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고 할 거 없이 벚꽃이 만개한 봄, 잠깐 나갔다 오자는 벨져의 막무가내에 끌려 점심을 먹고 호숫가까지 드라이브를 하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에 커피 한 잔 하고 나니 오후가 훌쩍 지나고 말았다. 가끔은 느긋하게 늦잠도 자고 숙소에서 좀 뒹굴어도 좋을 텐데. 루이스는 익숙하게 액셀을 밟으며 흘긋 조수석에 팔짱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벨져를 바라봤다.
기껏 비싼 차를 사놓고 자기가 모는 건 취한 자신을 데리러 올 때 뿐이다. 덕분에 루이스는 남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고급세단을 자기 차처럼 몰았다. 처음 벨져가 차 키를 던져줬을 땐 혹시라도 기스라도 날까 조심조심했지만 어차피 벨져는 홀든이었다.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의 가격은 0이 두 개는 더 붙고, 굳이 게이머 생활을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데다 은퇴하더라도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말 그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홀든.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나 데리고 살라고 하는 것도 벨져에겐 쉬운 일이었다.
자신이 '프로즌'이 아니었을 때도 벨져는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알바하는 식당, 서점, 술집 그것도 모자라 반지하 자취방까지 찾아와 귀찮게 굴던 게 벌써 몇 년 전인지. 루이스는 신호등이 초록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는 걸 보고 천천히 액셀에서 발을 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매끄럽게 멈춰선 차 안에서 루이스는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 고개를 돌렸다. 밖을 보고 있던 벨져가 그 시선에 루이스를 마주봤지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벨져가 대번에 눈썹에 힘을 줬지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루이스는 그래도 벨져가 다시 채널을 돌리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벨져는 칫, 하고 작게 혀를 차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때마침 봄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파란불이 켜졌다. 루이스는 액셀을 밟으며 경쾌한 하모니카의 멜로디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렸다. 벚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도로의 풍경이 예뻐서 절로 노래가 나왔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차를 몰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루이스는 창문을 조금 열고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나쁘지 않은 선곡이라 그런지 별 말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빠는 벨져를 옆에 두고 루이스는 정면을 보며 물었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벨져의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벨져.”
“왜.”
“오늘 며칠이지?”
“4월 4일 토요일. 그건 왜, 아.... 오늘이었나.”
벨져가 컵을 내려놓고 입가를 매만졌다. 별로 큰일은 아니지만 워낙 까탈스러운 성미라 루이스는 걱정이 됐다. 안 그래도 자기 공간을 침해받는 걸 질색하는데 과연 괜찮을런지. 루이스는 이제 겨우 열일곱인 그랑플람의 원딜러를 떠올렸다.
피지컬도 좋고 센스도 있고 대담하기도 한 원딜러 하랑은 그의 닉네임보다 미친 고딩이라는 수식어를 더 자주 달고 다니는 선수였다. 나이차가 꽤 나긴 하지만 하랑은 이글과 죽이 잘 맞는 아이였다. 쾌활하고 명랑한 딱 그 나이 남자애. 벨져의 말을 빌리자면 ‘시끄럽고 산만하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물론 같은 팀의 티엔이 잘 잡아주긴 하지만 그래도 넘치는 혈기는 주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루이스는 오늘 홀든A 숙소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 티엔이 브루스 감독과 함께 중국에 출장간 사이 일박이일로 묵어가는 것 뿐이지만 하랑이 오는 시점에서 평화로운 휴식은 물 건너가는 셈이었다.
루이스는 고가도로에서 커브를 돌며 오늘 일찍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아예 자고 들어가는 게 아니면 전쟁통처럼 시끄러운 숙소에서 자야하는데 문 하나로 그 목소리를 다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보나마나 이글이 술도 먹일 텐데, 고등학생인 하랑이 술을 마시는 건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숙면과 숙소의 평화, 아이작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브루스나 티엔에게 연락을 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가 하루 놀겠다는 걸 훼방 놓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벨져.”
“왜, 또.”
“우리 외박할까?”
그 말에 벨져가 눈을 크게 떴다.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에도 루이스는 능숙하게 운전을 계속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네 수행비서나 할까봐 하고 농담하긴 했지만 이정도면 정말 벨져 홀든의 비서나 운전수로 취직해도 좋을 갓 같았다. 아무렴 벨져가 대리를 부를 리 없으니 꽤 괜찮은 것 같은데. 딱히 미래에 뭘 해야겠다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루이스였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추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싫음 말고.”
“아, 아니. 싫다고 한 적 없다!”
“됐어, 끝났어. 잠이나 자두던가.”
“차 돌려.”
루이스는 들은 체도 않고 액셀을 밟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제가 못 잔 것도 벨져 때문이니 그라고 잠 좀 못 자면 어떻단 말인가. 루이스는 시내로 들어서며 창문을 올렸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벨져가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고 운전에 집중했다.
“…칠성급 호텔.”
“됐어. 하랑이 볼래. 아무리 그래도 집이 최고지.”
“그럼 내 집으로 가던가.”
“내가 너네 집을 왜 가.”
“외박하자며!”
벨져는 자꾸 말을 돌리고 간만 보다 빠지길 반복하니 짜증을 냈다. 이렇게 좀 삐지게 뒀다가 손을 내밀었을 때 만족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짓궂게 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스는 벨져가 퍽 귀엽다 생각하며 숙소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이 가까워질수록 벨져의 표정은 뚱하게 굳어졌지만 루이스는 벨져 홀든을 엿 먹이는 게 아주 즐거웠으므로 계속 이어지는 무언의 시위에도 차를 돌리지 않았다.
어느 선선한 밤, 홀든 A의 숙소에는 유례없이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공기는 대개 소음의 주범인 이글이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글은 놀라울 정도로 묵묵히 방송을 위한 세팅을 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벨져와 루이스의 방에서. 팔짱을 끼고 다리는 꼰 채 침대에 앉아 자신의 공간에 침입한 막내동생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벨져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꼭 해야겠냐?”
“왜, 쫄려? 사나이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이글은 책상에 마이크와 캠을 능숙하게 설치하고는 양손을 착착 치대며 손을 털었다. 영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시위하는 작은 형을 돌아보며 씩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벨져 홀든의 이런 모습을 어디 보기가 쉬운가. 이글은 오늘 방송이 잘 되면 이 영광을 함께 해준 트롤러에게 바치고 싶었다. 불과 두시간 전까지만 해도 연습실에 앉아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쉬레가 프로즌을 끼고 질 리가 없다고 누누히 말하는 게 벨져였다. 하지만 그도 트롤링에는 견디질 못하고 져버린 것이 지금의 결과였다. 아무리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해도 진 건 진 거니까. 내기로 벌칙을 걸고 한 이상 안 한다고 뻗댈 수도 없었다.
이글은 자기 아이디를 치고 인터넷 방송 사이트에 접속해 방을 열었다. 오늘의 방송용 게임은 사이퍼즈가 아닌 무섭기로 소문난 공포게임으로, 어느 정도 머리를 써서 퍼즐을 풀어야 공략이 가능한 게임이었다. 방제를 프로즌과♥쉬레의 내기 벌칙★공포게임실황 으로 바꾼 이글은 뿌듯하게 자신의 작품을 바라봤다.
제 작은형이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웃기고, 루이스가 과연 이번에도 그 얼음같은 침착함을 보여줄지 기대가 됐다. 아직 대기화면만 띄워놨을 뿐인데 본방은 물론 중계방까지 우후죽순으로 사람이 들어차는 걸 보며 이글은 경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주인공 중 한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하러 간 건지 도망간 건지 어쩐 건지 샤워하러 간지라 이글은 벨져의 옆에 앉았다.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자는 침대의 쿠션이 뭐 이리 좋담. 이글은 침대를 툭툭 두드려보곤 벨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형, 좀 기대되지 않아? 그 루이스가 어떻게 나올지? 응?”
“천박하긴.... 이딴 B급 호러가 뭐가 무섭다고.”
“흐응, 그래? 그럼 형은 따로 해야겠다. 이번에 새로 나온 퍼피 파라다이....”
“치워.”
제깍 팔을 쳐내며 질색하는 제 작은형의 반응이 즐거워 이글은 크게 웃었다. 고개를 젖히며 웃다가 뒤로 넘어가 끅끅거리자 벨져가 나가라며 이글을 발로 차 떠미는 바람에 이글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벨져는 이글이 떨어진 후에도 팔짱을 낀 채 밟으며 짜증을 냈다. 호러게임이 무섭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졌다는 게 불쾌한 거라 이글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더 입을 놀렸다.
“아, 그러게 누가 탱커 하래?”
“그 이상한 새끼 때문에 졌지, 네가 잘해서 진 게 아니라고!”
“크크킄큭, 아~ 그러셔? 난 그 사람한테 짱 고마운데, 아이디가 뭐더라 교주 제... 어읔!”
“그만해, 벨져. 애 죽겠다.”
깝죽거리다 정강이를 맞은 이글에게 거실에서 동앗줄이 내려왔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피부에 물이 오른 루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오늘 뭐 하는데?”
“어느 고성에서 깨어났는데 기억이 하나도 없어. 그 성 안에서 기억을 찾아가면서 탈출하는 공포게임이지롱. 아, 혹시 크리쳐 무서워해?”
“피 튀기고 그런 건 좀 싫은데.”
루이스는 머리를 털다 옷장에서 티셔츠를 꺼내 입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질색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겁을 먹는 것도 아닌 평온한 얼굴에 이글은 벨져가 한껏 돋워준 흥이 식는 걸 느끼며 길게 콧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오늘 벌칙은 두 사람을 놀리기는 커녕 침착하게 퍼즐을 풀어가는 공략 방송이 될 것 같다. 뭐, 그런 점이 루이스답긴 하지만 이래서야 기껏 준비한 보람이 없었다.
“다 깰 때까지 불 켜기 없음!”
“해 뜰 때까지 못 깨면 어떻게 해?”
“그럼 못 나오는 거지 뭐.”
“그때까지 못 깰리가 없지 않나.”
