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63건
- 2016.01.03 [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 2016.01.03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 2015.12.30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 2015.12.27 [다이루이] Scarface. 02.
- 2015.12.24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 2015.12.23 Happy birthday to you. 00.
- 2015.12.21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 2015.12.09 [다이루이] 2
- 2015.12.04 [벨져루이] The movie.
- 2015.12.01 [다이루이] Scarface. 01.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없다. 어쩜 관광지에 방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지만, 그나마 묵을만한 호텔은 이미 방이 다 나가고, 작은 여인숙이나 모텔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섯번째, 벨져는 돈을 주겠다는데도 예약을 받은 거라 안 된다며 거절하는 숙박업소를 나왔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사이 술이 좀 깼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루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결혼이 이렇게까지 외부인을 모을 일인가. 어쩐지 아까 펍에서도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더라니. 방금 전 유명한 배우가 이곳의 지역 유지와 도피해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기자와 팬들이 몰려 어쩔 수 없었따. 밖으로 내몰린 벨져는 혀를 차고 성큼 앞서 걸었다.
“저, 벨져.”
“뭐지.”
“저쪽에, 불이 켜져 있소만.”
루이스를 부축하며 따라오던 릭이 모퉁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모텔을 가리켰다. 외관도 별로고, 자리도 별로라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 어쩐지 방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휘청거리며 걷던 루이스가 릭이 앓는 소리를 내자 자기는 괜찮다며 떨어졌다. 벨져는 병실로 돌아가야 하면서도 도움을 자청하는 환자와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주제에 남 걱정이나 하는 천치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냥 해도 될 걸 저 지경이 되도록 무식하게 퍼마신 건 어디까지나 저 머저리다. 얼마나 한심하고 미련한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벨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딸랑. 벨이 울리며 젊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방 없어요.”
“방 둘. 다섯 배를 주지.”
“방 없는데요.”
“돈이라면.”
“아, 없다니까요.”
여급이 신경질을 내며 정리하던 수건을 턱하니 내려놓았다. 그녀의 기세에 잠시 움찔했던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돌아서서 세탁물을 개키기 시작했다. 딸그랑. 기어이 릭을 보냈는지 루이스가 혼자 들어왔다. 저걸 끌고 다른 곳을 찾을 순 없다. 벨져는 꾹 누르고 한 수를 물렀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나으리. 없다니까요?”
탁. 그녀는 아예 벽에 걸린 열쇠함을 치며 짜증을 내고 돌아섰다. 벨져 홀든에게 이런 푸대접이라니. 울컥 치솟는 짜증에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코웃음 친 벨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루이스가 휘청이며 팔을 잡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돌아봤다. 아직도 술기운이 여전한지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었다. 나른한 눈웃음에 벨져의 눈도 그만 루이스에게 쏠려버리고, 짜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약한 홍조가 돌았다.
“혹시 남는 방.... 그냥 잠만 잘 수 있으면 되는데.... 벌써 다섯번이나 허탕쳤어요.”
“아, 저.... 그게... 지금은 방이 다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던 벨져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는 여자와 나긋하게 말을 거는 루이스를 보고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참 잘 하는 짓이다. 벨져는 혀끝에 멤도는 말을 꾹 참아 눌렀다. 오늘 아주 작정하고 그 반반한 얼굴을 팔아먹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 지켜보고 있으니 데스크에 엎드리다 시피 기댄 루이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아래서 올려다보며 묻더니,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눈을 깜박였다. 여자에게 애원하는 법에 도가 튼 모습은 어이가 없다 못해 사실 펍에서 취한 사람은 루이스가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게, 수리중인 별채가 있긴 한데....”
“주세요.”
얼굴을 붉히며 내숭을 떠는 여자에게 웃으며 대답한 루이스가 몸을 일으켜 벨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손을 놓은 건 좋지만,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도무지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는 그였다. 루이스는 어젯밤 제 손을 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음에 드는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벨져는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 보란듯이 내려놓았다.
종업원이 발그레한 볼로 개켜놓은 시트와 수건같은 걸 분주히 준비하는 사이 툭, 루이스의 머리가 벨져의 어깨에 닿았다. 슬슬 한계인지 눈을 꿈벅이며 안간힘을 쓰는데, 그 꼴이 한심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따라오라는 말에 루이스가 멍한 눈으로 수건과 시트를 끌어당겼다. 벨져는 루이스가 든 짐을 빼앗아 들었다. 그냥 뒀다간 기껏 깨끗하게 세탁해 접어놓은 것들이 엉망이 될 터였다. 종업원은 수리중이라 보일러 대신 난로를 때야 한다며 빠른 속도로 이불과 시트를 갈았다. 별채까지 얼마나 된다고, 벨져를 따라 걷는 게 고작이었던 루이스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종업원은 루이스가 잠든 걸 보고 그쪽 도련님은 절대 못할거라며 난로에 불을 피우고 말 한 마디 붙이기 싫다는 듯 나가버렸다. 워낙 쌀쌀맞게 휙 나가버리는 바람에 벨져는 더 따져 묻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못 잘 건 아니다. 왜 멀쩡히 본채를 두고 떨어진 곳에 별채를 짓는지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취해서 잠든 루이스와 여행 온 커플이 쓸 법한 더블 베드를 함께 쓰는 건 머리론 알아도 마음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이를 어찌한다. 벨져는 머리를 누이지도 못하고 잠든 루이스의 팔을 잡아 이불 위에 눕혔다. 씻지도 않은 채 사내자식과 한 침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고 바닥에 내던질 수도 없고, 소복이 쌓인 먼지는 둘째치고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소파에 재울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내일 아침엔 송장을 치우게 될 테니까.
벨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곱게 잠든 얼굴을 보니 두통이 밀려왔다. 산을 오르고, 펍을 구르고, 제게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면서 엉망이 된 루이스였다.
루이스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욕실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따뜻한 물은 고사하고 누런 녹이 섞여 나오는 걸 확인한 벨져는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씻지 못할 거라면 더럽긴 오십보백보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같은 침대에서 잠들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벨져는 그치질 않는 한숨을 내쉬고 취침등 하나만 켜둔 채 불을 껐다.
그냥 누우면 되는데, 앉자마자 뻗어버리는 바람에 벗지도 못한 신발이 눈에 밟혔다. 잠시 고민하가, 결국 신발을 벗겨주고 나서야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누웠다. 루이스가 이불을 깔고 누운 바람에 벨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이불을 빼앗았다. 혼자 꽁꽁 두르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녀석의 숨소리가 벨져를 괴롭혔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왜 별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을 주워버린 걸까. 탁한 주황색 불빛이 비추는 루이스의 얼굴은 어젯밤을 연상시켰다. 여전히 슬프고, 아프고,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루이스의 손이 얼굴 바로 앞에 모여있었다.
쥐면 한 손에 다 들어올 것 같이 마른 손목.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손을 거두기엔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술기운이 들어가있었다. 과연. 예상대로 뼈밖에 없는 듯 마른 루이스의 손목은 벨져의 한 손에 잡히고도 남았다. 벨져는 짧게 혀를 찼다. 봐줄 거라곤 그나마 멀쑥한 얼굴 뿐인데 그마저도 말이 아니었다. 제게 맞아 찢어지며 부르튼 입술도, 막상 이렇게 보고 있으니 영 거슬렸다.
벨져는 손에 쥔 루이스의 손목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벨져는 도로 누워 몸을 돌렸다. 그와 제 얼굴 사이에 놓인 손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술냄새와, 방안에서 나는 먼지냄새, 시트에서 나는 청결한 비누와 햇살 냄새가 제 향수 냄새와 어지럽게 섞여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손 안의 온기와 눈앞에 잠든 남자의 얼굴에 감각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보통은 불쾌하다고 여겼을 것들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끝에 닿은 온기는 놓으면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아 놓치기 싫었다.
* 언제나 그렇듯이 연재분량은 원고 분량의 크롭이며 쌩원고입니다.
* 어떤 동행은 가제로 1월 중 완결,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7. (0) | 2016.01.16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6. (0) | 2016.01.10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0) | 2016.01.03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0) | 2015.12.30 |
[다이루이] Scarface. 02. (0) | 2015.12.27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이어집니다
예전 글이지만 진행 순서상 제목 표기와 게시 순서를 바꿨습니다
어쩌자고 이런 녀석을 받아준 걸까. 벨져는 한순간의 변덕을 후회했다. 덕분에 수월하게 갈 길을 돌아 돌아가고 있다. 얼음심장은 무슨. 세월에 날카롭게 벼려졌나 했더니 여전히 온건하다 못해 물러 터졌다. 연합의 동료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벨져의 곁에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안타리우스와 인식의 문, 그리고 연인을 잃은 남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안타리우스를 쫓던 벨져는 연합으로 돌아가려던 루이스를 낚아챘다. 물론 잡는다고 잡힐 녀석이 아니기에 남아있는 건 그의 의지기도 하다. 벨져는 그 날 펍에서 루이스를 주운 제 변덕과 그의 협조가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헤아리지 않았다. 녀석은 여전히 속을 모를 놈이고, 서로 깊이 얽히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마주한 과거의 실수는 예상 외로 덤덤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걸 알았으면 손을 뻗지 않았을 텐데. 넓은 아량으로 따뜻한 침대를 제공한 벨져는 아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제 심중이나 캐는 루이스를 마주했고, 그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루이스가 순순히 내놓은 정보는 꽤나 유용했다.
여제가 떠난 새로운 공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 곳을 찾는 과정엔 어김없이 안타리우스가 등장했다며 자신이 본 것과 그림자로만 알 수 있는 것들, 유럽을 헤집고 다니면서 알아낸 정보는 벨져가 혼자 수소문하며 모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벨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꽤 쓸 만한 길잡이였다. 능력도 확실하고, 시간이 흐르며 다져진 경험에 나름 쓸만한 머리까지 갖췄으니 껄끄러운 과거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만 아니라면 먼저 나서서 친분을 쌓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 사사건건 부딪히는 게 문제였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과 태생, 경험이 충돌했다. 양보? 녀석과는 원래부터 상성이 안 좋다. 벨져는 혀를 찼다.
알프스 산맥에 연구소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 까지는 좋다. 그 공은 인정한다. 그래서 릭과 함께 알프스까지 왔고, 대낮에 돌아다니는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도 발견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내놓은 수단과 방법은 벨져의 성에 차질 않았다. 고작 열쇠와 신분증을 훔쳐 연구소 안을 둘러보는 거라니.
물론 힘으로 뺏는 것 보다 잠시 잃어버린 걸로 하는 게 위험부담이 적겠지만, 벨져는 열이면 아홉 그의 편을 드는 릭도, 거 보라며 으스대는 녀석도 탐탁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벨져는 해가 지자마자 사람 많은 펍의 구석탱이에 처박혀 영국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수다나 떨고 있는 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화기애애한 꼴이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목적이 뭔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펍의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소문에는 취향이 그쪽이라던데. 과연 농부들과 다른 말끔한 차림새에 여자가 추근덕거려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게 소문이 확실한 것 같았다. 남자의 눈이 닿기 전, 벨져는 머리까지 뒤집어쓴 후드를 더 당겨썼다.
한가롭게 디저트에 대해 얘기하던 루이스를 쏘아보자 슬며시 눈을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눈짓을 주고받은 루이스가 남자가 볼 수 없게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바뀐 분위기에 릭도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살폈다. 뭔가 계획이라도 있는 게 아니었나? 루이스는 흘긋 남자를 보고는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앉아서 서너 잔은 마셨던 것 같은데 얼굴 색 하나 안 변하는 녀석이 릭의 잔까지 잡아 쭉 들이켰다. 열쇠를 훔치든 남자를 납치하든 뭘 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벨져는 눈을 찡그렸다. 그 사이 남자가 두 명째 여자를 거절했다. 낭패라는 듯 펍 안을 기웃거리던 남자가 바에 앉았다. 바텐더에게 무언갈 은밀히 속삭였지만 바텐더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다간 남자가 가버릴 판이다. 벨져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루이스를 채근했다.
“저 쪽?”
“아니. 너 말고. 넌 너무 눈에 띄어.”
벨져는 불만의 표시로 살짝 눈을 찡그렸으나 애석하게도 루이스의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래서 너무 아름다워도 탈이라니까. 루이스는 곤란해 하는 릭을 한 번 올려다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를 향해 걸어가는데,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루이스는 그의 옆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처연한 얼굴하며, 살짝 내리깐 눈, 거기에 얼음도 없이 마시는 독한 술. 누가 봐도 실연을 당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태연해서 잊고 말았던 이유를 다시 깨달을 정도였다. 연거푸 잔을 비운 루이스 옆, 남자가 루이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무어라 말을 걸었다. 작은 목소리라 뭐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순간 팽팽 돌아가던 생각이 멈췄다. 그를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 팔에 턱을 기대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술을 마시던 녀석이 말을 거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사르르 웃는데,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마치 몇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는 남자의 팔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에 이를 악물었다. 헛웃음이 샜다. 사내새끼가 눈웃음을 치는 꼴 하고는.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저런 싸구려 수작질이라니, 같잖기 그지없다. 실망하기도 아까울 정도로 기가 차는 수준이었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펍의 벽에 등을 기댔다. 루이스는 아예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살거리고 있었다. 펍은 시끄러웠고,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남자는 기분이 좋았고, 루이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입을 여는 건 추임새를 넣는 것 뿐이다.
남자가 들뜨면 들뜰수록 벨져의 기분은 수직 하강했다. 저 녀석이 뭘 하던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저렇게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갑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루이스 앞에 놓인 잔에 술이 다시 채워지고 남자 앞에도 잔이 늘어섰다. 가끔 속삭이는 말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 아주 침대까지 갈 모양이다. 남자의 손이 루이스의 어깨에서 등까지 내려갔음에도 루이스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마실 뿐이었다. 저게 진짜 취했나. 남자는 거부하지 않는 게 동의의 표시라 생각했는지 등줄기를 따라 훑으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벨져의 인내심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이, 그 손 놓지.”
“뭐야, 그쪽 애인?”
“애인...?”
