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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벨져루이] Notes
아픈 도련님 벨져(19)와 그 병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루이스(20)
언어의 장벽... 그것은 사퍼에게 묻는 것으로....☆
그리구 왠지 이것도 연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든....ㄷㅏ....
Day 1.
늦은 여름, 오스트리아 홀든 가의 저택엔 어김없이 햇살이 쏟아져 들었다. 짜증날 정도로 좋은 날씨에 아직 소년의 인상이 다 가시지 않은 청년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 볼 일 없는 교육수준에, 돌봐줄 사람도 없는 천애고아. 청년에게서 그나마 봐줄만한 곳이라곤 성실한 태도와 준수한 얼굴 뿐이었다.
든 것도 없는 짐가방을 가지고, 루이스는 성 같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죽하면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낼 정도일까.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저택의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건물의 외관도 그랬지만 안은 더했다. 이런 집도 이주면 익숙해지겠지만.
루이스는 앞으로 자신이 묵을 방을 둘러보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때 벗었던 모자를 내려두고 커튼을 쳤다. 식사 시간이며 생필품을 어디서 받으면 되는지, 자잘한 것들을 늘어놓는 집사를 향해, 루이스는 모두가 꺼리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은 어디에 계시죠?”
집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루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닳을대로 닳아서 감흥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청년은 차분한 무표정으로 집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비열하지도, 굽신거리지도 않는 영민한 하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집사는 흔들림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문제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명문 홀든 가의 가장 큰 고민이자, 조금 교육을 받은 것뿐인 고아 따위를 고용한 이유.
문을 두드리자 무언가 문에 맞아 깨지는 소리가 났다. 슬쩍 청년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무표정으로 서있었다. 집사는 아무 말 없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고, 청년에게 들어가보라 눈짓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문을 닫고 물러섰다.
눈 하나 깜짝 않는 게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버텨줄런지. 집사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방을 치우라고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밤중에 도망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문이 닫히고, 루이스는 슬쩍 방 안을 살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지만 성인도 아닌 아이에게 이렇게 큰 방, 거기에 욕실까지 딸려있는 큰 방이라니 과연 손 꼽히는 재력가 다웠다.
“하, 이젠 들여다 보지도 않는군.”
루이스는 허리를 숙여 하얀 도자기 파편이 깨져 나뒹구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큼직한 파편들을 모아 한 데 몰아놓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기 바쁘던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도자기보다 더 하얀, 소년인지 소녀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가 흉흉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노려봤다.
명백한 적의와 경계에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환자에 불과하다. 다만 그 환자가 상상도 못할 부자에, 권력까지 거머쥔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고, 사람을 아주 짐승같이 부릴 뿐이다.
“이렇게 물건을 던지면 다칩니다.”
“뭐야, 넌.”
“도련님의 열일곱번째 하인입니다. 아시겠지만 절 고용한 건 마님이고, 내쫓을 수 있는 것도 도련님이 아니라 마님이죠.”
“하,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루이스는 손을 털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엔 핏기가 없고, 있는 거라곤 귀족 특유의 오만과 거만, 그리고 분노 뿐이다. 그 분노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다. 그 대상이 된다는 게 더럽지만 이미 과분할 정도로 넘치는 돈을 받았다.
그 돈은 파산 직전이었던 수도원으로 갔고, 루이스는 앞으로 삼개월간 꼼짝없이 이 히스테리한 도련님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이주. 사람이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이주가 걸린다. 그게 결코 좋지 않더라도,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해준다.
“내기하시겠습니까?”
침대 위에 앉아있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결코 호의를 품지 않는 푸른 눈동자에, 루이스는 담담히 말을 이으며 다가갔다.
“제가 먼저 도망갈지, 아니면 도련님이 절 쫓아내는 게 먼저인지.”
“내가 얻는 게 뭐지?”
“글쎄요, 승리? 도취감? 뭐. 십 분도 채 안 가겠지만.”
“원래 말을 그딴 식으로 하나?”
“뭐, 도련님께서 공손하게 말씀하시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하인 치고 주제 넘은 발언이지만 이 방에는 그와 루이스 단 둘 뿐이었다. 앞으로 더한 것도 볼테니 거리낄 것도 없다. 간병인이며 하녀, 내로라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붙여도 채 일주일을 못 넘기고 도망치고 만다는 도련님이다.
밖에 떠도는 소문은 그렇다 쳐도, 집안 사람들까지 그의 호전되지 않는 병세와 신경질에 진력이 났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게 더 환자를 무력하게 만들고, 무력감은 곧 독이 된다. 열다섯까지만 해도 뛰어난 재능으로 촉망받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응당 화가 날 테고, 그의 형제들을 보면 자신의 것이었던 것이 떠올라 상실감과 분노가 끓어오르겠지.
“흥. 시궁창을 구르던 쥐새끼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길길이 날뛸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싸늘한 눈빛을 한 번 주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조롱 다음은 무시인가. 루이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벨져에게 다가갔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을 잡자 벨져가 손을 쳐냈다. 발끈해서 노려보는 그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고, 손등과 손바닥을 살핀 뒤 놓았다. 검을 잡았다던 손은 생각한 것보다 딱딱하고 차가워서 시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상처는 없군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도자기나 유리는 던지는 중에도 깨질 수 있으니까.”
“너....”
“손목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당혹, 혹은 짜증,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무언가로 얼룩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강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도자기 파편을 치우던 하녀가 움찔 놀라 루이스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친 루이스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어서 나가보라 눈짓했다. 침대에서 사는 것 치고 손이 맵다.
화끈거리는 뺨 대신, 루이스는 방금 제 뺨을 친 손을 잡았다. 발갛게 부은 손바닥을 확인하려는데 그의 손이 다시 날아들었다. 맞아주는 대신 손목을 잡아챈 루이스는 그를 내려다 보며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두 사람의 힘으로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련님. 이거 내리시죠.”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지 알아?”
“때리면, 그럼 기분이 좀 풀립니까? 아닐걸요.”
손을 놓자 다시 한 번 고개가 돌아갔다. 기왕이면 다른 쪽으로 때리던가. 그래도 양 쪽 볼이 퉁퉁 부은 채 흉한 몰골로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인 일이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도련님과 지내는 일은 더 고될 듯 했다.
“얼마든지 해보시죠.”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전 뭔가를 믿는다는 것에 회의적인 편인데요.”
“세 치 혀로 농간을 부릴 셈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걸.”
“앞으로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 전 말이 많은 편이 아닙니다.”
루이스는 목에 맨 타이를 풀고 하녀가 남기고 간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깨진 파편을 정리하고 있으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일어나는 대신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내기를 하자고 했지. 좋아. 받아들이겠어. 대신 조건이 있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 마주한 얼굴이 진지했다. 오가는 시선과 이어지는 침묵 속에 그가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지면, 평생 내 밑에서 일하도록.”
“안정적인 직업 제안 같은데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지.”
“그야 두고 볼 일이죠.”
“흥. 커튼부터 쳐. 빌어먹을 햇빛.”
그, 벨져 홀든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베개에 몸을 기댔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동작에 루이스는 내심 감탄하며 커튼을 쳤다. 얇은 여름 커튼 뿐인 제 방과 달리 얇은 커튼 옆에 두꺼운 커튼이 한 겹 더 붙어있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햇빛이 비치지 않게 커튼을 치고, 방 안에 있던 물병을 집어들었다. 옆에 놓여있는 수건에 물을 적셔 그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지 않았을 뿐 편안하게 누워있는 벨져의 손을 잡아 살짝 부은 손에 적신 수건을 갖다 댔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파편을 만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손을 적시고 호호 불어가며 식히는 동안 벨져는 손을 뿌리치지도 빼내지도 않았다. 사람을 부리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잘한 일 따윈 제 손으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가늘고 흰 손을 식히고 나서야 제가 그 사이 무릎을 꿇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친다.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손을 놓았다. 내내 내려다 본 건 자신일 텐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올려다 본 것만 같다. 루이스는 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서 물수건에 남은 물을 짜고 거울 너머로 흘긋 그를 바라봤다. 그 역시 자신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어 다시 눈이 마주쳤다.
숨 쉬기도 힘든 무거운 공기 속에 루이스는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필요해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타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루이스는 수건을 내려놓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가만히 앉아 눈을 살짝 내리 깔고, 손을 다리 위에 얹었다. 부르면 언제든 답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는 것도 하인의 일 중 하나다. 앞으로는 시간을 죽일 책이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구부정하게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이제 겨우 만난 것뿐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Day 2.
일 없이 가만히 있는 동안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건 좋은데 성질이 사나운 것 같다. 정말 예쁘다. 씻기는 동안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게 고역이었다
Day 3.
우리 도련님은 모시기 정말 힘든 분이다. 왜 다들 못 버티고 나갔는지 알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벨져가 예쁘다는 것이다. 돈때문에 하는 일이긴 하지만 사나흘이면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은데 그 얼굴을 보면 그래도 조금 참을만 하다.
Day 4.
어제는 책을 읽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더니 오늘은 또 괴테를 읽어달라신다. 내일부터는 손에 집히는 반경에 약통 외에는 두지 말아야겠다. 어제는 책에 맞았는데 오늘은 찻잔이 날아왔다. 맞진 않았지만 뭔가를 던지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신호다. 스케치용 연필이야 맞아도 주우면 그만이지만.
Day 5.
신경질과 짜증을 받아주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정신도 쉽게 지치기 마련이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
Day 7
일주일째다. 어제는 일기를 쓸 짬이 없었다.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들었다. 지금은 수면제와 진정제를 먹고 자고 있지만, 솔직히 이 일을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Day 10
하필 오른 손을 다치는 바람에 펜을 잡기 힘들다
Day 11
마님과 얘기를 나눴다 벨져의 상태가 부쩍 좋아보인다고 한다. 어디가 좋은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벨져는 마님을 닮았다. 주인어른은 뵌 적이 없다.
Day 12
노크를 깜빡했는데 그냥 한 번 슥 쳐다보는 걸로 끝났다 지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아름답다
Day 13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에 하인들이 수채 물감이며 유화 물감이며 캔버스를 날라다 내 방에 가져다 놓았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지만 착잡하다 벨져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한다 꽃을 보고 싶대서 꺾어온 장미를 병째 내던졌다. 손질이 다 되지 않은 장미 가시에 찔려서 그랬다고 하는데 변명인지 설명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어달라기에 빗질을 했는데 바로 짜증을 내며 꺼지라고 했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머리 빗는 것도 배워야겠다
Day 14
씻으면서 봤더니 몸에 멍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얻어맞는 것보단 덜하다. 오늘은 점심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안 먹으려는 걸 겨우겨우 달래서 한 스푼씩 떠먹였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벨져는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순수한 웃음이 아니라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보단 낫다 약을 안 먹는다고 뻗대기에 꿀을 잔뜩 넣은 차에 타서 먹였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Day 15.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이 주가 지났다. 까칠하고 까다로운데다 신경질적인 도련님과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깨지고 부서진 집기가 몇, 그 바람에 생긴 상처가 또 얼마쯤. 홀든 가의 하인들은 그래도 다른 도련님들이 안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루이스를 위로했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딱 이주가 걸린다. 그 시간은 지났고, 루이스는 벨져의 화법과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그의 변덕에 익숙해졌다. 그 역시 루이스에게 익숙해졌는지 노크 없이 방을 드나들어도 눈총을 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면 벨져는 일어나 피아노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책을 읽는 건 지루해 하기에 그럼 체스라도 두겠냐고 한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통산 전적 24승 23패. 짜증과 신경질로 무장하고 별 것도 아닌 걸 트집 잡아 시비를 걸던 벨져가 조용해지는 건 그 때와 잘 때 뿐이었다.
잠들면 그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가장 반짝일 시간에 이렇게 침대에 박혀 지내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의 수발을 드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지만. 이래서 돈이 좋다. 귀찮고 성가신 일을 미루고도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니까. 돈이란, 재물과 권력이란 일단 가지고 보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자신을 도닥였다. 벨져는 오늘도 어김없이 까다롭게 이 옷 저 옷을 벗었다 입길 반복했고, 벨져가 그나마 낫다고 하며 거울에 그의 몸을 비춰 볼 땐 녹초가 되어 찬 물을 들이켰다.
오늘은 산책을 가겠다며 나가기도 전에 체력을 뺀 장본인은 아주 큰 마음을 먹어주신 걸 감사히 여기라는 듯 뻐겨댔다. 그것 참 아주 감사한 일이네요. 라고 빈정거리지 않는 건 기특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쨌거나 마님은 벨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며 기뻐하고 있었고, 집사는 새로 하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홀든 저택의 사람들은 루이스가 떠나기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벨져조차도.
첫날 이후로 루이스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필요할 때 손발이 되어주고, 자잘한 일을 처리하고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루이스는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그만두고, 왜 밤중에 도망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아냥과, 아픈 구석을 쿡쿡 찌르는 날카로운 말투, 거기에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모욕을 주는 것까지.
벨져는 특권층이었고, 그가 가진 것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와 하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와 벨져의 태도가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그의 말이 무조건 맞는 척을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거리의 고아로 자라 온갖 것들을 보고 자란 자신도 가끔 울컥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는 주방에서 챙겨준 피크닉 용 도시락과 벨져의 약, 돗자리를 챙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양산까지 챙기고 나서야 벨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제 손으로 입히며 보긴 했지만 일곱 번이나 갈아입은 흰 셔츠 위에 감색 조끼, 베이지색 면 바지가 퍽 잘 어울렸다.
다른 하인 없이 단 둘이,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세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고, 벨져는 뒷짐을 진 채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벨져의 걸음이 멈추고, 루이스도 따라서 멈춰 섰다. 탐스럽게 핀 꽃을, 와인 잔을 들듯이 잡은 벨져는 부쩍 지쳐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쉬어 가자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푹, 숨을 내쉬며 꽃을 놓았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나?”
“아니오. 꽃은 잘 모릅니다.”
