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던가, 벚꽃의 꽃말은 봄학기 중간고사요, 단풍은 가을학기의 중간고사니 대학생들에겐 꽃놀이도 단풍놀이도 없다고.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며 휴강을 때린 학과장님 대신 휴강을 고지한 타라는 재킷을 한 손에 들고 교정을 걸으며 예쁘게 물든 단풍을 올려다봤다.
담배, 혹은 커피가 고파지는 완벽한 날씨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긴 교수도 학생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교수실엔 중간고사 시험지가 쌓여있고, 당장 모레까지 줘야하는 원고도 타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라는 지름길로 곧장 가는 대신 교정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길로 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단풍보다 더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하얀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뭐하는 거지?”
“아, 그게 교수님 머리에 단풍잎이 붙어서…. 떼어드리려고….”
“그럼 부탁할까.”
타라는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 영리한데다 성실하고, 예뻐서 꽤나 인기가 있는 1학년 대표. 첫학기 문학의 이해에서 냈던 레포트도 꽤 괜찮았고, 그냥 그저 그런 학부생과는 다른 원석이라 눈여겨보고 있는 학생이기도 했다. 물론 나름의 호감을 품고 있는 것과 학부생활은 별개긴 하지만.
조심스레 머리로 손을 뻗는 그녀의 희고 가는 손목을 본 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푸른 핏줄이 보이는 손목 안쪽. 이건 꽤 위험할지도. 그래서 시선을 내리면 전공책을 든 손 아래로 좀처럼 드러내는 일이 없던 흰 다리가 보였다. 팔랑거리는 연분홍 스커트에 차분한 블라우스. 내내 스니커와 운동화를 벗어나는 일이 없던 신발도, 꽤 굽이 높은 메리 제인. 머리를 스치고 떨어지는 손길에 타라는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치마 입었네.”
“아, 네.”
“어디 가?”
“앤지가 소개팅시켜준대서요.”
소개팅. 타라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려다 손을 재킷에 넣었다. 걸음을 늦추자 반 걸음 앞서 걷는 루이스의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흰 목이 한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루이스는 청초한 외모와 달리 엄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타라는 루이스가 과제로 낸 시를 떠올렸다. 그녀의 글도 그랬다. 한없이 차가운 이성에 꽃잎이 부서지는 것 같은 감성이라니, 누구나 탐을 낼 법한 녀석이었다. 물론 아직은 갈고닦아야 하는 원석에 불과하지만.
“으앗.”
“조심.”
반 걸음 앞서 걷던 루이스의 발목이 옆으로 꺾이며 몸이 휘청였다. 그대로 넘어지려는 루이스의 팔을 잡아챈 타라는 루이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놀라 커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루이스가 눈을 깜박였다.
“죄, 죄송해요.”
“힐을 신을 땐 조심해야지. 발목은.”
“괜찮아요!”
타라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치마 안쪽이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크게 꺾였던 발목을 쥐자 한 손에 잡혔다.
“아야야.”
“이래도 괜찮다고?”
살짝 힘을 주어 잡자 바로 새어나오는 약한 신음에 올려다보며 씩 웃자 루이스가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교수실 바로 앞이니까 쉬고 가지.”
“됐어요!”
“그래? 스타킹 올 나갔는데?”
루이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기껏 차려입고 나온 애를 놀려먹는 자신도 참 짓궂고 유치했지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루이스를 보는 거에 비하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갈래, 말래?”
“…또 부려먹으실 거잖아요.”
“안 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약속.”
타라는 뺨을 불리고 입술을 내밀며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쩜 얘는 토라진 것도 귀엽다니, 더 놀리고 싶어지게. 타라는 머릿속에 시 한편을 써내리며 한산한 교정을 걸었다. 따라오는 구두소리가 즐거웠다.
“앉아.”
교수실에 도착한 타라는 루이스를 소파에 앉히고 보건실에서 받은 구급상자에서 스프레이 파스와 붕대를 꺼냈다.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닌데 루이스는 처음처럼 불편해했다.
“왜 이래, 처음도 아닌데.”
“그게…., 아!”
“뿌린다.”
타라는 루이스의 구두를 잡아 발목에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부어오르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단단하게 붕대를 감는데 까만 구두의 빨간 밑창이 눈에 들어왔다. 타라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그게 뭐?”
“그게, 교수님이 이렇게 친절한 게… 처음이라….”
“내가?”
고개를 올려 묻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움 받을 짓을 했던가, 타라는 붕대를 고정하며 지난 학기를 떠올렸다. 술자리에서 꽐라가 안 되게 도와주고, 들러붙는 녀석들 걷어주고, 힘내라고 에너지 음료도 쥐어줬는데. 물론 그와 별개로 다시 써오라며 다섯 번 쯤 작품을 돌려보내고 기말 레포트도 안 받아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수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로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교수님 항상 저만 갈구시잖,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다고?”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난 다른 애들한테도 그러는데? 너 한정 아니야. 그거.”
“…….”
루이스가 억울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타라는 책상 앞에 앉아 등을 기댔다.
“근데 어쩌냐, 난 너한테 밉보이는 거 싫은데.”
이번엔 당황. 늘 생각하는 거지만 놀란 눈이 토끼같아 자꾸만 놀리고 싶어진다. 유치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하지마라.”
“…뭘요?”
“소개팅.”
“왜요?”
“내가 싫으니까.”
이번에도 놀랄 줄 알았는데, 놀라는 대신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타라는 책상 위에 올려둔 루빅스 큐브를 잡아 돌렸다. 낮술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 생각을 다 거치지 않고 나오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입가에 여유롭게 미소를 띠우는 건 잊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반. 타라는 울리는 루이스의 핸드폰 진동에 그녀를 바라봤다.
“저기, 교수님.”
“받지마. 가지도 말고.”
“저한테 왜 이러세요?”
“…글쎄. 왜 이럴까.”
“교수님 평판 좋은 것도 알고, 교수님 강의도 좋은데요…. 자꾸 이러시는 건….”
“귀여워라. 지금 그걸 다 믿었어?”
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순식간에 맹해지는 루이스의 표정이 볼만했다. 입가를 가리고 웃던 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뭐해, 전화 안 받고.”
루이스는 화도 못 내고 가방 속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타라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루이스가 황급히 볼륨을 줄였다.
“응, 응. 미안. 곧 갈게. 응. 이따 얘기해.”
타라는 제게서 고개를 돌리고 전화하는 루이스를 보며 웃음을 거뒀다. 싸하게 식은 머리로 한 손으로 큐브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다, 루이스가 전화를 끊으며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억울하단 표정으로 입을 비죽 내밀었다.
“또 이런 장난하시면 그땐 진짜 신고할 거예요!”
“얼른 가봐. 발목 조심하고.”
루이스가 대답도 없이 교수실을 나갔다. 홱 고개를 돌리며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치마자락이 눈에 선했다. 타라는 펜을 들었다. 글을 쓰려다, 흰 종이 위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20도 쯤 되는 술을 맨 속에 들이켠 기분이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큐브를 내려놓았다. 등 뒤로 의자를 밀어 쳐 놓은 블라인드를 올렸다. 교수회관을 종종 뛰어가는 루이스를 지켜보다, 창문을 닫아버렸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도 얼굴을 붉히며 한껏 수치스러워하는 벨져의 얼굴은 그대로였고, 루이스는 이게 드문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루이스는 검지로 뺨을 긁적이다 옆 의자를 뺐다. 벨져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이글의 못된 장난은 아닐까 싶어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이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지금 강의실 비었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
루이스는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려는 벨져의 입을 막고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로놓았다. 쉿. 눈을 깜빡이며 손을 내리자 벨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몇 시간째 움직이지도 않고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다이무스를 가리켰다. O.W.L이 코앞이라 도서관은 시험을 앞둔 5학년들로 살벌했고, 아무리 홀든이라 해도 고작 2학년이니 선배들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었다. 루이스는 산술점 책을 한 팔에 안고 벨져의 손을 잡아끌었다.
“휴, 너야 어떨지 몰라도 난 선배들 무섭단 말이야.”
“흥. 그까짓 상급생들, 몇 년 후면 내가 더 뛰어날 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련하시겠어.”
턱을 치켜든 벨져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듯 당당했다. 루이스는 책을 고쳐 안으며 어깨를 으쓱여 흘러내리는 망토를 올렸다. 멋대로 움직이는 계단을 타고 마법의 약 강의실인 지하감옥에 내려간 루이스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문 앞에 잠시 서있던 루이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담당 교수인 웨슬리 슬로언은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라 학생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도 후플푸프 학생들과 어디서 도시락을 풀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빈 강의실에 들어와서 뭘 뒤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까 뭐 어떠랴 싶었다. 혹시 들켜서 점수가 깎이더라도 이건 벨져의 탓이었다.
“그래서, 뭐가 어려운 건데? 2학년 과정이면….”
“전갈 독 해독제다.”
“아, 그랬지.”
루이스는 찬찬히 재료를 떠올렸다. 다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홀든이 못 만들 것도 없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루이스는 답을 얻기 위해 벨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벨져가 잠시 눈을 맞추고 있다가 시선을 피했다.
“뭐가 문젠데?”
“…실패한다.”
“그러니까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니야. 솔잎을 잘못 으깼다던가.”
“그걸 모르겠으니까, 도와달라는 거 아니냐!”
벨져의 외침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잘 해야하는 입장이니 한 번 실수한 것 정도야 괜찮지만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실수가 아니다. 다이무스한테 부탁하기엔 쪽이 팔렸을 테고, 벨져를 따라다니는 애들은 있어도 같이 다니는 애들도 없으니 만만한 제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좋아. 재료랑 방법은 다 알지?”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일단 뭐가 문제인지 한 번 만들어볼 것을 주문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말에 따라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 역시도 어쩔 수 없었다. 못내 탐탁지않아하면서도 재료를 준비하고 소매를 겉어붙인 벨져가 작은 칼을 쥐었다.
