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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Prequel. 02.
- 2015.06.23 Prequel. 01.
- 2015.06.22 Prequel. 00.
- 2015.06.17 호그와트 au
글
Prequel. 07.
07.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순위를 메긴다면 단연 상위권에 오를 사람이 제 집 소파에 앉아 저를 부르고 있었다. 당장 돌아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전화로 하면 될 걸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꽤 일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번 시즌도 넘길 테냐? 너라면 충분히 헬리오스에도 들어올 수 있을 거다. 내가 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형아.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가면 되겠네.”
벨져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이글 놈이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도 알려주지 않으리라. 문을 열기 전까지 기분좋게 돌아온 벨져였다. 오늘은 드디어 루이스가 조커1을 찍은 날이었고, 벨져는 그와 함께 5연승 기록을 세우고 피씨방을 나섰다. 곧 기말고사다 졸업 논문 심사다 뭐다 하는 일로 한동안은 얼굴을 보기 힘들 터였다. 그 전에 조커1을 찍은 게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 혼자 차를 세워두고 근처 바에서 한 잔 하고 오는 길이었다. 애당초 세웠던 계획도 차근차근 잘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최근 벨져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아니 '프로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맵을 읽는 센스, 냉철한 판단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 무엇보다 위기 상황에서 더 그를 빛나게 만드는 침착한 태도. 벨져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자신의 감과 판단을 믿었다. '쉬레'의 플레이도 그랬다. 지금까지 있었던 팀에서 벨져는 종종 오더를 무시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는 곧 자신이 맞다는 증명이었고, 팀원과 오더는 아연실색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벨져는 혼자서 게임을 이끌어나가는데 능숙했다. 최종 목표가 승리라면 탱커나 서포터 한 둘 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서포터와 탱커가 잘 해도, 딜러가 없으면 말짱 헛고생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프로즌'은 저와 정반대라 해도 좋을만한 플레이를 했다. 결과적으로 하는 행동은 똑같지만, 그는 팀을 이끌줄 알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다독이고 끌어들여 유대를 형성하는 면에서. 본인은 아니라고 하고 자각도 없는 것 같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 지켜보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아마 처음 그 날 졌던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할 정도로, 루이스는 팀원을 믿었다.
AOS에서, 그것도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게임에서 믿음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이던가. 벨져는 그런 신뢰와 믿음은 5인 공성을 돌릴 때나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신뢰와 유대는 강력한 무기지만, 때로는 그 마음이 발목을 잡기도 하는 법이었다. 지지난 시즌의 32강, 힐러가 잡혔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는 불나방 플레이를 선보인 멍청이 덕에 신인 Darkness는 결국 본선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일반전에서나 볼 법한 플레이였고, 벨져로선 드물게 그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팀의 빈자리에 영입하려거든 반대할 생각으로 기억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벨져. 그 때 일이 걸려서 이러는 거라면 이번 시즌은 쉬어도 좋다.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해.”
“말을 끊지 마라.”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큰형과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저를 아래에 두고 어르고 훈수하려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릴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성인이 된 지도 꽤 됐다. 벨져는 거리를 가득 메운 불빛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듣기 싫으니 어서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제레온 감독이 승부조작 혐의를 받고 있다. 아직 기사는 안 났다만.”
“뭐?”
“후임 로리아노가 애쓰고 있지만, 가망이 없어 보이더군. 검제로 돌아가긴 힘들 거다. 다음 시즌에 데뷔하는 것도 힘들 테고.”
“…그걸 나한테 굳이 얘기해주는 의도는 뭐야?”
“……공백기가 너무 늘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새로 생겼다 사라지는 팀도 무수히 많지.”
벨져는 무뚝뚝하게 말하는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레온에 대한 진위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오랜 연을 맺어온 프리츠를 버린다는 소리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벨져는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벨져는 검의 형제를 위해 몸 바치다시피 한 제레온을 떠올렸다. 잘 부탁한다며 사무실을 나가던 날까지도 그는 제게 맞는 팀원을 구해주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사람이었다. 입 안이 써 담배가 고팠다.
루이스랑 있는 동안 담배 한 대를 못 태웠던 게 떠올라 벨져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확 추워진 날씨에 여전히 가을이라도 되는 양 옷이 얇았다. 그렇게 다니니 감기를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게 보일러도 좀 틀고 옷도 좀 사고 하라니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 자연스럽게 루이스 생각을 하던 벨져는 불을 붙이고, 니코틴을 들이마셨다. 다이무스는 실내에서 무슨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긴 자신의 집이고, 그는 무단 침입한 불청객이니까. 벨져는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뱉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형아.”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다.”
“하! 그 걱정은 이글 녀석에게나 해주지 그래? 좋아라 할 텐데. 그 자식 이번에 중간고사도 자느라 안 본 거 알아?”
“…하아. 이만 가보겠다.”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
벨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다이무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대로 돌아서 나가던 다이무스가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돌더군.”
“무슨 소문.”
“네가 듀오를 돈다는 것 말이다.”
“…….”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잘 하리라 믿겠다. 그럼 잘 자거라.”
젠장. 벨져는 둔탁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도어락의 잠금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미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어 양손을 허리에 놓고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자나. 벨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응? 벨져? 왜?”
“…….”
“왜, 무슨 일 있어?”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벨져는 헝클었던 머리를 다시 쓸어올렸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소파에 풀썩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데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은 먹었냐.”
“응? 아, 먹었어.”
“거짓말 말고 먹어. 먹고 자.”
“그거 얘기하려고 전화 한 거야?”
“…아니.”
“취했어? 술 마셨어?”
벨져는 피식 웃었다.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슬쩍 눈을 감았다. 그래, 이렇게 착잡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운 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빠르게 마셔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안 취했다.”
“얼른 자.”
“그래. 너도 자라.”
“알았어. 끊는다.”
“…그래.”
벨져는 잠시 잡을까 하다가 대답했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있는 건 아마 졸업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울까 하다가 루이스가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지나가듯 걱정하던 게 떠올라 담배 각을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곧 연락이 올 것이다. 벨져는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제가 구상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상을 현실에 옮기려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나 다른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신경 쓸 일 투성이였지만 루이스가 시험공부를 하고 졸업논문을 쓰는 사이 마냥 그만 기다리기도 뭐했다. 벨져는 잠시 소파에 앉아있다 일어났다. 서재 겸 작업실로 쓰는 방 안 책상 위엔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아무도 알아줄 리 없는 고충에 벨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슬슬 신생팀과 기존 팀은 윈터를 준비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쉬레는 이번 시즌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헬리오스를 비롯한 다른 팀에서도 쉬레를 부르고 있었지만 벨져는 이제 다시 다른 팀에 속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시작. 벨져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새우고 찾아올 계절이야말로 벨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빨리 보여주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했다. 벨져는 나가기 전까지 쓰던 기획서를 펼쳤다. 새 팀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루이스였다. 지금 한창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그. 프로즌은 스스로 자신이 쉬레에게 합당한 상대였음을 증명해야 했다. 커뮤니티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과 손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벨져는 프로즌의 전적을 검색했다. 승률은 63%. 아이스의 랭킹에도 진입한 게 뿌듯해 미소가 지어졌다. 루이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차분한 목소리와 제게 향하는 그 눈빛이 그리워졌다. 벨져는 지난 시간을 더듬어 처음 그를 만난 행사장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창. 해가 쨍쨍하니 내리쬐던 더위도 이제는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의류매장에는 코트와 니트가 걸리고, 거리를 물들인 낙엽도 한 차례 내린 비에 쓸려나갔다.
겨울이 오는 동안 준비할 게 산더미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못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새 사무실과 대신 일을 해줄 사람들, 리그 진출과 영업. 벨져는 키보드를 다그락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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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6.
06.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수차례 거절해도 강의가 끝날 쯤이면 백금색 벤츠가 학교 후문에 서있었다. 제가 사는 동네엔 벤츠가 들어오면 이상하게 볼 거라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걸어다니는 삼십분이 아깝다고 했다. 일단은 고용된 입장이라 군말없이 따르긴 했으나 이글이 놀려대며 은근슬쩍 괜찮냐 물을 때면 루이스는 말없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글은 그럴 줄 알았다며 킬킬거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흥이 나면 벨져 홀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늘어놓곤 했다. 주로 불평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전해듣는 건 확실히 즐거웠다. 연예인들 사생활에 대한 가십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여어, 작은 형~.”
“네가 왜 같이 오냐.”
“나? 쨌지~.”
벨져는 이글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벨져의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넣으며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신발 털고 타!”
루이스는 이글에게 짜증을 내는 벨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벨져는 루이스를 돌아보며 턱을 까딱였다. 조수석에 타 안전벨트를 메고 있으니 벨져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턱 닫으며 운전석에 앉았다. 백미러로 다리를 꼰 채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는 이글을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바로 시동을 걸었다. 매끄럽게 시동이 걸리고, 벨져의 벤츠는 복잡한 학교 앞 도로를 빠져나갔다. 조용하고 편안한 승차감에 감탄하는 것도 고작 사흘, 이제는 벨져도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한 계약관계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루이스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됐고, 벨져와 상의 끝에 강의 시간과 아르바이트 시간을 피해 시간을 조정했다. 벨져는 아예 휴학을 하는 건 어떠냐고 권했지만 어차피 마지막 학기라는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번호나 하나 찍으라더니, 루이스는 어제 통장잔고를 보고 기겁했다. 벨져 홀든의 이름으로 들어온 돈은 루이스의 한 달 생활비가 넘는 금액이었다. 물론 그 홀든이고, 씀씀이가 남다른 건 이글만 봐도 알지만 피씨방비에, 종종 하는 식사나 커피 값까지 포함하면 그것보다 받는 게 더 많은 셈이었다. 연습생들은 숙소비다 뭐다 하는 걸 내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건 명백히 벨져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달간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알바를 줄이고, 제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때 맞춰 잔 결과였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루이스는 벨져가 지켜보는 앞에서 첫 배치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골드3이었지만, 거기에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앞으로 한 달 안에 조커를 찍으라는 말로 짤막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거기에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이글이나 다른 클랜원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벨져가 말한 조커를 찍었다. 줄 땐 야박하게, 뺏어갈 땐 가차 없이 오르고 내리는 RP가 허망하고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수없이 많았다. 학기가 시작하고는 집중을 못 할 것 같다는 것도 한 몫 했다. 막학기고, 들을 강의도 세 개 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기를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라 루이스는 강의를 화수목 삼 일 안에 몰아넣었다. 벨져는 가장 사람이 많이 접속하는 금토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고, 자동적으로 루이스의 근무 시간은 금요일 낮부터 일요일 밤까지가 되었다.
조커를 찍고 나서야 벨져는 루이스에게 파티를 걸어왔다. 그게 지난 주 금요일의 일이었다. 타고난 근딜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빠른 속도에 루이스는 첫 판부터 진땀을 뺐다. 벨져는 루이스에게 아이스를 셀렉하라고 했고, 루이스는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서도 그의 닦달에 못 이겨 아이스를 셀렉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져의 시니컬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동기나 이동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쉴 틈이 없었다. 벨져는 착실하게 우위를 점령했고, 루이스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게임을 이어가는 벨져가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그의 서포트를 하느라 바빴다.
루이스의 아이스는 처음부터 극공을 타는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이스의 궁극기는 분명 '영웅플레이'의 정석을 낳는 스킬이지만, 그만큼 성공시키기 힘들기도 했다. Y축을 잘못 잡으면 꼼짝없이 지붕에 얼음성을 짓는 꼴이라 결정 슬라이드를 타고 휠업을 돌리며 내려가면서도 불안한 궁극기였다. 낙궁의 캔슬도를 따지자면 시니컬도 만만치 않지만, 벨져는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굴었다. 천상계는 천상계라 쉽지는 않았지만, 루이스는 섬광과 같이 움직이는 벨져의 뒤, 혹은 옆에서 그를 위해 콤보를 잇고 다가오는 적을 견제했다.
그럼 그 사이 상황이 정리되기 마련이었다. 안 되면 지는 거고. 다만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쉬레는 확실히 뛰어난 선수지만 그것과 같이 게임을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왜 그의 팀메이트들과 사이가 안 좋은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의 성향이었다. 협력과 공생. 글쎄, 벨져는 이기기 위해서 동맹을 맺는 것은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이루기 어려운 사람같았다.
루이스는 차 안에서 길게 하품을 했다. 첫 주부터 발표 과제가 나오는 바람에 미리 해두느라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졸렸다. 신호등 앞에 멈춘 벨져는 루이스를 흘긋 곁눈질했다. 루이스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했다. 같이 어울려주는 거라 생각하면 피곤하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쁜 게 아니었다. 이만한 꿀알바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마침 초록불이 켜졌고, 벨져는 액셀을 밟으며 쳐다보지 않은 척 정면을 봤다.
“아, 근데 형 그럼 이번 시즌은 쉬는 거야? 요새 갤에 형 얘기 존나 시끄러운데.”
“당분간은 생각 없다.”
“흐응. 그래? 하긴 뭐, 쉬레님은 지금 프로즌을 꼬시느라 바쁘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이글을 바라봤다. 이글은 자기가 뭐 틀린 말을 하기라도 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입가에 지우지 못한 미소와 장난기 가득한 눈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로선 이글이 뭘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게 쉬레와 프로즌에 대한 것임은 확실했다.
“이글.”
“왜. 나 바빠.”
“…됐다.”
“포기해. 저 녀석은 물에 던져놔도 입이랑 손은 둥둥 뜰 거다.”
“손은 왜?”
“그야 트윗을 해야 하니까지.”
