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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0 [티엔ts루이] Maker
- 2015.06.03 [홀든ts루이] 어느 메이드의 하루 : 오전
- 2015.06.03 [다이루이] 齒亡脣亦支.
- 2015.06.01 [티엔루이벨져] 젊은 왕과 집사, 그리고 연적
- 2015.05.29 [티엔루이] 호감과 흥미 사이 To.닭님
- 2015.05.26 [벨져루이] 밑도 끝도 없이 양궁au
- 2015.05.19 [홀든루이] Exception.
- 2015.05.18 [홀든루이] If you can.
- 2015.05.14 [홀든루이] Maybe.
- 2015.04.14 Sad Ending.
글
[티엔ts루이] Maker
※ 핵전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일어난 근미래, 센티넬버스, 티엔(29), TS루이스(17)
탱이 원딜을 물었다. 하랑은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해 다가오는 적에게 스킬을 쏟아부었다. 4단계, 이번 한타만 이기면 이긴다. 팽팽한 접전 끝에 마지막 한타라 하랑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막 지원을 온 같은 팀 팀원들이 뒤로 돌아오는 걸 본 하랑의 검지가 바빠졌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위험하다. 하랑은 마우스와 키보드 위에 올린 손을 바삐 놀렸다. 집에 오자마자 시작한 게임은 지금까지 네 판을 모조리 졌다. 이번 판이라도 이겨야 속이 풀릴 것 같은데, 아군이 제법 하는 대신 적도 만만치 않았다. 그 전까지 트롤러들을 만난 하랑은 1인분을 하기 위해 집중했다.
"하랑."
"아, 왜!! 나 지금 바빠!!"
하랑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짜증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저를 향해 달려오는 적을 제 때 피했을 터였다. 이제 오분이면 되는데 고작 그걸 못 기다려서 방까지 올라오고. 하랑은 제 보호자가 무슨 소리를 하던 헤드셋도 빼지 않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좀, 한 판만 이기면 안 되냐고. 하랑은 반피가 된 제 캐릭터가 빨리 일어나길 바라며 남은 스킬을 맞춰 반격할지, 아니면 도망을 가야할지 고민했다. 믿음직한 아군 탱커는 적 원딜들을 쫓느라 바쁘고, 다들 제게 와줄만한 여유가 없어보였다. 어떻게든 지금 이 난관을 빠져나가야 한다.
하랑은 캐릭터가 일어나자마자 제 앞의 근딜러를 눕혔다. 바로 궁극기를 쓰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화면이 멈췄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열심히 누르던 하랑이 무슨 일인지 몰라 잠시 벙쪄있는 사이, 게임 화면에 서버에 접속할 수 없다는 문구가 떴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제 사부가 랜선을 들고 서있었다. 울컥 차오르는 화에 하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씨발 뭐하는데!"
"루이스가 늦으니 가서 데려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다음엔 랜선을 뽑겠다고도 했지."
"아오, 씨발!! 존나 다 이긴 판이었다고!!"
"듣지 않은 건 너다. 이미 전에도 몇 번 경고하지 않았나."
"3분이면 됐다고!"
하랑은 티엔의 변하지 않는 무표정에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짜증은 나는데, 덤벼봤자 진다는 걸 아니 뭐라고도 못 하겠고, 승질이 난 하랑은 애꿎은 의자를 발로 찼다. 바퀴 달린 의자는 주르륵 밀려가 벽에 부딪히고, 하랑은 행거에 대충 걸어뒀던 바람막이를 집어들었다.
"에이씨, 걔가 어디 그냥 기집애야? 걜 건드리는 사람이 더 위험할걸? 오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한 시간 전에 센터를 나왔는 연락이 왔다."
"뭐?"
한 시간이면 이미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짜증을 내던 하랑은 갑자기 드는 걱정에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핸드폰의 잠금을 열어 봐도 딱히 연락이 온 건 없다. 센터에 다녀와야 한다길래 혼자 보내긴 했지만, 언제든 틈만 나면 나가 놀려는 저와 달리 그녀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라 어디 다른 곳으로 샐 리도 없었다.
"전화는?"
"안 받는다."
"에이씨...."
하랑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바로 코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다. 티엔은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버리고, 하랑은 오늘 티엔이 모처럼 고기 요리를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주방을 기웃거리다 한입 주워먹는 것보다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사람이 먼저라 하랑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꽤 날이 쌀쌀하다. 몸을 스치는 한기에 부르르 떤 하랑은 제 양팔을 쓰다듬으며 걸었다. 저보다 옷도 얇게 입고 다니는 녀석이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고 사람을 걱정시키는지. 하랑은 이긴 거나 다름없던 마지막 판을 떠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아가면 승리 대신 깎인 알피와 중단 전적이 저를 반길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랜선을 뽑을 수가 있지. 하랑은 저를 방해한 사부의 그 철면피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언젠가 톡톡히 그 값을 치르게 하리라.
그건 물론 사부가 제 방까지 찾아와 마중을 보내게 만든 녀석도 마찬가지다. 하랑은 동갑내기 여자애를 떠올리곤 애꿎은 돌맹이를 걷어 찼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렴, 걔가 어디 늦으려고 늦는 앤가. 그 무뚝뚝하고 목석같은 정티엔이 죽고 못 살 정도로 아끼는 애다. 그 녀석은 무슨 일이 생겼으면 생겼지 절대 어디 다른 곳에 새거나 할 위인이 아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하랑의 걸음이 빨라졌다. 버스가 서는 정류장 앞 벤치에 다다르기까지 고작 오 분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한 시간 전에 출발했다던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하랑은 초조하게 정류장을 서성이다 벤치에 앉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고,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게임을 켜던 하랑은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의 불빛에 고개를 들었다. 퇴근 시간대가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빽빽해 누가 내리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제가 못 찾는 건가 싶어 일어나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내리는 사람 중엔 그녀가 없었다. 하랑은 초조해진 나머지 게임창을 끄고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수신음만 가고 답이 없어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을 보일 즈음, 이거 어디 다른 길로 먼저 들어가서 엇갈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티엔에게서도 들어오라는 연락이 없어 하랑은 다리를 떨며 간간히 차가 지나가는 도로만 쳐다봤다.
그러기를 얼마, 반짝반짝한 까만 고급 승용차가 앞에 멈췄다. 버스 정류장에 무슨 차를 세운담. 하랑이 눈살을 찌푸리고 애꿎은 차를 노려보는데 차의 뒷문이 달칵 열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내렸다. 푸른 기가 섞인 잿빛의 긴 머리카락.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난 하랑은 운전석을 향해 연신 고개를 꾸벅이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루이스!"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랑은 아직도 인사 중인 그녀 옆에 섰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못 본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낯빛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땅거미가 진 거리가 어둡다 해도 그 정도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하랑은 대번에 루이스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볼살이 하랑의 손에 밀리는 바람에 퍽 귀여운 얼굴이 됐지만 그래도 지친 기색을 지울 순 없었다. 제 손을 잡아 떼내는 그 손에도 힘이 없어 하랑은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센터에서 조금 일이 생겨서, 데려다주셨어."
"쯧, 핸드폰은?"
"가방에. 아, 무음으로 바꿔놓은 거 깜박했다. 미팅때문에."
"가이드?"
하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루이스를 향해 혀를 차며 그녀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어깨에 대충 둘러매고 묻자 루이스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또 꽝이구만. 어쩐지 사부가 예민하더라니. 하랑은 더 묻지 않고 루이스와 발을 맞춰 걸었다. 루이스는 벌써 몇년째 정식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이었다. 그것도 유능한. 물론 다른 센티넬에 비해 능력의 조절과 제어가 탁월하다 해도 정식 가이드가 없다는 건 센티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자 오점이었다. 언제 자신의 능력에 휘말려들지 모른다.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과 같다던 티엔의 말이 떠올라 하랑은 흘긋 루이스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엔 얄미울 정도로 흔들림 하나 없는 주제에, 제가 알아챌 정도로 잔뜩 쳐져선 우울해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옆에 걷던 루이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는지라 하랑은 슬금슬금 루이스의 눈치를 봤다. 맞는 가이드가 없는 것도 하루이틀이 아닌데 오늘은 어째 더 우울해하는 것 같다. 뭐라고 기운을 복돋아줘야 하는 걸까. 위로 같은 데 소질이 없는 하랑은 괜히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때가 되면 어련히 나타나겠지."
"응."
속 편한 소리로 들릴 진 몰라도, 괜히 어줍잖은 위로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안 그래도 자존감이 밑바닥을 기는 애다. 하랑은 루이스가 어서 평소의 그 잔잔하고 광활한 호수같은 루이스로 돌아왔음 싶었다. 돌맹이 하나 던져봤자 잠시 파문이 일고 마는 호수. 하랑은 그런 그녀가 좋았다. 센티넬이고 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그랬다.
루이스는 누가 티엔 정이 손수 키운 센티넬 아니랄까봐 철두철미하고 똑부러지는 녀석이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무표정에 먼저 살갑게 다가가는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사소한 것 하나도 기억하고 챙겨주는 거며 사람을 살피고 돌보는 게 일상인 좋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루이스는 딱히 뭔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하랑이 이 제 1구역의 중앙도시에 온 첫 해, 누군가 축하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한 생일을 챙겨준 루이스였다. 심지어 제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운동화를 곱게 포장한 상자에 담아 선물했다. 사실 그런 것보다는 일상에서 스쳐지나가면서 자기도 잊고 있던 걸 기억하고 챙겨줄 때가 더 감동이지만.
하랑은 어색해진 분위기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센티넬이 경쟁력이 되는 세계수 근처의 거점 도시들이야 센티넬 하나 하나에 목숨을 걸지만, 하랑이 자란 곳은 거점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 하루 하루가 전쟁같은 곳에서 하랑은 아버지와 함께 산 속 깊이 들어가 살았다.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 두 사람이 먹고 살기엔 부족하지 않다. 가끔 물건을 교환하러 마을에 내려가는 게 전부요, 가끔 점을 쳐주고 산에선 못 구하는 생필품을 교환하는 게 가끔 있는 낙이었다. 하랑은 티엔을 만나기 전까진 제가 센티넬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처음 말로만 듣던 거점 도시에 왔을 땐 공기조차 다르고 생활 자체가 달라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더랬다. 그런 하랑을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준 게 바로 루이스였다.
하랑은 센티넬이기 때문에 거둬진 루이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센터에서도 센티넬로 분류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에스퍼계 센티넬은 애매한 위치다. 아직 완전히 능력을 제어하지도 못하는 하랑은 센터에서 등급을 부여받는 의무 테스트 이후로 불려가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잡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하랑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절로 얼굴을 구기게 되는 티엔의 번호가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만큼이나 반가웠다.
"어! 지금 가는 중."
'그래. 얼마나 걸리나.'
"이제 세 블럭 남았수다."
하랑은 일부러 껄렁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까지는 이제 두 블럭. 무심히 걷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루이스가 작게 웃고, 하랑은 머쓱해진 나머지 걸음을 빨리 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루이스는 살짝 뛰어와 다시 하랑의 옆에 섰다. 더 뛸래야 집 앞이라 하랑은 이게 다 네가 늦어서라고 투덜거렸고, 루이스는 그런 하랑에게 미안하다며 등을 두드렸다.
티엔이 루이스에게만 무르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투덜거리는 하랑이지만 그녀에게 무르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쁜 여자애가 헤사하게 눈꼬리를 휘며 생긋 웃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제가 아는 기집애들이라곤 만날 드잡이질에, 사내애들보다 더 목청도 크고 괄괄했는데 루이스는 글에서나 보던 선녀같았다. 청순하고, 예쁘고, 상냥하고, 다가가면 꽃 향기가 날 것 같은 그런 여자애. 하랑은 결국 루이스의 미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늦었군. 씻고 내려와라."
하랑은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고 2층 계단으로 휙 올라가버렸다. 루이스는 신발을 벗어 하랑의 운동화까지 정리했다. 그새를 못 참고 현관까지 나온 티엔이 팔짱을 끼고 내려보자 힘 없이 웃는데, 한소리 하려고 벼르고 있던 게 전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루이스는 티엔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티엔은 쭈뼛쭈뼛 선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 돌아서 주방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죽어가던 그녀를 주운 그 날부터 지금까지 제가 키우다시피 한 아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얼굴 표정만 보면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건 하랑도 마찬가지지만, 하랑은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며 사람과 접촉을 피한 탓에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거리의 고아로 눈치밥을 먹으며 자라 나이에 맞지 않게 신중하고 침착한데다 생각과 감정을 숨기는 데도 능숙했다. 그녀를 데리고 왔을 땐 한동안 그것 때문에 애를 먹었던 티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데운 음식을 그릇에 담았다. 하랑이 노래를 부르던 갈비찜에 마파두부, 제 철인 사과를 갈아 만든 소스를 올린 샐러드에 고슬고슬한 밥까지 한 상을 차린 티엔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두 녀석을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하랑과 장난을 치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단정한 교복 대신 까만 나시티와 후드집업에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은 루이스의 허벅지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루이스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는 하랑을 보며 키득거리는 중이라 딱히 말을 꺼내기도 뭐해 티엔은 아이들이 앉기를 기다렸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예정보다 식사 시간이 늦어져 배가 많이 고팠던지, 하랑이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 예절에 대해 한 마디 하기도 전에 고기 덩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통에 티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는 그런 하랑이 재미있는지 피식 웃으며 앞접시에 고기를 한 점 덜어 티엔의 밥공기 앞에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르륵 눈웃음을 치는데, 오늘 낮에 점심을 먹고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윌라드 크루그먼과 웨슬리 슬로언, 거기에 티엔의 상관인 브루스까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딸이 최고라고 한 것이다. 그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둘을 보고 있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엔은 빈 앞접시를 가져간 루이스가 샐러드의 푸성귀를 가져다 먹는 걸 보며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고 기운을 내야 할 텐데. 하랑이 밥 한 보람이 있게 잘 먹는 것에 비해 루이스는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놨는데도 먹는 게 시원치 않았다. 아마 오늘도 가이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티엔은 안타까운 마음에 큰 살점을 덜어 루이스의 앞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루이스는 결정 능력이라는 비주류 능력을 가진 센티넬 치고 전투력이 높았다. 물론 거기엔 그녀의 타고난 성격과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년간의 스카우터 활동으로 다져진 티엔의 코치도 한 몫 했다. 그래서일까, 세간에서 루이스는 티엔 정의 미완성품이라 불리고 있었다.