루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짜 취한 건지 표정이 나른했다. 무슨 짓을 하는 짓이냐며 눈으로 묻자 루이스가 씩 웃었다. 저 새끼가...!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남자는 루이스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글쎄, 저런 타입 별론데.”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으며 순순히 끌려가자 남자가 비웃음이 분명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참아줘야 하는가. 명백히 저를 놀려먹고 있는 그의 그 잘난 얼굴에 당장이라도 한 대 휘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예 머리가 없는 놈도 아니고, 완전히 술에 취한 것도 아니니 뭔가 하려는 게 있을 것이다. 벨져는 꾹 눌러 참았다.
“집착이 심한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
“뭐 이 새끼야?”
벨져는 기어코 제 속을 뒤짚어 엎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루이스는 슬쩍 웃더니 남자 뒤편으로 던지라고 눈짓했다.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일어났다. 제정신이 분명한 차가운 눈빛에 벨져는 자신이 그의 계획대로 놀아났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너 뭐야?”
남자가 쓰러진 루이스를 넘어 벨져에게 성큼 다가왔다. 취한 척,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그를 붙잡은 루이스가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미안해요. 잠깐, 윽....”
그의 가슴에 기댄 루이스가 숨을 고르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눈을 찡그리며 낮은 한숨을 내쉰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렸다.
“저쪽 것까지.”
바텐더가 빠르게 지폐를 셌다. 루이스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고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지 루이스를 바라봤다. 벨져에게 걸어온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가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벨져는 남자를 응시하며 루이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서, 뿌리칠 수 있음에도 같잖은 연인놀이를 계속했다.
“미안.”
펍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바로 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벽에 기대서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벨져는 안에서 꾹 참았던 일을 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윽...!”
각오할 새도 없이 얻어맞은 루이스는 그대로 엎어졌다. 비릿하게 퍼지는 피맛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다.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화를 참고 있는 벨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하하, 그러게.”
더 맞을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전보다는 철이 든 모양이다. 루이스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진심으로 때려서인가,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급하게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킨 것과 맞물려 속까지 울렁거렸다. 루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덕분에 챙겼어.”
벨져는 루이스가 꺼낸 지갑과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핥는 루이스를 번갈아보고 그가 내민 지갑을 받아들었다.
“배운 거 없는 거리의 고아라서.”
묻지도 않고, 보기만 했을 뿐인데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코웃음을 흘리고 지갑에 들어있는 명함과 고리에 매달린 열쇠를 떼어냈다.
“좋은 지갑이네.”
“좋기는.”
볼 일을 마친 벨져가 다시 지갑을 루이스에게 던졌다. 루이스는 지갑을 살피다 펍의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나온 릭이 서글서글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잘 됐소? 아니, 루이스 그대 입술이.”
“성질이 좀 더러워서 말이죠.”
“아직 덜 맞았나보군.”
“이것 좀 펍 안에 버려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소.”
루이스는 릭에게 지갑을 건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닌 척 사람을 다루는 게 능숙하다. 벨져는 혀를 찼다. 하여간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다. 주먹을 털며 검자루를 쥐었다 놓자 루이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물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슬퍼보여서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거니와, 그와 정다운 대화를 할 사이도 아닌데 왜 자꾸만 시선이 가는지 모를 일이다.
슬쩍 눈을 뜬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졌음에도 반쯤 뜬 눈만은 붉게 빛나고, 그 나른하고 퇴폐적인 눈빛에 순간 벨져는 침을 삼켰다.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는 녀석의 얼굴에 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까 펍에서 남자에게 짓던 눈이 아니다. 도발도, 유혹도 아닌 그저 흡연에 불과한데 야릇한 분위기가 벨져의 입과 발을 얼려 꼼짝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릭이 나오자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끈 루이스가 방금 그 얼굴과 분위기는 전부 허상이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드디어 숨통이 트여 벨져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내가 이 벨져 홀든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고작 저거 따위에? 언짢아진 이유를 찾아낸 벨져는 후드를 뒤집어쓴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여간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따지고 보면 이 일도 다 제 멋대로 자기 잘난 맛에 한 거 아닌가. 사람을 들러리로 쓰기나 하고.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한 대 더 패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다.
멀쩡히 걷던 녀석이 비틀거리지만 않았어도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 그 면상에 한 대 갈겨주었을 텐데. 릭과 걷던 녀석이 그의 팔을 잡으며 낮게 신음했다. 멀쩡해 보인다 했더니, 급하게 마신 술이 이제야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멍청하긴. 한 손으로 입을 틑어막은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루이스에게 괜찮으냐 묻는 릭의 손에 쥐어주었다.
“먼저 가겠다. 버리고 오던지, 사람 꼴로 만들어오던지.”
황망하게 저를 바라보는 릭의 눈빛에도 벨져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녀석의 추한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고, 그 뒤치다꺼리를 해줄 생각도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으니 그걸로 끝,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면 그만인데도 자꾸만 눈에 밟혀 기어이 멈춰 섰다.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린 벨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루이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를 다시 만난 날도 저렇게 취해있었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오려는지, 바람이 찼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6. (0) | 2016.01.10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0) | 2016.01.03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0) | 2015.12.30 |
[다이루이] Scarface. 02. (0) | 2015.12.27 |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0) | 2015.12.24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벨져는 루이스의 방을 나서 바로 옆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 왔는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릭이 벨져를 맞았다.
“오, 왔소?”
“일행이 늘었다.”
“응? 동생도 떨어뜨리고 온 거 아니었소?”
“그녀석 말고, 좀 더 궁상맞은 결정사.”
“결정사? 잠깐, 그대 혹시…!”
릭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벨져는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일일이 답해줄 필요는 없다는 게 벨져의 지론이었다. 릭 앞이라고 바뀔 것도 없었다. 걱정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준 성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는 아량을 보이기로 했다.
“괜찮…소…?”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오.”
되려 묻자 릭은 머쓱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신문과 커피를 드는 대신 불안하게 손을 매만지며 눈치를 보는 게 거슬렸다. 그래도 벨져는 참았다. 건방지고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따박따박 하는 말마다 어깃장을 놓는 녀석보다야.
“그런데…. 정말 그… 그 사람이오?”
“연합의 3급 능력자 나부랭이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색한 기류 속에 눈치를 보기 바쁜 그를 향해 눈을 흘기던 벨져는 먼저 시선을 거뒀다. 릭 역시 흔히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를 책망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지겹도록 들은 소리고, 지겹다 못해 무뎌진 눈빛과 표정이다. 벨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를 신경 쓰고,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이 제게 씌운 편견의 굴레 속 벨져 홀든이었다.
“그…. 벨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그렇다면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소?”
벨져는 창문 앞에 섰다. 안타리우스의 의식은 성공해 인식의 문은 열렸고,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다. 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액자를 찾아 시바 포를 쫓는 것이고 아직 시바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한 벨져는 릭의 눈을 마주했다.
“그 녀석 하나 낀다고 달라질 건 없어. 난 내 일을 할 뿐이다.”
“…그대는 정말 대단하구려.”
“흥.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그러니 앞으로 며칠만 더 신세를 지도록 하지.”
릭이 난처한 듯 시선을 피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 좋다. 그보다는 루사노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의식이 성공해버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거리를 내려다봤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둠이 내렸던 거리엔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 속에 섞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인식의 문에 다가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문의 형태가 아니기에 더더욱 접근하기 어렵고, 그나마 아는 통로는 안타리우스에 점거됐다. 릭의 공간 이동 능력이 알려졌으니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긴 무리다. 벨져는 그림자와 액자를 넘나드는 그녀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하나는 행방을 모르고,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돌아올 가능성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멍청한 남자가 적들이 포진해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할 리가 없으니. 벨져는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자꾸만 어젯밤 어둑한 조명 아래 슬픔을 술로 삼키던 그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겠지.”
“으응?”
“어쨌거나 그림자를 열고 다녔으니 아무것도 모르진 않겠지. 액자에 대한 행방도 어쩌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지만. 릭이 눈을 깜박였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뚱하게 있느니 실제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벨져는 릭에게 옆방에 가보란 뜻으로 턱을 까딱였다.
“바로 옆이다.”
“그럼…. 다녀오겠소.”
벨져는 릭을 보내고 발신인도 수취인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런 게 없어도 누가 보낸 건지 뻔하다. 벨져는 시킨 일을 마무리했다는 짧은 메모를 보고 동봉된 정보를 외운 뒤 봉투째 태워버렸다.
릭이 마시던 커피에선 김이 올라오지 않고, 탄내 대신 벨져가 뿌린 향수 냄새가 방 안에 퍼지도록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질 않았다. 뭔가 일이 있으면 소리라도 들릴 텐데. 벨져는 루이스가 릭과 함께 연합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렸다가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이 있는데 그대로 꽁지를 내뺐으리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얕은 수를 썼던 녀석이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벨져는 다리를 꼰 채 문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온 신경을 문 너머에 집중하고 있기를 얼마, 릭의 웃음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와 냉큼 릭이 보던 신문을 집어들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신문에는 헌터에 대한 속보가 실려 있었고, 바로 얼마 전 마주쳤던 소리 능력자 자매에 대한 칼럼도 실려있었다.
“벨져, 우리 왔소.”
우리. 라는 말에 벨져는 눈썹을 꿈틀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 봤다고 벌써 우리라니. 벨져가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상기된 얼굴의 릭이 루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젖은 루이스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방울지고, 맺힌 물방울은 흰 목을 타고 흘러 티셔츠를 적셨다.
“칠칠치 못하긴.”
작게 중얼거리자 벨져를 향해 슬쩍 눈을 치뜨다가, 릭이 커피를 권하자 바로 고개를 들어 언제 눈을 흘겼냐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벨져는 다시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더 볼 일이 남아있는 겁니까?”
“아, 나는 벨져와 동행한 것 뿐이라.”
“그렇군요.”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자신을 빼고 돌아가는 대화에 벨져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둘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니 그 정도 주도권은 가져도 무방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안타리우스와 그 세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럼…. 인식의 문은?”
“내가 아는 루트는 막혔다.”
당당한 벨져의 말에 루이스가 기가 찬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를 매만지다가 벨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흰 손이 테이블 위에 있던 지도를 잡아 펼친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이었다.
벨져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마른 손목과 손등에 난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그 자신조차 갉아먹는 결정검 때문인지, 루이스의 손은 몇 년 사이에 성한 곳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온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도를 톡톡 두드리던 손끝이 한 점을 짚었다.
“스위스…?”
“일단 제일 가까운 곳은 인터라켄인데….”
“하늘이랑 눈밖에 볼 게 없는 곳이군.”
“여기서 소득이 없으면 거기로 가려했습니다.”
루이스는 지도를 짚으며 안타리우스의 연구소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고 릭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얘기의 주인공이고 연합의 영웅인데다 방금 처음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건의 주요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저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유명인을 직접 보면 신기할 테지. 릭에겐 얼마든지 이해하고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쪽. 또, 엄연히 같은 자리에 있는 자신을 빼놓고 릭에게 말을 건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루이스에게 불쾌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그를 노려보자 애먼 릭이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아, 그……. 그렇지. 커피. 커피 가져오겠소. 얘기들 나누시오.”
황급히 일어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숨을 내쉰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조하겠다더니, 저와는 말도 섞으려 들지 않는다. 벌써부터 어긋나는 말과 행동에 벨져는 젖은 머리를 터는 루이스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흰 목덜미에 물방울이 떨어져 흘렀다.
“협조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협조하겠다고 했지, 네 비위 맞춰주며 수행원 노릇 한다고 하지 않았어.”
릭에겐 그렇게 친절했으면서, 오늘 처음 본 사람보다 못한 냉랭한 취급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 여전하군.”
“지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홀든.”
“어떻게 믿지?”
“난 내가 들어가게 될 구덩이에 함정을 설치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거든.”
한 없이 0도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 타오르는 황혼의 색으로 정반대의 기운을 품은 눈을 마주하며 벨져는 수를 셌다. 말 한 마디 없지만 그 역시 자신의 수를 읽고, 읽고, 또 읽어 그 다음을 노리고 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기싸움. 먼저 백기를 든 건 루이스였다.
“그만. 이런 거 그만 하기로 했잖아.”
“먼저 시작한 건 너다.”
“…그래.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진짜야. 못 믿겠으면 말고.”
“믿는다.”
루이스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피곤하다는 듯 무심한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벨져를 바라봤다. 조금 즐거워진 벨져는 손을 모아 배 위에 얹고 노래하듯 말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의뭉스러운 모양이었으나 벨져 자신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안다 해도 말해주고 싶지 않다. 유치한 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벨져는 우위를 점한 이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0) | 2016.01.03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0) | 2016.01.03 |
[다이루이] Scarface. 02. (0) | 2015.12.27 |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0) | 2015.12.24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0) | 2015.12.2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Scarface. 02.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한 다이무스는 따라 나갈 필요도 없게 준비된 식료품들을 보고 찬장 가득 들어찬 통조림에서 눈을 돌렸다. 베이컨을 꺼내고, 계란을 꺼내 팬을 달궜다. 간단하게 먹는 거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직접 겪어본 게 아니니 섣불리 판단하는 건 금물이지만 루이스는 영국인이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부엌을 맡기긴 불안했다. 달궈진 팬에 베이컨을 먼저 올리고, 양상추를 흐르는 물에 씻는 중에 큰 소리가 났다. 계단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다이무스는 불을 끄고 부엌을 나갔다.
“루이스!”
계단에서 내려오다 굴렀는지, 루이스가 머리를 잡고 낮게 신음했다. 약한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다이무스는 몸을 웅크리는 루이스를 일으켜 앉히려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난 것도 아닌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심상치 않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이렇게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대체 왜 퇴원을 하고 불편한 조건을 받아들였는가. 다이무스는 발로 문을 열고 루이스를 침대 위에 바로 눕혔다. 상태를 살피는 건 그 다음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으론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의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겨우 진정이 됐는지, 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다이무스를 향한다. 다이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군.”
“…괜찮습니다.”
“이게 괜찮은 거라고?”
