무스 홀든으로 돌아오는 게 꼴불견이었다. 벨져는 일부러 제 형의 팔을 치며 지나갔다. 그래도 이번 학기만 보내면 다이무스와 일 년에 아홉 달은 떨어져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애써 위안 삼으며 두꺼비 따윈 진즉 잊었다는 듯 신이 나 머글들에 대해 떠드는 이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 작은형! 큰형! 작은형이 때렸어!”
“고생이 많으시네요.”
“……잘 부탁한다.”
“별 말씀을요. 이글. 네 두꺼비.”
“오! 고마워!”
루이스는 웃으며 이글의 손에 두꺼비를 내려주었다. 두꺼비는 괴팍한 제 주인에게 돌아가기 싫은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스의 목이 허전했다. 벨져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예감에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벨져?”
“따라와.”
“어? 응? 아니, 잠깐, 기차 시간…!”
9월인데도 루이스는 그동안 역에서 한 번도 목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목도리나,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 같은 걸 입었으면 입었지 오늘처럼 날씨에 맞는 가벼운 차림을 한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냥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러겠거니 했는데 왜 하필이면. 9와 3/4 승강장에서 조금 떨어진 벽돌 벽에서야 손을 놓은 벨져는 루이스를 벽에 밀쳤다.
“너, 그 머글들 사이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거냐.”
“…별 거 아니야. 다 끝난 일인걸.”
루이스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뜰 뿐 부인하지 않았다. 초연한 반응이 더 짜증나서,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두드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편안해진 표정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는 게 분했다. 좋아 보인다는 다이무스의 말이 떠올라 더 화가 치밀었다. 반장인 주제에 슬리데린의 후배들도 그렇게 챙기지 않으면서 다른 기숙사의 루이스를 그리도 잘 대해주었는지, 왜 똑같이 다퉈도 친동생인 자신이 아닌 그를 두둔하고 돌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알고 있었어?”
“처음 이 역에 오던 날 도와준 게 다이무스라서. 머글들 사이에선 괴물이나 다를 게 없으니까, 흔한 일이야.”
“너….”
“늦겠다.”
자그마치 사 년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다이무스는 알고 있었다는 것도 전부 분했다. 벨져를 밀어낸 루이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이래서 머글들이란.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멍청이처럼 당하고 있었던 저 녀석도 구제불능인 건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걸음을 옮기다 멈춰서 저를 돌아보는 루이스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멍청이. 그런 녀석들은 따끔하게 손을 봐주란 말이야.”
“그런 말은 너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벨져.”
분하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가 싫다. 저 무심한 눈이 곧바로 제게 향하게 만들고 싶다. 한 눈 팔 여지도 없게 저를 바라보고, 그따위 처연한 미소 따위 지을 여유도 없게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벨져는 단정하게 자른 루이스의 뒷머리를 잡아채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호그와트로 향하는 급행열차는 급행이라 해도 10시간이나 걸린다. 그 정도면 따져 물을 시간은 충분했다. 감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게 선을 긋고 밀어내다니, 방자한 것도 정도가 있다. 벨져는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모두 가질 것이니 선택은 없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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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가기도 한다
* 사족의 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기왕 썼으니까...
** 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를 먼저 읽어주세요
벨져는 네 명의 셰프들이 각자 할 요리를 정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괬다. 어쩐지 스튜디오가 소란스러운 것 같아 스태프들을 보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스냅백에 후드, 거기에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벨져가 못 알아볼리 없었다. 벨져는 놀란 나머지 검지로 그를 가리키며 벌떡 일어났다.
“너...!”
“어? 무슨 일이죠? 벨져씨? 어어??? 어???”
벨져의 반응에 시선을 손가락 끝으로 옮겼던 클레어가 놀라 비명을 지르고, 셰프들이 엉거주춤하며 일어났다. 웃으며 스냅백과 후드를 벗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루이스는 급히 달려온 작가가 채워주는 마이크에 목을 내주며 연신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고개와 허리를 꾸벅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화를 했던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자 스튜디오가 발칵 뒤집히고말았다. 벨져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이스가 웃으며 벨져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심코 의자를 내주려던 벨져는 진행자의 호들갑에 촬영중이라는 걸 깨닫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셰프들이 한 칸 씩 옆으로 가서 만든 자리에 앉은 루이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고,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벨져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루이스가 웃으며 침 한 번 안 바르고 벨져가 보고 싶어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 그러지 말고. 방송을 아는 사람이 왜 이래~.”