“...그래. 그렇군.”
“조금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들은 적이 없군.”
“아.”
루이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주 하고도 하루가 되도록 이름도 몰랐다 말인가.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루이스는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너라고 부르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루이스가 입을 다문 동안에도 벨져는 재촉하는 일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순순히 늦은 답을 내놓았다.
“루이스. 루이스입니다.”
“...격이 떨어지는 이름이군.”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도 아니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벨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가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해하며 홱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걷는데, 여전히 그 변덕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Day 16
어제 산책을 하고 온 뒤로 벨져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는다 헐레벌떡 가보면 그냥. 이라고 한다 내 이름에 노이로제가 걸릴지도 모르겠다 빗질하는 건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
Day 17
벨져가 자고 있다 하루밖에 안 됐는데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자다가도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깜짝깜짝 놀란다.... 여전히 잘 때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다
Day 18
차에 약을 타는 걸 들켰다 앞으론 어떻게 먹여야할까 길길이 날뛰는 벨져를 진정시키느라 펜을 들 힘이 없다
Day 19
큰일났다 아무래도 잠깐 존 것 같다 아닌 척 펜을 들었는데 벨져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무슨 말이 쏟아질지 안 봐도 뻔하다 꽃이라도 꺾어와야 할까
다행이다. 오늘의 빗질은 통과인 것 같다 머리카락이 가늘고 결이 좋아서 꼭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 그리고 씻길 때마다 생각한 거지만 정말 피부가 희고 깨끗하다 전에 생긴 상처인지, 오래된 흉터 몇개가 있는 게 아까울 뿐이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Day 20
오늘은 비가 와서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려도 벨져는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기에 다가가서 손을 잡았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머리를 기대왔다 창문을 닫는 대신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금은 자고 있다 일어나면 따뜻한 거라도 먹여야겠다
Day 21
벨져가 감기에 걸렸다 의사가 다녀 갔다
Day 22
열이 도통 내려가지 않아서 밤새 돌봤다 열에 시달리는 내내 내 손과 소매를 잡는 바람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열이 내려서 잘 자고 있다
Day 23
의사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자 벨져는 그딴 건 쓸모가 없다며 짜증을 냈다
Day 24
벨져가 마님과 산책을 나갔다 아무래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돌아와서 다시 열이 오를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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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글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제 영원한 레이디 아씨님께 드립니다...☆
“네. 접니다.”
“잘 들어갔나.”
“네. 아무렴요.”
“그래. 잘 자라. 사랑한다.”
“네. 저도요.”
액정에 뜨는 익숙한 이름에, 정해진 수순으로 흐르는 대화.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권태기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기다림에 조금씩 지치고, 끝내는 화를 낼 것도 없이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얼굴을 본 지 일 억 년쯤 된 것 같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가끔 하는 통화가 전부라는 게 씁쓸할 뿐이다.
이러다 헤어지는 걸까. 루이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침대에 앉았다. 솔직히, 지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우리 형이랑 사귀면 금세 나가떨어질 거라던 이글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한숨과 함께 침대에 누운 루이스는 찬찬히 머릿속에 집어넣은 시나리오를 되새겼다. 벨져는 배우로도 유능했지만, 감독이 더 적성에 맞는지 아직 젊은데도 휙 진로를 틀어서 지금은 메가폰을 잡고 있었다. 쉽사리 오케이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같은 씬을 다섯 번쯤 찍는 건 예사였다.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형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작업보다 지치는 건 사실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첫 번째 영화에 이어 두 번째 영화에도 주인공을 맡았다. 다이무스는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 번 질투나 실컷 해보란 심산으로 회사로 들어온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는 질투는 커녕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원거리 연애도,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루이스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별 네 개짜리 호텔답게 떡하니 들어있는 와인을 꺼내 잔을 두 개 가지고 성큼 방을 나섰다.
문을 두드리자 벨져가 문을 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루이스는 당당하게 벨져의 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뭐냐.”
“술 한 잔 하자고.”
“꺼져.”
“이러고?”
“그걸 아는 새끼가 이래?”
벨져는 인상을 쓰며 맞은편에 앉았다.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 한 장 달랑 걸친 채 슬리퍼를 신고 야밤에 감독의 방으로 들이닥친 주연 배우. 어디 잡히기라도 하면 그 날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다.
잔에 싸구려 와인을 따르는 루이스를 쏘아보던 벨져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기분이 안 좋으면 혼자 퍼마시고 잘 것이지, 왜 저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술만 마실 거라면 그렇게 싸고도는 후배 배우도 있다. 벨져는 혀를 찼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있어야 마셔?”
“내일도 촬영이 있다는 건 아나?”
“그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루이스는 눈만 올려 뜨며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풍류 없는 놈. 하, 실소를 흘리자 루이스가 잔을 내려놓았다.
“찍을게.”
무엇을. 벨져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루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싫으면 말고.”
“안 한다고 하지나 마라.”
어깨를 으쓱인 루이스가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우수에 젖은 듯, 서늘한 무표정이 당장 카메라에 담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야릇한 분위기 대신 긴장감을 더하는 게, 딱 벨져가 원하던 비주얼 그 자체였다. 벨져는 머릿속으로 촬영 계획과 일정을 수정하며 루이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별 일이군. 절대 안 벗는다고 그렇게 학을 떼더니.”
“그럴 일이 생겼거든.”
“형아?”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에 벨져는 확신했다.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녀석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쥐고 흔드는 건 다름 아닌 제 형이었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젓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턱을 괬다.
“그러게 그냥 스폰만 받고 끝내지 그랬나.”
“다이무스 홀든한테 그게 돼?”
“못할 것도 없지.”
벨져는 신이 나 웃음을 머금고 와인 잔을 들었다. 가져온 게 겨우 호텔에 비치된 싸구려 와인이라니, 하여간 멋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뱉었을 와인을 마시며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덕분에 이를 악물고 포기한 누드씬도 생겼겠다, 배우의 감정도 딱 역할에 이입되는 게 감독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별로지만, 배우 루이스는 벨져의 심미안을 채우다 못해 탐미에 대한 욕구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은 잘 풀리지 않는 연애사업에 심란한 나머지 어떻게 이용해보려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징그러운 커플의 고난과 주연 배우의 누드씬이 반갑기만 했다.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주고 누드씬. 이 정도면 완전 땡큐다. 짜증나는 연애 상담도, 이 조건이면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내가 질렸나?”
“그럴 리가.”
“...어차피 청소년 관람 불가인 거, 야하게 찍자. 할 수 있지?”
“호오. 감당할 자신은 있고?”
“운동할게.”
맡은 역에 충실 하느라 원래 체중에서 5킬로그램이나 빼놓고, 자진해서 이렇게 나와 주니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다. 벨져는 여유롭게 등을 의자에 기대며 가운을 벗어보라 손짓했다. 날카롭게 눈을 뜨면서도 잔을 놓고 일어난 루이스가 허리끈을 풀고, 샤워 타월 재질의 가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 작품을 천천히 훑으며 벨져는 길게 콧소리를 냈다. 돌아보라 손짓하자 말없이 순순히 따른다.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 곧게 뻗은 등과 도드라지지 않는 세밀한 근육이 나름 볼 만 했다.
“유지하는 걸로 하지. 앞은 됐고, 뒤만 쓰지.”
“그것 참 희망적이네.”
바닥에 떨어트린 샤워가운을 집어든 루이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허리끈을 동여맸다.
“형아가 보면 난리가 날 테지.”
“그 전에 귀에 들어가도 좋고. 아니, 역시 그게 좋을지도.”
“흥. 내가 제 발로 기어들어온 기회를 놓칠 것 같나?”
“그래. 그래서 너한테 온 거야.”
“하,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이란.”
“싫으면 마.”
벨져는 샐쭉해진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한 시라도 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담아주는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튕기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벨져는 손에 쥔 걸 놓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멍청이는 눈앞에 있고, 그 덕을 본 건 자신이다. 일단은 영화사에서 압박을 받기 전에 기자들에게 흘리는 게 먼저다.
그새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벨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큰 형을 떠올렸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어디 동남아에 잠적이라도 해야 할 성 싶었다.
하나, 둘, 셋. 루이스는 까만 광택이 도는 진홍색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숫자를 세고 전화를 받았다. 계속되는 촬영으로 그 사이에 머리가 말라서 바람에 휘날렸다.
“네. 접니다.”
‘루이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아니라, 네가...!’
“아, 잠시만요. 응. 아, 거기? 그래 더 찍지 뭐.”
루이스는 핸드폰을 잠시 떼어내고 일부러 들리도록 말했다. 한 번 스위치가 켜진 벨져는 방금 찍은 샷을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반응을 끌기엔 충분했다.
‘루이스!’
“아, 미안해요. 무슨 일이에요?”
핸드폰 너머에 침묵이 이어졌다. 차마 누드씬을 찍는다는 말을 못 하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적어도 내겐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이에요.”
‘루이스.’
“내 몸이잖아요. 당신도 없고.”
‘......내가 그리로 가겠다.’
“걱정 마요. 상대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않나!’
“그럼요? 우리, 세 달 동안 한 시간도 못 본 거 알아요?”
‘그건....’
“이젠 당신 기다리는 것도 지쳐요. 나도 내 삶이 있다구요.”
‘만나서 얘기하자. 일단 만나서....’
다이무스의 착잡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보니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하고, 벨져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루이스. 다음 숏 들어갈 거다. 여기서 여기까지. 가운을 벗고 테라스에 서. 역광으로 비출 거다.”
“앞에 누구 있는 건 아니지?”
“흥. 볼 것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밉살맞게 말하는 벨져의 엉덩이를 쳤다. 짝 소리가 나게 후려치는 바람에 벨져가 발끈해 주먹을 쥐며 노려봤지만 그의 작품을 위해서라도 벨져는 지금 루이스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촬영 들어가야 해요. 끊습니다.”
‘루이스...!’
“오려면 오세요. 어차피 안 올 테지만.”
모질게 말하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한 루이스는 대기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믿었던 보스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남자 주인공이 될 시간이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꺼놓고, 하루치 촬영이 끝났다. 벨져는 더없이 흡족해했고, 루이스는 배역의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저질러버린 일을 수습하러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꺼둔 사이 온 문자와 메시지, 부재중 통화 기록이 쏟아졌지만 다이무스의 기록은 없었다.
큰일을 저질러버린 건 아닐까. 뒤늦게 불안이 닥쳤으나 그래봤자 엎질러진 물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맥주를 사러 나가기 위해 후드를 집어 들었다. 내일은 촬영도 없겠다, 오늘 마시고 죽자는 마음으로 여섯 개 들이 팩과 보드카를 담아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땐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회사 차원에서 만난 그는 빈틈없는 슈트 차림에,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딱히 이렇다 할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루이스는 맥주병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이무스 홀든쯤이나 되면 달라붙는 사람도 많을 거고, 저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줄을 설 텐데. 내가 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데다,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남은 병을 비웠다. 벨져의 말이, 다른 모두의 말이 맞다. 오래 갈 수 없는 관계다.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땐 그냥 이 사람이 나와 같은 감정으로 봐주는 게 기뻐서, 통화 한 번에도 설레서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술병이 비어갈수록 루이스의 속은 타들어갔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이 타는 속에 막힘없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마셨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루이스가 눈을 떴다. 몸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살인범이면 어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벽에 머리를 세 번쯤 부딪치고, 겨우 호텔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문이 열리며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단단한 팔이 고꾸라지는 몸을 받치고, 익숙한 향수 냄새와 몸이 훅 루이스를 덮쳤다.
“루이스.”
“다이무스....”
“하아. 이 지경이 되도록....”
한숨을 쉬는 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기댔다. 번쩍 들린 몸이 침대 위에 놓여지고, 루이스는 제게서 멀어지는 팔을 잡고 매달렸다.
“다이무스.... 가지 마요. 나, 계속.... 기다렸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났다. 옆자리가 훅 꺼지고, 뜨겁고 단단한 몸이 루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를 마주 안고 루이스는 이게 꿈이 아니길 바랐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그래. 안다. 그래서 온 거다. 루이스....”
“가지 마요. 그냥, 나랑....”
“자라. 옆에 있을 테니까.”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꾹꾹 눌러 참다가 터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더 심각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며 등을 쓸어줘도 루이스는 내내 다이무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죄책감이 빠듯하게 가슴을 옥죄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내일. 내일 얘기하자.”
급하게 비행기를 잡아타고 오는 내내 걱정이 돼서 한숨도 못 잔 건 다이무스도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할 일이 태산이지만 일단 지금은. 이 사람을 안고 잠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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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My Hero for.ChoruNim
고백했다. 해버렸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봄, 겨우 한 살 더 먹은 것가지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질러버린 건. 아직도 멎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고, 숨을 토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버린걸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비겁하게, 선배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억지를 부리고 말았다.
'당신과 나 사이엔 아무리 애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 있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거리는 줄어들지 않겠죠.'
손을 잡지도 못하고, 겨우 손가락 하나를 건 채 떨리는 숨과 함께 내뱉은 목소리에 당황하던 얼굴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전 포기가 빨라요. 그러니까 이 관계를 이어가려면, 모리사와 선배가 절 더 좋아해야 해요.'
꼴사납게 울먹이고 말았다. 고백이라기보단 협박에 가깝다고, 미도리는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기 싫다. 정말로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주르륵,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은 미도리는 긴 다리를 접어 끌어 안았다. 이래선 졸업식 날 선배를 배웅하러 갈 수도 없다.
대답을 듣지 않고 도망친 건 자신이지만, 끝내 당황 그 이상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당신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좋은 사람이니까 나 같은 건 어울리지 않겠지. 아마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 상냥함에, 그 온기에 기대어 투정을 부리고 있던 건 나니까.
