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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어느 좋은 날
- 2015.10.17 정준일 좋은날
- 2015.10.17 [릭루이] 오후, 커피 한 잔.
- 2015.10.14 [다이루이]
- 2015.09.04 [다이ts루이티엔] Another.
- 2015.08.31 [다이루이] Good evening, sir.
- 2015.08.24 [티엔ts루이] Someday
- 2015.08.12 벨져루이 프로게이머au Prequel 위탁/통판 주문 받고 있습니다! 1
- 2015.07.16 사이퍼즈 루이스 오른쪽 연성 재록본 주문 받고 있습니다!
- 2015.07.02 Prequel. 08. 2
글
어느 좋은 날
홀든A팀의 팬인 클레어 설정이 들어있습니다.
접기를 열기 전에 미리 주의해주세요.
프로 은퇴 후, 동거하는 벨루.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내친집!”
“안녕하신가! 정의롭고 힘찬 오후일세!”
“로라스씨, 오늘 찾아갈 집이 아주 특별한 곳이라면서요?”
“그렇다! 오늘은 특이한 직업군에 있는 유명인 집에 찾아갈 예정이지!”
“어우,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자, 그럼 주인공을 찾아 가봅시다!”
케이블 채널의 인기프로 ‘내 친구의 집’을 진행하는 두 엠씨, 클레어와 로라스는 오늘도 활기차게 오프닝을 열었다. 오늘 찾아갈 곳은 다름 아닌 전직 프로게이머이자 현 기획사 사장 벨져 홀든의 집. 이미 수차례 팬들로부터 요청이 들어왔지만 번번이 거절당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클레어는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둘러보다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보이며 방긋 웃었다.
이번 촬영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클레어였다. 매번 거절당하는 피디와 작가들 대신 그 어렵다는 촬영허가를 받아낸 게 바로 그녀다. 물론 그 적극적인 태도에 사심이 들어있지 않다고는 말 못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 ‘벨져 홀든’에게 촬영허가를 받아냈다는 게 중요하지.
클레어는 잠시 이 일을 성사시켜준 베프를 떠올렸다. 촬영만 잘 끝나면 꼭 하루 데이트 풀코스를 쏘리라. 클레어는 오랜만에 만난 로라스와 담소를 나누며 차로 이동했다. 호기심 유발용 힌트 멘트를 따는 사이 차가 한 고급 아파트 앞 카페에 멈췄다.
차에서 내리기 전 화장을 고친 클레어는 차에서 내리기 전 다시 한 번 기합을 넣었다. 아자아자, 파이팅! 일이라고 하면 떨리지도 않을 텐데, 결코 팬심이 없다고 할 수 없기에 두근거렸다.
클레어는 마음을 다잡고 치마를 털었다. 분주한 카메라 감독님과 작가들 사이로 범접할 수 없는 클라스를 당당히 과시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꺄악! 클레어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특별 공연 전후로 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커피를 마시던 벨져 홀든이 일어나 클레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감격한 팬의 마음으로 악수하고, 화장실에 갔던 로라스와 벨져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클레어는 자리에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심호흡했다. 그래도 직업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다 보니,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진행자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다보니 한껏 긴장상태였던 제작진들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클레어 특유의 발랄하고 유쾌한 리액션도 있지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선을 딱 긋고 방송을 하는 벨져의 태도도 한 몫 했다.
방송을 하기엔 편하지만, 그것뿐이다 보니 클레어는 조금 아쉬웠다. 한 사람의 팬으로선 아무래도 인간 벨져 홀든이나 쉬레가 아닌 기획사 대표 벨져 홀든 같아 들뜬 마음이 가라앉았다. 카페 안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카메라가 돌기 시작한지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벨져와 함께 아파트로 향했다.
그토록 기대하고 기다리던 집 앞, 클레어는 도어락을 가리고 문을 여는 벨져 뒤에서 심호흡했다. 모두 숨죽인 복도에 전자음만 울렸다. 일 년 전에 은퇴하고 본격적으로 방송 생활을 시작한 프로즌이 자취하던 걸 쉬레가 불러다 동거하기 시작한 게 딱 두 달 전이었다.
덕분에 팬덤은 또다시 뒤집어졌고, 클레어와 로라스가 진행하는 내친집에도 팬들의 요청이 수없이 들어왔다. 그들의 살림집이 궁금한 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였고, 벨져 홀든편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이 나가자마자 화제가 된 지라 제작진도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오늘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집을 공개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떨리네요.”
벨져가 의례적인 미소와 함께 문을 열었다. 카메라가 먼저 들어가고, 클레어와 로라스도 벨져를 따라 발을 옮겼다. 전체적으로 화이트와 그레이의 심플한 인테리어가 깔끔하면서 모던했다. 오빠들 잘해놓고 사는구나. 클레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탄하며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넓고 깔끔한 집은 남자 두 사람이 사는 것치고는 엄청나게 관리가 잘된 편이었다. 과연 벨져 홀든. 감탄하며 둘러보던 로라스가 직접 청소한 거냐고 묻자 벨져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렇지, 쉬레님께서 직접 청소를 할 리가.
클레어는 거실 소파 쿠션 사이에 자리한 아이스와 래피드의 인형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사진도, 트로피도 없이 넓기만 한 집이지만 생활감이 묻어나는 집이었다. 클레어는 두 달 전 라디오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리첼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출연한 쉬레와, 깜짝 이벤트로 전화연결을 한 프로즌. 그것만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이 미소가 번졌다.
[오늘의 사연입니다. 제목부터가 강렬해요. 익명님께서 보내주신, 쉬레님의 치명적 단점. 이거, 벨져씨가 읽어주시겠어요?]
[아무래도 내부 고발자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데요. 잡히면 죽습니다.]
[아이, 오늘은 저희 호라이즌 빛나는 밤에의 청취자분이시니까요, 잘 읽어주세요!]
[큼, 큼.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쉬레님의 오랜 팬입니다. 저희 오빠는 잘생기고, 게임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돈도 많고,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어우, 칭찬 일색이네요.]
[그런 저희 오빠에게도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답니다.]
[벨져씨한테 단점이요?]
[큼, 크흠. 그건 바로……. 하아. 이거 제가 계속 읽어야 하나요?]
[아이, 읽어주세요.]
[친구가 없다는 겁니다. 여자 친구도 없고, 그냥 친구도 없는 것 같아요. 맨날 보면 프로즌이랑 다니고 밖에 따로 다니는 친구가 없는 것 같아서 늘 걱정입니다. 이러다 프로즌이 결혼하면 저희 오빠는 어쩌죠? 있습니다. 친구. 있어요. 있습니다.]
[어머, 정말 벨져씨를 좋아하는 분이신가봐요. 이렇게 걱정도 해주시고.]
[후……. 쓸데없는 걱정 같은데요.]
[네에, 그럼 여기서 전화연결 해보겠습니다. 청취자분의 익명성을 위해 음성변조를 해드리겠습니다. 연결 됐나요? 익명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너, 누구냐.]
[오빠……. 제가요……. 오빠 장가는 언제 갈까 걱정이 많아요…….]
[어우, 벨져씨랑 친하신 분인가봐요.]
[저 친구 있습니다.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이글이니?]
[오빠…….]
[야!!! 야익…….!]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왜 익명 보장을 안 해줘요. 첫마디 떼는데 바로 이렇게 음성변조 빼고. 밑장빼기 있습니까?]
[하하하, 아무래도 저희 음향감독님이 실수를 하신 것 같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너 죽는다?]
[네 안녕하세요, 호라이즌 빛나는 밤에 청취자 여러분. 프로즌 루이스입니다. 또 이렇게 인사를 드리네요. 모자란 점이 많지만 저희 벨져씨 잘 부탁드리구요. 다음엔 또 직접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어딜 와.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와.]
[네, 좀 있으면 벨져씨 생일이에요. 다들 축하해주시구요]
[어디야? 집이야?]
[그럼 저는 이만 자도록 하겠습니다.]
[왜 벌써 자?]
[벨져씨 조심히 들어오시구요. 리첼씨 힘들겠지만 힘내세요. 호라이즌 파이팅!]
[야!]
[벨져야 우리 팀의 이미지를 생각해.]
[팀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놈이 허구헌날 술 쳐먹고 다니고! 어?]
[어 어... 사회적인 교류는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거야.]
[교류를 인사불성으로 하냐?]
[사랑해.]
[어우, 두 분 사이가 정말 사랑이 넘치시네요. 지금 문자가 난리에요. 난리.]
[됐고, 어젠 어디서 잤어? 지금 어디야?]
[집에서 봐요 안녕 안녕 청취자여러분.]
[네, 저는 숙소입니다. 그리고 음... 우리 숙소에 아주 큰일이 생겼어요.]
[레나가 집나갔어?]
[아뇨, 우리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잠자리를 제공해주던 침대가 무너졌어요.]
[아이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ㅋㅋㅋㅋㅋㅋ]
[야 장난치지마.]
[진짜야.... 내가 뭐하러 이런 장난을 치냐. 올때 침대사와요....]
[아니, 뭐, 어쩌다가?]
[우리 집에 기르는 개 있자나. 그 머리 길고 완전 날뛰는 비글. 어, 걔가 그랬어. 우리 숙소에 와보니까 그렇게 됐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우리 비글이 침대를 뿌셔먹었구나.]
[굉장히 사람같은 비글이 있으신가봐요.]
[네, 아무래도 저희가.... 나간 사이에 이런 불상사가 벌어졌네요.]
[알았어요. 제가 집에 갈 때 꼭 침대 사갈 테니까요. 루이스씨는 그거 고친다고 한밤중에 망치 꺼내지 말고 기다려요. 알았죠?]
[와 이 가식적인 말투 봐. 누구세요? 저 제 팀메이트를 찾는데요.]
[잘해줘도 욕이냐?]
[엉 빨리 와. 내가 밥 차려놓고 기다릴게요.]
[네가 했어?]
[샀어, 샀어, 샀어.]
[알았어요. 프로즌씨, 프로즌씨 오늘도 술 먹으러 나가면 이번엔 진짜 도어락 바꿀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아, 안 나갑니다. 벨져씨가 자꾸 저한테 집착해서 걱정이 많아요. 그래도 뭐, 오늘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요.]
[알았어. 기다려.]
[응. 사랑해.]
[어, 나도.]
[와우, 정말 사랑이 넘치시네요.]
[프로즌, 루이스씨가 워낙 못난 영혼이라 제가 거둬 먹여 살려줘야죠.]