미완의 센티넬. 루이스가 보여주는 무긍무진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심사에서 3급밖에 받지 못한 데에는 가이드가 없다는 게 가장 컸다. 혼자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다 해도,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을 쓰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센터에 있는 가이드들 중엔 그 누구도 루이스와 동조율이 30%가 넘는 사람이 없었다. 개중에 그나마 제일 높은 게 자신인데, 그마저도 50%가 안 됐다. 덕분에 복잡한 절차를 거쳐 임시 가이드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었다. 티엔은 그녀에게 맞는 가이드가 나타나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아홉살, 죽어가던 그녀를 안아들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루이스는 저만 바라보는 아이였다. 제가 없으면 죽어버릴 것처럼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아이. 티엔은 웬 양아치 같은 놈팽이가 그녀의 가이드라고 나타나기라도 할까봐 루이스가 가이드 문제로 센터에 갈 때면 노심초사했다. 더러는 그래도 개중에 가장 동조율이 높으니 그녀와 귀속 관계를 맺는 게 어떠냐 제안하기도 했지만 티엔은 그럴 수 없었다. 첫째는 자신이 스카우터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티엔이 그녀를 무척 아끼기 때문이었다.
센티넬은 가이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간단하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를 아끼기 때문에 티엔은 루이스가 남은 평생을 제게 매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쁘고, 강하고, 제게 과분할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다.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듬뿍 사랑받으며 살 수 있는 아이였다. 티엔과 루이스의 나이차는 열 둘.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티엔은 양심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정식 센티넬이 되면 센티넬의 폭주로 이어지는 결핍증세를 막기 위해 신체 접촉이 필수인데, 채 50%도 안 되는 동조율로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선 단순히 손을 잡거나 안고 있는 걸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티엔이라고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후, 나아갈 길을 고르는 그 시간에 제 옆에 있었던 건, 어쩌면 제 스카우터 생에 가장 큰 역작이 될 지도 모르는 미완의
센티넬이었다. 어떻게 탐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유혹을 뿌리치기에 루이스는 너무나 달콤한 열매였다. 가이드가 없는 건, 그 중에서도 자신의 동조율이 가장 높은 건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손만 뻗으면 재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억누른 건 다름 아닌 그녀에 대한 애정이었다.
한 번 그렇게 옭아매면, 돌이킬 수 없다. 그때 루이스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저를 은인으로 알고 무엇이든 해서 그 값을 돌려주려는 아이다. 절대 거절할 리 없었다. 대개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는 센티넬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다. 귀속을 하지 않은 지금도 이런데, 그녀가 자신의 센티넬이 되면. 티엔은 두려웠다. 그녀를 '루이스'가 아닌 '센티넬'로 대하게 될까봐, 그녀를 도구로 쓰게 될까봐, 그녀가 더 자라서 알을 깨고 나올 즈음 제게 원망과 저주를 퍼부을까봐. 센티넬은 생존을 위해 가이드를 필요로 하고, 한 번 정식으로 귀속을 맺으면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다. 게다가 센티넬 쪽에선 가이드가 주는 심리적 안정과 스킨십을 사랑이라 여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비즈니스적인 관계, 혹은 친구의 선을 넘지 않는 게 센티넬의 수명이 오래 가는 비결이라 할 정도였다.
센티넬은 다른 사람보다 예민하고 특별한 존재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루이스에 티엔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완벽에 가까운 남자라 일컬어지는 그 스스로도 루이스를 아직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티엔은 다른 센티넬과의 계약 대신 센티넬 급으로 강한 체술과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터가 된 사람이었다. 대개 스카우터는 센터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센티넬과의 전투도 불사해야 할 때가 있기에 보통의 센티넬보다 능력치가 현저히 높은 이를 뽑는 게 관례라는 걸 생각하면 센티넬이 아닌 스카우터 티엔 정이 어떤 존재인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을 먼저 올려보낸 티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따라놓은 물 한 컵을 그대로 들이켰다. 하랑은 밥을 두 공기나 더 먹었고 루이스는 밥을 반절이나 남겼다. 모처럼 한 요리를 담은 그릇은 싹 비워졌건만, 속이 쓰렸다.
시험기간이라 공부하다 의식의 흐름대로 보고싶은 것만 씀.
안그래도 바쁜데 루이스 모델링 변경때문에... 심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름ㅠ
이제 루이스한테 동안에 미인이라고도 못할거 아냐...ㅠㅠ
그 전에 개편 전 루이스로 연성을..많이...해야하는데...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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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ts루이] 어느 메이드의 하루 : 오전
시험기간이라 슈퍼 딴짓 타임이 도래함
* 전에 썼던 홀든가 메이드 ts루이스
찌르르르,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에 이불 속에서 하얀 손이 불쑥 나와 침대 옆 협탁을 더듬었다. 그래도 자명종이 잡히지 않자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은 다 뜨지도 못하고,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지고 부스스했지만 그것도 그녀의 미모를 해치진 못했다. 시간을 확인한 그녀, 루이스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의 물을 튼 루이스는 보일러가 물을 데우는 시간동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잠옷을 벗었다.
찬물 세수로 잠을 깬 루이스는 욕조 안에 들어가 샤워기 앞에 섰다. 머리부터 적시며 떨어지는 따뜻한 물줄기에 굳어있던 근육들도 깨어나는 것 같아 가볍게 어깨를 주무르며 목을 돌리자 뿌드득 소리가 났다. 어제 밤일을 좀 과하게 하긴 했지. 루이스는 어젯밤 겁도 없이 홀든가에 잠입한 쥐새끼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결정능력의 좋은 점은 시간이 지나면 무엇에 당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벨져와 이글이 안타리우스의 뒤를 캐고 다니면서 가끔 이렇게 침입을 시도하는 쥐들이 늘었다. 쥐약을 놓는 것도 한계가 있는 지라, 루이스는 가끔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광신도 집단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홀든에 그런 어중이 떠중이들을 보내는지. 어제는 조금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대개는 다 제 선에서 끝날 만한 일들이었다. 이걸 그 애들이 알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치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머리를 감던 루이스는 벨져에게 받은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우선은 다이무스가 출근하는 걸 배웅하고, 집안일을 마친 후에 편지를 써야지. 그 다음엔 이글을 깨워 점심을 먹여 출근시키고, 다이무스를 도우러 잠시 헬리오스에 갔다가 두 사람이 퇴근하기 전에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들른다. 그러고 보니 세탁소와 식료품점도 들러야 했다. 루이스는 오늘의 일정과 할 일을 정리하고 샤워기의 물을 껐다.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감싸고 욕실을 나온 루이스는 머리를 말리며 서랍장 앞에 섰다. 두번째 서랍 안에서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흰색 팬티와 브래지어, 슬립, 가터벨트를 꺼내고, 세번째 서랍에서 스타킹과 속바지를 꺼내 한꺼번에 침대 위에 던졌다.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세 형제가 앞다투어 속옷을 선물하는 통에 루이스의 서랍장엔 각양각색의 속옷들이 즐비했다.
옷 선물은 벗기기 위해 하는 거라던데.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리를 떠올린 루이스는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감싼 수건을 푸르고 물기를 털어낸 루이스는 머리를 빗어 넘기고 일어났다. 침대로 향하는 사이 가슴에 두르고 있던 바스타올의 매듭이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침대 위에 던져둔 팬티를 집어들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발을 끈 사이에 넣어 골반까지 올린 루이스는 브래지어와 가터벨트를 차고 슬립을 걸쳤다. 침대에 앉아 흰색 스타킹을 허벅지까지 올리고, 일어나 착 달라붙는 까만 속바지까지 입은 루이스는 스타킹을 가터벨트로 고정한 뒤 일어섰다.
옷장에서 짙은 남색 원피스와 속치마를 꺼내 입은 루이스는 손을 뒤로 돌려 등의 단추를 채우며 시계를 바라봤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그래도 늦지는 않았다. 옷장 서랍에서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앞치마를 꺼내 어깨에 걸친 루이스는 허리끈을 다 묶지도 못하고 캡은 입에 문 채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며 허리끈을 묶고, 머리를 만져 캡을 쓴 루이스는 주방에 아침 식사가 준비된 걸 확인하고 바로 다시 계단을 올랐다. 이층, 다이무스의 방 앞에 선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머리와 앞치마를 매만지고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루이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같이 다이무스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소매의 커프스 단추를 달고 있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옷장에서 넥타이를 골라 그에게 다가갔다.
"잘 잤나."
"그럼요. 잘 주무셨어요?"
"덕분에."
다이무스는 기다렸다는 듯 턱을 들어 목을 내주었다. 루이스는 그의 목에 넥타이를 감아 매듭을 묶고, 다이무스는 그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다이무스가 영국으로 건너와 따로 살기 시작한 후로 두 사람의 아침 일과는 항상 이렇게 시작됐다. 어릴 적 오스트리아의 본가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루이스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일손을 도와야 했고, 다이무스는 매일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교육에 따라 도장에 나가 검을 휘둘렀다.
그보다 더 어릴 적엔 천둥이 치는 게 무섭다며 베개를 들고 찾아온 루이스를 옆에 누이고 같이 자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이를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때 얘기였다. 세 형제에게 또래의 예쁜 여자아이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맏이라는 이유로 다이무스는 곧잘 두 동생에게 루이스의 관심을 뺏기곤 했다. 그래도 제일 먼저 의지할 사람으로 자신을 꼽는다는 게, 셋 중 유일하게 그녀보다 연상인 다이무스만의 특권이었다. 오빠라고 불릴 수 있는 것도 다이무스가 누리는 특권 중 하나였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 밑에 거뭇하게 드리운 그림자가 점점 내려오는 걸 보며 넥타이의 매듭을 마무리지었다. 아무래도 식탁에 브로콜리를 더 올려야 할 성 싶었다. 은행 업무며 헬리오스의 업무까지, 하나만 해도 힘든 걸 병행하고 있으니 피로가 쌓이는 건 당연했다. 루이스는 넥타이에서 손을 떼고 다이무스의 뺨에 손을 얹었다. 말끔하게 면도를 마친 뒤라 까슬하진 않았지만 푸석해진 건 분명했다.
"오늘 오후에 회사로 갈게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있는 게 낫잖아요. 그쵸?"
다이무스는 아침부터 귀여운 소리를 하는 루이스 덕에 피식 웃고 말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안 그래도 아침에 약한 녀석이 머리에 또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싶어 그만두고 다시 한 번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애정이 묻어나는 친애의 표시에 루이스도 슬며시 웃었다. 홀든 형제와 루이스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지라 사용인과 고용주라기 보다는 남매에 가까웠다. 홀든 부인마저 아들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보다 루이스를 더 아낀다며 한탄 아닌 한탄을 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면 말을 다 한 셈이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 사이에선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세 형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건 가문과 그녀가 아니냐는 말마저 돌았다.
다이무스는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른 두 녀석에게 물어도 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루이스는 그들 사이에서 일종의 '깍두기'같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경쟁의 상대도, 적도 아닌 순수한 애정의 대상. 그걸 알기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구속하려 들지 않았다. 균형이 깨지는 순간 무엇이 찾아올 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그녀가 그들을 아끼는 게 그저 가족적인 애정일 가능성이 너무 컸다. 그건 두 녀석 역시 알고 있기에 세 형제는 한 여자를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대신 선을 지키고 있었다.
"자, 그럼 이글 깨우러 갈게요."
"부탁하지."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방을 나와 이글의 방으로 향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막내는 꼭 깨워줘야 일어나는 타입이라 깨우지 않으면 아침도 먹지 않고 잠을 자곤 했다. 루이스는 이글의 방 문을 똑똑 두드리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이글은 커튼도 안 친 방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쿨쿨 잠에 푹 빠져있었다. 자유로운 영혼 아니랄까봐 자는 자세도 가관이다. 루이스는 이글의 침대에 앉아 뺨을 두드렸다.
"이글.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이정도로는 반응조차 없다. 루이스는 이글에게 조금 더 가까이 앉아 엉덩이를 두들겼다. 토닥토닥, 아이를 깨우듯 가볍게 토닥이려니 이글이 입을 다시며 베개를 더 꼭 끌어안았다. 벨져는 그냥 찬 물 한 바가지 끼얹으라고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도 막내는 막내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이그을.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으으응....'
입술이 꿈틀거리는 걸 본 루이스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더 가까이, 얼굴 앞까지 다가가 쪽. 입술을 가볍게 맞추자 단숨에 허리가 잡혀 끌려갔다. 베개 대신 안긴 루이스는 눈곱이 낀 채 씩 웃는 이글과 눈을 맞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아침~."
"일어나세요."
"뽀뽀해주면 놔주지."
"조금 전에 해드렸잖아요."
"몰라~. 난 좀 더 잘래."
이글은 고개를 도리젓더니 루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바디워시와 샴푸의 꽃냄새가 달근해 놓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곤란해하지도 않고 이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일어나래도."
"윽, 아. 진짜 아팠어."
"자, 뽀뽀."
루이스는 냉큼 루이스가 엄살을 피우는 사이 뽀뽀를 해주고 단단한 막내 동생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잘생긴 얼굴에 기름기가 번드르르 하고 눈곱이 낀 게 영 마뜩찮아 억지로 일으켜 팔까지 걷어부치고 세수를 시켰다. 역시, 그냥 찬물을 붓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내일 해가 뜨면 또 똑같이 이글의 어리광을 받아줄 게 안 봐도 뻔했다.
"누나아."
"옷부터 입으세요."
