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도착한 장소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였다. 황무지라고 할까, 사막에 가까운 살풍경 속에 철제 의자 두 개와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허허벌판에 의자와 테이블이 어울리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 사람에 당황한 릭은 엉거주춤 서서 주위를 살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벨져 홀든과 수도원에 잠입하는 거나 헌터 둘 사이에 끼는 것보다도 더 불편하다.
“저... 차라도 한 잔...? 커피도 있습니다.”
“그럼 커피로 부탁하오.”
삭막한 풍경 속에 그림처럼 앉아있던 남자는 릭에게 자리를 권했다. 짙은 잿빛 후드, 얼어붙은 결정 조각 같은 것들로 추론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유명한 남자는 연합의 영웅이었다. 릭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빈 의자에 앉았다.
연합의 영웅이 직접 따라준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고, 멋쩍게 주변을 둘러봤으나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포트레너드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군. 그... 용건이 뭐요.”
“이야기를 해보라더군요.”
“나와?”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이 그가 다루는 얼음 결정처럼 날카롭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깨질 것 같이 위태로운 분위기라 어쩐지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단둘이 만나기는 처음이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저를 이리로 불러내 원치 않은 자리를 만든 토니를 원망하며, 릭은 다시 말을 붙였다.
“하하.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위에선 톰슨 씨가 가진 정보에 대해 물으라고 절 보냈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니까요.”
루이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말끝을 늘이는 사이에 다시 침착한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이 일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릭은 내심 가지고 있던 영웅에 대한 인상을 수정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전쟁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익히 알고 있을뿐더러,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의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그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들 주변 사람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별개가 아닌가.
릭은 최근에 만났던 남자를 떠올리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컵을 한 손에 쥐었다.
“음. 그래서 뭐가 궁금하오.”
“...여러가지가 있지만,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떠나셔도 되고요.”
“마치 내가 떠나길 바라는 것 같군.”
내내 다른 곳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는 건 처음이라, 릭은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이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나. 깜빡이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찰나였지만 고개를 숙이며 휘는 입술을 본 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 가볍게 손을 내젓는 루이스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라 제가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 하하. 그렇군.”
후드의 그늘에 가려진 얼굴에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간다. 릭은 루이스 쪽으로 몸을 숙였다. 루이스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웃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감사합니다. 이건 별 거 아니지만... 좋아하신다고 들어서요.”
“이런. 이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루이스는 그의 의자 아래 놓여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릭에게 건넸다. 봉투에 찍혀있는 로고를 확인한 릭은 도넛 가게에 들러 도넛을 사는 루이스를 상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드셔도 됩니다.”
“고맙소. 요즘 이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을 도통 못 만나서 말이지. 다들 하나같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 바쁘더군.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도 않고....”
“상식을 기대하기 힘든 곳이니까요.”
“그러게나 말이오.”
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루이스가 후드 재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도 주머니가 있나 싶어 그의 손에 시선을 옮기자 루이스가 릭을 바라보며 작은 기계를 꺼냈다.
언제부터 녹음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 시작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녹음기를 꺼내 보여주는 건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녹음기를 보고도 민감한 질문에 답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일까. 릭은 답을 찾아 루이스를 바라봤으나 루이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형제도 있고, 그 날 지원하러 간 동료도 있습니다만.... 늦은 탓인지 인식의 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라서요.”
“그래서 날 부른 거요?”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모두 알려진 얘기만 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꼭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 같았다.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고, 최소한의 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머릿속에 정에 약한 천재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그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의문과 흥미만 생겨날 뿐이다.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일 텐데, 계속해서 먼저 입을 열게 되는 것도 이상했다.
“미안하게 됐군. 당신이 이렇게 나오기까지 했는데.”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하.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루이스는 그 뒤로도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그의 질문에 릭은 모른다, 혹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애매모호하게 답을 했고, 루이스는 그럴 때마다 더 캐묻는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게 맞긴 하지만 이래서야 답을 기다리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루이스를 걱정하며 녹음기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여쭤보고 싶은 건 이게 끝입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인사를 받기도 민망하군.”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고문을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조금 조심하시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부른다고 나오시면 그 때는 정말 고문실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지 않았잖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을 잡자 루이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살짝 찌푸린 눈살에 릭은 무심코 잡았던 손을 놓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능력만 믿다간 정말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기엔 특히나요.”
“...새겨듣도록 하지.”
토니에게 느끼는 위안과, 브루스에게 느끼는 존경심, 그리고 벨져에게 느끼는 막연한 기대감과 다른 감정에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았던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는 사이 루이스가 녹음기를 끄고 짐을 챙겼다. 생각에 잠겨있던 릭은 자리를 뜨려는 루이스의 등을 향해 물었다. 이 이상한 질의응답이 시작됐을 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왜 이런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이게 무슨 뜻일까. 나름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대답에 릭은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봤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릭을 향해 돌아섰다.
“상황에 떠밀려 괴로워한다는 걸 들은 바 있습니다. 전쟁과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지만.... 이미 한차례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굳이 보태는 설명을 듣고 있던 릭은 마침내 루이스가 무엇을 바랐는지 깨닫고 입을 벌렸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실험의 재료로 쓰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고맙소.”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수 있다고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도 그 사실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는 사람도 있고,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운데 모두가 외면한 일상과 권리에 대해 말하는 남자를 보며 릭은 말로 형언하기 벅찬 감정에 차올랐다. 루이스가 지키려 애쓴 것은 릭 그 자신마저 포기한 것이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 였으니까.
“할 수 있다고 그게 쉬운 건 아니지.”
짧은 문답이었으나 릭은 루이스라는 사람이 왜 '영웅'이라 불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지 이해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은 희망을 맡길 수밖에 없다. 힘이 없고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진 릭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신세를 졌군. 내가 필요해지면 부르시오.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건 회사만으로 족하지만.... 긴급 택시로 이만한 게 또 없거든.”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루이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릭의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악수 뒤에 떨어지는 손이 왠지 아쉬워 그를 향해 웃자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최근 너무 눈이 부신 사람들을 봐서 그렇지, 이쪽도 남자치곤 선이 가늘고 예쁜 얼굴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청초한 분위기가 감도는 게 이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무슨 부탁이든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톰슨 씨?”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등을 돌렸고, 릭은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멀쩡히 가는 사람을 이유도 없이 붙잡은 건 릭 자신도 놀랄 만큼 충동적인 행동이라 입을 열고도 저를 돌아보는 루이스의 눈에 돌려줄 말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 그게.... 나도 토니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오... 연합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같이 가지 않겠소?”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말은 꽤 그럴 듯 했으나 너무 허둥댄 나머지 영 신빙성이 없었다. 처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소년도 이렇게 떨지는 않을 것이다. 릭은 부끄러움과 긴장이 뒤섞여 미친 듯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붙잡은 손목을 놓았다.
하긴. 갑자기 이런 말을 해봤자 수상쩍게 보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말 한 마디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체념하려는 순간 피식 웃음이 새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이 얇게 휘었다.
“그럼 기꺼이 동행하죠.”
“...아, 그럼 게이트를 열겠소.”
잠시, 그의 미소에 눈을 빼앗겼던 릭은 바로 발 밑에 게이트를 열었다.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도 민망한데 좀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런 모습을 보고 웃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친절히 고개를 돌려주었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 그러면 나도 민망하오.....”
“크흠. 죄송합니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웃지 말란 뜻은 아니었는데, 말해놓고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아쉬워진 릭은 그를 가까이 끌어 당겼다.
