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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3 [릭루이/이글루이] Agent 1
- 2018.02.17 [벨져루이] 유리 온실
- 2018.02.17 [루드루이] 08.
- 2018.01.27 [벨져루이] Happy Birthday to you
- 2018.01.12 [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 2018.01.07 [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 2018.01.02 [벨져루이] Two Pianos
- 2017.11.27 [벨져루이] 유리 온실
- 2017.11.14 [릭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 2017.10.20 [이글루이] 엘리멘트리au 1
글
[릭루이/이글루이] Agent
요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짬이 안나고 그러는 바람에 옛날에 쓰다 만 거라도 올려놓고 갑니다ㅠ
연재물 업데이트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ㅠㅠㅠ
그를 만난 건 처음으로 참석한 파티에서 였다. 연미복에 보타이를 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파티장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고, 전에 없던 유망주를 맞는 상류층 사람은 너무나 낯설었다.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해선 안 되는 중요 인물이라 말을 걸어오면 걸어오는 대로 응대를 하다 보니 혀가 말을 하는지 손에 든 샴페인은 어떤 맛인지 하나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찌어찌 쏟아지는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리려, 기왕이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길 바라며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간 테라스에 그가 있었다.
언뜻, 눈물이 어린 걸 본 것 같았으나 그는 빠르게 자신을 추슬렀다. 그 역시 이런 상류층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등을 돌려 나가는 대신 손수건을 건넸다. 목을 묶은 타이도 없이, 와이셔츠 단추를 푼
처연하고 가련한, 갓 대학에 들어간 것 같은 청년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아. 릭. 릭 톰슨이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다가가자 입술을 물었던 그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우는 남자가 예뻐 보일 수도 있다니.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이런 청년을 울리다니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냥, 그런 거죠. 뻔한 이야기에요.”
눈물이 고인 눈을 얇게 휘며 웃는 순간 릭은 숨을 집어삼켰다.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갔을 뿐인데
“참. 전 루이스에요. 그냥 루이스. 미리 말씀드리자면 어느 대단한 집안 아들이라서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성이라고 부를 게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 그렇군.”
선이 곱고 청초한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첫 번째, 그가 손을 내밀었다는 걸 깨달은 게 그 다음.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처음엔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어서 몰랐는데 예쁜 얼굴만큼이나 손도 작았다.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건 좋았다. 주책없이 심장이 뛸 정도로.
“손수건은 어쩌죠.”
“아, 괜찮소.”
“그럴 줄 알았어요. 보통 이런 파티에 오는 분들은 손수건 따위엔 연연하지 않거든요.”
손수건이 제아무리 비싼들 이 남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그게 얼마든 아깝지 않았다. 대신 여기 오는 분들. 이라는 말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 가여운 청년이다. 그런 사람의 아픈 과거를 캐묻는 게 신사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입을 뗐다.
“많이 만나봤소?”
“이런 곳에 있으면 싫어도 만나게 되죠.”
“그럼 여긴 왜....”
“...데려와준 사람이 있어요. 보통 이런 곳은.... 혼자 못 오거든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미안하오.”
순진한 청년을 꼬셔서, 저 좋을 대로 가지고 놀다가 가차 없이 버리다니. 아픈 상처를 되새기듯 드문드문 말을 잇던 루이스는 자조하듯 웃었다.
“당신이 미안할 건 아니죠. 끝났다는 건 알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와본 거예요.”
“그런 나쁜...!”
그 쓴웃음이 더 애처롭고 가련해 속으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헐뜯던 릭의 입에서 결국 한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루이스는 움찔 몸을 굳히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바라봤다. 그 눈에 어린 눈물과, 상처 받은 눈빛에 화를 내려던 릭은 입을 다물었다.
나쁜 사람에게 놀아나다 버려졌지만, 그래도 마음이 남은 모양이다.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 끝내 상처밖에 남지 않은 청년을 보고 있자니 만난 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은 릭의 마음이 아려왔다. 한 박자 늦게 주제넘은 말이었다는 걸 깨달은 릭은 황급히 말을 고치려 했으나 루이스가 다 포기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너무 순진했나 봐요.”
“루이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소.”
“...감사합니다.”
눈물을 머금은 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아련하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소?”
“...글쎄요.”
“여기. 내 명함이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아, 그, 그런 뜻은 아니니까 오해 말고! 순수한 호의니 거절하지 마시오.”
“.......”
루이스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릭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순박하고 귀엽다.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보니 오래 전 가슴을 설레게 한 첫사랑이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맑은 청초함이 보석보다 눈부시다. 루이스의 미소는 심장을 세게 뛰게 하는 한편 마음을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경계하느라 굳어진 마음과 얼굴 근육이 슬슬 풀어진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갈게요.”
“그러시오.”
“진부하지만 이만한 핑계도 없네요.”
“하하하. 기다리고 있겠소.”
릭은 손을 흔들어 테라스를 나서는 루이스를 배웅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때? 그 과장님, 넘어온 것 같아?”
“거의.”
“거의?”
소파에 길게 누워 다리를 까딱이던 이글은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동료의 서늘한 무표정을 보며 킬킬 웃었다. 루이스의 재킷이 머리 위로 날아와 얼굴을 덮쳤으나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거의는 무슨. 보니까 완전 홀딱 반했던데. 캬. 나도 깜빡 속을 뻔했지 뭐야. 안 그래, 영웅님?”
“테라스 훔쳐볼 시간도 남고 좋았겠네.”
“그럼.”
몸을 일으킨 이글은 재킷에 이어 셔츠도 벗기 위해 손목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등 뒤에 섰다. 허리와 배를 감싸듯 안고 향수조차 뿌리지 않은 목덜미에 코를 묻자 어느 눈 나린 새벽의 냄새가 나리는 것 같았다. 아득하고, 아찔한 기억 속 풍경을 떠올리고 손을 미끄러트리며 입을 벌리자 루이스가 이글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아직 임무도 다 안 끝났어.”
“싸늘해.”
“누구랑 달리 충동적이지 않으니까.”
깔끔하고 단호한 말과 달리 루이스는 얇게 눈을 휘며 웃음을 흘렸다. 아까 그랬듯 순진한 미소도, 전부를 걸고서라도 안고 싶어지는 요염한 미소도 아니었지만 뻐근해진 이글의 아랫도리를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충동이라니. 너무하네. 뭐, 사실이긴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편이라고 해줄래?”
“그러니까 그 본능 좀 어떻게 해봐. 비벼볼 게 따로 있지.”
우뚝 선 물건으로 엉덩이를 문지르던 이글은 셔츠 앞섶의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타이트한 요원복과 하네스가 더 금욕적으로 보이고, 그게 더 꼴린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난 지지리 말 안 듣는 애라서, 말을 잘 듣게 하려면 상이 필요한데.”
“사탕이라도 물려주면 되겠어?”
“사탕 말고.”
“...너 하는 거 봐서.”
이글은 입꼬리를 올렸다.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입술이 맞닿고, 그 다음은 전투와도 흡사한 섹스가 이어졌다.
언제 봐도 잘 빠진 등이다. 이글은 행위를 마치자마자 침대를 빠져나간 동료 겸 파트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작게 숨을 토했다. 달달한 말이나, 간지러운 애교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할 것만 마치고 가는 건 역시 조금 쓸쓸하다.
오랜만에 만난 엉덩이는 해후의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까만 슬랙스와 바지 안으로 사라지고, 루이스는 이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차갑기가 아주 얼음 저리 가라다. 남극도 이것보단 덜 추울 거다. 하물며 펭귄도 온기를 나누는데.
원망 반, 아쉬움 반으로 루이스를 바라보던 이글의 머릿속에 문득 루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멀리서 입술을 읽은 것뿐이지만,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기엔 신경이 쓰였다. 애초에 신경이 안 쓰였다면 그런 말 한 마디가 다시 떠오를 리도 없었다.
“아까 그 나쁜 사람.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 미세하나마 등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픈 구석을 찌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고개를 돌린 루이스의 서늘한 눈빛에 이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잘못 건드렸다. 이건 좀 위험할 지도.
“홀든.”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관 둬. 홀든이 뭐야, 소름끼치게.”
“누가 먼저 소름 끼치는 얘길 꺼냈는데. 적당히 해. 다음엔 잡혀도 안 빼줄 거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이 남자는 결국 구하러 올 것이다. 연합의 영웅, 루이스는 그의 이명이 날리는 냉기와 달리 그리 모진 사람이 못 되니까. 루이스를 보며 누워있던 이글은 피식 웃으며 턱을 괬다.
“걱정 마. 영웅님은 바쁘니까 안 와도 이해할게.”
“안 간다니깐.”
“그럼 큰 형 불러야지 뭐.”
“누군 좋겠네. 양 쪽에 발을 다 걸쳐둬서.”
“그래도 가운뎃다리는 너한테만.... 억...! 잠깐, 잠깐!”
“아예 못 쓰게 만들어줘?”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조준이다. 이래서 특수요원은 무섭다니까. 그만큼 스릴도 넘치는 건 좋지만. 이글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섹스도 질펀하게 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최후네. 그래도 마지막에 보는 게 네 얼굴이고.”
질색하는 표정이 가관이다. 소리내어 한바탕 웃고 싶은 걸 꾹 참고 양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루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탄창, 비었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네가 대상도 아닌 사람한테 총을 겨눌 리가 없잖아?”
깊은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총을 내렸다. 반은 감이었지만, 정말 쏠 마음이 없었는지 빈 탄창을 빼낸 루이스가 총알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수류탄이니 자동소총이나 하는 것들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지만 총기를 손질하는 루이스를 보는 건 좋았다. 칼을 갈고 닦는 무인과도 같은 자세로 침착하게,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하면서 비통함을 곱씹는 그 처연한 얼굴이 좋았다. 보고 있으면 질릴 틈이 없다.
그 얼굴이 보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정말 와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더더욱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글은 다시 고개를 드는 탐욕과 갈증에 입술을 핥으며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매끈한 등과, 희고 가는 목덜미. 정말이지, 엎어놓고 박고 싶어지는 뒷태다. 저 목에 이를 박아 자국을 새기고, 울긋불긋한 멍을 남기고 싶어 몇날 며칠을 애태우며 공을 들였던가.
이글이 눈으로 다시 한 번 행위를 되새기는 동안 탄창을 채우고 무기의 상태를 확인한 루이스가 그 생각의 흐름을 끊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봐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어디까지 봐주나 간보지 말고 물러나. 다신 안 도와줄 거니까. 지금 하는 짓도 그만 두고.”
“하하. 기억해볼게.”
하여간,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다니깐. 이글은 루이스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입을 비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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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늘 그렇듯 책으로 내기 위해 생략한 부분이 있습니다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원고의 90%는 완성되어있으니 나오긴 할 거예요 그때까지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에 둘러싸여 눈이 부시다. 칵테일 잔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은 루이스는 그런 것들 사이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한 사람을 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벨져 홀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좋은 옷을 골라 입고 한껏 치장한 벨져는 이 파티에 참석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벨져는 절대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벨져의 곁에 있기에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다.
출신도 미천한 하인 따위가 붙어 있어봤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상한 눈초리와 소문만 더할 뿐이었다. 하인 따위를 대동해야만 공식 석상에 나올 수 있는 벨져 홀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괜히 빌미를 제공하느니 떨어져있는 게 나았다.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뜬 루이스는 벨져에게 물을 갖다 주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 이름도 잘 모르는 술을 마셨다. 술을 나르는 다른 하인의 눈초리가 곱지 않고, 입술을 축이는 정도였지만 알콜인지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에 목과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
“이글 도련님.”
“그렇게 걱정 돼?”
주어가 없는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벨져의 몸 상태는 상당히 호전된 데다 오늘 저녁 파티를 위해 컨디션 관리를 철저히 했고 파티의 교양이나 매너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잠깐 누구 좀 만나볼래? 널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정체 모를 불안이 엄습했으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에 루이스는 이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을 떠나기 전에 돌아본 벨져는 어느 아가씨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얼핏 봤을 뿐이지만 그녀는 그와 어울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아른거리는 장면을 떨쳐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졌고, 손님으로 북적이던 복도는 그 많던 사람이 다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정신이 팔려 깨닫는 게 늦었을 뿐, 일부러 사람을 물린 게 분명했다.
이글은 노크도 없이 테라스 문을 열었다. 오늘 같은 날 작고 아담한 테라스는 밀담을 나누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로 부른 것은 어째서일까.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짓으로 저를 맞는 다이무스를 마주했다.
“미안하군. 따로 불러내기엔 좀처럼 시간이 안 나서.”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달리 다이무스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투였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다는 점에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동생들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그들보다는 말이 통할 것 같다. 상식 밖의 인물을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하면서도, 루이스는 가슴을 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먼 발치에서 봤을 때부터 그랬지만, 다이무스 홀든에게선 감출 수 없는 위압감이 흘렀다. 무기를 다루는 법을 연마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는, 강철처럼 단단한 사내다.
이글이 가벼운 행동거지로 감춘 예리함과, 벨져의 격과는 다른 무게감에는 자비도, 오만도, 가벼운 흥미도 없다. 그저 책임과 의무에 따른 냉철한 판단과 결단만이 있을 뿐.
그래서일까. 짓눌리는 듯한 침묵과 그의 눈빛에 압도된 나머지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만났을 뿐이지만 루이스의 감은 다이무스 홀든에 대한 경고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루이스가 조용히 심호흡 하는 사이, 그를 면밀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위스키 잔에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잔을 쥔 채 마실 생각을 않던 다이무스 대신, 루이스는 힘겨운 첫 마디를 뗐다.
“방해 없이 얘기를 나누기엔 너무 수고를 많이 들이신 거 아닌가요.”
저택의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그가 굳이 이런 장소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으리란 예상이 맞았는지 다이무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오래 가진 않겠지만, 파티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벨져의 시야에서 자신을 빼내기에 충분하리라. 다이무스는 얼음이 담긴 위스키 잔을 든 채 이글에게 눈짓했다.
문이 닫히고, 테라스에 단 둘이 됐는데도 다이무스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서 이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며 입을 축였다. 워낙 단단한 풍채에 엄격하고 굳건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지만, 간단한 손짓 하나에서도 그의 단호하고 정확한 성격이 묻어났다.
은행가라기보다는 역시 군인이나 무인에 맞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손과 그의 손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자신의 도련님과 비교하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다이무스 홀든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분명 그만큼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서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벨져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다이무스의 눈빛은 흠집을 찾는 것처럼 자신을 훑고 있었다. 어떤 틈, 혹은 단점이나 오점을 찾아내려는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책이 잡혀선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루이스는 더 자세를 바로 했다.
볼 일이 있어 부른 주인에게 용건을 먼저 묻는 하인은 없다. 방금 먼저 말을 뗀 것만 해도 주제 넘는 짓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눈을 내리깔자 다이무스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흠.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 없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벨져 도련님껜 아직 제가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귀족가의 하인이라 하면 그에 마땅한 교육과 훈련을 받기 마련이다. 그에 드는 비용도 물론 만만치 않았기에 하인은 곧 그 가문의 격과 가세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금을 쥔 채 무가의 명맥을 이어온 홀든은 그중에서도 단연한 규율과 가풍을 자랑했고, 하인 관리에도 철저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태어날 때부터 봐온 이들과 달랐다. 물론 벨져 홀든이라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겠지만 주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눈을 마주보며 대등하게 대화를 하는 건 홀든의 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딱 잘라 하는 거절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쫓아다니며 수발만 들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결연한 의지를 담아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 하는 거절에 눈살을 찌푸렸다. 냉큼 눈을 내리 깔며 공손한 척을 하는데,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게 척 보기에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러니 마음에 들 수밖에.
“병간호만 하고 있기엔 아깝군.”
“...과찬이십니다.”
위에 선 자로서 부리는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해본 적 없긴 벨져나 다이무스나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자신의 태생과 신분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과 현격히 구분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도구나 다름없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이글을 한심하다 여겼고, 그것이 홀든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감정에 섣부른 판단을 하는 건 아닌가?”
하지만 그냥 부리고 말 도구가 아니라면. 끈질긴 권유에 루이스는 더 거절하기 힘든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루이스가 이 자리를 불편해하고 난색을 표할수록 다이무스는 이 초연한 청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지금 막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영민하고 눈치 빠른데다 충직한 아랫사람은 구하기 힘들다. 그런 사람을 고작 병수발 따위에 전념하게 두다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 까다로운 벨져를 이렇게 오래 모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청년은 그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셈이다. 둘째 녀석은 뭐든 가장 좋은 몫을 가져가곤 했으니까.
“자네를 꽤 아끼는 모양이더군. 나중엔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텐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 같나?”
“......꽤 확신하시는군요.”
“흠. 기회에 대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벨져가 마음에 두고 있으니 절대 놓아줄 리가 없다. 아무리 병석에 있다 해도 그의 지위와 재력으로 얼마든지 잡아둘 수 있고, 홀든의 안주인은 아픈 아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주인의 곁을 떠나는데 이보다 더 깔끔한 제안은 없었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제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놓았던 술잔을 들었다. 입술을 축이고, 긴 침묵을 깨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눈살을 찌푸린 건 다이무스와 함께 있는 루이스를 발견한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손위형제를 시원하게 무시한 벨져가 루이스에게 다가가 짜증을 부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이무스는 손에 쥔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벨져는 결코 좋은 주인도 상사도 못 된다. 다이무스는 미래를,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방금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몸값을 흥정했다면 오히려 시큰둥해졌을지도 모르나 루이스의 고민과 갈등은 이런 데 도가 튼 다이무스의 눈에도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얘기를 나눴으니 망설이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떠날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주겠다.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제가 드릴 답은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사양하긴 곤란하다고 판단한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굽히고 물러설 줄 아는 것도, 강자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다이무스는 벨져가 루이스를 옆에 둔 것이 몹시 그답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운명의 여신은 어쩜 이리도 얄궂은지. 자신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 것을 벨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가지고 있다. 벨져의 취향이 묻어나는 옷차림만 봐도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훤히 보인다. 순순히 뺏기는 걸 보고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벨져에겐 미안하지만 그를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조금은 여유가 생길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믿을 만한 사람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깨달은 뒤라 더 간절했다. 진심을 다해,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성적이고 타산적인 결정을 내리길 바랐다. 그러나 소망하는 바와 달리 그의 말간 눈에 어린 망설임과 애정을 보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든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꼿꼿하게 제 주인을 지키려 하더니 약간의 스킨십에 당황해 붉어진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똑부러지는가 싶다가도 어설픈 게 어딘가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라고 첫인상을 고치는 사이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벨져가 매서운 눈초리로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벨져.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지 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잔뜩 가시가 돋친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가 날을 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 것을 빼앗아가려는데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대놓고 드잡이질을 하려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체면을 차리는 걸 보아 둘째 녀석에게 이 하인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픈 동생이 아끼는 걸 뺏기도 미안하지만, 이쪽도 코가 석자다. 이글 녀석이 밖으로 나돌지만 않아도 이렇게 책임과 업무가 과중하지 않을 텐데. 다이무스는 작게 숨을 토하고 벨져와 루이스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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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08.
부상으로 인한 휴가라며 아침도 건너뛰고 느지막이 일어난 루이스는 씻자마자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까딱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그의 무방비한 발을 잡아버리고 싶어진 나는 충동에 사로잡힌 채 조심히 다가갔다.
“으왓, 깜짝이야.”
발을 잡히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던 루이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잡힌 발을 뺄 생각은 없는지 버둥거리지도 않아서 나는 마음껏 그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크기와 길이를 가늠했다.
“작군요.”
“갑자기 사람 발을 잡고 하는 말이 겨우 그거예요?”
“작은 걸 작다고 했을 뿐입니다만.”
루이스는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무릎을 모아 앉았다. 발을 놓아주자마자 감추려는 모습이 귀여워 웃자 루이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랑 내 키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요.”