말끝을 늘여 달라붙어봤자 꼴랑 팬티 한 장 차림이라, 루이스는 이글을 밀어내고 빗을 들었다. 이글은 투덜거리면서도 고분고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을 주워입고 루이스는 이글의 머리를 빗었다. 평소하는 것처럼 위로 높게 올려 묶기엔 루이스와 이글 사이의 신장 차도 있고, 무엇보다 아직 머리를 안 감아서 그 긴 머리를 아래로 내려 느슨하게 묶었다.
"빨리. 이미 준비 마치고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난 아침부터 칙칙한 형이랑 밥 먹느니 누나랑 침대에서 뒹구는 게 더 좋은데."
"이글."
루이스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짓자 이글은 반팔 셔츠를 대충 입고는 루이스를 따라 나섰다. 제 아무리 망나니인 이글 홀든이라도 그를 이십년 가까이 돌분 루이스를 이길 순 없었다. 아마 유일하게 이글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는데, 이글은 어디까지나 그녀에게 져주는 것 뿐이었다. 아니, 사실 못 이기는 게 맞았다. 매를 맞거나 혼나는 것보다 루이스가 더 무섭다. 이글은 뒤에서 투덜거리며 루이스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다이무스가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형에게 간단히 눈인사를 한 이글은 제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는 아침식사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다이무스의 손에 들려있던 신문을 뺏고, 다이무스는 빈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몸을 쓰는 검사답게 아침 식사라 해도 꽤 양이 많았다.
"아아, 브로콜리 싫은데."
"편식하지 마세요."
"네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글."
"햄버거~."
이글은 입을 비죽 내밀곤 브로콜리를 접시 한 편으로 몰기 시작했다. 아삭한 식감의 브로콜리를 계란과 함께 입에 넣고 씹던 다이무스는 더 잔소리하는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래도 일 때문에 점심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는 날이 많다보니 집에서 먹는 식사라곤 아침이 고작이었다. 루이스는 아침만은 꼭 먹여서 보내고 싶어 했고, 바쁜 와중에도 아침 식사 만큼은 직접 식단을 짤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걸 아니 이글 녀석도 일어나 아침을 먹는 거겠지만. 다이무스 역시 일주일에 나흘은 올라오는 브로콜리에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지만 그게 제 눈가에 드리운 다크서클 때문이라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누나."
"네?'
"나 오늘 늦어. 기다리지 마."
"내일 들어오실 거예요?"
"몰라? 내가 좀 유능해야지, 아주 그냥 놔주질 않아~."
이글의 너스레에 루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글도 루이스를 따라 씩 웃고,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사이 다이무스는 무표정으로 이글을 보며 브로콜리를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포크로 장난질을 치는 이글을 두고 먼저 접시를 비운 다이무스는 물로 간단히 입가심을 하고 일어났다.
그에 맞춰 루이스가 우편물과 함께 아까 뺏어갔던 신문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읽다 만 신문과 편지들을 받아들며 눈을 맞췄다. 루이스가 아무 말도 않는다는 건 별다른 소식이 없다는 뜻이다. '홀든'에게 쏟아지는 각종 청탁과 셀 수도 없는 초대장을 걸러내는 건 루이스의 일 중 하나였다. 다이무스는 우편물을 서류가방에 넣었다. 양치를 마치고, 가벼운 코트를 팔에 든 채 내려오자 루이스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져주었다. 흘긋 식당 쪽을 보니 이글도 식사를 마치고 마저 자러 올라간 모양이었다.
"큼. 점심 같이 들겠나?"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데이트 하자구요?"
넥타이를 바로잡고 카라를 세웠다 내린 루이스가 빙그레 웃자 다이무스는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사려 깊고 침착한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필요한 걸 말하기 전에 준비하고, 언제나 깔끔하고 완벽하게 집안을 관리하는 데다 예쁘고 상냥하고 똑 부러지기까지 한 그녀는 완벽에 가까운 메이드이자 안주인이었다. 다이무스는 이런 사람을 골라온 아버지의 안목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이렇게 길러낸 어머니의 수완에 감탄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맡은 일이 많다 보니 힘들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녀가 맡은 업무를 대신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일은 본가의 사용인들도 할 수 있다 치더라도, 형제들을 아우르는 건 오로지 그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셋이 모여있을 때와 넷이 모였을 때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다이무스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벨져를 떠올렸다. 편지를 제대로 읽긴 했는지. 이미 오래 전 일인데도 답장이 없었다.
코트를 걸친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미소와 함께 내미는 서류가방을 받아들고 모자를 썼다. 문을 나서기 전, 으레 부부들이 그러하듯이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추는 건 다이무스 홀든이 출근 전 마지막으로 누리는 여유이자 온기였다.
"이따 봐요."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루이스는 출근하는 다이무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매일 아침 하는 거지만 이렇게 그를 배웅할 때면 쉬지도 못하고 일에 쫓겨사는 그가 안쓰러워지곤 했다. 다이무스의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본 루이스는 주방에서 사용인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 세 형제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불만은 밥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루이스가 요리를 잘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 결국 루이스는 홀든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영국 태생이라서 그런 건지 고아 시절에 배만 채울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탓인지 요리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웬만한 일은 다 눈감아주는 다이무스마저 이틀 버티고는 조심스럽게 요리사를 고용하자는 말을 꺼냈을 정도였다. 결국 루이스는 오스트리아에서 고용해 데려온 요리사에게 주방을 내주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잘 한 일이었다. 한나는 이제 주방일을 하기엔 나이가 많았고, 메이어 부인의 요리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리 실력의 소유자였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싸가면 좋아할까.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회사 근처에 괜찮은 샌드위치 가게가 없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메이어 부인에게 넉넉히 점심을 준비해달라 부탁하자 부인은 신이 나서 연어가 좋으냐, 햄이 좋으냐 묻기 시작했다. 다들 집에서 식사를 안하는 데다 아침부터 무거운 요리를 올릴 순 없다 보니 내심 제대로 된 요리를 못 하는 게 서운했던 모양이라 루이스는 종류별로 양껏 준비해달라 부탁했다. 둘이 다 못 먹어도, 헬리오스의 동료분들께도 나누어 드리면 그만이었다. 능력이 상극이라 그런지, 아니면 귀한 도련님을 마구 부려먹어서인지 그 쪽의 불의 마녀와는 아무리 해도 데면데면하지만 어쨌거나.
주방에서 볼 일을 마친 루이스는 방으로 향했다. 하우스 메이드의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세탁물은 정리해 세탁소에 맡기고, 청소부터 자잘한 일까지 전부 루이스의 손을 거쳐야 했다. 대개는 집사가 할 일이지만, 본래 입이 가벼운 하녀들이나 하인들로 부터 새어나가는 게 정보다. 게다가 홀든은 홀든이니 만큼 집안일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했다. 그렇다고 본가에 계속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나이 먹은 아들들이 할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루이스가 비서의 역할까지 떠맡고 있었다. 벨져는 미련하게 일을 사서 한다고 핀잔을 주고 다이무스는 미안해지만 정작 루이스는 이게 다 제 일이려니 했다.
고아에 불과한 자신을 거둬 먹이고 재워주는 것도 모자라 딸처럼 키워주신 홀든 부인에게 받은 걸 보답할 방법이라곤 성심껏 홀든을 위해 일하는 것 뿐이었다. 루이스는 어젯밤 앞치마 안주머니에 넣어둔 두툼한 편지를 꺼냈다. 이름도 없이 제 앞으로 온, 화려한 필체의 편지. 편지의 겉봉투엔 여러 나라를 거쳐 오느라 우표가 잔뜩 붙어있었다.
루이스는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의 옆구리를 잘랐다. 굳이 안을 확인 하지 않아도, 제레온의 뒤를 이어 안타리우스를 쫓느라 얼굴 한 번 내빛치지 않는 둘째로부터 온 편지가 분명했다. 다이무스의 편지는 읽다 말았다더니, 한 장짜리 제 편지엔 답장으로 다섯 장이나 써서 보냈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 루이스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이쪽이야말로 길어서 읽다 말고 싶다. 하지만 장난으로라도 말을 꺼내면 바로 삐질 게 뻔했기에 루이스는 자리에 앉아 편지를 펼쳤다. 벨져의 편지는 언제나 사랑하는 누이,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편지를 모두 읽은 루이스는 답장을 쓰기 위해 편지지와 만년필을 꺼냈다.
일을 하다 보면 오전은 훌쩍 가기 마련이라, 루이스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수표책과 샌드위치가 한가득 든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이글과 함께 집을 나섰다. 이글은 대번에 자기한텐 찾아와주지도 않는다며 생떼를 썼지만 엉덩이를 조금 세게 두드려주는 걸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도 '나 삐졌소.'하고 시위하듯이 입을 비죽 내밀고 틱틱 걸리는 돌맹이를 차는 바람에 루이스는 결국 이글에게 내일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이글은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나서야 만족하고 다이무스가 그랬던 것처럼 뺨에 뽀뽀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스스럼 없는 애정 표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긋거렸지만 그마저도 루이스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세 사람 다, 형제 아니랄까봐 이런 데선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끼는 법이 없었다. 제게 하는 것에 반만 했어도 이미 애가 있을 텐데. 루이스는 가벼운 걸음으로 가는 이글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그들의 눈을 너무 올린 탓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살짝 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점심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지만 헬리오스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오후와 저녁은... 시간이 나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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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齒亡脣亦支.
리퀘로 쓴 다이루이 동양물
"큰일이로군."
"큰일이네요."
다이무스 홀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골치가 아파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다이무스의 참모이자 가신인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조용히, 찻잎이 풀어지며 물에 우러나자 뜨거운 물을 한 번 더 부어 잔을 데우고 차를 따라 골머리를 앓고 있는 다이무스에게 권했다.
"드세요."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내온 찻잔을 감싸쥐고 들어올려 향을 맡았다. 완벽하게 제 취향에 맞춘 온도와 향이었다. 슬쩍 미간의 주름을 편 다이무스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음미하는 동안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문제가 된 서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탁상을 두드렸다.
서국의 제후가 방문하니 화려한 연회로 맞이하라는데, 문제는 그가 엄청난 난봉꾼이고 이 쪽엔 시중을 들 하녀들은 있어도 연회에 참석할 기녀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기방 세 곳이 단체로 뇌물 수수에 연루돼서 전 수령과 함께 압송되어 옥살이를 살게 된 게 바로 한 달 전 일이었다. 서국의 제후는 전에 맛본 그 화려한 연회를 기대하고 오는 게 분명한데, 지금 군영엔 잘 훈련된 군사들은 있을 지언정 연회를 위한 기녀는 없었다.
급하게 다른 지방에서 구하려 해도 파발이 가는 데만 사나흘이다. 서국의 제후는 당장 모레 도착할 텐데 어디서 기녀를 구한단 말인가. 서국으로 가는 무역상이 오가는 길목의 땅을 수백리나 가지고 있는 제후다. 그의 기분이 틀어져 갑자기 세를 과하게 물리기라도 하면 무역상들은 물론 나라의 재정에도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어떻게 해서든 맞춰줘야한다. 하지만 어떻게?
다이무스는 비리를 뿌리뽑겠다며 그들을 전부 처벌한 것을 후회했다. 그래도 기방을 완전히 없애선 안 된다고 루이스와 지방 토호들이 말릴 때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필요가 있으면 다시 생기기 마련이라고 다이무스는 기방의 주인을 법에 따라 처벌했다. 비리는 사라졌지만, 일자리를 잃은 기녀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게 이렇게 아쉬워질 줄이야.
다이무스는 차를 마시다 말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는 전에 있었던 화중왕 트리비아 카리나를 보러 오는 것이리라. 이 삭막한 곳에 볼 것이라곤 없으니 어두운 밤의 여제라도 없으면 뭇 사내들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주제에 그녀의 목소리는 그림자가 스며드는 것처럼 고혹적이었다. 다이무스는 잠시 그녀의 풍성한 치맛자락과 고양이가 걷는 것처럼 간드러지는 걸음걸이를 떠올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등을 덮는 차가운 손에 고개를 들자 루이스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바라봤다. 이럴 때도 제 편이 되주는 건 오로지 이 사람 뿐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골치 아픈 일일랑 다 던져버리고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유랑이라도 떠나면 좋으련만, 주어진 형편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치망순역지라는 말도 있고, 어떻게든 해볼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다이무스는 저를 어르듯 말하는 루이스를 향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말만이라도 고맙지만, 그라면 왠지 없는 사람도 솟아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어루만지다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다가온 그에게 입을 맞추고,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손에 쥐었다.
"윽..., 집무실에선 안 돼요."
"...안 한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고, 이따 방에서 봐요."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고선 귓가에 속삭였다. 귀를 스치는 숨결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으나 루이스는 미소를 끝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하아...."
루이스가 돌아 나가면서 연한 쪽빛의 겉옷 자락이 펄럭였다. 단정하고 차분한, 검소한 차림은 그에게 퍽 잘 어울릴 뿐더러 한 떨기 난꽃 같은 청아한 매력을 풍기곤 했다. 그가 나가고 다시 찾아온 두통에 다이무스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럴 때 만큼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구는 막내가 부러워질 따름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파발이 인근 기방에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땐 이미 서북의 제후가 도착한 후였다. 다이무스는 쓸모 없어진 서찰을 찢어서 버렸다. 제후는 도착한지 얼마나 됐다고 노골적으로 연회를 언급하며 기대가 크다며 다이무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다이무스는 급히 모은 군영의 무희들을 떠올렸다. 말만 무희지, 평범한 여인들이다. 그녀들이 아무리 능하다 한들 밭일을 하며 부른 노래요, 동네 잔치 때나 되는 대로 춤을 춘 게 고작이었다. 온갖 화려한 연회에 익숙해진 제후의 눈에 그게 얼마나 하찮게 비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히려 기만하려 든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연회는 시작도 안 했건만,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아 다이무스는 제후의 옆에서 차를 따르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제후는 혼자 신이 나서 떠들고,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하게 차를 따르던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루이스는 걱정말라는 듯 살짝 눈꼬리를 휘며 웃엇지만 오늘은 그 미소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연회에 여인들을 빼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하하. 참, 그녀는 잘 있소? 화중왕말이오. 지난 번에 왔을 땐...."