“이러는 편이 능력을 쓰기 편해서 말이오.”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릭은 능력 핑계를 댔다. 발 아래 반짝이는 게이트를 본 루이스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섰고, 줄어든 거리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릭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릭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가까워서야,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다. 문제는 거리를 벌려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루이스 역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저기....”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얼굴이 귀엽다. 남자한테 귀엽다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 보는 게 귀엽다는 말이 딱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건 알지만.... 모두에게 이러는 건 아니오.”
“...다행이군요.”
릭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살짝 눈을 내리깐 루이스의 속눈썹에 하려던 말을 잊었다.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을 때우는 가볍고 상투적인 말에 불과했지만 릭의 게이트는 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을 연합에 옮겨놓았다.
“그럼 저는 이만.”
“저, 루이스.”
루이스는 연합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말을 붙이기 어려웠지만 릭은 저를 위해준 사람을 위해 용기를 냈다. 그가 써준 마음에 비하면 아주 약간의 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릭은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소?”
“릭!”
말없이 릭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입술을 뗀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더 반갑게 맞는 연합의 참모 덕에 애타게 기다리던 답을 못 듣게된 릭은 토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루이스는 릭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돌아섰고, 릭은 풀이 죽은 나머지 돌아선 루이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남겨져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쓴 거랑 ctrl+c/v한 것 같지만 새로 나온 보이스 드라마를 듣고 나니 생각나서ㅠ
루이스는 빈 꽃병에 백합을 꽂아 놓고 곧장 욕실로 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소매를 걷고 목욕 준비를 하고 있으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지지만 하인 신분으로는 손을 담그는 게 고작이다.
매일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 병이 같은 무게의 금값과 비슷하다는 향유며 입욕제를 풀고 그 물을 그냥 하수구에 버리는 건 귀족들, 혹은 그만한 부자나 할 수 있는 호화로운 목욕이다. 감히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맨몸으로 있어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욕실이 수증기로 덥혀지고 나서야 루이스는 도련님을 모셔 왔다. 낮에 입힌 옷을 벗기고, 미리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벨져가 들어가면 그 때부터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옆을 떠날 수도 없는 루이스는 욕조 옆 작은 간의 의자에 앉아 벨져를 바라봤다. 하루 종일, 몇날며칠을 함께 있었는데도 이 얼굴은 질리지가 않는다. 어디 질리다 뿐이랴, 매번 새롭게 감탄하고 만다.
루이스는 날카롭게 뻗은 눈매며 오뚝한 코, 다물린 입술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벨져 홀든은 미의 극치를 인간의 형태로 빚어놓은 것만 같은 사람이고, 그의 까다롭고 극성스러운 성미에는 익숙해질지언정 벨져 홀든의 고매한 아름다움에 익숙해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깐 좀 뜨거운 것 같았는데, 지금은 딱 좋네요.”
벨져는 별다른 말없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 것으로 루이스의 말을 긍정했다. 제 취향대로 섞은 향기와 따스한 온기에 취해 몸과 마음이 노곤해졌다. 근거 없는 행복에 젖어 정신을 놓고 있으니 욕조 옆에 앉아 물을 찰박이던 루이스와 손이 스쳤다. 눈이 마주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타오르는 석양의 색을 하고선, 불꽃조차 삼켜버릴 것 같은 냉기를 품은 심연의 눈동자. 들여다보면 그 심연에 빠져버릴 걸 알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신비로운 눈이다. 저 벽 너머, 깊은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벨져가 생각을 하는 사이 눈을 내리깐 루이스가 스펀지에 비누거품을 냈다. 손을 물에 담그며 슬며시 풀어지는 눈매가 곱다.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따뜻한 물로 씻는 것도 감지덕지라며 엷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고, 날숨과 함께 말이 튀어나왔다.
“들어오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불현듯,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노골적이다.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당연했다. 제길. 며칠 있었다고 벌써 이글의 나쁜 점이 옮기라도 한 걸까.
루이스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하고 덤덤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게 다행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바로 쫓겨나요.”
“여긴 너랑 나 둘 뿐인데 누가 안다는 거지?”
“그래도, 하인과 함께 목욕하는 주인은 없어요. 홀든의 도련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인과 도련님이라는 관계를 들먹이며 사양했지만 벨져의 귀에는 정중한 사양이라기보단 완고한 거절로 들렸다. 욕조에 걸친 팔을 따뜻하게 적신 스펀지가 문지르며 지나간다. 벨져는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하인에게 매달릴 사람이 못 됐기에 시큰둥하게 다른 팔에 턱을 괬다. 괘씸한 녀석 같으니.
“뭐, 그렇다면야.”
벨져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 루이스는 착실히 하인의 본분을 다했다. 오히려 오늘따라 손이 더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을 끼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것 같은 손길은 처음 목욕을 도울 때와 변함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능숙해졌다는 것일까.
눈을 내리깐 채 제 몸을 씻기는데 열중하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불쾌한 감정이 비누거품과 함께 조금씩 씻겨 나갔다. 팔과 어깨, 가슴과 배를 거쳐 물속에서 다리를 문지르고 있을 때 벨져는 굳게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군.”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 걸요.”
“그건 내가 결정해.”
루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종아리를 문지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의 당혹만은 여실히 느껴졌다. 저 침착하고 투명한 눈이 흔들리고 표정이 바뀌는 걸 보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때는 무슨 짓을 해도 눈 하나 까딱 않던 녀석이 고작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원하신다면야.”
원하는 걸 얻어낸 벨져는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기다렸다. 루이스는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지 작게 숨을 내쉬었고, 그 숨이 담은 체념과 포기에 벨져는 점점 더 의기양양해졌다.
“음...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고아입니다. 어떤 애들은 부모를 알기도 하고, 한쪽만 알거나 친척에게 맡겨지거나 하는데 전 어느 쪽도 아니었어요. 그냥 거리의 고아였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깐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에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섞여들었다. 그러고 보면 참, 물을 닮은 남자다. 벨져는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드넓은 호수를 떠올렸다.
“그중에 몇몇은 자기 발로 고아원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얼마 못 가 돌아오곤 했죠. 거리에 고아가 넘치는 만큼 고아원에도 자리가 없었거든요.”
말하는 사이 몸을 다 씻긴 루이스가 자리를 옮겨 벨져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두피를 마사지하고 머리카락을 감기는 손길에 절로 눈이 감기고 졸음이 밀려왔다. 온전히 루이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잡념을 비누거품과 함께 물에 쓸려 보내던 벨져는 문득 루이스의 이야기가 제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수도원출신 아니었나?”
“원래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얘기는 흥미로운 법이죠.”
시니컬한 대답에 벨져 눈살을 찌푸림 그런데 귀를 씻기던 중이라 루이스가 아파서 그런 줄 알고 작게 죄송해요. 라고 속삭이듯 말하고 다시 얘기를 이어나감.
“그래서 보통 애들이 그러는 것처럼 버려진 아이들 무리에 끼어 살았죠. 우리는 각자 하는 일이 달랐어요. 보통은 으레 그러하듯 소매치기나 도둑질, 구걸, 배달, 구두닦이, 신문팔이부터 꽃팔이, 돈 되는 건 뭐든 해서 그걸로 먹고 살았죠.”
“너는? 어느 쪽이었지?”
“글쎄요. 뭐였을 것 같으세요?”
말끝에 피식 웃는 소리가 섞인 것 같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는 요령 좋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수건을 덮어 마무리했다.
“물에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돼요.”
좀처럼 웃지 않는 녀석이 띠운 엷은 미소에 벨져는 그러쥔 주먹에 힘을 줬다. 그 자신도 짓고 있는 줄 모르는 미소는 아주 예쁘고 상냥해서,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너는 나를.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에 벨져는 짜증내던 것도 잊고 루이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말로 다 하지 못한, 할 수 없는 마음을 담은 손은 뜨거웠고, 붙잡은 팔은 차가웠다.
