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63건
- 2017.07.05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6.21 [릭루이] Bittersweet 2
- 2017.05.24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14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1.27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 2016.12.13 [벨져루이]
- 2016.11.26 [루드루이] 04.
- 2016.11.24 [마틴루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 2016.11.20 [루드루이] 03.
- 2016.11.20 [루드루이] 02.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온실 시리즈에서 이어집니다.
* 병약한 벨져와 그런 도련님을 돌보는 하인 루이스
햇살과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벨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이 무겁지 않다. 아주 잠깐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은 게 대체 얼마마인가. 건강할 땐 너무나 당연했던 감각에 벨져는 기지개를 켜지도, 눈을 비비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순간과 감각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 눈을 감았다. 역시,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
벨져는 침대 머리맡에 둔 작은 은종을 흔들려다 씩 웃으며 종을 손에 쥐었다. 잠을 설치지도 않고, 식은땀에 젖어 깨지도 않은 데다 악몽도 꾸지 않은 건 그 녀석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루이스가 들어왔다. 양손 가득 수건을 들고 있는 루이스의 머리카락은 방금 씻은 것처럼 젖어있었고, 소매와 목깃도 다 잠그지 않은 채였다. 흰 얼굴이 물기에 젖은 것에 비해 입술만 붉다. 거기에 단정하지 않은 차림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벨져가 멍하니 평소와 다른 루이스를 바라보는 동안 루이스도 가만히 멈춰서 눈을 깜빡였다. 어째 덩달아 멍청해지는 것 같다. 루이스는 스스로 일어난 벨져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눈이 떠지더군.”
웃으며 말하자 루이스가 아까보다 더 눈에 띄게 멈칫하며 벨져를 바라봤다. 어딘가 잘못된 곳을 찾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기분이 상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표정은 뭐야.”
“아뇨. 제가 아는 도련님이 맞나 싶어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전혀.”
벨져가 홱 짜증을 내며 돌아서자 루이스가 다가왔다. 벨져는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바깥을 바라봤다. 늘 같은 풍경인데 오늘따라 더 환하게 빛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을 재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아무리 재도 열은 없다. 루이스는 그러고도 의심스러운지 얼굴을 가까이했다. 순간 이마가 차가워졌다.
“윽, 너...!”
“열은 없네요.”
루이스가 이마를 맞대며 눈을 깜빡였을 때, 벨져의 뺨에 없던 열이 번졌다. 기껏 상쾌한 아침을 맞아 좋았던 기분이 그 잠깐 사이에 오르고 내리며 심장이 뛰었다.
“, 네가 오기 전까지 완벽한 아침이었다!”
“제가 뭘요?”
“네가 자꾸...!”
턱, 말문이 막혔다. 벨져는 한숨과 함께 혼내기를 포기하고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세수할 거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주방에서 따뜻한 물을....”
“찬 물도 괜찮아.”
“...도련님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아시죠?”
“얼른 가지 그래?”
이게 아주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 기어오른다. 이러다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오를 기세라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냉큼 화장실로 들어가 주전자에 물을 채워왔다. 벨져는 루이스가 세면대에 물을 붓고 꽃잎을 띄우는 모습을 지켜보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어젯밤 잠옷 소매에 묶어놓은 리본을 풀어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결 좋은 은발을 뒤로 모아 묶었다.
루이스는 수건을 들고 벨져의 세수가 끝나길 기다렸다. 뜨거운 물이 아니라 평소보다 꽃향기가 덜하지만 비누에서 나는 향기와 약간의 물기만으로도 벨져 홀든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일찍 일어나 바람을 쐬는 거며, 잘 웃는 게 아무래도 오늘은 좀 살 만 한가 보다. 루이스는 비누거품을 닦아내는 벨져를 거울을 통해 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전에 여섯 번째인지 일곱 번째인지 모를 하인 하나가 벨져 앞에서 방긋방긋 웃다가 뭐가 그렇게 즐겁냐며 짤렸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루이스는 벨져 앞에서 잘 웃지 않았다. 하기야, 자기는 아프고 비참해 죽겠는데 옆에서 누가 즐겁고 행복해하면 더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하인이라는 사람이 그러고 있는 걸 이 고고한 도련님의 자존심이 허락할 리 없었다.
“수건.”
벨져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한 박자 늦게 보송하게 잘 마른 수건을 건넸다. 늦다고 성질내는 일 없이 거울을 보며 물기를 닦아낸 벨져가 폭 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나?”
“네. 일어나서 환기도 해야 하고 씻고 밥도 먹어야죠.”
그러고 보니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벨져가 보는 루이스는 언제나 문 앞에 세워둬도 될 만큼 멀끔하고 깔끔했고, 그게 너무나 당연해 다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 흐트러진 모습이라던가 씻고 먹는 것만 해도 그렇다. 잠시 머릿속에 느슨한 잠옷을 입고 잠든 루이스를 상상한 벨져는 괜히 차가운 물에 다시 손을 넣었다.
“아침 드셔야죠. 조금만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안 급해.”
“드시고 나면 더 기운이 날 거예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벨져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물기를 털려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손을 수건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까지 빈틈없이 닦아내는 섬세한 손길에 고개를 내리자 생채기와 흉터로 엉망인 루이스의 손이 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벨져의 손도 그리 다를 건 없었다. 검을 잡아 생긴 굳은살과 상처들이 자랑이었던 적도 있다.
“그럼 하고 싶으신 건요.”
검을 잡기는커녕 정원을 산책하는 게 고작인 몸이 되고 부터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녀석이 오기 전 까지는 그저 하루하루, 피와 살로 만든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억울해서 분풀이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글쎄.”
애매한 대답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옷장 문을 열었다. 미의식이 꽝인 하인 대신 벨져는 매일 아침 입을 옷을 직접 골랐다. 루이스가 셔츠가 가득한 서랍을 다섯 개 열고, 일상복으로 채운 옷장을 두 개 열고나서야 벨져는 오늘의 옷 고르기를 멈췄다.
“정원에 꽃이 피던데 나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늘 보는데 뭐 하러.”
셔츠를 입히고 단추를 채운 루이스가 다시 무릎을 꿇고 바지를 입혔다. 벨트를 허리에 꿰고 나서야 루이스는 작게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버클은 채우지 않은 채로 벨져의 등 뒤로 돌아와 셔츠를 입힌 루이스가 벨져의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온실은 잘 안 가시잖아요. 다들 예쁘다던데. 올해 장미가 더 탐스럽게 피었다고 얘기가 자자해요. 그걸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던데.”
“흥. 잘도 아는군.”
“주워들은 게 있죠. 같이 가자는 사람도 있고.”
벨져가 시큰둥하게 빈정거리자 루이스가 다시 벨져 앞에 섰다. 아래서부터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길은 언제나와 같이 군더더기가 없었다. 다만 단추를 채우느라 집중하며 내리깐 눈이 신경 쓰일 뿐이다.
“그래봤자 꽃이 꽃이지.”
“그래도요.”
“하,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 가지 그래?”
가시 돋친 말에 베스트의 장식 줄까지 채운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하고 무심했다. 이 말간 얼굴로 다른 하녀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전 도련님 몸종이잖아요.”
당연한 소리다.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명제인데도 그 말 한 마디에 울컥 감정이 치밀고 눈가가 시큰해진다. 말문이 벨져는 괜히 목을 만지며 구두를 신기는 루이스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누가 뭐래도 나는 당신의 것이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다시 우쭐해졌다.
벨져는 루이스가 구두끈을 묶는 동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씰룩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썼다. 구두끈을 묶고 일어나 열어놓은 서랍과 옷장을 정리하는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는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가면 되겠군.”
“피크닉이란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피크닉 바구니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시죠? 그 안에 식기며 그릇까지 다 들어간다구요.”
“내가 들면...!”
“그럼 제가 짤리는 거구요.”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기껏 인심을 써줬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영 별로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가자고 꼬셔놓고. 루이스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불쾌했다.
“그래서, 나랑 가기 싫다는 건가?”
“...가고 싶으시면 가세죠. 도련님 집이잖아요. 누가 당신을 막겠어요.”
“그럼 준비해. 조금 걸을 거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요.”
그 놈의 식사. 벨져는 한 번 웃고 휑하니 나가버린 루이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도로 침대에 누웠다. 루이스의 젖은 머리카락이 아른거리고, 물기를 닦아주다 닿은 손이 간지러웠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5. (0) | 2017.09.01 |
---|---|
[홀든루이] 세상의 끝 (0) | 2017.08.31 |
[릭루이] Bittersweet (2) | 2017.06.21 |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24 |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5.14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릭루이] Bittersweet
*
하루 종일 매달린 보고서를 열다섯 번 째 고치고, '처음이 낫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란. 릭은 부질없이 넘어가는 초침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달고 살고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작성한 보고서와 시계를 다시 한 번 번갈아 본 릭은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고 기다리길 얼마, 신호음 대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트와일라잇 서점입니다.”
“루이스. 나요.”
'아, 릭. 아직 회사인가요?'
“그게.... 야근해야 할 것 같소....”
'고생이 많네요.'
“그대는?”
'잠깐 연합에 들렀다가 들어갈 겁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녁 챙겨 드시고요.'
“알겠소. 그대도 챙겨 드시오. 참, 괜히 기다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끊겠소.”
'네. 이따 봐요.'
릭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누군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은 고된 하루에 위안이 된다. 그와의 시차는 다섯 시간 남짓. 시간을 어림잡아본 릭은 루이스가 잠들 시간이 다 되도록 서점에 있으며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가를 쓸었다.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릭의 책상 위에 김이 오르는 커피 잔 하나가 놓였다. 머그잔을 들고 있는 하얀 손과 붉은 손톱을 본 릭은 깜짝 놀라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놀라요? 뭐 잘못하다 걸린 사람처럼?”
“인기척을 못 느꼈소. 퇴근한다지 않았소?”
“막 가려던 참이에요. 열다섯 번 퇴짜 맞고 원점으로 돌아간 가여운 과장님께 커피 한 잔만 주고 말이죠.”
굽이치는 금발이 매혹적인 그녀가 시원하게 웃으며 릭의 책상에 살짝 몸을 기댔다. 무슨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것처럼 오묘한 미소를 짓는데, 왠지 모를 초조함에 릭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협상의 달인이자 노련한 로비스트다.
그녀 앞에서 비밀이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다. 애초에 감추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릭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그녀라고 알 리 없다는 생각은 그 다음이었다.
“흠. 숨겨둔 애인이라도 돼요?”
“애인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가 남자라는 사실은 둘째치고서라도, 연합의 영웅이 애인이라니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추측이다. 아무리 명석한 그녀라도 이번만큼은 너무 넘겨짚었다. 릭은 아직도 소년 같은 모습이 남아있는 청년을 떠올리며 얇게 웃었다. 그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동거인일 뿐이다. 딱히 틀린 표현도 아니라 그렇게 설명하려는데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할 것 없다는 제스처에 안심하면서도, 붉게 칠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에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렇군요. 표정이나 말투가 꼭 애인한테 말하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나이 차가 조금 나니까. 나도 모르게 동생 대하듯 했나 보군.”
“뭘요,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셨는걸요. 그래서 애인인가보다 했죠.”
“하하, 그야 퇴근하면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퇴근만한 게 없죠.”
“그럼. 기획안을 내던지는 상사보다야 왔냐고 맞아주는 사람이 백 배 낫지.”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그녀의 책상에서 가방을 챙겼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무거운 서류 가방 대신 가벼운 핸드백과 공들인 화장이 그녀의 자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바람에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신세가 더 처량해진 것은 덤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고맙소. 커피 잘 마시겠소.”
앉은 자리에서 그녀를 배웅한 릭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허리에 나쁜 자세라는 것은 알지만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했다. 어쩌면 오늘 내내 일진이 안 좋은 것도 그 영향인지 모른다.
릭이 의외의 인물과 예기치 않은 동거를 시작하게 된 건 지난주부터다. 액자와 시바 포를 찾아다니다 벽에 막힐 때면 릭은 지하연합의 토니 리켓을 찾았다. 그의 뛰어난 지략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가볍게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릭의 이야기를 들은 토니는 생각 끝에 후보지 몇을 골라주었고, 릭은 담소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토니, 이번 분기 생산품 보급 리스트.... 아. 안녕하세요.”
“아, 여기 두게.”
침착하고 의연한 결정사답게 루이스는 놀라는 기색 없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참,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요즘 어디서 지내고 있나. 여전히 여관을 전전하는 중인가?”
“뭐, 여기저기서 해결합니다.”
“그럼 우리 영웅님과 함께 지내는 건 어떤가. 이 친구, 보기보다 외로움을 타서 말이야.”
“토니. 유언비어 유포는 그쯤 하세요.”
“나쁜 제안도 아니지 않나. 자네야 늘 집을 비우기 일쑤고, 두 사람의 생활시간이 겹칠 일도 드물 테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릭은 당황했다. 루이스는 토니에게 쓸데없는 짓 말라는 투로 말하긴 했지만 언제나와 같은 포커페이스라 기분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음. 나는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좋소.”
릭은 사양하는 대신 용기를 냈다. 모처럼 하는 자기주장이라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지만, 놓치면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토니의 꾐에도 끄떡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토니는 잠시 릭을 보다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자네라도 그 집은 좀 크지 않나. 안 그래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다른 사람 눈도 있고. 금전적인 문제라면 내 사비로 보태주지.”
“누구가 들으면 엄청 서운해 하겠네요.”
“그야 있는 집을 두고 떼를 쓰는 거니까. 그럼 승낙했으니 바로 들어가면 되겠군. 릭. 잘 부탁하네.”
릭이 '토니 리켓의 사비'라는 말에 잠시 망설이는 사이 토니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황급히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릭이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이자 토니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과 눈빛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시감과 위화감이 들었지만 릭의 신경은 온통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하여 릭 톰슨은 루이스와 함께 살게 되었다. 잠시 신세를 지는 것이지만 늘 멀찍이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던 사람과 산다는 기대감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연합에서 제공했다는 집은 토니의 말대로 혼자 살기엔 넓었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 가구며 집기는 손을 탄 흔적 없이 깨끗했다. 루이스는 주방과 화장실을 소개하고 빈 방을 내주었다. 그가 건네는 여벌 열쇠를 받아들 때의 설렘이란.
차가운 열쇠와 그보다는 조금 덜 차가운 손이 손바닥을 스쳤을 때, 릭은 첫사랑에게 고백을 할 때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릭은 루이스가 방문을 닫자마자 어린 애처럼 침대 위를 굴렀다. 쑥스러움과 기대감이 차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당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릭의 설렘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시차가 있다 보니 릭이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면 루이스는 이미 퇴근한 뒤라 집에 있어야 했는데, 좀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방에 들어가 쉬는 것도 아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루이스를 볼 수 없었다.
루이스는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부러 저를 피하는 게 아닐까, 사실은 불편했던 걸까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혼자선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쓸쓸한 적막만이 반겨주는 넓은 집에서 릭은 루이스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사흘째 되던 날 밤, 릭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숙연해졌다.
루이스의 방은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밖과 안이 다를 바가 없다. 여행자의 짐이래봐야 생필품 조금과 약간의 옷가지, 현금 정도가 끝인데 오히려 릭 자신의 방이 생활감이 넘칠 정도였다.