“잠깐잠깐 잠깐!”
“뭐냐?”
“그렇게 하면 썰리는게 아니라 토막나.”
“그거랑 그게 뭐가 다르지?”
하여간 도련님이란. 루이스는 양파썰기를 예로 들려다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벨져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념도 없는데 말로 백 번 해봐야 소용이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등 뒤에 서서 벨져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너, 이게 무슨…!”
“자, 봐봐. 손에 힘 빼고.”
루이스는 힘을 주어 한 토막을 잘랐다.
“이게 네가 하려던 거고.”
토막난 조각 위에 날을 세워 얇게 저며낸 루이스는 부드러운 벨져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손에 들어간 힘을 뺐다. 요령이 생겼는지 혼자 잘 써는 게 역시 빨랐다.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벨져의 옆에 앉았다. 지하감옥은 추운데도 벨져의 목이며 귀가 빨갰다. 화로를 옆에 놔서 그렇겠지만, 옷도 따뜻하게 입은 주제에 혼자 화롯불을 쬐다니 치사했다. 루이스는 양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 주먹을 쥐어 턱을 받쳤다. 볼살이 주먹 위로 밀렸지만 차가운 손을 덥히기엔 딱이었다.
“윽….”
“지금! 빨리!”
집중해서 솔잎을 으깨던 벨져가 루이스를 보고 움찔했다. 때마침 솥에서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거품에 루이스는 솥을 가리켰다. 벨져가 도마를 들고 으깬 솔잎을 쏟아부었다. 잠잠해진 솥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된 것 같은데.”
루이스는 발을 까딱이며 마지막 재료인 상아 조각을 건넸다. 벨져는 여전히 이상한 표정이었지만 시간을 세느라 말할 여유가 없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삼십오초. 상아 조각을 솥에 넣고 휘휘 젓자 연기가 사라졌다. 성공이었다.
“잘 됐네.”
우유와 같은 흰색을 띠는 약을 확인한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벨져는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너.”
“응?”
솥을 들여다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져가 국자를 놓고 다가와 루이스의 볼을 꽉 잡았다.
“턱받침같은 거 하지 마. 사내자식이 귀여운 척은.”
“…뭐?”
“흥!”
벨져가 볼을 꽉 꼬집더니 솥에서 적당히 끓은 해독제를 유리병에 담았다. 볼은 얼얼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도와줘도 고맙단 말 한 마디를 못하지? 루이스는 내려놓은 책을 다시 품에 안았다.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어디가!”
“귀여운 척 하러 간다!”
“너, 이리, 야!”
루이스는 벨져가 정리를 하는 사이 문을 닫고 계단을 올랐다. 애초에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와 책을 고쳐안는데 계단을 오르다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으왓!”
꼴사납게 넘어진 루이스는 얼얼한 이마를 손등으로 비볐다. 신발끈이 풀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다른 발로 신발끈을 밟아버렸다. 무릎이 화끈거리며 따끔거리는 게 아무래도 피가 나고 멍이 들 것 같지만 벨져가 못 봐서 다행이었다. 루이스는 계단에 앉아 신발끈을 고쳐맸다. 다치고 넘어지는 것쯤이야 익숙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야! 루이…. 너, 익….”
신발끈의 매듭을 한 번 더 묶는데 잔뜩 성이 난 벨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망칠수도 없게 좁혀진 거리,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지팡이를 꺼내 복수를 하거나, 한 대 치거나 소리를 지를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풀석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슬며시 눈을 뜨자 벨져가 등을 보이고 쭈그려 앉아있었다.
“뭐해.”
“으응?”
“빨리 업혀.”
“아니, 나 걸을 수 있는….”
뜬금없는 호의에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얼버무리자 벨져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다리를 잡았다.
“아야야야.”
“이러고 잘도 걷겠다.”
“그냥 까진 거니까 바지 잘 잡고 걸으면, 아아. 알았어!”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해보려 했지만 벨져가 아픈 무릎에 손을 얹자마자 아파오는 무릎에 루이스는 양 손을 들어 항복했다.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등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 어린 애한테 업히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대론 계단에 앉아서 실랑이를 계속하게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기댔다. 벨져의 팔이 다리를 감싸고 천천히 일어났다. 떨어진 책을 주워야했지만 안 그래도 무거울텐데 책까지 부탁하기엔 염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따가 가지러오거나, 누군가 친절한 사람이 주워주길 바라는 수밖에.
일어날 때 힘들어했던 것과 달리 벨져는 루이스를 업고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아무래도 그 벨져다보니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따갑게 꽂혀서, 루이스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벨져의 등에 매달렸다. 벨져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왠지 쑥스러웠다.
“저기…. 벨져….”
“말, 시키지…마….”
“힘들면 그냥 내려줘도 되는데….”
래번클로 기숙사는 가장 큰 탑에 있고, 거기까지 가는 길은 높고 구불구불한 계단 뿐이다. 아무리 벨져가 슬리데린의 수색꾼이고, 체력이 좋다 해도 숨이 거칠어지는 건 당연했다. 중간에 누구라도 있으면 그냥 같이 갈테니까 괜찮다는 말이라도 해볼텐데, 오늘따라 래번클로 기숙사로 가는 길에 학생들이 보이질 않았다. 루이스는 점점 더해지는 미안함에 벨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진짜 괜찮아. 여기서 넘어지면 그게 더 큰일인 것 같은데.”
“넌…. 후. 항상 그 입이 문제야. 하, 빌어먹을 래번클로.”
루이스는 기어이 래번클로의 청동독수리상이 보일 때까지 자길 업고 계단을 올라온 벨져의 목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땐 벨져도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쉬느라 바빴다.
“잠깐만. 물이라도 좀 가져다줄게.”
대답이 없는 벨져 대신 루이스는 독수리상 앞에 섰다.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어김 없이 낸 문제에 벨져가 헛웃음을 흘렸다. 래번클로의 황동독수리상 얘기는 들어보긴 했지만 이정도로 어이가 없을 줄이야. 루이스는 독수리상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더없이 진지한 그 옆얼굴이, 투명한 붉은 눈동자가 벨져의 시선과 숨을 앗았다. 작고 붉은 루이스의 입술이 열렸다.
“사랑으로.”
“뭐?”
“일리가 있군. 들어가도 좋다.”
벨져는 엉뚱한 대답을 듣고도 문을 열어주는 황동독수리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문제고 답인가. 벨져는 루이스가 아직 한 번도 독수리상의 문제를 못 맞춘 적이 없다는 게 의아해졌다. 이거 얼굴로 현혹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잠깐 기다려. 물이랑 먹을 것 좀 가져올게. 나이오비! 도와줘요!”
문틈으로 사라져버린 루이스의 망토를 바라보던 벨져는 고개를 들어 독수리상을 올려다봤다.
“사아랑?”
황동독수리상은 벨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벨져는 여전히 질문도 답의 상관관계를 유추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루이스 녀석한테 물어보긴 쪽팔리고, 다이무스에겐 물어보기조차 싫었다. 혹시나 설명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독수리상을 쏘아보고 있는데 바지를 걷고 붕대를 감은 루이스가 나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나이오비가 그냥 안 보내줘서.”
루이스가 물병을 건넸다. 시원한 물을 쭉 들이켠 벨져는 포장지까지 까서 기다리고 있던 루이스의 손에서 초콜릿 바를 빼앗아들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래.”
“오늘 일은 비밀로 할 테니까 걱정 마.”
벨져는 달달한 초콜릿을 입 안에서 녹이며 생긋 웃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겨우 한 살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키는 벨져와 같은 선에 있어서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하기 편했다. 루이스의 얼굴에서 살짝 눈을 내린 벨져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는 붕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다리를 끌고 혼자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적잖이 아팠을 게 분명했다.
“멍청이.”
“뭐?”
“간다.”
“야! 벨져!”
초콜릿을 마저 입에 넣은 벨져는 루이스의 외침을 무시하고 다시 돌아온 계단을 빠르게 뛰어내려갔다. 사랑이라니,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잘도 하는 녀석의 얼굴과 등에 업혀 어쩔 줄 모르던 녀석의 온기와 무게가 떠올라서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빗자루를 타고 비행을 하던 때처럼 심장이 쿵쿵 울렸다. 장난감 가게의 초콜릿을 먹이기라도 한 건지, 뺨이며 손끝이 화끈거렸다.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고 싶은 기분이었다.
트리비아 카리나를 놓친 건 간발의 차였다. 의뢰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생포. 그게 안 된다면 그녀의 동행인 영웅 루이스라도 생포할 것. 루드빅은 제 발을 잡고 쓰러져 피를 토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접근해 급소를 차버린 덕에 몸을 일으키는 것도 무리일 텐데, 그 와중에 제게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는 게 용했다. 루드빅은 트리비아가 사라져버린 방향을 한 번 슥 보고는 바짓단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영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를 낮춰 쪼그려 앉은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잡아올렸다. 고통에 눈을 찡그린 루이스의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놓고 일어나 잡힌 다리를 털듯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그 와중에도 다리를 놓을 줄 모르는 손이 희게 질렸다. 푸르스름한 서리가 어리는 걸 본 루드빅은 그의 손을 발로 밟았다. 여태 신음 한 번 안 내던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호오, 이제야 조금 협조할 마음이 든 겁니까?”
“협조는, 무슨.... 크흑....”
“저는 의뢰를 받은 것 뿐입니다만.... 그렇게나 그 여자가 소중한 겁니까? 그녀는 당신을 버렸는데도?”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잡아 눈을 맞출까 생각하며 발 아래 손을 짓이기듯 발을 움직이자 루이스가 다시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질렀다. 조금 즐거워졌는지도 모른다. 기회를 노리며 지켜보는 내내 고요한 호수처럼 얼어붙어 연인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남자다.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 루드빅은 루이스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올렸다.
“큿, 컥.... 흑....”