[그래도 두 분 정말 사이가 좋아보이세요. 저도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이렇게 친하진 않거든요. 정말 스스럼없이 막대하고 그런 거 보니까 부럽네요.]
[그렇게 부러워하실 건 없습니다. 뭐, 그냥 데리고 사는 거죠.]
[루이스씨가 벨져씨를요?]
[아뇨, 그 반대죠.]
클레어는 다시 듣지 않아도 자동재생되는 라디오 내용을 떠올리며 웃다가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카메라의 사각에서 안면근육 운동을 했다. 두 사람의 스윗한 목소리와 생활감 넘치는 대화가 정말 좋아서 광대가 마구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프로는 프로. 클레어는 로라스와 함께 맡은 바 임무에 성실하게 벨져와 루이스의 집을 훑었다. 거실에서 작업실, 그리고 웬만한 연예인 저리 가라할 정도의 드레스룸에 감탄하고 대망의 침실. 클레어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봤자 별거 없다며 낮게 웃은 벨져가 마침내 문을 열고, 낮임에도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깜깜한 어둠에 클레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무엇이 있는지 채 보기도 전에 앞에 서있던 벨져가 성큼 걸어갔다. 불을 켜나 했더니.
“응? 왜 커튼이.... 뭐야. 너 왜 여기있어.”
적잖이 당황한 눈치의 벨져에 클레어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복도에서 들어오는 빛에 어슴푸레 비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은 넓은 방 안에 떡하니 자리한 침대와, 그 위에 앉아 이불뭉치를 살펴보는 벨져였다. 이불뭉치가 꿈틀거리고 머리가 빼꼼 튀어나왔다.
“야, 좀 일어나봐. 야.”
당황해서 커졌던 벨져의 목소리가 조금씩 다정해졌다. 촬영중인것도 잊었는지 돌아누운 루이스의 어깨쪽으로 추정되는 이불뭉치를 흔들며 고개를 숙여 속삭이는데, 그 모습이 스윗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다 뽀뽀하도 할 기세라 클레어는 눈을 크게 떴다. 스태프들도 모두 숨죽이고 점점 작아져 속삭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
“아쫌....멍청아.... 시차....”
벨져의 끈질긴 질문 끝에 마침내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민 루이스는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잔뜩 긁힌 목소리로 짜증을 내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벨져는 그제야 루이스에게서 떨어져 침대에서 일어났다. 완전 낭패라는 표정이었으나 차마 촬영중이니 나가라고 할 수 없었는지 클레어와 로라스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안방 문을 다시 닫았다.
“죄송합니다. 해외스케줄때문에 일정이 꼬였나봅니다.”
“아, 괜찮아요!”
“넘어가야죠 뭐.”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자 담당 피디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이곤 주방을 보여주겠다며 방송용 미소를 띠웠다. 아마 이 쯤에 편집이 들어갈 것이다. 클레어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한 주방의 모습에 감탄하고, 로라스가 요리를 즐겨하냐고 묻자 벨져는 요리사가 휴가를 가면 가끔 한다고 능청스레 대답했다.
앞에 있었던 헤프닝과 방송분량을 위해서인지 앞치마까지 찾는 그를 보며 클레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팬들이 선물해줬다며 카페 원더 코스튬의 앞치마를 찾아낸 벨져가 허리끈을 질끈 묶었다. 그 팬이 누군지 몰라도, 이 방송이 나가면 꽤나 뿌듯하리라. 그리고 벨져 홀든의 가르송 앞치마 하나에 몇 명이 행복해질지. 클레어는 너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며 포즈를 잡아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로라스가 원래 토끼 귀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을 꺼내는데 어찌나 고마운지! 클레어는 로라스를 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침실을 공개하지 못하는 벨져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달칵. 문이 열렸다.
“어?”
벨져에게 쏠려있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퀭한 얼굴의 루이스가 반쯤 풀린 눈으로 비척비척 주방으로 걸어오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곤 얼이 빠져있는 벨져를 슥 쳐다봤다.
그리곤 다가와 가만 서있는 손을 뻗어 벨져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쪽. 물기어린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적나라한 소리에, 눈앞에서 뭐가 벌어졌는지 순간 공황상태가 된 스태프들의 눈이 흔들렸다.
대체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정작 입을 맞춘 장본인은 경악에 빠진 사람들을 뒤로하고 자기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덜 풀린 눈으로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당황하기는 벨져도 마찬가지였는지, 화장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새끼야!”
“하하! 오늘도 사이가 좋군! 보기 좋은 우정일세!”
아니 대체 어느 정도로 사이가 좋으면 촬영팀도 인식 못할 정도로 비몽사몽인 사람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뽀뽀를 할 수가 있는 거죠? 클레어는 묻고 싶었으나 벨져가 머리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는 게 더 빨랐다.
“오래 같이 살다보니....”
포기했는지 벨져는 영혼이 탈곡된 표정으로 씨도 안 먹힐 변명을 힘없이 내놓았다. 워낙 순식간에 잡아채서 입술을 훔친 분이 오 년째 동거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번 주 방송은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할 판이었다. 콩깍지가 껴서 그렇지, 원래 이 오빠들은 뽀뽀가 생활이고 습관이라는 걸 떠올린 클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벨져에게 동조해주었다.
“하긴 벨져씨는 루이스씨랑 동거한지 오래되셨죠?”
“선수 생활할 때는 숙소에서 같이 살았으니. 거기다 유명한 징크스도 있으니 그렇겠지. 하하. 드렉슬러도 술을 마시면 자주 주변 사람들한테 뽀뽀를 한다네.”
“원래 자주 저럽니다. 주로 자기 내킬 때.”
“아, 그럼 오늘은...”
“자기 기분이 괜찮은 거죠.”
“하하하. 선수 생활 할 때야 같이 생활하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활동을 따로 하니까. 부딪히는 일도 많기 마련이지. 선수 생활 후에도 이렇게 잘 지내는 경우는 드물고.”
이해한다는 로라스의 말에 벨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곤 화장실 문을 가리키며 혀를 끌끌 차는데, 그때 또 기가 막히게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오는 수증기와, 젖은 루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주방에 있는 촬영팀을 못보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는데, 들어갈 때와 달리 아래만 챙겨 입어서 새하얀 등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떨리는 마음에 클레어는 포옥 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노출하는 법이 없는 프로즌이다. 그런데 졸지에 서비스 대방출!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클레어는 피디님을 꼬셔서 편집 전 필름을 꼭 복사해서 개인소장하리라 다짐했다. 이건 꼭 소장해야해! 방송인의 마음보다 팬의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럼 다시 갈까요?”
잠깐 깜짝 출연했던 루이스에게 쏠렸던 제작진의 시선이 다시 벨져에게 행했다. 프로즌 루이스도 루이스지만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벨져 홀든이니까. 클레어는 웃으며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그러니까, 분명.
달칵.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만 고개가 돌아갔다. 청바지에 후드티, 가벼운 집업재킷을 걸친 루이스가 촬영팀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도 적잖이 당황한 듯 했지만 곧 침착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금방 나갈게요.”
“어디 가는데!”
“밖에.”
“아, 저...!”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차키를 가지고 무심하게 손을 흔든 루이스는 그대로 현관을 향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 하고 작게 낸 목소리에 가슴이 기대감으로 콩닥거렸다.
“오랜만이네요, 클레어씨. 로라스씨도, 수고하세요.”
어쩜 우리 프로즌 선수는 피곤한 얼굴도 멋지신지...! 클레어는 잠시 카메라를 꺼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결승전 축하무대를 하러 갔다가 무대 뒤편에서 복잡한 케이블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줬을 때도 꼭 저런 얼굴이었는데. 클레어는 잠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도리 저었다. 아무리 사랑에 빠지기 쉬운 십대 소녀라지만 그래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에는 저스티스리그의 메인 간판 클레어 스미스여야 했다.
그래도 악수 정도는 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지만 이미 닫힌 현관문을 보고 있어봤자 나간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자 뚱한 표정의 벨져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무겁다. 클레어는 일부러 발랄하게 박수를 치며 묘한 기류를 환기해보았다.
“자자, 그럼 다시 힘내서 가자구요!”
“벨져군의 요리 얘기 중이었지?”
“뭐, 늘 있는 일이니까요. 신경 쓰지 마시죠. 뭐, 저 박정하고 메마른 놈의 실체를 까발리셔도 좋습니다. 하하.”
아무리 봐도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지만 그의 미소만큼은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클레어는 그를 따라 웃으며 후에 두 사람이 크게 싸우지 않기를 바랐다. 안 싸우길 바라는 건 오빠들이 늘 화목하고 화기애애하길 바라는 팬의 입장으로 생각해도 무리다. 안 그래도 허구한 날 치고 박고 싸우는데. 클레어는 아까부터 식탁 위에 있던 상자로 그의 관심을 돌려보았다. 그래도 일단은 방송중이니까.
“어머, 그런데 이건 뭐예요? 저희 주시는 선물?”
“아, 잠시만요. 우리 잠꾸러기걸수도 있는데…….”
박스와 쇼핑백을 열어본 벨져의 표정이 묘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표정에 클레어는 빼꼼 내용물을 들여다봤다. 흘긋 뭔가 보이긴 했는데, 금방 상자가 닫히는 바람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애초에 남의 물건인데다 벨져도 루이스가 사온 거라며 금방 치워버렸다. 잠시 있었던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이라는 듯이 촬영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진행됐고 클레어는 만족스럽게 컷을 외치는 피디의 목소리에 어깨에 주고 있던 힘을 뺐다. 일이 끝나니 완전히 팬의 마음이 되어버려서, 꼭 관광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레어! 다음 스케줄 가야지!”
“네, 가요!”
클레어는 매니저가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스태프와 로라스, 작가님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담당 피디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보이질 않았다.
“피디님 먼저 가셨어요?”
“아뇨. 아까 얘기하고 계시던데.”
“감사합니다!”
과연 주방 쪽으로 가니 벨져와 얘기를 나누는 피디가 보였다. 뭔가 자기들끼리 작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아 클레어는 멀찍이 떨어져서 손을 흔들었다.
“감독님! 그럼 이만 가볼게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 응. 조심히 들어가고.”
“네! 벨져씨도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어서 들어가 보라며 손짓하는 피디님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클레어는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그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희가 방송생활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는 피디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평소처럼 못 들은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순수한 호기심에 벽에 바싹 붙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바로 의자가 끌리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서두르라는 매니저를 따라 나왔다.