외롭고 쓸쓸한 방은 영웅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약하고 아픈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영웅이라지만 그 역시 인간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그 수많은 사람의 기대를 혼자 짊어지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마침내 릭은 토니의 말뜻과 표정을 모두 이해했다. 그 날 정 많은 천재의 표정에서 느낀 기시감과 위화감의 정체도, 체념한 것 같았던 루이스의 말도 전부. 릭은 그의 미소와 표정이 인형실 끊기 작전을 부탁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들떠있었으면 '잘 부탁한다'는 말에서 느낀 위화감마저 지나쳤을까. 스스로가 한심해진 릭은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시간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타깝고, 슬프고, 아파서 당장 그를 마주해도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혼자 들떴다가 실망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자신과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이 위태로운 남자를 잡아줘야 한다. 릭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토니는 자신이 이렇게 나올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곤란하고 미안한 일을 떠맡겨 미안해한 것이리라. 릭은 진심으로 루이스를 잡고 싶었다.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이 이것인 것만 같았다.
그 날부터 릭은 언제 올지 모르는 루이스를 기다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루이스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서 그를 기다리던 릭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동안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루이스는 릭이 함께 산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단 눈치였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릭은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투정 부릴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릭?'
'피곤한 줄은 알지만... 기다린 성의를 봐서 잠깐 얘기하지 않겠소?'
그리 길지 않은 대화 끝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라기엔 거의 일방적으로 릭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루이스는 순순히 릭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 그동안 무심하게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감인 것 같았지만 릭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제는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 한 걸 그가 깨워줘서 아슬아슬하게 출근했고, 오늘은 함께 아침을 먹고 나왔다. 릭은 저를 위해 까치집이 된 머리에 덜 깬 눈으로 커피를 내리던 루이스를 떠올리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 같았으면 그 머리를 한 번은 헝클어트려 봤을 텐데. 후드 속에 얌전히 숨어있기 마련인 머리카락과 동그란 뒤통수를 차례로 머릿속에 그려보던 릭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는 광대를 깨닫고 멋쩍어져 헛기침했다. 어차피 사무실엔 자신밖에 없지만 괜히 부끄러워져 주변을 둘러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온기에 문득 숨겨둔 애인이냐던 말이 떠올라 더 부끄러워진 건 덤이다. 릭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치고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돌아가 그에게 뭐라도 먹이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업무를 마치자마자 게이트를 탄 릭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눈을 깜빡였다. 잘 차린 한 상과 먹음직스러운 냄새,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볼을 꼬집었을 뻔 했다.
“루이스? 이게 다 뭐요...?”
“음. 야근하느라 저녁이 부실했을 것 같아서요. 제가 만든 건 아니고 사온 거니까 겁먹지 않으셔도....”
루이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하는 사이 릭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올라갔다. 기쁨과 쑥스러움에 작게 헛기침한 릭은 말끝을 늘리는 루이스를 향해 재빨리 손사래 쳤다.
“아니, 아니오! 그래서가 아니라, 그게. 예상치 못해서....”
“그동안 제가 그리 좋은 룸메이트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생각난 김에 사온 겁니다.”
“고맙소. 훌륭하군. 생일상이라도 받은 기분이오.”
진심을 담아 웃자 루이스가 마음을 놓은 듯 슬며시 웃었다. 엷은 미소가 근사해 살짝 시선을 피하자 루이스가 손을 씻고 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릭은 냉큼 방에 서류가방과 재킷을 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짝 뜨거워진 뺨에 찬 물을 끼얹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기쁜 티를 감추지 못하는 자신이 비쳤다. 정말 이렇게 티가 날 수도 없을 정도다.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마음에 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가자 먼저 앉아있던 루이스가 자리를 권했다. 따뜻한 수프에 빵, 거기에 미국식 챱스테이크와 샐러드 약간. 사온 음식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제게 맞춰 세심하게 고른 티가 났다.
“음.... 좀 어떠세요. 괜찮나요?”
“물론이오!”
격양된 나머지 나온 큰 목소리에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늘 지쳐보이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예쁘다고 생각한 순간, 애써 가라앉힌 뺨에 다시 열이 번졌다.
“다행이네요.”
“루이스. 당신은 정말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오.”
그러니까, 생각을 거치지 않고 이런 말이 나온 건 순전히 그 화사한 미소 탓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해버린 말에 한 번,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빛에 두 번 당황한 릭은 숨을 집어삼키며 쥐고 있던 포크를 움켜쥐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괜찮습니다. 그냥 좀 의외였을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오만....”
“제가 릭 씨보다 어린 것도 사실이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군 것도 사실이죠.”
“...지금 놀리는 거요?”
그 말을 웃으며 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밤잠을 못 이룰 뻔 했다. 릭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웃으며 빵을 잘라 건넸다. 진중하고 침착한 줄만 알았는데 또 은근히 여우같은 면이 있다. 조금 억울했지만 먼저 실수를 한 건 자신이었기에 릭은 루이스가 건넨 빵을 받아 입에 넣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원래 영국식 농담이 좀 그렇거든요.”
“앞으론 미국식으로 부탁하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놀리는 게 재밌는지, 루이스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 한 끼에 이렇게 기쁠 건가 싶으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미소가 조금이라도 덜 예쁘고 조금만 더 얄미웠다면 상대를 하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나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릭은 삐진 척 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고기와 빵을 입 안 가득 넣고 씹자 맞은편에서 루이스가 물을 따라 건넸다. 그래도 풀리지 않은 것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자 루이스가 포크를 내려놓고 그의 턱을 괬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해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건 식탁 하나가 고작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은 둘째 치고 연하의 남성이 저를 귀여워하면 불쾌한 게 당연하건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결국 릭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시선에 못이긴 척 고개를 까딱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어찌나 가슴이 세게 뛰는지, 릭은 루이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대신 다시 식사를 시작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릭은 심장을 삼키는 것 같은 심정으로 식사를 마치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직도 먹을 게 남았소?”
“밥은 아니고, 간식이요. 후식으론 좀 무거울 것 같지만.”
의자를 끄는 소리도 없이 일어난 루이스가 낮은 높이의 종이 박스를 내밀었다. 상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단내가 코를 간질이고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선물이오?”
“이 근방엔 미국식 도넛이 없어서. 이 정도로 봐주세요.”
릭은 가지런히 늘어선 머핀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쑥스러운지 머핀 상자를 도로 닫아 릭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잘 먹겠소.”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걱정 마오. 그래도 영국 티푸드는 정평이 나있지 않소.”
“머핀을 티푸드에 넣는다면요?”
“하하, 그럼 지금 한 번 먹어볼까.”
릭은 망설임 없이 제일 앞줄에 있는 머핀을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 설탕의 단 맛과 풍부한 버터 맛이 혀끝을 감돌고 블루베리가 씹혔다. 제 얼굴만 보고 있는 루이스를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스가 안심한 듯 웃었다.
“다행이네요.”
“음. 덩말 맛있소!”
“천천히 드세요. 커피는 많이 마셨을 것 같고... 차라도 드릴까요?”
“아니, 됐소. 정말 괜찮소. 내가 너무 부려먹는 것 같군.”
“하하. 그럴 리가요.”
루이스가 커피나 차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 차가운 물을 쭉 들이켜고 나자 그릇을 치우던 루이스가 검지로 그의 입술 옆을 톡톡 두드렸다. 얇게 뜬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그 눈빛이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릭. 여기. 묻었어요.”
순간 넋을 잃었던 릭은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손등을 긁고 입으로 들어온 설탕과자는 까슬했다. 엉기다 만 설탕 입자가 피부를 긁은 그 간지러운 감각이 아무리 입술을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달고, 끈적하고, 까슬한 감촉과 루이스.
릭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손으로 입을 덮었다. 왜 이러는지 정말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너무 기뻐서라고 하기엔 혼란스럽고, 당황해서라고 하기엔 반응이 너무 과하다. 릭은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한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 붙였다. 루이스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릭은 이런 거라도 해야지 안 쫓겨나지 않겠냐고 능청을 떨었다.
결국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그래도 성인 남성 둘이 서기엔 좁은 싱크대라 릭과 루이스는 서로의 팔이 맞닿도록 딱 붙어 서야 했다. 릭은 루이스가 다 닦은 그릇을 건네면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찬장에 넣었다. 키 차이 때문에 루이스가 그릇을 건넬 때면 릭을 올려다 봐야했는데, 그때마다 릭은 웃지 않기 위해 입 안을 물었다.
가지고 있던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모습 하나가 죄다 귀여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이 없는데,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길고 목이 희었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곁눈질하게 되는 얼굴이다. 속눈썹이 길다는 생각을 하는데 루이스가 고개를 들며 눈이 마주쳤다.
“자. 이게 끝이네요.”
“아, 그렇군. 시간 가는 줄도 몰랐소.”
“얼른 씻고 쉬시죠.”
“그대야말로. 시간이 늦었지 않소.”
“전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그럼 내가 데려다주겠소.”
“괜찮습니다. 이건 제 일이니까요.”
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선긋기가 아쉬우면서도 늦은 시간까지 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다면.
“조심히 돌아오시오.”
“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루이스는 늘 입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문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훈훈하게 데워진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아 릭은 홀로 거실에 남는 대신 방으로 들어왔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아홉 시 반을 조금 넘어가고 있지만 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열 두 시가 훌쩍 넘었다.
외롭고 쓸쓸해졌지만 그가 가고 나니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릭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가볍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답답하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는 걸 떠올리면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아무렴 그보다 힘들까. 릭은 바로 누워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사르르 눈이 녹는 것처럼 번지는 눈웃음과 웃음소리가 깜깜한 적막 속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싱크대에 기대어 입술을 두드리던 그. 그 모습을 떠올린 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갸름한 턱과 긴 속눈썹, 선이 고운 남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진 릭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내 땅 속에 잠들어있던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아해주시는 모든 분을 위해 써봤습니다 달콤쌉쌀한 어른들의 연애 조아요 같이 좋아해주세요ㅠ0ㅠ)/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든루이] 세상의 끝 (0) | 2017.08.31 |
---|---|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7.05 |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24 |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5.14 |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0) | 2017.01.27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유리온실에서 이어집니다.
스물. 루이스는 막연히 제 나이를 셌다. 많다고 하면 많을 수도, 적다고 하면 적을 수도 있는 숫자다. 의지할 곳 없는 거리의 고아치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남는 아이는 별로 없으니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운이 좋았다. 루이스는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표현했다. 어느 해 겨울, 동사 혹은 아사를 목전에 뒀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수도사 하나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친절한 수도사는 혼자 지내기 적적했다며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책을 펴놓고 창밖을 내다보던 루이스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책을 덮었다. 제멋대로에, 더럽게 까다로운 도련님이 마님과 돌아온 모양이었다. 벨져가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벨져를 돌보는 것은 루이스의 몫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라곤 지금처럼 마님이 벨져와 정원을 산책 할 때뿐으로, 보통 이십 분 정도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루이스는 짧은 휴식을 마치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벨져가 돌아오면 주려고 차게 식혀놓은 레몬티를 찾는데 무언가 후다닥 움직였다. 몰라보려야 몰라 볼 수 없는 은발이 툭 튀어나와있는데, 그 딴에는 제법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걸 모른 척 해, 말어. 눈을 가늘게 뜨고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보며 냉장고를 연 루이스는 반쯤 비어버린 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떡하니 놓여있는 물기 어린 컵. 숫제 뭘 훔쳐 먹다 걸린 반응이라고 생각했더니, 정말일 줄이야.
루이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대충 짚이는 곳이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오시죠.”
“으아, 봤어?”
“다 보였는데요.”
“거 눈 되게 좋네.”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지금까지 다들 그냥 눈 감아 준 거 아닙니까.”
“헤헤. 너, 제법인데?”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장난기 가득한 눈을 빛낸 그가 식탁 아래서 나오다 머리를 찧고는 엄살을 부렸다. 막내다운 응석이었으나 루이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비워놓은 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곧 도련님이 돌아오시는데요.”
“나도 도련님이거든!”
“아픈 도련님은 아니죠.”
“뭐, 그건 그렇지만.”
“제 도련님도 아니시고요.”
“우와, 방금 그거 엄청 위험하게 들리는데?”
루이스는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막내 도련님을 내려다봤다. 매사가 장난인 양 가볍게 굴고 있지만 본능적인 감이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리 출신답게, 살아남기 위해 익힌 눈치와 감각이다. 아닌 척 철없는 막내의 가면을 쓴 채 제 잇속을 챙기는 영악함은 루이스가 잘 아는 것이었다.
귀족가 막내 도련님치고는 의외지만, 그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오래 살아남으려면 저와 상관없는 문제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차피 계약제지만요.”
“하하하, 작은형 하인이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도망가는데 뭘. 며칠 째야?”
대체 얼마나 하인을 갈아치웠는지 날짜를 세는 단위도 이 모양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속으로 오늘의 날짜와 처음 이 저택에 온 날을 셌다.
“한 달이 조금 넘었네요.”
“뭐? 한 달? 흐응. 보기보다 인내심이 훌륭한가봐?”
“식사 시간도 못 참고 주방에 숨어드시는 도련님보다야 낫죠.”
하인치고 다소 건방진 발언이었지만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저택의 막내 도련님은 그마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의지랄 것도 없었고, 이 댁의 말썽꾸리기에 대해 들은 게 있었기에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았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벨져 홀든의 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하인이었다. 지금 벨져의 기분을 잘 맞추고 있는 걸 생각하면 겨우 막내 도련님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해고되진 않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조금 괴롭힘을 받을지는 몰라도, 반응을 보고 있으면 정말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이 시답잖은 대화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루이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으므로, 루이스는 그가 마음껏 즐거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조롱에 익숙한 몸이다. 고작 재밌다고 웃는데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작은형은 어때?”
다짜고짜 묻는 게 너무 직설적이라, 루이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질문은 같이 지내기에 벨져 홀든이 어떠냐는 뜻으로도, 벨져 홀든의 상태가 어떠냐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루이스의 감은 전자를 가리켰으나 처음 본 사이에 고용주, 그것도 까다롭고 예민하기로 유명한 벨져 홀든과 사이가 어떠냐는 얘기는 하인으로서 대답하기 난처한 것이었다. 루이스는 가장 무난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오래 보지 않았던 가족이다. '네가 보기에 우리 작은형은 어떤 사람이야?' 보다는 형제의 상태가 어떤지 묻는 게 당연했다.
“도련님이야 늘 그러시죠.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져서....”
“잠깐, 나한테 몸이 어떠하네 상태가 좋네 그런 건 설명할 필요 없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홀든이고, 벨져보단 어려. 그러니 난 태어난 순간부터 벨져를 본 거라구. 나한테 내 작은형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필욘 없어. 그리고, 너도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진 않을 거잖아?”
말투는 여전히 장난스럽지만 그 안에 든 말은 홀든이 자랑하는 검만큼 날카롭다. 식탁을 짚고 빙긋 웃은 그의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웃고 있지만 수가 틀리면 언제든 제 목을 꺾어버릴 것처럼 흉흉하다. 벨져보다도 어리니 저보다 어린 것은 당연한데, 홀든 가의 막내는 '홀든'이 원래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미소 끝에 이글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장난스러운 제스처의 의미는 항복이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롭고 가벼웠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에 루이스는 '말썽꾸러기 막내'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했다. 약자에겐 약자 나름의 방식이 있다. 루이스는 그저 이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루이스가 침착해진 것과 반대로, 탐색하듯 루이스를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잠시 웃음을 참는가 싶더니 결국 폭소를 터트렸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루이스는 굳이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웃는 바람에 한 번 뒤로 넘어가기까지 하면서, 배를 잡고 눈을 훔친 이글 홀든이 루이스를 마주했다. 겨우 몇 분, 혹은 몇 십 초를 보냈을 뿐인데 무거운 공기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너무 그러지 마. 해칠 생각 없다고. 요즘 날카롭지? 그럴 거야. 곧 어머니 생신이고, 그날만큼은 아버지가 큰 파티를 열거든.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그 때라도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댁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병신은 아니라고 말이야. 덕분에 나는 올해도 작은형을 위한 희생양이 될 참이고.”