“대답하세요. 그렇게 그녀가 소중합니까?”
루이스가 손을 긁으며 떼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목이 잡힌 채론 말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잡고 있다가 놓아주자 루이스가 막힌 숨을 들이마시며 콜록거렸다. 반복된 폭력은 사람을 체념하게 만든다. 반항해도 상관 없지만, 기왕이면 고분고분한 편이 포획과 이송에 편한 법이었다. 루드빅은 다시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지로 끌려온 루이스의 눈은 여전히 붉은 적의로 가득차있었다.
“사랑 때문에 대신 죽어주려는 멍청이들이 있긴 했지만.... 안심하세요. 당신도 의뢰 대상 중 하나니까. 순순히 말만 들으면 더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큭.... 그냥, 지금 죽여서 시체를 갖지 그래?”
“저런.... 모처럼의 호의였는데, 거절하신다면야.”
루드빅은 루이스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그의 명성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서라도 과격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건만, 도저히 꺾일 줄 모르는 먹잇감을 상대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손과 발을 묶어 어깨에 들쳐맸다. 몹시 드물게도, 흥미가 생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할 방식의 고문 앞에 그는 어떤 표정일까. 기대로 걸음이 빨라졌다.
눈을 뜬 루이스는 입에 묶인 재갈과,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된 채 높이 묶인 팔의 상태를 깨닫고 낙담했다. 무슨 약을 쓴 건지, 아니면 그 사이에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건지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진 것처럼 멍했다.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멍한 머리를 굴렸다.
이래서야 능력을 쓸 수도,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볼 수도 없다. 상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헌터. 입이 자유롭다 해서 세 치 혀의 농간에 놀아날 리도 없지만 그래도 거래가 된다는 점에서 협상의 여지는 있었다. 어차피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건 트리비아의 몫, 루이스에겐 이렇다할 정보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노리는 것은, 능력자 세계에 고하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2차 능력자 전쟁의 영웅, 연합의 영웅이 헌터에게 사냥당했다. 그 한 마디 명제로 안 그래도 소란스러운 밤에 혼란과 공포가 더할 게 뻔했다. 그러니 여기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차분한 방 안은 호텔이거나 그 비슷한 주거공간이고, 원래 입고 있던 옷 대신 얇은 샤워 가운이 입혀져 있었다. 고문용 전기의자나 소, 돼지처럼 매달린 것도 아니고 침대에 누워있지만 루이스의 발이 닿는 곳에는 흉기는 커녕 이불 조차 없었다.
손을 묶은 사슬을 끊어보려고도 했지만 사슬은 얼음의 냉기를 빨아들여 차가워질 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헌터가 사이퍼를 사냥하기 위해 쓰는 사슬이니 그냥 사슬과 같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슬을 끊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안 된다면 괜한 데 힘을 낭비할 수 없다. 깨어날 때부터 멍한 머리가 아파왔다. 몸에 열기가 도는 게, 아무래도 감염이 됐거나 무슨 약이라도 주사한 모양인데 이대로는 루드빅이나 다른 사람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서서히 오르는 열기에 몸을 일으켜 베개 위에 등을 기댔다. 계속 들려있던 팔이 저렸다. 팔꿈치를 내려 차라리 누구든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마침내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고 금발의 사내가 들어왔다.
“이런, 깨어계셨군요. 어떻습니까, 영웅에서 먹잇감이 된 소감은?”
입에 문 재갈때문에 어차피 대답을 할 수 없는 루이스는 소리 없이 그를 노려봤다. 루드빅은 웃으며 다가와 목을 손에 쥐었다. 그대로 힘주어 잡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루드빅의 손은 가볍게 목을 쓰다듬고는 떨어졌다. 그의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동시에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열이 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루드빅이 무릎을 잡았다.
“아, 혹시라도 반항 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루드빅은 아직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움츠러든 루이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말끔히 씻기고, 사전 작업을 해둔 그는 뭇 여성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무릎을 모아 당기는 방어자세가 내내 품고 있던 흥미를 부추겼다.
다급한 목소리와 흔들리는 몸. 루이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데 소매가 끌리고, 벨져가 너무 높이 있었다. 벨져의 당황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벨져가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당연히 어깨에 닿아야 할 머리가, 가슴에 묻혔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몸과, 멍한 머리. 루이스는 상황파악을 위해 벨져를 밀어내려했으나 손에 들어가는 힘이 이상했다. 손의 크기도, 팔의 길이도 전부.
“이게, 무슨…….”
“괜찮나? 루이스. 정신이 드나?”
“잠깐, 나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네 짓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눈 떴더니 네가…!”
벨져의 반응으로 보아 벨져의 짓도 아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손과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벨져의 손에 손을 대어보니 확연히 보이는 차이에 덜컥 겁부터 났다.
“거울! 으우.”
“잠깐, 움직이지 마라.”
일단 제 모습부터 확인해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익숙하지 않은 몸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행히 벨져가 받아내 침대에서 구르는 일은 막았지만, 속옷도 바지도 흘러내려 티셔츠 한 장 차림으로 벨져의 팔에 안겨 욕실로 가는 건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내가 몇 살로 보여?”
“여섯…, 일곱?”
“……어쩌지.”
벨져의 팔에 안겨 거울 앞에 선 루이스는 낙담했다. 늘 입고 다니던 티셔츠가 허벅지까지 내려오고, 몸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짐작 가는 건.”
“어제는 내내 연합에서 일만……. 아.”
루이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벨져를 올려다봤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초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벨져가 낯설 정도로 커 보였다.
“어제, 어릴 때도 생일 파티 같은 거 해본 적 없다고 했더니 엘리가…….”
“그럼 돌아갈 방법은….”
“능력 제어하는 법도 모르는 애야.”
“큰일이군.”
벨져가 이마를 짚었다. 그 바람에 벨져의 한 팔에 안긴 루이스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벨져의 셔츠를 꼭 잡고 매달렸다.
“잠깐, 놓지 마. 읏.”
“아, 미안하다.”
엉덩이를 받쳐 안아든 벨져가 자세를 고쳤다. 눈을 맞춘 벨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루이스의 머리를 매만졌다.
“일단 뭐라도 걸쳐야겠군.”
“입을 게 없을 텐, 엣취!”
벨져는 추운 욕실에서 나와 루이스를 이불로 감쌌다. 그것도 모자라 여우털 목도리를 가져와 둘러주고, 손발을 주무르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유리조각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루이스는 작은 발을 주무르는 벨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고개를 든 벨져와 눈이 마주쳤다. 자꾸만 흠칫거리는 벨져가 낯설었다.
“저기…….”
“루이스. 머, 먼저 말해라.”
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까지. 루이스는 손을 내밀어 벨져의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풍경 속에 믿을 건 이 사람 하나뿐이었다. 루이스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그래도 정신은 아직 스물일곱, 아니 스물여덟이거든?”
“이, 미…….”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벨져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벨져 홀든은 꽤 보기 좋은 구경거리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마음껏 즐길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발을 까딱였다. 꼬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식사부터 하지. 가져다주겠다. 잠깐 기다리도록.”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벨져가 도망치듯 가버렸다. 어색하다. 갑자기 어려진 몸도, 갑자기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도 전부 낯설고 어려웠다. 높아진 천장과 발이 닿지 않는 침대의 높이. 감정을 통제하는 기관이 어려진 몸에 반응하는 건지, 참아보려 해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울긴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수그린 채 참고 있는데 한 손에 접시를 든 벨져가 다가왔다.
“루이스. 일단 이것 좀.... 루이스?”
상냥한 목소리에 울컥, 설움이 차올라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툭 떨어진 눈물이 이불을 적셨다.
“루이스, 잠깐.”
바닥에 무릎을 꿇은 벨져가 넓고 따스한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고 엄지로 눈가를 문질렀다.
“고개 들어봐라. 루이스. 울지 말고.”
당황한 목소리가,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손이 더 미웠다. 못 돌아가나 하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어려졌다고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에 대한 서러움이 복잡하게 섞여 흘러 넘쳤다. 루이스는 제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토닥이는 벨져의 품에 안겨 울었다. 소리 내 꺼이꺼이 우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지만,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약해진 모양이었다.
“쉬이. 루이스. 괜찮을 거다. 괜찮아. 울지 마라.”
벨져는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치고 훌쩍거리는 루이스의 등을 토닥이며 뺨을 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작고 귀여운 얼굴이 눈물범벅이 돼선, 눈가며 코가 발갰다. 눈을 부비는 손도 작고, 발도 한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벨져는 꿀꺽 침을 삼켰다.
갑자기 연인이 어린애가 된 건 벨져에게도 충격이 상당했다. 그러니까, 루이스가 느끼는 당황과 별개로. 이 통통하고 보들보들한 뺨에 입 맞추고, 희고 부드러운 다리며 팔을 만지고 싶다. 변태도 아니고, 어린애를 보고 그런 쪽으로 상상을 하고 마는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그만 울고, 일단 먹어라.”
머리론 눈앞의 아이가 오늘로 딱 스물여덟이 된 남자라는 걸 알아도 막상 보이는 게 어린아이니 더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지고 다칠 것 같다. 거기에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벨져는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루이스의 작은 손에 포크를 들려주었다.
챙그랑, 쥐어주기 무섭게 포크가 바닥을 굴렀다. 코를 훌쩍이는 루이스에게 티슈를 뽑아 건네고, 벨져는 저도 모르게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새 포크를 가져왔다.
“쇼핑부터 해야겠군.”
“이대로 나가자고?”
“일단 이것부터 먹고.”
벨져는 루이스에게 다시 포크를 쥐어주는 대신 어제 먹고 남은 케이크를 잘라 내밀었다. 애인이 아니라 애 취급을 하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 이 몸으론 포크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매트리스를 발로 두드리며 입을 벌렸다. 입 안에 들어온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워서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너는?”
“그렇게 배고프지 않다.”