벨져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이글은 난이도를 헬 모드로 조정할까 고민하다 그것마저 잘해버리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라 그만 뒀다. 어쨌거나 이미 하기로 했으니 이제 와서 바꿔봤자 그게 그거였다. 이글은 뒤통수를 긁으며 일어나 앉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티셔츠를 적시는 데도 루이스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캠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참 생기기도 잘 생겼다. 언젠가 루이스가 없는 자리에서 얘기가 나왔을 때 팀원들끼리 한 말도 루이스가 제일 잘 생겨보일 때는 샤워하고 나온 직후라는 거였는데,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루이스에게선 묘한 청순함이 풍겼다. 이러니까 깐깐한 작은 형도 넘어간 거겠지. 이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루이스에게 다가가 손수 머리를 말려주는 벨져를 바라봤다. 하여간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하나도 없다. 이러니까 맨날 큰형이 포털에 돈을 쓰지. 이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시작한다?”
“그래. 이거 근데 잘 나오나?”
“고럼고럼. 이 이글님이 쓰는 건데 당연하지~. 자, 누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하지 뭐. 나중에 가면 막 에스컬레이트하고 그럴 거 아냐.”
루이스가 먼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연스레 그 옆에 앉은 벨져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이글을 쏘아봤지만 이렇게까지 한 이상 혼자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방송이라고 메이크업까지 한 벨져는 자기 쪽으로 카메라를 살짝 돌리곤 머리를 매만졌다. 이글은 두 사람 사이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꺼놨던 마이크를 켜고 대기화면을 치웠다. 유유히 흘러가던 채팅창이 채 읽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올라갔다.
루이스가 가볍게 박수를 치고, 이글은 잠시 오늘의 게임과 규칙을 소개했다. 첫째, 중간에 그만두기 없기. 둘째, 힌트랑 채팅창 보기 없기. 셋째. 불 켜지 않기. 이글이 윙크와 함께 인사를 마치자 때마침 심부름 보냈던 토마스가 뜨끈한 팝콘을 들고 돌아왔다. 이글은 그럼 채팅창에서 보자며 물러나 방의 불을 껐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둘만의 시간이었다.
“음, 이거 어쩌지. 이글이 하는 것처럼은 못하겠고…. 으음, 여러분 저희끼리 게임할게요...? 너무 뭐라 하지 마시고 예쁘게 봐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루이스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벨져도 고개를 까딱였다. 깜깜한 방안에 불빛이라곤 모니터와 스탠드 하나. 익숙한 방이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산한 배경음악이 더해지니 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벨져는 조용히 제게 시작한다며 스타트를 누르는 루이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벨져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니터를 바라봤다. 1인칭 게임이라 화면이 움직이고, 루이스는 침착하게 건물 안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뭐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조심은 하고 있지만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루이스를 오래 보긴 했지만 공포 게임을 하는 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반응을 할지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탐색을 계속하며 아이템들을 줍는 중이었다. 괜히 가구를 건드려보며 돌아다니다 뭘 건드렸는지 이상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흔들리며 흐려졌다.
튜토리얼이나 다름없는 초반이라 화면에 뜨는 스크립트를 소리 내어 읽고 설명하는 루이스의 목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발음이 꽤 씹히긴 하지만 이렇게 천천히 조근조근 말하니 알아듣기 훨씬 편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하면 좋을 텐데. 벨져는 루이스가 인터뷰를 할 때나 부스 안에 들어갔을 때 하는 말과 제게 머리를 기대며 웃는 걸 떠올리고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역시 지금 이대로가 좋다.
벨져는 키보드에 손을 얹고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루이스를 흘긋 바라봤다. 시끄러운 노이즈가 거슬리긴 했지만 벨져는 그것보다는 다른 데 관심이 있었다. 어둠 속 방금 샤워를 마친 루이스의 고운 얼굴이 모니터에 반사되어 비치고, 루이스의 몸에선 약한 샴푸 냄새가 풍겼다. 벨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 코를 매만졌다.
“어우, 깜짝이야.”
순간적으로 난 큰소리에 루이스를 보던 벨져도 움찔했다. 루이스는 벨져를 보며 허허 웃고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벨져.”
“왜.”
“나 이거 못하면 네가 깨줘야 해?”
“왜, 무섭냐?”
“조금.”
벨져는 랜턴을 얻더니 조금 더 과감하게 여기저기 건드려보는 루이스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무서워하긴 커녕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인데, 옆방에서 팝콘을 끼고 구경중일 이글이 엿먹을 생각을 하던 벨져는 슬쩍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자기가 필요하다는데 도와줘야지. 벨져는 묘한 뿌듯함과 함께 모니터를 바라봤다. 팔짱을 풀고, 루이스의 다리에 손을 얹어도 루이스는 별 말 없이 마우스를 움직여 복도를 걸어갔다. 별로 밝지도 않은 램프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찔러 보고 다니는 상황인데, 확실히 분위기라던가 음악이 음산했다. 하라는 게임은 안 하고 루이스만 보고 있었던 벨져는 이제야 그걸 느끼며 화면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건데?”
“어 얘 이름은 다니엘인데, 그림자한테 쫓기는 중이고 알랙산더라는 사람을 죽여야 돼. 자기가 약을 먹고 기억을 지운 다음에 성에서 깨어났어.”
“흐음.”
“그리고 공포를 느끼면 화면이 흔들리고 그래.”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라 벨져는 같이 화면을 보다 다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굳이 도와줄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엄살은. 벨져는 다시 화면을 보는 척 루이스 보기에 열중했다. 늘 같이 게임을 하다 보니 이렇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방송을 복기할 때나 루이스의 갤러리, 팬카페에 보정된 짤을 수집할 때 뿐이었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둑한 방 안에 불빛이라곤 모니터의 약한 빛 뿐. 그마저도 공포게임이라 화면이 어두컴컴해 화면보다는 루이스의 얼굴이 더 눈에 들어왔다. 어디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아니면 정말 무섭기라도 한 건지 루이스가 잠시 멈춰서 입가를 매만지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AOS 게임 특성상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판단과 오더를 내리는 사령탑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는 선수로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코치로도 우수한 편이었다. 상대의 사소한 습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는 냉철함과 집중력, 그리고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이 프로즌의 가장 큰 무기다. 벨져는 그렇기에 프로즌의 오더를 따랐다. 어느 쪽에도 치중되지 않는 최적의 판단. 물론 그 판단이 언제나 승리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벨져는 루이스를 믿었다.
홀든 A는 사실상 프로즌이 있기에 구성되는 팀이다. 언론과 팬들, 심지어는 다른 팀들까지 홀든 A의 중심을 쉬레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틀린 얘기였다. 프로즌이 있기에 쉬레가 있고, 쉬레가 있기에 프로즌이 있으며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애초에 루이스가 없었다면 서로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다른 형제들이 한 팀에 모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프로즌은 절대로 팀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승리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이 다르다. 그걸 알기에 이글 놈도 진즉 옆에 끼고 돌았던 거겠지. 벨져가 잠시 꽁기해진 나머지 팔짱을 끼는데 화면이 크게 흔들리며 루이스가 화들짝 놀라 움찔했다.
“스읍, 하아….”
음침한 공간, 저 멀리에서 괴수가 얼쩡거리는 게 보여 벨져는 슬쩍 루이스의 안색을 살폈다. 잔뜩 긴장한 채 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게 퍽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리자 루이스가 눈을 흘기며 주먹으로 가볍게 벨져의 어깨를 쳤다.
“저런 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
“아, 그럼 보지만 말고 네가 하던가. 저거 해치우지도 못해.”
꿍얼거리며 하는 투정에 벨져는 피식 웃었다. 귀엽기는. 이제 겨우 시작한지 이십분 쯤 된 것 같은데 벌써 투덜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 좀 더 놀려주고 싶었기에 슬쩍 말을 흘렸다.
“점점 강도가 올라갈 텐데 그럼 나야 고맙지.”
“아냐, 그냥 내가 할게.”
벨져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순식간에 진지해진 목소리와 눈빛이 결연했다.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크리쳐를 본 벨져는 마른세수를 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는 루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모처럼 이글 녀석이 기특한 짓을 했으니 노래를 부르던 운동화 한 켤레 쯤은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벨져는 제 품에 안겨드는 루이스를 안고 토닥였다.
“마저 해야지.”
“이런 거 진짜 싫어…. 하아….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왜긴 왜야, 빨리 진행이나 해. 이대로 밤 샐 거냐?”
“이글이 보고 있겠지?”
벨져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며 루이스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다시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마우스와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 후로 다시 심기일전하고 크리처를 피해 다니며 이리저리 숨기를 반복했다. 옷장 속에 틀어박혀 랜턴도 못 키고 벌벌 떠는 주인공의 심리에 이입한 나머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루이스를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쫓기면서 괴상 쩍은 비명도 지르고 안 무서운 척 허허 웃다가도 퍼즐은 또 척척 잘 푸는 게, 아무래도 비제이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오히려 이글보다 인기가 많을 지도 모른다.
벨져가 중간중간 자기가 대신 하겠다고 선수 교대를 자처했지만 루이스는 무서워하면서도 끝끝내 마우스와 키보드를 놓지 않았다. 중간에 이글이 알려주러 올 테니 거기까진 꼭 자기가 다 하겠다는 건데, 이미 진즉에 반절을 넘어온 것 같다고 말을 해줘도 듣지를 않았다. 이럴 때 보면 또 묘한 데 고집이 세다. 어쨌거나 벨져는 이런 거에 하나하나 놀라는 것도 흉측한 크리처를 상대하며 도망치는 게임도 별로였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루이스 옆에서 훈수를 두며 루이스가 놀라고 무서워하는 걸 실컷 구경했다.
처음엔 그래도 체면치레를 하더니, 루이스는 가면 갈수록 방송이라는 걸 잊고 벨져에게 우는 소리를 하며 엎어졌다. 뭐가 나타날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면서 급히 랜턴을 끄네 어디에 숨네 하며 혼잣말을 하고,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손을 잡으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타박하면서도 손을 잡아주고, 대신 화면을 보며 옷장 문을 열어주고, 그러다 한 번 걸려서 세이브 지점까지 다시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렇게 중간까지 자기가 하겠다던 루이스는 마지막 보스의 방을 앞에 두고 정신을 차렸다. 쎄한 느낌에 벨져를 바라보니 벨져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루이스를 마주봤다. 그제야 이런데 흥미가 없는 벨져가 왜 자꾸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는지 깨달은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벨져의 무릎으로 엎어졌다. 허탈한 나머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그래? 미쳤어?”
“흐흐흐, 흐흐하하하.”
“게임 주인공이 미쳐간다고 너까지 미치면 어떻게 해? 이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빨리 끝내지?”