“하하, 네. 실은 우리 PD님이 꼬셔서 왔습니다. 맨날 보는 얼굴인데요, 뭘. 그리고 이렇게 오면 또 여기 셰프님들이 맛있는 거 먹여주실 것 같아서.”
“어휴. 우리 클레어양 눈빛 좀 봐요. 초롱초롱해.”
“어.... 저 진짜 프로즌씨 팬이거든요. 아참, 루이스씨!”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주는 루이스에 클레어가 호들갑을 떨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반응에 벨져의 표정이 굳어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소재를 그냥 지나갈 리 없었기에, 진행자들은 맞장구를 치며 바람을 불었다.
“에이, 한 번 안아줘요!”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이돌인데....”
“팬이라잖아요. 뭐 어떻습니까!”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분위기에 떠밀린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슬쩍 벨져의 눈치를 봤다. 찔리는 거 알면 가만히 있으라고 루이스를 쏘아봤지만 클레어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키친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겸연쩍게 웃은 루이스가 벨져의 손을 잡아 두드리곤 일어났다. 그리곤 다가온 그녀와 가벼운 포옹.
팬과 우상의 포옹이라 하면 훈훈한 장면일지 모르나 벨져의 눈에는 영 탐탁지 않았다. 임자도 있는 사람이 저렇게 홀랑. 집에 가라니까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와버린 것도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루이스가 아니꼬워진 벨져가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봐도 루이스는 좋다고 웃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진행자들이 좋다고 떠들어대는 사이 테이프를 갈겠다며 잠시 촬영이 끊겼다. 평소에도 친분이 있었던 셰프와 인사를 한 루이스가 벨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너 뭐냐.”
“응? 왜?”
“집에 가라니깐.”
졸음이 묻어나는 눈가를 매만지며 작게 혀를 차자 루이스가 눈을 감으며 벨져의 손을 잡았다. 그만하라는 건지, 계속 하라는 건지 손은 잡아놓고 뺨을 기대는 루이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앞서 클레어의 냉장고로 요리 대결이 끝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꼬박 세 시간을 더 있어야 했다.
벨져는 마침내 시작된 요리대결을 앞에 두고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옆에 찰싹 붙어있던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마이크에 목소리가 들어갈까 입모양으로 졸리냐 묻자 거의 반쯤 눈이 감긴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선 면을 삶는다 고기를 튀긴다 정신이 없는데, 화려한 칼질과 좋은 냄새도 벨져의 시선을 루이스에게서 뺏을 순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나른한 얼굴에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벨져는 루이스의 다리를 토닥였다.
몸을 일으킨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다 반대편 키친에서 불이 붙은 프라이팬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토끼같은 반응이 귀여워 웃음을 눌러 참은 벨져는 셰프들과 진행자의 중계에 조금씩 말을 보탰다. 그렇게 눈앞에서 요리가 완성되어가는 걸 보랴, 졸음에 기대는 루이스를 토닥이랴 바쁜 사이 십오분이 흘렀다.
공성 한 판 하는 것과 같은 시간인데도, 요리 두 접시가 뚝딱 완성된 걸 보니 또 감회가 남달랐다.
“그럼 먼저 시식을 해보겠습니다!”
“아, 저만 먹나요?”
“어, 저는요?”
루이스가 어울리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벨져를 바라봤다. 이걸 죽여 살려. 벨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숟가락과 포크로 파스타를 말아 루이스의 입에 갖다주었다. 냉큼 입을 벌려 파스타를 입안에 넣은 루이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습니까!”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미묘한 반응에 벨져는 파스타를 제 입에 넣었다. 셰프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 안에 퍼지는 상큼한 토마토와 아보카도의 맛에, 가볍고 간이 심심하니 마냥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파스타는 벨져가 낸 주제에 잘 맞는데다 맛있었다. 벨져조차 루이스가 웃은 이유를 몰라 고개를 돌리니 루이스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루이스가 벨져를 보곤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 반응은 뭐죠? 저절로 웃음이 나는 맛입니까?!”
“아, 그게.... 푸흡. 아, 이럼 안 되는데.... 벨져가 만든 맛이 나요.”
“아아! 이거 어쩌죠! 집에서 먹는 맛이랩니다!”
