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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30 [다이루이] Scarface. 00.
- 2015.11.28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5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 2015.11.23 [다이루이] 가이드
- 2015.11.01 [티엔루이] 선물
- 2015.10.28 [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 2015.10.25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 2015.10.25 [다이루이] 그 해 겨울
- 2015.10.24 [벨져루이] I'm Fine
- 2015.10.23 [벨져루이토마] 어느 짝사랑.
글
[다이루이] Scarface. 00.
00.
코를 찌르는 알싸한 냄새. 소독용 알콜과 세제 특유의 냄새가 나는 복도를 한 남자가 걸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긴 검은 병문안을 의심하게 했지만 어쨌거나 목적은 병문안이 맞았다. 검을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다이무스는 연합 쪽에서 전해 받은 정보를 다시 한 번 곱씹고 흰 문 앞에 섰다. 정중하고 간결하게 노크한 뒤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자 차분한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반겼다.
“예상대로군요. 당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연합의 영웅은 창가에 서있었다. 겨울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그는 당연히도 얇은 환자복 차림이었다. 다이무스는 문을 닫았다. 갈 곳을 잃고 가라앉은 바람에 펄럭이던 커튼이 멈췄다.
“아이스.”
다이무스는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다이무스를 향해 쓰게 웃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들이쳐, 역광이 졌다.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겨울 도나우 강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는 지쳐보였고, 그 기색을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트리비아 카리나가 떠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 함께 있었던 유일한 남자는 홀로 돌아왔다. 자연히 새 공간과 정보에 혈안이 되어있던 이들의 관심은 그에게 쏠렸다. 자백제라도 투여해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지천에 널렸다.
연합에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곤 하지만 그는 연합의 영웅이었다. 새 공간, 그로부터 파생될 막대한 힘. 그 유일한 목격자. 세계는 안타리우스의 재림과 더불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능력자단체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고, 새로운 공간과 힘을 연합이 독점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언제 이 경쟁에서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결국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회사에서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결정의 루이스는 24시간, 회사 측 인물과 동행할 것. 연합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정보의 우위를 점한 건 그들이나 물자를 가진 건 회사다. 그것은 2차 능력자 전쟁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루이스가 안타리우스로 추정되는 괴인들에게 습격 받아 혼수상태에 빠진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연합에선 루이스가 정보를 털어놓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회사에서도 그가 순순히 협조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보호라는 명목 아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을 뿐이었다.
연합에서는 그 괴한들 역시 회사의 소행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회사는 전면 부인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소식, 그러니까 기어이 안타리우스의 의식이 성공했다는 정보가 이글을 통해 들어오면서 일주일간 이어진 탁상공론이 끝을 맺었다.
동생들의 소식을 적대세력을 통해 전해 듣는 기분이란. 다이무스는 통탄했다. 기어이 녀석들은 제멋대로 뛰쳐나가 일을 벌였다. 안전이라곤 보장되지 않는 곳에 몸을 던지고 불나방이라도 되려는 것인지. 거기에 아메리카 대륙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소식까지 더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합도 회사도 더는 무의미한 소모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빠른 동맹을 맺고, 회사와 연합은 협력을 약속했다. 회사가 부랴부랴 내놓은 타협안에 연합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아무렴 연합에 경호인원 하나 없겠냐는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회의 끝에 그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건 다이무스였다.
안타리우스의 습격에 대응할 수 있고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며 배신하지 않는 믿을만한 사람. 거기에 그가 숨기고 있는 것들을 알아내고 감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게 윗선의 결정이었다. 이런 일에 내보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있었고 타라는 빈말로도 그와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녀가 이성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아무렴 동성이라도 화장실이나 욕실까지 들여다보는 건 아니지만 성별이 다르면 여러모로 제약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다이무스는 병실 한편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루이스의 병실엔 꽃이며 간식거리며 과일 같은 선물이 가득했다. 베개 옆에는 사랑스러운 곰인형까지 있다. 연합에서 그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이 병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결정의 루이스는 명실공히 연합의 영웅이다.
그래도 예전엔 한 마디씩 말을 붙였던 것 같은데.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자리에 앉아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서류와 안경을 꺼냈다. 임무는 내일부터지만 은행일까지 쉴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가 이글 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루이스는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너무나 당연해서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처음 건넨 말이 이 상황에 대해 느끼는 전부라는 듯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바깥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불편해하면 나가면 그만이고 말을 걸면 그에 맞는 답을 하면 그뿐이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상태를 보러 온 것 뿐이니.
기어이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나서야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면 어느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다이무스는 안경을 벗으며 말을 꺼냈다.
“내일이 퇴원이라 들었다만.”
“우연이군요. 저도 내일부터라고 들었는데. 바로 갈 겁니다. 챙길 짐도 별로 없고.”
좋게 봐줘도 우호적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말투에 눈에 힘을 줘도 루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이 흐르도록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내일 뵙죠.”
완곡하지만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다이무스는 서류를 챙기고 배웅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내의 등에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살펴 가십시오.”
다이무스는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돌아섰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한동안 같이 살게 될 텐데, 그동안 부딪히지 않으려면 이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가 서로에게 훨씬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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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Exorcismus
벨져루이라기 보다는 벨져+루이에 가까움
신부 루이스와 헌터 벨져au
※ 라이샌더에게 악령 씌임 주의 ※
명문 홀든.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가문은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은행을 설립, 현대에 이르러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가문 안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가문의 비밀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 시대가 바뀌고, 세계는 이성과 지성, 과학과 기술에 지배되었지만 빛이 밝는다고 어둠이 사라지지는 않는 법.
예로부터 퇴마를 행하며 그 대가로 막대한 부와 명예, 그리고 때때로 세상을 움직일 정보를 거머쥔 이들이 바로 홀든의 부를 만든 기반이었다. 타고난 신체능력과 항마력. 가문은 엄격한 훈련과 시험을 통해 헌터를 선발했고, 최고의 헌터가 가문을 이었다. 적통과 서얼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선발되는 헌터들은 홀든의 자랑이요, 가문을 짊어지는 기둥이었으니 그 명맥은 과학의 빛이 밝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끊기지 않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그 대를 잇는 이가 하나.
“뭐야, 작은형. 일?”
“그래.”
“흐응. 잘 다녀와. 올때 기념품이랑 쭉빵한 미녀 잊지 말고.”
“하아, 할일 없이 빈둥거릴 거면 너도 따라나서는 게 어떠냐, 이글.”
“응? 아아 귀찮아. 작은형이나 다녀오라구.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
“미국으로 간다. 꽤 성가신 녀석이라는 것 같더군.”
“뭐, 그냥 사령정도면 작은형이 가지도 않겠지.”
소파에 드러누워 발끝을 까딱이던 이글이 고개를 돌렸다. 은으로 만든 탄환과, 일반인은 들 수도 없는 검을 챙기는 형의 등을 보며 고양이처럼 샐쭉하게 웃으며 물었다.
“도와줄까?”
“네 도움 따위 필요 없다.”
이글은 기어코 자존심을 우선하는 작은형의 등을 보며 키득거렸다. 벨져가 받은 임무, 이글도 안 본 건 아니다.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또 얼마나 힘든지도 안다. 그럼에도 손을 빌려주지 않는 건 그만큼 벨져의 실력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도와준대도 도움을 받을 사람도 아니고, 팽팽 부려먹기만 하겠지. 이글은 한 짐을 챙겨 나가는 벨져에게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재빠르게 귀찮고 성가신 일에서 발을 뺐다.
비행기로 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넓은 아메리카 대륙. 거기서 또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그걸로 모자라 차로 몇 시간을 걸려 달려온 스산한 마을. 벨져는 렌트한 벤츠를 몰며 마을로 들어섰다. 들어설 때부터 버려져 황폐화된 마을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에 벨져는 혀를 찼다. 제대로 된 식사와 잠자리를 위해선 또 몇 시간씩 달려 옆 마을로 가야한다는 게 귀찮고 성가셨다. 이래서 미국은.
벨져는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보수와, 이 일을 의뢰한 사람만 아니었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정도로 추레한 곳이었다.
길게 숨을 내쉬고, 벨져는 차를 멈췄다. 그나마 바깥은 멀쩡해보이는 집에 들어서기 전 장갑을 끼고 허리춤에 은탄을 채운 권총을 찼다.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뿌옇게 먼지가 날아올랐다. 안에서 널빤지를 대어 못질을 해놓은 덕에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틈새로 새는 빛에 떠오른 먼지들이 떠다니고, 벨져는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충분히 경계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낡은 마루에 무언가가 끌리고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벨져는 허리에서 총을 꺼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먼지가 자욱한 바닥에서 벨져가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떠올랐다. 무언가 있다. 확신한 벨져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벽 너머로 돌아섰다.
창에서 새는 한 줄기 빛이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은 남자를 비췄다. 의자에 앉아 무릎 위 성경 위에 양손을 올리고 눈을 감은 채 햇빛을 받고있는 남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푸른빛이 섞인 잿빛 머리카락에 햇빛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스르르, 눈을 뜨는 그 모습이 슬로우비디오를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눈동자. 남자가 눈을 깜박였다. 로만칼라. 벨져는 뭐라도 훔쳐본 것 같은 기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신부가 있다면 제대로 온 게 맞다.
“벨져 홀든이다.”
“홀든? 아아.”
신부는 일어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놀라거나 반길 텐데 맹한 건지, 예의가 없는 건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는 신부에게, 벨져는 초면부터 빈정이 상했다. 멀끔하고 곱상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이스. 루이스 안젤로입니다.”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다 위화감을 느끼고 멈춰섰다.
“안젤로. 라고?”
움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루이스는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지 않는 답에 벨져는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렇지.
“안젤라 신부님?”
“...예. 형제님.”
“하느님의 종이 이름을 속여서야 되겠습니까?”
“아직 억양이 익숙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루이스 안젤라. 영국인인데도 후원자는 미국인이고, 종파는 성공회, 소속은 로마 가톨릭. 누가 고아 아니랄까봐 섞이기도 참 징하게 많이 섞였다. 벨져는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의자를 그늘로 끌어다 앉았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자 입이 심심해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여도 신부는 그의 몸만한 트렁크를 열어 그 안을 볼 뿐 말이 없었다.
“상태는?”
“안 좋습니다.”
“이쪽에선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빠르고, 쉽게.”
“당신이 생각하는 악령이나 생명체와는 다릅니다.”