루이스의 옷차림은 크게 두 가지다. 책을 만지는 날은 니트에 셔츠, 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날은 후드재킷과 청바지. 그의 후드에서는 언제나 약한 화약 냄새와 싸한 소독용 알콜의 냄새가 풍겼고, 루이스의 몸이며 손에는 언제나 새 상처가 생겼다.
위험한 일을 하는 건 확실했지만 루이스가 말하려 하지 않았고, 더 간섭하기도 주제넘은 짓이라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멀쩡히 나갔던 사람이 팔에 붕대를 감고 들어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신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겁니까, 그 꼴로 지금...!”
“그냥 살짝 금간 거니까. 자, 받아요.”
루이스는 한 손에 안고 온 식료품 봉투와 다친 손으로 들고 온 신문을 내밀었다. 입술이 찢어져 피딱지가 진 채로 웃으면서 회피하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짐을 빼앗아 대충 던져놓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윽....”
“이게 그냥 살짝 금간 거라고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몰아세우던 나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날을 세우는 그의 눈빛에 긴장의 끈이 팽팽해지고, 이 침묵과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진 내가 루이스를 와락 껴안았다.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이렇게 애틋할 수 있을까. 차가운 몸을 끌어안자 어제부터 내내 나를 채운 원망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이 꼴이 되어 돌아온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겨우 이 사람을 내 눈앞에 뒀다는 안도감이 그 자리를 매웠다.
품안에 넣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겨우 날뛰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체구가 가녀린 편도 아니건만 왜 이다지도 위태로운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힘들었다.
“루이스, 제발.... 당신은 내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걱정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없으면 나는....”
“괜찮아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잇기 전, 루이스가 나를 밀어냈다.
“얼른 씻고 올 테니까 같이 저녁 먹어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 루이스 대신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사이 많이 자란 머리카락이 자꾸 속눈썹을 간질이는 것도 짜증스럽고, 선을 긋는 루이스에게도 짜증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나는 수건으로 손을 닦다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다친 건 왼쪽이니 괜찮다며 설거지까지 하려는 걸 기어코 말려 주방에서 쫓아냈건만 정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가다 못 보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좋아요. 뭐가 궁금한데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신경 쓰인다고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진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의심하는 눈이던데.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아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항복 선언이나 다름 없는 행동에 루이스는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물어봐요. 대답할 수 있는 건 해줄 테니까.”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친절이 과한 거 아닙니까.”
“다 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이 지낸 시간이 있잖아요. 날 해칠 거라면 진즉 해쳤겠죠. 그런 낌새가 보였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고.”
아니. 당신은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타인에 불과한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까.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한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루이스의 눈에 담긴 신뢰에 말문이 막혀 시선을 피하며 손을 만지작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눈빛을 받는 것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꽤 자신이 있나 보군요.”
“내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돼요.”
“정말 그냥 궁금해진 것뿐입니다.”
“음. 연합의 루이스가 나라고 하면 믿겠어요?”
책이나 만질 것 같은 단정한 청년이 연합의 영웅이라. 황당한 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 없다는 뜻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루이스는 농담을 하는 사람치고 너무 진지했다.
“설마.... 진짭니까.”
“저 문을 나가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다쳐서 생긴 상처일리 없다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을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가 그 ‘영웅’ 루이스라고는 아무리 좋게 봐도 이미지가 매치되지 않았다. 전설적인 시대의 영웅이 고작 이런 곳에서 이렇게 지낼 리 없다.
“연합의 지원은 한정적이고, 나보다 못한 사정에 처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여유가 되면 양보하는 게 낫죠. 군식구가 생길 줄은 나도 몰랐지만. 어차피 잘 들어오지도 않거든요. 보다시피 이런 집이라 집세도 싸고.”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루이스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의식을 잃은 시간을 합하면 두 달 가까이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지만 그가 가져다주는 신문은 꼬박꼬박 읽었다. 혹시나 기억에 도움이 될까 시작한 일이지만 집안일을 하고 나면 달리 할 일이 없다보니 지루해서라도 읽게 되는데, 연합의 영웅 얘기는 잊을만 하면 등장했다.
“기사나 이야기나, 아무래도 과장되는 면이 많죠. 잔뜩 부풀린 쪽이 더 잘 팔리니까.”
“...그렇군요.”
“사실은 별 거 아니죠? 어떤 녀석 하나는 영웅이란 말에 잔뜩 부풀려진 말을 듣고 대서양을 건너왔는데, 차마 내 입으로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한동안 멋진 척 하느라 고생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냥 평범한 동료지만.”
다른 사람 얘기를 하면서 엷은 미소를 띠우는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속에서 더한 짜증이 올라왔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나에겐 당신밖에 없는데.
“루이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내 품에 가둔다고 가둬질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으로 매달려 붙잡아두면 된다.
“매번 같은 악몽을 꿉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대자 루이스가 무릎 위에 펼쳐놓은 파일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침착하고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으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마음이 복잡한 척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잔뜩 뜸을 들였다.
“누군가에게, 누군지 모를 이들이 나를 쫓는 꿈입니다. 꿈속의 나는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고, 어디로 숨어도 그들은 나를 찾아내서 다시 달아나기를 반복하죠.”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런 제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쫓기는 이가 그들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심지어는 이런 자신을 비웃고 경멸하는 이들. 쫓기는 이유조차 모른 채 도망치는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최악의 악몽.
“그 꿈에서 뭐라도 알아낼 것이 있다면 좋겠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내 이름조차 모릅니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자 손이 잡혔다. 손등을 덮고 어루만지는 그의 손의 온기에 고개를 들자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 당신이란 사람은 어째서 이다지도 사랑스러운가.
“그렇지 않아요. 당신 탓이 아니잖아요.”
“루이스.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기억도, 꿈도..... 차츰 나아지겠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 담긴 눈빛에, 그의 그 목소리에 나는 그만 루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루이스는 손등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이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다친 짐승이 온기를 갈구하는 것처럼 루이스의 목에 코와 뺨을 부비며 체향을 맡았다.
여름해가 차츰 짧아지는 게 느껴지는 애매한 계절, 아침부터 온종일 내리는 비에 벨져와 루이스는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앉은 루이스는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벨져는 침대에 앉아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침대 위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다. 하지만 환절기라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하루쯤은 그냥 쉬라며 루이스가 극성을 부린데다, 가끔은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고 끌리기 마련이라는 말이 떠올라 연필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루이스의 고개가 돌아왔다.
“뭐가 잘 안 되세요?”
“빨리도 묻는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차라도 가져올까요.”
참 시간이 안 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차를 마실 시간이 다 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을 들었다 놓는 애달픈 감정의 이름을 깨달은 이후로 벨져는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손을 잡고, 하얀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손목 안쪽을 문지른다거나, 함께 잠들 때 그의 허리를 안고 은근히 다리를 쓸어내린다거나. 하지만 루이스는 거부하지 않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벨져는 오기에 더 스킨십의 수위를 높여갔으나 루이스는 그 말간 얼굴에 동요나 당황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투라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애초에 루이스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만든 건 벨져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봤자 긁어 부스럼만 될 게 뻔했고, 그렇다고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벨져는 이 꼴이 되고도 누군가에게 부탁 한 번 해 본 적 없었다. 평생 싫은 소리, 입 발린 아부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건 그래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으나 이번에는 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살갑게 굴며 다가가는 것도 통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타고난 아름다움과 고귀한 출신 덕에 벨져는 언제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쪽에 속했다.