“아니, 맛있어요! 맛있는데, 어.... 똑같이 건강한 맛인데 벨져씨가 만든 게 좀 더 제 입에 맞는 거 같아요.”
셰프가 고개를 떨구고, 루이스는 미안해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미안하고 웃긴지 자꾸 셰프에게 사과하며 웃는데, 다가가서 손을 잡아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같은 냉장고로 같은 생각을 하고 만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가 해준 게 더 맛있다는 말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벨져는 입가를 닦으며 루이스가 워낙 막입이라 그렇다며 셰프를 격려했다.
“그래도 뭐, 오늘 선택을 하는 건 루이스씨가 아니라 벨져씨니까요.”
“그럼요. 저는 그냥 곁다리정도로 생각해주세요.”
“넌 이제 집에 가.”
“벨져씨가 집에서 해주시면 되겠네요.”
“왜 얘기가 그렇게 되죠?”
루이스의 얼빵한 반응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루이스는 억울하다는 듯 벨져를 툭 쳤고,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음 요리로 나온 해산물 리조토를 한 숟가락 곱게 떠 입에 넣은 벨져는 확연히 다른 향신료의 맛을 음미하며 루이스에게 숟가락을 넘겼다. 냉큼 받아든 루이스가 크게 한 숟가락 떠먹는 동안 리조토를 넘긴 벨져는 셰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건 무슨 뜻인가요!”
“향신료를 굉장히 잘 조합해서 썼는데, 치즈를 많이 넣어서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리조토를 스파이시하게 잘 잡았군요.”
“별점을 준다면 몇 점입니까!”
“5성 만점으로 3.5 드리겠습니다.”
“크흐. 벨져 홀든 기준으로 별 3개면 레스토랑을 열어도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죠?”
“우리 셰프님 굉장히 짠 점수에 굉장히 황송해하고 있어요!”
벨져는 암암리에 도는 속설을 들으며 입을 닦았다. 루이스를 만나기 전에는 입에 안 맞으면 손도 대지 않았던 벨져였다. 게이머로 이름을 날리기 전부터 벨져는 셰프들 사이에서 까다로운 고객으로 유명했다. 한 번 예약이 들어오면 주방장조차 긴장하게 만든다는 홀든가의 차남. 그러니 이런 프로에 나오는 것부터가 사실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하겠다고 한 것은 오로지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저희들끼리 하는 얘기 있어요. 맛있다고 해주신 메뉴는, 베스트 셀러가 된다고.”
“아, 벨져 홀든 보증제같은 거군요.”
“네, 그리고 별로면 두 번 안 드시고.”
한가득 리조토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루이스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벨져를 바라봤다. 벨져는 제게 돌아오는 높은 평가에 이것 보라며 턱을 들고 오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정작 이 사실을 알아야 할 사람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는 눈치라 김이 빠졌다. 루이스는 벨져 앞에 놓여있던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 없죠. 루이스씨, 리조토는 어땠습니까! 여전히 벨져씨 요리가 더 맛있나요?”
“어.... 제가 진짜 피곤한가봐요.”
“왜요? 맛이 없습니까?”
“아뇨, 맛있는데....”
루이스가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자기 딴에 말을 아낀다고 하는데, 그래봤자 이미 꼬투리를 잡은 진행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루이스는 이러다 백만 안티가 생길 것 같다고 밑밥을 깔았다.
“맛있는데, 자꾸 집에서 먹는 느낌이에요.”
“이건 또 무슨 의미죠?”
“되게 제가 벨져씨한테 길들여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 말 되게 이상한데.”
“아아...! 이래서 너무 잘해주면 안 됩니다!”
“이러면 오히려 좀 궁금해지는데요. 게스트석이 아니라 조리복을 드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어, 그것도 되게 괜찮을 것 같아요. 근데 제가 태생이 그렇다 보니 웬만한 건 그냥 다 똑같이 느껴져서.”
난처해하던 루이스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며 성대하게 자폭해버렸다. 무너져가는 애인을 지켜보던 벨져는 루이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이걸 거둬 살리는 제 고생이 어떻겠습니까.”
벨져의 떨떠름한 표정에 루이스가 짐짓 상처받은 얼굴을 하다가 몇 초 못 버티고 웃어버렸다. 환한 미소에 벨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오늘따라 예쁜 말만 하는 그가 퍽 사랑스러워, 냅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려 고개를 내밀었다.