루이스는 머리를 누른 다이무스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제대로 힘도 주지 못하는 주제에, 괜찮다고 하는 건 허세라고 하기도 안쓰러울 뿐이었다. 루이스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이 정도로 안 좋은 줄은 몰랐다만.”
“잠깐 현기증이 나서 그런 겁니다.”
적대세력의, 그것도 자신의 감시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고, 다이무스가 아는 결정의 루이스는 그런 데 약은 수를 쓸 사람도 아니었다. 읽지 못한 다른 수가 있는가. 다이무스는 이 집 문을 열고 들어오던 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은 루이스의 얼굴을 보며 이 일을 정한 회사의 수뇌부와 연합을 떠올렸다. 홀든을 겨냥한 함정일지도 모르고, 연합의 계략일 수도 있다.
그냥 무시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이 때 괜히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다이무스는 신중해야 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됐다. 그래야 한다. 응당 그래야 했다. 하지만 다이무스는 눈 앞의 남자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눈과 상황을 모두 지워버려도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숨을 멈출 것 같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음 절벽 끝에 서서 기우뚱 쓰러질 것만 같은 그였다. 서늘한 전의를 풍기며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과거의 루이스가 아니다. 전장이 아니더라도 흘러나오던 냉기였다. 이렇게 약한 사내가 아니었는데.
다이무스는 베개를 세워 루이스의 등 뒤에 놓고, 이불을 끌어다 무릎을 덮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만큼이나 아무 말 없이 제 도움을 받는 그가 낯설었다.
“쉬어라.”
“…다이무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을 모아 앉은 루이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 한 게 아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슬며시 웃었다. 쓰디 쓴, 부서지는 듯한 미소에 다이무스의 얼굴이 굳었다.
“저도 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습니다.”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뭐지?”
“숨겨봤자 소용 없을 테니까요. 한동안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이 무슨 어리석은 발상인가. 다이무스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과 달리 루이스는 한 짐을 덜었다는 듯 베개에 몸을 기대고 다이무스와 눈을 맞췄다. 그는 저를 속이려 했다는 것에 불쾌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냐는 듯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연합의 영웅이 안타리우스의 습격에 당해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있는 게 좋을 리 없다. 그건 연합도 회사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웅'이기에 더더욱. 다이무스는 이제야 겨우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를 깨달았다.
루이스가, 능력자들의 영웅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불안과 공포가 만연한 능력자 세계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불안과 공포는 안타리우스를 비롯한 어둠의 세력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그들은 공포와 불안을 먹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어 세력을 늘리고 회사와 연합,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전체를 혼란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더 기세등등하게 활개를 치고 다닐 테고, 끝내는 연합과 회사가 손을 합쳐도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마지 못해 그가 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는 걸로 하겠다.”
“고맙습니다.”
“따로 필요한 건.”
루이스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다이무스는 그대로 돌아섰다. 연민인지 무엇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어지럽게 섞이며 가슴을 짓눌렀다. 누구의 의견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설득하는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모두를 위해서'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 가혹하고 부당한 요구에 싫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 마치 과거에 가문을 위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내려오던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쓰러졌던 자리에 멈춰섰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더 무거운 역할을 떠맡고 말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있는 침실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하게 하려던 점심이었는데, 편하게 할 수는 없게 돼버렸다. 다이무스는 꺼내놓은 계란과 다 식은 베이컨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오, 홀든 경.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막내! 그래서 저쪽이랑은 어때?”
오랜만에 만난 회사의 용기사들이 살갑게 다이무스를 맞았다. 다이무스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빼면 딱히 불편한 건 없다. 첫날 합의한 대로 다이무스는 그가 보이는 곳에서 업무를 보고,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말 같지만 전혀 다르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는 질문에 다이무스는 그저 다르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찾았다. 그는 연합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제게는 보여주지 않은 서글서글한 미소에 다이무스는 시선을 거뒀다. 그걸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드렉슬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면 어디 에이스까지 나서야 하겠냐. 그가 작게 덧붙인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들킨 후로 두터운 벽을 약간 허문 것 같긴 하지만 결정의 루이스는 비밀을 쉽사리 터놓을 인물이 못 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타라의 목소리에 화기애애하게 안부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싹 입을 다물었다. 타라와 루이스가 서로 못 잡아 안달이 난 사이라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고, 그 둘의 신경전을 막아서던 여제는 이제 없었다. 연합 쪽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의 눈치를 보는 그들을 두고 다이무스는 타라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누구고 할 거 없이 자리에 참석한 능력자들이 불과 얼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야 물론 회사와 연합의 축이 되는 둘이니 회의에 빠질 수 없지만 이래서야 초장부터 삐걱거릴 판이었다. 서늘한 냉기가 가라앉은 공기 속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타라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루이스,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서류를 정리하는 타라.
하나 둘 눈치를 보며 자리를 채우고 마침내 루이스가 둥근 테이블로 다가와 다이무스 옆에 앉았다. 타라와 정반대 자리라곤 하지만, 굳이 다른 자리를 두고 제 옆자리에 앉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몸은 좀 어때?”
“그쪽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럼 다행이네. 바로 실전에 투입할 인력도 부족한데.”
“돈 몇 푼에 휘둘릴 정도로 궁핍하진 않아.”
“어머, 그랬어? 몰랐네.”
아니나 다를까 가벼운 안부로 시작한 대화가 채 일 분도 못가 살벌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둘의 신경전은 어디까지나 있는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그만 하란 뜻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자자, 그만 하고. 이러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연합의 아론 휴톤이 사람 좋은 말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루이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이었지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팔걸이에 얹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다이무스는 못 본 척 했다.
“좋아요.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안타리우스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니는 사이에 우리는 근거지를 급습해서 안개수집장치를 파괴합니다. 이미 윗선에서 얘기가 끝난 거니까 더 할 말은 없고, 인선을 확정하고 세부 작전을 세우면 그걸로 회의는 끝. 어때, 간단하죠?”
타라는 안경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루이스는 가만히 그녀를 노려보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지는 바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이무스는 지금 루이스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잔뜩 힘을 준 미간. 어지간히 몸이 안 좋은지 의자 팔걸이를 쥔 손에 살얼음이 꼈다. 이쯤 나섰어야 할 루이스가 말이 없자 아론 휴톤이 입을 열어 연합에서 내정한 인선을 터놓고, 로라스가 그 대화에 끼어들며 타라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사이를 틈타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움찔한 루이스가 한 박자 늦게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다이무스에게 눈길을 줬다. 잡은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려 맞잡자 얼음이 녹아 손을 적셨다.
“그래서, 아무리도 토마스가 괜찮지 않을까…하는데…. 루이스?”
“아니. 안돼.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토마스를 내보내기엔 위험이 커. 차라리 재단의 챌피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때론 실전이 더 큰 경험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언제까지 후방에서 깨작거리고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래?”
타라의 도발에 루이스가 눈을 치켜떴다. 여제가 없는 그에겐 여유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
“…좋습니다.”
의외의 답에 앉아있던 이들의 눈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와 잡았던 손을 놓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 양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당신이 동행하는 걸 조건으로.”
“…좋아.”
타라는 루이스의 눈을 바라보다 시원하게 긍정하고 펜을 움직였다. 서로 한 발씩 물러난 셈이다. 루이스에게 온통 신경을 집중하느라 잠시 흐름을 놓쳤던 다이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누군가 질문이라도 했으면 곤란했겠지만 평소에도 과묵한 다이무스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랑 새끼 결정사가 전방에서 연구소 파괴를 맡는 걸로 하고…. 사방에 둘씩은 배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후방은 내가 맡지. 휴톤과 레베카가 각각 측면을 맡아줘.”
“좋아. 우리는 이쪽에 있는 용기사 둘.”
“윽….”
드렉슬러가 낭패를 봤다는 얼굴인 반면 로라스는 화색을 띠었다. 그가 연합의 아론 휴톤을 흠모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아무래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보가 새지 않게 시행일만 직전에 고지하는 걸로 남겨놓고 나서야 회의가 얼추 마무리 됐다.
다이무스는 내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꽤 시간이 지나서 오늘 은행 업무를 보긴 무리일 듯 싶었다. 타라는 서츄철을 챙기며 일어나 냉큼 도망가려는 드렉슬러를 잡아 세웠다. 또 서류를 미루고 공방에 틀어박혔겠거니 어림짐작했다. 늘상 있는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타라는 회의실을 나가기 전, 다이무스를 불러세웠다. 무언가를 부탁할 때, 미안해하는 얼굴로.
“홀든. 그럼 수고해줘. 둘이 세트잖아?”
다이무스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둘이 세트, 라는 건 물론 지금 상황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고,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가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지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걸까. 루이스의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일이 늘 것이라는 표현인가, 그도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 사이 물이 마른 손을 그러쥐었다. 답답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0) | 2016.01.03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0) | 2015.12.30 |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0) | 2015.12.24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0) | 2015.12.21 |
[다이루이] (2) | 2015.12.09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연합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일손이 부족한 서점에 하루라도 더 일손을 보태기로 한 건 딱히 사람이 많은 파티가 싫다거나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끌벅적한 연합 분위기야말로 파티라는 말이 잘 어울려서 좋아하고, 다른 때도 아닌데 이럴 때 좀 놀면 어떤가. 그럼에도 일곱시 땡 하자마자 퇴근해서 집으로 달려온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싸늘하고 어두워야 할 공간이 환하고 따뜻했다.
“벨져.”
“흠. 늦진 않았군. 앉아라.”
애인이 집에 와있는데 보일러나 장작을 아끼는 건 아니지만, 루이스는 목도리를 푸르며 크리스마스라고 받아온 갈레뜨 봉투를 벨져에게 건넸다. 벨져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선반 위에 올렸다. 내일 간식으로 먹으면 되겠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벨져에 기가 찬 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루이스였다.
“벨져.”
“뭐하나. 얼른 씻고 와라.”
“아니,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우리 어제 약속한 게 있을 텐데?”
약속. 약속이란 말에 힘주어 말하자 벨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좋은 날이고, 벨져 홀든 경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친히 왕림하시어 저녁을 준비하고 그것도 모자라 촛불까지 켜놓은 그 정성을 생각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분명 싸우겠지.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싸우고 싶지 않다. 결국 루이스가 먼저 한 발 물러났다.
“씻고 나올게.”
원한 대답에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넓지도 않은 집이라 욕실부터 주방까지 한 눈에 보이는데, 칠면조가 떡하니 쓰지도 않는 식탁 위에 올라와있었다. 루이스는 손을 씻으려다 새삼 감동했다. 나갔다 들어오면 춥다고 미리 물까지 데워놨다. 이 정도면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쫓아낼 수가 없다.
손만 씻으려던 루이스는 세수까지 하고 나왔다. 따뜻한 물에 있는 줄도 몰랐던 하루의 피로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라, 루이스는 벌써 앉아 기다리고 있는 벨져 앞에 앉았다. 이 집에 식탁보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벨져.”
“크리스마스 이브는 연인과 함께라는 말도 못 들었나? 알아서 한다.”
“…그래. 고마워.”
“들어라.”
피식 웃으며 포크를 들자 벨져의 눈이 따라붙었다. 이건 분명 사온 음식들 가운데 직접 만든 게 섞여있다는 뜻이다. 루이스는 죽 식탁 위를 훑었다. 칠면조야 이걸 구울 오븐이 없으니 백 퍼센트 아니고, 빵은 자주 가는 거기서 사온 것 같고, 샐러드는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면 가끔 하는 거니까 가능성이 높지만 그 옆에 있는 스튜같은 무언가도 냄비가 눈에 익을 걸 봐선 이쪽일 수도 있다.
정말로, 진심으로, 루이스는 이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밥먹으면 갈 테니까. 기껏 준비했는데 맛있게 먹어주지 않으면 실례다. 루이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스푼을 들었다. 벨져의 눈에 슬며시 기대가 스민다. 역시 이쪽인가. 맛있다. 한 술 넘긴 솔직한 감상이 그랬다.
“직접 한 거야? 맛있다.”
“흥. 소스랑 같이 먹는 거다.”
“뭔데.”
“타펠슈피츠.”
“너네 나라 음식?”
“그래.”
벨져는 앞접시에 각종 야채와 고기를 덜어 루이스에게 건넸다. 소스까지 알려주고, 거기에 감자도 곁들이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나서야 포크를 든다. 준비하려면 오래 걸렸을 텐데. 더 내보내기가 미안해졌다. 루이스는 군말없이 맛있게 받아먹었다.
“다행이군.”
“응? 머가?”
“먹고 말해라.”
자기가 계속 쉴 틈 없이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는 주제에. 벨져는 눈을 흘기며 타박했다. 누가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이 초라한 집에서조차 기품이 넘치신다. 어쩜 밥 먹는 것도 이렇게 예쁠까. 루이스는 입 안의 음식을 넘기고 벨져의 얼굴을 쳐다봤다.
“닳는다. 그만 봐.”
“물 가져올게.”
“가만 있어라.”
잠깐 까먹은 거였는지 벨져가 와인잔 두 개와 함께 와인 병을 들고 왔다. 코르크를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루이스는 피시식 웃으며 벨져를 바라봤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 분명 와인도 비싼 거겠지. 정말 과분한 애인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상투적인 말이지만 딱히 건배에 어울리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잔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났다. 한 모금 마시자 훅 올라오는 향과 맛에 또 한 번 감탄한 루이스는 한 모금 넘기며 벨져를 바라봤다. 슬쩍 올라간 벨져의 입꼬리만 봐도 뭐 이런 걸 가지고 감탄하냐는 지극히 그다운 생각이 보였다.
“좋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애장품이다.”
“그런 걸 마셔도 되는 거야?”
“못 마실 이유라도 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까워서. 하지만 아깝다는 말을 했다간 벨져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며 아까울 게 뭐가 있냐고 타박할 게 뻔했다. 루이스는 샐러드를 뒤적거리다 토마토와 양상추를 입에 넣었다. 벨져는 홀든의 검사 답게 식사에 충실한 편이었고, 루이스는 맛을 따지기보다 허기를 채우는 편이라 둘이 밥을 먹을 때면 루이스가 벨져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거나 이렇게 느긋하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속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벨져는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와인으로 입을 축이는데 벨져가 칠면조의 다리를 잡아 우아한 나이프 솜씨로 살을 발라 루이스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됐어. 내가 애도 아니고.”