꼬박꼬박 아침점심저녁 세 끼를 챙기는 사람이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게 웃겨 눈을 흘겨도 벨져는 끄떡없었다. 하긴, 벨져 홀든은 원래도 식사에 대해 은근히 집착이 심했다. 그래도 성인일 때는 먹었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배가 고프지 않다고 뻗댈 수라도 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몸을 따라서 정신과 마음도 어려지는 건지, 자꾸만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벨져는 기어이 접시에 담아온 음식을 다 먹이고 나서야 굽혔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기 위해 손을 내밀자 인형처럼 작은 루이스가 눈을 감고 턱을 올리는데, 순간 확 열이 돌았다. 너무 귀여워서 위험할 정도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고 루이스의 시야에서 도망쳐 벽을 짚었다.
작은 입술이 키스를 부르는 것 같다니, 미친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어린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다. 결코, 절대로, 단연코 소아성애적인 성향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루이스기 때문에, 원래의 그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다.
벨져는 낮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루이스는 고아였다. 그것도 거리를 떠도는 고아. 그러니 지금처럼 어린 시절을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생일, 마땅히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시기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보내버린 그다. 그러니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랐다.
돌아갈 수 없다면 그건 곤란하겠지만, 연합의 상상구현 능력자 꼬맹이의 능력 지속 시간은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스물 네 시간 정도일까.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가라앉은 심박수에 벨져는 루이스에게 입힐 옷부터 생각했다. 피부가 하얗고 예쁘니 무슨 색이든 잘 받을 테고, 이 기회를 틈타 자신만 아는 그의 모습을 더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기, 벨져.....”
“헉, 무, 무슨 일이냐.”
“아니,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이불을 꼭 쥐고 바지를 잡아당긴 루이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당장 부둥켜안고 침대 위를 구르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벨져는 이글이 꼬맹이들이 노는 걸 보면 그냥 대뜸 뽀뽀해주고 싶어진다고 하던 말을 십분 이해했다. 그야,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가만 둘 수 있을 리가. 벨져는 잠시 멈췄던 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혔다. 벨져 홀든이 오늘만 벌써 몇 번을 무릎을 굽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깟 무릎 따위 작은 루이스 앞에서야 어찌 되어도 좋았다.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나.”
“아니, 그냥....”
“루이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단호한 목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앙 문 루이스의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언제 잠잠했냐는 듯 심장이 널을 뛰었다.
“이런 나는.... 싫어?”
“싫을 리가!”
“...정말?”
“하, 정말이지. 지금 네 모습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뒹굴고 싶은...!”
루이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흥분한 나머지 오해할 법한 말을 했다는 걸 두 박자 늦게 깨달은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변태....”
“아니다! 루이스! 오해다!”
루이스가 진저리치며 벨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그 짧은 다리로 종종종 뛰어가는 게 너무 귀여워 잡을 수가 없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동물이 심장에 해롭다는 걸 되새기며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루이스……. 들어봐라. 오해다. 오해가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문을 다시 두드리고, 벨져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을 때도 매번 루이스가 먼저 사과를 했기에 해본 적 없는 사과였다.
“미안하다. 나는.... 후.... 그래. 네게 그런 걸 느낀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가 너라서 그런 거지, 절대 내가....”
달칵, 문이 열리고 허리 아래에서 루이스가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벨져를 올려다봤다. 벨져는 더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를 안아올렸다. 순순히 제 품에 안겨 셔츠를 꼭 잡는 루이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루이스.......”
“연합으로 갈래.”
“지금 그 꼴로 어디를 나간다는 거냐.”
“왜, 너도 쇼핑부터 하자며.”
“그러니까, 일단은 옷부터 제대로 입고 나서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거였다.”
“연합엔 피터도 있으니까 괜찮아.”
루이스가 부루퉁하니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루이스의 완강한 고집 앞에 최단시간으로 무릎 꿇은 벨져는 급한 대로 외출 준비를 하고 루이스를 한 팔에 안아들었다.
“이러니까 꼭 납치당하는 것 같아.”
“꼭 범죄자가 된 기분이군.”
“이미 전과가....”
“먼저 입 맞춘 건 어디까지나 너다!”
“넌 어디까지 상상했는데?”
벨져는 불리한 싸움 앞에 입을 다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아동복 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벨져와 루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들이야 아름다운 미남자와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아이의 사랑스러운 외모에 넋을 놓고 바라본 것뿐이지만, 어디까지나 연인인 그들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매우 곤란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재단사를 불러 몇 벌이라도 옷을 해주고 싶지만 당장 입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옷을 몇 벌 산 벨져는 루이스에게 르블랑의 아동용 남색 세일러 수트와 두꺼운 케이프 코트를 입혔다. 하얀 털에 감싸인 루이스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직접 코트의 리본을 매준 벨져는 내친 김에 후드까지 덮어씌웠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데, 정작 본인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루이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거, 여아용 아니야?”
“상관없다.”
“있지!”
“괜찮다. 잘 어울린다.”
벨져는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눈을 깜빡이다 확 얼굴을 붉힌 녀석이 귀여워 후드 째로 머리를 쓰다듬자 루이스가 작은 손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도리 저었다.
“하지 말라니깐!”
“안 되겠군.”
“뭐?”
“역시, 연합으로 가는 건 보류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루이스는 기가 차 물었다. 안 그래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해 죽겠는데 벨져는 아침의 상냥함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혼자 턱을 짚고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오늘 하루는 원래 내게 주기로 했었으니까.”
“그건....”
“게다가 어제는 네가 그대로 자버렸지.”
“설마 이 몸으로 하자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벨져가 정색하며 부정했다. 얼굴을 찡그린 벨져는 혀를 차고는 루이스를 다시 안아들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무심코 두근거릴 정도로 근사한 미소가 번졌다.
“그냥,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연합에 가면 여러모로 난리겠지. 설마하니 그런 생일을 보내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다시없을 기회다. 어린애 돌보기는 영 껄끄럽지만, 뭐. 생일이니 참아주도록 하지.”
“......벨져.”
“왜, 감동했나?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좋다.”
루이스는 싱긋 웃으며 벨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벨져의 뺨을 꽉 잡아 양쪽으로 당기자 바로 아픈 신음이 샜다.
“무슨 짓이냐!”
“미운 소리를 하길래. 어린애 방식으로 응징.”
“너...!”
“어리광 받아준다며. 뭐해. 얼른 안 가고.”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쁜 짓을 할 때나 저를 엿 먹일 때 짓는 미소를 띠운 루이스가 옷깃을 잡고 채근했다. 이거, 완전히 잘못 걸렸는지도. 하지만 그래도 행복했기에 벨져는 기꺼이 루이스의 집사 역할을 자처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루이스를 보여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벨져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루이스가 가리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비록 주려고 했던 선물은 이게 아니지만, 어린 루이스의 투정과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그의 어린 시절을 보상해주는 역할을 떠안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작은 발을 까딱이던 루이스는 곧 내려달라더니 혼자 걷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녀석이 귀여워 벨져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루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자 심통이 난 얼굴로 다가와 새끼손가락을 꼭 잡고 걷는데, 얼음에 상처가 나지 않은 작은 손이 따뜻했다.
다소 파렴치한 내용의 성인용 뒷이야기는 31일 디.페스타에 돌발본으로 나옵니다.... 28페이지....
언제나 그렇듯,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는, 말 한 마디가 그 시작이었다.
“오, 루이스! 내일 꼭 나와라!”
“나도 쉬자, 좀. 내일 나 비번 아냐?”
“아이고, 우리 영웅님. 또 그런다, 또.”
“니 생일아이가! 토마스가 목 빠져라 기다렸데이!”
“아니, 제가 무슨…!”
다 식은 커피를 들고 가던 루이스는 동료들의 마음 씀씀이에 피식 웃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선약이 있었다.
“됐어. 어린 애도 아니고.”
“생일에 어른애가 어디 있어? 그러지 말고, 응?”
“그냥 취하고 놀 명분이 필요한 건 아니고?”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채근하는 레베카에게 손을 내저었다. 토마스가 시무룩해하는 게 안쓰러워 마음이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루이스에게 생일은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 어릴 때도 챙겨본 적 없는데 뭘.”
“우웅…. 루이쯔 오빠, 생일 파티 없어?”
나이오비 옆에서 자던 엘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루이스는 다급하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연합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훈훈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엘리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할 걸 아는 거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엘리가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를 외면할 수 없어, 루이스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케이크랑, 촛불이랑, 풍선이랑…. 아무것도 업쪄?”
“아니, 엘리…. 그러니까….”
“그건 너무 슬포….”
루이스는 울음을 터트리려는 엘리를 안아들었다. 작은 등을 토닥이며 이 사단을 만든 술꾼들을 쏘아보고 어떻게 달래야할까 말을 골랐다.
“엘리, 오빤 괜찮아. 어른인걸.”
“그지만, 그지만….”
“정말 괜찮아. 울지마. 목 메일라.”
울먹이던 엘리가 홱 고개를 들었다. 턱을 부딪힐 뻔 했던 루이스는 파랗고 동그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자상하게 웃었다.
“그럼 오빠두 애기 해! 어른 하지 마!”
“응?”
“캬. 역시 꼬맹이. 말 한 번 잘하네! 고럼, 고럼. 남자는 나이를 몇 먹어도 여전히 소년이라구!”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이 망나니.”
나이오비가 소파에 늘어져 킬킬거리던 이글을 후려쳤다. 경쾌한 타격음에 루이스는 나이오비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한숨을 푹 내쉰 나이오비가 다시 한 번 이글을 때렸다.
“엘리눈…. 생일엔 마싯는 것두 먹구, 엄마랑 아빠랑 친구들이랑….”
“난 정말 괜찮아.”
“엘리가! 오빠 소원 들어주께!”