"......"
올 게 왔다. 다이무스는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기생따윈 없으니 기대를 접으라 하고픈 마음을 누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이를 어찌한다. 생각하는 와중에 침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시는 길에 기방이 텅 빈 것을 보셨을 겁니다. 근처의 기방들이 문을 닫으면서 그녀도 떠났지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하지만 어디 꽃이 그녀 하나 뿐이겠습니까. 봄 꽃이 지면 여름 꽃이 피기 마련이지요.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루이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차분히 말을 잇자 제후는 자기가 성을 낸 게 머쓱해졌는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찻잔을 들고 있던 다이무스는 한 고비 넘긴 것에 안도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데다, 묘하게 루이스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향기로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제후는 형식적으로나마 근황을 묻고 다이무스 역시 형식적으로 답하면서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급히 들어온 토마스가 루이스에게 은밀히 말을 전하자 루이스마저 자리를 뜨고, 루이스를 보며 버티던 다이무스는 지루해하는 제후에게 방을 안내하기 위해 일어났다.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여독을 풀라는 말에 제후의 얼굴이 확 폈다. 제후는 사양하는 법도 없이 가버리고, 다이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점점 날이 갈 수록 근심만 느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유례없이 지친 몸을 일으켜 연회장으로 향했다. 지시한 대로 완벽하게 준비가 됐는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잠시나마 위안을 얻어보고자 루이스를 찾아보았으나 언제나 제 시야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던 사람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다들 연회 준비로 바쁘다보니 루이스를 봤다는 사람도 없고, 그 역시 일을 서두르느라 경황이 없을 거란 생각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찾기를 포기했다. 대신 단상 위에 마련된, 가시방석이나 다름없는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회가 시작해도 제후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 역시 모두 예상했지만, 다이무스에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자 제후는 연회가 너무 지루하다며 아무리 그래도 무희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냐는 둥 불만을 터놓기 시작했고, 다이무스는 조잡하게 구성된 무희라도 불러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안 좋은 기분을 더 그르칠 가능성이 더 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이무스가 하늘에서 선녀라도 내려오길 간절히 바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짙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넘실 흘러들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고, 얼굴을 얇은 너울로 가린 무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선녀와 같이 하늘하늘한 옷으로 몸을 겹겹이 감싼 무희가, 왠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슴 앞에 팔을 모은 채 들어온 무희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자 스르륵 흰 연기가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피리 소리와 함께 위로 팔을 올리자 손을 감싼 긴 천이 천천히 너울지며 흘러내렸다.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무희의 자태는 오월 버드나무의 가지같이 낭창하고, 한 마리 학처럼 우아했다. 다이무스는 넋을 놓고 그 손짓과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다른 말이 무에 필요한가. 제비가 하늘을 노닐 듯 아름다운 춤사위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바닥을 채운 흰 연기가 마치 구름같아 정말 선녀의 춤을 보는 것도 같았다. 한 바퀴 빙그르 돌며 얼굴을 가린 너울이 펄럭이고, 그 안에 가려잇던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절대, 잘못 보지 않았다. 잘못 볼리 없었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제게 보낸 그 눈웃음. 다이무스는 제가 앉아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습게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지도 몰랐다. 손에 힘이 들어가 술잔이 떨렸다. 다이무스는 작은 잔 안에 이는 파문을 단숨에 삼켰다. 시원한 술은 목을 타고 넘어가며 가슴속에 붙은 불을 키웠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음악이 끝나고, 연회장 안을 잠시 신선의 술자리로 만든 무희도 춤을 멈췄다. 무희가 들어올 때와 같이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인사를 올리고 나서야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곧 안에 있던 이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어안이 벙벙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제후는 무희를 아래위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이무스는 혼자 술잔을 채웠다.
"허, 허허허. 하하하하! 아니, 이런 보물을 두고 이렇게 이 사람의 애를 태우신 겁니까. 하하하하,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소.내 잘나간다는 무희를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이오. 그래, 네 이름이 무어냐. 어서 그 너울을 벗어보거라!"
목소리는 속일 수가 없다. 다이무스는 가만 서있는 무희를 바라봤다. 가라. 흥을 돋우는 거라면 이미 충분히 성공했으니 돌아가도 될 터, 저 호색한이 어찌 한 번 품어보려 해도 없는 사람이라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잠시, 불쾌한 생각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리자 무희가 고개를 들었다.
"으응?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야?"
그리고 팔을 내려 손가락 끝으로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고 가까이 다가왔다. 웬일로 상석을 양옆의 자리와 떨어뜨리다 못해 몇 단이나 올렸나 싶었더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계획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더니, 이런 것이었나. 다이무스는 계단을 오르는 무희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제후의 눈은 이미 그 옷을 벗기고 있었다.
제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짓을 계획한 루이스도, 그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도, 호색한에 무능한 제후의 억지를 들어줘야 하는 것도 전부 다 못마땅했다.
어느덧 단상에 올라온 무희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천천히 너울을 걷었다. 화장까지 했는지, 고운 얼굴엔 연분홍빛이 어린 데다 작고 얇은 입술은 탐스럽게 붉었다. 거기에 살짝 내리깐 눈이, 더없이 매혹적이라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냥 순진한 처녀같은 얼굴로 요부같은 눈을 하다니. 싱긋, 입술과 눈을 예쁘게 휘며 웃는 바람에 무희가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가슴이 떨렸다. 누군지 알기에 더 떨리는 건지도 몰랐다. 다이무스의 요동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웃음을 친 무희는 다시 너울을 내리곤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잡았다.
제후의 존재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깨끗히 잊어버리고, 눈을 떼지 못하는 중에 무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이무스의 옆에 다가와 풀썩, 그 무릎에 앉았다. 팔을 목에 감으며 안겨와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 허리를 감싸안았다. 코를 마비시키기라도 할 것 처럼 짙은 꽃 향기에 꽃을 안은 것인지, 사람을 안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루이스."
"쉿. 적당히 알아서 둘러대주세요.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사람 앞엔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꽤나 귀여운 짓을 하는 구나."
"어서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는 물론 뺨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별 수도 없기에 다이무스는 다시 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제후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저와 품 안에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쇼. 이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그렇습니다."
"아, 아니. 아닐세. 헌데, 그....혹시...."
"제 정인입니다."
여전히 그 눈에 더러운 탐욕이 떨어지지 않아 불쾌해지려는 찰나, 루이스가 길게 콧소리를 내며 응석을 부리듯 품에 뺨을 부비며 안겨들었다. 제후와 이야기하고 있던 다이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할 거라면 제대로 하는 게 나았다.
"...자꾸 보채서 안 되겠군요. 먼저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이무스는 그대로 무릎에 앉아있는 루이스를 안아들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 내일이나 모레면 기생들도 도착할 테니 그 때 잘 구슬리고 달래주면 그만이었다. 문을 나서자 루이스가 너울을 걷어 넘기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도 한 고비 넘겼네요."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급하게 배웠죠. 이제 내려주세요."
"네가 보채지 않았더냐. 기왕 한 거 제대로 해야지. 이대로 침실까지 갈 거다. 침상 위에 내려주지."
루이스의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다이무스는 이제야 제 연인의 얼굴이 돌아온 것 같아 흡족하게 씩 웃었다.
"곱군."
"그야 화장에만 반 시진을 들였으니까요."
"기왕이면 가끔 해다오."
"...저도 사내놈입니다."
"정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게 이상한 일이더냐?"
루이스는 질색하다가 다이무스의 그 의기양양한 미소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번쩍 들어 다시 고쳐 안으며 곱게 연지를 바른 입술에 입맞췄다. 적어도 오늘 밤은 쉬이 재울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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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벨져] 젊은 왕과 집사, 그리고 연적
※ 겨울왕국 패러디 티엔루이벨져
생각하신 거랑 많이 다를 것 같아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ㅠㅠㅠㅠㅠ
흐으윽 부디 어여삐 봐주세요 ;ㅁ;)S2
올해로 젊은 왕을 모신지 이십년이 되는 티엔은 왕의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선 문지기들과 짧게 눈인사를 하고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할 땐 계란을 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고, 정중하게 세 번.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매일 그러하듯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티엔은 문을 열어 옆에서 세숫물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함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하얀 도자기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붓고, 티엔은 창문을 가린 두꺼운 암막 커튼을 젖혔다. 강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며 방 안을 밝히고, 상쾌한 아침 바람이 세 사람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침대의 얇은 천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라의 백성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젊은 왕은 꿈틀거리며 창문의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시녀가 갈아입을 옷을 내오는 사이 티엔은 침대로 다가갔다. 늘 보는 풍경이긴 하지만 왜 이 넓은 침대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는지. 티엔은 베개를 끌어안고 이불에 파묻혀있는 왕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전하. 일어나셔야 합니다. 홀든 경이 조회 전에 뵙자더군요."
"우으응…, 5분만……."
"그렇게 말씀하신지 5분 됐습니다. 일어나시죠."
티엔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는 왕의 어깨를 잡아 흔들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 역시 매일 아침 겪는 것이지만 빨리, 제대로 깨우려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일어나라."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않던 왕이 눈을 떴다. 채 눈을 다 뜨지 못할 정도로 잠에 취해서 저를 찾는 붉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워 티엔은 그의 눈꺼풀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작은 애정 표현에 루이스는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눈꽃이 피어나는 듯한 미소에 티엔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왕위에 오른 지가 벌써 육년인데, 아직도 어릴 때 버릇을 버리질 못한다. 티엔은 루이스의 잠버릇을 걱정하면서도 제게만 아침을 허락하는 그가 사랑스러워 이 짓을 그만두질 못하고 있었다. 왕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사람이 나쁜 버릇을 들이다니, 이래서야 집사 실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십여 년 넘게 그를 돌본 티엔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루이스의 미소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매번 다짐하지만 또 매번 그 미소에 지고 만다. 티엔 정은 대개 거의 대부분의 면에선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남자지만 이십여 년을 돌본 왕 앞에서 만큼은 저도 모르게 약해지곤 했다.
"티엔……."
제게 뻗는 손을 맞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재우고 면회 요청을 거절하고 싶지만 상대는 홀든이었다. 그것도 둘째. 티엔은 이불 째로 루이스의 몸을 끌어당겨 등을 토닥였다. 루이스는 티엔의 품에 얼굴을 묻고 부비며 어리광을 부렸지만 티엔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벨져 홀든이 신경질을 낼 거다. 일어나서 잠깐 얼굴이라도 비춰."
"벨져?"
루이스는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싫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홀든이 틀어쥐고 있는 막대한 부와 그를 기반으로 설립된 은행은 아무리 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푸대접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루이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시무룩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빠른 행동에 티엔은 루이스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루이스는 바로 슬리퍼를 신고 세수를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하루의 시작이라 티엔은 수건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서 수건을 받아들고 나가라 눈짓했다.
"오늘은 또 뭣 때문에 왔대?"
"아침에 긴히 할 말이 있다더군."
"군사 동맹 얘기는 안 꺼내면 좋으련만……."
티엔은 세수를 마친 루이스에게 수건을 건네고 옷을 가지러 돌아섰다. 얼음을 다루는 힘을 타고난 루이스는 그 능력 때문에 채 다섯 살도 되지 않아 외딴 탑에 유폐됐다. 말이 보호지, 감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루이스를 돌본 게 티엔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시중을 든 건 티엔이 아니라 티엔의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를 돕다 보니 어느 순간 루이스를 돌보고 있었다. 처음 루이스를 봤을 때 티엔은 제 눈을 의심했다. 말로 듣던 왕자님은 이야기에 나오는 야수처럼 흉악하게 생긴 괴물도 아니고, 괴팍하거나 까탈스럽지도 않았다. 떼를 쓰는 법도 거의 없는 착하고 순한 아이일 뿐이었다. 얼음을 다루는 능력만 아니면 그냥 동네에서 볼 법한 착하고 순한 아이에 불과했다. 탑에 사는 왕자님을 두고 무성한 소문 중에 맞는 거라곤 손에서 얼음을 만들어내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루이스."
"응?"
티엔은 저를 향하는 시선에 루이스에게 다가가 입술을 맞췄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옷의 단추를 푸르던 루이스는 갑작스런 키스에 놀랐지만 혀를 얽으며 입안을 희롱하는 연인을 따라 눈을 감았다. 허리를 당겨 배를 맞대고 점점 더 농염해지는 키스에 아침부터 머릿속이 비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으려는 입술이 떨어지고, 키스 대신 살짝 입술을 맞대고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끝을 맺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의 어깨를 잡고 다시 입을 맞추자 티엔은 루이스의 뺨을 양 손으로 감싸더니 이마와 코, 입술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니다."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놓았다. 그제야 루이스는 티엔이 왜 이러는지 눈치 채고 그의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였다.
"티엔.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 그래."
루이스는 슬며시 웃고는 돌아서서 잠옷을 벗었다. 아침햇살 아래 드러난 매끈하고 흰 살결. 그 피부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알기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다시 침대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탑에서 십여 년을 보낸 루이스지만 왕의 재목으론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왕자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떨어지는 면도 없었다. 물론 어릴 땐 더러 가끔씩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방을 꽁꽁 얼려버리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결국 능력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육년 전 전쟁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탑을 나오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 적은 강력했고, 채 세 달도 되지 않아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왕궁 앞까지 도달했을 때, 왕자들과 귀족들은 제일 먼저 달아났다. 수성전이 진행되는 도중 티엔은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루이스를 데리고 달아나려 했다. 일방적인 침략 전쟁은 얼굴도 모르는 형들과, 자식을 버린 왕이 받는 벌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방을 서성이던 루이스의 손을 잡고 티엔은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단 둘이 의지하며 몸까지 섞은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왕의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연인을 해치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놓았다. 놓고,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을 기회라며 전란의 중심으로 가버렸다. 티엔은 그제야 제가 모시던 사람이 진짜 왕이라는 걸 깨달았다.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자. 그 등을 보며 티엔은 가슴 속에 울컥 북받치는 감정을 삼키며 맹세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끝까지 따르며 보필하겠노라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버릇처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그의 편이 되어야 했다. 지금 그를 잡는 건 제 욕심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홀로 나아가 손을 푸른 결정으로 물들이고 얼음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기이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에 침입자들은 혼비백산해 물러났고, 루이스는 끝까지 맞서 싸우던 병사들과 국민들을 모아 그들을 몰아냈다. 상황을 역전시키고 바다마저 얼려 그들을 포로로 잡은 루이스는 배상금 문제는 물론 전후사고 처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심은 나라를 버린 왕자며 귀족이 아닌 '영웅'에게 쏠렸다.