덕분에 그 마음과 관심을 거절하는 데에는 능숙했지만 타인의 환심이나 호감을 사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받아주면 그 뿐이겠으나 루이스는 거리를 벌리면 벌렸지 결코 그의 의지로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못 견디게 짜증나 입술을 물던 벨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지금 이 저택에 단 한 사람뿐이다. 루이스는 문을 열고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와 발로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닫았다. 양손으로 들기 힘들었는지 팔에 받치고 있는데 여간 버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안에 계신다고 주방에서 힘을 좀 썼다나 봐요.”
“그걸 그렇게 들고 왔나?”
“이 앞까지는 카트에 올려서 가져왔죠.”
일부러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나 싶어 눈살을 찌푸리자 테이블에 널찍한 트레이를 내려놓은 루이스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무겁진 않았어요. 이것저것 챙겨주는데 거절하기도 그랬고요.”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얼굴로 다 말 하셨어요.”
벨져는 다음부터는 그냥 카트에 실어 오라고 하려다 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트레이 가득 가져온 단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기껏 힘들여 가져온 성의를 봐서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오이 샌드위치는 오랜만이네요.”
“원래 자주 먹는다. 부담도 적고, 단 건 별로라서.”
루이스는 차를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담은 뜻 모를 눈빛에 벨져는 뭔가 잘못 말했나 생각하다 그동안 티푸드로 단 것만 올리라고 지시했던 것을 떠올렸다.
“친절하시네요. 얼마 전까지 이름도 모르셨으면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시선을 내렸다. 대개 그런 행동은 순종의 의미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복종이나 순종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이상하다. 오히려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물지 않았으면 했다.
새벽의 꽃잎, 혹은 세상을 소복이 덮는 눈 같은 미소가 보기 좋았다. 눈이 싱그러워지는 느낌이라고 하면 알까. 벨져는 시집의 온갖 미사여구와 언어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저 미소를 다 담을 표현은 없다. 그야 물론 그 저명한 시인들은 이 녀석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만.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어떻게 되는 지 가르쳐줘야 하나?”
“흠. 전 가끔 도련님 침대에 콩 한 알을 넣어보고 싶어지는데, 지금이 그러네요.”
루이스는 납죽 엎드리는 대신 부드럽게 응수했다. 돌려 말했지만 까다롭고 예민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을 벨져가 모를 리 없었다. 벨져는 작게 실소를 흘렸다.
이 녀석은 첫날부터 그랬다. 돌보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를 고용한 건 홀든의 안주인이니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던가. 하인이라기엔 거친 느낌이 나는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끔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수를 둔다.
그의 그 당돌한 면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일단은 말이 통하는 상대도 오랜만인데다, 제 말 한 마디에 죽는 시늉을 하는 하인들에게 싫증이 난 상태였기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루이스의 이런 반응은 꽤 신선했다. 그래서 벨져는 채찍을 드는 대신 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해보지 그래?”
“싫어요. 그럼 제가 매트리스까지 다 갈아야 하잖아요.”
“넌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글쎄요.”
루이스는 애매한 말로 에둘렀다. 활자 속에 눈을 두고 있는데도 바로 맞받아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끔은 이 '당연함'이 무섭다. 겪어본 적 없는 세계,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과 사고는 낯설다 못해 섬짓했다. 여기 익숙해지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위기감과 막연한 공포. 다른 세계를 접하는 충격 앞에 루이스는 애써 의연한 척 했다.
벨져는 지금 오랜만에 적수를 만나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약한 면을 보였다간 금세 흥미를 잃고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될 게 뻔했다.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는 부품은 교체된다. 거리에서 나고 자란 루이스는 그 섭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계속 그렇게 살 생각인가? 남 수발이나 들면서? 그렇게 봉사를 즐기는 타입은 아닌 걸로 아는데.”
“도련님이 건강해지시면 전 떠나게 될 텐데요.”
“남겠다는 생각은 없나? 굳이 이 저택이 아니라도 홀든에 네 자리 하나 쯤이야 우습지도 않지.”
“남아서 계속 당신을 모시라고요?”
아름다운 얼굴이 속내를 들킨 양 얼어붙었다.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는 반응에 입맛이 썼다. 평생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라니, 대를 이어 한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자란 귀족 도련님 답다.
벨져 홀든에겐 이게 당연한 것이다. 이쯤 되면 우습지도 않다. 설마하니 이 유치한 억지가 통할 거라 생각한 걸까. 루이스는 책을 덮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결국은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다.
아무리 디킨스 책을 읽어도 루이스같은 사람의 삶과 미래가 어떤지 알 리 없다. 그래. 한 입 크기로 자른 오이 샌드위치를 티푸드로 먹으며 빵에는 갈색 껍데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귀하디 귀한 도련님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했다.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벨져도 이 거리를 느끼고 있을 터다. 뭐든 척척 대답하는 사람이 말문이 막혀 눈만 꿈뻑이고 있는 걸 보면 그랬다.
“차가 식었네요. 다시 준비해올게요.”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저 등을, 저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벽에 가로막히는 느낌이다. 그 벽은 너무 두텁고 높아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거부당하는 느낌, 모두 벨져 홀든에겐 생소한 것이라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같이 자라다시피 한 형제나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당황스러움이었다,
“가끔, 난 네가 너무 멀어.”
멀어지는 등에, 닫히는 문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중얼거렸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라 그 말이 루이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씻으러 들어갔던 루이스가 나의 등 뒤에서 발돋움을 해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면서 킁킁거리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신선한 채소라곤 여기 올라온 게 전부니 내일은 장을 봐와야합니다. 그러고 보니 비누도 새로 사야겠더군요. 어서 앉으시죠.”
다 된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놓자 루이스가 웃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가 처음 주방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는 티가 나는 식탁과 의자였으나 지금은 그와 나의 흔적으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오늘 저녁 메뉴는 남은 자투리 채소로 만든 포토푀에, 끄트머리만 남은 빵, 치즈를 얹은 감자와 소시지 구이가 전부인데 루이스는 이렇게 단출한 식탁이 크리스마스 정찬이라도 되는 양 나의 노고를 치사했다. 그가 내가 한 음식을 맛있다고 하는 것도, 내가 들인 시간과 정성을 알아주는 것도 꽤 흡족하고 뿌듯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빈말로도 그만 하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한때는 이런 걸 꿈꾼 적도 있었는데. 감회가 새롭네요.”
“흠. 저랑 말입니까.”
내가 접시에 음식을 더는 동안 루이스는 식탁에 턱을 괘고 평소에 하던 칭찬과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듣기 좋은 소리였기에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루이스는 순박한 청년처럼 작게 웃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정해진 상대는 없었어요. 남자일 줄은 몰랐지만.”
“저랑 있는 게 좋다는 소리로 들리는 군요.”
루이스는 웃으며 긍정했다. 나는 그의 웃는 얼굴과 가볍게 울리는 웃음 소리를 퍽 좋아했고, 내게 눈웃음을 짓는 루이스는 더 좋아했다. 이렇게 웃어주기만 하면 무슨 요구를 해도 다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자주 들어오는 겁니까?”
“그것도 있고,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나는 음식을 접시에 던 두 개의 접시를 내려놓고 내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식전 기도 같은 걸 하지 않았기에 루이스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바로 포크와 스푼을 들었다.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 묘한 열을 일으켜 음식을 먹는 대신 숟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나를 흘긋 보고 씹던 음식을 넘겼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고 섬세한 그답게, 조금 전보다 더 긴 말이 이어졌다.