이글이 벨져 대신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벨져는 주차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뒤롤 보며 조수석의 의자를 잡았다. 덕분에 드러난 조각같은 턱선과 목선에 루이스는 그에게서 살짝 멀어져 창 쪽으로 몸을 붙였다. 핸들을 돌리는 폼이, 같은 남자가 봐도 정말 멋있었다. 괜히 주차하는 남자한테 여자들이 설렌다는 게 아니라는 걸 루이스는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저도 모르게 두근거릴 정도니 여자들은 어떨까. 루이스는 조심스레 침을 삼켰다. 별 뜻은 없었다. 그저 가을볕이 따가울 정도로 강할 뿐이었다.
“날씨 진짜 좋네. 이런 날 피씨방이 뭐냐, 피씨방이.”
“토를 달 거면 집에 가라, 이글.”
“누가 간대? 그냥 이렇게 날도 좋은데 칙칙한 사내새끼들끼리 피씨방에 쳐박히니까 형들의 청춘이 안타까워서 그렇지~.”
루이스는 이글의 능청에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부터 같이 가자고 조를 땐 언제고 따라나오니 벨져의 신경을 살살 긁으며 장난을 치는 게 역시 형제는 좋구나 싶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벨져와 이글이 투닥거렸다. 벨져는 이글에게 신경질을 내고, 이글은 너스레를 떨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따라 올라오려던 벨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는 게 퍽 귀여웠다. 루이스는 벨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함께 계단을 올랐다.
“넌 왜 저 새끼를 데리고 와서….”
“내가 오라고 한 거 아냐. 자기가 따라왔지.”
“…하아.”
벨져는 진심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지쳐 보여 어깨를 두드려줄까 하다가 손을 내려 문을 열었다. 워낙 까칠한 사람이라 이런 사소한 스킨십에도 기분 나빠할까 조심스러웠다.
“오늘도 아이스 해?”
“네 마음대로 해라.”
“음…. 글쎄, 네 페이스에 맞춰가기 힘들어.”
“흥, 우는 소리 하기는.”
그러면서도 벨져는 루이스의 랜덤에 맞추어 랜덤을 꾸렸다. 빠르게 파고드는 쉬레를 위해 루이스는 기동력이 좋은 서브탱커를 넣었다. 이글이 음료수를 사러 간 사이 아이스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에게 귓말이 왔다. 대뜸 1과 2가 섞인 욕설로 시작하더니, 쉬레를 들먹이며 날선 비난이 채팅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게임을 하다가 욕을 듣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게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욕이라니. 루이스는 가만히 그가 하는 소리를 훑었다. 그딴 식으로 은퇴하게 만들고, 같이 다니는건 뒤라도 대줘서 그런 거냐는 둥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게 아무래도 쉬레의 팬 같았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뭔데.”
벨져는 자기 랜덤을 다 채우고 유리 칸막이 너머 루이스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제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이며 화면을 보던 벨져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차단해. 어차피 만날 일도 없겠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벨져가 욕을 들은 당사자보다 더 기분 나빠해서 오히려 머쓱해진 건 루이스 쪽이었다.
“뭐야, 뭔데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흐응.”
음료수를 건넨 이글이 루이스의 의자를 잡고 화면을 보다 길게 콧소리를 냈다. 콜라 캔을 깐 루이스는 캔을 기울이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쿨럭였다. 이글이 더럽다면서도 휴지를 가져다주고, 벨져가 등을 두드렸다. 사레 들린 거라 등은 두드릴 필요가 없는데, 천천히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잔뜩 인상을 쓴 얼굴과 달리 상냥했다.
“큽, 크흠. 켈록, 됐어.”
“너 진짜 탄산에 사레 잘 들리더라. 그냥 포카리 같은 거 마셔~.”
“아니, 그래도 콜라가 낫지. 근데 벨져, 너….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는 뭐지? 잠깐 있어봐.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벨져는 첫 게임을 하기도 전에 일어났다. 루이스는 별말은 않았지만 핸드폰까지 들고가는 걸 보고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도움을 구하고자 이글을 바라봤으나 이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모른다는 말을 대신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해~. 자기 최애 선수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반인한테 져서 그 충격으로 팀까지 나가면 팬 입장에선 네가 원수지, 원수.”
“…그렇구나.”
“그런 거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마. 너한테 지기 전부터 나오려고 벼르고 있었어. 기레기들이 자꾸 있지도 않은 소릴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해도, 안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벨져는 제게 시작을 말하면서 끝을 냈다. 프로 선수, 그것도 게이머가 다시 복귀를 하는 건 데뷔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아닌가? 그쪽 사정은 잘 모르지만 계약기간도 남았는데 그걸 파기하고 나온 거면 다른 팀에서도 받아주기 힘들 터였다. 아무리 벨져가 '쉬레'라 해도 괜찮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흡연실에서 잔뜩 인상을 쓴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인상을 쓰고 화를 내도 예쁜 얼굴이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걱정도 잠시 잊어버렸던 루이스는 민망해진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루이스는 옆에서 창을 내리고 커뮤니티를 돌고 있는 이글의 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글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요새 분위기는 어떤데?”
“당연히 졸라 나쁘지. 쉬레 없는 검제는 8강도 못 올라갈 거니 뭐니 하고, 쉬레 팬은 어디고 할 거 없이 너 엄청 싫어하고.”
“그 외에는?”
“글쎄, 직접 보는 게 빠를 걸? 링크 줄까?”
“응. 부탁해.”
이글이 핸드폰을 들었다. 루이스는 입술을 매만지며 초조하게 이글을 기다렸다. 그 사이 흡연실 문이 열리고,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 벨져가 돌아와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홀든 사이에 낀 루이스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벨져의 큐를 기다렸다. 벨져가 피우는 담배 냄새도 거슬리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불편했다.
“야.”
“응?”
“아이스 해.”
그 말을 마치자마자 매칭이 됐고, 루이스는 벨져의 말대로 순순히 아이스를 셀렉했다.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이 관계를 제안한 건 벨져지만, 팀을 나와 이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곧 저 하나를 위해 그가 가진 것들을 버렸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먹고 살 길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루이스는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손을 얹었다. 벨져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힘내서 이겨야 했다.
벨져는 제게 건 게 많았다. 그의 기대와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뿐이었다. 프로즌은 쉬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쉬레는 프로즌에게 새 삶의 시작이었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단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루이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가 피운 담배냄새가 공기와 함께 깊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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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5.
원고를 업로드 하다보니 편집점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슴니다만 이렇게 연재를 하다 보니 다음엔 언제 올라올까 하는 기다림과 기대도 받고 있는 것 같네요
읽는 시간은 짧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05.
벨져는 팀을 나왔다. 제레온이 딸 크리스티네 때문에 감독을 그만두고, 반년을 더 있으며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으니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대표는 붙잡으려 했지만 애초에 벨져는 이 팀이 아니라도 오라 하는 곳은 많았다. 아쉬울 건 없었다. 멤버간의 유대라는 것도 없다.
벨져가 팀에 있었던 건 단 하나, 제레온에 대한 의무와 책임 때문이었다. 제레온 프리츠가 없어도 검의 형제 기사단은 건재하다. 라는 걸 보여줬으니 충분했다. 지난 스프링의 우승, 섬머의 준결승 진출. 세간에서는 쉬레가 자꾸 이상한 데로 나돌아서 그렇다는 소리가 무성했지만 벨져는 여느 때처럼 개의치 않았다. 유명인에겐 언제나 구설수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대표는 계약금을 올려주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았네 어쩌네 하며 붙잡았지만 벨져 홀든은 다른 선수들처럼 돈에 매여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깟 위자료, 내고 말지. 관련 서류는 홀든의 변호사 쪽으로 보내라고 하니 허옇게 질리는 대표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그러게 제레온을 잡으라고 할 때 잡을 것이지. 제레온을 퇴출시킨 그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벨져는 벙찐 그를 매몰차게 뒤로 하고 연습실에 뒀던 짐만 챙겨 나왔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비롯해, 상자 하나짜리 짐을 싸서 뒷자석에 대충 던져놓은 벨져는 핸들을 피아노 치듯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루이스 녀석한테나 갈까. 오늘은 수요일이니 일찍 끝날 텐데. 대표가 끈질기게 붙잡는 바람에 공연히 시간을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퇴근 시간에 맞출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벨져가 루이스에게 간다고 전화를 하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데 전화가 왔다. 루이스였다.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없는 녀석이. 벨져는 드물게 놀라 잠시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의 액정을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묘하게 떨렸다.
“여보세요.”
'어, 난데. 지금 통화 괜찮아?'
“괜찮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좀 보자.'
“뭐?”
'안 되면 말고.'
먼저 전화를 하더니, 만나자는 말까지. 벨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상황이 반갑고 기쁜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루이스가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닌데,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벨져는 전화를 끊을 것 같은 눈치에 냉큼 대답했다.
“아니, 된다.”
'그럼 서점 앞 카페에서 보자.어딘지 알지?'
“곧 가지.”
전화는 그걸로 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일까. 벨져는 초조해진 나머지 입술을 매만지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꿨다. 그의 서점까지 가는 길은 이제 네비게이션 없이도 갈 수 있었다. 다만 전에 없는 상황에 왠지 모를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제발 그만 좀 오라며 짜증을 내고 화를 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벨져는 신호등 앞에 멈춰서 있을만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당장 데뷔라도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벨져는 제가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별 볼일 없는 팀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 제가 없는 리그에서 그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스러져간다면. 그대로 밑바닥에 다시 처박힌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애매하게 퇴근 시간대에 걸린 나머지 다 와서 길이 막혔다. 혹시 벌써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건 아니겠지. 이글 녀석에게 뭐 들은 얘기가 없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이글은 아직도 자고 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져는 차를 세워두고 빠른 걸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자리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2층으로 올라가니 창문을 열어놓은 창가 자리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창밖을 보고 있는 루이스. 그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른 벨져는 머리와 옷을 정리하며 다가가 그의 앞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메리카노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였으나 유리컵에는 물방울이 잔뜩 맺혀있었다.
“뭐냐, 할 얘기라는 거.”
“……. 이제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
묘한 침묵.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는데 루이스가 선수를 쳤다.
“플레인 요거트에 얼음 반만 넣어서 갈아주세요.”
“…….”
그건 또 언제 알았는지, 대신 주문을 하는 루이스를 보며 벨져는 팔짱을 꼈다. 물론 여기서 먹을 만한 건 그것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걸 알고 있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라 벨져는 몸을 카우치의 등받이에 기대고 양손 깎지를 껴 배 위에 놓았다.
“뭘, 정리하자는 거지.”
“한 달. 그쯤 했으면 됐잖아? 진짜 원하는 걸 말해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주문까지 가로채 사람을 물리나 했더니, 꽉 찬 돌직구가 날아와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오는 동안 가정한 최악의 수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걸 물어본다는 건 정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벨져는 잠시 루이스와 눈을 맞추다 눈을 감았다 뜨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나는 네가 프로로 데뷔를 해서, 네 가치를 입증하길 바란다. 이 쉬레를 꺾은 게 그냥 찌끄레기 듣보가 아니라, 아이스를 영웅으로 만드는 선수라는 걸 보여줬으면 해. 됐나?”
이건 그 때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한 달 동안 그를 지켜보며, 가끔 짬을 내 접속한 그와 함께 게임을 하며 느낀 것이었다. 그냥 이대로 썩히기엔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신에게 도움을 바래본 적은 없지만 루이스와 만난 것은 신이 정해준 운명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함께 게임을 하는 게 즐거웠다.
장마도 불볕더위도 사그라든 계절, 긴 여름해의 끝 무렵에 불어오는 바람이 벨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들어오는 햇빛에 루이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물방울이 잔뜩 맺힌 아메리카노 잔을 가볍게 쥐고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널 위해서?”
“…그래. 날 위해서.”
벨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를 거짓 유혹으로 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거에 휘둘릴 위인도 아니거니와, 그렇게까지 제 자존심을 팔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나 말고도 잘 하는 선수는 많아.”
“하지만 그들은 '프로즌'이 아니지.”
“…그래, 그렇다 치자. 네 자존심을 채우고 나에게 남는 건 뭐야?”
“돈? 명예? 인기? 부족한 게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줄 수 있어.”
루이스는 그 오만하고 자신이 넘치는 말에 피식 웃었다. 눈을 내리깔고,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다 축축해진 손을 뗐다.
“미안하지만 홀든.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
“…왜지?”
벨져는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존심? 한 달 동안 지켜본 그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눈앞의 기회를 걷어차버리는 멍청한 사람이었던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벨져는 루이스라는 사람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지? 평생 이렇게 궁핍하게 사는 거?”
“…….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한 번도?”
“한 번도.”
벨져는 덤덤한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꿈도, 희망도 가져본 적 없다니. 그는 고작 저보다 한 살이 많을 뿐이었다. 다른 환경에서였다면 어땠을까. 벨져는 주먹을 쥐고 침묵했다. 이해할 수도, 쉽게 지레짐작할 수도 없다. 한 달은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한 사람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가 벨져를 향했다. 벨져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 바로 앉았다. 프로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를 향해 승부수를 던졌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도, 완벽한 계획도 아니었지만 벨져는 예전부터 하던 생각이 있었다. 안 되면 되게 하는 것 역시 능력이었다.
“앞으로 세 달.너는 네가 바라는 걸 생각해보고, 나는 네가 내게 걸맞는 상대인지 확인해보겠다. 시간과 형편이 여유롭지 않다면 내가 널 고용하지. 시간도, 봉급도 네가 정해라. 대신 진지하게 해.”
“연습 상대가 되라고?”
“아니.”
“그럼.”
“…그걸 알아보려는 거다.”
벨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 감각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루이스를 놓고 싶지 않았다. 지금 놓아버리면 다신 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약이라고 하는 걸 써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다. 어떠한 '관계'. 벨져는 루이스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싶었다. 함께 승리의 기쁨을 공유하고,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캐릭터를 분석하며 메타를 짜올리는. 팀메이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너무 복잡하고, 왠지 자존심이 상해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말로 내뱉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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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4.