“신부님이 여기 먼저 와있었던 걸로 아는데.”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둑한 곳에서 저를 향하는 붉은 눈동자가 얼음처럼 시렸다.
“궁금하면 네가 가서 봐.”
시니컬하게 툭, 내던지듯 한 반말에 벨져는 피식 웃었다.
“네가 무능한 게 아니고?”
“그럼 그 잘난 은탄으로 쏴죽이시던가. 아니면 그 잘난 검을 드시던가.”
“너...!”
건성으로 홀든을 들먹이는 것에 울컥해 그를 노려보자 루이스가 트렁크를 쾅 닫았다.
“지금까지 세 명의 헌터가 실패하고 다섯이 죽었습니다. 그 오만, 내려놓고 가시죠.”
벨져는 단호한 말에 미간을 찌푸릴 뿐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실패란 해본 적이 없는 벨져였다. 설령 저 안에 있는 게 진짜 악마래도 벨져 홀든에겐 실패가 있을 수 없었다. 최전방, 거친 싸움을 통해 익힌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견고한 자아. 그야말로 퇴마사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벨져였다. 가문 안에서도, 그 잘난 형이나 동생마저도 벨져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잘즈부르크 축제를 마치고 돌아오진 못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심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벨져는 코웃음쳤다.
“이래서 신부들이란.”
제령과 구마, 엑소시즘이 전부인 신부다. 그들과 육탄전으로 싸울 일도 없고 신의 가호를 빌 뿐, 거친 일이라 해봐야 수도회에서 하는 노동뿐인 이들이니 결국은 벨져가 지켜줘야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벨져 역시 태어나면서 세례를 받고 악귀와 괴생명체들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문을 읊지만 그들의 방식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온건하다. 벨져는 몇 달, 몇 년이 걸리는 '치료'가 너무 안이하다 생각했다.
그동안 고통받는 구마자도,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엑소시즘을 행하는 신부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힘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가. 벨져는 제게 깃든 힘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단번에 악령을 베어 그들이 있어야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힘. 더러는 사람과 함께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냐며 질책하지만 죽음 뒤를 알 수 없는 인간에게 알 게 무엇인가. 한 사람으로 여럿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든 재난과 참사를 막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의가 아닌가.
벨져는 그들과 자신의 정의와 방법이 다를 뿐이라 여겼다.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지만, 딱히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빛나는 이성과 지성으로. 벨져가 담뱃불을 대충 바닥에 비벼 끄는데 이층에서 다른 사제 하나와 남자 간호사 하나가 내려왔다.
“신부님! 아, 저기....”
“벨져 홀든이다.”
“아, 루이스 신부님 부제로 온 토마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흐응.”
벨져는 싹싹한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계단을 오르는 루이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성호를 그으며 계단을 오르는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워, 벨져는 얼마나 심각한지 직접 보기 위해 그를 따랐다. 어두침침하고 폐가같은 일층과 달리, 이층은 꽤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둔중한 철문이었다. 누가 봐도 거기만 새로 만든 티가 나는 이질감에 벨져는 팔짱을 꼈다. 소금 포대와 십자가, 성모화가 의료기구들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루이스는 문고리를 잡고 다시 한 번 성호를 그은 뒤 벨져를 흘긋 돌아봤다.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썩은내에 벨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온통 새하얀 방에, 고정된 침대 위에 누워있던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벨져는 금을 그어놓은 소금 뒤에 섰다. 잡아야 하는 대상에게 동정심이나 연민을 품는 건 금물. 쓸 데 없이 휩쓸리는 건 사양이었다.
“신부님!”
“안녕, 라이샌더.”
“오늘도 와주셨군요! 정말 기뻐요!”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상한 미소를 머금은 루이스가 소년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성자같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소년은 얼굴 앞에 성호를 그으며 작게 읊조리는 루이스에게 맞춰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않았다면 아픈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신부님, 정말 좋아요. 신부님한테선 좋은 향기가 나요.”
루이스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소년이 그의 손을 잡아 제 뺨에 부볐다. 이 썩은내가 나는 방 안에서 대체 무슨 말인지. 벨져는 콜록거리며 소년이 하고싶은 대로 두는 루이스를 지켜봤다.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는 아까 본 차가운 사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구나. 몸은 좀 어떠니?”
“헤헤, 조금 힘들긴 한데 괜찮아요. 여전히 목소리가 들리지만....”
손에 뺨을 부비던 소년이 손을 놓고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곤 울상을 지으며 루이스를 올려다보는데, 정말 인형같이 사랑스러웠다.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연출. 마음을 가지고 놀며 인간을 희롱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주특기다. 벨져는 권총 위에 손을 올렸다.
“제가 또 신부님을 아프게 했나요? 죄송해요....”
“괜찮단다. 이렇게 다시 왔잖니.”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네? 신부님, 제발요.”
“나도, 주님도 너를 결코 버리지 않는단다.”
아이를 어르며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시종일관 미소로 아이를 대하는 게 아니꼬웠지만 끼어들 수는 없었다. 벨져는 손을 올려 팔짱을 끼고 등을 벽에 기댔다. 루이스는 일어나 벨져에게 문을 닫으라 눈짓했다. 방금 만난 주제에 제게 명령하는 게 아니꼬워 벨져는 발로 세게 문을 찼다.
“신부님. 가지 마세요. 신부님, 신부님!”
벨져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얼핏 봐선 피해망상과 편집증이 뒤섞인 걸로밖에 안 보이는 아이다. 이 썩은내만 아니었다면 그냥 정신과 의사에게 보이라고 하고 돌아나갔을 터였다. 루이스가 거울을 들고 성호를 그어도 벨져는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게, 홀든이 헌터인 이유는 그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혀, 저 신부가 거슬리는 것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벨져는 빨리 이 악취나는 방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말하라.”
“신부님. 왜 그러세요.”
“나는 주님의 종일지니, 더이상 기만하려 들지 마라.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아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처럼 울상을 짓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흐후후.”
오싹하게 올라오는 싸한 감각.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루이스도, 소년도 움직이지 않는다.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 속에 벨져는 마른 침을 삼켰다.
“키킥. 알고 싶어?”
바뀐 목소리. 소년은 기이한 웃음을 만면에 띠우고 루이스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의심할 것도 없다. 벨져는 총을 빼들었다.
“흐우. 하아. 한 번, 딱 한 번이면 돼. 한 번만 대줘. 그럼 여기서 나가줄게. 응? 이리와봐. 응? 오라고! 이 더러운 년! 악마에게 뒷구멍을 판 창녀!”
루이스는 아랑곳않고 소년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다만 늘상 보던 구마의식과 다른 점은, 구마자가 그를 쫓아내려는 신부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백이면 백 몸부림치고 거부하며 해치려드는데, 이번은 달랐다. 손도 발도 자유로운 소년은 황홀하다는 듯이 코를 벌름거리며 신부의 옷자락을 쥔다. 목을 조르지도, 그를 해치려들지도 않는다. 구마의식 중에 신부에게 매달리는 구마자.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벨져는 가만히 소금 선 안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주시했다. 그 사이 루이스의 기도가 이어지고, 그를 탐할 것처럼 굴던 소년이 루이스쪽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벨져를 감싸고 돌던 감각이 멎었다. 순간 다리가 풀릴 뻔 했던 벨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역겨운 냄새가 공기와 함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벨져는 아이의 몸을 눕히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주는 루이스를 지켜봤다. 아무렴 신부를 두고 헌터가 먼저 나갈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는 아이의 손발을 다 닦아주고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눈을 감고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는 그를 방해할 수는 없어서, 벨져는 잠자코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루이스가 기도를 마치고, 소년의 손을 배 위에 포개주었다. 함께 방을 나온 벨져는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확인했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군.”
“...벨 겁니까?”
한참만에 돌아온 목소리는 곧장 핵심에 꽂혔다. 동정과 자비는 그가 신에게 빌어야 할 것들이고 벨져의 일은 그들을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때문에 벨져가 돌려줄 답은 하나였고, 망설임따윈 없었다. 그런 감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난 의뢰를 받았어.”
“아직 성인도 안 된 아이입니다.”
“내가 알 반가? 신부?”
벨져는 일부러 그를 도발했다. 소년을 대할 때 풀어졌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그는 저를 책망하고 있었다.
“...... 당신의 일은 피를 부르죠.”
“너는 아닌가?”
“구마의식이 성공했을 때 구마자의 몸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끊은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턱을 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깔보는 거, 좀 적당히 하지 그래?”
“....하!”
마냥 순한, 전형적인 신부인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성격이 있다. 벨져는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신의 종이 이래도 되나?”
“못 할 건 또 뭔데.”
받아치는 게 보통이 아니다. 웬만해선 다른 헌터들도 아무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벨져다. 그런 제게 이 정도로 직설적인 반응은 신선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이번 일은 지루하진 않을 것 같다.
“씨발 좆같아서 진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웃어넘겼을 텐데. 벨져는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너...!”
“아, 잠깐 상태만 보고오신다더니. 괜찮으세요?”
바로 붙잡아 따지려했는데, 방금 전까지 꼿꼿하게 서있던 사람이 머리를 짚으며 휘청였다. 부제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벨져는 그 둘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일만 하면 그만. 신경 쓸 게 아니다. 그저 잠깐의 변덕으로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다. 벨져는 사제들을 뒤로 했다. 일단은 자료가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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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명왕아들 루이스au
Good evening, sir.에서 이어집니당
루이스 밀러의 경호 첫 날. 다이무스는 일찌감치 은행일을 마치고 명왕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를 다시 만난다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묘한 열기가 손끝을 감싸고돌았다. 그리고 그 긴장은 루이스의 방 앞까지 이어져,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는 단순한 행동조차 망설였다.
“어...?”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기억 속의 그 날 처럼 말간 얼굴의 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본다.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기 위해 올렸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가 놀란 토끼를 연상시켰다.
“오늘부터 경호를 맡은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아, 오늘부터였구나. 잘 부탁드려요.”
루이스는 문을 열고 나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다이무스는 목을 매만졌다. 은연중에 봄철에 새순을 틔운 나뭇가지같이 곧고 하얘서 잘 만든 도자기 인형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굳은데다 차가웠다. 차가운 건 그 능력 때문이겠지만 손끝에서 간질거리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뭇 레이디들의 손을 잡으면서도 무덤덤했던 다이무스에겐 낯선 경험이었으나 다이무스는 그마저도 목 안쪽으로 삼켜버렸다.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바쁜 분의 시간을 뺏는 거 아닌가 싶네요.”