외딴 섬에 홀로 표류한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도 그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지만 한 번 달리기 시작한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을 독차지할 수 없는 걸까. 용기가 없어서, 의욕이 없어서, 차라리 그런 이유였으면 좋겠다. 그럼 누군가를 탓하며 숨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모리사와 선배. 다시금 떠오르는 그 난처한 얼굴이 상처를 후볐다. 마음이 보인다면 제 마음은 아마 난도질이 되어 너덜너덜할 거라고 자조하며 머리를 숙였다.
숨기고 있던 비밀을,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걷잡을 수 없는 마음과, 아린 첫사랑과, 짝사랑과, 모리사와 선배. 그 모든 것의 끝에 있는 한 가지 소망. 그리고, 그의 그 상냥한 면이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자신.
아직 차가운 바람이 복도에 스산하게 불었다. 어쩌면, 어쩌면 잡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시끄럽기로 유명한 유성대의 그룹 라인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야 두 명이나 졸업하니까 당연하겠지만.
"죽고 싶다...."
말버릇이나 다름 없는 마음을 입에 담으며, 미도리는 차가운 복도에서 몸을 일으켰다. 답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온다 해도 어떻게 하면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하며 최대한 돌려말하는 거절이 전부다. 알고 있다. 아무리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한다 한들 마음을 거절하는 건 거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연의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다. 첫사랑은 더더욱. 이 마음은 얼마나 더 자신을 괴롭힐까. 마음에 담고 있는 것보다, 거절을 기다리는 게 더 괴롭다는 걸 통감하며 길을 걸었다.
차라리 지나가는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가고, 벚나무는 따스한 햇살을 받아 여린 분홍 꽃잎을 활짝 피워냈다.
한숨이 기침처럼 흘러나왔다. 죽고 싶었다.
왜 시간은 멈추지 않는 걸까. 기어이 졸업식 날이 되고야 말았다. 정말로, 정말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자다가 숨이 멈추길 그렇게 기도했는데 어김없이 해가 뜨고, 모닝콜에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씻는 내내, 옷을 입으면서, 현관 앞에 서서, 학교로 가면서, 교문에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만둘 수 있다고 수백번도 넘게 갈등했다.
피하면 그뿐인데, 그래도 보고 싶었다. 미련하고 한심하지만 마지막이니까. 이걸로 끝이니까.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색한 사이가 되더라도, 시간이 가며 잊혀져 선배는 그렇게 좋아하던 특촬물에 나오고 나는 비록 멀리서 지켜볼지라도 당신의 시간에 내가 존재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수도 없이 받은 고백 중에 하나일지라도, 실수나 장난으로 치부할지라도 타카미네 미도리라는 사람이 모리사와 치아키를 좋아했던 시간은, 그 마음은 진짜였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선배의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처음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어설픈 나의 마음이 못 미더울지라도 나는 진심이었고, 그건 선배가 학교를 떠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준비했던 고백은 하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심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다시 얼굴을 보면 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걸음은 착실히 그를 향해 갔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모리사와 선배.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이제 와선 알 수 없지만 할수만 있다면 떼를 쓰며 매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선배가 날 봐준다면 얼마든지.
왁자지껄한 교실 앞을 서성이다 문득, 제 손이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꽃다발을 사오면 늦을까.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들자 급우들과 장난을 치며 웃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아아, 당신은, 선배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이렇게나 아픈데, 고백한 그날부터 내내 잠을 설치고 당신 생각에 괴로워했는데 어째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라고, 그렇게 쉽게 마음의 짐 한 점 없이 지울 수 있는 모양이라고,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힘겨웠다.
말 한 마디. 하다못해 미안하다는 짧은 메세지 한 줄이라도 주었으면. 그랬으면 나는. 눈이, 코가 시큰거린다. 다시금 시야를 가리는 눈물에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뒤에서 당신의 등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나는, 비겁한 겁쟁이니까 태양같은 그가 돌아봐줄 리 없다.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바쁜 학부형과 기자들 사이에서 나와 한적한 복도를 걸었다. 시노부를 비롯한 유성대 멤버들에게서 전화며 라인이 빗발쳤지만 받지 않았다.
그렇게 선배는 웃는 얼굴로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학교를 떠났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어서, 용기를 낼 수가 없어서 안녕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안녕. 나의 히어로. 안녕, 나의 선배.
"역시, 여기 있었군. 타카미네. 그래도 대장인데, 인사도 안 하고 보낼 셈이었나?"
처음 그 사람이 나를 불러주었던 그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면 그가 운명처럼 서있고, 바람이 불어와 꽃잎이 휘날렸다. 꽃다발도, 재킷도 없이 당당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당신.
"고백에 답도 안 하고 떠나는 건 히어로답지 못하겠지. 그래서, 답을 하러 왔습니다."
고작 한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 숨을 들이마시며 더없이 진지해지는 얼굴, 한 박자 쉬고 흘러나오는 목소리. 마지막으로 슬며시 번지는 미소.
나는 그 답을 듣고, 조금 울었다.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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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조만간 책 홍보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익숙한 길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차림으로 걷는 기분은 오묘했다. 파티에 나갈 때나 신을 법한 구두와 좋은 옷, 거기에 모자까지 쓰고 길을 걷자니 흘긋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정도였다. 가슴과 허리를 갑갑하게 조여맨 속옷들때문에 숨을 쉬는 것도 버겁다. 날이 덥지 않아서 망정이지, 해가 내리쬈으면 이 차림도 여의치 않았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잘 닦인 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땅에서 한참 올라온 구두 때문에 뛸 수가 없었다. 옷과 구두, 심지어 속옷 하나에 이르기까지 몸에 딱 맞는 것뿐이라 헐렁하게 입고 다녔던 루이스에겐 하나같이 갑갑했다.
생전 꾸며본 적 없는 루이스가 이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게 된 데에는 어김없이 벨져가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벨져가 부르는 날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 날은 세탁소에 들르는 걸 깜빡한 나머지 옷장에 처박혀 있던 원피스를 입고 그를 만나러 갔다.
뭘 입고 나타나도 탐탁지 않아 할지언정 따로 말은 하지 않아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침내 빛이 바랜 노란 원피스가 벨져의 한계치를 넘어선 모양이었다. 벨져는 문을 열자마자 위아래로 훑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대체 그 차림으로 어떻게 여길 왔냐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옷은 편하면 그 뿐이고, 벨져의 기준에 맞추려면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꼴이라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럼 네가 한 벌 해주던가.'라는 말로 응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벨져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사주면 입을 거냐는 말에 답하지 않고 욕실로 직행한 게 문제였던 걸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연합으로 출근하니 휴게실에 잔뜩 쌓인 상자와 동료들의 시선이 루이스를 맞았다. 트리비아는 루이스가 오자마자 상자를 풀기 시작했고, 연합의 휴게실은 순식간에 부띠끄로 돌변했다. 원피스가 두 벌, 드레스가 한 벌,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여름용 스커트가 두벌씩. 거기에 속옷과 구두, 모자까지 하나하나 풀자면 끝이 없었다.
트리비아는 화려한 레이스 속옷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며 예쁘겠다고 루이스의 몸에 대보고, 나이오비 역시 자기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맞장구를 쳤다. 벨져의 취향은 확고했고, 트리비아는 그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꼭 살아있는 인형이 된 것 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레이튼을 비롯한 연합의 남성들이 민망해하며 자리를 피해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몇 번을 갈아입고 다른 조합을 맞춰보다 마침내 화장까지 마치고 트리비아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그 바람에 일이 다 밀렸지만 나이오비가 걱정 말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루이스의 손에는 일거리 대신 흰 레이스 장갑과 작은 가방이 들렸다. 넣을 것도 없는데 가방을 왜 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트리비아는 그게 싫으면 양산을 들어야 한다는 말로 루이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도 양산보다는 가방이 덜 무겁다. 아무렴 해가 다 지도록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상식도 한 몫 했다.
호텔에 들어설 때면 수근거리곤 했던 직원들이 오늘은 미심쩍은 눈초리 대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루이스를 반겼다.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숙녀분. 이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저를 향한 것인줄도 몰랐던 루이스는 혼자 갈 수 있다는데도 굳이 엘리베이터까지 동승한 벨보이에게 어설프게 웃고는 번쩍이는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런 차림은 불편하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아 낯설었다.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다. 정말 양갓집 아가씨라도 된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실수라도 할까봐 떨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건 다 몸을 옥죈 탓이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바로바로 열리던 문이 한참 열리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두드리려는데 철컥, 문이 열렸다. 그런데 벨져의 상태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루이스는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갔다. 벽을 짚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벨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초점이 흐려지는 듯 눈을 찡그리는 그의 몸이 휘청였다. 루이스는 냉큼 벨져를 받아 안았다. 쓰러지다 시피 안긴 벨져는 몸을 가누질 못했다.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받치자 어깨에 턱을 얹고 몸의 무게를 온전히 루이스에게 실어오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둘째치고 호흡이 불안했다.
이쯤 되면 뭔가 잘못됐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인은 알 수가 없으나 일단 눕혀야 할 것 같아 침대 쪽으로 끌고 가는데 벨져가 루이스의 허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벨져, 정신이 좀 들어? 어떻게 된 거야?!”
“루이, 스....?”
고통스러운지 눈을 꿈뻑인 벨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를 행여 놓칠까 싶어 귀를 귀울이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예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루이스는 계속 제 이름과 함께 예쁘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벨져를 안고 얼굴을 굳혔다. 제정신으로 벨져 홀든이 제게 예쁘다는 말을 할 리가 없다. 독일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걸 봐선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벨져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은 의사소통이 되질 않는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벨져의 몸에선 술냄새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대신 테이블 위에 피가 묻은 붕대와 잔뜩 어질러진 응급 키트가 눈에 들어왔다. 심한 상처는 아니나 독이나 환각을 일으키는 무언가에 당한 거라 추측한 루이스는 문득 안타리우스의 전 근거지인 디미스트와 디미스트의 안개를 떠올렸다. 퍼즐이 짜맞춰지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들쑤셔진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착 가라앉았다.
루이스는 벨져의 몸을 받친 채 숨을 내쉬고 턱 아래 예쁘게 맨 리본을 잡아당겼다. 모자를 바닥에 대충 내던지고, 장갑도 벗어 던졌다. 걷기 힘든 구두에서 내려와 맨발로 벨져를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전부 토하게 하고 물을 먹여 몸 안에 스며든 안개의 독을 빼내는 게 우선이다.
하루쯤 지나면 알아서 빠져나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동안 고통에 시달리게 둘 수는 없었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타는 듯한 갈증에 몸을 웅크렸다. 내리쬐는 햇살이 뜨거워 도로 몸을 돌리며 서서히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하다. 위화감의 정체는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이 멍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와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깼어?”
“.......”
잠긴 목에 쓰디 쓴 무언가가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무언가를 뱉어내려 콜록거리자 루이스가 신문을 접었다. 고작 기침 몇 번 했다고 몸이 뒤흔들리는 게 불쾌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감각이 가라앉질 않고, 목이 아파 눈물이 핑 고였다. 침대로 다가온 루이스가 내민 컵을 받아 단숨에 물을 들이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조금 정신이 들자 위화감의 정체가 떠올랐다. 벨져는 루이스를 방에 들인 적이 없었다. 디미스트에서 가면의 남자를 만났고, 돌아와 어찌어찌 상처를 치료한 게 벨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상처를 확인하려 셔츠의 소매를 걷자 깨끗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이 셔츠, 어제도 입었던가? 벨져는 이불을 걷었다. 셔츠는 물론 속옷까지 전부 어제 입었던 것과 다르다.
벨져는 홀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 섣불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고백이라도 했다던가, 혹은 강제로 그녀를 범했다던가. 최악의 상황만 떠올라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는데 조금 퀭할 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무표정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시 내가, 큼. 크흠.”
“룸 서비스 시켰어.”
“...뭐?”
“뭔지 모르지만 제일 비싼 걸로 시켰어. 혼자 다 먹을 거야.”
머리를 풀어 어깨 위로 늘어뜨린 루이스가 도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진홍색 실크로 된 나이트 가운은 분명 제 것이고, 보고 있는 신문 역시 벨져의 것이다. 루이스는 그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태연했다. 어디서부터 트집을 잡아야할 지 모를 정도로 당당해서, 마치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기억 안 나?”
루이스는 알고, 저는 모르는 이 상황이 데쟈뷰처럼 겹쳐졌다. 다시 겪어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지만 그때와는 루이스를 대하는 감정이 달랐다. 벨져는 왜 너는 항상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드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루이스가 벨져를 바라보다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초탈한 듯한 태도에 울컥했지만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기억이 온전한 쪽이었다.
“그래. 잘 생각해봐.”
“루이스.”
“옷은 다 맡겼어. 이따가 갖다준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괜찮아. 갈아입을 옷 가져왔거든.”
무슨 말을 못 꺼내게 단칼에 쳐내는 게 예사롭지 않다. 벨져는 그 기백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잘못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 음식이 도착하고, 루이스는 말 한 마디 없이 포크를 들었다.
끼니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사람이 제대로 식사를 하는 건 기특한 일이지만 분위기가 경직된 나머지 말을 붙이기가 조심스러웠다. 벨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놀랄 만한 장면이었으나 방 안에는 루이스와 벨져 단 둘 뿐이고, 루이스가 답하지 않는 이상 벨져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다.
방에 루이스를 두고 씻는 내내 기억을 더듬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두통과 짜증만 늘 뿐이었다. 씻고 나오면 뭐라도 얘기해줄 줄 알았더니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끝내 침묵을 고수했다. 방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마주친 눈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으나 문이 닫혔다. 루이스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그 의뭉스러운 행동에 벨져의 기분만 찝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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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여느 때와별 다를 거 없는 오후, 휴게실 소파에서 빈둥거리려던 이글은 먼저 소파를 차지한 사람을 보곤 혀를 찼다.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담요를 찾았다.
“뭐 찾아?”
“담요 어디있어?”