“네가 알아서 먹으면 내가 손을 보탤 이유도 없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래. 미안합니다.”
“알면 먹기나 해라.”
“다 맛있어서 뭐부터 먹어야할지 몰라서 그래.”
그냥 그렇다고, 가볍게 한 말이었는데 벨져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딱히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루이스는 벨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분주히 포크를 움직였다. 입 안 가득 칠면조 고기를 씹으며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요리를 벨져가 가르쳐준 대로 채소와 함께 곁들여 숟가락 위에 올렸다. 오늘 딱 세 번 참는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루이스가 입 안의 음식을 넘기고 입을 열었다.
“그러려고 한 말 아니니까 밥 먹자. 응?”
“……”
“내가 잘못했어.”
“…안다니 다행이군. ”
전에 한 번, 밥 먹는 거 가지고 대차게 싸운 뒤 이 주 동안 얼굴 한 번 안 보고 전화 한 통 안 한 후로 건드리지 않기로 한 주제였다. 벨져가 다시 식기를 드는 걸 보고 나서야 루이스도 빵을 뜯었다. 천천히 오래 씹으며 벨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끼 식사 정도는 건너 뛰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두 사람이 먹기엔 많은 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가 않는다.
“벨져.”
부르자마자 고개를 드는 벨져의 잔에 와인을 채우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밥 먹고 갈 거야?”
“…….”
와인병을 내려놓는데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기분이 상한 것도 아니고, 말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루이스는 제가 말을 잘못했나 되짚다가, 다른 의미로 들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네가 원한다면 같이 있어줄 수 있다.”
드디어 식사를 마쳤는지 냅킨으로 입을 닦은 벨져가 물잔을 쥐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벨져는 완전히 의기양양해져선 여유로운 미소까지 흘리고 있다.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웃는 걸 보아 백프로다. 어쩌지. 지금 여기서 집에 가라고 하면 또 한 동안은 안 본다고 토라질 게 뻔했다. 벨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돌려보낼 방법. 제 꾀에 꼬인 꼴이 된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지도, 부인하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벨져.”
“뭐, 아직까지 산타를 믿는 건 아니니 선물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벨져.”
“정 주고 싶으면 다른 쪽으로 줘도 되고.”
한껏 기분이 올라간 벨져의 말은 물이 흘러가듯 빠르고 경쾌했다.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져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있는 날인데, 가족이랑 보내야지.”
“……”
“어제 약속했잖아. 그래서 나도 스케줄을 뺏고.”
대번에 굳는 얼굴을 마주하는 게 싫고, 집에 보내기도 서운하지만 그래도 지켜야하는 게 있는 법이다. 당장 광장에서 일하는 것만 해도 바로 옆에 다이무스 홀든이 있는데 언제까지 모른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 가는 걸 안 좋아하는 건 아는데, 계속 너를 숨기는 나도 괴로워. 너는 다른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사람인데, 내가 독차지 하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단 말이야. 루이스는 요 며칠 내내 다이무스를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간단한 안부 인사에도 제 집에 있는 그의 동생을 떠올리고만다. 바쁜 연말에 일부러 없는 시간을 쪼개 이브 전날 휴가를 낸 것도, 침대로 몰아붙이던 그에게 약속을 받아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하루 쯤은 집에, 가족들에게 얼굴을 비추라고.
“쓸데 없는 걱정을.”
짜증을 내거나, 말을 돌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벨져의 반응이 싱거웠다. 한심하다는 듯 한 손으로 턱을 괸 벨져가 혀를 찼다.
“내가 그것 하나 처리 못할 줄 알았나?”
“다녀왔어? 언제?”
벨져가 눈을 감고 피식 오만한 웃음을 흘렸다. 루이스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순간 넘어갈 뻔 했던 루이스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럼 안 보내도 된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슬그머니 기대가 차올랐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그리고 새해에는 본가에 갈 거다.”
“…카드?”
“형아라면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지. 아, 이글 녀석에겐 용돈도 넣어줬으니 입을 다물 거다.”
“…하, 하하….”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다. 루이스는 새삼 다이무스가 가여워졌다. 누가 알았으랴, 하나 모자랄 것 없는 완벽한 남자가 연민의 대상이 될 줄. 루이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도취된 벨져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진지한 얼굴을 하는지. 이번에야말로 헛소리를 하면 아직까지 쥐고 있는 물컵을 빼앗아 끼얹어줄 다짐을 하는데 벨져가 손을 잡았다.
“내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넌.”
“…응?”
“쫓아낼 생각마라. 내가 정말 갔으면 저녁도 안 먹고 내일도 대충 갈레뜨에 차나 마시며 때웠겠지. 틀린가?”
잠시 눈을 깜박이다, 얼굴에 확 오르는 열에 자유로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벨져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수 없어 시선을 돌리자 그럴 줄 알았단 듯 웃음을 흘린 벨져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을 꽉 잡았다.
“걱정 마라. 내일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어줄테니.”
“자, 잠깐…!”
“잡아먹으려면 살을 잘 찌워야지. 어젠 출근한다고 봐줬지만 오늘은 그런 거 없다.”
“야!”
“시끄럽다. 데이트도 데이트 나름이지! 언제까지 내가…!”
“고마워! 고마운데!”
루이스는 벌개진 얼굴로 소리치다 푹 고개를 숙였다. 침착해야 한다. 루이스. 침착해야 한다! 손등을 덮은 벨져의 손이 데일 듯 뜨겁다. 화끈거리는 뺨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왜 또 이렇게 휘둘리는 걸까. 생각해봐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낮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부루퉁하니 이미 기분이 상한 벨져의 얼굴이 들어온다.
“…고마워.”
“…알면 됐다.”
“정말로.”
“흥. 이제와서.”
벨져는 삐진 듯 툴툴거렸지만 이미 귀가 달아올라있다. 자신도, 이 남자도 솔직하지를 못해서. 입으로는 항상 툭툭 시비를 걸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지만 하는 행동만큼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 있었다. 가령 왁자지껄한 파티 후에 혼자 쓸쓸히 외로워할 연인을 위해 외로워할 틈도 없게 만들어준다던가. 추울까봐 씻는 물을 데우고, 시간을 들여 만든 음식을 끝까지 먹어준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하고 애정어린 행동들.
결국 루이스가 먼저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삐진 척 눈을 흘기던 벨져에게 눈웃음을 치자 마지못해 기분을 푸는 척 잡은 손에 손가락을 얽어온다. 그래. 혼자 있기 싫었고, 파티 후에 진하게 몰려오는 외로움이 싫었다. 그래서 안 해도 되는 일을 자처해 이제나 저제나 시계만 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가라고 가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네가 있기를 바라면서.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잡아 제 뺨 위에 올렸다.
“그래서, 몸으로 때우라고?”
“너 하는 거 봐서.”
엄지로 뺨을 어루만지며 하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루이스는 손을 내려 와인잔을 들었다.
“벨져 홀든 경이 빚을 탕감해주시길.”
“흥.”
코웃음을 치면서도 잔을 들어 챙 하고 건배를 해준다. 비록 이 뒤에 예정된 것이 하나 가득 쌓인 설거지와 욕망에 충실한 연하의 체력 괴물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행복했다.
“아, 벨져.”
“또 뭐냐.”
“침대에 장미꽃 뿌리고 촛불 켜둔 건 아니지?”
“……”
“…하지 말라니깐….”
그거 치우는 건 결국 다 난데. 와인을 쭉 마시며 중얼거리자 방금 전까지 기분이 좋았던 벨져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정말이지….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마라….”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그도 배려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 피차일반이다. 이렇게 말 해놓고 결국 치우는 건 하나도 안 도와줄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져주기로 했다. 어째 매일 져주는 것 같지만.
“알았어. 말 안 할게.”
벨져가 정색을 하고 쳐다본다. 루이스는 잔을 내려놓았다. 역시, 삐진 애인을 풀어주려면 그 방법밖엔 없을 것 같아 제 무덤을 팠다.
“있다가 같이 씻을래?”
“…그래.”
움찔하는 입가가, 반쯤 풀어졌단 뜻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감이 좋은 편이었고, 내일은 하루 종일 침대 밖을 못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아무래도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좋아해.”
“뭐?”
“너 좋다고.”
“…….”
좋으면서 아닌 척 하기는. 루이스는 먼저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다 못먹을 줄 알았는데 열심히 먹었더니 그래도 샐러드와 냄비가 바닥을 드러냈다. 앞치마를 입을까 하다가 괜히 벨져의 이상한 취향을 건드릴지도 모른단 생각에 포기했다. 그래도 앞치마를 두른 벨져는 조금 보고싶을 지도.
벨져가 그릇을 가져오는 척 은근히 뒤에 달라붙었다.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벨져는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이걸 어쩔까, 받아줄까 말까 고민하면서 루이스는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결국 받아주게 되어있다는 점에서 루이스도 다를 게 없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0) | 2015.12.30 |
---|---|
[다이루이] Scarface. 02. (0) | 2015.12.27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0) | 2015.12.21 |
[다이루이] (2) | 2015.12.09 |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Happy birthday to you. 00.
생일 챙겨주려다가 운명을 발견햇습니다 빰
다음편은 벨져 생일에...
“형들, 대회 일정 나왔다!”
“응. 지금 보고 있어.”
이글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어나자마자 꼭 붙어앉아 아이패드를 보고 있던 덩어리 중 하나가 대답했다. 하여간 자리도 넓은데 왜 저러고 있담. 이글은 입을 비죽 내밀며 벨져에게 안기다시피 기대있는 루이스의 옆에 앉았다. 루이스를 끌어안고 패드를 만지던 벨져가 화면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네 생일에 결승을 하겠군.”
“그 전에 네 생일에 4강을 하겠지.”
“그거야 당연히 이길 테니까.”
루이스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옆에서 이글이 질색을 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루이스는 이글의 다리를 두드리며 이해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 잠깐도 뺏기기 싫은지 바로 벨져가 목에 감고 있던 팔을 당겼다. 목이 졸리는 대신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올려다보자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대진표를 확인한다. 루이스는 벨져의 아이패드를 꺼버렸다.
“뭐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거 없어?”
“그냥 늬들은 서로를 줘라. 줘. 노예권.”
“니들이라니. 이글.”
“에휴, 난 줄 거 없다! 형들 알아서 해!”
선물 얘기가 나오자마자 냉큼 달아나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이글을 보다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루이스와 벨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 기대도 안 했지만....”
“저 새끼는 평생 저럴 거다.”
“그래서, 너는 뭐 생각해놓은 거 있어?”
“딱히 없다만.”
루이스는 벨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벨져의 눈길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노예권 줄까?”
“미쳤냐.”
“아니면 뽀뽀쿠폰같은 거?”
“......이글이 옮았군.”
“걔가 무슨 병균이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벨져가 혀를 차며 목에 둘렀던 팔을 내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준다고 해도 과연 벨져 홀든의 눈에 찰까 싶지만 그래도 생일이니만큼 뭔가 해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떠올렸다. 같이 산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벨져는 어려웠다. 비싼 고급 크리스탈 잔 같은 녀석이라 무디기 짝이 없는 센스의 루이스에게 벨져 홀든의 생일선물은 난제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축에 속했다.
“글쎄, 물질적인 건 별로.”
“그래.”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는 세상이 비슷할 때나 통하는 얘기다. 벨져가 수실로 옷장에 채워넣는 옷만 해도 그렇다. 루이스가 생각하는 옷값에 0을 몇 개를 더 붙여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돈으로 구할 수도 없는 한정판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방 안에 즐비했다.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숙소 생활을 시작한 몇 주동안은 벨져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을 구분하다 못해 가격부터 생각하던 루이스였다.
“경기 끝나고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회식 하고 바로 연습하겠지.”
“그러게....”
벨져가 시선을 내렸다. 영 좋지 않은 표정에 뭐 문제라도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푹 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글 녀석의 멍청함이 옮았나.”
“.......”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예뻐서, 흰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런 척 해도 엄청 좋아한다니깐. 피식 웃으며 아예 벨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아이패드를 내려놓은 벨져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넌. 뭐 갖고 싶은 거.”
“없는데.”
쯧. 또 혀를 찬다. 루이스는 예상한 반응에 가늘게 웃으며 벨져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사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다이무스의 자리를 대신해 새로 영입한 탱커와 조합을 맞추고 본선 경기를 연습해야 하는데 꼼짝도 하기 싫었다. 벨져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넣자 벨져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지 말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눈을 감아버렸다.
“방금 일어나놓고 또 자냐.”
“안 자.”
“결승 끝나면 휴가니까 어디라도 가던지.”
“둘이?”
“주렁주렁 다 달고 가면 제대로 쉬겠냐.”
난 좋은데. 네가 둘이 가고 싶은 거겠지.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여행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휴가라고 하면 그냥 집에서 늘어지게 쉬는 게 훨씬 좋지만 벨져는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드라이브를 하면서 바람을 쐬야하고, 밥도 그냥 한 끼 때우는 게 아니라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우선은 결승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벨져와 제 생일 사이엔 딱 15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결승은 일요일, 본선은 토요일에 하는 경기 일정 상 8강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벨져의 생일에 4강전을 하는 거야 정해진 수순이었다. 더구나 이번 상대는 유독 홀든A에게 약한 서포터 위주의 신생팀이었고, 사실상 홀든 A는 결승까지 수월하게 가지 않겠는냐는 게 대세적인 여론이었다.
“이대로 올라가면 또 그랑플람이랑 만나겠네.”
“콩라인으로 굳혀줘야지.”
“너만 잘 하면 돼....”
“내가 못한다는 소린가?”
“아.”
