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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1 [벨져루이] 어느 토요일, 오후.
- 2015.04.11 [릭루이] 벚꽃 샤워
- 2015.04.11 [벨져루이] 어떤 게이머의 수난시대
- 2015.04.11 [티엔루이] 킹스맨au
- 2015.04.11 [벨져루이] April fool'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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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1 [벨져루이] 네가 시킨 택배의 정체를 나는 모르고 있다.
- 2015.04.11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글
[벨져루이] 어쩌다 마주친 그대.
2014/10/13
옛날 연성 안 올린 거 발굴해서 올림
거슬리고 방해된다는 이유로 동행을 만들지 않던 벨져로선 제법 후한 제안이었음에도 루이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축 쳐진 채 이끄는 대로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맑아져있었지만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발밑이 훅 꺼져버리는 감각에 놀라 퍼득거린 것도 잠시, 벨져 홀든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악몽을 꾼 것처럼 개운하지가 않았다.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며칠째 벨져 홀든을 괴롭히는 꿈은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아보아도 이미 깬 꿈은 검게 물든 장면에 멈춘 채 흐르지 않고,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안타리우스를 추적하고 인식의 문을 찾아내 파괴하는 데 위험이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멍청이랑 자꾸 마주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기사단에서 보낸 정보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보다 신경을 거스르는 건 그들의 존재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그들은 좋은 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고 남자는 그걸 알면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로 바라보면 한 번쯤 돌아봐줄 법도 하건만 그녀는 매정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쪽에선 제법 유명인이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문이 제법 됐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났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안타리우스의 포인트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작 그들은 저를 못 알아본 데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연인이 뭔가를 발견한다 해도 이미 벨져가 다녀간 후라 상관없지만 그래도 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좋을 리 없었다.
벨져는 마른세수를 하며 어제 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벤치에 앉아 궁상을 떠는 남자의 얼굴은 전보다 더 수척해보였고, 한심하고 바보같았다. 멀쩡한 얼굴을 들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적의 요새 근처에서 빈틈을 보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쓰러뜨린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진 주제에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나부랭이에게 당하는 것 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기에 벨져는 어젯밤도 그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게 벌써 몇 주 째인지. 이렇게 꿈자리가 사나워진 것도 분명 그게 거슬려서인 게 분명했다. 차라리 빨리 이공간을 찾아서 사라져줬으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쉬울 리 없었다. 벨져는 거기까지 흘러간 생각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기사단과 정보통에게 도착한 편지들을 대충 읽고 정보들을 정리한 벨져는 편지들을 갈무리해 객실 금고에 던져놓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곧 하우스키핑 시간이니 나가줘야 청결이 유지되는 데다 호텔 방 안에만 있기엔 갑갑했다. 거울에 비친 벨져 홀든은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제 모습에 만족한 벨져는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바람도 선선히 부는 게 딱 좋은 날씨라 잠시 들른 카페의 이층 야외 테라스에 앉아 본 노을은 아름다웠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차와 샌드위치는 제법 먹어줄만 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고 한 잔 할 기분이었기에 적당히 펍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왁자지껄하게 노는 무리에 낄 생각도 없고, 벨져가 즐겨 마시는 좋은 술이 있을 리도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잠시 한 잔 하고 사라지면 그뿐. 벨져는 오늘 한 기사가 편지의 끄트머리에 오만한 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한 걸 떠올렸다. 마티니 한 잔을 주문하고 낡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벨져는 실소를 흘렸다. 오만하기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격에 맞는 이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 역시 격이 떨어지는 쪽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원형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기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착취당하며 속고 있는지도 모르고 술에 취하는 이들이었다. 더러는 그런 생각을 하는 벨져를 일컬어 사정도 모르는 귀한 귀족집 도련님이라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다르다.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특권을 누리는 게 바로 귀족이고, 술에 취해 시시덕거리는 일개 필부와 자신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검의 형제 기사단에 들어올 정도의 기사라는 자가 하는 간언의 수준이 그 꼴이라니,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텐더가 마티니를 내려놓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리던 벨져는 얼핏 스친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손등으로 이마를 지탱한 채 맥주를 들이키는 옆모습이 낯이 익었다. 바의 끝과 끝이라지만 그리 큰 펍도 아니었기에 그와 벨져 사이의 거리는 채 5미터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 입고 다니는 후드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올리는 바람에 주홍빛 조명 아래서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술을 넘기면서 목울대가 움직이고, 맥주병을 문 입술에서 흐른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둑한 펍 안에서도 얼굴이 제법 붉은 걸로 보아 꽤 마신 것 같았다. 더운지 후드를 넘기고 티셔츠를 펄럭이는데 게슴츠레 뜬 눈가가 빛에 반짝였다. 슬쩍 벌어진 입술 새로 새는 더운 숨결이 여기까지 닿는 것 같아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시켜놓은 마티니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칵테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겨우 루이스 따위를 넋을 잃고 바라본 게 자존심이 상했다. 한 모금 넘기자 싸하게 넘어가는 알콜에 정신이 들었다. 분명 제가 시킨 건 온더락이 아니었는데, 얼음이 녹아 진에 섞이는 게 영 껄끄러워 짜증이 났다. 바로 미간을 찌푸리자 바텐더가 다가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이봐, 혹시 그쪽?”
“치워라.”
대답할 가치도 없었지만 바텐더가 음흉한 눈으로 가리킨 건 분명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어느 멍청이였기에 벨져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바텐더는 움찔하더니 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 한 걸음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진엔 성긴 얼음이 조각나 물이 섞이고 있었고, 벨져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웨이터에게 손짓했다.
“너, 너. 이리로.”
“예, 말씀하시죠….”
빳빳한 지폐를 마티니 옆에 올리자마자 방금 전의 능글거림은 어디로 갔는지, 바로 굽신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벨져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펍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은 이미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 녀석, 얼마나 마신 거지.”
“여섯시였나, 일곱시였나 그쯤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마셨죠. 아무리 포터라지만 앉아서 마신 것만 해도 혼자서 열댓 병은 마셨을 겁니다.”
벨져는 바텐더의 대답에 인상을 썼다. 아무리 낮은 도수의 맥주라 해도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셨으면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시간상으론 저녁도 안 먹고 마셨을 게 뻔했다. 보기보다 술일 센 건지 아니면 홧김에 마시고 있는 건진 몰라도 지금의 루이스는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더 물이 섞이기 전에 마티니를 한 모금 넘긴 벨져는 흘긋 그를 살폈다. 턱을 괴고 상념에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것도, 뺨이 붉게 물든 것도 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시며 궁상을 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벨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저 자식 것까지. 이거면 충분하겠지.”
“헛, 물론입죠!”
“흥.”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 순간의 흥 때문에 싸구려 술로 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잡친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도 대신 내줬겠다, 그냥 그대로 나가서 가버리면 그만인데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해서 어쭙잖은 놈팽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든, 찬바람을 맞고 거리에서 얼어 죽든 객사하든 알 바 아니다.
바를 뒤로하고 나가려던 벨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신경이 쓰여서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뒤돌아선 벨져는 나올 때와 달리 척척 걸어가 축 쳐진 어깨를 잡아챘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미련하긴.”
“……벨져?”
“다 마셨으면 그만 하고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되묻는 루이스의 표정이 어딘차 서글퍼 벨져는 더 짜증이 났다.
“네 그 잘난 애인한테 가야할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벨져는 바로 애수에 차 깊어지는 루이스의 눈을 보고 아차 싶었다. 루이스란 사람이 애인을 몇 시간 동안이나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실 사람인가 답은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여긴 안타리우스의 요새 근처. 아무리 싸웠다 해도 두세 시간을 여자 혼자 보내게 둘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벨져가 표정을 굳히자 루이스는 미소인지 울상인지 모르게 입가를 씰룩였다. 아픔을 견디려 술을 마시는 그의 옆얼굴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손깍지를 긴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옆을 떠날 수 없는 건 이대로 두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루이스는 위험하다. 그동안 그를 지탱하던 한 기둥이 빠져나간 상실감이 냉정과 침착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적진에서 이렇게 취하게 만들었다. 멍청한 자식. 차였으면 얌전히 그 잘난 연합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단 말인가. 벨져는 아직 반절이 남은 병에 손을 뻗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만.”
“신경 꺼. 벨져 홀든. 어차피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멍청한 자식.”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고, 루이스는 실소를 흘렸다. 멍청하다는 말에 웃는 걸 보면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목이 한 손에 잡힐 정도로 마른데다 눈 밑이 검은 게 그동안 어지간히도 무리를 한 게 뻔했다.
“놔.”
“흥,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 주제에.”
루이스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먼 곳을 그리며 청승을 떠느니 적의를 품고 저를 향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벨져는 그를 도발하기 위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코웃음쳤다. 취한 루이스는 평소의 냉철함을 잃은 후였고, 내지른 주먹은 맨정신의 벨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윽…!”
“하, 미련하다!”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주먹을 한 손으로 잡고 뒤로 꺾자 루이스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펍 안은 시끄러웠고 바텐더는 벨져의 눈짓에 끼어들려하지 않았다. 루이스의 등 뒤에서 손목과 팔을 잡아 제압한 벨져는 루이스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눈앞에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잠시 머뭇거렸다. 저항할 생각도 않고 저를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는 다시 깊은 슬픔에 흐려져 벨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벨져는 루이스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취했다.”
“알아….”
“하, 정말이지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군.”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벨져는 미련한 남자를 놓아주었다. 가볍게 내치듯 놓았을 뿐인데 이미 술에 절어있던 루이스는 휘청이다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아 의자를 잡고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낮게 신음했다. 그 모습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쯧, 한 번 차인 것 가지고 찔찔 대기는. 따라와라. 발목을 잡으면 바로 버릴거다.”
벨져의 퉁명스러운 말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슬리고 방해된다는 이유로 동행을 만들지 않던 벨져로선 제법 후한 제안이었음에도 루이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축 쳐진 채 이끄는 대로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맑아져있었지만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벨져의 푸른 눈과 루이스의 붉은 눈이 마주했다.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던 벨져는 한숨을 내쉬곤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말없이 벨져를 올려다보다 눈을 깜박였다. 펍 안은 어두웠으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건 선명했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벨져를 올려다보며 손을 맞잡았다. 벨져는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당기고, 그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오늘밤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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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느 토요일, 오후.
2015/04/06
* 더 안 이을것 같아서 걍 올림ㅇㅅㅠ
어디고 할 거 없이 벚꽃이 만개한 봄, 잠깐 나갔다 오자는 벨져의 막무가내에 끌려 점심을 먹고 호숫가까지 드라이브를 하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에 커피 한 잔 하고 나니 오후가 훌쩍 지나고 말았다. 가끔은 느긋하게 늦잠도 자고 숙소에서 좀 뒹굴어도 좋을 텐데. 루이스는 익숙하게 액셀을 밟으며 흘긋 조수석에 팔짱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벨져를 바라봤다.
기껏 비싼 차를 사놓고 자기가 모는 건 취한 자신을 데리러 올 때 뿐이다. 덕분에 루이스는 남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고급세단을 자기 차처럼 몰았다. 처음 벨져가 차 키를 던져줬을 땐 혹시라도 기스라도 날까 조심조심했지만 어차피 벨져는 홀든이었다.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의 가격은 0이 두 개는 더 붙고, 굳이 게이머 생활을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데다 은퇴하더라도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말 그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홀든.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나 데리고 살라고 하는 것도 벨져에겐 쉬운 일이었다.