주먹을 꼭 쥐고 하는 말이 귀엽고 고마워 그만 웃음이 터졌다. 루이스는 엘리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앙 다물고 양팔을 벌렸다. 가슴에 안고 있던 엘리를 고쳐안아 눈높이를 맞추자 엘리가 얼굴을 잡고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운 아이. 루이스는 웃음으로 보답했다.
“고마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되지 않은 유년기는 머릿속에서 조각을 들어내듯 비어있었다. 어리기도 했고, 떠올려봤자 좋은 기억도 아니다보니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엔 거리에서 하루하루 연명한 게 전부라 엘리가 말하는 생일 파티나 선물 같은 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였다. 그래서 더 생일같은 기념일에 무던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내일 나오기로 약속한 거다?”
“그건 내일 상황 봐서. 나도 좀 쉬자. 누구누구씨가 서류를 내팽게치고, 누구씨들이 민간 시설을 부수고 다닌 덕분에 뒷처리는 고스란히 내 차지거든?”
“잘못 했네.”
“그렇지? 그럼 회계장부 검토 부탁해.”
“윽….”
엘리를 받아 안으며 맞장구치던 나이오비에게 화살을 돌리자 휴게실에서 탱자탱자 놀던 동료들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하나같이 시무룩해하는 걸 보는 것도 석연치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구누구들 때문에 긴급 호출되는 바람에 기껏 쓴 휴가도 반납하고 일한 게 이틀이었다.
덕분에 원래 세워둔 계획은 박살이 났다. 어제는 일찍 퇴근해 푹 쉬고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데이트, 내일 오후엔 연합에 얼굴을 비출 예정이었는데 덕분에 애인은 삐졌고, 안 그래도 켜켜이 쌓인 피로는 밤샘이라는 이름의 중노동으로 이어져 자고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루이스는 벗어뒀던 재킷을 입고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껏 기대하고 준비한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했다. 어둠이 내린 포트레너드에 눈송이가 휘날렸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인을 향해, 걸음을 바삐했다.
* * *
“그래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미안…. 죄송합니다….”
“루이스.”
죄인이 된 것처럼 쭈그러져있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꾹 참고 이 미련한 남자를 어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래도 생일을 챙겨주길래 기념일은 챙기는구나 하고 뿌듯해한게 고작 이주 전이다. 어떻게 구했는지 제가 좋아하는 와인에, 케이크, 거기에 이 계절에 꽃다발까지 구해온 정성이 갸륵해 내심 흡족했던 벨져였다.
자기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남자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럴 거면 타인에게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지를 말던가. 화를 내고 싶지 않은데 제 눈치를 보는 루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루이스. 나는….”
“미안. 다음엔 정말로 안 늦을게. 정말이야. 약속해.”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벨져는 이마를 짚었다. 기껏 준비한 음식이 식고,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은 더 기다렸지만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조금 더 너 자신을 소중히하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말하면 걱정이 아니라 화가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미안. 휴가는 어제부터 냈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만. 더 말할 필요 없다.”
음식이야 데우면 되고, 케이크에 촛불은 다시 붙이면 그만이다. 벨져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냥 케이크를 가지러 가려던 것 뿐인데,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미안하다니깐.”
“…그래.”
“왜 그러는데, 응?”
초조와 불안이 묻어나는 눈빛에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행여나 실망했을까봐, 그래서 미움받을까봐 두려워 붙잡는 루이스를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벨져는 주먹을 꽉 쥐고 루이스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네 생일이다! 하루쯤은 네 멋대로 해도 된다고!”
“…….”
“제발, 너를 조금 더 소중히 해라.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결국 질러버린 벨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안 봐도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손목을 잡은 루이스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마음이 떨어지는 것 같다. 벨져는 등을 돌리려다 루이스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손을 잡고 올려다보자 힘없이 웃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아냐.”
“…미안하다고 하지 마.”
“응.”
제길. 벨져는 낮게 읊조리며 몸을 일으켜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몸을 숙여 다가가 입을 맞추자 순순히 입을 벌리고 눈을 감는 루이스가 안타깝고, 또 사랑스러웠다. 이 미련한 남자는 언제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우선이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자신을 소중히 하는 건 머릿속에 새겨두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어야지.”
“앞으론 그렇게 생각해. 날 위해서. 알았나?”
“노력해볼게.”
벨져는 가볍게 키스하고 일어나 다 식어버린 스튜를 데우기 위해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루이스가 뒤에서 슬그머니 허리에 팔을 올렸다.
“뭐야? 냄새 좋다.”
“지난 번에 네가 맛있다고 했던 거.”
“아, 거기?”
루이스가 등에 몸을 기대고 눈을 깜빡였다. 방금 화를 내놓고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그게 꽤 귀여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뺨에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눈꼬리를 얇게 휘는 말간 웃음에 또 마음이 녹아내린다. 이 녀석에게 놀아나는 자신도 참 답이 없다 싶지만 어쩌랴, 이것도 다 예뻐보이는 것을. 벨져는 스튜가 끓기 기다리며 루이스의 뺨에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췄다. 루이스는 피하려다 고개를 돌려 입을 맞췄다. 벨져는 아예 얼굴을 잡고 찐하게 입을 맞춰버렸다. 입술을 누르고 있어도 새는 숨이 간지러웠다.
“끓는다.”
“케이크 가져와라.”
“아직 열두시도 안 됐는데?”
“그래봤자 5분 남았다. 뭐, 나야 너랑 같은 나이로 있는 것도 좋긴 하다만.”
“언제는 뭐 형 취급을 해주긴 했어?”
“형 노릇 할 생각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벨져가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며 국자를 휘둘렀고, 벨져의 손에서 흉기가 된 국자를 피한 루이스는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렸다. 열 개의 초를 꽂은 벨져가 불을 붙였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열두시를 알리며 겹쳐지고, 루이스는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껐다.
“스물 여덟번째 생일 축하한다.”
“이젠 나이 먹는 것도 달갑지 않은데 말이야.”
“많이 먹고 커라.”
“그런 얘기는 적어도 이십년 전에 해줬어야지.”
“이십년 전에 내가 네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그야 그렇지만.”
루이스는 벨져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가 산더미였지만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벨져가 먼저 씻는 사이 베개를 끌어안고 기다리는데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루이스. 루이스. 쯧. 루이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저를 부르는 벨져의 목소리도 다 들리는데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벨져가 어깨를 잡아 흔드는데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은 말을 들을 생각을 않았다. 삐진들 어떠하리, 화난들 어떠하리, 졸음 앞에 장사 없는 것을. 루이스는 내일의 자신에게 모든 걸 맏기고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조용히 사랑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와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관을 나와 꼬박 한 시간을 추위 속에 헤매던 두 사람은 마침내 외진 골목에서 연구원의 집을 발견하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벨져가 발을 들었다. 루이스가 손을 뻗어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문짝을 날려버렸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속삭였다.
“미쳤어? 침입자가 있다고 광고해?”
“어차피 상대는 사이퍼도 아닌 일반 연구원이다. 안 될 건 또 뭐지? 강도라도 들었다고 생각할 거다. 비켜.”
“하아, 됐다.”
루이스는 벨져를 제치고 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위장인지, 대문에는 정말로 장치가 없는지 문을 두드려봐도 뒤가 텅 빈 나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잠금장치는 하나. 루이스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얇은 핀을 꺼냈다. 벨져가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열쇠구멍에 핀을 꽂았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조용히 해. 이것도 오랜만이라.... 열렸다.”
묵직한 잠금쇠가 핀에 닿는 감각에 힘주어 돌리자 찰칵, 잠금쇠가 풀렸다. 핀을 쥔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느라 손이 얼얼했다. 손목을 털며 일어나 문을 연 루이스는 문을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도련님 먼저. 도어맨처럼 안을 향해 손짓하자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벨져가 한심하단 눈으로 혀를 차고는 들어갔다.
그래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슬슬 이 까다롭고 예민한 남자가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평범하군.”
“그러게. 딱히 더 뒤질 것도 없어 보이고.”
벨져를 따라 들어간 집은 황량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으레 그러하듯 퀴퀴한 냄새가 나고, 정리정돈이 안 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욕실, 침실, 부엌과 거실까지 어디 하나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전투 인원도 아니고 연구원이니 당연하겠지만, 심지어 책상이며 서랍, 책장에도 별 수확이 없었다.
벨져가 책상 위의 서류를 뒤지는 사이 루이스는 침대를 뒤집어보고 거실로 나왔다. 아무리 이런 후미진 곳이라 해도 기밀을 보란듯이 책상 위에 흘릴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보관장소가 있다는 건데, 밖에서 본 집의 형태와 안을 볼 때 따로 비밀공간이 있을 수가 없었다. 벨져라고 그 간단한 걸 모를리 없으니 집을 보는 대신 서류를 붙잡은 것일 테고.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지며 거실을 서성였다.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벨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삐걱거리지 않는 마루. 햇빛이 한창인 시간에도 볕이 들지 않는 구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끝으로 나무 판자를 톡톡 두드리자 안이 꽉 찬 둔탁한 소리가 감돌았다.
여기다. 루이스는 테이블 위의 버터나이프를 집어 지렛대 삼아 판자를 들어올렸다. 기름이라도 칠한듯 가볍게 들리는 마루 바닥 아래,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루이스를 반겼다.
“벨져. 이리와봐.”
“누구 마음대로 오라가라냐.”
실컷 헛물만 켜다 나온 벨져의 표정이 굳었다. 진지한 얼굴로 옆에 다가온 벨져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손때묻은 노트며 오래된 연구파일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꺼내놓고 빠르게 훑어보니 대충 감이 왔다.
“거부당한 연구 뿐이군.”
“아예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인 건 아니니까. 성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기현상과 새로운 공간을 연결짓기엔 천 구백년이라는 시간이 문제였겠지. 일식도 안 일어난 때니까.”
“흥. 그 중 몇이나 진짜 있었겠나.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지금은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
“그 얼토당토 않은 기현상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들고?”