“아, 근데 진짜 먹고 나니까 그 향이....”
몸을 기울여 팔에 머리를 기대는 척,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리조토를 칭찬하며 엄지를 들었다. 이건 분명 일부러 피한 거다. 모두 시식을 하는 사이 눈을 흘기자 루이스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따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이따가라고 하는지 몰라도 다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퍽 자상했기에 벨져는 이번만 모른 척 져주기로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오히려 사귈 때보다 카메라 앞에서 뽀뽀하는 걸 조심하게 된 루이스였다. 그래도 사흘 만에 같이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괜히 싸우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예쁜 짓도 했겠다, 스케줄도 없겠다 침대에서 아침해가 뜰 때까지 뒹굴려면 토라질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자, 그럼 선택의 시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벨져씨가 하는 겁니다.”
“그래도 역시 이번 별은 별 두 개의 가치가 있지 않나.”
“그렇죠! 자! 버튼을 눌러주세요!”
처음 두 요리를 먹었을 때부터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기에 선택을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승패를 가른들, 오늘 선보인 레시피는 전부 가질 것이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벨져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핀라이트를 켜고 조명을 끈 스튜디오의 패널에 승패가 떠오르고, 벨져는 이번 대결의 승자의 가슴에 별배지를 달아주었다.
키친을 정리하는 사이, 두 번째 요리 대결이 남았음에도 루이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대결에서 진 셰프에게 식당으로 찾아가겠단 말을 전하던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집에 가.”
“너만 맛있는 거 먹으려고?”
반쯤 뜬 눈으로 귀여운 소리를 해대는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눈을 꿈뻑이다 주변을 둘러봤다.
“좀 조심하라니깐.”
“그러게 여길 왜 와.”
“왜 오긴, 너 보러 왔지.”
“내가 애냐.”
“애지, 그럼.”
“하! 애랑 그런 짓 하는 넌?”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고 무릎을 그의 다리 사이로 넣었다. 루이스가 흠칫 몸을 떨며 벨져의 가슴에 손을 얹어 밀어냈으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먹잇감을 몰아넣은 기분에 벨져는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빠져나갈 구석을 찾았지만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는 이상 벨져를 밀쳐낼 순 없었다.
“교활하긴.”
“영리한 거겠지.”
“말은 잘해요.”
“말도 못하는 누구보다야 낫지. 안 그런가?”
결국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 항복 선언에 흡족해진 벨져는 특별히 어제 오늘 쌓인 앙금을 용서하기로 했다. 밤은 길고, 그 시간을 만족스럽게 보내려면 잘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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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더없이, 덧없이.
※ 루이스 사망 소재 주의 ※
루이스가 죽었다.
실로 그다운 죽음이었다. 고결한 희생을 바쳐 모두를 구하고 참사와 전쟁을 막았다. 극히 이례적으로 영국 왕실에서도 조의를 표했으며 영웅 루이스의 죽음은 세계 곳곳에 퍼져 추모가 이어졌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안타리우스 공습전과 회사와 연합의 갈등. 그 모두를 잠식시키고 일궈낸 평화 앞에 인간된 자들은 경의와 애도를 보냈다.
루이스의 장례식엔 조문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이어졌고, 장례가 끝나도 그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이들은 줄지 않았다. 매일같이 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그의 죽음이 얼마나 고결하고 희생적인 것이었는지, 그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떠들기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영웅을 잃은 연합이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메우고 신문의 헤드라인에서 루이스의 이름이 내려갔다. 전쟁 끝에 사람들이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즈음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벨져 홀든이 나타났다.
잔뜩 굳은 얼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그의 손엔 하얀 장미 꽃다발이 들려있었고, 여전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발은 루이스의 무덤 앞에 멈췄다.
가져온 꽃다발을 시들어가는 다른 꽃 위에 올린 벨져는, 루이스의 이름과 생몰연도, 여왕이 친히 내린 조의 문구를 새긴 비석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끝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 전설이 되어 잠들다.
* * *
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벨져는 제 셔츠를 주워 입은 루이스가 찻잔을 들고 걸어오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깨어있는데도 어딘가 꿈을 꾸는 기분이다. 늘 그렇지만, 아무리 벨져라도 깨어난 직후는 힘들었다.