자신이 '프로즌'이 아니었을 때도 벨져는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알바하는 식당, 서점, 술집 그것도 모자라 반지하 자취방까지 찾아와 귀찮게 굴던 게 벌써 몇 년 전인지. 루이스는 신호등이 초록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는 걸 보고 천천히 액셀에서 발을 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매끄럽게 멈춰선 차 안에서 루이스는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 고개를 돌렸다. 밖을 보고 있던 벨져가 그 시선에 루이스를 마주봤지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벨져가 대번에 눈썹에 힘을 줬지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루이스는 그래도 벨져가 다시 채널을 돌리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벨져는 칫, 하고 작게 혀를 차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때마침 봄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파란불이 켜졌다. 루이스는 액셀을 밟으며 경쾌한 하모니카의 멜로디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렸다. 벚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도로의 풍경이 예뻐서 절로 노래가 나왔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차를 몰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루이스는 창문을 조금 열고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나쁘지 않은 선곡이라 그런지 별 말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빠는 벨져를 옆에 두고 루이스는 정면을 보며 물었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벨져의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벨져.”
“왜.”
“오늘 며칠이지?”
“4월 4일 토요일. 그건 왜, 아.... 오늘이었나.”
벨져가 컵을 내려놓고 입가를 매만졌다. 별로 큰일은 아니지만 워낙 까탈스러운 성미라 루이스는 걱정이 됐다. 안 그래도 자기 공간을 침해받는 걸 질색하는데 과연 괜찮을런지. 루이스는 이제 겨우 열일곱인 그랑플람의 원딜러를 떠올렸다.
피지컬도 좋고 센스도 있고 대담하기도 한 원딜러 하랑은 그의 닉네임보다 미친 고딩이라는 수식어를 더 자주 달고 다니는 선수였다. 나이차가 꽤 나긴 하지만 하랑은 이글과 죽이 잘 맞는 아이였다. 쾌활하고 명랑한 딱 그 나이 남자애. 벨져의 말을 빌리자면 ‘시끄럽고 산만하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물론 같은 팀의 티엔이 잘 잡아주긴 하지만 그래도 넘치는 혈기는 주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루이스는 오늘 홀든A 숙소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 티엔이 브루스 감독과 함께 중국에 출장간 사이 일박이일로 묵어가는 것 뿐이지만 하랑이 오는 시점에서 평화로운 휴식은 물 건너가는 셈이었다.
루이스는 고가도로에서 커브를 돌며 오늘 일찍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아예 자고 들어가는 게 아니면 전쟁통처럼 시끄러운 숙소에서 자야하는데 문 하나로 그 목소리를 다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보나마나 이글이 술도 먹일 텐데, 고등학생인 하랑이 술을 마시는 건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숙면과 숙소의 평화, 아이작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브루스나 티엔에게 연락을 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가 하루 놀겠다는 걸 훼방 놓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벨져.”
“왜, 또.”
“우리 외박할까?”
그 말에 벨져가 눈을 크게 떴다.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에도 루이스는 능숙하게 운전을 계속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네 수행비서나 할까봐 하고 농담하긴 했지만 이정도면 정말 벨져 홀든의 비서나 운전수로 취직해도 좋을 갓 같았다. 아무렴 벨져가 대리를 부를 리 없으니 꽤 괜찮은 것 같은데. 딱히 미래에 뭘 해야겠다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루이스였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추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싫음 말고.”
“아, 아니. 싫다고 한 적 없다!”
“됐어, 끝났어. 잠이나 자두던가.”
“차 돌려.”
루이스는 들은 체도 않고 액셀을 밟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제가 못 잔 것도 벨져 때문이니 그라고 잠 좀 못 자면 어떻단 말인가. 루이스는 시내로 들어서며 창문을 올렸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벨져가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고 운전에 집중했다.
“…칠성급 호텔.”
“됐어. 하랑이 볼래. 아무리 그래도 집이 최고지.”
“그럼 내 집으로 가던가.”
“내가 너네 집을 왜 가.”
“외박하자며!”
벨져는 자꾸 말을 돌리고 간만 보다 빠지길 반복하니 짜증을 냈다. 이렇게 좀 삐지게 뒀다가 손을 내밀었을 때 만족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짓궂게 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스는 벨져가 퍽 귀엽다 생각하며 숙소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이 가까워질수록 벨져의 표정은 뚱하게 굳어졌지만 루이스는 벨져 홀든을 엿 먹이는 게 아주 즐거웠으므로 계속 이어지는 무언의 시위에도 차를 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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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벚꽃 샤워
2015/04/10
이것이 새로운 사약의 맛인가요....?
대기실에 들어온 릭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후드를 쓰지 않아 동그란 머리가 움직이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루이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아직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다른 이명만큼이나 어깨에 많은 것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 나이에 조직의 중추에 선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힘든 상태라는 건 분명했다.
그에게 다가간 릭은 얼굴을 빤히 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 색만큼이나 차가울 줄 알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가늘고, 그닥 매끄럽지는 않은 머리카락. 그 끝을 엄지와 검지로 매만지다 아예 손바닥으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릭은 그 감촉에 빠져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으음..., 릭?”
“아, 미안하오. 나 때문에 깼소?”
“아뇨, 그건 아닙니다. 혹시 지금 시간이....”
“아직 공성 시간까진 이십분 정도 남았다오.”
다행히 루이스는 제가 머리를 만진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 게 이상할 법도 한데 그걸 뭐라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릭은 최근 자신이 게이트를 열었던 횟수와 그를 만났던 횟수를 세고는 짧게 혀를 찼다. 연합에서 그를 공성에만 내보내는 게 아니니 요 며칠간 제대로 쉰 적이 없는게 분명했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오. 서른이 넘어가면 싫어도 하루하루 느껴진다오.”
“충고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루이스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늘 보는 사이인데 이렇게 거리를 벌리는게 조금 섭섭했다. 조금은 마음을 열어줘도 좋을 텐데. 토니 리켓이 제게 미안해하는 건 그렇다 쳐도 연합의 영웅이 자신을 멀리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또 모를까. 릭은 혹시 제가 밉보일 짓을 하기라도 했나 기억을 더듬었으나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릭은 소파에서 일어나 팔을 돌리며 어깨를 푸는 루이스의 등을 빤히 쳐다봤다. 전에는 그래도 인사는 잘 받아줬는데.
릭은 아직 머리카락의 감촉이 선명하게 남은 손을 그러쥐며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연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돌아온 영웅은 전보다 어두워져있었다. 그의 연인인 트리비아 카리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루이스는 그녀에 대해 입을 다물었으므로 주위에서 지레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릭은 물을 마시는 루이스의 손목과 물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루이스.”
“푸하, 네?”
“아, 아니오. 아무리 목이 타도 그렇게 마시면 안 좋다오. 물 마시다 사레라도 들리면 약도 없으니까. 하하....”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하잘 것 없는 말이라 릭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웃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괜히 찔려 입가가 씰룩거렸지만 릭은 그래도 웃었다. 그 동그랗고 빨간 눈이 깜박이다 곧 사르륵 접혔다. 루이스가 바로 입가을 다리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지만 순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와 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은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릭을 마주했다. 눈이 예쁜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릭도 잔뜩 힘을 풀고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한 마디에 오늘 업무로 쌓인 피곤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스한 뿌듯함이 가득 들어찼다. 멋쩍어 뺨을 긁적이니 루이스가 입꼬리를 당겨 씩 웃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때마침 도착한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릭은 순식간에 제 앞에서 보인 피곤과 약한 모습을 지우고 늠름한 영웅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루이스를 보며 왠지 모를 씁슬함에 입을 다셨다.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에 그런가, 분명 대단한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자꾸만 루이스가 어리게만 보였다. 엘리나 피터, 혹은 샬럿이나 마를렌, 카를로스, 빅터 같은 어린 아이들이 이런 전쟁터에 나오는 걸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고 그래선 안 되는 거지만 릭은 루이스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을 보일 때면 신경이 쓰였다. 그가 짊어진 무게는 너무 무거운 것이라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고, 가끔은 당장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이 불안했다. 마음이 쉴 곳 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점점 더 안으로 곪아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 번 시선이 가면 그 다음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손이 갔다. 그는 제가 내민 손을 늘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었지만, 글쎄.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언젠가는 한계가 오기 마련이었고 릭은 그가 그 한계에 부딪혀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좋아하고 호감을 갖지만 자신이 그에게 갖는 감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연민도, 동정도, 동경도 아닌 어떤 애틋한 감정. 그 감정에 뭐라 이름 붙여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릭이 진심으로 그를 아낀다는 것은 확실했다. 준비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게이트를 열었다.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여실히 드러나는 공성이었다. 릭은 몇 번이고 그가 리스폰 되는 걸 지켜봤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평소의 침착함은 날이 선 긴장에 가려지고 점점 쌓이기만 하는 피로와 부담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상태로 뒤쪽의 마에스트로와 캘러미티를 지켜내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가까스로 역전승을 하긴 했으나 그것도 그저 버티고 있는 것 뿐, 이미 그의 몸과 정신은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제 삼자가 봐도 그 정도니 그의 동료들이 걱정하고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하는 말에 변명도 반론도 없이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는 루이스는 폭풍의 눈 같았다. 모두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 보다 눈을 감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칼렛과 수다를 떠느라 늦은 회사의 꼬마 숙녀를 마지막으로 제 할 일을 마친 릭은 루이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 가끔은 적절한 휴식이 필요한 법이오.”
“릭, 신경써주시는 건 고맙지만.”
릭은 제게 향하는 싸늘한 눈동자를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사람을 말려야 했다.
“기분전환이라던가.”
“...하아. 딱히 생각나는 건 없군요. 그럼 전 이만.”
루이스는 틈만 남면 제게 쉴 것을 종용하는 사람이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와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제게 신경을 써주는지는 몰라도 지나친 호의는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걷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히며 강한 힘에 끌려 몸이 휘청였다.
“윽, 릭!”
“지금 자네가 해야할 일은 잔업이 아니라 휴식이오! 이번주만 몇 번이나 내가 당신을 옮겼는지 아시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확히 일곱번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릭씨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이제 이거 놔주시겠습니까?”
릭은 단호한 루이스의 거절에 얼굴을 찌푸렸다. 연합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일주일에 일곱번이나 공성에 나가는 게 문제라는 건데, 그렇다고 남는 시간에 쉬는 것도 아니면서 루이스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일에 매달리는 게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그냥 둘 수 있을 리 없었다. 릭은 토니가 제게 진 빚을 떠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있었고, 릭은 이걸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소. 그 전에 잠깐만.”
루이스는 싸늘한 무표정으로 릭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어진 것은 말이 아니라 보라색 빛무리였다. 그제야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루이스가 팔을 뿌리치려고 헀을 땐 이미 풍경이 바뀐 뒤였다.
“하아....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말하지 않았소.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연합이나 회사에서 알면 당신이 곤란해질 텐데요.”
“자, 자. 그러지 말고, 뒤를 돌아보시오.”
사람 좋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릭에게 못 이긴 루이스는 한 발을 내딛으며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춰섰다.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 핀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며 꽃잎이 눈송이처럼 내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살랑이는 꽃잎이 손바닥에 내려앉고, 길 양 옆으로 죽 늘어선 꽃나무의 가지들이 흔들렸다. 넋을 놓고 보게 되는 광경에 루이스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아름답지 않소?”
“...네. 확실히.”
“거 보시오. 잠깐이면 되지 않소.”