벨져는 부인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검 대신 총포가 등장하고, 종교와 미신 대신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 세상이지만 그도 자신도 사이퍼였다. 개기월식의 그날부터, 최근의 슈퍼문까지. 사이퍼들의 이능력과 신비로운 자연현상은 뗄래야 뗄 수 없는데다가 그 이유와 연관성 역시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공간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사막 위에 어느날 갑자기 들어선 메트로시티, 세계수가 자라나 형성된 포트레너드. 그 모두가 얘기로만 전해들으면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현상을 직접 마주한 이들이 그것을 신의 계시나 기적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충분히 성인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이 사실은 능력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그 발상에서 시작한 보고서와 연구논문은 결국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마루바닥에 잠들어있지만 가능성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새로운 공간과 사이퍼,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란 명확히 밝혀낼 수 없는 고양이 상자 안의 고양이에 불과했다.
“진행되고 있는 연구가 뭔지 모르겠군. 안타리우스가 이런 자료를 계속 끌어안고 있다면 가능성이 없을 거다.”
“그건 아닐걸. 이것도 지금 진행되는 무언가도 결국은 가능성일 뿐이야. 인식의 문이나 액자처럼 확실한 통로나 공간이 있는 게 아니면 더 특정하기 힘들고.”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새 공간을 찾는 내내 한 고생을 떠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알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막연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도 의문이 걷히질 않는지 무섭게 서류를 읽는 벨져에게 루이스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아까웠겠지. 안 된다는 걸 알아도, 놓아야한다는 걸 알아도 막상 그러는 게 쉽지 않거든.”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루이스는 파일과 자료를 한 데 모아 도로 비밀 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이렇다 할 수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곳에 기밀문서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연락책도 아닌 일개 연구원이니 당연했다. 연구소에 가기 전에 먼저 들른 건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래도 클론이나 강화인간을 연구하는 건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경비는 적을 거야.”
“위치는?”
“서쪽 외곽. 지갑에 정기권있더라.”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또 탐탁지 않은지 제 얼굴에 꽂힌 그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이스는 판자를 도로 덮고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는데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쥐가 나면서 순간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며 풀썩 발목이 꺾였다. 넘어지기 전에 벽이라도 짚으려한 손은 의미없이 허공을 휘젓고, 거기에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돌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넘어져야 하는데, 충격 대신 단단한 팔이 허리를 잡았다. 루이스는 머리를 기대고, 당장 손에 잡히는 걸 쥔 채 숨을 골랐다. 추위와 함께 쨍하니 덮친 어지럼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데 다리까지 저리니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감각을 마비시킨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야, 루이스는 얼떨결에 붙잡고 기댄 사람이 벨져라는 걸 떠올렸다.
“후, 하아.... 미안.”
“도무지 못 봐주겠군. 대체 얼마나 미련하면...!”
생명줄이라도 되듯 잡았던 벨져의 옷을 놓고 떨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앞에서 이런 꼴이라니. 차라리 그냥 넘어지고 말지,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어지는 질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이야 하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마음에 안 드는 제게 꼬투리를 잡아 분풀이를 하는 게 목적이니 괜히 책 잡힐 빌미를 주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야 하는데, 당연히 그게 맞는 건데 손목을 잡아 루이스를 돌려세운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상한 일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벨져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루이스의 목에 감았다. 화가 난 얼굴로 그의 온기가 가득한 머플러를 꼼꼼히 감아 목 뒤로 매듭을 짓고는 다시 한 소리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냥 하면 될 걸 말도 못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벨져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홱 돌아섰다. 목을 감싼 온기와, 머플러에서 느껴지는 벨져의 향수냄새. 등을 보이고 돌아선 벨져는 주먹을 꽉 쥔 채 잠시 서있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루이스는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아니라고, 그저 지친 제 착각일 뿐이라고 되뇌어도 머릿속에선 빨간 경고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뭔가 잘못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다. 제게 패해 세상으로부터 온갖 괄시와 악의 섞인 편견을 받아야했던 벨져 홀든. 로라스 옆에서 길길이 날뛰며 노려보던 그 날의 벨져가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만약 이번에도 제 감이 맞다면, 이번에 무너지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벨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루이스는 이 불안이 기우로 끝나길 바랐다.
1월 12일. 땡하고 열두시가 되자마자 화장실을 간다던 이글이 케이크를 들고 연습실에 들어왔다. 토마스가 불을 끄고,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떨떠름한 얼굴의 벨져가 촛불을 껐다.
“아, 짝은형! 기껏 준비했는데 반응 좀!”
“닥치고 연습이나 해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냉담한 벨져의 반응에 이글은 투덜거리며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주인도 안 먹었는데 먼저 먹냐는 막내의 타박이 이어졌지만 막내는 어디까지나 막내. 이글은 토마스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생크림 케이크를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선물은 없어.”
“형!”
“바라지도 않는다. 셀이나 해.”
“내래 형동무에게 생일선물로 악몽을 선물해주갔어.”
“이글.”
대회 당일, 겁도 없이 망조합을 만들려는 이글에게 잠자코 있던 루이스가 말을 걸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글은 딜러 대신 쓰레기라 불리는 서포터를 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큰형이나 작은형이 이글에게 쿠사리를 먹이는 건 늘 있는 일이지만 루이스는 이글을 봐줬으면 봐줬지 나무라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아오지 가고 싶냐?”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에 쭈뼛하는 사이 딜러로만 꾸려놓은 랜덤이 선택되고, 잠시 벙쪘던 이글은 너털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장난이지!”
“나도 장난이야.”
의자를 뒤로 젖히고 고개를 빼쭉 내밀어 슬며시 웃지만 방금은 진심이었다. 이글은 투덜거리며 토마스에게 치댔다. 너네 선배는 왜 저렇게 예민 터진다냐. 짝형 생일이지 지 생일인가. 다이무스와 이글 중간에 낀 토마스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빨리 대기나 타라며 이글을 자리로 밀었다. 그야 준결승이고 벨져의 생일이니까 예민할 법도 하지만 루이스치고 너무 날이 서있는 게 사실이었다.
“저러다 져봐라, 둘이 얼굴도 못 볼걸?”
“아, 형!”
“나 3립 간다! 큰형 립도 내꺼~.”
이글은 빠른 이동기로 자신의 라인을 다 밀고 다이무스의 아랫줄을 가로챘다. 넷 밖에 없는 센티넬, 그것도 탱커의 초반 코인 절반을 뺏는 짓을 스스럼없이 저지른 이글은 냅다 적 팀 타워에 궁극기를 쏟아버렸다. 옆자리에서 다이무스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큰형이나 작은형이 아무리 뭐라 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밖에 더 되나.
오히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저 옆에 영웅님 쪽이 배는 무섭다. 큰형이나 작은형은 적당히 하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지만 루이스는 진짜 한 번 빡치면 사생결단을 낼 것 같은 위기감이 있었다. 하여간 순하게 생긴 놈들이 더 무섭다니깐. 이글은 혀를 내두르며 사이드로 파고들어 적 원딜 둘을 따고 유유히 합류하는 루이스의 아이스에게 타워의 막타를 양보했다. 반사적으로 치는 땡스 보이스가 이어폰을 통해 귓속으로 파고든다. 어쩜 해도 꼭 지같은 캐릭터를 해요. 이글은 다시 한 번 투덜거렸다.
그 사이 다이무스가 맵에 핑을 찍고 벨져와 루이스가 자리를 잡았다. 이글은 토마스를 옆에 붙이고 중앙 타워를 긁었다. 초반이라지만 루이스 하나한테 원딜 둘이 짤린 뒤라 여유로웠다.
탱 하나에 근딜 둘 원딜 하나 서폿 하나라는 괴랄한 조합은 홀든 A만 구사하는 조합이었고, 아직 공식적으로 보여준 적이 없지만 공방의 랭커들에게 알음알음 홀든A조합이라 불리고 있었다. 사실 하는 사람도 이게 어떻게 먹혀 들어가는지 잘 모르지만 승률은 좋은 이상한 조합이었다.
대체 왜 여기에 지는 거지. 이글은 같은 패턴으로 굴러가는 눈덩이를 굴렸다. 앞에서 벨져와 루이스가 버티고 있기에 프리딜을 할 수 있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온 적의 급습도 토마스가 걷어주니 변칙적인 상황은 이글이 트롤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초반에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압박하는 플레이는 벨져가 좋아하는 방식이었고, 재미가 없다는 것만 빼면 완벽했다. 다이무스가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을 계속해서 용인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이글은 전방 타워를 밀어버리고 벨져와 시프트를 교대했다. 벨져가 타워를 치는 사이 다이무스가 일으킨 한타에 딜을 넣는다. 연습을 도와주는 2군에겐 미안하지만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웠다.
“짝형 이벤트전때 뭐해?”
“나도 모른다.”
“어, 이글형 골목이요!”
“이번에 올스타전처럼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우리 막내 섭섭해서 어쩌누?”
“하나도 안 서운하거든요!”
“그래그래그래, 형이 꼭 너 최고라고 해줄게?”
이글은 바로바로 돌아오는 화끈한 반응에 킬킬거렸다. 내일, 아니 열두시가 넘었으니 오늘. 오늘 있는 마지막 4강전을 마무리 지으면 다음 주는 결승 전 이벤트였다. 이번 이벤트전에 초대받은 건 벨져와 이글, 루이스 셋.
본선에 오른 여덟 팀에서 이벤트전까지 초대를 받는 건 딱 열 명 뿐이란 걸 생각하면 파격적인 인선이었다. 쉬레와 프로즌이야 방송사 입장에서 흥행보증수표고, 이글은 인기BJ니 당연하긴 하지만. 이글은 자기도 나가고 싶다며 애원하던 그랑플람의 원딜 막내를 떠올렸다. 방송을 타면 여친이 생길 거라며 울던 불쌍한 영혼이었다.
