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63건
- 2016.10.06 [벨져루이] Night and Day
- 2016.10.06 [루드루이] 01.
- 2016.10.05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 2016.10.03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 2016.10.03 [신루이] 여름, 좋아해?
- 2016.09.07 [벨져루이] 무희
- 2016.08.30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2016.08.30 [벨져ts루이] 취중진담
- 2016.08.28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 2016.08.28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글
[벨져루이] Night and Day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그렇지요~
하루 종일, 카모라의 중역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방으로 돌아온 루이스는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지만 아직 하루 일과가 끝나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털썩 침대에 앉은 루이스는 서랍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선이 팽팽해지도록 당겼다.
호텔방에 들어오자마자 전화기가 있는지부터 확인한 건 다 이 시간을 위해서였다. 아슬아슬하게 침대까지 선이 닿는 전화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가고, 교환원이 연결해주기를 기다리길 얼마. 수화기 건너편에서 달칵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벨져 홀든이다.”
“나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잘 끝났고?”
“하루 해서 될 거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아직 한참이야. 너는? 잘 돼가?”
“뭐. 당장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피차 마찬가지네.”
루이스는 푹신한 베개 위에 등을 기대고 눕다시피 앉아 웃었다. 피곤하고 졸려서 목소리가 다 늘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기분전환이 될 만한 거 해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뭐, 행복한 거.”
“당장 떠오르는 건……. 글쎄 안 되겠군.”
“왜?”
“네가 없으니까.”
바로 나오는 대답에, 설레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 예쁜 자식. 평소에도 좀 이렇게 살가우면 얼마나 좋아.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수화기 선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다가 아플 정도로 당기는 볼을 꾹꾹 눌러 내렸다. 목을 가다듬고, 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 감동스럽긴 한데 유감이네. 다른 건? 차라던가, 음악이라던가.”
“그러는 넌?”
“나?”
“뭔가 하는 거라도 있나?”
“음……. 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알려주지.”
“약속하마.”
you have my words. 모든 것에 완벽한 벨져 홀든 경이지만 연애는, 그 중에서도 밀고 당기는 그 아슬아슬한 장난질에는 서툴다는 게 이럴 땐 티가 팍팍 난다. 루이스는 솔직한 답변에 작게 웃고 말을 이었다.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느릿하고 나긋했다.
“즉답이네. 좋아. 일단 물을 끓여. 주전자로 하나 정도? 그리고 대야에 부어서 온도를 맞춘 다음 발을 담그는 거야. 비누 거품으로 발장난도 좀 치고.”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나오는 대답은 하찮기 그지없다. 벨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침대 아래 나뒹구는 두 사람의 신발을 떠올리다가, 제 구두보다 한두 치수는 작은 운동화와 루이스의 맨발을 떠올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소박하군.”
“그렇지, 뭐.”
“참고하겠다.”
“하하. 왠지 네가 그러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 우아하게 와인 곁들여서 목욕이면 몰라도.”
“뭐, 그것도 피로를 푸는데 유용한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하지만?”
정말 졸린 지 목소리가 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늘어진다. 이러다 잠든 게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졸린데 잊지 않고 꼬박꼬박 자기 전에 전화를 하는 애인이 귀여워, 벨져는 그리움을 담아 솔직하게 대답했다. 같이 있으면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속마음이었다.
“역시, 네가 있는 쪽이 훨씬 좋다.”
“그거 좀 쑥스럽네.”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에 감정이 다 묻어난다. 벨져는 루이스의 붉어진 얼굴을 어렵지 않게 그리다, 그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꾹 눌러 내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 그러고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부끄러울 때면 눈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입을 열곤 했다.
사귀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전부, 눈에 선하다. 어지간히 감동했는지 더 말을 잇지 못하는 루이스 대신 벨져가 선수를 쳤다.
“금방 마치고 갈 테니 쓸데없는 일 벌리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을 다 비워. 언제 오는데.”
“최대한 빨리 마치겠다.”
“당장 내일이라도 날아올 기세네. 알았어.”
“그래. 얼른 자라.”
보고 싶어. 사랑해. 그런 말을 하는 걸 꺼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면 정말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 해봐야 느는 법이라 했던가. 오래도록 연애를 해본 사람답게 루이스는 그런 말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벨져는 주로 망설이다가 루이스의 간지러운 말과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선수를 뺏기고 그래. 하고 답을 돌려주기 일쑤였다.
“응. 너도. 끊는다. 참, 벨져.”
“또 뭐냐.”
“그냥, 보고 싶어서. 기다릴게. 잘 자.”
그래. 바로 이렇게. 예상을 하고 있어도 막상 이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 벨져는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에 목을 가다듬으며 다리를 꼬았다.
“잘 자라.”
“응. 나 또 횡설수설 하다가 잠들 것 같으니까, 그냥 먼저 끊어.”
귀엽기는. 이미 횡설수설하고 있으면서, 목소리에 잔뜩 묻어나는 졸음에 벨져는 피식 웃으며 모국어로 밤인사를 했다. 어설픈 독일어로 답을 돌려주는 그가 졸린 눈을 비비고 있을 것만 같아, 내내 골머리를 앓으며 힘을 주고 있던 몸에 긴장이 풀어졌다.
이래서 연애를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얼른 끝내고 그에게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아쉬움에 쉽사리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으니 쪽, 하고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키스를 보내왔다. 소리뿐이지만 그 하나에 없던 의욕이 생기고 만다. 벨져는 잠시 망설이다 똑같이 수화기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사랑한다.”
“으웩. 작은 형, 닭살!”
나도. 라는 달콤한 대답이 돌아와야 하는데,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둥실거리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벨져는 애인의 목소리 대신 찾아온 불청객의 목소리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인상을 팍 썼다.
“왜 네가 받는 거냐, 이글.”
“그야 당연히, 같은 방을 쓰니까 그렇지. 으으, 닭살. 우리 영웅님은 주무십니다. 저는 막 씻구 나왔구요, 내일도 오전부터 회의해야 하니까 끊는다.”
“잠깐. 같은 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엉? 아, 진짜.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침대 두 개! 일하러 온 거야, 일!”
억울한 듯 목청을 키우는 녀석 때문에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떨어트려 놓았던 벨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잠든 사람 옆에서 큰소리를 내는 동생을 타박했다.
“목소리를 낮춰라. 이글.”
“와, 대박. 형 지금 질투해? 왜, 내가 막 영웅님 침대에 들어갈까봐?”
“이글.”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으어. 졸려. 우리 배 타고 기차 타고 왔어. 한 판 뜨래도 피곤해서 못 해. 나폴리까지 얼마나 걸렸는 줄 알아? 끊어.”
피곤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침대로 파고들어 '한 판 뜨겠다'는 걸로 들리는 말에 벨져는 짜증을 억눌렀다. 루이스가 뻔히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여지를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글은 저를 놀리겠다는 그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못된 짓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었고,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길 바랐다.
“어이구, 무서워라. 걱정 마. 안 해. 내일 아침에 냉동사체로 발견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신경 끄셔! 흐아암. 아, 누가 추근덕거리면 그건 알려주지. 동생 좋다는 게 뭐야~.”
“이글.”
“고마우면 용돈 좀 찔러줘. 작은형 애인 깨기 전에 끊는다. 뿅~.”
유치한 인사를 끝으로 달칵 전화가 끊겼다. 좋았던 기분에 찬 물을 쫙 끼얹은 녀석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을.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색색 곤히 자는 얼굴이 떠올라 입가를 매만지다가,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간질거리는 말을 하던 그를 떠올렸다.
기다린다고 했으니 한 시라도 빨리 마쳐야 한다. 루이스의 일은 사나흘은 족히 걸릴 테고, 그럼 영국으로 가는 길에 이탈리아에 못 들를 것도 없다. 이글 녀석을 빨리 쫓아내고 나폴리의 해변을 걸으며 지중해의 여유와 풍경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데이트 할 계획을 세운 벨져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해변이 보이는 호텔이나 별장에서 애인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려면 뭐가 됐든 빨리 끝내야 했다.
* * *
애인이 바쁘다. 일찍 오래서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해가 뜨고 나서야 집에 들어온 애인은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쓰러지듯이 고꾸라지는 애인을 받아 안자 눈밑에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서 입술에도 핏기가 없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저녁에 나폴리에서 돌아왔어야 하는 사람이 이 지경이 된 이유야 뻔하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벨져.... 나 진짜, 지금 안 자면 죽어....”
아무렴 연합에 무능하고 한심한 머저리들만 모여 있다고 해도 그렇지, 출장을 다녀온 사람을 또 부려먹을 정도로 손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서서 일을 도맡을 이유가 있는가. 벨져는 멍청하고 미련한 애인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이마를 짚고 끓어오르는 화를 삭혔다.
자신보다 일을, 그 잘난 연합을 우선시하는 사람에게 화가 났다. 이럴 거면 일찍 오라고 조르지를 말던가. 누구는 일 분 일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잠도 안 자고 기다렸는데 그동안 이 사내는 안 해도 될 일까지 하고, 이 꼴이 되어 돌아왔다.
벨져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졸고 있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루이스가 대번에 짜증을 내며 인상을 쓰는데, 밤새 기다린 것도 억울한 데다 저만 그를 기다린 것 같아 자존심이 확 상했다.
“손 치워.”
“하, 내가 네 애인인데! 일주일만에 만나서 엉덩이도 못 만지나?”
무심결에 큰 소리가 나왔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성질을 못 이기고 결국 화를 내고 만 벨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붉은 눈으로부터 시선을 피해버렸다. 망할 애인은 연합의 영웅님이셔서 할 일이 다망하고, 연애도 오래 해서 늘 저만 연연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차라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목소리를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사려 깊은 그가 정작 애인인 자신을 뒷전에 두는 게 벨져는 퍽 서운했다. 저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죽죽 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푸른 루이스가 마른세수를 하고 푹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한숨을 쉬어야 할 게 누군데.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도로 벨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안겨들었다.
“벨져....”
짜증을 안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벨져 홀든은 어딘가에 얽매일 사람도 아니고, 눈치를 볼 사람도 아니니 언제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맡은 일을 허투루 할 사람은 아니다. 보고 싶다고, 기다리겠다고 하는 말에 최선을 다해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온 사람은 한참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짜증을 내는 건 당연했다.
다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벨져의 기분을 풀어주고, 그를 헤아릴 정신과 체력이 없었다.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게 당연한데 내가 피곤하니 미안한 마음 전에 짜증이 먼저 날 정도다. 지금은 다투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눌러 참고, 뺨을 그의 어깨에 부비면서 애원하듯 매달렸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잘못한 건 자신이었다.
“나 진짜 졸려.... 제발, 응? 자고, 나 좀 자고 일어나서 하자. 일어나면 놀아줄게 응?”
“.......”
“한 번만 봐주라. 사랑해. 응? 나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벨져어....”
“.....하아.”
죽이니 살리니 해도, 벨져는 제게 약하다. 보석같이 예쁜 눈이 흔들리는 거 캐치한 루이스는 벨져의 뺨과 입술에 쪽쪽 뽀뽀하면서 강수를 뒀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않는 걸 봐선 슬슬 화가 풀리긴 하는데, 그래도 억울하고 서운한 건 여전해서 삐져있는 게 분명했다. 이 기분 아주 잘 알지.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벨져의 윗입술을 입술로 물었다 놓았다가 눈을 뜨며 속삭였다.
“대신 일어나면, 네가 해달라는 거 해줄게. 응?”
“...그 말, 꼭 지켜라.”
“약속.”
“...하아.”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자 벨져의 팔이 등을 안았다.
“나 좀 데려가줘...”
아직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이, 벨져는 루이스를 안아드는 대신 질질 끌고 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그래도 막상 얼굴을 보니 측은해서 이불을 덮어주고, 이불 위로 가슴을 토닥였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배시시 웃는 루이스가 얄미워져 철썩 때렸지만 그래도 좋다고 웃는 사람에게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제정신일 때도 이렇게 애교가 흘러 넘치면 적어도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벨져는 잠시 평소에도 허허실실 웃는 루이스를 상상했다가 냉큼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렇게 웃으며 안겨들고 애교를 부리는 건 제 앞이면 충분하다.