04.
날이 조금씩 더워지면서 학교 앞 호프집에 손님이 늘었다. 기숙사 살 때가 좋았는데. 혼자 사는 게 좋기도 하지만 집세에 다음 학기 생활비며 면접비, 졸업용 자격증 비용을 생각하면 알바를 늘려도 힘이 들었다. 4년 장학금을 받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중간에 학업을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잠시 심부름을 하러 마트에 다녀온 루이스는 기름 앞에 선 사장님에게 파와 양파가 든 비닐봉지를 건넸다. 사장님은 말도 거칠고, 사람대하는 것도 서툴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었다. 새로 사는 바람에 필요 없어졌다고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노트북을 거저로 주기도 하고, 시험기간이며 과제철이면 손님도 없는데 일찍 접자며 삼사십 분씩 일찍 들여보내주기도 했다.
그와 눈인사를 하고 주방을 나온 루이스는 허리에 두르는 검은색 앞치마를 다시 입었다. 끈을 앞으로 돌려 매려는데 드르륵,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울리는 부저 소리에 루이스는 매장 안으로 가볍게 뛰어가 주문을 받았다.
“사장님! 간장이랑 양념 반반이요!”
루이스는 주문서를 뽑아 렌지후드에 붙여놓고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잔 두 개를 가져다 생맥주를 따랐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품과 맥주의 비율에 속으로 한 번 뿌듯해하고, 뻥튀기를 접시에 담아 한 번에 들었다. 균형을 잡아 빠른 걸음으로 손님 테이블에 배달한 후에야 루이스는 핸드폰을 꺼냈다.
[야, 우리 형이 너 존나 찾어.]
[한번만 도와줘라 진짜 끈질기다니깐?]
너도 끈질기다 이 자식아. 루이스는 이글의 카톡을 읽고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안 왔네. 루이스는 뻥튀기를 퍼 담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한 얼굴을 떠올렸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쉬레는 다시 한 번 붙어보자며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알아내 찾아왔더랬다. 그날은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하기야 누가 쉬레를 일하다 볼 줄 알았겠냐마는. 덕분에 루이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귀찮은 짐이 하나 늘고 말았다.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오후 알바 장소인 서점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그냥 한 번 져주고 끝내려고도 해봤고, 방해가 되니 찾아오지 말라고 화도 내봤다. 하지만 그는 제 사정 따위 알 게 뭐냐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애초에 게임은 가끔 기분 전환 겸 애들이랑 놀 때나 하는 게 전부라 이기고 지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쉬레는 일부러 지려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대번에 무효라며 봐줄 생각 말고 제대로 하라고 눈을 번뜩였다. 그때처럼 멱살을 잡거나 길길이 날뛰진 않았지만, 무섭기로 치면 멱살을 잡히는 쪽이 차라리 나았다. 옆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이 말려주지 않았더라면 사단이 났을 지도 몰랐다. 덕분에 루이스는 일주일을 더 시달려야 했다.
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 예쁘장한 얼굴 뒤에 그에 못지않게 더럽고 사나운 성질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아니 아예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었고, 덕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쪽은 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이글의 형 아니랄까봐 끈질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쯤 했으면 충분하련만 벨져는 끈질기게 함께 공성할 것을 권했다. 말이 권하는 거지 눈빛으로는 안하면 어떻게 할 기세였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피곤하고 귀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그런 말은 제게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한테 하는 편이 백배는 더 건설적일 텐데. 문제는 그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자꾸만 넘어가는 자신이었다.
게임을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더, 루이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제게 큰 의미를 두는 건지도 모르겠고, 잘한다는 얘기는 적잖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게임만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에겐 그런 것보다 당장 모레 내야할 전기세와, 다음달에 내야 할 수도세 같은 게 더 중요했다.
당장 다음 달이면 개강인데 쉴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둬야 했다. 졸업 요건을 채워뒀다곤 해도 자격증이네 면접이네 하면 돈 나갈 일이 잔뜩이었다. 당장 제대로 된 정장 한 벌도 없는데. 영라인 정장도 위아래로 한 벌 맞추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글이 한 시즌 우승이면 두 학기 등록금이야 껌값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도, 다 철이 없어 하는 소리로 들렸다. 공연히 헛된 꿈과 희망을 좇기에 루이스에겐 당장의 현실이 더 급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한 달 용돈으로 백화점 명품매장 쇼핑을 다니는 그와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이제는 짜증이 난다거나 화가 나기보다는 비참했다. 학습된 경험은 쉬이 떨쳐버릴 수 없다.
센치해지려는 찰나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루이스는 냉큼 홀로 나가 주문을 받았다. 여름이라 사람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이 일을 한 지도 꽤 되다 보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금토일 주말만 아니면 그럭저럭 할 만 했다. 감당이 안 되는 진상은 사장님이 알아서 처리해주시기도 하고. 루이스는 주문을 받아 포스기에 입력하고 풀린 앞치마 끈을 앞쪽으로 꽉 동여맸다.
그래도 월요일이라 그런가 벌써 아홉시가 되어가는 데도 테이블이 반쯤 비어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주방을 흘긋 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어젯밤 퇴근하고 나서 새벽에 게임을 했더니 잠이 부족했다. 최근엔 확실히 잠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하루가 고단한 일정에, 쉬레의 장단에 맞춰주느라 잠을 줄이다보니 더 피곤했다.
하루 중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점에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학기 초였으면 바빠서 몇 번이나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 실수를 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없는 게 방학 중의 대학 서점이지만, 그렇다고 서점에 들여오는 책을 정리하고 검수하는 일은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주문을 마친 손님에게 뻥튀기 서빙을 마치고 멍을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있던 커플이 소란해지더니 여자가 물을 남자한테 뿌리고 나가버렸다. 가게 안 손님들과 루이스의 시선 역시 물벼락을 맞은 남자에게 쏠렸다. 그는 잠시 앉아있다가, 이내 여자를 따라 나가버렸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루이스는 냉큼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들어간 마지막 주문은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 보였지만 그래도 양념을 입히기 전에 이 상황을 알렸다. 마침 앉아있던 두 테이블이 계산을 하면서 홀이 비었다.
루이스는 영수증을 전출함에 넣어놓고 핸드폰의 홀드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마감시간이라 바닥에 떨어진 물을 닦고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누가 턱 등을 세게 두드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튀어나갈 뻔 했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험악한 인상의 사장님은 기름 앞에서 열기를 쐬느라 벌게진 얼굴로 루이스의 등을 두드렸다.
“그거 해놓고 문 닫아라. 닭도 남았는데 오랜만에 술 한 잔 하자. 거, 얼굴도 좀 피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가끔 있는 일이었다. 레이튼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루이스는 아픈 등을 쓰다듬으며 허리를 폈다. 한산한 거리를 한 번 슥 내다보고, 앞에 백금색 벤츠가 있는지 확인한 루이스는 매장 문을 닫고 바깥 조명을 껐다. 아무리 그라도 이 시간에 나타나진 않으리라. 보고 싶은 것도 아닌데 자꾸 앞에 나타나니 이젠 없으면 조금 서운했다. 사람 마음만큼 이기적인 게 없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가져다 매장을 닦고, 다시 빨아서 걸고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오니 레이튼이 치킨 한 소쿠리와 2000짜리 용기에 맥주를 가득 담아놓고 루이스를 맞았다. 하루 일과의 끝 치고는 후한 대접이라, 루이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 앉았다.
“참, 그놈은 안 왔나? 그 허여멀겋게 생겨서 예쁘장하니 고상한 척 하는 놈.”
“푸하하. 네, 오늘은 없네요.”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쉬레, 아니 벨져가 희고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레이튼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이글 홀든의 형이라니.”
“그 형제들이 닮은 거라곤 머리카락뿐일 걸요.”
“그런 것도 같다만.”
전에 이글이 스타이거 교수와 한바탕 소란을 피운 곳도 바로 여기였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잠시 전화번호를 가르쳐줄 때까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 출석 도장을 찍던 벨져를 떠올렸다. 알려주면 안 올 줄 알았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서점으로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와 하는 공성이 싫은 건 아니었다. 프로답게 벨져는 게임을 잘 했고, 의견 충돌도 잦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 거냐.”
“아무 일도 없는데요.”
“흥, 거짓말은. 어디 그런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치킨이나 뜯고 있을 놈이냐? 척 봐도 너 때문에 오는 건데.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조심스러워지는 말투에 루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벨져가 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벨져가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고 섬세한 데다 까탈스럽긴 하지만 결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지. 사실 그와 제 관계는 딱히 이렇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했다. 스카우터라기에 벨져는 안정적인 수입이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았고, 친구라기엔 소원했으며, 그냥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 하기에도 뭔가 모자랐다.
“그냥 같이 게임하자고 하는 것 뿐이에요.”
“그것뿐이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겠지.”
“...대회를 나가자는데, 아시잖아요.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는 거.”
루이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입안이 씁쓸한 이유였지만 레이튼은 턱을 만지며 그 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다 되물었다.
“잘하냐?”
“글쎄요.”
“그 녀석은.”
“걘 프로구요. 꽤 유명해요. 우승도 몇 번 하고, MVP도 몇 번 받고.”
레이튼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크게 숨을 뱉었다.
“그런 녀석이 같이 하자는 건 너한테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팡, 아플 정도로 센 손바닥이 등짝을 두드렸다.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아픈 등에 손을 얹었다. 순간의 고통이 가신 후에도 얼얼한 게 아무래도 티셔츠를 까보면 레이튼의 그 거북이 등딱지 같은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실수할 수도 있지! 해보지도 않고 벌써 겁부터 먹는 거냐? 사내자식이. 잘 하는 게 있는 지도 모르고 사는 녀석들이 태반인 세상이다. 루이스. 기회가 앞에 왔는데 겁부터 먹고 뒷걸음질 칠 테냐?”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쉬레도 그렇게 말했다. 도망치지 말라고. 왜 기회를 앞에 두고 안전한 길만 가려 하느냐고. 그 말에 루이스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기회에 걸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 위험을 생각하면, 그 다음을 생각하면 지금 있는 자리라도 놓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섭다고들 하지만, 백을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과 하나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은 다르다. 그 무게가 너무나 달라서 어떻게 이해를 시킬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시선을 피하며 숨을 집어삼켰다.
“루이스. 나는 말이다, 네가 더 크게 될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손님들이 놀라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던 레이튼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워낙이 괴팍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굉장히 상냥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틀렸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루이스는 대학이 매 년 쏟아내는 엘리트들과는 다를 거란 말이지. 알겠냐?”
서툰 위로와 격려에 담긴 건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루이스는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역시,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루이스는 레이튼이 포스기 정산을 확인하는 사이 마저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했다. 괴팍한 사장님의 변덕 덕에 호프집 일렉버스트의 영업시간은 들쭉날쭉했다. 루이스는 대걸레까지 빨아 걸어놓고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홀로 나왔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또 비가 쏟아졌다. 매장 안에는 에어컨이 추울 정도로 돌아가고 있지만 루이스의 마음 에는 창밖에 내리는 것 같은 장대비가 내리며 지독한 습기를 채웠다. 루이스는 금세 지치고 우울해지는 이 계절이 싫었다. 앞으로 이주면 창밖의 비가 그치겠지만 제 마음 속의 비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다들 제가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라는데, 그게 저한테만 안 보이나 봐요. 루이스는 문 앞까지 나와 우산을 챙겨주는 레이튼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담은 한숨은 우산을 두드리는 거센 빗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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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재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야심한 시간이라 배달부일 리도 없다. 루이스는 창밖을 슬쩍 내다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도어스코프조차 없는 작고 허름한 집이라 확인을 하려면 문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티엔?"
검은색 일색의 남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놀란 루이스의 얼굴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급하게 달려드는 입맞춤에 루이스는 뒤로 넘어질 뻔했으나 저를 강하게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덕에 넘어지는 대신 벽에 등이 부딪혔다. 충격에 입술이 열리고, 그의 혀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안쪽으로 도망치려는 루이스를 낚아챘다. 안쪽 여린 곳을 건드리며 희롱하고, 혀를 감아올리는 사이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열린 입술을 타고 흘렀다. 뇌가 녹진하게 녹는 것 같은 기분에 루이스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다리가 풀려 볼썽사납게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 잠시의 딴 생각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 입천장을 건드리며 입술을 부비고 한 손으로 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이라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티셔츠 위로 허리를 더듬던 손이 그 안쪽으로 파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장갑을 낀 손이 예민한 옆구리를 쓸고, 더듬었다. 루이스는 그의 단단한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각도를 바꿔 더 깊이 들어오는 티엔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숨이 모자랐다.
"후우, 하아. 티엔."
"보고 싶었다."
"연락이라도 하, 읍....으응...."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맞추는 연인때문에 루이스의 불만은 농밀한 키스에 묻히고 말았다. 성급하게 갈증나 죽겠다는 듯 몰아치던 첫 키스와 달리 조금은 배려가 섞여있어 간간히 숨을 쉬었다. 코가 부딪히고, 살짝 눈을 뜨면 떨리는 긴 속눈썹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타오르는 욕망가 이질적인, 진지하기 그지없는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아찔했다.
"집중해."
"하아, 티엔."
루이스는 눈썹에 힘을 주고 다시 입을 맞추려는 티엔의 뺨을 감싸고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뽀뽀에 티엔이 다시 얼굴을 가까이했으나 루이스는 아직 호흡을 고르기도 바빴다. 한밤중 갑자기 찾아온 연인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안 오기로 했잖아요."
"......."