“전에는 그냥 일하다 휴게실에서 잤지만 이제는 다르잖아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그러다 잘 자라고 인사하고 아침에 다시 만나는 그런 거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통해 가슴까지 퍼지는 감각에 나는 그를 바라보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기억이 없으니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같은 것을 바랐던 것 같다.
마음을 쉴 수 있는 안식처.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의지가 되는 온기와 감정 같은 것. 타인과의 관계가 굳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루이스는 특별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전부 알고 싶고 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는 열망. 어쩌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이 남자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나는 살짝 테이블 두드려서 루이스의 시선을 끌었다.
“당신. 그거 압니까?”
막 덜어낸 음식을 입에 넣으려던 루이스가 눈 동그랗게 뜨고, 그의 포크에 달랑 들린 감자와 소시지 덩어리에서 치즈가 길게 늘어졌다.
“당신, 웃으면 정말 어려 보인다는 거.”
루이스는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거였냐는 듯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눈을 휘며 보내는 눈빛이 더없이 따스했다.
“남자한테 외모로 칭찬 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은데요. 진짜로 잘생긴 사람이 그러면 더 기분 이상하다구요.”
“칭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해요.”
루이스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그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대신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루이스를 관찰했다. 잘 먹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보고 있으면 그를 기다리는 내내 지루해한 걸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웠다.
식사를 마치고,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서는 루이스에게 주방을 맡긴 나는 포트에 커피를 내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음식을 하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설거지는 맡겨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을 너무 못 믿는다며 노골적으로 서운하다는 티를 냈지만 아무리 귀여운 얼굴을 해도 안 되는 건 있는 법이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루이스가 가져온 신문을 대충 훑는 사이 집안 가득 진한 커피 냄새가 퍼지고 이내 물소리가 멎었다. 양손에 컵을 하나씩 들고 온 루이스는 내 전용이 된 머그컵을 내밀고 소파에 앉아 컵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래서인지도 몰라요.”
“뜬금없이 무슨 소립니까?”
“자주 들어오는 이유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나도 좀.... 힘들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좀 지쳐있었어요. 다른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도피처가 필요했는지도 모르죠.”
루이스는 쓴웃음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아련하고 지친 표정에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손을 루이스의 다리 위에 얹었다. 따로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맞춘 듯 두 벌씩 마련되어 있던 식기와 읽지 않는 책. 불현 듯 스쳐지나가는 불쾌한 의혹에 얼굴이 굳었다.
“여자 문제입니까?”
“...내가 빠지면 곤란한 일이 많아서요.”
“그녀가 떠났군요.”
정곡을 찔렀는지 루이스가 눈을 감으며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서도 안쓰러움 대신 알 수 없는 분노와 질투가 끓어올라 나는 추궁을 계속했다.
“그래서 떠난 겁니까? 당신이 일에 매진하는 바람에?”
“그녀와 나는 바라는 게 달랐어요. 항상 여길 떠나고 싶어 했죠. 좀 더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당신은 남고 싶었고요.”
루이스는 비참하지만 다 괜찮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리석고 한심해서,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남자.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있는 힘껏 안고 그의 고통까지 들이마실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손길이 나의 등을 두드렸다. 아픈 구석을 찌른 건 난데, 어째서 당신이 나를 위로하는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나는 당신의 세계에서 숨을 쉬지 못할 테고, 당신 역시 나의 세계에서 숨을 쉴 수 없다. 누구 하나는 망가지고 말겠지. 더 다가가면 안 된다는 이성의 경고음이 굉굉하게 울리는데도 나는 품에 안은 남자를 놓지 않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장미덩굴로 휘감은 퍼걸러를 지나면 나오는 유리 온실. 어느덧 일상이 된 산책길에 벨져는 여느 때와 같이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저 몰래 차에 약을 탄 건 괘씸하지만 루이스는 자기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골탕을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요 며칠 사이 몸상태도 부쩍 좋아진 것도 사실이라 벨져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했다. 물론 말로는 주인을 속여먹은 괘씸한 하인을 벌주는 중이지만 고작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그렇게 험한 길도 아니니 사실 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고작해야 몇 종류의 티푸드와 간식, 그걸 담을 플레이트와 은식기, 찻잔 세트,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 정도일까. 벨져는 앞서 걷던 루이스가 멈춰서는 걸 보고 양산을 고쳐 들었다. 벌써 지친 거냐고 한소리 하려는 찰나 루이스가 들꽃 하나를 꺾어 들었다.
“그런 게 취향인가?”
“정원이나 온실에 있는 꽃은 꺾으면 쫓겨나기도 전에 요제프씨한테 혼나잖아요.”
“변명하고는.”
참 자기 같은 꽃을 고른다 했더니, 대는 이유도 보잘 것 없다. 루이스는 양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팔에 끼우고 꽃줄기를 만지작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뜻대로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중했다.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싶어 슬쩍 넘겨보려 하면 냉큼 감추고 시치미를 뗐다.
“으왓.”
그러다 발밑도 못 보고 넘어질 뻔 한 건 덤이다. 줄곧 루이스를 주시하던 벨져가 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넘어졌다간 피크닉 바구니 안의 내용물이 엉망이 됐을 터였다.
“걸려 넘어질 것도 없는 길에서 한심하기 짝이 없군.”
“감사합니다.”
“깨트렸다간 변상도 할 수 없는 찻잔이니 조심해야지. 그랬으면 몸을 팔아도 부족할 거다.”
“네?”
경악으로 물든 눈빛에 벨져는 제 입에서 '몸을 판다'는 말이 다른 의미로도 들릴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경박한 사고방식이지만 출신이 그러니 그런 쪽으로 해석하는 것도 도리가 없다. 벨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하인을 위해 친히 해설을 덧붙였다.
“내기를 말하는 거다. 네가 이 집에 빚을 만들면 그걸 갚는 동안은 달아날 수 없으니까.”
“아.”
“네가 시작한 내기였다만.”
벨져는 이제야 겨우 생각났다는 듯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서있는 하인을 향해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물론 기억합니다.”
“흥. 그 바보 같은 표정이나 어떻게 하고 말하지 그래. 그리고 그 얼굴,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하지 마. 내 격까지 떨어지는 것 같군.”
“네, 분부대로 하죠.”
말하는 사이 도착한 온실 문을 열자 진한 꽃향기가 진동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왔는데 숨이 차지 않는다. 그냥 걷기만 한 게 아니라 말을 한 걸 생각하면 더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 빌어먹을 약이 차에 섞여 더 효과를 냈나 보지. 벨져는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이제는 두 사람의 지정석이 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벨져가 양산을 접고 땀을 식히는 사이 루이스는 테이블에 가져온 것들을 차렸다. 반듯한 삼각형으로 자른 오이 샌드위치와 스콘, 스콘에 곁들일 클로티드 크림과 찻잔 두 개가 오늘의 티타임 메뉴다. 벨져의 변덕 때문에 다른 것도 이것저것 들어있지만 이 정도면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했다.
“잘 드시네요.”
“무슨 뜻이지?”
“웬만한 건 입에도 안 대시는 분이 오이 샌드위치 같은 걸 드시는 게 조금 신기해서요.”
“단 걸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딱히 오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너는 싫어하나?”
“아뇨. 음식은 가리지 않아요. 그래도 기왕이면 햄이나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가 좋지만요.”
“점잖지 못한 취향이군.”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그런 싸구려가 잘도 들어간다는 표정이다. 루이스는 소리 내서 웃지 않기 위해 애쓰며 제 몫으로 넘겨준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왕창 바르며 대답했다.
“뭐, 아시다시피 그런 출신이니까요. 먹었을 때 배가 차는 쪽이 좋죠.”
“그럼 티푸드는?”