저택이 떠들썩하고 벨져가 날카로운 건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걸 제게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루이스는 오래 있지도 않을 소모품에 불과했다. 애초에 시중이나 드는 하인에게 집안사정을 말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뭡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하인을 이용해 친형제를 해치려는 게 아닌 이상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낀 위기감. 루이스는 벨져와 닮은, 그러나 전혀 다른 빛을 띤 눈을 마주했다.
“오, 예리한데? 한 달 지났다고 했나? 그럼 적어도 벨져 마음에 들었다는 거네.”
이글은 이런 취향인 줄 몰랐는데 말이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 혼잣말이 다 들린다는 거지만 루이스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내내 장난스럽던 그의 눈빛이 달라진 탓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더 이상 놀잇감이 되어주기 싫거든. 네가 해줄 일은 아주 쉬워. 독을 타라거나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말만 해주면 돼. 없는 애길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형한테 날 만났다고만 해. 아, 물론 내가 시켰다는 말은 말고. 어때? 이 말만 전해주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기는 거야. 까칠한 도련님 모시면서 설설 기는 종노릇 그만 두고, 내 집 마련해서 행복하게. 어때? 끌리지 않아? 자, 이건 선금.”
이글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루이스에게 던졌다. 꽤 묵직한 주머니를 열자 노란 빛이 루이스를 맞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금화일 것이다. 그것도 순금. 생전 가져본 적 없는 금화를 손에 들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진짜 금으로 된 금화라구. 일이 잘 되면 똑같은 무게로 하나를 더 줄게. 어떻게 할래?”
루이스는 말없이 무거운 주머니를 챙겼다. 뜻하는 바를 이룬 이글이 씩 웃으며 다가와 루이스의 어깨 툭툭 두드렸다.
“그럼 잘 부탁해.”
얼굴이 가까운 거리에서, 이글이 한 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고개를 까딱였다. 루이스는 잠시 이글의 행동을 곱씹는 듯 가만히 서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모두를 창 너머에서 지켜본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는 새 꽉 쥔 주먹이 떨렸다. 손톱이 마른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한 번 쥔 주먹을 풀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빨라지고 거세진 걸음에 매일 반질반질하게 닦는 목재 계단이 쿵쿵 울렸다.
온 저택이 다 들으라는 듯 발을 굴러 방에 도착한 벨져는 방금 산책에서 돌아온 것처럼 식식거렸다. 큰 소리로 진즉 나와 저를 맞이했어야 하는 녀석을 부르려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갛고 순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차가운 레몬티를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온 루이스가 능숙하게 방문을 닫았다. 벨져의 매서운 눈빛에도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양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차를 따랐다. 루이스가 공손히 내민 잔이 바닥을 굴렀다. 유리가 깨져 부서지고 차가 양모 러그를 적셨으나 루이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신 깨진 유리조각을 한 번 바라보고, 작게 한숨 비슷한 것을 삼켰다.
“......다른 걸로 바꿔와.”
“위험하니까 도련님은 잠깐 앉아 계세요.”
루이스는 능숙하게 러그 위에 있는 의자를 옮기고 유리조각 위에 러그를 덮어놓고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벨져 홀든은 긴 숨을 토하며 침대 앞 디반에 앉았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하녀 하나가 들어와 러그와 유리조각을 치웠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제 할 일을 마친 하녀가 나가고, 벨져는 머리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벨져의 숨이 가라앉을 즘 다시 문이 열렸다. 루이스는 얼음을 띄운 컵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벨져는 노란 꽃잎 하나가 떠다니는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루이스가 쥐어준 그대로 들고만 있었다.
곧 벨져의 발치에 장미 꽃잎이 담긴 도자기 대야가 놓였다. 루이스가 소매를 걷고 김이 오르는 물을 붓더니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고 주전자에 담아온 물을 더 부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루이스의 물기어린 손이 벨져의 구두와 양말을 벗겼다.
물 온도를 재던 손은 딱 좋을 정도로 따뜻했고, 하얀 발을 만지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했다. 트집 잡을 곳 하나 없이 도련님의 발을 씻긴 루이스가 한 쪽 무릎을 세웠다. 무릎 위에 수건을 올리고 벨져의 발을 그 위에 올려 물기를 닦았다. 발가락 사이로 수건과 손가락이 파고들고, 꼼꼼히 주무르고 마사지 한 뒤에 빠져나간다.
고작 발을 닦는 것뿐인데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 번 맡은 일은 허투루 하는 법 없는 충직한 하인. 벨져 홀든을 위해 손을 데우고, 물의 온도를 맞추고, 발을 주무르는 루이스.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발에 키스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벨져는 얌전히 내리깐 눈과 그 위에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제 발등에 키스하는 루이스를 겹쳐 보다 동그란 정수리로 시선을 올렸다. 꽉 막혀있던 숨을, 들리지 않게 토해냈다. 속단하긴 이르다. 출신이 미천해 당장은 돈에 혹했을지 몰라도 주인을 저버리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적어도 아직은.
생각이 떠다니는 사이 루이스는 다 닦은 발을 다른 수건 위에 올려두고 물에 잠겨있던 발을 꺼내 방금 한 행동을 반복했다. 발을 온전히 내맡긴 채 벨져는 루이스의 동그란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상상을 했다. 머리에 손을 얹고, 퍼석하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귓바퀴를 어루만지는 상상을 끊은 건 루이스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얄팍한 기대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스가 운을 뗐다. 이불 위에 올려놓은 벨져의 손이 부드러운 천을 움켜쥐었다. 잘 개켜놓은 천이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도련님의 동생 분을요.”
벨져의 발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루이스가 말을 이었다. 어떤 기색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안한했다. '오늘은 날씨가 궂네요.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돈도 주더군요. 주머니 가득 채운 금화로.”
더 참지 못하고, 벨져는 제 발을 마사지하던 루이스의 가슴팍을 찼다. 루이스가 형편없이 뒤로 나동그라졌으나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조차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했다.
“지금 날 팔아 넘겼단 소릴 하는 건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돈 몇 푼이라뇨. 저 정도 금을 제가 살면서 만져볼 일이나 있겠어요. 뭐, 상관없어요. 저 말고도 거기 또 누가 있었으니 어차피 새어나가게 될 텐데.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보자보자 하니 아주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파행을 당연하다는 듯 입에 담는 하인이라니, 당장 채찍질을 해 내쫓아도 할 말이 없다. 기가 막힌 나머지 말문이 막힌 벨져는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난 루이스가 엉덩이를 털었다.
“쌓인 게 많았나봐요. 벨져는 고약한 심술쟁이에, 성격도 더러운데다 꼴같잖은 거드름이나 피우고 다니는 멍청이라고 하더라구요.”
“뭐? 이글은 그런 말까진....!”
아차. 홧김에 반박하던 벨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버렸는지 깨닫고 말을 멈췄다. 피식, 엷은 소리와 함께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벨져는 그동안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얇게 휜 붉은 눈과 슬며시 올라간 입매.
“저도 충성을 시험한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하지 않겠어요?”
루이스는 답지 않게 엷은 미소와 함께 노래하듯 말했다. 당했다. 당혹감과 함께 빠르게 돌아가는 이성이 벨져 홀든의 패배를 고지했다. 졌다. 완벽한 패배다. 벨져는 뺨과 목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맹하고 우직하게 일만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정도면 제법 얄밉고 영악한 하인이 아닌가. 물론 진짜 얄밉고 영악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 알고 있었나?”
“네. 모를 수가 없었죠. 알려주던걸요. 손가락으로 당신이 있는 곳을 열심히 가리키더라구요. 친절히도.”
“칫, 이글....”
벨져는 자신의 시야의 사각에서 이글의 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쩐지 녀석 치고 시킨 대로 잘 한다 했다. 녀석을 너무 믿은 것이 제 패착이다. 하물며 제가 놓은 수에 자신이 걸려들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치사하게 시험하는 것보다는 낫죠. 그쪽은 그래도 형을 도와준 거잖아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만 툭 던지고, 루이스는 다시 한 무릎을 꿇고 젖은 수건을 주웠다. 루이스가 대야를 치우는 동안 벨져는 평생 몇 번 맛본 적 없는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웃고 있을 이글의 얼굴이 그려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의기양양해진 루이스가 가련한 패배자를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제길. 다 알면서 왜...!”
“제가 말해야 했나요?”
원망이 가득한 말에 돌아온 대답이 매정할 정도로 침착해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진한 굴욕과 패배감에 끓는 화를 내보내는 벨져와 달리 루이스는 여전했다. 그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하고 화가 나, 벨져는 크게 소리 쳤다.
“그게 무슨!”
“저는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죠.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 눈치도 빠르고, 예민하고. 뭐 다른 게 있나보다 하고....”
“뭐?”
“...모르셨어요?”
엉뚱한 대답에 벨져는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루이스는 그 자신이 오히려 당황했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벨져의 머릿속에서 내내 맞춰지지 않았던,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던 답답함의 퍼즐 조각이 나타났다.
“드문 일이네요. 그것도 몰라보시고. 평소엔 셜록 홈즈 저리가라시면서. 설마 모르실 거라곤 생각 못했죠.”
벨져 홀든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모든 정황을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장난에 어울려준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루이스의 그 짜증날 정도로 무심한 태도도 말이 된다. 멀쩡히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고 시험한 주인에게 서운해 하고 따져 묻지 않는 것만 해도 그렇다.
모든 것은 벨져 홀든이 이 모두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벨져 홀든은 루이스에게 그런 존재다. 그 별 거 아닌 인정을, 얼마나 바라 마지않았던가. 잠시 잊었을지 몰라도 벨져 홀든은 원래 대단한 사람이다. 격의 차이와 품위, 모두가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
방금 전까지 화를 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뿌듯해진 벨져는 루이스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뭐,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도 깜빡 속았을 테니까 기분 푸세요. 이건 추가 수당으로 칠 테니까.”
“흥. 말은 잘 하는군. 다음엔 이렇게 끝나진 않을 거다.”
“또 시험하시면 그땐 그만 두죠. 이거랑 지금까지 일한 거면 십 년은 거뜬할 텐데.”
“윽, 지금 해보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조금만 봐주면 바로 기어오르는 게 아무래도 하인 길을 잘못 들인 것 같다. 겁을 먹지 않고 옆에 붙어있는 건 칭찬할 만하지만 역시 이래서 하인으로 부리기엔 곤란하다. 벨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제 기분을 들었다 놓는 버르장머리 없는 하인을 노려봤다.
좀 눈치를 살피란 뜻이었으나 루이스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대신 루이스는 손을 씻고 다가와 벨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얄미워 도로 걷어차 줄까 생각하는데 루이스가 다시 엷게 눈을 휘었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바닐라에 제비꽃 사탕 얹어놨는데.”
“너나 먹어!”
“정말요?”
조금 봐줬더니 아주 사람을 갖고 논다. 잠시 그 미소에 숨을 죽였던 벨져는 울컥 치미는 짜증에 손에 집힌 베개를 집어 던졌다. 루이스는 슬쩍 몸을 옆으로 돌려 손쉽게 피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올게요.”
다시 한소리 하려 입을 열려는 찰나, 루이스가 벨져의 무릎을 토닥이며 일어났다.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그와 자신만의 비밀 같아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기분이 불쾌해진 벨져는 방을 나서는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너.”
등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문을 나서려던 루이스가 돌아봤다. 이대로 그를 온전한 승자로 두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문을 나가면 제 손을 빠져나갈 것 같아서 더, 손에 쥐고 있어야만 안심이 됐다.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마.”
“네?”
무슨 연유에서인지, 벨져의 혀와 입술은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저가 잘나봤자 하인, 괴롭히려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창을 뒹굴고 고된 일만 하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고, 채찍을 들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인데도.
“이글이랑 얘기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아이스크림만 가지고 바로 올라와.”
“...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이상 루이스는 벨져의 이상한 명령을 따를 것이다. 문이 닫히고, 벨져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다 제 행동이 참을 수 없어져 이불을 마구 차고 베개를 던졌다. 분이 풀리지 않아 식식거리면서도 떠오르는 건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라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와 미소뿐이었다.
일을 할 땐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원망과 짜증이 뒤섞였다. 이게 다 이글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이상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조금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고 차오른 숨에 벨져는 다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픈 몸과, 빼앗긴 것들 대신 얻은 건 하인 하나뿐이다. 밤낮으로 먹어야 하는 약과 어머니의 걱정을 비롯한 다른 모두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하나마저 자신을 저버린다면 그때는. 벨져는 생각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었다. 다정도 지나치면 무정이라는 말이 떠올라 눈을 감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정말,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7.05 |
---|---|
[릭루이] Bittersweet (2) | 2017.06.21 |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5.14 |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0) | 2017.01.27 |
[벨져루이] (0) | 2016.12.1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Midnight fight?
해리포터au
루이스 2학년 벨져 1학년 꼬꼬마 애기시절
늦은 밤, 루이스는 몸을 뒤척였다. 침대에 든 지 오래 된 것 같은데 잠이 오질 않았다.
‘오늘 밤 자정, 숲으로 나와!’
그렇게 악을 쓰듯 외친 녀석의 분에 찬 얼굴이 아른거려 잠을 잘 수가 없다. 벨져 홀든은 입학 첫날부터 루이스를 괴롭히고 시비를 거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결과였다. 맹세코, 루이스는 벨져의 첫인사가 호의적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열차에서 그의 제안 아닌 제안을 거절했을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렇게 선언하고는 대꾸할 새도 없이 슬리데린 테이블로 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결국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사로잡혀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저녁 시간에 말을 해보려 슬리데린 테이블을 기웃거렸지만 벨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맛있는 저녁을 제대로 못 먹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도 잠들지 못하는 건 전부 벨져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다시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벨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슬리데린 기숙사로 찾아갈까 하면서도 벨져의 형을 비롯한 슬리데린의 상급생이 떠올라 걸음을 돌렸다. 교수님이나 반장들에게 얘기했다간 또 벨져 때문에 슬리데린이 벌점을 받을 테고, 벨져는 또 제 탓을 할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심지어 늘 같이 다니는 앤지조차도 없었으니 벨져가 잡히는 즉시 제가 일러 바친 것을 알아챌 게 분명했다. 그럼 또 미움을 사겠지. 주변을 맴돌며 괴롭히는 것도 심해질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상관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역시 엄청나게 신경이 쓰인다.
결국 루이스는 체념하고 몸을 일으켰다. 포근하고 따뜻한 깃털 이불을 걷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루이스에게 조금 높은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루이스는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엄지가 바닥에 닿는다. 몇 번 굴러 떨어져본 뒤로 루이스는 항상 침대에서 내려올 때 발끝을 세워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슬리퍼에 발을 넣고 차가운 공기에 팔을 쓸어내린 루이스는 잠옷 위에 망토를 걸쳤다.
낡은 잠옷과 낡은 망토는 모두 물려받은 것이다. 고아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므로 루이스는 기꺼이 물건을 나누어준 상급생들에게 고마워했다.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불평하기엔 너무 과분하다. 혹시 모르니 지팡이를 챙기고, 구겨져 올라간 원피스형 잠옷의 끝단을 내린 루이스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기숙사를 나왔다.
벨져 하나 때문에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인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시험 기간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늦게까지 공부하는 상급생들에게 꼼짝없이 붙들렸을 것이다.
휑한 복도를 조심히 걸으며 루이스는 목도리라도 챙길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텅 빈 공간만 해도 추운데, 벽과 바닥이 죄 돌이다 보니 더 추웠다. 지금이라도 따뜻한 침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벨져가 숲에서 혼자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쪽은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를 손봐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벼르고 있다 해도, 벨져는 이제 막 입학한 일학년이다.
