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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01 [벨져루이토마] 한 걸음 더 가까이
- 2016.02.27 [벨져루이] 눈 쌓인 교정, 분수대 앞.
- 2016.02.26 [벨져루이] 그 해, 가을.
- 2016.02.25 냉장고는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가기도 한다
- 2016.02.23 [벨져루이] 더없이, 덧없이.
- 2016.02.22 소금사막 *
- 2016.02.22 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2016.02.15 St. Valentine's Day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1
수위가 있다고 해야할지 없다고 해야할지 나는 도저히 모르겟다
그지만 신간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아마... 나오지 않을까....? :Q
큰일 났다. 사고를 쳐버렸다. 그것도 엄청 크게. 뻐근하고 나른한 몸을 일으킨 루이스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남자와 자버리다니. 루이스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한 순간 루이스의 뇌리를 스친 건 다름 아닌 제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야한 신음소리였다.
자기가 들어도 야한 비음과 함께, 앙앙거리며 눈앞의 남자에게 매달려 쾌감을 좇던 감각. 질척한 물소리와 함께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난잡하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저를 집어 삼킬 것처럼 열망하고 욕정하는 얼굴. 그 푸른 눈동자.
루이스는 떠오르는 기억을 지워내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어젯밤 저를 탐하던 남자의 자는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쩜 이리도 예쁜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남자, 그러니까 벨져 홀든은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성별을 초월한 절대적인 미. 아름다움과 예술에 관해선 무지한이나 다름없는 루이스지만 그래도 벨져가 얼마나 예쁜지 정도는 알았다. 그는 정말이지 천사 같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미모의 소유자였고, 인간을 굽어 살피는 천사마냥 그를 제외한 사람을 내려다보곤 했다. 굽어 살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그는 오만했다.
원하는 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권력과 재산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고귀함을 몸에 두르고, 타고나길 온갖 재능을 부여받은 채 태어난 고귀한 남자. 루이스는 가만히 벨져를 바라보다, 그의 속눈썹이 희고 길다는 걸 발견했다. 멋지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얼굴은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사고를 친 지금 무엇보다 빨리 그 뒷수습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루이스는 다시 제 상황을 깨닫고 벨져의 얼굴에 다가가고 있던 제 손을 몸 쪽으로 당겼다. 그의 뺨을 만지려던 게 들킨 것 같아 뺨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시 한 번,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른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뒤로 뺐다. 붙어 있던 다리를 떼자 벨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깨지는 않았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날 때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몸 상태와, 어젯밤 이 침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축축한 시트에 루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허벅지와 음부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데, 끈적한 덩어리가 질벽을 타고 쏟아지는 것 같은 그 감각에 몸이 굳었다. 보나마나 뻔하다. 루이스는 그걸 깨닫자마자 욱신거리며 당겨오는 아래에 조금 더 세게 입술을 물었다.
섹스가 처음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때보다 지금이 더 수치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런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벨져가 깨기 전에 이 난감한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말마따나 칼부림을 했으면 했지 낯간지러운 말을 속삭이며 사랑을 나눌 사이가 결코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스의 머릿속에 서서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쉴 곳을 찾아 들어온 살롱의 발코니에 기대어있던 벨져. 그때만 해도 두 사람 다 지루한 파티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에 불과했다. 시작은,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보던 벨져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고부터였다.
* * *
벨져는 불청객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높디높은 자존심과 긍지는 과거의 과오를 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고, 그가 껄끄러운 건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다른 방은 이미 밀담을 나누는 사람들 혹은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로 차버렸고, 다른 방을 찾은들 저를 찾아다니며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남자들이나 제게서 연합의 기밀을 빼내려는 스파이를 만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벨져가 낫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리며 다른 방이 없어서. 라는 시답잖은 이유를 들었다. 그에겐 그냥 둘러대는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쉴 곳을 찾는다는 점에선 사실이기도 했다. 당장 쫓아내거나 빈정거리며 제 신경을 긁을 거라 생각했던 벨져는 루이스를 경계하며 눈을 떼지 않을 뿐, 쫓아내지는 않았다.
비쌀 게 분명한 예쁜 의자에 앉은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다리를 두드렸다. 높은 굽과 뾰족한 앞코의 하이힐은 보기엔 예쁘지만 운동화에 익숙한 루이스에겐 일종의 고문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걸 신고 어떻게 다니는 거지. 다시 한 번 트리비아의 아찔한 킬 힐과 고양이처럼 우아하고 도도한 걸음걸이를 떠올린 루이스는 멍하니 다리를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지만 한 번 벗었다간 다시 신지 못할 게 분명했다.
벨져는 제 앞에서 무방비하게 넋을 놓고 있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이젠 자길 위협적이라고 생각도 안 한다는 듯한 그 태도가 괘씸했다. 영웅이라는 자리에 올라 떠받들어주니 자신이 누구인지,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도 잊고 저를 무시하는 거라면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말은 제가 아닌 그녀에게 돌아가야 했다. 물론 워낙에 맹한 사람이니 지금 그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익숙하지 않은 차림새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루이스는 벨져가 보기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리고 진주알과 크리스탈이 반짝이는 머리장식을 꽂고, 같은 세트가 분명한 귀걸이를 한 채 푸른 드레스를 입은 루이스는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순진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벨져는 천천히 루이스를 향해 다가갔다.
전장에서는 한 걸음만 다가가려 해도 고개를 돌려 육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안개 속을 경계하는 그녀다. 이 여자는 지금 그 자신이 너무 힘들어 정신을 잠시 놓았거나, 자신을 위험대상에 넣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희고 둥그런 맨 어깨와 머리카락이 조금 삐져나온 가는 목덜미를 보며 루이스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빛에, 벨져는 옅게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른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제가 있는 곳이 아니라 어디 질 나쁜 플레이보이라도 만났으면 비명 한 마디 못 질러보고 잡아먹히는 순진한 아가씨가 떠올랐지만 루이스는 그 남자를 패고 나왔으면 나왔지 결코 당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리 빤히 보냐는 눈빛에 벨져는 한 손에 쥘 수 있는 목과 곧게 뻗은 쇄골, 그리고 드레스 안쪽으로 얼핏 보이는 살갗의 흉터에 그녀를 훑던 시선을 거뒀다.
“연합이 사람을 잘못 보냈군.”
발끈할만한 말에도 루이스는 그녀의 코드명처럼 차갑고 덤덤하게 벨져를 바라봤다. 그 붉은 눈동자가 살기도,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제게 향해있는 게 꽤 신선해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인계를 쓰려거든 더 적합한 인물이 있었을 텐데.”
“흐응. 실패할 게 뻔한데 인력을 낭비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서.”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에 손을 올려 턱을 괬다. 괜한 신경전으로 체력과 정신을 소모할 여유가 없었다. 벨져 홀든은 오만한 사람이니 적당히 버릇없게 굴며 흥미가 없다는 걸 보여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물러갈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그이니 미인계가 통할 리 없다. 빈정대긴 했지만 루이스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기분을 돋웠는지, 벨져는 기분이 상해 돌아서기는커녕 루이스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버렸다. 편히 쉬고 싶었던 루이스에겐 낭패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픈 발과 다리를 위해 참을 만 했다.
“새로운 공간을 찾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과연 연합의 영웅이란 족쇄는 대단하군. 친히 이런 곳까지 왕림해주시고.”
“그건 벨져 경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식의 문을 파괴하려다 발렸다며?”
“때를 놓친 것뿐이다. 알다시피 워낙 여기저기서 일을 많이 터트리는 바람에.”
“천하의 벨져 홀든도 변명을 하는구나. 이거 놀라운 걸? 어디 신문사라도 찾아갈까봐.”
“살롱에서 나눈 대화는, 그 안에서 비밀에 부쳐지는 법이지.”
“그런 규칙을 따라야 할 정도로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서.”
살벌한 대화 끝에 먼저 말을 멈춘 건 벨져였다. 정말로 흥미가 없다는 듯 구는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 벨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다. 사실 이쯤 되면 그 날 그렇게 무릎을 꿇었다는 게 그리 부끄럽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그 날 이후로 제 빛을 드러내기 시작한 보석처럼 연마되어 더더욱 찬란히 빛나고 있었고,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스노우 퀸보다 영웅 루이스가 새로운 연합의 주축이라는 소리마저 돌까. 벨져는 다리를 꼬았다.
연한 하늘색 에나멜 구두와 흰 발, 그 위로 뻗은 루이스의 가는 발목이 꼭 잘 만든 도자기 같았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글쎄. 뭐인 것 같나.”
“보다시피 지금 너무 지쳐서 이대로 뻗을 수도 있거든? 제정신일 때 해.”
루이스는 양손을 들어 항복하듯 흔들었다. 아직 정신은 멀쩡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일 뿐이었다. 차라리 공성을 연달아 뛰고 말지, 이런 사교계 파티에서 내키지도 않는 웃음을 짓고 끝없이 이어지는 춤 신청을 거절하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피해 빠져나왔더니 이번엔 벨져 홀든. 정말이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게 딱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다. 벨져는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길고 곧은 손으로 피아노를 치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의 침묵을 기다리는 게, 꼭 나쁜 짓을 저지르기 전처럼 두근거렸다.
“…….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쥐고 있지.”
“예를 들면?”
“정보.”
날카로운 눈빛에 루이스는 잠시 풀어져있던 긴장을 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제 눈빛이, 지금 보고 있는 벨져의 눈빛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란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루이스는 연합이 필요로 하는 안타리우스와, 이글과 나이오비가 끝끝내 함구한 '그 날'을 떠올렸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그 마수는 능력자와 비능력자, 소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을 원하며 시커먼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면, 적어도 제 사람들만이라도 지켜내려면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했다.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
“뭘 원해.”
“거래할 의사는 있는 것 같군.”
“그건 말을 꺼낸 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미리 말하지만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개인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물론, 알고 있다.”
벨져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영웅이기 이전에 연합의 영웅이다. 연합의 한 기둥이니만큼 알고 있는 것도, 손에 쥘 수 있는 정보도 많지만 그녀가 마음대로 다루고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답이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벨져의 말에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다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워낙 선이 곱긴 하지만, 그 턱과 목덜미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이란 가히 사슴에 견줄 만 했다.
“그럼 거래는 성립이네.”
“그런 셈이지. 솔직했으면 좋겠군.”
솔직하고, 진실하게. 갑자기 목이 말라와 일어나자 벨져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와 붙었다. 아무리 솔직하고 진실 되다 한들 마음을, 머릿속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건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이었다.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벨져가 그런 수작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걸 해석하는 건 자신이었다.
제가 잘못하면,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죽음의 공포도, 배신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었다. 자신은 무력했고,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영웅의 행세를 잘 해내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어찌나 당당한지. 어쩜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루이스는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손이 떨렸지만 벨져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등 뒤로 다가온 벨져가, 손목을 잡아챘다. 제 심장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거리. 등 뒤에 선 남자에게 느껴지는 향수냄새.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금은, 위험하다.
“…….”
“벨져.”
간신히 입을 뗀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에 냉큼 돌아서려 했지만, 그보다 벨져가 루이스의 몸을 돌려 제 품으로 당기는 게 더 빨랐다. 말도 하지 못하게 머리를 가슴에 꽉 누르고, 허릴 안은 채 조용히. 라고 속삭이는 벨져의 목소리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벨져.”
“아쉽지만 때를 잘못 잡은 것 같군. 다이무스 경.”
벨져는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의 방문에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이상 그가 아닌 누가 보더라도 밀회를 즐기는 남녀로 보일 터였고,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를 방해하는 건 살롱의 규칙에 어긋났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화가 나있었고,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제가 혼자 있지 않은 이상 더 방해할 순 없다. 벨져는 이렇게 제 큰형을 골탕 먹이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기 직전이라면 더더욱.
“이제 그만 나가주겠어? 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는데. 설마 레이디의 이름에 흠을 내려는 건 아니겠지. 홀든 경?”
“…….”
좀처럼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다이무스지만 지금은 그 속이 훤히 다 보였다. 자신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데서 느끼는 불쾌함과, 내내 답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동생을 향한 답답함과 분노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벨져는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다이무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한 마디 하려는 표정으로 결국 등을 돌렸다. 그는 다이무스 홀든이었고, 여성의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억울해도 나갈 수밖에. 벨져는 다이무스가 나가자마자 루이스를 놓고 문을 잠갔다. 애초에 그를 피해서 들어온 거였는데, 이 정도면 속도 잔뜩 긁었겠다 오히려 이득을 본 셈이었다.
“지금 나한테 하나 빚진 거 맞지?”
기분 좋게 돌아서는데 들려오는 간드러진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이 기분을 만끽했을 텐데. 벨져는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와인을 마시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였으나 루이스는 이미 그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흐리멍덩한 눈을 반쯤 뜨고 있던 주제에, 지금은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생기가 넘치는 게 정말이지 밉상이 따로 없었다.
“……. 원하는 걸 말해.”