벨져는 아침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리로 생각을 하는 대신 팔을 벌렸다. 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막상 일어나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린 잔상에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루이스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침대를 벗어난 그 잠깐동안 몸이 식어서 끌어안기엔 별로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를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자 루이스가 벨져의 등을 안아 두드렸다. 아이를 달래듯 자상한 손길은 일어나란 재촉이라기 보단 더 자라는 것 같았다.
“벌써 두시야, 벨져. 휴일 아침에 늑장 부리는 건 기혼 여성의 특권이라고.”
“서두르지 마라…….”
루이스가 작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맨다리에 다리가 얽히고, 루이스의 몸에선 싸구려 비누 냄새와 함께 제 향수 냄새가 났다. 비록 첫만남은 최악이지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잖아. 침대에만 있으려고?”
“시간은 많다. 서두를 필요 없어. 조급하게 굴지 마라.”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에 감은 팔을 당겨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 여자들처럼 부드럽진 않지만, 품안의 온기와 그의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돌아누웠다. 셔츠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에 가늘게 눈을 흘겼으나 루이스는 제 생각에 빠져 처연하게 웃고 있었다.
“글쎄, 왤까. 난 내 미래를 상상해본 적이 없어. 당장 오늘을 사는 것도 벅차서, 내일도 내다볼 수가 없나봐.”
안타까운 말이었다. 한 치의 꾸밈도 거짓도 없는 진솔한 진심 앞에 벨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내내 굳건한 얼음성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그의 본심은 너무나 나약해서, 더 소중히 지켜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파스스 웃고는 굳은 얼굴로 말을 아끼는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려 짓는 미소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얼음꽃과도 같았다.
한 겨울 숲에 소복이 내린 눈꽃. 잔잔하게 가라앉은 얼음 호수. 그 평온한 얼굴에 위로 대신 입을 맞추려던 벨져는 부르튼 입술을 보고 허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감쌌다. 엄지로 도톰한 입술을 문질러도 루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리며 손끝엔 그의 숨이 닿는다.
그 따스하고 간지러운, 평온한 감각. 이렇게 가만히 웃고 있으면 한 송이 물망초가 떠오를 정도로 청초한 얼굴인데, 왜 입만 열면 사사건건 부딪히는 건지. 괜히 부아가 치밀어 루이스의 입술을 매만지던 엄지를 뺨으로 옮겨 그대로 볼을 꼬집었다.
“아야야. 아파!”
저보다 한 살이나 많은 주제에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얼굴이라니. 평소의 그 침착하고 냉정한 분위기와 서늘한 눈빛만 아니면 원래 나이에서 예닐곱쯤은 깎아 불러도 충분히 믿을 법한 얼굴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처럼만 입고 다니면 좀 봐줄만 할 텐데.
가끔 보여주는 순박한 얼굴이 빼도 박도 못하게 취향이라 더 짜증이 났다. 왜 하필이면 루이스 따위에게. 벨져는 루이스의 뺨을 놓았다. 손을 놓자마자 뺨을 문지르는 그에게 작게 핀잔을 주었다.
“엄살은.”
“진짜 아프거든. 하여간 예쁜 게 힘은 세가지고.”
“말이 좀 이상하군. 아름답고 강한 게 뭐가 나쁘단 거지?”
“...말을 말자. 응. 그래.”
루이스가 벙찐 얼굴을 하더니 달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벨져의 마음에 들 리 만무했고, 다시 루이스의 얼굴을 잡자 움찔 몸을 떤 그의 동공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제 손아귀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자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루이스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시선을 피하는 그의 뺨을 단단히 잡고, 벨져는 눈을 질끈 감은 루이스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그저 닿은 것뿐이지만, 닿았다 떨어질 때 나는 소리만큼은 여느 키스 못지않았다.
눈을 뜨자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루이스가 보여, 벨져는 혀를 찼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도 모르나?”
정말 놀랐는지 루이스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가늘고 긴 속눈썹이 떨리는 게 예뻐 가만히 바라보자 루이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를 놀리는 대신 덩달아 부끄러워진 벨져는 도리어 성을 냈다.
“왜 이런 걸 부끄러워하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응,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루이스가 벌떡 일어나 벨져를 마주봤다. 뭔가 굳게 다짐한 듯 결연한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루이스의 손이 벨져의 얼굴을 잡았다. 당황할 새도 없이, 루이스의 입술이 닿았다. 벨져가 방금 한 것과 달리 조심스럽고 간지러운, 부드러운 키스에 벨져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고, 말캉한 입술 사이로 들숨인지 날숨인지 모를 축축한 숨이 오간다. 누군가 혈관 속에 가득 날개를 넣고 부채질 하는 것 같다. 그의 손이 닿은 피부가 덴 것 마냥 화끈거리고, 가슴이 뛴다. 속눈썹이 떨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 * *
눈을 뜸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난 벨져는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선명한 기억은 때로 잔인하게 그 주인을 괴롭힌다.