고작 한 살 차이에, 키도 몸집도 비슷하다지만 어쨌거나 신입생이다. 고아로 자라 제 밑의 아이들을 챙기는데 익숙한 루이스는 이것도 어쩔 수 없는 버릇이라 생각했다.
알아주는 명문가 출신에, 어려움이라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라도, 사사건건 시비에 어깃장만 놓는 되바라진 애라도 돌봐줘야 할 것 같았다. 더 훌륭하고 듬직한 보호자가 있음에도 그랬다.
숲은 위험하니까 얼른 데려와야 한다. 자칫 잘못했다간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저를 골탕 먹이려고 불러낸 거고, 정작 벨져는 침대에서 잠들어있으면 좋겠다. 물론 벨져 홀든 성격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루이스는 벨져가 다이무스에게 붙잡혔거나 시간이 되길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기를 바랐다.
다들 자러 갔는지, 평소엔 꼭 한두번 씩 마주치기 마련인 유령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학교를 나온 루이스는 멀리 보이는 사람의 형체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온 모양이다.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루이스는 지팡이 끝에 자그마한 불빛을 밝히고 걸음을 재촉했다. 발에 젖은 풀잎이 스치고, 선물 받은 슬리퍼를 망치는 게 조금 미안하고 아까워졌지만 그보다 급한 게 있었다.
“벨져!”
“조용히 해, 이 멍청아! 꼴이 그게 뭐냐? 너, 설마 내가 부른 걸 까먹고 잠들었어?”
기껏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나왔더니, 환영 인사 한 번 거창하다. 루이스는 머리를 숙이고 달려오느라 차오른 숨을 뱉었다. 방금 침대에서 나온 차림인 루이스와 달리 벨져는 망토 안에 스웨터에 가디건까지 제대로 입고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됐다. 시답잖은 일로 불러낸 거면 이번엔 꼭 한 대 날려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루이스는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하?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진짜 바보야? 당연히 결투지! 그것도 몰라?”
피가 싸하게 식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여태 벨져를 걱정한 자신이 한심해진 루이스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등을 돌렸다. 짜증이 치밀어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한밤중에 몰래 기숙사를 나온 것도 모자라 명문가의 자제를 때리기까지 하면 퇴학 처분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이를 악물고 왔던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저따위를 걱정해준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야!”
“거절할게, 홀든. 그럼 이제 끝이지? 앞으론 말 걸지 말아줄래? 이딴 식으로 사람 휘두르는 거, 도련님인 너한텐 당연할지 몰라도 정말 불쾌하거든.”
루이스는 전에 없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계셨다면, 그랬다면 앞뒤 안 보고 다퉜을지도 모르지만 루이스는 지금 호그와트에 다니는 것도 기적이었다. 교수님들이나 같은 기숙사의 상급생, 친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역시 나중에 좀 성가셔도 그냥 이를 걸 그랬다. 흙이 묻고 젖어버린 슬리퍼가 눈에 들어와 더 서러워진 루이스는 눈을 문질러 닦았다. 아무리 분하고 서러워도 벨져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 서!”
직접 말하긴 무섭고, 다이무스 홀든에게 익명의 투서를 몰래 보낼 생각을 하는데 벨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루이스를 붙잡았다. 얼굴만큼이나 예쁜 목소리라 그만, 걸음을 멈췄다. 루이스는 사실 벨져가 벨라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했다. 예쁘고, 똑똑하고, 가진 것도 많으면서 왜 저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루이스가 받아치려 고개를 돌린 순간 벨져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벨져! 뒤!”
“뭐, 뭐야!”
루이스는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털로 뒤덮이고, 팔다리가 네 개 달린 요정을 닮은 생명체. 픽시랑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루이스는 그들에게 지팡이 끝을 겨누며 벨져에게 달려갔다. 날개를 파닥거리던 그들이 뒤를 돌아본 채 굳어버린 벨져를 향해 달려들고, 루이스는 재빨리 벨져를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루모스!”
“멍청아, 그런 걸로 되겠...!”
“누구 때문에 저것들이 따라오는데! 네가 시끄럽게 하니까 그렇잖아!”
지팡이가 내뿜는 빛에 그들의 날개짓이 수그러들며 주춤했다. 밝은 빛에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본 루이스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지팡이를 거뒀다. 저건 사람을 골리는 픽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독시다. 더 다가오지 않고 독낭을 부풀리는 걸 본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이 주문이 통하길 빌며 주문을 외쳤다.
“임페르비우스!”
다행히, 루이스가 만들어낸 방수막이 한껏 부푼 독시의 독낭에서 흩뿌려지는 독액을 막아냈다.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걸 감지한 독시들이 날개짓을 하며 웅성거리고, 루이스는 안도했다. 한숨을 내쉬고, 한 팔로 꼭 안고 있던 벨져를 놓아주려는데 루이스의 발이 끈적한 무언가에 젖어들었다. 방수막을 타고 흐른 독액과, 이미 젖어버린 슬리퍼.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끔직한 통증에 지팡이를 꽉 쥐었다. 독시들이 다시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루이스?”
“윽....”
“임묘뷸러스!”
“벨져!”
독시들이 얼어붙고,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져의 고개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급히 달려온 다이무스가 벨져를 발견하고,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인 카인 스타이거와 함께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벨져!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나는, 그러니까.... 형아, 난....”
“홀든! 동생을 데리고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라. 나는 루이스를 병동에 데려다줘야겠다.”
안절부절 못하는 벨져가 다이무스의 망토를 잡고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앓고 있는 루이스를 안아든 카인이 돌아서고, 다이무스가 어린 동생을 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벨져, 정말이지, 네 녀석은...!”
“홀든 군. 자네가 빚을 졌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좋을 걸세.”
“.......”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벨져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다이무스는 제 동생이 분에 못 이겨 교수에게 달려들어 소리치면 어쩌나 했지만, 고개를 든 벨져는 다이무스의 예상과 정 반대의 말을 했다.
“내일, 병동에 보러 가도 될까요.”
“사과 받을 사람은 따로 있지.”
“알겠습니다.”
머글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공손한 모습에 다이무스는 내심, 벨져가 루이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양 굴던 게 다른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쌤통이라고 못된 말을 했을 녀석이, 장난을 치다 이글을 다치게 했을 때처럼 굴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관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벨져는 솔직하지 못한 아이였으므로, 다이무스는 기숙사 점수를 오십 점이나 깎아먹은 주제에 제 앞에선 죽어도 울지 않으려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독시의 독이 그리 위험하지 않으며, 루이스는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위험천만했던 밤이 지나고, 루이스는 병동에 한가득 쌓인 사탕과 과자, 쿠키, 케이크, 초콜릿 사이에서 눈을 떴다. 조금 다쳤다고 이렇게 대접을 받는 게 처음이라 쑥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지루한 마법의 역사 수업도 빼먹고, 하루 종일 누워서 과자나 야금야금 먹고 있는 신세라니, 분에 겨워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새 슬리퍼와 잠옷을 선물해준 트리비아에게 조금 혼이 나긴 했지만 루이스는 그것도 좋았다. 걱정과 애정이 섞인 꾸지람은 평생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 더 각별했다. 점심시간에 찾아온 앤지는 작은 꽃다발 하나와 꼼꼼히 정리한 필기 노트를 건네주고, 벨져가 아침 식사 내내 저기압이더란 얘기를 해주고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버렸다.
루이스는 발에 감겨있는 붕대와 선물을 보다 몸을 뒤척였다. 기껏 이런 기회가 왔는데 공부는 싫다. 뭘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작은 헛기침 소리에 루이스는 커튼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지만,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소년에겐 또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벨져?!”
“윽, 괘, 괜찮나보네.”
“뭐,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양팔을 등 뒤로 감춘 벨져는 평소의 기세는 어디 감췄는지 루이스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왜 왔어. 설마하니 벨져 홀든 경께서 미천한 천민한테 사과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난, 그....”
가볍게 한 농담에 벨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 말을 망설이는 모습에 루이스도 덩달아 당황해버렸다. 이런 모습의 벨져는 처음이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제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거나, 멍청하게 자기 발밑도 못 본다거나, 너 때문에 혼났으니 책임지라는 뻔뻔한 태도를 예상한지라 너무 낯설어 벨져 홀든이 아닌 것 같았다.
“미안....”
“어, 어.... 응....”
내내 양 손을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벨져가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작고 엉성한 꽃다발과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 그리고 풀물이 잔뜩 든 손. 루이스는 감히 받을 생각을 못하고 눈만 꿈뻑거렸다. 뽀얗고 보드라운 벨져의 손에 물든 풀물만큼이나,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벨져가 침묵과 쑥스러움을 못 이기고 소리쳤다.
“어, 얼른 받아, 이 멍청아!”
“아, 응!”
얼떨결에 받아든 루이스는 꽃다발이라고 생각했던 나뭇가지와 꽃을 다시 살폈다. 꽃다발이라기엔 묘하게 모양을 만든 것 같은데, 타원도 원형도 아닌 무언가라 영 의심이 갔다.
“저기, 벨져.”
“뭐냐.”
평소대로 소리치고 나니 조금 괜찮아졌는지, 팔짱을 낀 벨져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린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거... 화환.... 맞지? 엄청 못 만든다.”
“뭐야?! 너, 사람이 기껏...!”
“고마워.”
겨우 눈을 마주친 벨져에게 생긋 웃자 길길이 날뛰려던 벨져가 방금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과 예쁜 파란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펑, 하고 터지는 것처럼 벨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벨져 홀든이라도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화환을 엮으면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윽.... 두고 봐! 다음엔 그런 소리 절대 못 하게 해줄 테니까!”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던데.”
“너, 이익...!”
“으악, 사람 살려!”
폼프리 부인이 달려들려던 벨져에게 병동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며 쫓아내고, 루이스는 식식거리며 돌아보는 벨져를 향해 예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루해했던 게 거짓말처럼 즐거워지고, 이상한 화환 하나와 편지 한 장이 손에 남아 있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릭루이] Bittersweet (2) | 2017.06.21 |
---|---|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24 |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0) | 2017.01.27 |
[벨져루이] (0) | 2016.12.13 |
[루드루이] 04. (0) | 2016.11.26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생일 챙기는 것도 벌써 6년째 루이스 올해도 생일 축하해ㅠ0ㅠ)S2
* 이글->루이 요소 있음
* * *
1월 중순, 애인과 불타는 한 때를 보내고 돌아온 루이스는 업무로 복귀했다. 한 해의 첫 달답게 각 세력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검수하고 일 년의 계획을 짜는 것부터 새로 들어온 신입을 배치하는 것까지 할 일이 산더미였다. 연합에 능력자가 가장 많은 건 사실이지만 업무를 맡길 정도로 유능한데다 믿을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이때만 되면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선배. 여기 커피요.”
“고마워. 거기 두고 가.”
“아침에 드린 것도 안 드시구요?”
“아.... 미안. 바빠서 생각을 못 했네.”
“좀 적당히 하세요.”
루이스는 후배의 걱정스런 잔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답게 사람을 살뜰히 챙기는 토마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제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기 바빴는데, 이제는 한숨과 잔소리다.
“조금 서운한걸.”
“네?”
“아냐. 같이 나가자. 가는 길에 나 좀 도와줄래?”
아침부터 정리해서 쌓아둔 서류가 꽤 됐다. 반절을 덜어 토마스의 손에 들려주고 앤지의 사무실로 가는 내내 토마스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불규칙한 수면과 영양 부족, 과로, 피로 누적 같은 걱정엔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루이스는 알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건 토마스도 알고, 앤지도 알고, 연합의 식구들도 다 안다.
그나마 공성 스케줄이 잡혀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토마스의 푸념을 듣던 루이스는 앤지의 사무실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서류를 넘겨달란 눈짓에 토마스가 루이스가 든 서류 위로 그가 든 서류들을 쌓고 문을 열어주었다. 짧게 감사 인사를 한 루이스는 저와 별 다를 바 없이 서류에 둘러싸인 연합의 수장에게 다가갔다.
“여기. 신입들 서류. 제일 위에 있는 게 인력 배치 검수안이고, 카모라에선 아직도 소식이 없네.”
“고마워. 놓고 가.”
“앤지.”
루이스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상관이자 친구를 불렀다. 그제야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해 안쓰러웠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냥 넘어갈 순 없어.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앤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다들 한숨이 느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쟁 중이고, 거기에 안타리우스까지 더해 더 큰 위협이 되고 있으니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점조직 형태의 연합은 더더욱 내부 세력을 조율하고 관리하기 힘든데, 가장 큰 세력인 카모라 마피아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다른 조직이라고 협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될 게 뻔했다.
“토니는 북아일랜드에 가있어서 무리고, 다른 사람들은 감당 못해. 거기서 하자는 대로 하자고 하고 돌아올 걸.”
물 흐르듯 흐르는 프랑스어 대신 영어로 한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는 없다. 배치가 끝나고 발령을 받으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그 전에 마무리해야 했다. 루이스의 태연한 태도에 앤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로서도 방관할 수 없는 문제다. 무슨 묘수가 떨어지길 바라는 듯한 눈빛에 루이스는 앤지의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갈 사람 하나 있잖아.”
“뭐?”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게, 그리 못할 말이라도 했나 싶었지만 이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다. 루이스가 직접 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모를 리 없건만 앤지의 표정은 의문을 지우질 못했다.
“이번 생일은 조용하게 보내고 싶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허락을 안 할 눈치라 루이스는 솔직히 답했다. 속이거나 얼버무릴 생각이 없기도 했고, 앤지를 걱정시키는 건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 동갑이긴 하지만 첫만남이 그래서인지 늘 지켜야 하는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랑?”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루이스는 애매하게 웃었다. 앤지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루이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고, 기왕 굳은 일을 떠맡아야 한다면 보상이라도 확실한 게 좋다. 더구나 그 때쯤이면 상황도 정리될 테고, 그럼 한숨 돌릴 수 있으니 그리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다.
“매번 가기 싫다고 울상이더니,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내가 그랬나. 루이스는 지친 얼굴로 묻는 친구를 보다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된단 뜻이었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앤지가 한숨과 함께 펜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럴 땐 또 영락없는 윗사람이다. 루이스는 앤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앤지는 어딘가 아련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마주 봤다. 손을 내밀자 맞잡아오는 손이 조금 차갑고 작았다.
“추운데 몸 좀 녹이고 오지 뭐.”
“조심해. 무슨 일 없어도 아침저녁으로 꼭 연락하고.”
“그럴게.”
걱정하는 그녀를 위해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앤지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가라는 말로 루이스를 장난스레 쫓아냈고, 다음날 루이스는 나폴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대는 어둠 속에서 뼈가 굵은 조직의 보스였고, 나폴리는 카모라의 본거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일주일이 될 터였다.
* * *
연합에서 공성이 끝난 뒤풀이로 술자리가 벌어지는 건 예사다. 워낙 술고래인 세 사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글은 그런 연합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에 공성에 참여하지 않을 때도 뒤풀이엔 빠짐없이 참석했다. 호탕한 형씨들이랑 공금으로 공짜 술을 마시는데 그 술자리를 누가 마다하겠냐마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벌어진 술자리에서 마실 만큼 마시고, 주정뱅이 뒤처리는 나 몰라라 하고 내뺀 이글은 연합의 휴게실로 향했다. 가깝기도 하고, 집에 들어가 봤자 싸늘하게 식은 방이 기다리는데다 자칫 잘못했다간 검을 벼르고 있는 큰형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기껏 기분 좋게 마시고 흥을 깨는 건 사양이다. 푹 꺼진 소파가 조금 불편하긴 해도 따뜻한데다 건드리는 사람도 없으니 훨씬 편하다.