“키만 차이나는 건 아닙니다만.”
뚱하니 토라진 얼굴이 귀엽다. 나는 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루이스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나를 흘겼다. 사실무근한 얘기라면 반박이라도 할 텐데, 사실이라 할 얘기가 없는 모양이라 나는 루이스의 옆에 앉아 그가 감추듯 오므린 발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쉬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죠?”
“그렇게 느껴집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양 빙긋 웃자 입술을 쭉 내밀고 있던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아닌 척 해도 목과 귀가 빨개져서 의식하고 있는 티가 났다. 루이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입술 위에 가로놓인 손가락이 입술을 덧그릴 때마다 내 눈이 그의 손가락을 좇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전에 해준 파스타 맛있었어요. 카르보나라. 베이컨 잔뜩 넣어서.”
“이런. 베이컨이 없는데요.”
“으음.... 사러 가기 귀찮은데.”
진지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그만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나는 뒤늦게 입을 가렸지만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은 멈출 줄 몰랐고, 신나게 한바탕 웃은 뒤엔 아까보다 더 뚱해진 표정의 루이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큽, 실례.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아아, 정말.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당신.”
“...웃기려고 한 말 아닌 건 알죠?”
“물론이죠. 너무 웃어서 광대가 다 아플 정도군요. 후.”
“잘 모르겠지만 성격 나쁘다는 소리 엄청 들었을 것 같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웃음이 아직도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바람에 루이스는 더 분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렇다 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다.
“이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놨습니다만, 베이컨 대신 햄도 괜찮다면 기꺼이 해드리죠.”
선심 쓰듯 말하자 루이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발을 아래로 내렸다. 완전히 늘어진 자세가 숫제 시위라도 하는 모양새지만, 내게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과 헛웃음마저 귀여운 투정으로 보일 뿐이었다.
“대체 그런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글쎄요. 태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제 기억은 백지라서요.”
“하아.... 당신이랑 얘기하고 있으면 기운이 빨려요.”
루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부쩍 즐거워진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귀여워하며 웃은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의 미소에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팔을 올린 팔걸이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당신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와도 차려준 밥 먹고 잠만 자잖아요. 와, 나 완전 식충이네.”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일부러 진지해지는 분위기를 피하고자 하는 과장된 말에 나는 은근하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며 받아쳤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는 눈 한 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을 땐 울상도 무엇도 아닌 애매한 미소와 함께였다.
미안함과, 그보다 조금 더 무거운 감정을 담은 미소에 나는 다시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갔다는 걸 느꼈지만 잠자코 루이스를 기다렸다.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기꺼이 그를 위해 기다릴 수 있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청소에 빨래에 밥하고 설거지까지 혼자 다 시키는 게 미안해서 그러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장고 끝에 털어놓은 얘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허무했지만 그 하찮은 고민마저 사랑스러웠다. 그 자신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못내 그게 마음에 걸려 사과를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든 손에 쥐면 부서질 것처럼 세심한 사람이 능력자 전쟁의 영웅이라니, 그 괴리감이 더더욱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당신을 원하는 욕망에 불을 질렀다. 당장 당신을 눕히고 싶은 충동과 뜨거운 열감을 애써 누른 나는 지난밤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의 경계를 풀만한 입 발린 말을 골랐다.
“그럼 좀 일찍 들어오시죠.”
“음. 그건 좀.”
“내가 여기 계속 눌러 살면 어쩌려고요.”
곤란하다는 듯 짓는 애매한 미소까지 이렇게 예쁠 일인가. 나는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를 외면하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성급하게 달려들었다가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조심성이 많은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아주 천천히, 당신이 나에게 잡히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음. 일단 내가 애를 써보다가, 정 형편이 힘들어지면 돈 벌어 오라고 내쫓아야죠.”
“그러다 제가 몸이라도 팔면 어쩌려고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나보다. 당황으로 깜빡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장난이라는 걸 눈치 챈 루이스가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리기 쉽군요. 이런 사람이 전쟁 영웅이라니.”
“놀리지 마요. 나도 이런 내가 싫으니까.”
나는 눈을 맞추지 않는 루이스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몸을 바싹 붙였다. 은근한 손길로 다리를 만지작거리자 당황해 몸을 뒤로 빼려는데 좁은 소파에 앉은 채로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도 꽤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정 뭐하면 시험해보겠습니까?
진득하게 허벅지 안쪽을 긁으며 묻자 루이스의 몸이 굳었다. 방금 전까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이었지만 만지면 만지는 대로, 흔들면 흔드는 대로 따라오는 그의 떨리는 눈이 예뻐 자꾸만 손이 갔다. 진한 미소를 띤 채 입을 맞추려 다가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이 정도면 꽤 수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농담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만...!”
훤히 드러난 목을 핥아 올리자 루이스가 멀쩡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사뭇 진지해진 얼굴이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이제 정말 물러날 때였다. 더 하면 당장 침대에서 쫓겨나는 건 고사하고 며칠 내내 얼굴을 못 볼지도 몰랐다.
“왜 긴장하죠?”
“그야 당신이....”
“걱정 마세요. 당신이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 둘 테니.”
나를 밀어낸 루이스가 미심쩍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방금 핥은 곳을 손으로 덮었다.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있는지 긁지도 않고 대고 있을 뿐이라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루이스와 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죠. 나는 그저 말을 들을 뿐입니다.”
의심스러운 눈빛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괘자 루이스가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습니까?”
루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영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자 이번에는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토라진 얼굴이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루이스가 떠난 자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뭣하면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하죠. 제 진심을 증명할 겸.”
“됐어요. 스토브는 하난데 거기서 자면 벽난로에도 불을 때야 하잖아요. 땔감도 없는데 얼어 죽으려고요?”
“기꺼이 침대에 들여 주시겠다니, 친절하시군요.”
“내 집에서 아는 사람이 동사하는 게 싫을 뿐이에요.”
루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투였지만 내게는 그마저도 새침해 보였다. 순박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전쟁영웅이라니. 이제와 사람이 달리 보이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장난스레 대답했다.
“네. 그런 걸로 하죠. 영웅님.”
“그렇게 부르지 마요.”
“왜죠? 이유라도 있습니까?”
“말했잖아요. 당신은 나를 영웅으로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책상에 걸터앉은 루이스는 고개를 숙인 채 울적해진 얼굴로 내가 아닌 바닥을 바라보고,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빠듯하게 죄는 안타까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입을 열었다.
“참고하죠.”
“부탁해요.”
“...그래요. 루이스.”
나에게 당신이 유일하듯, 나 역시 당신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환희와 희열을 눌러 삼키며 낮게 숨을 뱉었다.
연휴라 쉬는 김에 엄청나게 오랜만에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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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Happy Birthday to you
루이스 생일 축하해!
이번에도 도움을 주신 초루님과 실비님꼐 감사 인사 드림니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달군 팬에서 무언가 익어가는 소리와, 식욕을 돋는 맛있는 냄새. 루이스는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을 뿌리치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어젯밤 함께 밤을 보낸 남자가 없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로 보아 생일이랍시고 아침상을 차려주려는 모양이었다.
가만 보면 진짜 귀엽다니까.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몸을 돌리려다 허리가 우지끈하고, 골반이며 종아리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제 그렇게 해댔으니 무리도 아니다. 기운도 체력도 몇 수 위인 그의 페이스에 따라가는 건 원래도 벅차고 힘들었지만 어째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루이스는 새삼스레 생일의 씁쓸함을 느끼며 맨다리를 이불에 비비적거리다 하반신이 특히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급하다고 현관에서 서서 했더니 꼬리뼈에 멍이 든 것도 같았다. 하긴 그렇게 박아댈 때마다 부딪혔으니 멀쩡한 게 더 이상하다. 영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가진 거라곤 평범에서 조금 나은 정도인 신체 능력과 결정능력뿐이다.
아픈 허리를 짚고 걸음을 옮기자 고소한 냄새가 더 진해지고, 둔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걷던 루이스는 몇 걸음 못가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묶고 후라이팬과 냄비 앞에 서있는 연인의 모습을 발견한 루이스는 벽에 몸을 기댔다. 앞치마의 끈까지 꽉 동여매고 머리도 올려 묶은 벨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뒤집개를 들고 있었고, 루이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뒤집개를 꼭 쥐고, 온 신경을 팬 안에 쏟고 있는 벨져가 마침내 뒤집개를 팬에 찔러 넣었다. 입술까지 물며 뒤집기를 시도하는 순간 지켜보던 루이스도 덩달아 숨을 집어 삼켰다.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꽤 공을 들인 게 분명하다. 벨져의 얼굴에 집중하느라 정작 팬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못 본 루이스는 벨져가 안도의 숨을 내쉼과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리가 이렇게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볼 정도로 흥미진진한 것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인기척을 느낀 벨져가 뒤를 돌아봤다. 벨져의 뒤집기를 응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벨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분한 얼굴을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라도 걸쳐라. 야만스럽기 짝이 없군.”
“큼. 자기가 찢은 셔츠가 몇 장인지 모르는 것 같네 홀든경.”
어젯밤 격렬한 정사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벨져는 새침떼기처럼 홱 고개를 돌렸다. 아침에 약한 사람이 일찍도 일어났다 싶어 다가가자 비로소 팬 안에 노르스름하게 익은 팬케이크가 보였다. 일단 모양은 흠잡을 데 없이 예쁘다.
“씻고 와라. 눈곱도 떼고, 옷도 입고.”
“벗길 땐 언제고.”
“때와 장소에 맞는 차림이라는 게 있는 거다.”
벨져의 뒤에서 서성이며 기웃거리자 눈살을 찡그린 벨져가 뒤집개를 잡은 손을 들어 루이스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뭘 들고 있으면 그걸로 치는 게 자연스러운데, 손등으로 밀어내듯 치는 게 또 벨져 홀든다워 피식 웃자 벨져가 루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어서.”
“알았어. 맛있어 보인다.”
“맛있을 거다. 누가 만든 건데.”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팽팽하게 늘어나고 뭉친 근육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특히 아픈 곳을 문지르며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비누 거품을 얼굴에 바르는데 있어야 할 것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제자리에 있던 것들이 발이 달려 도망갈 리도 없고, 제가 손을 댄 적도 없으니 찾을 곳은 하나다.
“벨져!”
루이스는 비누 거품 수염을 매단 채 화장실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벨져를 찾았다. 오늘의 요리사는 여전히 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저를 위해 애쓰는 걸 방해하는 게 조금 미안했지만 당장 급한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 면도칼 네가 치웠어? 칼은 쓰던 게 편한데?!”
벨져가 들은 척도 않자 루이스는 고개만 내민 채 목소리를 높였다. 벨져가 머무는 곳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스의 하숙집은 조금만 목소리를 높이면 주방은 물론 침실까지 목소리가 닿고도 남았다.
혼자 고군분투 중이던 벨져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더니 양파를 썰던 칼을 들고 다가왔다.
“내가 치웠다!”
“그것 좀 치워!”
설마하니 그걸 제게 휘두르지는 않겠지만 들고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된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검이라면 또 모를까, 식칼은 도리어 생활감이 넘쳐서 무서웠다.
“그렇다고 프라이팬을 들고 올 수는 없잖나!”
“차라리 팬을 들어!”
진중한 얼굴로 골 때리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바람에 맞받아치려다 큰 소리를 낸 루이스는 아픈 목을 부여잡았다. 눈살을 찡그리며 목을 만지는 사이 몇 걸음만에 부엌으로 돌아간 벨져가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프라이팬을 든 채 다시 다가왔다.
“그냥 두고 온다는 선택지는 없어?”
“내가 누구 때문에....”
기가 차 헛웃음을 흘린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집중한다 싶더라니, 잠이 덜 깬 게 분명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내 면도기는?”
“내가 치웠다.”
“갑자기 왜?”
루이스의 턱에서 하얀 비누거품을 엄지로 훔친 벨져가 손가락에 묻은 거품을 루이스의 코에 묻혔다. 그러고는 피식 웃는데,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저를 놀리는 의도가 다분한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식사 후에 알려주지. 다 씻었으면 나와라.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또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잘 차린 아침상에, 사라진 면도용품. 루이스의 입장에서 벨져 홀든이 꾸민 계획은 대게 가늠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루이스는 짐작하기를 멈췄다. 전투나 섹스는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뭘 하려는지 다 보이는데 이럴 때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상상의 범주가 닿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라 그런 걸까.
루이스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같은 차림에 수건 하나만 더한 상태로 화장실을 나왔다. 잘 세탁해 개켜놓은 새 옷을 꺼내 입고 젖은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털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겼고, 그 틈으로 맛있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급격히 밀려오는 허기와 유혹에 이끌려 주방으로 간 루이스는 아침 준비에 여념이 없는 애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에 달라붙었다. 아직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고, 오늘 아침엔 벨져가 옆에 없었으니까 이 정도 쯤이야. 더구나 오늘은 제 생일이니 조금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그래서일까, 평소 같았으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핀잔을 줬을 벨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루이스의 젖은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사소한 스킨십에 기분이 좋아진 루이스는 탄탄한 등과 허리를 더 바싹 끌어안으며 벨져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미운 날이 더 많은 것 같긴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사랑스러운 날도 있는 법이다.
“고마워. 아침부터 고생 많았겠네. 더 자야 하는 거 아냐?”
“괜찮다.”
음식을 다 하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며 좀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수프를 그릇에 담는 벨져는 꽤 멀쩡해 보였다. 앞치마를 벗는 건 까먹었지만 그건 잘 어울리니 말해주고 싶지 않아 등에 매달려 있으니 벨져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네가 그랬잖나. 생일이라고 추운 밖을 돌아다니느니 집에서 남이 차려주는 밥이나 먹고 싶다고.”
“내가?”
“그래.”
언제 그랬는지는 몰라도 퍽 저다운 소원이었기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걸 또 기억해뒀다가 챙겨주는 그 마음씨가 예쁘고 고맙다. 사랑이 퐁퐁 샘솟아나는 기분이 된 루이스는 까치발을 들어 벨져의 뺨에 뽀뽀를 거듭했다. 그러자 뭐가 탐탁지 않은지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에 이게 무슨 반응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보고 있으니 그릇에 음식을 옮겨 담은 벨져가 루이스를 돌아보며 이마에 뽀뽀했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머리가 거슬려서다. 괜한 오해 말도록.”
“잠깐만.”
루이스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다 손을 뗐다. 곧장 침실로 가 서랍을 뒤지던 루이스는 물건을 가지고 벨져에게 돌아와 그의 앞머리를 앞으로 모으고 조심스럽게 핀을 꽂았다. 금이나 은은 아니지만 당장 쓰기 편하고 본연의 기능만 다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루이스는 핀을 곱게 꽂은 벨져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만....”
“괜찮아. 귀여워. 잠깐만 하다가 빼버리면 되잖아. 응?”
벨져는 당장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지 부엌 유리창에 잘 생긴 얼굴을 요리조리 비춰보다 루이스를 돌아보고 체념하듯 입을 앙 다물었다. 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그렇게 심통 난 얼굴을 해봤자 귀여울 뿐이라 싱글벙글 웃은 루이스는 벨져를 위해 손거울까지 가져왔고, 벨져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뒤에 눈을 가늘게 뜨며 한 마디 했다.
“뭐, 나쁘지 않군.”
“그렇다니까.”
루이스는 벨져의 시큰둥한 척에 맞장구를 쳤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는 것도 아니고, 다소 품위 없는 꼴이라 탐탁지 않지만 루이스가 이렇게 좋아하니 더 딴지를 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보기에도 제법 괜찮긴 했다.
“나나 되니까 소화하는 거다.”
“그럼, 당연하지. 예쁘다. 귀여워.”
무엇보다 이 해맑은 미소 앞에선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벨져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루이스의 뒷목을 잡아 입 맞추고 그를 가볍게 밀었다.
“가서 앉아라.”
“의자는 안 빼줘?”
“원한다면.”
정말 기분이 좋은지 안 부리던 어리광을 부리며 눈웃음까지 살살 치는데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벨져는 생일을 맞은 연인을 위해 기꺼이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나중에 앙갚음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생일이 좋긴 좋네.”
먼저 식탁에 앉은 루이스는 샐러드와 수프를 가지고 오는 벨져를 보며 웃었다. 벨져 홀든 경이 직접 만든 음식에, 친히 의자까지 빼주시다니 그야말로 영광이 따로 없다.
“뭔가 아침부터 촛불을 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네.”
“시간으로 치면 아침은 한참 지났다만.”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잘 먹을게.”
“들지.”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든 벨져의 눈짓에 루이스도 포크를 들었다. 신선한 샐러드에 빈 속을 데우는 따뜻한 수프. 절로 감탄이 나오는 맛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져를 보자 내심 초조하게 반응을 지켜보던 벨져가 그제야 안심한 듯 가볍게 코웃음 치며 웃었다.
“맛있어.”
“흥. 당연하지. 나는 벨져, 벨져 홀든이다. 이 내가 했는데 맛이 없을 리가.”
“집에 빵 없었어?”
방금 전까지 기고만장해져 한껏 자신을 뽐내던 벨져가 흠칫 굳었다. 미리 준비까지 다 해놓고 수프에 빵을 내가는 걸 잊다니.
“아, 그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고, 있으면 좋겠다 정도니까.”
“있다.”
“내가 가져올게.”
벨져의 반응을 눈치 챈 루이스가 다급히 말을 고쳤지만 완벽을 추구한 벨져의 마음엔 이미 작은 스크래치가 난 뒤였다.
“벨져.”
급격히 가라앉은 벨져의 기분을 알아챈 루이스는 굳은 얼굴로 수프를 뜨는 벨져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빵 같은 거 없어도 맛있어. 해준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뭐라고 했나?”
“그냥 그렇다고. 맛이 없어도 좋아했을걸.”
“흥.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고마워.”
루이스는 눈을 휘어 웃으며 벨져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괜찮다는 위로와 함께 떨어지는 손이 아쉬워 그의 손을 잡아챈 벨져는 엄지로 루이스의 손등을 어루만지다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사랑이 느껴지는 아침이네.”
“언제는 안 그랬나?”
“그러게.”
언제 그랬냐는 양 평소의 벨져 홀든으로 돌아온 연인을 보며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좀 뻔뻔하고 어이없긴 해도 역시 이쪽이 더 보기 좋다.
“뭐 많이 하는 것 같더니, 아침은 이게 끝이야?”
“이건 전채다.”
“본격적이네.”
뭐든 소홀히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이것도 퍽 벨져 홀든스럽다고 생각하며 남은 수프를 입에 넣었다.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쪽으로 겨우 하루를 나던 시절엔 이것도 감지덕지했을 텐데.
“쓸데없는 감상은 그만.”
“응. 생각이 많았네.”
“내가 다 준비해놨으니 넌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
“하하. 그래. 오늘이 다 갈 쯤엔 너무 황송해서 엎드려 기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흥. 네가 퍽이나 그러겠군.”
샐러드와 수프 그릇을 비우자 일어난 벨져가 그릇을 치우고 새 접시를 가져왔다.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과 서니 사이드 업 반숙 계란프라이, 거기에 토마토와 구운 콩까지. 완벽한 영국식에 놀람 반, 감탄 반으로 입을 헤 벌리고 접시만 바라보고 있으니 도로 자리에 앉은 벨져가 짧게 혀를 찼다.
“내가 한 음식을 식게 둘 셈인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대체 왜 이런 것까지 잘 하는 거야?”
아침상을 차려주는 건 감동이지만, 이건 조금 분하다. 토마스가 한 번 먹어준 뒤로 연합의 동료들은 아무도 제가 한 음식을 먹어주지 않을 정도로 요리에 재능이 없는 루이스로선 주방에 들어가기는커녕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요리사가 차려주는 고급 요리만 먹고 살았을 벨져에게 요리 솜씨로 진다는 게 몹시 억울했다.