얼음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더 이상 배척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뭄이 심한 지역의 우물에 저수지를 만들고, 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피서지를 만드는 고마운 능력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나 연합국의 수장으로부터 친필 편지와 선물이 도착했다. 더 늦기 전에 변경에서 적을 막은 덕에 피해를 줄였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받은 황금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피해보상금으로 분배했다. 물론 피해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도 루이스의 뜻이었다. 이쯤 되니 성도 받지 못한 왕자가 왕이 되는 것에 반기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탑을 나와 왕위에 올라서도 티엔은 변함없이 그 곁을 지켰다. 다만 루이스의 능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다 보니 시시때때로 동맹을 맺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보려는 나라들이 손을 뻗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제 힘이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거절하고 있지만, 그게 계속되니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루이스가 괴로워할 때마다 그 옆을 지키고 위로하는 것 역시 티엔의 몫이었다.
"그나저나 벨져라…, 다른 형제들은?"
"다이무스 홀든은 헬리오스에 있고 이글 홀든은 아직 뻗어있다."
티엔은 루이스의 옷을 입혀주며 대답했다. 단 둘이 있을 때도 보좌관 티엔 정과 연인이자 오랜 친우 티엔 정을 구분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태반이라 말을 조심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말을 낮췄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진 루이스는 티엔을 돌아봤다. 같이 지낸 세월만 이십년이 넘다 보니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속내가 읽히곤 했다.
"괜찮다니까."
"……. 하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럼?"
"…그 남자가 널 나와 같은 눈으로 보고 있어서."
루이스는 대답 대신 말도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 사람들 일엔 한없이 예민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선 눈치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그런 면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이럴 때 만큼은 자기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지 모르는 무방비한 연인이 원망스러워지곤 했다. 루이스는 피식 웃고는 티엔을 끌어안았다. 기껏 차려입은 옷이 구겨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이자 티엔이 루이스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티엔은 빙그레 웃는 루이스와 눈을 마주하고, 피식 웃으며 입을 맞췄다. 이젠 정말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 남자가 제 연인을 집어삼키려 들더라도 가야 했다. 오늘따라 접견실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늦는군. 차를 마시는 손동작만으로도 우아함과 기품이 절로 묻어나는 은발의 사내, 벨져 홀든은 오지 않는 젊은 왕을 기다리며 붉게 우러난 차의 향을 음미했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산에서만 나는 찻잎은 이 나라의 특산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벨져가 지금 마시는 것은 특상품이라 더욱 그 향이 은은하고 짙었다. 처음 마실 땐 그냥 물이나 다름없지만 입 안에서 머금고 넘길 때야 비로소 그 향이 은은하게 퍼지다 눈이 녹듯 사라지는 게 특색이었다. 꼭 누구처럼 말이지. 벨져는 쿠션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꼬았다.
'영웅' 루이스라길래,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이미지의 마법사를 떠올렸는데 막상 나온 게 거리를 지나다보면 흔히 있을 것 같은 수수한 청년이라 꽤 의외였더랬다. 왕이 되기보다는 어디 도서관의 사서나 하면 딱 어울릴 법한 얼굴이라 벨져는 그를 얕보고 말았다. 그 수수하고 곱상한 얼굴 뒤에 싸늘한 얼음 칼날을 숨기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리 쉽게 체관을 내주지 않았을 텐데. 제 오만이 불러온 실수 때문에 홀든 은행은 루이스에게 없다시피 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딱 원금 상환 그게 전부다. 그 없느니만 못한 이자 덕에 이렇게 가끔 찾아와 닦달하러 올 수 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저를 두고 시작된 뒷말과 막내동생의 놀림을 피할 수 없었다.
언젠가 벨져 홀든이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는 날이 오리라. 세간에서 그렇게 떠드는 바와 달리 벨져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끈질기게 찾아오는 건 사소한 복수나 앙갚음 때문이 아니라, 조금 더 심오한 흥미 때문이었다. 이주 만인가. 벨져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곧 내륙엔 쨍한 여름이 다가오는 지라 얼음 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고, 내륙의 화폐를 이쪽의 화폐로 바꿀 정도의 현금을 보유한 건 홀든 은행밖에 없었다. 벨져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는 루이스를 비롯한 대신들과 치열하게 환전 비율을 가지고 얘기를 하다 루이스가 쐐기를 박기 전에 회의를 끝내고 나왔다. 이번에도 져준다면 다이무스는 물론 아버지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한 걸 내준다면 또 모를까, 아무리 루이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번 만큼은 쉽게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했군요."
"그러게. 많이 늦었군. 내 시간은 일 분 일초가 돈인데 말이야."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뭐, 이런 작은 나라에선 아무래도 최상품을 구하긴 힘들겠지."
"이해해주셔서 고맙군요."
명백한 도발에도 루이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며 벨져의 앞자리에 앉았다. 늘 데리고 다니는 검은 머리의 집사가 차를 내오자 고개를 돌려 눈웃음을 치는 게 영 신경에 거슬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벨져는 턱을 살짝 올리고 팔짱을 꼈다.
"너, 이리로. 기다리느라 차가 식었다."
차를 마시던 루이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제게 향했다. 당장이라도 그 능력을 사용해 저를 꽁꽁 얼려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눈이었다. 역시, 얼빠지게 순한 얼굴보단 이쪽이 낫다. 벨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집사는 흠 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동작으로 벨져의 잔에 차를 따르고 허리를 숙인 후 물러났다. 루이스의 최측근이라고 해도 제가 우위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벨져는 잠시 싸늘한 눈빛으로 저를 경계하고 있는 그와 눈을 맞춘 후 다시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 적개심을 감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얼음 호수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이른 아침부터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그냥, 보고 싶어서."
"…전 농담은 재미있는 게 좋습니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벨져는 확 일그러지는 루이스의 얼굴에 흥이 났다. 질색하는 루이스의 뒤에 선 집사의 얼굴이 같이 굳는 게 영 마뜩찮았지만 그보단 눈앞의 남자가 더 중요했다. 벨져는 쿠션에 등을 기대며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벨져는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눈을 감고 피식 웃었다.
역시, 가지고 싶다. 이글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질색했지만 벨져는 이글의 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벨져는 이 굳건한 얼음벽 같은 사내의 목에 목줄을 채워 제 발 아래 두고 싶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강하고 아름다운 짐승이다.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열에 달뜬 숨 사이에 제 이름을 부르는 달콤하고도 짜릿한 상상에 벨져는 눈을 떴다.
"사실,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서밖에 안 나는 거라……. 그걸 주면 그깟 돈 몇 푼은 문제도 아니지."
"…말씀하시죠."
벨져는 선심 쓰듯 먼저 속내를 털어놨다. 그래, 그걸 가질 수 있다면 그깟 돈 몇 푼쯤 대수롭지 않지. 루이스의 얼굴은 여전히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들어올 때 잠시 띠웠던 가식적인 미소 대신, 잔뜩 날을 세워 저를 위협하고 경계하는 이 붉은 눈과 차가운 표정이 벨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너."
"농담이 과하십니다, 홀든 경."
"하, 개는 개답게 주인 아래 엎드려 있어야지. 식탁에 올라오려 하면 쓰나."
놀란 나머지 말도 못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루이스 대신 그의 집사가 끼어들었다. 그 포커페이스가 깨지고 동요하는 걸 더 감상하려던 벨져는 흥을 깬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가차 없이 깎아내리는 말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도 없는 사이라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주고받는 눈짓도, 자잘한 습관 하나까지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보살피는 것도, 이따금 애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속닥이는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이 남자는, 루이스를 돌봐야할 어린 동생이자 왕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연인으로 보고 있다. 과거가 어찌 됐든 벨져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먹어치우고 나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벨져는 짐승의 눈을 한 티엔 정을 피하지 않았다. 치열한 눈싸움은 한 사람을 둔 사내들의 갈등 그 자체였다.
"그쯤 하시죠, 홀든 경."
"예의를 가르친 거다, 왕."
"그게 조건이라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벨져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티엔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루이스는 벨져만을 응시했다. 잠시, 그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쉽게 내주겠다고 하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홀든 경이 남색인 것도 모자라 한 나라의 왕을 상대로 몸을 요구했다는 게 알려지면, 그것도 꽤 볼만 하겠군요."
"……."
이 새끼가. 벨져는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밖으로 알리겠다고 협박하다니. 남색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게 알려지면 이미 자신과 루이스에 관해 떠도는 소문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라 추문이 된다. 루이스야 백성을 위해 몸을 바친 왕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를 따르는 동맹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이들이 단체도 돈을 빼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벨져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이를 악물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이스는 평온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벨져의 싸늘하게 식은 눈이 따라붙었지만 루이스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세 걸음도 채 못 가서 벨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더 하실 말씀이라도?"
"흥, 영악하긴. 언젠가 네가 스스로 내 발치에 무릎 꿇게 될 거다."
벨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단단히 봉한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루이스는 티엔에게 눈짓하고는 고개를 돌려 벨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기대하죠. 그럼 이만."
루이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웠다.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찬 접견실을 나오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듯 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걸음 뒤에 따라오는 티엔에게 손을 내밀자 바로 벨져가 내놓은 두루마리가 손에 올라왔다. 홀든의 인장이 납인된 것으로 보아 홀든의 당주가 보낸 게 분명했다.
이미 다 정해져있는 걸 가지고 어제부터 그 짓거리를 하다니. 루이스는 놀아났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불안해하는 티엔도 덩달아 루이스의 무거운 마음에 무게 추를 더했다.
"티엔."
"예, 전하."
"돌아가는 배에 선물로 애완동물 좀 보내. 기왕이면 작고 털 많고 애교 많은 애들로."
"알겠습니다."
루이스는 이글이 고급정보라며 말한 벨져의 약점을 떠올렸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거나 애완동물은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다는 점에서 받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난감한 선물이었다. 어디, 돌아가는 삼일 내내 실컷 즐겨보시지. 루이스는 뜯지 않은 두루마리를 다시 티엔에게 넘겼다. 이른 아침부터 헛소리를 듣느라 기분도 더럽고 배도 고팠다.
"오늘 아침은 뭐야?"
"연어 샐러드를 넣은 샌드위치를 준비했습니다."
"하아, 오늘 들은 얘기 중에 제일 반가운 소리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티엔을 돌아봤다.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불안과 심란해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다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그를 이십년 동안 본 루이스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티엔."
"……."
연인의 이름을 읊조린 루이스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손을 마주 잡아오는 그가 안쓰럽고 또 미안해 루이스는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사랑해.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눈으로 말하자 티엔이 애틋한 눈을 하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두어 번 더 손등을 토닥인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놓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연인을 위로하느라 쉬이 잠들기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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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호감과 흥미 사이 To.닭님
제 사랑 닭님께 드립니다 ><
뭔가 많이 부족하지만 제 사랑으로 받아주세요...!! (전나
재단과 연합의 친선전, 루이스는 무너진 HQ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슬아슬했다아... 긴장이 풀렸는지, 토마스가 털썩 주저앉아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는 피식 웃고는 토마스와 엘리에게 다가갔다. 고생한 후배에게 손을 뻗자 토마스가 저를 올려다봤다.
"둘 다 잘했어. 돌아가면 맛있는 거 먹자."
칭찬 한 마디에 토마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존재하지도 않는 꼬리를 마구 흔드는 착각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신나서 말문을 튼 토마스와 덩달아 신이 난 엘리가 재잘거리기 시작하고, 리스폰 기어의 피터와 이글도 무전기로 떠들어대는 바람에 연합의 통신망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애 둘을 데리고 나오면 항상 이렇게 된다니깐. 그래도 왁자지껄한 게 싫지만은 않아 루이스는 릭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토마스와 엘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보고 있는데 뒤통수에 묵직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랑이라면 투덜거리고 있으니 아니고, 브루스씨는 조금 전에 리스폰 기어로 갔고. 그럼 남는 건 티엔 정 뿐이다. 아니니다를까, 토마스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손을 입가에 대고 속삭였다.
"선배, 티엔 정이 아까부터 선배를 보고 있는데요...."
"응. 알고있어."
"모야? 엘리두 비밀얘기 들을래~!"
엘리가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더 지체했다간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루이스는 토마스에게 잠시 갔다 오겠다며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과연, 등을 돌리자마자 마주치는 검은 눈동자에 루이스는 침을 삼켰다. 굳건한 돌과 같은 그가 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일까. 루이스는 이번 공성을 되짚었다. 듬직한 동료들이 잠시 다른 임무를 하러 가는 바람에 전방에 설 사람이 마땅치 않다보니 뒤에 엘리와 피터, 토마스를 두고 갈 수가 없어 정면으로 파고드는 티엔과 계속해서 마주치긴 했다. 그를 막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절로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이번엔 잘 얼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고르는 사이 거리는 전점 가까워졌고, 루이스는 티엔 앞에 멈춰서 손을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스터."
"...수고했다."
딱히 감정이 상한 건 아니었는지 티엔은 먼저 손을 내민 의중을 파악하려 하면서도 악수를 거절하진 않았다. 하지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시선만큼은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루이스는 태연히 신경 쓰지 않는 척 가볍게 맞잡은 손을 흔들고 놓았으나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의미지.