절대,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냉기를 풀풀 풍기는 싸늘한 영웅이어도, 제 앞에선 이렇게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벨져에겐 한참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조금 더, 확신을 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모든 선택지 앞에서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었으면 했다.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불편해 작게 한숨을 쉬자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실눈을 뜬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지간히 졸린지 초점이 흐린 눈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는 게 애틋해, 벨져는 가슴을 토닥이던 손을 멈췄다.
“벨져....”
“또 뭐냐”
“같이 자자.”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겨우 밀어 올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벨져가 잠시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오는 그 역시 어젯밤 내내 뜬 눈으로 지새웠는지 눈에 졸음과 피로가 가득했다.
“...하아. 이거 원, 애인이 아니라 보모라도 된 기분이군.”
“사랑해....”
조각같은 몸을 꼭 끌어안고,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벨져의 손이 뒤통수를 감싸고 머리 위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도 아랑곳않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의 몸에서 나는 샤워 코롱 냄새와 햇살보다 더 따뜻한 온기와 단단히 저를 끌어안은 팔에 안심하고 만다.
“벨져어....”
“잠꼬대 하지 말고 자라.”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는 비식비식 웃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3. (0) | 2016.11.20 |
---|---|
[루드루이] 02. (0) | 2016.11.20 |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루드루이] 01.
짐승을 주운 루이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을 썼을 땐, 낯선 공간에 있었다. 격통에 배를 움켜쥐자 까슬한 붕대가 손바닥에 닿았다. 통증에 눈을 질끈 감고 헐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 철제 침대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치료가 된 환부와, 낡고 허름한 집.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필요한 것만 잘 정돈된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주변을 면밀히 둘러보면 볼수록 낯선 공간에 대한 이질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다 할 위험은 느껴지지 않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배의 통증에 더불어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쨍하게 울리는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자신의 몸에는 왜 이렇게 흉터가 많고 이렇게 큰 부상을 입은 채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 것인가. 무엇이든 떠올려보려 해도 초조함에 두통만 심해질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꼭 기억에 검은 잉크를 부어놓은 것 같다.
그렇게 고통에 허덕이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몸을 지킬 수 잇을만한 것을 찾다가, 침대 옆에 있는 가위를 쥐고 도로 침대에 누워 자는 척 숨을 죽였다. 문고리와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 뒤에, 경첩이 삐그덕 거리며 문이 열렸다.
선이 가는 체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종이봉투를 주방에 내려놓고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호의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상과 허름한 집.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준 걸 보면 당장 자신을 해치진 않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죽일 생각을 하다 퍼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혼란스러워졌다. 왜,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당연하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고, 이렇게 부상을 입은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침대로 다가온 사람의 몸에선 낡은 종이와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도서관이나, 서류를 만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서늘한 손이 조심스레 이불을 걷었다가 다시 덮고는 멀어지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너무 낯설다. 어색하고 낯선, 경험해보지 못한 온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손길과 눈길에 덜컥 겁이 나면서, 가슴과 눈이 뜨거워졌다. 마치 이런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구는 자신이 무섭고, 눈을 떴을 때 펼쳐질 상황이 두려웠다. 또다시 쫓기게 되는 건 아닐까.
삽시간에 저를 덮치는 어둠에 손에 꽉 거머쥔 가위를 놓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는 것조차 결심이 필요했다. 눈을 뜨자마자 공황에 빠졌던 것과 너무 차이가 나면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쫓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안전하다는 확인이 더 우선이었다.
지금 이 남자도, 사주를 받고 잠시 저를 돌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어나면 다시 어딘가로 끌려가,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가위를 쥐고 눈을 떴다. 제게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모른다는 불안과,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려야한다는 판단 하에 다시 다가오길 기다리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노련한 사냥꾼은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법.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복부의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굉굉 울리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덮쳐왔다.
“큭...! 크허, 허억. 헉.”
“괜찮아요? 숨 쉬어요. 자, 괜찮으니까....”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부여잡았던 머리를 당겨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제 몸에 손을 대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의 품에 기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으면, 점차 고통이 잦아들며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낡은 종이 냄새와 비누 냄새. 살짝 감도는, 시원한 향. 지척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 소리. 그 사소한 것들에 술렁이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자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떨어졌다. 왠지 그 손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좀 괜찮습니까?”
“당신은....”
“아, 루이스. 그냥 루이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느낌이다. 잘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왠지 이 사람은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처가 꽤 깊었어요.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 날....”
“...기억 안 납니까?”
기억이라는 소리에, 다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고 그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은 누군지, 이 사람은 왜 자신을 도와주었으며 왜 자신은 이런 생각들만 하는 것인지, 혼란에 휩싸여 그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허억. 헉. 당신, 나를 압니까?”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묻자 자신을 루이스라고 밝힌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그 반응에, 낭패감과 함께 혀를 찼다. 방금 했던 것처럼 기대기라도 하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루이스는 다시 머리를 감싸지도 어깨를 내어주지도 않았다.
“당신, 글림듀에 쓰러져있었습니다. 기억 안 나요?”
“제길,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누군지도, 뭘 하던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일순 루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루이스가 몸을 돌려 책상에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데, 그 옆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눈치라 덩달아 긴장하다가도 문득 학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자란, 순수하고 선한 청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그 옆얼굴을 바라보는데 루이스가 한 쪽으로 기운 천칭을 그린 종이를 눈앞에 내밀었다.
“혹시 이런 문장 본 적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게 뭐죠?”
“그렇군요.”
예상을 벗어났는지 루이스가 종이를 책상 위에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건 순식간이다.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에 무심코 옷깃을 잡자 루이스가 돌아보며 제 손 위에 그의 손을 올렸다. 막연히 생각한 것과 달리 그의 손은 조금 차갑고 딱딱했지만 제 손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얼핏 서늘해보여도 제게 매달리는 사람은 내치질 못한다. 그리 매정한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전 집을 비울 때가 많아서.... 뭔가 생각나거나 그러면 말없이 그냥 나가도 됩니다. 일단 오트밀 죽을 만들긴 했는데.... 음. 있는 건 다 먹어도 돼요.”
“보통은 의심부터 하는 거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나요?”
침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수긍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데도 수상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루이스는 잠시 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해서 접근하는 거라면, 보통은 기억을 잃었다는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생각을 하지는 않죠.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그걸 알면서 이러는 겁니까?”
“네.”
“왜죠?”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 거 아닙니까?”
“덜컥 사람을 믿는 타입은 아닌데요. 굳이 따지자면 불신하는 쪽이라서.”
“행동과 말이 어긋나는데요.”
“당신, 일주일 넘게 누워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남을 속일 정신머리가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사경을 헤매다보면 무슨 일이 안 생기겠어요.”
루이스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겪어본 적 있다는 듯 덤덤했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 같아 슬쩍 기분이 상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기억이 없었고, 아무리 시큰둥하게 굴어도 그는 제 생명의 은인이었다.
당장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밖으로 나간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당장 내쫓겨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한 사람의 에게 조금 더 신세를 지는 게 괜히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낫다는 건 따져 볼 것도 없었다.
“그럼 조금만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트밀을 데워 오겠다며 일어났다. 오트밀 죽은 맛이 느껴지지 않지만 따뜻했고, 그는 다 먹는 걸 지켜본 뒤에 물 한 컵과 함께 침대 옆 책상 위에 있는 약을 종류 별로 알려주고는 차를 끓여 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찻잎 향이 가득 퍼지고, 루이스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차와 책. 어딘가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그. 이 모든 게 왠지, 기묘한 운명이 쓴 하나의 드라마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창밖은 어둑했고, 큰 상처를 입은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점차 약기운에 눈이 감기며 그렇게 다시 몽롱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 * *
또 얼마를 잤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숨소리마저 시끄러울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그 사이에 붕대가 바뀌었고, 집주인인 그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릎 밖을 소파 밖으로 뻗은 채로 고른 숨소리를 내는 그에게 발소리를 다가가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살이나 됐는지, 갓 스물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삶에 지친 자의 얼굴이다. 달빛조차 희미한 짙은 어둠 속. 천천히 홀린 것처럼 그의 목에 손을 뻗었다. 흰 피부는 서늘하고, 손끝에 닿는 맥박에 갑자기 두통이 찾아와 머리를 부여잡았다.
꾹 감은 눈꺼풀 아래로 비명과 피비린내, 살육의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체와, 차가운 피부, 그리고 손끝에서 사라져가던 생명의 울림. 그 모든 것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눈을 뜨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다시 그가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숨소리가 가슴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다지도 끔찍한 장면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대뜸 목을 쥔 것도 그렇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와 눈을 감고 한숨과 함께 낮은 신음을 내뱉자 루이스가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덮어주려 손을 뻗는데 돌연 그가 제 손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움찔 숨을 집어 삼켰지만 그냥 잠꼬대에 불과했는지 더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에도 루이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손은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애틋해 놓고 싶지가 않았다. 서늘한 목과 달리 그새 따뜻한 손을 마주잡자 잠시나마 그의 얼굴이 풀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호감을 느끼다니.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마음 어딘가에선 이 사람에게라면 그래도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2. (0) | 2016.11.20 |
---|---|
[벨져루이] Night and Day (0) | 2016.10.06 |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존잘님께서 자라고 던져주신 연성의 벨루가 넘 조아서...
루이스 파자마에 벨져 샤워가운 최고최고ㅠㅅㅠ)S2
일을 하다보면, 가끔은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는 법이다. 회사가 헌터의 폭로로 어수선한 사이 연합은 안타리우스를 쫓아 능력자와 불안한 세계 정세의 수호자가 되려 했고, 벨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조력자가 필요했다.
다이무스가, 가문이 알면 기겁할만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세상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인형실 끊기 작전 당시 연합이 입수한 안타리우스의 내부 자료와 벨져가 독자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교환하기로 하고, 은밀히 만날 약속을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날 기대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 건은 연합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고, 그러니 당연히 이 거래를 하러 오는 건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어느 정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에 유리하도록 거래를 이끌어 갈 인물이어야 했다.
아무리 연합 소속의 능력자가 많은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많겠는가. 그러니 회담장에 나타나는 건 연합의 수장 앤지 헌트, 수뇌부의 토니 리켓, 마지막으로 영웅 루이스 이 셋 중 하나가 될 게 뻔했다.
회담장에 도착한 루이스를 보고,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뒤에 줄줄이 따라온 것만 아니었다면, 진즉 소모적인 신경전을 건너뛰고 데이트를 했을 텐데. 딸려온 잔챙이들이 너무 많았다. 보는 눈이 많아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쫓기듯 자리를 피했는데 루이스는 여즉 감감 무소식이다.
저녁 식사 시간을 훨씬 지나,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벨져는 저도 모르게 엄지를 물었다.
“아, 정신 사납게 진짜!”
“닥쳐라. 이글.”
“그렇게 보고 싶으면 전화라도 해! 대체 그 좋은 머리는 뒀다 어디다 써?”
소파에 길게 누워 속 편하게 노닥거리던 이글을 쏘아보다 시선을 돌렸지만 녀석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원래 성질 같았으면 이미 목덜미를 잡아다 침대 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서로 일은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게 벨져의 발을 잡고 있었다.
따로 만날 땐 가급적이면 일 얘기는 꺼내지 않고, 서로를 우선하기로 했지만 이렇게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됐을 때는 아무래도 저를 우선해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또 싸우기라도 하면 그 때는 다음에 시간이 맞아 만나도 서먹하게 감정 소모만 하게 될 게 뻔했다.
“이글.”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나가라.”
“허, 그래. 간다, 가.”
늘어져있던 이글이 몸을 일으켰다. 연합 쪽에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출장을 보내면서 투 베드 룸을 예약한 것인지.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자 숙소까지 찾아왔는데 벨져를 맞은 건 술냄새를 풍기는 동생 녀석이었다.