저런 얼굴에, 저런 몸에, 거기에 배경과 재능까지 다 주고 요리까지 잘 한다니. 조금은 모자란 구석이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과연 계시긴 한 건지 모를 신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던 루이스는 울상을 지으며 포크를 들어 베이컨과 계란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간이며 식감이며, 뭐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음식이라 어깨가 축 쳐졌다.
“맛있네.”
“그 얼굴은 뭐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잘 하는 거야? 불공평해.”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자기 식사 정도는 챙길 줄 알아야지. 나이 먹고 그거 하나 못 하는 쪽이 부끄러운 거 아닌가?”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해.”
“안다. 맛에 대해서는.... 뭐, 그건 내가 잘난 것이니 어쩔 수 없군.”
백 번 맞는 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아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이스는 뚱한 얼굴로 포크를 쥐고 훌륭한 정찬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서 짜증나고, 저를 놀리며 으스대는 벨져의 잘생긴 얼굴도 짜증났지만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봤자 투정에 불과하고, 그럴수록 이 잘난 남자는 저를 귀여워 할 테니.
“그런 날 애인으로 두고 있는 거다. 좀 더 자신에게 긍지를 갖도록.”
“위로가 안 대는데.”
음식을 입에 문 채 웅얼거리며 답하자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홀로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는 벨져의 이마 위에서 반짝거리는 핀과 아름다운 얼굴을 위안 삼으며 물 한 컵으로 답답한 속을 쓸어내린 루이스는 폭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다 가졌으면 좀 재수 없게 굴 수도 있지. 미인은 얼굴값을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하나는 다행이네.”
“무엇이?”
“나 말고 또 어떤 사람이 널 감당하겠어. 기왕 영웅 하는 김에 내가 희생해야지.”
“희생이라.”
루이스는 바로 날카로워지는 벨져의 눈초리에 상큼하게 웃고 콩과 계란을 입에 넣었다. 넣자마자 음식이 반이나 남은 접시가 벨져 쪽으로 끌려갔고,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벨져가 뚱한 얼굴로 턱을 괜 채 루이스와 눈을 맞췄다.
“유치하게 이럴래?”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아침부터 한바탕 하자고?”
“그게 새벽부터 자길 위해 애쓴 사람한테 할 소린가?”
푹. 가슴을 찌르는 말에 루이스는 입 안에 남은 음식을 꿀떡 삼켰다. 맞는 말이라 말문이 턱 막히고 제가 저지른 말실수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왔다. 더 다투고 싶지도 않고, 그의 자존심을 긁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마지못해 하는 걸로 들린다만.”
“...질투했어. 꼴사납지만, 요리까지 완벽하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내가 어떻게 할까.”
눈에 힘을 준 채 잠자코 듣고 있던 벨져가 눈을 감았다 뜨며 접시를 루이스 쪽으로 밀었다. 한결 풀어진 표정에 움츠러들었던 루이스의 마음도 같이 풀어졌다.
“마음 같아선 몸으로 갚으라고 하고 싶지만, 날이 날이니 봐주지. 네 말대로 나도 유치했으니 피차일반이다.”
“그럼 이제 아무 문제없는 거지?”
“그래.”
“식겠다.”
밥을 앞에 두고 싸우는 것도 영 보기 좋은 일은 아니다. 루이스가 음식을 입에 넣으며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동안 그 몫의 접시를 비우고 포크를 쥔 채 망설이던 벨져가 말을 붙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맞군.”
“뭐?”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
그답지 않게 주저하는 목소리에 또 무슨 말을 할까 싶어 긴장했던 루이스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말에 벨져를 바라보다 달아오른 귀를 발견하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눌렀다. 앞머리는 핀으로 올리고, 부드럽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하나로 올려 묶어 안 보일 수가 없었다. 뻔뻔할 정도로 넘치는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의미 없는 포크질을 하는데 방금 전까지 착잡하니 무거운 말을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걸 이제 알았어?”
“그래도 희생한다는 말은 하지 마라.”
“농담이었어.”
“농담으로라도, 넌 이미 너무 많은 걸 포기하고 살고 있으니까. 적어도 내 앞에선....”
기어이 포크를 내려놓고 눈을 마주한 벨져의 눈빛에 루이스는 말을 잃었다. 갑자기 성큼 다가온 감정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러서 의식적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멈출 것 같았다. 내가 너보다 못나서 희생한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해서 그렇게 화를 낸 거였구나 하고 깨닫자 전보다 더 미안해진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벨져의 손끝을 잡았다.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안다. 제길,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불안은 전염병처럼 옮으니까. 루이스는 말을 꺼내는 대신 벨져의 손을 문질렀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같은 말은 해봤자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만 들을 게 뻔했으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잔잔하게 깔린 목소리가 담은 말에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딱히 감흥도 없는 하루에 불과하지만 그 날을 축하해주려고 몇날 며칠을 고민했을 연인에게 박하게 굴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치울까? 면도 해준다며.”
“그래. 그건 두고 잠시 쉬고 있어라.”
손을 놓고 일어난 벨져가 설거지거리를 한 데 모으려는 루이스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직접 설거지라니, 황송해서 차마 두고 볼 수가 없다.
“벨져, 그냥 두고.... 나 허리 아파. 엉덩이도 아프고. 그냥 둬. 응?”
그릇을 들고 가던 벨져는 루이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과, 아래서 올려다보는 애처로운 눈빛이 제법 볼만했다. 이런 얼굴로 쳐다보면 누구든,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고 싶어질 것이다. 결국 벨져는 루이스의 간절한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한 그 날 이 남자를 베어버리지 못한 것도 이 얼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지나갔지만 그 이상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그가 원하는 대로 그릇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양손을 들자 겨우 루이스가 안심한 듯 엷게 눈을 휘며 웃었다.
“준비할 동안 누워있어라.”
“기왕 서비스하는 김에 마사지도.”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이제 아주 막 부려 먹으려 든다. 방금 전까지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눈이 영악하게 빛나고, 그 여유로운 작태에 벨져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생일을 맞은 애인을 바라봤다. 귀여워 죽겠다는 티를 풀풀 내며 웃는 게 영 못마땅한데 여우같이 구는 게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니 그야말로 중증이 따로 없었다.
이걸 어찌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끙 앓는 소리를 낸 벨져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여유가 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저를 귀여워하는 그의 이마에 뽀뽀하고 몸을 번쩍 안아들자 그림처럼 웃던 루이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으악!”
“품위 없긴.”
여유와 주도권을 되찾아온 벨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침대로 향했다. 루이스의 팔이 벨져의 목에 감겨들고 놀란 가슴을 추스른 루이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내 평생 품위 같은 건 가져본 적이 없는데.”
“안다. 얌전히 쉬고 있도록. 금방 올 테니 그새 잠들지 말고.”
“노력해볼게.”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벨져의 뺨을 잡아 저를 마주보게 한 루이스는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꾹 눌렀다 떼자 벨져도 마주 안으며 웃는데, 그 아름답고 따스한 미소에 무심코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벨져....”
쪽, 입술이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루이스가 감았던 눈을 뜨자 몸이 뒤로 밀리며 등이 침대에 닿고 가슴 위에 이불이 덮였다.
“보채지 말고 기다려라. 그도 아니면 아직 부족한가?”
“아니. 충분해.”
한 쪽 눈썹을 까딱이며 묻는 시니컬한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오만과 거부하기 힘든 섹시함이 묻어났지만 루이스는 망설이는 일 없이 대답했다. 이 얼굴에 넘어갔다간 침대에서 또 하루가 지나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최고의 컨디션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애인의 체력과 그의 얼굴에 홀려 보내버린 낮과 밤을 떠올린 루이스는 가슴께에 덮인 이불을 꼭 쥐었다. 벨져는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렇지 않은 양 눈치를 보는 남자의 앞머리를 흐트러트리고 그의 이마에 뽀뽀한 뒤 일어났다.
“오늘만큼만 사랑스러우면 더 바랄 게 없겠군.”
“음. 기대 안 하는 게 좋겠어.”
“동감이다.”
예상치 못한 빠른 긍정에 눈살을 찌푸리자 벨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잘생겨도 얄미운 건 얄미운 거라, 루이스는 참을 생각도 않고 웃는 벨져의 허리를 걷어차려 발을 들었다. 물론 벨져 홀든 경께선 그마저도 유연하고 우아하게 피해버렸지만 어쨌거나.
“자상하게 굴던지 놀리던지 하나만 해, 하나만! 켈록, 컥....”
“흐음. 오늘이 가면 고려해보지.”
“그냥 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군. 뭐, 그런 점도 귀엽다만.”
밥을 먹으면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큰 소리를 내자 밤새 소리를 내지른 목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기침을 뱉었다.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 얄미워 베개라도 내던질까 생각하며 콜록거리던 루이스는 당장 급한 문제 앞에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실리를 택했다. 벨져가 내민 물 컵을 받아들고 쭉 들이켠 루이스는 입가에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어째 한 살 더 먹어도 변함이 없군.”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는 건 좋은 거지. 칭찬 고마워.”
“뭐, 그런 뜻은 아니었다만....”
능청스럽게 사람 속을 살살 긁는 것도 어쩜 이렇게 능숙한지, 당장 무대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루이스는 무대 위에서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주인공 역을 꿰찬 벨져를 상상하다 빈 컵을 건넸다. 지금도 영화 속 대사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 여기서 대중의 인기까지 얻었다간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참. 너 주려고 시집 갖다 뒀었는데.”
“이따 와서 보겠다.”
“얼른 와. 춥다.”
“알겠다.”
루이스의 이마에 입 맞춘 벨져는 걷어차느라 드러난 맨발을 이불로 꼼꼼히 감싸 덮어주고 난로까지 앞에 놓아주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주방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다리는 동안 눈이 감겼다.
사각사각. 귀를 간질이는 얇은 소리와 간질거리는 감촉에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어김없이 잘 생긴 얼굴이 보였다. 현실감이 없어 반쯤 뜬 눈을 깜빡이며 보고 있으니 턱 밑을 손바닥으로 감싸 잡고 있던 벨져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앞머리에 핀을 꽂고 있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자 벨져가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 높이에 이 각도라면 목과 등을 받치는 건 분명 벨져의 허벅지겠지. 무릎베개가 주는 안정감에 취한 것도 잠시, 벨져의 다리에 무게를 덜기 위해 어깨와 등에 힘을 주자 벨져가 루이스의 가슴을 꾹 눌렀다.
“힘 빼고, 움직이지 마라.”
“기다리려고 했는데....”
“쉿.”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손이 말끔한 턱을 어루만지고, 벨져가 숨을 죽이며 거품을 닦아낸 면도칼을 다시 루이스의 턱에 갖다 댔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목과 턱을 내맡긴 루이스는 도로 눈을 감았다. 목과 턱을 받친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비누 거품을 걷어내는 게 간질거려 눈을 뜨고 있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깬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먹자마자 다시 잠들다니 어젯밤 체력 소모가 꽤 심했나 보다. 벨져는 섹스할 때만큼은 이렇게 자상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좀 크긴 해도 잘 풀어줘서 괜찮지만 불이 붙고 이성이 휘발되면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벨져가 참고 천천히 하려 해도 먼저 애가 닳아 매달리게 된다.
루이스는 어젯밤 부끄러운 소리를 하며 벨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리던 자신을 떠올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음탕하다는 소리를 해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벨져 앞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야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누군데. 루이스는 부끄러운 기억 대신 욕정에 달아오른 눈으로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던 벨져를 생각했다.
야하고, 예쁘고, 다정한데다 부자에 몸도 능력도 좋은 연하의 애인. 그야말로 최고의 상대다. 물론 고작 한 살 차이지만 그것도 한 살 나름이다. 타고난 능력이나 태생부터가 다르다보니 벨져의 체력이나 요구에 맞추다보면 루이스는 꼼짝없이 이렇게 드러누워야 했다. 그걸 자초한 건 자신이지만, 안 그래도 건강한데 신체 강화 능력이라니. 아무리 공정한 신이라도 편애할 만한 외모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가진 자에게 너무 많이 주는 것 같다.
“읏.”
“조심.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거의 다 했으니 조금만 참도록.”
생각을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이 들어갔고, 부드럽게 고개를 돌리던 벨져가 손을 멈췄다. 목에 완전히 힘을 빼고 맡겼던 루이스가 따끔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자 벨져가 칼을 내려놓고 매끈한 턱을 살살 문질렀다.
“피는 안 난다만, 아프면 말해라.”
“됐어. 괜찮아.”
루이스는 벨져의 배에 머리를 기댔다. 한 쪽 귀에서 시작해 반대쪽 귀까지 정성들여 만져주는 건 조금 부끄럽고 간지러워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양 손에 든 검을 휘두를 땐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눈 까딱 않고 베어버리는 주제에 손가락 두 뼘이 채 될까 말까한 칼날에 상처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살살 몇 번씩 손잡이를 고쳐 쥐는 것도, 칼날을 댈 때 숨을 멈췄다가 때면서 내쉬는 것도 전부 사랑스러웠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사랑받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포근한 만족을 주기엔 충분했다.
“시작했으니 하고는 있지만 굳이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군.”
벨져의 배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루이스는 머리를 굴려 말의 뜻을 헤아리는 대신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해주고 싶다며.”
“나오는 게 없어서 말이지. 얇고 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난 것 같지도 않군.”
“너 만난다고 깔끔하게 했으니까 그렇지.”
“하루 사이에 못 볼 꼴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럼 볼 꼴이 되는 사람도 있는 거지.”
루이스의 턱에 남은 마지막 거품까지 걷어낸 벨져는 맨들맨들해진 턱을 문질러 확인하고 따뜻한 물수건을 얹었다. 비눗기가 남지 않게 꼼꼼히 눌러 닦고 나니 안 그래도 보송한 피부가 더 맑아 보여 뺨을 톡톡 두드리자 루이스가 벨져의 턱에 손을 뻗었다. 확인하듯 어루만지는 손끝은 얼굴만큼 부드럽지 않지만 그 또한 루이스의 일부였기에 벨져는 루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손 잡는 것도 주저하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거리낌 없는 스킨십이 나쁠 리 없었다.
“자기도 그러면서 남말하긴.”
“나는 잘 안 보이는 것뿐이다.”
“하긴. 거기도... 으악!”
“품위 없는 소릴!”
평화롭게 이어지던 대화에 끼어든 불순한 말에 물수건을 짜던 벨져가 몸을 돌렸고, 그와 동시에 벨져의 팔꿈치와 루이스의 머리가 부딪쳤다. 졸지에 가만히 있다가 맞은 루이스가 벨져의 무릎 위에서 데구룩 구르고, 벨져는 루이스가 뜨거운 물을 받아놓은 대야를 엎지르지 않게 물이 든 대야를 번쩍 들어올렸다.
“내가 거기랬지, 거기가 어딘 줄.... 앗, 뜨거!”
“내가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것 같나? 가만있어라!”
급하게 드는 바람에 흘러넘친 물이 루이스에게 튀고, 루이스는 왔던 방향의 반대로 굴러 벨져의 무릎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에 진이 빠져버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고 벨져가 대야를 다시 내려놓으며 떠들썩한 상황이 종료됐다.
“그래서,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야? 그런 걸로 치면 나도 할 말 많은데.”
끄응. 눈을 가늘게 뜬 벨져가 영 못마땅하다는 신음을 흘리다 루이스의 뺨을 찰싹 때렸다. 소리만 나지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흠칫 몸을 떨며 진짜로 맞은 척 뺨을 감쌌다. 장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과한 반응에 벨져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여 짧게 뽀뽀했다.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데도 올라간 입꼬리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귀엽게 보이니 어쩌겠는가. 결국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오늘 같은 날, 이런 분위기면 아무리 입술이 부르터도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좋아해.”
“안다.”
피식 웃는 루이스를 따라 웃는 벨져가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루이스는 그를 위해 턱을 들었다. 뒷머리에 닿는 무릎베개가 주는 달달하고 포근한 분위기에 취해, 아름답고 강한 연인의 손길에 취해 루이스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뺨을 어루만지자 비단결처럼 매끈한 피부가 손에 착 감겨들었다.
“혹시 내가 생일선물로 고양이나 강아지 데리고 살자고 하면 어쩔 거야?”
조근조근, 속삭이듯 담은 말을 마치자마자 험악해진 얼굴에 루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상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벨져의 뺨을 잡아 입을 맞추고, 단단히 삐져 입을 열어주지 않는 그의 입술을 핥으며 눈을 올려 뜨자 루이스를 떼어낸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이라서 봐주는 거다.”
“그래.”
“날 안 보고 살 수 있으면 기르고.”
“으음. 그럴 수야 없지.”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두르며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심통을 낸지 얼마나 됐다고 순순히 입을 열어주는 게 귀엽다. 이러니 계속 놀리고 싶지. 루이스는 책임을 전가하며 벨져의 속눈썹이 떨리는 걸 지켜보던 루이스는 벨져가 실눈을 뜨자 바로 눈을 감았다.
“키스할 땐 눈을 감는 게 예의라고 안 배웠나?”
“네가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하, 말은 잘 하는군.”
“하지만 사실인걸. 너도 부인하지 않잖아.”
“말할 필요가 없지.”
넘치는 자신감은 오만으로 이어진다. 그 덕에 이 자리에 살아있을 수 있는 루이스는 벨져를 나무라는 대신 다시 한 번 키스했다. 루이스는 벨져의 오만을, 제게는 없는 그 당당함과 자신감을 사랑했다.
“사랑해.”
가끔, 생각이 지나치면 머릿속에 담긴 것이 혀를 타고 흘러넘친다. 잠시나마 형체를 갖추고 사라진 목소리를 깨닫자 루이스의 허리 위에 머물던 벨져의 손이 멈췄다. 마주한 시선 사이, 그 짧은 틈새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오가고 열이 올랐다.
- 띵동.
“어, 잠깐 내가...!”
“아니. 내가 가지. 가만 있어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벨이 올리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누구 하나는 바라보던 사람을 침대 위로 떠밀었을 거다. 너무 달콤해서 마비될 것 같은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에 루이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눌러 눕히고 일어났다. 아직 머리에 핀을 꽂고 있다고 말해줘야 했는데. 뒤늦게 깨달은 루이스는 벨져의 등을 향해 뻗었던 손을 이불 속에 넣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니 어쩌겠는가. 오면 잘 달래야지. 어쩌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지도 모른다. 벨져 홀든은 웬만한 게 아니고서야 그의 미모로 모든 것을 설득하는 남자니까.
“뭐야? 외판원?”
“아니. 내가 주문한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돌아온 벨져는 웬 상자와 함께였고,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벨져를 기다리던 루이스는 빙긋 웃었다. 하긴, 벨져 홀든 경께서 이 정도로 기념일을 건너 뛸 리 없다. 더구나 몇 푼 되지도 않는 봉급을 모아 선물을 해준 다음이라면 더더욱. 보나마나 제 생일선물일 게 분명했지만 루이스는 벨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뭔데?”
“열어봐라.”
베개로 허리를 받치고 헤드에 몸을 기댄 루이스가 묻자 벨져가 루이스의 다리 위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너무 뻔하게 주는 거 아니야?”
“기대했나?”
“조금?”
“오늘이 점점 가고 있다는 것만 알도록.”
“하하하. 미안. 농담이야. 고마워.”
능청스럽게 모른 척하다 볼에 뽀뽀하자 뚱하니 삐질 것 같던 벨져의 표정이 스르륵 풀어졌다. 아닌 척 해도 엄청 귀엽다니까. 성격도 나쁘고 성질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뻔뻔하고 재수 없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냥 열면 돼?”
그리 크지 않은 상자를 들며 묻자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무거운 물건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 보석을 받았으니 장신구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상자를 열자 작은 상자 세 개가 나타났다. 그것도 그냥 종이 박스가 아니라 귀중품이 들어있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상자다.