당장이라도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왜 직접 오질 않냐며 투덜거릴 것 같은데,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 전부 알고 있는데 어째서 가장 행복했던 날의 기억을 되풀이하는 걸까. 벨져는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밝히고, 미풍이 넘실거리는 화창한 날이다.
맑은 날씨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 마지막을 직감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서두를 리 없었다. 손을 잡는 것부터 키스, 몸을 섞는 것까지 남들은 몇 달, 몇 년을 들여 돌아가는 길을 왜 그리 서둘렀으며 왜 그다지도 1분 1초를 소중히 여겼는지. 벨져는 그 모두를 루이스의 무덤 앞에 서서야 깨달았다.
몇 번을 돌이켜봐도 봄날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솜사탕처럼 달콤한 나날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더없이, 덧없이 아름다웠다.
끝까지, 그는 제게 지독히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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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사막 *
* 리케님께 드립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불거진 다툼이었다. 루이스는 자고 일어나도록 비어있는 침대의 옆자리와 텅 빈 거실을 둘러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광의 기록이 가득한 거실 벽 한쪽을 짚고 걷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어젯밤에 내뱉고 만 말이 떠올라 입이 썼다.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에게 그런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루이스는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팀원들을 보다 그 속에서 저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벨져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화, 많이 났겠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혼잣말에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연락 한 번 없는 벨져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거라면 먼저 말을 걸기도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잠은 꼭 같이 자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는데 그것마저 안 지킬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마음이 상한 걸까.
벨져는 보이는 것보다 더 섬세한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상처 받는데 무딘 루이스는 종종 이렇게 벨져에게 무심코 상처를 줬고, 그 다음은 언제나 어려웠다. 자존심때문에 사과를 못해서가 아니라 또 무신경하게 상처를 줄까봐. 그게 마음에 걸려서 쉽사리 먼저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지. 제가 생각해도 답답했다.
착잡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자기비하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지는 기분에 루이스는 불과 오 분도 안 되어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핸드폰을 베개 아래서 꺼내 화면을 두드렸다. 클랜원들의 단톡방과, 매니저의 문자, 정작 기다리는 사람에게선 부재중 통화는 커녕 문자 한 통 메세지 하나 없었다.
한 번, 딱 한 번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전화를 할 수 있는데도 루이스의 손은 화면 위를 서성일 뿐이었다. 오늘도 스케줄이 있어서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이렇게 오래 벨져가 집을 비운 적이 없어서 그런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남은 공간을 채웠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잡았다. 깊게 심호흡하고, 메신저를 켜 자판을 두드렸다.
집에 와. 와서 얘기하자. 고작 그 두 마디를 써놓고 전송을 못해 망설이다가 큰 마음을 먹고 버튼을 눌렀다. 돌이킬 새도 없이 날아간 메세지 옆에 뜬 숫자 1은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핸드폰 화면을 잠그고 일어나 침대를 정리했다. 씻고 준비하는데 십 분, 매니저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한 시간.
루이스는 청소기를 꺼냈다. 뭐라도 해야 했다.
* * *
없다. 촬영을 마치고 핸드폰을 받아든 루이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한 번 화면을 확인했다. 그래도 촬영이 끝나면 확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루이스가 보낸 메세지는 보낼 때 그대로였다. 엄습해오는 불안에 루이스는 메세지 창을 위아래로 훑다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침착하려 애쓰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걸그룹의 활기찬 사랑 노래가 대기음으로 울리는 내내 루이스의 손은 입술을 매만졌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탄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어, 왜.”
“이글. 벨져 어디있는지 알아?”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싸웠는데, 아니. 내가 말을 좀 잘못했는데 나가서 안 들어와.”
“에이, 작은 형이 애야. 가출을 하고 안 들어오게.”
이글의 태평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유치한 반항이라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리가 없다.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며 다짜고짜 촬영장에 난입해 멱살을 쥔다면 또 모를까, 이렇게 걱정시킬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핸드폰도 꺼놨어. 벌써 한나절이 지났고, 메세지도 안 읽어.”