“딱히 가리지 않아요. 살면서 먹어본 것보다 여기 와서 처음 먹어본 게 더 많고. 빵에 쨈만 있어도 감지덕지죠.”
“알 만 하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버릇 하지 못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벨져는 책갈피를 끼워둔 부분을 찾아 책장을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바구니를 열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끔 차에 곁들이는 간식이다. 제비꽃 사탕을 꺼낸 벨져는 루이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동그란 케이스를 열어 자기 입에 한 알을 넣고, 또 하나를 내밀자 루이스의 입술이 다가왔다. 당연히 손을 내밀겠거니 생각했던 벨져는 놀라 숨을 집어 삼켰다. 순간이나마 손끝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과 열린 입술 사이로 끼친 더운 숨에 놀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작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 벨져는 고개를 돌렸다. 오도독 굳힌 설탕 입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꽃잎이네요.”
“...그래.”
“도련님이 좋아하실 만 하네요.”
무슨 뜻이냐 물었겠지만 왠지 지금은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벨져는 허리를 더 꼿꼿이 세우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거 드릴게요. 답례라고 하긴 뭐하지만.”
엉성하고 서툴지만 어찌어찌 잘 봐주면 그럭저럭 반지로 보이는 형태다. 루이스는 답지 않게 머쓱해하며 말을 덧붙였다.
“실은 화관을 엮어드리고 싶었는데 여기 꽃들은 함부로 꺾을 수가 없어서요. 잡초라고 생각하셨는지 비슷한 꽃도 안 보이더라고요. 보통은 지천에 널린 꽃인데.”
벨져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이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당당하게 내민 손은 끼워주길 요구하고 있었기에 루이스는 어느 손가락에 맞을까 고민하며 꽃반지의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흐응. 짧은 콧소리와 함께 벨져가 검지와 중지를 접었다. 남은 선택지는 둘. 망설임 끝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에스코트하듯 잡고 새끼 손가락에 꽃반지를 끼웠다. 그마저도 크기가 안 맞아 둘째 마디에 걸리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기분이 영 이상했다.
“이러니까 꼭....”
묘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혹은 긴장하고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 루이스는 벨져 손에 끼운 꽃반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충성 서약 받는 것 같군.”
“프로포즈 하는 것 같네요.”
동시에 흘러나온 말의 차이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이상했다.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비슷한 상황이니까. 그렇지 않나?”
“방금 하신 말 똑같이 돌려드리죠.”
“흐응. 프로포즈 반지라기엔 너무 초라해서. 아, 미안하다고 하면 되나?”
“...그냥 말을 마세요.”
루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벨져를 외면했다. 항복을 받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벨져는 흡족한 미소를 띠고 그의 새끼손가락에 걸린 꽃반지를 바라봤다.
숨이 찬다. 이대로는 잡히고 말 것이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을 피해서, 나를 쫓아오는 그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숨고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안 돼. 누군가, 누군가 나를 좀 도와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에 단내가 나는데도 잡히면 죽을 거란 공포에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만, 이제 그만.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는 어둠, 보고도 외면하고 마는 사람들. 아무리 외쳐도, 아무리 울어도 도움은 오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는 달려야 한다.
급박한 발소리, 나를 쫓아오는 사냥개, 울리는 소리. 온 힘을 다해 달리던 나의 몸이 크게 굴렀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끈적하고 소름끼치는 어둠이 발목을 휘감고 나를 쫓던 이들이 서서히 손을 뻗었다. 발버둥 칠수록 몸을 휘감은 어둠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몸을 뒤덮었다. 빛 한 줌 보이지 않는 어둠에 집어삼켜지며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싫어, 제발, 그만...!
마지막 발버둥으로 뻗은 손이 잡혔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일으키는 감각에 눈을 뜨자 짙은 어둠 속에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보였다.
“괜찮아요? 무슨 꿈을 그렇게....”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쿵쿵 뛴다. 불안과 공포, 일방적으로 무력하게 쫓기는 감각이, 그 때의 심장소리가, 아직도 달라붙어있는 것 같다. 마른 침을 삼키자 젖은 손이 등을 쓰다듬다 떨어졌다.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얼굴에 겨우 꿈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그를 꽉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에 뺨을 부비며 숨을 토하자 그제야 밖에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저, 나 옷이 젖어서....”
루이스는 그의 그 순박한 목소리로 난처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나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남성의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안심이 된다. 루이스의 손길은 자상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소리와 미지근한 체온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도닥였다.
“괜찮아.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모르면서, 루이스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나의 등을 토닥였다. 일순 든 충동에 고개를 든 나는 곧장 그에게 키스했다.
“읏...”
당황한 듯 움찔한 그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혀를 얽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진하고 질척한 키스가 주는 아찔한 쾌감에 나는 공포도, 불쾌한 악몽도 전부 단번에 잊어버리고 혀와 입술에 집중했다. 처음에 밀어내려던 루이스도 양순히 입을 벌리고 내 혀를 빨고 입술을 부딪치며 입술과 혀를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숨이 가빠지고 혀뿌리가 뻐근하도록 이어지는 키스에 나는 루이스의 뒷목을 잡고 고개를 돌려 각도를 바꿔가며 혀를 밀어 넣었다. 젖은 몸을 더듬다 그의 허리를 잡으려는데 루이스가 나를 떼어내고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이제 진정했어요?”
“...조금은요.”
“음. 아래는 아닌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도 붉어진 뺨과 살짝 풀어진 눈시울이 예뻐 정신없이 쳐다보던 나는 그의 눈짓에 팽팽하게 솟은 바지춤을 발견했다. 아랫배에 묵직한 열이 쏠린 건 루이스와 있을 땐 으레 있는 일이었고, 키스를 하다 보면 또 그렇게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혼자 지내며 손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는 루이스를 붙잡으려 했으나 루이스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다 안다는 듯 슬쩍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리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깝고 분해 눈살을 찌푸렸으나 옷장을 향해 돌아선 루이스에게 보일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젖은 후드재킷을 의자에 걸어놓고 젖어버린 티셔츠를 벗었다. 꼼꼼하게 균형이 잘 잡힌 등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사이 새 옷을 입은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턱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해결하고 와요. 기다릴 테니까.”
“당신이 먼저 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너무 지쳐서 힘들어요. 오늘만 봐줘요. 나도 그럴 테니까..”
나는 방금 전의 키스를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는 루이스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눕히고 하던 것을 마저 이어가고 싶지만 그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싫다.
망설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옷을 벗으면 어떻게 될지 안다는 듯 젖은 바지는 벗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다.
“...먼저 잠들지 마세요.”
“노력해보죠. 너무 기대는 말고.”
겨우 나온 말이라는 게 이런 거라니,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약간의 침묵과 약하고 애절한 말투로 루이스는 경계를 풀고 미소 지었다. 나는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 화장실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거센 빗소리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루이스의 체중을 받아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를 듣고 지퍼를 내려 단단히 일어선 물건을 손에 쥐었다.
“큿... 흐.... 루이, 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뜨겁게 맥동하는 욕정에 나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그의 단정하고 말간 얼굴이 흥분을 못 이겨 달뜬 신음을 뱉으며 쾌감에 물드는 걸 보고 싶다. 몸에 난 상처와 흉터 위에 입을 맞추고, 흰 목을 물고, 그리고, 그리고.
“후우.... 하.... 하, 하하....”
다리를 벌리고 그의 안으로 파고드는 상상 끝에 나는 사정했다. 정액을 토하며 꺼떡이는 분신도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으나 아직은 상상에 불과한 욕망일 뿐이었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 아무리 친절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해치려드는 사람을 계속 품어주진 않을 테고, 그랬다가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 뿐이다.