“설마 꽝 이런 거 들어있는 건 아니지? 확률 뽑기 그런 거야?”
“하, 이 나를 뭘로 보고.... 전부 네 거다. 어느 걸 뽑아도 당첨이지.”
“다행이네.
루이스는 웃으며 중앙에 있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뭐가 있을까. 이런 상자가 세 개쯤 되면 뭐가 나와도 실망은 안 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상자를 열자 고귀한 은빛으로 빛나는 회중시계가 나왔다.
열어보라는 눈짓에 얼떨떨하게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필체로 쓰인 간지러운 문구와 숫자 대신 보석이 반짝거리는 시계판이 보였다.
“자수정과 가넷이다. 보다시피 특별 주문품이지. 잘 간수하도록.”
“'사랑하는 나의 연인 루이스에게.' 라니,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야?”
루이스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묻자 벨져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멋쩍어하는 것도 귀엽지만 루이스는 다름 아닌 벨져 홀든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에 조금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안쪽에 이름이라도 써줄 걸 그랬군. 물론 잊지 않고 시계 뒷면에 써놨다만.”
“이걸 어떻게 들고 다녀?!”
“못 들고 다닐 이유가 있나?”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일단 넘어가.”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 열면 열수록 더 부끄러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루이스는 당장 눈앞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다음 상자를 열었다. 여전히 고급스럽고 화려하지만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루이스는 얇은 고리를 들어 앞뒤를 살폈다. 자수정이 하나 박혀있는 걸 빼면 그리 특별해보이진 않는 동그란 링의 용도를 몰라 벨져를 쳐다보자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정답을 내놓았다.
“열쇠고리다.”
“아. 시계도 그렇고,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거야?”
“듣고 싶나?”
벨져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 질문을 들었는지 팔짱을 낀 채 한 쪽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어떤 긍정의 제스처를 취하기라도 하면 지금의 열 배는 부끄러워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루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언제든 내게 돌아오라는 뜻이고, 시계는 볼 때마다 날 생각하라는 뜻이다. 네가 스물네 시간 언제나 나를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건 아주 잘 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너도 내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밑지는 장사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나도 네 생각 해.”
“하, 미련하다! 한참 부족해. 알겠나?”
아직 하나가 더 남았는데 이불 속에 숨고 싶은 기분이다. 루이스는 상자만 만지작거리다 작게 숨을 토했다. 그렇게 난방이 센 것도 아닌데 너무 덥다. 손끝이며 뺨이 화끈거리는데 도무지 열이 식을 줄 몰랐다.
“남은 것도 열어 봐라.”
루이스는 기대감에 가득 찬 벨져의 눈빛에 마지못해 마지막 상자를 꺼냈다. 만약 여기서 더 했다간 부끄러워서 죽은 첫 번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연합이 영웅이 애인과 함께 생일을 보내다 행복에 겨워 사망하다. 같은 기사가 나면 다른 건 몰라도 웃기긴 하겠지. 특종이라고 누군가는 좋아하겠지만. 떨림을 잊기 위해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며 루이스는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벨져가 특히 기대하는 것 같아서 긴장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익숙한 물건이 나왔다. 루이스는 귀걸이 한 쪽을 꺼내 높이 들었다. 반짝이는 보석은 벨져도 자신도 즐겨 쓰는 자수정으로, 세공도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딱 하나.
“이건 왜 하나밖에 없어?”
귀걸이는 본디 두 개가 한 쌍이다. 척 보기에도 엄청 비쌀 것 같지만 다이아몬드나 루비, 사파이어같이 비싼 보석이라면 또 모를까 자수정은 그리 비싼 축에 속하지 않는다. 벨져의 생일 선물을 고른다고 이곳저곳 보석상을 돌아다녔으니 그 정도는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벨져 홀든이 금전적 문제로 그랬을 리는 없었다.
루이스의 질문에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린 벨져는 그의 목깃 안으로 손을 넣었다. 얇은 은색 줄에 조금은 어색하게 달려있는 보석을 보여준 벨져가 목걸이와 옷깃을 정리하고 루이스의 손등에 그의 손을 얹었다.
“언제 어디서나, 너는 내 일부다.”
“......”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뺨이며 피부가 맞닿은 손에 열이 홧홧하게 오르고, 더없이 진중한 고백에 숨이 턱 막혔다. 벨져는 피식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한 손으로 루이스의 뺨을 감싸 입을 맞췄다.
“음, 그.... 고마워.”
벨져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잡자는 건줄 알고 손을 얹자 맞잡으며 눈살을 찌푸리는데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이자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맞잡았던 다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원래 이런 건 선물한 사람이 직접 해주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소독해야 하는데....”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해놨다.”
쑥스러워서 한 발 빼며 시선을 피하자 벨져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목에 손을 뻗었다. 피할 수도 없는 거리라 목에 닿은 손이 머리카락을 쓸며 귀에 닿았고,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은 벨져의 손에 바르르 몸을 떨자 귓불이 잡혔다. 부드럽게 귀를 만지작거리던 벨져는 말랑한 귓불에 입을 맞췄다.
“읏. 잠깐....”
“가만히.”
어쩜 이렇게 준비성도 철저한지. 루이스는 귓불에 닿는 차가운 알콜에 흠칫하며 눈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예민한 곳이라 간지러워서 자꾸만 목이 움츠러드는데 벨져가 소독한 귀에 호호 숨을 부는 바람에 참기 힘들었다.
“읏, 흐.... 벨져....”
“보채지 마라.”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섹시하다. 순식간에 야릇해진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어 벨져의 팔꿈치를 잡자 잡힌 귓가에서 벨져의 목울대가 울렸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자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지고, 차가운 금속이 살갗에 닿았다. 이미 뚫려있는 곳이라 아프진 않았지만 손끝이 닿은 곳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간지러워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됐군.”
“응. 고마워.”
“제대로 보지도 않고?”
“네가 고른 거잖아. 당연히 어울리겠지.”
거울을 가지러 일어선 벨져의 소매를 잡은 루이스의 말에 벨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가식이나 체면치레라곤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진심과, 그 말이 담고 있는 신뢰와 애정이 기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없이 즐거워진 벨져는 턱을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다.”
“네 생일케이크도 같이 왔으니 저녁에는 함께 초에 불을 붙이도록 하지.”
“저녁까지 해주려고?”
“이 나를 두고 다른 사람과 남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라도 한 건가? 어리석군. 미련하다!”
자신이 넘치는 걸 넘어 거만하게 느껴지는 말투와 세상의 온갖 멋짐과 아름다움은 다 제 것이라는 양 뽐내는 얼굴, 빳빳하게 쳐든 고개까지, 어딜 봐도 평소의 벨져 홀든이다. 방금 전까지 너무 두근거려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던 루이스는 작게 웃으며 안도 섞인 숨을 내쉬었다. 자상한 애인도 좋지만, 역시 이 쪽이 조금 더 편하다.
“이제야 좀 살겠네. 고마워. 정말로.”
“...네게 과분하긴 하지. 영광으로 알도록.”
“하하. 그럼. 여부가 있겠습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봐도, 앞머리를 넘긴 핀 때문에 귀여워 보일 뿐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핀을 뺐다. 오래 꽂아놓은 탓에 자국이 남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 모양을 다시 잡아주는데 벨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벨져, 오늘은....”
아, 이건 위험하다. 막을 새도 없이 고개를 옆으로 틀며 눈을 감고 입을 맞춰오는 벨져의 입술에 입이 막혔다. 입술을 비비고, 혀가 얽히며 빠져드는 진한 키스에 루이스는 눈을 감고 벨져의 뒷목을 잡았다. 손등을 간질이는 머리카락 틈새로 손가락을 넣고, 키스에 전념하다 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아, 하.... 벨져....”
“안다.”
새벽까지 해서 더 하는 건 무리다. 애초에 기본적인 체력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라지만 존재감을 과시하며 단단하게 부푼 앞섶을 무시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쯤 되면 애인이 너무 건강한 것도 문제다.
“힘들면 그냥....”
“그, 한 번 정도는 괜찮으니까.... 살살....”
“조심하겠다.”
그 애인의 얼굴에 홀려 매번 지고 마는 자신이 제일 문제인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벨져 홀든이면 어떻게든 지게 되어 있다. 어쨌거나 인생은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패자는 그고, 승자는 자신이니 이 정도는 양보하는 게 도리다.
그렇게 오늘도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 루이스는 입술을 맞추러 다가오는 벨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파르르 떨리며 감기는 그의 속눈썹을 보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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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1/10 Late night / Office
1월 12일. 루이스는 달력에 표시해놓은 빨간 동그라미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출발하면 늦지 않게 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연주회는커녕 새해맞이에도 관심이 없지만 애인의 생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날이기도 하고, 몇 날 며칠을 회유한데다가, 안 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어도 애인의 생일을 가까이서 축하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작년에는 시간을 맞추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늦어버렸고, 별 다른 선물도 없이 하루 종일 호텔에서 몸의 대화만 나눴는데 올해도 그렇게 때웠다간 한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올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벼르고 새해를 맞으러 오스트리아로 떠난 애인을 떠올린 루이스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펜을 들었다.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려면 한시라도 바삐 끝내야 했다.
1/11 Afternoon / Platform
새벽까지 서류를 마치고 아침 첫 배를 타고 칼레로, 또 칼레에서 곧장 기차를 타고 몇 시간. 이동하는 내내 정신없이 졸다 깨길 반복한 루이스는 빈에 도착한 열차가 다시 출발하기 전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내렸다.
슬라이드라도 타고 빠져나와야 하나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계단을 밟고 내려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 루이스는 출발하기 전부터 몇 번이고 확인한 코트 안주머니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플랫폼을 나왔다. 확실히 대륙은 공기가 다르다. 숨 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서리는 건 똑같지만.
바쁜 걸음으로 역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익숙한 사람과 그와 잘 어울리는 까만 자동차를 발견했다. 차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저를 노려보는 연인과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낯선 도시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반갑고, 풍경이 아름답다. 가만 보고만 있어도 절로 지친 마음이 회복되는 것 같은데 정작 루이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남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역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도 보일 기미가 없기에 네 녀석이 내뺀 줄 알았다.”
“설마. 나 그렇게 신용이 없어?”
“워낙 전적이 화려해야지.”
지치고, 힘들고, 졸려서 인내력의 한계가 가까워지면 장난도 장난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서 왔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루이스는 뚱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벨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데 사람은 안 오지, 연락도 없지. 그야말로 발만 동동 구를 상황이다. 추운데 차에 있지 않고 나와서 기다린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역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도록 안 나타나는 사람을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혹시나 하는 불안에 마음을 졸이다 차를 박차고 나왔을 걸 생각하면 또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스는 특별한 날을 앞두고 다투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똑같이 짜증내는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너 보려고 어제, 아니지 오늘 새벽까지 밤새서 일하고 왔어. 좀 봐주라.”
“네가 하는 거 봐서. 며칠 비웠다고 또 이 꼴이 되다니. 쯧.”
벨져 홀든이 그럼 그렇지. 루이스의 예상대로, 벨져는 짜증을 내면서 그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루이스의 목에 두르고 다크서클이 짙게 진 눈 밑을 엄지로 문질렀다. 고급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뺨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동안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하지 못해도 애정 어린 걱정이다.
“일단 타라. 바람이 차군.”
“아, 그....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은 사람을 운전기사로 쓸 것 같나?”
포트레너드야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그렇다 치지만 여긴 오스트리아고, 빈은 유명인사도 많은 도시니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물은 거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벨져 홀든이 친히 문까지 열어주시는데 안 탈 이유도 없고, 그의 말대로 바람이 찼기에 바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연주회는 언제야?”
“무식하긴. 연주회가 아니라 오페라다.”
“아, 그래.”
벨져가 고개를 까딱이자 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루이스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나 그거나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루이스는 이쪽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성의가 없군.”
“나 열세시간 동안 이동한 건 알지?”
흥. 아름답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미남자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단 투로 코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이 그러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오만하고 당당한 남자가 그러니 기분이 나빠지려다가도 무심코 그 미모에 홀려 기분 나빠할 틈이 없어지고 만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정장도 없겠군. 적어도 장소에 맞는 격식을 갖추는 정도의 예의는 보여야 할 거 아닌가. 나, 이 벨져 홀든과 함께 빈 오페라 하우스에 가려면 말이지.”
그 얼굴에 홀리는 건 제아무리 냉철한 결정사라도 다를 게 없어서, 루이스는 벨져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잠시 놓았던 이성을 되찾았다. 무표정도 무표정이지만 기분이 좋은 벨져는 더 위험하다. 넋을 잃고 보다가 휘말린 게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그보다, 힘들게 왔는데 좀 좋은 말 해주면 안 돼? 그, 사.... 보고 싶었다던가 그런 건....”
“사랑해. 보고 싶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사랑한다던가, 라는 말은 운전석에 있는 기사의 눈치가 보여 말하지 못하고 조금 더 평범한 말로 돌려 말했는데, 들떠 있던 벨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을 뿐,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나는데 눈치 없이 두근거리는 건 대체 누구의 심장인가. 루이스는 꽁꽁 언 얼음을 다시 얼려버릴 것 같이 싸늘한 벨져의 눈빛과 벨져의 얼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말을 잊었다.
루이스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벨져를 바라보자 그의 말을 잊게 만드는 장본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다가와 입을 맞췄다. 뒷목을 잡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며 눈을 감고 애틋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루이스는 벨져의 마음을 깨닫고 되레 미안해졌다.
오자마자 짜증을 낸 건 아마, 연락도 뜸하더니 특별한 날을 앞두고 제대로 준비도 안 하고 와서 당연한 걸 묻고, 남의 눈치나 보는 게 서운하다는 뜻이겠지. 과연 우아하고 고상한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보고 싶었다, 네가 날 더 신경써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루이스는 벨져의 매끈한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
“그래도 힘내서 왔으니까 봐줘. 응?”
샐쭉하게 실눈을 뜬 그를 향해 한껏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이자 벨져가 루이스의 코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요령만 느는군.”
“하하. 그러게.”
연상의 애인, 그것도 화려한 걸 넘어서 고혹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을 만나며 익힌 요령은 연하의 애인을 만날 때도 유용했다. 예쁘고, 화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쉬이 마음을 내주지 않는 고고한 사람들. 이렇게 보면 참 한결같은 취향이다. 루이스는 벨져가 다른 사람 생각을 하는 걸 트집 잡기 전에 그의 입술을 입술로 눌렀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걸 영 마뜩치 않아하면서도 키스를 거부하지 않는 게 귀여워 웃자 대번에 벨져의 눈매가 변했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 정장 없어. 시작까지 몇 시간 안 남지 않았나?”
“루이스.”
“늘 불만이었잖아. 오늘은 토 안 달고 네 말대로 할 테니까. 응?”
“...정말인가?”
“그래.”
“좋아. 그럼 옷을 맞추러 가야겠군. 아, 물론 그 전에 식사부터 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들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내내 찌푸린 얼굴이던 벨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꿍꿍이속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는 게 보였기에 더더욱 물릴 수 없었다.
무슨 음흉한 짓을 하려는지 몰라도 이 정도면 생일 기념 서비스로 충분하겠지. 사악하게 웃는 것도 두근거릴 정도로 잘 어울리는 애인 때문에 고생길이 열린 루이스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외면하며 달리는 차 안에서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1/11 Still Afternoon / Tailor Shop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루이스는 몇 번째 갈아입는 건지 모를 정장을 입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트리비아의 의상실에서도 해본 적 없는 옷 갈아입기에 지친 몸이 그만 쉬게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눕고 싶다. 최소한 앉기라도 하면 좋겠다. 쇼핑을 따라다닐 때도 힘들긴 하지만 인형놀이가 수백 배는 힘들다. 루이스는 아까 입었던 것과 뭐가 다른 것인지 모를 정장을 받아들고 다시 한 번 탈의실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벨져가 이건 허리를 줄여야겠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하고 있고 벨져 홀든이 인정한 테일러는 그에 맞장구를 치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제발 누가 좀 살려줘....”
여기, 도움!을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다시 한 번 셔츠자락을 당긴 루이스는 셔츠 가터에 끝자락을 고정하고 바지를 입었다. 그 위에 서스펜더, 또 거기에 단추가 족히 여덟 개는 달린 것 같은 베스트, 그리고 재킷. 이것만 입어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체 여성복은 얼마나 더 힘들까.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사귀기 시작한 무렵 그녀가 시켜준 경험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코르셋에 킬힐, 거기에 몸을 죄는 갖은 속옷을 껴입고 또 몸을 옥죄는 것에 비하면 이쪽은 천국이다.
“벨져어....”
힘들어서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에, 울상을 지으며 문을 열고 나가자 벨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긋이 품평하는 눈빛에 부끄러웠던 것도 처음 뿐, 지금은 그저 이 정장 지옥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후회할 줄은 말을 꺼냈을 때부터 알았지만, 생각보다 후회가 막심했다.
“알맹이는 여전히 격이 떨어지지만.... 뭐, 그럭저럭 봐줄만 하군.”
“그럼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화색을 띠자 잠시 자리를 떴던 테일러의 조수가 넥타이만 한 가득 걸려있는 행거를 끌고 왔다. 벨져는 행거를 흘끗 보고는 대여섯 개를 골라 루이스의 어깨에 널어놓고 고민하다 하나를 골라 목에 둘렀다. 이럴까봐 목깃을 내리지 않았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루이스의 턱을 들어 올리고 다시 목깃을 세웠다.
테일러와 조수가 이런 일은 자기네들이 하겠다며 안절부절못하는데도 벨져는 루이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눈치를 보던 루이스가 그들에게 됐으니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조금만 고개를 움직이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시선을 목에 둔 채 집중하는 벨져 때문에 안절부절 못 하는 건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가깝지 않아?”
“쉬잇.”
이렇게 가까운데서, 그런 목소리로 낮고 조용히 속삭이다니. 이래서야 심장이 위험하다. 긴장과 떨림으로 뻣뻣하게 굳은 루이스는 숨을 죽이다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난 것 같아 민망해한데 고개를 내릴 수 없으니 딱 미칠 지경이었다.
“됐다.”
벨져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뒤에야 루이스는 멈춘 줄도 몰랐던 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오페라는 시작도 안 했는데 지친 몸은 휴식을 요구하며 늘어지려 했다. 제 작품이 흡족한지 세 발짝 떨어져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가 피식 웃었다.
“왜, 두근거렸나?”
“윽. 당연하지...!”
“솔직한 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
놀려서 기분이 좋은 건지, 그 자신의 심미안에 뿌듯한 것인지 몰라도 벨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어째 좀 억울하긴 하지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진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피고 벨져의 입술에 빠르고 짧게 뽀뽀했다.
“마음에 들어?”
“나쁘지 않다.”
“다행이네.”
“머리만 조금 손보면 되겠군.”
“그럴 시간은 돼?”
“빠듯하지만, 될 거다.”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와 재킷 칼라를 만져주다 루이스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검사로서 필연적인 굳은살이 박일지언정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이마에 닿고, 얇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넘겨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머리는 안 올리는 게 낫겠군.”
“고마워.”
루이스는 벨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를 흔들고 늘 하는 대로 정리했다. 머리를 올리고 거울을 볼 때도 어색하지만 이런 반응을 하는 건 비단 벨져뿐만이 아니었다. 트리비아도 한 번 올려보는 게 어때? 라고 하고는 다시 내리고 후드를 권했고,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는 절친한 친구 앤지 역시 딱 지금의 벨져 같은 표정을 하더니 머리를 올리지 말라고 했다. 조금 상처긴 해도 안 어울린다는데 어쩌겠는가. 받아들여야지.
루이스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자 벨져가 답지 않게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올린 머리가 안 어울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저 혼자 풀이 죽어서 시무룩해하는 스물일곱이라니, 끔찍한 게 정상인데 말도 못 하게 귀엽다. 머리를 올리면 안 그래도 어려보이는 얼굴이 더 어려 보여서 안 되겠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잡아끌어 그의 허리를 안았다.