루이스는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릭을 보다 피식 웃었다. 확실히 여유가 없긴 했지만 동료도 뭣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신경을 써줄 정도였다니. 제가 생각해도 한심해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윽!”
“꽃구경을 하면서 그렇게 한숨 쉬는 거 아니오!”
“...아프잖습니까.”
등을 팡팡 치며 기운을 복돋아주려는 건 고마운데, 평범한 회사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팠기에 루이스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마저도 싱긋 웃어버리는 바람에 더 투덜거리지도 못하게 된 루이스는 할 수 없이 입술을 움직여 슬쩍 웃었다.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은 릭은 꽃잎의 비가 내리는 길로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꽃을 감상했다.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비밀이라오.”
“.......”
루이스는 상쾌한 대답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물어본다 해서 다시 찾아올 것도 아니고, 공간 이동 능력자인 릭 톰슨에겐 못 가는 곳이 없으니 지구 어딘가에 있는 거겠지 싶었다. 루이스가 더 묻지 않자 릭은 조금 보폭을 줄였다. 아주 잠시,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막상 이렇게 데리고 나오니 훨씬 마음이 편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꽃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잠시 나무에 매어놓은 그네를 발견하곤 멈춰섰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보고, 릭은 그네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그를 바라봤다. 한결 풀어진 표정이라던가 힘이 빠진 어깨가 보기 좋았다.
“여긴 완전히 봄 날씨네요.”
“하하, 영국은 날씨로 계절을 느끼기 힘들지. 앉겠소?”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루이스는 그런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네요.”
“다행이군. 종종 필요하면 말하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흩날리는 꽃잎 비 속에서 고운 얼굴로 하는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어 릭은 씁슬하게 웃었다. 그러자 루이스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제가 컨디션 관리를 못 한다고 릭 씨를 귀찮게 할 수는 없죠.”
“나는 이 동행이 꽤 즐겁소만.”
“.......”
어떻게 정중하게 거절해야할까 머리를 쓰는 게 보여 릭은 피식 웃었다. 이런 면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리라. 릭은 그 마음 씀씀이를 알기에 루이스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럼 내가 동행해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소? 가끔 찾아가리다.”
“그건....”
“아니면 내가 불편하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난처하는 게 보였지만 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라 사람의 호의를 쳐내는 것에 무르다. 그걸 알기에 릭은 일부러 상심한 척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 심성을 이용하는 것에 조금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런 게 바로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던져둔 함정에 걸려든 루이스를 향해 릭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매주 금요일 일곱시에 서점으로 찾아가겠소.”
“아니, 잠깐. 왜 얘기가 그렇게....”
“그 때 끝나지 않소?”
“아무래도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음. 저녁은 내가 사겠소.”
“저한테 선택권이 있긴 한 겁니까?”
루이스의 질문에 릭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거부하면 당장 여기서 포트레너드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은 기세라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도 없어 보였다.
“루이스.”
“...네.”
“포기하면 편하다오.”
싱긋, 상쾌하게 웃으며 하는 소리가 아주 굉장했다. 거의 반 협박이나 다름 없는 말에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마른 세수를 하며 한 바퀴 돌았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앞으로 더 곤란해질 게 뻔했다. 오늘은 다들 돌아간 후에 갑자기 끌려왔지만 다음에도 그런 배려를 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일찍 퇴근합니다.”
“그렇군. 광장에 안 가다 보니 몰랐소.”
“그리고 매주는 곤란합니다.”
“격주로 가지.”
“서점에서 사라지는 게 더 수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럼 집으로 데리러 가겠소.”
제 발로 무덤을 판 루이스는 어째 거하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 후였다. 릭은 그네에서 일어나 루이스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푸른 잿빛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이, 퍽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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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게이머의 수난시대
2015/04/10
* 어김없이 게이머au
* 모 게임 네타 주의
어느 선선한 밤, 홀든 A의 숙소에는 유례없이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공기는 대개 소음의 주범인 이글이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글은 놀라울 정도로 묵묵히 방송을 위한 세팅을 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벨져와 루이스의 방에서. 팔짱을 끼고 다리는 꼰 채 침대에 앉아 자신의 공간에 침입한 막내동생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벨져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꼭 해야겠냐?”
“왜, 쫄려? 사나이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이글은 책상에 마이크와 캠을 능숙하게 설치하고는 양손을 착착 치대며 손을 털었다. 영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시위하는 작은 형을 돌아보며 씩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벨져 홀든의 이런 모습을 어디 보기가 쉬운가. 이글은 오늘 방송이 잘 되면 이 영광을 함께 해준 트롤러에게 바치고 싶었다. 불과 두시간 전까지만 해도 연습실에 앉아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쉬레가 프로즌을 끼고 질 리가 없다고 누누히 말하는 게 벨져였다. 하지만 그도 트롤링에는 견디질 못하고 져버린 것이 지금의 결과였다. 아무리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해도 진 건 진 거니까. 내기로 벌칙을 걸고 한 이상 안 한다고 뻗댈 수도 없었다.
이글은 자기 아이디를 치고 인터넷 방송 사이트에 접속해 방을 열었다. 오늘의 방송용 게임은 사이퍼즈가 아닌 무섭기로 소문난 공포게임으로, 어느 정도 머리를 써서 퍼즐을 풀어야 공략이 가능한 게임이었다. 방제를 프로즌과♥쉬레의 내기 벌칙★공포게임실황 으로 바꾼 이글은 뿌듯하게 자신의 작품을 바라봤다.
제 작은형이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웃기고, 루이스가 과연 이번에도 그 얼음같은 침착함을 보여줄지 기대가 됐다. 아직 대기화면만 띄워놨을 뿐인데 본방은 물론 중계방까지 우후죽순으로 사람이 들어차는 걸 보며 이글은 경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주인공 중 한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하러 간 건지 도망간 건지 어쩐 건지 샤워하러 간지라 이글은 벨져의 옆에 앉았다.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자는 침대의 쿠션이 뭐 이리 좋담. 이글은 침대를 툭툭 두드려보곤 벨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형, 좀 기대되지 않아? 그 루이스가 어떻게 나올지? 응?”
“천박하긴.... 이딴 B급 호러가 뭐가 무섭다고.”
“흐응, 그래? 그럼 형은 따로 해야겠다. 이번에 새로 나온 퍼피 파라다이....”
“치워.”
제깍 팔을 쳐내며 질색하는 제 작은형의 반응이 즐거워 이글은 크게 웃었다. 고개를 젖히며 웃다가 뒤로 넘어가 끅끅거리자 벨져가 나가라며 이글을 발로 차 떠미는 바람에 이글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벨져는 이글이 떨어진 후에도 팔짱을 낀 채 밟으며 짜증을 냈다. 호러게임이 무섭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졌다는 게 불쾌한 거라 이글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더 입을 놀렸다.
“아, 그러게 누가 탱커 하래?”
“그 이상한 새끼 때문에 졌지, 네가 잘해서 진 게 아니라고!”
“크크킄큭, 아~ 그러셔? 난 그 사람한테 짱 고마운데, 아이디가 뭐더라 교주 제... 어읔!”
“그만해, 벨져. 애 죽겠다.”
깝죽거리다 정강이를 맞은 이글에게 거실에서 동앗줄이 내려왔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피부에 물이 오른 루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오늘 뭐 하는데?”
“어느 고성에서 깨어났는데 기억이 하나도 없어. 그 성 안에서 기억을 찾아가면서 탈출하는 공포게임이지롱. 아, 혹시 크리쳐 무서워해?”
“피 튀기고 그런 건 좀 싫은데.”
루이스는 머리를 털다 옷장에서 티셔츠를 꺼내 입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질색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겁을 먹는 것도 아닌 평온한 얼굴에 이글은 벨져가 한껏 돋워준 흥이 식는 걸 느끼며 길게 콧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오늘 벌칙은 두 사람을 놀리기는 커녕 침착하게 퍼즐을 풀어가는 공략 방송이 될 것 같다. 뭐, 그런 점이 루이스답긴 하지만 이래서야 기껏 준비한 보람이 없었다.
“다 깰 때까지 불 켜기 없음!”
“해 뜰 때까지 못 깨면 어떻게 해?”
“그럼 못 나오는 거지 뭐.”
“그때까지 못 깰리가 없지 않나.”
벨져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이글은 난이도를 헬 모드로 조정할까 고민하다 그것마저 잘해버리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라 그만 뒀다. 어쨌거나 이미 하기로 했으니 이제 와서 바꿔봤자 그게 그거였다. 이글은 뒤통수를 긁으며 일어나 앉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티셔츠를 적시는 데도 루이스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캠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참 생기기도 잘 생겼다. 언젠가 루이스가 없는 자리에서 얘기가 나왔을 때 팀원들끼리 한 말도 루이스가 제일 잘 생겨보일 때는 샤워하고 나온 직후라는 거였는데,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루이스에게선 묘한 청순함이 풍겼다. 이러니까 깐깐한 작은 형도 넘어간 거겠지. 이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루이스에게 다가가 손수 머리를 말려주는 벨져를 바라봤다. 하여간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하나도 없다. 이러니까 맨날 큰형이 포털에 돈을 쓰지. 이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시작한다?”
“그래. 이거 근데 잘 나오나?”
“고럼고럼. 이 이글님이 쓰는 건데 당연하지~. 자, 누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하지 뭐. 나중에 가면 막 에스컬레이트하고 그럴 거 아냐.”
루이스가 먼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연스레 그 옆에 앉은 벨져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이글을 쏘아봤지만 이렇게까지 한 이상 혼자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방송이라고 메이크업까지 한 벨져는 자기 쪽으로 카메라를 살짝 돌리곤 머리를 매만졌다. 이글은 두 사람 사이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꺼놨던 마이크를 켜고 대기화면을 치웠다. 유유히 흘러가던 채팅창이 채 읽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올라갔다.
“안녕~, 이글이글이의 벌칙방송~. 오늘은 쉬레님과 프로즌님이 함께해주실 겁니다. 아쉽지만 저는 오늘 시청자할 거구요. 자, 인사인사.”
“안녕하세요, 프로즌입니다.”
“쉬레입니다.”
루이스가 가볍게 박수를 치고, 이글은 잠시 오늘의 게임과 규칙을 소개했다. 첫째, 중간에 그만두기 없기. 둘째, 힌트랑 채팅창 보기 없기. 셋째. 불 켜지 않기. 이글이 윙크와 함께 인사를 마치자 때마침 심부름 보냈던 토마스가 뜨끈한 팝콘을 들고 돌아왔다. 이글은 그럼 채팅창에서 보자며 물러나 방의 불을 껐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둘만의 시간이었다.
“음, 이거 어쩌지. 이글이 하는 것처럼은 못하겠고…. 으음, 여러분 저희끼리 게임할게요...? 너무 뭐라 하지 마시고 예쁘게 봐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루이스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벨져도 고개를 까딱였다. 깜깜한 방안에 불빛이라곤 모니터와 스탠드 하나. 익숙한 방이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산한 배경음악이 더해지니 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벨져는 조용히 제게 시작한다며 스타트를 누르는 루이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벨져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니터를 바라봤다. 1인칭 게임이라 화면이 움직이고, 루이스는 침착하게 건물 안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뭐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조심은 하고 있지만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루이스를 오래 보긴 했지만 공포 게임을 하는 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반응을 할지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탐색을 계속하며 아이템들을 줍는 중이었다. 괜히 가구를 건드려보며 돌아다니다 뭘 건드렸는지 이상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흔들리며 흐려졌다.