처음엔 잘못 찾아왔나 싶어 얼굴을 보고 바로 문을 닫아버렸는데, 다시 열린 문틈으로 이글이 얄밉게 웃으며 방을 같이 쓴다고 할 때의 그 기분이란. 기껏 좋은 잠자리를 두고 이글과 방을 바꿨는데도 루이스는 그 빌어먹을 보고때문에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이래서야 방을 바꾸기 위해 용돈을 두둑하게 쥐어준 것도 다 쓸모없는 짓이 아니었나 싶어 머리를 짚는데 방을 나가던 이글이 문 앞에서 홱 돌아섰다.
“작은 형.”
“또 뭐냐.”
“메에롱.”
유치하고, 짜증나게 혀를 내민 이글이 잽싸게 문틈으로 사라지고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던 벨져는 주먹을 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막내 녀석은 도무지 철이 들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싹수가 글른 놈이긴 했지만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만났는데 기왕이면 같이 있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나. 저만 애를 태우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자괴감도 들었지만 벨져는 전화기를 드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방 안을 서성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수화기를 들었다.
“벨져?”
단조로운 기계음을 듣고 있는데 뒤에서 수화기를 거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얼떨떨한 듯 눈을 깜빡이며 서있는 사람은 벨져가 내내 기다린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네가 왜 여기 있어?”
“이글 녀석을 내쫓았다.”
양손에 짐을 들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뺨에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나 아직 일 해야 할 거 남았는데....”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미안해하며 입을 맞춰왔다. 스킨십을 꺼리는 편도, 아끼는 편도 아니지만 루이스가 이렇게 달라붙을 땐 미안하거나 저 내킬 때뿐이었기에 벨져는 좁힌 미간을 풀지 않았다.
“피곤할 텐데 먼저 자. 오래 걸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팔 가득 들고 있던 송수신기와 장비를 내보였다.
“이글을 그렇게 믿나?”
“어차피 코드는 나밖에 모르는데 뭐.”
괜한 투정에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뺨을 살짝 어루만지다 아쉬움만 잔뜩 남긴 채 떨어져 옆방으로 가버렸다. 일하는 중에는 터치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 말인즉슨 옆방에서 밤새도록 전보를 보내도 건드릴 수가 없다는 뜻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은 내내 독수공방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따로 방이 있는 객실에 침대가 둘인가 했더니 이런 용도였나 싶어 푹,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방을 바꾸자고 하지 않았어도 이글은 두 명이 쓸 공간을 혼자 썼을 것이다. 다 알고 시치미를 뗐다 이거지. 벨져는 한 마디 벙긋 하지 않고 낼름 용돈을 받아먹은 막내를 향한 짜증에 이를 물었다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렇게 된 이상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일념 하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굳게 닫힌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내심뿐이었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문을 연 루이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곤 한숨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자라니까.”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야 없지.”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잖아. 그냥 우연이라고.”
“우연이 곧 인연이고 운명이라는 말 못 들어봤나?”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니지 않아?”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쓰라는 거지?”
벨져는 수척해진 얼굴로 미안해하는 루이스에게 와인을 따라 건넸다. 잔을 들고 사양하는 법 없이 마시는 걸 봐선 그 역시 아쉽긴 한 모양이라 기다리는 동안 절절 끓던 짜증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미안. 그냥 먼저 자. 이거 끝나면 휴가 낼 테니까, 응?”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거슬리긴 하지만 제게 절절매는 루이스를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일단 씻고 나오지 그래. 새벽에라도 침대에 들어올 거라면.”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한숨을 폭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섹스는 못 하니까 이런 거라도 들어준다는, 그 속내야 안 봐도 뻔했다. 뻔하고, 미련하고, 사랑스럽다. 결국 이렇게 하나하나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벨져는 제 뜻대로 고분고분하게 욕실로 들어가는 루이스를 흡족하게 바라보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도로 소파에 앉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여전히 고양이 세수라도 하듯 후다닥 씻고 나온 루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벨져가 미리 준비해둔 파자마를 입은 루이스의 몸에선 따끈따끈한 김이 오르고, 흰 피부는 촉촉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그의 눈이 제게 향했을 때, 벨져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의 루이스에겐 '좋다'는 말밖에 못 할 거라 확신했다. 이런 몸을, 이런 눈을 하고 일이나 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벨져는 바로 제 연인에게 다가가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려 했다.
“미안. 다음에.”
손으로 입을 막은 루이스는 난처한 듯 웃으며 눈을 깜빡이다 냉큼 일하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망갈 곳을 주지 말고, 팔에 가뒀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이미 야속한 님은 도로 일을 하러 가버려서, 벨져는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문을 잠근 것도 아니니 그냥 들어가면, 들어가서 따뜻하고 촉촉한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출 수 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울컥 치밀어 이마를 짚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누군 지금 가운 차림으로 기다리는데, 그냥 한 번쯤 모른 척 넘어오면 어디가 덧나나. 야속함에 화까지 났다. 기껏 준비한 와인이며 촛불은 다 무용지물이 됐다.
서로의 영역은 존중해주기로 하는 게 아니었다. 루이스는 결코 좋은 연인이 아니다. 질투에, 기다림에 방치해 두고는 그 자신은 혼자 태연한 게, 자신을 우선해주지 않는 게 짜증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고작 그런 것에 연연하는 자신이다.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질투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고, 어설픈데다가 가끔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니 그 틈을 파고들어보려는 잔챙이가 꼬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잔챙이가 아니라 루이스 그 자신이다.
지금처럼, 저를 내버려두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네가 날 신경써주지 않는 게 짜증난다고 말하긴 자존심이 상한다. 왜 항상 자신만 아쉬운 상황이 되고, 져줘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벨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와인을 따랐다. 마음 같아선 그냥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잔뜩 풀이 죽어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른거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자 나오진 못하고 문틈 사이에 선 루이스가 죄인이라도 된 것 처럼 벨져의 눈치를 살폈다.
“벨져.... 피곤하니까 일찍 자는 게 어때.”
“하, 피곤할 일이 뭐가 있지?”
“역시 오지랖일까... 그렇지만 늦게 자면 안 좋으니까.”
시무룩해진 얼굴이 귀여워서 그만, 잠시 흔들렸던 벨져는 괜히 헛기침하며 다가가 뺨을 맞췄다. 문을 잡은 손을 잡아 끌어당기자 순순히 끌려온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보던 루이스의 턱을 잡아 슬며시 들어 올리자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떨리며 살포시 감기는 눈이 예뻐 그 눈꺼풀 위에 짧게 키스한 벨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금은 서늘해진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와 마주 안아오는 팔. 허여멀건 얼굴이 미안해 죽겠다는 듯 울상을 지으니 화를 내기도, 억지를 부리기도 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참아준다.
“한 시간 주지. 그 때까지 침대 안으로 안 들어오면 한동안은 볼 생각하지 마라.”
벨져는 축 늘어진 채 올려다보던 루이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졸리면 그냥 먼저 자.”
“얼른 마치기나 해.”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루이스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뽀뽀하고는 도로 문을 닫았다. 베개를 정리하고 침대를 붙여 놓은 벨져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애꿎은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려댔다. 누굴 기다리고, 얽매이고 이런 건 천성에 맞지 않는다.
그 무엇 하나 맞지 않는데, 자꾸만 벨져 홀든 답지 않은 일을 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 애가 타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미련하고 바보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
사랑. 그래,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조차 길을 잃을 것 같이 짙은 어둠이 내린 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연인은 돌아올 줄을 모르고 시간이 갈수록 제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기다려놓고 그냥 자버리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내 영영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고 루이스가 그 방의 전등을 껐다.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에 일어나자 루이스가 먼저 벨져의 품에 안겨들었다. 꽉 끌어안은 채 벨져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다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지는 그의 등에 손을 얹자 루이스의 숨이 벨져의 목덜미에 닿았다.
“원래는 내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 무리했거든. 우리 만난 지 오래 됐으니까.... 그래서 하고 있던 일까지 같이 하느라 그래. 미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랬어.”
입술이 천 위에서 움직이는 감촉과 함께 조근조근,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자상하고, 그 목소리가 내뱉는 말은 더 듣기 좋았다. 그냥 바로 이렇게 말했으면 속을 썩이며 원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여전히 야속하고 서운하긴 했지만 벨져의 입가엔 그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풀어져버려서 김이 샜다. 벨져는 내심 끌어안은 채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루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바로 제 뺨과 뺨을 부비다, 그것도 모자라 연거푸 입술을 맞추는 그의 살가운 스킨십에 벨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해명이 너무 늦었단 생각은 안 드나?”
“사랑해.”
“흥. 말로만.”
“미안하다니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허리를 쓸어내리자 루이스가 얼굴을 붉히며 벨져의 팔을 잡았다. 한결 깊어진,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눈빛을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뭐야. 이러려고 기다린 거야?”
“당연하지.”
파자마는 입기도 쉽지만 벗기기도 쉬운 옷이다. 툭, 툭 단추를 풀며 쇄골에 입술을 묻자 루이스가 움찔 몸을 떨며 벨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읏, 잠깐. 나, 나 내일도 흣.... 하아....”
“원래 옷 선물은 벗기려고 하는 거라고, 그런 소리 못 들어봤나?”
“하으, 으응. 잠, 힛...!”
벨져는 잘 빠진 허리를 쓸어내리며 금세 오똑 선 가슴을 입에 담았다. 워낙에도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지만, 약한 곳쯤은 이미 훤했다. 골반에서부터 손끝을 미끄러트리며 바지 안으로 손을 넣자 눈을 감은 루이스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졸리면 둔해진다던데.”
짓궂게 웃으며 그의 중심을 잡고 주물거리자 루이스가 눈을 흘겼다.
“하고 나면 더 잘 잘 수 있을 거다.”
“안 해도 잘 잘 수 있거든?”
씨도 안 먹히는 허세에 벨져는 코웃음을 치고 루이스를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가 손을 뻗어 벨져의 목에 그의 팔을 두르며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열린다. 마침내 달디 단 인내의 결실이 맺히는 순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Night and Day (0) | 2016.10.06 |
---|---|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데샴님과 공성중에 풀던 썰이 너무 찰져서... 앙☆ au
기인 벨져 보고싶읍니다 시름시름
입학한 이래, 벨져는 곧 "기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차갑고 오만한 왕자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벨져의 태도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벨져 홀든을 경외시하게 만들었다. 벨져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격'이자 '품위'라고 표현했다. 난다긴다하는 외모와 재능을 가진 학생들 중에서도 벨져의 상대는 없었다.
입학하기 전부터 화제를 모은 터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벨져의 첫 무대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관객들로 채워졌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아무리 노력한들 타고나는 재능과, 그 태생은 바꿀 수 없는 법. 벨져는 자신을 둘러싼 작은 세상이, 다시 지루해지고 있었다.
한 명쯤은 기업의 이미지와 홍보를 위해 연예계에 있어도 나쁘지 않은 법이라며 흔쾌히 허락한 아버지는 금방 질릴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져에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쉬웠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후계자 숭업도, 아이돌로서의 가창력, 춤, 퍼포먼스도 전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이들을 뛰어넘는 경지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육체적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균형 잡힌 몸과 타고난 지능, 두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져에겐 못할 것이 없었다.
슬슬 그만둘까.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등교를 거부하던 중에 유닛을 통해 소문이 들려왔다. 편입이 없는 아이돌 육성과에 전학생이 온다는 소문은 벨져의 흥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 까다로운 입학 심사관과 임직원들이 편입을 허가한 것일까.
학 학년 위의 전학생이 왔다는 소리에 벨져는 오랜만에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소문의 전학생은, 벨져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이란 어딜 봐도 찾아볼 수 없고, 그냥 지나치다 한 번 돌아볼 것 같다는 게 전부다. 어딜 봐도 평범한 얼굴에, 침침한 후드.