티엔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몸을 더 바싹 붙였다. 배를 맞댄 채 그와 벽 사이에 눌린 루이스는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고 입술을 맞췄다. 천천히, 그를 달래듯 입술을 부비며 숨을 주고 받고, 조심스레 혀를 내밀어 희롱하듯 스치고 감으며 타오르듯 붙은 욕망을 애정이 담긴 흥분으로 바꾸어나갔다. 한 달 만에 보는 연인이었다. 루이스라고 반갑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감감무소식인 그를 떠올리며 오늘처럼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린 밤을 셀 수 없었다.
"하아, 루이스."
"나도, 보고 싶었어요."
루이스는 작게 속삭였다. 들을 사람이라곤 눈앞의 남자밖에 없건만, 비밀의 언어를 속삭이듯 은밀했다. 티엔의 눈에 참기 힘든 듯 욕망의 불길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일이라곤 없을 것 같은 그 눈동자가 정욕에 휩싸여 저를 갈망하는 그 오싹한 감각에 루이스는 먼저 입을 맞췄다. 고개를 돌려, 서로의 밑바닥까지 들춰내 가지려는 듯한 흥분에 키스는 점점 거칠어졌다. 루이스는 몇 번이나 벽에 떠밀려 머리를 찧었지만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거친 키스에 흥분했다. 이불 속에서 따뜻해진 몸은 그보다 더한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루이스는 제 허리를 더듬는 티엔의 손목을 잡고 그의 장갑을 벗겨냈다.
"티엔, 하아, 읏...."
뺨을 어루만지다 뒷목을 잡고 키스하던 티엔이 입술을 떼더니 루이스를 번쩍 안아들었다. 같은 남자지만, 티엔의 탄탄한 몸에 루이스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잘 다져진 근육은 물론이고, 웬만한 여자 부럽지 않은 가슴까지. 그의 팔 안에 안긴 루이스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저를 번쩍 들어올리는 그의 힘과 체력에 감탄하면서도 남자로서 약간의 비참함을 느꼈다. 체계적으로 운동을 해서 만든 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근육이 있는 몸인데, 그것도 티엔의 앞에선 그저 초라해질 뿐이었다.
"읏."
"루이스...."
매트리스 위에 던져진 루이스는 제 위에서 검은 코트를 벗으며 저를 애정과 욕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그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넥타이를 잡아 당겨 몇 번째인지 모를 키스를 하며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 사이 티엔의 손은 루이스의 티셔츠를 가슴 위까지 말아올리고 벨트 버클을 풀었다.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흥분을 고조시켰다. 이 다음에 이어질 행위에 대한 기대감으로 아랫도리에 열이 쏠렸다.
"후, 티엔.... 당신 또...."
혀뿌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진한 키스에 루이스는 고개를 뒤로 빼 감았던 눈을 떴다. 풀어 헤친 셔츠 아래 배를 감은 붕대가 바로 루이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티엔은 급하게 넥타이를 풀어 던지며 인상을 찌푸린 루이스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별 거 아니다."
"별 거 아니긴, 아직 다 낫지도 않은 거 아니에요?"
"괜찮다. 루이스,"
루이스는 입을 맞추려는 티엔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힘으로는 당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 관계의 주도권은 루이스에게 있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다 터졌잖아요. 됐어요."
"루이스! 널 만나려고 일을 마치자마자 온 거다."
티엔이 루이스의 팔을 잡으며 급하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있는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루이스는 어정쩡하게 제 허리 위에 무릎으로 앉아있는 티엔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걸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티엔이 루이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 다가왔지만 루이스는 다시 그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그리고 반대로 그를 눕히며 다리를 모아 일어났다. 루이스는 이미 잔뜩 불거진 티엔의 앞섶을 어루만지며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입으로 해줄 테니까, 다 나으면 해요."
아쉽기는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기대한 만큼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아픈 사람에게 무리를 시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눈밑에 진 다크서클과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숨도 못돌린 채 저를 만나러 온 게 분명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같은 남자의 걸 입에 넣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티엔의 것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이스는 입을 벙긋거리는 티엔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손바닥 아래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것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브리프를 내렸다. 갑갑하게 조이던 천에서 밖으로 나온 그의 성기는 탱탱하게 고개를 쳐들고 잔뜩 불거진 핏줄이 채 불뚝거렸다. 잘 빠진 모양에, 흠잡을데 없는 굵기와 크기에 루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게 제 뒤를 뚫고 들어와 쑤셔댄 거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며 구멍이 움찔했다.
"루이스, 나는...흐읏...!"
호기롭게 말한 것과 달리 막상 보니 입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루이스는 손으로 튼실한 기둥을 쓰다듬으며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틀거리는 그의 성기를 바라보다, 티엔이 일어나며 멈추려하는 것에 마음이 급해져 눈을 딱 감고 입 안에 넣었다. 루이스를 말리려 몸을 반쯤 일으켰던 티엔은 성기를 감싸는 따뜻하고 습한 점막의 감촉에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손에 힘을 주면 아파할까봐 움켜쥐지도 못하고, 성기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쾌감에 딱 죽을 맛이었다.
입 안에 티엔의 성기를 품은 루이스는 천천히 코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무성한 음모와 복근,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는 티엔의 표정에 덩달아 흥분한 루이스는 용기를 내 혀를 움직여 귀두의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핥았다. 눈을 찡그리며 쾌감을 참으려는 티엔의 얼굴이, 지나치게 섹시했다. 루이스는 옴폭 패인 곳을 혀끝으로 콕콕 누르고 그 위를 핥았다. 말랑말랑하고 미끈한 감촉이 생경했지만 티엔이 낮게 내뱉는 흥분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루이스는 작정하고 티엔을 기분좋게 해주기 위해 과감하게 혀를 움직였다. 어설프지만, 야동에서 흔히들 하는 것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빨다가 귀두 아래를 핥고 머금고 있던 것을 뺐다. 입으로 숨을 쉬다가, 그의 것을 잡고 기둥에 불거진 핏줄을 혀로 핥으며 옆에서 이 대신 입술로 물고 빨았다. 조금씩 새어나오는 티엔의 숨소리와 신음이 야했다.
"하아, 티엔.... 기분 좋아요?"
"으음, 하, 후우.... 그래."
"다행이다...."
루이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엉덩이를 위로 치켜들고, 티엔의 고간에 얼굴을 묻은 채 큰 아이스크림을 빨아먹듯 입을 벌려 그의 성기를 입안에 담았다. 다 들어갈 것 같진 않지만, 조금 더 안쪽에 넣어보면 그의 귀두가 입천장을 지나 목 안쪽에 닿았다.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하지? 루이스는 이를 세우지 않게 조심하며 그의 것을 빨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움직였다. 위아래로 빨아당기며 얇은 피부의 막이 제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외설스러워 루이스의 성기에도 열이 쏠렸다.
"흐읏, 하, 루이스...!"
"웅, 하아...."
루이스는 스스로 하듯 티엔의 기둥을 감싸고 위아래로 당기며 귀두를 핥았다. 손이 빨라지면서 제 어깨를 잡은 티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가 아팠지만 그보다는 그의 성기를 애무해주는 게 더 우선이었다. 루이스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침대를 짚던 손으로 그의 고환을 주물렀다. 한번 더 빨아주기 위해 입을 벌리는데, 티엔이 어깨를 세게 움켜쥐더니 얼굴에 뜨끈한 액체가 뿌려졌다.
"크흣, 하아...."
한 박자 늦게,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후에는 이미 티엔의 정액이 끈적하게 루이스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적시고 있었다.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성기가 두 차례 더 끊어 사정하고, 루이스는 속눈썹에 진하게 붙은 정액에 눈을 감았다. 다시 뜨려했으나 뜨끈하고 진한 정액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비릿한 냄새가 역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흥분되는 게, 아무래도 저도 많이 쌓여있었던 것 같았다.
"읏, 티엔...."
"하아.... 미안하다...."
루이스는 손등으로 뺨에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정액을 닦았다. 입술에 붙은 것을 슬쩍 혀로 핥자 미끈하고 끈적거리는 비릿함이 느껴져 슬쩍 인상을 쓰며 눈을 부비고 있으니 티엔의 크고 따스한 손이 다가와 눈을 쓸어주었다.
"한 달이나 못 했으니까..., 그래서 그렇다."
묻지도 않았건만 티엔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평소보다 사정이 빠른 걸 말하는지, 아니면 참지 못하고 사정해버린 것을 말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쌓여서 진한 정액을 말하는지 몰라도 겨우 그런 걸로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게 퍽 귀여웠다. 루이스가 피식 웃자 티엔은 안절부절 못하며 침대 아래 떨어진 정장재킷의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루이스는 잠시 생각하다 그의 손목을 잡았다.
"티엔."
티엔은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루이스를 바라봤다. 루이스는 그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빼 대충 얼굴을 문대 닦아 던지고, 그의 가슴 위에 양손을 올려 밀어 눕혔다. 무슨 남자 가슴 촉감이 이렇게 좋담. 루이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 하고 싶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루이스는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키려는 티엔의 위에서 체중을 이용해 그의 가슴을 눌렀다. 티엔이 무슨 짓이냐는 듯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손으로 바지와 팬티를 벗고 티엔의 허리 위에 올라탔다. 티엔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 굳은 얼굴을 하고 루이스의 손목을 잡았다. 루이스는 슬쩍 엉덩이를 움직여 한 발을 빼고도 우뚝 서있는 그의 것에 골을 비볐다. 단번에 티엔의 표정이 바뀌었다.
"...루이스."
"당신, 다쳤잖아요."
"이게 더 괴롭다. 차라리 내가 움직이는 게 낫겠군."
"누워있으라니까요."
루이스가 짜증을 내자 티엔이 입을 다물었다. 루이스는 제 것을 탄탄한 티엔의 배에 부비다가, 침대 옆 협탁에서 젤을 꺼내 제 손에 죽 짰다. 티엔은 그거라도 제가 해주겠다고 했지만 루이스는 티엔이 자주 그러는 것처럼 입술로 그의 말을 막아버렸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게 저를 휘두르던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귀엽게 구는 것도 좋았다. 루이스는 지금 우위를 점한 기분이 어떤 것인지 톡톡히 느끼는 중이었다.
손가락을 타고 흐를 정도로 녹은 젤을 뒤로 가져가 한 달 동안 쓰지 않아 꽉 다물린 구멍에 치대듯 바르고,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밀어넣었다. 하나 정도는 괜찮은 것도 같아서, 안쪽에 젤을 꼼꼼히 바른 후 하나를 더 넣었다. 두 개는 빠듯한 것 같아 빼고 싶었지만 티엔이 그런 것처럼 루이스도 마음이 급했다.
"읏...."
"루이스, 억지 부리지 마라."
"흐으, 할 수 있다니까요."
루이스는 은근슬쩍 엉덩이를 잡아 당기는 티엔의 손에 발끈해 두 개도 버거운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상처 없이 저 큰 것도 삼키던 곳이었다. 루이스는 슬쩍 세번째 손가락을 빼고 두 개로 구멍에 젤을 바르고 입구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늘 그가 해주던 거라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안을 휘젓고 안과 밖을 드나들던 감각을 기억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루이스, 제발...."
티엔은 이제 애원하다시피 하며 루이스의 가슴과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췄다. 예쁘게 도드라진 유두가 눈에 어른거려 입에 물자 루이스는 가슴 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에 아래에 힘을 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열심히 풀던 구멍이 손가락을 조이며 다시 움츠러든 게 원망스러워 그를 흘겨봤으나 티엔은 눈까지 감고 루이스의 가슴에 집중하고 있었다. 약하고 예민한, 그가 끈질기게 괴롭혀 개발된 유두가 그의 혀에 빙글빙글 돌려지고, 빨리는 바람에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끄트머리를 살짝 깨무는 바람에 루이스는 깨문 입술 사이로 약한 신음을 냈다. 티엔은 양손으로 루이스의 엉덩이를 잡아 터트릴 것처럼 주물렀다. 그 바람에 손가락을 머금은 구멍이 양쪽으로 벌어지고, 빈 틈 사이로 공기가 들어왔다.
"응, 읏...! 티엔...!"
"후우, 그러게 내가 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루이스는 울상을 짓다가 벌름거리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전보다 수월하게 손가락을 받아들인 구멍은 이제 젤에 질꺽거리는 야한 물소리를 내고, 그 안쪽은 손가락보다 더 길고 큰 것으로 꽉 채우는 것을 기대라도 하듯 뜨거워졌다. 티엔이 꼬집고 비트는 유두가 찌릿찌릿했다. 잔뜩 괴롭혀지면서 느끼는 쾌감이 오랜만이라 더 힘들었다.
"그리고, 후으. 오늘따라 네가 더 천박하게 구니까, 읏. 더 참기 힘들다...."
천박하게 군다는 말에 루이스는 허리를 움직여 그의 성기와 제 것을 비볐다. 두 기둥이 부딪혀 비벼지다 퉁 튕겨나갔다. 두 성기는 앞에서 투명한 액을 흘리며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확실히 제가 생각하기에도 외설스러운 광경이었다. 거기에 흥분하는 자신은, 그의 말대로 야하기 짝이 없었다.
"으응, 하지만 이게 다.... 당신이.... 후우...."
"그래. 응, 후. 루이스, 넣고 싶다.... 넣게 해다오."
"응, 하아. 원해요, 티엔."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였다. 안쪽까지 깊게 찌르고 거칠게 박아줬으면 좋겠다. 이미 안쪽과 입구가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가끔 하는 것처럼, 엎드린 채로 뒤로 짐승처럼 박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연인이 너무 오랜만이었고, 또 티엔의 배에 감긴 붕대가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이라 얼굴을 보고 살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등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질색을 하며 싫어했을 체위를 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당신은 움직이지 말아요."
루이스는 티엔의 가슴에 다시 양손을 올렸다. 티엔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잡아다 제 엉덩이에 놓았다.