티엔이 손을 놓지 않는 바람에 꼼짝 없이 잡힌 루이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공성 중에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말이라도 했나. 루이스는 티엔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공성 내내 맞붙으며 호승심을 자극하기라도 한 건가. 후자면 조금 곤란하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서 쉬고 싶기도 하거니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압도적으로 이기거나 져야 하는데, 티엔 정과 전력을 다해 싸웠을 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루이스로서도 예측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걱정을 삼켰다. 다행히도 티엔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고, 루이스는 안도하며 돌아섰다. 일에 관해선 철두철미하지만 은근히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 가급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잘 풀린 거면 좋겠는데. 악수를 하고 돌아서도 후드를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시선은 끈질기게 루이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옵저버로 연합의 공성을 보러 올 때도, 가끔 길을 가다가도 우연히 마주치면 한동안은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영웅이란 이름을 달고 나서부터 웬만한 관심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적당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한게 제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건 티엔 정이 서점에 출석도장을 찍기 시작한지 꼭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참을 만큼 참았고, 이쯤되면 확실히 입장을 정리해 못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다음엔 꼭, 말해야지. 루이스는 그랑플람과 공동작업이 예정된 디시카 순찰 업무를 하겠다고 나섰다. 디시카의 수액 채집구역에서는 뭐가 나올지 모르는 데다 워낙 치안이 좋지 않아 제 몸 하나 정돈 지킬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연합의 주요 자원 지역이니 만큼 그랑플람의 의사를 대표할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니 그랑플람에선 티엔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연합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 말해두면 그도 알아서 포기할 것이다. 아무리 요즘 능력자들의 소속 이적이 잦다고 해도 명색이 '연합의 영웅'이다. 동료들을 저버릴 수도 없거니와 지금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합의 조직들을 앤지에게 그냥 떠넘기고 갈 수도 없었다. 연합 내에는 아직도 앤지를 탐탁지 않아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들을 아우르는 건 전적으로 토니와 흑염 하이드 때부터 연합에 충성을 다한 이들 덕분이었다. 다들 연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이적은 루이스에게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티엔 정이 대체 왜 자신을 노리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 말로 잘 풀면 알아서 포기할 터였다. 루이스는 스케줄을 정리하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제 이름을 적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건 늘상 하는 일이라 왜 나가냐 묻는 사람도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음."
예상한 대로 나타난 티엔은 루이스의 인사에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손을 내밀자 굳센 손으로 악수를 받은 티엔은 전과 달리 금세 손을 놓았으나 그 시선만큼은 그대로였다. 신경 쓰이는 건 매한가지지만 우선은 일이 먼저다. 루이스는 챙겨온 지도를 펼쳐 보여주며 오늘 돌아볼 지점을 짚었다. 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를 간단히 묻고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확실히, 유능한 사람이라 그런지 일은 별 무리 없이 수월하게 풀려나갔다. 일이라고 해도 그냥 디시카의 세계수 근처를 순찰하는 것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디시카의 거주지역을 반쯤 돌고 수액 체취 구역으로 들어서는데 잠시 세계수에 눈을 판 사이 돌부리에 발이 턱 걸렸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라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성대하게 넘어질 거라 생각하고 땅을 구르는 것만은 피하려 손을 뻗었으나 강한 충격을 마주하는 대신 허공을 휘저었다. 루이스는 제 허리를 붙잡은 단단한 팔의 감촉에 눈을 떴다. 가깝다. 티엔 정의 그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괜찮나?"
"아, 예.... 감사합니다."
"주위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밑도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래도 안개가 끼고 나무가 무성한데 모자까지 쓰니 시야가 가리기 마련이지."
하랑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런가, 후드를 살짝 걷으며 하는 선생같은 말투에 슬쩍 민망함이 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두 살 차인데. 후드를 걷은 티엔의 손이 내려오며 귀를 스쳤다. 루이스는 민망한 나머지 후드를 정리하는 척 티엔의 손이 스친 귀를 매만지며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니, 고개를 숙이라는 게 아니다."
불쑥 다가온 손이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 강하게 올린 것도 아니건만, 자연스레 그 손을 따라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잠시 말 없이 그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티엔의 눈이 흔들렸다. 살짝 귀가 붉어진 것 같은데 어디 안 좋기라도 한 건가 싶어 루이스는 진지해졌다. 정제되지 않은 나무 수액때문인가. 능력을 강화하는 안개를 빨아들여 생긴 나무 수액은 장비에 쓰이는 것처럼 정제되지 않아 안개의 농도가 높았다. 능력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위험하다.
루이스는 손을 들어 티엔의 이마를 짚었다. 티엔이 눈에 띠게 움찔하며 손목을 잡자 그제야 자신이 무례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무 수액의 영향으로 몸이 안 좋은 거라면 여기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니, 괜찮다."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신중하게 생각해보시죠."
루이스는 티엔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티엔은 여전히 진중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고, 루이스는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내민 손에 티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루이스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냐는 듯한 눈빛에도 루이스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길이 복잡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 생겨도 이러고 있으면 바로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불쾌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뭔가 했더니, 손을 잡으라는 거였나. 티엔은 방금 전까지 순진하게만 보이던 눈이 순식간에 단호한 빛을 띠는 걸 보고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이 사내는 제 컨디션이 안 좋은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티엔은 가볍게 숨을 토했다. 그냥 자세를 바로잡아주려 한 것 뿐이었다. 다만 루이스가 저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는 바람에 잠시, 놀랐을 뿐이다.
아무리 그가 곱상하니 선이 고운 미인이라 해도 엄연히 남자다. 그건 분명히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년 같은 눈을 하고 올려다보는 바람에 티엔은 순간 달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 하지만 곧이 곧대로 말하는 건 실례가 되는 일이기에 티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걸 말해서 괜히 그의 자존심과 명예에 흠을 내느니 오해를 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불가항력으로 다가온 떨림에 얼굴이 붉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럼 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마에 손을 얹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다가온 손에 다시 한 번 놀란 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의 냉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같은 남자에게 두근거리다니.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맞잡은 채 가라앉을 생각을 않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고민일 뿐, 맞잡은 손의 감촉에 두근거림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디시카의 나무를 돌아봤자 나무일 뿐, 딱히 주목할 점은 보이지 않다 보니 자꾸만 다른 게 티엔의 시선을 빼앗았다. 후드 아래 드러난 희고 가는 목덜미라던가, 단단하고 곧게 뻗은 손목과 팔이라던가. 티엔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꼭 쥐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렇게까지 제 흥미를 끌다니,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티엔은 지난번 친선전을 떠올렸다.
털썩 주저앉은 마에스트로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주는 젊은 영웅과, 살짝 머금은 그 미소가 문득 시야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비슷하다 보니 사정거리 안에 항상 그가 있었다. 그날 따라 어린 아이들을 대동해서인지 앞에 아론 휴톤이나 레베카 러쉬톤이 있을 때보다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잦았다. 평소엔 뒤로 돌아오거나 결정으로 만들 레일을 타고 빠르게 미끄러지며 저를 지나치는 바람에 알고도 못 막는 게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주제에, 그날 따라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브루스와 자신이 앞길을 터도, 그와 마에스트로의 굳건한 얼음벽을 넘을 수 없었다. 물론 하랑이 미숙함과 챌피의 늦은 서포트 역시 영향을 끼친 걸 빼놓을 순 없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영웅과 맞닥뜨렸을 때 낮게 타오르는 그 붉은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왜 차가운 드라이아이스에 화상을 입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머리로는 뒤로 넘어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 붉은 눈동자를 지나칠 수 없었다. 자꾸만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게 문제였다. 그 붉은 눈동자가 다른 이가 아닌 자신만을 향할 때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흥분됐다. 조금 더, 오래 붙어보고 싶다. 티엔은 그와 면대면으로 붙었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귀를 쨍하니 울리며 깨지는 산탄총, 그 푸른 결정이 깨지고 바스라지며 비로소 보이는 붉은 눈동자. 티엔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한 번 쯤은 꺾어봐야 할 사내다. 티엔은 광장에 돌아와서도 그를 주시했다. 마에스트로와 이야기하던 그가 무슨 일인지 티엔을 돌아봤고, 잠시 둘은 눈을 맞췄다. 티엔이 아무 말도 않자 루이스는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스터.'
'...수고했다.'
티엔은 얼음의 냉기가 남은 차가운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힘이 실리지 않은 서늘한 손, 변할 것 같지 않은 그 절대영도의 무표정에 잠시 서린 곤혹. 티엔은 그제야 제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손을 놓았더랬다. 손바닥에 닿았던 촉감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게 아쉬웠다.
잠시 그 날을 회상하던 티엔은 제 손을 잡아 끄는 루이스의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본 게 얼마만인가. 그것도 남자들끼리. 이래서야 그냥 산책을 나온 거나 다를 게 없었다. 자욱하게 낀 안개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아니면 영락없이 숲길을 걷는 피크닉이다. 티엔은 맞잡은 손의 온기에 이끌려 걸었다. 끝도 없이 걸을 것 같던 시간은 금세 끝나고, 루이스가 티엔의 손을 놓았다. 손에 남은 감촉이 괜히 아쉽고 서운해 티엔은 미지근해진 제 손바닥을 잠시 바라봤다.
"저..., 미스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차분하게 길잡이 역할을 하던 루이스가 결연한 눈을 하곤 티엔을 돌아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티엔이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숨을 집어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연합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뜬금없는 소리에 티엔은 드물게 되물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루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뭔가 혼란스러운 듯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 절 스카우트하려는 게 아닙니까?"
"오고 싶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루이스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말을 멈췄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이지? 루이스는 다른 가정을 내놓았다.
"아니면 결투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나쁘지 않지.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답을 들어도 이해가 가기는 커녕 더 깊은 미궁 속에 빠진 느낌이다. 루이스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는 티엔의 얼굴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그럼 대체 왜 저 그렇게 보시는 거죠...?"
못 물어볼 건 또 뭔가. 루이스는 솔직하게 자신을 따라붙는 시선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팔짱을 낀 티엔은 그마저도 못 알아들은 눈치라 루이스는 답답해졌다. 이쯤되면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 남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자각 자체가 없는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아파오는 머리에 이마를 짚었다. 이걸 어찌한다. 스카우트도, 결투도 아니라 해도 그의 집요한 시선이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루이스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아닙니다. 제가 착각했군요."
"내가 널 어떻게 본다는 거지?"
제가 던진 질문보다 가감없이 돌아오는 질문에 루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지금 저를 보는 이 눈빛.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맹수의 눈빛. 거기에 적의가 섞이지 않은 게 마치....
"혹시, 제게 호감을 갖고 계십니까?"
침대에 이르기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묘한 텐션, 그 눈빛이 아닌가. 루이스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순식간에 둘 사이를 메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티엔 정이 한 걸음 다가왔다.
"호감이라.... 잘 모르겠군."
"...그럼,"
"하지만, 흥미는 있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드물게 열기가 섞인 목소리가 낯설었다. 다가오는 손에 흠칫 움츠리자 티엔의 손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뺨을 쓸고, 목을 스치며 내려갔다. 후드를 벗겨낸 티엔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눈을 감았다. 그의 손끝이 닿은 자리가, 덴 듯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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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밑도 끝도 없이 양궁au
그냥 갑자기 뜬금없이 떠오른 양궁au
양궁은 다른 스포츠와 달리 오로지 홀로 고고한 스포츠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이고, 아무리 단체전이라 해도 활을 들고 선 순간만큼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도, 그렇다고 너무 빨리 쏘아서도 안 된다. 철저하게 계산된 조준, 망설임을 남겨선 안 되는 슈팅. 그렇기에 벨져에게 양궁은 최적의 스포츠였다.
날씨 좋다. 벨져는 잘 정리된 화살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사격장에 들어섰다. 방금 전까지 바람 한 점 없더니, 파이널이 시작되자 갑자기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건 좋은 징조다. 벨져는 승리의 여신이 오늘도 제 손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규모도 상금도 작은 대회지만 어쨌거나 이번 대회는 벨져의 고교 데뷔전이었다. 초등학생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벨져는 그동안 꾸준히 ‘홀든’의 명예에 걸맞게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컵과 금메달을 거머쥐며 유망주로 입지를 굳힌 선수였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바뀌는 건 없다. 이제 겨우 격에 맞는 상대들을 만나게 된 것 뿐이었다. 승리는 언제나 제 것으로 정해져있었고, 오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타고난 신체조건과 탁월한 집중력, 그리고 무엇보다 망설이지 않는 빠른 슈팅. 벨져는 화살이 제 손끝을 떠나 과녁에 꽂히는 그 사이의 공백을 즐겼다. 원하는 대로 꽂히는 화살과 정상에 선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벨져는 빨리 쏘는 만큼 힘도 좋았기에 바람이나 날씨의 영향에도 강한 편이었다. 날씨가 궂을 때면 벨져와 다른 선수 사이의 점수 격차가 더 벌어지곤 했고, 그런 점에서 이번 경기도 니케가 제게 날개를 펴주는 셈이었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수가 사석에 들어오는 것을 흘끗 바라봤다. 특이한 색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끈 탓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쳐다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여간 영국 놈 아니랄까봐 칙칙하긴. 벨져는 짧은 감상을 끝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곧 마이크로 제 이름이 호명됐고, 벨져는 일어나 활을 들었다. 성인급도 잘 안 쓰는 무거운 활. 그 무게를 한 팔로 들고 벨져는 사석에 섰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벨져는 자기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말하는 문구를 떠올렸다. 그 말 그대로 벨져는 화살을 오래 들고 있는 법이 없었다. 숨을 고르고, 시위를 당겨 스트링이 입술과 턱에 닿도록 당기고 잠시 숨을 멈춘다. 하나, 둘, 셋. 조준을 마친 벨져는 팔꿈치를 올리고 화살을 쐈다. 화살은 바람을 찢고 날아가 노란 원 안에 꽂혔다. 9. 시작으로 나쁘지 않다. 가볍게 활을 돌리며 벨져는 다음을 준비했다. 살짝 돌아간 암가드를 절히나느데 옆 사석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순간 불어오는 강한 돌풍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하다하다 바람까지 제 손을 들어준다. 쏘고 울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자 정확히 노란 원 안에 꽂힌 화살이 보였다. 10. 오조준을 한 게 바람을 탔나. 자기 차례를 알리는 신호음에 벨져는 활을 들었다. 경기라고 해봤자 매일 하는 연습이나 다를 게 없다. 발사 신호음이 울리고, 벨져는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화살을 떠나보냈다. 9. 이번에도 화살은 9에 꽂혔다. 10에 가깝긴 했지만 그래도 9는 9였다. 강한 바람에 경로가 살짝 휜 탓이었다. 어긋난 계산에 벨져는 혀를 찼다.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지만 제 계산이 틀렸다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조금 더 힘을 들였어야 했나. 벨져는 과녁을 보며 팔짱을 꼈다. 옆에선 다시 신호음이 울렸다. 그냥 빨리 끝내지. 벨져는 바람을 맞으며 조금 시간을 들이라는 제레온의 충고를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정도의 판단은 모두 제 몫이다. 섬광같은 화살은 벨져 홀든의 특기이자 자랑이었다. 활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9. 이번에 잡지 못하면 꼴이 우스워질 판이었다.