벨져는 헛웃음을 치고 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전학생에게 다가갔다. 학 학년 위의 상급생 반이지만 개의치 않고 팔짱을 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을 내려다 봤다.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그 뿐이다.
이 학원에 발을 들였다는 건 곧 그 역시 아이돌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벨져는 전학생에게 넘볼 수 없는 격을 몸소 가르쳐주기 위해 대결을 신청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넘어가려 해도 소용없다. 교실이 술렁거렸고, 프로듀서 과의 여학생이 전학생의 어깨를 잡고 무어라 속삭였다. 벌써부터 스카우트를 하려는 속셈인지 몰라도 그녀의 말에 전학생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고, 벨져는 두 시간 뒤에 광장에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벨져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와 실력, 그 모든 것에 환호하는 팬. 아무리 프로듀서가 붙은들 결과는 같을 것이다.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벨져는 여유를 만끽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하고도 십 분 뒤, 벨져는 굴욕적인 패배에 무릎을 꿇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벨져가 졌다는 사실을 바꿀 순 없었다.
관객 속에서 누군가가 전학생을 영웅이라 불렀다. 우습지도 않은 별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비웃으려는 순간 객석의 관객들이 웅성거리더니 파도처럼 그의 이름 앞에 영웅이라는 말을 붙여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이었던,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승리와 대중이 등을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그들이 환호하며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이름은.
벨져는 도망치듯 스테이지를 내려왔다. 십육 년 만에 처음, 벨져 홀든의 자존심이라는 감싼 드높고 공고한 벽이 부서진 날이었다.
처음은 특별하다. 첫 키스, 첫사랑, 처음으로 시작하는 온갖 미사여구와 로맨틱한 말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처음은 특별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루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에 푹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보지 말고 말을 해.”
“드라마를 찍었다지.”
“왜. 또 뭐.”
“그 시간에 춤 연습을 하는 게 낫지 않나?”
루이스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한 숨 죽이며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족히 이미터는 넘어 보이는 담벼락에는 또 어떻게 올라갔는지, 멋들어지게 앉아있는 게 꼭 고양이 같았다. 사납고, 성질 더럽고, 예쁘긴 또 엄청 예쁜 고양이.
“그러니까, 난 아이돌이 될 생각이 없대도.”
“흥. 이미 아이돌인데 어떻게 다시 아이돌이 된다는 거지?”
여전히 말이 안 통한다. 기인은 재능이 특출나게 뛰어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라던 말을 떠올린 루이스는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사이 벨져가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놀란 나머지 무심코 뒷걸음질 친 루이스에게 가볍게 착지한 벨져가 다가왔다. 정말 고양이라도 되는지 그 높이에서 뛰어내렸으면서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는 게 여러모로 대단했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루이스의 앞에 선 벨져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귀한 도련님 아니랄까봐 잘 생기긴 또 무지하게 잘생겼다.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역시, 화려한 미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름답다는 건 같다.
벨져의 얼굴은 취향을 가리지 않고 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니 매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어도 이렇게 웃으면, 순간 가슴이 떨리는 것도 당연하다. 하는 행동이며 말이 다 재수 없어서 그렇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고 우아한 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에게 도취된, 얄밉기 그지없는 오만한 미소도 어쩜 이렇게 근사할 수 있는지. 루이스는 신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바로 따라와 거리를 좁히는 벨져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됐지만 그래도 불편하다고 의사 표현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왜.”
“곧 세시가 된다.”
“어. 알아.”
“기대되지 않나?”
“전혀?”
“이 내가, 참여하는데도?”
“사람 많이 오겠네.”
안 그래도 랭킹을 달리는 팬은 많고, 그들을 수용할 자리는 좁아서 다들 힘들어하는데 이번에도 벨져가 참전하면 팬들의 의욕이 꺾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벨져가 나오지 않는 이벤트 기간에도 '벨져님이 좋아하니까'라는 말로 '트릭스타'의 무대를 채우던 팬들을 떠오른 탓이었다.
야광봉 불빛보다 더 빛나는 눈이 과연 그의 팬답다 싶었다. 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같이 랭킹을 달리는 팬들이 어찌나 힘겨워 하던지, '트릭스타'의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팬은 다 팬이니까 이렇게 말하면 벨져의 '나이츠'와 자신의 '트릭스타'를 같이 좋아해주는 팬들에게는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첫 패배가 충격적이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벨져의 집착은 라이벌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라이벌이라기보다는 까의 성향이 짙은 빠에 가깝다고 할까.
루이스는 두 달 전 '트릭스타'의 이벤트 랭킹에 벨져가 내내 1위를 지키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가, 눈앞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루이스에게 벨져는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어려웠다. 다른 기인들도 있지만, 그 쪽보다 벨져를 상대하는 게 수 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미련하긴. 대화의 기본은 눈을 맞추는 거다.”
“자. 됐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든 채 내려다보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얼굴만 아니었어도 더 말을 섞지 않고 그냥 무시했을 텐데.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이 목울대를 울리며 넘어갔다. 얼굴이, 가깝다.
“저, 나, 그 라이브 준비도 해야 하고...!”
“흥. 네가 내게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
“그냥 내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안 되는 거야?”
“뭐, 별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트릭스타' 팬들이, 내 팬들을 불편해한다지.”
별 거 아니라더니, 내심 신경 쓰고 있던 핵심을 쿡 찌른다.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벨져를 바라봤다. 이 고고한 귀족 도련님께서는 그 역시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팬을, 그것도 타팬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그냥 받아들여라.”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감동을 했을 지도 모르는데, 결국 이 모양이다. 기대한 자기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루이스는 지난 이벤트 내내 1위를 차지한 벨져가 상태 메시지에 '네 첫 번째는 나니까.'라고 적어놓은 걸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기대도 안 했다.”
“무슨 소리지?”
작게 내뱉은 혼잣말에도 멋진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루이스는 시시콜콜 제 일에 간섭하는 벨져에게 신경 끄라고 말하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고 벤치에 앉았다.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우두커니 서서 벤치를 내려다보기에 루이스는 교복 마이를 벗어 벨져가 앉을 수 있도록 깔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루이스의 옷을 깔고 앉은 벨져가 다리를 꼬았다. 신은 정말 불공평해서, 외모도 재능도 머리도 팬도 돈도 다 가진 놈이 다리까지 길다. 루이스는 쭉 뻗은 다리를 보다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너울져 흔들리는 모양이 은실다발을 널어놓은 것 같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벨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시선만으로 떨쳐내기에 벨져의 시선은 늘 제게 붙어 떨어질 줄 몰라서,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루이스의 손을 멈추지 못했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릿결에 감탄하는 사이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서늘하고 가느다란 그 촉감은 루이스의 삶에서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비싸고, 아름답고, 좋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 그런.
왠지 간지럽고 쑥스러워진 루이스는 다시 머리카락을 만지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렸다. 밀어내지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줄곧 저를 바라보는 벨져의 눈에는 어김없이 자신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 말라는 말보다 침묵이 더 어색해 손을 내리려는데 벨져가 길게 콧소리를 내더니 루이스의 반대편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덕분에 벨져의 등과 머리를 마주하게 된 루이스는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마음껏 해도 좋다는 듯이 몸을 돌려준 의도를 모르겠다. 만져도 된다는 건지, 아니면 토라진 것인지 몰라 망설이는데 벨져가 흘긋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하고 있나.”
“으, 응?”
“줘도 못 먹는 멍청이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만.”
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 벨져에 울컥 짜증이 올라왔지만 루이스는 차마 예쁜 뒤통수를 쥐어박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신 예쁜 머리카락에 조심조심 손을 뻗어 어느 실보다 곱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다 어릴 적 고아원의 동생들에게 해주던 것처럼 한 줌을 쥐고 세 갈래로 나누어 땋기 시작했다. 늘 관리를 하는 머리카락은 한 번 꼬이는 일도 없이 비단실을 땋는 것처럼 사르르 거렸다.
입만 열지 않으면 이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는데. 라이브를 앞두고 저도 모르게 해버린 긴장이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람에 흔들려 피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간지럽고, 얌전하게 제 손길을 받고 있는 벨져가 새삼 예뻐 보였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이러고 있으니 정말 행복해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공들여 한 가닥을 땋고 손을 놓자 고정되지 않은 끄트머리가 슬며시 풀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등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니 벨져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미안.”
양손을 어깨 위로 들고 말하자 눈살을 찌푸리던 벨져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예쁜 뒤통수를 마주하게 된 루이스는 숨죽여 웃고, 벨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드르르륵,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면 이 귀여운 소꿉장난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세 시를 알리는 알람에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났다.
“먼저 가볼게.”
“그래.”
“나중에 봐!”
알람을 끄자마자 바로 걸려오는 토마스의 전화를 받으며, 루이스는 무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살랑 불어오는 바람. 흔들리는 네 머리카락이 나를 흔들고 네 모습이 눈에 번져가.
노린 건 아닌데 꼭 누구에게 하는 말 같다. 이번 신곡의 제 파트 가사를 읊조리며 한 사람을 떠올리고,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신루이] 여름, 좋아해?
커미션()으로 쓴 킹프리의 신루이
코알라님께 드립니다/ㅠ0ㅠ)/
다섯 시 삼십 분. 처음 만난 그 도로에는 항상 기다린 것처럼 돌아보는 그 애가 있다. 한편으로는 어딘가 이상하고 묘한 그 애가 돌아볼 때 짓는 미소는 달빛이 물에 비치는 것처럼 예뻐서, 그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 같은 건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루이 군! 나 기다렸어?”
“응. 난 언제나 신 군을 기다리고 있었는걸.”
“미안. 연습이 길어졌지 뭐야. 더운데 어디 그늘에서 기다리지 않고.”
미안해진 신이 뛰어오느라 차오른 숨을 고르며 걱정해도 루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희고 예쁜 피부가 여름의 햇살에 발갛게 익은 게 예쁘기도 하지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다. 뭐가 없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신은 아이스크림 노점을 발견하고 미안함에 굳혔던 얼굴을 폈다.
“루이 군. 아이스크림 좋아해?”
“아이스크림?”
루이가 처음 들어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걸이가 흔들렸다. 신은 루이를 그늘진 벤치에 앉히고 곧장 아이스크림 가게를 향해 뛰었다. 루이와 제 몫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서 내밀자 루이는 얇게 눈을 휘며 웃었고, 신은 그 옆에 앉아 머리를 긁적였다.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요리조리 보던 루이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정말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차가움과 달콤함이 퍼지며 커지는 눈이 꼭 예쁜 고양이 같아 웃음이 번졌다.
“루이 군은 꼭 고양이 같아.”
“내가?”
“아, 응. 그게, 음…. 그러니까….”
사람을 동물에 빗대는 건 역시 실례이려나.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는데 루이가 몸을 기울여 성큼 다가왔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노란 눈에 신은 숨을 집어삼켰다.
“어떤 점이?”
“루이 군은…. 뭔가 잘 설명할 수 없는 사람 같아. 잘 모르겠지만, 예쁘고, 그리고….”
왠지 말을 하면 할수록 부끄러워져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방금 사온 아이스콘이 있어서 더, 목이 탔다.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갈증, 루이와 멎지 않는 두근거림.
“그리고?”
“예쁜 걸 보면 만나고 싶어지고, 같이 있으면 무척 두근거려. 꼭 프리즘 쇼를 볼 때처럼 기분 좋은 떨림이 멈추지 않아. 으응, 그러니까 내 말은….”
“기뻐. 신 군.”
전해야 하는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아 횡설수설 하던 신은 루이의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르르, 햇살이 부서져내리는 것 같은 눈웃음에 머릿속이 비어버려서, 멀뚱히 그 예쁜 얼굴을 발라보다 한층 화사하게 웃는 루이의 미소에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너를 다 알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손을 차갑게 적시며 흐르는 아이스크림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으아, 휴지가….”
급히 닦을 것을 찾으려 주머니를 더듬는데 아이스크림콘을 쥔 손이 잡혔다. 조금 차갑고, 예쁜 루이의 손은 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어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눈꼬리를 올린 채, 눈을 마주하며 손등까지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핥는 루이는 아까와는 딴판이라 당황스러웠다.