“괜찮다.”
“지금 나 괴롭히는 거지?”
“아니, 전혀.”
“거짓말. 눈이 웃고 있잖아.”
부루퉁하니 토라진 루이스의 말에 벨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양 눈썹을 까딱였다. 루이스의 한숨 뒤에, 허리를 마주 안으며 벨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루이스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냥 따듯한 이불속에서 노닥거리면 안 돼??”
“안 돼. 그건 네 생일에 해라. 기꺼이 들어주지.”
“너무하네.”
벨져는 말없이 루이스의 턱을 들어올렸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을 따라 고개를 들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부드럽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벨져가 보여 머릿속에 가득 차있던 불만이 쑥 들어갔다.
“좋은 옷에 좋은 외투가 빠질 수 없지.”
여기서 또, 외투 지옥이 시작되나. 방금 전까지 설렘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다른 의미로 크게 쿵쾅거리며 루이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려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테일러가 미리 준비한 듯한 코트 한 벌을 가지고 나타났다.
벨져가 입고 있는 것과 색만 다를 뿐인 코트의 등장에 루이스는 뿌듯해하는 벨져를 바라보고, 다시 코트로 눈을 돌렸다.
“이 벨져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 가려면 어느 정도의 격은 맞춰야지. 내 옷을 맡길 때 미리 맡겼다.”
“내 치수는 어떻게 알고?”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나? 내가 네 몸을 얼마나....”
“그만, 거기까지!”
밝은 회색 톤의 코트가 벨져에게 잘 어울리긴 하지만 제게도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망설이자 벨져가 코트를 들고 루이스의 등 뒤에 섰다.
“저기, 벨져.... 이젠 나도 좀 부담스러워지는데....”
“팔.”
말만 했지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루이스는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등 뒤에 선 벨져가 코트를 입혀주고, 테일러가 다가와 매무새를 고쳐주며 거울을 보는 사이 옆에 서있던 벨져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루이스를 보다 입을 열었다.
“역시 이걸로 하길 잘했군. 아, 물론 기장은 네 게 더 짧다.”
짧다는 말에 울컥한 루이스는 팔꿈치로 벨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비싼 값을 하는 건지 고급 수트와 코트를 겹겹이 입었는데도 움직임이 자연스러웠고, 루이스의 팔꿈치에 맞은 벨져가 작게 억눌린 신음을 냈다.
벨져 홀든은 그의 이명이 증명하듯 빛처럼 재빠른 쾌검사다. 아무리 거리가 가까운들 이 정도는 피하는 게 당연했기에 맞을 줄 몰랐던 루이스가 되레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자 벨져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괜찮아?”
“별 거 아니다. 그보다 마음에 안 드는 소릴 한다고 폭력을 쓰다니 천박하군.”
“그걸 알면서 왜 안 피하는데?”
“아픈 구석을 찔렀으니 한 대 정도는 맞아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더 짜증나.”
잠시나마 죄책감에 시달린 루이스가 억울해하자 벨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길 가지고 노는 게 짜증나고 억울한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막상 할 말이 없어진다. 루이스는 까다롭고 아름다운 사람, 그것도 아름답고 우아하며 오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홀든의 둘째 도련님을 애인으로 둔 자의 고충을 되새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어울리는 것도 힘들지만 오늘과 내일만은 그를 위한 날이었다. 이 정도는 참고 따라주는 게 도리다. 그동안 바쁘다고 혼자 둔 것도 미안하고, 그 외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벨져가 저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걸 정당화한 루이스는 벨져가 매준 타이를 한 번 만져보고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그럼 갈까.”
에스코트 하듯 손을 내밀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벨져가 고개 끄덕이며 루이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아, 장갑 필요하나?”
“이따가. 지금은 이대로 좋다.”
놀리는 게 아닌, 애정이 담긴 자상한 미소가 눈부시다. 루이스는 벨져가 힘주어 잡은 손을 맞잡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미인을 가지면 힘들다던데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옳은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심장에 해로운 건 부인할 여지가 없다.
“또 그러는군.”
“내가 뭘.”
“뭐, 나는 네 그런 모습도 좋아하니 상관없다.”
별것도 아닌 말에 혼자 설레서 눈도 못 쳐다보고, 손만 꿈지럭거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벨져는 대체 누가 이 사람을 두고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라고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홍조 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귀찮고 싫다는 티를 풀풀 내면서 어떻게든 제 마음에 들어보려고 애쓰는 게 기특해 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았다.
“고생했으니 상이라도 줘야겠군. 아이스크림?”
“내가 애야?”
“하긴, 새 옷에 흘리기라도 하면 큰일이군.”
“벨져...!”
“농담이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못 사줄 것도 없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지.”
벨져는 루이스가 정말 화를 내기 전에 재빨리 루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미 조금은 뿔이 난 것 같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벨져의 예상대로 루이스는 벨져를 잠시 흘겨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만 이러면 좋을 텐데,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포트레너드에서는 그나마 음습하고 침울한 후드와 어두운 무표정이 다가오는 사람을 막아주지만, 이렇게 꾸며놓으면 누구나 달라붙을 게 분명했다.
터무니없이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고, 정이 많은 것도 문제고, 곱상하게 생긴 것도 문제다. 물론 가장 심각한 건 본인이 자각이 없다는 거지만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 벨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시시때때로 옆을 돌면서 가지를 쳐야지.
거기까지 생각한 벨져는 흐트러진 루이스의 앞머리를 만져주고 코트와 함께 세트로 맞춘 목도리를 둘렀다. 이 정도면 누구도 벨져 홀든의 것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니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테고, 보기에도 좋다.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 벨져는 오랜만에 연인을 독점한 기분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이니 마음껏 즐기는 게 당연했다.
1/11 Evening / Wien National Opera House
값이 얼만지도 모를 옷과 구두에 실크 장갑까지 끼고 박스석에 앉았건만 루이스는 오페라에 전념하기보다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졸음과 싸워야 했다. 물론 벨져의 생일이니까 그가 하고 싶다는 걸 하는 게 맞고, 그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해주는 게 맞지만 루이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 화려한 가수와 오케스트라. 차라리 무성영화가 나을 지경이다. 그건 언어가 없어도 즐길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 쪽의 수준이 높은 게 아닐까. 예술과 대중성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잠들고 만 루이스는 허벅지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에 놀라 펄쩍 튀었다. 당연히, 경멸을 가득 담은 애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영화관에서 졸다 깬 것보다 몇 배는 민망하고 창피했다.
“큼, 내가 그래서 해설이라도 해달랬잖아.”
“작품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지 않고 떠드는 건 오페라를 모욕하는 품위 없는 짓이다.”
그럼 데려오지를 말던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은 루이스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레몬 슬라이스가 장식된 탄산수 잔을 집어들었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벌써 몇 번이나 졸다가 깨서 싸늘한 눈초리를 받다 이번엔 허벅지를 꼬집혔는데, 다음에 졸다 깼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약간 기분이 나쁜데 다음엔 정말 싸우게 될 지도 모른다. 벨져의 기분을 안 상하게 하면서, 내일을 평화롭게 맞고, 나도 멀쩡하려면 이쯤에서 나가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벨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루이스는 탄산수 위에 떠있는 얼음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벨져.”
불러도 답이 돌아오기는커녕 아예 무시하기로 한 건지 반응이 없다. 루이스는 완벽한 옆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괬다. 썩 내키진 않지만, 비장의 무기가 하나쯤 있긴 했다.
“빨아줄까?”
이번엔 어떤 표정일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빨개진 벨져가 경악에 물들어 입을 벌린 채 뻐끔거리다 루이스의 팔을 덥썩 잡으며 다가왔다. 총알도 튕기는 홀든의 검을, 그것도 둘이나 들고 전장을 누비는 쾌감사의 악력에 악 소리 한 번 못 내고 신음을 삼키며 인상을 쓰자 겨우 패닉에서 빠져나온 벨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냐! 아무리 박스석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신성한 오페라하우스에서 그런 음탕한 생각을...!”
“아니, 여기서 말고! 왜 날 무슨 파렴치한으로 보듯이 보는 거야!”
벨져가 목소리를 낮추고 빠르게 속닥거리는 바람에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루이스는 억세게 잡은 벨져의 손을 떼어내고 푹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오늘 몇 번째 한숨을 쉬는 건지 모르겠으나 한숨이 나올 상황인 것은 확실했다.
“나도 얼만지도 모를 옷을 하루도 안 돼서 더럽히고 싶진 않아! 그냥, 여기 말고.... 둘이.... 응?”
공공장소에, 오페라가 한창이라 속닥거리는 게 고작이지만 오히려 말끝을 흐리며 어물쩍거리는 게 통했는지 벨져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두 시간은 여길 나갈 기회가 없다. 루이스는 유혹에 혹해 갈등에 빠진 벨져를 몰아붙이기 위해 고개를 반대로 돌려 얼굴을 가리고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싫으면 말고... 난 그냥 네가 자꾸 해달라고 하니까 생각나서 말해본 거니까. 네가 맨날 더럽게 못한다고 욕하면서 계속 해달라고 조르잖아.”
“못한다고 했지 욕은 안했다.”
“내가 독일어를 배운 적은 없어도 욕하는 것 정도는 알아.”
안 된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잡고 늘어지는 걸 보면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은데, 그래도 고민이 되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 루이스가 다시 한 번 벨져의 눈치를 살피려 흘긋 눈을 돌리자 이마에 손을 얹고 눈까지 감은 채 갈등하던 벨져가 입을 열었다.
“가지.”
“...정말?”
무르지 못하게 되묻자 오늘 역에서 처음 봤던 그 탐탁지 않은 눈빛이 돌아왔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다른 게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봐준다는 그 눈빛은 벨져가 타협이라는 말로 그의 고집을 꺾고 한 수 무를 때 짓는 눈빛이었다. 그의 인생에 패배는 단 한 번밖에 있을 수 없고, 그건 연애라는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생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를 이길 상대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 파렴치한 소릴 해놓고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지 마라. 가증스러우니까.”
“그래도 싫단 말은 안하네.”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물자 단정한 얼굴이 순식간에 성숙하고 야한 얼굴이 된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의 여유로운 미소에 짙은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그 얼굴을 좋아했다. 분하지만 마음이 동해 거부할 수가 없었다.
홧홧하게 끓어오르는 욕정에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를 감싸며 입을 맞췄다. 오늘 내내 가볍게 한 키스가 아니라, 혀를 얽고 몰아붙이며 육욕을 채우는 키스에 루이스가 앉은 의자가 점점 밀려났다. 더 하다간 여기서 끝까지 가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에 키스를 멈춘 벨져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아 닦고 파르르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을 보다 일어섰다.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 뒀다.”
“그럴 것 같았어.”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군. 내 생일인데 말이지.”
“네 생일은 내일이야. 뭐, 그래도 싫지 않잖아?”
다 안다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에 울컥한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커튼 뒤로 끌어냈다. 벽에 밀어붙이고,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거친 키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스가 벨져를 힘껏 밀어냈다.
“얼마나 잘 빨아주는지 기대하지.”
“하아, 하.... 나 완전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숨을 쉬느라 몸을 숙이고 헉헉거리던 루이스의 말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자초해놓고 이제 와서 결과를 두려워하는 게 귀엽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그보다 더 한심한 건 그 유혹에 넘어간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을.
“하, 그걸 이제 알았나?”
“못 무르겠지?”
“절대.”
숨을 고른 루이스는 몸을 일으키며 속으로 한동안 고생 좀 하겠네. 하고 체념했다. 아무렴, 벨져 홀든에게 오페라를 뺏으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1/12 Night / Hotel
공기가 뜨겁다. 정신없이 뒹굴고 난 뒤에 찾아오는 노곤한 탈력감과 해방감, 뜨거운 열기가 돌던 몸이 식는 감각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리 신체 강화 능력자라지만 쓸데없이 건강해서 그에 맞추려면 감당이 안 됐다. 하기 전에 그렇게 조르던 것도 해줬는데, 그래도 따라가기 벅차다.
눈 위에 팔을 얹고 숨을 고르던 루이스는 조금 진정이 되자 팔을 내리고 느릿하게 호텔 방을 훑었다. 뻗어버린 저 대신 물을 가지러 간 벨져의 조각상같은 나신에 눈이 머물다, 그 옆에 있는 시계가 시야에 들어오자 뜨겁게 달궈져 잠시 흐려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컵에 물을 담아 침대로 돌아오던 벨져는 루이스의 시선을 따라 시계를 보고 잠시 멈춰 섰다가 돌아와 컵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가운 하나 안 걸친 몸으로 친히 물 심부름을 다녀온 애인에게 심부름 값으로 뽀뽀를 선사한 루이스는 컵을 비우고 삐거덕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단기간에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혹사당한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고, 벌서부터 턱이 아프지만 이것까지 벨져의 손을 빌리기는 좀 그렇다.
굳이 못 할 건 없지만,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라고 할까. 기왕 준비한 선물은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직접 주는 게 도리였다. 루이스는 들고 온 가방을 뒤지며 출발할 때부터 고이 모셔온 선물을 찾았다.
“아까 분명히 넣어놨는데.... 아, 찾았다. 여기.”
벨져는 루이스가 건넨 작은 박스를 받아 들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을 썼는지 벨져가 아는 범위의 브랜드는 아니어도 제법 모양새를 갖춘 포장이었다.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형편도 안 되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의아해진 벨져는 우두커니 서서 손 안에 딱 들어오는 사이즈의 박스에 들어갈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생일선물.”
벨져가 상자를 들고만 있자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로 돌아간 루이스가 이불을 끌어안고 말을 보탰다.
“기대할 만한 건 아닌데.... 싸구려라고 뭐라 하지만 마.”
값에 상관없이 뭔가 해주고 싶다는 그 마음이 갸륵하다.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벨져는 루이스의 옆에 앉아 상자에 감긴 리본을 당겼다. 매듭을 풀고, 상자를 열자 안에서 나온 것은 자수정 커프스 한 쌍이었다. 그의 말대로 벨져가 쓰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나름 신경을 썼는지 투명하고 진한 레드와인 색 수정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네가 쓰는 거에 비할 건 못되겠지만.... 그래도 뭔가 주고 싶었어. 난 늘 받기만 하잖아.”
“원래 이런 건 선물한 사람이 해주는 거 아닌가?”
머쓱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또 귀여우니 상관없지만 너무 눈치를 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아 말을 돌리자 루이스가 커프스를 가져가려다 피식 웃었다. 그나 저나, 실오라기 한 올 안 걸친 차림이라 커프스는 소용이 없었다.
“내일.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뭐, 나는 지금 차려입고 나가서 산책해도 상관없다만.... 정성이 갸륵하니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벨져는 커프스를 다시 상자에 넣고 처음 받았던 그대로 리본을 곱게 묶어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상자만 봐도 흐뭇해 입꼬리가 올라가고, 당장이라도 어디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의 입꼬리도 함께 올라갔다. 평소보다 더 기고만장해져서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인다. 모름지기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쁘게 하는 법이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흐뭇하게 벨져를 보던 루이스는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하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미안한데, 나 이제 도저히 안 되겠어.”
“벌써 지치다니. 영웅 체력이 말이 아니군.”
“알잖아. 밤샘에 장거리이동에, 하루 종일 벨져 홀든 경 비위 맞추느라 힘들었다고.”
“비위만 맞춘 게 아닐 텐데. 재미를 본 건 네 쪽 아닌가?”
“그래, 네가 다 맞아. 그러니까 나 좀 놔주라....”
“할 일 다 했다는 투군.”
몸에 힘이 빠지자 반쯤 감긴 눈이 더 무거워지고 말이 느려졌다. 그냥 보기에도 슬슬 한계였기에 벨져는 루이스를 위해 전등을 껐다. 루이스의 옆에 모로 누워 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벨져를 향해 돌아누워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이주정도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동갑이 된 기분 어때? 뭐, 워낙에도 형 취급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즐겨봐.... 그러다 친구도 먹고... 그러는 거지.”
“헛소리 하는군. 자라.”
벨져는 루이스의 눈 위에 손바닥 얹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이고, 벨져의 손에 눈을 감은 루이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응.... 너도, 잘 자.... 생일 축하해. 벨져.”
“...그래.”
이불을 끌어당겨 꼼꼼히 덮고 루이스를 끌어안은 벨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이 무척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1/12 Happy Birthday / Alles Gute zum Geburtstag
갓갓소재 제공해주신 초루님께 감사드립니다.
벨져 생일 축하해! ㅠㅇㅠ 노모에 벤쿠버타임 하느라 힘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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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호그와트AU
릭 7학년/루이스 3학년
기숙사에 남은 인원을 체크하고, 첫 호그스미드 방문에 들뜬 3학년을 배웅한 후플푸프 기숙사의 반장 릭 톰슨은 손을 내리고 양팔을 감쌌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서리고, 방한 마법을 건 망토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데도 춥다.
처음 호그스미드를 방문할 쯤이면 눈이 펑펑 내리긴 하지만 올해는 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서, 벽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아야지. 숨겨놓은 도넛과 코코아를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하는데 얼어붙은 분수대에서 까딱이는 발이 보였다.
“음? 루이스?”
“아, 릭. 안녕하세요.”
“왜 여기 혼자 있는..... 아.”
코며 뺨이 빨개졌는데도 시무룩한 얼굴로 발만 구르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본 릭은 이런 날 혼자 눈을 맞고 있는 이유를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아 출신에, 성도 없는 아이는 호그스미드 방문 허가증에 보호자 사인을 받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여기 계속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저는 괜찮아요. 가보세요.”
“음....”
완고한 대답에 릭은 잠시 난처해하다가 분수대에 쌓인 눈을 치워 자리를 만들고 루이스 옆에 앉았다. 말을 걸 때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내내 발아래 쌓인 눈만 보고 있던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올려다봤다.
빨개진 뺨은 또래 아이들보다 홀쭉하지만 그래도 어린 티가 나고, 땡그랗게 뜬 빨간 눈은 꼭 유순한 토끼 같다. 마법사와 토끼는 그리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릭은 3학년이 됐는데도 아직 제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루이스를 향해 씩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럼 옆에 있는 건 괜찮지?”
“...감기 걸릴 텐데요.”
“하지만 너는 여기 계속 있고 싶고, 나는 널 혼자 둘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루이스는 릭의 말에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이며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뺨과 마찬가지로 빨개진 손끝을 본 릭은 장갑을 벗어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괜찮긴. 이렇게 차가운데. 이러다 동상이라도 걸리면 병동에서 꼬박 일주일은 누워있어야 할 걸?”
“.......”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을 꼭 잡고 문지르다 호 입김을 불자 어떻게든 손을 빼려던 루이스가 얌전해졌다.
“요즘은 좀 어때?”
“괜찮아요. 작은 홀든이 좀 귀찮게 굴긴 하지만.”
“하하. 그 애한텐 꽤 충격이었을 테니까.”
조금 미지근해진 손을 잡고 웃음을 터트린 릭은 루이스의 망토에 달린 후드에 손을 뻗었다. 후드에 묻은 눈을 털고, 눈만 보일 정도로 뒤집어씌우자 루이스가 몸을 움츠린 채 시선만 올려 릭을 쳐다봤다. 눈치를 보면서도 밀어내려고 하지 않는 게 정말 작은 동물같아서 귀엽다. 맘 같아선 꽉 끌어안고 싶은 걸 꾹 참고, 릭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그게.... 사실 도넛이랑 코코아를 준비해놨는데 그 생각이 나서.”
“그럼 얼른 가보세요.”
“혼자 먹기는 많고....”
어떻게 권해야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따라올까. 릭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릭을 빤히 올려다보던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습니다.”
“아니, 뭐.... 그냥 내가 신경 쓰여서 그런 거니까.”