“좋아. 스무 고개 할 줄 알아?”
벨져는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은 여자를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맹하고 순진해서 무슨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루이스는 영리하고 교묘한데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유치한 놀이 말인가.”
“그래. 직접 모든 걸 주는 건 너무 쉽잖아? 장황한 얘기라면 더더욱 이야기를 섞기 쉬워지니까. 알다시피 질문에 대답은 예스와 노. 뭐, 대답하기 곤란해서 답을 피하고 싶다면 글쎄……. 침묵 한 번에 한잔씩?”
“나쁘지 않군.”
“굳이 예스 노가 아니더라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
예쁘게 웃는 게, 누가 보면 연인에게 짓는 미소라 해도 믿을 법 했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라곤 그녀의 코드명만큼 차디 찬 거래일뿐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덫이 아닐까 의심부터 했겠지만 제가 아는 루이스는 누굴 속여가면서, 그것도 자신을 속여가면서 이런 제안을 할 사람이 아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할 걸 상정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잔 두 개와 비치된 위스키 병을 양손에 들었다. 다리를 꼰 채 발을 까딱거리던 루이스의 발끝에 걸린 구두가 유리구두를 연상시켰다. 동화 속의 공주님과 달리 열두시 종이 울린다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지만, 그 여리고 가는 발과 발목만큼은 그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좀 편하게 있을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루이스는 아슬아슬하게 발에 걸려있던 구두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른 한 쪽도 벗어버리고, 발을 문지르는 그녀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벨져는 혀를 찼다.
“질문 몇 개면 바로 뻗겠군.”
“누가 나만 줄창 마신대?”
“그야 두고 볼 일이지.”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벨져를 응시했다. 새초롬하다고도, 무미건조하다고도 못할 무언가. 아무리 뛰어난 벨져라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어려웠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벨져의 중심 아주 가까이에 맴돌고 있었다. 비록 그게 의도한 게 아닐지라도, 그날 이후로 언제나 벨져 홀든의 아주 깊은 곳에는 ‘루이스’가 있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손을 털어 얼음을 만들어내는 걸 지켜보며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얼음으로 손을 닦고는 빈 잔에 얼음을 채운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시작하지.”
“좋아. 누가 먼저 마시게 되나 보자고.”
루이스의 도발에 벨져는 턱을 치켜들며 가벼운 코웃음으로 답했다. 질문은 스무 개 뿐이지만, 긴 밤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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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 루이스 사망 소재 주의
루사노에서 포트레너드로 온 후 은신처를 만드는 대신 함께 살았던 루이스의 플랫에 이글이 토마스 스티븐슨을 달고 찾아왔다.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는데,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다. 순순히 맞아줄 리 없는 녀석이 일부러 맞고는 꺼낸 말이 더 가관이었다.
“형이 루이스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형의 착각일 뿐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만 좀 해! 형만 슬픈 줄 알아? 연합은 아직도 초상집 분위기라고! 그런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두지 말았어야지!”
“이글씨!”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공허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공허. 이글의 말이 맞았다.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미소로 제 뺨을 쓸던 그를 그냥 보내선 안 되는 거였다. 그게 기억 속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연합이 소중하다 한들 자신을 두고 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모두가 제 오만이었다.
“그럼.”
“뭐?”
토마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이글이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박스에 넣다 말고 반문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데?”
“작은형….”
“그 빌어먹을 자식은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 그런데 뭐? 내가 그녀석을 가장 잘 안다고? 웃기지 마라, 이글. 그 녀석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 사랑했다면 이렇게 모질게 굴 리 없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잊을 수도 없는 최악의 기억을 남기고 떠났을리 없다. 그의 부고를 신문을 통해 듣고, 장례도 끝나 무덤 앞의 꽃마저 시들어갈 때에서야 찾아가도록 두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형은 아무것도 몰라.”
“그러는 넌 얼마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벨져는 이글의 멱살을 잡아챘다. 자기도 분해 죽겠다는 듯한 이글이, 입을 열려다 말고 시선을 피했다.
“이글 홀든!!!”
“그만해요!”
가만히 지켜보던 제 3자의 개입에 벨져는 시선을 돌렸다. 눈물 범벅의 애송이가 주먹을 꽉 쥔 채 벨져를 보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선배는, 루이스 선배는….”
“닥쳐라.”
“형!”
“네가 그 자식이 지키려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라.”
“애먼 애한테 화풀이 하지 마!”
잠자코 잡혀있던 이글이 벨져의 분노가 토마스에게 향하자마자 팔을 잡았다. 애초에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게 누구인가. 그토록 아끼던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리 연합의 영웅이라 한들, 한 사람이 그 모두를 감당할 수있을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루이스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웠다. 영웅의 그늘에 숨어, 그를 앞세워 살아남은 이들을 벨져가 용서할 수 있을리 없었다. 생전에 지키려하지 않았다면 살인귀가 되어서라도 복수했을 것이다.
벨져는 묻고 싶었다. 왜 자신만의 루이스가 될 수 없었는지.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제 옆에 있는 걸로 충분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럼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토록 지키려했던 이들은 제게서 추억 한 조각마저 앗아가려 하는가.
“선배를 아낀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지, 넌 모를 거다.”
“루이스 선배는…!”
“그러니 네 영웅에게 감사해. 지금 여기서 널 베지 않는 건,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이니까.”
서슬퍼런 눈빛에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진심이다. 모두가 슬퍼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벨져같진 않았다. 갈 곳 잃은 분노와 상실감에 허덕이는 남자는, 고고한 벨져 홀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제 기억 속 마지막 루이스를 떠올렸다. 머리를 쓰다듬고, 슬며시 웃던 루이스는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같았다. 평소의 듬직한 선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후련해보였다.
그래서 잡지 못했다. 잡는다고 잡힐 것 같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쓰게 웃으며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역시, 걱정이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선배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걱정했어요. 하지만 이 남자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동경하던 사람이다. 그와 같은 선에 서고 싶었다. 그의 등을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자리를 너무나 쉽게 꿰찬 남자에게 마지막까지 지고 싶지 않았다.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해. 둘 다.”
“나가.”
“…하아. 플랫은 형이 알아서 해.”
이글은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쓸어담고는 박스를 토마스에게 넘긴 뒤 돌아섰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엔 그의 물건이라고 할 것도 얼마 없었다. 벨져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작은형.”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나가.”
“…너무 얽매여있지는 마.”
얽매여있지 말라는 말에 벨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벨져 홀든에게 루이스를 떼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과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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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토마] 한 걸음 더 가까이
* 벨져루이<토마
** 토마스 짝사랑/토마스에게 상냥하지 않은 세계 주의
“왜 벨져에요?”
“응?”
“왜…. 휴톤씨나, 앤지씨도 아니고. 왜, 그러니까…!”
말이 마음같이 나오지 않는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물을 수 없는 질문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토마스는 제 어깨를 잡는 루이스의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졌어.”
“네?”
“발을 딛고 있던 땅도 사라지고 어둠 속에 갇혀. 살아도 고통뿐이고,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지. 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아침 해가 뜨지 않기를 바랐어.”
“선배….”
담담하게 이어가는 것은 그의 절망이었다. 토마스가 본 선배는, 루이스는, 영웅이란 남자는 강한 사람이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는 영웅. 비록 그 방향이 제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를지라도 존경받아 마땅한 사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결코 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털어놓는 절망의 무게란 과연 어떤 것인지. 토마스는 루이스의 절망을, 그 어둠의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나는…. 더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포기해버렸지.”
“…….”
“그런데도 죽을 수가 없었어. 책임과 의무와 날 믿고 기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선배의 탓이 아니에요…!”
어쭙잖은 위로라는 걸 알지만,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그것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제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더 나은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걸론, 이 사람을 붙잡을 수 없다. 토마스는 문득 트리비아를 떠올렸다. 그 둘은, 그 연인은 트리비아가 떠나려 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루이스가 슬퍼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게 아닐까. 처음부터 그 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도 허공을 딛고 있던 게 루이스이며 그를 기다려주던 게 트리비아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텅 빈 허공에 사는 그를 받아줄 수 있을까. 루이스의 사랑이 트리비아의 사랑보다 깊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애정을 쏟아도 상대가 그걸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눈앞의 남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토마스 안에 켜켜이 쌓아올린 루이스라는 사람의 근간이 흔들리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알아.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지.”
“선배…!”
“그런데, 그 녀석이 날 잡아줬어.”
아득해진 머릿속에 루이스의 미소가 들어와 박혔다. 부서질 것 같은 미소가 아니라 홀가분하고 따스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상하지. 그런데 말이야,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떨어지는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데…. 걔가 그러더라고.”
루이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목을 가다듬고, 입꼬리를 올리는 그에게 전에 없던 여유가 보였다.
“그러면 왜 안 되느냐고.”
숫제 꿈을 꾸는 것처럼 읊조리는 루이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날이 서 다가오는 이들을 상처 입히는 고드름이 아닌, 끝없이 펼쳐진 얼음평원과도 같은 고요. 고향의 얼음호수가 그러했듯, 그 고요 앞에 인간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이 사람과 마주하려면,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루이스는 눈을 휘며 빙그레 웃었다.
“벨져는…. 알아줬어. 그리곤 그래도 된다고 하더라고. 가치 없는 삶이 뭐가 소중하냐면서 화를 내는 거 있지?”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마침내 루이스는 발을 디딜 땅을 찾았다. 그를 잡는데 필요했던 게 고작 말 몇 마디밖에 안 됐다는 허무보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재빨리 고개를 숙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자 루이스가 어깨 위에 올린 손으로 토마스를 토닥였다.
“살아도 된다고 해줬어. 자기가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저희가 못 미더운 건가요?”
“응?”
“왜, 왜 그게 벨젼데요? 우리는, 우리도, 당신을 걱정하고, 당신을…!”
“달라.”
내내 담담하게 남 얘기 하듯 말하던 루이스가 토마스의 격정을 딱 잘라 끊었다. 침착한 연합의 영웅의 얼굴을 한 루이스가 낯설다. 아니, 방금 전까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고요를 머금었던 남자가 동경해온 선배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야. 나는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했어. 너희들을 앞세워 살아남는 걸,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토마스. 그건 날 더 괴롭게 하는 거야.”
“선배!”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그 녀석은 달라.”
루이스의 입을 막고 싶었다.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녕, 나는 당신의 첫 번째가 될 수 없나.
“벨져는…. 글쎄, 나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렇게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르지. 영웅 전기의 시작은 언제나 벨져 홀든이잖아?”
더 말하지 말아요. 제발. 더 들었다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런 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입술 한 번 달싹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끔찍이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니까, 다시 돌려놓는 것도 그 녀석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배라고 불러선 안 되는 거였다. 그를 계승하고 싶었다. 그의 절망이 아닌, 찬란히도 빛나는 명예를 이어받고 싶었다. 이런 걸 잇게 되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손이, 아련히도 빛나는 미소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을 리 없다. 이어받는 것조차 자신이 없다. 영웅이 전설이 된다는 말을 그리 쉽게 담아선 안 됐다. 차고 두꺼운 얼음벽으로 나약한 자신을 감추던 인간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버렸다. 영웅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이길 수 있을까.
그 두 사람 앞에서 자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저, 보호받아야 하는 조연.
“미안.”
“…제가 강해져도, 소용없겠죠.”
“넌 잘 해낼 거야. 내가 없으면, 그 다음은 네 시대니까.”
아니오. 저는 당신의 시대에 당신과 함께이고 싶어요.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말을 가슴에 묻고, 토마스는 애써 웃었다.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팔을 벌려 토마스의 등을 감싸 안고 토닥였다. 몸이 닿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망 없는 첫사랑이 시리도록 아팠다.
걸음을 맞추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등이, 너무나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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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눈 쌓인 교정, 분수대 앞.
* 호그와트au
호그와트의 학생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근 십년간 인구가 늘고 있다곤 하지만 마법사나 마녀의 수는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었고, '그' 사건 이후로 마법사의 인구가 줄다 보니 한 기숙사의 학생이라고 해봐야 백 명이 될까 말까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났다 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오, 작은형!”
“저리 가라. 이글.”
“캬, 난 형을 다시 봤지 뭐야. 노땅한테 개겼다가 된통 깨졌담서?”
“그게 무슨 천박한 말투냐! 네 녀석은 조금 더 홀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왜애. 난 작은형이 인간적이어서 좋은걸.”
이글은 혼자 분수대에 앉아있던 벨져에게 다가가 킬킬거렸다.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년은 그 나이 소년답게 장난기가 많았고, 홀든의 수치이자 걱정이라는 말답게 호그와트 안에서도 항상 말썽의 중심에 있었다. 홀든 최초로 슬리데린에 들어가지 않은 걸 첫째로, 모범적이다 못해 너무 완벽해 다가가기 힘든 그의 형들과 달리 그리핀도르의 기숙사 점수를 깎아먹는 주범이자 골칫덩이였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천진한 천연덕꾸러기라는 게 이글의 장점이지만 그와 십여 년을 같이 보낸 벨져에게 동생이란 홀든의 어디에서 이런 게 나왔는지 모를 미스터리이자 귀찮은 대상에 불과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렴, 이글.”