"만지는 건, 허락해 줄테니까...."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한 손으로 구멍을 벌리고 한 손으로 티엔의 성기를 잡아 뒤에 맞췄다. 제대로 입구를 찾아 뭉툭한 귀두를 반쯤 넣고, 루이스는 아랫입술을 앙물었다. 천천히 허리를 내리자 안으로 파고드는 부피와 질량감에 얼마 가지 못해 한숨을 토하며 멈춰섰다. 티엔의 손은 루이스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티엔의 것을 삼킨 구멍이 벌렸다 다물렸다.
"크흐.... 루이스...."
"....후우, 잠시만요....잠깐만...."
이도저도 못하고, 루이스는 땀을 흘리며 티엔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처음 부드럽게 들어오던 것과 달리 굵은 것이 입구를 벌리는 게 너무 아팠다. 제대로 풀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자세가 달라서 그런가.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게 뻔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접합부를 더듬었다. 젤이 잔뜩 발려있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콘돔을 씌우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후우, 티엔.... 으읏...!"
"하아, 루이스...!"
루이스는 마음을 크게 먹고 단숨에 허리를 내렸다. 안을 깊게 찌르며 뚫는 성기에 고개가 젖혀졌다. 눈물을 흘리며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루이스를 달래기 위해 티엔은 몸을 일으켜 가슴돌기를 핥고, 그의 가늘고 예쁜 목덜미에 짧은 버드키스를 하며 루이스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등을 쓰다듬었다.
"흐으, 하아...."
"크흐, 루이스.... 숨을 쉬어라."
"윽.... 흐윽.... 티엔......."
잔뜩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가에 입을 맞춘 티엔은 제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묻는 연인의 목덜미와 어깨, 귀에 입술을 맞췄다. 왜 그러게 시키지도 않은 짓을 사서 했는지. 물론 그게 다 저를 위해서지만, 더는 지켜보고 있기 힘들었다. 티엔은 정말 많이 참았고,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애교도 이정도면 충분했다.
"루이스, 사랑한다."
티엔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잠시 기다리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진정이 되었는지,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고, 입술이 맞닿는 건 금방이었다. 키스가 오래 이어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티엔...."
루이스는 연인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아픈 건 둘째치고서라도 그도 남자였다. 아무리 체격이나 힘이 딸린다고 해도, 물러설 수 없는 게 있는 법이었다. 루이스는 티엔의 어깨를 잡고 무릎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래로 죽 딸려나가는 감각이 낯설었지만 이미 안쪽까지 들어와있었던 거라 생각하면 못할 것 같지도 않아 엉덩이를 아래로 내렸다.
"크흣, 루이스...."
"하아, 하, 으읏...."
루이스가 허리를 들썩이면서 위아래로 움직이자 그를 눕히려던 티엔은 예상치못한 적극적인 행위에 이를 악물었다. 제 어깨를 꽉 잡고 고통을 참으며 허덕이는 루이스의 얼굴이 야했다. 티엔은 루이스의 골반을 잡았다. 제 위에 올라탄 루이스는 허리를 돌리며 다시 위아래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직접 움직이는 것만큼 만족스럽진 않지만 제 성기를 꽉꽉 물며 조이는 내벽은 익숙한 것이었다. 뜨겁고 제 것을 맛있게 오물거리는 구멍에 티엔도 허리를 움직여 안을 두드렸다. 지금도 깊이 들어가있긴 하지만 그가 느끼는 곳은 조금 더 안쪽, 거칠고 깊숙하게 박아야 닿는 곳이었다.
루이스는 스스로 움직이며 좋은곳을 찌르고 문질렀다. 티엔이 움직일 때처럼 머릿속이 날아가는 것같은 쾌감은 없어도, 야릇하고 간질거리는 기분좋은 감각에 루이스는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욱신거리며 간질거리는 곳은 닿지를 않았다. 그 때, 티엔이 루이스의 골반을 꽉 잡고 위로 쳐올렸다.
"하으응...!"
"후우, 하, 듣기 좋구나. 더, 들려다오."
티엔은 파들파들 떠는 루이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잇자국을 낸 뒤 씩 웃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곳을 노리고 반복해 허리를 움직여 쳐올리자 이내 배에 뜨끈한 정액이 뿌려졌다. 티엔의 추삽질에 사정한 루이스는 목에 팔을 감으며 발가락을 움츠렸다. 오물오물, 제 것을 맛있게 삼키고도 더 달라 조르는 야한 몸이 예뻐 티엔은 루이스를 침대에 눕혔다.
엉덩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제 것을 보는 것도, 제 위에서 위아래로 흔들리며 요분질을 하는 루이스도 절경이었지만, 역시 이게 더 좋았다. 티엔은 루이스의 무릎 안쪽을 잡아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루이스는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뻗다가 눈을 가렸다. 그래봤자 귀엽기만 할 뿐이라 티엔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손을 잡아 떼내고 잔뜩 젖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췄다. 루이스는 입을 삐죽였지만 허리를 움직여 안을 치대자 바로 그 예쁜 입술에서 신음이 터졌다.
"으응, 아, 하읏, 티엔, 조금 천천ㅎ...!"
"후우, 루이스. 보고 싶었다."
"아흥, 아, 크흣, 거기...!"
티엔은 루이스의 다리를 잡은 채 마음껏 허리를 움직였다. 시트를 움켜쥔 루이스의 흰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지만 티엔은 울먹임에 발음이 뭉게지는 연인의 울음소리에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 커녕, 제 허리에 다리를 감아 조이며 쾌감을 조르는 루이스의 안을 휘젓고 두드리는 속도를 붙였다. 아까 그의 펠라치오로 한 번 사정했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티엔은 루이스의 안쪽을 마구 찌르다 루이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정했다. 안에 퍼지는 뜨거운 점액의 감각에 한 번 사정했던 루이스는 몸을 잘게 떨었다.
"흐으, 아...."
"하아, 루이스...."
루이스의 머리를 끌어안고 사정의 여운에 잠시 호흡을 고르던 티엔은 눈물로 범벅이 된 루이스의 눈가를 엄지로 쓸다 입을 맞추고 핥았다. 짠 맛이 났지만 눈물이 방울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곧 붉은 눈동자가 저를 향하는 게 예뻐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췄다.
"하아, 후우.... 티엔.... 크흠."
신음을 내지르느라 갈라진 목소리가 동했지만 티엔은 지친 연인을 배려해 그의 옆에 누워 다리를 루이스의 다리 위에 얹었다. 아직 숨쉬기 바쁜 루이스를 품에 안자 땀에 범벅이 된 두 사람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티엔은 루이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베개를 그의 머리에 받쳐주었다. 루이스가 베개 반쪽을 내밀어 한 베개에 머리를 누인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륵 눈을 휘었다.
"상처는 좀 어때요."
"괜찮다."
"......알겠어요.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호랑이 한 마리를 잡다가 스친 것 뿐이다. 상처는 깊지 않아."
루이스는 호랑이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티엔이 바로 주름진 미간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금세 풀긴 했지만, 상상도 못한 이유였다. 루이스가 표정을 풀지 않자 티엔은 눈을 피했다. 걱정도 걱정이지만, 혼날까 변명을 찾는 게 귀엽기도 하고 일이 끝나자마자 날아온 노력이 가상하기도 해 루이스는 이번 한 번만 봐주기로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심해서 다녀요."
"알겠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분고분 하는 말에 수긍하는 연인의 눈동자에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꿈벅이자 티엔이 등을 토닥이며 떨어진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었다. 기분 좋은 체온에 루이스는 티엔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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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3.
03.
“어이.”
“네, 고객님. 치한 및 스토커 신고는 국번 없이 112입니다.”
루이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산대 안쪽의 종이봉투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방학의 대학 서점은 한가하기 그지없었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저를 찾아올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정말 이럴 거냐?”
“그 말 그대로 돌려주면 되겠어?”
“프로즌.”
“시간 없다니까.”
질리지도 않는지 벌써 일주일째 출석 도장을 찍고 있는 쉬레에게 루이스는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명백한 거절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게임할 시간이 없는 것 뿐이다. 어김없이 당장 화보를 찍으러 가도 될 것 같은 차림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선글라스는 대체 몇 개나 있는지, 오늘은 짙은 갈색의 선글라스였다.
“고작 30분 내주는 게 그렇게 힘든가?”
“하아. 힘드니까 이러고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먼저 반말을 찍찍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말을 낮춘 게 엊그제였다. 쉬레는 호칭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저만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거기다 자꾸 보다보면 정이라도 들 거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미운 정을 붙이려는 건지 어느 쪽인지 몰라도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밥이라도 사겠다고,”
“체할 거 뻔한 상대랑 밥 먹는 취미는 없어서.”
“너,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쯤 했으면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일주일째 반복된 논리에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바 아니고, 그쪽이 굽히고 들어오는 거에 황송해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루이스는 그의 팬이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애초에 와서 꼬셔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저 쉬레의 일방적인 요구일 뿐이었다.
“어제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왜 그쪽 사정에 맞춰줘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돈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주지.”
“부탁하는 태도도 글러먹었고.”
쉬레는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있었다. 너무 뻔뻔하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굴어서 넘어갈 뻔도 했지만, 어쨌거나 루이스는 그의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만 생각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쉬레가 괘씸해하거나 말거나 제가 알 바 아니었다.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데.”
“적어도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진 않았으면 좋겠어.”
“흐응. 난 어디까지나 책을 사러 온 거니 그건 됐고.”
루이스는 영혼 없이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대충 아무거나 추천해보래서 법학과 전공 서적을 넘겨주면 거들떠도 안 보고 카드부터 내미는 놈이 책을 사러 오긴 무슨.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루이스는 이글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쉬레가 혼자서 찾아왔을 리도 없으니 백퍼센트 그녀석 짓이었다. 생각해보면 거기 간 것도 이글 때문인데, 거기에 신상까지 털어줬으니 만악의 근원인 셈이었다.
“그래도 쉬는 날은 있을 거 아니야. 그때도 그렇고.”
“아쉽게도, 내 쉬는 날은 어제였는데. 앞으로 이주간 없을 예정이고.”
“뭐?”
능글맞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쉬레가 짜증을 내다 혀를 차며 돌아섰다. 이 정도면 적당히 엿을 먹여준 기분이라 좀 후련하긴 했지만, 쉬레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루이스를 마주했다.
“…낮이 안 되면 밤도 괜찮다.”
“난 잠도 자지 말라고?”
“네 녀석 때문에 나는…!”
쉬레는 뭔가를 말하려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랫입술을 물며 입가를 엄지로 매만지는 게 꽤 선정적이었지만 그도 자신로 남자였다. 차라리 작업을 걸었으면 걸었지, 이건 뭐 어린애가 놀아달라 떼 쓰는 것도 아니고.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쪽이 내 사정 생각을 안 해주는데 내가 그쪽 사정 생각해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
“난 그쪽 팬도 아니고 아쉬울 것도 없어. 지금 자기가 일주일째 억지만 쓰고 있다는 걸 좀 알 때도 되지 않아?”
쉬레가 무섭도록 시린 눈으로 루이스를 응시했다. 그렇게 본다고 겁을 먹는 것도 아니건만. 루이스는 계산대를 톡톡 두드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이글보다 더 다루기 힘든 것 같았다.
“저기, 쉬레.”
쉬레는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도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깔보이는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루이스는 잠시 그를 마주보다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시간 나면 연락할 테니까 그만 와.”
이게 루이스가 할 수 있는 타협의 끝이었다. 사실 이글이 알려준 거면 이미 다 털렸겠지만, 그래도 그와 제가 직접 번호를 주고받는 건 의미가 달랐다. 어쨌거나 쉬레는 지금까지 제게 연락을 한 적이 없었고, 루이스가 아는 거라곤 쉬레가 이글의 형이라는 것 뿐이었다. 쉬레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찍었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루이스가 연락처를 저장하려는데 쉬레가 이름 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벨져. 벨져 홀든이다.”
“…루이스.”
그가 불쑥 나타난지 일주일만에 하는 통성명이었다. 루이스는 번호를 저장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쉬레가 핸드폰을 꺼내는 걸 보고 끊자 쉬레는 화면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화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저장을 안 하는 걸 봐선 이미 알고 저장해둔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글 홀든. 루이스는 그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고는 눈앞의 상대를 마주했다.
“이제 됐지?”
“일주일, 딱 일주일 기다려주도록 하지.”
“그거 참 무서운걸.”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이러다 집까지 찾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어째 좀 불안했지만 쉬레는 오늘의 수확에 만족했는지 쿨하게 등을 돌려 나갔다. 루이스는 계산대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괘고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쉬레는 루이스를 한 번 돌아보고, 녹음이 우거진 교정을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등이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했다.
벌써 미운정이라도 들었나. 루이스는 벨져가 올 때 켰던 에어컨을 끄고 가디건을 집어들었다. 밖에 있다 온 사람에겐 시원할지 몰라도, 하루 종일 있는 사람한테는 제법 쌀쌀한 온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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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2.
분량 조절에 실패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도통 감이 안와서 그냥 다 올리기로.....ㅇㅅㅠ
02.
0:33. 딱 33초를 남기고 끝난 게임은 벨져 팀의 스트리머가 본진에서 빠져나가 몰테를 가는 것으로 끝났다. 이글의 아이스를 처리하고 리스폰기어에 올라가있던 벨져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스트리머를 제외한 넷이 전부 올라오는 바람에 HQ가 빠르게 깎이던 중이었는데, 간발의 차로 저쪽 HQ가 먼저 터졌다. 벨져는 게임창이 넘어가기 전에 v를 눌렀다.
그리고 바로 옆에 둔 핸드폰을 들어 이글에게 전화를 걸었다. 되도 않는 사기를 친 거라면 받지도 않겠지. 벨져는 반쯤 포기하고 태연해지려 애썼다. 하지만 벨져의 손은 초조를 감추지 못하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기계식 키보드의 자판이 다그락거리며 푸르게 빛났다. 그 소리는 이글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다 멈췄다.