루이는 녹아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다 핥은 뒤에도 신의 손가락을 할짝거렸다.
“저, 저기, 루이 군?”
“응?”
“아, 아냐. 이제 괜찮으니까 루이 군도 녹기 전에 얼른 먹어.”
신은 황급히 손을 빼냈다. 손을 뺀 뒤에도 몽글몽글하고 간지러운 감촉이 가시지 않아 몸을 살짝 옆으로 틀고, 루이에게 보이지 않게 슬며시 손을 문질렀다. 말랑하고 촉촉한, 그 감촉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때때로 루이 군은 이렇게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자신을 놀라게 만든다. 놀리거나 골탕을 먹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호의로 그런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몇 걸음이나 앞서가 있는 것 같다가도, 이렇게 갑자기 거리를 좁혀 다가와 마음을 흔들고 또 훌쩍 가버린다.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리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그런 초조한 기분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그 초조함이 마냥 싫지는 않아서 더 이상하고, 그래서 끝내 이도 저도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은 채로 이런 만남이 계속되고 있었다. 예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왔다가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면 그냥 다, 괜찮다고 하고 싶어진다.
신은 작게 숨을 토하며 다시 흘러내리기 전에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위에서부터 먹어치우는 저와 달리, 루이는 녹아 흘러내리려는 아이스크림의 밑을 할짝거렸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루이를 흘긋거리는데 루이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벌렸다.
늘 예쁘게 웃어주는 루이의 무표정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해가 쨍쨍한 대낮인데도 왠지 야릇한 기분이라 멋쩍어진 신은 괜한 아이스크림콘만 와작와작 씹었다. 뺨이 화끈거리고 더운 게 아직은 그래도 여름이구나 싶었다. 미친 듯 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다.
왜 이럴까. 자꾸만 머릿속에 방금 본 루이의 옆얼굴과 도톰하고 달콤할 것만 같은 입술이 떠올라 신은 손부채를 부치며 흐르는 물을 바라봤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저, 루이 군은 여름 좋아해?”
“신 군은? 여름, 좋아해?”
“응! 좋아해! 올해는 특히 더! 루이 군을 만나서 처음으로 프리즘 쇼를 보고, 오버 더 레인보우 선배님들을 만나고, 에델로즈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를 체험할 수 있었는걸! 그래서 루이 군에게 고마워. 그 날 루이 군을 만나지 않았으면 세계가 이렇게 반짝이고 있다는 걸 몰랐을 거야.”
프리즘 쇼를 보고 오던 길, 늘 오가던 거리가 찬란한 빛에 물드는 그 광경. 동경과 치기 어린 충동으로 뛰어오른 그 순간 피부와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과 반짝임.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를 웃게 만드는 프리즘 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 신은 주먹을 꽉 쥐고 루이를 바라봤다.
“기뻐.”
“응?”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었어.”
고개를 숙이고, 엷은 미소와 함께 숨을 들이마시며 시를 읊조리듯 작지만 또렷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그 날의 너를 잊지 않아.”
벤치에서 일어나 양손을 허리 뒤에 모은 채 천천히 걸으며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꼭, 반딧불을 따라간 그 날을 떠오르게 했다. 무언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어딘가 아련하고, 애틋한, 짙은 그리움이 배인 것만 같아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뛰어넘는 마음이 있어.”
루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뱅글 몸을 돌려 신을 마주한 루이가 작게 웃었다.
“이 다음은 신 군이 말해줬으면 좋겠네.”
“으응? 아, 혹시 노래… 가사… 야?”
“알고 있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라서. 나, 책은 교과서밖에 안 읽고.”
부끄럽지만 사실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웃자 루이가 생긋 미소 지었다. 눈을 반짝이며 허리를 숙여 다가오는 루이와 얼굴이 가까워져, 신은 작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깜빡거렸다.
“기대할게.”
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루이는 신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고는 홱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후련해진 것만 같은 미소와 함께 돌아선 루이는 싱그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팔을 나풀거리며 뛰어갔다. 예쁘게 땋은 머리가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신은 피식 웃으며 도로 벤치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역시 루이 군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즐겁다. 즐겁고, 두근거리고, 설레서, 이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응. 좋아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일어나 가방을 고쳐 맸다. 집으로 가는 길을 걸으며 루이가 한 말을 곱씹다 우연히 바라본, 물에 닿아 반짝이는 저녁노을에 멜로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멈춰 섰다.
“나는 지금, 너를 만나고 싶어.”
루이가 하려다 만, 다음 가사. 신은 내일 만나면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노을이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흥얼거리는 노래의 멜로디와 노을에,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그 애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무희
제 사랑 소찌님께 드립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뜨면, 햇살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남자가 한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흘러내린 은발과 우아한 얼굴, 탄탄한 몸이 어우러져 내뿜는 아름다움이란 감히 인간에 비할 게 아니다. 그 완벽한 남자를 눈앞에 둔 평범한 사람, 루이스는 오늘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비볐다.
“일어났으면 깨우지.”
“잘 자길래.”
“그럼 커튼이라도 쳐주던가....”
투덜거리며 목을 벅벅 긁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벨져가 루이스의 손이 다녀간 자리에 입술을 맞췄다. 어젯밤 그렇게 물고 빨아댔으니 분명 붉게 잇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다. 굳이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뻔했다.
입을 맞추더니 은근슬쩍 손이 허리를 더듬는다. 아무리 벨져가 예쁘다지만 밤새 시달린 것도 모자라 아침부터 달라붙으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저리 가라고 손을 내젓자 손을 잡고 손바닥이며 손목 안쪽을 진득하게 핥고 깨무는데, 채 잠이 다 깨지도 않은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으..., 그만해. 해가 벌써 중천에 떴어. 일어나.”
“우리가 어제 막 돌아왔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래도 인사는 드리고, 읏. 하지 말라니깐.”
짜증과 함께 인상을 쓰자 벨져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팽 토라졌다. 루이스는 못 이긴 척 벨져에게 키스하고 몸을 일으켰다. 얇은 이불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위로 미끄러지며 내려가고, 대충 벗어던진 옷을 집어 들었다. 흰 몸에 걸친 옷은 하렘의 여인네들이 입을 법한 하늘하늘한 옷이 아닌 평범한 무명옷이었다.
흰 무명천으로 몸을 가리고, 허리끈을 조인 루이스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달빛이 비칠 정도로 얇은 장막을 걷었다. 동이 튼 뒤로 줄곧 주인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시종들이 세숫물이며 수건, 향유와 옷을 들고 들어오고 벨져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을 걸 그랬어.”
“그럼 네가 좋아하는 비단옷도 못 입을 걸. 하루에도 몇 벌씩 갈아입으면서. 이번 달에만 비단 값으로 얼마를 썼는지 알기나 해?”
“내가 알 반가?”
옷을 입히는 시종들이 분주히 손을 놀리는 사이 벨져가 돌아보며 오만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지독히도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깟 비단 몇 필 쯤이야 얼만든지 써도 아깝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사치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아. 그럼 하렘에 내리는 거라도 줄여. 한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면서. 기껏 잠자리 날개같은 비단옷을 입어도 네가 안 가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번엔 얼굴이라도 좀 비춰.”
아침부터 잔소리를 한다고 뭐라 할 줄 알았더니, 벨져가 피식 웃으며 다가와 루이스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하렘에 가라고 닥달을 할 때면 짜증을 내거나 토라지는 것과는 영 다른 반응이었다.
“네가 그렇게 차려입고 내원에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갈 거다.”
“웃기지 마.”
“진심이다만.”
“그럼 당장 국정이 엉망이 될걸.”
“그래서 널 거기 앉히는 대신 이렇게 안고 있지 않나.”
뒤에서 루이스를 끌어안은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가슴팍을 더듬었다. 어젯밤 그렇게 만져놓고 또, 그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옷감에 쓸려 곤두서있던 유두에 신경이 몰렸다. 튀어 나오려는 비음을 누르고 째려보자 벨져가 씩 웃으며 입술을 맞추더니 루이스의 가슴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이번에 하사받은 비단은, 전부 널 주마.”
“줘도 쓸 데 없거든? 네 옷이나 해 입어.”
“투명한 달빛같아서, 걸쳐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최상품이라더군.”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남의 얘기는 한 마디도 들어먹질 않는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고 뒤에서 저를 끌어안은 벨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이미 네 옷을 만들라고 시켰다.”
“...왠지 불길한데.”
“그걸 받자마자, 네 생각이 나더군. 꼭 입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하면 설레는 줄 아는 걸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안타깝게도 정답이다. 루이스는 터질 것 같은 심장소리가 부디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심호흡했다. 가슴을 덮었던 벨져의 손이 빠져나가고,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가라앉았다.
“쉬고 있어라. 약 바르고.”
“다녀와.”
“금방 다녀오겠다.”
제법 자상하게 입을 맞춘 벨져가 원정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침실을 나서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침실에 홀로 남은 루이스는 도로 침대 위에 풀썩 누워 이불을 끌어 당겼다.
벨져가 최근 몇 년간 원정을 다니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느라 궁에 붙어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돌아왔는데도 하렘에 가지 않는 건 문제다. 다른 것보다 후계자 문제나, 저마다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부인이며 첩들의 가문에도 눈치가 보일 때였다.
남자, 그것도 근본도 없는 고아에 노예 출신이 벨져 홀든의 제 1 책사라는 것만 해도 말이 많은데 거기에 실은 그 천것이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지면 곤란한 건 어디까지나 벨져다. 물론 지금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그래도 그동안은 원정에 전장에 나가니 그럴 수도 있다고 눈 가리고 아웅이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원정을 끝으로 벨져는 더이상 원정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밖으로 돈 시간보다 더, 그의 무공은 혁혁했고, 다이무스와 황제 자리를 두고 경합을 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영락없이 낀 루이스는 어느 쪽이 되어도 곤란했다.
노예로 팔려가던 루이스를 거둬준 건 어디까지나 그 날 제가 팔리는 도시를 정복한 다이무스다. 얼굴이 희고 곱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손님을 받는 교육을 받아 비싼 값에 팔릴 예정이었던 루이스는, 노예 상인이 마지막에 내놓기 위해 준비한 상품이었다.
하루, 한 시간, 단 십 분만 늦었어도 그대로 이름 모를 부자에게 팔려 성노예로 부려지다 질리면 사창가에 팔릴 운명을 바꾼 건 다름아닌 다이무스 홀든이다. 출신도 없는 노예를 거둔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본래 시장에 팔린 용도로 쓰는 대신 시중을 들게 했다. 한 발 먼저 물을 준비하고, 날씨나 기분에 맞춰 다른 차를 대접하는 사소한 것들을 눈여겨본 다이무스가 글을 가르쳤고, 루이스는 그제서야 제가 꽤 영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면밀히 주인을 살피고 돌보는 것도 여느 노련한 시종 못지 않지만, 루이스의 진정한 가치는 중요한 순간에 내놓는 책략과 전장과 군사를 휘어잡는 데 있었다. 그걸 알아본 다이무스는 곧 루이스를 옆에 끼고 다녔고, 그게 한창 다이무스의 것은 죄다 뺏으려던 벨져의 눈에 띠었다.
그때는 정말, 이렇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루이스는 거진 십년이 넘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처음 궁에서 만난 벨져는 사납고, 예쁘고, 성질 못된 흰 고양이 같았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건 덤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바람에 다이무스가 곤란해진 것도 한두번이 아니고, 루이스가 시달린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눈이 맞아버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풀 수 없는 난제다. 루이스는 주인 없는 베개를 끌어안고 코를 묻은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가 쓰는 향이 나서, 꼭 지금도 옆에 있는 것 같다. 앞으론 이렇게 혼자 보내는 밤이, 낮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동안 누린 게 있으니 이제는 기다림과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했다.