이글은 불이 꺼진 휴게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밀어 젖히려는 순간 안에서 당기는 힘에 몸이 끌려갔다. 그래도 명색이 홀든의 쾌검이다. 평생 몇 번 없는 일에 이글은 당황했고, 술이 들어간 몸이 기우뚱 넘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어둠속에서 이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아씨, 깜짝이야!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칙칙한 후드에 핏기가 없이 질린 얼굴이 어둠 속에서 나오는데 꼭 어릴 적 유모를 졸라 듣던 괴담의 사신 같아 이글은 되레 목청을 높였다. 루이스의 팔을 뿌리치고 제 발로 서자 얄밉도록 침착한 그가 휴게실의 전등 스위치를 켰다. 밝은 전등 아래서도 허여멀건 얼굴이나 얼음같이 차가운 무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막상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일이나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
“출장 다녀온 건 난데 왜 네가 시차적응을 못 해. 이미 날 지났어.”
“거 참, 되게 깐깐하네!”
“일주일이나 비웠으니까 그만큼 일도 쌓였을 것 같아서 바로 왔어. 갈 거니까 얼른 자. 주정부리지 말고.”
“주정은 누가 주정을 부렸다 그래?”
루이스는 그걸 모르냐는 눈빛으로 이글을 쳐다봤다. 자기야말로 당장 자야 될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서류 파일을 들고 있는 걸 보니 기가 찼다. 하여간 여기고 저기고 다 일 중독자들뿐이다. 이글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루이스가 의자에 걸려있던 담요를 던졌다.
“얌전히 잠이나 자. 간다.”
“야! 적당히 해!”
매정하게 돌아선 등에 대고 소리쳤지만 루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들릴 듯 말 듯한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이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쪽도 꼭 누구처럼 산통을 깨는데 일가견이 있긴 마찬가지였다.
* * *
부산을 떨어대는 소리에 일어난 이글은 소리의 근원을 찾고는 도로 누웠다. 토마스가 루이스의 생일이니 깜짝 파티를 해주자고 벼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아주. 제 작은 형이 누구인가. 분명 기회도 안 주고 보란 듯이 데려가서 주말이 다 가도록 독차지하고 안 내보낼 게 뻔하다. 토마스의 열의와 동경도 가상하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 큰 애정과 집착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글은 괜히 기운 빼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했다가 쿠션과 담요를 빼앗기고 나서야 일어나 앉았다. 이 가여운 영혼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해서 좌절하고 낙담하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보복이겠지만 남 좋은 일, 그것도 제 작은 형에게 좋은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이글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퍽 기특한 행동이었지만 맞장구 쳐주는 사이 루이스가 휴게실에 들어온 건 이글도 어쩔 수 없었다.
토마스는 계획이 틀어져 울상을 지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위로할 선배는 너무 지친 나머지 후배님까지 챙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글은 루이스 대신 토마스의 뺨을 거칠게 토닥여 위로하고 하품을 하며 소파에 앉았다. 어제 마신 싸구려 위스키 때문인지 아니면 간밤에 추위가 몸을 덮쳐서인지 몸이 찌뿌듯했다.
“가서 맛있는 건 많이 먹었어?”
“거기서 셰프 코스 세 시간 먹느니 햄버거 세 개 먹는다.”
“크크크큭, 이래야 내 영웅님이지. 그래도 거기 가면 맛있는 거 먹고 극진히 대접 받잖아?”
“그게 바로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지.”
이글은 요기 라즈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떠올리고 킬킬거렸다. 이번에 루이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카모라의 능력자 얘기가 파다했고, 덕분에 영웅님의 유일한 후배께서 바짝 날이 선 상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발끈한 토마스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왜 이글 형이 뿌듯해하는 건데요?”
“어엉?”
“됐어. 토마스. 미안한데 파티는 너희끼리 해야겠다.”
어래, 그래도 아직 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 아닌가 보다. 이글은 어젯밤보다 더 헬쓱해진 얼굴로 토마스를 챙기는 루이스를 보며 그가 밤을 꼴딱 샜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는 또 무엇인가. 사실 답이야 뻔하다. 루이스의 대답이 제 신경을 거스를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이글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원래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랬다.
“근데 왜 이렇게 서둘러?”
백 프로다. 이글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애정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과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보고 한 발 앞서 질색했다.
“빨리 하고 기다리는 사람한테 가야지.”
“네?”
“누구처럼 기다림에 보답할 자신이 없거든.”
토마스는 영 감을 못 잡고 루이스와 이글을 번갈아보며 설명해달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글은 팍 김이 샌 나머지, 루이스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느라 답을 해주지 못했다. 이러니 좋아 죽지. 이글은 루이스가 없는 사이 내내 신경질을 부리던 제 작은 형을 떠올렸다가 이마를 짚었다. 숙취 때문인지, 이 답 없는 인간들 때문인지 몰라도 골이 때렸다.
“지독한 새끼....”
“뭐?”
“아무것도 아니야. 좋아하겠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그럼 주말에라도...!”
“미안, 토마스. 나 일요일까지 휴가야. 이거 마친다고 어제 새벽에 도착해서 밤샜어. 약속도 있긴 하지만.... 이 김에 좀 쉬려고.”
그 인간이 퍽이나 쉬게 두겠다. 이글이 속으로 빈정거렸다. 아까는 실수로 모국어로 욕해버리고 말았지만 이번엔 다행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글이 소파에 드러누워 다리를 꼬고 팔로 머리를 받친 사이 루이스가 풀이 죽은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 달 내내 루이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토마스는 더 매달리지 않았다. 저 착하고 가여운 녀석 같으니. 시무룩한 얼굴로 루이스의 서류 배달을 자청한 토마스가 휴게실에서 나가자 찬 물을 한 컵 쭉 들이켠 루이스가 이글의 옆에 앉아 하품을 했다.
“그 상태로 만날 수는 있겠어?”
“야우젠지 뭔지, 벨져가 예약을 잡아놨어. 시간 안에 안 가면 죽일지도 몰라.”
“어, 응.... 그래....”
너희가 세네시쯤 차 마시는 거랑 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간 벨져가 용돈을 끊을 것 같은 예감에 이글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몇 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 인간 속내 하나 모를까. 딱히 단 것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분명 이런저런 케이크를 잔뜩 늘어놓고 골라 먹게 해주고 싶은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받아야 할 축하도 받지 못하고 살았으니까. 이글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반쯤 졸고 있는 루이스를 보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래도 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승질 좀 부리다 말겠지.”
“하아. 그게 문제란 말이야.”
“...별일 없을걸? 작은 형도 좋아할 거고, 너도 뭐....”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에 왠지 양심이 찔려 말을 얹자 루이스가 등을 푹 수그리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지금 걱정해야 되는 건 약속 시간에 늦는 것보다 그거 몇 분 안 늦겠다고 무리해서 초췌해진 얼굴과 말이 아닌 몸 상태 쪽이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그 격한 운동을 했다간 사람 하나 잡을 게 뻔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누군가. 일주일동안 벼르고 벼른 벨져 홀든이다. 딱히 친형제의 잠자리 사정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도 않고, 남의 연애에 끼는 것도 달갑진 않지만 걱정이 되는 나머지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나왔다.
“야, 사람이 때론.... 아니라고도 말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연합의 영웅이 남자 애인이랑 게이섹스하다가 복상사로 죽었단 기사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
진지하게, 진심으로 걱정돼서 한 말이었는데, 루이스는 이글을 멀뚱히 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같잖은 소리 말라는 반응에 이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새겨들어! 진짜 훅간다니까??!!? 너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니까 괜찮아.”
“네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나본데....”
“이글.”
답답한 나머지 일어난 이글을 올려다보는 루이스는 어느새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과 목소리를 하곤 이글을 타일렀다.
“너도 알아보는데, 벨져가 지금 내 상태를 모를 것 같아?”
입을 다물자 도로 소파에 등을 기댄 루이스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하곤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피곤해 나른해진 눈매며 분위기가 어른스러워 제가 아는 루이스 같지가 않았다.
“괜찮아.”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리 없다는 강한 믿음이 눈부시다. 이글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도 쉽게 가져가버리는 형제를 떠올리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루이스는 눈을 얇게 휘며 웃고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토마스에게 했던 것처럼 이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럴 때만 연상인 티낸다?”
“네가 연상 대접을 안 하는 거겠지.”
“내가 그런 거 할 사람이야?”
괜히 심통이 나 투덜거려도 루이스는 웃을 뿐이었다. 누구는 좋겠네. 애인이 이렇게 믿어주고. 자존심상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이라 입만 삐죽이고 말았지만 영 속이 쓰렸다.
때마침 들어온 나이오비가 루이스를 찾고, 이글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주인 없는 생일상에서 술이나 퍼마셔야겠다고 벼르며 그를 보냈다. 야우제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고, 이글은 제 숙면을 방해하고 아침부터 염장을 지른 몹쓸 인간을 응징할 권리가 있었다.
전화기 앞에서 목을 가다듬은 이글은 다이얼을 돌렸다. 비록 선물이 아니라 생일빵일지라도 기쁘게 받아 주리라 믿으며, 사랑을 담아.
* * *
“그래서, 에프터눈 티랑 다를 게 뭐야?”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네 거다. 전부.”
루이스는 예쁜 탁자 위에 끊임없이 나오는 케이크며 과자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메이드처럼 풍성한 프릴을 단 앞치마와 헤어 캡을 쓴 종업원들이 순식간에 테이블을 채우고 나니 그야말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삼단 트레이에는 흔히들 곁들이는 샌드위치나 스콘 대신 단단해 보이는 케이크과 돔 형태의 무스케이크가 올라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했다.
“이걸 다 나 혼자서 먹으라고?”
“뭘 좋아할지 몰라서. 뭐, 한 입씩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게 무슨 소리야. 신종 괴롭힘이야? 난 불태울 로마가 없다고.”
“괴롭히는 것 같나? 아니면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건가? 듣자하니 그 쪽 애송이가 널 졸졸 따라다녔다는데.”
이번 출장 내내 카모라의 능력자 하나가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닌 건 맞다. 소문이 언제 벨져의 귀까지 들어갔는지 몰라도, 루이스는 그에 관해서라면 결백했다. 어디 결백하다 뿐이랴.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건 한 사람으로 충분하고, 자신을 동경하며 따라다니는 것도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열 살이나 어린놈한테 추파 받으니 좋았나? 오늘도 안 나타났으면 내가 직접...!”
어쩐지 오랜만에 봤는데도 반가운 얼굴이 아니더라니. 루이스는 삐진 애인을 어떻게 달래야하나 생각하다 퍼뜩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벨져가 하는 말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대체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렇게 쉽게 말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 뿌리는 분명 제가 잘 아는 바로 그것이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내가... 아니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날 따라다녀서?”
“질투는 누가...!”
“나 너랑 보내려고 연합에서 떠들썩하게 해주는 생일파티도 마다하고 어제 밤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밤새 일하다 왔어. 약속시간 맞추려고. 기특하지 않아?”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자 벨져가 시선을 피했다. 이해는 할지언정 마음이 영 내키지 않는 것쯤은 충분히 안다. 루이스는 손을 뻗어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는 벨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손 안에서 흠칫 떨렸다가 이내 엄지로 손등을 쓸어오는 벨져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마주했다.
“기분 풀어. 벨져 홀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겨우 기분이 풀렸는지 벨져가 의기양양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려 씩 웃고는 커피잔을 들었다. 따로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제 앞엔 티팟과 빈 찻잔이 놓여있었기에 루이스는 잔에 차를 따랐다. 벨져가 오늘의 다과회를 아주 단단히 벼르고 준비했다는 건 세 살 꼬마라도 알 것이다. 진하고 묵직한 찻잎의 향이 달디 단 케이크와는 잘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많다.
선물에 값어치를 따지는 것도 아니고, 벨져의 주머니 사정 상 이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입 밖에 내는 순간 분위기는 얼어붙고 또 싸우게 될 게 분명해서 참고 있지만, 테이블을 꽉 채운 케이크의 산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러니까 꼭 그거 같네.”
운을 떼자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던 벨져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속눈썹이 떨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 루이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몸이 피곤하니 말이 헛나가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했다.
“왜 있잖아. 과자와 초콜릿으로 만든 집으로 유혹해서 잡아먹는 동화.”
“하, 그래도 사탕 하나로는 왔던 길을 다 표시할 수 없지 않나?”
“윽.”
찔리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전에 회사의 아이들이 찾아왔던 그 날. 어느새 거기까지 퍼진 건지.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의 반응이 즐거운지 미소를 머금고는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냈다.
“선물이다.”
“너한테 받는 건 안 내키는데.”
“앞으론 이걸로 용돈을 주도록.”
“아무리 그래도 내 형편에 안 맞거든?”
이것도 미리 준비했는지 빳빳한 100달러 지폐 열 장이 루이스 앞에 놓였다. 하여간 질긴 놈. 안 받으면 또 안 받는다고 짜증을 낼 것 같아 카드처럼 늘어선 지폐를 챙겼다.
“고맙다. 용돈 줘서.”
“천만에.”
정작 생일인 사람은 즐겁지가 않은데, 벨져는 지금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드는지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애인이 즐거워하는 걸 보는 건 좋지만, 어째 그게 저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자. 이것부터 먹어봐라.”
루이스가 착잡한 심경으로 가만히 차를 홀짝거리자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던 벨져가 포크를 집어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잘라 내밀었다. 루이스는 몸을 숙여 다가가 포크 끝의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입 안에 번지는 상큼한 민트와 레몬 향이 좋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데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제 행동을 되새기던 루이스는 주변의 시선에 한 번, 그리고 얼어붙은 벨져의 얼굴에 또 한 번 죽고 싶어졌다.
“...미안.”
화끈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 손을 뺨에 대고 시선을 피했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 뒤에는 분명 테이블 매너를 지적할 것이다. 그만 무심코 해버린 일이라 따져도 할 말이 없었다.
“너.”
“.......”
“이리로.”
옆에 놓고 패려고 그러나. 망설이던 루이스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자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벨져가 턱을 살짝 치켜들곤 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물론 옆에 앉을 수야 있지만 그 다음에 뭘 하려는 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루이스는 살짝 상기된 뺨에 뿌듯하고 흡족해 마지 않다는 시선을 보내는 벨져가 부담스러웠다. 갔다간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 제 손으로 케이크 하나 못 먹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어서.”
어떻게든 안 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정하게 재촉하는 벨져의 목소리와 그 눈빛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벨져 홀든이 벨져 홀든인 이상, 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 이상 벗어날 수 없다. 루이스는 제가 판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크게 한숨을 쉬고 의자에서 일어나 벨져 옆에 앉았다.
* * *
두 시간에 걸친 티타임 끝에 벨져는 루이스를 옆자리에 태우고 직접 차를 몰았다. 기어이 모든 케이크를 한 입씩 떠먹인 뒤라 레몬수로 입을 헹궜음에도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기엔 시간이 이르고, 영화를 보기엔 사람이 많을 시간인데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하니 졸음이 밀려왔다.
잠깐 조는 사이 도착한 호텔 로비에서 루이스는 하품을 했다. 체크인을 마친 벨져가 손을 잡아 이끄는 것도 스위트룸으로 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맞잡은 손이 따뜻해 놓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어떤 방해도 없이 단 둘이 주말을 보내게 될 것이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해가 지기도 전에 뻗을 정도는 아니다.