“괜찮습니다.”
윌라드는 루이스가 콕 집어 자신을 지목했다고 했다.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한다 해서 누군가 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루이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윌라드 크루그먼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진심이라 없는 말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런데 왜 모른 척 하는가. 다이무스는 들어오라는 권유에 루이스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명왕의 집다운 인테리어지만 그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바깥보다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다이무스가 잘 관리된 방을 둘러보며 습관처럼 사각을 찾는 사이 루이스가 창문을 열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을 겁니다. 대외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앨리셔를 마중가거나 가끔 산책하는 갓 뿐이니까.”
“그래도 제 일입니다.”
“그럼 좀 쉬어간다 생각하세요.”
루이스는 창을 등지고 미소 지었다. 햇살이 물에 닿아 부서지며 오색 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듯이.
다이무스는 집어삼켰던 숨을 몰래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자리를 권하며 침대에 앉았다. 그의 집이고, 방이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다이무스는 침대에 있는 루이스가 신경 쓰였다. 이글이나 벨져가 그랬다면 눈길을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텐데. 창문을 열었음에도 방안이 더웠다. 방주인은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초면이나 다름없는 타인의 방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가 신문을 펼쳐들었다. 다이무스는 집에서 보려고 챙겨온 서류를 꺼냈다.
코끝에 도는 향기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잠시 존재를 잊었던 루이스가 양 손에 잔을 들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보기 시작한 서류였건만, 보다 보니 그만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집중해버렸다. 다이무스는 펼쳐놓은 서류를 한 데 모았다.
“차랑 커피 어느 쪽이 좋을지 몰라서.”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방해될 것 같아서요. 차? 커피?”
“그럼 커피를.”
루이스는 다이무스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남은 잔에 담긴 홍차는 곧장 그의 입으로 향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기왕 쉬는 김에 체스 하실래요?”
별로 어려운 요구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빛내며 둥근 탁자 위에 체스 판을 가져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별로 표정이 변한 것도 아니지만 신이 난 게 빤히 보이는 그가 소년같이 귀여웠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커피를 마시며 판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건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졸업했지만, 고작 두 살 어린 사내는 제 혈육들보다 훨씬 더 귀여운 동생 같았다.
이런 동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을 텐데. 무심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유년기를 상상하던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걱정하던 앨리셔를 떠올렸다. 둘은 피가 이어져있지 않아도 좋은 남매임에 틀림없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한 때 잠이 들기 전 눈을 감고 바라던 '귀여운 동생'에 대한 환상과 이상을 전부 모아놓은 사람 같았다.
다이무스는 기꺼이 루이스가 양보한 흰 말을 잡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처음에 봐준답시고 악수를 둔 게 아까워질 정도로 어렵다. 많이 고민하고 두는 것도 아닌데 루이스의 수는 거침이 없었다. 이기긴 힘들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수를 되짚으며 엷은 미소가 걷힌 루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예리한 눈매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눈을 사로잡는다. 예쁘게 웃는 얼굴보다, 오히려 이 쪽이 진짜가 아닐까.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던 다이무스는 비숍을 움직였다. 아니, 실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악수를 둔 다이무스는 낮게 신음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무 봐주시는데요.”
“그만.”
“벌써요?”
다이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봐줬다 해도 진 건 진 거다. 루이스가 슬쩍 웃고는 말을 돌렸다. 이겼는데도 썩 즐거워보이지 않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뭔가 굉장히 실망시킨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이무스는 제가 불편해한다고 오해를 하나 싶어 탁자 쪽으로 몸을 숙였다.
“한 판 더 두겠나?”
“봐주기 없이?”
“그래.”
“좋아요.”
또 얼마쯤 말을 움직이며 수를 주고받았을까, 마침내 루이스의 흑색 킹을 잡은 다이무스는 가볍게 체크메이트 선언을 했다. 순순히 항복한 루이스는 오히려 아까보다 후련해보였다. 훨씬 나아진 얼굴에 덩달아 기분이 나아진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말을 정리하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얇게 눈을 휘며 웃었다. 오후의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순간 숨을 멈췄던 다이무스는 한 박자 늦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습만큼이나 위험한 미소다. 다이무스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를 바로 볼 수가 없다. 잠시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다이무스의 눈은 장식장 위 시계에 멈췄다. 고작 두 판을 두었을 뿐인데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걷었던 소매를 내려 소매 단추를 잠갔다. 그 사이 체스 판을 다 정리한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다이무스는 슬쩍 몸을 돌렸다. 갈고닦은 몸이 부끄럽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그를 흘긋 돌아보며 눈치를 주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아, 시간이. 슬슬 나가볼까요.”
외출인가.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둘이라 그다지 준비할 것도 없다는 게 그나마 기꺼웠다. 재킷을 집어 들고 모자를 쓰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루이스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따라 뒷자리에 앉아야 할지, 기사 옆 조수석에 앉아야할지 망설였다.
“뭐해요?”
“아닙니다.”
문을 열고 옆자리를 비운 채 기다리는 루이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문을 닫았다. 바로 출발하는 차는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리고, 루이스는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밖을 바라봤다. 멍하니 정면을 보던 다이무스는 작은 콧소리에 옆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매끈한 턱선과 옆얼굴이 지난 밤 기차에서 본 것과는 또 달랐다.
루이스의 옆얼굴을 보던 다이무스는 너무 빤히 쳐다보는 건 신사로서 할 행동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다이무스는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말이 많은 것도, 사교성이 좋은 것도 아니다. 다이무스 홀든은 오히려 너무 말이 없어서 답답하단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겐 말을 붙이고 싶다. 침묵이 어색한 것도, 그가 불편하게 구는 것도 아니지만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대화가 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한참 망설이다 백미러로 루이스를 보곤 운을 뗐다.
“어디로 가십니까.”
루이스가 차에 탄 뒤 처음으로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돌렸다. 다이무스에게 향한 붉은 눈동자가 잠시 그대로 멈춰 있다가 슬며시 풀렸다.
“앨리셔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라서요.”
“경호원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왜 굳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셔는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공성전에 투입되는 사이퍼다. 그녀보다 열 살이나 많은 루이스보다 강한 게 당연하다. 불한당을 만났을 때 오히려 불한당의 신변을 걱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할까봐 나름 돌려 말한다고 한 건데, 루이스는 단번에 뜻을 파악했다. 머리가 너무 좋아도 탈이다. 혹시 열등감을 자극한 걸까.
“능력이 보잘 것 없어도, 오빠는 여동생이 걱정되는 법이거든요.”
차분한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해서, 열등감이나 질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나마 마음을 졸인 게 민망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침묵을 가르는 목소리에 눈을 맞추자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말 놓으셔도 돼요. 아까처럼.”
말을 놓은 적이 있었나. 다이무스는 기억을 뒤졌다. 오늘이 정식으로 경호를 맡은 첫날이고, 전투가 아니라지만 이 역시 엄연히 임무다. 하물며 경호 대상에게 하대를 하다니. 다이무스의 머리가 빠르게 기억을 되짚는 사이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작게 웃었다.
“왜, 체스할 때요.”
“.......”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만 낭패의 한숨을 지었다.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 편이 편하고.”
루이스가 말을 덧붙이며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차가 멈추고, 다이무스에게 싱긋 웃은 루이스가 차에서 내렸다.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예상 외로 루이스 밀러 경호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임무는 임무. 그것도 굉장한 중책이다. 다이무스는 차에서 내려 루이스의 뒤에 섰다. 앨리셔가 다니는 하교 정문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다.
“루이스라고 불러도 돼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앨리셔의 모습을 찾으며 하는 말엔 두 번이 없다. 다이무스는 정답을 말하고도 석연치 않아 루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불만을 가득 안고 침묵했다. 이글의 변덕이 옮기라도 한 걸까. 거절한 건 자신인데도, 기분이 상했다.
“아, 오빠!”
“안녕, 앨리셔. 잘 지냈어?”
“아침에 인사하고 얼마나 지났다구요. 아, 다이무스씨도 안녕하셨나요.”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한 남매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잠시 멈춰있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움직여 인사했다. 앨리셔는 두말할 것도 없고,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앨리셔의 가방을 대신 든 루이스는 누가 봐도 한 번쯤 돌아볼만한 남자라 지나가던 학생들의 발길이 멈췄다. 그냥 같이 서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는 남매라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다. 다이무스는 더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차문을 열었다.
“타시죠.”
“자, 아가씨 먼저.”
“감사합니다.”
뒷자리에 두 사람이 타고, 문을 닫은 다이무스는 자연스레 남은 조수석에 탔다. 선택지가 없었던 것 뿐이지만 왠지 섭섭했다. 두 사람은 정답게 떠들고, 다이무스는 잠자코 앞을 보며 두 사람의 둘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학교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내놓는 앨리셔와, 그녀에게 맞장구치며 귀기울여주는 루이스는 그야말로 자상한 오빠였다.
“우왓!”
“오빠!”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명왕의 자녀들이 탄 차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 일. 다이무스는 두 사람이 무사한 걸 먼저 확인하고 검을 쥔 채 내렸다. 꾸물거리는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였습니다.”
“오빠, 괜찮아요?”
“응. 너무 그렇게 보호해주지 않아도 돼.”
“아, 죄송해요.”
루이스는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앨리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갈등이 격화된 능력자전쟁을 고스란히 겪은 세대니 무리도 아니었다. 지난 몇 년도 대학에 갔다고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피신해있었다는 게 명왕의 친아들에 대해 범람하는 소문 중 가장 유력한 설이었다.
딱히 소문을 믿는 건 아니지만, 다이무스 궁금했다. 이 데운 우유같이 말간 남자의 과거가, 베일에 싸인 그를 알고 싶다는 욕구가 차올랐다. 더, 알고 싶다. 다이무스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그러쥐었다. 아침에 혼자 차를 타고 올 때 느꼈던 묘한 열기가 여전히 손끝에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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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가이드
센티넬버스
다이무스가 센티넬 루이스가 가이드
곤란하다. 그것도 매우. 다이무스는 검을 바투 쥐며 몰려오는 오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센티넬의 신체능력과 발달된 오감은 전투에 유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다이무스는 낮게 신음했다. 공성중에 능력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날뛰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지척에서 들리듯 들리는 발소리와 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숨소리, 멀리서 느껴지는 열기와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매캐한 탄약 냄새같은 것이 다이무스를 괴롭혔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예민해진 감각에 혈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껴지고,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이 구역질이 났지만 그 감각을 차단할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붉은 위험신호를 울리는 걸 알면서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움직일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푸른 얼음결정. 분명 이 각도라면 그의 얼음에 갇히게 되리라.