루이스는 잘못 속내를 말해버린 것처럼 입을 가렸다. 가슴을 아프지 않게 치는 벨져가 입술을 비죽인다. 삐진 게 귀여워서 이렇게 장난을 치고 마는 걸 알까. 알면 이럴 리가 없지. 키득거리며 미안하다고 말하자 깍지 낀 손을 놓고 내려놓았던 아이패드를 든다. 너 그거 떨어뜨리면 나 오늘 연습 못해. 벨져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 때 다른 약속 잡지 마. 이번에도 파토내면 앞으로 네 얼굴 안본다.”
“그럼 그랑플람으로 옮겨야겠네.”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다. 이러다 진짜 토라질 기세라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목을 뒤로 빼며 한 번 튕기다가 결국은 뺨을 내준다. 늘 관리를 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질였다.
“농담이야.”
루이스는 벨져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엄지로 뺨을 찬찬히 매만졌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벨져의 눈에 힘이 풀린다. 그 모습이 좋아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벨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당연히 입술을 맞추겠거니 싶어 눈을 감았는데도 반응이 없다. 슬며시 눈을 떠볼까 하는데 코를 잡혔다.
“아아아, 미안!”
루이스는 코를 비트는 고통에 벌떡 일어났다. 코를 잡고 눈을 흘기니 벨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흥. 덤빌 구석을 보고 덤벼야지.”
“...너 내가 너보다 형이란 건 아예 안중에도 없지?”
“고작 한 살 가지고.”
“아, 몰라몰라. 넌 생일 선물 취소야.”
벨져를 내버려두고 소파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뭐 그런 게 있냐는 둥 어이 없어하는 벨져를 두고 식탁 의자에 대충 걸어놨던 잠바를 집어들었다. 족히 두 사이즈는 큰 잠바는 원래 다이무스의 것이지만 다이무스가 은퇴하면서 자연스레 루이스의 소유가 됐다. 딱히 탐이 났던 게 아니라, 자기 옷과 헷갈려서 자주 입고 다닌 것 뿐이지만 어쨌거나 다른 건 다 사무실에 돌려놓은 다이무스가 오더의 역할과 함께 루이스에게 준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야!”
“나 먼저 간다!”
물론 벨져는 그런 거에 의미를 붙이는 게 오글거리지도 않냐며 질색을 했지만. 루이스는 벨져의 외침을 무시하고 이글과 토마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충 슬리퍼를 신고 문을 열면 결국 벨져가 몸을 일으킨다. 비척비척 토마스의 손에 이끌려 나온 이글도 춥다면서도 슬리퍼를 꿰찼다.
“아이작씨는?”
“아까 먼저 나가셨어요.”
“으아, 춥다. 으으으.”
“아, 형!”
“오늘은~ 우리 토마스가~ 몇 쓰레기나 당할까요~?”
“이글 형! 형이나 잘, 으악!”
이글은 능글맞게 웃으며 토마스의 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 토마스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고, 애를 놀리던 이글이 결국 벨져에게 등짝을 맞았다. 한 걸을 떨어져 걷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글의 호들갑에 웃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벨져의 생일까지 앞으로 한 달 남짓, 고민은 이제 시작이었다.
'사이퍼즈 > 벨져루이 : 프로게이머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 Valentine's Day (0) | 2016.02.15 |
---|---|
Happy Birthday to you, Belzer. (2) | 2016.01.12 |
어느 좋은 날 (0) | 2015.10.22 |
Prequel. 08. (2) | 2015.07.02 |
Prequel. 07. (0) | 2015.07.0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짙은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트리비아.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끝내 돌아보지 않는다. 부르지 않았으니까. 부르지 못했으니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손을 뻗었지만 뒤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손이 저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죽음의 구덩이로 끌어당기는 시체들의 썩은내가 진동을 하고, 그들은 저마다 분노와 원망을 내뱉는다. 그리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지극히도 무심한 눈동자들.
동료라고 믿었던 이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는다.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것처럼 가까워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절망은 더욱 깊어지고, 마침내 죽음의 늪에 갇히는 순간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말한다. 이것이 아무도 믿지 못한 자의 말로라고.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브랜다의 목소리.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더니,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됐네? 가여운 루이스. 이제 넌 혼자야. 영원히.’
“헉...! 윽.... 아, 하아....”
얼음 속에 갇힌 듯한 오한에 번쩍 눈을 뜨자 쨍한 두통에 질끈 눈을 감았다.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세차게 뛴다.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걸 몽땅 게울 것 같은 토기와 타는 듯한 갈증이 동시에 찾아와 루이스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찬찬히 숨을 고르면 조금씩 두통이 가시고 날뛰던 심박수와 귀를 울리는 심장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서야 낯선 방에 있다는 걸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낯선 방, 그것도 꽤나 넓고 좋은 방인데다 침대까지 푹신하다. 며칠간 떠돌며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본 적도 없는데, 이런 방은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사치였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누굴 만났던 것도 같은데, 너무 취했는지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기억이 흐릿했다.
이 정도 방이면 모텔이나 여인숙은 절대 아닌데, 비용 청구를 연합으로 했다간 호되게 야단을 맞을 지도 모른다. 엄습하는 현실의 걱정에 한숨을 내쉬자 쨍한 두통이 다시 찾아와 눈을 감고 머리를 감쌌다. 숙취로 인한 두통이 가라앉길 기다리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일어났군.”
“...벨, 큼, 벨져 홀든?”
놀란 것도 잠시, 턱하고 목이 막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당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봤다. 경계해야 하는 상대다. 몸 상태가 완전히 맛이 가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흥. 꼴을 보아하니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군.”
“잠깐, 그럼 어제...!”
“그래. 창관에 넘어가려는 널 구해줬지.”
“뭐?!”
“꽤 비싸게 치렀다만.”
“아니아니, 잠깐. 잠깐만.”
루이스는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발언에 어제의 기억을 되짚었다. 전혀, 전혀 그런 기억은 없다. 바에서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겨 거리로 내쫓겼다거나 술집에서 흠씬 두들겨 맞을 뻔한 걸 도와줬을지언정 창관이라니. 우선 벨져 홀든이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것부터가 수상하다. 루이스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마주했다.
“허튼 소리 마. 안 속으니까.”
“그래? 유감이군.”
“목적이 뭐야.”
여유롭게 방의 창문을 연 벨져는 턱을 치켜들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목적? 글쎄, 뭐일 것 같나.”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설명하기 힘든데.”
“차여서 폐인이 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축축 쳐지는 몸상태에, 최악에 가까운 악몽, 거기에 일어나자마자 벨져 홀든까지 더해지니 맞받아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달리 멀쩡했고,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유로웠다.
“그래서 그 꼴이 되도록,”
“그 얘기는 안 했으면 하는데.”
내내 여유롭던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매서웠지만 루이스는 피하지 않았다. 이젠 그 때의 나약한 한낱 결정사 따위가 아니니까. 날카로운 적막을 깬 건 벨져의 웃음소리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무슨 의미지?”
벨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과거의 일일랑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을 대하는 것같은 태도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벨져 홀든은 분명 살기등등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루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이전에, 왜 여기서 벨져 홀든과 맞닥뜨리게 됐는가. 하필이면 지금.
“저런. 너무 어려웠나 보군. 감안하겠다.”
“홀든.”
“그래서, 새로운 공간은 어떻게 됐지?”
“내가 그걸 말해야해? 있으면 듣고 싶은데.”
“지금 자기 처지를 모르는 모양인데.”
벨져가 가소롭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침대로 다가왔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긴 하지만 절대 함부로 검을 휘두를 사람은 아니다. 이 방, 꽤 좋아보이니 검을 휘두르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완력으론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루이스는 벨져와 눈을 맞춘 채 주먹을 그러쥐며 손안에 얼음을 쥐었다. 차가운 얼음이 흉기가 될 준비를 마친 것과 동시에 벨져의 발이 멈췄다.
“지금 넌 내 인질이다.”
“인질? 농담이라면 완전 실패인데.”
“농담으로 들리나?”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목소리와 차가운 얼굴. 벨져 홀든은 쉽게 농을 입에 담을 사람도 아니었다. 왜 이런 곳에서 마주쳤는지, 왜 이곳까지 옮겨줬는지는 모르나 지금 그는 진심이었다.
“이 근방에서 연합을 적으로 돌리면 힘들 텐데.”
“언제는 적이 아닌 적 있었나?”
“...진짜 목적이 뭐야. 네 말대로 멍청해서 못 알아듣겠거든.”
“글쎄. 영웅씩이나 되는 녀석을 부리고 다니는 기분은 어떨까 해서 말이지.”
진지한가 했더니 다시 웃음을 머금는다. 우위를 점령한 것처럼 구는 그는 즐거워보였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글보다 더 대하기 힘들다. 루이스는 작게 숨을 토했다.
“이런 신경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동감이다.”
너무 쉬운 대답에 김이 빠졌다. 머리를 잡고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얼음을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뺐다. 얼음을 굳히느라 언 손이 화끈거리고, 손이 젖어들었다.
“트리비아가 떠난 공간에 대해서라면 미리 말해두지만 전혀 몰라. 누가 머릿속을 뒤질지도 모르니까 아예 보지 않았어. 유감이야.”
“그 쪽엔 관심 없다.”
먼저 선을 그었음에도 벨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에 불과한 신경전에 슬슬 짜증이 차올라 그를 노려보자 벨져가 팔짱을 꼈다. 먼저 물어봐놓고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러고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루이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숙취와 피로로 몸상태가 개판이었다.
“그러는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홀든?”
“말해줄 의무도 없다.”
“그럼 이만 가도 되지? 길에서 뻗지 않게 해준 건 고마워. 비용은 연합으로 청구해.”
“그만. 어딜 가려는 거지?”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루이스를 붙잡았다. 쉽게 보내주리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 도망가는 거랑, 너를 상대하는 거. 어느 게 더 효율적일까. 난 전자라고 생각하는데.”
“저런. 전자의 성공률이 높지 않은 것 같다만.”
“하아....”
이쯤 되면 답답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스는 세수도 못한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막 일어나서 머리도 엉망일 텐데 저 답답하고 성가신 도련님은 이 아침에도 기품이 차고 넘쳐흐르신다. 루이스는 이게 나쁜 꿈이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그대로였고, 물러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도망친다 해도 사방이 막힌 곳에서는 무리다.
“뭐, 일단은 일종의 변덕이라고 해두지. 안타리우스를 쫓고 있다. 협조하도록.”
“내가 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악연이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지. 네가 남은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벨져의 말에 루이스의 표정이 얼었다.
“사랑놀음에 세상 돌아가는 상황까지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뭐, 그런 짐은 필요 없기도 하고.”
“그럼,”
“안타리우스의 의식이 성공했다. 거기에 웬 헌터가 어둠 속에 숨은 일을 끄집어내서 여기저기 소란이지.”
“.......”
연합에 있지 않다고 정보조차 모르는 건 아니다. 매일 앤지와는 연락을 주고 받았고, 연합은 가장 큰 사이퍼 조직답게 조직원과 지부가 각지에 퍼져있다. 트리비아와 마지막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시국은 위기를 넘어서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 이번에는 능력자 세계를 넘어서 전 세계에 전쟁의 불길이 번질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엔 연합과 회사가 손을 잡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성이 높았다.
전쟁 후에 남는 건 승자도, 패자도 아닌 추악한 비극 뿐이다. 전쟁의 훈장으로 주어진 영웅이란 이름도 결국은 허상에 불과하니까. 루이스는 주먹을 쥐었다.
“내 목적은.”
청명한 목소리가 상념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맑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
“안타리우스의 힘의 근원, 인식의 문을 파괴하는 거다.”
“......그래서?”
“동행해라.”
“왜?”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악연이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라고. 혹시 모르지. 이것도 운명일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했을 법한 말이었지만, 벨져의 그 오만한 미소엔 숨길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잠시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시작된 그 날이 눈꺼풀 아래로 스쳐지나가고, 그 때와 다르지 않은,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여유롭고 당당한 남자가 눈앞에 서있다. 또다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고, 앞에 펼쳐진 게 가시밭길이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끝내는 제 앞에 돌아올.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벨져의 눈이 커졌다. 그도 예상치 못한 것 같은 반응이었지만 루이스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조하겠어.”
벨져가 눈을 깜빡였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벨져가 진심이었듯 루이스도 진심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Scarface. 02. (0) | 2015.12.27 |
---|---|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0) | 2015.12.24 |
[다이루이] (2) | 2015.12.09 |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다이루이] Scarface. 01. (0) | 2015.12.0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ㅂ밖+모바일이라 엔터 대신 줄간격~
2014년 1월에 냈던 다이루이 단편집 수록 원고
Uno.
오후 10시 28분. 모두가 퇴근하고 빈 사무실은 전기절약 캠페인에 따라 어둑했다. 한 군데만 전등이 켜져 있었는데, 그 백열등 아래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남자가 있었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진 지 오래였지만 업무를 마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다이무스 홀든에게 야근이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바이어에게 보낼 서류를 처리하던 다이무스는 자료 파일을 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상품개발팀 드렉슬러의 손을 거친 자료는 말 그대로 중구난방에 엉망진창이었다. 개발팀에서 뺄 수 없는 꼭 필요한 인재이고,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신제품들은 분명 전자기기의 혁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천재이긴 하지만, 그의 서류는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제발 제대로 된 개발서를 올리라고 타라가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이 없었고, 천성이 괴팍한 아웃사이더라 주변에서 대신 서류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요령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천재 개발자의 서류는 돌고 돌아 다이무스의 손에 돌아오곤 했다. 드렉슬러의 서류는 다이무스 정도나 되는 끈기와 책임감을 가지 않고서야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그나마 요새 글씨는 알아보게 써주더니, 타라가 회장님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갔다고 금세 이 모양이다. 암호해독가가 필요할 정도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서류를 앞에 두고 다이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올려 회색 천장과 백열등을 보며 눈을 감다가 목에서 뿌득, 하고 소리가 났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라도 마실까 싶어 일어나는데 탕비실에 원두도 그 흔한 믹스커피도 보이질 않았다.