* * *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일어난 벨져는 알람부터 껐다. 루이스는 아직 자고, 벨져는 멍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켰다. 고양이가 세수하듯 십여 분만에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하는 녀석과 달리 벨져는 준비하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루이스. 야. 일어나.”
“으으응….”
씻고 나온 벨져는 여전히 퍼질러 자는 루이스의 배를 발로 밀었다. 밀면 미는 대로 굴러가 바로 누운 루이스가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나른한 붉은 눈동자에 자신이 담기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휜다. 사르르 녹아드는 눈송이 같은 미소에 벨져는 멍하니 제게 양팔을 벌리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벨져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숙였다. 쪽, 뺨에 입 맞춘 벨져는 루이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술을 마셔도 이러지만, 루이스는 아침에 유독 애교가 많았다. 벨져는 저를 꼭 끌어안고 가만히 숨을 쉬는 루이스의 등을 안아 토닥였다.
“일어나.”
“싫어….”
“오늘 경기잖아. 씻어. 얼른.”
싫다며 어깨에 기댄 고개를 가로저은 루이스가 벨져의 허리를 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귀엽긴 하지만 더 지체했다간 다이무스가 쳐들어올 것이다. 벨져는 제게 매달린 루이스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허벅지를 안아들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녀석을 수증기가 자욱한 욕실 앞에 내려놓고, 벨져는 루이스의 등을 두드렸다.
“들어가.”
“싫은데….”
벨져는 결국 루이스의 등을 발로 차버렸다. 또 좋다고 웃는 녀석이 꼴 보기 싫어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리자 안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 이 빌어먹을 자식은 자기 생일도 아니고 꼭 내 생일에. 벨져는 옷장에서 어제 미리 골라놓은 옷을 꺼냈다. 전신 거울에 비춰보고, 두 번을 갈아입는데 다시 욕실 문이 열렸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은 무슨.”
“벨져.”
“왜.”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루이스가 다가왔다. 물기를 머금고 뽀얀 피부에 홍조가 오른 녀석이 은은한 미소까지 띠우고 있으니 꼭 무언가 고백이라도 할 것 같다. 벨져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모른 척하며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생일 축하한다고.”
“그걸 이제 말하냐.”
“어제 다 같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따로 한 번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됐다. 얼른 준비해.”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걸어놨던 후드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방송엔 유니폼 차림만 나간다지만 집에서 입고 다니는 걸.
“그거 말고.”
“응?”
“그거 입지 말라고.”
벨져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 던져주었다. 청셔츠에 연한 그레이 스웨터. 어차피 위에 팀 패딩을 입을 테고, 아래야 늘 입는 청바지를 입을 테니 위라도 따뜻한 게 나았다. 후드 한 장 달랑 입는 것보다야 시각적으로도 낫다. 루이스는 미적 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거기에 고통 받는 건 언제나 팬과 자신이었다. 벨져는 옆집 오빠 같은 루이스를 보며 양말까지 골라 던져주었다.
“이제 좀 사람 같군.”
“그럼 내가 사람이 아니면 뭔데?”
“테러리스트.”
“…말을 말자.”
벨져는 착 가라앉은 루이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그냥 혼자 옷 입을 생각을 하지 마라. 덧붙이자 루이스가 홱 쏘아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갔다. 루이스를 챙기느라 잠시 멈췄던 벨져는 꺼내놓은 스웨터를 도로 옷장에 넣었다. 대신 흰 셔츠와 가디건을 꺼내 입고 그 위에 코트, 포인트로 푸른 머플러.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벨져는 흡족하게 가죽장갑을 챙겨 방을 나섰다.
어젯밤에 키보드와 마우스, 헤드셋은 다 챙겨놨고, 유니폼은 잘 다려진 채 트렁크에 실려 있었다. 아침 겸 점심이야 가서 먹을 테고, 경기 전에는 간단하게 팬미팅이 있다. 벨져의 생일이라 특별히 준비한 자리였다. 그러니 당연히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했다.
* * *
05:37. 접전을 거듭한 두 번째 세트가 오 분을 남기고 아이스의 샤드 소리와 함께 끝났다.
“후아. 아슬아슬 했네!”
“흠. 나대지 마라.”
“엑. 한 번만 봐주세요.”
“다 이겨 놓고 무게 잡긴. 잘 했어, 우리 막내!”
“좋아, 잘했어!”
이글이 토마스의 등을 세차게 두드렸다. 아파하면서도 배실배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토마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한타를 이긴 건 뭐니 뭐니 해도 토마스가 넷을 얼리며 궁대박을 낸 덕이었다. 루이스도 헤드셋을 벗고 토마스의 등을 두드리며 일어났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고 선수 부스 문을 열었다. 꼭 한 번씩은 져서 보는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홀든A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오늘은 세 번째 세트까지 갈 것도 없었다.
“가자.”
루이스가 상기된 얼굴로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에서 다시 쓸 수 없겠지만 이렇게 이긴 걸로 충분했다. 투명한 선수 부스를 나가는데 루이스가 슬며시 벨져의 손을 잡았다.
돌아보자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밖에서 이렇게 눈웃음치면 누구 좋으라고. 벨져는 자기 내킬 때만 예뻐하고 애교를 부리는 루이스가 항상 불만이었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쌀쌀맞게 사람 걱정이나 시켰던 주제에. 그래도 여전히 손은 여전히 얼음장 같아 벨져는 루이스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벨져야.”
“왜.”
“…아냐.”
벨져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하여간 이 새끼는 속만 썩이고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단상 앞에 나란히 서서 인터뷰를 준비하는 내내 루이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배시시 눈웃음을 쳤다.
“자, 그럼 당당히 결승에 진출한 홀든 Attackers에게 소감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마이크를 잡은 다이무스가 연습한 결과일 뿐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며 마지막 토마스의 궁극기가 잘 들어갔다고 덧붙였다. 나름대로 길게 말한 건데, 해설이라면 또 모를까 방송용은 아니라 금세 마이크가 옆에 서있던 루이스에게 건너왔다.
“오늘이 쉬레 선수의 생일이라고 하던데,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어떻게?”
인터뷰어가 묻자 루이스가 바로 들고 있던 마이크를 벨져 앞에 대주었다. 그냥 마이크를 넘기면 될 것을. 벨져는 루이스를 한 번 쳐다보고 관중석을 쳐다봤다. 생일을 축하하는 치어풀을 든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검지를 들어 그들을 가리키고 오만한 미소를 띠웠다.
“사례하지.”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비명이 흡족했다.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 열기를 만끽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인터뷰어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쉬레 선수 인기가 정말 대단하네요! 자, 그럼 옆에 프로즌 선수도 한 마디 해주세요!”
마이크를 대주며 웃고 있던 루이스가 당황해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곤 도움을 요청하듯 자신과 이글을 보다가 카메라를 가리키는 인터뷰어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어…. 오늘 경기는 사실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구요. 어, 음…. 사랑하는 벨져야! 생일 축하해!”
주먹까지 불끈 쥐고, 부끄러워하며 카메라에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벨져는 자기가 말해놓고 얼굴을 감싸며 마이크를 넘기는 화상을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아래위로 훑었다.
그런 말은 카메라 앞이 아니라 사람한테 해야지. 아주 잘 하는 짓이다. 마이크 없이 빈정거리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루이스가 머리를 기대왔다. 어휴, 등신. 벨져는 루이스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마이크를 이글에게 건넸다. 배를 잡고 웃던 이글은 한 마디 하라는 말에 방금 루이스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어…. 저도 오늘 경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구요. 큭, 크흡…. 사랑하는 작은 형! 생일 축하해! 꺅!”
벨져는 이글의 정강이를 찼다. 이미 관중석이고 해설이고 할 거 없이 다 웃느라 바쁘다. 벨져는 정색하고 팀원을 바라보는 다이무스를 흘긋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토마스는 뻘쭘하게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니 얼굴이 시뻘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마이크를 다이무스에게 넘겼다. 오늘도 동생들이 벌여놓은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 다이무스가 결승전에 임하는 각오 한 마디를 맡았다.
“큼, 상대가 그랑플람이긴 하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다이무스의 시선이 벨져를 향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랑하는 동생아, 생일 축하한다.”
등골이 쭈뼛 서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벨져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루이스를 꽉 잡았다. 할 수만 있으면 비명을 지르며 여기를 탈출하고 싶었다. 부들부들 떠는 벨져를 감싸 안은 루이스가 등을 두드렸다.
“난 저 인간이 너무 싫다.”
“알아, 알아. 큰형이잖아.”
“……”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등을 토닥이며 둥기둥기해주는 루이스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심호흡했다. 하지만 닭살스러운 멘트는 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벨져를 괴롭혔다.
나 오늘 뒤풀이 안 간다. 너도 가지 마. 벨져는 상황을 마무리 짓고 대진표를 찍는 카메라를 보며 루이스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억지를 부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루이스가 등을 토닥이며 그래. 하고 속삭였다.
겨우 마음의 평화를 찾은 벨져는 바로 대기실로 향했다. 어차피 다음 주는 쉬어가는 이벤트전이고, 오늘 경기는 패배 없이 클린 게임으로 끝났다. 일찍 경기를 끝낸 덕에 아직 하루가 다 가려면 시간이 남아있었다.
“형아, 난 루이스랑 먼저 간다.”
“그래. 쉬어라.”
“작은형! 내가 생일선물로 큰형의 모닝콜 알람 만들어줄게!”
“그게 내 귀에 다시 들리는 순간 널 죽이겠다.”
이글이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대기실은 팬들이 보낸 벨져의 생일선물로 가득했지만 벨져는 그런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다 매니저와 큰형이 알아서 챙길 테고,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벨져는 옷을 갈아입는 대신 코트부터 챙겨들었다.
“간다. 얼른 챙겨.”
“크흐, 우리 형이지만 참 빨라.”