릭이 손사래를 치자 루이스가 언제 울적했냐는 듯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분수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루이스 같은 학생을 위해 학교에서 나눠준 망토는 졸업생에게 기증 받은 걸 해마다 쓰는 것이다 보니 낡고 해진데다 루이스한테 두 사이즈는 컸지만, 뱅글 돌 때마다 소매며 자락이 펄럭거리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저 나이 대에는 금방 자라기 마련이고, 덕분에 상급생들은 저학년 학생들이 몸보다 더 큰 망토를 입고 다니는 걸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일상이다. 릭도 별로 다를 바 없는 상급생이었고, 루이스는 그 학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였다. 그러니 시선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 갈까.”
릭의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에 언 몸을 일으키며 작게 신음한 릭은 엉덩이를 털고 앞서 걷는 루이스의 뒤를 따랐다. 보폭의 차이가 있으니 따라잡으려면 금방 따라잡겠지만 뒤에서 눈밭을 총총 걸어가는 모습이 귀여워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꽁꽁 언 몸으로 급히 움직이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이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왓, 루이스!?!”
냉큼 다가가자 씩씩하게 몸을 일으킨 루이스가 입을 앙 다문 채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마저도 소매가 너무 길어 손등이 아니라 소매가 다 문지르는 모양새였지만, 잠깐 마음을 놓은 사이 벌어진 일에 릭은 안절부절 못 하고 허공에 손만 내저었다.
“벼, 병동에...!”
“괜찮아요.”
“그래도....”
넘어진 게 아파서인지, 아니면 추위에 얼어서인지 빨갛게 언 뺨이며 눈가가 안쓰러워진 릭은 혼자 일어나 망토에 묻은 눈을 터는 루이스를 바라보다 떠오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읏. 저 정말 괜찮아요, 혼자....”
“가끔은 그냥 받기도 해야지. 어차피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고.”
루이스를 안아든 릭은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양팔로 안아든 루이스의 몸은 눈으로 보고 가늠한 것보다 더 가볍고 작아서,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만했던 것 같은데. 2년 전, 어느 날인가 제 몸만한 책을 안고 넓은 복도를 헤매던 신입생을 떠올린 릭은 얌전히 안겨있는 루이스를 고쳐 안았다.
“전에.”
“응?”
“처음 만났을 때도 도와주셨죠. 이렇게는 아니었지만.”
무슨 얘긴가 했더니, 루이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기억해준 게 기쁘면서도 쑥스러워진 릭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루이스는 머뭇거리다 눈을 내리깔고는 양손으로 후드를 꼭 잡아 내려 얼굴을 가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에 릭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쓰며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루이스를 안은 채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큰일이고, 이제 겨우 마음을 조금씩 열어주는 아이에게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응? 아니. 뭐, 별로 힘들지도 않고.”
“아뇨. 그.... 그날.... 도와주신 거요.”
“하하. 그건 더 인사 받을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릭의 사람 좋은 미소에 루이스는 작게 숨을 토했다. 나름 용기를 낸 거였는데 상대가 너무 아무렇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망설이는 사이 눈이 쌓인 교정을 지나 복도에 다다르고, 실내로 들어가자 공기의 온도가 바뀌었다. 평소 같으면 왁자지껄할 홀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호그스미드에 간 학생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계속 이렇겠지. 혼자 있는 것도, 조용한 것도 나쁘지 않지만 다들 즐겁게 노는 동안 소외되는 건 역시 외롭다. 울적해진 루이스는 릭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몸에 주고 있던 힘을 뺐다. 빠른 걸음도 걸음이지만 낯선 높이와 그보다 더 낯선 온기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후플푸프 기숙사 휴게실이 있는 부엌 근처 오른쪽 복도에 도착한 릭은 앓는 소리와 함께 루이스를 고쳐 안았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통을 두드리려면 아무래도 손이 필요하기 마련이었고, 그러려면 루이스를 한 팔로 안아야 했다.
“저, 이젠 제 발로 서도 되는데요.”
“아, 그럼 잠시만....”
릭은 루이스가 바닥에 발을 대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손을 거뒀다. 릭이 너무 조심스러운 나머지 덩달아 긴장한 루이스는 후플푸프 기숙사로 통하는 통들 사이에서 쭈뼛거리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릭 톰슨이 후플푸프 중에서도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라지만 같은 기숙사 학생도 아닌 루이스를 이렇게 챙기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고, 다른 기숙사 학생이 휴게실까지 들어가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괜찮아. 너라면 다들 반겨줄 테고, 나도 있으니까.”
“하지만....”
루이스가 망설이는 사이 리듬에 맞춰 통을 두드린 릭은 다시 루이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소중하게 안아드는 게 아니라 어깨 위에 감자포대처럼 들었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건 여전했다.
“으왓! 릭!”
“하하! 래번클로의 영웅을 납치해왔다!”
“릭?!”
호탕하게 웃으며 휴게실에 들이닥친 릭 덕에 조용한 후플푸프 휴게실이 소란해지고, 당황한 루이스가 뒤를 돌아보며 릭을 찾았으나 야속한 뒤통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울상을 지으며 릭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웅크리자 릭이 웃으며 루이스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오, 뭐야 뭐야.”
“반장이 영웅님을 납치해왔대!”
“뭐? 어디어디?”
릭은 곤란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이스를 어깨에서 내려주는 척 품에 꼭 끌어안았다.
“저, 저기요?”
“하하하.”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루이스를 망토로 꽁꽁 감싼 릭은 불이 지펴진 벽난로 앞으로 가 두사람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쉬고 있던 다른 학생들도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어느새 간식 파티가 벌어졌다. 매일 나오는 식사도 훌륭한 정찬이지만 본 적도 없는 신기한 과자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버터 맥주가 나오고, 루이스는 다소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후드를 꼭 뒤집어 쓴 채 릭이 건넨 버터 맥주를 홀짝거렸다.
기숙사마다 성향이 다른 것도 있겠지만, 후플푸프 기숙사는 건물의 장식부터 어딘가 조금 더 따스한 느낌이다. 온화하고 평화로운데다 다들 친절하다. 마음이 편해진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올려 릭을 찾았다.
“이 정도면 호그스미드 방문 못지않은 후플푸프 방문이었지?”
“네. 감사해요. 그런데....”
“응?”
릭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 망설이는 루이스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몸을 낮추며 자연스럽게 손을 루이스의 허리에 두르자 꿈지럭거리던 루이스가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들어 릭을 올려다봤다.
“제가 여기 온 것 때문에 릭 씨가 곤란해지진 않을까요?”
웬만한 미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며 귀여운 말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두근거린 릭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약간의 불안과 걱정이 섞인 표정이 가련해서 당장이라고 꼭 끌어안고 싶은데, 그랬다간 당장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루이스를 끌어안는 대신 릭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모른 척 하며 대답했다.
“아, 하하. 그거라면 걱정 마. 네가 나쁜 장난을 치러 온 것도 아니고 내 초대를 받아서 온 거니까. 다들 그런 걸 문제 삼지는 않을걸. 래번클로가 널 너무 소홀히 한다는 걸 문제 삼는다면 모를까.”
“그건 그냥 제가 혼자....”
“알아. 우리는 후플푸프니까, 고작 그런 걸로 널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럼 슬슬 갈까. 이제 다들 돌아올 시간이기도 하고.”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스의 망토를 단단히 여민 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완전히 어린 애 취급이지만 나름 익숙해진 루이스는 다시 훌쩍 높아진 높이에 릭의 목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과보호 받는 것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고, 소중히 대해주는 것도 좋지만 역시 조금 부끄럽다. 쑥스럽고,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기분에 주먹을 꼭 쥐자 릭이 피식 웃으며 후드 위로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뭐가요?”
“뭐든.”
따스한 봄 햇살을 머금은 듯한 릭의 미소에 루이스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꼭 햇살 같은 사람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 사람 주변은 언제나 봄처럼 따뜻할 것 같고, 그래서 자꾸 기대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멍하니 눈만 깜박이자 릭이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다 엷은 미소를 지었다.
“릭 씨는....”
“응?”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심코 입을 열었던 루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릭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아빠까지는 아니더라도, 형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릭이 더 마음을 쓸 게 분명했으므로 루이스는 얼버무리며 릭의 목을 더 꼭 끌어안으며 뺨을 부볐다.
그 자그마한 행동이 릭의 가슴을 더 뿌듯하게 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꼭 안은 채 한적한 복도를 걸어 래번클로 탑으로 향했다.
* * *
“루이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네.”
“...안녕하세요. 릭.”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릭은 추운 복도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작긴 해도 안 자라는 건 아닌지, 짧은 바지 밑단 아래로 하얀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목도리에 귀마개까지 꽁꽁 싸매고 다니는 계절에 짧은 바지가 좋을 리 없지만. 릭은 차가운 맨살을 덥혀주고 싶은 걸 참고 루이스의 옆에 앉았다.
생각이 많은 아이라 이번엔 또 무슨 고민일까 짐작이 가질 않았다. 래번클로의 고민이라고 하면 이상하고 해괴한 소리거나, 보통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게 보통이지만 시무룩하니 풀이 죽은 얼굴을 보면 그런 학구적인 고민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지레짐작이라 릭은 무슨 일이냐 묻는 대신 루이스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때로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탤 요량으로 루이스 옆에 조금 더 붙어 앉은 릭은 내리는 눈을 가만히 지켜봤다. 함박눈이 내리는 호그와트의 교정은 조용하고, 스노우볼 안에 있는 자그마한 세상처럼 아름답다.
내리는 눈송이를 잡으려 손을 내밀자 영영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쯤은 웅얼거리는, 자그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이라도 놓쳤다간 이 신중한 영웅님이 내보인 마음을 다시 꽁꽁 감춰버릴 것 같았다.
“저는 래번클로랑 안 맞나 봐요. 차라리 후플푸프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정말 그랬으면 지금쯤 래번클로 학생들은 죄다 문 밖에 나앉은 신세겠군.”
“저는 진지하다구요.”
릭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생각에 잠긴 루이스를 보다 작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얌전히 머리를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당황해서 그런 거지, 싫은 건 아닌 것 같다. 그 모습이 정말 작은 동물을 보는 것 같아서, 릭은 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꾹 누르고 조심스럽게 루이스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여느 때처럼 부드럽지만 오늘은 철없는 어린애를 어르는 것 같다. 괜히 심통이 난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쌜쭉하게 내밀었다. 하지만 원망스러운 것과 별개로 머리를 만져주는 건 좋다. 크고 따뜻한 손이 머리를 어루만지면 꼭 사랑받는 것 같았다.
잔뜩 풀이 죽어서 얌전해진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릭은 둥근 뒷머리까지 어루만지며 토닥이다 무심코 루이스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려다 멈칫했다. 아무리 귀여워도 친동생이 아닌 이상 이건 과한 스킨십이다. 릭이 손을 멈추자 루이스가 왜 멈추느냐는 듯 고개를 들어 릭을 바라봤다. 크고 동그란 눈은 토끼를 연상시키고, 살짝 붉어진 뺨과 눈가가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바람에 릭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꽤 유명한 모자걸이였지.”
“몇 분이었나, 족히 오 분은 걸렸던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모자가 꽤 정성을 들여 고른 거야. 물론 네가 원했으면 후플푸프에 배정해줬겠지만... 모자가 그렇게 고민 끝에 한 결정이라면 래번클로로 가는 게 너한테 더 좋은 거겠지.”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죠.”
말을 하는 사이 진정한 릭이 웃으며 루이스를 바라봤다. 작은 동물이 의심을 거두고 마주하는 것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하는 사이 뾰로통하게 대답한 루이스가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래. 네가 후플푸프였다면 지금처럼 유명해지진 않았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정직하고 올바른 길을 추구하지만, 다른 기숙사처럼 특출나게 눈에 띄지 않잖아?”
“릭 씨는 순간이동으로 엄청 유명하잖아요.”
루이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 말에 쑥스러워진 릭은 귓가를 긁었다. 이래서야 위로를 해주려다 되레 칭찬만 받는 것 같고, 상급생이자 반장 체면이 말이 아닌 것도 같다. 애초에 반장 체면 같은 걸 생각하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멋진 선배이고 싶은 마음에 릭은 손을 내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음. 그건 나도 몰랐던 재능이고.... 다른 기숙사에서 지냈다면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을걸. 난 그리핀도르처럼 대담하거나 용감무쌍하지도 않고, 슬리데린처럼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처럼 똑똑하지도 않아. 언제나 뒤에 한 발 물러서있는 편이지. 그래서 사실은 네가 부러워. 어린 나이에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긴 쉽지 않지.”
“...아무리 그래도 다른 기숙사 애들이 릭 씨처럼 말해주진 않을 거예요.”
“하하하. 그건 그렇지. 하지만 다들 널 격려해주고 싶을 거야. 오히려 나는 좀 멋이 없는 편이지.”
“그래도 전 릭 씨가 해주는 게 좋아요.”
“응?”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이스를 바라봤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은 루이스는 릭을 마주보는 대신 그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따뜻하고.... 멋있진 않아도, 진심이 느껴지니까요.”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쳐다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게 귀엽다. 릭은 루이스가 제 입과 광대가 꿈틀거리는 걸 못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얘는 왜 이렇게 귀엽지? 끌어안아도 되나? 역시 안 되겠지? 루이스가 후플푸프 학생이었으면 모른 척 한 번은 끌어안아 봤을 텐데. 릭은 뿌듯하게 차오르는 쑥스러움과 기쁨,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꾹 누르다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이런 건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나도 쑥스러운걸.”
“...진심이에요.”
“고마워.”
“저도요.”
“그래. 그럼 이제 갈까?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곧 크리스마스인데 컨디션을 망쳐서 병동에만 누워있으면 안 되잖아?”
릭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래번클로의 작은 영웅님과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즐겁지만 눈발도 거세지고, 이렇게 추운 복도에 더 있었다간 정말 병동 신세를 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야 방한 마법이 걸린 목도리며 장갑, 스웨터로 중무장을 했다지만 루이스의 차림새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런 날에 적합하지 않았다.
곧 시험도 있고, 안 그래도 작은 아이가 아파서 누워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릭은 제 몸보다 큰 책을 안고 강의실을 찾아 복도를 헤매던 신입생 시절의 루이스를 떠올리고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는 부드럽고 자상한 미소로 손을 내민 릭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릭의 예상대로 루이스의 손은 맨손으로 눈싸움을 한 것처럼 차가워서, 릭은 루이스의 손을 지긋이 문지르며 작은 손을 데웠다.
“릭 씨한테는 아직도 제가 1학년으로 보이나 봐요.”
“하하. 나는 이제 졸업반인걸.”
“제가 시간을 뺏은 건....”
“그럴 리가.”
신중하고 침착한 건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이겠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눈치를 보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안쓰럽다. 릭은 루이스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발을 옮겼다. 졸업도, 학교를 떠나는 것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제 이렇게 손을 잡고 걸을 기회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이 시간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호그와트에서 보낸 지난 6년은 분명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릭은 그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을 입 밖에 꺼내는 대신 루이스의 손을 꼭 잡고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늦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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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Two Pianos
존잘님께 선물로 드렸던 벨루 피아노 콩쿨AU
낙엽이 떨어지는 11월의 어느 날. 대기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소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기실에 비치된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 연주자가 실수를 하고 눈에 띄게 흐트러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따분한 탓이 컸다.
아무리 학생부 1차 예선이라지만 지금 연주자나 그 전이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시시하고, 진부하고, 따분하다. 앞으로 이어질 연주라고 별로 다르지 않을 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소년은 팔짱을 풀고 일어났다.
“벨져.”
“시시해서 더 못 봐주겠군. 더 듣다간 내 귀까지 썩겠어.”
동세대에선 견줄 사람이 없다는 유망주, 데뷔 이레 근 10년간 출전한 대회마다 우승을 휩쓴 홀든의 벨져. 자신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천재. 그 외에도 소년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많았으나 벨져는 개의치 않았다.
벨져 홀든에게 그 정도 찬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고, 본디 가지지 못한 이들은 저보다 나은 이를 질시하는 법이니 뒤로 무슨 소리가 들려도 그저 덤덤했다.
대기실을 나온 벨져는 서늘한 공기에 손으로 팔을 감싸 팔짱을 꼈다. 놓고 온 재킷이 생각났으나 못 견딜 정도로 추운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간들 껄끄러울 뿐이니 조금 걷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이제 막 네 번째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했으니 제 순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인터미션 전에만 들어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복도를 걷는데 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긴장만 안 했어도...!”
“됐어. 어차피 홀든 때문에 준우승밖에 못 하는 콩쿠르였잖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못 이긴다고.”
“그래그래. 어차피 다들 힘 빼고 할 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 잘해봤자 2등이고.”
“그 새끼는 이미 가진 트로피도 많으면서 왜...! 좀 양보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왜 그렇게 다 가지지 못해서 안달이야? 뻐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길....”
누군가 했더니, 두 번째로 시작해서 악보를 까먹더니 결국 심사위원의 커트로 연주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그만둔 연주자다. 센스가 부족한 건 둘째 치고 자신감이 없는 건 다 연습 부족이다. 머리가 나빠도 몸이 반응하도록 확실히 숙지했으면 그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야말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데다, 저 좋을 대로 남 탓을 하는 것까지 총체적인 난국이다. 그야말로 평가 대상 외. 저런 정신머리로는 뭘 해도 그저 그런 정도겠지. 격이나 급을 따질 것도 없다. 벨져는 작게 혀를 차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심한 패배자들 사이를 당당히 걸어가는 건 입상 발표 때나, 시상식 때면 충분하다. 벨져는 적개심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지뢰밭에서 자신을 뽐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손이라도 씻고 갈까. 대기실 주변 화장실은 이미 긴장과 압박감을 못 견딘 녀석들로 가득했기에 벨져는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녀석이 하나.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급하게 빌린 티가 나는 정장에, 사이즈도 맞지 않는 낡은 구두. 거기에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로 물을 뒤집어쓰고도 떨리는 손까지.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오는 행색에 그나마 봐줄만한 건 티 없이 맑은 얼굴뿐이다.
대충 훑어본 것으로 파악을 마친 벨져는 물을 틀어 손을 적셨다. 가시지 않는 시선에 살짝 눈을 흘기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 어설프고 같잖은 반응에 벨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샜다.
“못 치겠으면 시간 뺐지 말고 돌아가라. 어차피 도망친다 한들 너 같은 패배자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주제도 모르고 각오도 없이 콩쿠르에 발을 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그게 당장 제출할 상이 필요하거나, 콩쿠르에 참가하는 비용도 아까운 처지라면 더더욱.
평소 같으면 먼저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타인에게 간섭하는 일도 없지만 어줍잖은 치기로 긴장에 벌벌 떠는 멍청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말이 나왔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물에 젖어 저를 바라보는 눈과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을 뿐이다. 차가운 물밖에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몰라도, 손끝이 빨개질 정도로 차갑게 굳은 손가락으로 제대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벨져의 신랄한 말에 이름 모를 소년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까와 그리 다를 것도 없는 반응에 김이 빠진 벨져는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았다. 그렇게 본다고 뭐가 해결되지도 않는데, 되받아치지도 않다니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기껏 무대에 올라가서 피아노 건반 한 번 못 쳐보고 내려오는 구제불능. 자신의 과오와 연습 부족은 나 몰라라 하고 남 탓을 하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자기연민에 빠지는 게 더 답이 없다. 아까 지나치며 들은 말을 떠올린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대충 뒷주머니에 넣었다.
벨져는 찝찝하고 꿉꿉한 짜증을 걸음에 실었다. 복도를 울리는 벨져의 구두 소리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고, 드디어 되받아치려는 건가 싶어 멈춰 서자 따라온 그가 여전히 희고 맑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저기, 손수건 떨어트렸어.”