피곤해서인지 단 게 먹고 싶었다. 비척비척 자리로 가 제일 아래 서랍의 잠금을 여는데 늘 챙겨두던 초콜릿도 보이질 않았다. 포기하고 빨리 마치려고 노트북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데 지렁이가 기어가는 글씨에 도무지 일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문서작업을 그 좋아하는 노트북이나 스마트 폰으로 할 것이지. 이런 중요한 서류에 드렉슬러는 꼭 손으로 써서 스캔을 해서 보냈다. 타이핑 하기도 귀찮다는 걸까.
매일 아침 마시는 카페모카가 마시고 싶었다. 진한 시럽과 거품이 풍부한 스팀밀크, 거기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고 휘핑크림을 잔뜩 얹어 자바칩을 뿌리고 모카 드리즐까지 뿌린 카페모카. 회사 아래 있는 대형 체인점 말고,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에서.
높은 사무실 빌딩만 죽 늘어선 거리엔 당연히 큰 대형 체인 카페들도 많았지만 다이무스는 그 카페가 좋았다. 다른 곳과 다르게 직접 커피를 볶아서 향도 좋고,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이나 분위기, 뉴에이지 풍의 음악까지. 공간이 다른 카페에 비해 협소하다는 것만 빼면 뭐 하나 빠지지 않았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는 카페를 떠올린 다이무스는 벗어둔 재킷을 입고 멋스러운 버버리 코트를 걸쳤다. 목도리에 장갑까지 끼고 잠시 노트북을 바라보던 그는 전원을 끄고 가방 안에 정리해 넣었다.
이대로 카페에 들렀다가 퇴근할 생각이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제 자리에 켜진 전등을 끈 다이무스는 일의 능률을 위해서라며 퇴근 카드를 찍고 회사를 나섰다.
Due.
오후 10시 12분. 퇴근하는 회사원들마저 거진 다 빠져나간 카페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 높은 회사 사무실 건물뿐이라 이쯤 되면 손님이 없는 게 당연했다. 더러 야근하는 회사원들이 지친 얼굴로 비척거리며 들어와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걸 빼면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월요일부터 명절이니 그 전 주 금요일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찍 가버리는 게 당연했다. 혼자 가게를 보던 루이스는 잠깐 창밖을 내다보며 불이 꺼진 사무실 건물들을 바라보다 슬슬 매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꺼내다가 어차피 오늘 문 닫으면 한동안 안 나오겠지 싶어서 락스칠도 하려고 전용세재를 꺼냈다.
오후 아홉시에 출근해 아침 여덟시까지, 카페를 지키는 루이스 덕에 조그만 카페는 24시간 내내 문을 열고 밤샘 작업을 하거나 야근하는 회사원들을 맞았다. 더러는 이런 조그만 카페에서 뭐 하러 24시간 영업을 하냐고 했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니까.
그래도 손님이 적은 건 사실이라 새벽 시간에는 다른 알바도 없이 루이스 혼자 카페를 봤다. 그 날 쓸 원두를 볶고, 부족한 건 없는지 확인하고 모자란 게 있으면 주문하고 청소하고 나면 새벽 두시 쯤.
카페를 한 번 죽 둘러보고 할 일이 없으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가끔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선곡 리스트를 수정하고 그래도 할 일이 없으면 노트북을 켜놓고 웹서핑을 하거나 드라마와 예능 프로를 봤다.
그러다 졸리면 알람을 새벽 5시 반에 맞춰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누가 보면 정말 늘어지게 가게 본다고 해도 루이스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여섯시부터 출근하는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쿠키 반죽을 만든다. 분명 멀쩡한 반죽인데, 왜 오븐에 넣기만 하면 이상해지는 걸까. 루이스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제가 만들면 이상해진다는 건 알기에 그냥 쿠키가루에 우유를 부어 치대서 냉장고에 넣어서 반죽을 만들어두는 것까지만 했다.
그러다 여덟시 쯤 오전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집에 가서 퍼질러 자고, 가끔 누가 부르면 나가서 놀다 출근하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에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막상 본인은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바닥을 쓸고 닦고 왁스칠까지 했더니 반짝거리는 게 흐뭇한 나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루이스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금요일이라 아마 다들 퇴근했을 테고, 혹시 남은 사람이 있어도 이 시간이면 집으로 가지 카페에 들르진 않을 거란 생각에 카운터 안쪽의 간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Tre.
"큼, 큼."
다이무스는 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카운터 너머엔 아직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건만 앳된 청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빨리 커피 한 잔을 들고 집에 가고픈 다이무스는 평소보다 인내심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잠에 깊이 빠졌는지 청년은 다이무스의 헛기침 소리를 듣지 못하고 위태롭게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크게 고개가 꺾이더니 퍼뜩 눈이 마주쳤다.
“어, 어어? 아, 죄송합니다.”
“...카페 모카. 휘핑 올리고 자바칩 추가에 모카드리즐.”
다이무스가 내미는 쿠폰과 카드를 받아들고 영수증과 카드, 전동벨을 함께 건넨 청년은 바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았다. 간 원두를 템퍼로 눌러 머신에 놓고 버튼을 누른 그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가져다 스테인리스 컵에 따르고 스팀기를 켰다.
졸린지 눈을 꿈벅이면서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부드럽게 거품을 내는 게 제법 오래 일한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아침에 들러 커피를 사가거나, 혹은 누가 사오는 걸 마시는 타입이었기에 이미 쿠폰을 몇 개씩 썼으면서도 이 시간에 여길 온 적은 없었다.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에 홀더를 끼우고 생초콜릿을 두 번 펌핑한 그는 방금 전에 데운 우유를 붓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휘핑기를 두어 번 흔들더니 우유 거품 위에 휘핑크림이 멋지게 또아리를 틀었다.
비닐장갑을 끼고 자바칩을 우르르 올리고 모카드리즐을 휘휘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게 아침에 보는 아르바이트생보다 훨씬 능숙했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가져온 그는 무심코 덮으려다 다이무스에게 물었다.
“뚜껑 씌워드릴까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아니, 됐습니다.”
컵 위에 담뿍 쌓인 모양새가 흡족해 눌러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 빨대를 꽂고 한모금 마시면 뜨끈하고 풍부한 단 맛에 피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돌아갈 생각으로 발을 옮기는데 바닥을 디뎌야 할 발이 미끄러운 바닥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몸이 기우뚱했다. 한 손에 뜨거운 음료를, 다른 한 손으론 지갑을 쥔 채라 그대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읏!”
“어어...! 풉!”
그리고 아파할 틈도 없이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다이무스는 창피함과 함께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빨리 일어나려는데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다시 허우적거리고 만 다이무스는 일 년치 구길 체면을 다 구긴 것 같은 쪽팔림에 차마 화 낼 생각도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려는 찰나 좀 전까지 웃던 청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다가왔다. 조금 전과 달리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친 덴 없으세요?”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컵이 흔들리는 바람에 커피가 흐르긴 했지만 위에 잔뜩 얹은 크림 덕에 아예 쏟아지진 않았다. 다행이 위쪽은 차가운 크림 덕에 그리 뜨겁지 않았지만 청년은 그걸 보고 주방에 들어가 걸려있던 행주를 집었다. 다이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려는 찰나 청년은 찬장을 열어 새 것으로 보이는 흰 행주에 물을 적시고 얼음을 꺼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몸을 일으킨 다이무스는 옆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고 손을 가볍게 털었다. 손에 묻은 휘핑크림에 미간을 좁히고 아직도 아픈 꼬리뼈를 매만졌다. 쪽팔림이 가시고 짜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떻게 컴플레인을 걸까 생각하는 사이 행주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온 청년은 대뜸 손을 잡더니 물수건으로 다이무스의 손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나대지마라.”
“아, 죄송합니다. 많이 안 다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바닥에 왁스칠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자기 때문에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놓고, 정신을 차렸는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청년을 보며 다이무스는 차가운 행주로 손을 마저 닦았다. 한 겨울에 얼음을 대고 있는 것도 우습고, 화상을 입은 것도 아니라 대충 손만 닦고 있으려니 청년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영수증 쪼가리에 빠르게 뭔가를 적어 건넸다.
“저기, 이거 제 전화번혼데 옷 세탁하시고 연락해주세요.”
그 말에 고개를 숙여 코트를 살피니 휘핑크림과 드리즐이며 커피 얼룩이 남아있어 다이무스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왁스칠을 해놓고 주의하라는 표지 하나 없이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졸던 탓에 생긴 일이 아닌가.
안 그래도 지친 탓에 빨리 가서 쉬고 싶던 다이무스였다. 평소 같았음 그저 이런 카페의 야간 알바를 측은히 여기고 됐다 했을 테지만 아까 넘어지는 걸 보고 웃은 것 때문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잠깐 앉아계시면 다시 해드릴게요.”
그나마 눈치는 있는지 테이블의 의자를 빼주고 급히 안쪽으로 들어간 청년은 톨 사이즈 컵에 다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워낙에도 듬뿍 얹어주던 휘핑과 자바칩이지만, 조금 전보다 더 잔뜩 얹어진 모습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번엔 직접 홀더를 끼우고 테이블까지 가져오는 청년의 발밑을 보던 다이무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명찰에 적힌 청년의 이름을 살폈다. Louis. 덜도 더도 없이 딱 다섯 글자만 쓰인 금빛 명찰에 혹시나 카페에서 쓰는 예명인가 싶어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뭔가.”
“아, 루이스입니다. 문자나 전화 주세요.”
“그러지.”
다이무스는 핸드폰에 전화번호와 이름을 저장하고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뒤 컵을 손에 들었다. 아예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손에 든 카페모카를 홀짝거렸다. 뜨끈하게 퍼지는 단 맛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스팀 밀크의 부드러움이며 진한 커피 향이 다른 카페들보다 나았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몰라도 아침 출근 시간대에 바쁜 나머지 급하게 내린 것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카페의 커피보다 맛있는, 그것도 완벽히 제 취향의 커피를 다른 곳에서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집에 비싼 커피머신을 들여다 놓기도 했지만 뭐가 문제인지 제가 내리는 커피는 맛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골목 앞에 세워둔 벤츠에 오르기 전에 아직 쌓여있는 눈에 신발을 좀 닦고 차에 올랐다. 목을 타고 넘어가 뱃속을 뜨끈하게 데우는 느낌에 만족스러운 나머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모차르트를 틀고, 난방을 튼 차에서 시트에 몸을 기대니 따스히 퍼지는 충족감이 기분 좋았다.
더 늘어지면 이대로 졸 것 같아 창문을 약간 연 뒤 커피를 홀더에 놓고 핸들을 잡았다. 밤공기는 차고, 방금 전까지 커피를 손에 들고 있던 손은 따뜻했다.
Quattro.
루이스는 손님을 보내고 비척비척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아까 빨아서 걸어둔 걸레를 들고 와 바닥에 엎질러진 커피를 닦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왁스칠 한 데다 뜨거운 물 부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과 왜 하필 이럴 때 졸아버려서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대충 크림과 커피를 다 닦고 마른 걸레를 가져다 한 번 더 닦은 뒤, 주의 표지판을 가져다 세웠다.
“하아....”
이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 갖다 놓는 게 뭐 그리 귀찮다고. 잠시 쉰다는 게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존 데다 제 실수로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버리다니 제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다.
마저 가게 안을 정리하고 그라인더를 살폈다. 얼마 남지 않은 원두를 마저 갈아 에스프레소를 내린 루이스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느긋하게 마시며 로스팅기에 예열버튼을 누르고 미리 따로 포장해둔 원두를 꺼냈다.
매일같이 그 날 쓸 원두를 로스팅하는 건 물론 귀찮은 일이지만, 루이스는 그래야 커피 맛이 제대로 난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일 좋은 건 핸드드립이지만 일일이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뭐. 이렇게 좁은 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손님이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는 것은 다 이런 수고로움에서 온다는 게 루이스의 신념이었다.
아무도 맛없는 커피를 들고 가게를 나가게 하지 않겠다는 그 다짐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젊은 사장 루이스가 처음 가게를 열면서 마음먹고 6년째 지켜오는 한 가지였다. 이젠 제법 단골도 생기고 입소문도 퍼져서 오전 오후 저녁 파트를 나눠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출도 안정되고, 모아둔 걸로 확장을 해도 될 정도였지만 루이스는 딱 이정도가 좋았다.
모든 자리 구석구석에 제 눈이 닿고, 자기가 하나하나 손을 볼 수 있는 작은 카페. 물론 요새 들어선 돈이 생기니 욕심이 나서 빈 벽에 책장도 놓고 책이며 이것저것 인테리어 소품을 들여놓고 싶기도 했다.
루이스는 걸레를 빨아 널어두고 예열이 완료된 로스팅기에 원두를 넣었다. 도로록 도로록 커피콩이 볶아지며 내는 고소한 향이 이윽고 카페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루이스는 허리에 맨 검은 앞치마의 매듭을 다시 여몄다.
날이 바뀌기도 전에 사고를 한 번 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어 졸음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황금연휴의 시작이라곤 하지만 밤샘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휴일을 반납하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루이스의 기다림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뭘 할까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는 노트북을 켜고 테이블에 앉았다. 인테리어 소품이라도 바꿔볼까 쇼핑몰에 들어간 루이스의 눈이 메인에 뜬 남성브랜드 런칭 이벤트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떡하니 걸린 디자인이 조금 전 실례를 저지르고 만 손님의 코트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흘긋 보고 로그인을 하려는데 그 아래 뜬 런칭 기념 세일 가격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헉소리를 냈다. 아니 물론 대기업들 본사가 주르륵 늘어선 곳이긴 하지만, 임원진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명품에 월급을 붓나? 아니면 집이 갑부라도 되는 건가?