벨져는 루이스가 옷을 챙겨 입고 핸드폰을 들자마자 손목을 낚아챘다. 퇴근길에 만나려고 대기하는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생일이었다. 이 정도는 포상휴가라고 할 수도 없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고 관계자 전용 출입구로 발을 옮겼다. 경기가 진행되는 사이 매니저에게 부탁해놓은 벨져의 차가 주차장에 떡하니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벨져. 잠깐, 잠깐만.”
“타라.”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어지러울 정도로 진한 장미향이 물씬 풍겼다. 운전석에 놓인 장미 꽃다발. 눈이 시리도록 푸른, 장미. 가만히 멈춰선 벨져 대신 루이스가 품에 가득 들어오는 꽃다발을 한 손에 안았다.
“잠깐 멈추래도.”
겸연쩍어하며 파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은 루이스가 주차장의 조악한 조명 아래서 웃었다.
“생일 축하해.”
“…….”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벨져는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봤다. 얼굴을 붉힌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다른 건 다 성에 안 찰 것 같아서. 그냥 내가 주고 싶은 거.”
“나쁘지 않군.”
“다행이네.”
“애썼다.”
“마음에 들어?”
“그래.”
“그럼 좀 받아줘라. 이거 무거워.”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와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예쁘다. 잘 어울리네.”
“…큼.”
“울어?”
“울긴. 안 운다.”
고개를 기울인 루이스가 안 그래도 작은 주제에 몸을 숙여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무거운 꽃다발을 안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자 루이스가 냉큼 열쇠를 빼앗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뭐 해. 안 타고.”
“왜 네가 운전하려는 거지?”
“그걸 안고 어떻게 운전해. 얼른 타. 배고프다. 저녁 뭐 먹을래?”
안전벨트까지 매고, 문까지 닫아버리는 바람에 벨져는 못 이긴 척 조수석에 앉았다. 신선한 꽃향기에 차 안이 온통 꽃밭 같았다. 루이스는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차를 뺐다. 매끈한 턱선과 목이 꽃에 꽂혀있던 벨져의 시선을 빼앗았다.
“다행이다. 좋아해서.”
“흥. 네녀석이 꽃도 볼 줄 알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네가 좋아하니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주고 싶었어.”
“평소에 잘 해라. 평소에.”
“여기서 더 어떻게 잘하냐.”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도로 위를 달렸다. 뭘 먹겠냐고 물어본 주제에 거침이 없었다. 꽃다발을 준비한 걸 보면 저녁도 준비한 게 틀림없다. 새벽부터 낮까지, 내내 얼어있던 벨져의 기분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기분이 좋아진 벨져는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흘러나오는 노래도 스윗했다.
* 벨져와 루이스의 생일 기념으로 나오는 프로게이머au 신간 Happy Birthday to you 의 원고 부분선공개 겸 벨져 생일축하 연성입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그 햇살에 프라이팬의 달걀처럼 익어가던 루이스는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입안은 모래알을 한 움큼 넣은 것처럼 깔깔하고, 갈증과 함께 쨍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점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몹쓸 숙취는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게 며칠, 그마저도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뜨다 눈앞에 보이는 쇄골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대로 고개를 올리자 잠든 벨져의 얼굴이 보였다.
길고 풍부한 속눈썹 아래 우아하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워낙에도 미인이긴 하지만 이렇게 그림자까지 질 줄이야. 순수하게 감탄하며 벨져의 얼굴을 감사하던 루이스는 창밖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길래 벨져와 한 침대에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방이 없어서, 사정사정해 별채까지 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완전히 공백이었다. 아무래도 머리를 기대자마자 곯아떨어진 모양이라고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려 했다는 데 그친 건 제 허리와 다리에 감긴 벨져의 팔다리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오랫동안 안 쓴 별채니 난방이 제대로 될 리 없고, 유일한 난방수단인 벽난로는 불이 꺼진지 오래인 듯 했다. 추운 지방에, 밤이 되면 기온이 더 떨어지니 이불 한 겹으론 추위를 다 막지 못했을 테고 그러다보면 옆에 있는 체온에 달라붙을 수밖에.
설마하니 벨져가 먼저 제정신으로 끌어안았을 리는 없다. 그게 루이스가 내린 결론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벨져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잠결에 자기도 자연스레 온기를 찾았을 터였다. 내외하는 남녀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빠져나가려 하면 할수록 벨져는 더 꽉 끌어안고 좀처럼 놓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끌어안고 자는 베개쯤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현저하게 느껴지는 체력과 완력 차이에 더 오기가 생겼다. 가까스로 벗어나 숨을 돌린 루이스는 언제 벗었는지 모를 신발을 주워 신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왈칵 녹이 섞인 물이 흘러나와 손을 적셨다. 이럴 땐 그냥 흐르게 둬야 하는데, 벨져가 그런 서민의 생활상식을 알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일단 급한 대로 물을 틀어두었다. 여기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화장실을 나오는데 벨져가 창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루이스를 깨운 아침햇살이 이번엔 벨져를 괴롭히고 있었다.
루이스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커튼을 쳐 햇빛을 가리고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저기선 씻을 수도 없고, 있어봐야 예민한 도련님의 귀한 수면을 방해할 뿐이다. 하얗게 입김이 서리는 추위에 팔을 쓸며 사람의 발길이 닿은 길을 따라 걸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흐릿해 대충 감으로 걸어가니 마당에서 세탁물을 걷던 여자와 마주쳤다. 어젯밤 방을 내준 종업원을 기억해낸 루이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좋은, 큼. 아침입니다.”
“어머나, 벌써 일어나셨어요? 밤새 춥지는 않으셨구요?”
“덕분에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드릴까요?”
루이스는 그녀가 걷던 시트며 수건, 베개 커버같은 것들을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스위스인데 아무렇지 않게 말이 통한다. 위화감에 슬쩍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힘드시겠어요. 영어도 잘 하시는데.”
“에휴. 그러게나 말이에요. 겨우 탈출했다 싶었더니 잠깐만 와서 봐달라고 사정사정을 해서 왔더니 글쎄, 자기는 귀족 나부랭이랑 눈이 맞았다지 뭐예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놓고 여태껏 편지 한 번 없어요.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거 공부시켜놨더니, 이런데 틀어박히질 않나. 결국은 눈 맞아 도방가질 않나. 아, 같이 온 그 귀족나리는요? 그쪽도 만만치 않게 재수 없던데.”
과연. 루이스는 유독 벨져에게 야박했던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모양이나 말투로 보아하니 가정교사였던 것 같고, 사정 설명은 본인이 늘어놓은 신세한탄으로 다 들었다. 귀족에게 치를 떠는 이유도 알만 했다. 교사로 있을 때 까이고,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못하고 공부시킨 동생은 하필이면 또 귀족과 눈이 맞아 도망. 벨져야 누가 보더라도 귀족 도련님이니 어찌 보면 질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잡니다. 동생분 일은 정말 안타깝네요.”
“에휴. 기사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소설 속에나 있는 얘기예요. 그것 때문에 신세 망친 애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모름지기 남자는 성실하고 지고지순한 게 최고라니까요!”
여자는 시트를 팡팡 털며 말했다. 모름지기 신세한탄 인생역경 스토리란 아무리 말해도 말해도 질리지 않는 법이고, 거기에 왠지 친숙한 옆집 청년같이 생긴 남자가 있으면 말이 더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부터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여성들이 꽤 있었기에 익숙했다.
어떤 매커니즘인지는 모르지만 뛰어나게 잘 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호감이 가게 생긴 청년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루이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자의 푸념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받았다. 어젯밤에는 그런 얼굴로 불쌍한 척을 한 게 먹혀들어간 거고. 루이스는 그녀와 함께 다 걷은 세탁물을 옮겼다.
우다다 할 말을 쏟아내고 사라진 그녀의 등 뒤로 감사하다 소리친 루이스는 꽤 괜찮은 설비의 욕실에서 따뜻한 샤워로 언 몸을 녹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가방을 들고 나올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루이스는 전화기를 들었다. 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어디야? 트리비아는?’
“그녀는 떠났어.”
‘……그래. 그렇구나. 그럼 너는. 그리스에서 연락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앤지. 천천히.”
루이스는 흥분한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그야 물론 이글과 나이오비가 소식을 전했다면 걱정할 만 했다. 어쨌거나 안타리우스가 강화인간들을 처리한다는 건 성공작을 거의 완성했다는 뜻이고, 제키엘 헌팅턴까지 등장했으니 거기에 휘말렸으면 솔직히 뼈도 못 추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불안과 가정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루이스는 구태여 설명을 더하는 것보다 빠르게 앤지의 불안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랑 있는지 알아?”
‘뭐? 설마 작업 들어온 건 아니지?’
근래는 좀처럼 듣기 힘들어진 스노우퀸의 격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작게 웃었다.
“벨져.”
아무리 그녀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글이 벨져와 있었다는 걸 알렸다면 더더욱.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 뻔한 반응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루이스는 말을 잇지 못하는 친구에게 안심하라는 말을 보탰다. 얼마나 믿을진 모르겠지만 말 한 마디 한다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괜찮아?’
“자세한 건 편지로 보낼게. 아무래도 돌아가는 건 더 늦어질 것 같아. 미안. 부탁해.”
‘……알겠어. 루이스, 제발 몸조심해. 응?’
“알았어. 또 연락할게.”
루이스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앤지가 걱정을 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이면 보일수록 그녀를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녀마저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또다시 괴로워질 뿐이었다. 나는 네 기대에 못 미칠 지도 몰라. 기대를 저버리면 제게서 등을 돌릴 사람들이 무서웠다.
루이스는 양동이 하나를 빌려 뜨거운 물을 받아 왔던 길을 돌아갔다. 방문을 열자 나가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이 루이스를 맞았다. 자고 있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짜증을 내며 손을 내치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리는데, 그 모습이 꼭 마나님들의 성질 더럽고 예쁜 고양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