루이스는 제 상태를 가늠하며 문을 여는 벨져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키스하고, 자연스럽게 섹스로 이어질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벨져는 꽤 담백하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코트를 벗었다. 잡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는 허전함과, 예상외의 행동에 루이스는 벨져를 빤히 바라봤다.
“안 해?”
“졸려 죽으려는 주제에. 아까 먹은 케이크 종류가 몇 개인지는 기억나나?”
물론 기억할 리가 없다. 그런 걸 일일이 세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은데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바로 옆에 즐거워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웃고 있는 벨져가 있는데 그깟 케이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는 루이스를 향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벨져가 목에 맨 스카프를 풀었다. 섹스어필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행동에 루이스는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게 어려우면 호텔로 오는 길은.”
“음....”
“흥. 정신없이 졸았으니 기억날 리가 없지. 씻고 잠이나 자라.”
“그럼 너는?”
오랜만에, 그것도 특별한 날에 만난 애인이 이렇게까지 담백하게 나오는데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조심스럽게 묻자 재킷을 벗고 셔츠의 커프스까지 푼 벨져가 다가와 뺨을 잡고는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루이스를 담았다.
“옆에 있겠다.”
“화 안 내?”
“자고 일어나면 낼 거다.”
이제야 겨우, 제가 아는 벨져가 돌아온 것 같아 루이스는 슬며시 웃으며 뺨을 감싼 벨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차라리 싸우고 시비를 거는 게 낫지,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더 조바심이 난다. 따뜻하고, 배가 부른데다 안심이 되니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씻기 귀찮은데....”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벨져를 올려다봤다. 이상하게 벨져랑 있으면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지금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말도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부릴 리 없는 어리광.
“그럼 조금 기다려라. 욕조에 물부터 받을 테니.”
“씻겨준다고? 네가? 나를?”
“이미 여러 번 해봤다만.”
“뭐?”
“먼저 뻗어버린 널 누가 씻기고 입혀서 재웠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널 맡기기라도 할 것 같나?”
예쁜 입술을 타고 귀를 감아드는 목소리가 하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벨져가 불쾌하단 티를 팍팍 내지만 않았어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꿈이었음 좋겠다.
당황한 루이스가 황급히 기억을 더듬는 사이 푹 한숨을 내쉰 벨져가 소매를 걷었다. 욕실로 가려는 걸 직감한 루이스는 벨져의 손목을 잡았다. 이전에야 기절해서 그랬다 치더라도 의식이 있는데 몸을 맡기는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 그냥 내가 씻을게.”
“...양치 꼭 하고.”
어째 애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지만 루이스는 내려다보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한 평생 하인을 부리며 누군가가 시중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산 사람이라서 더더욱.
루이스는 욕실에 들어가 문에 등을 기대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뺨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였다. 그러니까, 아마. 이건 감동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저를 씻긴 것도 모자라 친히 옷까지 입혀 재웠다니,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좋다. 부끄럽고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바닥을 구르며 이불이라도 차고 싶지만 그럴 순 없기에 찬 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세면대 앞에 놓인 거울에 비친 얼굴이 붉어져서 원래대로 돌아올 줄 몰랐다. 참 꼴이 말이 아니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토하고 연거푸 찬물을 끼얹었다.
정신을 차리는 데는 냉수만한 게 없다. 얼굴에 이어 손, 발까지 피부가 얼얼할 정도로 씻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힌 루이스는 앞머리가 젖어있는 거울 속 자신을 보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넋이 나간 표정에 진하게 드리운 다크써클까지 더해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니 벽에 걸린 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켰다.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벨져가 고개를 들고는 턱 끝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연한 아이보리 색 파자마는 연한 광택이 흐르는 걸로 봐선 어째 실크 같다. 과연 준비성도 남다르지. 루이스는 군말 없이 옷을 갈아입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게 선물이야?”
“그럴 리가. 말만 해라.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
“믿음직스럽네.”
벨져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빛나고 한껏 치장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교회 파티장에나 어울릴 법한 인사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루이스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 위에 배를 깔고 누워 깃털을 가득 채운 베개를 끌어안고 있자니 다시 몽롱해졌다.
이쯤 되니 벨져가 옳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은 무슨, 눕자마자 이렇게 몸이 늘어진다. 하긴 출장 기간 내내 긴장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돌아와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 몸이 못 버티는 것도 당연하다. 노곤하게 밀려오는 잠에 취해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루이스는 입을 열었다.
“벨져....”
“뭐냐.”
“나, 너한테 진짜 받고 싶은 거 있는데....”
대답 대신 신문이 접히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발소리가 침대를 향했다.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는 손길에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올린 루이스는 옆에 앉은 벨져를 발견하고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안마 받고 싶어. 마사지 받으면서 자면 최고일 거야.”
“그런 거라면 살롱에 연락해서....”
루이스는 벨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바로 앉아 벨져의 손을 잡아끌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침대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에 벨져는 잠시 망설이다가 구두를 벗고 들어와 루이스의 눈가에 키스했다. 반쯤 뜬 루이스의 눈과 또렷한 벨져의 눈이 마주하고, 루이스의 눈매가 사르르 휘었다.
“너한테.”
“...이젠 하다하다 날 하인처럼 부리는군.”
“넌 나한테 맨날 그러잖아.”
“돌아누워라.”
어이가 없다는 듯 굴면서도 결국 져준다.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목을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입술로 입술을 물고, 비비다 떨어지는 가벼운 장난 같은 키스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등허리를 받쳐 안았다. 짧은 뽀뽀를 끝으로 루이스를 눕힌 벨져가 루이스의 허리 위에 걸터앉아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냥 앉아도 상관없는데 체중이 느껴지지 않게 무릎으로 서있는 배려가 고맙고, 뭉친 근육을 풀며 주무르는 손끝에선 묻어나는 애정이 감격스럽다. 기분 좋게 몸을 만지는 손길에 정신이 점점 더 몽롱하고 흐릿해진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지 않았다. 몸을 겹치고 쾌감과 열락을 나누는 사이 제 몸의 성감을 파악하고, 어쩌면 주인인 자신보다 더 제 몸을 잘 알 수도 있는 벨져다. 마음만 먹으면 마사지가 애무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지만 벨져의 손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그 주인을 닮아 뼈대는 물론 손톱까지 예쁜 손은 섹스할 때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경고하듯 말했다.
“딴 맘 먹지 마.”
“하,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
피식피식, 멈출 줄 모르는 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자 벨져가 우뚝 척추를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꿀꺽,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나고 벨져가 몸을 숙여 다가왔다. 그 푸른 눈에 담긴 열망과, 참아야 한다는 갈등이 보여 루이스는 먼저 손을 뻗었다. 벨져의 어깨를 잡고 살짝 몸을 일으켜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입을 맞췄다. 입술이 열리고, 혀가 넘나들며 숨과 타액이 섞이다 떨어졌다.
“대신.... 나 자고 일어나서 잔뜩 하자.”
“...기억 안 난다고 하지나 마라.”
“응. 근데 나, 오늘 안에 못 깰지도 모르니까.... 너 기다리기 지루하면....”
“쓸데없는 감상은 그만두고 눈을 감도록. 내가 지켜주겠다.”
미안함에 길어지려는 말을 자른 벨져가 머리와 귀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토닥였다. 다시 한 번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고, 루이스는 도로 누워 눈을 감았다. 걱정할 거리도 긴장할 것도 없이 잠드는 게 얼마만인가. 견갑골을 문지르고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따뜻하고,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24 |
---|---|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5.14 |
[벨져루이] (0) | 2016.12.13 |
[루드루이] 04. (0) | 2016.11.26 |
[마틴루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0) | 2016.11.24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겨울만 되면 이런 게 보고 싶어지더라...
따뜻한 날씨. 내리쬐는 햇살. 먹구름도 자욱한 안개도 드리우지 않는 맑은 하늘.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하늘이 이곳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펼쳐진다. 그 풍경이 마치 제 모습 같아 루이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 이런 환경에서 큰일이라고 해봤자 고양이가 잼단지를 깨트린 것 정도다.
지루하고 심심한,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평화에 익숙해져도 되는 걸까.
“아직 날이 차다고 했을 텐데.”
“따뜻하니까 괜찮아.”
타박하듯 말하지만 어깨 위에 담요를 덮는 남자의 손은 더없이 다정하다. 보석보다 아름답고 바다보다 푸른 눈은 그의 손보다 더 다정한 걱정을 담고 있어 루이스는 사양하는 대신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른 벨져가 혀를 찼다.
그새 식어버린 차는 정원의 흙 위에 가차 없이 버려졌다. 비싼 차지만 루이스는 아깝다는 말도 그만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벨져 홀든이고, 이 집의 주인이며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권리다. 그저 몸을 위탁한 신세니 그가 그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자격이라기 보단 염치가 없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겠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태연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 저 역시 벨져의 소유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인, 부서지고, 깨진 인형.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섬세한 손길로 고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저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루이스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벨져를 시야에서 밀어냈다. 숨을 쉬듯 생각이 맴돌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안 그런 척 상냥하고 섬세한 도련님은 모질고 무딘 말에 상처받을 것이 뻔했다.
“너 오기 전에 너 닮은 고양이랑 놀고 있었는데.”
“기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털도 부드럽고, 애교도 많아서 귀엽더라.”
벨져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하자 그 잘생긴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만 더하면 토라질 눈치라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벨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네가 더 예뻐.”
“당연하지.”
가늘게 뜬 눈은 그대로지만 앙 다문 입술은 만족스럽게 휘어진다.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 우쭐해하는 표정이야말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뒀다. 찬바람에 몸이 차가워진 나머지 으슬으슬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일주일 전, 감기에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기침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루이스는 손으로 팔을 쓸었다. 바로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일어나. 들어가지.”
“그래야겠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굳어서인지 일어나려는데 눈앞이 아찔하게 흐려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도 이젠 일상인데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머리를 감싸고 중심을 잃은 몸을 붙잡은 벨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 발로 걸을 수 있으니까 안아들 생각 마.”
짐짓 엄한 척 목소리를 깔았지만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오만한 남자가 저를 업신여기며 재수 없게 굴 때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루이스는 매번 벨져를 밀어냈다. 이 안온한 환경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익숙해지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랬다간 돌아갈 수 없게 될 터였다.
벨져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테고. 루이스는 숨을 몰아쉬며 벨져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연합의 영웅이 있어야 할 곳은 전장이다. 자신의 가치를,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건 그 곳이고, 끝내는 것 역시 그곳이어야 한다. 아직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거운 걸음을 떼며 벨져에게서 떨어졌으나 벨져의 시선은 루이스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한 걸음 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가 있다. 벨져가 지켜보는 한 루이스는 무리를 해서라도 괜찮은 척 해야 했다.
“다리, 후들거리는 건 알고 있나?”
“괜찮아. 다리를 다친 건 아니거든.”
“그래. 대신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
“부정하지 않을게. 그래도 괜찮아.”
“하, 퍽이나.”
짧은 조소를 끝으로, 벨져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몸을 받쳐든 손과 팔은 조심스럽고,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부축한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거야?”
“그러다 또 한나절 걸려 들어가려고. 됐다. 사양하지. 네 몸이 못 버틸 거다.”
루이스는 더 말하는 대신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원치 않게 들려가는 신세에 기사의 품에 안긴 공주처럼 목에 팔을 감을 생각은 없다. 벨져는 숨 한 번 흐트러지는 일 없이 테라스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가장 볕이 잘 드는 따뜻한 방 침대 위에 루이스를 내려놓고 스물 네 시간 불을 꺼트리지 않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벨져.”
부름에 망설임도 없이 돌아본다. 그를 올려다보며, 루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왜 그를 불러 세운 것인지 자신조차 모른다. 그저, 돌아서는 등이 눈에 밟혔다.
“아니야.”
“하아. 또 미련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만 두도록.”
“아니. 크루통 넣은 치킨 수프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준비시키겠다.”
딱히 뭘 먹고 싶은 건 아니지만 벨져의 관심을 돌리는데 이만한 게 없다. 자기가 먹는 것보다 제게 무언가를 먹이는 걸 더 좋아하는 벨져를 돌려보내려 한 말이 먹혀들어 벨져가 걸음을 옮겼다. 고작 몇 걸음, 문이 닫히기까지 몇 초인데 그만 벨져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코가 간질거리며 재채기가 나왔다. 벨져가 돌아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앞으론 밖에 혼자 나가지 마라.”
“그냥 재채기가 나온 것뿐이야.”
성큼 다가온 벨져가 손을 들어 루이스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피부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엄지로 훔쳐낸 벨져는 코를 훌쩍거리는 루이스를 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감기가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라니까.”
“지켜보면 알겠지.”
루이스의 얼굴에서 손을 뗀 벨져는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린 채 방을 나갔다. 아마 돌아올 땐 따뜻한 수프와 생강과 레몬을 넣고 끓인 차를 가져올 것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누웠다. 몸이 차가워진 것은 사실이다. 고작 바람을 쐰 정도로 감기에 걸릴 정도로 몸이 약해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와 살로 만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벨져가 오려면 적어도 삼십 분은 걸릴 것이다. 딱히 무언갈 먹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벨져와 실랑이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여력도 없었기에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이라면 모를까 정말 잠들어버리면 벨져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꿈속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책을 읽고 움직였을 뿐인데도 피곤했다. 낮은 숨을 쉬고 있으면 천천히 몸이 무거워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을 일으키긴 커녕 눈꺼풀도 밀어 올릴 수 없다.
“루이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벨져의 작은 목소리 뒤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한 번 나고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덮고 있는 이불이 목까지 끌어올려지고 따스한 손이 머리를 덮었다. 그의 손이 닿아서야 머리카락이 차갑다는 걸 깨닫고 만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의식이 점점 더 멀어지고,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녹아 잠잠해졌다.
그새 잠든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벨져는 한숨과 함께 손을 멈췄다. 기침이 멎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몸이 약해지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라지만 마음 한 켠에선 그 명제를 부정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거나 무술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결정 능력 하나 있다고 전방에 설 수 있을 리 없는데도. 특별히 생각할 것도 없다. 앤트워프에서 마주친 그 때부터 루이스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내였으니.
억지로 그 자신을 갉아먹으며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빠져나간다. 그 아련하고 서늘한 감촉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멈췄다.
참아보려 해도 한숨이 새어나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약해진 남자를 볼 때면 걷잡을 수 없이 의식하기도 전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루이스는 녹아내리기 시작한 빙산처럼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었고, 자신은 그를 돌보는 동안 그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견고한 마음에 금이 간다.
루이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만히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다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 남자는 자신이 부서지며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내 참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와서야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고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스러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돌보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뿐이다. 벨져는 루이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불을 뗀 탓에 공기가 건조했고, 건조한 공기는 환자에게 좋지 않다. 기껏 나은 감기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벨져는 창문을 조금 열고 수건을 적셔 방 안 곳곳에 걸었다. 루이스가 이 방의 주인이 된 그 날부터 죽 벨져가 해온 일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5.14 |
---|---|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0) | 2017.01.27 |
[루드루이] 04. (0) | 2016.11.26 |
[마틴루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0) | 2016.11.24 |
[루드루이] 03. (0) | 2016.11.2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루드루이] 04.
“우산 없었습니까?”
“어차피 씻으면 그만인데요, 뭘.”
비가 내리는 저녁, 쫄딱 젖은 채로 돌아온 그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천이 바닥 타일에 철퍽 떨어지고, 문이 닫히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나는 스토브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날도 추운데 비를 맞아놓고 찬물로 샤워를 하려면 몸이 차가워지는 게 당연했다.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루이스는 금세 욕실을 나왔다. 머리 위와 허리에 수건을 둘렀을 뿐인 그는 추위에 무방비했고, 발뒤꿈치를 든 채 덜덜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고 걸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 잠시 담요라도 덮어주기 위해 다가갔다.