“아…, 진짜…. 하아…. 내가 진짜….”
“미련하긴. 그래서 내가 한다고 할 때 듣지 이제 와서 찌질대긴.”
루이스는 틀린 말 하나 없는 벨져의 얄미운 말에 그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좀 더 진심으로 얘기하지, 그걸 그냥 지켜보기만 하다니. 갑자기 밀려드는 억울함에 루이스는 의자도 뒤로 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 단 한 번도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본 적이 없었다. 루이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제가 바보짓을 한 거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루이스가 그러고 가만있으니 벨져가 루이스가 앉아있는 의자를 발로 밀어 옆으로 밀고는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았다. 루이스는 제가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벨져와 이제 최종장을 앞에 둔 게임 화면을 보며 멍때렸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게임이 끝나고 엔딩 영상이 재생되는데,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하아….”
“끝났네. 다 잡아먹히고 끝.”
“난……. 대체 뭘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벌칙게임 수행.”
얄밉기 그지없는 말에 루이스는 억울함을 담아 벨져의 팔을 쳤다. 벨져는 미간을 찌푸리며 루이스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게임을 껐다. 그제야 나타난 채팅창과 방송화면이 보여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이거 벌칙 게임이었지. 언제부턴가 그걸 까맣게 잊어버린 루이스는 침울하게 한숨을 내쉬곤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네, 다 했습니다. 다니엘은 네…. 이렇게 됐네요. 이상 프로즌이었습니다.”
“쉬레였습니다. 오늘 이 방송을 하게 해준 그 새끼를 보신 분은 제게 연락 주십시오. 그럼 이만.”
벨져는 늘어진 루이스를 대신해 방송을 종료했다. 잠깐 본 채팅창에 이글이 자러 갔다는 말을 본 벨져는 따로 방송용 캠과 마이크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컴퓨터의 전원도 끄고 루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열시쯤 시작해서 쉼 없이 달렸는데도 벌써 해가 떠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루이스.”
“몰라, 내버려둬.”
“자야지.”
루이스는 대답 대신 힘없이 벨져의 손을 쳐냈다. 저를 쏘아보는 붉은 눈동자에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으쓱했다. 도와준다고 할 때 됐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라는 명백한 표현에 루이스는 의자에 앉은 그대로 축 늘어져 천장을 바라봤다. 분명 시작할 때만 해도 깜깜했는데. 방에 전기불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방 안이 푸르스름하게 밝았다.
“해 떴네.”
“이리 와라.”
벨져는 루이스의 침대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루이스는 못 이긴 척 다가가 쓰러지듯 누웠고, 벨져는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함께 누워 눈을 감았다. 꼬박 밤을 새서 그런가 머리를 누이니 졸음이 쏟아졌다. 루이스도 마찬가지인지 별 말 없이 고른 숨을 내쉬고, 벨져는 루이스를 조금 더 바싹 끌어당겨 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어쨌거나 이제는 잠에 들 시간이었다.
4월 1일 만우절. 게임 회사들이 앞다퉈 명절을 쇠듯 만우절 이벤트를 뻥뻥 터트릴 때 사이퍼즈 역시 그 흐름에 합류했다. 합류라기 보다, 그들이 더 신나서 준비한 걸 내놓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유저들도 너나할거 없이 만우절이라는 축제에 몸을 맡겼으니, 프로팀인 홀든A도 예외는 아니었다.
1일 0시가 되자마자 '쉬레'와 '프로즌'의 트위터엔 이런 트윗이 올라왔다.
[HA_Belzer @belzerthebest:
안녕! 모두의 아이돌 쉬레입니다! >_< 오늘 친선경기로 아이스 셀랙할 거예욤! ]
[HA_Louis @realouis :
최강의 근딜러 프로즌이다. 오늘 오후 다섯시에 친선경기가 있으니 참여할 우민들은 대기하도록. ]
누가 봐도 계정을 바꿨다는 게 명백한 트윗에 사람들은 이게 다 귀여운 만우절 장난이려니 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뒤이어 쉬레의 트윗에 주르륵 달리는 형과 오빠 소리에 쉬레의 핸드폰은 쉴새없이 징징거리며 알람을 울렸다. 쉬레에게 형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 중에는 같은 팀의 토마스 스티븐슨도 있었고, 평소 쉬레를 좋아하지만 쉽사리 말을 못 붙이는 사람과 프로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늘 딱딱하고 재수없는 소리나 하던 사람의 트위터 계정이, 비록 안에 있는 사람이 바뀐 걸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프로필과 닉네임을 걸고 절대 할리 없는 애교 섞인 말투를 하니 그 갭이 엄청났다. 게다가 프로즌은 팬서비스가 투철하기로 소문난 사람. 늘 씹히는 게 일상이었던 화면 너머의 사람들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돌아오는 멘션에 별을 찍고 캡쳐를 하기 바빴다.
"아, 내 트윗엔 언제 답멘할 건데!"
"야 네가 얼마나 그동안 사람들을 방치했으면 이러겠어. 지금 알림창 볼 새도 없다."
"넌 알림 꺼놨잖아. 그래놓고 그런 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잠깐만. 이거 마저 답멘해주고."
이층 침대에 누워 루이스의 핸드폰을 가지고 노닥거리던 벨져는 루이스한테 답멘이 돌아오는 대신 시답잖은 것들이 자꾸 말을 거는 통에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밖에다 프로즌이랑 놀아야하니 더 멘션 보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말마따나 이건 제가 뿌린 씨앗이기도 하기에 벨져는 홱 돌아누웠다. 루이스는 벨져의 핸드폰으로 트윗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며 노트북까지 켜는 중이었다.
"그럼 내 커피는."
"직접 사다 먹어. 그리고 지금 열두시 반이야. 밤 새려고?"
"나쁜 새끼."
"네가 먼저 하자며."
루이스의 노트북이 켜지는 소리에 벨져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야 겨우 자기를 보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가까이 오라 손가락을 까딱였으나 루이스는 다시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봤자 핸드폰을 넘겨줬다 뿐이지 노트북을 켠다 해도 제 계정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벨져는 한껏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티를 내려 루이스의 핸드폰 액정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터넷 창을 키더니 벨져의 아이디를 치고 그대로 트위터에 로그인했다.
"뭐야."
"왜?"
"너, 내 비밀번호는 어떻게 아는 거냐?"
"너, 나, 너, 나. 이걸 못 뚫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루이스는 벨져를 돌아보지도 않고 알림창을 켜더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라 벨져는 그 긴 다리를 이용해 이층 침대에서 훌쩍 내려와 루이스의 노트북을 뺏어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벨져."
"커피 먼저."
루이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지만 벨져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턱을 치켜들었다. 곧 죽어도 제게는 잘못이 없다는 태도에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만우절이랍시고 장난을 하는 의미가 하나도 없었다. 루이스는 지갑을 챙겨 일어나며 의자에 걸어둔 후드를 챙겼다. 나가서 확 안 돌아와버릴까보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돌아올 자신을 알기에 루이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원, 벨져 홀든에게 길들여지는 사막여우가 된 느낌이다. 루이스가 방을 나가려 문고리를 잡자 벨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루이스를 멈춰세웠다.
"카드 가져가라."
"나 지갑 있어."
"하, 잔소리 말고."
평소 같았으면 주는 대로 받았겠지만 루이스도 심통이 나있던 터라 소심한 반항을 해보았지만 벨져는 코웃음치고는 루이스를 향해 카드를 던졌다.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날린 카드를 잡아챈 루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복수랍시고 얼마를 긁어도 벨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또 제가 긁어봤자 천성이 소시민인지라 쫄려서 많이 긁지도 못했다. 벨져가 제게 던져주는 옷만 해도 뒤에 붙는 0이 얼마인지. 루이스는 전에 토마스가 귓속말로 대충 가격을 말해준 걸 듣고는 그냥 모르는 게 약이라 생각하기로 다짐한 후였다.
띵동, 하고 현관문의 벨이 울리는 소리에 방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토마스가 냉큼 일어났다. 인터폰에 보이는 익숙한 택배 아저씨의 모습에 토마스는 바로 현관을 향했다. 어제 시킨 신발이 온 걸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노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갈색 골판지 상자를 건넸다. 신발이라기엔 부피가 작아 토마스가 어리둥절한 사이 아저씨가 PDF를 꺼내 펜을 내밀었다.
"루이스 홀든씨 본인이신가요?"
"아, 아뇨."
"그럼 동료에 체크하고 서명해주세요."
토마스는 이름을 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루이스 홀든이라니. 루이스 홀든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홀든'이라니!!! 토마스는 황망히 닫히는 철문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박스에 붙은 택배 용지를 살폈으나 프린트 된 글자는 누가 봐도 Louis Holden님 이었다. 애써 부정을 해보려던 토마스의 여린 마음은 그렇게 알파벳 여섯 글자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토마스는 테이블 앞에 앉아 두 손깍지를 끼고 아치를 만들어 얼굴 앞에 두고 외출한 형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껏 진지한 얼굴에 평소엔 웃느라 눈에 띠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가 더해진 것도 모자라 뒤에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모 만화의 사령관 같았다. 그 모습에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두 홀든과 루이스는 현관에서 멈칫 발을 멈췄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심각한 걸까. 순간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지나갔다. 은퇴하나? 다른 팀으로 이적? 그것도 아니면 캐나다의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대체 뭐지? 그 정도로 토마스의 얼굴이 심각했기에 좀처럼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벨져마저 슬쩍 눈치를 보고 루이스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나마 우리 중 제일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건 너니까 빨리 가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 라는 눈빛에 루이스는 난처해하면서도 토마스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저어, 토마스. 무슨 일 있어?"
"선배."
"으, 응."
"말해봐요. 언제부터예요?"
"뭐가?"
루이스는 제게 따지듯 묻는 토마스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부터냐니. 루이스는 토마스가 흥분한 나머지 말을 다 생략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바람에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이글과 벨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토마스가 루이스의 어깨를 턱 잡았다.
"선배!"
"아,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형은 닥치고 있어요!"