딱히 오늘 촬영에 문제될 건 없었고, 굳이 있다면 루이스의 난입인데 그것도 그렇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물론 중간에 기습뽀뽀가 좀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로라스의 말처럼 오래되고 스스럼없는 친구사이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애정표현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클레어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타려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손바닥을 짝 쳤다. 그리고 감격해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매니저의 구박에 다시 냉큼 차에 올랐다.
설마 저 오빠들 사귀나? 그래서 그런가? 클레어는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아무리 두 사람이 잘 생겼고, 쉬레의 프로즌 앓이가 대단하고, 프로즌도 못지않게 쉬레를 챙기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클레어가 내적갈등을 하는 사이 차는 매끄럽게 움직여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 위를 달렸다. 클레어는 핸드폰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기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단 말인가. 우리 오빠들이 같이 살겠다는데. 클레어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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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오후, 커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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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성 ㅇㅅㅠ...
“많이 기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엇, 아, 아니오.”
토니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지는 그를 기다리며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깜빡 졸았던 릭은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릭의 앞자리에 앉은 그는 지하연합의 영웅, 루이스였다. 공성 중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사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신입사원의 자세로 돌아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꼿꼿이 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싸한 기백이 느껴져 존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릭은 어두운 무표정의 영웅을 앞에 두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후드 때문에 진 그늘 때문인지 공성에서 볼 때보다도 더 분위기가 무거웠다. 루이스는 테이블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켰다. 영국인이라 틀림없이 홍차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유리창을 통과하는 강렬한 햇빛이 그를 비췄다. 햇빛 때문인가, 흰 피부며 새빨간 눈동자, 선이 고운 턱선이 어우러진 옆얼굴이 그림 같았다. 꼭 도나우 강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온갖 색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순수하게 감탄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크.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방금 그 노골적인 시선은 실례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릭을 마주했다. 무표정인건 여전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그늘이 걷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침묵이 무겁다. 릭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미건조한,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다. 친구 소개로 여자를 만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바지 위에 적당히 닦으면서도 릭은 루이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토니가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겨서 대신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딱히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한 공기가 불편하다. 릭은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상대를 잠시 떠올렸다가 지워버렸다. 아무리 간부라고 하지만 영웅씩이나 되는 사람을 대신 보내다니. 릭은 토니가 제게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깨닫는 동시에 졸지에 대신 체면치례를 하러 나온 그에게 미안해졌다. 며칠 야근을 하다 온 자신도 자신이지만, 애써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는 상대가 신경 쓰였다.
“그…….”
말을 꺼내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제게 향하는 또렷하고 맑은 눈에 릭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 다른 게 아니고, 괜찮소?”
“예?”
망했다. 릭은 어색하게 웃는 그대로 굳었다. 다른 괜찮은 말도 있을 텐데 고작 괜찮냐니, 적어도 그가 소화하는 업무의 양과 스케줄이 평범한 회사원인 자신보다야 많을 텐데! 뻔히 알면서 이도 저도 아닌 긁어 부스럼으로 자폭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았다.
“크흠. 괜찮습니다. 덕분에.”
스위치를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릭은 멍하니 뒷머리를 긁던 손을 내렸다. 웃었다. 잠시였지만, 분명 웃었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니, 애초에 사람이기는 했구나. 살짝, 눈꼬리가 휘는 게 예뻤다. 순간이었지만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것도 예뻤다. 남자에게 비교할 말은 아니지만 꼭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릭은 어디에선가 아침 카페 창가에서 봤던 물망초를 떠올렸다가 꿀꺽 침을 삼키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지만 그래도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한결 풀어진 건 분명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종업원이 커피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릭은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포옥 숨을 몰아쉬었다. 강한 햇볕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데 여긴 왜……. 아, 아니지.”
“피곤하시면 들어가 쉬셔도 됩니다.”
“하하, 그건 아니라오.”
커피를 젓던 그가 고개를 들어 릭을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운데 마냥 싫지는 않다. 릭은 검지로 무릎을 톡톡톡 두드렸다.
“토니가 당신을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얘기를 해보라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숨을 쉰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머리를 받쳤다. 근심에 휩싸인 얼굴을 내려 보고 있으니 왠지 손을 뻗고 싶어진다.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싶었다.
“조언자가 필요하단 뜻이 아니겠소. 아니면 가볍게 사귈 친구라거나.”
릭은 충동을 억누르며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사회인에게 학습된 본능과도 같은 처세술은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릭을 잠시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앉았다. 김이 오르는 커피를 바라만 보고 있는 그에게, 릭은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밀어주었다.
피곤할 땐 단 게 좋다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완곡한 거절에 릭은 조금 서운해졌다. 하지만 강요를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릭은 바구니를 다시 제자리로 당겼다.
“다는 그렇고, 반만…….”
씁쓸하게 거절당한 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시 무르기 전에 초코칩쿠키를 반 잘라 내밀자 입에도 안 댈 것 같던 그가 쿠키를 받아 입에 넣었다.
“여긴 쿠키도 제법이지만 스콘이 제일이라오. 커스터드 크림도 일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잘 먹는 게 뿌듯해 릭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그를 바라봤다. 열심히 쿠키를 먹던 루이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다네요.”
“하하, 그야 물론 초코칩쿠키니까.”
“그러게요.”
릭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잘 먹는 걸 보니 기쁘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묘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토니가 마음을 달래려고 한 거라면 더이상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스터, 저는…….”
“아, 부스러기 묻었소.”
릭은 손을 뻗었다. 뒤로 물러나는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놀라 커진 눈이 귀엽다. 영웅이 아닌, 루이스의 얼굴이 이런 걸까. 릭은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이거 실례를. 거기가 아니라 이쪽이오.”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지르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자신의 입술 왼쪽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쿠키 부스러기를 뗀 루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라오.”
루이스는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커피를 마셨다. 커피잔을 쥐는 손가락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붉게 튼 곳이며 분홍색 새 살 위로 다시 새 상처가 생긴 게 그가 짊어진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에서 책을 들고 있을 때와 공성을 할 때의 그는 정말 다르고,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평화로운 쪽이 좋았다.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평범한 서점 직원이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랬으면 희고 모양 좋은 손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평소엔 괜찮습니다.”
“아니, 미안하오. 그런 게 아니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괜찮다며 커피를 마시는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잠시 어렸다 사라졌다. 혹시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 릭은 필사적으로 무마할 말을 찾았다.
“정말로, 그래서 본 게 아니오. 그게……. 예쁜 손이라 생각해서.”
“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이걸로 오늘만 두 번째다. 이미지는 완전히 망했다. 이게 소개팅이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남자한테 이런 작업멘트를 해서 무얼 한단 말인가.
“톰슨씨.”
“예, 아, 아니. 음.”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누그러진 표정이 어째 저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아 릭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연하의 남자에게 위로를 받는 직장인이라니. 릭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본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는 건 처음이라오.”
“그렇군요. 저한텐 꽤 익숙해서, 죄송합니다.”
“익숙하다니……. 아.”
릭은 잠시 광장에서 게이트를 여닫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능력자들을 이동시키느라 바빠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서점에 서있는 그에겐 제 모습이 보였을 터였다.
“자주 뵙기도 하고요.”
“그야 그렇소만.”
“전 톰슨 씨의 상사도 아닙니다.”
“하하하, 그대를 상사로 두면 내 일이 절반은 줄어들 것 같소만.”
“글쎄요.”
어디 그게 쉬울 것 같으냐는 듯 짓는 짓궂은 미소에 릭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할 줄이야. 릭은 진심으로 대신 그를 보내준 토니에게 감사했다. 덕분에 일주일의 스트레스가 따스한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릭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생각한 것만큼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매번 미안해하는 토니보다 대하기 편했다.
“토니가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딱히 그와 많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오.”
“그럼…….”
“그가 미안해할 뿐이지.”
“…….휘말려든 쪽이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평범한 일상을 누릴 땐 그게 귀한 줄 모르죠.”
덤덤하게 말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삶, 갑작스러운 사건. 송두리째 바뀌는 삶. 릭은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남자를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 애틋한 눈빛으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듯이, 그 먼 곳을 그리는 눈에 릭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가슴 위에 올라온 돌은 조금씩 무게를 더할 겁니다. 결국에는 짓눌려버릴지도 모르죠. 그땐 이미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죠.”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루이스는 경고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릭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릭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까 싶을 정도로, 그는 릭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은 매력적이니까요. 누구든, 붙잡으면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있소?”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릭이 아는 루이스란 사람은 스카우터도 아니거니와 이런 걸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릭에게 루이스는 어디까지나 연합의 리더이자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어째서 연합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지우려 하는가. 예전의 평범하고 로맨틱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고, 또 전쟁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전쟁이 가져다줄 명예도, 부도,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릭 톰슨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글쎄요.”
릭이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쓰게 웃는 그의 눈은 후드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있을 곳을 정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겁니다. 경험자의 충고라고 해두죠.”
“......”
“그럼 저는 이만. 다음에는 토니가 나올 겁니다.”
루이스는 단숨에 잔을 비우곤 테이블 위에 두 사람 분의 커피값을 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그대로 릭을 지나쳐갔다. 싸한 냉기가 릭을 덮쳐왔다. 이대로 보내기엔 석연치 않다.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지만, 릭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루이스!”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말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릭은 깜빡이는 루이스의 눈을 보며 마침내 입술을 뗐다.
“후회하오?”
“…….”
루이스는 시선을 피했다. 또, 그 눈이다. 릭은 숨을 죽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있던 루이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릭은 카페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등을 지켜봤다. 끝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릭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두 사람분의 커피값을 테이블 위에 놓고 루이스가 두고 간 지폐는 지갑 안쪽에 넣었다.
날씨가 좋다. 릭은 바로 게이트를 여는 대신 조금 걷기로 했다. 빼먹은 게 있나 싶어 돌아본 창가 자리엔 쿠키 반쪽과 다 식어버린 커피만이 남았다.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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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키스할래요?"
대답할 새도 없이, 그의 눈이 감겼다. 속눈썹이 떨리며 다가오는 입술을 밀어낼 수 없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이대로 끝나는 게 아쉬워 다이무스는 입을 벌려 입술로 그의 입술을 물었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연이어 맞닿았다. 친애라기엔 연인같이 다정하고, 풋풋한 키스라기엔 두 사람의 입술이 말라있었다. 다이무스의 입술은 연이은 야근과 과로로 부르트고 터져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면 따금거렸지만 키스가 주는 따스한 만족감과 포만감은 비할 게 아니었다. 혀를 넣어도 될까. 입술과 입술이 달라붙었다 떨어지며 적나라한 소리가 났다. 다이무스는 제게서 떨어지는 입술과 뒤로 물러나려는 루이스의 뒷목을 잡아쥐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응, 으응...."