“우와앗. 엄청 상냥한 얼굴로 꺼지라고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아아, 영웅님한테 알려주러 가야…. 으엑!”
“당장 멈춰.”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도망가려는 이글의 머리 꼬랑지를 잡아 세운 벨져는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막냇동생의 어깨를 잡아 분수대에 앉히고 눈을 맞췄다.
“약속해라. 절대, 절대 그 자식한테 말하지 마.”
“헤헤, 그럼 뭘 해줄 건데?”
“……. 제길.”
“하하하! 이번 호그스미드 외출 때 데리고 나가준다고 약속하면 생각해볼게!”
“이글! 안 된다는 거 알면서 억지 부리지 마라!”
“흐으응. 그럼 버터 맥주?”
열두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당당하게 음주를 입에 담는 걸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 뱀같은 녀석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만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야 한다. 세심한가 싶으면서도 답답할 정도로 둔한 녀석이니 아직 희망은 있다. 벨져는 오늘 있었던 해프닝이 이틀도 안 가 잊히길 바랐다. 교수에게 대든 것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내막이 알려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간사한 뱀처럼 웃는 이글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이글이 배를 잡고 웃었다.
“즐거워 보이네, 이글.”
“큽, 푸흡. 그게, 하하! 루이스, 그거 알고 있어?”
“글쎄,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네게 호그스미드 외출은 일러. 반장 회의 때 조용히 말씀드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지금 벌점을 주는 게 나을까?”
“칫, 재미없긴.”
언제 왔는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쌀쌀해진 날씨에도 목을 훤히 내놓은 루이스가 허리를 짚으며 퍽이나 다정한 말투로 이글을 타일렀다. 타이른 다기 보단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어쨌거나 천방지축인 이글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글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릴지언정 순순히 물러났다.
그 잠깐 사이에 사람을 흔든 녀석이 회랑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벨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벨져와 같이 이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루이스가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내린 눈이 뽀드득 뭉쳐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후드 안쪽으로 보이는 흰 목이, 그 잠깐 사이 벨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도 모르게 꿀꺽 목울대를 울린 벨져는 루이스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네.”
“가던 길 가라.”
그 사이 차가워진 분수대에 앉자 루이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옆에 앉으려나 싶어 한 쪽 다리를 당겨 눈을 치워도 루이스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스타이거 교수님과 한 판 했다며?”
“그게 뭐.”
“…그거, 혹시 나 때문이야?”
움찔, 정곡을 찔린 벨져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의 얼굴엔 표정이라 할 게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에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누가 너 따윌 신경 쓴대?”
“아니면 말고.”
“하!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 따위가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란 거냐?”
“그만.”
서늘한 눈매와 살벌한 눈빛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그 따위에 화를 내는 루이스라니, 상상도 못했던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벨져 쪽이었다. 자신이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벨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다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가 널 책임져주기라도 할 것 같아? 사정 안 좋은 게 어디 너 하나야? 그런데 왜 너만 받아줬겠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슬 퍼런 눈빛으로 조용히 타오르던 루이스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크게 놀란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눈만 깜빡거리던 루이스가 손을 들기에 지팡이를 꺼내는 줄 알았는데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소리 내서 웃는 루이스를 본 적이 있던가.
소복이 눈이 쌓인 분수대 앞, 눈이 녹아 얼음으로 굳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같이 고요한 풍경 속에서 루이스가 웃었다. 그 자신도 주체하기 힘든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다가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눈을 휘는데, 햇살이 물에 닿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멎고, 햇살이 멈춘다. 멈춘 시간 속에 그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뺨에 열이 몰려, 벨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치고 너무 격렬하게 웃느라 벗겨진 후드 안으로 보이는 흰 목과 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겨우 진정하고 숨을 고른 루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벨져의 앞에 섰다.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루이스는 O.W.L.이다 뭐다 해서 바빴던 내내 우중충하게 다니던 사람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래.”
“뭐가.”
“스타이거 교수님은 좋은 분이야.”
뜻 모를 말에 미간을 좁히자 루이스가 다시 웃다가 주먹을 입에 대며 헛기침했다.
“내 평생 가장 편한 여름방학이었어. 늘어져라 낮잠도 자고, 밤낚시도 가고. 네가 오해할만한 건 전혀 없었어. 그냥, 뭐랄까…….”
“지금 내 앞에서 그를 두둔하는 건가?”
“두둔한다기 보단….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지?”
“스타이거 교수님이 나한테 불건전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한 거 아니야?”
“걱정이라니, 내가? 너를? 하! 착각도 유분수지!”
“그럼 다행이고.”
루이스가 뒷짐을 지더니 슬며시 웃었다. 혼자만 열을 내는 게 분해서, 이를 악문 벨져는 손을 뻗엇다. 뒤늦게 피하려고 해봤자 거리를 좁힌 건 그였고, 벨져의 손은 그대로 루이스의 목을 감쌌다. 몸을 뒤로 빼며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스는 차가운 손이 목에 닿자 몸을 떨며 뒷걸음질치고, 발이 미끄러지며 허우적거리다 뒤로 넘어져버렸다.
“으으.”
“흥. 꼴좋군.”
벨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올리자 성대하게 넘어진 루이스가 엉덩이를 만지다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멍청하게 혼자 자빠진 거지만 크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대뜸 내밀어진 하얀 손. 벨져는 루이스의 손에서 웃음기가 걷힌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풀이 인 헐렁한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손목은 같은 남자의 것치고 가늘고 희다. 왠지, 봐선 안 되는 걸 봐버린 기분이었다.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루이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 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암시도, 해석해야 할 필요도 없다.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다 손을 맞잡자 루이스가 빙긋 웃었다. 눈꽃 결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미소가, 흰 눈밭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얍.”
“으왓!”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루이스가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맞잡은 손을 확 잡아 당겼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 벨져는 그대로 루이스의 위에 엎어졌고, 루이스의 웃음소리와 함께 솜털 같은 냄새가 확 풍겼다.
“하하하. 아아. 정말이지, 구경꾼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 자식…….”
“벨져 홀든이 놀라는 얼굴이라니. 카메라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루이스는 짐짓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어버렸다. 평소의 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순박하고 소년 같은 웃음에 벨져는 루이스의 가슴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입가를 씰룩였다.
“감히 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미안, 그지만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너만 만나면 되는 일이 없어! 지팡이 들어!!”
“잠깐 벨져, 진정하고…….”
양 손을 들고 순진한 척 눈을 깜빡여 봤자, 입꼬리가 부들거리며 올라갔다. 애써 웃음을 참는 꼴이 더 보기 싫어, 벨져는 옆에 있는 눈을 한 움큼 집어다 루이스의 얼굴에 문질렀다.
“차거! 야!”
“죽어!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네가 먼저, 흐앗.”
셔츠 안으로 눈이 들어가자 루이스가 움찔 몸을 떨며 가는 비음을 흘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떼자 루이스가 가쁜 숨을 내쉬며 벨져를 올려다봤다. 얇게 뜬 눈에, 잔뜩 붉어진 얼굴, 하얗게 서리는 입김. 야릇한 표정에 벨져의 얼굴에 다시 열이 번졌다.
“읏.”
“……벨져?”
“말 하지 마. 그랬다간 죽여 버릴 거다.”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쥐었다가 놓으며 일어났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에게, 제 심장 소리가 전부 들릴 것만 같았다.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글 녀석이 수상한 저주를 건 게 틀림없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혼쭐을 내주리라. 그렇게 다짐한 벨져는 아직도 눈밭에 어정쩡하게 앉은 채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를 무시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망토가 휘날리는 걸 정리하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텅 빈 회랑을 걸었다.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고, 루이스로부터 멀어진 다음에서야 벨져는 벽을 짚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자꾸만 그 야릇한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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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그 해, 가을.
*호그와트 au
9월 1일. 런던, 킹스 크로스 역. 긴 여름방학을 보낸 호그와트의 학생들이 새 학기를 맞이해 머글들 사이를 오갔다. 머글 태생이나 혼혈 학생들이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지만 머글들과는 거리가 먼 순수 혈통의 학생들은 종종 그들의 시선을 받곤 했다. 그리고 여기, 다른 의미로 머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소년이 하나.
“제길.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불어오는 바람에 눈부신 은발을 날리며 승강장을 돌아다니던 벨져는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들이마셨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성인이 되기 전까진 마법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는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홀든.”
“윽.”
“설마 길 잃어버린 거야?”
최악. 벨져는 두꺼비를 잃어버렸다며 난리를 피우던 막냇동생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기 싫은 녀석과 마주쳐버렸다 아직 학교도 아닌데 이 면상을 보다니 이번 학기는 벌써부터 재수가 옴 붙었는지도. 벨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남이사.”
“이글이라면 두꺼비보단 부엉이라 생각했는데.”
루이스의 후드 안에서 여름 내내 벨져를 괴롭힌 이글의 두꺼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고양이나 개, 토끼처럼 작고 털 달린 작은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양서류 역시 달갑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벨져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찼다.
애초에 왜 그런 동물을 귀여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거 없이도 잘 살 수 있는데. 약한 것들은 싫다. 벨져는 남루한 사복 차림의 루이스를 아래위로 훑었다. 원래 지내던 고아원이 파산해서 스타이거 교수네서 지낸다더니 어째 추레한 행색은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리 내.”
“내가 이글한테 갖다 줄게. 악몽이라도 꾸면 큰일이잖아.”
“윽, 너…!”
“누구나 무서운 거 한둘쯤은 있는 거 아니겠어. 이쪽이야.”
아니, 달라졌다. 분위기가 다르다. 조금 더 차분하고 침착해진데다, 전에 없던 여유가 생겼다. 벨져는 트렁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짐가방 하나를 손에 달랑 든 루이스를 따라 걷다가 그를 제치고 앞서 걸었다. 다이무스도 그렇고, 고작 몇 살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 어른인 척 앞서나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호해야 할 어린애도 아니고, 벨져 홀든에게 미아 취급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벨져, 어딜 갔던…. 루이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나. 좋아 보이는군.”
짜증이 가득했던 다이무스의 얼굴이 루이스 앞에 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다이무스 홀든으로 돌아오는 게 꼴불견이었다. 벨져는 일부러 제 형의 팔을 치며 지나갔다. 그래도 이번 학기만 보내면 다이무스와 일 년에 아홉 달은 떨어져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애써 위안 삼으며 두꺼비 따윈 진즉 잊었다는 듯 신이 나 머글들에 대해 떠드는 이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 작은형! 큰형! 작은형이 때렸어!”
“고생이 많으시네요.”
“……잘 부탁한다.”
“별 말씀을요. 이글. 네 두꺼비.”
“오! 고마워!”
루이스는 웃으며 이글의 손에 두꺼비를 내려주었다. 두꺼비는 괴팍한 제 주인에게 돌아가기 싫은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스의 목이 허전했다. 벨져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예감에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벨져?”
“따라와.”
“어? 응? 아니, 잠깐, 기차 시간…!”
9월인데도 루이스는 그동안 역에서 한 번도 목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목도리나,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 같은 걸 입었으면 입었지 오늘처럼 날씨에 맞는 가벼운 차림을 한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냥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러겠거니 했는데 왜 하필이면. 9와 3/4 승강장에서 조금 떨어진 벽돌 벽에서야 손을 놓은 벨져는 루이스를 벽에 밀쳤다.
“너, 그 머글들 사이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거냐.”
“…별 거 아니야. 다 끝난 일인걸.”
루이스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뜰 뿐 부인하지 않았다. 초연한 반응이 더 짜증나서,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두드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편안해진 표정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는 게 분했다. 좋아 보인다는 다이무스의 말이 떠올라 더 화가 치밀었다. 반장인 주제에 슬리데린의 후배들도 그렇게 챙기지 않으면서 다른 기숙사의 루이스를 그리도 잘 대해주었는지, 왜 똑같이 다퉈도 친동생인 자신이 아닌 그를 두둔하고 돌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알고 있었어?”
“처음 이 역에 오던 날 도와준 게 다이무스라서. 머글들 사이에선 괴물이나 다를 게 없으니까, 흔한 일이야.”
“너….”
“늦겠다.”
자그마치 사 년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다이무스는 알고 있었다는 것도 전부 분했다. 벨져를 밀어낸 루이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이래서 머글들이란.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멍청이처럼 당하고 있었던 저 녀석도 구제불능인 건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걸음을 옮기다 멈춰서 저를 돌아보는 루이스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멍청이. 그런 녀석들은 따끔하게 손을 봐주란 말이야.”
“그런 말은 너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벨져.”