튜토리얼이나 다름없는 초반이라 화면에 뜨는 스크립트를 소리 내어 읽고 설명하는 루이스의 목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발음이 꽤 씹히긴 하지만 이렇게 천천히 조근조근 말하니 알아듣기 훨씬 편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하면 좋을 텐데. 벨져는 루이스가 인터뷰를 할 때나 부스 안에 들어갔을 때 하는 말과 제게 머리를 기대며 웃는 걸 떠올리고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역시 지금 이대로가 좋다.
벨져는 키보드에 손을 얹고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루이스를 흘긋 바라봤다. 시끄러운 노이즈가 거슬리긴 했지만 벨져는 그것보다는 다른 데 관심이 있었다. 어둠 속 방금 샤워를 마친 루이스의 고운 얼굴이 모니터에 반사되어 비치고, 루이스의 몸에선 약한 샴푸 냄새가 풍겼다. 벨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 코를 매만졌다.
“어우, 깜짝이야.”
순간적으로 난 큰소리에 루이스를 보던 벨져도 움찔했다. 루이스는 벨져를 보며 허허 웃고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벨져.”
“왜.”
“나 이거 못하면 네가 깨줘야 해?”
“왜, 무섭냐?”
“조금.”
벨져는 랜턴을 얻더니 조금 더 과감하게 여기저기 건드려보는 루이스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무서워하긴 커녕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인데, 옆방에서 팝콘을 끼고 구경중일 이글이 엿먹을 생각을 하던 벨져는 슬쩍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자기가 필요하다는데 도와줘야지. 벨져는 묘한 뿌듯함과 함께 모니터를 바라봤다. 팔짱을 풀고, 루이스의 다리에 손을 얹어도 루이스는 별 말 없이 마우스를 움직여 복도를 걸어갔다. 별로 밝지도 않은 램프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찔러 보고 다니는 상황인데, 확실히 분위기라던가 음악이 음산했다. 하라는 게임은 안 하고 루이스만 보고 있었던 벨져는 이제야 그걸 느끼며 화면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건데?”
“어 얘 이름은 다니엘인데, 그림자한테 쫓기는 중이고 알랙산더라는 사람을 죽여야 돼. 자기가 약을 먹고 기억을 지운 다음에 성에서 깨어났어.”
“흐음.”
“그리고 공포를 느끼면 화면이 흔들리고 그래.”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라 벨져는 같이 화면을 보다 다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굳이 도와줄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엄살은. 벨져는 다시 화면을 보는 척 루이스 보기에 열중했다. 늘 같이 게임을 하다 보니 이렇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방송을 복기할 때나 루이스의 갤러리, 팬카페에 보정된 짤을 수집할 때 뿐이었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둑한 방 안에 불빛이라곤 모니터의 약한 빛 뿐. 그마저도 공포게임이라 화면이 어두컴컴해 화면보다는 루이스의 얼굴이 더 눈에 들어왔다. 어디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아니면 정말 무섭기라도 한 건지 루이스가 잠시 멈춰서 입가를 매만지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AOS 게임 특성상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판단과 오더를 내리는 사령탑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는 선수로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코치로도 우수한 편이었다. 상대의 사소한 습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는 냉철함과 집중력, 그리고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이 프로즌의 가장 큰 무기다. 벨져는 그렇기에 프로즌의 오더를 따랐다. 어느 쪽에도 치중되지 않는 최적의 판단. 물론 그 판단이 언제나 승리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벨져는 루이스를 믿었다.
홀든 A는 사실상 프로즌이 있기에 구성되는 팀이다. 언론과 팬들, 심지어는 다른 팀들까지 홀든 A의 중심을 쉬레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틀린 얘기였다. 프로즌이 있기에 쉬레가 있고, 쉬레가 있기에 프로즌이 있으며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애초에 루이스가 없었다면 서로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다른 형제들이 한 팀에 모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프로즌은 절대로 팀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승리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이 다르다. 그걸 알기에 이글 놈도 진즉 옆에 끼고 돌았던 거겠지. 벨져가 잠시 꽁기해진 나머지 팔짱을 끼는데 화면이 크게 흔들리며 루이스가 화들짝 놀라 움찔했다.
“스읍, 하아….”
음침한 공간, 저 멀리에서 괴수가 얼쩡거리는 게 보여 벨져는 슬쩍 루이스의 안색을 살폈다. 잔뜩 긴장한 채 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게 퍽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리자 루이스가 눈을 흘기며 주먹으로 가볍게 벨져의 어깨를 쳤다.
“저런 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
“아, 그럼 보지만 말고 네가 하던가. 저거 해치우지도 못해.”
꿍얼거리며 하는 투정에 벨져는 피식 웃었다. 귀엽기는. 이제 겨우 시작한지 이십분 쯤 된 것 같은데 벌써 투덜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 좀 더 놀려주고 싶었기에 슬쩍 말을 흘렸다.
“점점 강도가 올라갈 텐데 그럼 나야 고맙지.”
“아냐, 그냥 내가 할게.”
벨져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순식간에 진지해진 목소리와 눈빛이 결연했다.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크리쳐를 본 벨져는 마른세수를 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는 루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모처럼 이글 녀석이 기특한 짓을 했으니 노래를 부르던 운동화 한 켤레 쯤은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벨져는 제 품에 안겨드는 루이스를 안고 토닥였다.
“마저 해야지.”
“이런 거 진짜 싫어…. 하아….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왜긴 왜야, 빨리 진행이나 해. 이대로 밤 샐 거냐?”
“이글이 보고 있겠지?”
벨져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며 루이스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다시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마우스와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 후로 다시 심기일전하고 크리처를 피해 다니며 이리저리 숨기를 반복했다. 옷장 속에 틀어박혀 랜턴도 못 키고 벌벌 떠는 주인공의 심리에 이입한 나머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루이스를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쫓기면서 괴상 쩍은 비명도 지르고 안 무서운 척 허허 웃다가도 퍼즐은 또 척척 잘 푸는 게, 아무래도 비제이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오히려 이글보다 인기가 많을 지도 모른다.
벨져가 중간중간 자기가 대신 하겠다고 선수 교대를 자처했지만 루이스는 무서워하면서도 끝끝내 마우스와 키보드를 놓지 않았다. 중간에 이글이 알려주러 올 테니 거기까진 꼭 자기가 다 하겠다는 건데, 이미 진즉에 반절을 넘어온 것 같다고 말을 해줘도 듣지를 않았다. 이럴 때 보면 또 묘한 데 고집이 세다. 어쨌거나 벨져는 이런 거에 하나하나 놀라는 것도 흉측한 크리처를 상대하며 도망치는 게임도 별로였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루이스 옆에서 훈수를 두며 루이스가 놀라고 무서워하는 걸 실컷 구경했다.
처음엔 그래도 체면치레를 하더니, 루이스는 가면 갈수록 방송이라는 걸 잊고 벨져에게 우는 소리를 하며 엎어졌다. 뭐가 나타날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면서 급히 랜턴을 끄네 어디에 숨네 하며 혼잣말을 하고,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손을 잡으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타박하면서도 손을 잡아주고, 대신 화면을 보며 옷장 문을 열어주고, 그러다 한 번 걸려서 세이브 지점까지 다시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렇게 중간까지 자기가 하겠다던 루이스는 마지막 보스의 방을 앞에 두고 정신을 차렸다. 쎄한 느낌에 벨져를 바라보니 벨져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루이스를 마주봤다. 그제야 이런데 흥미가 없는 벨져가 왜 자꾸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는지 깨달은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벨져의 무릎으로 엎어졌다. 허탈한 나머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그래? 미쳤어?”
“흐흐흐, 흐흐하하하.”
“게임 주인공이 미쳐간다고 너까지 미치면 어떻게 해? 이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빨리 끝내지?”
“아…, 진짜…. 하아…. 내가 진짜….”
“미련하긴. 그래서 내가 한다고 할 때 듣지 이제 와서 찌질대긴.”
루이스는 틀린 말 하나 없는 벨져의 얄미운 말에 그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좀 더 진심으로 얘기하지, 그걸 그냥 지켜보기만 하다니. 갑자기 밀려드는 억울함에 루이스는 의자도 뒤로 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 단 한 번도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본 적이 없었다. 루이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제가 바보짓을 한 거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루이스가 그러고 가만있으니 벨져가 루이스가 앉아있는 의자를 발로 밀어 옆으로 밀고는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았다. 루이스는 제가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벨져와 이제 최종장을 앞에 둔 게임 화면을 보며 멍때렸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게임이 끝나고 엔딩 영상이 재생되는데,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하아….”
“끝났네. 다 잡아먹히고 끝.”
“난……. 대체 뭘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벌칙게임 수행.”
얄밉기 그지없는 말에 루이스는 억울함을 담아 벨져의 팔을 쳤다. 벨져는 미간을 찌푸리며 루이스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게임을 껐다. 그제야 나타난 채팅창과 방송화면이 보여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이거 벌칙 게임이었지. 언제부턴가 그걸 까맣게 잊어버린 루이스는 침울하게 한숨을 내쉬곤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네, 다 했습니다. 다니엘은 네…. 이렇게 됐네요. 이상 프로즌이었습니다.”
“쉬레였습니다. 오늘 이 방송을 하게 해준 그 새끼를 보신 분은 제게 연락 주십시오. 그럼 이만.”
벨져는 늘어진 루이스를 대신해 방송을 종료했다. 잠깐 본 채팅창에 이글이 자러 갔다는 말을 본 벨져는 따로 방송용 캠과 마이크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컴퓨터의 전원도 끄고 루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열시쯤 시작해서 쉼 없이 달렸는데도 벌써 해가 떠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루이스.”
“몰라, 내버려둬.”
“자야지.”
루이스는 대답 대신 힘없이 벨져의 손을 쳐냈다. 저를 쏘아보는 붉은 눈동자에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으쓱했다. 도와준다고 할 때 됐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라는 명백한 표현에 루이스는 의자에 앉은 그대로 축 늘어져 천장을 바라봤다. 분명 시작할 때만 해도 깜깜했는데. 방에 전기불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방 안이 푸르스름하게 밝았다.
“해 떴네.”
“이리 와라.”
벨져는 루이스의 침대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루이스는 못 이긴 척 다가가 쓰러지듯 누웠고, 벨져는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함께 누워 눈을 감았다. 꼬박 밤을 새서 그런가 머리를 누이니 졸음이 쏟아졌다. 루이스도 마찬가지인지 별 말 없이 고른 숨을 내쉬고, 벨져는 루이스를 조금 더 바싹 끌어당겨 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어쨌거나 이제는 잠에 들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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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킹스맨au
2015/04/04
* 킹스맨AU
** 메모란으로 옮겼던 거 이어봄.
총알이 빗발치는 비상구, 수트를 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급하게 층계를 올랐다. 한창 쫓기는 중인 남자의 이름은 티엔 정, 안보국의 요원으로 도박장에 잠입했으나 그를 반기는 건 기관총이었다. 티엔은 탄창을 갈아끼우려 허벅지에 손을 뻗었으나 이미 다 써버렸다는 걸 깨닫고 바로 계단의 모퉁이를 돌아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총알이 박힌 허벅지의 출혈을 막기 위해 급히 넥타이를 풀어 동여맨 티엔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난관을 어찌 빠져나갈까 고민하는데 뒤에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몸에 딱 맞는 쓰리피스 수트에 까만 뿔테 안경, 거기에 한 손에 든 우산까지. 상당히 젊어보이는 건 둘째치고 차림새로 보아하니 도박을 하러 온 손님인 것 같았다. 국적은 아마도 영국. 그러지 않고서야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을 들고 다닐 리 없다. 조금 전까지 비상구에서 총성이 들렸을 텐데, 스위트룸에서 나오느라 못 들었는지 남자는 여유롭기 그지 없는 태도로 티엔에게 다가왔다. 헬기를 타려면 어떻게든 옥상까진 가야 한다. 비상구에서 저를 쫓는 무장경비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좋은 밤입니다, 미스터."