다이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등을 돌려 피하기엔 늦었다. 피한다 해도 지금은 가다가 등을 보이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오기 전에 친다. 다이무스는 검을 뽑았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쓰러질 수야 없는 노릇. 오히려 한 번 리스폰한다면 이 날카로운 오감도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부, 얼어버려!]
순간 덮치는 냉기와 함께 몸을 지배하던 감각이 사라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채 제게 직격하는 얼음 산탄총을 맞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후방에 코인을 양보하느라 장비를 많이 장착하지 않았는지, 모든 스킬을 쏟아 부었음에도 다이무스에게 걸린 빙결 효과가 가셔도 체력이 남았다. 다이무스는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검을 들었다. 낭패라는 걸 알면서도 손에 결정검을 만들어내는 사내에게서 풍기는 냉기에 당장이라도 터질것만 같던 머리도, 떨리던 손끝도 안정을 찾았다. 스물 아홉 해를 살면서 센티넬로 각성한 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다이무스는 검을 휘두르며 제 검을 맞받아치는 루이스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벌떼처럼 제 몸을 싸고 돌던 감각이 가라앉았음에도 묘하게 들뜨는 가슴의 고동과, 차갑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마치 한 곡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의 검에 루이스의 결정검이 부서지고, 다이무스는 질풍처럼 파고들었다.
[크흑.]
쓰러진 루이스가 낮은 신음을 냈고, 최상의 컨디션을 되찾은 다이무스는 헬리오스의 에이스답게 그의 목을 겨눴다. 몸을 감싸고 도는 열기와, 단숨에 몸을 움직이며 시작된 심장의 두근거림이 다이무스의 검을 멈췄다. 질끈 눈을 감았던 루이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마에스트로를 본 다이무스는 검을 꽂고 돌아섰다. 타라의 재촉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를 베고 싶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비이성적인 선택이었으나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벨 수 없었다. 잘 설명하긴 힘들지만 된다, 안 된다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낀 그 감각. 센티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본진 안으로 들어온 다이무스는 가장 유력하고 확실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제야 떠올린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다이무스 홀든에게는 가이드가 없다.
가문에서 붙여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센티넬에게 가이드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센티넬은 종종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이퍼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센티넬에게 맞는 가이드만 있다면 오히려 사이퍼보다 더 가치가 높았다. 가이드는 자신이 가이드인 줄도 모르고, 불안정한 센티넬을 통제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센티넬을 손에 넣고 주무르기 위해선 가이드를 목줄로 잡는 편이 쉬우니까. 다이무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가문에서 센티넬을 잃은 가이드를 붙여주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어태껏 그 누구도 주지 못한 안정을 찾아낸 다이무스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다. 차라리 6년 전, 벨져가 그렇게 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연합의 영웅이고, 자신은 홀든의 사람이자 헬리오스의 에이스다.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다이무스는 자조했다. 가이드는 센티넬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다.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자각이 없다.
기어이 찾기는 찾았으나 그말인즉슨 곧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고, 한 번 가이드가 주는 평화와 안식을 맛본 이상 그 무엇도 만족스럽지 않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 다이무스는 저를 마주하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를 가지려면, 가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협력관계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날, 막연히 꿈꿔온 운명을 만난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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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선물
티엔이 안나오는 티엔루이
루이스 전력 60분, '목도리를둘러주는/선물하는'
뜨거운 물에 몸에 찌든 피곤이 노곤하게 녹아내린다. 가뜩이나 바쁜 월말을 보내고 나니 내일 있을 출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루이스는 우울한 내일을 생각하는 대신 어깨까지 푹 몸을 담궜다. 오늘은 꼭 겨울 옷을 내놓아야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옷을 꺼내야지 하는 것도 오늘내일하다보니 한 달이 다 갔다.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곤 하지만 반팔에 후드티로 버티긴 힘든 날씨였다. 씻고 나가서 옷부터 꺼내야지. 겨울옷을 어디에 정리해두었는지 생각하던 루이스는 토마스가 빌려준 목도리를 깜박 잊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돌려줘야지 해놓고는 할로윈이다 뭐다 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새로 사서 돌려줘야하나 아니면 그냥 다른 걸로 주는 게 나으려나. 똑같은 걸 찾으면 다행이지만, 괜히 엉뚱한 걸 사갔다가 토마스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곤란하다. 중요한 물건이었을 지도 모르고. 토마스라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사레를 치겠지만 어쨌거나 잃어버린 건 제 잘못이었다. 대체 정신을 어디다 놓고 사는 거지.
루이스는 바쁜 일상에 지친 제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걸려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문질러 털고 거울 앞에 섰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고 마주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잠을 좀 자야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어젯밤도 놓아주지 않고 기어이 침대에서 잠들지 못한 탓이 컸다.
정말이지, 그걸 끝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린 자신에 대한 자조가 몰려왔다. 아무리 단호하게 말을 해야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도 막상 그 앞에만 서면 무심코 예스맨이 되고 만다. 이제 적은 나이도 아닌데 좀 적당히 하면 안 되는 걸까.
루이스는 미간을 문지르며 시큰거리는 눈을 꿈벅였다. 끈질긴 요구와 협박과 투정 속에 이뤄진 동거 생활도 이제 한 달. 루이스는 물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털며 나란히 놓인 칫솔 두 개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문제라니까. 루이스는 머리를 털다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짧은 시간에 한숨을 몇 번 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그게 마냥 싫지는 않은 게 그도 자신도 사랑에 빠져 눈이 먼 게 분명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 제가 연인이 되고 동거마저 하게 되리라고. 같은 비누를 쓰고, 같은 샴푸를 쓰고, 같은 치약을 쓰고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드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은 루이스는 이미 집을 나간 그를 떠올렸다. 옷정리를 하고, 연합에 들러 토마스에게 사과한 뒤 목도리를 사러 나갈 생각을 하니 손끝이 간질거렸다.
똑같은 목도리 두 개를 내밀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벤트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같은 것을 공유하고 그렇게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에 서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은 행복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루이스는 욕실을 나와 방으로 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먹을 수 있게 만들어놓은 샌드위치와 유리잔에 따라놓은 오렌지 주스. 귀찮아서 식사를 거르고 나갈 걸 알았는지, 아니면 밤의 사과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몰라도 아침부터 준비하고 나갔을 그를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이스는 옆에 놓인 쪽지를 집어들었다.
[아침 거르지 말 것.]
아침식사라고 하기엔 민망한 시간이지만. 루이스는 머리를 말리는 대신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와삭 씹히는 양상추와 상큼한 토마토, 거기에 얇게 썬 햄에 계란과 감자도 으깨 넣은 샌드위치는 별 세 개짜리 식당에서 먹은 밥보다 맛있었다. 단숨에 한 조각을 먹어치우고, 다음 조각도 입에 넣은 것도 모자라 마지막 조각을 한 손에 든 루이스는 목도리는 어떤 색이 좋을까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집 안이라지만 맨 몸으로 오래 있기엔 날이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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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이미 재록본에 수록한 글이지만 뒤를 이어쓰고 싶어져서 재업
“치워라.”
“예, 말씀하시죠….”
“여섯시였나, 일곱시였나 그쯤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마셨죠. 아무리 포터라지만 앉아서 마신 것만 해도 혼자서 열댓 병은 마셨을 겁니다.”
더 물이 섞이기 전에 마티니를 한 모금 넘긴 벨져는 흘긋 그를 살폈다. 턱을 괴고 상념에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것도, 뺨이 붉게 물든 것도 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시며 궁상을 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벨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헛, 물론입죠!”
“흥.”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 순간의 흥 때문에 싸구려 술로 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잡친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도 대신 내줬겠다, 그냥 그대로 나가서 가버리면 그만인데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해서 어쭙잖은 놈팽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든, 찬바람을 맞고 거리에서 얼어 죽든 객사하든 알 바 아니다.
“……벨져?”
“다 마셨으면 그만 하고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신경 꺼. 벨져 홀든. 어차피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멍청한 자식.”
“흥,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 주제에.”
“하, 미련하다!”
“알아….”
“하, 정말이지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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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재록본 수록용으로 썼던 벨져루이다무 디스토피아물
이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팔을 베어도, 다리를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어기적거리며 다가온다. 벨져는 오래 전에 들은 네크로멘서와 죽은 시체들의 얘기를 떠올렸다. 끝나지 않는 시체들의 밤. 그런 허무맹랑한 전설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랬다. 이대로라면, 당한다. 머리를 베어야 겨우 멈추는데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벨져는 한 발 물러섰다.
깨어나보니 폐허뿐인 낯선 도시, 거기에 베어도 베어도 달라붙는 적, 이미 한 차례 길을 헤맨 뒤라 퇴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한다. 벨져는 흉측하게 뼈를 드러내고도 달려드는 그것의 머리를 베었다. 단번에 베지 않으면. 벨져는 양손에 든 검으로 시체가 썩는 악취를 내는 그들을 죽였다. 죽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겐 차라리 죽음이야말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인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벨져는 혀를 찼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가. 검이, 박혀 빠지지 않았다. 얼마를 이렇게 쫓겼는지, 신체강화능력을 사용해도 역부족이었다. 벨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무식하게 높은 건물과, 거무죽죽한 하늘.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조건. 이게 혹시 질 나쁜 꿈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위에서 창문이 깨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당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귀가 멍멍한 총성이 울리더니 달려들던 흉악한 얼굴이 발치에 나뒹굴었다. 단 한 발의 총성. 구원과도 같은 소리에 벨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이어를 타고 내려오면서 터지는 총성에 맞춰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하나씩 쓰러졌다. 침착하고, 신중한 명중률이다. 검은색 일색으로 무장한 저격수는 벨져 앞에 착지했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벨져는 힘주어 검을 뽑았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벅지에 찬 총이 두 정, 허리춤에 하나, 군용 나이프에 기관총까지 갖추고 중무장을 한 채 큰 가방을 메고 있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멋쩍어져 한 마디했다.