분하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가 싫다. 저 무심한 눈이 곧바로 제게 향하게 만들고 싶다. 한 눈 팔 여지도 없게 저를 바라보고, 그따위 처연한 미소 따위 지을 여유도 없게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벨져는 단정하게 자른 루이스의 뒷머리를 잡아채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호그와트로 향하는 급행열차는 급행이라 해도 10시간이나 걸린다. 그 정도면 따져 물을 시간은 충분했다. 감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게 선을 긋고 밀어내다니, 방자한 것도 정도가 있다. 벨져는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모두 가질 것이니 선택은 없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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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가기도 한다
* 사족의 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기왕 썼으니까...
** 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를 먼저 읽어주세요
벨져는 네 명의 셰프들이 각자 할 요리를 정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괬다. 어쩐지 스튜디오가 소란스러운 것 같아 스태프들을 보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스냅백에 후드, 거기에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벨져가 못 알아볼리 없었다. 벨져는 놀란 나머지 검지로 그를 가리키며 벌떡 일어났다.
“너...!”
“어? 무슨 일이죠? 벨져씨? 어어??? 어???”
벨져의 반응에 시선을 손가락 끝으로 옮겼던 클레어가 놀라 비명을 지르고, 셰프들이 엉거주춤하며 일어났다. 웃으며 스냅백과 후드를 벗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루이스는 급히 달려온 작가가 채워주는 마이크에 목을 내주며 연신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고개와 허리를 꾸벅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화를 했던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자 스튜디오가 발칵 뒤집히고말았다. 벨져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이스가 웃으며 벨져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심코 의자를 내주려던 벨져는 진행자의 호들갑에 촬영중이라는 걸 깨닫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셰프들이 한 칸 씩 옆으로 가서 만든 자리에 앉은 루이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고,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벨져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루이스가 웃으며 침 한 번 안 바르고 벨져가 보고 싶어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 그러지 말고. 방송을 아는 사람이 왜 이래~.”
“하하, 네. 실은 우리 PD님이 꼬셔서 왔습니다. 맨날 보는 얼굴인데요, 뭘. 그리고 이렇게 오면 또 여기 셰프님들이 맛있는 거 먹여주실 것 같아서.”
“어휴. 우리 클레어양 눈빛 좀 봐요. 초롱초롱해.”
“어.... 저 진짜 프로즌씨 팬이거든요. 아참, 루이스씨!”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주는 루이스에 클레어가 호들갑을 떨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반응에 벨져의 표정이 굳어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소재를 그냥 지나갈 리 없었기에, 진행자들은 맞장구를 치며 바람을 불었다.
“에이, 한 번 안아줘요!”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이돌인데....”
“팬이라잖아요. 뭐 어떻습니까!”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분위기에 떠밀린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슬쩍 벨져의 눈치를 봤다. 찔리는 거 알면 가만히 있으라고 루이스를 쏘아봤지만 클레어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키친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겸연쩍게 웃은 루이스가 벨져의 손을 잡아 두드리곤 일어났다. 그리곤 다가온 그녀와 가벼운 포옹.
팬과 우상의 포옹이라 하면 훈훈한 장면일지 모르나 벨져의 눈에는 영 탐탁지 않았다. 임자도 있는 사람이 저렇게 홀랑. 집에 가라니까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와버린 것도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루이스가 아니꼬워진 벨져가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봐도 루이스는 좋다고 웃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진행자들이 좋다고 떠들어대는 사이 테이프를 갈겠다며 잠시 촬영이 끊겼다. 평소에도 친분이 있었던 셰프와 인사를 한 루이스가 벨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너 뭐냐.”
“응? 왜?”
“집에 가라니깐.”
졸음이 묻어나는 눈가를 매만지며 작게 혀를 차자 루이스가 눈을 감으며 벨져의 손을 잡았다. 그만하라는 건지, 계속 하라는 건지 손은 잡아놓고 뺨을 기대는 루이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앞서 클레어의 냉장고로 요리 대결이 끝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꼬박 세 시간을 더 있어야 했다.
벨져는 마침내 시작된 요리대결을 앞에 두고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옆에 찰싹 붙어있던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마이크에 목소리가 들어갈까 입모양으로 졸리냐 묻자 거의 반쯤 눈이 감긴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선 면을 삶는다 고기를 튀긴다 정신이 없는데, 화려한 칼질과 좋은 냄새도 벨져의 시선을 루이스에게서 뺏을 순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나른한 얼굴에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벨져는 루이스의 다리를 토닥였다.
몸을 일으킨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다 반대편 키친에서 불이 붙은 프라이팬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토끼같은 반응이 귀여워 웃음을 눌러 참은 벨져는 셰프들과 진행자의 중계에 조금씩 말을 보탰다. 그렇게 눈앞에서 요리가 완성되어가는 걸 보랴, 졸음에 기대는 루이스를 토닥이랴 바쁜 사이 십오분이 흘렀다.
공성 한 판 하는 것과 같은 시간인데도, 요리 두 접시가 뚝딱 완성된 걸 보니 또 감회가 남달랐다.
“그럼 먼저 시식을 해보겠습니다!”
“아, 저만 먹나요?”
“어, 저는요?”
루이스가 어울리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벨져를 바라봤다. 이걸 죽여 살려. 벨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숟가락과 포크로 파스타를 말아 루이스의 입에 갖다주었다. 냉큼 입을 벌려 파스타를 입안에 넣은 루이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습니까!”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미묘한 반응에 벨져는 파스타를 제 입에 넣었다. 셰프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 안에 퍼지는 상큼한 토마토와 아보카도의 맛에, 가볍고 간이 심심하니 마냥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파스타는 벨져가 낸 주제에 잘 맞는데다 맛있었다. 벨져조차 루이스가 웃은 이유를 몰라 고개를 돌리니 루이스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루이스가 벨져를 보곤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 반응은 뭐죠? 저절로 웃음이 나는 맛입니까?!”
“아, 그게.... 푸흡. 아, 이럼 안 되는데.... 벨져가 만든 맛이 나요.”
“아아! 이거 어쩌죠! 집에서 먹는 맛이랩니다!”
“아니, 맛있어요! 맛있는데, 어.... 똑같이 건강한 맛인데 벨져씨가 만든 게 좀 더 제 입에 맞는 거 같아요.”
셰프가 고개를 떨구고, 루이스는 미안해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미안하고 웃긴지 자꾸 셰프에게 사과하며 웃는데, 다가가서 손을 잡아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같은 냉장고로 같은 생각을 하고 만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가 해준 게 더 맛있다는 말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벨져는 입가를 닦으며 루이스가 워낙 막입이라 그렇다며 셰프를 격려했다.
“그래도 뭐, 오늘 선택을 하는 건 루이스씨가 아니라 벨져씨니까요.”
“그럼요. 저는 그냥 곁다리정도로 생각해주세요.”
“넌 이제 집에 가.”
“벨져씨가 집에서 해주시면 되겠네요.”
“왜 얘기가 그렇게 되죠?”
루이스의 얼빵한 반응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루이스는 억울하다는 듯 벨져를 툭 쳤고,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음 요리로 나온 해산물 리조토를 한 숟가락 곱게 떠 입에 넣은 벨져는 확연히 다른 향신료의 맛을 음미하며 루이스에게 숟가락을 넘겼다. 냉큼 받아든 루이스가 크게 한 숟가락 떠먹는 동안 리조토를 넘긴 벨져는 셰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건 무슨 뜻인가요!”
“향신료를 굉장히 잘 조합해서 썼는데, 치즈를 많이 넣어서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리조토를 스파이시하게 잘 잡았군요.”
“별점을 준다면 몇 점입니까!”
“5성 만점으로 3.5 드리겠습니다.”
“크흐. 벨져 홀든 기준으로 별 3개면 레스토랑을 열어도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죠?”
“우리 셰프님 굉장히 짠 점수에 굉장히 황송해하고 있어요!”
벨져는 암암리에 도는 속설을 들으며 입을 닦았다. 루이스를 만나기 전에는 입에 안 맞으면 손도 대지 않았던 벨져였다. 게이머로 이름을 날리기 전부터 벨져는 셰프들 사이에서 까다로운 고객으로 유명했다. 한 번 예약이 들어오면 주방장조차 긴장하게 만든다는 홀든가의 차남. 그러니 이런 프로에 나오는 것부터가 사실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하겠다고 한 것은 오로지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저희들끼리 하는 얘기 있어요. 맛있다고 해주신 메뉴는, 베스트 셀러가 된다고.”
“아, 벨져 홀든 보증제같은 거군요.”
“네, 그리고 별로면 두 번 안 드시고.”
한가득 리조토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루이스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벨져를 바라봤다. 벨져는 제게 돌아오는 높은 평가에 이것 보라며 턱을 들고 오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정작 이 사실을 알아야 할 사람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는 눈치라 김이 빠졌다. 루이스는 벨져 앞에 놓여있던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 없죠. 루이스씨, 리조토는 어땠습니까! 여전히 벨져씨 요리가 더 맛있나요?”
“어.... 제가 진짜 피곤한가봐요.”
“왜요? 맛이 없습니까?”
“아뇨, 맛있는데....”
루이스가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자기 딴에 말을 아낀다고 하는데, 그래봤자 이미 꼬투리를 잡은 진행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루이스는 이러다 백만 안티가 생길 것 같다고 밑밥을 깔았다.
“맛있는데, 자꾸 집에서 먹는 느낌이에요.”
“이건 또 무슨 의미죠?”
“되게 제가 벨져씨한테 길들여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 말 되게 이상한데.”
“아아...! 이래서 너무 잘해주면 안 됩니다!”
“이러면 오히려 좀 궁금해지는데요. 게스트석이 아니라 조리복을 드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어, 그것도 되게 괜찮을 것 같아요. 근데 제가 태생이 그렇다 보니 웬만한 건 그냥 다 똑같이 느껴져서.”
난처해하던 루이스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며 성대하게 자폭해버렸다. 무너져가는 애인을 지켜보던 벨져는 루이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이걸 거둬 살리는 제 고생이 어떻겠습니까.”
벨져의 떨떠름한 표정에 루이스가 짐짓 상처받은 얼굴을 하다가 몇 초 못 버티고 웃어버렸다. 환한 미소에 벨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오늘따라 예쁜 말만 하는 그가 퍽 사랑스러워, 냅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려 고개를 내밀었다.
“아, 근데 진짜 먹고 나니까 그 향이....”
몸을 기울여 팔에 머리를 기대는 척,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리조토를 칭찬하며 엄지를 들었다. 이건 분명 일부러 피한 거다. 모두 시식을 하는 사이 눈을 흘기자 루이스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따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이따가라고 하는지 몰라도 다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퍽 자상했기에 벨져는 이번만 모른 척 져주기로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오히려 사귈 때보다 카메라 앞에서 뽀뽀하는 걸 조심하게 된 루이스였다. 그래도 사흘 만에 같이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괜히 싸우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예쁜 짓도 했겠다, 스케줄도 없겠다 침대에서 아침해가 뜰 때까지 뒹굴려면 토라질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자, 그럼 선택의 시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벨져씨가 하는 겁니다.”
“그래도 역시 이번 별은 별 두 개의 가치가 있지 않나.”
“그렇죠! 자! 버튼을 눌러주세요!”
처음 두 요리를 먹었을 때부터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기에 선택을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승패를 가른들, 오늘 선보인 레시피는 전부 가질 것이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벨져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핀라이트를 켜고 조명을 끈 스튜디오의 패널에 승패가 떠오르고, 벨져는 이번 대결의 승자의 가슴에 별배지를 달아주었다.
키친을 정리하는 사이, 두 번째 요리 대결이 남았음에도 루이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대결에서 진 셰프에게 식당으로 찾아가겠단 말을 전하던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집에 가.”
“너만 맛있는 거 먹으려고?”
반쯤 뜬 눈으로 귀여운 소리를 해대는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눈을 꿈뻑이다 주변을 둘러봤다.
“좀 조심하라니깐.”
“그러게 여길 왜 와.”
“왜 오긴, 너 보러 왔지.”
“내가 애냐.”
“애지, 그럼.”
“하! 애랑 그런 짓 하는 넌?”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고 무릎을 그의 다리 사이로 넣었다. 루이스가 흠칫 몸을 떨며 벨져의 가슴에 손을 얹어 밀어냈으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먹잇감을 몰아넣은 기분에 벨져는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빠져나갈 구석을 찾았지만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는 이상 벨져를 밀쳐낼 순 없었다.
“교활하긴.”
“영리한 거겠지.”
“말은 잘해요.”
“말도 못하는 누구보다야 낫지. 안 그런가?”
결국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 항복 선언에 흡족해진 벨져는 특별히 어제 오늘 쌓인 앙금을 용서하기로 했다. 밤은 길고, 그 시간을 만족스럽게 보내려면 잘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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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더없이, 덧없이.
※ 루이스 사망 소재 주의 ※
루이스가 죽었다.