“어, 형. 이야~. 아주 그냥 프로즌이라니까 득달같이 달려들대? 어휴 정말.”
“프로즌은.”
“와, 동생보다 프로즌이 더 좋냐? 누가 보면 아주 그냥 반한 줄 알겠어~.”
“그냥 해본 말이면 끊겠다.”
“급하긴.”
괜히 딴청을 부리는 바람에 애가 탔다. 줄 거면 빨리 주고, 아니면 말지 놀아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글 녀석이라면 지금 들어가있는 클랜도 최대규모고, 거기엔 각종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많은데다 이글 본인도 마당발이니 충분히 프로즌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 것 치고 열흘만에 얘기를 꺼내는 게 괘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실마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놓치기엔 제 마음이 풀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가 그냥 어줍잖은 아이스 나부랭이라는 걸 입증해 제가 그냥 진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시니컬로 아이스의 평타에 졌으니까.
역시, 그날 전화번호 정도는 따놨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초조하게 이글을 기다렸다.
“프로즌. 본명은 루이스. 아, 고아라 성은 없어. 나이는 스물넷. 이정도면 되겠어? 어때 무료봉사가 후하지?”
“이글.”
“와나, 진짜. 이것만 해도 어디야. 여기까지 알아내는 게 쉬운 줄 알어? 참내, 작은형이나 큰형이나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다니깐.”
벨져는 되려 성을 내며 투덜거리는 동생의 목소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답 망나니 새끼. 그냥 욕을 한 바가지 해줄까 하다가 벨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럼 그렇지. 순순히 알려준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글 녀석이 조건도 없이 술술 부는 걸 봐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뱉고 있는 중이었다. 벨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왜 이런 녀석이 동생인 걸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을까, 말까. 벨져는 무심코 손을 뻗다 망설였다. 이걸 받으면 또 겨우 이런 거에 낚이냐며 비웃어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거부를 해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 뭔가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속는 셈 치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장난하지 마라.”
“아! 장난 아니야! 형이 조또 찌질하게 구니까 그렇지!”
“뭐?”
벨져는 대번에 인상을 굳히며 되물었다. 이글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럼 필요 없다는 거지? 끊는다~.”
“이글 홀든!”
마음이 급한데 자꾸 간을 보는 이글이 짜증나 벨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막내놈은 사람 속을 긁는데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덴 좀처럼 휘둘리지 않는 벨져도 이글에게만큼은 이렇게 휘둘리곤 했다. 동생만 아니었으면 확 그냥. 쓸데없이 이글의 페이스에 휩쓸리고 만 벨져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지금 아쉬운 건 제 쪽이었다. 망할 동생놈도 그걸 알고 이러는 거지만.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이글. 그리고 원하는 게 있으면 빨리 말해. 괜히 재지 말고.”
“흐응…, 형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주 잘 알겠는걸? 재미없긴. 흥이 식었어. 모처럼 아는 사람이라 도와주려 했더니 우리 작은형은 별로 아쉽지가 않은가봐.”
이 짜증나는 새끼. 아주 그냥 가지고 노는 구만. 벨져는 부득 이를 갈았다. 평생 남의 비위같은걸 맞춰본 적이 없는 벨져였다. 뜨거워진 핸드폰을 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벨져는 참았다. 적어도 자신은 이런 애새끼에게 놀아날 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것보다 나은 존재다. 벨져. 네가 상대하고 있는 건 나이만 쳐먹은 애새끼다. 벨져는 마음을 다스리며 에어컨을 켰다. 바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깊숙이 들이마시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건가?”
“안 미안한 목소린데?”
“……. 하아. 미안하구나, 이글. 진심으로.”
씹어뱉는 가식으로, 벨져는 굴욕을 감내했다. 겨우 프로즌 그 새끼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망설여졌지만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이글이 숨넘어가라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치와 굴욕에 죽고 싶어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프로즌 망할 새끼. 벨져는 아득 이를 물었다. 이글 녀석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에 짜증과 불쾌지수가 더해져 팬이 조공으로 보내준 부채를 들어 얼굴에 부치기 시작했다.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닌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야, 아… 대박. 눈물 났어. 천하의 작은 형이 사과라니, 큭. 큭큭. 이거 녹음했어야 하는 건데. 에이.”
“그랬으면 네가 오래 살아있지 못하겠지. 무덤에 새길 유언은 정했니, 동생아?”
“와, 지금 친동생을 죽이겠다는 거야? 너무하네. 어머니가 들으면 펑펑 울다 실려가시겠어.”
“그리고 아버지와 형은 축배를 들겠지.”
바라 마지않는 전개에 이글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이 녀석의 유전자는 어디서 나온 걸까. 같은 부모님 아래 자란 형제지만 벨져는 도무지 이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봐주는 거라면 또 모를까, 녀석이 우위에서 저를 농락하는 이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하하하, 그거 말 되네. 여튼, 형이 넘 안쓰러워서 그래. 그러다 스토킹으로 수사라도 받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알려주는 거니까 내 성의와 친절을 생각해서라도 직접 해결해. 돈이나 사람 쓰지 말고.”
“흥, 애초에 남의 손 따위 빌릴 생각도 없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그야 잘난 벨져 홀든이시지. 아이스 평타에 발린.”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하려는 찰나 띵 하고 우편이 왔다. 이글에게서 온 우편을 열자 열한자리 숫자와 주소가 있어 바로 프린트스크린 키를 눌렀다. 주소가 어째 좀 낯이 익은 것도 같지만, 이게 프로즌의 연락처와 주소고 이글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두어 번 더 캡쳐를 한 벨져는 문득 드는 의문에 입을 열었다.
“이글.”
“왜, 고마워? 고마워 죽겠지? 알아~. 넣어둬!”
“넌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는 거냐.”
질문에 답이 돌아오는 대신, 적막이 이어졌다. 곰곰히 생각할 것도 없다. 이글의 행동과 말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화감이 있었다. 첫째로, 이렇게 순순히 프로즌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을 리 없다. 둘째, 이글 홀든이 하다못해 물 한 잔을 가져오라 시켜도 보상을 요구하는 녀석이 아무것도 요구조건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이글은 어떻게 프로즌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아는가. 이글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께름칙한 기분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 다 아는 수가 있지이~. 어어 나 전화 온다. 끊을게. 뿅!”
긴 침묵 끝에 그걸 끝으로 전화는 끊겨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자 바로 수신이 거부됐다. 누가 봐도 서둘러 도망간 모양새였지만 원하는 걸 얻어낸 벨져는 더 아쉬울 게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는 여전히 의뭉스럽지만, 그거야 언제 한 번 녀석이 좋아하는 클럽에 데려가 술을 좀 먹이고 기분 좋을 때 물어보거나 아니면 술값을 내달라며 아쉬운 소리를 할 때 캐물으면 그만이었다.
* * *
오전부터 시작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근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맛없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어젯밤 알아낸 주소의 건물을 주시하는 벨져에게 전화가 왔다. 액정에 뜨는 발신인은 이글.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러나 의심부터 들었지만 딱히 못 받을 것도 아니었다. 벨져는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 전화를 연결했다. 막 일어난 동생 놈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흘러들었다.
“어, 형. 뭐야, 꼭두새벽부터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야, 형한테 스토커의 기질이 있는 줄은 몰랐네.”
“닥쳐라, 이글.”
“에헤이. 또 그런다 또. 이제 좀 은인으로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땡볕에서 하염없이 기다릴까봐 좀 도와주려했더니. 안되겠구만?”
다짜고짜 속을 벅벅 긁어대는 통에 벨져는 잠시 이걸 끊을까 말까 고민했다. 어차피 기다리면 만나게 될 텐데. 여기서 뭘 더 하겠다는 것인가. 탐탁지 않았지만 기다림에 지친 것은 사실이었기에 벨져는 전화를 끊는 대신 이글이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뭘 원하는데?”
“그 사거리에 보면 바이크 세워둔 호프집 있거든? 거기서 간장 파닭! 지금이 여덟시니까 여덟시 반에 봅시다. 오케이?”
“…하아.”
“그럼 이따 봐~. 아, 먼저 가있어.”
그럼 그렇지. 중요한 건 쏙 빼놓고 알려준 동생이 짜증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일부러 애를 태운 게다. 특별히 알려주긴 무슨. 벨져는 혀를 찼다. 그리로 오라는 건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먹던 샌드위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치우고 일어났다. 대체 프로즌 하나에 얼마의 시간과 신경을 쏟는 건지. 이쯤 되니 슬슬 이 짓거리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한여름의 대학가 호프집은 붐비는 시간답게 사람들이 가득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벨져는 탐탁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주인이 90년대 하드락, 혹은 바이크 덕후라도 되는 듯 안의 인테리어가 요란했다. 주황색 조명이 전부인 어두운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낄 필요는 없었지만 벨져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멋도 멋이거니와 유명한 선수인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벨져는 구석진 안쪽 자리로 향했다. 홀에 돌아다니는 종업원 두 명은 벨져를 보지 못했는지 메뉴판을 주러 오지도 않았다. 부르려 해도 서빙벨도 없고, 맥주를 나르랴 주문을 받으랴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다리기만 하는군. 그렇게 생각하니 퍽 자존심이 상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이글 녀석의 요구사항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행여라도 진한 기름 냄새가 옷에 밸까 한숨을 내쉬는데 주방 쪽에서 그를 향해 종업원이 다가왔다.
“주문은 이따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그 목소리. 그리고 어둑한 실내에서도 눈에 띄는 머리카락. 벨져는 돌아선 종업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시끄러운 음악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잡은 손목을 힘주어 당기자 그가 꼭 그때처럼 휘청이며 이끌려왔다. 저를 향해 돌아선 멀건 얼굴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다, 그 붉은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데자부같이 익숙한 감각이었다. 벨져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찾았다.”
더이상 그를 찾아 헤맬 필요는 없었다. 벨져의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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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1.
[ Prequel ]
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3년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1.
그 일로부터 열흘. 딱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어처구니 없는 기사도 돌았고, 커뮤니티엔 쉬레에 대한 옹호와 비판과 욕설이 마구 뒤섞인 채 그들끼리 치고 받기를 반복했다. 그동안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런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봤자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들이 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벨져 홀든의 관심은 프로즌이라는 세글자와 그 멀끔한 얼굴의 남자에게 쏠려있었다. 찾아서, 이 수모를 갚아야 한다.
검색을 해본 결과 프로즌은 실제하는 유저였다. 어느 게임, 서버에나 하나 쯤은 있을 법한 고루한 닉네임이지만 프로즌이라는 이름은 그의 그 서늘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꽤 닮아있었다. 프로즌이 그에게 어울리는건지 그가 프로즌에 어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계정이 그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프로즌. 공식전을 돌지 않는지 랭킹조차 뜨지 않는 언랭의 유저.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커뮤니티 창을 켰다. 여전히 회색으로 뜨는 그 세글자에 괜히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일방적으로 친구 추가를 하고, 언제 접속할까 어플까지 깔았건만 프로즌은 열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급수를 보면 그래도 꽤 오래한 것 같은데. 벨져는 회색 글씨를 보며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팀으로는 진 적이 있어도, '쉬레'에게는 이게 첫 패배였다. 벨져는 누가 뭐래도 1:1의 강자였다. 누구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근접전에서 만큼은 뛰어나다 자부했다. 그런 그에게 언랭의 일반인, 그것도 시니컬을 들고 아이스에게 졌다는 게 벨져에겐 충격이었다. 첫 패배와, 전국적 망신과 프로즌. 벨져는 제가 진 이유를 복기하기 위해 끊임 없이 연구했다. 그렇게 지고 한 사나흘은 보이는 족족 아이스만 잡아댔다.
하지만 수차례 1:1을 해도, 상위권의 아이스 유저들과 붙어도 아이스는 그때처럼 벨져를 위협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명백하게 쉬레가 프로즌에게 졌다는 뜻이었다. 시니컬로 아이스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프로즌의 아이스는 겨우 30대 레벨에, 앞선 한타로 체력이 반토막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1셔라곤 해도 풀피였던 제 시니컬을 이겼다. 벨져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명백한 실책이었고,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벨져는 그로부터 삼일은 잔소리꾼을 피해 핸드폰도 꺼놓았다. 이글 녀석은 그러게 한 번 큰 코 다칠 줄 알았다며 귓이며 우편으로 놀려대고 끝이었지만. 짜증은 나도 차라리 그 쪽이 나았다.
벨져는 애꿎은 세팅창의 아이템을 정리하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서늘한 눈빛과, 멀건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여름인데도 겨울을 떠오르게 하는 녀석이었다. 벨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양껏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가도 가슴에 맺힌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삐릭, 접속 알림 사운드에 벨져는 반사적으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벨져는 이글의 클랜 이동 알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 귓속말이 왔다. 녀석의 파티 초대 테러에 초대 거부 설정을 해놓은 이후로 늘상 있는 일이었다. 오라는 프로즌은 안 오고. 벨져는 이글을 만나기 전에 빠르게 큐를 눌렀다. 방학 중이고, 경기도 끝난 지라 사람이 꽤 있으니 이글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글 녀석은 클랜원들과 인사니 뭐니 하느라 못해도 오분은 늦게 들어올 것이다. 벨져는 빠르게 시니컬을 가져갔다. 그래봤자 상위 랭크의 매칭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그게 지루하다고 쓰레기같은 일반전에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문득문득 손이 F7로 가는 것은 거기서 프로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알바하느라 자주 못 들어온다곤 했지만 다른 아이디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마주치는 랭커들 사이에 숨어있는 건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 막연히 기다리는 것 뿐인데, 그것도 열흘이 넘어가니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이게 전부, 프로즌 때문이다. 벨져는 창밖의 야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 화면이 전환되며 흐르는 배경음악에 적팀 조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익숙한 닉네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메이헨(아이스) : 오! 뭐야, 평타에 발린 쉬레자나?]