더해가는 열감 속에 흥분하면서도 철저한 계산을 하고 마는 자신을 알면 루이스는 더 경계할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비치는 건 어딘가 세간의 상식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자신이 아닌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자신이다. 그럼 결코 나를 버리지 못할 테니까.
루이스의 미소와, 곤란해하면서도 끝내 받아주고 말 때의 표정을 떠올린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그가 조금 더 마음을 놓고, 내게 익숙해지면 이렇게 혼자 달래지만은 않을 것이다.
도저히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어진 나는 더운 숨을 내쉬며 땀과 정액으로 젖은 손으로 다시 내 분신을 감싸고 짜릿한 상상을 이어갔다.
일상이 무너졌다. 평범한 일상을 지탱하던 커다란 시스템의 붕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은 너무나 빠르고 쉽게 무너지고 부서졌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죽은 자가 걸어 다니고, 한 때 가족, 친구, 혹은 그저 지나치는 행인에 불과했던 이들이 원초적인 위협을 가하는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 날 전까지는.
“다이무스. 일어났어요?”
“지금 막 가려던 참이다.”
“이글이 또 말썽이에요.”
상념을 정리하던 다이무스는 한숨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새벽 내내 불침번을 섰기 때문이지만 동생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보다 더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 나니 정신을 흐리고 무르게 만드는 약에 의존하고 마는 녀석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민폐를 끼치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세간의 상식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맏형의 책무는 세상의 붕괴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루이스.”
녀석이 몸을 지배하는 짜증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약을 찾듯, 다이무스는 앞서 걷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 자신을 마주하도록 돌려 세우고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루이스는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으나 이내 입을 벌리고 숨과 혀를 섞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격식을 차릴 것도, 체면을 차릴 것도 없으니 전부 내던지고 단 둘이 되고 싶었지만 루이스는 그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는 게 다이무스 한 사람일리 없으니 이미 여러 번 유혹을 받았을 텐데 여기 계속 있지 않은가.
루이스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그런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이무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책임을 다할 때까지는 그 누구의 손도 잡지 않으리라는 것도.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벨져가 짜증을 부리는 거라면 언제나 있는 일이니 신경 쓸 거 없다.”
“그냥 짜증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음. 좀처럼 타협을 모르는 녀석이니까.”
그 말이 그의 여린 마음을 찔렀는지, 루이스는 허리를 안고 뺨에 입 맞추던 다이무스를 밀어냈다.
“루이스. 나는....”
“알아요. 일단은 이글부터 보러 가죠.”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나머지 그만 말을 잘못 골랐다. 급박한 상황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흔한 일이라지만 세 형제가 모두 같은 사람에게 꽂히는 건 극히 희박한 확률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남성이라는 것까지 더해지면 여간 난처한 게 아니다.
루이스는 누군가를 선택할 상황이 아니라며 모두 거절했지만 생존자 캠프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나 형제 사이에 불협화음이 나는 것을 전부 그의 탓으로 생각했다. 원래부터 형제간의 우애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사실도 루이스에겐 전부 다 보이는 변명에 불과했다.
유력가의 자제로 태어나 부족함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사람 하나를 얻지 못해 이렇게 궁색해질 줄 몰랐기에 더더욱 홀든의 세 형제는 루이스에게 매달렸다. 무언가에 열중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세상 탓이기도 했다.
“이게 다 무슨....”
“아, 왔어? 둘이 같이 올 줄은 몰랐네.”
“이글.”
“안 터트릴 테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응?”
방 안에 폭약을 잔뜩 쌓아두고 회로와 라이터를 들고 있던 이글이 회로를 내려놓고 루이스에게 안겨들었다. 이글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루이스에게 뺨을 비비며 다이무스를 향해 혀를 내밀었고, 안 그래도 힘이 잔뜩 들어간 다이무스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 똑같은 짓을 해댔음에도 불쾌했다.
“내가 처리하지.”
“루이스. 응? 한 번만. 한 번만 하자. 그럼 얌전히 있을게. 응?”
이게 한 두 번이 아니었는지, 이글은 집요하게 루이스의 허리와 엉덩이를 더듬으며 매달렸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치를 보며 이글을 밀어내려 했으나 완력의 차이는 그리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이스. 난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영악한 녀석 같으니. 다이무스는 이글의 수완에 혀를 내두르며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으로 능구렁이처럼 온갖 문제를 다 피해가고, 보급품도 은근슬쩍 더 챙기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눈앞에서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읏, 이글!”
각자의 방식에 끼어들지 않기로 맺은 약속만 아니었다면 매달리는 녀석을 바로 떼어냈을 텐데. 다이무스는 겨우 이글을 떼어낸 반동으로 휘청거리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이거 당장 해체해서 레이튼 씨한테 돌려드려. 네 입으로 어떻게 된 건지 해명하고, 앤지한테도 네가 직접 말해.”
“같이 안 가줄 거야?”
“먼저 약속을 어기고 제멋대로 군 건 너야. 그런 표정해도 안 봐줄 거니까 알아서 해.”
한껏 가여운 척 울상을 짓던 이글이 루이스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루이스는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폭탄으로 가득 찬 방을 나가버렸다. 형으로서, 경쟁자로서 한 마디 할 차례였다.
“이글.”
“알아, 알아. 도화선 설치도 안했다고.”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형이랑 작은형이 무슨 생각인지는 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지? 우리 영웅님은 나랑 더 끈끈한 사이거든. 아까 못 봤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어제 새벽에 형이랑 작은형이 싸운 건? 자기들도 할 말 없으면서.”
이글은 코웃음을 치며 켜켜이 쌓아둔 폭약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젯밤이라는 얘기에 잠시 펴져있던 다이무스의 미간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아니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지 몰라도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우리 다이무스 홀든 경께서 더러운 편법까지 동원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어. 나도 아니고, 형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니 나도 좀 놀랐지 뭐야?”
“이글.”
“작은형이 화낼 만 했던데? 하필이면 형이랑 루이스가 같이 정찰을 가는 날 다른 조원들이랑 연락이 끊기고, 루이스가 다쳐서 급하게 피했는데 거기에 물자며 약이며 방공호까지 있어. 너무 우연이 과하지 않아? 둘이 그렇게 사라져버리지 않은 게 얼마나 놀라운지 말 안 해도 알겠지?”
다이무스는 이글이 손을 꼽는 것을 지켜보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
“이제는 부인도 안 하는 거야? 너무하네. 내가 이십 사년간 알고 있던 다이무스 홀든이 아닌 것 같아.”
“사회의 상식과 규율에 묶여있던 것뿐이다.”
“이제 그 사회가 붕괴했으니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 여기엔 또 이곳만의 규율이 있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아무리 스노우 퀸이 자애롭더라도 이 정도 양의 폭약을 빼돌렸다는 게 알려지면 총살을 면하기 힘들 테니.”
“괜찮아. 난 루이스가 살려줄 거거든.”
“그럼 그 전에 누군가가 널 처리할지도 모르지.”
다이무스의 싸늘한 말에 선을 분리하던 이글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의 다이무스 홀든이라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랑에 눈이 멀고 질투에 타오르는 게 아니라 미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사실, 미치지 않는 게 더 어렵긴 했다.
“형. 그거 알아?”
“사실 우리 중에 형이 제일 못된 거. 바보같이 규칙에 얽매여 있는 척, 온갖 고상하고 고결한 척은 다 하지만 속은 제일 시커멓잖아. 아무리 나라도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지는 않거든.”
“...동료의 범위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지.”