실로 그다운 죽음이었다. 고결한 희생을 바쳐 모두를 구하고 참사와 전쟁을 막았다. 극히 이례적으로 영국 왕실에서도 조의를 표했으며 영웅 루이스의 죽음은 세계 곳곳에 퍼져 추모가 이어졌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안타리우스 공습전과 회사와 연합의 갈등. 그 모두를 잠식시키고 일궈낸 평화 앞에 인간된 자들은 경의와 애도를 보냈다.
루이스의 장례식엔 조문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이어졌고, 장례가 끝나도 그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이들은 줄지 않았다. 매일같이 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그의 죽음이 얼마나 고결하고 희생적인 것이었는지, 그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떠들기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영웅을 잃은 연합이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메우고 신문의 헤드라인에서 루이스의 이름이 내려갔다. 전쟁 끝에 사람들이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즈음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벨져 홀든이 나타났다.
잔뜩 굳은 얼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그의 손엔 하얀 장미 꽃다발이 들려있었고, 여전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발은 루이스의 무덤 앞에 멈췄다.
가져온 꽃다발을 시들어가는 다른 꽃 위에 올린 벨져는, 루이스의 이름과 생몰연도, 여왕이 친히 내린 조의 문구를 새긴 비석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끝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 전설이 되어 잠들다.
* * *
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벨져는 제 셔츠를 주워 입은 루이스가 찻잔을 들고 걸어오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깨어있는데도 어딘가 꿈을 꾸는 기분이다. 늘 그렇지만, 아무리 벨져라도 깨어난 직후는 힘들었다.
벨져는 아침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리로 생각을 하는 대신 팔을 벌렸다. 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막상 일어나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린 잔상에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루이스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침대를 벗어난 그 잠깐동안 몸이 식어서 끌어안기엔 별로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를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자 루이스가 벨져의 등을 안아 두드렸다. 아이를 달래듯 자상한 손길은 일어나란 재촉이라기 보단 더 자라는 것 같았다.
“벌써 두시야, 벨져. 휴일 아침에 늑장 부리는 건 기혼 여성의 특권이라고.”
“서두르지 마라…….”
루이스가 작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맨다리에 다리가 얽히고, 루이스의 몸에선 싸구려 비누 냄새와 함께 제 향수 냄새가 났다. 비록 첫만남은 최악이지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잖아. 침대에만 있으려고?”
“시간은 많다. 서두를 필요 없어. 조급하게 굴지 마라.”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에 감은 팔을 당겨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 여자들처럼 부드럽진 않지만, 품안의 온기와 그의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돌아누웠다. 셔츠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에 가늘게 눈을 흘겼으나 루이스는 제 생각에 빠져 처연하게 웃고 있었다.
“글쎄, 왤까. 난 내 미래를 상상해본 적이 없어. 당장 오늘을 사는 것도 벅차서, 내일도 내다볼 수가 없나봐.”
안타까운 말이었다. 한 치의 꾸밈도 거짓도 없는 진솔한 진심 앞에 벨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내내 굳건한 얼음성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그의 본심은 너무나 나약해서, 더 소중히 지켜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파스스 웃고는 굳은 얼굴로 말을 아끼는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려 짓는 미소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얼음꽃과도 같았다.
한 겨울 숲에 소복이 내린 눈꽃. 잔잔하게 가라앉은 얼음 호수. 그 평온한 얼굴에 위로 대신 입을 맞추려던 벨져는 부르튼 입술을 보고 허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감쌌다. 엄지로 도톰한 입술을 문질러도 루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리며 손끝엔 그의 숨이 닿는다.
그 따스하고 간지러운, 평온한 감각. 이렇게 가만히 웃고 있으면 한 송이 물망초가 떠오를 정도로 청초한 얼굴인데, 왜 입만 열면 사사건건 부딪히는 건지. 괜히 부아가 치밀어 루이스의 입술을 매만지던 엄지를 뺨으로 옮겨 그대로 볼을 꼬집었다.
“아야야. 아파!”
저보다 한 살이나 많은 주제에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얼굴이라니. 평소의 그 침착하고 냉정한 분위기와 서늘한 눈빛만 아니면 원래 나이에서 예닐곱쯤은 깎아 불러도 충분히 믿을 법한 얼굴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처럼만 입고 다니면 좀 봐줄만 할 텐데.
가끔 보여주는 순박한 얼굴이 빼도 박도 못하게 취향이라 더 짜증이 났다. 왜 하필이면 루이스 따위에게. 벨져는 루이스의 뺨을 놓았다. 손을 놓자마자 뺨을 문지르는 그에게 작게 핀잔을 주었다.
“엄살은.”
“진짜 아프거든. 하여간 예쁜 게 힘은 세가지고.”
“말이 좀 이상하군. 아름답고 강한 게 뭐가 나쁘단 거지?”
“...말을 말자. 응. 그래.”
루이스가 벙찐 얼굴을 하더니 달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벨져의 마음에 들 리 만무했고, 다시 루이스의 얼굴을 잡자 움찔 몸을 떤 그의 동공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제 손아귀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자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루이스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시선을 피하는 그의 뺨을 단단히 잡고, 벨져는 눈을 질끈 감은 루이스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그저 닿은 것뿐이지만, 닿았다 떨어질 때 나는 소리만큼은 여느 키스 못지않았다.
눈을 뜨자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루이스가 보여, 벨져는 혀를 찼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도 모르나?”
정말 놀랐는지 루이스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가늘고 긴 속눈썹이 떨리는 게 예뻐 가만히 바라보자 루이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를 놀리는 대신 덩달아 부끄러워진 벨져는 도리어 성을 냈다.
“왜 이런 걸 부끄러워하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응,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루이스가 벌떡 일어나 벨져를 마주봤다. 뭔가 굳게 다짐한 듯 결연한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루이스의 손이 벨져의 얼굴을 잡았다. 당황할 새도 없이, 루이스의 입술이 닿았다. 벨져가 방금 한 것과 달리 조심스럽고 간지러운, 부드러운 키스에 벨져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고, 말캉한 입술 사이로 들숨인지 날숨인지 모를 축축한 숨이 오간다. 누군가 혈관 속에 가득 날개를 넣고 부채질 하는 것 같다. 그의 손이 닿은 피부가 덴 것 마냥 화끈거리고, 가슴이 뛴다. 속눈썹이 떨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 * *
눈을 뜸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난 벨져는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선명한 기억은 때로 잔인하게 그 주인을 괴롭힌다.
당장이라도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왜 직접 오질 않냐며 투덜거릴 것 같은데,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 전부 알고 있는데 어째서 가장 행복했던 날의 기억을 되풀이하는 걸까. 벨져는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밝히고, 미풍이 넘실거리는 화창한 날이다.
맑은 날씨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 마지막을 직감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서두를 리 없었다. 손을 잡는 것부터 키스, 몸을 섞는 것까지 남들은 몇 달, 몇 년을 들여 돌아가는 길을 왜 그리 서둘렀으며 왜 그다지도 1분 1초를 소중히 여겼는지. 벨져는 그 모두를 루이스의 무덤 앞에 서서야 깨달았다.
몇 번을 돌이켜봐도 봄날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솜사탕처럼 달콤한 나날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더없이, 덧없이 아름다웠다.
끝까지, 그는 제게 지독히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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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사막 *
* 리케님께 드립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불거진 다툼이었다. 루이스는 자고 일어나도록 비어있는 침대의 옆자리와 텅 빈 거실을 둘러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광의 기록이 가득한 거실 벽 한쪽을 짚고 걷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어젯밤에 내뱉고 만 말이 떠올라 입이 썼다.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에게 그런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루이스는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팀원들을 보다 그 속에서 저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벨져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화, 많이 났겠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혼잣말에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연락 한 번 없는 벨져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거라면 먼저 말을 걸기도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잠은 꼭 같이 자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는데 그것마저 안 지킬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마음이 상한 걸까.
벨져는 보이는 것보다 더 섬세한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상처 받는데 무딘 루이스는 종종 이렇게 벨져에게 무심코 상처를 줬고, 그 다음은 언제나 어려웠다. 자존심때문에 사과를 못해서가 아니라 또 무신경하게 상처를 줄까봐. 그게 마음에 걸려서 쉽사리 먼저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지. 제가 생각해도 답답했다.
착잡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자기비하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지는 기분에 루이스는 불과 오 분도 안 되어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핸드폰을 베개 아래서 꺼내 화면을 두드렸다. 클랜원들의 단톡방과, 매니저의 문자, 정작 기다리는 사람에게선 부재중 통화는 커녕 문자 한 통 메세지 하나 없었다.
한 번, 딱 한 번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전화를 할 수 있는데도 루이스의 손은 화면 위를 서성일 뿐이었다. 오늘도 스케줄이 있어서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이렇게 오래 벨져가 집을 비운 적이 없어서 그런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남은 공간을 채웠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잡았다. 깊게 심호흡하고, 메신저를 켜 자판을 두드렸다.
집에 와. 와서 얘기하자. 고작 그 두 마디를 써놓고 전송을 못해 망설이다가 큰 마음을 먹고 버튼을 눌렀다. 돌이킬 새도 없이 날아간 메세지 옆에 뜬 숫자 1은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핸드폰 화면을 잠그고 일어나 침대를 정리했다. 씻고 준비하는데 십 분, 매니저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한 시간.
루이스는 청소기를 꺼냈다. 뭐라도 해야 했다.
* * *
없다. 촬영을 마치고 핸드폰을 받아든 루이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한 번 화면을 확인했다. 그래도 촬영이 끝나면 확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루이스가 보낸 메세지는 보낼 때 그대로였다. 엄습해오는 불안에 루이스는 메세지 창을 위아래로 훑다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침착하려 애쓰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걸그룹의 활기찬 사랑 노래가 대기음으로 울리는 내내 루이스의 손은 입술을 매만졌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탄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어, 왜.”
“이글. 벨져 어디있는지 알아?”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싸웠는데, 아니. 내가 말을 좀 잘못했는데 나가서 안 들어와.”
“에이, 작은 형이 애야. 가출을 하고 안 들어오게.”
이글의 태평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유치한 반항이라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리가 없다.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며 다짜고짜 촬영장에 난입해 멱살을 쥔다면 또 모를까, 이렇게 걱정시킬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핸드폰도 꺼놨어. 벌써 한나절이 지났고, 메세지도 안 읽어.”
“야, 야. 일단 좀 진정해봐. 넌 어딘데?”
“지금 촬영 끝났는데…. 하아….”
“알았어, 알았어. 찾아볼 테니까 물이라도 한 잔 하고! 어? 짝형이 누구 죽이면 죽였지 어디 뭐 해코지 당하고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마!”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너머의 이글이 볼 리도 없건만, 냉정과 이성이 전부 마비된 것 같았다. 이글의 말대로 해코지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행여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저를 안 보려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불안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깟 말 한 마디 때문에 깨질 사이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믿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벨져가 갈 법한 장소를 떠올리던 루이스는 매니저에게 일찍 들어가라며 차 키를 받아들었다. 벨져가 그 나름의 시위를 하고 있는 거라면, 숨은 그를 찾아내는 게 루이스의 몫이었다. 루이스의 차가 도로 위를 달렸다. 이렇게 찾아도 안 만나준다면 그 때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화가 난 완고한 얼굴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돌아온 집. 루이스는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에도 없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저녁도 안 먹고 벨져를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벨져는 커녕 그를 봤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워낙 시선을 많이 받는 녀석이니 못 봤다면 정말로 없는 거다. 루이스는 잠잠한 핸드폰을 보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의 잠금은 너무나 쉽게 풀리고, 큰 마음 먹고 잡아당긴 문 안으로 보이는 현관은 루이스가 나가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기척은 커녕 따스한 온기조차 없는 휑한 집. 루이스는 무거운 숨을 토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문에 기대어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네가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외친 뒤에, 충격에 굳어버린 벨져의 얼굴이 떠올라 빠듯하게 가슴을 조였다. 덮쳐오는 죄책감에 루이스는 등을 차가운 문에 기댄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번에 잘못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그깟 심야 영화, 그냥 보러 갈 수도 있는 거였는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루이스는 너무나 무력했다. 무릎을 모아 안고 이마를 짚었다. 이번 주 내내 스케줄이 바빠서 힘들다고 제대로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고, 집에 돌아오면 씻고 자기 바빴다. 그 정도면 벨져도 많이 참아준 거였는데 이기적으로 군 건 어느 모로 보나 루이스 자신이란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한 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꺼낸 루이스는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벨져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있었고, 루이스의 핸드폰은 배터리를 충전하라며 기계음을 울렸다. 사과하자.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빌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반쯤 마음을 놓았던 루이스는 화면에 뜬 이글의 이름에 자포자기하며 전화를 받았다.
“응.”
“야, 짝형 날랐어.”
“무슨 소리야.”
“너랑 싸우고 바로 그냥 아무 비행기나 탄 것 같아. 공항사진이 좀 찍혔더라고.”
“하하, 벨져답네.”
“아직 비행중이라 전화 못 받는가보지 뭐. 걱정하지 마. 연락 오면 빌고! 나 좀 그만 찾어! 알았어?”
“…그래.”