벨져는 화살을 끼웠다. 평소 하는 것처럼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고, 가늠자를 통해 과녁의 정중앙을 응시했다. 숨을 고르고, 때를 기다려 쏜다. 화살을 정중앙을 비껴나 두 번째 원의 끄트머리에 꽂혔다. 화살이 꽂힌 걸 본 벨져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총합은 27, 재수가 없으면 26. 이렇게 되면 이번 세트를 내줘야 할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내가, 왜? 왜 초조해하는 거지? 나는 벨져 홀든이다. 한 세트쯤 내주더라도 결국 이기는 건 나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제 상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들었는데, 대충 흘려듣다보니 영국인이라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벨져는 사석에 서서 화살 두 개가 중앙에 가깝게 꽂힌 과녁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영국놈을 바라봤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옆선이 곱상하니 가늘다. 잠시 그 옆얼굴을 보는 동안, 화살이 활을 떠나며 그의 손 안에서 활이 미끄러지듯 돌았다. 얄궂게도 그의 화살은 벨져의 화살이 그랬던 것처럼 8과 9 사이의 선에 꽂혔다. 남은 건 심판의 몫이지만, 그래봤자 운이 좋아야 비기는 거였다. 기록지를 든 심판들이 과녁 앞을 오가더니 스코어가 스크린에 떴다. 제 3라인, 벨져 홀든, 9, 9, 8. 졌다. 벨져는 제게서 2점을 따간 영국놈의 이름을 확인했다. 제 4라인, 루이스, 10, 9, 9. 망할.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구겨졌다.
“하...! 제길....”
욕보다는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정색한 벨져는 다시 활을 들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딴 새끼한테 지다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벨져는 다시 사석에 섰다. 성도 없는 고아같은 게 발을 디딜 판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줘야 했다. 괜히 덤볐다 허송세월 하느니 뭣 모르는 녀석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납작 엎드리게 해주지. 벨져는 활을 들었다. 화살촉엔 오만이 서렸다. 결과는 6:0. 참패였다.
***
벨져는 대기실을 뒤엎었다. 진 건 진 거다. 명백하게 졌다. 그 사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코어가, 과녁에 정확히 꽂힌 화살이 입증했다. 우승을 확신한 경기에서, 겨우 16강에 떨어졌다. 토너먼트식 경기에선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 벨져는 분을 삭이며 제게 쓰디 쓴 패배를 맛보게 한 빌어먹을 개새끼의 이름을 목 안쪽으로 곱씹었다. 제게 집중됐어야 할 언론의 플래시는 제레온이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모두 그에게 쏠렸다. 결과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준결승에서 스트링이 끊어지며 손을 다친 바람에 일종의 패널티가 있었음에도 결승을 속행해 퍼펙트 골드로 한 세트를 따낸 무명의 신인 선수. 심지어 이미 승패가 결정된 마지막 세트에서 루이스는 마지막 화살로 과녁의 정중앙에 설치된 카메라를 깨버렸다.
무명의 신인이 영웅처럼 나타나 벨져 홀든을 꺾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올라온 기사의 타이틀이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벨져 역시 그에 대한 정보를 기사로 볼 수밖에 없었다. 벨져는 차 안에서 태블릿을 켰다. 온통 벨져를 꺾고, 라는 말로 도배되다시피 한 기사들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던 벨져는 마침내 쓸만한 인터뷰 기사를 찾아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시작했다는 인터뷰를 시작으로 벨져는 루이스에 대한 정보란 정보는 다 끌어 모았다. 그는 예상대로 고아였고, 저를 누른 그 경기 전에는 대회에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양궁을 시작한지 채 일 년도 안 되어 준우승을 한 ‘영웅 루이스’.
이글이 집착도 그 정도면 병이라고 질색하며 놀려도 개의치 않았다. 벨져는 필사적으로 제가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부모가 천재라던가, 아니면 수없이 연습을 했다던가. 하지만 루이스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아마 그 본인조차 모를 만한 자료들 안에선 루이스가 양궁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전부였다.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코치도 없이 고작 친구랑 일 년 한 걸로 필드에서 그렇게 계산을 해서 쏜다고? 벨져는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내팽개치길 반복했다. 그리고 언론이 루이스 영웅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선수단을 나왔다.
선수단을 나온 벨져는 홀로 연습에 매진했다. 때마침 제레온이 도핑사건에 연루됐고, 사람들은 벨져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고 수근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머릿속에 벨져 홀든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새겨주지 않으면, 편히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떠드는 것과 달리 벨져는 진 것 자체는 금방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이긴 횟수가 더 많고, 앞으로도 이길 날이 많다. 제가 너무 여유롭게 생각해서, 기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오만하기 그지없어서 방심한 대가를 치른 것 뿐이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해도 가시지 않는 게 있었다.
벨져는 이걸로 딱 오백발 째의 화살을 떠나보내며 다시 그 말간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들이 묻기 전까지 벨져 홀든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 게 제일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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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루이] Exception.
* 범죄자 루이스와 경검 홀든즈로 이어짐
** 나쁜녀석들과 인셉션을 버무린au
교도소 안의 죄수의 삶이란 지겹기 그지 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것 뿐이라 루이스는 여느 때와 같이 점심을 먹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그래봤자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다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곱상한 얼굴만 보고 린치를 하려 들거나, 다른 용도의 노리개로 삼으려는 놈들도 있었지만 카모라까지 규합한 지하연합, 그것도 그 수장의 오른팔이자 콘실리에리를 건드릴 만한 정신나간 놈은 없었다.
애초에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사람도 아닌지라, 루이스가 입소하던 날 네 명이 의무실로 실려갔고, 루이스는 짐을 푼 지 반나절도 안 되어 독방 신세를 졌다.
폐쇄된 교도소 소식이 어찌나 빠른지 독방 신세를 지고 나오니 반가운 얼굴이 루이스를 반겼다. 지하연합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벌인 2차 전쟁에서 함께한 터커가 잠시 쉴 겸 휴가를 받아 왔다는데, 그 마음에 고맙고 미안해 루이스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루이스가 이곳에 있을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는 사람이었고, 또 동료를 아끼는 의리있는 사내였다. 첫날 소동 후로 말이 퍼지면서 그 후로 덤벼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듬직한 동료가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됐다. 앤지가 많이 걱정하더라고 전한 그는 루이스가 다른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며 경호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만 하고 돌아가래도 듣는 법이 없기에 루이스는 일찌감치 그의 마음을 돌리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제일 먼저 루이스를 걱정했다. 하지만 주먹을 쓰는 거라면 또 모를까, 높으신 분들의 결정엔 그가 달리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괜찮겠냐?"
"나쁠 건 없지. 형량도 줄여준다는데."
터커가 억센 손으로 루이스의 등을 말없이 두드렸다. 터커의 형은 1년 6개월, 가만히 있으면 곧 출소할 터였고 루이스는 며칠 전 저를 찾아온 두 사람의 제안을 수락한 후였다. 터커보다 먼저 높은 회벽을 나가도 홀든이라는 다른 감옥에 갇히는 것 뿐이지만.
루이스는 기지개를 켜다 머리를 받치고 잔디밭에 누웠다. 하늘이 유독 푸르다. 좋은 날씨라 옷도 벗고 일관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만난 홀든은 그야말로 귀족 그 자체라 제가 그들에게 섞일 일은 없겠지만,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앤지가 변호사를 통해 보내온 자료를 받아보긴 했지만 사람은 어디까지나 겪어봐야 아는 일이다.
잠시 하늘을 보던 루이스는 손을 들어 강하게 내리쬐는 해를 가렸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괴로우니 눈을 감을 수 밖에. 어쨌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더 신경쓰지 말자.
루이스는 흔히들 망나니라 부르는 막내 홀든을 떠올렸다. 그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과 일화, 겉으로 보이는 그는 말 그대로 망나니지만 루이스는 세간의 평가와 숨겨진 그가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목표가 있다.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경향은 있지만 어디에 얽매여 있지 않기에 오히려 그의 형들보다 더 예측하기 힘들뿐더러 영리하다. 영리하다기 보단 영악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호기심은 그렇게 굴러 굴러 몸집을 불리다 따뜻한 햇살에 먼 의식 너머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사복 차림의 죄수 한 사람만을 태운 이송버스가 갑자기 멈추고, 그 옆에 새빨간 페라리 한 대가 거칠게 멈춰섰다. 얌전히 창 밖을 보고 있던 죄수 루이스는 페라리에서 내린 긴 은발을 보고 바로 앉았다. 소문만 무성한 망나니 막내 홀든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이송버스의 앞문이 열리고 선글라스에 딱 달라붙는 가죽바지, 거기에 호피무늬 라이더재킷을 걸친 다소 해괴한 조합인데도 지나치다기보다 화려하다는 인상을 주는 게 꼭 패션 잡지의 모델같았다.
"여어, 영웅 형씨. 안녕?"
"그쪽은 꽤 즐거워 보이는걸."
"흐응, 듣던 대로 보통내기가 아닌데? 난 또 재미없는 샌님인 줄 알았지 뭐야."
껄렁하게 말하는 게 생각하는 그대로를 내뱉는 티가 역력했다.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앞에 만난 형제들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고 있자니 꼭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동물원에 보러 온 것 같았다. 누가 우리 안의 짐승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루이스가 웃자 이글도 씩 웃더니 재킷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고 운전석 칸막이를 탕탕 쳤다. 철컥. 철창 문이 열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글이 열쇠고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왔다. 반응을 않자 손목을 턱 잡는데 악력이 상당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고개를 들자 드디어 그의 눈이 보였다. 짙은 색 유리에 가려져있지만, 어쩌면 이 사내는 망나니라는 허상으로 사냥꾼의 본능과 야성을 가리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 갑자기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는데, 입술에서 쪽 하고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놀라 눈이 커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이글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하하하하! 뭐야, 그 얼빠진 반응은. 픕, 푸훕. 아아, 진짜 웃겨 죽겠네."
이글 홀든은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얼빠진 얼굴이었을 거란 생각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뺨이 화끈거렸다. 소심한 반항일 뿐이지만 루이스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너무 잘 어울려서 잊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반말을 하는 것도 짜증났다.
"하하, 이 오빠가 이것보다 더 좋은 것도 줄 수 있는데, 너무 차갑게 굴지 마. 응?"
"내가 너네 둘째 형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아냐?"
"어, 그래? 싫음 말구. 어이! 아저씨! 다시 모셔다 드려! 영 같이 일하기 싫으신갑다."
이글은 순식간에 등을 돌리더니 철창을 탕탕쳤다. 껄렁한 그의 말이 더이상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뀌는 분위기에 루이스가 그를 잡으려 입술을 떼자 이글의 검지가 입술 위에 올라왔다.
"쫄지 말어. 농담이니까. 너무 순진하게 넘어오지 말라고, 천재 설계자씨."
생글생글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팍에 꽂은 이글은 쭈그려 앉아 루이스의 발목에 걸려있던 족쇄를 풀었다. 그리곤 품에서 작은 박스를 꺼내 장난스레 흔들어 보여주다가, 청혼이라도 하는 것처럼 상자를 열어 보여주었다. 얇은 은색 금속. 언뜻 보면 팔찌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고리의 크기가 컸다.
"쨔잔. 이러니까 꼭 청혼하는 것 같네."
"그럼 차였을 걸."
"하하, 선물이니까 받아두라고. 이래봬도 형씨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거니까."
"그런 친절 별로 달갑지 않은데."
"난들 어쩌겠어. 시키니까 하는 거지."
말을 주고 받는 사이 발목에 차가운 금속이 감겼다. 찰칵, 맞물리는 소리가 자유의 몸이 아님을 일깨우며 발목에 걸렸다. 손목의 수갑까지 풀어낸 이글은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수갑이 풀린 손목을 매만지고 있으니 이글이 차 밖으로 나가 루이스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따스한 바깥 공기, 높은 담이 없는 풍경이 오랜만이었지만 왼쪽 발목에 감긴 얇은 금속의 감촉은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자, 그럼 가볼까?"
이글 홀든은 오랜 친구를 대하듯 루이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구는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니 찡긋 윙크하는데, 기가 차 헛웃음이 나왔다. 루이스는 아무래도 이 일이 순탄치 않을 것을 직감했다.
안타깝게도, 나쁜 예감은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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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루이] If you can.
* 범죄자 루이스에 법조계 홀든즈
흉흉한 기운이 감도는 육중한 회색 건물 앞, 건물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은색의 고급 세단이 멈췄다.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반짝이는 차체, 그리고 거기서 내린 남자의 머리칼 역시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벨져 홀든. 명문 귀족 출신에 금융업과 경검을 아우르는 엘리트 가문인 홀든. 그리고 그 홀든의 차남.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어가며 자라 명문 사립학교 진학에, 일류대를 조기졸업하고 검사 뱃지를 단 그는 무엇 하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특유의 오만한 태도와 남을 깔보는 성격을 기분 나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능력, 그리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배경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능력이 확실하고 철두철미한 일처리는 그가 낙하산같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충분했다. 벨져 홀근은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따를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사내였고, 실패란 것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 사건까진.