턱으로 루이스가 자고 있는 소파를 가리키자 양팔 가득 서류를 들고 나르던 레베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통 소파에 걸쳐져있기 마련인 담요가 보이질 않는다. 레베카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항복을 선언했다. 따라 들어온 트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들이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뭐가 안 따라주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레베카가 웬일로 남을 챙기냐며 씩 웃으며 팔꿈치로 이글을 툭 쳤다. 말이 툭이지 퍽에 가까운 소리와 통증에 이글은 맞은 팔을 감싸쥐었다.
“짜식, 엄살은.”
“엄살 아니거든!”
“어유, 그래? 그럼 남자답게 시원하게 벗어서 덮어주던가.”
대낮부터 한 잔 한 것처럼 킬킬거리는 레베카를 쳐다보던 이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편한 분위기는 좋지만, 천덕꾸러기 취급은 가문에서 받는 걸로 충분하다. 입을 비죽이자 레베카가 내가 살 테니 이따 한 잔 하자며 윙크했다. 이거 한 대 맞고 공짜술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글은 냉큼 그녀에게 윙크를 돌려줬다.
“무르기 없기!”
“뭘 물러?”
“레베카가 이따 쏜대!”
“오오, 그거 좋지!”
“너희는 포함 아니거든!?”
따라 들어온 휴톤과 도일이 사람 좋게 웃으며 레베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어째 둘 다 묘하게 텐션이 높다. 이글은 근육질의 남자 둘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질색하며 물러섰다.
“뭐야, 대낮부터 퍼마신 거야?”
“퍼마시긴! 마, 더워서 한 잔 했다.”
“그럼그럼. 이런 날씨엔 시원한 맥주가 딱이지!”
“한 잔도 한 잔 나름이지.”
이글은 트리비아의 핀잔에 맞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음 때문인지 루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 하기야 이 소란에 잠이 잘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사무실에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이 찾아들고, 회의실에서 자기엔 부담된다며 루이스는 굳이 휴게실의 소파를 고집했다. 그마저도 시끄러운 사람들이 다니니 제대로 못 자는 게 당연하다. 이글은 혀를 차며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씨들, 담요 못 봤어?”
“소용 없데이. 윽수로 예민하다 아이가.”
“엑.”
이렇게 떠들면서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싶어 두 사람을 보자 휴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부터 그랬어. 저렇게 잠깐 눈을 붙이긴 하는데, 몸에 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
휴톤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길거리의 고아 소녀가 몸을 지키기 위해선 자는 시간마저 온전히 쉴 수 없다. 아마 그 생활이 몸에 배인 모양이라고 말하는 내내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얘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잘즈부르크 축제에 다녀온 벨져의 말이 떠올랐다. 축제 기간에 맞춰 집에 돌아온 벨져는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냐는 이글의 질문에 '잠자리가 불편해서' 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김이 팍 샌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왜 갑자기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둘 다 예민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둘 다 엮이면 피곤해지니 그냥 모른 척 지나가려는데 마침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다 아는 이상 루이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연합은 대체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는거냐며 저를 붙들고 또 애먼 화풀이를 할 게 분명했다. 이글은 구석에 방치된 담요를 집어들었다.
“그냥 다시 자라고 하지 뭐.”
휴톤이 말리려들었지만 이글은 후딱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 소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떠드는 소리에 뒤척이다 천장을 보고 누운 루이스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이 봐도 안쓰러운데, 좋아하면 얼마나 속이 썩을까. 이글은 무언가 닿는다는 것마저 느끼지 못하도록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담요를 내려놓았다. 덮어 씌운다는 생각으로 대충 하면 깰까봐 조심하는데 그것도 마뜩치 않았는지 루이스가 웅얼거렸다.
그 소리가 정지 신호라도 된 것 마냥 손을 멈추자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가 깜빡였다.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와,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짓는 눈웃음에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 사이 미소와 함께 뻗은 손이 이글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제가 아는 루이스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사근사근한 태도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대로 끌려가자 몸을 겹친 이글의 귀에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이글의 귀를 간지럽혔다. 포옥, 내쉬는 숨과 목을 끌어안은 부드러운 팔에 어안이 벙벙했다.
혼란에 휩싸인 이글의 목덜미를, 뒤에서 커다란 손이 잡아 당겼다. 그 우악스런 손아귀 힘에 겨우 정신을 차린 이글은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 없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 손에서 풀려났을 땐 휴게실에서 회의실로 끌려온 뒤였다. 의자에 억지로 앉혀진 이글 앞에, 주먹 깨나 쓰는 덩치 둘이 자리하고 그 사이 의자에 앉은 트리비아가 다리를 꼬았다. 안 그래도 무서운 누님과, 웃음기가 싹 가신 두 사람을 앞에 두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사이렌이 왱왱 울린다. 이글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잠깐, 잠깐.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우리 말로 해결합시다!”
“이글.... 난 그래도 네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동감이데이. 니 혹시....”
“아니라니까! 아, 답답해 미치겠네! 나도 억울하거든?! 나도 피해자라고!”
“뭐? 피해?”
“아악!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어떤 놈들이 겁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가는 상황에 이글은 머리를 쥐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겨우 돌아온 관심에 이글은 깊은 한숨을 토하고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냥 잠꼬대 한 거야. 내가 맹세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그리고 쟤도 나이 먹을만큼 먹은 성인인데 자기 맘대로 할 수도 있지!”
신랄하게 두다다 쏟아내는 말에 휴톤과 도일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야 그들이 성급하게 굴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데, 억울함을 토로하고 나니 잡혔던 뒷목이 아파왔다. 목을 돌리자 우두둑 소리가 나고, 목이 뻐근해 주무르자 휴톤이 못내 미안한듯 주춤거렸다. 한 마디 않고 차디 찬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트리비아의 눈매가 살짝 풀어졌다.
오해로 치면 아론 휴톤만큼 역시 오해받는 기분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덩치는 산만해서 금세 순한 얼굴을 하고 미안해해서 짜증이 가라앉긴 하는데, 애초에 오해를 안 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파렴치한 취급이나 하고. 울컥 튀어오르는 서운함과 억울함을 토로하자 휴톤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도.... 억수로 미안하데이.”
“됐거든! 아니 그리고, 댁들이 무슨 막내 여동생 시집 보내기 싫어하는 팔불출 오빠야? 나 그래도 귀족집 도련님이거든? 내가 무슨 해충이야?! 진짜 너무하네!”
“아니, 그게.... 정말 미안하다.”
이글이 뚱하니 팔짱을 끼자 머리를 긁적이던 도일이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데.... 그, 가는 우리도 불안타.”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정말 한창인 나인데 연합 일에만 매여있으니까.”
“그게 뭐 하루 이틀이야?”
별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를 구태여 하는 의도를 묻자 휴톤이 멀리서 엘리와 피터를 볼 때 짓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도 못 해보고, 남들처럼 꾸미는 것도 아니고 일만 하니까.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저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강한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그 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도 미안하고.... 걱정이지.”
“얼래? 그렇게 치면 앤지는!”
“갸는 그 일 전까진 평범했다 아이가.”
“그래. 상대적으로 루이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낸 건 맞지. 게다가 루이스는 뭐냐, 그.... 잔... 잔, 누구였지?”
“잔 다르크?”
“그래! 그 사람처럼 언젠가 홱 죽을 것 같다구. 루이스는.... 늘 혼자 짊어지려 하니까.”
이글은 가만히 휴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중간에 트리비아가 거들지 않았어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녀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답게 말은 어수룩해도 분명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혼자 다 짊어지려다 스러질 것 같다고, 좋은 시절을 전부 연합과 그녀의 그 어리석은 이상에 얽매여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루이스는 위태로운 사람이다. 그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런 사람이니까, 라는 말로 넘기면 그 뿐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못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이 사람들의 유대이고, 그 유대가 강한만큼 루이스를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벨져는? 이렇게 답답한 면마저 좋다는 걸까. 문득 스치는 의문에 이글은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방금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에 그렇게 된통 당해놓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그 둘은 어느 모로 보나 달콤한 연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눈이 맞았다? 이글은 못된 장난을 하기 전에 드는 두근거림을 즐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나름 잘 즐기는 것 같던데.”
트리비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휴톤은 알고 있었는지 아차 싶은 눈치였고, 도일은 못 알아들었다. 이글은 악동처럼 미소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일은 혼자만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휴톤을 툭툭 쳤고, 휴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이글과 트리비아를 번갈아봤다. 의기양양하게 회의실을 빠져나온 이글의 뒤로 트리비아의 냉기가 흘렀다.
“잠깐 나 좀 볼까?”
“흐응. 미녀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아.”
“우리 자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도련님?”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데.”
또각거리는 킬힐 소리와 함께 위험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 트리비아가 이글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대로 벽까지 밀린 이글은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취했지만 트리비아는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과연 여제, 이글은 그녀의 박쥐들을 떠올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진짜 무서운 건 언제나 여자들이다. 특히나 연합에선 더더욱.
“왜 이러실까.”
“어머,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겠는데.”
“저런. 거짓말을 하려면 티는 내지 말아야지.”
“티났어?”
“그럼.”
이글은 아쉬운 척 입을 다셨다. 연합의 누님들은 하나같이 무섭지만 그 중 가장 무서운 건 단연 트리비아 카리나다. 속을 알 수 없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냉기가 꼭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쪽은 진심이야?”
“그쪽? 어딜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둘째 도련님 말이야.”
“아아, 작은형? 우리 작은형이야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우린 모여 앉아서 연애사업 얘기할 사이가 아니거든. 칼부림이라면 또 모를까.”
“흐응. 뭐, 좋아. 두고 보면 알겠지.”
트리비아의 손이 떨어졌다. 이글은 태연한 척을 하느라 집어삼킨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작 문제의 당사자는 태평하게 잘만 자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 된 걸까. 간만에 착한 일을 하려 해서 그런가, 얻은 거 없이 손해만 왕창 본 기분이었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가만히 지켜보다 입가를 매만졌다. 나쁜 장난을 할 때면 팽팽 돌아가는 잔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만족스러운 계획이 세워지자 씩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이글은 고양이도 아닐 뿐더러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난 이글은 목 뒤에 양팔로 깍지를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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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이상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이글은 요 며칠 새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최초의 생각으로 회귀했다. 역시 이상하다. 조용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폭풍전야가 따로 없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폭풍을 앞둔 고요다.
최근 들어 가장 이상한 걸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예민하고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 작은 형이라 하겠다.
멋대로 예고도 없이 방을 썼는데 일언반구 없고, 오히려 즐거워보이기까지 했다. 어딘가를 떠도는 건 전이랑 다를 게 없지만 안타리우스의 근거지에서 돌아온 뒤로 한참 바쁘더니, 파티에 참석하질 않나, 요즘은 큰형이 있는 광장에서도 언뜻언뜻 돌아다니기까지. 분명 무언가 감추는 게 있다. 이글의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이글은 제 심증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라지만 이글은 개의치 않았다. 호기심은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고, 그런 욕구는 본디 바로바로 풀어줘야 하는 법. 여느 때처럼 연합의 휴게실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던 이글은 냉큼 일어나 검을 들었다.
워낙에도 딱딱하고 젠체하는 형들을 먹이는 건 특기지만 오늘은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러 가는 기분이랄까. 벨져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을 하니 어린애마냥 들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회사와 연합은 안타리우스와 물밀듯 들어오는 신흥 세력들에 치여 완전 카오스 상태고, 당연스럽게도 이글은 회의에서 배제됐다. 알려주는 건 이미 퍼져서 공공연한 사실이 된 정보 정도일까. 연합에 투신하기 전에도 이런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건 익숙했기에 별 감정은 없다. 그들이 히든 카드로 쓰겠답시고 감춰둔 정보는 이미 이글의 손에 들어와있는 경우도 많았다.
골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맞댄들 이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 누구라도 같은 마음일 테지. 공공의 사라지면 그 후에 이권과 공적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또 치열한 밥그릇 싸움을 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연합과 회사는 여전히 능력자 세계의 큰 축이지만 그 비대해진 몸집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부의 파벌이 힘겨루기를 하고, 그러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언젠가 무너질 걸 알고 있음에도 그들이 독립을 선언할까 섣불리 손을 손쓰지 못하는 건 연합이나 회사나 똑같았다. 그 지경에 이른 걸 어찌 해보겠다고 토니와 루이스를 비롯한 측근 참모진이 고군분투하는 중이지만 전쟁의 행보란 조커 급의 능력자인 토니 조차도 예측할 수없는 문제였다.
“뭐, 애초에 그게 가능했으면 인간이 아니겠지만.”
이글은 가벼운 걸음으로 공중에 혼잣말을 날려보냈다. 따라 붙는 시선이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살기도 적의도 서려있지 않은 미행. 대충 정체는 짐작이 간다. 그제인지 언제인지 벨져의 호텔에서 봉사만 하고 허탕을 친 그것때문이겠지. 이글은 나이스한 바디에 붉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를 떠올렸다. MI7의 요원이라는 건 몰랐지만 홀든 가의 망나니에게 정보를 빼내려 접근하는 미녀는 수도 없이 많았고, 덕분에 이글은 그네들이 예쁘장한 얼굴, 관능적인 몸매, 진한 화장과 화려한 치장으로 가린 정체를 간파하는데 통달한 상태였다.
글쎄, 누구라도 벨져같은 형제와 함께 살다보면 그렇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게 벨져 홀든이고, 그를 낳은 어머니다. 주변엔 하나같이 에쁘고 잘생긴 사람들 뿐이고 이글 그 자신도 얼굴로는 어디 내놔도 뒤쳐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후광쯤 비치거나 웬만큼 신비롭지 않고서야 이글이 외모에 홀릴 일은 없다. 이글은 제 작은 형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다이무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잘난 가문에서 하라면 군말 없이 결혼할 사람이다.