과연, 벨져 홀든은 마음 정리하는 스케일도 남다르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이글과 전화를 마치자마자 핸드폰이 꺼지고, 루이스는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일단 안전하게 잘 있다는 걸 확인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 서니 하는 줄도 몰랐던 긴장이 뜨거운 물에 녹아내렸다.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들로 가만히 뜨거운 물을 맞고 있던 루이스는 욕실 안에 차오르는 수증기에 콜록거리며 물을 껐다.
환풍기도 안 돌려놓고 들어오다니,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벨져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른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나가도 옷 좀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 보일러도 안 켜놓고 나가서 욕실 밖 공기가 차가웠다.
한기와 외로움에 바르르 몸을 떤 루이스는 온도부터 맞춰놓고 핸드폰을 켰다. 샤워하는 사이 충전된 배터리는 겨우 5%. 물에 젖은 머리를 털며 핸드폰을 침실로 가져와 다시 충전기에 연결했다. 진동으로 해두면 혹시라도 못 들을까봐 전화 알림을 진동과 벨소리로 바꾸고, 벨소리 음량을 최대로 올린 뒤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메신저 창에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일일줄이야. 루이스는 종종 벨져가 투덜거리던 걸 떠올리고 다시 한 번 깊게 반성했다.
여태껏 널 이렇게 서운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말 없이 기다려주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해버렸다. 둘이 있어도 넓은 집은 한 사람에겐 너무나 넓다. 빈 공간이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신경질을 내며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다가와 머리를 말려줄 사람이 없다. 루이스는 드라이기를 꺼내 혼자 머리를 말렸다.
같이 쓰는 샴푸와 바디워시 향에 무심코 기대하게 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걸까, 아니면 네게 길들여진 걸까. 제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향기는 벨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말린 루이스는 그대로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늘 눕는 제 자리 대신 벨져의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다.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노래 가사와 같은 마음에 루이스는 벨져의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전화 오면 뭐라고 하지. 자다가 놓치는 건 아닐까. 그럼 일어나 있어야 하는데, 한 번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 안에서 맨살을 부비고 있으니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루이스는 손을 뻗어 충전기에 연결된 핸드폰을 침대 옆 협탁에 놓고 스탠드를 켰다.
쨍한 불빛에 눈이 아프다고 하자마자 바꾼 스탠드였다. 스탠드 갓을 한 번 쓸어보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지 않는 연락을 막연한 기대로 기다리는 루이스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왔다. 자지 않기 위해 일어나 앉았지만 일주일 째 쌓인 피로에, 저녁 내내 긴장한 채로 벨져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이불 속에 들어온 이상 잠이 오는 건 제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불가항력이었다. 아침해가 밝아오는 새벽, 결국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루이스의 눈이 감겼다.
그렇게 잠들어 고른 숨소리를 내던 루이스를 깨운 건 진동과 함께 울리는 벨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깊게 잠들었던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눌러 밀었다.
“으으응….”
“루이스.”
알람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어도 핸드폰에선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웅얼거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뜬 루이스는 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침대 위에 엎드려 핸드폰을 집어들자 화면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말문이 턱 막혔다.
졸음에 다 뜨이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화면에 비치는 풍경은 여전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땅. 쏟아지는 별빛과 그 모두를 담은 풍경은 언젠가 TV에서 함께 본 곳이었다. 한 번 쯤 가보고 싶다고 했던 걸 또 기억하고 있었는지. 루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참을 생각도 없었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벨져어.”
영상통화라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동이다. 어떻게 이걸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루이스는 핸드폰을 공손히 양손으로 들고 먼 땅에 홀로 떠나버린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끝내주는 앵글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소금 사막을 보여주던 화면이 빙그르 돌아가더니 조금 지친 얼굴의 벨져가 비쳤다. 루이스는 화면 한 쪽에 뜨는 제 얼굴이 엉망인 걸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무 좋은데, 좋아하는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자니 부끄러웠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라, 핸드폰 액정에 뜨는 벨져를 보며 웃자 벨져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흥, 이런데도 내 사랑이 느껴지질 않는다고 투정을 해?”
“……미안.”
잠결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게 휘는 눈매가 별빛이 가득한 하늘만큼이나 예쁘다.
“지금 당장 키스해주고 싶은데….”
화면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린 목소리는 닿지 못했는지, 벨져가 다시 카메라를 풍경으로 돌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자꾸만 광대가 올라갔다. 보고싶다는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었다. 루이스는 몸을 돌려 누웠다. 팔을 뻗어 핸드폰을 높이 들고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이름을 불렀다.
“보고 싶다…….”
잠결에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한 말에 다큐멘터리처럼 풍경을 보여주던 핸드폰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다 듣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긴. 루이스는 당장 떠오르는 말을 더했다.
“사랑해. 진짜 많이…….”
분명 잠들기 전까진 할 말이 많았는데, 사과도 하고, 또 다른 말도 하려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미안….”
눈을 비비며 잠을 몰아내려 했지만 한 번 찾아왔던 졸음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핸드폰을 떨어트리며 뺨을 맞은 루이스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며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예쁘다. 근데…. 지금은….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미련하긴.”
“하하, 그러게.”
하는 말은 타박이지만 그 말을 하는 목소리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 벨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떠올라 루이스는 베개 위에 화끈거리는 뺨을 기댔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핸드폰 액정을 채운 풍경이 아름답다. 그보다 마음을 울리는 건 감히 그 크기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었다.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기분에 루이스는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랑을 어떻게 다 돌려줄 수 있을까. 벨져 홀든은 언제나 제게 넘치도록 과분한 사람이었다. 초라한 불안과 걱정은 그 앞에 서면 언제나 하잘 것 없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제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뉘우치며 밤하늘을 바라보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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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생각할 땐 재밌었는데....ㅠㅠ 쓰다보니 재미가 없어서 쓴 곳까지만 올림
** 게이머 은퇴 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셰프들이 유명인의 냉장고로 하는 시간제 요리쇼에 오늘 게스트로 초대받은 벨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루이스에게 카톡을 보냈다. 촬영을 시작했냐는 질문 옆에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 걸 봐선 핸드폰을 볼 여유가 없거나, 아니면 정신 자체가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벨져는 잠시 응원차 방송에 들어가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괜히 봤다가 또 망해가는 거 보고 심란해지면 이번 방송을 망칠 가능성이 컸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자리에 앉아 셰프들이며 패널들과 인사를 나눈 벨져는 제작진이 미리 옮겨놓은 냉장고를 보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닥달을 하긴 했지만 집을 비운 이틀 사이에 루이스가 또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아, 오늘의 특급 게스트를 모십니다!”
벨져는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 그래도 몇 번, 루이스가 집에서 셀프카메라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잡히면서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벨져였다. 셰프들의 요리 대결에 앞서 냉장고를 공개하는 시간이 이렇게 긴장될 줄이야. 적당히 오프닝 멘트를 주고받던 벨져는 냉장고 앞에 선 진행자들이 손잡이를 잡는 걸 보고 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어, 왜요. 왜 긴장을 하시죠? 여태 여유만만이시더니.”
“벨져씨 이런 모습 처음 봅니다. 경기할 때도 긴장을 안 하는 선수였거든요.”
두 엠씨가 긴장을 풀라는 듯 사람 좋게 웃었지만 벨져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정리도 안 된 집을 보여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인가. 벨져는 영혼 없이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제 동거인이 워낙....”
“아....”
“아, 루이스씨와 동거중이시죠?”
“그렇습니다. 지금 촬영중일텐데.... 제가 집을 이틀동안 비웠는데 그동안 얼마나 엉망으로 해놨을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셰프들이며 같이 나온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벨져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또 오늘 특집이 숙소요리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클레어씨?”
“어머, 그럼요! 사실 아이돌 숙소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또 선수들은 아니잖아요.”
“사실 프로게이머 숙소 냉장고는 이런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이돌 대표로 나온 클레어 스미스가 해맑게 웃었다. 전에도 한 번 집에 방문해 벨져가 만든 요리를 맛봤던 그녀는 두 사람의 집이 얼마나 깔끔하며 벨져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늘어놓으며 벨져의 냉장고 오픈을 잠시나마 늦춰주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루이스씨가 집에서 뭔가 요리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뇨. 주방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 아니 루이스씨는 절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야, 그렇게까지 가나요.”
“그렇습니다. 완제품을 먹는 건 괜찮은데, 자기가 직접 하는 건.... 라면 정도일까요.”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말에 애써 웃음을 눌러 참은 진행자가 냉장고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루이스씨는 그럼 전혀 냉장고에 손을 안 대는 겁니까?”
“못 대게 하죠. 보통.”
“이야.... 이거 왠지 불쌍한데요. 그 친구가 참 괜찮은 친구거든요.”
“사람이야 뭐....”
갑자기 루이스에게 기우는 동정론에 말끝을 흐렸다. 물론 사람이야 괜찮지만, 동거하는 애인이 아니라 같이 사는 입장에서 보면 루이스는 꽤나 번거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청소하기 귀찮다고 안 움직이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안 먹고 사람 속을 썩이는 데다 또 냉장고는 왜 그렇게 헤집어놓는지. 벨져는 지금 열심히 방송을 하고 있을 애인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럼 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죠! 전화 연결 한 번 해볼까요!?”
“아마 지금 촬영중이라 힘들 겁니다.”
“아, 어떤...?”
“타방송국의 조그만 텔레비전인데 실시간으로 하니까 아무래도....”
“그렇군요! 하긴 또 요즘 섭외순위 1순위가 아닙니까. 제가 듣기론 벨져씨보다 더 버신다고....”
짓궂은 질문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수입으로 치자면 그렇지만 워낙 보유 자산이 다르니까요.”
턱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자 셰프들이 박수를 치고 말을 꺼낸 진행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종종 가는 레스토랑의 메인 셰프가 계산은 루이스가 하지만 실제 카드는 벨져의 카드라는 증언을 보탰고, 벨져는 이틀동안 첫 출연이라고 저를 보는둥 마는둥 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그까짓 BJ 짝퉁 방송, 그냥 자기 채널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방송국까지 가서 해야 하나 싶었지만 루이스는 첫 공중파라며 같이 이 프로에 나오자는 벨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가버렸다.
그래. 그까짓 출연료 안 벌어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 수 있다. 벨져 홀든은 애인 한 사람쯤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못해 그를 위해 구단까지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어올라 벨져는 아까 접어든 카드를 꺼냈다.
“그래도 뭐, 시험 삼아 한 번 전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방송중이라고 전화를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벨져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 시작 전에 꺼둔 전원을 넣고 잠깐 흘러가는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는데 손에 든 핸드폰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벨져는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피식 웃었다.
“또, 우리 루이스씨가 양반은 못 되네요.”
“아! 루이스씨한테 전화가 온 겁니까!”
“받겠습니다.”
벨져는 셔츠에 찬 마이크를 약간 당기고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자마자 여태 속을 썩인 못난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아직 안 들어갔어? 다행이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클레어가 눈을 반짝였다. 평소 프로즌의 팬이라던 그녀니 당연하지만,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긴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어. 너는.”
“나? 이제 생방 끝났는데 완전 정신 없었어.... 너는 언제 끝나? 데리러 갈까?”
“지금 촬영중이다.”
벨져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침묵 속에 감도는 당황과 혼란이 여기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약간의 투정과, 늘어지는 말끝에서 풍기는 그 나름의 애교에 결국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루이스?”
“야, 이...!”
“루이스씨! 안녕하세요!”
“아, 어.... 안녕하세요! 아 근데 이거 방송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루이스의 맹한 대답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루이스의 황망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고, 진행자가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앞서 벨져씨가 두분의 동거생활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셨는데요, 평소에 벨져씨가 요리를 자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 그게 좀 허세가 든 방송용....”
“뭐?”
“네, 자주 해주죠. 오늘 셰프님들이 벨져씨의 입맛에 맞춰주시느라 힘드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짓말 아니구 벨져 요리 되게 잘해요.”
“그렇군요! 허세가 좀 들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다?”
짓궂은 질문에 루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 벨져씨도 그렇고, 서로를 감싸주는 두 분의 우정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언제 한 번 나오셔야죠!”
“하하, 같이 사는데 같은 냉장고로 두 번 나갈 수는 없죠. 아니면 지금 갈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오긴 어딜 와. 집에 가!”
참다가 짧게 윽박지르자 루이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며 능청스레 넘어가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그럼 저희 벨져씨한테 맛있는 거 많이 먹여주시구, 저는 집에서 본방 시청하기로 하고 여기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전화를 끊고 집에서 보자며 (웃음) 이모티콘을 보냈다. 아직 냉장고를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메시지에 답장도 않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벨져가 핸드폰을 끄고 집어넣는 사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냉장고로 돌아갔다. 저들끼리 얘기를 진행하다 마침내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은 그들이 냉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스튜디오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이야.... 이거 여느 살림꾼 냉장고 못지 않은데요?”
“일단 굉장히 깔끔합니다. 이건 와인인가요?”