“야, 야. 일단 좀 진정해봐. 넌 어딘데?”
“지금 촬영 끝났는데…. 하아….”
“알았어, 알았어. 찾아볼 테니까 물이라도 한 잔 하고! 어? 짝형이 누구 죽이면 죽였지 어디 뭐 해코지 당하고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마!”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너머의 이글이 볼 리도 없건만, 냉정과 이성이 전부 마비된 것 같았다. 이글의 말대로 해코지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행여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저를 안 보려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불안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깟 말 한 마디 때문에 깨질 사이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믿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벨져가 갈 법한 장소를 떠올리던 루이스는 매니저에게 일찍 들어가라며 차 키를 받아들었다. 벨져가 그 나름의 시위를 하고 있는 거라면, 숨은 그를 찾아내는 게 루이스의 몫이었다. 루이스의 차가 도로 위를 달렸다. 이렇게 찾아도 안 만나준다면 그 때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화가 난 완고한 얼굴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돌아온 집. 루이스는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에도 없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저녁도 안 먹고 벨져를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벨져는 커녕 그를 봤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워낙 시선을 많이 받는 녀석이니 못 봤다면 정말로 없는 거다. 루이스는 잠잠한 핸드폰을 보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의 잠금은 너무나 쉽게 풀리고, 큰 마음 먹고 잡아당긴 문 안으로 보이는 현관은 루이스가 나가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기척은 커녕 따스한 온기조차 없는 휑한 집. 루이스는 무거운 숨을 토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문에 기대어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네가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외친 뒤에, 충격에 굳어버린 벨져의 얼굴이 떠올라 빠듯하게 가슴을 조였다. 덮쳐오는 죄책감에 루이스는 등을 차가운 문에 기댄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번에 잘못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그깟 심야 영화, 그냥 보러 갈 수도 있는 거였는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루이스는 너무나 무력했다. 무릎을 모아 안고 이마를 짚었다. 이번 주 내내 스케줄이 바빠서 힘들다고 제대로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고, 집에 돌아오면 씻고 자기 바빴다. 그 정도면 벨져도 많이 참아준 거였는데 이기적으로 군 건 어느 모로 보나 루이스 자신이란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한 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꺼낸 루이스는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벨져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있었고, 루이스의 핸드폰은 배터리를 충전하라며 기계음을 울렸다. 사과하자.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빌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반쯤 마음을 놓았던 루이스는 화면에 뜬 이글의 이름에 자포자기하며 전화를 받았다.
“응.”
“야, 짝형 날랐어.”
“무슨 소리야.”
“너랑 싸우고 바로 그냥 아무 비행기나 탄 것 같아. 공항사진이 좀 찍혔더라고.”
“하하, 벨져답네.”
“아직 비행중이라 전화 못 받는가보지 뭐. 걱정하지 마. 연락 오면 빌고! 나 좀 그만 찾어! 알았어?”
“…그래.”
과연, 벨져 홀든은 마음 정리하는 스케일도 남다르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이글과 전화를 마치자마자 핸드폰이 꺼지고, 루이스는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일단 안전하게 잘 있다는 걸 확인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 서니 하는 줄도 몰랐던 긴장이 뜨거운 물에 녹아내렸다.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들로 가만히 뜨거운 물을 맞고 있던 루이스는 욕실 안에 차오르는 수증기에 콜록거리며 물을 껐다.
환풍기도 안 돌려놓고 들어오다니,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벨져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른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나가도 옷 좀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 보일러도 안 켜놓고 나가서 욕실 밖 공기가 차가웠다.
한기와 외로움에 바르르 몸을 떤 루이스는 온도부터 맞춰놓고 핸드폰을 켰다. 샤워하는 사이 충전된 배터리는 겨우 5%. 물에 젖은 머리를 털며 핸드폰을 침실로 가져와 다시 충전기에 연결했다. 진동으로 해두면 혹시라도 못 들을까봐 전화 알림을 진동과 벨소리로 바꾸고, 벨소리 음량을 최대로 올린 뒤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메신저 창에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일일줄이야. 루이스는 종종 벨져가 투덜거리던 걸 떠올리고 다시 한 번 깊게 반성했다.