하렘의 여인들은 전부 그렇게 살고 있다. 조금 울적해진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엔 머리론 알아도 가슴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쓸데없는 생각일랑 나중에 하자는 생각으로 도로 눈을 감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인사만 하고 온다는 것이 얘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황후 궁에서 점심까지 먹고, 잠깐 얘기만 나눈다는 게 길어져 해가 지고 연회가 열렸다. 이럴 줄 알고 어젯밤에 욕심껏 그만 하자는 사람을 붙잡고 해댔지만 얼굴 볼 짬도 안 날 줄이야. 옷을 갈아입겠다는 핑계로 돌아가려 해도 옳다구나 하며 후궁들이 달려들었다.
꼼짝없이 사로잡힌 벨져는 결국 황후궁에서 옷을 갈아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어머니가 제 생각을 하며 만들었다는 옷은 물론 흠 잡을 곳이 없지만, 아침부터 내내 혼자 있을 루이스가 마음에 걸려 연회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 마침내 연회가 끝나고, 세력가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는 일을 대충 마무리 지은 벨져는 바로 루이스가 기다리는 침실로 향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절로 걸음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시종들을 물리고, 세차게 문을 연 벨져는 불도 켜지 않은 휑한 침실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불을 밝히지 않은 건 시종들이 일을 게을리 했다는 증거다. 당장 매질을 해도 시원치 않지만 그런 것쯤은 루이스를 찾아 밤을 보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정원 쪽 문에서 달빛이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기에 벨져는 바깥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연회가 끝났다는 걸 알렸을 테니 어딜 갔더라도 지금 이 시간엔 와있어야 한다. 오늘 아침에 다른 여자를 안으라더니, 정말 숨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싫은 가정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정원 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슬쩍, 그리로 고개를 돌리자 달빛을 등진 그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창틀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늦었네.”
“...잘 어울리는군.”
루이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숙인 덕에 머리에 쓴 베일이 따라 내려오며 바람에 흔들렸다. 잠자리 날개보다 얇아, 달빛을 실로 자아내 만든 천이라더니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흰 피부가 훤히 비쳤다. 넘실거리는 베일을 들어올려 그 안에 들어가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입술로 입술을 물고, 두 사람 사이에 숨이 오갔다.
“밖에서 입을 옷은 아니더라.”
“흥. 당연하지. 그 꼴로 어딜.”
“흣. 잠깐. 그 전에.”
옷을 선물하는 건 그 옷을 벗기겠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법. 입은 줄도 모를 정도로 얇은 천 위로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가슴에 입을 맞추려는데 루이스가 벨져를 밀어냈다.
“생각을 해봤는데,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더라고.”
무엇을. 이라 묻는 눈빛에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짚고 발끝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창틀에서 순순히 끌려오는 벨져의 품으로 안기다시피 내려간 루이스는 베일 안에서 뺨을 맞대고 속삭였다.
“기왕 이렇게 입은 김에 보여줄까 하는데....”
나긋한 목소리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보석보다 더 푸른 눈동자가 강한 열망을 품고 제게 향하는 게 기쁘지만, 지금은 입을 맞출 때가 아니었기에 루이스는 벨져를 침대에 앉히고 물러섰다.
“그래도 연습은 조금 했는데, 많이 어설플 거야. 그냥.... 그러려니 해.”
“기대되는군.”
무희나 입을 법한, 속살이 다 비치고 하늘하늘하게 넘실거리는 천에 감싸인 루이스가 맨발로 차가운 돌바닥을 딛고 섰다. 주인을 기쁘게 하는 노예의 덕목 중에는 여러가지가 있는 법이고, 높으신 분들의 노리개가 되려면 글은 몰라도 춤이나 노래는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천천히, 벨져가 없는 시간동안 연습한 동작을 되새기며 몸을 움직였다.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음악 삼아, 쏟아지는 달빛을 조명 삼아 몸이 기억하는대로 동작을 이어갔다. 유려하게, 미소를 잊지 말고, 손끝과 발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워,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추는 춤. 제게 향하는 눈빛이, 숨을 쉬는 것조차 방해가 될까 숨소리마저 죽이는 그가 집중하는 만큼 루이스도 춤을 추는데 빠져들었다.
연습할 때와 다르다. 기억을 좇는 데 급급했던 그때와 다르다. 비록 무수한 매질 끝에 겨우 몸에 새긴 춤이지만, 그때와 달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해가며, 피와 땀을 흘려서라도 배워서, 지금 이 사람에게 이 춤을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쓸모없는 일이 아니었다. 십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의미를 찾았을 뿐.
마지막 턴을 끝으로, 루이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춰섰다. 내내 힘을 준 종아리와 일자로 펴고 있었던 발목이며 팔이 저려왔다. 깊게 숨을 내쉬며 풀썩 들어올린 손을 내리자 벨져가 푹, 숨을 내쉬며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렸다.
“큼. 흠.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벌써 배운지 십년도 넘었지만, 뭐. 기왕이니까 보여주고 싶었어.”
벨져는 쑥쓰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에게 손을 뻗었다. 바로 다가와 제 무릎 위에 걸터앉는 그의 몸에서 나는 열기는 행위 중의 온도를 닮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벨져는 루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일단 좀 씻고.”
“어차피 다시 이렇게 될 거다.”
“그래도, 읏. 비싼 천이라며.”
“내 제일무희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뛰어난 책략가에, 뭐 사사건건 귀찮게 굴기는 하지만 그래도.”
루이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지만 벨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기념할만한 날에는 더더욱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벨져는 천 위로 루이스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구멍을 더듬었다. 회음부를 진득하게 쓸어 올리며 시선만 올려 씩, 웃자 숨을 고르던 루이스가 확 얼굴을 붉혔다.
루이스가 제 얼굴에 약하다는 것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벨져는 가슴을 덮은 천을 위로 끌어올리는 대신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한 쪽 가슴을 입에 담았다. 다급히 어깨를 잡으며 흘리는 비음은 익히 들어본 것이다. 어떻게 만져주고, 언제 어떻게 해야 기뻐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가 이렇게 기특하게 나와 주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벨져는 얇은 비단 위로 솟는 루이스의 중심을 잡아 흔들며 엉덩이를 주물렀다.
“흥, 앗. 으읏, 벨... 흣. 이거 벗고...!”
“하, 이러려고 입힌 거다. 원하던 것 이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지.”
“익..., 너 이....”
“짜증내는 얼굴이 야하다고 얘기 했던가?”
쪽, 찡그린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웃자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프긴 하지만 그래봤자 손톱자국을 내는 앙탈 정도다. 벨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돌려 루이스를 침대 위에 눕혔다. 달빛을 받으며 춤추는 루이스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서 한시라도 빨리 그를 꿈결이 아닌 제 품에 가두고 싶었다.
“그럼 어디 오늘도 해가 뜰 때까지 해보자고.”
“이 미친 새끼야!”
“황자에게 미친 새끼라니, 춤을 춘 상으로 그 불경죄는 이번에만 특별히 넘어가주겠다.”
“....하아. 내가 미쳤지, 그래. 내가 미쳤다, 미쳤어.”
“그만. 집중하도록.”
벨져는 체념한 듯 축 늘어진 루이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의 손을 잡아 목을 안게 했다. 삐진 척을 하는 것도 귀엽다. 웃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와, 벨져는 연인을 꽉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이걸로 끝!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었다. 고민에 빠진 탓이었다. 밥 한 끼 정도가 뭐 대수랴 싶겠지마는, 같이 먹는 사람이 다이무스 홀든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냥 때우는 식사는 어림도 없고, 적당한 선이라고 하면 죄 데이트 코스뿐이다. 형편 상 예약제 레스토랑을 잡을 수도 없으니 도무지 어디에서 뭘 먹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챙겨준 건 고맙지만, 말 한 마디로 충분히 끝날 일이 아닌가.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그냥 상투적인 인사로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이스가 아는 다이무스 홀든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식사 한 끼는 좋든 싫든 대접해야 한다.
사실 그냥 모른 척 하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이글은 '뭐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냐. 그냥 쌩까.'라고 했지만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처지에 그게 될 리가 없다.
이제는 말투만 닮아가는 게 아니라 목소리가 자꾸만 겹치는 바람에 해야 하는 말도 헷갈리는 판국이다. 다이무스가 할 말을 제가 하질 않나, 말해놓고도 뭐가 잘못된 줄 모르다 뒤늦게 깨닫질 않나, 아주 엉망이다. 당황한 나머지 옆에 눈치를 살피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다이무스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쿡쿡 찔렸다.
역사를 읽으러 서점에 들르는 사람보다 물건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못 알아챌 법도 한데 다이무스는 조금 느릴지언정 루이스의 시선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양심이 찔리는 거라고, 전에 진 빚을 갚아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낮고 진중한 그의 목소리에 설렌다거나,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백날 생각만 해봤자 소용없지만.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고 다이무스를 등지고 섰다. 의식하지 말자. 새로 개장한 인도 음식점이 꽤 괜찮다던데. 맛에 까다로운 카리나와 본토 사람인 라즈도 호평을 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이 끝나면 꼭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을 고쳐 쥐었다.
오늘만 아홉 번째. 저를 보다 눈이 마주칠라 치면 바로 홱 돌아가 버리는 게 오늘만 꼭 아홉 번이다. 제 눈치를 보며 신경을 기울이는 그 모습이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이제 그만 뜸 들이고 말을 걸어주었으면 했다.
이번에도 아닌가. 인가 아닌가 흔들리는 것도 슬슬 지친다.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은 분명 전장에 나서는 이에겐 칭찬할만한 덕목이지만 지금은 그 신중한 성격이 꽤, 답답했다. 속 시원히 말 좀 하라던 막내의 말에 이런 식으로 동조하게 될 줄이야. 다이무스는 하루만 더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짜증을 내는 능력자의 말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봤자 소용없는 말 뿐이지만 그 역시 고객의 한 사람.
다이무스는 제게서 등지고 돌아선 그를 흘긋 바라보고, 소위 진상이라 하는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여 사업은 홀든만의 사업이 아니라, 헬리오스의 클랜사무소와 연계된 일이다. 언성을 높이며 시비를 거는 능력자를 차갑게 내려 보며, 다이무스는 이미 몇 번이고 설명한 정해진 규칙을 설명해주려 했다. 그가 들먹인 이름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연합의 영웅을 들먹이며 이따위로 나오면 연합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주고 있자니 짜증보다 피로가 몰려왔다. 그 영웅이 바로 옆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나가던 능력자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은행 앞에서 시비가 붙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연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가 엮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자 의기양양하게 언성을 높이던 그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잡았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 입에 담아도 될 이름이 따로 있다. 이따위에 검을 뽑을 필요도 없다. 다이무스는 그를 내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발끈한 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두꺼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놓으시죠.”
“넌 또 뭐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찾더니.”
엷은 쓴웃음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슬며시 흐르는 냉기에 지켜보던 갤러리도 숨을 집어삼켰다.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제 멱살을 쥔 그가 잠시 굳었다가, 마른침을 넘기며 손에 힘을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을 먹다니 방금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연합으로 가시죠.”
“뭐,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아뇨. 모르는데요.”
“뭐 이 새끼야?!”
작은 개가 크게 짖는 법이라 했던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쥐었던 손이 이번엔 루이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얼어붙었던 갤러리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멱살을 잡힌 루이스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냥 어리고 순하게만 보이는 얼굴이, 잠시 앞머리를 올린 것만으로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서점 직원 루이스 대신 영웅 루이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독서를 권하던 사람이 아니다. 눈빛만으로 공기를 얼리고, 좌중을 압도하는 그 기백은 평범한 사람이 따라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의 영웅. 루이스.
이 광장에, 이제 그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다이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하다. 공성에서 마주치더라도 가급적이면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를 그저 그런 능력자가 당해낼 리 없다.
“이거, 놓으시죠.”
“윽.... 서, 설마....”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몰라도, 사무실에 가면 당신이 어느 소속의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그의 팔을 잡은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막힘없이 흐르는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해서, 이 상황을 모르고 들으면 친절한 상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루이스의 얼굴에서 호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가운,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이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무표정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자 그가 뒷걸음질 쳤으나 루이스의 손은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숙여 다가가 아이를 대하듯 눈을 맞췄다.