일반 채팅으로 도발하는 동생 녀석에 벨져는 왼쪽 중앙 3립으로 향했다. 도발에도 수준이 있지, 저따위 싸구려에 넘어갈 리 없었다. 아직 한참 멀은 동생을 친히 가르쳐주기 위해 벨져는 골목 안개지역에 숨어 애용하는 디티 인사이드를 깔았다. 아니나 다를까, 쭐레쭐레 슬라이드를 깔고 3립을 먹기 위해 이글의 아이스가 나타났다. 아이스 하나 잡는데는 궁극기도 필요 없다. 벨져는 가볍게 원콤보로 이글을 전광판으로 보내버렸다.
[메이헨(아이스) : 아 형! 귀여운 동생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쉬레(시니컬) :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메이헨(아이스) : 내가 없는 소리한 것도 아닌데 왜그랰ㅋㅋㅋㅋ]
벨져는 이글을 차단하고 타워를 치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한타가 벌어졌으나 벨져는 초반에 이글 녀석을 처리했으므로 노마크 상태에서 레벨링을 하기 위해 합류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앙 타워를 끼고 4:4를 하면 그게 그거였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 이상 비등비등하게 타워를 긁다 서로 레벨링을 하기 위해 옆 타워로 이동할 터였다. 벨져는 이글의 리스폰이 끝나는 걸 보고 혼자서 반피를 만든 타워를 두고 뒤로 빠졌다. 아이스의 빠른 기동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쯤이 딱 시니컬의 궁극기로 한타를 걸어보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적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알고 있는 것과 그걸 막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중앙타워와 사이드 타워 옆 통로의 안개지역. 벨져는 거기에 숨어 디티를 꽂았다. 닌자 페어 중 하나인 시니컬은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데미지, 그리고 화려한 스킬만큼이나 방어력과 체력이 약했다. 제 팀의 디티가 아닌 디티 꽂히는 소리에 벨져는 바로 우클릭으로 디티를 꽂던 적팀 근딜을 잘라냈다. 그 뒤에 있던 원딜까지 전광판으로 보내고, 뒤늦게 달려오는 탱커와 아이스의 슬라이드에 바로 스페이스로 구멍을 타고 낙하한 벨져는 팀원들의 굿 소리를 들으며 중앙 타워에 핑을 찍었다.
근딜과 근딜의 싸움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벨져는 중앙타워의 팀원들과 합류에 중앙타워를 긁는 대신 아까 남겨둔 타워를 독차지했다. 최근 상향을 받은 스트리머 덕에 남은 타워 하나마저 금세 파괴하고 나니 딱 3분이었다. 벨져는 안쪽의 립까지 먹고 나서야 라인을 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스노우볼링 전개였지만 적팀엔 언제라도 역전을 노릴 수 있는 스타라이트와 미스틱이 있었다. 거기에 검증이 된 건 아니지만 영웅 플레이의 대표캐인 아이스까지. 그 셋의 궁극기를 한번에 맞으면 아무리 레벨차가 나도 위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트루퍼가 뜨기 전까지 통로 립을 먹는데 스트리머가 아이스에게 잘렸다. 순식간이었다. 아마 물방울쿠션이 꺼지자마자 샤드에 당한 것이리라. 얕은 잔재주에 벨져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봤자 이글의 아이스는 영웅병 걸린 아이스일 뿐이었다. 공방의 다른 아이스 랭커와 붙어도 프로즌 정도의 아이스는 없었다. 그러니 이글 녀석의 아이스가 위협이 될 리가. 마침 트루퍼가 딱 좋은 위치에 떴다. 벨져는 바로 트루퍼를 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1단계지만 그래도 코인 벌이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이미 3장2모를 찍은 후라 트루퍼는 팀원들이 오기도 전에 벨져의 손에 끝이 났다. 탱커나 서포터가 잡고 있던 거라면 또 모를까, 딜러가 막타를 먹는 게 당연했다. 거기에 스트리머는 이제야 겨우 전광판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공방이 버프에 벨져는 옆에서 터지듯 밀리는 아군 철거반을 보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철거반이 날아가는 정도를 봐선 아이스다. 벨져는 이동속도 킷을 사용하고 4번타워 앞 통로에 디티를 꽂았다. 바로 가까이서 들리는 휠업소리에 E키를 누르자 이글 대신 아이스와 함께 옆에 있던 히포크라시와 어트랙티브가 같이 갈렸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극공 힐러는 바로 궁극기에 죽고, 방서폿이었던 어트랙티브는 쐐기와 패닝으로 처리하고 나니 스타라이트가 다가왔다. 벨져는 아껴둔 왈츠로 통로를 타고 빠져나왔다. 둘을 끊은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통로 나오자마자 옆에서 미스틱과 아이스의 궁극기 소리와 함께 아군 상태창에 셋이 전광판 신세가 됐다. 암살을 하는 사이 옆으로 이동해 라인을 밀던 팀원들을 노린 거였다. 이글 녀석은 아마 저를 노린 거였겠지만.
벨져는 이글을 추격하는 대신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스타라이트의 기어3가 남아있고, 중앙타워가 살아있는 이상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글 녀석의 귓속말만 아니었다면, 벨져는 그대로 타워를 포기했을 터였다.
[메이헨: 형, 프로즌 보고싶지 않아? 가르쳐줄수 있는데ㅋㅋ]
[메이헨: 내기할래? 이기면 알려주지~]
이글의 귓속말은 벨져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글이 하는 말이니 그냥 하는 도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위여부를 살피고 재기에 벨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몸이 달아있는 상태였다. 벨져는 잠시 한숨을 깊게 내쉬고, 234번 소모킷을 전부 사용했다. 지루하게 벽돌을 쌓을 뿐인 게임은 순식간에 결승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벨져를 흥분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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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equel ]
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본편의 3년 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0.
날은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었고, 종강을 만끽하며 늘어지게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졸업까지 앞으로 반 년. 취직 걱정이 앞섰지만 당장 사는 게 바빠 남들 다 따는 자격증이나 뭐니 하는 것들은 거들떠볼 수도 없었다. 그런 걱정을 하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가끔 동기나 후배들이랑 한 판씩 하던 게임에서 어떻게 연이 닿아 소위 꿀알바라고 하는 자리를 얻고, 창고로 쓰던 쪽방이라도 괜찮으면 옮겨와 살라는 사장님의 배려에 지갑에 여유가 생긴 덕이었다. 방 하나짜리 고시원보다 넓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편했다.
루이스는 터덜터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설핏 깬 잠을 다시 자기 위해 차가운 장판 쪽으로 돌아누웠다.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잠들어 휴일을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화는 한 번 끊겼다가 다시 걸려왔다. 스팸 전화는 아니라는 소리다. 두 번이나 걸 정도면 학교의 급한 일, 아니면 알바 대타일 가능성이 컸다. 루이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으려 장판을 더듬거렸다. 손끝에 닿은 핸드폰을 끌어당겨 전화를 연결해 귀에 갖다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나! 뭐해?”
“……. 이글…. 나 오늘 이 주 만에 쉬는 날이거든…?”
“하하! 그거 잘 됐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물이라도 한 잔 해야 할까. 루이스는 핸드폰 액정에 뜨는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받아버린 것을 후회하며 빈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단잠을 자던 차에 하필이면 이글 홀든의 전화라니. 지금이라도 그냥 끊어버릴까. 그럼 당장은 편하겠지만, 그랬다간 또 한동안 이글이 이걸 가지고 야박하네 어쩌네 하며 징징댈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 조금 시달리고 마는 게 낫지. 루이스는 애써 긍정했다. 자다 일어난 참이라 그걸 확인할 정신이 없기도 했다.
“어어, 끊지 마! 놀자는 거 아냐!”
경쾌한 이글의 목소리에 짜증이 앞섰다. 습하고 더운 여름의 날씨는 사람의 짜증 지수를 쉽게 올린다. 휴일에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있다면 나오라는 이글 홀든의 전화가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비단 쉬는 날이 아니라도 시도 때도 없이 놀자는 녀석이지만, 사람에겐 모름지기 쉴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었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럼 뭔데. 거짓말할 생각, 큼. 흠. 하지 말고.”
아무래도 물을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목을 가다듬자 이글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글의 주변이 꽤 소란스러웠다.
“어, 오늘 지스타 있는데 백 명 한정으로 쿠폰 뿌린대. 근데 1인 1매로 준다는 거야. 아 존나 빡빡하지 않냐? 사람도 존나 많.”
“용건만.”
“야박하긴, 와서 나 대신 좀 받아줘. 갑자기 아부지 호출이 와서 가야될 것 같은데 나 지금 서른 번째로 서있단 말이야. 기다린 거 아깝다구. 대신 수고비는 제대로 줄 테니까! 응? 다 전화 안 받는다구~.”
안 받을 만도 하다. 누가 이런 날 뙤약볕에서 몇 시간씩 대신 기다려주겠는가. 루이스는 고민했다. 수고비가 얼마인가에 따라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데.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어디로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
“어, 그건 톡으로 보내놨어. 네가 안 보니까 전화한 거라구~. 알았지? 부탁할게! 아, 추가상품은 알아서 해~.”
루이스는 이글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갑자기 생겨버린 일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글 대신 쿠폰을 받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루이스는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콜라 한 캔을 까 들이켰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청량감에 숨통이 좀 트였다. 부스에서 쿠폰을 챙기고 추첨권을 넣었는데, 그것도 챙겨가야 할까. 루이스는 고민하며 한 모금 콜라를 마시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콜록였다. 따끔따끔 거리는 게 거식해 목을 만지고 있으니 위에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다.
사이퍼즈 부스는 여전히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반 관람객에게도 쿠폰을 준다는 것 같은데 고작 그것 때문에 저 안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캐릭터 체험도 어차피 기다리면 풀릴 터였다.
루이스는 카탈로그를 펼쳐보다 함성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프로게이머를 이겨라! 라는 프로그램에 상품은 50만 테라. 토너먼트식도 아니고 단판으로 신행되는 소위 퍼주기 행사였다. 오늘의 초청 선수는 ‘쉬레’. 최근 가장 핫한 선수였다. 팬도 많은 만큼 안티도 많은 모양이지만, 그의 플레이를 동경하며 따라하는 사람들 때문에 프로게이머니 대회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도 알고 있는 선수였다.
그러고 보면 한 번도 그의 플레이를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추첨발표까진 시간이 남아있었고, 근처 카페엔 이미 사람들이 즐비했다. 루이스는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는 걸 보며 잠시 망설이다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캐스터 대신 BJ를 하는 유저가 옵저버를 하며 중계를 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스크린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쉬레의 기습에 셋이 ‘블레이드’의 궁극기에 끊기고, 바로 추격을 이어 쿼드라가 터졌다. 쿼드라가 제노사이드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루이스는 제가 방금 무엇을 본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관중은 같이 흥분해 쉬레를 연호했고, BJ도 그의 플레이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작한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전방 타워가 모조리 털렸다.
“나라면 쉬레한테 안 덤빌 것 같애…….”
옆에 서있던 여고생이 중얼거렸다. 그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팀이 불쌍하다고 소곤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쉬레는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수준에 맞춰주겠다는 듯이, 코인을 잔뜩 들고도 레벨도 올리지 않고 있었다. 블레이드의 필수품이라 여겨지는 하드스킨도 없거니와, 아이템 역시 온통 흰색 일색이었다. 명백하게, 가지고 놀고 있다. 개중에 용기를 낸 탱커 하나가 쉬레를 물었다. 하지만 쉬레는 팀원들의 백업이 오기도 전에 탱커를 녹이고, 그를 따라온 서포터까지 끊어냈다. 2장 1모 1신에 스킬링. 쉬레는 노셔츠로 상대팀을 농락하고 있었다. 역량 차이가 확연했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본 루이스는, ‘쉬레’가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상했다.
게임은 그대로 터져서 십 분을 조금 넘겨 끝나고 말았다. 쉬레와 함께한 유저 넷도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쉬레는 무표정으로 그들이 건네는 인사에 눈길만 잠시 주었을 뿐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최강의 근딜이라는 수식에 보탬이라곤 없었다.
BJ가 쉬레와 함께한 네 명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진 팀에겐 위로의 말과 함께 부스를 나온 그들을 도닥이고 쿠폰을 건넸다. 다음 경기의 참가 희망자를 묻는데, 쉬레 팀은 지원자가 넘치는 반면 도전자 팀은 지원하겠다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황한 BJ가 손에 든 쿠폰을 흔들어보였으나 관중은 웅성웅성할 뿐이었다. 이미 패배가 예정된 데다, 그 꼴을 보고도 무력한 패배라는 굴욕을 당하고 싶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여성 유저가 손을 들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가는 사이 루이스도 손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온 거지, 그런 압살을 당하고 목격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다.
그래, 루이스는 흔히들 말하는 ‘쉬레 플레이’가 싫었다. 루이스가 나오자 시간이라도 끌려는 건지 BJ가 처음 손을 든 여성유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여차저차 도전자 팀에도 다섯 명이 모이고, 루이스는 생전 처음 본 사람들과 방음 부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어색하고 경직된 공기 속,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클라이언트를 켜니 클랜 알림 창에 절친한 원딜러의 접속 알림이 떴다.
헤드폰을 끼기 전, 처음으로 나섰던 여성 유저가 말을 걸었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친숙했다.
“저기,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아, 프로즌입니다. 초대해주세요.”
“어? 정말요?”
“네. 다 대문자로.”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빙그레 웃으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날 아나? 공성에서 마주친 사람인지도 몰랐다. 타앙, 파티 초대의 둔중한 UI사운드에 화면을 보니 방금 접속한 원딜에게 초대가 와있어 루이스는 거절을 눌렀다.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팅창을 열려 엔터를 치는데 다시 한 번 초대가 왔다. 키보드에 양손을 올리고 있던 루이스가 다시 거절을 누르기 위해 마우스를 잡으려는데, 옆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받아요. 다 기다리고 있는데?”