티엔은 바로 그의 목을 팔로 감아 제압하고 머리에 총구를 댄 채 비상구 문을 마주했다. 거세게 문이 열리고, 제가 잡은 인질이 양손을 들었다. 경비들은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들어올 수 없는 층에, 고급스러운 수트를 갖춰입은 남자를 보자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 받았다. 티엔이 서서히 다가가자 뒤로 물러나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인질 겸 총알받이를 찾은 모양이었다.
"이런 거친 방법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요."
남자를 끌고 헬기장으로 올라가던 티엔은 문득 코끝에 느껴지는 머스크향에 위화감을 깨달았다. 경비병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건 그렇다 쳐도, 남자는 인질 치고 허둥대거나 협상을 하려 하지도 않고 너무 침착했다.
"너, 정체가 뭐지?"
잠자코 티엔이 이끄는 대로 따라주던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티엔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티엔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건 절대 일반인이 아니다. 저를 잡으러 온 다른 세력의 사람인가. 티엔은 급히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남자가 티엔의 다친 다리를 을 붙잡는 게 빨랐다.
"자기 소개가 늦어졌군요. 갤러헤드입니다. 미스터 정."
순간 손목이 잡히고, 따끔하는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제 신분이 노출되었단 뜻이다. 헬기가 다가오는 소리를 끝으로, 티엔의 의식은 검게 물들었다.
지끈지끈한 둔통에 깊이 잠들었던 의식이 돌아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 티엔은 몸을 일으키려다 허벅다리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작게 신음했다. 하늘색 파자마에 다리엔 붕대가 감겨있고 주변은 마호가니 가구가 있는 걸로 보아 고급 호텔이나 그에 준하는 어딘가 같았다.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을 떠올린 티엔은 빠르게 주변을 살피고 머리를 굴렸다. 새로운 계획이 필요하다.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갤러헤드라고 했다. 영국 신사인 척 하면서 잘도 비겁한 짓을 하다니. 물론 이렇게 치료까지 해주고 좋은 방을 내주긴 했지만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티엔은 난로 옆에 놓인 부지깽이를 집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옷장 앞에 검은색 정장이 걸려있는 게 보였다. 가슴 주머니에 꽂혀있는 종이를 빼자 멋드러진 필체로 To. Mr. Jung 이란 메모가 적혀있어 티엔은 주변을 휘 둘러봤다. 방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지만 그래도 어디에 어떻게 도청장치나 카메라가 붙어있는지 몰랐다. 괴상한 놀이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장단에 맞춰주기로 한 티엔은 파자마를 벗어던졌다.
빳빳하게 다린 드레스셔츠를 맨 몸 위에 걸치고 소매는 단추 대신 옆에 놓인 커프스로 잠근다. 발목까지 완벽한 핏으로 떨어지는 바지를 입은 뒤 벨트의 버클을 정중앙에 오도록 맞추고, 발목을 덮는 검은 양말을 신고 나면 브로그가 없는 옥스포드의 순서였다. 짙은 붉은색에 광택이 나는 넥타이와 금장 핀. 티엔은 셔츠 단추를 잠그며 저를 위해 준비된 것들을 차례로 훑었다.
이 모두가 철저하다 못해 완벽한 신사의 옷차림을 위한 것이었다. 대체 이런 옷차림을 시켜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티엔은 거울을 보며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고 카라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집어들어 팔을 넣었다. 너무 부드럽지도 빳빳하지도 않은 재킷은 맞춤옷이라도 되는 듯 딱 맞을 뿐더러 티엔에게 퍽 잘 어울렸다.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수트만큼은 십점 만점에 십점을 줘도 될 만큼 탁월했다. 앞단추를 잠그고, 양손으로 재킷의 카라를 안쪽으로 잡아 매무새를 다듬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티엔은 거울을 통해 정중하지만 결코 친절하지 않은 신사를 바라봤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터."
"썩 유쾌한 아침 인사는 아니군."
"거친 방법은 선호하지 않아서요. 실례가 됐다면 사과드리죠."
자신을 갤러해드라 칭했던 남자는 퀸즈잉글리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어려보이는 얼굴 탓인지 전통적인 영국 귀족이라기보단 젠트리같은 인상이 강했다.
"이렇게 나를 끌고온 목적이 뭐지?"
"끌고 오다뇨. 피곤해보이시길래,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해드렸을 뿐인데 제 작은 친절이 과했던 모양이군요. 준비는 다 되신 모양이니 얘기를 조금 나눌 수 있을런지요."
"흠. 내게 선택권이 있나?"
남자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었다. 숙녀를 대하듯 정중하게 문을 열고 기다리는 게 언짢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티엔은 볼모나 다름 없는 신세였다. 상대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으며, 높은 확률로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본부에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없고, 부상을 입었으며 남자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은 굳이 따로 시험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혼자서 자신을 상대하러 나올 일도 없거니와 이렇게 여유로울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다. 그도 그저 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고 일단은 그 보스와 대화를 할 모양이니, 티엔은 일단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선 어떻게 탈출할지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무턱대고 탈출이나 저항을 하다간 감시와 감독이 더 심해진다는 건 시간을 들여 생각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었다.
진홍색 카페트가 깔린 복도와 벽을 보아선 역사가 느껴지는 게 꽤나 고풍스러운 저택같았다. 다른 곳과 달리 문이 두짝인 곳 앞에 다다른 갤러헤드는 잠시 멈춰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손을 들어 똑똑, 무겁지도 경박하지도 않게 문을 두드렸다. 정중하기 그지없고,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예절은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어색했다.
"랜슬롯."
"갤러해드."
티엔이 그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갤러해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회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카락의 사내. 잘 벼린 한 자루의 검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서류를 보다 고개를 들어 인사를 받았다. 티엔은 그가 서류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다부진 몸이며 뺨에 난 십자상처는 절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원탁의 기사의 이름으로 부르는 집단. 티엔은 머릿속에서 여러 기관들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이쪽은 말씀드린 미스터 정입니다."
"수고했군. 앉게."
랜슬롯이란 코드명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놓인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갤러해드는 티엔에게 커피와 차 중 어느쪽이 좋으냐 물었고 티엔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커피라 대답했다. 재킷을 정리하며 앉는데 고급스러운 소파의 쿠션이 지나치게 좋았다. 원래 불편한 자리는 맞지만 차라리 허름한 창고에서 묶이면 묶였지, 이런 분위기는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피차 할 말이 많지 않으니 간단하게 하지."
"바라던 바다."
"리원판. 그자에 대해 도움을 주었음 한다."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원한다면 상부에 요청하는 게 빠를 거다. 무턱대고 정보를 넘길 만큼 허술하진 않으니."
"중국과는 얘기가 된 내용이다. 원한다면 확인해보도록."
예상대로, 간단한 말 몇마디 뿐이었지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티엔은 미간을 찌푸렸고, 랜슬롯은 티엔 앞에 서류봉투를 가볍게 던지며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미심쩍긴 하지만 단단히 봉해진 서류봉투를 열어본 티엔은 제 상부의 인장이 찍힌 서류에 더 심각해졌다. 인증코드와 암호화된 시리얼넘버까지, 내부인이 아니면 알아볼 수 도 만들어낼 수도 없는 그랑플람의 기술이 들어간 서류는 위조품일 수가 없었다.
마침 다가온 갤러해드가 랜슬롯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티엔의 앞에도 고소한 향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갤러해드와 랜슬롯이 주고받은 눈빛. 티엔은 그 잠시의 시선교환에 묘한 기류를 느꼈다. 저건 동료들간에 지을 만한 눈빛이 결코 아니다. 동료요원이라기보단 비서 같은 행동에 티엔은 이 미남자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단번에 저와 같은 부류라는 걸 꿰뚫어본 랜슬롯과 달리 아무리 봐도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협력하겠다면 그 다음은 갤러헤드가 함께할 거다."
"그 전에 통화를 한 통."
랜슬롯은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티엔에게 주었다. 티엔은 상부와 연결되는 핫라인으로 전화를 걸었고, 곧 제 상사가 전화를 받았다. 잘 모르겠지만 명령이 내려왔으니 그들에게 협력하라는 그의 목소리에서 난처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꽤 영향력이 큰 조직이라는 것은 틀림없고, 명령까지 내려왔으니 티엔은 따라야 했다. 말이 협력이지, 뒤로 뺄 여지도 남기지 않고 밀어붙이는 게 강요나 다름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죠. 갤러헤드입니다."
"티엔, 티엔 정이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고, 티엔은 갤러헤드의 손을 맞잡았다. 해사한 웃음이, 드디어 그의 앳된 얼굴에 맞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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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April fool's day
2015/04/02
* 훌게au로 만우절을 챙기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이게 뭔가 싶어져서 미완...
4월 1일 만우절. 게임 회사들이 앞다퉈 명절을 쇠듯 만우절 이벤트를 뻥뻥 터트릴 때 사이퍼즈 역시 그 흐름에 합류했다. 합류라기 보다, 그들이 더 신나서 준비한 걸 내놓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유저들도 너나할거 없이 만우절이라는 축제에 몸을 맡겼으니, 프로팀인 홀든A도 예외는 아니었다.
1일 0시가 되자마자 '쉬레'와 '프로즌'의 트위터엔 이런 트윗이 올라왔다.
[HA_Belzer @belzerthebest:
안녕! 모두의 아이돌 쉬레입니다! >_< 오늘 친선경기로 아이스 셀랙할 거예욤! ]
[HA_Louis @realouis :
최강의 근딜러 프로즌이다. 오늘 오후 다섯시에 친선경기가 있으니 참여할 우민들은 대기하도록. ]
누가 봐도 계정을 바꿨다는 게 명백한 트윗에 사람들은 이게 다 귀여운 만우절 장난이려니 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HA_Belzer @realouis 루이스님 루이스님 뭐하세요?]
[HA_Louis @belzerthebest 야 가서 커피좀 사와. 돈 줄게.]
[HA_Belzer @realouis 헐ㅠㅠ 지금 저 커피셔틀 시키시는 거예요 형?]
[HA_Louis @belzerthebest 형소리 듣기 좋네.]
[HA_Belzer @realouis 형! 형! 형! 아 나도 형이라고 불리고 싶다. 힝ㅠㅠ]
뒤이어 쉬레의 트윗에 주르륵 달리는 형과 오빠 소리에 쉬레의 핸드폰은 쉴새없이 징징거리며 알람을 울렸다. 쉬레에게 형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 중에는 같은 팀의 토마스 스티븐슨도 있었고, 평소 쉬레를 좋아하지만 쉽사리 말을 못 붙이는 사람과 프로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늘 딱딱하고 재수없는 소리나 하던 사람의 트위터 계정이, 비록 안에 있는 사람이 바뀐 걸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프로필과 닉네임을 걸고 절대 할리 없는 애교 섞인 말투를 하니 그 갭이 엄청났다. 게다가 프로즌은 팬서비스가 투철하기로 소문난 사람. 늘 씹히는 게 일상이었던 화면 너머의 사람들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돌아오는 멘션에 별을 찍고 캡쳐를 하기 바빴다.