제게 굽신거리느라 바쁜 교도소장을 떼어놓은 벨져는 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서 넥타이의 매듭을 만지며 숨을 들이마셨다. 과거의 실수를 마주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면회라는 방법 대신 직접 찾아온 것은 하루, 혹은 몇시간이라도 제 형제들 귀에 자신의 행적이 들어가는 걸 늦추기 위해서였다. 벨져는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넣어온 정보를 되새기고 한숨을 쉬었다.
따라온 교도관이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벨져는 좁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물빠진 잿빛 머리카락과 곱상한 얼굴. 창문 하나 없는 교도소의 독방에서도 그는 얼음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날 이후로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새파란 죄수복에 그 날의 그를 겹쳐본 벨져는 표정을 굳혔다가 빈정거렸다.
"체스라, 한가하군. 누군 네 데스크만 털면 해결일 문제들을 가지고 아주 사방팔방 뛰어다니느라 바쁜데 말이야."
"…덕분에 아주 편안합니다."
여전히 재수 없는 자식. 벨져는 혀를 찼다. 이렇게 면대면으로 대하는 것도 껄끄럽지만 이미 위에서 다 결정이 된 사항이라 어깃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빠르고 간단하게. 벨져는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웠다.
"뭐, 네 놈의 목에 목줄을 채울 생각을 하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군."
"그러다 물리면 이번엔 쪽팔린 걸로는 안 끝날 텐데."
"뭐 이 새끼야?"
"검사님이 입에 걸레를 물어서 쓰나.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께서."
제 기분을 슬슬 긁는 소리에 벨져는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올렸다. 상성이 맞지 않는다기 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바람에 잠시 말린 것 뿐이다. 완벽에 가까운 미소를 머금고, 벨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웃었다. 고작 한 번. 제 실책이 크긴 했지만 고작 한 번 이긴 걸 가지고 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더 무서울 게 없나보군."
"나 무서운 거 많은데. 지금 내 앞에서 날 잡아먹으려는 검사님이라던가."
"흥, 말은 잘 하는군. 쓸모없어지면 바로 스위트룸으로 돌아오게 될 거다. 알아서 아늑하게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문제 없겠군."
"글쎄. 그 전에 내가 달아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어디 한 번 해보시던지. 다시 잡아 쳐넣어줄 테니까."
벨져의 푸른 눈과 루이스의 붉은 눈이 마주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서로를 탐색하는 맹수들처럼, 폭풍 전이 지극히 고요한 것처럼 둘은 말이 없었다. 그 신경전을 먼저 깬 건 루이스였다. 순하게 생긴 눈을 슬쩍 내리깔며 작게 숨을 내쉰 그는 무릎 위에 모아뒀던 손을 들어 체스판의 검은 폰을 움직이며 여전히 거만하게 서있는 벨져를 바로 보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벨져는 그를 내려다 보다 체스판 앞으로 다가가 흰 나이트를 움직였다. 처음 폰이 두 칸 앞서더라도, 끝내는 잡히게 되어 있었다.
"얼마든지."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고, 벨져 역시 미소로 답했다. 게임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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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루이] Maybe.
* 전에 썼던 intro의 뒷편.
** 범죄자 루이스에 법조계 홀든즈
다이무스 홀든은 철두철미한 남자다. 그것은 일에 있어서도, 자신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다져진 몸 위에 매끄럽게 떨어지는 검은 수트와 적갈색 넥타이, 그보다 더 그를 완벽하게 만드는 건 한 자루의 검같은 얼굴이었다. 다이무스는 자신을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무겁고 음습한 공기가 감도는 회색 건물로 들어갔다. 간간히 철창 안의 죄수들이 그의 모습을 보러 기웃거렸지만 이내 그의 칼날같은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복도를 두드리는 구두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고, 곧 철창이 열리며 건물 깊은 곳의 문이 열렸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군."
기다렸다는 듯 태연하게 자신을 맞는 남자는 세월이 빗겨가기라도 한 듯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다이무스는 책상 앞 의자를 빼 앉아 카라를 정돈했고, 그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다이무스는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가볍게 숨을 내쉬고 서류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건넸다. 루이스. 지하연합의 수장 앤지헌트의 오른팔이자 천재 설계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영리하게 행동하던 그가 제 발로 들어온 게 벌써 오 년 전 일이었다. 그는 잠시 다이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파일을 받았다.
사전에 협의가 된 내용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건 파일을 건네다니. 루이스는 천천히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방화와 실종, 생존자들은 증언을 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상태. 고아원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루이스는 심란하게 파일을 덮었다.
"보기에 어떤가."
"추출할 생각일랑 관두는게 좋을 겁니다.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거랑 똑같으니까."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군."
"어린애들이니까요."
다이무스는 파일을 되받아 서류가방에 넣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단언한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이무스는 가만히 루이스를 바라봤다.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드러난 붉은 눈동자엔 어느새 날카로운 통찰이 깃들어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상할 정도로 없습니다. 원장이 돈을 빼돌리고 아이들을 학대하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 아이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불을 질렀다기엔 너무 능숙하고 깔끔하죠."
"그럼 방화를 사주한 게 누구라고 보나?"
"시킨다고 이렇게 치밀할 수는 없죠. 단순한 원한은 아닙니다."
다이무스는 입을 다물었다. 과연 천재 설계자는 이렇게 증거가 부족한 파일에서 무엇을 보고, 무슨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건 일종의 테스트였다. 이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팀에 넣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던 둘째를 떠올린 다이무스는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는 아예 일어나 좁은 감방 안을 서성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고아원. 혹시 중년의 여선생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가 있다면 이 아이들의 또래일 법한."
"있다. 선량한 사람이라더군. 사건 시간엔 퇴근 후 집에 있었다."
"...그럼 그녀겠군요."
다이무스는 단호하게 말하는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그 붉은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서늘한 냉기를 풍기는 것 같았다.
"어째서?"
"첫째로는, 그녀가 선량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신만 아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원장을 죽일 생각은 보통 하지 않죠."
"이해가 가지 않는군."
"고아원에서 일한지 삼년. 그동안 원장이 무슨 짓을 하는지 충분히 알았을텐데 왜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아마 그녀는 원장에게 뭔가 약점이 잡혀있었던 거겠죠."
"예를 들면?"
"글쎄요, 전과? 아마 지금 쓰는 이름은 가명일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약을 하느라 급료도 제대로 원장 밑에서 일할 리가 없죠."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응시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일전에 다른 사람이 했던 추리와 흡사했다. 다이무스가 가만 듣고 있자 루이스가 입가를 매만지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원장이 약을 어디서 구했냐, 그게 궁금해지는군요. 헤시시?"
"왜 그렇게 생각하나."
다이무스의 질문에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서류 가방을 흘긋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에,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거기까지 유추해내다니. 내색은 않았지만 훌륭했다.
"그렇군. 그래서, 동기는?"
"...더이상 약을 살 돈이 없었던 거겠죠. 처음엔 그냥도 주지만, 점점 가격을 올리는 게 전형적인 수법이니까. 돈이 필요해진 원장은 그녀를 협박하며 돈을 요구했을 겁니다. 이미 전에도 꽤 줬겠지만."
"또?"
"신변의 위협을 가했을 수도 있죠."
루이스는 담담하게 말했고, 다이무스는 꼰 다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생각보다 더 뛰어났고, 예상 외로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말을 하면 아마 길길이 날뛰겠지만. 다이무스는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리러 오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특별히 원하는 거라도 있나?"
"그래봤자 24시간 감시 아닙니까?"
철문을 나서기 전 잠시 발을 멈춘 다이무스의 질문에 루이스는 질문으로 답했다. 사건에 협력할 때마다 형량이 줄어든다. 그러나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을 나오기 위해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홀든 형제들의 감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게 대전제였다. 타협할 수 없는 요구에 다이무스는 문을 열며 방을 나서다 멈춰섰다.
"...고려해보겠다."
고개를 돌리기 전, 그가 피식 웃는 걸 본 것도 같았지만 다이무스는 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가 어떤 가능성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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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 Ending.
2015/04/12
프롤로그 병이 도져서 옛날에 썼던 걸 끌어올려 덧붙여보앗슴니다
연합의 영웅과 그의 연인 트리비아 카리나가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닌다는 건 이미 널리 퍼진 얘기다. 그림자와 액자, 환영의 도시 트와일라잇. 상처를 입어도 회복되고, 죽음조차 거스르는 이공간의 존재는 일종의 신비인 동시에 모두가 탐내는 기적이었다. 처음 트와일라잇을 발견하고 그 공간을 독점한 채 황혼의 도시에 군림한 여제는 본디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 이였고, 그녀의 연인은 자신만의 공간을 바라는 그녀를 사랑했다.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다.
몇 주에 걸친 집요한 추격 끝에 회사와 연합이 발견한 건 추레한 망토를 뒤집어쓴 한 남자와 찬란하고 처연하게 바스라지는 빛무리였다. 만월의 밤이었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남자가 쓴 망토의 후드를 벗겨냈다. 힘없이 부서져 먼지와 같이 흩날리는 빛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놓아주듯 한 손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던 남자. 빛무리에 감싸인 그의 손 안에서 어둠이 날갯짓하며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그 범접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광경에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행색은 추레했으나 남루한 옷가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옆얼굴에 드리운 깊은 수심과 애틋한 눈빛만이 사라지는 빛무리에 반짝일 뿐. 추격자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그는 한 때 영웅이라 불린 자이자 여제의 신하였고,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였다.
고통을 애써 참아내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는 시리도록 아픈 미소와 함께 돌아서 저를 찾아온 이들을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달을 등진 루이스는 절벽 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맞았다. 몇 차례에 걸친 추격과 정예요원들을 상대해온 그였지만 이젠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보냈어야 할 사람을 제 욕심으로 잡고 있던 그였다. 돌아보지 마, 카리나. 루이스는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켰다. 돌아올 문은 부쉈다. 물론 그 책임은 전부 제게 향하겠지만 감히 꿈꿔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대가를 치루는 것 뿐이었다.
“문을 부쉈나.”
“보는 대로.”
“엠프레스는.”
“달빛을 따라.”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은 건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루이스는 이 이후 벌어질 일을 가볍게 그렸다. 회사가 독자적으로 보낸 이들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이스…….”
루이스는 제 이름을 부르는 동료를 향해 웃었다. 걱정과 불안, 긴장이 섞여 미간을 찡그린 레베카 옆엔 휴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다. 둘이나 보내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앤지의 걱정이 과했던 모양이었다.
달리는 열차 안, 각각 연합과 회사의 능력자가 지키는 1등칸 안에는 단 둘 뿐이었다. 삼엄한 경비 속에 열차를 탄지 십분여 만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이무스는 가방에서 서류 파일을 꺼내 보고, 루이스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빠르게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아슬아슬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안 그래도 오랜 여정으로 지쳐있던 루이스가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이 침묵은 결국 탐색전의 일부일 뿐. 그렇다면 더 지치기 전에 만족할 만한 정보를 주고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나았다. 어차피 포트레너드로 돌아가면 회사와 연합의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게 뻔했다. 루이스는 타라나 브뤼노를 앞에 두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를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오랜만이로군요. 그것도 이렇게 거창하게.”
“네 신변은 안타리우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현 상황에서 연합의 영웅이 죽기라도 하면 연합과 회사의 균형이 깨지겠지.”
“안타리우스가 활동을 개시했다는 건 압니다. 최근 루사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서류를 검토하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창틀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고 바깥을 보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파일을 덮었다. 직접적으로 적대하거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두 사람은 각 진영의 사람이었기에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속내라던가 행동 패턴, 사소한 습관이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 알고 있다면 더 망설일 것도 없다. 다이무스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문을 열었나.”
“그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전 그녀를 배웅했을 뿐이라서요.”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루한 풍경에서 고개를 돌리니 매사 진지하기 그지없는 다이무스 홀든의 얼굴에 초조가 비쳤다. 회사 쪽에서도 어지간히 급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를 보냈다는 것부터가 이 사안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오가는 시선 속에 서로 뭐 하나라도 잡아내려는 그 긴장 속에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아무리 안타리우스가 점거했다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은 연합의 세력권 안에 있습니다. 회사보다는 정보가 빠르죠.”
저를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매서운 눈빛에 루이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눈을 감았다. 그도 아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건 지금 제가 상대하는 다이무스 홀든이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인지 아니면 홀든의 장남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시나, 잔뜩 굳은 그의 얼굴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루이스는 창틀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 눈을 뜨고 순순히 그가 원하는 정보를 내놓았다.
“동생분은 무사합니다. 둘 다.”
“보증할 수 있나?”
“그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군요.”
루이스는 제 패를 슬며시 보여주곤 덮어버렸다. 벨져 홀든이 이글 홀든을 불렀고, 이글은 나이오비와 다른 능력자를 대동하고 벨져를 찾았다. 비록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루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릭 톰슨의 공간이동과 그림자를 열고 이동하는 것, 어느 게 더 빠른가에 대한 실랑이도 이젠 의미가 없었다.
“루이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시다시피 막 실연을 당한 참이라서요. 더 말할 기분이 아니군요.”
“왜 그랬지?”
“…….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어디까지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꽤 감상적인 말이군.”
루이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어설프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곧 세계는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 것이고, 그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될 바에야 그녀만이라도 행복해지는 게 나았다. 트리비아를 보내기 싫어 미적거렸던 루이스가 그녀를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아주 사소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안타리우스가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니는 지금, 루이스는 제 선택이 늦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문을 열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알겠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쉬도록.”
다이무스는 다시 파일을 펴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루이스는 그걸 보곤 일등칸의 푹신한 쿠션에 지친 몸을 기댔다. 로라스만큼은 아니지만 다이무스 홀든 역시 자는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은 못 된다. 거기다 두 홀든의 정보를 쥐고 있는 이상 다이무스는 회사의 명령이 있다 해도 함부로 나설 수 없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루이스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곧 의식이 무거운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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