“자, 잠깐. 아니,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그게....”
겁에 질린 능력자가 루이스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아무리 상대가 에이스 능력자라 한들 공석에 있으면 함부로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란 그 얕은 믿음 하나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던 자가,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빈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거리에서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러났다. 건넨 것은 아마 일종의 경고였겠지만, 어딘가 위험하고 선정적인 그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제의 능력자는 발이 언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서점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건 덤으로, 그를 바라보던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단하군.”
“별 거 아닙니다.”
“뭐라 했나.”
“그것도, 별 거 아닙니다.”
석연치 않은 대답에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지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층계참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내민 채 위의 상황을 염탐하던 드렉슬러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쏙, 아래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 상황을 지켜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회사에 가면 또 이걸로 귀찮게 굴 게 뻔하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가 있었던 층계를 노려보다가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책을 집어 든 그를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호기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지고, 덕분에 골칫거리를 하나 치운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그 자신을 위해, 연합을 위해 했다는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끼어든 이유가 듣고 싶었다.
“어째서지.”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냐고 묻는 거다.”
“...제가요?”
책을 읽는 척 하던 루이스가 손을 멈추고,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에, 어째서인지 다이무스는 조금 즐거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내려 잠시 고민하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모양이 좋은 손가락이, 일전에 몰래 맞춰본 그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그만 일전에 맛본 감촉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는 숨을 집어삼켰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가.”
“경께서는 왜 제가 화를 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건....”
이번에 말끝을 흐린 건 다이무스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예뻐서,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망설이는 중에 루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은 초승달처럼 얄쌍하게 눈을 휘며 짓는 미소가 예뻐, 입을 다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녁을 함께 하며 얘기하도록 하지. 본의 아니게 수고를 끼쳤군.”
“아, 아닙니다. 그리고 식사라면 지난번에....”
금세 당황하는 루이스의 반응에 이번엔 다이무스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무심코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다이무스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잡아먹지 않는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새로 생긴 인도 음식점이 괜찮다더군. 혹시 그쪽 음식은 별로인가?”
“아, 네.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당혹이 가시고, 안도가 대신 묘한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다이무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요즘 부쩍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던 아이들의 말이 떠올리고 흘긋, 그 사소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을 바라봤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덴 것처럼 피해버렸지만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신호다.
거리는 천천히 좁혀 가면 되는 것이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목소리가 섞이고 겹친다. 그 간지러운 울림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취중진담
밤늦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급히 달려간 디시카 근처의 한 펍은 좋게 말해도 품위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린 건 공간 자체에 짙게 밴 술 냄새와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거나하게 취해 널브러진 사람들 탓이 더 컸다. 가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벨져는 바닥에, 테이블에 뻗은 연합의 능력자들을 지나 제게 손을 흔드는 혈육에게 다가갔다.
오후에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다 헤어진 연인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엎드려 자고 있는 걸 보는 건, 펍의 공기와 분위기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대놓고 인상을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벨져는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머리카락과 바에 달라붙다시피 한 등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상황을 방관한 것도 모자라 새벽에 저를 불러낸 녀석을 쏘아봤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잘못 없어. 멀쩡한 것 보면 몰라? 난 뒤처리반이라고!”
“용건만.”
“뒤처리반이 할 일이 다 그렇지, 뭐. 데려가.”
이글은 양 손을 어깨 높이로 들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등받이가 없는 원형 의자를 빙글 돌렸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며 발뺌하는 녀석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팔짱을 끼자 곧 이글이 다시 의자를 돌려 벨져를 마주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쉰 이글은 그 옆에 뻗은 사람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계속 형 찾더라.”
저를 찾더라는 말에 벨져는 잠시 이글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내렸다. 바와 한 몸이라도 될 것처럼 엎드린 사람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김없이 망할 후드를 입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더럽게 손이 많이 간다. 벨져는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과 함께 팔짱 낀 팔을 풀어 완전히 뻗은 그녀를 일으켰다. 축 늘어져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웅얼거리며 감았던 눈을 뜨는데, 평소의 총기와 서늘한 눈빛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흐리멍텅했다. 거기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풍기는 술 냄새는 덤.
그녀, 그러니까 벨져의 연인이자 연합의 영웅님께서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졸리고 취한 와중에도 눈앞의 사람을 확인하려 눈을 깜빡이다가 배시시, 이런 지저분한 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치는데, 이것만 봐도 얼마나 마셔댔는지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으응, 벨뎌어…….”
침대에서도 가끔, 저 좋을 때나 내는 콧소리와 함께 루이스가 안겨들었다. 머리와 몸을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은 루이스의 뺨이 붉었다. 안아 올려 달라고 투정인지 술주정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는 루이스의 머리를 받치고, 벨져는 한가롭게 위스키를 마시는 이글을 바라봤다.
“아, 또 뭐어.”
“다른 말은 없었나?”
“별 얘기 안 했어. 알잖아, 우리 영웅님 취하면 자는 거. 그냥 뭐……. 형이 얼굴만 예쁜 개새끼라는 거?”
벨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집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바 위에 툭 던졌다. 이글의 손이 냉큼 지폐를 가져가고, 벨져는 계속 안아서 데려가라고 칭얼거리며 제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안 마셨어. 쌩으로 위스키 두 병? 내가 오기 전에 뻗은 모양이더라고.”
용돈을 쥐어주자 술술 잘도 나오는 증언에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뺨을 잡아 올려 눈을 맞추고, 잘도 웃음을 흘려대는 그녀를 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이게 귀여워 보이니, 정말 답이 없다.
“속이 안 좋으면 바로 말해라.”
“뭐야, 천하의 벨져 홀든 경께서 그런 허드렛일도 한단 말이야? 우리 영웅님 대단하네~. 사랑의 힘?”
“토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버릴 거다.”
“으응…….”
짓궂은 농담에 차갑게 대답하면서도,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벨져의 손은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자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진 사람의 체온과 술 냄새가 훅 끼쳤다.
“간다.”
“조심히 들어가~.”
급하게 나오느라 몰랐는데, 밤공기가 꽤 찼다. 머릿속으로 루이스의 집과 거리를 계산한 벨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디 이대로 무사히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언제 역류할지 모르는 게 바로 술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루이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벨져의 목을 끌어안은 루이스가 벨져의 가슴팍에 뺨을 부비작거렸다. 평소에 이렇게 살갑게 굴면 좋으련만, 루이스는 애정을 표현하는 데는 영 서툴렀다.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루이스는 어떨지 몰라도, 벨져에겐 루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관계가 이어질 리가 없다.
매번 싸우고 다투고 잠시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도 다 사랑하니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만나면 하나가 되기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잃어버린 반쪽.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이 짠해 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음 같아선 어디도 못 가게 잡아두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욕심이지 루이스의 행복이 될 수는 없었다. 마음껏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 사랑이 뭔지 참 어렵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벨져는 기사단 쪽 일을 하느라 잠시 오스트리아에 다녀오느라, 루이스는 연합 때문에 이 주간 얼굴 한 번 못 보다 겨우 만났는데 만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서로 언성만 높이다 헤어져서 지금 이 모양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정말 결백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다 잠시 화장실에 간 루이스를 기다리는데 예의 그 거너가 접근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뿐이면 또 모르지만, 다짜고짜 예쁜이. 시간 있어? 라고 껄렁거리면 누구라도 시비를 건다고 생각하지 작업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대체 뭐가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부분은 건드린 것인지. 물론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벨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콤플렉스 덩어리에, 한없이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 빌어먹을 총잡이가 대뜸 옆자리에 앉아 척하니 팔을 제 어깨에 얹고 쫓기고 있으니 대충 말을 맞추라고 속삭이느라 얼굴을 가까이 했으니, 뒤에서 봤으면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그 순간에 이주 만에 하는 데이트를 생각했다.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되도 않는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사람이 신경을 쓸까봐 그냥 넘기려 한 것뿐이었다. 정말로, 오늘은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재미 좋냐는 천박한 말도 참아 넘겼건만 돌아온 건 루이스의 싸늘한 냉대였다.
루이스는 잠깐이나마 글래머의 금발 미인이랑 연인 놀이라도 해서 좋았냐고 빈정거렸지만, 벨져는 정말 그 점에 대해선 티끌 하나만큼도 죄가 없었다. 금발의 미녀가 아무리 많은들 루이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 그녀가 제 편을 들기는커녕,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는 바람에 덩달아 벨져도 빈정이 상했다. 차분히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먼저 생각하기엔 지쳐있었고, 결국 벨져와 루이스는 자기 얘기만 하다 헤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떨어져있는 내내 생각했지만, 벨져는 정말 억울했다. 제 편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며 믿어주지를 않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머리가 식으면 다시 전화를 하겠거니 싶어서 잠도 설치고 기다렸는데 걸려온 전화는 취한 사람 데려가라는 전화였다.
속상하고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풀어야지, 왜 그걸 술로 푼단 말인가. 미련한 사람 같으니. 그걸 또 받자마자 달려온 자신도 미련하긴 마찬가지다. 사랑. 그래,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벨져는 루이스를 고쳐 안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이 이렇게 찬데 아직도 반팔 티셔츠에 후드 한 벌이 전부라니 이 꼴로는 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빠른 걸음으로 루이스의 집에 도착한 벨져는 문 옆 화분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잘 열리지도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고 허름한 공간에 냉기가 감돌았다. 바람만 안 분다 뿐이지 밖이나 다를 게 없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벨져는 루이스를 침대 위에 눕혔다. 내려놓자마자 칭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루이스는 후드를 벗고,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등을 더듬거리는데 한 손으론 역부족인지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벨져는 한심해 하는 대신 루이스의 손을 잡아 내리고 그녀의 등 뒤에 앉았다.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어깨끈을 내리자 한결 편해진 얼굴의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바람에 날린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 익숙해진 것인지 전보다 술 냄새가 덜했다.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벨져는 동그란 이마에 키스하며 캐미솔 아래로 브래지어를 빼냈다. 하는 김에 꽉 죄는 타이트한 청바지도 벗기려 루이스의 다리를 무릎에 얹자 루이스가 꼼지락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바지까지 벗기고 나니 루이스는 까만 캐미솔 하나에 얇은 면 팬티 한 장 차림이라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벨져…….”
“속이 안 좋으면 당장 화장실에…….”
“미안…….”
루이스는 고개를 도리 젓다가 벨져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속을 태운 게 다 부질없어지는 사과에,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벨져는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루이스를 안고 좁은 침대에 누웠다. 피부 위, 옷 위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과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벨져가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허리를 토닥이는 것처럼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안겨 이따금 얼굴을 부볐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 심장 박동만이 정적을 채웠다.
“루이스.”
“응…….”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다.”
단호한 말투와 함께 손길이 멎었다.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어쩜 이렇게 한 점 흔들림 없이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사람인지.
다시 고개를 드는 자격지심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얼굴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루이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널 사랑한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
“벨져, 난…….”
“사랑해.”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게 전부 제 탓인 것 같아서. 언젠가 이런 제게 질려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처럼 당당할 수가 없었다.
“난……. 미안. 미안해.”
곧은 시선을 피할 곳이 없어 눈을 감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밀려드는 자괴감에 숨을 집어 삼키며, 루이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네가 언젠가 날 떠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루이스. 날 봐라.”
이 남자는 한 번을 봐주는 법이 없다. 숨고, 도망가고 싶어도 언제나 이 눈빛에, 목소리에 잡히고 만다. 이번에도 벨져는 봐 줄 생각이 없었고,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하지 않는 한 이 상황이 계속될 게 분명했다. 차가운 공기를 폐에 집어넣고,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한다.”
“난...!”
“사랑한다.”
“벨져, 그만…….”
“사랑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실어, 꾹꾹 눌러 새기듯 말하는 그의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으니 그제야 벨져가 루이스의 뺨에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하는 벨져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벨져의 팔을 잡았다.