떨리는 손으로 클릭해서 죽 스크롤바를 내렸다. 주머니의 장식단추며, 소매의 버클, 안감과 허리띠까지 보고 나니 그냥 비슷한 코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드라이 세탁이었고, 다시 봐도 충격적인 가격에 루이스는 마른 세수를 하며 과연 세탁비로 얼마가 깨질까 고민했다. 모카 드리즐에 휘핑크림, 거기에 뜨거운 라떼까지 하면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새해를 맞아 데스크탑을 장만하려던 계획은 접어야 할 성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핸드폰 기기 할부도 안 끝났는데. 루이스는 암담한 숫자계산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비싼 옷에 커피를 쏟은 데에 별 말도 안 한데다, 톨사이즈에 휘핑크림을 잔뜩 얹자 슬쩍 미간의 주름이 가시던 걸 떠올린 루이스는 그가 아예 옷값을 물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는데다 무슨 일만 생기면 자다가도 전화를 받고 불려나오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는 루이스였다. 주로 그런 상황에 루이스가 하는 건 진상 고객 처리인데, 사실 얼굴만 봐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싸늘해 보이긴 하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한숨을 쉬다가 문득 그가 제게 반말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분위기에 압도되는 바람에 반말을 하는 줄도 몰랐다. 당황스럽고 죄송한 나머지 눈치도 못 챈 거겠지.
게다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비싼 코트에, 그런 인상이며 태도를 봐선 엘리트 회사원이겠지 싶었다. 분명 일처리도 칼같이 해서 고속승진을 해왔을 거다. 그럼 돈도 많이 벌 텐데 이 정도 쯤은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던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잘못한 건 사실이니 옷값을 청구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멍청한 나, 바보같은 자식.
Sei.
컵을 들고 차에서 내린 다이무스는 바로 잠금 버튼을 누르고 지하 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 층을 눌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다이무스는 빈 컵과 차 키를 식탁 위에 놓고 넥타이를 풀었다. 옷을 벗다가 코트에 진 얼룩에 살짝 한숨을 쉬었다.
뭐, 세탁소에 맡기면 알아서 처리해주겠거니 했다. 어머니께서 계절마다 옷장을 채워주시기에 그 코트가 얼마나 하는지는 커녕 제 손으로 옷을 사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다이무스로선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일단은 마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집까지 일을 가져오지 않으려 했건만, 연말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의 서류를 떠올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었다. 차라리 샤워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었던 그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볍게 샤워를 하려 물을 틀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자니 아까 그 아르바이트 청년이 떠올랐다. 남자치곤 선이 가는 얼굴에 수더분하니 척 봐도 참한 학생같아 보였더랬다.
아까야 피곤하고 만사가 짜증나는 상태였던 데다 허우적거리며 넘어진 꼴을 보여서 그렇지, 정말로 세탁비를 청구할 심산은 아니었다. 애가 실수를 한 것 같지고 진지하게 화내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데다, 그 처음 잠깐 웃은 것만 빼면 아주 죄송해서 울상을 짓는 게 훤히 보인지라 더 뭐라 하기도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의 안목이니 고작 카페 알바 봉급 가지곤 세탁비만 해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이 제법 귀엽기도 했다. 제 동생이었다면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실컷 웃은 뒤 미안해하기는커녕 실컷 두고두고 놀려먹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르바이트라도 한다는 가정 하에.
“형! 치킨 사 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글이 문 너머로 외쳤다. 집에 왔을 땐 사람이 왔는 지 개가 왔는 지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이 꼭 이럴 때만 찾는다. 아주 지가 상전이지, 상전이야. 다이무스는 못 들은 척 무시하기로 하고 샴푸를 펌핑했다. 그것도 감정을 담아 꾹, 꾹.
나가면 또 치킨 시켜달라며 찡찡 생떼를 쓸 게 분명했다. 나이는 스물넷이나 먹어가지고, 아직도 하는 행동은 열일곱 질풍노도의 시기다. 다이무스가 회사에 취직하면서 출퇴근 시간이 왕복 세 시간이 넘자 아버지는 독립을 허락하셨다.
대학을 다니던 이글은 제대로 출석도 안 하고 늘 날을 넘겨서 돌아오던 주제에 학교랑 집이 가까워지면 나아질 거라며 냉큼 따라 들어와 방 하나를 차지했다. 막을 새도 없었다. 다이무스 생의 첫 독립의 자유는 그렇게 동생의 뒤치다꺼리가 됐다.
이글은 여전히 출석을 하지 않았고, 술에 취해 날이 지나 기어들어왔으며,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다음 학기에도 F를 받으면 쫓아내겠다는 말에 이글은 휴학계를 냈다. 정말이지, 그래놓고 빨래며 청소, 요리 하다못해 설거지 한 번도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헹궜다. 짜증으로 잠이 깨긴 했지만 그래도 찬물을 틀었다. 오싹하니 개운하게 드는 한기에 몸을 떨고 걸어둔 가운을 걸쳤다.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보며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젖은 머리를 털며 화장실을 나섰다. 샤워 한 번에 피로가 한결 가시는 기분이다.
머리를 털며 새 옷을 꺼내 침대 위에 던져놓고 젖은 머리를 마저 말렸다. 미리 꺼내둔 옷을 챙겨 입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물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끄러운 동생을 피해 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일 다시 출근하지 않기 위해,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연휴에는 좀 쉴 수 있게 일을 빨리 마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검은 뿔테 안경을 꺼내 쓰고 노트북의 전원을 넣었다. 긴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망했다. 다이무스는 떠오는 아침 해와 밝아오는 제 방을 보고 절망했다. 중간에 이글이 치킨을 사달라며 문을 두드리다 못해 부술 지경이 되는 바람에 한 마디 하려고 문을 열었던 게 화근이었다.
언제 코트 주머니에서 흐른 건지, 영수증에 적힌 전화번호를 가지고 이글이 누구한테 번호를 받은 거냐며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다이무스는 일을 잠시 놓아두고 차분히 이글에게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글은 도통 들어먹지를 않아서, ‘형은 인기 많아서 좋겠네!’라는 식으로 자꾸 시비를 걸며 당치도 않는 질문을 해댔다. 쉴 새 없이 나불거리던 그 입은 결국 다이무스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치킨을 시켜주고 나서야 닫혔다. 사실 그보단 치킨을 먹느라 바빴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지만.
치킨만 시켜주고 들어가서 마저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만 고소한 튀김 냄새에 끌려 같이 치킨을 먹었다. 이글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두 병을 꺼내왔고, 다이무스는 먹은 걸 정리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어젯밤에 한 거라곤 드렉슬러의 서류를 다시 만든 것 뿐이다. 암담했다. 이래서야 퇴근하고 집에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장 일요일까지 타라에게 직접 전해줘야 하는 일인데, 시차를 생각하면 이제 24시간도 안 남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세수부터 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는 대충 왁스로 넘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었던 코트를 걸치려던 다이무스는 코트에 얼룩이 졌다는 걸 깨닫고 다른 코트를 꺼내 입었다. 목도리를 대충 목에 감고, 식탁 위 테이크아웃 컵과 함께 놓아둔 차키를 가지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에 있으면 이글이 또 저랑 놀아 달라 보챌 테고, 밥도 해 먹여야 하니 그냥 회사에서 일 하는 편이 능률적으로, 심적으로 나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시계를 보니 7시 48분이다. 지금 출발하면 딱 8시 반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회사로 향했다.
Sette.
[ 정말 죄송해요...콜록, 콜록...! ]
"아냐, 괜찮아. 푹 쉬어."
[ 으으, 어제 애들이랑 놀아주다 그만... 콜록, 내일은 나을 거예요. ]
“난 괜찮으니까, 나을 때까지 쉬어. 어차피 오늘까지 하고 내일은 나도 가게 닫을 거니까. 목 많이 쓰지 말고, 몸 따뜻하게 하고 있어. 끊는다.”
안타까울 정도로 상한 토마스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착하고 싹싹한 토마스는 같이 일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딱히 같이 일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애였다.
어차피 아침에 나오는 나이오비는 주말에 안 나오고, 연휴가 코앞이니 조금 일찍 닫는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 사장은 루이스 자신이었으니 당장 문 닫고 집에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이다.
간밤을 돈걱정으로 꼬박 샌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계를 보니 8시 반이 넘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안 찾아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찍 접어도 될 것 같다가도, 어제 한 짓을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싶었다. 어차피 전기세고 뭐고 하면 그게 그거일 것 같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른 걸레를 가져다 바닥을 닦았다. 혹시 몰라서 신발도 닦았다. 혹시 그래도 미끄러울까봐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바닥을 뽀득뽀득 닦아보는데 문의 풍경이 또로록 울렸다.
“엑...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렸더니 어제 그 손님이다. 루이스는 당혹스러웠다. 어제 마지막 손님이 오늘 아침 첫 손님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왜 하필 이러고 있을 때 들이닥친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님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 같은 걸로 드릴까요?”
애써 웃으며 말을 걸자 매서운 인상의 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오늘은 한층 더 무섭다. 어제 자길 쏘아보던 것보다 더하다. 루이스는 냉큼 안쪽으로 가려다 아직 자기가 걸레를 들고 있단 걸 깨닫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걸레를 빨아서 널어두고, 항균 비누로 꼼꼼히 손을 닦고 나와 달디 단 카페모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같이 내놓으면 좋을 텐데, 쿠키는 오늘 토마스도 안 나오게 된 바람에 새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베이글과 식빵, 치즈와 햄이 냉장고에 들어있어 루이스는 자기 아침을 챙길 겸 크로크무슈를 만들 준비를 했다. 전기 팬에 햄과 빵을 올려두고, 계란을 달달달 풀어 파슬리 가루와 소금을 살짝 쳤다. 샌드위치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듣곤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없었다. 나쁘지 않다는 거지 맛있다는 건 아니니까.
앉아서 노트북 충전기를 연결한 손님을 흘긋 본 루이스는 미리 데워둔 머그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휘핑크림과 자바칩, 드리즐을 뿌리는 것으로 카페모카를 완성했다. 소반에 티슈를 깔고, 시나몬칩을 두 개 얹어서 자리로 가져가면서 루이스는 살짝 긴장했다.
“주문하신 카페모카 나왔습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의 눈은 노트북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바쁜가보다, 하고 돌아서서 안쪽 주방에 들어온 루이스는 팬의 전원을 켰다. 햄이 구워지는 냄새며 계란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무심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지금 카페에 음악을 안 틀어놨다는 걸 깨닫고 갑자기 확 부끄러워진 나머지 뒤집개를 들고 한숨을 쉬다가 크로크무슈를 태울 뻔 했다. 다행이 제 때 뒤집어 노릇노릇 먹음직한 크로크무슈 두 개를 대각선으로 잘랐다.
접시를 꺼내 반으로 자른 크로크무슈 두 개를 올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티슈로 감싸 그 옆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원래 메뉴가 아니라 별 다른 장식은 하지 않으려다 그래도 구색이나 갖추자 싶어 방울토마토 두 개와 양상추를 뜯어 한쪽에 놓았다.
더 고민하다간 크로크무슈가 식을까봐 여기까지 하고 한 손으로 접시 아래를 받쳐 손님의 자리로 갔다. 여전히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앞에서 루이스는 영업용 스마일을 띠우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아직 아침 안 드셨으면 드실래요?”
그제야 그의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그 회색 눈에 루이스가 잠시 움찔한 사이 살짝 한숨을 내쉰 남자가 안경을 벗고 노트북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루이스는 냉큼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와 함께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왠지 모를 열기에 뺨이 다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카페 안 난방이 너무 센가보다. 아니면 잠을 못 자서 내가 이상해졌거나.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제 몫의 크로크무슈를 집었다.
손이 기름에 묻는 게 뭐 대수이랴. 한쪽 귀퉁이를 베어물고 우물거리는데 괜찮았다. 그래, 이 정도면 뭐라 한 소리 듣지는 않겠지. 소금을 설탕으로 착각하지도 않았고 하나로 뭉치지 않게 계란물도 잘 풀었다.
실수한 거 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카운터 안쪽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남자 쪽을 바라보는데, 간단한 요깃거리 하나에도 나이프와 포크를 쓰는 게 꼭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는 폼이었다. 그래 저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눈이 그리로 향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마냥 불편했다. 답답한 나머지 빈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루이스는 손에 든 걸 그냥 입 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살짝 치켜뜬 무심한 회색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시려다가, 속이 답답해 그냥 찬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저쪽을 모른다. 마냥 기다리며 언제 세탁비를 청구할지 불안에 떠는 것 보다 연락을 할 수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게 걸렸던 거 아닐까!
루이스는 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바람에 무릎을 서랍에 찧어 악소리도 못 내고 몸을 수그린 채 무릎을 잡고 몸부림치다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 남자가 서있었다.
쪽팔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한심하지만 차마 내색은 안하려는 그 표정에 루이스는 우선 허리를 폈다. 그러자 남자는 접시를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피식 웃었다. 순간 부드러워진 눈매며 미미한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 루이스는 잠시 숨을 쉬는 걸 잊었다.
“저, 저기요! 이름이 뭐예요?”
그리곤 막힌 날숨을 내쉬는 동시에 말을 던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정신없이, 찰나의 정적에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다이무스. 다이무스 홀든.”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0) | 2015.12.24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0) | 2015.12.21 |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다이루이] Scarface. 01. (0) | 2015.12.01 |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The movie.
현대물
언제 또 이을지 모름.
시놉시스, 대본. 벨져는 파일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낮게 신음했다. 오디션도 보고, 수많은 포트폴리오를 봤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져는 박스 채로 쓰레기나 다름없는 포트폴리오 박스를 전부 내다버리고 싶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몽땅 던져버리면 좀 후련해질까. 낮게 한숨을 내쉬고, 기분을 전환할 겸 TV 전원을 켰다. 제레온의 영화를 볼 생각이었는데, 리모컨을 놓치면서 엉뚱한 채널이 나왔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리모컨을 줍는데, 화면으로 그만 눈이 돌아갔다.
그래, 운명과 같이.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벽을 채운 화면을 응시했다. 입에 문 담배를 떨어트렸다는 것도 음악이 끝나고, 뮤직비디오가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 뮤직비디오였구나. 서정적인 곡조 뒤를 채운 시끄러운 기타 소리에 벨져는 가차 없이 TV를 꺼버렸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이 소년처럼 울며 웃고 있었다.
벨져는 잠시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약간의 주저와 망설임 끝에,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벨져의 마음도 초조해졌다.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신호음이 멎었다.
[ 별일이네. 벨져 홀든이 먼저 연락을 다 하고. ]
“너, 어디냐.”