벨져는 진행자들이 꺼내든 와인 병을 보고 기억을 더듬었다. 제 술은 전부 와인 셀러에 있으니 직접 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루이스가 넣어둔 것일 텐데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보다는 제가 집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가 배는 신경 쓰였다.
내내 방송 준비한다고 전화도 안 받더니, 냉장고 정리용기에 정리해놓은 거며 유리병, 플라스틱 통, 냉장고 주인인 벨져조차 꺼내 봐야 알아볼 비닐팩에 유통기한과 내용물이 라벨지에 곱게 적혀있었다. 멀리서 흘긋 봐도 선명한 루이스의 글씨에 잠시 품고 있던 감정이 녹아내렸다.
“글쎄요. 제 건 아닙니다.”
“이렇게 두 분의 사생활이 탄로나나요! 이게 동거인한테 주긴 아까운.... 그.... 벨져씨가 집을 비울 때 마시려고 넣어둔 게 아닐까요. 혹시 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노골적인 떠보기에 벨져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 숨겨둔 연인이 있느냐, 묻는 것이지만 그 연인이 다름 아닌 벨져 홀든 그 자신이라는 건 아무리 당당한 벨져라도 대답하기 곤란했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후환은 두렵다. 벨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중에 루이스씨가 나오면 물어보시죠.”
“아, 이렇게 피하시는군요! 이 아름다운 우정!”
“아무래도 오래 됐으니까요.”
“또 이렇게 마음이 맞는 친구끼리 사는 것도 로망이 있죠.”
“아무렴 이렇게 같이 살면 집에 여자는 안 데리고 오게 되는 게 또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주거니 받거니 저들끼리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늘어놓던 두 사람이 허허 웃고, 아까 벨져의 편을 들었던 셰프가 벨져의 눈치를 봤다. 데이트할 때 자주 가고, 그 역시도 스트레이트가 아니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저 와인 되게 구하기 힘든 거예요.”
“아, 그런가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브랜드의 샴페인인데, 저게 지금 딱 27년된 거거든요. 진짜 구하기 힘든 거예요.”
27년. 벨져는 들어있던 와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연말도 연초도 아니니 루이스가 선물받은 와인인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이건.... 같이 먹는 건가요?”
“그것도 선물 받은 겁니다. 루이스씨가 여기저기서 받아오는 게 많죠.”
“인기인이군요?”
“뭐, 그래도 나쁜 친구는 아니니까요. 밤마다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야, 밤마다.... 외박을 자주 하는 편인가요?”
“아뇨. 잠은 꼭 집에 와서 잡니다.”
루이스의 신상 캐묻기가 되어가는 흐름에 벨져는 한 팔로 턱을 괬다. 루이스가 보고 싶다. 냉장고 따위 평소대로 해놔도 괜찮으니 어제 영상통화나 조금 더 길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산 지 반십년이 다 되어가도 루이스의 세심함은 어딘가 모르게 벨져의 핀트를 어긋나곤 했다. 자상하고 세심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다른 것보다 제게 신경을 써주었음 하는 마음을 토로해도 그때 뿐.
벨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리는 동시에 냉장고 탐색이 끝나고, 진행자들이 오늘의 요리 주제를 발표했다.
“이야, 범상치 않습니다! 밤에 먹어도 부담 없는 한 끼 식사는 그렇다 치고, 건강한 정크푸드는 대체 뭐죠?!”
“저는 제 입에 들어가는 이상 좋은 재료에 건강과 맛을 둘 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야 그렇죠. 그런데 이건....”
“전 제 취향에 맞게 해먹을 수 있으니까요. 맛있는 걸 해줘도 안 먹고 햄버거같은 걸 찾는 누구씨를 위한 절충안입니다.”
셰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벨져는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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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Valentine's Day
* 둘 다 은퇴하고 사귀기 시작한 후입니다
** 발렌타인은 지나지 않았습니다 벤쿠버시간으로 아직 2월 14일 오후 9시입니다 저는 늦지 않습니다 저는 날짜를 넘기지 않앗습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연인들의 날. 루이스는 웬일로 운전대를 잡은 벨져를 잠이 덜 깨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벨져.”
“깼군.”
흘긋 적선하듯 시선을 준 벨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꿈이 아닌지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않았다. 루이스는 잠시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벨져의 옆얼굴을 쳐다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우리 어디 가?”
“더 자라.”
“납치야?”
분명 눈 뜨기 전까지만 해도 푹신한 침대 위였는데 무릎을 덮은 담요며 한껏 뒤로 젖혀놓은 조수석 의자가 웬말인가.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무거운 눈을 깜박였다.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머리를 쓸었다. 텅 빈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포르쉐의 조수석 승차감은 끝내주게 좋았고, 벨져의 손은 딱 좋은 정도로 따뜻했다.
그 손이 머리를 쓰다듬다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며 내려와 루이스의 눈 위를 덮었다. 따스한 손바닥이 이끄는대로 눈꺼풀을 내린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연인의 날 한 번 거하게 치를 모양이었다. 그래도 루이스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루이스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마침내 벨져 홀든이 기나긴 무자각의 터널을 빠져나와 현재에 이른 지금 이번 발렌타인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맞는 연인의 날이었다. 그러니까 챙기고 싶었겠지. 로맨틱과 분위기를 목숨처럼 여기는 벨져니 당연했다.
“나 잔다....”
벨져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지고, 루이스는 포개놓은 손의 반지를 만지며 도로 눈을 감았다.
* * *
이마를 쓰다듬는 간지러운 손길에 눈을 뜨자 벨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보는 얼굴이지만,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라 루이스는 나른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고, 당기는대로 끌려오는 벨져에게 입술을 내밀자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다가온 벨져가 입술을 포갰다. 입술이 벌어지며 새는 나른한 숨. 몇 번만에 젖은 입술로 벨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떨어진 루이스는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끝까지 밀어놓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래서, 어디야?”
“네 눈으로 봐라. 내려.”
루이스는 먼저 내리는 벨져를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차 문을 열었다. 밀려들어오는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며 양팔로 몸을 감싸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펼쳐졌다. 잘 꾸며놓은 나무 펜스에 기대어 바다를 보다가 어깨를 덮는 코트에 웃음이 샜다.
“뭐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거냐.”
“글쎄.”
벨져가 뾰루퉁하니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게 또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루이스는 벨져의 입술에 쪽 가볍게 뽀뽀했다. 빙그레 웃자 벨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쁘다.”
“올라가서 보면 더 예쁠 거다.”
“아니, 바다 말고.”
루이스는 벨져의 손끝을 가볍게 잡고 눈꼬리를 휘었다. 전부 말하지 않아도 말뜻을 알아들은 벨져의 표정이 풀어졌다. 좋으면서 아닌 척, 독기도 뭐도 하나 없는 눈으로 흘겨봐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벨져가 기겁하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게 어딜 만져!”
“닳지도 않는 거 좀 만지면 어때서.”
벨져가 입을 벙긋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게 꼭 영상화보같아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렸다. 이마를 짚은 벨져의 왼손 약지에 빛나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방송인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왜, 아무도 없잖아.”
“네 눈은 무슨 옹이구멍이냐.”
벨져가 고개를 돌려 턱끝으로 뒤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둔 예쁜 카페. 루이스는 창가를 올려다보고 벨져에게 시선을 돌렸다. 벨져는 코트깃을 매만지며 손을 잡아이끌었다.
“방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난 괜찮다.”
“뭐야, 그게.”
이상한 논리에 웃음을 터트리자 카페 계단을 오르던 벨져가 고개를 돌려 쪽, 입술을 훔쳤다. 그리곤 주변을 돌아보고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러게 왜 방송을 하겠다고 해서.”
“미안.”
루이스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며 발뒤꿈치를 들었다. 한 계단 위의 벨져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귀기 전에도 수없이 했던 뽀뽀지만 지금은 의미가 달랐다. 전에는 카메라 앞에서 뽀뽀를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고작 입술을 포갰다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벨져의 뺨을 가볍게 잡아 가볍게 뽀뽀하는 걸 끝으로 떨어진 루이스는 이제야 천천히 눈을 뜨는 연인에게 미소지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 깊게 그림자가 지는 속눈썹이 아찔했다.
“미련하긴.”
한 번 더, 기어이 자기 좋을대로 입을 맞춘 벨져가 오만한 미소와 함께 계단을 마저 올랐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벨져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오는 내내 잤다고 하지만 차 안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드했다. 목을 돌리자 나는 뿌드득 소리에 어깨를 돌리며 올라가자 창틀 안에 방금 본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겼다.
“예쁘다.”
“안다.”
“너 말고.”
벨져가 대번에 눈을 흘겼다. 루이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메뉴는 아메리카노로 정해져있지만 벨져가 사납게 눈꼬리를 올리는 게 참 예쁘고 귀여워서 매번 제 무덤 파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물론 너도 예쁘지.”
“됐다.”
“삐졌어?”
“삐지긴.”
루이스는 메뉴판을 벨져에게 돌려주며 테이블에 턱을 괬다. 벨져가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마치고 단 둘이 된 루이스는 벨져의 손 위에 손을 얹어 약지에 낀 벨져의 반지를 매만졌다.
“왜.”
“아니, 그냥. 새삼스러워서.”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손을 덮었다. 꼼짝없이 잡힌 루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보석보다 예쁜 벨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손등을 덮은 벨져의 손이 손가락끝을 잡더니 벨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당기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사르르 눈을 감는데 확 열이 번졌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작게 웃으며 새어나온 숨이 손등을 간질였다. 손을 빼려 해도 벨져는 놔주질 않았고, 루이스는 항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훗. 귀엽긴.”
“하여간 다 네멋대로지.”
“왜, 좋아하지 않나?”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벨져를 가만히 쳐다봤다. 다 이겼다는 듯 웃고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홱 고개를 돌리니 잡은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깍지를 끼는데, 또 거기에 홀랑 넘어가버리는 자신이 미웠다.
“싫어?”
“그건 반칙이야.”
“사랑에 반칙이 어디 있나.”
“지금 네가 하고 있어.”
벨져는 그마저도 가소롭다는 듯 웃어넘기며 다시 한 번 루이스의 손등에 입맞췄다. 사랑은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거라는데 왜 항상 지는 기분일까. 루이스는 안 잡힌 손으로 턱을 괘고 벨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자상한 벨져의 눈빛에 루이스는 다리를 꼬았다. 타는 목마름에 힘겨워하던 게 얼마나 됐다고, 넘칠 정도의 애정에 이젠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누가 알았으랴, 짝사랑보다 더한 게 연애일줄.
“됐어.”
“삐졌나?”
“그래, 삐졌다.”
때마침 종업원이 다가오면서 루이스는 냉큼 벨져의 손에 잡혀있던 손을 뺐다. 조금 전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게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벨져는 손을 빼도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루이스의 아메리카노와 벨져의 차를 내려놓은 종업원이 벨져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루이스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의 바다로 눈을 돌렸다.
차가운 잔을 만졌던 손이 차갑고, 살짝 열이 오른 뺨이 뜨거웠다. 아직 2월이라 그런지 바다의 파도가 거셌다. 파도를 보며 열기를 가라앉히는데 벨져가 톡톡, 다리를 건드렸다. 말로 부를 것이지, 하여간 이 도련님은 다른 사람이라면 기분 나빠할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고 다.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 조금 전보다 더 기분이 좋아보이는 벨져가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루이스쪽으로 돌려 밀었다. 벨져의 차를 받은 루이스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이건 뭐야? 향 좋다.”
한참을 뜸들이던 벨져가 피식 웃고는 같이 시킨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내밀었다. 아무리 밖에서 보이지 않는 자리라지만 남자 둘이 카페에서 디저트를 시켜놓고 떠먹여준다니. 남이 볼까 민망해 고개를 도리저으며 몸을 뒤로 뺐지만 벨져는 단호했다.
“어서.”
“...해달라고 하지 마.”
언제나 결국 뜻한 바를 이루는 벨져 홀든이었다. 루이스는 얌전히 입을 벌려 벨져가 내민 케이크 조각을 받아먹었다.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이 입 안에서 녹았다.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녀석이 웬일로 초콜릿 케이크를 다 시켰는지 잠시 생각하던 루이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새삼 깨닫고 아메리카노와 함께 케이크를 넘겼다.
“이게 다야?”
“그러는 넌?”
“글쎄. 넌 뭐 하고 싶은데?”
“공개 연애.”
“그거 말고.”
루이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벨져는 여태껏 잘만 뽀뽀하고 끌어안고 다했으면서 왜 그거 하나 못해주냐고 불만이 많았지만 이것만큼은 루이스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기는 괜찮다고 해도,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 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둘 다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안 그래도 스캔들나는데 둘 다 게이라고 하면 기자들이 사냥개처럼 달려들걸.”
“지금도 그 스캔들 막느라 힘들다만.”