뭔가 했더니, 정말이지 멍청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벨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도로 무시하면 적당히 알아들을 법도 한데 따라붙은 시선은 걸음을 옮겨도 가실 줄 몰랐다. 벨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주기 위해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연주를 앞두고 괜한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고, 주제도 모르는 게 성가시게 엉겨드는 것도 딱 질색이었다.
“흥. 백기 대신 써라. 포기할 게 아니라면 그 얼어붙은 손부터 어떻게 하도록.”
벙찐 얼굴을 뒤로하고, 벨져는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릴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더 이상 신경을 쓰는 의미도 가치도 없었다.
쇼팽 에튀드- Op.10 No.4.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벨져는 가볍게 숨을 토하며 목을 죈 보타이를 풀었다. 시상식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다시 맬 시간은 차고 넘친다. 남은 건 지루하고 감흥 없는 연주 뿐.
벨져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딛은 순간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다시 걸음을 내딛다 고개를 돌렸다.
분명, 전에 없이 깨끗한 음색이지만 뭔가 달라. 적어도 제가 아는 동년배 중에 이런 피아노는 없다. 벨져는 다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른 걸음은 이내 뜀박질이 되고, 열린 커튼 사이로 비치는 무대 조명에 벨져는 계단을 뛰어 올랐다.
깨끗한 렌토는 온데간데없는 격정적인 알레그로. 몰아치는 바람을 휘감은, 차가운 겨울.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던 상대라면, 그건 아마도.
열린 커튼 너머 칠흑으로 빛나는 피아노 건너편을 바라보며 벨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스친 예상대로, 그가 있었다.
맹한 얼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무표정과, 그의 손가락을 타고 울리는 피아노 소리. 벨져는 숨을 옥죄는 연주 앞에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는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제가 누른 건반이다. 앞의 연주자 모두 똑같이 쓴 피아노인데도 그의 손끝에 닿은 건반은 전혀 다른 피아노인 양 소리가 다른 소리를 냈다. 마치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강렬하게 울리며 청중을 휘어잡고 그들의 심장을 묶는다.
몰아치는 바람과 같은 주선율은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옮겨 가고, 이어지는 에스프레스에 숨이 멎는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피아노와, 감정이라곤 내비치지 않는 무표정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그. 몰아치는 감정과 그 모두를 담아낸 소리에 벨져조차 넋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테크닉이 좋아도, 아무리 어려운 곡을 들고 나왔더라도, 기계처럼 악보의 지시를 정확히 지키는 연주를 해도 이걸 넘어설 수 없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음표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린다.
겨울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미스터치 하나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연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벨져는 커튼을 움켜쥐었다. 졌다. 이름도, 출신도 모를 녀석의 연주에 압도당해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패배를 시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사위원의 평이 어떻든 벨져 홀든이 졌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쇼팽 에튀드- Op.25 No.11 '겨울바람‘. 분하게도, 저 지독히 무신경한 얼굴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래. 아무리 쫓은들 바람을 손에 쥘 수는 없겠지.
벨져의 헛웃음과 함께 소년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에서 떨어지고, 연주를 마친 그가 숨을 토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숨은 안도와 후련함을 담고 있지만 그 눈은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시린 동토에 머물러있다. 먼 곳을 그리는 그 눈빛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 아래 일렁이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뜨겁고, 묵직한, 호승심을 닮은 무언가. 그 누구도 준 적 없는 감정에 벨져는 커튼을 움켜쥐었던 손을 제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옷 위로 닿은 손이 뜨겁다. 쓰러트릴 상대가 있다. 잠시 느낀 수치와 굴욕은 몇 배로 갚아주면 된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벨져는 그를 향해 보내는 박수 소리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장장 10여 년간 이어진, 오만하고 고고한 독주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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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업로드 순서랑 시간의 흐름이 안 맞아서 넘버를 붙이진 못하고 제목을 통일했습니다ㅠㅇ ㅠ
정리하는 김에 이 AU 첫연성이었던 Notes를 봤는데 역시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쓴 원고랑 시간 배열이나 방향이 많이 다르더라구요ㅠㅠ
해가 중천 가까이 오른 아침, 벨져의 기상 시간에 맞춰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온 루이스는 알아봐달라는 듯 부스럭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글을 발견하곤 잠시 망설이다 그를 향해 다가갔다.
“거기서 뭐하세요.”
“이야, 하필이면 여기서 또 보네?”
“막내 도련님과 마주치는 장소 치고는 협소하지만, 네. 또 뵙네요.”
“하하, 원래 몰래 먹는 게 더 맛있다잖아?”
식탁 아래서 기어 나온 이글은 들고 있던 파이 조각을 내려놓고 손을 털며 싱크대 옆에 앉았다. 자유분방하다 못해 한 소리를 들어도 크게 들을 것 같은 행동거지였지만 루이스는 그를 타이르는 대신 찬장을 열어 찻잎을 꺼냈다.
“보통은 그러다 들키면 혼쭐이 나는데요.”
“음. 그럼 나는 보통이 아닌가보지. 그러는 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빈 주전자에 물을 넣었다. 이글은 발을 흔들다 악동처럼 씩 웃고 루이스의 등 뒤로 다가와 서성였다.
“뭐 드릴까요?”
“아니? 너보단 내가 여길 더 잘 알걸?”
“그럼 왜 그러세요.”
“혹시 그거 알고 있나 해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기에 루이스는 이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재치와 총기로 반짝이는 이글의 눈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무심코 벨져를 떠올렸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벨져는 결코 이런 눈을 하지 않는다. 그와 꼭 닮은 색을 띤 눈은 재기와 총기로 빛날지언정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차갑게 식은 눈과 달리 입가에 띠운 예쁜 미소는 완벽했기에 더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위험하기로 치면 벨져보다 수십 배는 더 위험하다.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리자 이글이 가볍게 미소를 물고 있던 입술 한 쪽을 올리며 키득거렸다.
“아, 정말. 그런 얼굴 하지 마. 무슨 장난 하나를 못 치겠네.”
“고작 장난 하나 치자고 이런 수고를 들일 것 같진 않은데요.”
“그새 벨져가 옮았어? 하긴, 우리 작은 형 비위 맞추고 살려면 보통 눈치로는 안 되지. 보기보다 더 감이 좋네.”
한량처럼 굴던 이글은 그 말을 끝으로 미소를 지웠다. 가벼운 태도가 가시자마자 오싹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와 본색이 드러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 작은형, 곧 결혼해.”
“네?”
머리를 세게 때리는 듯한 충격에 루이스는 누굴 대하고 있는지도 잊고 되물었다. 이글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는데,
“꽃이라는 건 여름 한철 장사잖아.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꽃도 지고 나면 쓸모가 없지.”
루이스는 입술을 물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꽉 쥔 주먹에 핏줄이 불거지고 짧게 자른 손톱이 파고들었으나 숨 한 번 제대로 쉬기 힘든 루이스가 주먹을 펴는 일은 없었다. 숨과 울음 비슷한 묵직한 덩어리를 목 아래서 삼킨 루이스는 무거운 입을 뗐다.
“그럼, 그럼 그 분은요.”
“누구? 아, 형수 될 사람? 글쎄. 그건 너한테 달렸지.”
너에게 달렸다. 다시금 무겁게 짓누르는 말의 무게에 루이스는 숨을 눌러 삼켰다. 차갑고 무덤덤한 시선이 저를 책망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아니라는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작은형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못 되니까 사랑은 아니어도 존중은 하겠지. 그런 허울뿐인 자리라도 감지덕지인 사람은 널렸고. 그것도 네가 없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야. 굳이 남겠다면야 뭐.... 그런 거지. ”
아무리 헌신적인 사람이라도, 아무리 배려와 양보가 넘치는 사람이라도 자기 남편이 다른 사람을, 그것도 출신도 모를 하인을 옆에 두고 끼고 도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가만히 있을 귀족 아가씨가 어디 있을까.
결국 벨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집안의, 가장 별 볼일 없는 사람을 고르게 될 것이다. 홀든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그런, 남은 것이라고는 과거의 영광뿐인 집안의 여자를 들이고 제대로 눈길 한 번 안 준 채 그렇게. 하지만 입을 막아도 결국은 탄로 나겠지. 벨져 홀든의 고아한 명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테고, 더러운 추문만 남을 것이다.
그게 바로 벨져 홀든의 곁에 남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대가다. 루이스는 찬연히 빛나고 있는 벨져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그래서 그녀도.
“루이스. 벨져를 사랑해?”
루이스는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통과 회한, 슬픔 같은 감정을 씹어 삼키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진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러니까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투덜거려 봐도 답이 없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 싶었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마음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맞닥뜨리게 될 현실에 대해 얘기한 것뿐인데 못할 짓을 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못된 장난은 하고 나면 즐겁기라도 하지. 좋아질 기색이 없는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던 이글은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좀 생각해봐. 너 정도면 다른 곳도 얼마든지 갈 수 있잖아. 꼭 벨져 옆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한 눈치가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은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다 축 쳐진 루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 탓이 아니야. 배신은 더더욱 아니고.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지. 넌 최선을 다했잖아.”
루이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 없지.”
이글은 방금 루이스가 웃었던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다. 그 성격에 루이스가 떠나는 걸 배신이라 여기지 않을 리 없고, 그 자존심에 상처를 받지 않을 리도 없다.
허울뿐인 빈말이 통하기엔 이미 벨져 홀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버린 뒤인데다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네 탓이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말이 듣고 싶었던 때도 있었죠.”
“응?”
“그런데 그런 건 하나도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쳐왔는데.”
웃음 대신 쓰디 쓴 고통을 되새기는 얼굴로 뜻 모를 말을 하는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이글은 그에게 얽힌 사연을 캐묻는 대신 그에게 말을 맞췄다. 본인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더라도 사람과 돈을 쓰면 평범한 사람의 사연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고, 당장 눈앞의 사람이 하는 말이 더 중한 법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해보려고?”
“...모르겠네요. 이제는 더 갈 곳도 없는데.”
이글이 가면을 벗은 것처럼, 그가 켜켜이 껴입은 것들을 걷어내자 침착하고 진중한 하인의 얼굴 대신 세상에 지치고 상처로 얼룩진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 본모습. 벨져가 그토록 원하는 사람의 속내를 확인한 이글은 저도 모르게 희열을 느끼며 입술을 물었다.
“에이, 그럼 그냥 다 때려 치고 나랑 갈래? 사실 나도 네가 좀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니까 벨져고 홀든이고 뭐고 다 신경 끄고, 세계를 유랑하는 거야. 어때? 죽이지 않아? 난 버린 자식이라 책임이니 기대니 그런 것들도 상관없이 펑펑 돈만 쓰는 입장이라고.”
루이스는 그제야 조금 편해진 얼굴로 웃었다.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다.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할까, 가만 두고 보기가 애처로워서 자꾸만 손이 간다.
머리가 복잡해진 이글은 벨져가 왜 루이스를 옆에 두려 하는지 더 깊이 생각하는 대신 루이스의 팔을 잡고 활기차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미 정해진 결말에 헛된 희망을 품는 게 더 괴로운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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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모티브가 된 곡입니다! 같이 들어주시면 기쁠 거예요! >//<
“루이스.”
“톰슨 씨.”
“그.... 나랑 별 보러 가지 않겠소?”
그것은 다소,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공성전을 마친 직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다가온 릭 톰슨의 말에 루이스는 콜라 캔을 든 채 눈을 깜빡였다. 공성 내내 그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은 터라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피차 수고했다는 상투적인 말을 주고받고, 그러고 나면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뿐이라 당황스러웠다.
연합의 참모인 토니와 릭은 예의 그 작전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은 모양이지만 루이스는 그와 이렇다 할 친분이 없었다. 공성이라던가, 토니를 만나러 연합에 들른 그와 오며가며 마주친 적은 있지만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별을 보러 가지 않겠냐니.
루이스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다소 느닷없는 별구경 얘기를 꺼낸 장본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뜬금없지. 나도 아오.”
스스로도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멋쩍은 눈치였으나 다른 꿍꿍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십대 소년의 첫 데이트 신청을 같은 모습이라 괜히 미안해진 루이스는 이미 정해진 답을 망설였다. 웬만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거절당할 게 뻔한데도 용기를 내 말을 건 그의 마음이 신경 쓰여 안 되겠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정말 끝내주는 곳을 찾아서, 꼭 함께 가고 싶소.”
그가 덧붙인 이유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 말을 하는 릭은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어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곤란해 하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무른 면이 맞물려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루이스는 기대에 찬 눈빛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소. 그냥 기분 전환 삼아. 응?”
겨우 뗀 한 마디마저도 거절이라기엔 영 애매한 말이었지만 릭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더 물러설 수 없게 된 루이스는 이 일의 당위성을 찾기 시작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릭 톰슨과 그의 능력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면 호감을 쌓아두는 게 여러모로 이롭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흔쾌히 따라 가기엔 미심쩍은 데다 하루 종일 이어진 격무에 지친 몸과 처리하지 못한 내일의 업무가 마음에 걸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분도 있지 않습니까?”
“음. 그게.... 퇴근하고 밤거리를 걷다 시계를 보는데 마침 이 곳 시간이지 않겠소. 그러다 고개를 올렸는데 밤하늘이 오늘따라 더 반짝이고, 그러다 보니 문득, 당신 생각이 나서.”
릭은 뜻 모를 이유를 쑥스럽다는 듯, 하지만 소중한 기억을 꺼내 보여주듯 천천히 읊조렸다. 다른 변명거리를 찾던 루이스는 그 따스한 목소리와 미소에 더 할 말이 없어졌고, 릭은 빙긋이 눈을 휘며 손을 내밀었다.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같이 가주지 않겠소?”
마주한 눈이 머금은 온기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내밀다 일순 멈춰서자 일말의 망설임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덥썩 손이 잡혔다.
“자, 그럼 가볼까!”
맞잡은 손에서 번지는 홧홧한 열기에 한 번, 차가운 제 손을 단단히 잡은 악력에 또 한 번 놀란 사이 릭이 게이트를 열었다. 발밑에 생긴 푸른 빛이 별보다 더 반짝이지 않을까 생각하던 루이스는 불현듯 든 불안감에 고개를 들어 릭을 올려다 봤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비장의 장소요. 기대해도 좋소.”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릭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놓지 않겠다는 듯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느슨하게 잡은 손이 주는 묘한 기류에 루이스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꽉 잡혀 끌려가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간질거리지는 않으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막상 손을 놓았지만 크고 따뜻한 손이 꼭 잡고 있는 감각과 미적지근한 온도가 남은 손이 왠지 모르게 허전해진 루이스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후드를 깊이 눌러 쓰며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빼놓고 순순히 놓아주는 손이 아쉽다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루이스. 고개를 들어 보시오.”
발밑에 푸른빛이 사라지고, 이공간을 이동하는 기묘한 부유감 대신 제 발로 땅을 딛은 안정감에 그 말을 따라 고개를 들자 드넓게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별과, 그 별무리를 품은 짙은 밤하늘. 망설이고 주저한 게 어리석게 느껴지는 장관에 루이스는 말을 잃었다. 단어 몇 개, 문장 몇 줄을 더해도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을 바라보다, 손을 어루만지는 온기에 겨우 정신이 돌아와 긴 숨을 내쉬었다. 어깨며 목에 잔뜩 들어갔던 힘과 긴장이 풀어지고, 내쉰 숨을 들이마시자 조금 쌀쌀하고 신선한 공기에 저 밑 어딘가에 막혀있던 숨통이 탁 트였다.
광활한 하늘과, 반짝이는 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이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옥죄고 있던 압박과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해진 루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별을 수놓은 밤구경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감사해야 하는 건 난색을 해도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권해준 마음씨였다.
“멋지네요. 별자리 이름 같은 거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다행이군.”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릭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쉬었으면 했던 것뿐인데, 딱딱하게 굳은 무표징이 풀어진 것만으로도 내심 뿌듯했던 릭은 눈송이처럼 사르르 번졌다 사라지는 미소에 눈을 깜빡이다 그를 따라 웃었다.
뺨이며 손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바람에 내색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루이스를 방해하지 않으려, 주책 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입을 다문 릭은 발을 내딛었다.
“가만히 서있으면 감기 걸릴 거요. 바람도 차고.”
“그럼 좀 걸을까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 평소에 보는 늠름한 영웅의 얼굴과는 사뭇 다른 청초함을 풍겨, 릭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은 걸음을 옮길수록 더 깊고 아련해졌고, 갸름한 턱과 애수에 젖은 눈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릭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지금 이 사람은, 말 한 마디에도 깨져버릴 것 같다. 너무 위태롭고 연약해서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내키지 않는 제안을 따라 여기까지 와준 사람이다. 괜히 그를 더 침울하게 만드는 것만 같아 릭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니까.... 가끔은 이렇게 기분 전환도 하고.”
“....... 누가 제 기분 전환 시켜주라던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지쳐보여서.”
“톰슨 씨에게도 그렇게 보일 정도라니, 제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닌가 보군요.”
릭의 말에 멈춰 선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발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이 알아챌 정도로 상태가 나빠 보인다니. 회사는 물론이고 저를 노리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뻐할 소리에 자조하는 사이 릭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오! 무리해서 괜찮은 척 하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 일개 회사원에 불과한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냥 그대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드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루이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가끔 이렇게 기분 전환이 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부르시오. 부끄럽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저만 믿으라는 듯 말하던 릭이 겸연쩍어하며 말을 마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라곤 티끌만큼도 섞여있지 않은 진심에 먹먹해진 루이스는 차마 릭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생각과 달리 저는 너무나 초라한 사람이라 이런 마음을 받는 게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마음만 받고 또 무리하면 나는 뭐가 되오.”
“하하. 그도 그러네요.”
루이스는 투정부리듯 말하는 릭에게 꾸밈없이 웃으며 답했다. 연상에, 버젓한 직업이 있는 어른이 부리는 투정이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릭의 말이 이어졌다.
“신세 진다고 생각 마시오. 당신이야말로 남을 도울 때 받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으면서.”
“듣다 보니 어째 혼나는 것 같네요.”
엄한 척하려고 애쓰는 초짜 선생님 같은 말투에 루이스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솔직히 입에 담았다.
“루이스...!”
“농담입니다.”
예상대로 바로 발끈한 릭이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때맞춰 털어놓은 진실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꼭 풀 죽은 강아지 같아 루이스는 웃음을 참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거 조금 웃는다고 릭이 저를 여기 버려두고 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켜야할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그대도 농담을 하는 줄 몰랐소.”
“음. 영국인의 유머 센스가 좀 그렇긴 하죠.”
“그래도 지금이 훨씬 보기 좋군.”
루이스는 릭의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방금 전까지 저를 놀리며 참던 웃음과 달리 보는 사람이 더 아픈 쓴웃음이라 머뭇거리는 사이 루이스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를 냈다.
“엣취!”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버리는 재채기 소리에 민망해진 루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코를 훌쩍였다.
“조금 쌀쌀하네요.”
“옷이 얇은 걸 깜빡했군. 잠깐 이거라도 덮고 계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춥지....”
말릴 새도 없이 외투를 벗은 릭이 루이스의 어깨에 방금 벗은 외투를 얹고는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야말로 얇은 반팔 티셔츠 한 벌이라 받을 수 없다고 하려는데,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얇게 휘는 눈매가 그리는 눈웃음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루이스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사이 릭은 루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게이트를 만들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금방 오겠소.”
“아, 저기...!”
막무가내인 것도, 정신없이 몰아치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눈 깜짝할 새 릭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루이스는 잔상만 남은 게이트를 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갑자기 다가오는 것 치고 불편하지 않다. 천성이 선하고 자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겠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남겨진 루이스는 멍하니 서있는 대신 그 자리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그와 함께 걸을 땐 몰랐는데, 광활한 밤하늘과 허허벌판 사이에 홀로 남겨지고 나니 그렇게 처량하고 쓸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코도 훌쩍이고, 엉덩이를 꿈지럭거리며 다시 자리를 잡다 어깨와 등을 감싼 코트가 툭 떨어졌다.