이글은 방을 나서는 다이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동안 가문이며 회사며, 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았던 벨져나 자신과 달리 억눌린 게 많았다는 건 알지만 평생을 망나니인 척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던 이글의 눈에도 다이무스의 행동은 너무 과격했다.
그를 구성하고 있던 체제와 규칙, 시스템이 무너지니 함께 무너지기라도 한 걸까. 이래서야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나 다를 게 없다. 미친 듯이 달리다 그 자신도 다른 열차도 들이받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겠지. 문제는 그 다른 열차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성격에 저렇게 된 게 자기 때문이라고 하면 절대 끊어내지 못하겠지. 이글은 벽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 푹 숨을 내쉬었다. 루이스를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루이스가 다이무스를 선택한다 해도 절대 저런 상태의 다이무스에게는 넘겨줄 수 없었다.
더 어그러지기 전에 수를 쓰지 않으면. 이글은 입술을 매만졌다. 경쟁자들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고, 그를 거머쥐려면 단순한 생각을 뛰어넘어 치밀한 계략이 필요했다. 지난 밤 잠든 루이스가 그도 모르는 사이 중얼거린 이름을 떠올린 이글은 뜻 모를 웃음을 짓고 다시 하던 일에 착수했다.
사람을 찾아 옥상을 오른 루이스는 진한 주홍색으로 물든 하늘을 등지고 검을 휘두르는 남자를 발견했다. 사실 임시 거처로 쓰는 쇼핑몰이 아무리 넓어도 그가 있을 곳은 여기밖에 없기도 했다.
“여기 있었네.”
“잔소리라면 사양하지.”
“그런 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그럼.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하러 오셨나? 그 외엔 딱히 듣고 싶지 않군.”
시니컬한 말투가 왠지 기뻐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루이스는 그에게 다가갔다.
“난 괜찮아. 큰 부상도 아니었고. 멀쩡히 돌아왔잖아.”
“넌...!”
계속 무시하다 뒤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음에도 아름다웠다. 루이스는 난간에 걸터앉아 눈부신 석양을 등지고 벨져를 바라봤다. 머리까지 올려 묶고 격양된 감정을 풀어내던 벨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 마음을 뒤흔든다. 벨져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역광이 지는 바람에 그런 것도 있지만 기분이 언짢기도 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봐선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구름이 드리우며 루이스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뭐가 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전부.”
“그것도 나 때문이야?”
“쓸데없는 소리만 할 거라면 가겠다.”
“알잖아.”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등을 돌려 걷던 벨져는 걸음을 멈췄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살아만 있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마음을 할퀴고 있는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했다.
언제나 명확한 것들뿐이었던 벨져의 세계에, 루이스는 유일하게 혼란을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만 자신을 잃고 발을 헛디디고 만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잖아.”
“...그래.”
루이스는 그 말을 내뱉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이 수척했다. 아스라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에 벨져는 입술을 물었다가 루이스의 옆에 섰다.
단둘이 있음에도 말을 고르고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낼 수 있는, 루이스가 감추고 있는 비밀. 벨져는 알면서 입을 다물었다. 함께 가자는 말을 거듭해 거절하는 이유도, 초라하고 나약한 이들을 지키려는 마음도 전부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벨져는 루이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옆에 두고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겠지.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남자 때문이었다.
“내가 화가 난 건 형아가 널 독점하려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럼?”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나는 여기서 죽어도 된다는 생각.”
루이스는 엷게 웃었다. 그 희미한 웃음은 정답이라는 뜻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벨져는 더 화가 났다. 걱정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다. 애초에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이 꼴이 났다지만 벨져 홀든과 벨져가 가진 정보를 원하는 곳은 많았고, 벨져는 그 후보들 중 마음에 내키는 곳을 고를 수 있었다. 가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루이스가 떠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나?”
그 아련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아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건 그의 탓이 아니다. 그저 막지 못했을 뿐. 아무리 특수요원이라 한들 화학병기와 싸울 수는 없다. 한 발 늦은 건 벨져 역시 마찬가지였고, 세상에는 아직도 그보다 더 악질적인 이들이 그들만을 위해 만든 벙커에 숨어 호의호식하고 있다.
루이스 역시 그 거대한 음모에 대해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떨쳐내지 못할 뿐. 그래서 안전을 확보한 뒤에도 정찰대를 꾸려 생존자를 찾아 나서고, 위험을 감수하고, 매일같이 죽음 속에 자신을 던지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루이스의 무모한 행동을 두고 영웅이라 칭했지만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미안.”
“반성이 동반되지 않은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게.”
담담한 목소리에 더 울컥한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어깨에 떨어지고 루이스와 벨져의 얼굴 사이에 커튼처럼 드리웠다.
“넌 아무것도 몰라.”
침묵을 지키는 그의 눈에 어린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벨져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부르트고 거칠어진 입술임에도 끔찍이 좋았다. 그래서 더, 오래 맞대고 있기가 힘들었다.
“벨져.”
“닥쳐.”
“미안해.”
팔을 잡은 채 읊조리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벨져는 루이스를 품에 안았다. 숨이 막혀오는데도 놓을 수가 없다.
“그 때가 좋았지. ”
“그 때 널 완전히 밟아놨어야 했는데.”
벨져는 루이스의 웃음소리에 발끈하는 대신 그 날의 루이스를 떠올렸다. 스무 살의 자신과, 스물 한 살의 루이스. 참 질긴 악연이다. 그 때 널 만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네가 이렇게 괴롭지 않았겠지. 벨져는 말을 삼키고 루이스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애틋했다.
“내가 지금....”
“하지 마.”
“...그래.”
내가 지금 널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면 무슨 터무니없는 소망도 전부 들어주고자 할 것임을 알기에 벨져는 루이스의 말을 끊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잠시 이렇게 세상에 단 둘뿐인 것처럼 서로를 안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은 짧고, 부서지기 쉬우니까. 우리의 세계가 무너지고 부서져 온전치 못하더라도 지금 이 찰나에 우리가 완전했다는 것이면 충분하다.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모를 것들이지. 벨져는 말을 삼켰다.
“참. 이거.”
루이스는 주머니에서 뜯지 않은 담뱃갑을 꺼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쇼핑몰에 자리를 잡은 덕에 부족한 생필품은 거의 없었으나 언젠가는 소모되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호품은 더 귀한 사치품이 되어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꽤 괜찮은 방공호였나 보군.”
“클램차우더 스프 캔도 있더라.”
벨져는 비닐을 뜯고 입에 담배를 물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도 담배지만 자신을 생각해 가져온 마음이 기뻤다. 한 대 피우겠냐는 뜻으로 담뱃값을 내밀자 루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너한테 그 담배 냄새가 나는 게 좋더라.”
“...참고하지.”
불을 붙여준 루이스가 라이터를 넣고 벨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미안할 일을 잔뜩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사랑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벨져는 루이스에게 약했다. 제 눈치를 살피며 예쁘게 구는 루이스에게는 더더욱.
“다른 사람들이 찾을 거야.”
“...그래.”
“너무 오래 있지 마.”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예쁘게 굴며 기분을 풀어줬으니 이제 다른 사람을 찾아갈 차례라는 걸 알지만 꼴사납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기분 나쁘다고 총질하면 안 돼! 비 올 것 같으니까 맞지 말고 들어 오고!”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입에 대고 외치는 루이스를 향해 벨져는 손을 내저었다. 하여간 눈치는 아주 귀신같다. 그게 자기 자신한테 한없이 무뎌서 문제지. 벨져는 자신의 차례가 조금이라도 빨리 오길 바라며 날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석양에 섞여 흩어졌다. 세상이 무너졌음에도 해는 뜨고 진다. 타오르는 저녁노을도, 내리는 비도,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마음도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