"아, 내 트윗엔 언제 답멘할 건데!"
"야 네가 얼마나 그동안 사람들을 방치했으면 이러겠어. 지금 알림창 볼 새도 없다."
"넌 알림 꺼놨잖아. 그래놓고 그런 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잠깐만. 이거 마저 답멘해주고."
이층 침대에 누워 루이스의 핸드폰을 가지고 노닥거리던 벨져는 루이스한테 답멘이 돌아오는 대신 시답잖은 것들이 자꾸 말을 거는 통에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밖에다 프로즌이랑 놀아야하니 더 멘션 보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말마따나 이건 제가 뿌린 씨앗이기도 하기에 벨져는 홱 돌아누웠다. 루이스는 벨져의 핸드폰으로 트윗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며 노트북까지 켜는 중이었다.
"그럼 내 커피는."
"직접 사다 먹어. 그리고 지금 열두시 반이야. 밤 새려고?"
"나쁜 새끼."
"네가 먼저 하자며."
루이스의 노트북이 켜지는 소리에 벨져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야 겨우 자기를 보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가까이 오라 손가락을 까딱였으나 루이스는 다시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봤자 핸드폰을 넘겨줬다 뿐이지 노트북을 켠다 해도 제 계정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벨져는 한껏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티를 내려 루이스의 핸드폰 액정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터넷 창을 키더니 벨져의 아이디를 치고 그대로 트위터에 로그인했다.
"뭐야."
"왜?"
"너, 내 비밀번호는 어떻게 아는 거냐?"
"너, 나, 너, 나. 이걸 못 뚫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루이스는 벨져를 돌아보지도 않고 알림창을 켜더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라 벨져는 그 긴 다리를 이용해 이층 침대에서 훌쩍 내려와 루이스의 노트북을 뺏어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벨져."
"커피 먼저."
루이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지만 벨져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턱을 치켜들었다. 곧 죽어도 제게는 잘못이 없다는 태도에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만우절이랍시고 장난을 하는 의미가 하나도 없었다. 루이스는 지갑을 챙겨 일어나며 의자에 걸어둔 후드를 챙겼다. 나가서 확 안 돌아와버릴까보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돌아올 자신을 알기에 루이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원, 벨져 홀든에게 길들여지는 사막여우가 된 느낌이다. 루이스가 방을 나가려 문고리를 잡자 벨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루이스를 멈춰세웠다.
"카드 가져가라."
"나 지갑 있어."
"하, 잔소리 말고."
평소 같았으면 주는 대로 받았겠지만 루이스도 심통이 나있던 터라 소심한 반항을 해보았지만 벨져는 코웃음치고는 루이스를 향해 카드를 던졌다.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날린 카드를 잡아챈 루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복수랍시고 얼마를 긁어도 벨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또 제가 긁어봤자 천성이 소시민인지라 쫄려서 많이 긁지도 못했다. 벨져가 제게 던져주는 옷만 해도 뒤에 붙는 0이 얼마인지. 루이스는 전에 토마스가 귓속말로 대충 가격을 말해준 걸 듣고는 그냥 모르는 게 약이라 생각하기로 다짐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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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어느 겨울
2015/04/01
* 17살 루이스, 그랑플람 소속 주의
하랑의 기분은 몹시 좋지 않았다. 설이라고 새 옷을 맞춘대서 들떠있었더니 웬걸, 재단사가 치수를 재서 깔쌈한 양옷 한 벌 하나 했더니 딱딱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사부는 추위에 그닥 도움도 안 되는 칙칙한 색의 모직 코트 몇 벌을 골라 내밀었다. 뭐 하나 자기 마음대로 고르지도 못하게 할 거면 왜 따라오라고 했담. 하랑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 그냥 그럼 사부가 알아서 사오던가! 존나 춥다고!"
"하랑, 몸을 편안하게 하면 수련에 뒤처지는 법이다."
"아오, 씨!"
하랑은 더 말해봤자 티엔이 같은 말만 반복할 것을 알기에 답답해 가슴을 쳤다. 그냥 다 포기하고 빨리 돌아가 따뜻한 난로 앞에서 몸이나 녹이고 싶었다. 마틴도 그렇고 브루스도 그렇고, 대체 이런 날씨에 어떻게 밖에서 그렇게 입고 하루종일 있을 수 있는 건지, 얇기만 한 옷들을 보며 하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선에 있을 땐 겨울이면 옷 안에 솜을 넣어 누비곤 했는데 천도 솜도 많은 나라에서 왜 겨울옷이 이렇게 얇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따뜻한 옷은 따로 있고 제 사부가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저를 괴롭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티엔이 검은색 코트를 건네고, 하랑은 그를 가늘게 노려보며 받아들었다.
"거, 나온 김에 걔 옷도 좀 사주지그래? 아무리 얼음 능력자라 해도 그렇지 옷이 너무 얇드만."
"...하랑. 여긴 남성복 매장이다."
"난 뭐 눈이 없는 줄 알어? 아까 오다보니 사방이 다 옷가게더만. 쪼잔하긴."
하랑은 배를 타고 영국에 도착하던 날 저와 티엔을 맞아주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때도 제법 날이 추웠는데 루이스의 옷차림은 여전히 가을 같았다. 아무리 얼음쟁이라도 그렇지, 춥지도 않은 걸까. 짧은 치마를 홀랑홀랑 까뒤집고 다니는 여자애들에 비하면 루이스의 차림은 조신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옷이 짧은 거나 얇은 거나 추워보이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한창 때 여자애들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게 고맙다. 하지만 때론 보는 쪽이 더 민망해지기도 했는데, 회사의 공주님도 그렇고 가슴을 훤히 드러낸 조선의 기집애도 그렇고 노출이 너무 과했다. 얼마 전엔 헐벗은 거나 다름 없는 차림으로 공성전을 하기까지 했는데, 하랑은 그 판 내내 기겁하느라 집중을 못했다. 그 바람에 수련의 성과가 없다며 호되게 고생한 하랑은 루이스의 그 꽁꽁 싸맨 차림새를 다른 사람들이 본받았으면 했다. 그런 부끄러운 차림을 하고도 당당하다 못해 치마를 펄럭이며 뛰어다니고 누워있는 사람 위를 훌쩍훌쩍 넘어다니니 심장에 해로웠다.
그런데 비해 루이스의 치마는 무릎 위로 넘어가지 않았다. 정강이에서 무릎 언저리를 오가는 치마에 흰 셔츠. 서점에서 일할 때 입는 게 퍽 단아하면서도 고왔다. 조막만한 패랭이꽃이나, 난초같이 소박하고 청순한 미인상이라 그런가 하랑은 루이스가 남사스런 차림을 한 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공성을 할 땐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에 티셔츠, 후드차림이 기본이기도 하고 애초에 생각해보면 루이스는 맨다리를 내놓는 법이 없었다.
누구 때문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가끔 다른 여자애들이 입는 치마를 부러운 듯 보는 걸 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또 아닌 것 같던데. 하랑은 팔랑팔랑한 원피스를 입은 루이스를 떠올리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팔짱을 끼고 추운 거리를 걸으며 흘러내린 목도리를 다시 둘둘 둘렀다. 새빨간 색의 보드라운 목도리는 루이스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떠준 것이었다.
하랑은 추위에 한껏 목을 움츠리며 루이스를 떠올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참한 건 둘째치고, 기본적으로 루이스는 좋은 애였다. 티엔을 따라 배를 타면서부터 꾸준히 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아냥과 멸시 어린 눈길에 짜증을 내다 못해 주먹질을 하고 난 뒤라 기분을 잡칠 대로 잡친 후라, 하랑은 웃으며 손을 내민 루이스를 무시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도 루이스는 하랑에게 잘 대해주었다. 수련이다 뭐다 아는 거라곤 일과 수련밖에 없는 것같은 티엔 대신 포트레너드를 구경시켜주고 영어가 짧은 하랑과 손짓발짓으로라도 대화를 해주기도 했다.
얼굴만 보면 제 또래 같은데, 하는 행동거지나 분위기가 묘하게 어른스러워서 한동안 하랑은 루이스가 저보다 연상인줄로만 알았다. 특히 공성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고 칼이나 주먹이 직격하려는 순간 제 앞에 깔리는 얼음 결정을 보면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만다.
아무래도 능력이 능력이다보니, 하랑은 저만치 앞서있는 사부의 등보다 루이스의 등을 보는 일이 많았다. 둘 다 믿음직하긴 하지만 티엔의 등과 루이스의 등에서 느껴지는 믿음직스러움은 조금 그 성질이 달랐다. 티엔의 등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라면, 루이스에게선 절박함이 느껴졌다. 모든 걸 제가 해결하고 떠맡으려는 뒷모습은 저보다도 가녀리지만, 그걸 뛰어넘는 기백이 있었다. 루이스는 뒤에 지켜야할 사람이 있는 이상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등이었다. 그러니 연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하랑은 최근 루이스가 동갑이라는 걸 알고 꽤 놀랐다. 하랑이 루이스를 누나, 누나하고 부르며 따르는 것을 본 티엔이 농땡이 피우지 말라며 한소리 하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터였다. 양놈들이 위아래 없이 말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하랑은 루이스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꽤 좋았던 터라 생일이 빠르단 걸로 우겨 누나라 불렀다.
마틴도 친절하고, 곰 할배도 듬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보단 여자가 좋은 법이었다. 하랑은 자연스레 시간이 남으면 루이스와 어울렸고, 그때마다 티엔은 못마땅해하며 놀 시간에 수련에 정진하라 했지만 그 역시 루이스에게 약하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칙칙한 사내놈들 사이에 열 일곱밖에 안 된 꽃같이 예쁜 여자애가 있으니 어찌 안 예쁘랴마는. 걸음과 함께 정처없이 흘러가던 생각은 문득 한 곳에 멈춰섰다. 루이스는 티엔의 제자도 아니고, 여전히 서점에서 일하는 데다 마틴이나 브루스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 않는다. 티엔만 보면 불편한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마틴을 생각하면 더더욱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사부."
"또 무엇이냐."
"루이스는 왜 그랑플람에 들어온 거야?"
순간 티엔의 미간이 움찔했다. 흔치 않은 반응에 하랑의 궁금증은 더 크기를 불렸고, 하랑은 티엔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보면 굳이 다른 사람 놔두고 티엔과 저를 맞이하러 루이스가 나올 이유가 없었다.
"사부가 꼬신 거야?"
"꼬시다니."
"아니 그럼 걔가 왜 들어왔는데? 어?"
"들을 가치도 없군. 그 얘기는 더 꺼내지 마라."
티엔은 고개를 저으며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자기는 두꺼운 코트 입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했으니 춥지도 않다 이거지. 하랑은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목도리 안으로 얼굴의 반을 쏙 넣었다. 이렇게 추운데 루이스는 왜 아직도 가디건 차림인 걸까. 잠깐 서점에 들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 벌어진 티엔과의 거리에 같이 가자고 소리친 하랑은 잰걸음으로 티엔의 뒤를 따랐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들 뿐이라니깐.
"어서오세, 티엔."
딸그랑 울리는 종소리에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늦게 일을 마치는 회사원이나 은행원들 뿐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손님 아닌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능력자에 관한 책은 아직 새로 들어온 게 없는데요."
"널 보러 왔다."
루이스는 돌려말하지도 않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읏샤, 작게 소리를 내며 바닥에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자 티엔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날이 춥더군."