쪽, 쪽 하고 입술이 맞닿는 사이 그의 숨결이 훅 끼쳤다. 다이무스는 제 가슴팍을 꽉 그러쥐는 루이스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입술을 뗐다. 훅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들숨과 날숨이 합쳐졌다.
더 해도 될까.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비추지 않는다. 그의 능력만큼이나 차가운 벽이 그의 내면을 엿보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고민하는 대신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는 순순히 눈을 감고 다이무스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윽...."
혀를 넣자마자 깨물렸다. 뭉근한 열기에 취해 흥분했던 다이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손으로 감쌌다.
"아팠어요?"
"......."
다이무스는 대답 대심 천연덕스럽게 묻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슬쩍 입꼬리를 당긴 루이스는 귓가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약하게 한다고 한 건데."
"......."
"아직 거기까진 아니에요."
한 쪽 무릎을 세워 손을 얹은 그는 선을 그었다. 이 모든 관계의 주도권은 그가 쥐고 있다. 그것을 잊지 말라는 뜻인가. 다이무스는 일방적인 선긋기에 기분이 상했다. 실망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대로 다가와 키스하자고 한 건 그다. 다이무스는 억울했다. 그리고 서운하기도 했다. 대체 이 남자는 얼마나 더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일까. 그 기약 없는 희망 고문에 다이무스는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다. 이건 부당한 처사였다. 하물며 피도 눈물도 없다는 은행원도 이정도는 아니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런 사이. 날씨 얘기를 하듯 차분한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바라보는 대신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차라리 못 알아들었으면 좋으련만. 다이무스 홀든은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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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ts루이티엔] Another.
홈에 박수로 남겨주신 리퀘 그 두번째입니다! ><
" 다이무스의 파트너로 파티에 참가하는 루이스, 그걸 지켜보는 티엔 "
살다 보면 여자라서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지금 이 성가신 일도 그 중 하나에 속했다. 루이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끈을 조여맸다. 다이무스가 속옷부터 구두, 악세서리 하나까지 빼먹지 않고 보낸 드레스와 초대장.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가지였고 루이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파스텔 톤의 연분홍 쉬폰 드레스는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디자인이지었만 첫 프롬에 가는 열일곱 소녀라면 모를까, 스물일곱씩이나 된 여자가 입는 건 아무래도 머쓱했다. 하지만 어쩌랴, 이걸 입은 제 모습이 보고 싶다는데.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다이무스가 보낸 이상 다른 걸 입을 수도 없다. 흰 레이스 속옷과 속이 비치는 얇은 슬립 차림의 루이스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살이 쪘나…."
가슴부터 허리까지 꼭 달라붙는 라인의 드레스인데 아무래도 지퍼가 잘 올라가질 않았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등 뒤로 손을 뻗었다. 힘겹게 지퍼를 올린 루이슨느 갑갑한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푹,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지퍼가 잘 잠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한 번 돌아보고, 풍성한 치맛자락을 정리한 뒤 다시 거울을 바라보자 꼭 십대로 돌아간 것 같은 자신이 보였다.
루이스는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장신구함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앙증맞은 벚꽃모양 크리스탈 귀걸이와 목걸이는 걸치고 나면 꼼짝없이 십대 소녀로 보일 판이었다. 이미 파일로 고등학교 시절의 제가 어땠는지 다 봤으면서. 장난기가 발동한 루이스는 어디 한 번 신고나 당해보란 심보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했는지 안했는지 모를 정도로 엷은 화장에, 드레스와 같은 연분홍 블러셔를 가볍게 볼에 두드린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립글로즈를 바르고 입술을 안으로 모아 물었다. 입꼬리까지 바르고 화장솜으로 삐져나온 걸 지우고, 머리도 엉성하게 모아 올려 장식핀을 꽂자 정말 파트너의 손을 잡고 졸업 프롬에 가야할 것 같았다.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마지막으로 전신 거울 앞에서 앞뒤로 제 모습을 꼼꼼히 살핀 루이스는 묘하게 들뜬 기분으로 클러치백을 챙겼다. 구두의 발목 리본을 묶다가 퍼뜩 깜빡 잊고 있었던 반지가 떠올라 급하게 깨끔발로 방에 뛰어들어갔다. 반지까지 끼는 걸 마지막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루이스는 집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리무진에서 친절한 기사님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푹신한 좌석에 앉은 루이스는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벌써부터 다이무스의 반응이 기대됐다. 프롬 같은 거 가본 적도 없는데, 첫 데이트 상대가 누구냐며 있지도 않은 상대에게 질투를 하고 꼬치꼬치 캐묻던 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여워서 사실을 말해준 적은 없지만 아직까지도 거기에 집착하고 있었다니. 루이스는 자신이 한껏 들떴다는 걸 순순히 인정했다.
진정하기 위해 손을 무릎 위에 모아 놓고 숨을 폭 내쉰 순간, 장갑을 빼먹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차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봤으나 이미 차는 멘션에서 한참 멀어진 후였다. 꼭 이렇게 하나를 빼먹는다니깐. 루이스는 맨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루이스.”
차에서 내리자 까만 턱시도를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 다이무스가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다가와 손을 잡아 손등 위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기꺼이 그의 입맞춤에 미소로 화답한 루이스는 그대로 팔짱을 끼는 다이무스의 곁에 섰다. 다이무스의 얼굴이 붉었다. 루이스는 작게 키득거리며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춘 줄 알았던 다이무스는 잠시 넋을 놓았던 게 민망해 헛기침을 했다. 이글이나 벨져가 알았다면 석달 열흘은 놀려먹었을 정도로 얼빠진 표정이었을 것이다. 루이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위아래로 루이스의 모습을 훑다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그녀와 마주봤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 메시지에 로비로 나간 다이무스가 본 것은 요정같은 소녀였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만 울리고, 멈춘 시간 속에 그녀가 웃으며 제게 걸어왔다. 한참을 루이스와 눈을 맞추던 다이무스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며 그 예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예쁘군. 잘 어울린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누구씨가 신경 좀 썼죠.”
홀린 듯 들뜬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쓸 새도 없이 루이스가 수줍게 웃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렸다. 자연스레 감기는 눈과 떨리는 속눈썹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췄다. 어여쁜 연인인 건 변함이 없지만 오늘은 더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팔짱을 끼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져 입가를 매만졌다. 역시 실수였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차림의 루이스는 좋지만 그녀에게 달라붙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은 불쾌하기 그지 없다. 게다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미성년자를 데리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네 실수다.”
“뭐가요?”
“조금만 덜 예쁘고 덜 영리하지 그랬나.”
루이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할까 싶으면서도 정말로 곤란해하는 다이무스가 귀여웠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팔에 매달려 걸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기대 이상의 반응에 즐거워진 루이스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뽀뽀했다. 다이무스가 기쁜 것인지 기분이 나쁜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 더 유쾌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왜요, 싫어요?”
반박을 하려던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목에서 빛나는 핑크색 펜던트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신경 써서 고른 벚꽃 펜던트가 루이스의 흰 피부에 잘 어울렸다. 다이무스는 손을 놓고 목걸이의 펜던트를 가볍게 잡았다. 펜던트를 만지는 척 쇄골과 목을 더듬자 루이스가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한결 낫군.”
“네?”
“목을 죄는 초커보다 훨씬 낫다는 거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쇄골에 입술을 맞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루이스의 볼이 인공적인 색에서 자연스러운 분홍으로 물든 게 훨씬 보기 좋았다.
“한 곡, 추겠나?”
“이거 지금 제가 침착해야 하는 상황 맞죠?”
“레이디.”
“발을 밟아도 화내거나 잔소리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요.”
새침한 표정에 다이무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렇게 투정을 부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다이무스는 손등으로 연인의 뺨을 다정하게 쓸며 미소를 머금었다. 저를 바라보며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보다 예쁘게 웃는 연인은 제 손에 뺨을 기댔다.
다이무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홀로 이끌었다. 허리를 감싸 안고, 흐르는 왈츠곡에 발을 움직이는 둘 사이의 거리는 손 한 뼘밖에 되지 않았다.
“겁을 준 것 치고는 나쁘지 않군.”
“가르친 선생님이 엄했거든요.”
“누군지 얼굴 한 번 보고 싶군.”
낮게 속삭이며 잡은 손을 올리자 루이스가 한 바퀴 돌며 풍성한 치맛자락이 넓게 퍼졌다. 다이무스는 매끄럽게 그녀의 등을 받치며 다시 발을 옮겼다. 그녀가 말하는 엄한 선생이란 다름 아닌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총을 쏘고 피할 땐 그렇게 유연하고 재빠르면서, 춤을 추라니 각목처럼 뻣뻣하게 굳어 손과 발이 따로 놀던 루이스가 떠올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어엿한 레이디로 만든 것 역시 자신이란 걸 생각하면 발을 밟히고 정강이를 걷어차인 것쯤이야.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허리를 잡아 들어올렸다 내려놓으며 한 바퀴 돌았다. 바로 손을 맞잡고, 리듬에 맞춰 물 흐르듯 이어지는 템포와 스텝이 뿌듯했다. 곡이 끝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다. 다이무스는 곡이 끝나며 제 어깨에서 떨어지는 루이스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를 보고 잡고 있던 오른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웃는 루이스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포옥 숨을 내쉬었다.
“후우,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아요?”
“그랬나.”
“당신이 너무 좋아해서 분위기 깨기 싫었거든요.”
“잠시 앉아있어라.”
한적한 테라스로 루이스를 데리고 나온 다이무스는 오늘 작정하고 저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듯한 루이스를 대리석 난간 위에 앉혔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흔드는 루이스는 순진무구한 소녀같았다.
물을 가져오는 길에 백합이나 흰 작약으로 꽃다발이라도 사다 안겨주면 완벽 할 것 같은데, 아쉽게도 당장 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따가, 집에 가는 길에라도 안겨주고 싶지만 그쯤이면 웬만한 꽃집은 다 문을 닫을 터였다. 다이무스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루이스의 이마에 뽀뽀했다.
그런 게 없어도 제 연인은 충분히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다이무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웨이터에게 꽃을 구할 곳이 있냐 묻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기뻐한다면 뭐든 해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정작 루이스가 들으면 애먼 꽃을 구하러 다니느니 새 구두를 신느라 지친 발을 주물러달라고 했겠지만 그는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홀로 남겨진 루이스는 테라스 문 너머로 보이는 홀에 다이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곤 조심스레 구두의 리본을 풀었다. 굽도 낮고, 예쁘긴 하지만 새 구두가 편하기란 흔치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길도 들지 않은 새 구두를 신고 춤까지 추고 나니 발뒤꿈치가 까져 쓰라렸다.