“…사례하지.”
“이봐, 뛸 줄 알아?”
작게 인사를 말하자 흘긋, 뒤를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쳤다. 꼭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눈동자. 무례한 언사였으나 그 눈빛에 시선이 사로잡힌 벨져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면 뛰어!”
발을 움직이게 만드는 목소리에 따질 겨를도 없이 뛰었다. 귓가를 스치는 총성에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 목소리도, 눈빛도 어딘가 익숙했다. 불쾌하고 찝찝한 그 감각.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던 그 눈동자.
“아까운 총알을 낭비하게 하지 마, 토마스. 이봐, 이쪽.”
남자는 빠르게 골목을 돌며 뒤로 돌아 기관총을 쏘아댔다. 벨져는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을 달리며 흘긋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기관총 대신 안정적인 자세로 몇 발 더 발포하면서 오른쪽으로 돌라고 눈짓했다. 따라오는 발소리에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격자로 된 철창이 열렸다. 바로 팔만 뻗으면 다가올 정도로 앞까지 다가온 그것을, 총을 바꿔든 그가 쏘아 죽였다. 바로 앞에서 터지는 썩은 피. 벨져는 마침내 열린 문에서 저를 잡아끄는 손에 끌려가고, 그가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저기, 괜찮아요? 어디 물린 곳은?”
“물려…? 아니, 없다.”
“운이 좋았네요. 마침 총기점에 식료품을 전달해주고 오는 길이었거든요.”
마에스트로. 서류에 있는 사진으로 몇 번 본 게 고작인 청년의 얼굴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석을 동경해 한 달을 걸려 영국으로 건너와 지하연합에 들어갔다는 다른 얼음쟁이. 그가 살갑게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벨져는 뒤를 돌아봤다. 헬멧과 고글을 벗고 머리를 터는 그는 분명 제가 아는 그가 맞았다.
“…루이스…?”
“어, 루이스 씨를 아세요?”
“알다마다.”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지. 벨져는 이를 악물며 눈썹에 힘을 줬으나 루이스는 벨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문을 이중으로 닫고도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있었다.
“참,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전 토마스라고 해요. 토마스 스티븐슨.”
“벨져 홀든이다.”
“엑, 홀든?”
“그래.”
젊은 결정사가 난처한 듯 루이스를 바라봤다. 명백한 구원요청이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벽에 걸려있는 패드에 무언가를 입력하느라 바빴다.
“저기, 루이스씨….”
“총알 서른발짜리 전리품 치곤 꽤 짭짤하네. 뭐, 그것도 통신이 먹통이 아닐 때나 소용있는 일이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랑 똑같아. 이봐, 괜찮으면 들어.”
“너…!”
척척 다가온 루이스가 그때까지 매고 있던 가방을 턱 던졌다. 상당히 무거운 무게에 벨져는 가방의 끈을 잡으면서도 일부러 배를 노리고 던진 그를 쏘아봤다. 정작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옆에 있는 꼬맹이 자식이 안절부절 못하며 안색을 살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리곤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
“그새 총같은 거나 두르고, 이거 영웅 꼴이 말이 아니군. 이젠 이 몸까지 모른 척이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잘난 능력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이러고 있는 거지.”
“…하아. 토마스, 무시하고 데려가. 아무래도 약이라도 한 모양이다.”
“네, 네!”
얘기를 듣기는 커녕 사람 얼굴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더니 약쟁이 취급이라니. 벨져는 제게 다가오는 마에스트로를 밀어내고 루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대답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설명해. 밖에 득실거리는 저것들은 또 뭐고, 너는 또 왜…!”
소리치는 중에 팔이 잡히고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순식간에 벨져를 엎어매친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 주변을 털었다.
“일단 올라가서. 조금 진정하라고.”
벨져가 내던진 가방을 다시 짊어지고 둔중한 철문 앞에 선 루이스는 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그 신호에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이중 삼중으로 엄중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게 안타리우스의 본거지를 방불케 했다. 불만도 의문도 가득했지만 일단은 그의 말대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마에스트로가 다가와 속닥였다.
“루이스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예요?”
“뭐? 무슨 소리지?”
영웅을 동경한다는 주제에 2차 능력자 전쟁과 그를 영웅으로 만든 저를 모른다니. 연합엔 바보밖에 없는 건가.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 루이스씨는 얼마 전까지 용병이셨다고 하니까, 음. 아무래도 저같은 일반인은 잘 모르거든요. 이번 일도 그렇고….”
일반인?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결정 능력으로 영웅이 된 사내는 능력 대신 총을 든 용병이라 하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은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벨져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검이라니, 신기하네요.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확실히 총이나 포가 발달하긴 했지만, 홀든이니까.”
“하하, 그래도 확실히 이런 데서 일본도는 보기 드물죠.”
“토마스, 그만 떠들고 와서 이것 좀 밀어봐.”
“아, 네!”
토마스는 루이스와 함께 셔터를 밀어올렸다. 딱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만 열어 허리를 숙여 들어가는데, 더 올리면 될 것을 굳이 몸을 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밖보다도 어두컴컴한데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넓은 홀. 벨져는 주변을 둘러봤다. 루이스는 다시 셔터를 닫고 가지고 있던 라이트로 주변을 슥 훑었다. 적막한 공간에 세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한 번 둘러본 루이스는 라이트도 꺼버렸다. 어떻게든 공간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 했으나 잠시 스쳐간 불빛의 잔상에 눈이 적응하질 못했다.
“그쪽이 아니라 여기.”
다른 쪽 통로를 봐두려 했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헤맨다고 생각했는지 루이스가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 되도 않는 친절에 코웃음을 쳤으나 루이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바리케이드가 겹겹이 쳐진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루이스가 문을 열었다. 계단의 비상등에 의지해 걷던 벨져는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토마스, 모두에게 소개 부탁해. 난 가져다 놓고 씻으러 다녀올 테니까.”
“아, 네! 다녀오세요!”
루이스는 손을 흔들어보이곤 어둠 속으로 걸어 사라졌다. 토마스 스티븐슨과 단 둘이 된 벨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발소리만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저, 저기….”
“뭐냐.”
“따라오세요. 다들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면 기뻐할 거예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운이 좋았어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지? 저것들은 또 뭐고.”
사람 좋게 웃던 토마스 스티븐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보더니 갑자기 팔을 잡았다.
“저기, 잠시만요.”
“무슨 짓이냐!”
“잠시면 돼요.”
기어이 팔을 잡고 소매를 걷은 녀석은 팔꿈치 안쪽을 보고 나서야 팔을 놓았다. 그리곤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으로 보는데, 벨져로서는 도무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약…하는 거 아니죠?”
“아까부터 자꾸 약쟁이 취급을 하는데, 전혀 손대본 적 없다.”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토마스가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났다던가…?”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빤히 쳐다봤다. 토마스는 금방 백기를 들었다.
“그, 외 떠들썩했던 바이러스 있잖아요. 그게 퍼졌어요. 여긴 몇 안 되는 안전거점 중 하나구요. 다른 데랑 달리 번화가의 쇼핑몰이라 주변이 위험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생필품이 모자라진 않아요. 전기도 돌아가고.”
“바이러스?”
“네, 그 좀비 바이러스 있잖아요. 어딘가에서 연구진들이 백신을 개발중이라곤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아, 혹시 형제가 있지 않나요?”
“…있다.”
토마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게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알겠네요. 얼른 가요! ”
뭐가 그리 기쁜지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혹시 여기에 다이무스나 이글이 있는 건가. 연합의 인물이니 이글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디 갖다 던져놔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소식을 들으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능력은 어떻게 된 거지?”
“네?”
“자랑하는 얼음 감옥 말이다.”
“얼음이요? 식료품을 최대한 한군데 몰아넣느라 얼음은 없어요.”
마치 능력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듯한 말투에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둘러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가 동경하는 영웅이 저를 한 번 이겼다 해도 그 아래 있는 녀석까지 무시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검을 빼들지 않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는 위화감, 믿을 거라곤 그 잘난 결정능력밖에 없는 주제에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 불길한 예감이 벨져의 발목을 휘감고 올라왔다.
“아, 혹시 아까 루이스씨가 쏜 총에 맞기라도 했어요?”
“…아니다. 그보단 안내를 부탁하지.”
“네, 바로 여기예요.”
쇼핑몰이라고 하는 건 백화점 같은 것인지 구역별로 물건이 늘어서있었다. 잔뜩 어질러진 데다 군데 군데 비어있는 게 한차례 소동에 털린 것 같긴 하지만. 조금 더 걸어가니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왔어요!”
“토마스!”
“토마스가 왔어!”
“토마스 오빠!”
“뭐야, 누구야?”
“누구랑 같이 왔는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금방 시끄러워졌다. 수가 적긴 했지만 대충 보기에 연합의 능력자들 몇과, 기타 세력의 능력자 몇, 그리고 회사 쪽의 인물도 몇 섞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동생 녀석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악에 물들어 한 달음에 달려오는 녀석의 표정이 꼭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다가와 성난 표정으로 주먹을 날리며 무슨 소린지 모를 욕설을 지껄이기 전까지, 벨져는 제게 펼쳐진 지옥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장비를 벗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 덕에 몸을 움직이느라 몸은 땀범벅인 데다 녀석들의 썩은 피냄새가 배인 옷을 입고 있자니 찝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물은 곧 자원. 최대한 물을 아껴가며 샤워를 마친 루이스는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고 피에 젖은 장비엔 미리 만들어둔 소독제를 뿌렸다. 가급적 물을 쓸 일이 있다면 한 번에 신속하게 하는 편이 좋다. 근 십 년간 몸에 익힌 생존지식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데 퍽 유용했다.
뒷처리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루이스는 이 층에 유일하게 샤워룸이 갖춰진 직원실을 나왔다. 이 역시 전투인원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였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그래도 임무를 완수한 데다, 생존자를 한 명 더 데려왔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였다. 관리실 앞에서 걸음은 멈춘 루이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붙어있는 철문에 대고 정중하게 노크했다.
대답 대신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왔나.”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로군.”
“교환 임무는 완료했습니다. 거기에 생존자를 한 명 구출했고요. 내역은 리스트와 대조해보시면 됩니다.”
“수고했다. 가서 쉬도록.”
“다이무스.”