그런데 벨져는, 그 아름답고 오만한 인간은 오죽하랴. 벨져는 그냥 아무 여자랑 원나잇을 하기엔 눈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게다가 그 몹쓸 자존심. 그러니까 귀족으로서 가지는 고결함과 품격엔 맞지 않는 행위라며 점잖을 떠느라 제대로 연애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물론 한 사람과 오래 만나지 않기는 이글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이글은 제 욕구와 흥미엔 충실한 편이었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기왕 사는 거 즐겁게 다 누려봐야지. 하여간 형들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글은 문고리에 걸려있는 룸서비스 사양용 팻말을 슥 보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땄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못 할 것도 없다.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문까지 꽁꽁 걸어잠그셨나 했더니, 그 답지 않게 방 안이 어수선했다. 별다른 위험은 느껴지지 않지만,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빈 방에는 머스크 향이 가득했다. 벨져가 애용하는 향수의 냄새다. 그런데 그 아래로 은은한 꽃냄새가 난다. 강한 머스크와 비누에서나 날 법한 냄새. 다소 이질적인 조합에 이글은 벨져의 화장대 위를 살피다 익숙한 향수병을 집어들었다.
화려한, 딱 벨져 홀든 같은 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쪽. 수수하고 은은한, 웬만해서는 눈치 채지 못할 향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욕실에 들어가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지만 욕실에도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글은 제 형의 취향이 참 일관됐다는 것만 새삼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벨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여기 왔었다. 타인의 흔적을 찾아 방 안을 훑던 이글의 눈이 침대에 멈추고,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어쩐지 요즘 엄청 바쁘더라니. 화장대 앞에 걸려있는 흰 목욕가운과 두 사람이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침대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모르는 사라이라면 또 모를까, 이글의 눈엔 이 방을 본 것만으로 그간의 정황이 훤히 보였다. 이글은 확신을 위해 이불을 걷어 시트를 만져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게 둘 다 나간지 얼마 안 된 모양인데, 그것도 놀라웠다. 벨져 홀든이 다른 사람을 침대에 들인 것도 모자라 아침까지 함께 있었다니! 다른 호텔도 아니고 여기로 데려올 정도면 그건 정말 진심이란 뜻이고, 놀라운 만큼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제일 먼저, 그것도 비밀로 애인을 만들어?
이글은 괘씸한 작은 형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이 눈에 들어온 건 정말이지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결코 짧지 않은, 벨져의 것보다 더 탁한 색의 머리카락. 익숙한 색이다. 머리카락을 집어들어 빛에 비춰본 이글은 떠오른 인물에 말문을 잃었다.
그러고 보면 둘 다 요즘 통 안 보이긴 했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고, 상관을 안 하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그 실상이 이거일 줄이야. 저도 모르는 사이 충격에 입을 벌렸던 이글은 다시 한 번 손에 쥔 머리카락을 보고 기가 찬 나머지 실소를 흘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둘이? 이글은 문제의 두 사람을 잘 알았다. 가장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것보다는 잘 알았다. 둘 다 연애하고는 연이 없는 사람인 건 둘째 치고 이 시국에 자기들 감정에 빠져 없는 시간을 허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럼 뭔가 더 있다는 건데. 숨은 뜻을 참으로 머리를 굴려도 이렇다할 게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헤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를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무렴. 그 둘이 한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벨져는 과거의 패배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걸 즐겼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정말 초월하고 극복했을 리 없다. 그러기에 벨져는 너무 잘났고, 그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경 안 쓴다고 하느라 더 신경을 쓰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그런데 그 상대와 잔다고? 루이스도 그렇다. 벨져가 그러는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이글은 그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모종의 거래를 상상하며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하긴, 첫 만남이 그렇게 강렬했으니 또 모르지. 소위 운명의 짝이라는 걸지도 모르고, 섣불리 판단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마냥 도도한 발소리에 이글은 방 주인이라도 된 양 일어나지도 않고 괘씸한 작은 형을 맞았다. 예상한 대로 벨져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다가왔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벨져가 예쁜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이글을 쏘아봤다.
“어~. 작은 형,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바쁘게 쏘다녀?”
“뭐하는 짓이냐, 이글.”
“어, 열려있더라구. 왜? 내가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혹시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실 웃자 벨져가 대놓고 그 수려한 외모에 짜증과 불만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다. 핵심을 찔려 더 불쾌하겠지. 이글은 계속해서 아픈 구석을 찔러댔다.
“어? 진짠가 본데. 누구야? 예뻐?”
“이글.”
“에이, 그러지 말고~. 응? 누군데. 응? 아, 속 시원히 말 좀 해봐!”
“그런 거 없다.”
“정말? 그럼 이 머리카락은 뭐야?”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눈을 찡그리던 벨져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당황한 벨져의 눈빛에 이글은 상큼하게 웃었다. 나는 다아 알고 있어요. 비록 제 대사는 아니지만 지금은 재단의 동갑내기 독심술사의 말이 딱이었다.
“어디 보자, 형 거라기엔 좀 길고, 색도 탁하고…. 흐으음…. 누구더라?”
“이글!!!”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르고 그래?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봐?”
벨져가 이죽거리는 이글을 쏘아봤다. 떨리는 입가가 억지로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래봤자 이미 평정을 가장하기엔 한참 늦었다. 이글은 실실 웃으며 손을 펼쳤다. 공중에 뜬 머리카락이 둥실 떠다니다 떨어졌다.
“뭐, 형 반응 보니까 대강 알겠네. 근데 설마 억지로 한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망발이냐!”
“아무렴 시정잡배들고 아니고 명예를 목숨같이 아는 벨져 홀든 경께서 그러셨겠어. 근데, 좋았어?”
“이글!!”
“아, 소리 치지 말고 말 좀 해봐.”
어라, 이상하다. 벨져의 반응이 어째 시원치 않다. 아니,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게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과할 정도로 반응하는 게 어째 더 수상하다. 이러니까 마치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시뻘개진 얼굴이며 자기가 모욕당한 것보다 더 날카롭게 반응하는 게 딱 그랬다.
그 총잡이도 이런 분위기였지. 이글은 제 가정이 점점 더 확실해지는 걸 깨닫고 무미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벨져가 사랑에 빠진 건 두고두고 놀려먹을 일이지만, 웃음이 안 나왔다. 이건 하나도 재밌지가 않다.
“형, 미쳤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적당히 해라.”
“걔가 누군지 몰라? 진짜로?”
“그런 거 아니다. 제길, 설명해줄 테니 나와.”
“형!”
“나오라고 했다.”
싸늘한 눈빛에 이글은 입을 다물었다. 더 볼 것도 없다. 벨져가 하려는 말은 기껏해야 그의 감정을 어떻게든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티가 나다 못해 이 정도면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감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벨져가 루이스를 좋아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감정으로.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길은 너무 험하고 힘든 길이었다. 몰랐으면 또 모를까, 다칠 게 훤히 보이는데 가만히 지켜있을 수는 없다. 이글은 제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였다는 걸 시인했다.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어버렸다.
“루이스가 좋아?”
“…….”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마주한 형제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그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하는 소모전. 이글이 먼저 시선을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걘? 걔도 형을 좋아해?”
“……”
“진심이야?”
사랑이란 한 쪽의 감정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옆에서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는 사람을 봐왔기에 잘 알았다. 그 애처로운 사랑 얘기의 주인공이 벨져가 될 줄은 몰랐지만 그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나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음 심장을 가진 그녀다.
벨져는 원하는 걸 가지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아니다. 이글은 가까이서 지켜본 루이스와, 그녀의 등을 떠올렸다. 얼핏 가녀려 보이는 어깨지만 그 어깨에 짊어진 건 수 십 수만명의 목숨이다. 루이스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또 모를까, 제 아무리 벨져라 한들 그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녀의 이상은 너무나 멀고, 이 혼란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이기에 더더욱.
때문에 이글은 벨져가 말로라도 아니라고 답하길 바랐다. 차라리 모르면, 그렇게 부인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멀어지면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벨져는 답이 없었다. 침묵은 긍정이라 했던가. 더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이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뜻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미친 거야? 걔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그래. 예쁘긴 하지. 근데 예쁘기로 치면 형이 더 예쁘거든?!”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백 번 양보해서 형이 좋아한다고 해. 뭐 그럴 수도 있지! 가끔 하는 거 보면 귀엽기도 하고! 근데…!”
“잠깐.”
말을 막은 벨져의 눈빛이 험악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위협적인 눈빛에 이글은 움찔 뒤로 물러났다. 말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고, 이글은 제 형의 주먹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뭐?”
지금 어이가 없는 사람이 누군데, 벨져는 기가 차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뭐라는 건가. 아니, 기껏 사람이 걱정을 해줬더니 병신 취급을 해? 그것도 친동생을 상대로? 질투를? 벨져 홀든이?
이글은 차례로 떠오르는 의문에 헛웃음을 흘리다 웃어제꼈다. 이 정도면 정말 답이 없다. 지랄도 적당히 해야 불쌍히 여기지,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다. 한바탕 폭소한 이글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자신을 가라앉히고 벨져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이글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자초지종을 추궁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벨져 홀든이라니 소름이 끼쳤지만 그래도 그는 제 형이었다. 몹쓸 형이지만 어쨌거나. 그러니 어느 정도까지는 도와주는 게 맞다. 이글은 잠시 머릿속으로 연합과 벨져를 저울질하다 한 번 더 튕겨 보았다.
“나 연합 소속이걸랑?”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아, 예…. 참 잘나셨네요. 하아. 진짜 내가 미쳤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라. 이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옆에서 본 게 몇 년인데 귀여운 거 좀 볼수도 있지! 분명히 말하는데, 걔가 웃어주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거든?! 형보단 내가 걔를 잘 알어! 알아?!”
누구 염장지르는 것도 아니고, 꼴에 좋아한답시고 되먹지도 않은 질투를 하는데 억울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짱을 끼고 못마땅해하던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왔다.
“그럼 아는 김에 말해봐라.”
“…뭐?”
“그녀에 대해 아는 거 전부. 그럼 멋대로 군 것 정도는 용서해주지.”
벨져는 이글을 내려다봤다. 그 딴엔 선심 써서 아량을 베푼다고 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이건 권유가 아니라 협박이다. 말 안하면 용돈을 끊던가, 아니면 주먹이나 발이 날아오겠지. 이미 그의 승리에 도취해있는 형을 올려다보며 이글은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지, 걱정을 해봤자 보람을 느낄 수가 없는 형제다. 이 거지같은 형을 걱정하느니 루이스를 걱정하는 게 심신의 평화에 이로울 성 싶었다. 일단은 제 신세부터 걱정해야겠지만. 이글이 속으로 갈등하는 사이 벨져는 의자를 끌어다 앉고 와인까지 들고 와 홀짝였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다. 판도랑의 상자를 연 순간 빠져나갔다는 온갖 부정한 것들. 그 모두가 한데 섞여 벨져 홀든의 형상을 띠었다. 이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글이 연 상자의 밑바닥에는 일말의 희망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글쎄, 희망이 있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일까.
벨져는 이글이 다 토해내기 전까지 보내줄 사람이 아니었고, 다이무스처럼 은근슬쩍 속아주는 사람도 못됐다. 이글은 지금쯤 연합의 사무실에서 용을 쓰고 있을 루이스를 떠올리고 쓴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샤드가 제 머리를 강타하는 감각이 아직도 선했지만, 지금 그녀는 아주 멀었고 벨져는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가까운 주먹이 무서운 법이었다.
영웅님. 미안. 나도 좀 살자. 이글은 긴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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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일 때문에 몇 번 와보긴 했지만 휘황찬란한 럭셔리 호텔의 구조며 장식들은 여전히 새 것처럼 번쩍거리고, 여전히 낯설었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던 남녀 한쌍은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루이스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괜히 움츠러들어 후드를 더 깊이 눌러 썼다.
이런 장소는 역시 조금 부담스럽다. 화려한 걸로 치면 카모라나 아이리쉬 갱단의 보스들 사무실이 더하지만 공간이 풍기는 분위기는 비견할 수 없었다. 꼭 너같은 게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급스러운 금장이 박힌 문패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우아한 필체를 떠올리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똑, 똑. 루이스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드렸다. 있는 줄 몰라서가 아니다. 보통은 초인종을 누르니까 그런 평범한 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뒤를 내다보고는 루이스가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껴 섰다. 최소한으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벨져는 문을 걸어 잠궜다.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럭셔리 호텔의 객실은 참으로 그다운 화려하고 우아한 가구로 가득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화장대 위에 뜯지 않은 편지들이며 종이들이 흩어져있었다.
[귀엽더라.]
[눈이 대체 얼마나 낮은 거냐.]
[너 말야.]
대충 방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뚱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꽤 귀여운 수를 썼던데? 꼭 자기같은 꽃도 보내고.]
[하, 별일이군. 답지 않게 꽃말도 아나?]
[정확히는 얽힌 일화를 아는 거지만.]
코웃음친 벨져가 루이스를 지나쳐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의 기다림을 알려주듯 테이블 위엔 와인잔 두 개와 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고, 벨져는 코르크 마개를 따 잔에 따랐다.
[앉지 그래.]
[고마워. 안 그래도 다리가 아팠거든.]
그리 오래 서있던 것도 아니지만 루이스는 일부러 벨져의 신경을 긁을 법한 말을 하며 벨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와인을 따르고 있지만, 순간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도 도발은 충분했다.
[질문할 건 좀 생각해봤어?]
[먼저 할 기회를 주지.]
[그 내려다보는 태도는 여전하구나. 그러다 또 다칠라.]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지. 더 할 말 없나?]
루이스는 벨져가 내민 잔을 손에 들었다. 건배따위는 필요 없겠지 싶어 대답하는 대신 그를 바라보며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려 잔을 기울이자 질 좋은 와인의 달고 상큼한 향이 훅 끼쳤다. 펍의 맥주나 위스키가 입에 맞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걸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에겐 뭐든 싸구려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루이스는 싸하게 포도의 향을 남기고 넘어가는 와인을 삼켰다. 은은히 감도는 향이, 꼭 혀를 희롱하는 것 같다.