늘 웃고 네네 응석을 받아주던 애가 화를 내니 무섭다. 이글은 저를 쏘아보며 소리치는 토마스를 향해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란 말인가. 이글은 흘긋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 골판지 상자를 보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 성인용품이라도 샀나? 그러지 않고서야 토마스가 아무리 루이스 일에 민감하다지만 이럴 리가 없었다. 아니지, 그랬다면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거나 부끄러워하고 있을테니 그것도 아니다. 이글은 토마스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가만히 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 문제의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선배! 설명해주세요!"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루이스는 잠시 상자를 보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토마스를 보곤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걸로 이런 헤프닝이 일어나다니. 하여간 어린 후배가 귀여워 살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웃으며 토마스가 한껏 멋내 세운 머리카락을 흐트리며 쓰다 듬었다. 토마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루이스의 손을 피하지 않아 금방 머리가 엉망이 됐다. 하지만 지금 토마스에겐 머리보다 루이스의 이 여유로운 태도가 더 신경쓰였다.
"악, 선배! 왜 그러는데요!"
"우리 토미가 귀여 워서 그러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야?"
"겨, 겨우라뇨!"
벨져는 영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사이좋은 토마스와 루이스를 지켜봤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언뜻 보니 이 상황을 이해한 건 루이스뿐이라 벨져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박스를 들었다. 내내 궁금해하던 이글도 벨져의 옆으로 와 상자에 붙어있는 배송 정보를 읽었다.
"루이스 홀든 님."
"흐응."
"푸하하하하하핫!"
이글은 소리내어 읽고는 바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콧소리를 길게 내며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 게 꽤 흡족해보였다. 벨져의 그 반응이 토마스가 내내 하던 고민에 설득력을 더했다. 셋 중에 누구인가 했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단 말인가. 토마스는 벨져의 그 여유작작한 태도에 발끈해 루이스를 향해 물었다.
"선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설마 진짜로...!"
"아니. 토마스, 그거 아냐."
루이스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순간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루이스는 신경도 안 쓰고 토마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마우스 새로 사는데 배송 정보에 성은 필수입력이더라고. 그래서 생각나는 거 중에 제일 짧은 걸로."
난리를 친 게 부끄러워질 정도의 사소한 이유에 토마스는 뭐라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이글은 아직도 숨이 넘어가라 웃다 못해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며 흐느끼는 중이었다.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흑역사 적립이다. 이글은 분명 앞으로 쿨타임이 될 때마다 이걸로 놀릴 것 이고, 인터뷰에서 말해버리거나 방송 중에 말할 지도 몰랐다. 그걸 깨닫자 마자 뺨에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토마스는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아났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달아나는 걸 지켜보다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웃느라 정신 없는 사람 대신 택배를 뜯었다. 에어캡에 싸인 제품이 제가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인 걸 보고 루이스에게 제품 상자를 건네자 루이스가 받아들고는 실실 웃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흥, 아직 넌 그거 쓸 급이 아닌데."
"어. 너 주려고 샀어."
"뭐?"
태연하게 대답한 루이스는 다시 뜯지도 않은 상자를 벨져에게 건넸다. 벨져가 쓰는 마우스는 게이밍 마우스 중에서도 비싼 순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웬만한 전자기기 하나 값 정도 되는 지라 다이무스가 경비로 처리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왜, 전에 스튜디오에서 인식 잘 안 먹는다며. 그래서 내 거 사는 김에 하나 샀지. 내 건 그 아래 있을 걸? 없어?"
벨져는 상자에서 신문지뭉치를 빼고 다른 마우스 하나를 더 꺼냈다. 제가 쓰는 것보다 더 가볍고 클릭 소리가 적은 루이스가 애용하는 모델. 그 마우스는 벨져가 루이스에게 프로즌 전용이라며 사준 것이었다.
"쯧, 이게 벌써 몇 년전건데 아직도 쓰냐."
"왜, 그거 프로즌 마우스잖아. 진짜 프로즌이 산 거 알면 회사에서 좋아라 하겠다. 프로즌 팬들이라면 다 하나씩 갖고 있는 거 아냐? 근데 내건 없어?"
이글이 눈물을 닦으며 박스 안을 기웃거렸다. 벨져는 이글을 쳐내며 문제의 골판지 상자 안에 마우스를 넣었다. 이글이 인증샷 하나만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들었지만 벨져는 개소리 하지 말라며 달려드는 이글을 발로 밀고는 방으로 향했다. 벨져가 이글의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린 바람에 그마저도 무산됐지만, 이글은 아쉬움에 머리를 긁적이다 루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저었다. 한참 웃다가 이글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신문지뭉치를 던졌다. 잽싸게 받아챈 이글이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쓰레기통으로 던져넣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팔을 얹었다.
"하여간, 노답새끼들이라니깐."
"너도 만만치 않아."
"하하. 그건 그래."
"오랜만에 치킨이나 시켜먹을까?"
"오, 좋지. 야! 토마스! 니네 형수가 치킨 쏜댄다!"
루이스는 이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과장스레 몸을 수그린 이글이 엄살을 부리며 그대로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고, 결국 한바탕 소동은 장을 보고 돌아온 아이작에게 혼나며 치킨을 뜯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아침부터 홀든A의 숙소는 분주했다. 부엌에선 아이작이 계란과 베이컨을 굽느라 바쁘고, 씻고 나온 토마스는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않고 늘어져있는 이글을 깨우느라, 벨져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며 아침부터 옷장을 뒤엎고 있었다.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안 돼?”
“미쳤어?”
벨져는 스키니진에 흰 셔츠, 그 위에 남색 스웨터를 입은 루이스가 침대에 앉아 이번 봄에 나온 불독인형을 끌어안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넌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그만 심통내. 모처럼 꽃놀이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더 아무거나 입을 수 없는 거다.”
루이스는 인형에 턱을 올리고 뚱한 얼굴의 벨져를 빤히 쳐다봤다. 이거야 원, 여자친구랑 쇼핑간 것도 아니고 벌써 삼십분 넘게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걸 보고 있으니 점점 기다리는 게 지루해졌다.
“베엘져어.”
“보채지 마라.”
벨져는 벌써 상의만 다섯 벌째 집어던지다 겨우 마음에 드는 게 나왔는지 얇게 스프라이트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걸쳤다. 봄이라곤 해도 저러면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꺼냈다간 벨져의 준비시간이 더 늘 것 같아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안에 가디건 입고, 위에 잠바를 입은 다음 벨져가 나중에 춥다고 짜증을 내면 가디건이나 잠바를 벗어주면 그만이니까. 루이스는 손등을 살짝 덮는 스웨터의 소매를 당겼다.
“선배!”
“응, 오오. 토마스, 신경 좀 썼는데?”
왁스로 머리도 만지고 몸에 딱 맞는 새 옷을 차려입은 토마스는 센스가 좋아서인지 새내기 대학생 같았다. 그 뒤로 따라온 이글은 스냅백에 껄렁하다 해야할지 화려하다 해야할지 애매한 차림이었지만 저게 다 명품이란 걸 안 후로 루이스는 이글의 옷차림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누가 맨날 입어서 때가 타고 목이 늘어진 런닝이 브랜드 제품이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냐만은, 또 티비나 보면서 비스듬히 누워 감자칩이나 먹고 있는 걸 보면 진하게 풍기는 백수의 향기에 옷이 묻힐 수밖에 없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표범무늬 모피코트를 두르고도 모델 포스가 나는 거라던가, 가끔 광고 찍으러 갈 때 핏이 사는 걸 보면 옷걸이는 참 좋은데. 사진 찍는 걸 보면 진짜 모델을 해도 될 것 같은 애가 이러고 있으니 가끔은 그쪽으로 안나간 게 안타깝기도 했다.
“뭐야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작은 형!”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나가!”
이글의 껄렁한 말투에 벨져가 문가에 서있는 토마스와 이글에게 짜증을 냈다. 흔히 있는 일이라 이글은 귀를 파며 들어오고, 토마스는 벨져와 이글의 눈치를 살피다 루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보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고,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씨는 뭐해?”
“도시락 싸고 계세요. 아까 슬쩍 보니까 샌드위치랑 과일 싸고 계시던데.”
“오오오.”
“오늘도 안 간대?”
“가겠어? 우리 없다고 대청소한대.”
루이스는 팬이 선물해준 쉬레와 프로즌의 스노우볼을 높이 띄웠다 잡아채는 이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옆에서 루이스의 오늘 옷차림이 교회 오빠 스타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차분하고 평범한 게 좋을 뿐이지만,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귀여운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기껏 공들인 머리를 망치면 안 된다 생각에 손을 멈췄다.
“너, 너, 저리로.”
이번에야말로 끝났나 싶었더니 벨져는 토마스와 이글이 들어온 뒤로 옷을 또 갈아입었다. 루이스는 허허 헛웃음을 흘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벨져가 이글이 가지고 노는 스노우볼을 뺏고 방에서 쫓아내는 걸 지켜봤다. 이래서야 나갈 수는 있을까. 사람들 붐비기 전에 가서 자리 잡고 싶은데. 루이스는 벨져와 눈이 마주치자 인형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꽃놀이 가자~. 옷 그만 갈아입고~.”
“그게 뭐냐, 어린애도 아니고.”
“네가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렇지. 씻기도 제일 먼저 씻어놓고.”
“너희가 너무 무신경한 거다. 선크림은 발랐냐?”
루이스가 대답이 없자 벨져는 한숨을 쉬고 화장대에서 선크림을 집어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옆에 토마스가 있는 걸 깨닫고 손에 크림을 죽 짰다.
“눈 감아.”
“그거 네 대사 아니잖아.”
“입도 닫아.”
루이스는 벨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남자치고 매끄러운 손이 뺨과 이마, 코와 턱을 지나 목을 매만지다 떨어졌다. 토마스는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저를 향한 싸늘한 벨져의 눈빛에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쭈뼛거렸다.
“어, 음. 전 아이작씨 도시락싸는 것 좀 도와드리러 갈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심술 부리지 마.”
“흥, 심술은 무슨.”
벨져는 선크림 뚜껑을 닫고 루이스의 손등에 남은 크림을 문질러 닦았다. 루이스는 그냥 손등을 문지르며 벨져가 대충 늘어놓은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꽃보러 가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혼잣말같은 그 말에 벨져는 선크림을 내려놓고 거울 너머로 루이스를 흘긋 쳐다봤다. 청승맞기는. 벨져는 옷장에서 인디언핑크색 브이넥을 꺼내 입고 위에 감이 톡톡한 감색 재킷을 걸쳤다. 이 정도면 옆에 섰을 때 흉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오늘의 루이스의 패션에 맞춘 벨져는 향수를 꺼내 루이스 옆에 다가가며 뿌렸다.