루이스는 딱딱하게 대답하는 그를 불러세웠다. 아직 작동하는 CCTV와 그 통제실에 있는 그라면 들어올 때부터 알았을 것이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차림으로 등을 돌리고 선 그, 그리고 그 옆에 기대어 둔 기다란 검. 루이스는 한 걸음 다가갔다.
“읏…!”
돌아선 그는 루이스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더운 숨이 샜다. 혀를 얽고, 몸을 더듬거리다 보니 벽에 부딪쳤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루이스.”
“후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다이무스는 애틋한 눈으로 팔 안의 남자를 바라봤다.
“녀석 때문이냐.”
“…다이무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전,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네 책임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군.”
루이스는 다시금 떠오르는 나쁜 기억에 쓰게 웃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팔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눈을 맞추려 했으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리석은 남자였다. 버림받고도 주인을 찾아가려는 미련함이 야속했다.
“루이스. 다시 생각해 봐라.”
“노력해보겠습니다.”
“두 번째가 없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뼈아픈 충고였다. 루이스는 제 팔을 아프도록 잡은 그의 팔을 잡았다. 이것이 남자의 질투인지, 아니면 진심어린 충고인지는 모르나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괴로웠다. 루이스는 제 목줄을 잡았던 남자를 떠올리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황폐화된 도시와 파멸한 인류. 그 속에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해봐야 지옥 속의 시한부 인생에 불과했다. 루이스는 저를 바라보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질 수가 있을까요.”
“곧 비가 내릴 거다.”
“그리고 눈이 내리겠죠. 저들이 썩어 없어지는 것과 우리가 저들에게 먹히는 것, 어느 게 먼저일까요.”
“루이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엄한 목소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팔을 잡아 떼자 다이무스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휑하게 드러난 목언저리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루이스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마주 안으려 손을 뻗다가 멈췄다. 역시, 아직은 이 남자를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그 녀석은 널 버릴 거다.”
“…그럴 지도 모르죠.”
따스한 온기를 밀어내고 차가운 철문에 손바닥을 댄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를 버린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제가 얼마나 바보같은지도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게 저를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루이스는 무겁고 차가운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으로 걸어가며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여전히,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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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그 해 겨울
2013년도 1월 앤솔에 냈던 원고인데 다시 보니 꽤 마음에 들어서 일부만 공개해봅니다 :3
모티브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시리즈.
어? 잠깐.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한창 원고지를 써내려가는 중에 트릭에 허점이 보인 것 같아 손을 멈추었다. 앞부분을 다시 보려는데 옆에 둔 원고지뭉치가 없었다. 어어, 분명 여기 뒀는데? 하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옆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한 번 집중하면 옆에 누가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옆에 앉은 사람 때문에 루이스는 하마터면 강의 중이라는 것도 잊고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루이스는 옆에 앉은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
루이스가 알고 있는 그는, 완벽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수석으로 입학해 과탑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좋은 머리에, 잘 나가는 집안, 잘 생긴 외모. 사람들로 하여금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는 주사위를 여섯 번 굴려도 여섯 번 모두 6을 나오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주름 하나 없는 연한 하늘색의 와이셔츠, 단정한 감색 재킷. 해질녘의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시계. 그 모두가 오로지 그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완벽했다.
루이스는 언젠가 이글이 제 형은 숨 막힐 정도의 완벽주의자라고 한 것을 떠올렸다. 집 안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다던 말을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제 글을 읽고 있다. 그것도 자기 바로 앞에서.
초조함에 책상을 두드리다가, 손톱을 입에 물었다가 이내 자신의 행동이 불안해하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깍지를 끼고 얌전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엔 다리를 떨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해도 뼈마디가 굵은 그의 손에서 제 원고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저절로 눈이 다이무스의 손을 향했다. 흘긋거리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제 담당 편집자인 고혹적인 미녀를 떠올렸다. 수많은 신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앞에서도 루이스는 이렇게 떨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는 소설에 쓰이는 스토리와 트릭을 두고 말다툼을 벌이긴 하지만, 4살 연상의 그녀는 언제나 좋은 파트너였다.
애초에 루이스를 등단시킨 것은 오랜 친구인 앤지의 도움이 컸다. 고등학교 동창이던 그녀는 알고 보니 대기업 수장의 딸로, 앤지는 아버지의 계열사중 하나인 출판사에 제 소설을 가지고 갔다.
당시 매출이 저조했던 지라 모험삼아 낸 루이스의 소설은 예상 외로 히트를 쳤고, 루이스는 도서출판 ㈜연합의 영웅이라 불릴 정도가 되어버렸다. 앤지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루이스는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루이스가 쓸데없이 과거회상을 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때, 강의실이 웅성거려 고개를 드니 교수님과 학생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때마침 다이무스의 손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겨우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네?”
다이무스의 회색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정면으로 시선을 받고 있자니 와, 정말 잘생겼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어어...그게...”
“아직인가.”
아뇨. 당신 때문에 생각해둔 게 지금 전부 날아갔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루이스는 애써 참았다. 아직 강의실 안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다이무스 홀든을 향하고 있었다.
하긴, 얼굴도 잘 생겼겠다. 집안도 좋겠다, 유능한 인재라 졸업 시즌에 앞서 스카우터들이 모셔가려 한다는 소문도 달고 다니는 그다. 굳이 여자가 아니라도 그의 옆에 붙어 뭐라도 해볼 생각으로 달라붙는 사람이 많았다지만, 정작 다이무스는 그런 시선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게 타고난 카리스마와 여유라는 걸까. 이런 사람이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구나, 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간 있나.”
“네?”
“아까부터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루이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강의인 범죄심리학은 목요일 마지막 강의였다. 마감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고, 오늘은 늘 저를 따라다니는 토마스도 대타 알바가 들어왔다며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아갔기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 강의인데...”
“그렇군. 저녁은 먹었나?”
“아뇨.”
“그럼 내가 사지. 짐 챙겨라.”
멍하니 있다가 다이무스가 건네는 원고지 뭉치를 받아들고 퍼뜩 빈 원고지들과 만년필을 정리해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먼저 성큼성큼 강의실을 나서는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저기, 다이무스 홀든씨?”
“뭐지.”
“저 아세요?”
분명 같은 강의를 듣긴 하지만 분명 그와 루이스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당연하게 루이스에게 반말을 했다. 아무리 루이스가 나이 21를 먹고도 아직도 술을 사러 가면 신분증 검사를 당하는 동안의 소유자라도, 보통이라면 존대를 했을 것이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과 동기인 이글이 집에서 제 얘기를 하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과 얼굴을 매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이글은 새벽 2~3시까지 클럽을 쏘다니거나 술 먹으러 가고 다음날 오후 강의에나 간신히 얼굴을 내미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알 일은 없을 텐데.
“.....”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알 만큼은 알고 있다. 동생 둘이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벨져도 홀든이었지. 문득 그를 떠올렸다. 1학년 때, 멋모르고 앤지의 손에 이끌려 토론대회에 나섰다가 마주친 오만한 남자. 단순히 경력을 쌓기 위해 참가한 벨져는 당연히 우승을 예상했지만, 결승전에서 루이스와 논쟁을 벌이고 결국 패배했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벨져는 루이스만 보면 이를 갈고 있었다.
전파를 타고 방송까지 됐으니, 동생을 보려고 TV를 봤다면 충분히 제 얼굴을 알만했다. 한 번 본 사람을 기억할 정도라면 그의 기억력이 좋거나, 아니면 주위의 누구-아마도 벨져-가 계속 떠오르게 했겠지.
그렇게 납득하고 나니 괜한 말을 꺼냈단 생각에 멋쩍어져 어깨에 맨 크로스백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애초에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기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는데. 공연히 맥이 빠져버렸다.
자신을 잘 따르는 토마스는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로 루이스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곤 했지만, 루이스의 성적은 겨우 중위권을 유지하는 정도고 딱히 학과 활동이나 다른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루이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로서도 아직 부족하고.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생각을 하는 사이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 뛰었다. 그 바람에 후드가 벗겨지고 시월의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로 옆도, 뒤도 아닌 애매한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 걸었다.
어색함만 감도는 침묵 속에서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입술을 핥았다. 튼 곳이 있었는지 따끔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단편집 마감을 하고 나서 급하게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마치느라 제대로 침대에 들어가 잔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으니, 입술이 이렇게 되는 거야 당연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어...딱히 가리는 건 없는데요.”
“그렇군.”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어왔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니 수긍하는 것으로 대화가 끊겼다. 그런데 담백하고 간결한 그의 화법은 이상하게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일까.
그런데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마감과 과제에 치여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체육대회 때문에 거리에 형형색색의 학과 잠바를 입은 학생들이 가득했다. 새삼 이런 날 강의를 풀로 하고 과제를 걷어간 스타이거 교수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불같은 금요일 저녁. 학교 언덕을 내려가 봐야 클럽과 술집뿐이니 그냥 간단하게 먹자는 제안에 다이무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강의실을 나온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거리에 화려한 조명이 켜질 무렵에야 겨우 분식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직장을 은퇴한 선배님이 차린 분식집은 값싸고 양 많고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직접 운영하는 곳의 가게 이름이 왜 엄마 손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한 번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는 말도 돌았다.
그렇지만, 다이무스 홀든과 분식집이라니.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좁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시키는 걸 보고 있자니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즐거워 보이는군.”
“아...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사과라면 오히려 내가 해야겠지.”
뭐에 사과한다는 걸까, 하는 순간 불연 듯 다시 고개를 드는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고 나니 다이무스의 시선이 곧장 루이스에게 꽂혔다. 피할 수도 없어 따라 둔 물만 들이켰다.
“흥미롭더군.”
“...감사합니다.”
루이스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팬래터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체크하곤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트리비아의 회유와 협박에도 나서기 싫다며 일관했던 루이스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지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다.”
잠깐, 앞뒤를 다 잘라먹는 직설적인 화법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뭐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다이무스는 아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수학과 조교인가?”
아, 들켰다. 망연해지는 기분에 어색하게 웃었다. 루이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다이무스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스토커는 독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가짜 범인일 테지. 스토커라면 일부러 가면을 놓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그녀를 납치한 것까지는 스토커의 짓인가?”
“계속 하세요.”
눈앞의 남자는 정확히 내용을 짚었고,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계속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어디까지 답을 낸 걸까하는 생각에 조금 두근거렸다. 아니, 엄청 두근거렸다.