루이스는 피가 맺힌 발뒤꿈치를 슥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발이 아프니 이만 가자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구두를 벗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뻐근한 목을 돌리는데 달칵,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당연히 다이무스겠거니 하고 고개를 든 루이스는 예상치 못한 얼굴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단정하고 늠름한 외모의 그.
“티엔…?”
“루이스.”
약간의 망설임이 섞인 목소리에 티엔은 덤덤히 대답했다. 티엔은 루이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루이스가 난간에 기대고 있던 손을 떼고, 그가 잡으려는 다리를 뒤로 빼면서 몸의 중심이 뒤로 넘어갔다.
“어엇.”
“루이스!”
기우뚱 넘어가던 몸이 순간 강하게 당기는 힘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푹, 몸이 부딪히는 충격을 예상하고 질끈 눈을 감았던 루이스는 익숙한 향수 냄새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제 허리와 등을 단단히 감싸안고,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을 내쉬는 사람은 연인이 아닌 다른 남자다. 그럼에도 떼어낼 수 없는 건 어째서일까.
루이스는 다시 가슴속에 일렁이는 혼란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소중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타는 갈증을 겨우 축이는 듯이 눈을 감은 채 저를 안고있는 티엔을 마주 안지도 못하는 손으론 주먹을 쥐었다.
“저기…. 저, 괜찮.”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다오.”
“티엔….”
이미 한 차례 그를 속였던 루이스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을 빠진 걸로, 잠시 백일몽을 꾼 것이라 생각하라 해도 그는 포기할 줄 몰랐다. 다이무스는 그가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일 뿐이라 했지만 루이스는 정말로 그렇게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의 진심을 봤다. 진심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러니 다이무스의 말마따나 정말로 티엔이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일지라도 루이스는 그를 차갑게 밀어낼 수 없었다. 아니, 이미 그 날 그 키스로 루이스는 그를 자르고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럼에도 티엔은 물러서지 않았다. 설마하니 요원인 자신을 찾아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루이스였다.
티엔은 잠시 더 그러고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떨어졌다.
“미안하다.”
“…….”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티엔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루이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발목을 잡았다.
“읏…!”
“아름답더군.”
차갑게 적신 손수건이 발뒤꿈치를 감쌌다. 찌르르 올라오는 알싸한 통증에 눈을 찌푸리며 다리를 빼려 해도 티엔은 한 손으로 발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화가 날 정도로.”
물이 아니라 술을 적셔오기라도 한 건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지만 루이스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티엔은 기어코 반대쪽도 잡아쥐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달리 맨발을 감싸쥔 그의 손은 따뜻했다. 닿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그 자상한 손길에 루이스가 돌려줄 수 있는 건 아픈 대답 하나뿐인데도.
티엔은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에 빼어난 능력까지 뭐 하나 모자란 게 없으면서 왜 하필이면 제게 마음을 준 걸까. 루이스는 티엔이 안타까웠다. 비단 그의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루이스는 티엔 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경 쓰였다.
“여긴 어떻게.”
“재단으로 초대장이 왔다. 챌피가 시간이 나지 않아 대신 왔지.”
티엔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눈만은 여전히 타오르는 채로, 루이스는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면서도 가슴이 옥죄어 오는 것 같이 갑갑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유구무언이란 말은 이럴 때를 두고 말하는 말이리라. 루이스는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거기서 뭘 하는 거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이 무서운 표정의 다이무스와 그와 똑같은 표정의 티엔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이스는 놀라 걸터앉아있던 난간에서 내려왔지만 방금 전까지 긴장을 풀고 있어서였는지 힘이 풀리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이스!””
“읏!”
양 옆에서 팔을 붙드는 남자들 덕에 꼴사납게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누구고 할 거 없이 힘을 꽉 주어 잡은 탓에 붙잡힌 팔이 아팠다.
“일단 이거 좀 놓고!”
“실수는 인정하지.”
티엔이 순순히 사과하며 손을 놓자 다이무스가 그대로 루이스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그 바람에 엉성하게 올린 머리에서 장식핀이 떨어지며 머리카락이 쏟아져내렸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안은 채 불쾌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티엔을 마주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이 싸움에선 결코 물러날 수도 질 수도 없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티엔을 보지 못하도록 끌어안았다. 헬리오스의, 홀든의 다이무스 홀든이 아니라 루이스의 연인으로서 제 사람을 넘보는 불한당에겐 시선 한 줌도 허락할 수 없다.
불쾌한 건 티엔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서로에게 서로는 사랑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다. 십분 양보해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저, 다이무스.”
“이만 가줬으면 좋겠군. 보다시피, 밀회중이라서.”
“기껏 어울려주느라 다친 것도 모르고 제 욕심만을 강요하는 남자라면, 더 두고 볼 것도 없지 않겠나.”
다이무스는 티엔의 비아냥거림에 눈살을 찌푸렸다. 매서운 얼굴이었으나 티엔은 그 정도에 움츠러들 애송이가 아니었다. 다이무스도 그가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면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티엔 정은 함부로 봐선 안 될 상대였다. 루이스를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그저 눈앞의 남자가 너무 위협적인 상대라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남의 애인에게 무슨 짓이지.”
“사람을 물건처럼 얘기하는군.”
티엔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난간에 기대어 섰다. 먼저 평정심을 무너뜨렸으니 기선제압은 한 셈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건, 다이무스의 품에 안긴 루이스가 얌전히 안겨있기 때문이리라. 티엔은 한 마디도 거들어주지 않는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복숭아 빛의 하늘하늘한 드레스와 꾸밈없이 웃는 루이스. 치파오를 입은 그녀 역시 아름다웠지만, 그 차림을 본 순간 티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제가 루이스를 아는 것에 비해 훨씬 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녀의 그 미소였다. 시종일관 그를 사랑스럽단 눈길로 쳐다보는 걸 지켜보고 있는 매 순간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제 앞에선 보여준 적 없는 눈빛과 미소, 장난스레 농담을 건네며 새침한 척 애교를 부리는 것까지. 그래서 더더욱 발뒤꿈치가 까지고 새 구두가 힘들어도 기꺼이 그를 위해 감내하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티엔은 주먹을 쥐며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동안 티엔의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은 결코 짧지 않았다.
물러서야 할 때다. 지금이 아니면 그녀 앞에서 꼴사납게 질투하는 추태를 보이게 될 게 뻔했다. 티엔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여전히 매섭게 저를 경계하고 있는 다이무스를 마주봤다.
“너무 안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홀든.”
“흥. 나대지 마라.”
“루이스.”
티엔은 인사를 하기 위해 루이스를 불렀다. 단 세 글자. 특별할 것도 없는 이름. 그 뿐인데도 입에 담는 순간 혀끝이 아리도록 달았다. 이름의 주인은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들어 저를 안은 남자를 올려다봤다. 다이무스는 놓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잠시만요. 하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에 다이무스는 어쩔 수 없이 루이스를 꼭 붙들고 있던 팔을 풀었다.
“고마워요.”
“…그래. 그럼 그 답례는 다음에.”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손을 뻗은 티엔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손끝으로 만지다 놓았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제게로 향했다. 티엔은 쓰게 웃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하는 루이스의 손을 잡은 티엔은 그 보드라운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왼손 약지에 빛나는 반지가 안 그래도 무거운 마음에 추를 더했다.
손을 놓은 티엔은 쓰게 웃으며 두 사람을 뒤로했다. 멀어져가는 티엔의 등을 바라보는 루이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스는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가슴 앞에 놓고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루이스.”
“알아요.”
“후우….”
다이무스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역시 답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해졌다. 이번에는 제 편을 들어주었지만 다음에도 그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이무스는 아직도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 연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끌려온 루이스가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머리에 입술을 맞추며 등을 쓰다듬었다.
“나만 봐라.”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말고. 넌 나만 보면 돼.”
“다이무스….”
“사랑한다.”
“저도요.”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너른 품에 안겨있으면 세상의 어떤 비바람도 다 막아줄 수 있을 것같이 듬직한데, 이번만큼은 쉽사리 평온이 찾아오질 않았다. 그건 아마 문제가 밖이 아니라 제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품에 파고들어 뺨을 부볐다. 결국 오늘 데이트는 이렇게 망친 셈이었다.
“몸이 차군. 들어가지.”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있어요.”
그 와중에도 자길 먼저 생각하는 다이무스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어 다이무스를 올려다봤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안타깝고 미안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맞췄다.
“사랑해요.”
그 말에 다이무스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혀를 얽고 입안을 희롱하는 진한 키스는 녹진하게 생각을 앗아간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질척하게 젖어 섞이는 타액과 오가는 혀에 달근한 신음이 샜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는 게 좋겠군.”
“응. 그래요.”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루이스는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다이무스의 팔에 매달려 머리를 기댔다. 겨우 돌아온 그의 미소에 안심한 루이스는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안심하고 여유를 되찾은 것은 다이무스도 마찬가지라, 이제야 겨우 루이스가 벗어놓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새 구두에 발뒤꿈치가 까졌다고 한 것도 떠올랐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다리를 흘긋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뺨과 턱을 어루만지고, 떨어진 구두를 주워다 한손에 들었다.
“루이스.”
“네.”
“앞으론 미리 말해라. 무조건 맞춰주려 하지 말고.”
“그렇지만 당신이 기뻐할 것 같았는걸요. 좋아했잖아요?”
“난 네가 다치는 게 싫다.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루이스는 대답대신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다이무스는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입 맞추고, 그녀의 코를 잡았다 놓았다. 아프지 않게 한다고 했건만 루이스는 바로 손으로 코를 감쌌다.
“그럼 가지.”
“으으. 이렇게 아프게 잡는 게 어딨. 꺅!”
다이무스는 다시 구두를 신기는 대신 그녀를 안아들었다. 루이스가 귀엽게 소리를 지르며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루이스는 괜찮으니 내려달라고 했지만 다이무스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들고 테라스를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루이스는 부끄러워하며 다이무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다이무스는 시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시선들 사이에 그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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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Good evening, sir.
명왕의 아들인 루이스.
회사가 설립된지 17년. 윌라드 크루그먼은 명왕 헨리 밀러의 사택으로 가는 차 안에서 넥타이를 고쳐맸다. 검은 정장은 갓 스물이 된 청년에게 딱 맞아떨어졌다. 검은색 일색의 정장은 상복으로 맞춘 것이었다.