넌 내게 줄 게 없다. 네가 가진 것들 중에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없고.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던 벨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에겐 이 정도가 당연한 걸 테니까. 아무리 애써도 그의 눈에 찰만한 걸 마련하는 건 무리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전에 내건 조건을 떠올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먼저 물을게. 제키엘 헌팅턴의 테라듀는 우리 쪽 테라듀 능력자의 것과 동일한 금속이야?]
[그렇다.]
루이스는 레베카가 만나러 간다고 했던 '친구'와 가면의 아이작을 떠올렸다. 그리고 레나를 쫓던 스토커. 그 세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면 그의 인간적인 면을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레베카는 그 역할을 하기엔 너무 올곧고, 그렇게 잔인하게 친구를 속일만한 사람이 못 됐다. 배신을 경험하는 건 자신만으로 족하다. 루이스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성급했다. 일단은 이 남자를 상대하는 게 먼저였다.
[네 차례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길래 시간을 준 것 뿐이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벨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렸다. 붉은 와인이 잔 안에서 물결치며 얇은 선을 남겼다.
[해석하는 건 각자의 자유에 맡기기로 했던 것 같은데.]
[흐응. 딱히 궁금한 건 아니다. 관심도 없고.]
[좋아. 그래서 네 질문은 뭔데?]
[이공간을 통해 얻은 힘은 공간을 파괴하면 사라지나?]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다. 관측할 수 없는, 보고된 적 없는 주제에는 답을 할 수 없다.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새 공간이 발견되긴 해도, 사라진 경우는 아직 우리 쪽에서도 전례가 없어. 그러니까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어. 나만 손해만 본 것 같네.]
모른다는 말을 돌려 말해도 벨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여유롭고, 내려다보는 시선은 변함이 없다. 와인잔을 입에 가져간 벨져의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순간 루이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이 질문의 답은 솔직하게 대답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벨져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한 번의 기회를 버린 셈이었다.
[답지 않게 의심이 많네, 벨져.]
[확실할수록 좋다고 한 건 너였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그 정도는 내줘도 상관 없다는 태연자약한 태도에 루이스는 생긋 웃었다. 오만한 말투며 사람을 깔보는 태도하며, 혼자 여유를 만끽하는 저 잘난 얼굴이 짜증났다. 얄밉다는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재수 없다. 어쩌다 이 남자와 다시 얽히게 됐을까.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날 그 문을 열었던 걸 후회했다. 아예 마주치질 말았어야 하는데.
[뭐, 그럼 다시 질문하지. 공간을 없애는 걸 시도한 적 있나?]
루이스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잔의 밑동을 만지작거리다 가볍게 잡고 들어올렸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고, 눈으론 그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이 아까울 정도의 고급 와인이지만 쉬지 않고 한 숨에 쭉 잔을 비웠다. 입술을 떼고 흐르는 방울을 혀로 핥자 벨져가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내가 친절했다는 생각은 않고? 전에 누가 먼저 뻗었는지 기억 안 나나 보네.]
[흥. 그딴 배려 필요 없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벨져 홀든이시겠지.]
살짝 툭,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 벨져가 발끈해 눈에 힘을 줬다. 안 들어도 뻔한 말에 목소리를 겹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뺨을 받쳤다. 지킬 게 없다는 건 그만큼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그만큼 외롭고. 루이스는 어깨에 준 힘을 뺐다.
벨져는 못마땅하단 표정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아무리 그의 기분이 언짢은들 루이스는 그의 눈치를 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시큰둥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벨져 대신 객실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갚아주는 게 도리다.
[네 의무는 아직 다하지 못한 거지?]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해낼 거다. 난, 벨져 홀든이니까.]
테이블 대신 둥근 와인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건드리던 루이스는 한결 진중해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벨져의 표정에 여유로 가득한 오만한 미소가 걷혔다. 하나마나인 질문을 하는 걸, 같은 방식으로 돌려준 것뿐이고 그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한 번 하기로 했으면 적어도 상대를 대등하게 대하는 게 그가 수호하는 기사도가 아닌가. 그러니 이 질문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있음에도 충분히 가치있었다.
[좋아. 질문해.]
벨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새삼 벨져의 속눈썹이 길고 예쁘다는 걸 깨닫고 와인잔의 테두리를 검지의 지문으로 매만졌다. 원을 그리는 손가락에 와인 방울이 맺혀 잔 위를 미끄러졌다.
[회사로 넘긴 연구 일지, 누락된 건 의도된 거였나?]
[계속 말하기 곤란한 질문 뿐이네. 맞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토니는 알고 있어.]
고르고 골라, 정제해낸 신중한 질문에 루이스는 성의껏 답했다. 모르는 거라면 몰라도 알고 있는 걸 감추진 않는다는 게 이 게임의 규칙이었고, 벨져에게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선 신뢰를 쌓는 게 우선이었다.
비록 그의 시험에 한 차례 통과했다고 해도 교묘하게 답하는 거나, 회피하면 결국 둘 다 시간만 버리고 헛수고만 쌓일 뿐이었다. 전 게임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도 결국은 신뢰의 문제였으니까. 특유의 오만함이 전부 걷히지는 않겠지만,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면 충분했다. 사실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하는 게 반칙이지만 흥미가 생겼는지 벨져의 눈빛이 이유를 요구했다.
[감이야.]
[뭐?]
예상한대로 벨져가 미간에 힘을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 물론 그냥 피하려 하는 거라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루이스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근거가 없기에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
[못 믿겠으면 말고.]
[연합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나?]
[기사단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정해놓은 규칙도 존중 안 해?]
[너...!]
[분명히 해두지만, 조직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으로 하는 거래야. 싫으면 당장 그만두던가.]
루이스는 잔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고 나기를 귀족, 그것도 홀든의 벨져. 이 남자와 동등한 자격으로 거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스는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고 생각도 없었고,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이 게임을 이어가야 할 정도로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연합은 가장 능력자들이 많은 조직이고, 그만큼 들어오는 정보도 많았다. 물론 그걸 솎아내는 것도 일이지만 연합은 회사, 혹은 국가 하나와 정보전을 해도 밀리지 않는다. 하물며 오스트리아에 국한된 기사단이 얼마나 유익한 정보를 가지고 있겠는가. 루이스는 벨져에게 이렇게까지 의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쉬운 건 벨져고, 그걸 알기에 제안한 것 뿐이다. 두 가지에 답했고, 한 가지 답을 얻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벨져의 목소리가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잠깐.]
[영양가 없는 소리나 하면서 계속 날 무시하고 깔볼 거라면 더 있고 싶지 않은데.]
[...다시 앉아주겠나?]
딴에 많이 참은 듯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 나름대로 양보한 거라는 걸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자의 입장에서 봐주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아량을 베풀 듯 굽혀주는 게 아니라, 동등한 위치를 원했다.
[다시 앉으면? 어차피 계속 그런 식으로 굴 거잖아? 자기만 양보하고, 참는 것 같고 그래?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하지 마.]
[...약속하지.]
[뭘?]
[노력하겠다.]
겨우 한다는 말이 노력하겠다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벨져는 자신이 한 약속을 나몰라라 할 위인은 못 됐다.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그 높다란 자존심에 꽤 상처일 테고,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에 루이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질문할 차례였다.
[프리츠를 돕는 건, 한 사람을 위한 거야?]
[아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나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이득을 볼 수는 있겠지.]
[흐응. 그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투군.]
벨져가 그 예쁜 얼굴에 불쾌하다는 걸 드러냈지만 루이스는 덤덤했다. 한 차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자기는 이런 식으로 구냐는 불만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지금은 연합의 능력자도, 기사단의 단장님도 아니니까 뭐.... 내가 감이라고 답한 거랑 비슷한 거지.]
[시키지도 않은 설명을 한 건 너다.]
[그러니까 잘 걸러서 들어야지. 그건 해석하는 사람 몫이야.]
[자의적 해석으로 답을 회피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질문에 포함이야?]
질문에는 질문으로. 싸늘한 신경전 속에 날카로운 말이 오갔다. 계속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바람에 고작 세 번 질문이 오갔음에도 피곤이 몰려왔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고급 와인이라 방심하고 한 번에 들이킨 게 이제야 올라오는지 머리가 아팠다. 임시방편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 같으니.]
[동감이야. 그보다 슬슬 피곤한데.]
[쯧.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랬나.]
벨져가 일어나 객실 한 쪽에 있던 크리스탈 물병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고압적인 말투나 시종일관 사람을 얕잡아보는 것만 아니면 소설 속에나 나오는 기사님 같았을 텐데. 물론 전형적인 기사님은 따로 있지만 이런 면에선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두 사람의 정의가 다를 뿐이라던 말을 떠올린 루이스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물을 마셨다. 와인보다 더 미지근한 물에선 비린 맛이 나지 않았다. 얼음을 녹이지 못한 날이면 그냥 수도에서 따라 마시는 물과는 천지차이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루이스는 잔을 반쯤 비우고 내려놓았다.
[네 차례야.]
[계속 할 수 있겠나?]
[이정도 쯤이야. 사실 오늘 야근해야 했는데 덕분에 탈출했거든.]
루이스는 엷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마사지하던 손을 내렸다. 앤지도 토니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 벨져는 영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춰서 해가 됐으면 됐지 득이 될 게 없다는 건 벨져 역시 잘 알았다.
[헌터가 프리츠에도 관여했나?]
[헌터라....]
모호하고 위험한 질문에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졌다. 헌터가 어느 개인을 특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직업군을 뜻하는 것인지도 애매할뿐더러 프리츠에 관계했냐니. 홀든과 프리츠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전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제게 묻는 의도는 무엇인가. 정말 몰라서?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더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벨져가 잔을 들었다.
[망설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넘어가도록 하지.]
[조금 의외라서. 그런 거 안 궁금할 것 같았거든.]
[그런 거라.]
[그렇잖아. 아니면 이것도 너를 위한 거야?]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나른하게 고개를 저었다. 뺨이며 몸이 뜨뜻한 게 피곤한 나머지 술기운이 금방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 해도 될 말이 나오는 건 다 그 때문이었다.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꽤 많이 돌아다녔거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미지근한 물에 얼음을 만들어 넣었다. 잔에 얼음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연합이야 그렇다 쳐도 그동안 서점에서 안 잘린 건 기적이지.”
“흥. 둘 다 같은 이유겠지.”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다른 건 몰라도 ‘영웅’의 이름은 꽤 매력적인 선전 도구니까.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돌려 말해주는 게 친절인지, 아니면 그냥 한 말인지 몰라도 그 핵심만큼은 정확했다. 그래. 둘 다 같은 이유다. 그걸 제외하면 남는 거라곤 얄팍한 연민과 정뿐이다. 그렇게 배신당해놓고 또 사람을 믿는 자신도 참 우습지만.
“다른 소릴 해대는 걸 보아하니 취했나보군.”
잠시 생각에 빠져 동료들의 얼굴을 그리는 사이, 벨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이 떨리고 그림자가 지는 모습이 예뻐 눈을 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엷게 웃었다.
벨져 홀든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남자다. 외모도 그렇지만,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포식하는 맹수와도 같이 강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하기 때문에 여유롭고, 강하기 때문에 약자를 굽어 살피는 아량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그 자신만을 사는 그에게 제 모습은 퍽 답답하게 비춰질 터였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한심하다는 듯 볼지도 모른다. 벨져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고, 이유를 말한다 한들 이해할 수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오해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안 하느니만 못 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 겨우 와인 한 잔에 취할 리가 없고, 설령 취했다한들 정신은 말짱했다. 피곤에 절은 몸이 받쳐주지 않는 것 뿐. 그렇다 해도 벨져는 더 이어갈 의지가 없어보였기에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 와인 잘 마셨어.”
“간다고? 이 시간에?”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물론 날이 바뀌어 오긴 했지만 못 갈 것도 없는 시간이다. 루이스는 그게 뭐 어때서?란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아하고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론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벨져가 인상을 쓰며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전장을 나뒹군다 한들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협은 어쩔 수 없다. 성큼성큼, 힘으론 절대 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루이스는 긴장하며 뒷걸음질 쳤으나 벨져는 홀든의 쾌검사였다.
등이 벽에 닿고, 벨져가 다가와 팔을 뻗었다. 얼굴 옆, 벽을 짚어 자신을 가둔 그의 손과 팔이 거북했다. 그래봤자 한 팔 뿐이니 완전히 가둔 것도 아니고 못 빠져나갈 것도 없지만 이런 식은 불편하다. 문득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에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세게 뛰었다.
“저, 저기…. 벨져…?”
“아무리 너라도 새벽 두 시는 늦은 시간이지. 자고 가라.”
진중한, 푸른 바다를 담은 듯한 눈동자. 에메랄드와 코발트의 염료가 함께 섞여 어우러진 것 같은 예쁜 눈은 이탈리아의 바다를 떠오르게 했다.
“…원래 이런 식이야?”
“이런 식이라니.”
“이렇게 꼬시냐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친 벨져가 턱을 살짝 올려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원래도 내려다보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깔보는 시선이라니. 그 잘난 얼굴에 얄미운 미소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명치에 주먹을 꽂아야 할까 생각하며 주먹을 쥐는데 귓가에 금속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옆 방을 빌려놨다.”
“모든 귀족이 다 너같은 건 아니지?”
“흥. 그럴 리가. 모든 영국 남자들이 신사던가? 종종 불청객이 찾아와서 그 방비용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고마워.”
“…가 봐.”
루이스는 실없이 웃으며 열쇠를 받아들었다. 태연한 척 미소를 머금고 열쇠를 고쳐 쥐자 사납게 치켜 올라갔던 벨져의 눈매가 슬쩍 풀어졌다. 짜증나긴 하지만 한편으론 참 알기 쉬워서 좋다. 루이스는 돌아서자마자 가식으로 띄운 미소를 거뒀다.