“아, 좀 밖에서 뿌리라니까.
“내가 내 방에서 외출준비를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그게 내 방이기도 하니까 문제라는 거지.”
“흐응, 싫어?”
“나한텐 너무 화려해서 안 어울려.”
벨져는 루이스의 대답에 흡족해져 길게 콧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당겼다. 단둘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래도 봄나들이로 꽃구경이라니, 이번 기획이 누구 머리속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제법 칭찬해줄만했다.
“와, 진짜 얼마만이지. 도시락 들고 피크닉 가는 거.”
“전엔 누구랑 갔었는데?”
“고아원에서 다같이.”
루이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퉁명스레 묻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오는 바람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아픈 구석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눈치를 살피자 루이스가 씩 웃으며 일어났다.
“됐어, 나가자.”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지만, 말을 잘못했단 자각은 있기에 벨져는 토씨 하나 못 달고 루이스를 따라 나섰다.
차를 타고 삼십분, 꽃이 만개한 공원에 도착한 토마스와 이글은 루이스와 이글이 주차하는 사이 알아서 찍으라고 쥐어준 카메라를 들고 신나서 붕붕 뛰다니다 갑자기 인터뷰를 시작했다.
“홀든A의 막강한 서포터, 마에스트로! 오늘의 의상 컨셉은 뭡니까?”
“어, 오늘은 글쎄요? 봄이니까 상큼한 새내기?”
“이야아, 죽인다~. 모델 뺨치네 우리 토마스!”
이글은 카메라로 토마스의 발끝부터 머리까지를 훑으며 토마스 주변을 뱅뱅 돌았다.
“아, 형. 그만해요. 쪽팔려.”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상큼한 우리 토마슈~. 우쮸쮸쮸.”
“형 자꾸 이러면 방에 뭐가 널려있는지 앨리셔씨 트위터에다 제보할 거예요!”
“그건 안 되지.”
얼굴이 붉어진 토마스가 빽 소리를 지르자 이글은 바로 표정을 굳히며 카메라를 노란 개나리가 잔뜩 핀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형들을 향해 돌리고 혀를 찼다. 하여간 벨져 홀든 저거저거 아주 이게 데이트인 줄 아나. 척 봐도 루이스와 맞춰입은 티가 나는 옷차림에 이글은 제 작은형이 정말 어찌 할 수 없는 노답이라 생각했다. 아이돌 좋아한다고 뭐라 할 게 아니다. 저게 사생팬이지. 그것도 순 악질.
이글은 얼마 전 벨져가 루이스의 팬사이트에서 조공이랍시고 선물로 보낸 스니커의 가격을 떠올리고 고개를 도리저었다. 그걸 알면서도 봐주는 저 새끼도 정상은 아니지만.
“뭐 하냐?”
“쉬레와 프로즌의 팬들을 위한 서비스 타임.”
“뭔 소리야.”
“아냐, 우리 방송의 18퍼센트는 형들의 그 끈적한 사이가 책임지고 있다고.”
사뭇 진지한 이글의 목소리에 벨져는 또 헛소리겠거니 하고 무시하려했지만 둔하기 짝이 없는 루이스가 말을 거는 바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에 미묘한 수치에 억양이 거세진 건 분명 착각이 아니겠지만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그야 물론 귀엽고 멋진 이글이 비중이지~. 이글이글이 몰라? 하, 역시 유행에 뒤쳐지시네~, 안 되겠어~.”
“그게 유행이 된다면 난 그냥 죽겠다.”
“하, 하하. 벨져 형이 그런 말 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요....”
“당연하지. 농담이 아니니까.”
벨져가 정색하고 말하자 옆에서 걷던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철썩 치고는 슬쩍 토마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루이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좋지만, 뒤통수가 따끔하다 못해 뒤에서 검은 오오라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게 아무래도 위험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루이스에게 오늘 도시락 메뉴를 화제로 말을 걸었고, 루이스는 기대된다면서 토마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평일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공원은 그닥 붐비지 않았다.
“선배 너무 인기 많은 것 같아요.”
“응?”
“우리 팀은 다들 인기가 많잖아요. 이글형도 그렇고, 벨져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게 무슨 소리야.”
뒤에선 벨져와 이글이 또 버럭버럭 하며 투닥거리고 있지만 그러느라 계속 걷는 두 사람과 거리가 제법 거리가 벌어졌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에 토마스는 속에 품고 있던 얘기를 터놓았고, 루이스는 가볍게 받았다.
“서포터는 눈에 띠는 포지션도 아니니까요.”
“우리 전적 살펴보면 네가 제일 승률 좋을걸?”
“하지만 그거랑 그건 다르잖아요.”
“다르지. 그지만 네 덕에 우리는 착실히 이기고 있어. 나도 벨져도 널 믿으니까 앞으로 가는 거야. 공방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토마스는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루이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서포터란 포지션이 눈에 띠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몫은 진입을 하는 이니시에이터나 딜러가 가져가지 마련이라 5인궁이라도 넣지 않는 이상 토마스는 카메라나 해설진의 주목을 받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걸 인정해줄 사람은 결국 팀원들밖에 없는데, 점점 모두가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의 톱니바퀴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서운했던 차였다.
“토마스. 우리가 말은 안 해도, 언제나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벨져도요?”
“하하, 당연하지. 뭐, 그건 저 녀석 마음이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널 빼겠다고 하면 당장 미쳤냐고 할 걸?”
토마스는 결국 한 대 맞은 이글과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도 토마스를 보며 마주 웃고, 그 사이를 벨져가 치고 들어왔다.
“아, 형!”
“형 소린 꺼내지도 마.”
“꽃 보러 온 거야, 싸우러 온 거야?”
“아, 같이 가! 쫌! 어휴, 드러워서 정말.”
이글이 잔뜩 투덜거리며 다가와 카메라를 루이스에게 넘겼다. 카메라를 받아든 루이스는 토마스와 벨져, 이글을 차례로 비추다 꽃이 만발한 공원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조그만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뒤돌아서 세 사람을 담기도 하고, 양 손이 자유로워지자 목 뒤에 깎지를 끼고 걷는 이글에게 농담같은 인터뷰 질문도 던졌다.
“요새 BJ로 버는 수입이 엄청나다면서요?”
“제가 워낙 멋져야 말이죠, 방송 치면 바로 나옴.”
“그게 그랑플람의 미친 고딩때문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글은 대번에 입술을 내밀었다. 그게 퍽 귀여워 루이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물었다. 이글은 주로 토마스와 듀오를 돌거나, 하랑이와 듀오를 돌거나, 아니면 그 둘과 삼인을 뛰곤 했다. 하랑은 피지컬이 뛰어난 원딜러인데다 센스도 있는 편이라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딜러인 이글과 함께 있으면 시너지가 엄청났다. 엊그제도 벨져와 듀오를 돌리다 세사람을 만나 진 루이스는 일부러 예민한 구석을 찔렀다. 진 다음에 벨져가 이게 다 뽀뽀를 안 해서 그렇다며 멱살을 잡고 달려든 복수였다.
“그건 걔가 바른 생활 어린이라 그런거지! 그랑플람에선 열두시 되면 걔 컴 전원을 빼버린다드라.”
“네가 하다가 술자리 데리고 오니까 그렇지.”
“쉿!”
이글은 큰일난다며 손사레를 쳤다. 어차피 다 편집해서 나갈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적당히 정도를 지키긴 해야 했다. 루이스와 이글이 노는 사이 벨져와 토마스가 음료수를 사서 돌아왔다. 이글의 첼시 콜라, 토마스의 민트초코 프라푸치노, 벨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루이스의 체리코크가 담긴 사각 트레이에 삼단 찬합이 두 개. 이글과 토마스, 벨져는 각각 트위터, 카스,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루이스는 세 사람의 촬영을 위해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오오오.”
“역시 아이작씨, 굉장하네요!”
“대단한데?”
“흐응. 나쁘지 않군.”
각각 다른 감상과 함께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다들 작성을 마친 후에야 각자 손을 뻗어 샌드위치와 유부초밥을 입에 가져갔다. 카메라는 잘 내려두고 먹는 동안 바람이 홱 불며 벚꽃잎이 흩날렸다.
“좋다. 날씨도 좋고, 꽃도 예쁘고 밥도 맛있고.”
“아이작씨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토끼랑 같이 보라고 갈 때 꽃가지 하나 꺾어가자.”
벨져는 이글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 동생을 쳐다봤지만 이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글의 말마따나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꺾어다주고 싶을 정도로 진풍경이라 혹했다.
“품위 없는 것들. 꽃가지 하나 보느니 차라리 휴일을 줘라. 쯧.”
토마스와 루이스는 관심도 없는 척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 벨져를 보고 둘이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뭐.”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치고 손에 묻지 않게 잘 싼 샌드위치를 집어든 벨져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루이스는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이글과 프라푸치노를 마시는 토마스를 차례로 훑어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파랗고 분홍색 꽃잎이 살랑인다.
“꽃놀이, 나오길 잘했네.”
루이스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하여간 가끔 늙은이같은 소리를 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긴장과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즐기는 루이스의 모습이 오랜만이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있는데 당연하지.”
“다음엔 아이작씨랑 다이무스씨도 같이 와요!”
벨져는 애먼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의 체리코크를 뺏어마셨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벨져는 체리코크를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다음주 수요일, 시간이 비니 다음 시즌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기분 전환삼아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아랑 아이작까지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지만. 벨져는 미리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날씨가 좋았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실책. ‘쉬레’ 벨져 홀든은 무력하게 아군의 HQ타워가 부서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고작 8강에서, 그것도 클린스코어로 패배란 홀든 attackers는 물론 벨져 홀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아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제 옆에 앉아있어야 할 그가 선수 부스 밖 관객석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팀원들의 얼굴과 함께 끝자리에 본 적도 없는 놈이 하나 앉아있는 게 보였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며 뒤돌아서는 게 보였다. 벨져는 해설들이 뭐라 떠들건 상관하지 않고 일어섰다. 뭔가 잘못됐다. 이겨야 하는 게임이었고, 그는 게임을 끝내고 무심한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함께 승리를 기뻐해야 했다. 루이스. 프로게이머 ‘프로즌’의 자리는 ‘쉬레’의 옆이었다. 벨져는 삼년이 넘는 시간동안 루이스와 호흡을 맞췄다. 그만큼 자신의 플레이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벨져는 다급하게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관객석과 선수를 가로막은 방음 부스의 벽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는 계속해서 멀어졌고 벨져가 루이스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는 찰나 아직 끼고 있던 헤드셋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벨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프로즌의 주캐, ‘Ice’의 패배 보이스였다.