바로 어제 명왕 헨리 밀러 3세의 아내가 죽었다. 윌라드는 죽은 사모님을 떠올렸다. 원래는 결혼도 하지 않으려던 명왕이었으나 봄같은 사랑엔 장사가 없었다. 저와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그녀는 햇살 같은 여자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명왕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단박에 알 수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린 아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죽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세 번의 유산 끝에 어렵사리 얻은 아들은 이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였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아이가 어머니를 똑닮았다고들 했다. 명왕 헨리 밀러의 유일한 아들, 헬리오스의 적법한 후계자. 그런 아이를 굳이 제게 맡기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슬픔에 겨워 이성을 놓는 인물이 절대 아니다. 명왕은 아직도 제게 자질을 시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윌라드는 간부들이 능력의 개발을 위해 시도한 고난과 시련의 영향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짚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운전수가 차를 세웠다.
과연, 헨리 밀러의 사택은 그 경비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윌라드는 마중 나온 집사와 인사를 나누고 그의 뒤를 따랐다. 사모님과 포대기에 싸인 아기는 본 적 있지만, 이런 식으로 단 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윌라드는 집사가 안내해준 아이의 방 앞에 섰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자 어린아이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움찔, 침대 위에서 움츠러드는 작은 등과 푸른 머리카락이 단연 시선을 끌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낯설다. 윌라드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윌라드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였더라. 생각하며 침대에 앉자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동그란 이마와 붉은 눈동자, 아이답지 않게 오똑한 코며 예쁜 입술이 말 그대로 제 어머니를 똑닮은 아이였다.
낯을 많이 가린다고 한 것을 떠올린 윌라드는 경계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다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장갑을 낀 손이 문제였던 걸까. 윌라드는 장갑을 벗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입을 앙 다문 채 경계할 뿐이었다. 윌라드는 잠시 눈을 맞추다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쓰다듬자 아이는 울음을 참는 듯 울상을 지었다.
이게 맞는 걸까. 윌라드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머뭇거리다 작은 몸을 이불 채로 안아 쓰다듬고 토닥이자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이의 몸에서 나는 분냄새가 윌라드를 난처하게 했다. 윌라드는 그제서야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루이스 밀러. 그것이 바로 아이의 이름이었다.
* * *
다이무스는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다. 포트레너드로 가는 마지막 기차의 1등칸에 올라 모자를 벗은 뒤 지친 몸을 쿠션에 기댔다. 거래를 마치고 쉬지도 못한 지라 심신이 고단했다. 이 시간 포트레너드행 기차엔 사람이 없다는 게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됐다. 오늘만큼은 귀찮은 동행자 없이 홀로 한 칸을 차지하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른세수를 하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다이무스의 1등칸 문이 열렸다. 편하게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나. 역시 조금 더 들이더라도 한 칸을 전부 빌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다이무스는 폐가 되는 커플이나, 여성,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고개를 들었다.
“좋은 밤입니다.”
문을 연 사람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평범한 것도 같으면서 다시 돌아보게 되는 앳된 얼굴과, 학생 같으면서도 차분한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 곱상한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는 수더분했지만, 멀끔한 청년이란 건 변함이 없었다. 그는 옷을 정리하며 역방향 의자에 앉아 작은 가방을 내려놓고 다이무스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았다. 다이무스는 그의 긴 속눈썹이 불빛 아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걸 보다 눈을 돌렸다. 실례가 되는 행동을 해서야 신사라 할 수 없다.
아직 수염도 나지 않았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다이무스는 적막 속에 괜히 한 번 시계를 꺼내보았다. 이 시간에 능력자들의 도시로 가는 청년이라. 그렇다는 것은 그 역시 사이퍼일 가능성이 높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그리고 신경을 끄는 남자 때문에 다이무스는 눈을 떴다. 다이무스의 검은 벨벳으로 마감된 의자에 기대여 있었다.
다이무스는 다리를 꼬았다. 긴 다리가 둘 사이에 펼쳐졌다 접혔다.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외모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는 회사의 어린 물능력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호락호락하게 당할 다이무스가 아니지만, 남자가 들어오는 순간 다이무스의 휴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이무스는 어쩔 수 없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피곤해보이시는데 조금 쉬시는 건은 어떤지요, 미스터.”
서류를 보려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이무스는 활자에서 시선을 올렸다.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사르륵 그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예쁜 눈이다. 다이무스는 조악한 빛 아래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로.”
“집으로 가려고요.”
남자는 빙긋 웃었다. 소탈하면서도 온화한 그 분위기에 다이무스는 그가 중상류층의 젠트리겠거니 했다. 세워둔 검에 대해 언급은커녕 호기심이나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 상대는 드물다. 은발에 얼굴에 난 십자흉터와 검.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제 정체를 알 법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그러한 분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남자는 그 역시 잠을 자지 않기로 했는지 가방에서 얇은 포켓북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봐도 전장에 설 만한 사람이 아니다. 기껏해야 책이나 만지다 그림을 걸기 위해 망치를 드는 것이 전부인 평범한 사람. 아무리 잘 감춘다 해도 그 살벌한 경험을 한 이에게서는 티가 나기 마련인데, 눈앞의 남자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꼭 지금처럼, 책을 읽는 게 천직인 듯한 얼굴이었다. 귀족들이 가지는 오만이나 거드름같은 것 역시 보이질 않는다. 남자는 좋은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란 청년인 듯 했다. 책을 든 손가락도 남자가 험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증명하듯 희고 가늘었다.
다이무스는 남자의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쳐다보는 것은 실례다. 피곤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남자가 제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목 안쪽으로 낭패가 섞인 한숨을 삼켰다.
잠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던 다이무스는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에 깨 번쩍 눈을 떴다. 오른발이 얼얼했다. 남자는 어느새 잠들어있었고, 그가 읽고 있던 책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선잠을 깨운 것은 손에서 떨어진 책인듯 했다.
키츠의 시집. 다이무스는 책을 집어들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토끼풀꽃을 말려 만든 책갈피라니. 앙증맞은 풀꽃을 다시 끼워놓고 고개를 들자 책주인의 자는 얼굴이 들어왔다.
처음 볼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몇 번을 봐도 미려한 용모다. 남자의 자는 얼굴엔 미소가 걷혀 언뜻 서늘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감상이 다이무스의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남자를 꽃에 비유해 무엇하랴마는, 눈앞의 남자는 그가 책 속에 끼워놓은 풀꽃을 무척 닮아있었다.
작고 여린, 하얀 풀꽃. 그래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손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건드리면 녹아 사라질 것만 같은 눈송이가 손에 닿기 전의 두근거림. 손끝이 그의 푸르스름한 머리카락에 닿으려는 순간, 달리던 열차가 멈췄다. 울리는 경적소리에 다이무스는 헛기침을 하며 남자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천천히 열리는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남자는 눈을 부비며 하품을 했다.
“여기.”
“아, 감사합니다.”
남자는 책을 받아들곤 곧장 가방에 넣었다. 얼마를 잤는지, 눈이 반쯤 감겨 있다가 객실을 나오며 비틀거렸다. 다이무스는 그가 넘어지기 전에 팔을 잡았다. 남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세게 잡은 것 같아 손을 놓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였다.
또렷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다이무스의 눈을 사로잡았으나 그는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새벽의 역 안에는 당연하게도 사람이 없었다. 싸늘한 밤공기에 다이무스는 코트 깃을 여몄다. 남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마중와줄 이를 찾는 것인지. 다이무스는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목이 유독 희었다. 여즉 학생 같아 보이는 외모 때문에, 맏형의 책임감이 인 것인지 아니면 순진한 호의가 마음에 남아서인지는 모르나 다이무스는 그에게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밤의 포트레너드는 위험한 곳이라 더더욱. 그렇게 그를 따라 역을 나서는데 남자가 멈춰서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다이무스의 걸음도 따라 멈췄다.
“윌라드!”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련님.”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향하는 곳엔 다이무스가 익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윌라드 크루그먼. 헬리오스의 무역이사인 그가 어째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다이무스는 그가 남자를 도련님이라 부른 것을 떠올렸다. 도련님. 과연 이 세상에 윌라드 크루그먼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이무스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지 말라니까요. 오랜만인데 이러기에요?”
장난기가 섞인 그 목소리에 윌라드가 미소를 머금더니 남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 마구 헝클어뜨렸다. 남자는 웃으며 하지 말라고 피하고, 다시 눈을 부비더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이 시간에 따로 차도 없을 텐데 동승하시겠습니까, 홀든 경.”
“......기꺼이.”
다이무스는 검을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그는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가 보인 엷은 미소와 여유의 근원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완전히 놀아난 꼴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요. 루이스. 루이스 밀러입니다.”
그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마냥 따스할 것만 같던 손이 서늘했다.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그의 미소에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흔히들 앨리셔에게서 후광을 보는 것처럼, 그의 등 뒤에서도 은은한 달빛이 빛을 내고 있었다.
홀든가 저택 앞에 멈춘 차의 창문 너머로, 루이스가 손을 흔들었다. 다이무스는 그와 윌라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러고도 그 손의 감촉이 잊혀지질 않아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 말간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눈을 뜨면 잠든 그가 제 앞에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이무스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출근했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더해졌으나 의식하지 않으려했다. 은행원의 덕목은 정확, 신속, 그리고 냉철함이다. 다이무스는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나 숨겨놓은 아들이란 말답게 루이스의 모습은 회사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명왕의 적장자임에도 회사를 물려받기는커녕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된 그였다. 세간에서는 그가 병신이라 그렇다느니, 포악한 괴물이라 그렇다느니 떠들어댔지만 다이무스가 만난 그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마냥 기다리기를 일주일, 다이무스는 이 모두가 제 부질없는 상상에 불과하단 걸 깨닫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음을 놓은 그때, 기회는 마음을 놓은 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윌라드의 호출에 다이무스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간 다이무스는 뜻밖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윌라드의 등에선 그 무엇도 읽을 수 없다. 대체 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희열과 열기에 들뜨는 마음과 달리 냉철한 이성은 그 이유를 찾았다.
“어째서 제게.”
“그 아이가 그러고 싶다고 하더군요.”
윌라드는 자상한 미소로 돌아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윌라드 크루그먼은 그 누구보다 야망 있는 남자고, 호시탐탐 회사를 집어삼키려는 이인자다. 그런 그가 왜? 적장자를 내세워 명분을 얻으려 한다기엔 이상한 게 너무나 많았다.