“여자는 독신에 술집 종업원이었다. 교수인 연인을 제외하면 딱히 친한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그 연인에게 연정을 품은 조교가 있다. 더 볼 것도 없는 치정극이더군.”
범인과 동기. 추리소설의 3요소 중 두 가지를 풀어냈으니 마지막으로 트릭이 남았다. 모름지기 추리소설엔 이 셋이 고루 섞여야 한다는 것이 루이스의 지론이었다. 하나라도 빠지면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
거침없이 말을 잇던 다이무스가 입을 닫았다.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행동이 그가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트릭에 대한 답을 내지 않았다. 애초에 트릭에 허점을 느끼고 펜을 멈춘 루이스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완벽한 사람의 표본인 다이무스 홀든이라도, 단번에 간파당하면 작가의 이름이 울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천천히 턱을 괬다. 조금 전까지의 긴장이 다 거짓말이라는 듯 여유를 가장하고, 슬쩍 미소까지 띠웠다.
“그리고?”
다이무스는 돌변한 루이스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 여유를 가장하고 경계하며 떠보고 있다. 루이스에겐 가장 강력하고 비밀스러운 패가 하나 남아있었고, 다이무스는 아직 그 패를 뒤집을 수를 찾지 못한 듯 했다.
“...그 밀실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읽는 사람이 풀어야죠.”
다이무스의 손가락이 나무 재질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지만 그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나는 소리만 또렷이 들렸다. 다이무스가 손가락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당돌한 면이 있군.”
“절 잘 모르시나 보네요.”
다이무스의 눈매가 순간 부드러워졌다. 아,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저도 모르게 손은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기분이 묘했다. 홈즈를 만난 모리아티의 기분이 이런 거 아닐까. 호적수를 갖는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무슨 문제를 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푼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누가 말했던가, 범죄자와 탐정 사이는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묘한 유대감과 긴장이 둘을 아주 가까운 거리의 평행선이 되어 달리게 한다.
오싹할 정도의 흥분이 루이스의 몸 안에서 휘몰아쳤다.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기분 좋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도 그렇군. 그럼,”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넉살좋게 웃으며 양 손에 음식을 들고 온 주인 아저씨가 음식을 상 위에 척척 차리면서 다이무스의 말이 끊겼다. 맥이 탁 풀리는 동시에 그냥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수저통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건넸다.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선입관에 사로잡혀버렸던 건지.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좋았다. 무뚝뚝한 건 사실이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이 말하는 것처럼 꽉 막힌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지만, 그와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앤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을 때랑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 더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막상 김이 하얗게 오르는 음식을 눈앞에 두니 식욕이 돌아 짧게 잘 먹겠다고 말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확 깨져버린 분위기에, 따듯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도 영 아니다싶어 조용히 먹기만 했다. 다이무스역시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다 먹고 일어서서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계산하는 다이무스를 두고 먼저 가게 문을 밀고 나서는데 바깥 날씨가 제법 추워 후드를 뒤집어썼다. 거리의 나무들이 떨군 잎들이 바싹 말라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걸 보니 새삼 올해 가을이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처연해져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엔 유독 보름달이 크고 밝았다.
“달이 밝군.”
딸그랑- 풍경 소리와 함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후드 짚업의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도 않고 뒤돌아서니 다이무스가 다가와 덮어쓴 후드를 벗겨냈다.
“이게 훨씬 보기 좋다.”
찬바람이 드러난 목덜미를 스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후드를 썼다. 루이스가 집을 나설 때만해도 해가 짱짱한 가을 날씨였기에 후드 짚업 안은 반팔 티 한 장 뿐이었다.
“전 이게 편해요.”
물론 후드를 쓰고 있으면 따뜻하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후드를 쓰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언제부터 후드를 쓰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언제든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동굴과도 같았다. 혹시 언짢아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안색을 살피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너무 포커페이스라 읽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잘 먹었습니다.”
“그래.”
딱히 더 생각나는 말이 없어 으레 하는 감사 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이무스는 다시 앞장 서 걷기 시작했고, 어차피 역으로 가는 방향이었기에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여전히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애매했다.
그의 뒤도, 옆도 아닌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다이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걸음걸이에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꼿꼿하니 바른 자세로 걸었다.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것만큼 당당하지만 그보다 진중하고, 결코 뽐내지는 않는다. 그의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여유가 잘 생긴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문득 다음 작품엔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도 이야기 거리로 어떻게 만들어 볼 수 없을까를 고민하는 게 글을 쓰는 이에겐 습관이나 다름없는 법.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있자니 괜히 손이 근질거렸다.
잘 생긴 얼굴에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고, 두뇌명석하기까지 한 좋은 집안의 장남. 만능형 캐릭터는 식상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걷는데도 이상하게 다이무스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학교 골목거리에서 대로로 나오니 사람들이 즐비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따금 인파에 치일 때면 뒤를 흘긋 보며 걸음을 늦춰주었다. 딱히 더 할 말도 없다면 그냥 밥 먹고 간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훌쩍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을, 그의 작은 배려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까지 5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그렇게 걸었다. 이상하게 그 5분은 긴 것 같기도 했고 짧은 것 같기도 했다.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것 없이 미묘하고 애매한 데, 간질거리는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잘 들어가라.”
“어, 다이무스씨는요?”
“차 가지고 왔다.”
잠깐, 지금 뭐라는 거야? 차 가지고 왔다고? 근데 왜 여기 있어요? 지금 나 데려다 준 거예요? 라고 묻고 싶었는데 입에선 이미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만 나왔다.
“네?”
“그럼 이만 가보지. 늦었으니 조심해서 들어가라.”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본 다이무스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의 등을 눈으로 쫓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역시 사람이 많았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아까 하던 구상을 잇기 시작했다. 무겁고 날카로운 검 같은 남자. 배경은 현대보단 근대로, 자식이 없는 고령의 괴짜 노인이 지인 몇을 저택에 초대해 신비의 액자를 걸고 추리 대결을 시작한다.
초대받은 사람은 총 다섯. 아름다운 여배우, 세도가 집안의 장녀, 노인의 주치의, 참석하지 못한 기업가의 대신으로 온 여비서, 마지막으로 주인공과 그의 친구.
머릿속으로 대강의 배경을 잡고,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1% 남았다는 경고창이 떠서 손가락을 멈췄을 땐 이미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세 정거장이나 지나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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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I'm Fine
노래 듣다가 셀프전력 60분 해보앗슴니다
※ 루이스 사망 소재 주의 ※
너를 만났다. 정말 오랜만인데. 나는 술에 취해있었고 너는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말갛게 웃으며 서있었다. 나는 네게 다가가 네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너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왜 이러고 있어.”
“나쁜 새끼. ”
나는 네게서 나는 비누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술에 취해서 제대로 말한 건지 아니면 생각을 한 건지 알수없었지만 너를 놓치기 싫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다정했다.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이 행복했던 그 시간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날 거면 사랑하지 말지. 사랑이란 독과도 같았다. 나는 네가 없는 현실을 살아야했고, 너는 나를 떠나 모두의 영웅이 되었다. 나는 널 내 옆에 붙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가끔은 그림자속에서 그녀가 튀어나와 내게 안타까운 미소를 짓는 것 같았고, 널 갈갈이 찣어놓았던 그녀 역시 나를 비웃었다. 너는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손을 뻗어보아도 닿지 않을 허상을 사랑한 것이라 속삭였다.
나는 그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너와 싸운 걸 후회했다. 마주치지 말 걸 그랬다.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했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 비참해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살 수밖에 없다. 네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네가 희생해서 일구어낸 평화니까. 난 그걸 지킬수밖에. 그러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를 잊어버리고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 그저 다시 한 번 그 말간 미소를 볼 수 있길 기도했다.
그리하여 내 삶이 다하는 그날 네가 문을 열고 다가와 나를 이끌어주기를. 고결한 희생 끝에 영웅으로 잠든 네 곁에 가기위해 내가 해야할 일이 많았다. 네 후배는 자랑스러워할만한 녀석이 됐다. 안심해. 연합의 시끄러운 꼬맹이들도 이제는 꽤 자라서, 그때의 철부지 같지가 않아.
“그렇구나.”
루이스는 꿈에 그리던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 내가 이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영원히 모를 거야.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대답이 돌아왔다. 남의 생각은 훤히 들여다보면서 자기 속내는 하나도 내놓지 않는 건 어딜 봐도 불공평하다. 끝까지 비겁하고 치사한 자식 같으니.
“넌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으니까. 이해해줘. 너도 그렇고, 사람들은 언제나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법이거든.”
“넌 정말 둘도 없는 나쁜 자식이지.”
“그래. 그래서 원망해?”
“그래.”
“그렇구나.”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지마. 그래봤자 다시 사라질 허상주제에.”
“잠시 내려와서 인사를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해줘. 여기까지 와서 싸우기 싫다.”
“...정말, 너는....”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눈을 감고 팔에 안은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기억 속의 감촉 그대로라 더 원망스러웠다. 내 기억 속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네가 미치도록 보고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놓치기 싫었다. 술에 취해 빚어낸 허상이든, 정말로 그녀석이 내려와 인사를 하는 거든. 벨져는 이 순간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사랑해.”
이 한마디에 차가운 환상이 녹아내릴 걸 알면서도 벨져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응. 나도.”
“널 사랑해.”
하지만 말해도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고 한 마디 말로 잡기엔 네가 짊어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냥 지나쳤겠지.”
“우리가 만나지 못할 거라고?”
“그래.”
“너, 그말 잘 기억해둬라.”
“왜?”
“내가 찾아낼거니까. 내가. 이 벨져 홀든이.”
그 말에 잘만 떠들어대던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숨을 집어삼키고 잠시 말을 고르는 그 버릇까지 너는 여전했다. 모두가 변하는 이 시간속에 오로지 너만이 그대로였다. 작게, 피식 웃는 소리에 벨져는 입술을 물었다. 트리거를 당긴 이상 이 나약하고 아름다운 환상은 곧 손 안의 눈송이처럼 아린 통증만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끝까지 제게 가혹한 녀석이었다.
“...여전히 너답구나. 멋져.”
“그러니까 대답해. 내가 찾아내면 넌 나를 사랑하는거야. 알겠어?”
“그래. 그럴게. 어떻게 그러지 않겠어.”
“그리고 내 옆을 떠나지마. 먼저 갈 생각따위 하지도 마.”
“알겠어. 약속할게.”