힘들다고 하는 것치고 벨져의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쁘지 않다기 보다, 뭔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이다. 루이스는 이 남자가 이번엔 또 무슨 이벤트를 준비해놓고 저를 기다리는지 예상답안을 추리다가,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여기 케이크 맛있다.”
“많이 먹어라.”
“자, 아.”
루이스는 벨져의 입을 막기 위해 케이크 조각을 잘라 내밀었다. 초콜릿을 좋아도 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입을 벌리는 게 얄미워 벨져의 입으로 향하던 포크를 돌려 제 입에 넣었다. 벨져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유치하긴.”
“몰랐어?”
“알고는 있었다만.”
“그럼 예상을 했어야지.”
“앞으로는 감안하겠다.”
벨져는 코트를 정리하곤 차를 홀짝였다. 정말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행동 하나하나가 화보인데, 왜 입만 열면 이 모양이 될까.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포크로 케이크를 잘랐다.
“자.”
“안 속아.”
“진짜야. 싫으면 말고.”
관심 없는 척 하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얌전히 입을 벌리는 게 예뻐서, 루이스는 포크 대신 입술을 내밀었다. 쪽,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자 놀란 벨져가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미안. 이제 진짜.”
웃으며 케이크를 내밀자 벨져가 포크를 쥔 손을 쥐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 와중에도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매서웠다.
“진짜라니까.”
“첫 발렌타인데이다. 망치고 싶지 않아.”
벨져답지 않게 진지한 투정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벨져와 그런 무드는 약에 쓸래도 찾기 힘든 루이스. 둘이 기념일이면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래도 전여친이랑 사귈 땐 이렇진 않았는데, 친구로 지낸 날이 많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벨져 앞에선 로맨틱한 말도 분위기도 다 낯설었다.
“그거 알아?”
“뭐.”
“오늘 마틴 생일인거.”
“루이스.”
“그런 얘기 아니야. 그냥, 기념일이 생일인 사람들은 어떨까 싶어서.”
마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벨져가 표정을 굳히며 팔짱을 꼈다. 황색 경보 발령. 기분이 언짢으시니 바로 풀어드릴 것. 루이스는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에 냉큼 말을 돌렸다.
“우리 다음엔 어디가?”
“몰라.”
삐졌다.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도 퉁명스럽게 나오는 걸 봐선 뽀뽀 몇 번으로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루이스는 카페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는 벨져를 보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나 잠깐 화장실.”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벨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서 하루동안 전세를 낸 것까진 좋았는데,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녀석을 납치하듯 조수석에 태우고 달릴 때만 해도 두근거렸는데 왜 또 이 모양 이 꼴인지. 머리를 헤집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며 벨져는 창 밖의 바다를 바라봤다.
발렌타인 데이란 모름지기 연인들의 날이고, 그러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귄다고 얘기도 하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내 사람이라고 말도 하고 싶은 건데 하나같이 안 된다고만 하는 루이스가 야속했다. 아까 반응을 봐선 오늘이 발렌타인인 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러니 당연히 선물이나 이벤트를 준비했을 리 없었다.
늘 그렇듯이, 애태우는 건 저 혼자라는 생각에 속이 탔다. 다정하고 자상하기로 치면 숙소생활을 하던 그 때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벨져는 루이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탄 속에 냉수가 들어가니 좀 살 것도 같았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에 벨져는 밖을 기웃거렸지만 벨져가 앉은 자리에선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음. 이거 되게 오랜만인데. 그래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부족해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언제 또 기타를 들었는지, 맑은 기타 소리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댔다. 잔잔한 기타 반주에 사랑을 속삭이는 가사. 노래가사처럼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벨져는 루이스를 보러 나가는 대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카페 안엔 직원들과 자신뿐이었고, 즐길 땐 확실하게 즐기는 게 좋았다.
프로즌이 은퇴하기 전, 그러니까 숙소 생활을 하던 시절엔 그렇게 조르고 협박을 해도 안 하던 노래를 뜸 한 번 안 들이고 하는 건 그 나름의 연인 한정 애정표현이었다. 돌아가면 괜찮은 기타를 한 대 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제게 바치는 세레나데는 마리아쥬의 웨딩임페리얼보다 더 향기롭고 감미로웠다.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내려놓는 소리에 이어 루이스가 돌아와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좀 봐주지.”
“잘 들었다.”
루이스가 싱긋 웃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칭찬해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같은 모습에 벨져는 손목에 찬 시계부터 확인했다. 조금 이르지만 체크인부터 해놓고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어나.”
“아직 다 안 먹었는데.”
루이스는 말만 그렇게 하고 벗어놓은 코트를 집어들었다. 평소에도 이정도만 고분고분하게 따라주면 좋을 텐데.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포석을 깐 보람이 있었다. 카페를 나온 벨져는 세워둔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았다. 루이스를 전용 기사로 부린 지도 어언 반십년이지만 오늘은 데이트 코스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벨져가 시동을 걸도록 밖에서 미적거리던 루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웬일이래. 운전을 다 하고.”
벨져는 구태여 이유를 말하는 대신 조수석에 앉은 루이스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달칵, 고정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자 입술을 맞춘 루이스가 씩 웃었다. 그리곤 뺨을 잡아 고개를 살짝 기울여 눈을 감으며 다가오는데,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입을 열자 혀가 닿고, 달근하고 물컹한 무언가가 넘어왔다. 밀어내려 해도 혀를 감으며 뺨을 꽉 잡는 바람에 도망갈 곳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루이스의 허리를 잡았던 벨져는 혀와 혀가 얽히고 감기며 녹는 게 달고 쌉쌀한 초콜릿이란 걸 깨닫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해피 발렌타인. 놀랐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루이스의 입가에 초콜릿이 묻어있었다. 답지 않게 귀여운 짓을 한다 싶어 옆구리를 쿡 찌르자 루이스가 몸을 웅크렸다.
“뭘 그렇게 부스럭거리나 했더니.”
“별로였어?”
“뭐, 나쁘진 않았다.”
“다행이네. 주머니 가득 초콜릿이거든.”
불룩한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한 줌 꺼내더니 그대로 쥐고 흔들며 웃는 루이스가 귀여웠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에서 초콜릿 하나를 뺏어 입에 쏙 넣었다.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얼릉.”
어떻게 이걸 입에 넣고 어떻게 말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발음이 뭉개졌다. 소년처럼 맑게 웃으며 다가온 루이스가 목에 팔을 감으며 눈을 감았다. 입 안에서 녹는 초콜릿이 끈적하고, 달았다. 미각이 마비되는 것 같은 단 맛은 취향이 아니지만 달디 단 키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떠넘기려 해도 초콜릿을 혀 위에 두고 꾹 누르는 루이스의 장난에 마른 허리와 옆구리를 문지르는 것으로 응수하자 루이스가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키스하는 중에 그러는 게 어디있어.”
“네가 먼저 시작했다.”
“야, 난 입 안에서 놀았지.”
루이스가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투덜거렸다. 그 사이에 초콜릿이 다 녹아 입안이 텁텁해진 벨져는 루이스의 목에 팔을 감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사랑한다.”
“.......”
장난기가 가득했던 눈동자가 움찔하더니 그대로 눈을 깜빡이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려 도망갔다.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 슬며시 웃으며 흰 목에 입맞추자 루이스가 다급하게 팔을 잡았다. 벨져는 루이스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따뜻한 허리를 어루만지자 루이스의 몸이 굳었다.
“잠깐. 아니, 그러니까....”
“사랑해.”
“윽, 그래도 차 안에선 안 돼!”
“왜지?”
“왜냐니!”
노을이 번진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루이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바라보자 입만 벙긋거리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는데, 좀처럼 보이지 않는 반응이 신선했다.
“썬팅 다 해서 밖에서 안 보인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럼?”
다시 한 번, 루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벨져는 루이스가 좋아하는 얼굴을 십분 활용하기로 마음 먹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나?”
“...그야....”
꼴에 한 살 연상에, 연애 경험도 사회 경험도 많다고 여유를 부리던 루이스가 부끄러워하는 게 꽤 흡족했다. 벨져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라니, 이 이상 즐거울 수가 없었다.
“차에서 하면! 환기도 안 되고! 시트 청소하기도 힘들고! 계속 생각날 텐데!”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안 귀여운 소리에 벨져는 조수석 의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정색했다. 그야 물론 환기도 어렵고 청소도 힘들겠지만, 그걸 이유로 드는 건 말이 안 됐다. 잠시 루이스의 말을 곱씹던 벨져는 반 박자 늦게 루이스가 극구 반대하는 의미와 붉어진 얼굴의 의미를 깨닫고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아. 그러니까, 그게....”
“그래. 차에 탈 때마다 섹스하고 싶어질 것 같다는거군.”
“미친...!”
“그래. 잘 알겠다. 감안하지.”
벨져는 자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갔다. 한껏 몸을 문쪽으로 붙이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눈을 질끈 감은 게 꼭 순결을 뺏기지 않으려 필사적인 모양새였다. 벨져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고 쪽,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대로 굳어있는 루이스를 내버려두고 조수석 의자를 잡고 뒤를 보며 주차해둔 차를 뺐다. 무언가 더 이어질 거라 예상하고 있던 루이스는 차가 움직이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왜 그만뒀는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벨져는 루이스의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는 뽀뽀에도 눈을 꼭 감고 있는 게 귀엽기도 했고, 괜히 제 욕심을 앞세워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한적한 도로 위를 달렸다. 루이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어쩌다 너랑 이렇게 됐을까 싶어서.”
“흐응.”
루이스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지쳤음을 토로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루이스가 카섹스를 거부하는 이유를 안 것만으로 오늘의 수확은 충분했다.
“그래서, 진짜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나.”
“지금 하고 있다.”
“데이트는 맨날 하는 거잖아. 그거 말고.”
“또 까먹고 미안하다고 할 거면 하지 마라.”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쏘아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루이스가 미안해하는 걸 알고 있는데 괜히 아픈 구석을 건드린 것 같아 슬쩍 눈치를 살피니 예상대로 상처받은 얼굴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아냐.”
“루이스.”
“내가 죄인이지 뭐.”
또, 같은 패턴이다. 벨져는 차를 세우려다 액셀을 밟았다. 이렇게 된 이상 중간에 레스토랑도 바다도 다 패스하고 호텔로 직진이다. 이럴 때 어떻게 수습해본답시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할수록 어그러지고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는 건 이미 수 차례 반복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적막이 깊어지는 차는 텅 빈 도로를 달려 예약해둔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오는 내내 마음을 좀 가라앉혔는지, 루이스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직 다섯시밖에 안 됐지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 아슬아슬한 침묵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 벨져는 차에서 내려 문을 잠그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차라리 싸우면 섹스하면서 풀기라도 하지, 이렇게 토라진 루이스를 달래고 제 잘못을 사과하는 건 아직도 힘들었다. 그깟 말 한 마디가 뭐 그렇게 힘드냐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때 뿐이었다. 벨져는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멀찍이 떨어져있는 루이스를 흘긋거렸다. 제가 보지 않는 데서 축 쳐진 얼굴을 하고 있는 루이스때문에 양심이 따끔거렸다.
루이스는 제 눈치를 살피기 바쁜 벨져에게 등을 돌렸다. 기분이 안 상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못 넘길 것도 아니었다. 제멋대로에, 오만하고 저만 아는 도련님이긴 하지만 벨져는 기본적으로 제 사람에겐 무른 사람이었다. 그게 루이스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천하의 벨져 홀든을 전전긍긍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게 뿌듯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미안하기도 해서, 루이스는 청승은 이쯤하기로 하고 초콜릿을 하나 까 입 안에 넣었다.
어쩌랴, 미우나 고우나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루이스는 연인의 날을 고대하고 있던 벨져에게 맞춰주기로 결심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벨져에게 다가가자 눈치를 보던 벨져가 슬그머니 손끝을 잡았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루이스는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하고 싶은 거 있었는데.”
“뭐?”
루이스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그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치며 입술을 겹쳤다. 입술로 입술을 물었다 놓고 떨어지길 세 번. 촉촉촉 물기 어린 사랑스러운 소리에 루이스는 감았던 눈을 떠 벨져를 바라봤다.
“호텔방에서.”
쪽. 입술을 포개며 눈웃음 한 번.
“맨몸으로 부비적거리면서,”
어깨를 잡았던 손을 뻗어 목을 감싸안으며 다시 한 번 입을 맞춘 루이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오전 내내 늑장부리는거야.”
“...나쁘지 않군.”
푸흐흐, 웃음이 샜다. 덩달아 풀어진 벨져가 웃으며 이마를 맞댔다.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내내 마음을 졸인 게 보여 미안했다.
“왜 우리는 매번 후회할 짓을 해놓고 미안해할까.”
“우리라니. 너겠지.”
“하하, 그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루이스는 벨져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맞는 첫 발렌타인은, 아무래도 침대 위에서 보내게 될 것 같았다. 루이스는 카드키에 문이 열리자마자 키스하며 허리를 감싸안는 벨져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싸우고 서운하게 만들어도 좋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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