‘Ice’가 두 사람에게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벨져에겐 첫 패배였고, 루이스에겐 프로게이머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Ice를 들고 져버렸다. 벨져는 이게 루이스 은퇴 후 첫 경기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있을 수 없다. 이젠 내가 뒤를 봐줄 수 없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며 쓰게 웃는 그에게, 너에게 기적을 선물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벨져였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루이스가 없는 첫 경기에서 ‘Ice’로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너무나 잘 알았다. 루이스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Ice’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루이스와 ‘Ice’를 연관 지어 전장의 영웅, 역전의 희망이라고 부르곤 했다. 루이스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쑥스러워했지만 벨져는 그 별명이 루이스와 ‘Ice’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Ice’를 들고 루이스가 보는 앞에서 져버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있을 수 없는 스코어에 헛웃음을 흘렸다. 견딜 수 없는 굴욕감과 분노에 방음부스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루이스를 잡으러 나가려했지만 부스엔 문이 없었다. 사방이 막힌 투명한 상자 안에 갇힌 벨져는 결국 루이스가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조금 전까지 있었던 팀원들과 스태프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루이스가 은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벨져는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한낱 꿈.
그걸 깨닫자 번쩍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천장,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 벨져는 바로 핸드폰을 찾아 홀드 버튼을 눌렀다. 오전 5시 15분. 마지막 게임을 하고 잠들기 전이 3시였으니 두 시간쯤 잔 셈이다. 답답하게 막혀있던 숨을 내뱉은 벨져는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로 훌쩍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곤히 잠든 룸메이트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루이스.”
잠기운에 잠긴 목은 깔끔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끝이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벨져는 상관하지 않고 루이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성인 남자 둘이 함께 눕기엔 좁은 침대였지만 루이스는 잠결에도 몸을 모로 뉘어 벨져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벨져는 냉큼 자리를 차지하곤 루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느껴지는 바디샴푸의 청결한 냄새와 따끈한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간절했던 그의 체취에 불안으로 날뛰던 가슴 속의 폭풍이 가라앉았다.
“루이스.”
한 번 더,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자 루이스가 잠투정을 부리듯 무어라 웅얼거렸다. 벨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콧잔등과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 맞추곤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지 않으면 쉬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취해서 고백하고 사귀게 된 지 고작 세달 밖에 안 된 연인이자 누구보다 믿음직한 파트너.
벨져는 루이스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건 전부 루이스가 은퇴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한계가 오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 말이 은퇴의 밑밥이란 걸 모를 정도로 벨져는 멍청하지 않았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은 필요 없다. 벨져는 자신의 팬들이 저를 위해 드는 치어풀을 떠올렸다. 사석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 꼭 맞는 말이었다. 벨져는 제게 팔을 둘러오는 루이스의 잠든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직 그를 그리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
트리위저드 시합 덕에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연회가 열렸건만, 찾는 사람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잘나신 호그와트의 챔피언님은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고, 망나니 동생녀석은 제 기숙사 녀석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벨져가 파트너로 데려왔던 여자애는 덤스트랭의 멍청이들에게 춤신청을 받아 홀에서 춤을 추는 중이었지만 벨져는 더이상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보여주기 위해 데려온 파트너였고, 두 곡이나 췄으면 충분히 가문의 영광이 될 터였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뒤로 묶고, 무도회 의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벨져 홀든은 열 넷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넘쳐흘렀다. 순수혈통 가운데서도 홀든이라 함은 귀족 중에 귀족이었고, 형제들 가운데서도 벨져는 귀족이란 어때야하는가를 몸소 보여주는 쪽이었다. 우아하고, 고상하고, 품격이 넘치는 귀족. 전쟁을 겪은 후론 머글태생이나 혼혈이라고 하는 잡종들이 많이 섞여들었지만 다른 순수혈통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벨져는 그들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벨져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격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편이었고,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잡종들과 순수혈통은 현격하게 구분되기 마련이었다. 불안을 느끼는 건 그들이 혈통만 믿고 나대는 나약하고 저급한 멍청이들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다. 물론 개중에도 조금은 봐 줄만한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벨져는 계단을 올라 연회장 안을 다시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기껏 옷까지 신경써서 챙겨줬건만 일찌감치 달아난 모양이었다. 벨져는 팔장을 끼고 계단을 내려가다 낄낄거리고 있는 동생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으악! 뭐하는 짓이야, 작은형!"
"루이스는."
"루이스? 우리 영웅님은 안 온댔어. 지금쯤 기숙사에 있거나, 아니면 도서관에 틀어박혀있겠지. 하여간 재미가 없다니까~."
예상대로의 대답에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썼지만 이글은 개의치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뺨도 붉고, 평소보다 더 들뜬 모양새가 한 잔 한 게 분명했다. 고작 열 세살짜리한테 누가 술을 준 건지, 다이무스가 바빠서 신경쓸 틈이 없으니 바로 꾀를 부리는 막내동생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자 갈기는 벌꿀색~."
"흥. 사고 치지 말아라."
"에이, 작은 형도 참. 됐으니까 가 봐."
"거기 너, 이리로."
루이스를 찾는다며 놀리는 대신 순순히 기숙사 문의 암호를 말해주는 게 아무래도 이미 살짝 맛이 간 모양이라 벨져는 주변을 둘러보다 옆 테이블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녀석을 불렀다. 턱을 치켜들고 손가락을 까딱이는 게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벨져는 상급생에게도 하대를 하는 사람이었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기자에게 둘러싸여 이글이 무슨 짓을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뻔했고, 루이스라면 또 모를까 그리핀도르의 다른 멍청이들은 같이 사고를 치면 쳤지 말릴 종자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빌어먹을 자식이 여기 있었으면 이럴 필요도 없지만, 하여간 만악의 근원같으니. 벨져는 한숨을 쉬는 대신 혀를 찼다. 그래도 녀석들과 자주 어울려다니던 후플푸프의 꼬맹이를 붙여두면 집안 망신은 피하겠지 싶었다. 벨져는 벙쪄서 달려온 녀석에게 이글을 잘 지켜보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연회장을 뒤로했다.
그리핀도르 남자기숙사의 뚱뚱보 여인은 예복을 차려입은 벨져를 호들갑으로 맞았다. 그걸 상대하느라 골을 썩이다 겨우 안으로 발을 들이자 캄캄한 어둠이 벨져를 맞았다. 밝은 조명에 익숙해진 눈이 적응을 못 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벽을 짚고 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이 어른거리고, 푸르스름한 달빛을 맞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먼 곳을 향하는 눈동자가, 갸름한 턱선과 목이 벨져의 눈을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스웨터에 면바지 차림이건만 요정 벨라의 피를 이었다는 보바통의 챔피언같은 건 순식간에 지워져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창틀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창밖의 눈을 보는 루이스는 어둠 속에 홀로 빛나고 있었고, 벨져는 그를 보며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제게 향하는 눈동자에 숨을 집어삼켰다.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야, 벌써 돌아왔..., 벨져?"
"하,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시길래 나오지도 않나 했더니. 파트너를 못 구해서 틀어박힌 거냐?"
"그러는 넌?"
별로 달갑지 않은 루이스의 반응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아무래도 그리핀도르의 녀석들이 기숙사 안에 무슨 향이라도 피워놓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녀석을 보고 두근거릴 리가 없거니와, 아름답다고 생각할 리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께서 친히 납셔주셨는데 반가워하지는 못할 망정 떨떠름한 얼굴을 한 루이스가 흘러내린 스웨터의 소매를 올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등을 덮고 있던 스웨터의 소매가 올라가며 드러난 손목에 침을 삼키다 여기까지 온 목적을 떠올리고 눈에 힘을 줬다.
"사람의 호의를 무시한 정의로운 그리핀도르의 영웅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겨우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겨우라니, 네 녀셕! 그게 얼마짜린데!"
벨져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며 빈정거리자 루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순간 열이 뻗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이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두어번 깜박였다. 벽난로의 불빛이 닿는 것도 아니고, 보름인 것도 아닌데 속눈썹이 떨리는 것까지 선명했다.
"오다 주웠다며."
"윽...!"
허를 찔린 벨져가 그대로 움찔했다. 영웅이네, 뭐네 해도 루이스는 성조차 없는 고아였고, 당연히 이런 연회에 입을 좋은 예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안 그래도 트리위저드 시합때문에 바빴고, 이글은 종일 같이 다닌다 해도 그런 데 신경쓸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레번클로의 반장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녀가 챙겨줬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녀 성격에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전남친에게 예복같은 걸 챙겨줄 리 없었다.
더구나 루이스는 무도회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다들 무도회 파트너를 구하느라 바쁠 때도, 여학생들이 각자 드레스를 준비하느라 분주할 때도 다이무스랑 도서관을 향하는 게 고작이었다. 트리위저드 시합이 시작된 이후로 다이무스 홀든이 친동생들보다 그를 더 가까이 두고 자문을 구한다는 건 호그와트 학생은 물론 보바통과 덤스트랭의 학생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후줄근한 꼴로 연회장에 나타난다면 다이무스는 물론 홀든과 호그와트의 위신에까지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제 형은 물론 교수들에 본인까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길 한 번 이겼던 녀석인데, 얼굴도 멀쩡한 녀석이 후줄근한 꼴로 다니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결국 벨져는 자신을 위해서,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 내키진 않지만 따로 주문을 넣었다. 그게 벌써 이주 전의 일이었고, 지난 주엔 벨져 앞으로 도착한 옷상자를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루이스에게 던져주었다. 죽어도 널 위해 준비했으니까 곱게 입고 나오라는 말은 할 순 없었기에 별 걸 다 생각하다 뱉은 말이 오다 주웠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믿다니. 이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멍청한 수준이 아닌가.
말문이 막힌 벨져가 초조해진 나머지 입술을 핥았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꺼내 보지도 않았나?"
"오다 주웠다며."
그걸 믿냐, 이 멍청아!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어떻게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지? 차라리 이글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다못해 이글 녀석이 이런 소리를 하면 한 대 칠 수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상급생이고, 그리핀도르고, 루이스였다. 어느 기숙사가 안 그러겠냐만은 슬리데린이 그리핀도르를 건드려봤자 오랜 앙금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벨져는 가문의 위신과 형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참았다. 참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잡종새끼같으니."