이런 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건 어디까지나 주인과 하인의 관계고, 그건 아직도 그가 저를 깔보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자신이 베푸는 아량에 감사할 줄 아는 시녀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루이스는 찝찝한 감정을 뒤로 하고 벨져의 방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기대 비슷한 걸 한 게 무색하기도 하고,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도 못하는 걸 혼자 의식하고 있다는 게 쪽팔리고 분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도로 열쇠를 던지고 싶지만,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 침대와 최신 설비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손을 대고 열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옆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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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아무리 졸리고 피곤해도 출근은 해야 한다. 오늘도 착실하게 소시민의 삶을 시작한 루이스는 별 다를 거 없는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서점으로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을 빵을 한 덩이 사고 출근.
루이스는 서점의 문을 열고 일할 때 입는 셔츠와 가디건으로 갈아입은 뒤 서점 뒤 테이블을 정리하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서점은 한가롭다. 아는 사람, 혹은 꾸준히 찾는 사람만 오는 서점에서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소소하게 자리한 서점은 사실 트와일라잇 광장에서 가장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가끔 책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읽긴 하지만 추천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기야 이 시국에 트와일라잇까지 온 사이퍼가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바로 옆에 있는 홀든 은행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이퍼들이 들락거리지만 서점은 한가롭기 그지 없었다. 루이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하루가 갈수록 몸이 예전같지 않다. 여기저기가 삐걱거리고, 만성 수면 부족으로 카페인 없이는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모처럼 볕이 잘 드는 날씨에 몸이 더 나른했다. 인간의 삼대 욕구는 수면욕과 식욕, 성욕이라고 했던가. 안 그래도 요즘은 지치는 일 뿐인데 한밤중에 잠도 안 자고 돌아다녔더니 잘 시간을 뺏기는 건 물론이요, 거기에 머리까지 쓰느라 배로 힘들었다. 하긴, 벨져 홀든을 상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어제는 정말 생각나는 게 거기밖에 없어서 그랬지만 벨져의 말대로 장소를 옮길 필요는 있었다. 뒤에 보이는 트리비아, 방금 막 리스폰 기어에서 내려와 무전으로 들리는 이글의 목소리에 떠오른 게 거기였을 뿐이다.
딱히 거기라야 할 이유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거기까지 오가는 시간과 체력이 아깝다. 게다가 제 아무리 잘난 벨져 홀든이라도 일단은 연합의 세력권인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 중 누군 뭐 안전하겠냐마는,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이미 한 차례 아무것도 아닌 조무래기를 깔봤다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벨져를, 그 아름답고 고고한 남자를 떠올리다가 눈을 비볐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걸 봐선 아무래도 여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얼어죽을 걱정이나 난방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좋지만, 더위와 쨍한 햇살은 견디기 힘들다. 여름은 루이스에게 가장 가혹한 계절이었다. 올해는 더 더울 거라는데 또 어떻게 여름을 나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나고 자란 런던의 뒷골목에 해가 잘 들지 않아서였을까. 추위를 견디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한여름 뙤약볕에는 몸이 맥을 못 추고 늘어졋다. 거기다 햇빛에 노출된 피부는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울긋불긋하게 물들어서 여름에도 몸을 가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편해서 입고다니던 후드는 이제 떼어놓을 수가 없는 필수품이 됐다.
다들 해수욕이다 뭐다 하며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놀러갈 때도 루이스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벨져는 더 피부가 희고 창백한데 여름엔 어떨까. 그 성격과 외모에 양산이라도 쓰고 다닐지 모른다. 분명 화려한 레이스 양산을 쓰겠지. 워낙 하얗고 예뻐서 흰 색이나 아이보리 색이 어울릴 텐데.
지루하기 짝이 없는 뻔하디 뻔한 로맨스 소설을 읽던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았다. 모든 걸 가진 귀족 남자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활발하고 선한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차고 넘쳤다. 흔히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는데, 신데렐라는 원래 귀족 가문의 여성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왠지 그가 이 거리를 지나갈 것만 같다. 그렇게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데 꽃 파는 아이 하나가 서점 문을 열었다.
“저, 저기….”
“응? 무슨 일이니.”
“이거…! 엄청 예쁜 분이 언니 갖다드리라구…!”
뺨이 발갛게 물든 데다 눈이 반짝이는 여자아이가 루이스에게 수선화 한 다발을 내밀었다. 엄청 예쁜 분. 머릿속을 스쳐가는 인물에 루이스는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그리구 이것두요!”
“응, 고맙구나. 다른 말은 안 하셨니?”
루이스는 꽃을 내려놓고 앞치마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열한두살쯤 됐을까, 자매가 아니냐고 더러 묻는 세탁소의 아이 또래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작은 쪽지를 건넸다. 두 번,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접힌 쪽지에선 희미하게 꽃향기가 났다. 이쯤 되면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보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것도 없었다.
“어, 음…. 그지만 이건 비밀인데….”
“나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던?”
“아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그게….”
시선을 피하는 아이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 루이스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아이를 다그칠 생각은 없다. 대신 아이의 모자 위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 먹었니?”
“아뇨, 아침 일찍 꽃을 따느라….”
“그럼 같이 먹을래? 혼자서 먹긴 심심했거든. 그래봤자 빵이랑 차뿐이지만.”
“네!”
능력자도 아닌 아이가 여기까지 꽃을 팔러 왔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정말 형편이 어렵거나, 아니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스파이거나. 벨져가 뭘 보고 고른 건지 몰라도, 어쨌거나 아이는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낡은 원피스와 앞치마. 그것마저 꽃을 꺾느라 흙으로 더럽히고, 제 때 먹지도 씻지도 못한 데다 음식을 보자마자 기대감에 눈을 빛내는 것까지. 어쨌거나 루이스는 거리의 고아 출신이었고, 그런 것들을 구분하는 눈만큼은 확실했다.
차를 우리고 컵에 담아 내가는 동안 아이는 신기한 듯 서점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루이스는 작은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고 말을 붙였다.
“읽어보고 싶니?”
“아, 아뇨! 읽을 줄도 모르는 걸요. 그 예쁜 분도 제일 먼저 글을 읽을 줄 아냐고 물어보셨고…. 앗!”
손사래를 치던 아이는 해맑게 웃다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밀을 말해버리고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는 빵을 잘라 큰 쪽을 아이에게 건네며 웃었다.
“괜찮아. 비밀로 할게. 약속.”
“정말이죠…?”
“그럼. 별 것도 아닌걸.”
“휴, 감사합니다. 아, 언니도 예쁘세요! 정말로요! 아까 그 분은 장미같구, 언니는 물망초 같아요! 더 잘 팔리는 건 장미지만요!”
“그래. 고마워.”
들어올 때만 해도 간신히 말을 꺼내던 아이는 말이 많고 활달했다. 천성이 밝고,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고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가 빵을 손에 쥐자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천천히 먹으렴. 차도 좀 마시고. 너무 뜨겁니?”
“아뇨! 괜찮아요! 뜨거운 물이 얼마나 귀한데요!”
“그러다 체할라.”
루이스는 아직 김이 오르는 아이의 컵을 들고 후후 불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에게 컵을 건넸다.
그야 물론 보낸 애가 안 돌아오니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도 벨져가 지켜보고 있다. 직접 행차하지 않는 이유는 단연 옆 건물의 그 때문이었다. 이글이 아무리 바닥에 드러눕고 떼를 써도 절대 빌려주지 않는 홀든 가의 장남.
다이무스는 꽤 젠틀한 신사였고, 서점에도 자주 들르는 단골 고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벨져보다야 다이무스의 호의를 사는 게 낫고,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다이무스에게 빚을 지우는 게 이득이지만 어쨌거나 한 번 거래를 시작한 이상 그를 팔아넘길 순 없었다. 못 할 건 또 뭐 있겠냐마는, 그랬다간 정말 그와는 끝장이었다.
답을 아이 편에 돌려보내야 할까. 루이스는 창밖을 흘긋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부러 글을 못 읽는 아이를 보낸 건 단 한 줌의 정보도 흘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마 제대로 전해주는지도 지켜봤겠지. 아무렴 벨져 홀든이 일을 그렇게 허술하게 할 리가 없다.
루이스는 아이가 빵을 먹는 사이 창을 등지고 서서 쪽지를 폈다. 코어레너드의 럭셔리 호텔 이름과 네자리 숫자. 루이스는 객실 번호만 외우고 일어나 물을 끓이느라 썼던 화로에 쪽지를 던져넣었다.
“언니는 안 먹어요?”
“응? 아, 괜찮아. 더 먹을래?”
“정말요?”
“가져갈래?”
조심스럽게 묻는 아이의 앞치마가 불룩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먹을 걸 숨기는 건 나중에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배가 주린 와중에 생각나는 가족 때문이다. 활짝 피는 아이의 얼굴에 루이스는 빵을 잘 싸서 봉투 안에 넣고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심부름 값 대신이라고 생각해.”
“그, 그지만…. 꽃 값도 후하게 쳐주셨는 걸요.”
“괜찮아.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루이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냥 쪽지를 배달시키고 말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아이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나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벨져는 너무 예뻤고, 흔치 않은 일을 접한 아이는 순전히 뿌듯한 마음에 자랑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었다. 꽃 파는 아이, 신문 파는 아이, 구두 닦는 아이. 거리에 넘쳐나는 아이들 틈새로 번지는 소문은 또다시 그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었다.
“비밀로 해줄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 가족한테도,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꽃들한테도요?”
“응. 사실, 언니랑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거든. 언제 어디서나 감시하고 있어서, 잘못하면 너도 네 가족들도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알겠니?”
짐짓 심각한 척 아이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속삭이자 겁을 먹은 듯한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걸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괜히 겁을 준 것 같아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눈을 돌리려는 순간 꼼질락거리는 아이의 손과 작은 잇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 한 거짓말, 조금 더 보탠들 어떠랴 싶어,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동생이 있니?”
“네, 이제 다섯살이구…. 몸이 아파요….”
“네가 동생을 사랑하는 것처럼, 언니도 그 분을 사랑한단다.”
“…정말요?”
아이들은 감정에 예민하다. 아이의 질문에 뜨끔한 루이스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직접 만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그 분의 말을 전해주겠니?”
루이스는 최대한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말하려 애썼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읽었던 소설의 정신 나간 여주인공이 새를 붙들고 하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하는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이 나이 소녀들은 으레 동화속에 나올 법한 로맨스를 동경하는 법이니까. 슬픈 척 눈을 깜빡이자 아이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예요!”
“고마워.”
루이스는 아이를 한 번 안아주고 일어났다. 오래 쪼그려 앉은 탓에 다리가 저렸다. 어떻게 이게 통했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금단의 사랑을 하는 가련한 여주인공 보듯 힘내라며 서점을 나섰다.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뒤에서 손을 흔들던 루이스는 의자에 털석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의욕이 넘치는 것도 문제다. 아이가 벨져에게 힘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벨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조금 궁금했지만 당장은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택도 없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걸 가지고 또 한 소리 할 지언정 그도 이해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가벼운 아이들의 입을 믿을 순 없을 테니까.
한 차례 폭풍이 몰아친 것 같다.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빵부스러기와 컵 두 개, 그리고 서점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와 눈이 쨍할 정도로 노란 수선화가 남았다. 오늘 아침에 꺾어왔다는 말을 증명하듯 물기가 어린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가장 예쁜 유리병을 찾아 반쯤 물을 채우고 꽃을 꽂아 햇볕이 가장 잘드는 창가에 병을 놓았다. 싱그러운 여름의 향기가 오래된 종이로 가득한 서점을 채웠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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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다음주에 온다던 사람입니다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
불꽃이 일고 금속음이 터지며 곳곳에서 공격이 날아드는 교전 상태, 가장 앞에 선 벨져는 박쥐로 변해 후방으로 달아나는 여제를 쫓았다. 그녀를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를 악문 순간, 벨져의 옆으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얼음 레일이 벨져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제길…!”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급하게 몸을 돌려 검을 던져다. 섬광보다 빠르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이라면 막을 수 있다…!
“전부, 얼어버려!”
한 끝, 한 끝 차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녀를 막지 못한 대가는 차가운 얼음 감옥이었다. 후드 안으로 휘날리는 청회색 머리카락. 얼음 속에 갇힌 채 후방에서 교전중이던 이들이 얼음 산탄총에 쓰러졌다. 벨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짐이라고는 하나 회사의 능력자라는 사람 넷이 단번에 리스폰 기어로 올라가버리는 기분이란. 꼼짝할 수 없게 가뒀던 얼음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벨져는 모든 기술을 써버린 루이스에게 달려들어 올려 베었다. 네 번, 베고 잡아 착지하며 안개지역의 상자 안으로 밀어넣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크흣…!”
“그 잘난 영웅의 이름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군.”
“네가 상관할 바가…, 큭!”
“아직 내 질문에 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하, 먼저 내빼놓고 이제 와서?”
벨져는 유치한 도발로 기회를 엿보는 루이스를 잡아 빠르게 발도해 베었다. 그녀만큼 단번에 큰 피해는 입힐 수 없지만 일대일인 이상 이런 식으로 갉아먹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우위를 점하고 이어가는 건 제 쪽이다.
아무리 환영의 도시라한들 고통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물들었다. 그 와중에도 눈을 감지 않는 건 칭찬할만 하지만 그녀는 과거 첫 대결에서도 그랬다. 그러니 딱히 칭찬해줄 필요도, 전처럼 한 수 물러줄 것도 없다.
“흥, 아직 남은 질문이 있지 않나?”
“후우. 하,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거야? 의외로 쪼잔하네! 홀든!”
깔끔하게 베어넘기며 잠시 손을 놓은 틈으로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날카로운 얼음의 위력은 몸소 체험해 본 자만이 안다.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걸, 벨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검의 괘적을 바꾸는 것보다 루이스의 검이 더 빠르다. 벨져는 검으로 쳐내는 대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이 거리면 언제든 검을 던져 공격할 수 있다. 루이스의 사정거리를 가늠한 벨져는 다시 그녀에게 검을 던져 돌아가려 했다.