“루이스.”
흠칫. 담요를 덮어주기 위해 젖은 맨 어깨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루이스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맹수 앞에 선 토끼같이 떨리는 몸과, 희게 질린 얼굴, 붉은 눈동자 위에 드리운 속눈썹에 물기가 어려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표정을 감추기 힘들 정도로, 아찔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차는 뭘로?”
“아무거나 괜찮아요.”
흰 피부. 왜소하지도, 근육이 과하지도 않은 다부진 몸. 섬세한 잔 근육이 팔을 올리며 드러나고, 이내 밋밋한 천에 가려졌다. 그게 무척이나 아쉬워 나는 그의 맨 등에 손을 얹고, 손끝에 닿는 피부를 느끼며 근육 하나하나를, 그 아래 혈관의 떨림까지 모두 가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군데군데 총상이며 자상, 그을린 흉터까지 온전한 곳을 찾기 힘든 몸이지만, 고작 그런 것들로 본래의 매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구석구석 핥고 입 맞추고 싶어 목이 탔다.
빤히 지켜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루이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흘긋, 책망하듯 보는 시선에 나는 찻잎을 고르는 척 딴청을 피웠고, 루이스가 허리에 묶어둔 수건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수건 아래 감추고 있던 허리와 엉덩이가 드러났고, 나는 그의 몸을 눈에 새겼다.
매끈한 허리와 희고 튼실한 엉덩이. 거기에 허벅지로 떨어지는 라인까지, 양껏 눈요기를 하다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물을 찻잎 위에 부었다. 찻잎이 투명한 물을 물들이며 떠다니고, 루이스가 팬티와 바지를 걸쳤다.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척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귀여운 사람 같으니.
“밥은 먹었습니까?”
“아. 깜빡했어요.”
“차보단 수프가 낫겠군요. 머리라도 말리면서 기다리시죠.”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디건을 집어 들었다. 스톡을 끓이고, 간단하게 루를 만들어 섞은 뒤 후추와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수프가 완성되고, 남은 빵으로 만들어둔 크루통을 올려 마무리했다. 한 손엔 수프, 한 손엔 숟가락을 들고 가는데 그새를 못 참고 드러누운 루이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샜다.
입을 벌린 채 잠든 건 그렇다 쳐도, 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테이블 위에 뜨거운 수프를 내려놓고, 그릇을 들고 오느라 뜨거워진 손을 그의 배 위에 올렸다. 그냥 올린 건 아무렇지도 않은지 루이스는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팔을 가슴 위에 올릴 뿐이었다. 그에겐 다소 큰 내 가디건의 소매가 그의 손등을 덮고 손끝이 앙증맞게 나와 있어 장난기가 돌았다.
“헉, 흣...!”
매끈한 배를 문지르다, 노골적으로 간질이자 루이스가 퍼드득 몸을 떨며 일어났다. 놀라 깬 그가 나를 칠 뻔했지만 버둥거리느라 팔이 허공을 휘젓고 허무하게 내려갔다. 나는 킬킬거리며 다시 부드럽게 그의 배를 쓰다듬었다.
“만져달라는 줄 알았지 뭡니까.”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체념한 듯 한숨을 쉰 루이스가 그의 배 위에 손을 얹은 내 손을 잡아 떼어냈다.
“당신... 가끔 엄청 아저씨 같은 거 알죠?”
“변태 같다고 해도 됩니다.”
“알고 있네요.”
“뭐....”
어깨 으쓱이자 루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흘겨보는 게 아닌, 조금 진지해진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건조한 눈빛이 향하는 곳은 자신의 배다. 니트 아래 가려진 피부에 자리한 문신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먼저 운을 뗐다.
“만져도 됩니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냥...”
“그냥?”
“...아파보여서요.”
“그렇습니까?”
한참 뜸을 들였던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 보인다니. 생각해본 적 없는 감상에 나는 솔직히 답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요. 알다시피,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군요. 당신도 해보는 건?”
루이스는 고개를 젓다가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눈은 비록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내 옆구리에 자리한 문신과 그 아래 흉터들, 그리고 실밥을 빼고 분홍색 새살이 돋은 상처가 선명히 떠오를 터였다.
상처투성이인 것은 같은데, 어째서일까. 이 사람은 너무 상냥하다. 그의 상처는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다친 희생의 결과가 아닐까. 루이스의 손이랑 등에 무수히 많은 흉터를 떠올리며 그의 손끝을 지긋이 보고 있으니 루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소매 아래 가렸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 이것부터 들어요. 더 식기 전에.”
거짓말. 실은 다 알고 싶으면서.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으며 몰아붙였다간 겁을 먹고 달아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든지 감정의 거리를 넓히고, 토끼처럼 굴을 파고 숨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릇을 받아든 루이스가 냄새가 좋다며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턱을 괬고,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루이스는 그릇을 비우고 맛있었다는 말로 감사를 표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상.
“읏.”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자란 손톱에 또, 니트의 보풀이 걸렸다. 손톱 아래 약한 살에 파고드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손톱에 걸린 니트의 보풀을 뜯어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손톱이 자라서 자꾸 걸리는 것뿐입니다.”
“당기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요.”
루이스는 그릇을 내려놓고, 바느질용 작은 가위를 가져와 내 손을 잡고 보풀을 끊었다. 끄트머리만 남은 실 가닥을 빼려했으나 루이스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톱 가장자리에 가위를 댔다. 조심스럽게 손톱의 흰 부분을 자르는 루이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상처라도 입힐까 작은 가위질에 공을 들이는 게 나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 같다. 뿌듯해진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 위에 나의 손. 자연스럽게 루이스의 손을 보게 된 나는 짧게 자른 손톱을 보고 띠웠던 미소를 지웠다. 이렇게 손이 예쁜데, 아깝다.
잘려나간 손톱 조각이 다섯 개가 되고, 나는 반대편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렇게 짧게 자르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책을 만지다보니 종이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책을 만지는 일을 하는구나. 그의 몸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책 냄새라는 걸 알고 나니 책이 가득한 장소에서 차분학고 고요히 책장을 넘기는 루이스가 떠올랐다. 모양 좋은 손에 자리한 상처는 종이에 벤 상처라기엔 투박하고 훨씬 깊었지만 새삼 떠오른 호기심에 잠시 위화감을 덮었다. 나는 이 사람이 몇 살인지도 모른다. 그저, 이십대 초반쯤 되겠거니 짐작할 뿐.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군요.”
“아뇨, 뭐 익숙하니까. 고아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왠지 모를 동질감에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나의 손등을 토닥이고, 떼어냈다. 이 거리를 좁히려면, 당신에게 더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욕망을 채우려면, 그렇게 하려면.
“루이스.”
“정말 괜찮아요. 혼자인 것도,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니니까. 그냥 가끔 외로울 뿐이죠.”
쓰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을 잇는 그의 손을 잡아 쥐고, 나는 눈을 맞췄다. 루이스는 난색을 표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놓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봤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루이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당황해 나를 일으키려는 그의 손을 잡고, 나는 홀린 사람처럼 말한 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른 입술과, 그보다 더 건조한 손등. 경애의 키스. 이 사람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루이스....”
“그만, 다 됐으니까 일어나요.”
그의 손등에 뺨을 부비다 나를 일으키는 그를 올려다보며 열기에 가득 찬 숨을 쉬었다. 루이스. 나의 사랑. 그래. 이것은 사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마음을 해명할 길이 없다. 당혹스러워하는 그를 더 몰아붙이려다가, 나는 인내하기로 했다.
본디 좋은 사냥꾼은 인내할 줄 아는 법이다.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려, 상처 하나 없이 사로잡을 그 때까진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시야에 두고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당신을 내 손에 넣고, 내 품에 가졌을 때, 당신은 어떤 표정을 할까. 상상만으로 등골이 오싹거리는 희열에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뜨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혜를 갚겠다는 겁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알겠으니까 일어나요.”
“물론 갚는 방법은 제 마음대로입니다만.”
“잘 모르겠지만 거부권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글쎄요. 두고 보시죠.”
“처음으로 두고 보자는 말이 두려워졌어요.”
“저런. 책임지고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죠.”
“그런 뜻이 아닌데요.”
나는 능청스럽게 싱긋 웃으며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널브러졌고, 하품을 했다.
“졸리면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누가 자꾸 자는 동안 추행을 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까?”
“네.”
“인과를 따지자면, 당신이 자꾸 누군가에게 달라붙어서 끌어안는 게 먼저입니다만. 주의하도록 하죠.”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고,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가 묘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나는 차가운 물에 그릇을 씻으며 애써 그를 모른 척 했다. 루이스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고, 나의 말도 사실이었으나 나는 온전히 내 의지로 잠든 그를 만져댔기에 언쟁에선 불리했다.
물론 그가 이 쓸데없고 하찮은 언쟁에 이긴다 해도 다시 혼자 자는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릇을 마른 천으로 닦아 올려놓는 사이 루이스는 침대에 누웠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자는 얼굴이 정말 귀엽다. 괜히 볼을 콕콕 누르며 괴롭히고 싶은 충동에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눈을 떠 나를 흘겨보는 바람에 놀라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상한 생각 말아요.”
“이상한 생각이라니, 어떤?”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긴 어려운지 루이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홱 돌아누웠다. 토라진 아이 같은 반응에 나는 소리 내어 웃었고, 루이스는 하나뿐인 이불을 그의 몸에 꽁꽁 둘렀다. 그만 웃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애벌레 같은 모양새가 귀여워 웃음이 멎질 않았다.
“좋아요. 제가 졌습니다. 쿡, 큽.”
“비도 오는데 어디 계속 해보시죠.”
“오, 내쫓기라도 하려고요?”
“못할 것도 없죠.”
루이스는 시니컬하게 대답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나는 허리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이불 위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댔다.
“봐주시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비오는 거리로 내쫓기다니 처량하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 문 앞에서 동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르고요.”
“신원 미상의 시체가 한 구 늘겠네요.”
“루이스.”
지그시 그를 바라보자, 따박따박 시니컬하게 대답하던 루이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꽁꽁 싸맨 이불을 조금 풀고 몸을 벽에 가까이 붙여 자리를 만들어준 그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하고, 나는 좁은 자리에 내 몸을 욱여넣었다. 침대를 넘어가는 긴 다리로 루이스의 다리를 감싸고 한 팔은 그의 허리에 감자 비로소 안정감이 들었다.
“나는 가끔, 당신 없이 어떻게 잠드나 싶습니다.”
루이스는 등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역시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바람은 더 차가워지고 있기에 혼자인 밤은 더더욱 외롭고 추워질 터였다. 함께 라는 것만으로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 또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곤히 잠들 리가 없다. 나는 그의 허리를 안고,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씻은 지 얼마 안 되는 그의 몸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0) | 2017.01.27 |
---|---|
[벨져루이] (0) | 2016.12.13 |
[마틴루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0) | 2016.11.24 |
[루드루이] 03. (0) | 2016.11.20 |
[루드루이] 02. (0) | 2016.11.2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마틴루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깜빡하고 안 올린 걸 찾아서 업로드~
급하게 구한 룸메이트는, 급하게 소개를 받아 구한 것 치고는 꽤 성실하고 괜찮은 사람 같아서, 절대 건드리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헐벗은 청년을 본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주근깨가 매력적인, 금발의 청년.
숙취와 함께 바른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끊었던 담배가 고파왔다.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은 간다. 오랜만에 들이킨 위스키가 반가운 나머지 얼음도 없이 쭉쭉 들이킨 게 화근었다. 거기다 정전까지 되는 바람에 촛불을 켜놓고, 캠프 분위기가 난다며 어린애처럼 담요로 텐트를 치고 마시다 보니 그만 들떠서 취해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룸메이트랑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알몸으로 깨어나진 않았겠지.
머리를 긁다가 일단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보일러가 안 되는 나머지 공기가 찼다. 물도 마찬가지라 대충 세수만 하고 나온 루이스는 널브러진 옷가지며 술병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지러진 거실이 정리가 되어도 일어날 줄 모르는 동거인을 내버려두고, 루이스는 후드재킷을 집어들고 집을 나섰다.
“돌겠네, 진짜....”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나온 말은 생각을 거치지 않은 100%의 진심이다. 착잡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틴은 좋은 사람이다. 스트레이트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성실한, 그야말로 흠 잡을 데 없이 좋은 사람.
게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걸 계기로 곤란해지는 건 한두가지가 아니다. 당장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물론이고 방을 빼야할지도 모른다. 그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감정이 얽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겉잡을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쉬다가 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한 블럭 떨어진 샌드위치 가게는 이 근방에서 그나마 제일 싸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늘 앉는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인사와 함께 커피를 따라주고, 루이스는 여느 때와 같이 아침 특선을 시켰다.
심란하다. 심란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겠지.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마시려다 흘리고, 그걸 수습하려다 소금통을 치는 바람에 소금통이 바닥을 구르며 큰 소리가 났다. 굴러 떨어진 소금통을 줍고, 엉망이 된 테이블을 티슈로 닦은 루이스는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룻밤의 실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술때문이다. 누가 먼저 키스했는지, 옷을 벗었는지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저를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꽤 섹시했다는 것 정도가 떠오르는 기억의 전부지만 그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취해서 미쳤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태연하려 해도 이런저런 걱정이 떠올라 목이 바싹바싹 탔다.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마틴이 꿈을 꾼 것으로 넘어가는 게 베스트다. 기억을 아예 못하면 더 좋고.
마침 나온 식사의 계란 노른자를 괜히 나이프로 건드리다 반숙으로 익힌 노른자가 깨져 흘러내려다. 오늘은 하나같이 되느 일이 없다. 이걸 자초한 건 자신이지만, 억울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정말, 결백하게, 건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루이스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목록을 뒤져 전화를 걸자 잠시 수신음이 들리더니 평소의 촐싹거리는 목소리 대신 지쳐 늘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에, 기자 클리브 스테플입니다.”
“저예요, 클리브 씨. 마틴 말이에요.”
“어. 왜, 싸웠어?”
“아뇨. 혹시 그 친구.... 술버릇 어때요?”
마틴을 소개해준 그라면 알지도 모른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묻자 건너편에서 클리브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입을 다셨다. 밤샘이 잦은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일 분 일초에 애가 탔다.
“술 진탕 마시면 서운하고 섭섭한 일 말하면서 울지 않아? 그러다 쓰러져 자던데. 아, 일어나선 기억 못 하더라. 그걸로 자주 놀려먹었지, 아마?”
“고마워요.”
“무슨 일 있어?”
“아뇨. 아무일도 없어요.”
“에이, 아무일이 없긴. 아무 일이 없으면 어디 우리 영웅님이 이렇게 아침댓바람부터 전화를 하셨겠어?”
“다음에 술 살게요.”
루이스는 안도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감이 좋은 사람이니 대충 눈치를 챌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추측일뿐이다. 마틴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도 없었던 일로 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왜 불안이 가시질 않는 걸까.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던 루이스는 커피잔을 들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포크를 들어 노른자가 흘러내린 계란을 잘라 입에 넣었다. 밍밍한 계란을 씹다가 바닥에 성대하게 소금을 치고 정작 계란 위엔 소금을 치지 않았다는 게 떠올라 어깨가 축 늘어졌다.
“미치겠네 진짜.”