주워든 코트는 무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미지근했다. 옷을 도로 어깨에 덮는 대신 무릎 위에 올린 루이스는 코트에 밴 옅은 커피 냄새에 괜히 쑥스러워져 잠시 머뭇거리다 도로 어깨 위에 덮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있으면 되는데,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코트의 무게며 온기, 거기에 밴 향 같은 게 죄다 신경 쓰여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결국 루이스는 옷을 끌어당겨 여미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다 열이 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부끄럼을 타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우스운 꼴이라 더 생각을 하는 대신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를 바라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별을 보며 릭을 기다리길 얼마, 땅 위에 남은 표식 위에 그가 나타났다. 한 손엔 두꺼운 담요, 한 손엔 보온병과 컵을 가져온 그는 아직도 얇은 티셔츠 한 장 차림이라 루이스는 냉큼 외투를 건넸다. 등과 어깨를 덮던 코트가 사라져 한기가 든 것도 잠깐, 빙긋 웃은 릭이 루이스의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그 짧은 시간동안 담요를 난로에 데워오기라도 했는지 무거운 코트와는 비교도 안 되게 따뜻했다. 릭은 데운 담요를 목까지 꼼꼼히 둘러주고 나서야 그의 코트를 걸치고 루이스의 옆에 앉아 컵을 내밀었다.
“자, 여기. 따뜻한 코코아요.”
“감사합니다.”
“아. 혹시 단 걸 안 좋아한다거나...?”
“아뇨.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영국인이거든요.”
“하하. 음식은 그래도 차는 까다롭잖소. 우유에 차냐, 차에 우유냐 같은 걸로 하루 종일 입씨름하고.”
“그건 중요한 문제니까요.”
“나는 커피 파니까 봐주시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아의 온기에 차가워진 몸과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에 언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자상하고, 따뜻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좋은 사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선 축복받은 능력이다. 따뜻한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쥔 루이스는 김이 오르는 코코아를 홀짝이다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입을 열었다.
“별구경에 코코아라.... 이런 건 좋아하는 분이랑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지금도 그러고 있소.”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자아낸 말에 장난으로 말을 걸었던 루이스의 눈이 커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한 릭은 옆눈질로 루이스를 보곤 눈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근사한 미소에 루이스는 마주 웃는 대신 숨을 집어삼켰고, 릭은 너무 솔직한 반응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것도 이 정도면 영웅 급이다.
“설렜소?”
“작업 멘트로는 최고네요. 연륜은 못 당하겠군요.”
“음.... 지금 늙었다는 말을....”
“뭐....”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친 농에 넘어간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루이스가 부정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는 그의 은근한 성질에 릭은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기분이 나쁘긴 커녕 그마저도 귀여워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릭이 웃자 루이스도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다 소리 내어 웃었다.
“큼. 흠.”
한바탕 웃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루이스가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긴장을 풀고 한가롭게 별이나 구경하는 것도 좀처럼 없던 일이다. 아무리 별이 예뻐도, 전장의 한복판에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여유가 없다.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뿐이지, 다시금 부는 전란의 폭풍에 세계 각지에선 지금도 소리 없는 첩보 작전과 수뇌부의 머리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치열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피 튀기는 싸움에서 ‘영웅’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사람들이 ‘영웅’에게 품는 막연한 기대는 더 커져서 그 모두를 짊어지려니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감상에 사로잡혀 빈 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릭이 푹 긴 한숨을 토했다. 이런 싸움에 평생 손을 대지 않았을 사람이, 의도치 않게 전란에 휩싸여 작전에 투입되고 죄책감에 휩싸여 액자를 찾아다니느라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쉽사리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제가 있었더라도 토니는 릭을 작전에 투입했겠지만, 그래도 만약 그 때 제가 떠나지 않고 있었더라면.
루이스는 그런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죄책감을 끌어안고 이어지는 침묵에 이따금 바람 소리와 섞여들다 릭의 목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다들 궁금해 하던데. 그대는 물어보지 않소? 모처럼 단 둘이고. 방해받을 일도 없는 기횐데.”
“...톰슨 씨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 고맙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때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엔 짙은 피로와 회한이 섞여 있어 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닌데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액자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떠돌이의 삶을 택한 사람이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그런 사람이 시간과 수고를 들여 마음을 써주는데 그걸 이용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늘 일도, 저만 알고 있는 게 좋겠죠.”
“알아주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그대만 알아주면 되오.”
고심하며 꺼낸 말에 돌아온 답이, 그와 함께 제게 보내는 미소가 주는 울림에 루이스는 후드 속에 얼굴을 숨기고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며 말을 골랐다.
“음. 뭔가 로맨틱하네요.”
“하하. 그렇소?”
“네. 자칫 잘못하단 착각하겠어요.”
침착하고 차분하려 애썼지만 정작 튀어나온 말은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라,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착각할 것 같으면 알려주시오.”
그렇게 말하며 손을 덥석 잡는 바람에 놀랐지만 릭은 그가 더 놀랐다는 듯 흠칫 몸을 떨었다. 모든 결정 능력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루이스는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편이었고, 몸에서 냉기가 흐르는 트리비아와 달리 보통 사람들에겐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어느새 손이 이렇게.... 이만 가는 게 좋겠소.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리겠군.”
“괜찮습니다. 원래 이러니까요.”
“자꾸 그렇게 두니까 몸이 상하는 거 아니오.”
함께 별을 보러 가자고 잡을 때보다 더 강하게 잡는 바람에 손을 빼지도 못하는 사이 얼굴 가득 걱정을 띠운 릭이 루이스의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큰 손이 손가락 마디며 손바닥을 문지르는 게 쑥스러우면서 야릇한 기분이라 손을 빼려 해도 릭은 루이스를 놓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꼭 잡고 비비며 호호 입김을 부는데, 그 정성과 걱정이 쑥스러우면서도 고마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힘이 빠진 걸 느낀 릭은 살며시 내리깐 루이스의 눈과 그 위로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온전히 제게 손을 맡긴 루이스의 손을 잡고 있으니 그 착각은 착각이 아니라고,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제가 생각해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부끄러워하는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감정에 릭은 말없이 손을 데우는 데 집중했다.
잡은 손을 데우고,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러고 나면 씻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정리해야지. 그와 함께 별을 보러 갔다는 기억만으로도 지친 하루가 멋진 하루가 되고, 또 다른 날의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입김을 불던 손가락 끝에 입술이 스쳤다.
“아, 그, 미안하오.”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스친 것뿐인데 저만큼이나 당황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선을 피했다. 쑥스럽고, 간지럽고, 두근거리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 손끝을 타고 번져 물들어 간다. 먼저 손을 뺀 루이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감추고, 머쓱해진 릭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 팔뚝에 찬 시계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내가 너무 시간을 뺏었군. 데려다주겠소.”
“부탁드립니다.”
먼저 일어난 릭이 루이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루이스는 그 손을 잡는 대신 혼자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 완곡한 거절에 릭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없이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를 통한 공간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서, 편리한 능력이 오늘은 몹시도 서글펐다.
“저, 톰슨 씨?”
“릭.”
“네?”
“릭이라고 불러 주시오.”
뜬금없는 말에 동그래진 눈이 토끼를 연상시켰다.
“다른 건 아니고. 톰슨 씨는 너무 딱딱하지 않소. 그리고....”
제 말만 기다리고 있는 루이스에게 마땅한 변명거리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릭은 작게 한숨을 쉬며 시간을 끌다 마지못해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톰슨 씨라고 하면 꼭 회사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오....”
스스로 생각해도 변변치 못한 이유지만, 때로는 꽤 훌륭하게 먹히는 게 바로 일 핑계였다. 아니나 다를까, 깨달음을 얻은 양 작게 입을 벌린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론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음. 부탁하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런 일에는 조금.... 둔감하니까요.”
성과 이름을 분리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듯 지은 미소에 릭은 당황해 입을 벌렸다. 이래서야 누가 누구더라 둔감하다고 할 처지가 못 된다. 실수를 바로잡기도 전에 반대편 게이트에 도착해버리는 바람에 더 다급해진 릭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팔을 움켜잡았다.
“미안하오! 그런 뜻이 아니었소. 나는 그냥, 그,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되는 대로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 위로 드리운 주황색 가스등과 그의 후드가 만든 그림자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입술을 물고 있는 것만은 또렷이 보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별 일도 아닌걸요. 그러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 뭘 했고 뭐에 서운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예쁜 미소에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보던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릭.”
그럼 좋은 밤 되라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루이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발밑에 얼음 결정을 깔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아까보다 더 멍하게 보던 릭은 수줍게 제 이름을 부르던 그를 떠올리고 주먹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려는 광대를 억지로 눌러보려 해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고, 감출 수 없는 흥분에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다 마음껏 소리치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다.
그날 밤, 게이트를 열고 돌아와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도 가시지 않는 흥분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잠든 릭은 짧은 꿈을 꿨다. 그 꿈엔 혼자 걷던 밤하늘을 저와 함께 걷는 루이스가 있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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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이] 엘리멘트리au
쓰고 안올렸던거 올림
한창 엘리멘트리 볼 적에 썼던 이글루~
그리고 저는 기약없는 뒷편과 프롤로그만 쓰는 병에 걸린 사람이 맞습니다
참 연재하던 온실 시리즈와 루루는 계속 쓰는 중인데 제가 갑자기 취직을 해버려서.... 업로드 일정이 미뤄질 것.... (골골
메일로 받은 주소를 찾아 간 주택 문 앞에 선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첫 날, 새로 면접을 보는 것만 같은 떨림에 마음을 다잡고 초인종을 눌렀으나 허무하게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도움을 거부하고 틀어박힌 이다. 그런 사람을 돌보는 일에 벌써부터 끈기를 잃어선 안 된다.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드렸으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커튼이 쳐져있지 않은 유리창을 넘겨 보며 사람의 형체를 발견한 나는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이글 홀든 씨?!"
쾅쾅쾅.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선수금을 받아버렸고, 나에겐 이대로 돌아가서 무섭고 살벌한 고용주에게 이 일을 못하겠다고 할 용기가 없었다.
"이글 홀든 씨! 형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소파에 드러누운 사람의 형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할 각오로 문을 두드리는데 갑자기 안쪽으로 문이 열렸다. 나체나 다를 바 없는 여성의 등장에 멍해진 나는 냉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어머, 귀여워라. 라고 작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진한 향수 냄새에 거북해하면서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금방 일어날 거예요. 어젯밤에 좀 격렬했거든요. 차라도 내줄까요? 아니면...."
"아뇨, 괜찮습니다. 볼 일 보세요. 하는 김에 옷도 좀...."
몸을 훑어내리는 끈적하고 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숙맥처럼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헐벗은 것이나 다름 없는 란제리 차림의 여성을 앞에 두고 태연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것처럼 나의 얼굴을 쓰다듬다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겨우 찾은 평화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앞으로 돌봐야 하는 대상을 찾아 거실로 향하자 문을 열어준 여자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상태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긴 은발과 널찍한 등과 탄탄하게 잡힌 근육이 멋지다는 감상보다는 앞으로 저걸 돌봐야 한다는 막막함이 앞섰다.
"이봐요."
약물 중독, 기행, 그 외 다양한 폭력 사태와 범죄들. 망나니 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삶을 사는 남자의 첫만남이 정상적이고 깔끔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로 닥치니 한숨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막연했다. 나는 소파에 엎드려 미동도 않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이글 홀든 씨?"
"뭐야.... 서비스?"
고개를 돌려 나를 본 남자의 얼굴은 잠과 짜증에 찌들어 있음에도 멋졌다. 오히려 그런 면을 부각해서 위험하고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몸을 일으킨 그의 손이 불쑥 덮쳐왔다.
"읏, 잠, 홀든 씨!"
"응. 알았어, 알았어. 처음이야? 이것도 신선한데."
"형님이 보낸 재활 도우미입니다! 다이무스 홀든 씨요!"
"아."
뒷목이 잡히고 고작 몇 초밖에 안 됐는데 소파에 눕혀진 건 둘째 치고, 버둥거리는 몸을 제압하고 당연하다는 듯 허리와 다리를 쓰다듬는 게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형의 이름이 통했다는 것일까. 무표정마저 잘생긴 남자가 잠시 동작을 멈춘 사이 나는 재빨리 그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아, 귀찮게...."
이글 홀든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다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가려주던 담요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야했다.
"난 그런 거 필요 없는데."
"그건 당신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형이 뭐랬는데?"
"상습적 약물 복용과...."
"아니, 그거 말고. 널 안 받아주면 어떻게 된다. 뭐 그런 조건 말이야. 아무렴 아무런 준비 없이 보냈겠어."
"옷을 입고 나면 말씀드리죠."
도저히 이 상태로 대화를 이어가기 민망해 내건 조건에 이글 홀든이 허, 하고 기가 찬 표정을 짓다가 한바탕 폭소를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모욕을 주려는 듯한 웃음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자 배를 잡고 웃던 그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바지를 주워 들었다.
"아, 진짜 귀엽네."
"오늘만 두 번째 듣는 소린데, 별로 유쾌하지 않군요. 특히 당신의 말은요."
"너무한데."
진짜 너무한 게 누구인지 묻고 싶지만 저 페이스에 말려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뻔뻔하기가 아주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뱀과 같은 녀석이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조금 더 새겨들었어야 했다. 그런 후회가 들었으나 돌이키기엔 늦은 뒤다. 나는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한 데 모아 묶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마저도 등 뒤에서 가슴을 안아오는 손길에 놀라 무너지고 말았지만.
"자기. 외로워지면 연락해?"
"아뇨, 저는...!"
"후후. 귀여워라. 이글. 이렇게 귀여운 친구가 있으면 좀 일찍 부르지 그랬어."
"뭐야. 나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흐응. 자기는 신선한 맛이 없잖아."
"아침부터 너무한 말 투성이네."
옷을 다 차려입은 여자는 이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하고 그의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빼냈다. 이런 범법행위도 신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그녀가 나를 지나치며 짓는 눈웃음에 다시 얼굴이 굳었다.
"동정도 아니면서 너무 그러지 마."
"네?"
"여자친구랑 깨진 지 얼마 안 됐고, 그러다 돈이 필요해져서 일을 구했겠지. 꽤 오래 사귄 것 같은데 반지 자국이 없다는 건 반지를 낄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고. 그런 직업을 가진 주제에 한창 나이에 남 돌보는 일이나 한다는 건 그 일에서도 문제가 있었다는 거지. 예를 들면 의료 사고 같은 거."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날카로운 말에 나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맑은 바다를 옮겨 놓은 것처럼 새파란 눈은 너무나 투명해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인형의 눈 같았다.
"그게 당신과 관계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정확히는 내 형이 준 수임료가 그 문제를 상쇄해주는 거겠지."
"네. 거절하기엔 많은 액수였거든요."
"그래서, 널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날 어쩌겠대? 내쫓는대? 무일푼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서 포기한 망나니를 거둬주는 그의 형제의 책임감과 염려는 감사해야 마땅한 것이나 이 망나니 도련님은 그저 거추장스럽다는 양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오늘부터?"
"오늘부터. 두 시간 이상 떨어져있을 땐 연락해야 하고 약물 중독 재활 프로그램에도 참석해야 합니다. 형님이 내건 조건에는 절 위협하거나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도 물론 포함되어 있고요."
"24시간 나를 감시하시겠다?"
"저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당신을 돕는 거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최악이네. 내가 도망치고 속이면 잡아낼 수는 있고?"
"그건...."
그의 눈빛에 담긴 위압감에 나는 말을 멈췄다. 이 사람은 위험하다. 함께 있었다간 언제 목을 물릴지 모른다. 그런 위기감이 도망갈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지만 나 역시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해봐야 알겠죠."
나를 시험하듯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뱀처럼 나를 옭아매고 짓누르던 공기가 누그러지고, 그의 껄렁한 태도와 걸음걸이에서 여유마저 느껴졌다. 한 발짜국 앞에 선 이글은 허리를 짚고 서서 나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해?"
"루이스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그냥 악수를 하는 것 치고 세게 잡힌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손을 빼려 했으나 충분한 악수 뒤에도 이글은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내게 되물었다.
"루이스?"
"제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설마 그 '루이스'는 아니겠지."
"꽤 흔한 이름인데요."
이글은 손을 놓고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가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 침대로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은 미소에 나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하긴. 형이 아무나 붙일 리가 없지. 유일하게 '홀든'을 무릎 꿇린 남자잖아?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척 하긴, 내 작은형 말이야. 그러니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붙이지!"
"홀든 씨?"
혼자 신나서 떠들며 방 안을 돌아다니던 이글은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았다.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잘 지내보자고, '영웅' 씨."
여기까지 안다면 더 부정하기도 힘들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항복했다.
"...그렇게 불리는 것도 엄청 오랜만이네요."
"그나저나 진짜 동안이네. 나이 먹은 거 맞아? 참, 그냥 이름으로 불러. '홀든 씨'라니, 다른 사람 얼굴이 떠올라서 소름끼치잖아."
이글은 말을 마치고 익살스럽게 윙크했다. 루이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삐닥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지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상상 이상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글. 일단 약물 검사를 좀 해야겠으니 거기 좀 앉아보시죠."
"말 놓지? 어차피 오래 가지도 않을 텐데."
"입 닥치고 앉아."
휘익. 이글이 휘파람을 불며 양손을 들었다. 그래봤자 신나고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얄미운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순순히 루이스의 말을 따라 소파에 앉았고, 얌전히 팔을 내밀었다.
"잘 지내 보자고. 원한다면 침대 옆자리도 비워놓을 테니까, 언제든지 들어 와?"
이글이 던지는 은근한 추파에 루이스는 눈을 치켜 뜨며 주사바늘을 빼낸 곳을 꾹 눌렀다. 이글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놓지 않고 힘주어 누르다 떼고 소독용 알콜을 방울진 핏방울 위에 떨어트린 뒤 솜을 건넸다.
"하루에 두 번, 네 상태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것만 잊지 마."
"보기보다 되게 과격한게 매력있네. 알았어, 알았다고."
루이스는 솜으로 피부를 문지르는 이글의 손을 잡아 뗐다. 혈관도 건강하고 주사바늘도 정확히 들어갔기에 그래봤자 따끔한 수준이고, 피도 금방 멎었는데 엄살이 심하다. 한 번 더 소독을 해야 할까 생각하던 루이스는 이글의 팔 위에 훅 숨을 불었다. 알콜은 그새 다 날아갔지만 엄살이 심한 아이에겐 관심이 약인 법이었다.
"서비스 좋은데."
"네가 말썽만 안 부린다면, 괜찮은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
"설마 침대 얘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 뭐, 나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그건 사양하겠어. 나는 네 불장난 상대가 아니니까. 함께 지내면서 널 감시하고 돌보긴 하겠지만, 개인 사생활 정도는 구분할 거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대신...."
"그 사생활에 섹스도 포함이야?"
점점 골치가 아프다. 루이스는 허리에 손을 얹고 이글을 응시했다.
"좋아. 그럼 집에서 하는 건 상관 없지?"
"그 정도 사생활은 존중할게. 날 끌어들이지는 마."
"한 번 차이고 나니까 신실한 독신주의자라도 된 거야? 왜 그래, 섹스는 좋은 거라고. 가끔 기분 전환을 해줘야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위층 침실 쓸 테니까 그렇게 알아."
"외로워지면 말 해! 나는 환영이야!"
루이스는 소리치는 이글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올랐다. 얼마나 말을 나눴다고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처음 수임료에 대해 들었을 때는 사람 하나 돌보는데 너무 과한 금액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합당한 금액이었다. 확실히, 이글 홀든을 감당하려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
계단을 올라온 루이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평화롭고 순탄한 일상에 이별을 고했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글 홀든과의 생활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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