“나도.”
“사랑한다.”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도, 벨져는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했다. 벨져 홀든은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도, 쉽게 사랑을 입에 담을 사람도 아니다. 루이스는 이러는 이유가 벨져의 얼굴에 있기라도 하다는 양 벨져를 바라봤다.
“내가 널, 사랑한다.”
“...무슨 뜻이야?”
“네가 아무리 자존감이 낮고, 못났어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이 벨져 홀든이 사랑하는 건 너니까. 알겠나?”
“...뭐야, 그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지. 물론 네 모든 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계속 눈을 맞추려 밀어내던 벨져가 이번엔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완벽한 벨져 홀든 경께서는 지금 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있을 리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고, 다른 사람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니 그 시답잖은 불안과 걱정일랑 할 필요가 없다고.
참 위로에 서툰 사람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파고들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도무지 솔직하지가 못하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에 담긴 갖가지 감정과 애정은 열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을 받고 그냥 입을 다무는 건 공평하지 않다. 루이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벨져의 얼굴은 어느새 퍽 자상해져서, 덩달아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늘, 자기가 사랑받는 걸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대.”
“그렇군.”
“그러니까 나도, 아마 계속 이럴 거야. 잠깐 괜찮았다가..., 또 불안해하고.”
“그 잠깐을 늘려나가면 된다.”
“...할 수 있겠어?”
벨져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 미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벨져. 벨져 홀든이다. 난 내가 원하는 건 전부 손에 넣어. 너도 예외는 아니지.”
“대단하네.”
도망가고 숨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단단히 잡고 놔주지 않는 그가 좋아서, 루이스는 고개를 쭉 내밀어 입술을 맞췄다. 몸이 맞닿은 온기에 술이 들어간 몸이 노곤해지고, 무거운 졸음이 다시 몰려왔다.
“벨져.”
“말 하도록.”
“사랑해…….”
루이스는 벨져의 몸 위에 엎드린 채 그의 탄탄한 가슴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허리를 감싸고 머리를 토닥이던 손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 입으로 몇 번이나 한 말이고, 안 들어본 것도 아닌데 또 느낌이 달랐다. 배시시 웃더니 기력이 다했는지 그대로 잠들어버린 루이스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벨져는 품에 안은 연인을 꽉 끌어안지 않기 위해 이를 물었다.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연인의 사랑스러움이란,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다.
오늘 쌓인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다 못해 행복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꾸만 광대가 올라가고, 웃음이 나와서 벨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그 누가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간 자기 자신에 대해선 한없이 무딘 사람이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심호흡한 벨져는 이불을 끌어당겨 루이스의 등을 꼼꼼히 덮었다. 아무리 취해도 기억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니 일어나면 분명 이불을 차겠지만,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것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아무렴, 장장 이주 만에 연인을 안고 잠드는 밤인데 그쯤이야. 좁고 불편한 침대도 상관없다.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해진 벨져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기대될 따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보이스를 내주는 바람에....22
은행의 실질적인 업무는 일반 창구 업무가 끝나는 4시부터다. 헬리오스의 에이스에서 은행원의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도 딱 4시였다. 그것뿐이라면 어떻게 병행할 수 있다. 문제는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 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씩이나 되는 사람이 창구 업무를 볼 위치에 있는 건 아니지만 트와일라잇이라고 하면 내로라하는 능력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아무리 능력자 등록제가 시행되고 있고, 연합과 회사가 관리를 한다고 한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이, 그것도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를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로부터 기간을 엄수해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어느 정도 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신뢰와 정확, 냉철함을 두루 갖춘 데다 능력자들에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이미 중역에서 그들의 임무를 다하기 바빴고, 그들을 고작 대여 업무나 시킨다고 트와일라잇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몇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는 자연스럽게 다이무스에게 돌아갔다. 이 결정이 가장 효율적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일감은 줄지 않고, 시간은 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업무에 은행 지부장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업무, 거기에 장비 대여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두말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건 그것이 다이무스 홀든의 책임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홀든의 직계, 그것도 장남의 위치란 그런 것이다. 두 동생이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으나 둘 다 제 역할을 다하긴 커녕 다이무스의 속만 썩이기 바빴다. 전에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졌다면 요즘은 그냥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의 업무를 마치려면 퇴근은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이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을 하다 사무실을 나왔다. 내내 앉아서 서류를 보느라 뻐근한 목을 돌리며 서점 앞을 지나려는데 문득, 걸음이 멈췄다.
이 시간까지 뭘 하기에 아직 불이 켜져 있나 했더니, 서점 안 의자에 널브러져 잠든 그가 눈에 들어왔다. 꼭 막내 녀석 같은 포즈로, 입까지 벌리고 자는 게 퍽 안쓰럽고 귀여워 서점 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깰 줄 알았더니 꽤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을 열어둔 채 불까지 켜고 불편하게 자느니 제대로 정리하고 돌아가 쉬는 게 나을 성 싶어 다이무스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낡은 경칩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 영웅씩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방비한 건 위험하다 못해 무모한 일이다. 이글이야 천성이 그런 녀석이지만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물론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루이스에게 실례되는 일이지만. 모름지기 평소 행실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심하다는 생각 대신 같은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이 먼저 들고 만다. 그런데 왜, 그 다음엔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다이무스는 한 손에 책을 안은 채 눕다시피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숙련된 검사인만큼 발소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정장에 맞춰 신은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고작 몇 걸음.
가장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깨우기 위해 뻗은 손이 멈췄다. 몸을 뒤척이며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몸을 모로 살짝 튼 채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입술과,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고른 치아에 그만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루이스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차마 다가가질 못했다. 아마도, 그때도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눈을 감으며 살짝, 닿았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그를 깨우려던 손으로 의자를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친애의 표시로도 하는 행위지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다이무스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고 화끈거리는 목을 매만졌다. 루이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고, 입을 맞추었다는 건 자신밖에 모른다. 다이무스는 헛기침을 했다.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데서 이렇게 잠든 걸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도무지 깨어날 줄 모르는 게 반가웠다.
잠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이무스는 본래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하기 위해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루이스.”
“으응…….”
“일어나라. 돌아가서 자도록.”
몸을 웅크리며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도리 저으며 깨어나길 거부하던 루이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다시 잠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루이스가 눈을 떠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에 조금 서운해지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피해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 큼. 크흠. 그, 다이무스 경....”
“퇴근하던 중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아, 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깨우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루이스도 급히 일어나 떨어트렸던 책을 줍다가 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발 앞서 나간 다이무스의 손이 루이스의 팔을 잡은 덕에 어디 부딪치는 일은 막았지만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괜찮나?”
“...네,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입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가 눈을 내리깐 채 작게 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무척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것으로 격려를 담아 인사하고 돌아섰다.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나가는 것 역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작 몇 걸음을 옮기는 게 아쉬워진다. 다이무스. 그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했다.
그런 기대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기다린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불러 세웠다.
“저....”
기대한 것처럼 이름을 불러준 건 아니지만 충분하다. 다이무스는 한 박자 쉬고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동안 낸 목소리만큼이나,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이 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려는 것 같아서 손에 든 서류 가방을 꽉 잡았다.
“감사합니다.”
망설임 끝에 겨우 입 밖에 낸 감사가 어찌나 기특한지. 그 자신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지.”
“네? 아, 예.”
“그럼.”
“좋은 밤 되시길.”
기분 좋게 서점을 나선 다이무스는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나긋한 목소리를 되새겼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피로가 반절은 덜어진 것 같다. 고작 몇 분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다. 상투적인 인사일 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다이무스 홀든에게 오늘밤은 그저 평범한 여느 하루와 같지 않아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시상에 다이무스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가 이토록 영감을 줄 수 있을까.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사랑스러운 간질거림이 피어올랐다.
그의 말 그대로, 좋은 밤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공식에서 갑자기 보이스 업데이트를 해주는 바람에 행복에 겨워 써보았습니다... ^ㅅㅠ
아마도 3부작
블록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씩 목소리가 겹치기 마련이다. 서점과 은행 사이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법한 골목 하나가 전부였고, 한가한 시간엔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목소리를 내봤자 듣는 사람은 그와 자신 단 둘뿐일 때도 빈번했다.
그러니 말투가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이스는 요즘 선배 목소리에 단호함이 느껴져서 덜컥덜컥한다는 토마스의 말을 떠올리고 왼쪽을 흘긋거렸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원인이었다. 서점보다야 은행 업무가 많으니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더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닮아가나? 루이스는 늘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와 말투다. 책과 종이를 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많지만 그래도 기본은 장사.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미소는 기본이다. 물론 재화와 물건을 대여해주는 그에겐 필요 없는 덕목이겠지만.
루이스는 사이퍼의 역사가 기록된 책을 덮고 벽에 기대어 섰다. 영웅이 되기 이전엔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게 소원이었고,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에 아무리 박봉일지언정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지금은 형편이 조금 폈다고 해도 뭐 하나 모자란 것 없이 살아온 그와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능력자에게 물건을 빌려주던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이지만 눈이 마주쳤다. 너무 빤히 본 걸까. 민망함에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넓은 광장과, 카페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 늘 보는 풍경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무게가 느껴지는 구두소리가 다가왔다.
“무슨 용무라도 있나.”
“아, 아뇨. 아닙니다.”
설마 하니 잠깐 쳐다본 걸 가지고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다이무스의 무표정은 여전했다. 워낙에도 표정에 변화가 많지도 않고, 사사로운 일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자신에 대한 모욕,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를 그냥 지나칠 사람은 아니었다. 무례한 짓을 한 건 자신이고, 그 시선에 불쾌했다면 응당 사과를 하는 게 맞다.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다.”
그럼 왜. 라는 생각이 튀어 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 얼굴은 읽기 어렵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예측할 수가 없다. 검은 그 사람을 닮는다 했던가. 검의 궤도를 읽기 힘든 것도 그 주인을 꼭 닮았다. 침묵이 이어졌으나 다이무스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답을 못 들었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마른 침을 넘기고 솔직히 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 고작 이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걸 싱겁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데 다이무스가 말해도 좋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라, 모르겠다. 루이스는 손가락 끝으로 두꺼운 책의 표지를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제 말투가 경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막상 말해놓고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얘기를 들은 거지 정말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의식한 게 민망해 뒷목에 손을 가져가는데 다이무스가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았다 뜨는 눈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실은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군요.”
“하루에 몇 시간씩 나란히 서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그렇지요.”
“그래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말에 수긍하던 루이스는 슬그머니 목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다이무스 홀든은 좋게 말해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필요한 것만 입에 담는 과묵하고 진중한 남자가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가는 게 낯설고, 그가 하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그런 인지부조화 끝에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당장이라도 입가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얼굴이 붉군.”
뺨에 다가오는 손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빼며 뒷걸음질 치다,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뒤통수를 감싼 루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쪽팔려 죽고만 싶었다. 그냥 뛰어내릴까. 얼굴을 향해 오던 다이무스의 손이 고개를 푹 수그린 루이스의 어깨 위에 내려왔다.
“괜찮나. 꽤 세게 부딪친 것 같다만.”
“네, 괜찮, 괜찮습니다.”
그냥은 가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온 다이무스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 속에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기류가 흘렀다. 다가올 것 같은 얼굴이 다가오지 않고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회색 눈동자가 어떤 열망에 흔들린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이무스가 눈을 감으며 물러났다. 어깨를 잡았던 손이 안타깝게 떨어졌다. 미련이 잔뜩 남은 것처럼, 손바닥이 떨어지고 손가락 끝이 쇄골을 스쳤다. 어안이 벙벙했다.
“조심하도록.”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뭐였을까.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있는 은행을 등지고 서 손끝으로 입술을 덧그렸다. 닿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그랬으면 왜 밀어내지 않았을까. 그는, 다이무스는, 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것인가.
뺨에 손을 댔다. 얼음을 계속 쥐고 있었던 것처럼 손이 차가운 반면 얼굴이며 목, 귀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