[ 나? 글쎄, 어디일 것 같아? ]
“장난 말고. 너 일 하나 해라.”
[ ...일? 배우가 그렇게 없어? ]
“닥치고 와. 대본 보낼 테니까 보고.”
일방적인 선언에 잘만 대답하던 루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무겁다. 벨져는 입가를 쓸었다. 아무렇지 않다.
[ 벨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지난 일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
“상관없다. 장담하지.”
[ ...알았어. 읽어보고 연락할게. 이 번호로 하면 되지? ]
통화는 그간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끝났다. 지난 일. 결코 감정이 개입되는 일은 없다. 이건 작품이고, 일이고, 역에 어울리는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다. 벨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지난 일. 육개월 동안 미친 사람처럼 연애하다가, 갈라선 그 시답잖은 과거. 벨져는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내렸다.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었다.
결코 끝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도 이미 오 년이 지났다. 언제나 꿈은 깨기 마련. 세상이 환희로 가득 찬 그 시간은, 지금에 와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아직도 그 때 그 번호를 유지하고 있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를 떠나서 멀어져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지워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고 충동적인 만남이었다. 아직 벨져가 작품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그는 벨져 대신 트로피를 가져갔다. 신인상 정도에 별 미련은 없지만, 연초에 데뷔해 이름을 올리던 벨져 대신 시상식 두 달 전 개봉한 영화로 상을 채갈 정도로 그의 실력은 뛰어났다. 뛰어나다. 벨져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루이스를 지금의 자리로 올려놓은 첫 작품. 그는 주연 축에도 끼지 못하는 배역을 맡았다. 포스터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을 팔아넘긴 스파이를 사랑한 남자 연기는 아직도 루이스라는 배우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차갑고 서늘한, 하지만 동시에 자상한 면을 갖춘 평범한 남자. 옆집에서, 거리에서 마주칠 것처럼 친근하게 다가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관객을 압도하고 몰아붙이는 그. 벨져는 당초 계획대로 제레온의 영화를 트는 대신 루이스의 첫 작품을 틀었다. 그 해 가장 잘 팔린 영화답게 블루레이 한정판 박스까지 나온 작품이었다.
세간에서 루이스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벨져 홀든이 배우를 그만뒀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정작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야 별 것도 아닌 녀석에게 트로피를 빼앗겼단 생각에 조금 과잉된 반응을 하긴 했지만 그 분함과 억울함은 '어디 네까짓 게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며 튼 영화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스크린 속에서 온전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어떤 경지. 손끝의 떨림부터 눈길 하나, 대사 하나까지. 흠을 잡자면 수도 없이 잡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화면 안에서 진실로 그녀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했다. 이런 방식도 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 캐릭터는 그냥, 이런 사람이라고. 이것을 재능이 아니면 뭐라 표현해야 할까.
평론에 짠 평론가 누구는 그냥 배역을 잘 받은 신인이라 평하기도 했지만 벨져는 알 수 있었다. 한 번 발을 들여 본 사람이기에 알 수 있다. 이 역이 아니어도 그는 소화해낼 것이다. 그의 연기와 감정은 눈사태와도 같다. 올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서서히 다가오지만, 이내 그 감정과 눈빛으로 사람을 옭아매고 압도해버린다.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어서, 눈을 돌리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그저 사로잡힌 채 그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
루이스는 영화의 시작에 나오지 않는다. 원래는 배역의 이름도 없어서, 그 캐릭터는 그대로 배우의 이름을 받아 루이스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벨져는 와인을 꺼냈다. 미학 없이 싸우고 터지는 영화에 와인은 어울리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를 보는 것이라면 와인이 빠질 수 없었다.
주인공 뒤에서, 루이스가 여자를 보며 미소 짓는다. 제길. 벨져는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았다. 저를 보며 저렇게 웃던 시절이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간지러워지는 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고, 조금 차가운 손을 뻗는다. 벨져는 TV를 꺼버렸다.
좋은 머리는 잊고 싶은 기억까지 고스란히 남기고 되감는다. 그의 포커스는 제게 향해 있지 않다. 한 때는 영원할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영화를 찍고, 너는 내 카메라의 중심에 있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호흡하며 같은 그림을 완성해가는 관계. 지금 앉아있는 소파에서 어설프고 풋풋한 낯간지러운 말들을 속삭이고, 키스하고, 몸을 섞었다.
벨져는 공들여 가꾼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게 과연 잘 한 짓일까. 그와의 관계는 흔히들 말하는 '프랑스 영화'같았다. 십 분 동안 사랑을 속삭이고, 십 분 동안 섹스하다가, 그 뒤로 줄창 싸우다 헤어지는. 벨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내보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다.
원하는 화면을 얻기 위해 그가 필요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없고, 그와의 관계는 이미 파국을 맞이했다. 벨져는 시나리오 작가인 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연 남자 배우 역에 루이스. 그도 들으면 바로 동의할 것이다. 애초에 릭은 사람 보는 눈이 너무 낮다. 사람이 너무 좋은 것도 있겠지만, 벨져는 자신의 화면 안에 아무나 들일 수 없었다. 벨져 홀든의 자존심은 소품 하나, 캐스팅 하나에도 빠짐없이 적용된다. 벨져의 까탈스러움은 단역 하나까지 직접 뽑기로 유명했다.
벨져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해버리고 욕실로 향했다. 루이스와 헤어지고, 벨져는 노선을 바꿨다. 원래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 되고 싶었다. 연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으로, 제레온 프리츠같은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언론의 입을 막아주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이번 제작 투자도 어찌나 말이 많았는지. 벨져는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기 앞에 섰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이미 벌어진 사이를 메꾸는 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다시 시작하는 데는 더 많은 용기와 감정이 필요하고, 그러기엔 지나온 시간과 벌어진 틈이 존재했다. 그러니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벨져는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이제 '루이스'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려 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한 그 순간부터 코끼리가 떠오른다고 하던가. 그도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누구인지도 모를 가수의 뮤직비디오에서 이별의 슬픔을 앓던 그를 떠올렸다. 화면 속 루이스는 제 옆에 있을 때처럼 품이 조금 남는 니트를 입고 있었다. 소파에 무릎을 모아 앉아 손등까지 내려온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우리가 헤어졌을 때, 그 때도 너는 울었을까. 이제와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0) | 2015.12.21 |
---|---|
[다이루이] (2) | 2015.12.09 |
[다이루이] Scarface. 01. (0) | 2015.12.01 |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Scarface. 01.
01
다이무스는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는다. 미리 받은 주소로 짐을 부쳐놓은 뒤라 늘 들고다니는 가방 외에 딱히 챙길 게 없었다. 오늘부터 연합 쪽에서 제공한 집에서 그와 단 둘이 생활해야 한다. 보안상의 문제로 잡역부도 들일 수 없으니 말 그대로 단 둘이. 딱히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집처럼 편할 순 없다.
리버포드에 위치한 이층집 앞에 차를 세웠다. 생각한 것보다 외관이 준수했다. 이탈리아풍의 이층집. 누구의 소유인지 감이 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찰칵,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다이무스를 맞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꽤 고급스러운 가구가 즐비했다. 연합은 마피아에 모태를 두고 있으니,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소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이무스는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제 짐을 확인하고 집 안을 둘러봤다. 일층에 넓은 거실, 서재, 작은 부엌과 식당, 이층에 있는 침실까지. 다른 곳은 원래 비워둔 건지 급히 치운 건지 가구 하나 없이 휑했다.
다이무스는 집을 둘러보고 텅 빈 벽난로에 장작을 던졌다. 바로 오겠다던 사람은 아직 소식이 없다. 먼저 불이나 피워둘 생각으로 난로 앞에 섰는데, 불씨를 던져 넣어도 불이 쉽게 오르지 않았다. 다이무스가 한참 마른 장작과 씨름하며 회사에 있는 그녀를 떠올릴 무렵, 문이 열렸다.
“...... 뭐……. 하십니까?”
“....... 불 피우는 중이었다만.”
“아.”
여전히 추워 보이는 차림의 그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옆으로 매는 가방을 소파에 대충 던진 그가 난로 앞에 다가와 안을 기웃거렸다.
“불 있으십니까?”
다이무스는 라이터를 내밀었다. 수십 번을 시도해도 붙지 않던 불이, 그가 왔다고 붙을 리가 없었다. 다이무스에게 이런 추위는 그리 견디기 힘든 것도 아니었지만 루이스는 방금 막 퇴원한 환자였다. 이대로라면 하루를 보내기도 전에 동사할 지도 모른다. 난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을 꺼내려는데 루이스가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루이스는 장작을 다시 쌓더니 대충 만 신문지에 불을 붙여 장작 속에 던졌다.
하얀 손과, 더 파리해진 것 같은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결정능력자라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고 해도 옷차림이 너무 얇다. 다이무스는 코트를 벗어 신문지를 던져 넣는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 것 치고 안색이 좋지 않군.”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벽난로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은 루이스가 다이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달라는 뜻인 줄 알고 그의 손을 잡아당기자 무슨 짓이냐는 듯 올려다본다. 다이무스는 그제야 제 손에 부지깽이를 말하는 것을 깨닫고 잡은 손을 놓았다. 부지깽이를 내밀자 루이스는 장작을 몇 번 들쑤시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좀 쌀쌀하네요. 보일러부터 틀고 오겠습니다.”
“침실은 이층이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짐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섰다. 침실은 하나뿐이다. 방금 확인하지 않았던가. 다이무스는 이게 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원망하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심지어 한 방에 투베드도 아니고, 성인 남성 둘이 굴러다녀도 될 정도로 큰 침대가 떡하니 놓여있을 뿐이다. 다이무스는 짐가방의 옷부터 정리했다. 세탁이나 다림질이야 세탁소에 맡긴다 해도, 청소며 요리를 비롯한 가사는 직접 해야 한다. 다이무스는 새삼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고 한탄했다. 아직 방의 공기가 데워지지 않아 다른 코트를 걸치고 넓은 침대에 얄궂게 자리한 베개 두 개를 노려봤다.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뭐라도 있습니까?”
“아니다.”
가방을 들고 온 루이스가 방 안을 휙 둘러보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먼저 옷장을 쓴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는 열려있는 옷장을 보고, 옆에 있는 서랍을 열어 옷가지를 정리해 넣었다. 생각한 대로 루이스는 같이 살기에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짐을 정리한 루이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이무스는 묵묵히 짐을 정리했다. 먼저 와서 정리를 시작했음에도 짐의 양 자체가 차이나다 보니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방 안은 많이 따뜻해져서 숨을 내쉬어도 하얀 김이 서리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내상이 심했다고 들었다만.”
“밖으로 안 보이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지친 기색이 농후했다. 다이무스는 조금 더 자라고 하려다가 쓸데없는 참견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컨디션 조절 정도는 알아서 할 것이다. 그보다 두 사람의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 먼저였다.
“연합에서 일은.”
“알아서 할 겁니다. 같이 다녀야하는 만큼 둘을 쓰는 임무를 주겠죠. 저보단 다이무스씨의 일정을 조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전 중으로 은행 업무를 볼 거다. 오후는 비워놓았고, 5시 이후엔 다시 은행 업무를 보고 7시 전으론 퇴근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그럼 그동안 서점에 있도록 하죠.”
셔츠를 개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봤다. 그는 눈을 맞추긴 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스물 네 시간, 동행하라는 말은 못 들었나?”
“그럼 장식장이라도 할까요.”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긴 싫단 소리다.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영웅에게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까. 그렇게 따지면 멀쩡한 집을 놔두고 업무도 제대로 못 하고 묶여있는 저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이무스는 한 번 참기로 했다. 첫단추부터 잘못 꿰고 싶지 않았다. 그 냉랭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열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았고, 다이무스는 그보다 더 심한 동생을 둘이나 가지고 있었다. 둘째 녀석에 비하면 이 정도야 까칠한 축에도 못 든다.
“나쁘지 않군.”
“당신에게, 나쁘지 않은 거겠죠.”
“내가 네 상황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제게 당신의 상황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이스.”
“미리 말씀드리죠. 뭔가 알아내려 하는 거라면, 공연히 힘 빼지 마십시오.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백제를 투여해도 답은 같을 거예요. 믿지 않겠지만.”
루이스는 자조했다. 다이무스는 잠시 제 안에 가라앉아있던 연민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본 적이 있던가. 다이무스가 아는 연합의 영웅은 이렇게 약한 남자가 아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남자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든 여자를 떠올렸다.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워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루이스는 낯설고, 또 대하기 어렵다. 다이무스는 한 발 물러났다.
“임무일 뿐이다.”
“……. 그러겠죠. 당신도…….”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제게 머물렀던 그의 붉은 눈이 달아나버렸다.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 다이무스 씨가 이렇게 묶여있는 것도 금방 끝날 겁니다.”
“무언가 알고 있나?”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곧 쓸모없다는 걸 깨닫게 되겠죠. 당신도, 그들도.”
루이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상처와 비밀. 어느 쪽에서 기인한 태도인지는 모르나 다이무스는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파헤친다고 속내를 터놓을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회사의 에이스가 아닌 다이무스 홀든은 루이스 개인을 존중했다. 그가 쌓아올린 공적과 짊어지고 있는 것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의 병실을 가득 채운 선물이 증명하듯 그는 사랑하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곳에 있는 건 헬리오스의 에이스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별개다. 다이무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침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 시야 안에 있어라.”
“.......”
루이스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향했다. 그걸 느끼면서도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잔뜩 겁먹은 토끼처럼 다시 도망갈 것 같아 마지막 남은 바지를 옷걸이에 걸어 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은행과 서점은 가까우니 사무실을 잠시 그리로 옮긴다고 생각하지.”
“.......”
“싫다면 계속 이 집 안에 있어야 한다만.”
“……. 좋습니다.”
“그래. 그럼 점심부터 먹도록 하지.”
빈 짐가방을 닫아 방 한 쪽에 세워놓고,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눈을 맞췄다. 도망가지 않고 저를 마주하는 붉은 눈에 잠시 빛을 잃었던 총기가 돌아왔다. 흡족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2) | 2015.12.09 |
---|---|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8 |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0) | 2015.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