일단 도망치듯 나오긴 했는데 마틴의 얼굴은 어떻게 볼 것인가. 루이스는 접시를 밀어놓고 이마를 짚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0) | 2016.12.13 |
---|---|
[루드루이] 04. (0) | 2016.11.26 |
[루드루이] 03. (0) | 2016.11.20 |
[루드루이] 02. (0) | 2016.11.20 |
[벨져루이] Night and Day (0) | 2016.10.06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루드루이] 03.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몸을 움직일 정도가 됐지만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멈춰있었다. 기억이 수반하는 끔찍한 두통에 비하면 돌아오는 정보는 터무니없이 적고, 단편적인 기억과 습관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체를 유추하는 속도는 답답하다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더디다. 드문드문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고, 루이스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애매한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 생각나지 않으면 잠시나마 쓸 가명을 스스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름 달력을 봐도 내키지 않았다. 루이스는 더 말하지 않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왔다. 화약 냄새와 약 냄새, 싸한 알콜 냄새와 함께 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종이와 책 냄새와 함께 들어오기도 했다.
그 사이 두통은 잦아들고 상처도 아물어 갔지만 짙은 어둠에 잠긴 기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뿔뿔이 흩어진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려 해도 주어진 퍼즐 조각이 너무 적었다.
루이스가 가져오는 신문을 보거나, 집안일을 하고 그를 기다리며 식사를 준비하는 게 하루의 전부. 이렇게 지루한 일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언제든 나갔다 와도 좋다며 열쇠를 줬지만 왠지 모르게 나가고 싶지 않았다.
레시피에 부족한 재료가 있어도 문 앞에 서면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끝끝내 발을 잡곤 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까지, 의식주 전부를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저기.”
“무슨 일입니까?”
부르는 소리에 스튜를 끓이다 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루이스가 구급상자를 꺼내 놓고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지만 해주겠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끓이던 스튜의 불을 끄고 다가가 셔츠를 벗자 루이스가 손을 뻗었다. 그를 둘러싼 냄새들을 전부 걷어내면, 루이스에게선 미미하게 서늘한 향이 났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나 겨우 맡을 수 있는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싸한 민트 향을 떠올렸다. 루이스의 손은 배를 감싼 붕대를 풀고 거즈에 알콜을 묻혀 상처를 소독했다.
아찔한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지만 루이스를 잡지는 않았다. 전에 무심코 잡았다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는 바람에 루이스의 어깨엔 아직도 옅은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멍자국을 볼 때마다 기묘한 도취감에 휩싸인다는 것을 과연 이 단정한 얼굴의 남자가 알까.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동안 소독을 마친 루이스가 상처를 물끄러미 보다가 후, 숨을 불었다. 알콜이 날아가며 닿는 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큼 목을 가다듬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자신이다.
흰 피부를 물어뜯고, 짓씹어 삼키고 싶다. 손끝에서부터 번지는 충동과 열기에 목울대가 울렸다. 잠시 눈을 맞추던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작은 가위를 알콜로 닦고 배를 잡았다. 상처를 꿰맨 실밥을 풀어내려는 것뿐이지만, 제게 집중한다는 그 하나의 사실에 홧홧한 열기가 아랫배에 몰렸다. 당장, 이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고, 아무것도 못 하게 제압한 뒤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치우고 싶다. 흰 목덜미를 손에 쥐면 어떤 표정을 할까. 그 붉은 눈동자에 어떤 감정을 담고 나를 바라볼까.
툭, 툭, 가위가 실을 끊는 소리와 함께 루드빅은 달뜬 숨을 내뱉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흥분했기 때문이다. 가위가 실을 당기는 통증마저도 아찔했다.
“후, 루이스....”
“조금만 참아요. 거의 다 끝났으니까....”
셋, 둘, 하나. 마지막 실이 끊기고, 자그마한 핀셋으로 실을 뽑아내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이어졌다. 낮게 신음하자 작게 속삭이듯 말한 루이스가 다시 알콜을 묻힌 솜을 갖다 댔다. 아린 통증에 고개를 숙이자 그의 손이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토닥였다.
그 상냥하고 자상한 손길에 그만, 참고 있던 충동이 달려 나갔다.
“읏.”
“당신....”
침대 위로 넘어트린 루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붉은 눈으로 바라볼 뿐. 등골이 오싹해지는 스릴에 고개를 숙여 내려가자 루이스의 손이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이, 서늘한 무표정에 강한 욕망이 들끓는다.
단호한 거부 앞에 얇게 눈을 휘며, 혀를 내밀어 제게 향한 손바닥을 핥자 루이스의 손이 움칫 굳었다.
“루이스.”
“좀 당황스럽네요.”
“하하, 당황한 얼굴이 아닙니다만.”
흠칫흠칫 떨리며 주먹을 그러쥐는 손끝에 입을 맞추고 눈을 치켜 올리자 루이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 허리를 쓸어내리자 루이스가 턱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짓,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합니까?”
“쫓아내기라도 하려고요? 이제 와서?”
“못할 것도 없죠. 이제 거의 다 나았고.”
“몸이 낫는다고 전부 낫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 팔을 잡아챈 그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깍지를 끼기 전, 루이스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내 잡히고 말았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쪽, 그의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며 다리 사이로 무릎을 넣어도 루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저항하고 거부하며 혐오할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너무 조용하다.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고개를 들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뺨을 감쌌다. 약간 차가운 그의 손이 뺨에 닿을 때, 움찔 떤 것은 오히려 다가가던 제 쪽이었다.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는 게, 호의를 베푸는 게 낯설다.
감정 없는 관계. 그저 유린하고, 농락하며 제 욕구를 채울 뿐인 그런 무미건조한,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야 했다.
“그만.”
“...루이스.”
“괜찮아요. 이런 짓 안 해도 되니까.... 조금 쉬어요.”
잠시 망설이다 저를 끌어안은 루이스는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헐떡이며 일어난 자신을 달랠 때처럼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어르는 목소리는 자상하고, 뺨에 닿는 피부는 따뜻했다. 이 남자는 제가 남창이나 귀부인들의 노리개 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쫓기며 달아나는 꿈을 꾸다 보면 그것이 제 과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루이스의 추측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른단 생각이 들면서도, 몸에 가득한 상처와 문신을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린 피 냄새와, 살육, 먹잇감을 쫓고 먹어치우는 그런 충동과 감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데 겨우 그런 일을 했을 리가. 하지만 그런 오해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들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것이라, 나는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품.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달고, 또 따스했다. 한 순간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 더, 놓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 모두가 그저 값싼 동정과 연민에 불과할지라도.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금은 태도가 변할 법도 하건만 그는 서운할 정도로 태연했다. 같이 저녁을 먹고, 루이스는 서류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드러눕는다.
실밥도 풀었으니 이제 당당히 그의 침대를 요구해도 될 텐데. 말을 꺼내려다, 거절할 것 같아 도로 입을 다물었다.
며칠간 함께 생활한 바로 미루어 보건데 루이스를 움직이려면 곧이곧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아닌 것 같아도 정에 약한 그를 뜻대로 움직이려면 약은 수를 쓰는 게 훨씬 빠르다.
나는 불을 끄고 누워 잠시 시간을 죽이다 화들짝 놀란 듯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잠에 빠져든 그. 소파 앞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이름을 불렀다.
“루이스.”
“으응.... 또 악몽 꿨어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손을 잡에 제 머리 위에 올리고, 머리를 기대자 루이스가 올라오라 손짓했다. 냉큼 그의 위에 올라타 몸을 겹치자 루이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자줬으면 좋겠는데.”
“...나 잠버릇.... 있어서....”
“무슨?”
“옆에 누구 있으면.... 자꾸.... 끌어안아서....”
어지간히 졸린 것인지 루이스의 말이 다 늘어졌다. 버릇인 줄은 몰랐지만 품에 파고든다는 것은 전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성실하게 답을 하는 게 귀엽고 안쓰러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 그에게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눈을 휘며 웃었다.
“좋아요. 좋습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안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었다는 게 기뻐, 잠투정처럼 하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침대는 아직 체온이 다 식지 않아 미지근했지만 성인 남성 둘이 눕기엔 역부족이라 모로 누워야 했다. 숨이 닿는 거리, 무방비하게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그.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먼 과거부터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 속 나는 쫓기고 있었고,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그 긴 추격 끝에 내가 승리했으리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지만 기억이 돌아올 때 함께 찾아오는 두통과 감정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왜, 어째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런 의문과 억울함은 서서히 분노가 되었고, 이윽고 빛으로 덮여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됐다. 거추장스러운 기억일 뿐이지만,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쥐면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차가운, 자잘한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은 머리나 등을 쓰다듬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고, 그저 가만히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머리를 쓰다듬는 온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이 사람만 이렇게 함께 있어주면 지긋지긋한 두통도, 악몽처럼 다가오는 기억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루이스.”
가만히 누워, 입모양으로 달싹거린 이름에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혀끝에, 손끝에 피어오르는 열과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야망도, 분노도, 짜릿한 희열도 아닌, 작고 따스하게 피부를 간질이는 미풍.
차가울 뿐인 공기가 이 사람을 거쳐 달콤한 숨이 된다. 루이스가 내쉬는 공기를 마시며, 그를 가진 기분에 흠뻑 취한 나는 팔 안에 안긴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느껴본 적 없는 온기가 따스해 양손에 움켜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4. (0) | 2016.11.26 |
---|---|
[마틴루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0) | 2016.11.24 |
[루드루이] 02. (0) | 2016.11.20 |
[벨져루이] Night and Day (0) | 2016.10.06 |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루드루이] 02.
설마하니 번호를 붙이게 될 줄 몰랏읍니다...
슬슬 이것도 제목을 생각해야... ㅇㅅㅠ
루이스가 늦는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오던 사람이 사나흘에 한 번 꼴로 들어오는데, 그를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한 나머지 밖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매번 신문과 이런저런 잡지를 가지고 돌아와, 식사도 건너뛰고 죽은 듯이 잔다. 그마저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소파에서 뒤척거리며 잠을 설치기 일쑤라 침대로 옮겨준 게 벌써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도 문이 열리자 지친 얼굴의 그가 종이 뭉치를 한 다발 내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는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마른세수를 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 루이스를 불렀다.
“루이스.”
“괜찮아요. 오늘은 좀 잤으니까....”
혼을 내듯 짐짓 엄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리고,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초췌했다.
피곤한 것뿐이지만 무감각한 시선이 묘한 긴장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홀린 듯 다가가자 루이스의 손이 내 셔츠의 소매를 만지고, 그의 조금 차가운 손끝이 손목을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그러쥐었으나 루이스는 개의치 않고 옷을 만지다 보풀이 일어난 부분을 잡았다.
“잠시만 잡고 있어요.”
서랍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온 루이스가 나를 옆에 앉혔다. 바늘구멍에 실을 꿰고, 손목을 잡아 튿어진 소매의 단추를 풀어 해진 천에 바늘을 넣어 빼는 행위를 반복하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뛰는 소리가 부쩍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눈앞을 가리는 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루이스와 그의 손. 저 손을, 곧게 뻗은 손목을 잡아 쥐고 싶다.
숨을 죽이던 나는 팽팽한 긴장과 솟구치는 욕망을 감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능숙하군요.”
“필요하면 다 하게 되어있는 거죠.”
별 거 아니란 듯 대답한 루이스는 고개를 소매에 처박다시피 하고 손을 놀렸다. 새하얀 손등에 새로 난 분홍색 흉터. 마지막으로 본지 얼마나 됐다고 루이스의 손등이며 손가락에 상처가 또 늘었다. 루이스의 몸에선 여전히 오래된 종이와 먼지 냄새가 났지만 종이만 만지는 사람이 이렇게 다칠 리 없다.
단정한 얼굴과 달리 그의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과 단순한 사무직이 아니라는 것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은 그냥 이대로, 고요한 호수처럼 있어줬으면 좋겠다.
옷을 벗기지도 않고, 한 번 찌르는 일도 없이 소매를 꿰매던 그가 실을 팽팽하게 당기다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 최근 한 달 실종자 명단을 봤는데... 당신이랑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뇨. 아마.... 신고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루이스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다 이로 실을 끊었다. 왜냐는 말도, 뭔가 생각났냐는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툭. 실을 끊으며 나의 말도 끊어낸 그는 실과 바늘을 갈무리해 일어났다. 나는 목 아래 고여있던 숨을 뱉고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그의 등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필요한 건?”
“글쎄요, 새 옷이랑.... 등유, 밀가루, 토마토, 당근이랑....”
왠지 모를 오기와 불만에 퉁명스럽게 말하자 루이스가 도로 소파에 앉더니 작은 통을 건넸다.
“웬 겁니까? 사탕이라니.”
“전에 잔뜩 받은 게 있었는데, 다른 건 아이들 나눠주고 남은 거예요.”
“의도를 모르겠군요. 먹고 입 다물란 겁니까?”
루이스는 싱긋 웃으면서 사탕 내밀었고, 나는 그 미소에 못 이긴 척 사탕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 사람의 얼굴에, 그 중에서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웃음에 약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민트의 향에 모르게 반가운 기분이 들어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단 맛에 입을 열었다.
“뭐.... 나쁘디 않군요.”
“다행이네요.”
“당시는?”
“장 봐올게요.”
사탕 때문에 새는 발음이 우스꽝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짓는 미소에 생각이 멈췄다. 루이스는 바로 일어나버렸지만, 손끝이며 뺨에 번지는 열은 쉬이 가시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금방 올 줄 알았더니 저녁 늦게 양손 가득 식료품을 들고 온 루이스는 소파에 앉았다가,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대로 누워 반대편 팔걸이에 다리를 올렸다.
“밥 안 먹어도 되니까 깨우지 말아줘요.”
“또 거기서 잘 겁니까?”
담요를 끌어다 덮다가,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무미건조한 시선에 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종이 식료품을 정리하다 말고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다가가 빈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그의 소파에 손을 올렸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
말없이 눈을 깜빡이던 루이스가 시선을 내렸다. 내리깐 눈과 떨리는 속눈썹, 그 아래 드리우는 그림자. 그 뺨에 손을 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크지 않지만 명확한 동의의 표현 앞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고, 이불을 덮어쓰곤 돌아누웠다. 나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를 바라보다 소파 위의 담요를 접어놓고 하던 정리를 마저 하기 위해 일어났다.
딱히 배가 고프다거나 식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리를 마치고 바로 그가 잠든 침대로 향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잠들어 무방비한 상태의 루이스가 어른거려 옆에 있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들어가 좁은 침대에 몸을 누이자 루이스가 몸을 웅크렸다. 작은 동물 같은 반응이 귀여워 건드리고 싶으면서도, 이대로 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싶어 머리를 받치고 그를 내려다 봤다.
이렇게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에게 구해져, 이 집의 가구처럼, 혹은 말을 잘 듣는 개처럼 이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삶.
묶여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 있다니. 묘한 기시감과 불쾌한 기분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가,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 떨리며 움츠러드는 게 꼭 괴롭히지 말라는 것 같았다. 괜한 심술에 꽉 끌어안자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이던 그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무거운 눈을 밀어 올려 제게 향하는 멍한 시선.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던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다 몸에 힘을 빼곤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을 잡고, 검지로 손바닥을 간질이자 루이스가 미간을 좁히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귀엽다. 누군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제게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루이스.”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 불러보는 이름이 달았다. 마치 전에 그가 준 쿨캔디처럼,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들어 서늘한 향이 퍼지는 것 같았다. 루이스가 쥔 주먹에 잡힌 손가락을 그대로 밀어 넣어 손깍지를 꼈다. 잠든 그는 밀어내지 않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맞춰 숨을 쉬는데 루이스가 작게 웅얼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추위를 원망했다면 모를까 반겨본 적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오늘만큼은 추위와 어둠이 고마웠다. 감사해야 하는 밤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틴루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0) | 2016.11.24 |
---|---|
[루드루이] 03. (0) | 2016.11.20 |
[벨져루이] Night and Day (0) | 2016.10.06 |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