“네?”
루이스가 말뜻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자 루이스 대신 마우스를 움직여 파티 초대 수락을 눌렀다. 다섯 명. 방금 그녀에게 초대를 위해 닉네임을 말했던 사람들로 채워진 파티에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설마.
“퀸?”
“안녕, 프로즌. 이런 우연이라니, 예감이 좋지 않아?”
루이스는 그제야 그녀가 제가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슬쩍 웃었다. 그녀의 말 그대로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저와 상성도 호흡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루이스는 다른 세 사람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스노우퀸, 앤지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그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앤지는 루이스에게 찡긋 윙크했다.
안내에 따라 친선전에 입장한 루이스는 조합을 맞출 것이냐 물었다. 앤지의 옆에 앉은 남자가 어차피 쉬레한테는 소용없을 거라며 잘하는 거 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으로는 이길 수 없다. 맞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고민하다 ‘아이스'를 골랐다. 팀원 하나가 벌써부터 게임을 놓는 거냐며 허탈하게 웃었지만 루이스는 게임을 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셀렉과 대기가 끝나고, 배경음악이 깔리며 화면이 전환됐다. 쉬레는 그의 주캐인 ‘시니컬’이었다. 부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스님 힘드시겠네요. 아이스로는 시니컬을 못 이기잖아요. 삑도 자주 나고.”
“……. 해봐야죠.”
루이스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마우스를 잡았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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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와트 au
* 다이무스 6학년(16), 루이스 4학년(14), 벨져 3학년(13), 이글 1학년(11)
만우절이랍시고 아침 식사부터 푸딩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고작 이런 장난이 뭐가 그리 즐겁다는 건지. 벨져는 켄타우로스 탈을 쓰고 지나가는 후플푸프 학생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한심하긴. 그러고 보니 제일 신나서 돌아다닐 이글 녀석이 아직까지 잠잠했다. 또 얼마나 큰 사고를 치려고,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나은데 소식이 없는 게 영 불안했다.
벨져는 동생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엇다가 고개를 드는데,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제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벼보아도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여전히 벨져의 시야 안에 있었다. 교복 망토의 후드에 가려 이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긴 생머리였다. 거기에 노란 색과 붉은 색이 번갈ㅁ아 놓인 그리핀도르의 넥타이. 벨져는 절대 잊을 리 없는 얼굴을 떠올렸으나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학생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와 까만 양말. 벨져는 수업을 가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잠시 멈춰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이스...?"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이름에 벨져는 급히 쫓아가려했지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복도 가득 퍼졌다. 잠시 망설인 사이, 그 뒷모습은 벨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벨져는 강의실 문을 열면서도 복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그건 대체...."
"아, 안녕하세요. 그게... 내기에 졌거든요."
"...그렇군."
다이무스는 수업을 듣기 위해 들어오다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언제나 루이스와 제가 함께 앉는 자리에, 한쪽 다리를 꼬고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펜을 들고 있는 여학생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 여학생이 루이스라는 걸 깨닫고 자리에 앉긴 했지만, 그래도 놀란 게 사실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거나, 웬만큼 눈썰미가 있지 않고서야 여장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잠시였지만, 자신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루이스에게 여학생 교복은 퍽 잘 어울렸다. 어울리다 못해 너무 예뻐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이무스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고쳐앉았다. 워낙에 곱게 생기긴 했지만 긴 생머리가 더해져 청순한 매력이 물씬 풍겼다. 그 바람에 애꿎은 제 가슴이 떨렸다.
다이무스는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책을 펼치고 펜을 꺼냈다. 계속 쳐다보다간 그도 민망해하거나 불쾌해할 것이다. 하지만 다이무스의 신사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눈은 자꾸만 말려 올라간 치마 아래 드러난 흰 다리와 무릎으로 향했다.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까만 양말부터 치마 사이의 흰 살결이 부드러워 보였다. 결국 다이무스는 이대로 가다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루이스의 손을 잡아 그의 치마 위에 올렸다.
"주의하도록."
"아, 네."
다행히 루이스는 별 생각이 없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치마를 내렸다. 다이무스는 그 반응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핀도르의 장난은 다른 기숙사보다 심하고 빈도도 잦다 보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무슨 마법을 썼는지 가슴까지 닿는 머리카락도 가발이 아닌 그의 머리카락 같았다. 아직 교수님이 들어오지 않으셨기에 다이무스는 넌지시 물었다.
"머리는, 뭘 썼나."
"아, 이건 크리스티네가 도와줬습니다."
"그렇군."
불편하다는 이유로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그녀가 파티에 참석할 때면 머리를 길게 땋아올리는 걸 떠올린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핀도르로 가더니 이런 장난에도 끼게 되었나. 그녀에겐 좋은 일이라 다이무스는 다시 깃펜을 들었다. 수업 내내, 학생들의-주로 남학생들의-시선이 옆으로 향했으나 루이스는 얼음 마술이 특기인 마법사답게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업에 집중했다. 집중해서 신경을 못 쓰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지는 몰라도 루이스의 가장 큰 장점은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아직 4학년이긴 하지만, 그에겐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 다음 학기엔 반장 뱃지를 달게 될 테고, 졸업하면 오러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 자신은 아버지를 따라 마법부에서 일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마법부에 있으면 고아라 연고가 없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필기를 하던 다이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학생들이 루이스를 흘긋거리는 걸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있다는 것과도 같았다. 사실 다이무스도 그 남학생들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가 다리를 이리저리 꼬면서 드러난 맨다리가 옆자리에 앉은 다이무스의 눈을 자꾸 사로잡은 탓이었다.
예상 외다. 만우절이니 분명 여기저기서 장난을 걸어올 거란 건 예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아마 루이스 본인도 자기가 못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자각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저 내기에 진 바람에 여장을 하게 된 것에 불과하니까. 다이무스는 누군지도 모를 치마 주인을 향해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이게 다 치마가 짧은 탓이다. 내기의 주동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필시 이글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다이무스는 제 막내 동생이 이 일에 끼어들었다는 것에 갈레온을 걸 수 있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잠잠하다 싶었더니, 이젠 직접적으로 오지는 않겠다는 건가. 아침에 벨져의 푸딩에서 개구리 모양 초콜릿이 나온 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분명 루이스와, 여장과, 만우절에는 관계가 있다. 다이무스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루이스의 펜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다이무스의 불안한 눈도 흔들렸다. 언제나 그렇듯 이글의 행동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집도 아니고, 학교에서 벌건 대낮에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심란한 마음에 한손으로 이마를 짚으려는 찰나, 부지런히 필기를 하던 루이스가 양피지 조각을 슬쩍 밀었다. '괜찮아요?' 교수님과 칠판, 책만 보는 줄 알았더니 집중을 흐트러트릴 정도였나.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내민 양피지 조각에 짧게 답했다. '괜찮다. 혹시 이글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나?' 여전히 시선은 칠판에 고정한 채, 루이스는 양피지조각을 가져갔다. '아니요. 그리핀도르는 열두시 종 치자마자 시작했거든요. 아마 슬리데린까지 갈 여유가 없을 겁니다.' 이번엔 아무렇게나 찢은 양피지 조각 대신 노트 한 페이지가 돌아왔다. 어쩐지 잠잠하더라니, 신고식을 치르고 되갚아줄 장난을 생각하느라 그런 거였나. 다이무스는 이글이 보이지 않는 이유에 납득하고 다음 질문을 하려 펜을 들었다. 무슨 내기를 했지? 라고 쓰기 위해 펜을 종이 위에 올린 순간, 너무 개인적인 걸 묻는가 싶어 펜을 뗐다. 그런 걸 서스럼 없이 물어도 될 사이인가. 하지만 그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어 망설이는 사이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이 저마다 책을 덮고 짐을 챙기느라 부산스러워진 강의실 안, 루이스가 책을 덮었다.
"그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지금 전쟁중이거든요. 하루짜리."
"...건투를 빌지."
"하하, 뭐 이제 사년이나 됐으니까요. 다들 학기초부터 이글한테 당한 게 많아서 일주일 전부터 머리 싸매고 회의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이글 홀든을 제대로 놀려줄 수 있을까, 하고."
"그리핀도르는 그런 데 일주일이나 시간을 쓰나?"
"벨져가 머리 만지는 시간보단 덜하죠."
"..."
"농담이에요."
다이무스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야 물론, 벨져가 거울을 보는 시간에 비하면 일주일 동안 어떻게 장난을 칠 것인가로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합리적이다. 더구나 그게 아무도 말릴 수가 없는 천방지축 막내라면 더더욱. 루이스가 후드를 덮어쓰는 사이 다이무스는 책을 덮고 짐을 챙겼다.
"잘 부탁하지."
"올해는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그랬으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유감이로군."
"네. 아무래도 당하는 입장이다 보니."
"그래도,"
한 뼘 아래서 책을 양손으로 감싸안고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홀린 듯 손을 들어 후드를 넘겼다. 루이스의 긴 머리카락이 손등을 스쳤다.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저를 기다리는 그를 향해 잘 어울린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법 나쁘지 않군."
"하하, 오늘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예쁘단 말이에요."
"...그래."
"도서관 가실 건가요? 오늘 수업은 끝났는데 지금 기숙사로 돌아가면 지옥이 펼쳐져있을 것 같아서."
"그것도 좋...."
"야!!!"
다이무스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대답하려는 찰나, 강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벨져가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벨져."
"형아는 빠져. 너 이 새끼...!"
"벨져!"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난 아니야. 지금까지 다이무스 선배랑 같이 있었어. 지금 막 수업이 끝난 참이고."
"이런다고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아? 이딴 걸로 장난치지 말...!"
갑자기 쳐들어온 벨져가 루이스를 향해 손을 뻗고, 다이무스가 둘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벨져가 손을 뻗는 게 조금 더 빨라서, 다이무스의 겨드랑이 사이를 빠져나간 벨져의 손은 루이스의 멱살 대신 다른 곳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읏...!"
"......"
벨져는 제 손에 닿는 감촉에 당황했다. 작지만 부드럽고, 둥근, 말랑말랑한 무언가. 아마도, 있을리 없는 그 감촉. 벨져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손에 쥔 것을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되도 않는 장난을 걸어서, 따지러 왔더니 이게 대체 무슨...!
"실컷 만졌으면 이제 그만하지 않을래, 홀든?'
"너...!"
다이무스가 한 발짝 물러나고, 제 손이 어딜 쥐고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벨져의 얼굴에 확 열이 쏠렸다. 루이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손을 뗐으나 이미 강의실 문에 모여든 학생들은 눈앞의 광경에 저마다 입가에 손을 대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너, 너...!?"
여자였어? 여자였나? 지금까지 그럼 난 여자를 상대로 그렇게 사사건건 부딪히고, 싸움질을 했다는 건가? 벨져는 혼란스러웠다. 열셋이 되도록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제 아무리 이글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벨져를 패닉에 빠지게 한 적은 없었다. 벨져의 얼굴이 희게 질리는 걸 본 루이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오늘 하루 뿐이거든? 화장실 가는 거 빼고 아무 문제 없으니까 평소대로 돌아와줄래, 벨져?"
"...사과 하고 끝내라, 벨져."
"......"
벨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굴려 루이스가 이러고 있는 게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전까지 공황상태에 빠졌던 게 허무하고 어이가 없는 데다, 안심이 됐다. 그 바람에 그만,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저, 저기. 벨져?"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하고 다니던가!"
벨져는 안도감에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가오다니. 괘씸하고 짜증이 나 그를 노려보자 루이스는 큰소리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때만 약한 척, 피해자인 척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혹의 주술 같은 거나 걸고 다니고! 그러고도 네가 남자냐?!"
"...뭐?!"
"뭐야? 뭐야, 뭐야? 작은형 루이스랑 싸워?"
루이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는가 싶더니 문쪽에서 이글의 목소리가 들렸다. 빼곡하게 서있는 학생들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기어온 이글이 한 상급생의 다리 아래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오오, 아니면 고백하는 거야? 벨져랑 루이스랑 사귄다고?"
"야!!!"
"이글. 그런 게 아니다."
눈가에 눈물 방울을 단 벨져는 동생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다이무스는 두 동생때문에 골치가 아파와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만우절이다. 웬만한 건 다 장난이고 거짓말이라는 말로 넘길 수 있다. 침착해야 한다, 다이무스 홀든.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루이스의 말버릇을 속으로 외쳤다. 부모님이 안 계신 이상 두 동생을 돌보는 것은 오롯이 제 책임이다. 다이무스는 벨져를 약올리다 달아나는 이글과 그를 쫓아가는 벨져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인 루이스는 그의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잡아...올까요?"
"...부탁하지. 기왕이면 슬리데린 기숙사로."
"넵."
루이스는 다이무스를 뒤로 하고 강의실을 나갔다. 얼음 레일을 깔고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에 이어 복도에서 이글 녀석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래야 만우절이지. 다이무스는 마음을 다잡고 루이스가 두고 간 책과 가방을 대신 챙겼다. 잠시 이글이 사고를 안 치고, 평화가 이어진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이 바보였다. 다이무스는 문 앞에 서있던 그리핀도르 반장에게 다가갔다.
"이글 녀석이랑 전쟁을 하고 있다고."
"아, 뭐, 뭐...."
"협력하지."
당황해 눈을 피하는 그의 어깨를 탁 잡은 다이무스는 더없이 진지하게, 순도 100%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리핀도르의 반장은 처음에 무슨 소리를 들었나 하는 벙찐 얼굴로 다이무스를 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구경을 하러 왔던 학생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해 곧 박수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앙숙 슬리데린과 그리핀도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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