가령, 지금 윌라드의 표정이라던가, '루이스'를 발음할 때면 부드러워지는 목소리와 눈매. 그런 것들이 다이무스의 위화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더구나 아이라니. 명왕의 아내가 사고를 당한 게 불과 22년 전. 그때 그가 다섯살도 안 된 아이였으니 적어도 올해 스물일곱이다. 물론 앳된 얼굴이라곤 하지만 아직까지 아이라 불릴 나이는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로군요, 다이무스경.”
윌라드는 피식 웃고는 커피를 따랐다. 진한 커피향이 사무실 가득 퍼지고, 찻잔이 다이무스 앞에 놓였다.
“제가 루이스의 후견인이 된지도 22년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그리로 가는 법이지요.”
다이무스는 진중한 윌라드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표정의 윌라드를 본 적이 있던가. 한치의 꾸밈도 없는 얼굴이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말을 고르는 중이라는 걸 명백히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다이무스는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다이무스는 그 미소와, 접힌 눈꼬리를 떠올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이 가는 법이라고 말하던 윌라드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그 미소를 두고, 자그마치 22년. 굳이 그 세월을 캐묻지 않아도 아끼지 않을 수 없으리란 건 자명했다.
그럼에도 다이무스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의문은 풀리지 않고 손톱 끝의 거스러미처럼 신경을 거슬렀다.
“명왕께서도 아십니까.”
“루이스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제게 일임했습니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더 기분이 나빴다. 그토록 경계하는 상대에게 하나뿐인 친아들을 맡기는 저의가 무엇인가. 배신을 막는다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회사도, 아들도 버리려는 것인가. 다이무스는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이무스경께선 전력을 다해 그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면 됩니다. 곤란하게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당부하는 말과 표정은 완전히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것이라, 다이무스는 더더욱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잠시 생각하던 다이무스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 임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거절할 수 없다. 다이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리지 않은 의문과 씁쓸한 심정으로 그의 사무실을 나오는데 문 앞에 서성이던 앨리셔가 다이무스를 발견하곤 다가와 말을 붙였다.
“저, 다이무스씨. 그... 저희 오빠의 경호를 맡으신다고...”
잔뜩 긴장한 얼굴의 소녀에게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셔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다행이네요! 다이무스씨라면 안심이에요.”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고 방긋 웃는 앨리셔는 정말 기뻐보였다. 그러고보면 멀리 갈 것도 없이 그의 가족이 여기 있지 않은가. 모든 형제와 가족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앨리셔라면 이 석연치 않은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일까, 양녀인 앨리셔와 루이스는 친남매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았다. 따지고 보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데 어째서 이들은 이토록 그를 염려하고 아끼는 것일까.
다이무스는 앨리셔가 구김없이 자란 것과 그의 말간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태생적인 성격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가족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다이무스는 앨리셔와 루이스가 함께인 풍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제 형제들이 모이면 일어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따스하고 평화로운 봄날의 티타임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오빠도 사이퍼긴 하지만 아버님의 능력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강한 것도 아니라 불안했거든요.”
“어떤?”
“아, 오빠는 결정능력자에요. 그래도 3급 정도지만.”
별 볼일 없는 결정능력에, 3급 능력자. 다이무스는 서늘한 손의 감촉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앨리셔와 윌라드가 이토록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당장 샬럿과 마를렌만 해도 공성에 나가는 곳이 포트레너드다.
능력에 비해 가진 게 너무나 많은 후계자. 승냥이같은 이들이 노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앨리셔는 몇 번이고 고맙다며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가 궁금해진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잡았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도, 그가 제 손에 잡혀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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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Someday
전작 Keep calm and kiss me의 후일담입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가져와봤습니다 ;ㅅ;)/
서류를 검토하던 티엔은 카페 문의 풍경이 울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던 그녀가 저를 발견하고 걸어오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티엔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정장 차림의 루이스는 티엔의 앞자리에 앉아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일 없었어요.”
“별일 없는 얼굴이 아닌데.”
그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울상을 지었다. 퍽이나 섭섭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라 티엔은 서류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루이스는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는 입술을 죽 내밀었다. 절대 일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였다. 티엔은 속에서 천천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눌렀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구요.”
“또, 그인가.”
“...오늘은 상사님께 혼났거든요.”
“그만둬라.”
티엔이 진심으로 말하며 손을 잡자 루이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티엔정에게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준 여자에겐 이미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연인이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또 모를까, 그 여자는 어여쁘기만한 얼굴을 하고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고 있는 데다 제게 접근한 것도 그 업무의 일환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직속 상관이자 연인이 다이무스 홀든이라니. 이쯤 되면 아무리 그랑플람의 아시아 지부장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찾아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티엔이 할 수 있는, 루이스가 허락한 전부였다.
“뭐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니까요.”
루이스가 슬쩍 손을 뺐다. 서운해진 티엔은 두손을 포개놓았다.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에 엎드려버렸다. 마음이 상했는데도 작고 지친 그녀가 안쓰러워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자 루이스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밀어내지 않고 제 손길을 편안히 느끼고 있는 루이스에 다시 마음이 부풀었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남은 서운함마저 말끔히 지워냈다.
“그도 그렇군.”
“그런 거죠.”
고개를 들어 생긋, 눈을 휘며 짓는 웃음이 아침 이슬을 머금은 수국같아 티엔은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바보가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맞는 말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그녀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테고, 연락도 없는 그녀를 무턱대고 기다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는 건 이 미소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마시겠나?”
“그러게요. 주문하고 와야지.”
루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티엔은 어깨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커피잔을 들었다. 티엔이 마시던 커피는 이미 반쯤 식어있었고, 처음 마실 때보다 썼다. 그러나 티엔의 눈을 찌푸리게 한 건 커피가 써서가 아니라, 루이스의 걸음걸이때문이었다. 주문을 하면서 살짝 뒤꿈치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신발이 편치 않은 게 분명했다. 티엔은 작게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루이스는 꽤 높은 굽의 힐을 발끝에만 살짝 걸쳤다.
“왜요?”
“신발에 길이 안 든 것 같아서.”
“그럼 바꿔줄래요?”
꽤나 당돌한 말에 티엔은 눈만 움직여 그녀를 마주봤다. 루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티엔은 어쩔 수 없이 따라웃고 말았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루이스는 연애에 능숙했고, 때로는 그게 거슬리기도 하지만 좋을 때가 더 많았다.
“신발 한 켤레 못 사줄까.”
“농담이에요.”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고들 하지.”
“이미 신발장 가득 신발이에요.”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티엔은 그녀의 뺨을 슬쩍 꼬집었다 놓았다. 말랑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자꾸만 루이스쪽으로 향했다.
“진짜, 당신까지 이럴 거예요?”
뾰로통하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마저 귀여워보이니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다. 티엔은 말끔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실수는 인정하지.”
“...됐어요. 하아.”
무언가 또, 제 말이 그녀의 안좋은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티엔은 종업원이 가져온 딸기 파르페와 루이스를 번갈아보고는 대신 숟가락을 들어 아이스크림을 떴다.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하면서도 입을 벌려 받아먹는 루이스의 입술과 살짝 보인 혀끝에 티엔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입술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운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맛있나?”
“스트레스 받을 땐 단 게 최고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었지?”
“글쎄, 아니 자기가 잘못해놓고 미안하단 소리도 안 하는 거 있죠?”
“그랬나?”
“그렇다니까요! 정말, 그래서 제가 고생해가면서 해놨더니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냐고 다그치고!”
“누가 누구를 탓하는 건지 모르겠군.”
티엔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에게 적당히 맞장구쳤다. 루이스는 간간히 티엔이 떠먹여주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이무스 홀든이 제게 얼마나 무섭게 혼을 냈는지 털어놓았다. 그야 물론,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굳이 위험한 선택지를 골라가며 임무를 성공시키는 부하라면 혼을 낼 법도 하다.
하지만 그 속풀이를 들으면 들을 수록 티엔은 속이 뒤틀렸다. 다이무스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부하로 루이스를 대한 것이 아니었다. 제 여자를 잃기라도 할까봐 겁이 났던 게지. 티엔은 루이스에게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다이무스 홀든에게 공감했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시키고 싶을 리 없다.
티엔은 루이스가 제 연인이었다면 당장 일을 그만두게 하고 집에 곱게 모셔두고 싶었다. 꽃을 돌보고,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저를 맞아주는 아내. 그렇게 예뻐하기만 해도 시간이 아까울 것 같은데. 티엔은 다이무스 홀든을 잠시 떠올리고는 작게 혀를 찼다.
“진짜, 걱정하는 건 알지만 서운하다니까요.”
“그럴 법도 하지.”
“하아.... 나라고 자기 걱정이 안 되는 줄 아나.”
“그리고 그건, 내 앞에서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축 쳐져서 애꿎은 파르페를 휘젓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티엔은 남은 커피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걱정하는 걸 듣고 있으면 속이 뒤틀리니까.”
“......”
루이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꽤나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붉은 눈은 여전히 변덕스럽게 티엔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티엔은 다리를 꼬고, 찻잔을 비웠다.
“다치지 마라. 몸도, 마음도.”
슬쩍, 그녀의 손을 덮었다.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빛나는 반지. 그걸 가려도 루이스는 손을 빼내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여지를 남겨주는 것때문에 자꾸만 더 위험한 상상을 하게 된다는 걸 알까. 티엔은 남은 손마저 잡아 모았다. 양손으로 그녀의 작은 두 손을 잡고, 기도하듯 모아 슬쩍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가 손을 뒤로 뺐다. 놓아주지 않고 눈만 위로 치켜뜨니 당혹인지 무엇인지, 루이스의 얼굴이 붉었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실수는 인정하지.”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놓는 척, 그녀의 손바닥에 살짝 입술을 맞추고 놓아주었다. 다이무스 홀든의 험담과 넋두리를 늘어놓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 루이스는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너무 몰아붙이면 도망가고 말 사람이다. 그쯤은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은 전혀 다른 문제라서, 잠시 충동에 흔들렸던 티엔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실은 실수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그녀를 제 옆에 두기 위해서, 적어도 제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선 참아야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을.”
루이스가 손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놓고 꼼지락거렸다. 루이스는 제게 미안해하고 있다. 그게 연정이 될지 동정이 될지는 모르는 노릇이나, 티엔은 이럴 때마다 그녀의 여린 부분을 파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음까지 전부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
“녹기 전에 어서 먹는게 좋겠군.”
“당신, 정말 뻔뻔하다니까요.”
“...그런가?”