"그러게요. 이제 곧 비 대신 눈이 오겠어요."
"하나 샀다."
티엔이 내민 쇼핑백에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받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티엔이 루이스의 손에 손잡이를 들려주려 해 루이스는 손을 빼며 한걸음 물러났다.
"괜찮아요."
"루이스."
"정말 괜찮아요."
티엔은 눈을 맞추려하지 않는 루이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색해진 공기가 무거웠고, 제가 대하고 있는 건 열일곱짜리 여자애였다.
"루이스."
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하랑이 궁금해하지 않았더라면 떠올릴 일도 없을 정도로 평범한 하루였다. 다만 그때는 루시 일로 티엔이 날카로워져있었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 잠시 방황하던 때였다는 게 중요했다.
"이미 많이 주셨어요. 티엔, 자꾸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푹 꺼진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다가와 티엔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티엔은 자기가 주는 건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주기만 하려는 소녀를 바라봤다. 자신이 상처입는 게 두려워 호의는 받으려 하지 않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도 싫다. 티엔은 루이스가 하랑에게 잘해주는 것도 마틴과 남매처럼 지내는 것도 싫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왜 자신의 사람이 되어주지 않는 것일까. 티엔은 그랑플람에 들어오라는 권유도 한사코 거절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문을 닫아버렸던 날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애먼 책만 노려봤다.
루이스는 험악한 무표정의 티엔을 보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이 사람은 어렵다.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섰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무뚝뚝하기는 다이무스와 다를 바가 없지만 루이스는 티엔이 자꾸만 제게 무언가를 해주려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걸 아는 것과 편하게 대하는 것은 다르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티엔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면 언제나 눈이 마주친다. 다른 사람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제게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억하고 챙겨주는 사람에겐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이 돌려줄 능력도 무엇도 없는데 왜 자꾸 주려는 걸까. 루이스는 티엔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계속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돌아서기라도 하면.
루이스는 가끔 공성전에서 마주치는 루시 리를 볼 때마다 긴장에 침을 삼켰다.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루이스에게도 껄끄러웠다. 그녀가 티엔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티엔은 제게 그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대해줄 리도 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빛나는 루시를 보고 있으면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자신은 너무 초라한 사람이라서 견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제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이스가 티엔의 끈질긴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회사에 먹혀버릴 지도 모르는 그랑플람이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사와 연합이 싸우는 동안 죄 없는 사람들이 다쳤고, 그들이 야욕을 채우려는 동안 거리에선 동전 한 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루이스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제 능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루이스가 그랑플람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건 고작 열두살밖에 안 된 메어리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었다. 월급 봉투를 받은 루이스는 과자와 조그만 선물을 사서 제가 자란 고아원을 향했고,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들것에 실려나가는 메어리를 봤다. 고아원을 나온 루이스는 거리를 걸었다.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티엔을 만났고 아는 얼굴에 그만 눈물이 흘러 넘쳤다. 혹시라도, 제가 티엔이 처음 권유했을 때 그랑플람에 들어갔더라면, 그래서 재단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면, 그랬으면 메어리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 속에 스스로 숨을 멈추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루이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쪼그려앉아 울었다. 티엔이 수차례 왜 그러냐 물으며 울지 말라 했지만 모든 게 제 탓 같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티엔의 손에 이끌려 간 그의 집에서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엔은 더이상 묻지 않았고, 루이스는 그랑플람에 들어가겠다는 말 한 마디만 했다. 그 후로 쭉, 티엔은 저만 보면 무언가 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고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시간이 늦었어요."
"바래다주겠다."
"...잠시만요."
티엔 정은 괜찮으니 먼저 가란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늘 당당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자신때문에 축 쳐져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루이스는 정리를 서둘렀다. 내일 아침에 해야할 일까지 미리 정리해둔 루이스는 서점 안을 밝히는 등을 끄기 위해 스위치 앞에 섰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쇼핑백에서 코트를 꺼내 루이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버리던, 환불을 하던 네 마음대로 해라."
루이스가 난처해했지만 티엔은 여지조차 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겨울용 르블랑 코트는 비싼 만큼 제 값을 하는 상품이니 적어도 추위에 떨진 않을 것이다. 기성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 봄에 재단에서 단체로 옷을 맞추면서 루이스의 치수도 남아있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겨울 코트를 따로 주문했다. 그게 벌서 보름 전이었고 오늘에서야 티엔 앞으로 도착해 전해주러 온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환불도 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모르겠지만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은 대개 두둑한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잘 입을게요."
"가지."
티엔은 루이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코트에 팔을 꿰는 걸 보며 문을 열었다. 하얀색을 기조로 한 코트는 루이스에게 퍽 잘 어울렸고 티엔은 제 안목이 훌륭했다는 것에 뿌듯해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 검은 코트와도 퍽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서점의 문을 잠그는 루이스를 보며 본디 흑과 백으로 나타나는 음양은 하나라는 생각을 하던 티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이스는 문을 잠그곤 티엔을 올려다봤고, 티엔은 그 투명한 붉은 눈을 보며 제가 잠시라도 속된 마음을 품었던가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루이스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몇 해만 더 있으면 성년이라곤 해도 아직 한참 어린애였다. 게다가 저와는 띠동갑이니, 자칫 잘못했다간 연합의 테라듀 능력자에게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손목에 감기던 차가운 수갑의 감촉을 떠올린 티엔은 팔을 내밀지 않고 앞서 걸었다. 곧 빠른 걸음으로 쫓아온 루이스가 옆에 걷기 시작했지만 티엔은 루이스보다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서 걸었다. 그러다보니 걷는 게 아니라 경보 수준이 되어버리고, 그러다보니 쫓아오던 루이스가 그만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으왓!"
재빠르게 넘어지려는 루이스의 허리를 낚아챈 티엔은 급격하게 줄어든 거리에 잠시 숨을 집어삼켰다. 놀란 루이스가 눈을 깜박이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소녀를 바라봤다. 주황색 가스등불 아래 제 품에 안겨있는 루이스. 가슴이 크게 뛰고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그녀가 꼭 끌어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가, 감사합니다."
"...발밑에 집중해."
"당신이 너무 빨리 걸으니까.... 아얏."
"괜찮나? 쯧."
발목을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티엔의 가슴을 밀치고 물러난 루이스가 한 걸음 내딛다가 눈살을 찡그렸다. 티엔은 바로 무릎을 굽혀 루이스의 발을 살폈다. 루이스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티엔이 발목을 잡자마자 시큰거리는 통증에 작게 신음을 내고 말았다.
"안 되겠군. 업혀라."
"네? 아뇨, 혼자 걸을, 으아앗...!"
티엔은 루이스의 발목을 놓고 그대로 무릎 아래로 손을 넣었다.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일어나는 바람에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티엔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업히고 만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듬직하고 너른 등에 업혀있자니 어째 쑥스러웠다. 그것보단 놀란 심장이 자꾸 큰 소리를 내며 뛰는 게 신경쓰였지만 티엔이 루이스를 고쳐 업으면서 루이스도 자세를 고쳤다.
"나빴어요, 진짜...."
"제대로 발밑을 안 본 네 부주의겠지."
"하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도 없다. 루이스는 하랑이 짧은 영어로 티엔 흉을 늘어놓던 걸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랑의 말대로 티엔이 한 번 막무가내가 되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루이스는 티엔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얹었다. 티엔의 등에 업혀있으니 찬 겨울바람이 부는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제 다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의 팔과 너른 등, 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덥다는 게 루이스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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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봄비
2015/03/31
* 봄, 만남, 도서관에서 이어짐
어김없이 네시 반이 넘어가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도서실을 정리한 루이스는 마우스를 흔들어 화면을 띄웠다. 검은 머리에 단정하고 늠름하게 생긴 3학년 선배는 문 하나도 그냥 여는 법이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세를 고쳤다. 낡은 미닫이문이 소리도 많이 내지 않고 열렸다. 워낙 도서실에 학생들도 별로 없는데다 티엔이 들르는 시간은 도서실 마감 시간과 가까웠기에 루이스는 혼자 티엔을 맞았다.
"자주 오시네요."
"면학은 학생의 본분이니까."
티엔은 그 말에 슬며시 올라가는 루이스의 입꼬리를 보며 바코드 전산 처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부활동이 끝나고 들르는 도서실에서 나누는 잠깐의 대화. 티엔은 그 짧은 시간이 꽤 기꺼웠다. 요 며칠동안 지켜본 결과, 루이스는 교무회의가 있는 월요일과 수요일 방과 후엔 꼭 도서실에 있었다. 그걸 알게 된 티엔은 월요일과 수요일이면 부활동을 마치고 꼭 도서실에 들렀다.
그냥 두고 가면 되지만 티엔은 루이스가 바코드를 다 찍기를 기다렸다. 얼굴도 곱지만 티엔은 루이스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모양이 예쁜 손가락이 책을 정리하고, 바코드를 다 찍으면 모니터를 보고있던 루이스가 티엔을 바라봤다. 그럼 티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을 빌리기 위해 서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책장에 서있으면 선생님이 돌아와 잠시 루이스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곧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이 반납한 책을 꽂으러 서가로 들어왔다.
책을 전부 고른 티엔은 일부러 루이스가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 책을 가지고 나온 티엔이 대출을 하는 사이 루이스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서기까지 약 3초. 지퍼를 죽 올려 어깨에 가방을 맨 티엔도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앞에 서면, 바로 뒤에서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엔은 문을 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텅 빈 복도에 겹쳐들리는 발소리. 그 묘한 기분에 티엔은 잠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있던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는 건 순식간이었고, 제가 돌아볼 줄 몰랐는지 루이스도 그대로 멈춰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잠시 사로잡혔던 티엔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 비...."
"우산, 안 가져왔나?"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살피는 티엔은 가방 안에 고이 들어있는 접이식 우산을 떠올렸다. 어차피 제가 사는 자취방은 멀지 않고, 기껏해야 봄비니 그리 거세지도 않다. 곤란해하는 루이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우산을 써도 비를 피하기 충분하단 생각에 티엔은 그녀를 바래다줄 생각이었다. 루이스는티엔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나올 땐 맑았으니까요."
"어느쪽으로 가나? 바래다주지."
"아, 아니에요. 안 멀어요. 이 정도는 맞아도 돼요."
바래다주겠단 말에 당황한 루이스가 손을 내저었다.그 모습이 퍽 귀여워 티엔은 아무 말도 않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옆에 따라붙은 루이스가 연신 안 그래도 된다고 설명했지만 티엔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여자애가 비를 맞고 가게 둔다는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학교 현관에 다다른 티엔은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먼저 가보겠다 말하는 루이스의 옆에 서 우산 반쪽을 씌워주자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요 앞에 윈더미어까지 부탁드려요."
어렵게 꺼낸 말에 티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전에도 그 서점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티엔은 입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정사로 따지면 티엔 역시 그리 할 말이 없었다. 신경쓰는 건 아니지만 입학 상담이라거나 자기소개서엔 선생님들 사이에 꾸준히 오르는 주제가 바로 티엔의 가정사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홀어머니 아래서 문무를 겸비한 완벽한 아이. 티엔은 자신을 평가하고 수식하는 말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완벽해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사람보다 강해지는 것 정도에나 흥미가 있는 정도였다.