“지켜라.”
나는 일부러 끝까지 너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웃고 있으리란 걸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다. 그 미련도 후회도 없는 개운한 미소를 보면, 이게 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까봐. 네가 마지막에 남긴 노트 그대로. 내게 남긴 유언 그대로 너를 잊고 앞만 보며 행복하게 살다가 혹시라도 너를 잊게 될까봐.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그건 약속이었다. 행복하기로. 앞만 보기로. 나는 너와 약속했으니까. 비록 죽기보다 싫은 약속이지만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가끔 네 생각에 무너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날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너라는 사실에 다시 안도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극인가 싶지만.
“루이스.”
“다음 꿈에 만나자.”
“...그래.”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거리가 보였다. 네가 없는 거리. 네가 없는 황혼의 도시. 그래도 나는 네가 없는 오늘을 살아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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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토마] 어느 짝사랑.
오메가버스, 벨져루이<토마
토마스가 루이스를 향한 외로운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한 토마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제 자리로 향했다. 비록 잔뜩 쌓인 서류뿐이지만 그래도 긴 싸움이 끝난 후라 그마저도 반가웠지만, 그것도 채 이주를 넘기진 못했다. 서류지옥. 서류지옥, 그리고 또 서류지옥. 차라리 현장 수습이 백배는 낫다. 요 이주간 자신은 한 곳에 진득하게 앉아있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지독하게 느낀 토마스는 축 쳐진 채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토마스를 맞이한 건 전후 처리로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이 아니라 불안하게 웃으며 반기는 연합의 동료들이었다. 도망가야 한다. 지금 당장! 토마스 안의 위험 센서가 붉은 색으로 빛나며 사이렌 경보를 울렸다.
“아, 잠깐 잊은 게 있어서....”
“토오마아스으.”
“억.”
“너네 선배에 대한 특종이다. 그래도 안 듣고 갈래?”
루이스의 이름이 나온 이상 도망갈 수 없다. 토마스는 삐걱거리는 트루퍼처럼 고개를 돌렸다. 제 목덜미를 잡아챈 이글이 위험하게 미소지었다. 여기서라도 도망을 갔어야 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이상하게 운수가 좋더라니. 웃으며 다가오는 동료들이 무서웠다. 등골에 식은땀이 오싹하게 흘렀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토마스는 루이스를 잠시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건만, 이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순간 토마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충격이라고 하기도 뭐한 뉴스였다. 그러니까, 왜? 어째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아노미 상태에 빠진 토마스를 위로하는 대신, 연합의 동료들은 친절하게도 그들의 요구조건을 면전에 디밀었다. 자기들은 물어볼 엄두가 안 나니 대신 물어봐 달란다. 토마스는 저항했다. 그러나 막내라는 것은 슬픈 운명을 타고나기 마련이니, 토마스가 한 번 발동이 걸린 그들을 멈출 수 있을리 만무했다.
“아, 못해요! 어떻게 그런 걸 물어봐요!”
“아 그럼 어쩌냐! 나도 궁금해 죽겠는데, 작은형은 절대 말 안한다고!”
“마, 퍼뜩 갔다 온나!”
“그래, 토마스! 신세대 영웅님답게 가서 시원하게 물어봐달라구!”
“자, 자, 화이팅!”
결국 토마스는 떠밀리다 못해 루이스의 사무실에 던져졌다. 고작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 있던 사람까지 이 서류지옥에 끌려올 정도로 일이 많기 때문에 우연히 사무실을 비웠다던가 하는 일은 아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서류를 보고 있던 루이스가 불청객의 방문에 고개를 들었다.
“토마스?”
“아, 하하하. 오늘도 좋은 오후에요. 선배.”
“점심 다 지났는데 여긴 왜. 나 오늘 점심 먹었어.”
“정말요? 뭐 드셨어요?”
“샌드위치.”
루이스는 책상 한 켠에 치워둔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퇴원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밥도 거르고 일을 하는 일이 잦다보니 서류 배달을 올 때마다 잔소리를 하고 점심 배달을 한 토마스였다. 루이스는 이것 보라는 듯이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순수하게 기뻐했을 테지만, 방금 듣고 온 소식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순수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토마스는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으며 문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과 기대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목 안쪽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확인하지 않고는 내내 밤잠을 설칠 게 분명했다.
“저.... 하나 여쭤 봐도 돼요?”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면.”
루이스가 서류를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이 펜을 내려놓고 저를 올려다보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토마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선배. 진짜 벨져랑 사귀어요?”
“응. 그런데 왜, 신기해?”
토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루이스는 토마스가 어설프게 감춘다고 모를 사람도 아니고, 그런 거에 하나하나 기분 상할 사람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면 대답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가르치는 사이 정이 들었는지 자길 동경하는 녀석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루이스는 토마스에게는 유달리 유했다.
“그... 둘 다 알파잖아요....?”
“응.”
“괜찮아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안경을 벗어 내려놓고, 눈을 비비는 그에 토마스는 무심코 감탄했다.
“뭐, 불편하긴 한데 못 견딜 정도는 아니야.”
“그런가요.”
“그런 거지. 으으, 뻐근하다. 커피 마실래?”
기지개를 켠 루이스는 후배를 두고 일어났다. 토마스가 움직이려했으나 루이스가 한 발 먼저 커피포트를 집었다. 잔을 들어 살짝 흔드는 루이스에게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좋아하는 친구를 뺏긴 기분처럼 서운섭섭했다. 알파와 베타, 그리고 오메가. 그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필연적인 선이 그어져있었다. 알파는 오메가와 베타는 베타와. 넘어갈 수도, 어찌 해볼 수도 없는 높은 벽. 루이스가 건넨 따뜻한 커피를 받아든 토마스는 고개를 꾸벅였다. 김이 오르는 커피에 제 얼굴이 반사됐다.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그런 것뿐이야.”
루이스는 덤덤하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철제 의자가 삐그덕거렸다.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게 된 토마스는 가만히 커피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요?”
“글쎄.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렇게 됐더라. 별 건 없었어.”
토마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음이 향하는 건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는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알파이기 때문에 접었던 마음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한 번 해볼걸. 토마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벨져가 우성이라서요?”
“아니.”
루이스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곧 스물여덟이 되는 그에겐 제 질문이 어린아이의 순진한 질문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머그잔을 꽉 쥐었다. 토마스와 만날 때부터 날카롭게 날이 서있던 그였다. 트리비아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토마스는 그와 그녀가 갈라서게 된 것이 결국 그들이 정해진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땐 그 역시 베타였다. 루이스는 늦게 발현한 편이었고, 본인조차 성질이 변했는지 모를 정도로 자신에겐 무심했다. 열성이기도 하지만 그라는 사람 자체가 그랬다.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세심한 주제에. 그럴 거면 그렇게 잘 해주지나 말지.
토마스는 억울했다. 억울할 일이 아닌데도 억울했다. 가끔 비추던 미소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던 손길이, 잘했다는 칭찬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됐는지 모른다. 루이스는 가식이나 겉치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언뜻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있다 보면 그가 얼마나 사람을 챙기고 배려하는지,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를 거는 것도 당연했다.
영웅은 영웅.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영웅 루이스는 세월 속에 더 굳건해졌고, 다시 시작된 전쟁은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와 벨져 홀든이 같은 적을 상대하며 서로를 옆에 두었기 때문에. 루이스는 아무에게나 등 뒤를 맡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벨져와 등을 맞대고, 일선에서 안타리우스의 클론을 상대하는 모습을 토마스는 뒤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과는 다른 의미의 영웅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순간 토마스는 깨달았다. 나는 저 사람과 등을 맞대고 싸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먼 훗날 언젠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의 등을 이 거리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더 강해지려했다.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한참 말이 없는 토마스의 머리 위로 루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마스.”
“네.”
“넌 잘해낼 거다. 걱정하지마. 그게 아직은 아닐 뿐이야.”
상냥한 위로에 토마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닌데.
“나도 알아. 이제 겨우 알게 됐거든. 혼자 짊어지려는 나쁜 버릇.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 녀석은 후려쳐서라도 끌고 나와주더라고. 그래서 나는 나로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래서가 아닐까. 매일 싸우지만, 이번엔 잘 해보려고.”
루이스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 풋풋한 표정이 정말 연애를 하는 사람의 표정이라 가슴이 꽉 막혔다. 세상의 반쪽이 뚝 떨어져나간 상실감이 이럴까.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런 제게 웃어주었다. 다 괜찮다는 듯이, 전부 이해한다는 듯이. 사실은 하나도 모르면서.
“질문은 그게 끝이야?”
“...네.”
“대답은 한 것 같네. 더 필요해?”
“아니요.”
“그럼 이제 할 일 해야지.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전해주고.”
루이스가 안경을 다시 쓰며 고개를 까딱였다. 토마스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문에 찰싹 붙어있던 이글과 레베카, 나이오비, 도일이 한 번에 우르르 쏟아져 저마다 억소리를 내더니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서 일 좀 하지 그래? 애 좀 적당히 괴롭혀.”
“아니 우리가 뭘 괴롭혔다고 그래~.”
“지금 네가 괴롭히고 있잖아, 이글 홀든.”
“우리 갈게. 일해, 일. 일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야! 너 진짜 우리 작은형이랑 사귀냐?”
“그렇게 물어볼 거면 뭐하러 애를 보내?”
직구를 던지는 이글에게 루이스가 빠르게 종이를 구겨 집어 던졌다. 이글은 잽싸게 옆으로 피하곤 레베카가 끌어당기는 것도 아랑곳 않고 속사포처럼 다음 질문을 던졌다.
“작은형 어디가 좋아서? 고백은 누가 먼저 했어? 키스는 했어? 아, 거 되게 비싸게 구네! 좀 알려줘라!”
“그렇게 궁금하면 니네 형한테 물어봐라!”
“옳소!”
“내도 실은 그짝이 더 궁금하데이.”
“...다 얼려버리기 전에 나가!”
한바탕 소란 끝에 사무실을 나온 이들은 왜 사귈까 어디가 좋았을까 하는 것도 잠시, 궁금증이 풀리자마자 제각각 그들의 자리로 향했다. 이글은 일 대신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지만 어쨌거나. 서류가 가득한 책상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를 막 시작한, 뿌듯하고 기쁘고 또 한편으론 쑥스러워하는 루이스의 얼굴이 아른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듣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요 며칠은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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