되묻자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티엔이 내민 숟가락을 건네받은 루이스는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하다니, 모를 소리라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 약점이나 잡고.”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게 약점이 되나?”
“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흠.”
티엔은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열심히 아이스크림과 그 아래 층층이 쌓인 단 과자와 딸기를 떠먹는 루이스는 꼭 그 달디단 디저트 만큼이나 사랑스러웠고, 단 것은 입과 혀를 즐겁게 하는 만큼 몸에 해로웠다. 그녀 역시 제게 달디 단 독이 되는 것일까. 티엔은 물기에 젖어 빛나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역시, 해로운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기뻐해야겠군.”
“뭘요?”
“어쨌거나 내가 네 일부가 되었다는 거 아닌가.”
입술에 묻은 크림을 엄지로 훔치며, 티엔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돌아서고 말 임무 대상에서, 그녀의 마음에 발을 들인 상대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다. 티엔은 진심이었다. 루이스는 포기한 듯 포옥 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똑같아요.”
“뭐가?”
“나 힘들게 하는 거요.”
루이스는 숟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왼손으로 턱을 괬다. 지친 표정에 잠시 미안해지긴 했지만 티엔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 빛나는 그의 흔적을 노려보고, 루이스가 다 녹은 파르페를 흘리기 전에 서류를 정리했다. 언젠가 저 손가락에 다른 반지를 끼워주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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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추후에 책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8.
마침내 대학생활이 끝났다. 루이스는 후련한 마음 반, 어딘가 섭섭한 마음 반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숨을 푹 내쉬었다. 졸업식만 가면 이제 정말 끝이다. 루이스는 노트북을 덮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붙어 지내다시피 하다가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니 부쩍 그 생각이 났다. 루이스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을 듣는 동안, 묘하게 두근거리고 설레기도 해 루이스는 노트북을 톡톡 건드렸다.
“여보세요.”
“응, 벨져.”
“잘 끝났나?”
“응. 덕분에.”
공사장에 있기라도 한 건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아니, 그냥.”
그냥. 보고싶어서. 보고싶다는 말은 목에 걸린 것 처럼 간질거리며 나오질 않았다. 루이스는 목에 걸린 것을 털어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벨져의 목소리에 짙게 배인 피곤이 신경쓰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지내는지도 한 번 묻지 않은 게 떠올랐다. 시험기간이라 바쁘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무심했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바빠?”
“아니, 안 바쁘다.”
“그럼 만날래?”
“그래. 그 카페에서 보도록 하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알았어.”
벨져는 걱정과 달리 별로 기분이 상하거나 서운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어질러진 방을 슥 둘러봤다. 오랜만에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냉장고도 좀 채워놔야지. 전같았으면 바로 시작했을 수순의 앞에 자연스럽게 벨져가 떠올랐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벨져가 말한 세 달도 끝난다. 루이스는 할 일을 적어놓은 캘린더를 펼쳤다. 알바며 과제, 팀플이며 시험으로 빼곡한 봄학기와 달리 가을학기 이후에는 과제 기한이 적혀있는 게 전부였다.
루이스는 캘린더를 덮고 일어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샤워도 하고, 오랜만에 사람 꼴로 나가기 위해 아껴둔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딱 분침이 절반 지나 있었다. 루이스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고 잠바를 걸쳤다. 벨져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집에서 가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키홀더와 지갑, 핸드폰을 챙긴 루이스는 집을 나섰다. 가지만 남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바람이 매서웠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티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어차피 요 앞이니까 이 정도야 어떠랴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험기간이라 꽉 찼던 카페들도 방학을 맞아 한산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들어선 루이스는 매장을 슥 둘러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은 루이스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 여기서 만날 때만 해도 해가 쨍하니 내리쬐던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바뀌고, 아메리카노 한 잔도 얼음이 담긴 유리잔 대신 따뜻하게 데운 하얀 머그로 바뀌었다. 루이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따뜻한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세 달. 벨져가 얘기한 세 달은 루이스의 학기와 함께 시작해 끝나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지난 시간을 천천히 되돌아봤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감상 속에 어느 순간 제가 섞여있었다. 그 해의 겨울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이었다. 결코 닿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고, 다른 세계를 동경할 새도 없이 주어진 것에 아등바등하느라 꿈을 꿔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욕심이 났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손을 내미는 그가 너무 눈부셔서, 닿고 싶었다.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시지프스가 되는 건 아닐까 했다. 신들의 아량으로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뻐기다가, 결국은 끊임없이 무거운 돌을 산 꼭대기까지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인간.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되도 않는 헛된 꿈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한 것도 벌써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은, 벨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사람은, 버려지는 것에 대해 어떠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는 저를 꾀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첫만남이 너무 극적이어서, 그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를 감싸쥐었다.
까만 수면에 자신이 비쳤다. 하고 싶은 것은 확실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계절의 끝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루이스.”
“왔어?”
“기다렸나?”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부쩍 수척해진 얼굴의 벨져가 장갑을 벗으며 다가와 앞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었다. 눈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이 안쓰러웠다. 벨져는 손을 뻗어 머그를 잡고 있던 루이스의 손등을 감쌌다. 따스한 온기에 루이스는 그를 향해 슬쩍 웃어보였다. 벨져는 대번에 혀를 찼다.
“손이 이게 뭐냐.”
“요 앞인데 뭘.”
“미련하긴.”
“너는. 잘 지냈어? 피곤해 보이는데.”
“못 지낼 것도 없지.”
못 지낼 것도 없다면서, 그 또렷한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제 손등을 감싸고 온기를 나눠주는 게 간질간질해 루이스는 숨을 죽였다. 이 모든 것이 깨면 사라질 꿈이 아니기를 바라. 잠시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 손의 온기와 감촉에 낮게 일던 파도가 가라앉았다.
“벨져.”
벨져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그 시선에 잠시 생각을 골랐다.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에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그 날 공성이나, 무슨 일이 있었다, 내일은 뭘 하고 밥은 뭘 먹을까. 정말 일상적인 얘기밖에 안 했구나. 그런 생각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등을 감쌌다.
“너는, 잘 지냈나?”
“응. 이제 다 마쳤지.”
“학사모 쓸 일만 남았군.”
“너는?”
“나?”
이런 질문이 의외라는 듯 벨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피식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기졸업했다. 별로 흥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하겠더군.”
“너 답네.”
“당연하지.”
수긍하자 벨져는 더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받아 차를 주문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에 루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벨져는 테이블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벌써 겨울이네.”
“오늘은 눈이 온다더군.”
“그래? 벌써 첫눈이 내릴 때가 됐구나.”
루이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했더니, 벌써 비 대신 눈이 올 날씨가 되었나보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금방 벨져의 차가 나왔다. 벨져가 시킨 진한 홍차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건 뭐야? 냄새 좋네.”
“얼그레이.”
벨져는 마셔보라는 듯 찻잔의 손잡이를 루이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금테가 둘러진 잔을 조심스레 잡고 입술을 댄 루이스는 가까이서 올라오는 향기에 차를 마시는 건지 향기를 마시는 건지 모를 기분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벨져 쪽으로 손잡이를 돌려놓은 루이스는 다시 머그를 잡았다.
“그냥 그렇네.”
“다음에 제대로 우려주지. 홍차는 전문점이 아닌 이상 제대로 맛을 못 내더군. 그래도 이 정도면 쓰레기는 아니지만.”
루이스는 바로 홍차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예 양팔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벨져가 한참 베르가못이니, 찻잎의 원산지니 하는 얘기를 하다가 말을 멈췄다. 너무 가까이 갔나 싶어 벨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당겨 의자 쿠션에 몸을 기댔다.
“밥은?”
“어…, 먹었을 걸?”
일어나서 메일 확인하고, 하던 일을 마치기까지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노트북의 글씨만 보고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라고 하는 게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벨져를 만나러 나오며 쐰 햇빛이 사나흘 만이었다. 비타민D를 위해 광합성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는데 벨져가 혀를 차더니 반도 마시지 않은 차를 두고 일어섰다.
“가자. 밥부터 먹고 차를 마셔야지. 빈 속에 그 쓴 걸 집어넣어?”
“어어, 너는? 점심 먹고 온 거 아니야?”
“이 멍청아,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나와.”
“넌 몇시에 먹었는데.”
“하아, 나도 안 먹었으니까 밥부터 먹자고.”
신경질이 섞인 벨져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벨져는 제 손목을 덥석 잡아 끌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에 끌려 가면서도, 피식 웃음이 샜다. 이 짜증과 신경질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반가웠다. 고작 몇 주 못 본 것 뿐인데 한 일 년은 못 본 것처럼 그리웠고, 또 반가웠다. 그간의 공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끌어당겨주는 게 고마웠다.
“뭐, 먹고 싶은 건?”
“별로 없는데.”
“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쯧, 그새 잘 먹여놨더니 이 꼴이 뭐냐.”
“너도 그새 말랐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계산대 앞에서 장지갑을 꺼내들었다. 루이스도 지갑을 꺼냈으나 벨져는 이미 카드를 내민 후였다. 뭐 그런 걸 꺼내냐는 듯 벨져는 그 잘생긴 얼굴의 미간을 찌푸렸다.
“넣어둬.”
“어떻게 커피 한 번을 못 사게 하냐?”
“그 돈을 누가 주는데. 밥이나 제대로 사 먹어. 굶고 다니지 말고.”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말이건만 벨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그런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제 지갑에 들어있는 건 벨져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기도 하고, 벨져에게 이 정도 커피값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은 그냥 기분이라도 내게 해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한 잔 할래?”
“…나쁘지 않지.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고. 그 다음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계산을 하는 사이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벨져의 시선에 루이스는 그를 마주봤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싶어 제 옷차림을 슥 보는데 벨져가 들고 내려온 목도리를 두르고 매듭을 지어주었다.
“나 추위 별로 안 타는데.”
“흥, 그래놓고 감기나 걸리지 마라.”
벨져는 영수증 대신 카드만 받아 지갑에 넣고는 돌아섰다. 루이스는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 훈기가 내려오는 카페의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목을 감싸면 체온 유지가 잘 된다던데, 벨져가 하고 다니는 거라 그런지 맨살에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벨져는 차를 빼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버렸다. 같이 가재도 그는 듣는 법이 없었다. 따라나가려 하면 또 짜증을 낼 게 분명했고,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해진 채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루이스는 한 발 양보했다. 사실 늘 양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 홀든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지금도 흔들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감상에 젖어 카페 문 앞에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코 끝에 차가운 게 닿아 녹아내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치고 있으니 아직 덜 얼은 진눈깨비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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