"시비를 걸러 여기까지 온 거라면 돌아가."
"하..., 사람이 기껏 준비해줬으면 고맙단 말은 못 해도 입어는 보는 게 예의 아닌가!"
벨져는 어느새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자식을 상대하고 있으면 느는 건 짜증과 두통밖에 없다. 루이스는 창틀에 앉은 그대로 미간을 찌푸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괘씸하기 짝이 없어 더 성질이 뻗쳤다.
"알았어. 입어보면 될 거 아니야."
"완전 엎드려 절받기가 따로 없군."
"절을 받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빈정 상하게 비비 꼬지 말고."
루이스는 가볍게 창틀에서 뛰어내려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아래에서 일주일 전 건네준 상자를 꺼낸 루이스는 무표정으로 뚜껑을 열었다. 벨져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재질의 예복은 얼마 전 퀴디치 선수복을 새로 맞출 때 잰 사이즈를 어렵사리 얻어내 맞춘 것이었다. 벨져의 안목은 높은 편이었고, 미적 감각도 뛰어났다. 분명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며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상자에서 조심스레 옷을 꺼내든 루이스가 벨져를 흘긋 쳐다봤다.
"문제 있나?"
"...한 둘이 아니어서 어디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흥."
벨져는 자신만만하게 코웃음쳤다. 껄끄러워하는 루이스의 표정에 조금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곤 포기한 듯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었다. 스웨터 안에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까지 벗자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에 등부터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살을 보일 일도, 볼 일도 거의 없는 벨져는 마구 벗어제끼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무미건조하게 옷을 벗는 루이스의 표정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삐쩍 말랐을 줄만 알았는데, 팔뚝이나 옆구리 선이 제법 탄탄하면서도 얄쌍했다.
드레스셔츠를 집어들고 팔을 넣은 뒤 단추도 채우지 않고 소매부터 만지는 루이스의 얼굴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냥 옷을 입는 것 뿐인데, 살짝 내리깐 눈이 묘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벨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아노 건반을 치듯 팔뚝을 토도독 두드리며 누구의 것인지 건너편 침대에 걸터앉자 루이스가 단추를 여미고 바지를 벗었다.
평범한 검은색 브리프에 감싸인 엉덩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벨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셔츠 위로 도드라진 견갑골이, 바지를 입느라 등을 숙이는 바람에 드러난 허리가, 바지를 올려도 여전히 탱탱한 엉덩이가 벨져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은 물론, 아랫배 그 아래에도 피가 쏠리는 바람에 벨져는 다리를 꼬았다. 아무래도 그리핀도르 녀석들이 다른 기숙사 학생들을 골려주려 이상한 향을 피우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벨져가 입가를 매만지는 사이 루이스는 벨트를 채우고 베스트를 걸쳤다. 거기에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테일코트까지.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신은 루이스의 뒷모습은 가히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봐줄만 했다. 제 작품에 흡족해진 벨져가 크게 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넥타이를 매며 뒤돌아섰다. 평소에 짓는 얼빵한 표정 대신 서늘한 무표정이 검은 예복에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불편해. 연회장에 나갈 것도 아니고. 이정도면 성의 표시는 한 거잖아. 아니면 뭐가 더 필요해?"
"멍청한 새끼...."
벨져가 낮게 목소리를 끌자 루이스가 인상을 썼다. 벨져는 그를 마주 노려봤고,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루이스 주제에 자길 내려다보는 것도 영 탐탁지 않았다. 기껏 예쁘게 꾸며줬더니 바로 벗으려 하지 않나,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해도 이건 도리가 아니었다. 벨져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자 루이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싸우고 싶진 않다."
"누가 싸우자고 했나?"
"지금 네가 시비 걸고 있잖아."
"흥, 격이 떨어지는 상대와 싸울 가치도 없다."
"하아.... 그래, 다 봤으면 돌아가."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빈정이 상한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평소같았으면 이쯤에서 제 신경을 박박 긁었을 텐데, 순순히 제 말을 따르는 것도 모자라 피하려 드는 게 영 마음에 걸렸지만 계속 상대하다간 저만 우스워지는 꼴이었다.
"옷은 고마워.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뒤돌아서 나가려 걸음을 옮기는 벨져의 뒤로 루이스의 목소리가 닿았다. 벨져는 멈칫했을 뿐 뒤돌아보지 않았고, 루이스는 더 잡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벨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복도의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자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았다.
쫓기고 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도 멈춰서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뛰었다. 살기위해선 뛰어야 한다. 흰색 방호복의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은 움직임이 둔하고 느리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과 골목을 달리던 소년은 발 아래 자욱하게 깔린 흰 안개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소독약이라고 불리는 가스가 소독약이 아닌 것쯤은 다운타운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른아이 할 거 없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소년은 급히 뒤를 살폈다. 방호복을 입은 청소부들은 다가오고,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코와 입을 가리고 가스가 퍼지고 있는 쪽으로 달렸다. 청소부들이 붙은 이상 추격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가스를 향해 돌진할 거라곤 생각을 못 할 테니 잠시 그들의 눈을 피해있다가 도망치면 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게 깔린 흰 가스는 작은 몸 하나 쯤은 충분히 가려줄 터였다.
가스의 밀도가 가장 높은 쪽으로 달리던 소년은 따가운 눈을 깜박이다 결국 눈을 감았다. 벽에 손을 대고 뛰다 보니 숨이 가빠왔지만 피할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눈을 떴지만 하얀 가스밖에 보이질 않고, 너무 달린 탓에 입에선 단내가 났다.
그래도 맞아죽는 것보단 나을지 몰라. 소년은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입과 코를 가렸지만 가스의 농도가 높은 곳으로 뛰어든 탓인지 벌써 어지러웠다. 하다못해 고백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제게 말을 걸어주곤 했던 여자애를 떠올리며 후회해보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에 아찔한 현기증이 소년을 덮치고, 다리가 무너지면서 작은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밖보다 깨끗한 공기에 숨이 트였다. 공기를 들이마시느라 무방비하게 널부러진 소년 앞으로 사람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도움의 손길인지, 죽음의 사자인지 모를 발소리는 코앞까지 다가와 소년의 배를 찼다.
“큭, 흐억…!”
강한 충격에 구르는 사이 문이 탁 닫히고,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당장 문 하나를 경계로 앞이 분간이 될 정도로 가스의 농도가 옅다. 다운타운엔 이정도까지 가스를 막을 수 있는 기술도 자제도 없다. 소년은 제가 찾아온 곳이 제 무덤이 될 것을 직감했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가스를 들이마신 몸은 뜻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하, 쥐새끼 한 마리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군.”
머리채가 쥐어잡히고, 두피가 당겨지는 고통에 손을 뻗었지만 바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른 소년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흰 방호복을 입은 그의 눈이 새파랬다.
“흐응. 뭐냐 그 눈빛은. 치워라.” “…사람이네.”
소년은 눈을 깜박였다. 방호복을 입은 청소부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였다. 오싹한 레이저가 몸을 훑고, 오염 정도에 따라 제거하거나 소독한다. 어느날 예고도 없이 닥쳐온 재앙은 으레 하는 얘기처럼 전쟁도, 외계인도, 자연재해도 아니었다.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세균은 빠르게 번졌고, 인간은 무력했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그 나름의 생존법을 강구했지만 그것은 전부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소위 청정지역이라 불리는 방호시설을 만들고 거기에 틀어박혔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혹시나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 하나로 연구시설과 청정지역 근처에 판자촌을 구성했다. 청정지역, 연구시설, 판자촌, 그리고 그 변방.
재앙이 닥치고 두 세대가 지난 지금은 사는 지역이 곧 계급이자 신분이었고, 소년이 사는 곳은 변방의 다운타운이었다. 끔찍하다고 일컬어지는 변방, 밑바닥 중의 밑바닥인 다운타운의 거리에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들은 해충이라 불렸다. 해충을 처리하는 데 사람의 손을 쓰는 것조차 아깝다고 선포한 대통령이 청소부를 보내기 시작한 게 삼 년 전. 그 이후로 소년은 방호복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무례하군.” “눈, 되게 예쁘다.”
솔직한 감상에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움찔하더니 팔짱을 꼈다. 두꺼운 옷 때문에 그마저도 힘들어보였지만 어쨌거나.
“흐응. 눈이 있으면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지.”
키나 목소리를 보아하니 제 또래인 것 같아 슬쩍 경계심이 풀어졌다. 잘만 구슬리면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청소부들은 주민등록이 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니 방패로 삼아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기분이 좋아진 건 그가 가늘게 코웃음 치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서 너, 이름은?” “…….”
소년이 대답하려 입을 연 순간 갑자기 짚고 있던 마루가 진동하더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의 바닥이 꺼졌다. 그 짧은 찰나에 눈이 마주치고, 둘은 동시에 손을 뻗었다. 내뻗은 손을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힘주어 잡자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두 사람이 그대로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벨져는 문득 아침에 루이스가 식탁 위에 써놓은 메모를 떠올리곤 식료품점에 들러 우유를 샀다. 처음엔 엿을 먹여줄 생각으로 가사 전반을 맡기긴 했지만 식사까지 맡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말 영문을 모를 일이지만, 영국인들의 손을 거치면 멀쩡한 식재료도 쓰레기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런 얘기는 영국 태생들을 놀릴 때나 쓰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정말 입에 댈만한 음식이 없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영국인이었으므로 벨져는 루이스가 한 음식엔 절대 손을 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차피 혼자 살면서 뭘 해먹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적당히 먹을 만한 걸 사먹고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차려놓은 아침을 같이 먹었는데 의외로 먹어줄 만 했다.
씻고 나왔더니 까치집을 하고선 불 앞에 서있길래 그 노력이 가상해서 한 입 정돈 먹어주려 했다. 물론 당연히 맛이 없을 테니 아침부터 욕해주고 상큼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던 심산이었는데, 벨져는 멀쩡한 아침식사에 감사해야할지 아니면 기껏 준비한 욕이 무용지물이 된 걸 탓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아침식사에 뒤이어 그래도 먹어줄 만한 음식을 내놓을 때면 벨져는 그동안 제가 알던 상식이 잘못된 건가 싶어 곤혹스러워졌다. 샌드위치나 간단한 수프, 샐러드같이 패턴은 단조롭지만 그래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기껏 그 점을 높이 사 식재료비를 부담하겠다고 마음먹은 다음날, 루이스는 늦잠을 자서 벨져를 엿 먹였다. 아침을 먹고 나갈 생각으로 일어났더니 식탁은 비었고, 버터 냄새가 돌아야할 부엌엔 싸한 냉기만 감돌았다.