여태껏 널 이렇게 서운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말 없이 기다려주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해버렸다. 둘이 있어도 넓은 집은 한 사람에겐 너무나 넓다. 빈 공간이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신경질을 내며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다가와 머리를 말려줄 사람이 없다. 루이스는 드라이기를 꺼내 혼자 머리를 말렸다.
같이 쓰는 샴푸와 바디워시 향에 무심코 기대하게 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걸까, 아니면 네게 길들여진 걸까. 제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향기는 벨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말린 루이스는 그대로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늘 눕는 제 자리 대신 벨져의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다.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노래 가사와 같은 마음에 루이스는 벨져의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전화 오면 뭐라고 하지. 자다가 놓치는 건 아닐까. 그럼 일어나 있어야 하는데, 한 번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 안에서 맨살을 부비고 있으니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루이스는 손을 뻗어 충전기에 연결된 핸드폰을 침대 옆 협탁에 놓고 스탠드를 켰다.
쨍한 불빛에 눈이 아프다고 하자마자 바꾼 스탠드였다. 스탠드 갓을 한 번 쓸어보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지 않는 연락을 막연한 기대로 기다리는 루이스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왔다. 자지 않기 위해 일어나 앉았지만 일주일 째 쌓인 피로에, 저녁 내내 긴장한 채로 벨져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이불 속에 들어온 이상 잠이 오는 건 제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불가항력이었다. 아침해가 밝아오는 새벽, 결국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루이스의 눈이 감겼다.
그렇게 잠들어 고른 숨소리를 내던 루이스를 깨운 건 진동과 함께 울리는 벨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깊게 잠들었던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눌러 밀었다.
“으으응….”
“루이스.”
알람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어도 핸드폰에선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웅얼거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뜬 루이스는 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침대 위에 엎드려 핸드폰을 집어들자 화면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말문이 턱 막혔다.
졸음에 다 뜨이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화면에 비치는 풍경은 여전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땅. 쏟아지는 별빛과 그 모두를 담은 풍경은 언젠가 TV에서 함께 본 곳이었다. 한 번 쯤 가보고 싶다고 했던 걸 또 기억하고 있었는지. 루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참을 생각도 없었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벨져어.”
영상통화라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동이다. 어떻게 이걸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루이스는 핸드폰을 공손히 양손으로 들고 먼 땅에 홀로 떠나버린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끝내주는 앵글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소금 사막을 보여주던 화면이 빙그르 돌아가더니 조금 지친 얼굴의 벨져가 비쳤다. 루이스는 화면 한 쪽에 뜨는 제 얼굴이 엉망인 걸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무 좋은데, 좋아하는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자니 부끄러웠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라, 핸드폰 액정에 뜨는 벨져를 보며 웃자 벨져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흥, 이런데도 내 사랑이 느껴지질 않는다고 투정을 해?”
“……미안.”
잠결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게 휘는 눈매가 별빛이 가득한 하늘만큼이나 예쁘다.
“지금 당장 키스해주고 싶은데….”
화면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린 목소리는 닿지 못했는지, 벨져가 다시 카메라를 풍경으로 돌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자꾸만 광대가 올라갔다. 보고싶다는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었다. 루이스는 몸을 돌려 누웠다. 팔을 뻗어 핸드폰을 높이 들고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이름을 불렀다.
“보고 싶다…….”
잠결에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한 말에 다큐멘터리처럼 풍경을 보여주던 핸드폰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다 듣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긴. 루이스는 당장 떠오르는 말을 더했다.
“사랑해. 진짜 많이…….”
분명 잠들기 전까진 할 말이 많았는데, 사과도 하고, 또 다른 말도 하려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미안….”
눈을 비비며 잠을 몰아내려 했지만 한 번 찾아왔던 졸음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핸드폰을 떨어트리며 뺨을 맞은 루이스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며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예쁘다. 근데…. 지금은….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미련하긴.”
“하하, 그러게.”
하는 말은 타박이지만 그 말을 하는 목소리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 벨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떠올라 루이스는 베개 위에 화끈거리는 뺨을 기댔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핸드폰 액정을 채운 풍경이 아름답다. 그보다 마음을 울리는 건 감히 그 크기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었다.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기분에 루이스는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랑을 어떻게 다 돌려줄 수 있을까. 벨져 홀든은 언제나 제게 넘치도록 과분한 사람이었다. 초라한 불안과 걱정은 그 앞에 서면 언제나 하잘 것 없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제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뉘우치며 밤하늘을 바라보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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