더러는 주위는 돌아보고, 친구도 사귀고 놀라고도 하지만 티엔은 그런 데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텐데. 티엔은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곤 그녀쪽으로 우산을 슬쩍 기울였다.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루이스를 곁눈질하다보니 샴푸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희미한 꽃향기, 우산 아래 단 둘. 티엔은 하얀 목덜미와 세라복 안쪽으로 흘긋 보이는 쇄골에 마츤 침을 삼키며 정면을 바라봤다. 루이스의 팔과 닿아있는 팔이 간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윈더미어까지는 오분이면 넉넉한 거리였고, 두 사람은 한 마디 말을 주고받는 법도 없이 걷기만 했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춰 걷다보니 평소보단 더 걸렸을 테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저, 여기까지면 돼요.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라."
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그녀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들어간 루이스는 서점 주인과 반갑게 인사하며 싱긋 웃었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저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앞치마를 둘러맨 루이스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다 눈이 마주쳤다. 그바람에 티엔은 훔쳐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움찔했지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었다.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티엔은 서점에서 발을 돌렸다. 정말 사소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루이스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수고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빗속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티엔의 어깨는 약간 젖어있었고, 입가엔 희미하게 웃음이 걸려있었다. 봄비에 언 땅이 녹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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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네가 시킨 택배의 정체를 나는 모르고 있다.
2015/03/30
※ 후로게이머au는 사랑임니다....
띵동, 하고 현관문의 벨이 울리는 소리에 방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토마스가 냉큼 일어났다. 인터폰에 보이는 익숙한 택배 아저씨의 모습에 토마스는 바로 현관을 향했다. 어제 시킨 신발이 온 걸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노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갈색 골판지 상자를 건넸다. 신발이라기엔 부피가 작아 토마스가 어리둥절한 사이 아저씨가 PDF를 꺼내 펜을 내밀었다.
"루이스 홀든씨 본인이신가요?"
"아, 아뇨."
"그럼 동료에 체크하고 서명해주세요."
토마스는 이름을 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루이스 홀든이라니. 루이스 홀든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홀든'이라니!!! 토마스는 황망히 닫히는 철문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박스에 붙은 택배 용지를 살폈으나 프린트 된 글자는 누가 봐도 Louis Holden님 이었다. 애써 부정을 해보려던 토마스의 여린 마음은 그렇게 알파벳 여섯 글자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토마스는 테이블 앞에 앉아 두 손깍지를 끼고 아치를 만들어 얼굴 앞에 두고 외출한 형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껏 진지한 얼굴에 평소엔 웃느라 눈에 띠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가 더해진 것도 모자라 뒤에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모 만화의 사령관 같았다. 그 모습에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두 홀든과 루이스는 현관에서 멈칫 발을 멈췄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심각한 걸까. 순간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지나갔다. 은퇴하나? 다른 팀으로 이적? 그것도 아니면 캐나다의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대체 뭐지? 그 정도로 토마스의 얼굴이 심각했기에 좀처럼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벨져마저 슬쩍 눈치를 보고 루이스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나마 우리 중 제일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건 너니까 빨리 가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 라는 눈빛에 루이스는 난처해하면서도 토마스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저어, 토마스. 무슨 일 있어?"
"선배."
"으, 응."
"말해봐요. 언제부터예요?"
"뭐가?"
루이스는 제게 따지듯 묻는 토마스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부터냐니. 루이스는 토마스가 흥분한 나머지 말을 다 생략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바람에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이글과 벨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토마스가 루이스의 어깨를 턱 잡았다.
"선배!"
"아,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형은 닥치고 있어요!"
늘 웃고 네네 응석을 받아주던 애가 화를 내니 무섭다. 이글은 저를 쏘아보며 소리치는 토마스를 향해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란 말인가. 이글은 흘긋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 골판지 상자를 보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 성인용품이라도 샀나? 그러지 않고서야 토마스가 아무리 루이스 일에 민감하다지만 이럴 리가 없었다. 아니지, 그랬다면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거나 부끄러워하고 있을테니 그것도 아니다. 이글은 토마스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가만히 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 문제의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선배! 설명해주세요!"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루이스는 잠시 상자를 보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토마스를 보곤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걸로 이런 헤프닝이 일어나다니. 하여간 어린 후배가 귀여워 살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웃으며 토마스가 한껏 멋내 세운 머리카락을 흐트리며 쓰다 듬었다. 토마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루이스의 손을 피하지 않아 금방 머리가 엉망이 됐다. 하지만 지금 토마스에겐 머리보다 루이스의 이 여유로운 태도가 더 신경쓰였다.
"악, 선배! 왜 그러는데요!"
"우리 토미가 귀여 워서 그러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야?"
"겨, 겨우라뇨!"
벨져는 영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사이좋은 토마스와 루이스를 지켜봤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언뜻 보니 이 상황을 이해한 건 루이스뿐이라 벨져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박스를 들었다. 내내 궁금해하던 이글도 벨져의 옆으로 와 상자에 붙어있는 배송 정보를 읽었다.
"루이스 홀든 님."
"흐응."
"푸하하하하하핫!"
이글은 소리내어 읽고는 바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콧소리를 길게 내며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 게 꽤 흡족해보였다. 벨져의 그 반응이 토마스가 내내 하던 고민에 설득력을 더했다. 셋 중에 누구인가 했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단 말인가. 토마스는 벨져의 그 여유작작한 태도에 발끈해 루이스를 향해 물었다.
"선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설마 진짜로...!"
"아니. 토마스, 그거 아냐."
루이스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순간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루이스는 신경도 안 쓰고 토마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마우스 새로 사는데 배송 정보에 성은 필수입력이더라고. 그래서 생각나는 거 중에 제일 짧은 걸로."
난리를 친 게 부끄러워질 정도의 사소한 이유에 토마스는 뭐라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이글은 아직도 숨이 넘어가라 웃다 못해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며 흐느끼는 중이었다.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흑역사 적립이다. 이글은 분명 앞으로 쿨타임이 될 때마다 이걸로 놀릴 것 이고, 인터뷰에서 말해버리거나 방송 중에 말할 지도 몰랐다. 그걸 깨닫자 마자 뺨에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토마스는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아났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달아나는 걸 지켜보다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웃느라 정신 없는 사람 대신 택배를 뜯었다. 에어캡에 싸인 제품이 제가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인 걸 보고 루이스에게 제품 상자를 건네자 루이스가 받아들고는 실실 웃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흥, 아직 넌 그거 쓸 급이 아닌데."
"어. 너 주려고 샀어."
"뭐?"
태연하게 대답한 루이스는 다시 뜯지도 않은 상자를 벨져에게 건넸다. 벨져가 쓰는 마우스는 게이밍 마우스 중에서도 비싼 순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웬만한 전자기기 하나 값 정도 되는 지라 다이무스가 경비로 처리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왜, 전에 스튜디오에서 인식 잘 안 먹는다며. 그래서 내 거 사는 김에 하나 샀지. 내 건 그 아래 있을 걸? 없어?"
벨져는 상자에서 신문지뭉치를 빼고 다른 마우스 하나를 더 꺼냈다. 제가 쓰는 것보다 더 가볍고 클릭 소리가 적은 루이스가 애용하는 모델. 그 마우스는 벨져가 루이스에게 프로즌 전용이라며 사준 것이었다.
"쯧, 이게 벌써 몇 년전건데 아직도 쓰냐."
"왜, 그거 프로즌 마우스잖아. 진짜 프로즌이 산 거 알면 회사에서 좋아라 하겠다. 프로즌 팬들이라면 다 하나씩 갖고 있는 거 아냐? 근데 내건 없어?"
이글이 눈물을 닦으며 박스 안을 기웃거렸다. 벨져는 이글을 쳐내며 문제의 골판지 상자 안에 마우스를 넣었다. 이글이 인증샷 하나만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들었지만 벨져는 개소리 하지 말라며 달려드는 이글을 발로 밀고는 방으로 향했다. 벨져가 이글의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린 바람에 그마저도 무산됐지만, 이글은 아쉬움에 머리를 긁적이다 루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저었다. 한참 웃다가 이글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신문지뭉치를 던졌다. 잽싸게 받아챈 이글이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쓰레기통으로 던져넣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팔을 얹었다.
"하여간, 노답새끼들이라니깐."
"너도 만만치 않아."
"하하. 그건 그래."
"오랜만에 치킨이나 시켜먹을까?"
"오, 좋지. 야! 토마스! 니네 형수가 치킨 쏜댄다!"
루이스는 이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과장스레 몸을 수그린 이글이 엄살을 부리며 그대로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고, 결국 한바탕 소동은 장을 보고 돌아온 아이작에게 혼나며 치킨을 뜯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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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2015/03/22
* 현대 고등학교au
바야흐로 꽃이 피는 삼월. 이제 삼학년이라 고전무술부의 부장직은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티엔은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젖은 머리를 털며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증축 공사로 책을 빌린 뒤 처음으로 도서관을 개방한 날이라, 책때문에 가방이 무거웠다. 도서관이 닫히는 건 네 시 반. 씻고 나온 게 네시 십오분이었다. 더 늦기 전에 반납하기 위해 미닫이 문을 연 티엔은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밀려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먹구름이 낀 하늘 같은 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가에 서있던 여자애가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쳤다.
“저기, 아직 대출은 안 되는데요....”
“아, 아아. 반납이다.”
“그럼 이쪽으로.”
파란 리본을 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입생인 것 같은데, 첫날부터 도서관에 익숙한 듯한 태도에 티엔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여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당연한 듯 대출대 안쪽에 앉은 여학생은 책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데 비해 검은 색 세라복 위에 가디건도 입지 않은 채였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걸까. 티엔으로선 드문 타인에 대한 흥미였지만 여학생은 책 다섯 권의 반납 처리를 마치고 티엔을 올려다봤다.
“이제 가셔도 돼요.”
“1학년?”
“네. 그런데요.”
“...이름은?”
“루이스.”
그 이름의 울림이 그녀와 제법 잘 어울렸다. 티엔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티엔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티엔은 깜박이는 그 붉은 눈동자가 꽤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혹시 선생님께 용무가 있으신 건가요?”
“...그건 아니다만.”
“곧 문을 닫을 시간인데요.”
“알고 있다.”
의미 없는 문답. 이러고 있는 게 시간낭비라는 건 알지만 티엔은 좀처럼 걸음을 옮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박또박 말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엔 아직 중학생 티가 났고, 갸름한 얼굴선이며 가는 목덜미, 소매 사이로 흘긋 보이는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게 실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티엔은 괜히 교복의 칼라를 매만지며 돌아섰다. 어차피 도서부원이라면 앞으로 종종 마주칠 터, 그런데 왜 지금껏 관심도 두지 않았던 도서부원에게 흥미가 생긴 건지. 티엔은 대출이 안 된다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저기요.”
그리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티엔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이 도서실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녀와 자신 단 둘 뿐. 천천히 몸을 돌리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에게 다가왔다.
“책갈피. 빼먹으셨어요.”
“...흠.”
티엔은 책갈피를 쓰지 않는다. 가방 안에 넣어놓은 유인물이나 메모지가 끼워져있던 게 아닐까 하는데 예상 외로 루이스가 내민 것은 얼마 전에 참고서를 사면서 받은 영수증이었다.
“여기보단 그 건너편 골목에 윈더미어가 나아요. 포인트 적립은 안 되지만 얼굴 조금만 익히면 싸게 주시거든요.”
윈더미어라는 소리에 티엔은 후미진 간판을 떠올렸다. 낡은 서점과 눈앞의 여학생. 티엔은 무표정한 루이스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는 그것뿐이었는지 루이스는 티엔이 반납한 책을 양손에 들고 서가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티엔은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의 복도를 걷는 내내 기분좋은 꽃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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