같이 살다보니 자연스레 생활 패턴 정도는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루이스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이른 아침을 맞는 편인 벨져에게 내내 맞춰주다가 아차 방심한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정도 되는 맨션에 얹혀살면서 그것도 못하랴싶지만 피차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아침 한 끼 얻어먹겠다고 자는 사람을 깨우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나가서 사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쉽고 섭섭한 감정이 쌓이다보니 한 마디 했던 게 소소한 다툼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같이 살면서 지킬 규칙을 쓰고 있었다.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타협점을 찾아서 대화를 해보려는 노력이 가상했기에 벨져는 한 번 져주기로 했다. 집세며 금전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기에 얼마든지 우위에 설 수 있지만, 고작 그런 걸로 쪼잔해지고 싶진 않았다. 절대 휘말린 게 아니다.
벨져는 묘하게 저를 애 다루듯 하는 게 찝찝했지만 펜과 종이를 내밀며 잠시 시간을 갖자는 루이스는 반쯤 체념한 표정과 말투를 떠올리곤 얼굴을 찌푸리는 것밖에 못했다.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맞춰주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얼음쟁이 놈은 자기가 한 발 물러선 주제에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이래서야 꼭 애새끼처럼 투정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벨져는 총 스물 세 개의 요구조건을 적었고, 루이스는 딱 다섯 개를 적었다. 그것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들이라 벨져는 혼자 열심히 고민한 것 같아 머쓱해졌더랬다.
벨져는 벌써 한 달도 더 된 기억을 떠올리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어째 계속 저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상이 싫은 건 아니지만 자꾸만 루이스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기분이라 찝찝했다.
계단을 올라 열쇠도 꺼내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루이스가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이자 같이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벨져는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 시간이면 부엌에 있어야 할 루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 식료품점의 봉투를 내려놓은 벨져는 집안을 한 번 슥 둘러보곤 바로 루이스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않고 문을 열어젖히자 이불 위로 빼꼼 나온 머리카락이 보여 미간을 찌푸렸다.
“야, 어이!”
“으우움….”
루이스는 잠투정을 부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저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이 짜증난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자 그제서야 게슴츠레 눈을 떴는데 눈빛이 몽롱한 게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리곤 배시시 웃는데, 그바람에 손목이 잡히는 것도 뒤늦게 깨닫고, 뿌리치려 했을 땐 이미 저를 끌어당기는 힘에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그대로 침대로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벨져를 끌어당긴 루이스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끌어안고는 씩 웃었다 그리곤 다시 고른 숨을 내쉬는데 영락없는 잠꼬대라 애꿎은 벨져만 휘말린 셈이었다.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사람을 안고 난리인지. 루이스는 말 그대로 벨져를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상체만 애매하게 끌리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발을 딛고 있던 벨져는 따끈따끈한 체온과 폭신한 이불에 고민하다 신발을 벗었다. 아예 발까지 올리고 누우니 그나마 편하긴 했지만 저를 곰인형처럼 끌어안은 루이스가 새근새근 잘도 자는 건 아니꼬웠다. 저를 끌어안고 빙긋 웃던 얼굴에 떠오른 만족감에 자기만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밥하라고 깨우려던 거지만.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냐.”
“…….”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얌전히 기어들어온 자신인 것 같지만, 벨져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루이스는 대답도 않고 눈을 깜박이다 다시 눈을 감아버리는 게 퍽 피곤한 모양이었다. 벨져는 지난 삼 일간 집안일을 팽개친 동거인을 노려봤다. 묘하게 뜨끈뜨끈한 게 또 아프기라도 하나 싶어 손을 이마에 댔다. 멀쩡한 체온에 안심하고 손을 떼려는데 루이스가 고개를 돌리며 벨져의 손바닥에 이마를 부비더니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야.”
“일곱 시 이십분.”
“…미안.”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져가 대번에 인상을 쓰자 루이스가 피식 웃더니 이불을 당기며 바로 누웠다.
“난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챙겨 먹어.”
“흥,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명백한 축객령에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자기가 끌어당겨놓고는 이제 와서 쫓아내는 것까지 하여간 예쁜 구석이 없다. 김이 빠져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라도 갈까 생각하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삐졌어?”
“헛소리 마라.”
“흐아암, 그래도 오자마자 청소하고 스튜 해놨는데.”
벨져가 돌아서서 팔짱을 끼자 루이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도 졸린 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입술만 움직여 씩 웃었다.
“삐졌네.”
“졸려서 정신이 나갔군.”
“안 먹을 거야?”
“먹을 만 하면.”
루이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벨져가 시선을 피하는 걸 놓치지 않고 슬쩍 웃었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본심을 말하기 쑥스럽거나 부끄러울 때 이런 식으로 눈을 피했다. 하여간 누가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자존심은 세가지고.
몸은 무겁고, 자꾸만 눈이 감기지만 벨져를 이대로 혼자 뒀다간 나중에 더 귀찮아질 게 뻔하단 생각에 루이스는 따끈한 이불의 유혹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시큰둥한 무표정을 짓고 있던 벨져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말은 사납게 해도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마저 완벽히 감출 순 없는 법. 더구나 같이 살다보면 이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도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말은 안 해도 기뻐하는 걸 보니 역시 일어나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독야청청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외로움을 타는 건가 싶기도 했다. 개는 싫어할 것 같고, 조만간 어디서 혈통 좋은 고양이라도 구해다 안겨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 뒤치다꺼리도 다 제 몫이 될 것 같아 생각을 그만뒀다.
그래, 사실 지금도 사람 하나 뒤치다꺼리하기 바쁘다. 루이스는 제 옆을 떠나지 않고 툴툴거리는 벨져를 보며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지. 루이스는 벨져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국자를 들었다. 속 편히 한 대만 칠 수 있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삭막한 복도엔 약냄새와 소독용 알콜의 싸한 냄새가 났다. 그리 길지도 않은 복도를 걸을 때면 언제나 숨을 집어삼키게 된다.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어 익숙한 나무문 앞에 서면 언제나 망설이게 된다. 그래도 벨져 홀든은 매일같이 깨어나지 않는 한 남자를 찾아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병실엔 누가 가져다 놓은 꽃향기가 약냄새와 섞여 벨져를 맞았다. 삑, 삑 일정한 간격으로 상태를 알리는 전자음도 베이지 색의 싸구려 벽지도 어제와 같다. 병실 안엔 그 흔한 시계 하나가 없어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안에서 시간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건 야속한 남자의 몸에 양분을 공급하는 수액과 링거액, 그리고 화병의 꽃이 전부였다.
철제 파이프 의자를 대충 발로 끌어다 앉은 벨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의 눈은 애틋한 감정을 담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았다면 연인이라고 생각할 법한 장면이었으나 그를 이렇게 만든 건 벨져 홀든 본인이었다.
살짝 떨리는 속눈썹에 벨져는 손을 거뒀다. 혹시나, 깨어날까 하는 기대에 그를 지켜보았으나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벨져를 괴롭혔다.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본 지 얼마나 지났는지. 벨져는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몸을 관통하던 감각이 선명했다. 피를 토하고, 자신의 품으로 쓰러지며 아스라이 지은 그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여느 때와 같이 차가웠고,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가리고 있던 환각이 겨우 걷혔다.
‘벨져. 벨져 홀든.’
그가 여기 있을 리 없다. 분명 그는 제 뒤에 있었을 터, 지금 제가 꿰뚫은 건 성가신 빛능력자 클론의 심장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지하연합의 영웅쯤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력하게. 정신을 차렸음에도 벨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방심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결정의 루이스는 6년 전 결정검 하나로 저를 꺾었던 능력자였다.
주르륵 쓰러지며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이 제 손을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제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힘없이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벨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충격이 심했다. 쓰러진 루이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티셔츠를 적시는 걸 보고서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그의 몸을 안아들자 루이스가 힘겹게 눈을 뜨고는 피식 웃었다. 벨져는 죽지 말라고 했고, 루이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론 선명한 기억이 없다. 루이스를 데려간 의료진들, 이글이 넘겨주던 검에 말라붙은 핏자국같은 것이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흐릿했다.
안개에 섞여있던 환각물질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벨져는 환각물질 따위에 당했다는 분노보다, 제 검이 향한 게 치명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를 찔렀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벨져는 진심으로 죽이려했고, 환각이 덧씌워진 상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몸이 루이스보다 작았기 때문에 심장을 빗겨나갔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멍청한 새끼.”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으면 한 대 후려갈기기라도 하지, 왜 그걸 고스란히 쳐맞고 심지어는 저 혼자 후련하다는 듯 구는지. 루이스는 단 한 번도 제 뜻대로 움직여준 적이 없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빚을 지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벨져는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에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용서를 빌진 않을 것이다. 따지자면 이건 쌍방과실이고, 그가 제게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사랑한다는 낯 간지러운 말은 꺼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를 연인이라 칭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제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제게 죄책감과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감정만을 남겨놓은 채 왜 그랬는지 답도 주지 않고 가버릴 순 없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조차 없었고, 기다림의 시간은 길기만 했다. 어서 깨어나서 그 붉은 눈동자에 투명한 빛을 담아 자신을 바라봐주었음 했다. 이대로 떠날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잘난 동료들을 두고 훌쩍 가버릴 인물도 아니거나와 그리 약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제 곁으로 돌아와 주었음 했다.
벨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는 건, 이렇게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혹시라도 제가 없는 사이 영영 떠나버릴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잠든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되고, 애틋하고 무거운 감정은 조금씩 그 부피를 늘렸다. 하루에 하나씩 더해, 매일 커져만 가는 감정은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다.
누가 열어놓았는지 창문을 타고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약한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뻗어 넘겨주다 문득 든 생각에 몸을 일으켜 다가갔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루이스의 뺨을 스치고, 벨져는 고개를 숙였다.
맞닿은 입술은 거칠었고 피부에 닿는 숨은 안타까우리만치 미약하게 느껴져 가슴께가 시큰했다. 이 감정에 확신을 주지 않는 남자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