“나가라!”
여제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뒤에서 날아든 박쥐 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앞은 루이스, 뒤는 여제. 벨져는 작게 혀를 찼다. 어느 쪽이든 피할 수 없다. 루이스가 미소짓는 게, 옅은 안개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작게 움직이는 입술.
“제길…!”
박쥐 떼가 등을 덮치고, 몸이 떠오른 순간 루이스가 벨져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른팔을 왼팔로 받치고, 귓가에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속삭이더니 곧장 쨍한 냉기와 함께 얼음이 폭발했다. 쟁쟁한 소리와 투박한 통증이 이어지고, 곧이어 벨져는 리스폰 기어 위로 올라갔다.
자아도 없이 끌려가는 기분이란 언제 당해도 기분 나쁘다. 먼저 올라와있던 넷이 제 눈치를 살피는 게 더 짜증나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십 분 내내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방금 그 한 방으로 열세를 극복하고 승기를 가져간 주역이 본진까지 들어와 무자비하게 수호자를 쓰러트리는 걸 손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영 심기가 불편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녀의 능력만큼이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이야말로 벨져가 방금 전까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전날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여느 아가씨마냥 머리를 틀어올린 게 이레귤러일 뿐이었다. 제 눈 앞에서 까딱이던 희고 가는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향락의 기억.
당황한 나머지 먼저 살롱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할 거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루이스가 너무 태연한 탓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쪽은 말을 꺼낸 벨져였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저들끼리만 화기애애하느라 공성을 망친 팀원들이 먼저 리스폰 기어를 나간 탓에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의 그 술집에서 봐.”
홀로 남은 벨져는 마지막으로 루이스가 속삭인 말을 곱씹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겨우 그 말만 가지고 어떻게 찾아가겠냐고 하겠지만 벨져에겐 짚이는 곳이 있었다.
아니, 거기밖에 없다. 루이스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디시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제 망나니 동생이 그가 가진 가장 귀한 재산에 흉터를 내고 가문의 위상을 더럽힌 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능력자에게 당한 제가 낫다. 비록 3급 능력자라 하지만 적어도 루이스는 그녀가 가진 다른 이름 앞에 한 치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분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상대였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벨져라 한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벨져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 루이스를 옹호해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겨우 그렇고 그런 능력자따위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만큼 굴욕적인 건 없을 테니까.
그 때의 일은 제 오만과 방심이 빚어낸 실수에 불과했지만 '루이스'는 달랐다. 그녀는 벨져 홀든을 꺾은 능력자답게 성장해나갔고, 이제는 더 나아가 연합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이 쯤 되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어차피 일생에 한 번쯤 겪을 일이라면, 오히려 그녀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벨져는 화를 내며 올라온 르블랑의 꼬마 숙녀와 명왕의 양녀를 내버려두고 부서져가는 HQ를 바라봤다. 니케가 루이스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누구에도 지는 법이 없는 자신이건만 루이스 앞에만 서면 흐름이 이상하게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어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내려가지 않았다. 여제가 비행을 시작한 이상 끝난 게임이었고, 내려가봤자 기세등등한 적을 마주해 분풀이를 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 당초 얼굴을 비추는 것에 의의가 있었던 만큼, 벨져는 이번 공성을 진들 이긴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예정에도 없던 루이스가 나오는 바람에 아주 약간 진심이 되었던 것뿐이다. 오히려 소득이라면 소득이 있었지.
여느 때처럼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 받는 회사 사람들을 두고 벨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잔소리꾼이라도 만나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
* * *
포트레너드의 쪽, 디시카는 워낙에도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회사와 연합의 갈등이 깊어지고 안타리우스가 성횡하는 근래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술냄생와 퀴퀴한 악취가 진동하는 술집으로 발을 들인 벨져는 손을 들어 코를 손등으로 가렸다. 그런다고 악취가 가시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손등에 남아있는 향수 냄새가 이 냄새에 적응하기까진 도움이 될 터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술집에는 불량배며 정신이 빠진 녀석들이 즐비했고, 벨져는 저를 이런 곳으로 불러낸 사람을 찾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능력자라 한들 여자 혼자서 들어올 곳이 못 된다. 척 봐도 질이 나쁜 녀석들이 여자를 끼고 수작을 부리거나, 공기가 탁해질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며 싸구려 술을 퍼마시는 지저분한 술집은 고귀함과 품위를 호흡하며 자란 벨져에겐 아무리 좋게 봐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잘도 이런 싸구려 술집에 발을 들일 생각을 했구나, 이글. 막내를 떠올리며 혀를 차던 벨져는 안쪽 구석에 후드를 쓰고 앉아있는 루이스를 발견했다. 눈여겨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엔 싸구려 위스키 한 병과 유리잔 두 개, 맥주병이 늘어서있었다. 혼자 마실 양은 절대 아니다. 벨져는 갈색 맥주병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훑던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눌러쓰고 고개를 수그린 그녀를 내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꼭 이런 곳이어야 했나?”
“보다시피 제정신 안 박힌 놈들 뿐이거든. 이 시간엔 더더욱. 걱정마, 여기 주인이랑 아는 사이니까.”
“흥. 말은 잘하는군.”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평소에 입는 후드재킷보다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여성 특유의 골격까지 감출 순 없다. 조악한 불빛 아래 잘 보이지 않는 얼굴과, 곳곳에 생채기가 난 가는다란 손가락. 벨져는 잔을 들어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마시지도 않을 맥주병만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이런 술이야 그냥 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얼음이 나올 리도 없고.”
“그냥 달라고 해.”
루이스는 손을 쥐었다 펴며 빈 잔에 얼음을 채웠다. 기묘한 장면이지만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이 정도는 놀라운 축에 끼지도 못했다. 라벨도 상표도 없는 위스키를 따 잔에 따른 벨져는 얼음과 술이 섞이도록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대로 내려놓으려 했는데, 무언가의 기대를 담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단숨에 들이켰다.
“후후. 만만히 볼 게 아니지?”
“…너….”
“그게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야. 싫으면 다시 문 열고 나가.”
색을 보고 당연히 위스키겠거니 생각한 술은 식도와 위를 태우는 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셌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썼던 벨져는 여유롭게 웃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루이스는 만지작거리던 병을 따 손에 들고는 의장에 등을 기댔다. 가시지 않은 쓴 맛과 타오는 속 때문에 입가가 씰룩거렸으나 루이스는 제가 먹인 골탕이 만족스러웠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래.”
“잘도 나를 기만하는군.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고.”
“기대할게.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게 인지상정. 말문이 막혔는지 루이스가 테이블에 팔을 올리며 벨져 쪽으로 몸을 숙였다. 후드 안에 감춰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피처럼 붉은 눈이 벨져를 향했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혼자 남겨지는 거, 기분 정말 별로였거든.”
“윽……. 그때는….”
“알아. 경황이 없었겠지. 바쁘셨거나. 그런 걸로 연연하고 매달리는 레이디가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렇지 않게 아픈 구석을 찌르고 빠지는 바람에 기세등등하게 루이스를 몰아붙이던 벨져의 기세가 꺾였다. 아침에 일어나 목도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벨져가 입을 다문 사이 루이스가 도로 몸을 뒤로 빼고 팔짱을 꼈다.
“그땐 나도 완전히 취했었고…. 그냥 서로 실수한 걸로 치고 넘어가자고. 참고로 전에는 술로 때우려다가 그 방에 있는 술을 동내고 밑천이 없어서 옷 벗기로 했던 거야.”
“누가 먼저….”
“알고 싶어?”
“아니, 됐다!”
누가 침착한 결정사 아니랄까봐, 잘도 부끄러운 얘기를 술술 늘어놓는 루이스때문에 벨져만 뺨이 달아올랐다. 어느 쪽이든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전말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고, 없던 일로 하는 건 이쪽도 원하는 바였다.
벨져가 죽고 싶을 정도로 쪽팔려하는 게 재미있어,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발로 벨져의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그가 루이스를 볼 때 고운 얼굴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고, 확률로 치면 다시 한 번 거대 일식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희박했다.
“뭐, 지난 질문에 다시 답하는 건 포함시키지 말자구.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냐고 물어본 거야. 이걸로 세 번째네.”
“으윽….”
분명 엇비슷하게 마셨던 것 같은데 먼저 정신을 놓고 기억을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벨져는 도로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분명해서, 루이스는 조금이나마 다이무스의 고충을 이해했다. 이글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픈데 벨져까지 돌보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루이스가 그런 생각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사이 벨져는 이미 몇 번이고 되짚었던 기억을 돌이켰다. 영화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유독 생각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레코드가 긁힌 것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는 기억 속에는 지금의 이 무감각한 얼굴이 아닌, 잔뜩 흐트러져 할딱이는 여자가 있었다. 충동에 휩싸여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타들어가는 속만큼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쓰린 속에 또다시 누가 불을 지른 것만 같다.
눈을 감았다 뜬 벨져는 자신을 다잡았다. 취한 것도 아닌데 멀쩡한 제정신으로 루이스에게 말려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서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만 해댔지. 네가 여제의 행방에 마지막 남은 와인을 들이키던 것까진 기억난다.”
“설마하니 그렇게 다 피해가고픈 질문만 할 줄은 몰랐거든.”
“동감이다.”
“규칙을 수정해야겠어. 물론 계속한다는 가정 하에.”
“무슨 생각이지?”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돼. 어쨌거나 조건은 전과 같아. 소속의 대표가 아닌 개인으로서 하는 거래고, 제공자의 신원 보호는 철저하게 지켜야 해.”
“차라리 종이와 펜이라도 가져오지 그러나.”
“이런 건 확실히 하는 편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서로 안전한 편이 좋잖아?”
“그래서 새 규칙은.”
“간단해. 답은 예, 아니오. 대신 대답하기 곤란하면…. 술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요구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지.”
“그렇게 하면 네가 내놓을 게 있나? 공평한 거래라고 들리지 않는데.”
“벌써부터 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왕이면 안전한 편이 좋지.”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사항을 늘어놓는 건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의 성격탓일 수도 있지만, 벨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영웅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 한들 변함없이 겁쟁이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모두를 쥔 건 벨져지 루이스가 아니다. 벨져의 말은 다소 가혹할지 몰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루이스가 가진 거라곤 그녀의 몸과 명석한 두뇌, 능력과 정보 정도가 전부다. 자랑하는 능력도,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영리함도, 그리고 그녀가 아껴 마지않는 동료들도 전부 하나같이 내놓을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나를 줄게.”
“하! 전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군. 이만 일어나도 되겠나?”
“그래? 전에는 꽤 좋아했던 것 같아서. 아쉽게 됐네.”
이 인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 하룻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러는 게 불쾌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이래서 엮이고 싶지 않았건만. 벨져는 입가를 씰룩이며 루이스를 노려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덤덤한 무표정으로 맥주병을 기울이며 벨져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금 그 말, 상당히 불쾌하게 들리는군.”
“그러게 누가 기억하지 말래? 잊은 건 너야. 홀든. 정 궁금하면 질문이라도 해보던가.”
“흥. 차라리 술을 마셔라.”
“그게 별로라는 걸 경험해서. 아까도 말했지만, 혼자 남겨진 기분 진짜 별로거든.”
“윽…,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내 마음이다. 그리고!”
주먹을 부들거리던 벨져는 홧김에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건 전혀 벨져 홀든스럽지 않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도발하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 번쯤 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결코, 음란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소녀같이 순수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바람에 더 오기가 생겼다.
“장소는 내가 정해.”
“아무렴.”
생긋. 루이스는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막 봉우리를 틔운 하얀 꽃처럼 웃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얄미워 벨져는 대충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술값을 던졌다.
“이런 악취나는 곳에 한 시도 더 있고 싶지 않군. 일어나.”
“응? 잠깐. 아깝잖, 으왓…!”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술이 아까운 것 뿐이었는지 루이스는 저항 한 번 없이 끌려왔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벨져는 술집을 나오자마자 루이스의 손목을 놓았다.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가늘다. 장갑을 끼고 만졌음에도 손에 남은 촉감이 왠지 간질거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찼다. 말 한 마디 없이 가스등이 드문드문 서있는 거리를 걷는데 루이스가 추운지 팔을 감싸고 목을 움츠렸다. 손으로 팔을 쓰는 궁상맞은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샜다.
“저기, 난 이쪽인데….”
“그래서?”
“응?”
“앞장서라.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로의 갈림길에서 멈춰선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말하는 의도야 뻔하지만 그렇다고 새벽에 혼자 돌려보내기엔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루이스가 얼음보다 더 차갑고, 능력자 다섯쯤은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라 한들 이런 시기에 혼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할 리 없었다.
“지금 레이디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고개를 기울여 올려다보는 루이스에게 정색하고 말하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바로 섰다.
“다행이네. 보다시피 사람이 전혀 없거든.”
루이스는 싱긋 웃더니 거리에 얼음길을 깔고는 미끄러졌다. 자랑하는 기동력이 이럴 때도 쓰이는 모양이다. 벨져는 한달음에 멀어진 루이스의 뒷모습과 바스라진 얼음이 순식간에 기화되는 걸 보고 돌아섰다.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따라갈 의무까진 없다. 어차피 쉽게 당할 리가 없기도 하고,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건 그녀에게 추근덕거릴 멍청이들의 안위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인다. 벨져는 이미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꾸 루이스가 마음에 걸리는 건 몸에 익힌 매너와 습관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손에 쥐었던 가느다란 손목이 생각나서, 벨져는 샤워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루이스를 생각했다.
하루를 늦게 마치는 것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하루에 두 번 씩이나 루이스를 마주하기란 여간 피곤한 게 아니어서, 금세 잠이 몰려왔다. 눈을 감기 전, 연락할 수단과 만날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이것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깨달은 벨져는 베개를 잡아 당겨 편한 자세를 잡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나머지는 일어나서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는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그녀가 나왔다. 귀에 끈적하게 감겨드는 목소리가 달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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